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기괴한 행동인가. 규연은 단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떨어지랬더니 일부러 손까지 대고, 반응을 보기 위해 규연을 힐끗 쳐다보는 모습이 얄궂었다.
이게 진짜 나를 가지고 노네.
나루의 순진한 장난에 당해 주던 규연이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화를 분출했다. 이건 명백히 규연을 의식하고, 자극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안 좋은 소문은 다 퍼뜨려 놓고, 사과도 안 하고, 역으로 자신을 농락하려 드는 나루의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난 규연이 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야, 장난해?”
“그, 그러니까 이건…….”
“내가 계속 가만히 있어 주니까 만만하지. 네까짓 게……!”
팔을 잡아끈 규연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건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어라 말도 걸지 못하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루는 조금 겁먹은 상태였다. 그냥 규연의 마음을 조금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붙잡힌 팔도 아팠고, 보폭이 넓은 규연을 따라잡느라 빠르게 걸어서 다리도 아팠는데 제일 아픈 건 따로 있었다.
‘네까짓 게……!’
네까짓 거라고 했다. 나루는 마음 어딘가가 쿡쿡 쑤셔서 어깨를 웅크리고 걸었다. 그보다 훨씬 못된 말에도 익숙한 자신이었는데, 이제 와 이런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 걸 보면, 규연과 한 달 가까이 지내면서 많이 치유 받고, 그만큼 약해졌나 보다.
탁!
조수석에 나루의 몸을 구겨 넣은 규연이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전에는 한숨을 쉬면서도 안전벨트를 직접 해 줬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나루는 일부러 안전벨트를 메지 않고 기다렸다.
“안전벨트 해.”
“…….”
기다리면 해주겠지, 라는 마음은 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나루는 입을 삐죽 내밀고 얌전히 안전벨트를 채웠다.
규연은 집으로 가는 동안 앞만 바라보고 운전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서 나루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내가 잡혀 온 놈한테 농락을 당하다니. 그것도 저런 아무것도 아닌 애한테.
규연의 자존심이 심히 깎였다. 애초부터 만만히 볼 틈을 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규연은 이제부터라도 단단히 통제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 내가 너무 풀어줬지. 그러니까 저렇게 살판이 나지.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후에는 또다시 나루의 팔을 붙잡고 문 앞까지 올라왔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루는 절대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 내가 좀 잘해줘서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
“이제부터 제대로 통제할 거니까, 각오해.”
나루는 이제 ‘각오’하라는 말이 딱히 무섭지 않았다. 전 주인이라면 몰라도, 규연은 각오하라는 사람치고 꽤 친절했다. 밥도 주고, 욕실에서 씻게 해주고, 아주 호화스러운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줬다.
멀뚱멀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루가 규연을 따라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상쾌하면서도 은은하게 묵직한 향이 코를 찔렀다. 늘 규연에게서 나는 좋은 향이었다.
킁. 킁킁. 좋은 냄새 난다. 이래서 나는 규연이 집이 좋아.
집으로 들어온 나루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런 따스한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건, 정말이지 복 받은 일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규연은 나루를 똑바로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곧게 뻗은 눈매가 그의 날카로운 인상을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늘 동그랗고 순한 눈매가 불만이었던 나루는 그런 규연을 부러워했다.
언제 봐도 잘생긴 얼굴. 규연이 잘생겼어.
규연은 나루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내리깔린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무서웠다.
“밥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사소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전부. 내 허락 없이 하지 마.”
“…전부?”
“전부.”
“네에…….”
단호한 대답에 꼬리를 내린 다울이 쉽게 수긍했다. 허락 맡는 것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말하는 것까지 허락을 맡았어야 했으니 말이다.
상황이 또 규연의 예상을 깨고 흘러갔다. 규연이 나루의 속마음을 읽지 못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미 속이 터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 * *
나루는 지금 자신의 삶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각오하라고 경고한 규연은 그날부터 나루를 단단히 옥죄기 시작했다. 움직이려고 하면 가만히 있으라 하고, 나루가 낮잠을 자려고 하면 일부러 못 자게 막았다.
심술을 부리는 수준이었으나, 잡혀 있는 사람은 귀찮고 힘들 것이었다. 규연은 나루를 편하게 두지 않으려고 노력까지 했다. 간혹 이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루는 이런 규연의 노력을 무참히 짓밟는 중이었다. 물론 몰래. 혼자서만.
“야, 일어나.”
“으움, 네.”
낮잠을 자면 밤잠을 설쳐서 늘 힘들었는데, 직접 깨워줘서 고마웠고.
“어딜 움직여. 가만히 안 있어?”
“…네에.”
규연의 옆에 꼼짝없이 붙어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원래 강아지 수인들 특성이 다 그랬다. 주인으로 인식한 사람에게는 온 마음을 다 내어주고 싶고, 항상 붙어있고 싶었다. 규연은 나루의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중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만히 있어라, 따로 떨어지려 해도 옆에 붙어있어라, 너무나도 행복한 명령이었다.
나루를 옆에 달고 부엌으로 온 규연은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아침에 카페에서 가지고 온 파운드 케이크를 꺼냈다. 오늘은 시간이 여유로워서 한가로운 하루를 보낼 작정이었다.
나루는 규연을 따라 앉았다. 그의 테라스는 작은 카페와 다를 게 없었다. 값비싼 화초와 화분으로 꾸며진 벽 한쪽은 너른 정원을 떠올리게끔 했고, 그사이에 놓인 테이블에 앉으면 피크닉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다리를 꼰 규연은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생각에 잠겼다.
나루는 규연이 준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고, 화초에서 날아든 파리 한 마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벌레를 잡는 손짓에 망설임이 없었다.
“가서 버리고 와.”
산만한 나루의 행동에 분위기가 제대로 깨져 버렸다. 규연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턱짓으로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손바닥 가운데에 찌그러진 파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루는 고개를 끄덕이곤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규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휘저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을까. 이해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쟤 가족은 한 달이 지나가는데도 연락 한 통 없네.
문득 의아함을 느낀 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아들이 행방불명됐는데 찾지 않는 부모의 행동이 이상했다. 게다가 졸부 집안이면 아들을 더 끔찍하게 생각할 텐데.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알아봐야 하나.
사실 나루에게 사과를 받는 건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딱 보니, 사과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눈치라 아예 포기해 버렸다.
문제는 놓아줄 타이밍을 제대로 놓쳤다는 것이다. 벌써 한 달이 넘게 같이 지내고 있고 무엇보다, 잡혀 온 본인이 나가기 싫어했다. 얼떨결에 나루를 데리고 있게 되었지만, 너무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 이상했다.
생각난 김에 알아봐야겠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선 규연이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일을 부탁했던 심부름 업체에 다시 가 보는 게 좋을 듯했다. 형인 규성의 비서는 여전히 업무가 바빠서 일을 더 얹어 줄 수가 없었다.
“어디 가요?”
“넌 집에 박혀 있어.”
“나가고 싶은데…….”
“집에. 얌전히. 박혀. 있으라고.”
같이 나가고 싶었던 나루가 들러붙자, 이마를 밀어낸 규연이 딱 잘라 거절했다. 나루는 일부러 힘 빠진 걸음으로 걸었다. 규연과 단둘이 집에 갇히는 건 좋았지만, 혼자 남는 건 싫었다.
규연이 신발장으로 향하니 나루가 껌딱지처럼 붙어왔다. 졸졸 따라다니는 게 펫 같았다. 검은색 워커를 신은 규연은 문을 열기 전 경고를 남겼다.
“앞에서 무릎 꿇고 있지 마라.”
“기다리는 건데…….”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
“네에.”
조심히 무릎을 꿇고 앉으려던 나루가 잽싸게 일어섰다. 규연은 한숨을 내쉬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서서히 닫히고, 문틈으로 나루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아쉬워하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심부름센터까지 데려갈 수 없어 애써 외면했다.
규연은 심부름 업체의 주소를 알아낸 후, 차를 빠르게 몰았다. 서울 구석에 자리 잡은 심부름 업체는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건물도 좀 오래됐고, 계단에도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땅히 차 세울 곳이 없어 골목길 한 편에 주차를 한 규연이 건물 안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진짜 들어가기 싫게 생겼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일어서, 규연은 코를 틀어막아 버렸다. 유독 높게 지어진 계단을 딛고 올라가니 허름한 유리문이 보였다. 보안을 위해 붙여놓은 흰색 필름은 세월이 흘러 누렇게 바래 있었다.
손잡이는 또 왜 이리 잡기 싫게 생겼는지. 쇠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심히 녹슬어 있었다. 규연은 뻗었던 손을 거두고, 유리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여기 사장 나와.”
“아니, 이 시간부터 누가 문을 막…!”
“당신이 사장?”
안쪽에서 튀어나온 직원이 소리를 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 손에 숟가락을 쥐고 있는 걸 보니 식사 중이었나 보다. 규연은 퀴퀴한 냄새와 합쳐진 음식 냄새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
“한 달 전에 나랑 연락했었잖아, 사장님. 내 목소리 모르겠어요?”
다 낡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규연이 거만한 자세를 유지했다. 직원은 골똘히 무언가를 떠올려 보다가, 규연의 목소리를 기억해내고 손뼉을 쳤다.
“아! 그 싸가지, 가 아니라 그 손님!”
“싸가지? 아무튼, 그때 내가 뒷조사 부탁했던 사람 말인데.”
“예 예.”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좀 알고 싶어서. 뭐, 저번에 조사해놓은 파일이라도 없나?”
뜬금없는 요구에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던 직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만요’를 외친 그는 먹던 밥을 모두 치워놓고, 어딘가 던져 놓았던 서류를 찾아 규연의 앞에 앉았다.
규연의 따가운 시선에 겁먹어 식은땀을 훔쳐내던 직원이 같은 서류를 여러 번 넘겨보았다. 정보를 주긴 줘야 하는데, 자료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적혀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문제였다.
흰 종이에는 송나운과 관련된 소문들 몇 가지가 적혀져 있었다. 직원은 이걸 길게 늘어뜨려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 있네요. 있어.”
“보여줘요.”
“어, 이게 그, 저희 서류는 아무리 의뢰자라도 보여드릴 수가 없어서요.”
“뭔 상관이야, 어차피 거기 적힌 내용 알려주는 거면서.”
“아, 그래도, 그게 다릅니다. 달라요. 제가 잘 설명해 드릴게.”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규연은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쳤다. 어차피 종이에 적힌 걸 읊는 건데, 그냥 편하게 넘겨주면 될 것을 왜 굳이 사서 고생하려는지.
직원은 더 의심을 사기 전에 입을 열었다. 이 심부름 업체 사장의 교훈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였다. 즉, 자료 조사는 쉽게 쉽게 하고, 입을 잘 털어서 돈이나 많이 벌자는 말이었다.
“어, 여기 나와 있네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사람은 혼자 삽니다. 집에서 워낙 막무가내라 부모가 집 한 채 해주고 내쫓은 거나 마찬가지라죠.”
워낙 막무가내라고? 송나루가? 아니, 막무가내이긴 하지만 망나니 수준은 아니었다.
규연은 이야기를 듣다 말고 표정을 찌푸렸다. 부모가 집 한 채만 해 주고 쫓아냈다니. 독립한 것도 아니고 쫓아냈다는 사실이 조금 걸렸다.
“더 말해 봐요.”
“그, 부모 돈 믿고 떵떵거리며 살긴 했는데, 사실상 빈 껍데기죠. 그리고…….”
직원은 쉴 틈 없이 입을 놀리며 나루에 대한 사정을 알려주었다. 길게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압축해 보면 집에서 쫓겨난 빈 껍데기 졸부 아들이라는 거였다.
규연은 왠지 기분이 찝찝해졌다. 차라리 듣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루의 집이 어떻게 살든 본인이 관여할 바 아니었으나, 쫓겨났다는 게 좀 안쓰러웠다.
지갑에서 현금을 두둑하게 꺼내 던져 준 규연은 묵묵히 심부름 업체를 벗어났다. 찝찝한 기분은 건물을 나오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규연이 본 나루는 사고를 많이 치긴 해도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돌발 행동을 해도 성격 자체는 온순했다. 애초에 사고를 치는 것도, 기본적인 걸 몰라서 실수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가끔 보면 행동이 어리숙한 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티가 났는데, 부모가 그리 매정하게 내쳐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인과가 반대인 걸까. 무엇이 되었건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YK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규연은 사랑만 받고 자랐기에 더더욱 나루의 부모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설마, 걔가 자꾸 붙어오는 게 여태 사랑받지 못해서 그런 건가.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있던 규연이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제가 괜히 불쌍한 놈을 붙잡고, 인생을 더 나락으로 빠뜨리는 게 아닌가 싶어 자괴감마저 들었다.
지잉. 지잉.
그때였다. 규연의 핸드폰이 진동음을 여러 번 울렸다. 발신 번호에는 사용하지 않는 집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 전화기는 오직 나루만 사용했다. 이런 타이밍에 나루에게 전화가 걸려오다니. 망설이던 그가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저, 올 때 마카롱…….
“뭐?”
-마카롱 더 먹고 싶어요.
소심하지만 다부진 목소리였다. 규연은 허탈함에 웃음을 내뱉었다. 누구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그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마카롱 심부름이나 시키고 있었다.
“하, 하 참, X발…….”
-여보세요?
“끊어.”
-마카롱은 하늘색이랑, 분홍색으로……!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규연이 핸드폰을 조수석에 내던졌다. 액셀을 밟는 발에 유독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