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같이 눈을 뜬 나루가 방문을 열고 작은 틈새로 얼굴을 내밀었다. 인테리어를 위해 놓아둔 전자시계가 숫자 5를 띄우고 있었다. 나루는 발꿈치를 들고 조용히 걸어 나왔다. 발소리 때문에 규연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였다.
꼬르륵.
나루의 배꼽시계는 정확했다. 저녁을 늦게 먹으면 여섯 시에 배가 고팠고, 일찍 먹으면 다섯 시에 배가 고팠다. 어제는 저녁을 일찍 먹어서 일어나자마자 허기가 졌다.
좀도둑 놈처럼 살그머니 나와 부엌으로 들어온 나루가 선반을 올려다봤다. 위에는 각종 조미료와 시리얼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루의 시선이 시리얼 상자에 닿았다. 오곡과 함께 뭉쳐있는 건과일이 꿀과 메이플 시럽에 코팅되어 있고, 그 위로 우유가 쏟아져 내리는 그림이 포장지에 박혀 있었다.
사료!
시리얼 상자의 생김새도, 자잘하게 든 내용물도 사료를 떠올리게 했다. 나루는 까치발을 들어가며 시리얼 상자를 꺼냈다. 이곳에 온 뒤로 사료는 먹은 적이 없어서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게다가 규연의 집에 있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급 사료 같았다.
상자를 헤집듯 뜯어내니 은색 포장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루는 끄트머리를 잡아 뜯어 입구를 벌리고 낮은 접시를 꺼내 시리얼을 한가득 쏟아부었다.
우수수 쏟아져나온 알갱이들이 접시를 채우자, 나루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달콤하면서도 담백하고 또 고소한 시리얼 냄새가 위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사람이니까, 사람답게 먹어야 해.”
우유도 붓지 않은 시리얼을 그대로 식탁 위에 올려둔 나루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우아하게 시리얼을 먹으면 딱 어울릴 자세였다.
파바밧!
그러나 현실은 엉망이었다. 나루는 접시에 머리를 처박고 입으로만 시리얼을 씹어 삼켰다. 꼭 강아지처럼 말이다. 역시, 사료는 숟가락을 쓰지 않고 먹어야 맛이 있었다.
찹찹, 소리를 내며 시리얼을 흡입하던 나루가 비어가는 접시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이 정도론 성에 차지 않았다.
한 접시 더 먹어야지. 배고파, 배고파.
싱크대로 달려가 시리얼을 더 부어 온 나루가 다시 접시에 얼굴을 처박았다. 상큼한 향이 나는 크랜베리도 너무 맛있고, 중간중간 느껴지는 블루베리의 식감도 좋았다. 나루는 태어나서 이렇게 좋은 사료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원래 새벽에 일어나면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 X발……. 아침부터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 대체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를 찹찹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규연이 아침부터 욕을 지껄였다. 아직 깰 시간도 아니고 새벽인데, 나루가 벌써 일어나 사고를 치고 있는 것 같아서 짜증이 확 올라왔다.
베개로 귀를 막고 잠을 청하려던 규연은 결국 신경질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참을 수 있어도, 저 찹찹거리는 소리는 참기 힘들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한 규연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루는 거실 소파에서 지냈는데, 있어야 할 사람은 없고 담요만 떨어져 있는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건 잠도 없나. 새벽 댓바람부터 사람 미치게 하네.”
실내화를 끌며 부엌으로 간 규연은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걸 떠나서 기괴했다.
식탁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물도 우유도 없이 머리를 처박은 채 시리얼을 먹고 있는 나루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니 뭐, 지가 원시인이야? 개야? X발. 가지가지 해요.
뜯어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규연이 화부터 눌렀다.
참자. 참자. 상대는 송나루야. 쟤 진짜 어디 모자란 게 분명하다고. 유규연, 네가 한 번 참아.
마음을 다스리고 식탁 앞까지 다가간 규연이 시리얼이 담긴 접시를 뺏어 들었다.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시리얼에 정신 팔려있던 나루는 식탁에 머리를 박고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아야…….”
“너 새벽부터 뭐 하냐? 어? 네가 개도 아닌데 왜 자꾸 밥을 이렇게 먹냐고.”
“…….”
한심한 반, 분노 반. 속이 터져 나가는 기분을 느낀 규연이 나긋하게 호통쳤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심정이 말투에 그대로 섞여 나오고 있었다.
나루는 할 말이 없었다. 진짜 개가 맞았고, 개는 사료를 원래 이렇게 먹는다. 물론 사람의 모습일 때는 자제하는 게 맞지만, 사료는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맛없었다.
멀뚱한 두 눈동자가 규연에게 닿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눈빛이었다. 그 눈이 너무 뻔뻔해서, 규연은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됐다, X발. 됐어. 너 거기 가만히 앉아 있어.”
“내 밥…….”
“그래, 밥 만들어 줄 테니까 앉아 있으라고. 하, 이건 또 뭐야. 시리얼을 얼마나 부어 먹은 거야.”
싱크대 위에 놓인 포장지를 허무맹랑하게 바라보던 규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조금씩만 우유에 타 먹어도 적당한데, 얼마나 배부르게 먹었으면 시리얼 포장지 반 정도가 비어 있었다.
제대로 된 밥을 만들어 주겠다던 그가 어이없는 눈으로 나루를 응시했다. 이만큼 먹었으면 더 들어갈 공간이 없을 텐데, 밥 먹을 생각이 드는 건가. 배부르다고 거절도 안 하고. 겉은 비실비실하면서 속은 돼지였다.
슬며시 규연의 시선을 피한 나루가 먼 산을 바라봤다. 꼭 혼낼 타이밍에 먼 산을 바라보는 게 아주 얄미웠다.
규연은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간단한 브런치를 준비했다. 전날 카페에서 가지고 온 모닝빵은 오븐에 한 번 더 데우고, 스크램블 에그와 새우를 넣은 샐러드를 만들어 접시 위에 플레이팅했다. 음료는 신선한 토마토를 갈아 만든 유기농 주스였다.
두 개의 컵에 주스를 담던 규연은 문득 제 신세를 깨닫고 욕을 곱씹었다.
“내가 왜 잡혀 온 애한테까지 밥을 일일이 만들어 주고 있는 건지. 세상 참…….”
식탁 위로 접시 두 개와 컵 두 개가 올라왔다. 나루는 토마토 주스부터 들이켰다. 시리얼을 우유도 없이 먹어서 목이 막히긴 한 모양이었다.
꼴깍, 꼴깍.
소리를 내가며 토마토 주스를 원샷한 나루가 입가를 닦아내며 컵을 내려놓았다. 규연이 만들어 주는 유기농 주스는 언제 마셔도 상큼하고 맛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규연은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반면, 나루는 규연보다 나이프질이 한참 엉성했다. 톱질하듯 나이프를 움직이며 빵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은 나루가 포크로 부스러기들을 찍어 먹었다. 그릇 위는 산짐승이 쓸고 지나간 듯 엉망이 된 채였지만, 음식을 한가득 입에 넣어 양 볼이 빵빵해진 나루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규연이 나루의 몫까지 음식을 만들어 주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식기 도구는 잘 사용하지 못해도, 나루는 규연이 만든 음식을 끝까지 맛있게 먹어 주었다. 접시를 핥을 기세로 먹은 뒤에는 행복하게 웃기까지 했다.
규연은 평소에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베이킹 실력도 뛰어났고, 음식 솜씨도 좋아서 자주 만들곤 했는데 정작 집에서는 먹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일류 셰프의 실력에 입맛이 길든 형들은 규연을 칭찬하기만 할 뿐, 잘 먹어 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이 바빠서 함께 식사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규연이 다른 사람에게 살갑게 요리를 대접할 스타일은 또 아니었다.
“맛있냐.”
“네, 맛있어요!”
누군가가 자기가 만든 음식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 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래, 나루가 맛있게 먹어 주는 건 좋다고 치자. 그런데…….
“넌 하는 행동이 왜 이렇게 엉성해? 누가 나이프를 그렇게 쓰냐고. 내가 하는 거 봐.”
나루와 함께 식사할 때면 정신이 사나워 미칠 것 같았다. 숟가락질도 엉성해, 포크질도 엉성해, 나이프는 아예 못 써, 하는 행동만 보면 어렸을 때 식기 도구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했다.
규연이 나이프 쓰는 법을 보여주자, 나루가 천천히 따라 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석대로 잡고 쓰는 게 힘든 모양이었다.
“아니, 톱질하는 것처럼 그러지 말고 천천히 쓸어 보라고.”
“톱이 뭐예요?”
“……X발.”
뭘 좀 알려주려고 해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답답했다. 그냥 하는 대로 따라만 하면 되는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른다고 질문을 던져대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규연은 원래 입이 더러웠지만, 나루를 만난 후로 입이 더 거칠어졌다. 웃긴 사실은 모두 의도치 않게, 무의식중에 욕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띨빵할래.”
“…….”
아, 이번에 한 말은 좀 상처받았으려나. 보통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빠하지.
“…띨빵이 뭐예요?”
“입 다물어 그냥.”
이건 뭐, 욕을 해도 욕이 뭔지 모르니 규연의 속만 터졌다. 설마 고의로 저러는 건가.
대화 자체를 나누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나루를 외면한 그가 제 식사에 집중했다.
오늘도 대미지를 입지 않은 나루는 규연을 따라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다. 식탁 아래로는 신난 발이 엇박자를 타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워낸 나루는 싱크대로 가서 간단히 설거지를 마치고 나왔다. 규연이 식기세척기를 쓰는 걸 보고 버튼을 마음대로 눌렀다가 혼난 적이 있어서, 자기 건 직접 설거지하는 거였다.
다시 규연의 앞자리로 돌아온 뒤에는 밥 먹는 걸 뚫어지게 쳐다봤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가 보고 싶으니까 구경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애써 그 눈빛을 무시한 채, 식사를 마친 규연은 나루를 바라보고 미간을 좁혔다. 입 주변에 빵 부스러기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티슈를 뽑아 들고 온 규연이 나루에게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나루가 냉큼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제 봐도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다.
“먹었으면 입 좀 닦아라, 더럽게.”
“으붑, 읍!”
“다 닦았으니까 비켜.”
“더 안 닦아요?”
“다 닦았다고. 나 바빠, 비켜.”
냉정한 손길로 나루를 밀쳐낸 규연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루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느라 식사 시간을 길게 잡아먹었더니 벌써 나갈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식기세척기 작동 버튼을 눌러놓고, 욕실로 향한 규연이 말끔히 씻고 나왔다. 그러는 동안 나루는 규연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욕실에서 나온 규연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옷을 입고, 드라이까지 완벽히 마쳤다. 다음 일정은 카페에 나가서 일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직원들 월급을 입금해 주는 것이었다.
규연이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자 나루가 잽싸게 따라붙었다. 클럽에서 돌아온 뒤로 규연에게 나쁜 친구가 붙지 않았을까 걱정돼서 일일이 따라다니는 거였다. 물론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하다는 이유가 조금 더 크긴 했다.
“나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제발 좀 얌전히. 알아들었어?”
“같이 가면 안 돼요……?”
“어, 안 돼. 네가 왜 따라 나와. 집에 가만히 있어라.”
“네에.”
풀 죽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진 나루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규연을 응시했다. 맨발로 신발장까지 나와 있는 게 꽤 간절해 보였다. 규연은 차 키를 챙겨 들고 뒤돌아섰다. 시무룩한 나루를 굳이 달래 줄 필요는 없었다.
덜컹! 삐, 삐삐, 삐-.
문을 열고 나가려던 때에 규연의 발목이 제대로 붙잡혔다. 덕분에 문이 잘못 열려서 경고음이 울렸다.
규연은 묵직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발장에 맨발로 들어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나루는 맨발로 들어오다 못해 엉덩이까지 붙이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두 팔은 규연의 다리를 꼭 껴안은 채였다.
“야, 안 놔?”
“안 놔.”
저 X발 선택적 반말.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꺾어 규연을 올려다본 나루가 선택적 반말 스킬을 사용하며 고집을 부렸다. 동글동글한 눈이 쓸데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