방에 갇혀 있던 나루는 두 시간이 흐른 뒤에야 풀려났다. 규연이 직접 열어준 건 아니었고, 스스로 반성했다며 문고리를 돌리고 나온 것이었다.
방 밖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민 나루가 거실을 훑어봤다. 집이 워낙 고요해서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타르트를 만드느라 진을 뺀 규연은 방으로 들어가 쉬는 중이었다. 나루는 겁도 없이 규연의 방문을 열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규연아……?”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루는 자신감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는 정자세로 누운 규연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쩜 자는 자세까지 기품이 넘쳤다.
나루는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규연의 얼굴을 구경했다. 높은 콧대와 예쁘게 정리된 눈썹은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냈다. 손가락을 뻗어 규연의 눈썹을 톡톡, 건드려 보던 나루가 답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는 마음이 조급해서 멋대로 입술부터 들이댔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루는 이미 규연을 제 주인으로 받아들였고, 온 마음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규연은 나루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규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를 흉본 졸부를 잡아 왔는데 휘둘리기나 하고, 제 마음도 내어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가 깎여 나갈 것이다.
“나는 네가 좋아. 이제 내 진짜 주인이니까.”
조용히 속삭인 나루가 또다시 규연의 두 볼을 잡아챘다.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지만, 나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입술 박치기가 아니라, 정말 평범한 입맞춤 같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고, 그 상태로 몇 초가 지났다. 나루는 조심스레 손을 놓아주고 방을 빠져나왔다.
규연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자신이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규연이 눈을 번쩍 떴다. 잠이 오지 않아서 눈만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루가 들어오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입을 맞췄다. 당황한 규연은 떼어내지도 못하고 자는 척을 이어가야만 했다.
차라리 아예 잠들어 있을걸.
괜한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규연은 나루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노력을 하든,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나루와 이어질 가능성은 0.1%도 없었다.
그나저나 나루도 참 특이했다. 자기를 못살게 괴롭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싶을까.
아무튼 나루의 마음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됐다. 규연은 나루의 마음이 식을 때까지 관심을 주지 않기로 했다.
아예 내쫓아 버릴까.
사과받기를 포기하고 내쫓을 생각을 하던 규연은 문득 심부름 업체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꼭 이럴 때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라서 동정심이 들었다.
그래, 그냥 무시하자. 마음이 식을 때까지 철저하게 무시해.
결정을 내린 규연이 이불을 덮어썼다. 아무래도 내일부터 다시 망나니 같은 생활을 이어가야 할 것 같았다.
* * *
규연의 일상은 쉴 틈 없이 바빠졌다. 물론 좋은 의미로 바빠진 건 아니었다. 오전에는 디저트 카페에 악착같이 붙어 있고, 저녁에는 건혁을 불러 클럽이나 술집에 꼬박 출석 체크를 했다.
그동안 나루는 집에 혼자 남겨졌다. 규연은 일부러 잠금장치까지 완벽히 풀어놓고 나돌아다녔다. 차라리 도망가려면 도망가라는 심보였다.
아침마다 현관문을 확인하던 나루는 무방비하게 열려 있는 잠금장치를 보고 적잖게 놀랐다. 처음에는 규연이 실수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잠금장치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나루는 심장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이제 막 시작했는데, 규연이는 왜 시작도 전에 끝내려고 하는 걸까.
소파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나루가 고개를 푹 숙였다. 거실이 온통 캄캄해서 분위기가 더 늘어져 우중충했다.
현재 시각은 새벽 한 시. 규연은 오늘도 일찍 들어오지 않았다. 신발장 앞에서 규연을 애타게 기다리던 나루는 일찍이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최근 들어 이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 넓은 집 안을 마음대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데도, 제 기분은 꼭 지하실에 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루는 졸린 걸 꾹 참고 규연을 기다렸다. 잠시 스쳐 지나가더라도 규연의 얼굴을 꼭 보고 싶었다.
삑. 삐빅. 삐삐삐―.
오늘은 좀 빨리 오네.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에 취해서 번호를 제대로 누르지 못한 규연이 현관문에 기대어 쓰러졌다. 나루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축 늘어진 규연의 몸을 잡아 끌었다.
다행히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규연이 거실 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나루는 낑낑거리며 재킷을 벗겨 주고, 옆에 앉아 규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미워. 내가 좋다고 말하자마자 이러는 게 어디 있어.”
규연의 코를 집게 손으로 틀어막은 나루가 꽁한 표정을 지었다. 코가 틀어막힌 규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루는 곧장 손을 풀어 주고 규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전처럼 다시 관심 가져줘…….”
자기 냄새를 묻히기 위해 규연에게 몸을 비비적거리던 나루가 코를 킁킁거렸다. 술 냄새와 묵직한 향수 냄새, 그리고 나루의 포근한 체취가 뒤섞여 묘한 향이 났다. 나루의 체취는 얼마 가지 않아 강한 알코올 냄새에 지워져 버렸다.
담요를 끌어와 규연의 옆에 자리를 잡은 나루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았다. 며칠 내내 무거운 몸덩이를 끌고 침대까지 눕혀 줬었는데, 오늘은 그냥 이렇게 잠들고 싶었다.
늦은 아침, 눈을 뜬 규연은 뻐근한 등을 매만졌다. 몸이 으슬으슬 춥다 했더니, 대리석 바닥에서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은 그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옆을 돌아봤다.
“얘가 왜 여기에…….”
소파를 두고 똑같이 대리석 바닥에서 잠든 나루가 담요를 폭 뒤집어쓰고 있었다. 규연은 나루의 얼굴을 오랜만에 마주했다. 한 5일 정도를 피하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규연은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술도 안 마시다가 마시려니 힘들었다. 게다가 규연은 사람 많은 곳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간단히 아침을 먹기 위해 냉장고를 연 규연은 텅 빈 내부를 보고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 망나니처럼 사는 데 집중했더니 냉장고 채울 틈도 없었나 보다.
잠깐, 그럼 쟤는 여태 뭘 먹고 지낸 거야.
뒤늦게 나루를 떠올린 그가 거실로 돌아와 잠든 나루를 유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전보다 살이 더 빠져서 몸이 앙상했다. 안 그래도 살집이 없는데, 저렇게까지 마른 꼴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심했나. 밥은 제때 챙겨주고 나갈걸.
급한 대로 배달 음식을 주문한 규연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준비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깬 나루는 규연을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뛰어왔다.
“규연아!”
“집에 있으면서 밥도 안 먹었냐.”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럼 나가서 뭐라도 사 오던가.”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나 안 나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제 의사를 밝힌 나루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쪽쪽 빨았다. 오랜만에 밥 다운 밥을 먹을 수 있는 건가. 기대감에 흥이 올라 발이 흔들거렸다.
아침이라 그런지 배달이 제법 빨리 도착했다. 가벼운 한식을 주문한 규연은 국과 반찬들을 나루의 앞에 놓아줬다. 나루는 밥을 받자마자 숟가락을 움직이기 바빴다.
그 앞에서 해장국을 홀짝이던 규연은 착잡한 얼굴로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묘하게 쳐다보았다. 며칠 굶긴 것도 자신인데, 역으로 뭐라고 한 게 조금 미안한 것도 같았다. 정작 나루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슬슬 배가 차서 숟가락질을 느리게 하던 나루가 규연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 이유가 뭔지 몰라 답답했다.
설마, 아직도 내가 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조용히 국을 떠 마시던 나루가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내가 좋다고 하는 게 싫어?”
나루는 계속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존댓말을 쓸 때면 왠지 모르게 소심해져서 일부러 반말을 쓴 거였다.
밥을 씹어 삼키던 규연은 체할 거 같았다. 나루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지나치게 솔직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난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내가 왜 좋은데?”
“…….”
“대답해 봐.”
“나를 데려왔으니까. 그리고 잘해 줬으니까…….”
규연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떠졌다. 나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좋냐고 물었더니 그냥 데려와서 좋단다. 심지어 잘해 줬단다.
데려왔다? 데려왔다가 아니라 납치겠지, 그리고 잘해 줘? 휘말려서 좀 챙겨준 건 있어도, 전혀 잘해 주지 않았다.
묘하게 말이 어긋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넌 애가 왜 이렇게 쉽냐.”
“…쉬워?”
“어, 쉽다고. 조금만 잘해 주면 간 쓸개 다 내주겠네.”
“간 필요해?”
“말을 말자.”
대화에 진전이 없었다. 규연은 나루가 쉽게 마음을 내어준 것이라고 단정했다. 제대로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사소한 것 하나에 의미 부여를 했을 것이라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규연이 멍한 나루의 얼굴을 붙잡아 눈을 마주쳤다. 이제는 좋아하지 말라고 확실히 말해 둬야 한다.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을 받아주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여지를 주면 안 됐다.
“잘 들어.”
“…….”
“나는 너 받아줄 마음 없어. 그러니까 좋아하지 마.”
나루의 가슴을 칼로 찌르다 못해 후벼 파는 말이었다.
좋아하지 말라니. 좋아할 건덕지를 줘 놓고, 좋아하지 말라니!
이런 말을 하는 규연이 괘씸했다. 나루는 주먹 쥔 손을 식탁 아래로 숨기고 바들바들 떨었다. 튀어나오려는 눈물도 있는 힘껏 참았다.
차라리 못살게 굴지, 저런 말을 하면 더 상처받잖아. 유규연 나빠.
나루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규연이 잡고 있던 얼굴을 순순히 놓아줬다. 둘 사이에는 오직 적막만이 맴돌았다. 규연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상황 자체가 불편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말 제대로 알아들었냐.”
“…….”
“송나루.”
규연의 딱딱한 목소리가 텅 빈 적막 사이를 메웠다. 나루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불쌍할 정도로 구른 적은 있어도, 대차게 까여본 적은 또 처음이었다.
그 쓰레기 같던 전 주인도 나루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거짓으로라도 좋아한다고 하면 그날은 찬밥이 아닌 따뜻한 밥을 줬고, 그렇게 학대해도 나루가 도망가는 건 절대 못 참았다.
그런데 규연은 대놓고 좋아하지 말라 했다. 어디 이것뿐일까. 도망가라고 현관문까지 열어놓았다. 나루는 이게 더 상처였다.
“못 알아들었어.”
“그래, 알아들었, 뭐라고?”
“못 알아들어!”
철저히 외면당했다는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오른 나루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규연에게 힘껏 달려들었다.
식탁 위가 마구잡이로 어질러지고, 규연의 몸에 달려든 나루가 손을 휘둘렀다. 기습 공격을 당한 규연은 뒤로 넘어졌다. 나루는 이때다 싶어 규연의 몸 위로 올라탔다.
곧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았던 눈빛이 단단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