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려는 나루를 잡아 준 사람은 건혁이었다. 회사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나온 건혁은 커피도 마실 겸 규연의 디저트 카페로 향하던 중이었다. 저번에 클럽에서 있었던 일도 묻고 싶었고, 나루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기도 해서 굳이 멀리까지 나온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인연일까. 건혁은 한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루를 우연히 마주했다. 저번에 마주쳤을 땐 경계를 하더니, 지금은 건혁의 얼굴을 못 알아보고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다.
건혁은 그냥 지나치려는 나루를 급하게 붙잡았다. 어깨를 잡아 세우니 뒤늦게서야 고개를 들고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순하고 동글동글한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다음은 바로 경계 모드였다.
나루는 건혁의 얼굴을 발견하고 5초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클럽에서 말을 걸었던 규연이의 친구.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던 사람.
“규연이한테 다녀오나 봐?”
그래, 이 능글맞은 목소리는 그 사람이 확실하다.
나루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혀 뒤에 칼을 숨기고 아픈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꼭 이렇게 앞에서는 사람 좋은 척을 해댔다.
“비켜주세요.”
규연의 앞에서는 헤실헤실 잘만 웃던 나루가 미간까지 좁혀가며 건혁을 밀어냈다. 그럴수록 건혁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딘가 띨빵한 거 같은데, 또 멀쩡하고. 온순한 거 같은데, 앙칼지고. 꽤 흥미로웠다.
건혁은 나루의 앞을 대놓고 막아섰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먼저 대화를 끝마칠 때까지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 역시 규연의 친구인지라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었다.
“얘기 좀 더 하고 가지 그래.”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규연이한테는 살갑게 굴더니, 나한테만 앙칼지게 구네. 재미있게.”
저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능글거리다 못해 울렁거릴 수준의 멘트였다. 나루는 이런 부류를 잘 알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진심은 아닐 것이고, 흥미가 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내다 버리겠지. 전 주인이 가끔 제 친구에게 나루를 맡길 때마다 이런저런 일을 다 겪어 봐서 사람 파악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루는 건혁을 무시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금 신경 쓸 게 많아서 힘든데, 건혁까지 상대하다가는 머리가 터져 버리고 말 거다.
버스 정류장은 여기가 맞나. 규연이가 준 카드는 그냥 찍기만 하면 되는 건가. 기사 아저씨한테 카드 결제라고 말해야 하나.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건혁을 생선가게 파리 보듯 한 나루가 자연스레 옆을 지나쳤다. 건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시선을 받아 봤다. 개만도 못한 취급이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나루를 붙잡아 세웠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유규연한테 다른 마음 있는 건 아니겠지?”
“다른, 마음……?”
또 모르는 척할세라 질문을 던진 건혁이 거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뜻을 이해하기 바빴다.
다른 마음이라니, 그게 무슨 마음이지.
말하는 뉘앙스로 봐서는 어딘가 싸한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건혁이 던진 질문은 나루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차라리 정확히 ‘유규연을 좋아하냐.’라고 물었다면 대답해 줄 자신이 있었다.
대답을 망설이자, 건혁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루를 훑어봤다. 클럽에서 봤을 때, 둘 사이가 마냥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었다. 물론 평범할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규연의 원수라는 걸 떠나서 그냥 둘 사이가 미묘한 게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 짚은 건가. 의아함을 품던 건혁이 일부러 미끼를 내던졌다.
“내가 규연이 친한 친구라서 아는데, 걔 여자도 많고 들러붙는 남자도 많아.”
“…….”
“콧대 높은 인간들도 유규연 앞에서는 그냥 여우일 뿐이거든.”
타인에게서 규연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나루는 안 궁금한 척 고개를 돌리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여자도 많고 남자도 많다? 이건 백번 천번 이해가 됐다. 일단 규연은 얼굴부터 뛰어나게 잘생겼고, 키도 훤칠하게 크고, 몸도 꽤 좋아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돈까지 많은 부자였다.
나루도 예상하던 사항이었으나,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규연이는 내 주인인데.
자신의 새로운 주인을 다른 사람들도 탐내고 있다고 하니 심통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조차도 가까이 가기 힘든데, 너는 이런 위치에 있잖아?”
“그게, 왜요?”
건혁은 웃으며 까 내리는 걸 그 누구보다 잘했다. ‘나조차도’를 말할 땐 손바닥이 나루의 머리까지 올라왔고, 나루의 사회적 위치를 설명할 땐 허리 언저리까지 내려갔다. 한마디로 넌 바닥에 있다는 소리를 하는 거였다.
“주제 파악을 하라는 거지.”
“…….”
나루는 이제야 좀 말뜻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건혁은 지금 규연을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중이었다. 아까 말했던 ‘다른 마음’은 규연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를 물었던 것일까.
아무리 순진한 나루라도 이 정도 구분은 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 갇혀 있다 나와서 기본 상식은 부족할지 몰라도,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건 귀신같이 구분해냈다. 굴림수 생활을 하며 몇 년을 고통받았더니 자연스레 생긴 능력이었다.
위태롭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나루는 불쾌하다는 티를 최대한 많이 냈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하,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나 있어.”
“…….”
“마음 있어. 규연이 마음 열어줄 거야.”
방금까지 존댓말을 사용하던 나루가 반말로 대응했다. 굳이 이런 사람에게 존댓말을 써 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건혁은 잠시 당황했다. 반말도 반말이었지만, 너무나도 당당하게 마음이 있다고 대답해서였다. 설마 설마 싶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규연의 뒷담화를 하고 다니던 애가 잡혀가더니 갑자기 마음이 생겼다고? 심히 이상한 전개였다. 아무리 규연이 잘생기고 돈이 많아도, 잡혀갔을 때 적잖게 괴롭힘을 당했을 텐데 좋아하는 게 말이 안 됐다.
헛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건혁은 제 앞에 있는 나루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소심해 보이던 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 같잖았다.
“네가 뭘 착각하나 본데.”
“너, 규연이 좋아해?”
“뭐?”
어색한 친구 사이면 몰라도, 친한 친구 사이에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기 마련이다. 쟤가 지금 장난을 치는 건가. 황당한 얼굴로 나루를 바라보던 건혁이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저걸 지금 진심으로 물었다는 거야?
나루는 진지했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규연에게 마음이 있냐며 물어보는 게 영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만약, 건혁이 규연을 좋아하는 게 맞다면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건혁이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하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루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이 목소리는, 규연이!
돌아본 곳에는 규연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얼떨결에 오해받게 생긴 건혁은 절대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다. 그런데도 나루의 의심쩍은 눈빛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나루를 보내고 난 후, 규연은 고민에 휩싸였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나루를 혼자 돌려보낸 게 신경 쓰이기도 했고, 이러다 제 발로 도망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규연은 담배를 피우러 가는 척하며 카페 밖으로 나왔다. 무언가 눈치챈 서연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걸 보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나와 라이터를 깔짝거렸다.
몇 걸음만 나가 볼까. 아니, 저 건물까지만. 아니다, 버스 정류장까지만 가 보자.
자신과 타협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규연은 자그마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그보다 나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나루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저게 누군가, 하고 고개를 내밀어 보니 그곳에 건혁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저 둘이 왜 버스 정류장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규연은 저번부터 나루에게 관심을 갖는 건혁이 신경 쓰였다.
아쉽게도 나루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뒤돌고 있는 상태라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꼭 말아쥔 주먹이나 중간중간 콩콩 구르는 발을 봐서는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티 나지 않게 가까이 다가가던 규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마음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들려왔지만, 처음부터 듣지 못해서 무슨 상황인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때 나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규연이 좋아해?’
규연은 나루가 던진 질문에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규연이다…….”
그리고 다시 현재. 규연을 발견한 나루는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활짝 폈다. 건혁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얼굴이었다.
“저 사람이 규연이 좋아한대요.”
“안 좋아해. 소름 돋는 소리 좀 하지 마. 집에 가라니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저 사람이 저를 잡아서…….”
일러바치는 듯한 말투로 건혁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한 나루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방금까지는 건혁에게 밀렸을지 몰라도, 이제 규연이 왔으니 자신이 더 유리하다는 태도였다.
건혁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마냥 멍청해 보이는 게, 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꼴이 맹랑했다. 더 어이없는 건, 규연이 나루의 말만 듣고 건혁을 은근슬쩍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루라고 했나? 나를 너무 나쁘게 몰아가는 것 같은데.”
“나쁘게 안 몰아갔어요.”
“아까는 잘도 반말하더니, 지금은 왜 존댓말이야?”
“저는 반말한 적 없어요. 계속 예의 바르게 존댓말만 썼어요….”
건혁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나루가 순진무구한 낯으로 거짓을 고했다. 그러고 보니 규연이 나타난 후로는 쭉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쪼그만 게 여간 약은 게 아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이 규연을 사이에 두고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건혁은 나루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고, 나루는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바빴다. 나루에게는 정말 불쾌한 일이었으나, 규연의 눈에는 두 사람이 꽤 친해진 걸로 보였다.
“야, 좀 떨어져. 너 얘랑 친하냐?”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왜 그렇게 붙어있어.”
나루의 팔을 확, 잡아끈 규연이 둘 사이를 떼어놓았다.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건혁은 꽤 놀란 상태였다. 그 누가 들이대도 신경조차 쓰지 않던 유규연이 사사로운 질투나 하고 있다니. 그것도 이런 아무것도 아닌 졸부한테.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루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라, 규연이 반응이 이상하다. 나를 신경 써 주는 건가? 내가 저 인간한테 닿는 게 싫은가? 그렇다면…….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나루가 건혁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돌발 행동을 실천했다.
어때, 규연아? 어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