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누워 한참을 생각하던 나루는 자연스레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저녁부터 자고 눈을 떠 보니, 통창 너머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하늘이 보였다.
규연이는 자고 있나?
담요를 걷어내고 일어선 나루가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레 옮겼다. 규연의 방문 앞에 도착한 후에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고리를 돌리고, 작은 틈새로 방 안쪽을 훔쳐보았다.
“어라?”
뭔가 이상했다. 넓은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 할 규연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새벽 여섯 시. 이쯤이면 잠에 빠져있어야 하는데, 새벽부터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루는 규연의 방문을 활짝 열고 안을 샅샅이 훑어봤다. 방 안쪽 욕실에서도 물소리가 안 들리고, 침대 아래에도 없고, 책상에도 없고,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발을 동동 구르며 나온 나루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안 그래도 어제 불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는데, 눈 뜨자마자 규연이 사라져서 가슴이 다른 의미로 쿵쿵 뛰었다.
덜컥!
나루가 그토록 찾던 규연은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침부터 어딜 갔다 온 건지, 들어오자마자 품에 안은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부터 왜 멍하니 서 있어.”
“어, 어디 다녀와요?”
“가게에, 왜.”
심플한 대답을 내놓은 규연이 가게에서 들고 온 재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새로 바꿀 재료들을 미리 확인해 보기 위해 집으로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나루는 규연의 뒤를 쫓아다니며 재료들을 구경했다. 상자 안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데, 나루를 밀어내고 상자 안을 살펴보던 규연이 갑자기 욕을 중얼거렸다.
“다 깨졌네, X발.”
“…….”
다행히 나루에게 한 욕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바닐라 에센스 하나가 깨져서 상자 안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좋은 냄새가 난다 했더니, 이거였구나.
나루가 시리얼을 타 와서 먹는 동안, 규연은 바쁘게 움직였다. 매일 노는 거 같아 보여도, 가게 일은 열심히 하는 게 신기했다.
수첩에 사 온 재료들을 꼼꼼히 적고, 무게도 재어 보고, 티스푼으로 소량씩 떠서 맛을 보기도 했다. 나루는 들고 있던 시리얼을 내려놓고, 자기도 맛을 보겠다며 끼어들었다. 알록달록한 시리얼보다 규연이 맛보는 시럽이 더 맛있어 보여서였다.
“나도!”
“손 치워라.”
“나도 먹고 싶은데…….”
“네가 이걸 왜 먹어. 가서 얌전히 시리얼이나 먹어.”
매정한 태도에 터덜터덜 걸어온 나루가 다시 시리얼을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꼭 밖에 나가고 싶었는데, 규연이 평소보다 더 바빠 보여서 나가자는 말을 못 할 것 같았다.
재료 정리를 마친 규연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오늘은 신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책상 앞에 꼭 붙어있어야만 했다.
규연의 디저트 카페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매번 바뀌는 메뉴들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카페에는 없는 메뉴를 온 직원이 함께 개발하고, 한 달 주기로 신메뉴를 내서 기존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신규 손님들을 끌어모았다.
이번 메뉴의 주재료는 오렌지였다. 저번 달에 화이트초콜릿을 사용한 디저트들이 큰 인기를 얻어서, 이번에는 상큼한 오렌지로 분위기를 바꿔 볼 생각이었다.
대충 커피 한 잔을 챙겨 서재로 들어온 규연은 의자에 앉아 레시피 개발용 노트를 펼쳤다. 대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형들은 규연이 그저 놀러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뭐, 실제로 규연이 생각 없이 놀 때가 많긴 했지만, 레시피가 빼곡하게 들어찬 노트는 그동안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저기, 일 끝나면 같이 밖에 나가요.”
“너 언제 들어왔어.”
“방금?”
슬며시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온 나루가 말을 걸었다. 규연이 바빠 보였으나, 혹시 모르니 밖에 나가자고 제안해 본 거였다. 차분한 목소리에 놀란 규연은 미간을 좁히고, 제 쪽으로 붙어오는 나루의 몸을 밀어냈다.
밖에 데리고 나갔다가 열 받아서 가둬둔 게 며칠 전인데, 규연이 현관문을 열어줄 리가 없었다.
“집에서 절대 못 나간다고 분명히 말했다.”
“규연이랑 같이 나가고 싶은데!”
“웃기지 마. 내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
“옆에서……?”
“어.”
방금까지 나가고 싶어서 안달을 내던 나루가 순순히 고집을 꺾었다. 규연이 단순히 안 된다고만 말했다면, 어떻게든 나가자고 꼬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루는 똑똑히 들었다.
‘내 옆에서, ……, 있어.’
중간에 끼어든 말들은 왼쪽 귀로 들어와서 오른쪽 귀로 빠져나가 버렸다. 옆에 있으라는 말에 들뜬 나루는 입꼬리를 빙글 올려 웃었다.
강아지 수인인 나루는 주인 옆에 붙어 있는 걸 좋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다.
쌀쌀맞게 대답한 규연은 안경까지 쓰고 펜을 휙휙 돌렸다. 신메뉴는 하루를 꼬박 고민해도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까 말까 했다. 그러니 최대한 집중해서 자료를 찾고, 레시피를 생각해 보아야 했다.
나루는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숨을 죽이고, 규연의 발밑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뜬금없는 행동에 시선을 빼앗긴 규연이 황당한 얼굴로 나루를 내려다보았다.
“너 지금 시위하냐?”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규연의 눈에 나루의 행동은 시위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못 나가게 했다고 일부러 무릎을 꿇어서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다니. 단순히 고집부리는 걸 넘어서서 괘씸한 행동이었다.
얘가 지금 나랑 기 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마음을 굳게 먹은 규연이 나루를 외면해 버렸다. 고집부리는 대로 다 해주다가는 끌려다니게 될 것 같아서,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보로 철저히 무시했다.
반면, 나루는 시위하냐고 묻는 규연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주인이 옆에 있으라 했으니 그에 맞는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 왜 신경질을 내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지하실에서 지낼 때, 나루는 온종일 무릎을 꿇고 기다리곤 했다. 기다릴 땐 무조건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전 주인의 명령을 따르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몸에 배어 버렸다.
물론 강아지로 변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건 괜찮았지만, 사람인 상태에서는 다리가 저리거나 쥐가 나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게 힘들었다.
처음에 신경질을 내던 규연은 곧 아무렇지 않게 일을 시작했다. 나루는 일하는 규연의 모습을 뚫어지게 구경했다.
오, 규연이는 펜을 저렇게 잡는구나. 손이 커서 펜이 다 덮여. 멋있다.
노트에 뭘 열심히 쓰고 있는 걸까. 숫자? 글씨? 아니면 그림인가?
규연이 안경 쓰니까 더 잘생겼어. 나도 저거 쓰면 똑똑해 보일까.
“으…….”
사소한 부분까지 짚어가며 감탄하던 나루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고작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다리에 쥐가 나서 버티기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작은 소리에 손을 멈칫한 규연이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루는 티 나지 않게 다리를 톡톡, 쳐가며 버텼다.
규연은 나루의 미련스러운 행동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저 조그마한 게 성격은 얼마나 독한지 모르겠다. 한 시간이 넘도록 무릎을 꿇고 시위를 하는 모습에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렇게 두 시간이 더 지났다. 규연은 나루에게 져 주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 작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으나, 나는 괜찮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게 얄미워서 참고 또 참았다.
“으앗……!”
그때였다. 감각이 사라진 다리를 몰래 콕콕 찔러 보던 나루가 그만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규연은 기다렸다는 듯 펜을 내려놓고, 의자를 돌려 나루를 쳐다봤다.
바닥에 엎어진 나루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제 패배를 인정하고 눈물을 보인 것이다. 거만하게 다리를 꼰 규연은 이제야 관심을 좀 던져 줬다.
“미련스럽긴.”
“…….”
바닥을 짚고 있던 나루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리가 저려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규연이 걱정해 주니 기분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전 주인은 집중하고 있을 때 소리를 내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는데, 역시 규연은 그 사람과 마음씨 자체가 달랐다. 나루는 이토록 마음씨 착한 규연이 진심으로 좋았다.
얼른 일어나서 저 품에 돌진하고 싶은데, 저린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앞으로 또 이딴 식으로 고집부려 봐. 가만 안 둬.”
“응?”
응? 지금 규연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고집부린 적이 없는데.
의아함을 느끼던 나루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규연은 엎어진 나루의 몸을 제 품에 안아 들었다. 덕분에 고집부린 적 없다고 반박하려던 입술이 꼭 다물렸다.
굽혀져 있던 다리가 쭉 펴지는 바람에 찌릿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나루는 이런 느낌 따위 평생 느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규연이 안아 준다면, 정말 평생 아파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규연의 품에 살며시 얼굴을 묻은 나루가 습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오늘은 또 다른 향수를 뿌린 걸까. 시원한 스킨 향으로 시작해 묵직한 우드 향으로 끝나는 게 매력적이었다.
콩닥. 콩닥.
나루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규연과 가까이 붙어 있을 때면 늘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댔는데, 오늘은 더 빠르게 뛰는 느낌이었다.
직접 안아서 옮겨주기까지 하고, 규연이는 나를 이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해주고 있는 거야.
나, 진심으로 규연이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평생 주인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기대에 차서 반짝거리는 눈빛이 규연에게 닿았다. 소파에 몸을 내려준 규연은 그런 나루의 표정을 발견하고 슬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표정은 뭐냐.”
“그냥…….”
“아무튼 너, 또 이런 미련한 짓 하기만 해.”
“…….”
“대답 안 하냐? 어?”
거칠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나루가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저거 봐, 또 나를 걱정하고 있어.
뿌듯해하는 나루와 달리 규연은 욕을 읊기 바빴다. 저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는 둥 중얼거리던 그는 서재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규연은 몰랐다. 제 까칠함이 나루에게 다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허공을 향해 발을 굴렀다. 소리 없는 오두방정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루가 혼자 설렘을 느끼고 있는 동안, 규연은 머리를 싸맸다. 신메뉴를 생각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온통 나루로 가득 차서 이제는 괴로울 지경이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요망해지는 나루의 행동에 혼이 빠져나갈 위기를 느낀 규연이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줏대 지켜, 흔들리지 마. 저딴 거에 흔들리지 마.
오후 늦은 시간까지 서재에 처박혀 고통받던 규연이 펜을 놓아 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 정신이 좀 들 것 같았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에는 규연이 디자인한 타르트가 그려져 있었다.
퐁신한 크림치즈 위에 오렌지를 잔뜩 얹었고, 그 위에 교차하듯 쌓인 얇고 폭신한 시트들은 사이사이마다 오렌지잼이 발라져 있었다. 맨 위층에는 생크림과 오렌지가 잔뜩 얹어져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달콤하고 상큼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이 오렌지 타르트는 나루를 떠올리며 디자인한 디저트였다. 그래서인지 타르트는 나루를 꼭 닮아 있었다. 부드러운 생크림은 유순한 얼굴을, 톡 쏘듯 상큼한 오렌지잼은 그 애의 특이한 성격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