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메뉴 괜찮은데요? 상큼하고, 적당히 달콤한 게.”
“그러게, 오렌지랑 이 잼이 특히 괜찮네. 연령대 상관없이 좋아하겠어.”
디저트 카페 직원인 서연과 정수는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늦은 오전, 휴무일인 두 사람을 집으로 부른 규연은 직접 디자인한 오렌지 타르트를 선보였다.
그저 놀기만 하는 사장 같아도, 규연은 디저트에 꽤 진심이었다.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까지 다녀오고, 실력도 의외로 수준급이라 늘 신메뉴 개발하는 데 빠지지 않았다.
그의 가게에서 일하는 파티시에 정수도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잘난 인간이 돈지랄하며 취미로 가게를 운영한다고. 하지만 규연이 만든 케이크를 한 입 먹어 보고는 그 생각을 싹 지웠더란다.
오늘 선보인 오렌지 타르트 역시 완벽했다. 특히, 직접 만든 오렌지잼은 그 어느 제과점보다 뛰어났다. 정수는 오늘도 편견 하나를 깨부쉈다.
껄렁하게 생겨서는 참 열심히 산단 말이야.
“어, 안녕하세요! 어떻게 두 분이 같은 집에…….”
배가 고파서 오렌지 타르트를 막 퍼먹던 서연이 작은 발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카페에서 봤던 귀여운 남자가 규연의 집에 있는 것이다. 이제 막 일어난 부스스한 얼굴이 동글동글한 게 여전히 귀여웠다.
규연은 귀찮은 일이 생겼다며 이마를 짚고 나루를 들여보내려 했다. 그러나 서연의 손이 더 재빨랐다.
“같이 먹어요! 이거, 사장님이 신메뉴 개발하신 건데 맛있어요.”
“…….”
“왜, 왜 눈치를 보시지?”
침을 꼴깍, 삼킨 나루가 눈동자를 굴려 규연을 쳐다봤다. 내가 진짜 여기에 껴서 먹어도 되냐는 눈빛이었다. 눈치를 보는 모습에 당황한 서연이 막무가내로 나루의 손에 포크를 쥐여줬다.
포크를 쥔 손이 꼼지락거렸다. 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이 오는 날이라 나루를 빈방에 재우고 웬만하면 갈 때까지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루가 이런 규연의 마음을 헤아려줄 리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포크를 움직인 나루가 타르트를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상큼한 오렌지와 달콤한 생크림이 어우러지니 입 안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심지어 나루는 단 마카롱도 한꺼번에 다섯 개는 해치울 수 있는 디저트 킬러였다.
맛있었는지 발을 동동 구르던 나루가 타르트 한 입을 더 떠서 먹었다. 서연은 에이드까지 곁들이면 최고라며 제가 마시던 컵을 슬며시 밀어주었다.
“진짜 맛있죠? 사장님이 저래 보이셔도 디저트 하나는 끝내주게 만드시거든요.”
“그거 무슨 뜻이야.”
“사장님 최고라는 뜻이죠! 하하…….”
나루가 서연의 컵에 입을 대려고 하자, 규연이 자연스레 컵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새 컵을 꺼내 레몬청과 탄산수를 쏟아부어 에이드를 만들어 줬다. 순간 서연의 시선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런 일에 관심이 없는 정수는 수첩을 꺼내 레시피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리고 재료는 얼마나 더 필요한지, 오렌지는 어디 오렌지가 더 좋은지 깐깐하게 따졌다. 하여간 디저트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연은 신메뉴보다 나루와 규연의 사이에 더 관심을 가졌다. 남자 둘이 한집에서 같이 살고, 거기다 남한테 관심 없기로 유명한 규연이 나루를 살뜰하게 챙기기까지 한다니. 뭔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했다.
나루는 식탁 한구석에 앉아 남은 타르트를 해치우기 바빴다. 포크를 사용하는 게 조금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규연과 식사하면서 연습을 많이 했더니 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생크림은 확실히 이쪽이 더 맛있는데요.”
“바꾸길 잘한 거 같, 야, 그거 먹지 마.”
정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규연이 대뜸 인상을 구겼다. 손은 어느새 나루의 행동을 저지시키고 있었다. 나루가 장식용으로 올린 인공 풀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먹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손이 잡힌 나루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인공 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묻어있는 생크림이 맛있어서 입에서 빼기 싫었다.
“싫어.”
“하…….”
“…….”
“좋은 말할 때 뱉어라. 하나, 둘.”
규연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나루가 씹던 풀을 뱉어냈다. 줄기 부분에 이빨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는 게 어이없고 웃겼다.
서연은 점점 둘 사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 싹수 노란 규연이 나루에게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게 굴고, 착하기만 할 거 같았던 나루는 보기와 다르게 성깔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서연이 식탁 위에 놓인 타르트와 나루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규연이 개발한 신메뉴와 나루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톡 쏘듯 상큼한 게, 꼭 나루 성격 같았다.
“그런데 사장님 타르트, 이분이랑 좀 닮았어요.”
“……뭐?”
“그, 그냥 제 생각이에요. 부드러워 보여도 상큼한 게, 매력 있어서…….”
규연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루를 생각하면서 만든 타르트이니 닮는 게 당연한데, 설마 서연이 이걸 눈치챌 줄은 몰랐다.
입에 포크를 물고 있던 나루가 기대하는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았다. 정말 나를 생각해서 만든 거야? 하고 묻는 듯한, 감동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규연은 몇 박자 느리게 부정했다.
“…아니야.”
“제, 제 착각이었나 봐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
일이나 하라며 등을 떠민 규연이 눈을 부라렸다. 휴일에 불러놓고, 이제는 일까지 하라니. 악덕 사장이 따로 없었다. 정수와 급하게 의논을 마친 그는 나루가 더 이상한 짓을 벌이기 전에 둘을 돌려보냈다.
서연은 현관문을 나서기 전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와중에 집에서 챙겨 온 마들렌을 나루의 손에 꼭 쥐여주기까지 했다. 나루는 또 그걸 좋다고 받아들었다.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전부 착한 사람이었다.
정신없던 집 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규연은 한숨을 내쉬며 부엌으로 돌아왔다. 나루는 어느새 서연에게서 받은 바닐라 마들렌을 입에 넣고 있었다. 몸은 마른 주제에 먹는 건 기가 막히게 잘 먹었다.
“정말 나 생각하고 만든 거예요?”
“뭐가.”
“아까 그거, 맛있는 거.”
타르트가 담겨있던 빈 접시를 가리킨 나루가 눈을 끔뻑였다. 규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순순히 대답해 줬다가 또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끔찍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애초에 창피해서 말해 줄 생각도 없었다.
나루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텐데, 규연은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묵묵히 부엌을 청소하는 모습에 나루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나 생각하고 만든 거구나…….”
접시에 묻어있던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나루는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함을 천천히 느꼈다.
나는 이런 느낌인가. 달콤하고, 상큼하고. 조금 부끄러울지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치고 행동이 과감해졌다.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찍어 먹던 나루는 아예 접시에 코를 박았다. 재료들을 도로 집어넣던 규연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눈을 크게 떴다.
“미쳤구나?”
“……응?”
“더럽게 접시는 왜 핥아. 너 변태냐?”
“나, 나 변태 아닌데. 나 변태 아니에요.”
아니긴 무슨, 접시를 그렇게 핥고 있는데. 이 미친.
나루를 변태 취급하며 중얼거리던 규연이 접시를 뺏어가 물로 한 번 씻어내고, 식기세척기에 넣어 작동 버튼을 눌렀다. 졸지에 변태가 된 나루는 규연의 뒤에 착 붙어 다니며 해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냥 규연이가 이제 날 좋아하게 된 줄 알고…….”
“다시 말해 봐. 뭐?”
“날 좋아하게 된 줄 알았어요.”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냐.”
나루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을 떠올리며 디저트까지 만들었는데,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이 안 된다. 규연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온순한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나루가 무언가 반박할 때마다 짓는 표정이다. 냉장고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낀 규연은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일지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귀를 열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건 규연이야.”
“…….”
“나는, 나는…….”
규연이 네가 좋은데. 이제 정말 내 평생 주인으로 삼을 수 있는데.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이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나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식탁 의자가 주욱, 밀려나며 작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뭘 하려는 거야, 저게.
속으로 나루의 행동을 예측해보던 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사이, 나루는 규연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작 몇 걸음 걸어오는 건데, 뭐가 그리 비장한지.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
규연의 앞까지 다다른 나루가 까치발을 들었다. 작은 머리통이 정확히 어깨까지 올라왔다. 나루는 망설이지 않고 규연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너 지금 뭐,……!”
방심하고 있던 규연의 상체가 나루 쪽으로 기울어졌다. 뭐 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나루가 잔소리를 듣기 전에 입부터 맞췄기 때문이었다.
규연의 두 볼을 꼭 붙잡은 나루가 당당히 입술 박치기를 했다. 말 그대로 입술을 막 가져다 박은 것에 불과한 행동은 입맞춤이라기엔 많이 격했다.
덕분에 규연은 피를 보고야 말았다. 나루의 송곳니에 찔린 입술에서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누구는 아파 죽겠는데, 누구는 혼자만의 로맨스를 즐기는 중이었다.
당당하게 뽀뽀하는 나, 정말 멋있다.
나루는 누군가에게 먼저 입을 맞춰 본 적도 없었고, 제대로 된 키스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어떻게 하는지도 모를 수밖에.
“이게 돌았나.”
“으우, 아직 안 끝났는데!”
“여기 피 나는 거 안 보여? 누굴 물어뜯어 죽이려고.”
나루의 턱을 붙잡아 떼어낸 규연이 핏방울 맺힌 입술을 보여가며 화를 냈다. 나루는 크게 아쉬워하며 손을 뻗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시 입술을 맞춰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나루의 막대한 계획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제대로 뿔난 규연이 뒷덜미를 잡고 빈방에 나루를 던지듯 처넣었기 때문이다.
“반성해.”
“난 잘못한 거 없는데……!”
“반성할 때까지 여기서 나올 생각하지 마.”
엄포를 놓은 규연이 방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았다.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던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딱 규연이 마음을 확인할 타이밍이었는데.
반성은 무슨, 나루는 다음번엔 어떻게 입을 맞춰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했다.
반면, 규연은 뒤늦게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진정시키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거지 같은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부엌으로 돌아와 싱크대 주변을 청소하다 말고, 규연이 잘 접힌 행주를 집어 던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맥박이 빨라지는 듯했다.
그 새끼는 왜 갑자기 급발진하고 지랄이야. 멍청한 게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직원들을 집으로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X발.
규연은 애꿎은 서연을 탓했다. 그녀가 타르트를 보고 나루와 닮았다느니, 뭐라느니 말만 안 했다면 나루가 급발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하던 규연이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게,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