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화면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건 언제나 신기했다. 나루는 규연이 나간 사이 TV 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리모컨 조작법을 익힌 후로는 혼자 있을 때마다 TV를 틀어놓곤 했다. 멍하니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금세 흘러가서 좋았다.
나루가 보는 프로그램은 몇 없었다. 강아지가 나오는 다큐 프로그램, 아니면 홈쇼핑 채널이 전부였다. 특히, 홈쇼핑의 경우 주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나올 때만 시청했다.
오늘은 나루가 제일 좋아하는 강아지 다큐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길거리의 개들’이라는 프로그램은 유기견들이 겪는 일들을 자세히 다뤘다. 나루는 제 친구와도 같은 강아지들이 나올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다.
<길가를 떠도는 강아지들은 위험에 처하기 쉽다. 며칠 전, 한 도로에서 안타깝게도…….>
나긋하고 차분한 나레이션이 거실에 울렸다. 도로에서 사고를 당한 강아지 이야기가 나오자 나루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루는 모자이크된 도로를 보며 제 가족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막냇동생이었다. 너무 어려서 사람으로 변하는 것조차 불안정하던 동생. 나루도 어려서 무슨 상황이었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 가족이 다 같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 이사 가던 중이었을 것이다.
수인의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면 더 무시 받을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따라 가족들은 다 같이 강아지 모습 그대로 이동하기로 했다. 나루의 형과 동생들은 수인화 조절이 힘든 막내를 챙기며 엄마의 뒤를 졸졸 쫓아가기 바빴다.
집을 바로 구할 수 없어 다리 밑에서 노숙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도로 하나를 남겨두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힘없이 따라오던 막내가 도로 한가운데에 풀썩 주저앉았고,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엄마는 헐레벌떡 막내를 구하러 갔다. 나름 한적한 도롯가라 망설이지 않고 뛰어든 것이었는데, 하필 그때 화물 트럭이 달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막내와 엄마를 구하기 위해 도로에 뛰어든 형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운전자가 화내는 소리에 놀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동생들 또한 놀라서 도망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루는 차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 막내와 엄마를 지켰다. 이후의 일은 더 슬펐다. 한참 그 옆에 앉아 울던 나루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잡혀 전 주인에게 팔려 갔고, 막내와 엄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도 하지 못했다.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눈물이 차올랐다. 전 주인과 지내면서는 가족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가족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학대를 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에 성공하고, 규연을 만난 뒤에는 여유라는 게 생겼다. 살 만해진 게 좋았지만, 가끔 가족 생각이 날 때면 마음이 시큰거렸다.
나루가 TV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즈음, 외출했던 규연이 돌아왔다. 심부름 업체에서 신경 쓰이는 말을 듣고 온 규연은 나루를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와중에 규연의 손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본인의 디저트 카페 로고가 깔끔히 박힌 쇼핑백이었다. 마카롱을 먹고 싶다는 말에 화를 냈으면서, 나루의 주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너 지금 우냐?”
“크응…….”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규연이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마카롱 심부름까지 시키더니, 자기는 TV나 보고 울고 있는 게 묘하게 열 받았다. 나루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그가 억지 다분한 말을 내뱉었다.
“아주 태평하다, 태평해.”
“그런 거 아닌데…….”
“너 내가 분명히 말했지. 사소한 것까지 통제할 거라고.”
단호한 말투에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통제 덕분에 규연의 옆에 꼭 붙어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멋대로 울지도 마. 내가 허락하면 울어.”
“허락하면, 울어요…?”
“어, 우는 얼굴 못 봐주겠으니까 그만 질질 짜라고.”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마음대로 울지도 못 하게 한다며 성을 냈을 거다. 그러나, 나루에게는 이런 규연의 행동이 따스하게 다가왔다. 말투는 좀 거칠어도, 꼭 자신을 달래 주는 것 같아서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규연은 나루를 향해 쇼핑백을 던져 주었다. 안에는 형형색색의 마카롱들이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아마도 서연이 정성스럽게 포장한 듯했다.
울어서 눈가가 빨갛게 됐으면서, 나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꽃처럼 화사해서 규연은 순간 흔들릴 뻔했다.
“뭘 웃어.”
“규연이가 좋아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규연이가 좋아서.
나루는 제가 느끼는 감정을 늘 솔직하게 표현했다. 규연은 그런 꾸밈없이 솔직한 모습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좋은 집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고개 숙일 일 없이 자라서 제멋대로였고, 주변인들은 그런 규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식을 떨었다. 듣기 좋은 아양이 아닌 진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사람이 몇 없었다. 하지만 나루는 달랐다.
“진짜 좋아.”
“야, 떨어져.”
어느새 달려온 나루가 규연에게 폭삭 안겨들었다. 별 같잖은 이유로 울지 말라고까지 했는데 뭐가 좋다고 들러붙는 건지. 평소였다면 곧장 이마를 밀어냈을 텐데, 오늘만큼은 떼어내기 쉽지 않았다.
규연의 몸을 두 팔로 꼭 껴안은 나루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행동이었다. 키가 큰 규연의 앞에 매달리듯 안긴 나루의 몸집이 오늘따라 더 작고 귀여워 보였다.
규연은 나루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늘 심부름 업체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자신이 없는 사이 울던 얼굴이 안쓰럽기도 해서 그냥 안겨 있도록 두었다.
뭐지? 이쯤이면 규연이가 나를 막 밀어내야 하는데.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나루가 조심스레 규연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규연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못마땅하게 올라간 한쪽 눈썹, 사포처럼 까칠한 시선, 꾹 다물린 입까지.
차가운 표정은 그대로인데, 행동은 왠지 모르게 따듯했다.
“정말 안 밀어내요?”
“…….”
“정말?”
“비켜.”
순수한 질문에 정신을 차린 규연이 뒤늦게서야 이마를 밀어냈다. 동그랗게 뜬 눈이나, 오밀조밀 움직이는 입술이 쓸데없이 귀여워서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규연은 생각했다. 순진해 보이는 나루가 사실은 사람 홀리는 여우 같은 게 아닐까. 제 앞에 선 말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어, 어디 가요?”
“씻으러.”
규연이 뒤돌아서자 나루가 황급히 옷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아침에처럼 자신을 또 혼자 두고 가버릴까 봐 붙잡은 거였다. 씻으러 간다는 말을 남긴 규연은 제게 붙은 손을 떼어내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남은 나루는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를 풀어헤치고 하늘색 마카롱 하나를 집었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들어찼다. 부드러운 식감과 달달한 맛이 꼭 지금 나루의 기분 같았다.
규연이가 나한테 마음을 열어준 걸까. 나 기대해도 되는 건가.
규연의 작은 행동 하나에 나루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댔다. 그저 안겨드는 걸 밀어내지 않았을 뿐인데, 나루는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이런 나루와 달리 규연은 착잡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나루의 부모는 자식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도 찾아 나서지 않았고, 나루는 오히려 이 집에서 쫓겨나는 걸 두려워했다.
이 두 가지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제게 안겨들던 나루의 모습까지 떠올리니 머리가 돌아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규연의 시선으로 본 나루는 그저 또라이 같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냥 또라이에서 귀여운 또라이가 되어가고 있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유규연, 미쳤구나. 미친 새끼. 네가 진짜 미쳤지.”
저런 졸부를, 그것도 자신을 욕하고 다닌 졸부를 귀엽게 본다는 게 말이 안 됐다.
“하하, 미친…….”
허탈하게 웃은 그가 수도꼭지를 옆으로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찬물로 바뀌어 나오자, 몸이 차게 식었다. 머리까지 식히고 나니 이제야 제정신이 좀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나오던 규연은 소파에 앉은 뒷모습을 잠시나마 쳐다보았다. 사다 준 마카롱을 야금야금 깨물어 먹고 있는 뒤통수가 오늘따라 얌전해 보였다.
생각에 빠진 나루는 규연이 나온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열심히 마카롱을 씹고 있는 게 우스웠다.
아까는 좋다며 달려들더니, 이제는 뭐 모르는 척하는 것도 아니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김이 샌 규연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나루는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규연이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무어라 말을 걸고 싶었지만, 이미 방으로 들어가 버린 터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 먹은 마카롱 상자를 테이블 위에 치워놓고, 소파에 누운 나루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오늘은 생각해야 할 게 꽤 많았다.
규연이 씻는 동안, 나루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머릿속에 전 주인이 떠올라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규연이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건 매우 좋았다. 나루는 이런 규연에게 제 마음을 내어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 주인도 처음에는 나름 잘해 줬었다. 나루가 아기일 시절에는 잘 돌봐 주다가, 나이가 차고 나니 거친 행동을 서슴없이 했었다.
물론 규연이 전 주인처럼 괴팍하지는 않을 테지만, 초반에 잘해 준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규연이한테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은데, 그랬다가 전처럼 상처만 받을까 봐 무서워. 그리고 규연이가 나한테 정말 마음을 연 게 맞을까.
매일 속없이 웃고 다녀도 이럴 땐 야무졌다. 나루는 두 번 다시 상처받기 싫었다.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고, 지금은 규연을 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지 않을 사람이라면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만약, 내가 규연이 마음을 열어줬는데 규연이가 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만약의 상황을 생각하던 나루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담요를 조금 걷어내고,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던 나루가 눈을 꼭 감았다. 일단은 앞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규연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게 더 중요했다.
그때, 나루에게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규연이 마음을 조금씩 떠보는 건 어떨까. 정말 미안하지만, 아주 조금만 시험해 보는 거야.
규연이 알아챈다면 크게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루는 조금만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과연, 유규연이 앞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줄지, 안 해줄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