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0)


규연의 한정판 손목시계가 어느덧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장인지라 출근 시간이 따로 없어서 늦어도 괜찮았지만, 계획이 틀어지는 건 짜증 나는 일이었다.

이를 악문 규연이 다소 위협적인 목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며칠 같이 지내 보면서 깨달은 건데, 나루는 유독 숫자를 무서워했다. 예를 들어 이런 숫자.

“당장 놓으라고 말했다. 하나, 둘…….”

“같이 갈래.”

“이게 은근슬쩍 반말질이야.”

“바, 반말이 뭐예요?”

이제는 거짓말까지 능숙하게 한다. 규연은 뻔뻔하다 못해 당당한 나루의 모습에 넋을 놓았다. 아까 나이프 사용법을 알려줄 땐 진짜 모르는 눈치더니, 지금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말을 더듬던 나루가 애교 작전을 펼쳤다. 똘망하게 뜬 눈은 여전히 규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고, 꼭 붙잡고 있던 다리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기까지 했다.

저 요망한 새끼가, 돌았나.

검지를 들고 나루의 머리를 쭈욱 밀어낸 규연이 붙어 있던 몸을 떼어내 버렸다. 아무리 들러붙어도 규연보다 힘이 약한 나루는 밀면 밀치는 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

“안 들어가요.”

“얌전히 들어가라고 두 번 말했어.”

“안 들어가.”

또 반말이다. 나루는 일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마다 반말을 날렸다. ‘나도 나름 너한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였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황당함이 커져만 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안 들어가고, 금방이라도 따라 나올 것처럼 신발장을 서성이고, 하여튼 사람 골머리 썩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먼저 항복을 외친 건 규연이었다. 이딴 일로 시간을 소비하다가 제 계획이 더 틀어지기라도 하면 기분이 아주 더러울 것 같았다.

“5분 줄 테니까, 옷 갈아입고 나와.”

“…….”

“데려가 주겠다고.”

“…문고리, 잡고 있으면서.”

“하, 하하, X발. 자, 놨어. 됐지!”

데려가 준다는 말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나루가 규연을 감시하듯 쳐다봤다. 하다하다 의심까지 받은 규연은 문고리를 쥔 손을 떼어내 보여주었다. 열받은 규연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루는 잽싸게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중간중간 규연이 먼저 나가 버릴까 봐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오, 피곤해.”

“흐흥…….”

“웃음이 나오냐?”

“안 웃었어요.”

제 뜻대로 규연과 함께 외출하게 된 나루는 몰래 웃음을 흘렸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언제나 즐거웠기 때문이다. 저번에는 생뚱맞게 클럽으로 가서 실망했지만, 이번에는 날 밝은 낮이라 클럽으로 갈 의심 따위 하지 않아도 됐다.

차에 시동을 걸던 규연은 쓸데없이 귀여운 웃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는 아침부터 기가 쭉쭉 빨렸는데, 누구는 상쾌하게 웃기나 하는 게 거슬렸다.

“창문에 손대지 마, 자국 남아.”

“네에.”

“…….”

“와, 건물 신기하게 생겼다!”

창문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한 게 불과 5초 전인데, 나루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창문에 꼭 붙어 손자국을 냈다. 대답만 잘했지, 들어먹을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애들도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는데, 저건 진짜 개도 아니고.

체념한 채 고개를 돌린 규연이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어서 카페에 들러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고, 월급을 입금해 주고, 마무리로 세차장에 들르고픈 마음이었다.

조수석 창문은 5분도 지나지 않아 엉망이 되었다. 손자국은 물론이요, 얼굴까지 들이댄 건지 동그란 볼 자국과 입술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겉이 번지르르한 스포츠카에 저런 하찮은 자국이 남으니 우스워 보였다.

제 가게 앞에 도착한 규연은 차를 세워 놓고, 나루를 질질 끌어왔다.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나루는 손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앞 좀 보고 걸어라.”

“저건 뭐예요?”

“확 버리고 갈까 보다.”

“저 하, 한눈 안 팔았어요.”

버리고 간다는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루가 멀쩡히 앞을 보고 걸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나루가 서 있는 이곳은 처음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 보았던 장소였다. 고소한 빵 냄새가 폴폴 풍기던 곳.

언젠간 꼭 이곳에 있는 빵을 전부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꿈 같은 날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나루는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냄새부터 맡았다.

킁. 킁킁. 으음, 역시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난다.

규연은 제 앞에서 생쇼를 하는 나루를 한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졸부라는 새끼가 디저트 카페 앞에서 냄새나 맡고 있다니. 확실히 정상은 아닐 거다. 꼴사나운 모습에 참지 못한 규연이 나루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나까지 창피하게 뭐 하는 짓이야, 들어와.”

“어, 어어, 들어가도 돼요? 혼날 거예요.”

“혼나긴 누가 혼나, 내 가게인데.”

“……!”

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규연은 나루의 뒷덜미를 잡고 안까지 들어왔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진열해놓은 디저트를 망가뜨리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잡고 들어온 거였다.

갓 나온 레몬 마들렌을 진열대에 올려놓던 서연이 고개를 꾸벅 숙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규연이 제 가게에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처음이었다.

“사장님, 옆에는 누구…….”

“알 거 없고, 하던 거 마저 해.”

저 싸가지 없는 사장 새끼.

속마음으로 규연을 욕하던 서연이 버둥거리는 나루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하얗고 뽀얀 피부에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 옆에 있는 규연과 달리 귀엽고 여리여리한 게 딱 호감 상이었다.

“세상에, 나 태어나서 저렇게 생긴 남자는 또 처음 보네. 저런 사람이 왜 사장님이랑 놀지?”

마들렌을 다 채워 넣은 서연이 다른 디저트를 가지러 가는 척하며 나루를 힐끔거렸다. 아무리 봐도 온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규연과는 상극인 성격 같은데, 어째서 저 둘이 붙어있는 건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나루는 넓은 디저트 카페 안을 탐색하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매장 가운데에는 진열대가 놓여 있고, 왼편과 2층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들이 즐비해 있었다. 고급스러운 클래식 음악과 가벼운 티 타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다 규연이 가게라니. 신기해. 규연이 진짜 정말 많이 부자구나.

동경의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치를 봤다. 사랑스러운 디저트들이 눈앞에 있는데 못 먹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나루의 마음도 모르고, 규연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보는 데 열중했다.

“사장님, 아메리카노 드세요.”

“왜 안 하던 짓이야.”

“항상 드렸거든요? 저, 저기, 이거요. 마카롱인데 혹시 좋아하세요?”

“누구 마음대로 마카롱을 줘.”

기회를 틈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마카롱을 들고 온 서연이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평소에는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커피를 주는 일이 없었는데, 뭔가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연의 관심은 나루에게 쏠렸다. 일부러 맛별로 골라서 가지고 온 마카롱을 내밀자, 나루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규연이 누구 마음대로 주냐며 마카롱을 다시 밀어냈으나, 서연은 단호한 손짓으로 규연을 막았다.

“이거, 제가 결제한 거예요.”

“저, 이거 먹어도 돼요……?”

“네, 드셔도 돼요. 참고로 이거 진짜 맛있어요.”

조심스레 포장지를 뜯은 나루가 연분홍색 마카롱을 가만히 쳐다봤다. 색만 봐도 달콤할 것 같은데, 입에 넣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침을 꼴깍, 삼키고 한 입 베어 무니 눈앞에 천국이 펼쳐졌다.

폭신하게 들어가는 꼬끄와 딸기 향이 느껴지는 필링이 최고였다. 중간에는 수제 딸기잼도 들어가 있어서 상큼한 맛까지 더해졌다. 조금씩 베어 물어보던 나루는 손에 든 마카롱을 한입에 넣어 버렸다.

“맛있어요!”

“어머, 어떡해. 파운드 케이크도 정말 맛있는데, 이것도 좀…….”

“얘가 길 잃은 강아지냐. 왜 자꾸 뭘 먹이지 못해 안달이야. 가서 일해, 일.”

좋은 분위기를 규연이 다 깨놓았다. 파운드 케이크까지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된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나마 마카롱 하나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남은 마카롱은 연한 하늘빛을 띠고 있었다. 나루는 포장을 벗겨 최대한 아껴 먹으려고 노력했다. 찔끔찔끔 먹을수록 꼬끄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입가도 옷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규연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척을 하던 서연은 친절히 물티슈를 가져다줬다. 그 짧은 사이에 마주친 나루의 얼굴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으악! 뭐지. 말랑콩떡이 같아! 사장 놈이랑 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야. 도망치세요!

서연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켰다. 당장이라도 저 극악무도한 사장에게서 나루를 훔쳐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루는 서연에게서 받은 물티슈를 자연스레 규연에게 내밀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뭐, 어쩌라고.”

“입…….”

“입 뭐.”

“입에 묻었어요.”

규연은 순간 제 입가를 더듬거렸다. 대뜸 물티슈를 내밀더니 입에 묻었다니, 다른 사람이었어도 본인에게 한 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루가 말한 건 나루 본인의 입이었다. 규연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지금 제 입을 닦아 달라 이건가. 어이가 없어서, 참 나.

당당히 얼굴을 들이민 나루가 눈을 감았다. 어서 닦으라는 듯한 태도였다. 규연은 제 앞으로 넘어온 물티슈를 도로 던져 버렸다. 나루의 허벅지 위로 물티슈가 툭, 하고 떨어지자 감았던 눈이 뜨였다.

“누구 보고 닦아달래. 네 알아서 닦아.”

쌀쌀맞은 반응에 다시 시무룩해진 나루가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스스로 닦으라고 하니 별수 있나.

물티슈를 입가에 가져다 댄 나루가 일부러 다른 곳을 닦아냈다. 고의성이 다분한 손짓에 헛웃음을 친 규연이 일부러 관심을 주지 않았다.

관심을 줘! 나 옆에 있는데 왜 컴퓨터만 쳐다봐!

눈빛으로 제 속마음을 드러내 봐도 규연은 얼음장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관심받기를 포기한 나루는 옷에 떨어진 부스러기부터 치우기 위해 물티슈를 슥슥 문질렀다.

“너 미쳤냐……?”

“왜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진 행동에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던지던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색소 있는 부스러기는 조심스레 털어내야 하는데, 나루는 옷에 색소가 다 번지도록 물티슈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규연이 입지 않는 옷이라지만, 저건 완전 옷을 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매번 물어보는 건데.”

“네.”

“너 일부러 이러냐? 아니, 이건 무조건 일부러 그런 거야. 왜 그러냐, 어?”

“일부러 아닌데. 규연이가 안 닦아줘서…….”

이걸 또 규연의 탓으로 돌린다. 이번에도 먼저 항복을 외친 규연이 물티슈를 들고 입가부터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마카롱을 어떻게 먹어야 이렇게 더럽게 먹을 수 있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꺄악!”

그때였다. 테이블 쪽을 힐끔거리던 서연이 다정한 규연의 태도에 비명을 내질렀다. 손님들이 있는 것도 까먹고, 단순히 규연의 행동에 놀라 소리를 질러 버린 것이다.

오늘따라 일이 왜 이렇게 꼬이냐, X발.

죽은 동태 같은 눈으로 서연과 나루를 번갈아 쳐다보던 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느낌이 영 싸하더니, 하루가 제대로 꼬여 버렸다.

서연은 둘이 무슨 사이인 거냐며 질문 폭탄을 던졌다. 나루는 쓸데없는 질문에 출처 모를 개소리를 지껄였고, 당연하게도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역시, 나루를 데리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너, 당장 집으로 가.”

“시, 싫,”

“당장. 집으로. 가라고.”

“…길 모르는데.”

경고하듯 뚝뚝 끊어 말하던 규연이 종이를 찢어 집 가는 방법을 상세히 적어 줬다. 이 정도면 유치원생도 알아보고 갈 수준이었다.

얼떨결에 쫓겨나게 된 나루는 손에 종이를 꼭 쥐고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걷고, 뒤돌아서 규연의 얼굴을 불쌍하게 쳐다보고. 또 한 걸음 걷고, 뒤돌아서 규연을 쳐다보고.

“어설픈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걸어라.”

“치…….”

가게 문을 닫고 나간 나루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창으로 규연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들여보내 달라는 표정이었다. 규연은 매정하게 손을 휘저었다.

에이, 아깝다. 들어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미련 없이 뒤돌아선 나루가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힌 버스 정류장은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은 규연이 준 카드를 괜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툭!

“아야……!”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

인도의 벽돌 수를 세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힘없이 고꾸라지려는 나루를 가뿐히 잡아 준 남자가 능글맞은 톤으로 말을 걸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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