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개새끼가 미쳤나!”
팔을 물린 남자가 나루의 머리를 밀쳐냈다. 끝까지 송곳니를 세우던 나루는 뒤통수가 얼얼한 걸 느끼고 떨어졌다. 룸 안의 분위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나루는 소매로 입가를 닦아내고 남자를 노려봤다. 마냥 순하기만 하던 눈매도 매섭게 치켜뜨니 나름 무서워 보였다. 나름.
“규연이 괴롭히지 마.”
단호한 말투에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쟤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몰라, 유규연 괴롭히지 말래. 대체 뭐라는 거야…….”
가장 끄트머리에 있던 여자 둘이 속닥거렸다. 유규연을 괴롭히지 말라니. 여기서 누가 유규연을 괴롭혔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들어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 건 나루였다.
그런데 괴롭힘당한 사람이 괴롭힘을 주도한 사람을 감싼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장난치는 건가 싶어 얼굴을 제대로 살펴봤지만, 부릅뜬 눈이 제법 진지했다.
“뭐? 내가 언제 규연이를 괴롭혔다고 그딴 말을 지껄여, 이 미친놈아!”
“나 없는 사이에 괴롭혔으면서.”
“이거 완전 제대로 된 또라이네? 야, 진짜 돌았냐?”
남자는 억울했다. 나루가 없는 사이에 괴롭히기는 무슨, 그는 오히려 규연에게 욕을 들어먹었다.
나루가 나간 후, 남자는 특유의 허세를 부리며 센 척을 했다. 그게 남자가 자신의 무례함을 자랑하는 방식이었다. 한참 저런 졸부 새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뒷담화를 늘어놓는데, 술을 마시던 규연이 조용히 좀 처마시라며 쌍욕을 퍼부었다.
분명 건혁이 졸부 콧대를 눌러 놓으라고 했는데, 참 이상했다. 보통 건혁이 전달하는 말은 규연이 전달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둘이 친구 사이기도 했고, 규연이 제 이미지를 위해 비도덕적인 일을 모두 건혁에게 맡겼으니 말이다.
쌍욕을 들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제는 규연을 괴롭혔다는 말까지 나오다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뭘 알아, 확 씨. 한 주먹도 안 되는 새끼가!”
“손 치워라.”
“…아니, 규연아. 이 새끼가!”
“손 치우라고.”
나루를 때릴 기세로 손을 치켜든 남자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대로 내려치기만 하면 되는데, 규연에게 단단히 붙잡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맞을까 봐 무서워서 어깨를 웅크리고 있던 나루가 몰래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규연이 자신을 괴롭히려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감싸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가 오해를 한 거 같다.
사실 규연은 나루를 괴롭히려고 한 게 맞는데. 이렇게 또 착각이 쌓여 버렸다.
“넌 좀 따라 나와라.”
나루의 손목을 잡아챈 규연이 여린 몸을 강제로 끌고 나왔다. 나루는 끌려 나오면서 뒤늦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나루가 팔을 깨문 사람은 규연의 친구였다. 주인은 물론이고 주인의 친구들은 절대 물면 안 되는데, 큰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규연이 자신을 지켜주긴 했지만, 슬쩍 엿본 표정은 잔뜩 화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화가 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규연이 친구를 물어서 단단히 화가 난 거야……. 당연히 헛다리를 짚은 거였다.
인파 속을 지나쳐 클럽 밖으로 나온 규연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착잡함을 느낄 때마다 흡연하는 습관이 들어서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루는 두려움에 규연의 눈치를 보며 몸을 떨었다. 이번 건 혼나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거였으니 말이다.
정작, 규연은 나루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저 콧대 한 번 누르겠다고 이런 짓까지 벌였는데, 자기는 당하고 있었으면서 내 걱정이나 하고. 둔한 건지, 멍청한 건지, 지나치게 착한 건지.
사과하고 싶은데, 사과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 쉽게 트이지 않았다. 규연은 담배를 태우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죄, 죄송해요. 소중한 친구들을 소개해 줬는데 내가 막 물어버려서. 그런데 저는 진짜 규연이가 괴롭힘당한 줄 알고…….”
담배꽁초를 멀리 던져 버린 규연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나루가 먼저 선수를 쳤다. 울지는 않았으나 중간중간 떨리는 목소리가 약해진 규연의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나한테는 잘만 골 때리게 굴었으면서, 왜 이런 상황에서는 호구 같은 건지.
“지금이라도 가서 사과하고 올게요.”
“어딜 가.”
그 치욕을 당했으면서 이제는 다시 돌아가 사과까지 한단다. 규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 나루를 붙잡아 세웠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루가 아니라 규연이었다.
어깨를 돌려세우자 왜 붙잡느냐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규연의 손을 떼어낸 나루가 다시 클럽 입구로 들어섰다. 여태 보면서 느낀 거지만, 나루는 은근한 고집이 있었다.
“사과해야 해요. 규연이랑 그 사람이랑 사이 안 좋아지니까…….”
“됐어, 가지 마.”
“사과할래요.”
“가지 말라니까?”
“으잇, 이거 놔 주세요!”
한 발짝 다가간 규연이 이번에는 팔을 붙잡았다. 이 정도 했으면 가만히 있겠지, 싶었는데 웬걸. 나루가 기를 쓰며 팔을 뿌리쳐냈다.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며 클럽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걸 겨우 잡아 놨더니, 놓아달라고 발버둥까지 친다.
규연은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과는 해야겠고, 나루는 가만히 있어 주질 않고,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었다.
“좀 가만히 있어 봐.”
“놔 주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처맞을 뻔했는데!”
참다못한 규연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제야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나루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좋아하고 싶은데, 좋아하면 안 될 것 같고. 이걸 어쩌지. 규연이가 나를 정말 걱정했나 봐.
규연은 심각한데, 나루 혼자 분위기가 풀어졌다.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강제로 끌어내려 무표정을 유지하던 나루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웃음이 새어 나올 듯해서였다.
“너 여기 데려온 거 나야, 잊었냐?”
“아니요.”
“안 잊었는데 왜 화를 안 내. 내가 너 일부러……!”
“일부러……?”
괴롭히려고 한 건데.
규연이 애써 뒷말을 삼켜냈다. 대놓고 괴롭히려고 했다는 걸 알려주면 나루가 상처받을 것 같아 말할 수가 없었다. 정작 나루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었지만.
일부러? 일부러 뭐 어쨌다는 거지?
괴롭힘당하는 건 익숙했고, 잠깐이나마 규연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에게서 지켜주기도 했고, 누가 봐도 걱정하는 것처럼 화를 내주었으니까.
“아니다, 내가 미안하다.”
“규연이가 왜……?”
“왜라니, 너, 아니 됐어. 그냥 미안해.”
사과도 해 보니 별거 아니었다. 담백하게 미안하다고 말한 규연이 민망스러움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굽히고 들어간 적이 없는데, 막상 이런 경험을 해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기분이 이상한 건 나루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사과만 해 봤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사과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규연은 선뜻 사과를 건넸다. 나루의 입장에서는 굳이 규연이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돈도 많고, 좋은 집도 있는데 이렇게 겸손한 사람은 처음이야. 규연이는 정말 착해.
나루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뭐가 고마워.”
“사, 사과한 거요.”
“너 호구냐,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
아, 사과받을 땐 고맙다는 말을 안 해도 되는구나. 또 하나를 배운 나루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규연은 핸드폰을 꺼내 대리를 불렀다. 클럽에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기가 쭉쭉 빨려서 얼른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와 달리 나루는 번화가가 신기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대리 불렀으니까 이쪽으로,”
“와, 맛있겠다.”
“이쪽으로 오라니까 거기 서서 뭐 해.”
다른 데 한눈을 판 나루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규연이 차에 기대어 섰다. 하여튼 조금만 방심해도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루는 거리 구석에 있는 포장마차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침 술에 취한 아저씨 하나가 손에 하얀 봉투를 껴안고 뒤돌아섰다.
저게 뭐지?
몸은 규연에게 붙잡혀 있어서 움직이지 못했고, 그 대신 눈을 열심히 굴려 봉투 안을 엿본 나루가 입을 떡 벌렸다.
흰 봉투에 든 것은 붕어 모양으로 생긴 빵이었다. 노르스름하게 익어 맛있는 빛깔을 자랑하고 있는 붕어빵. 팥을 많이 넣어 주는 건지 적당히 익은 반죽 안으로 거무죽죽한 색이 비쳐 보였다.
본능적으로 발을 딛은 나루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규연이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뒷덜미를 붙잡은 탓이었다.
“저거 먹고 싶은데…….”
“아까부터 뭘 먹고 싶다는 거야.”
“저거요.”
“구질구질하다, 진짜. 저걸 먹고 싶다고? 밖에서 파는 저 더러운걸?”
규연은 포장마차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밖에 내놓고 파는 음식에 거리에 떠도는 먼지들이 앉았을 텐데, 그걸 그대로 입에 넣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부잣집 도련님 아니랄까 봐, 음식 하나하나에 참 까탈스러웠다.
나루는 더럽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갈망 어린 시선이 붕어빵에서 떨어지지 않자, 규연이 어쩔 수 없이 지갑을 건넸다.
“네가 사 와.”
“네!”
지갑을 들고 포장마차 앞으로 뛰어간 나루가 주인에게 무어라 떠들며 주문했다. 규연은 나루가 붕어빵을 사러 간 사이에 담배 하나를 더 피웠다. 눈동자는 여전히 나루의 뒤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계산까지 마친 나루가 흰색 봉투를 품 안에 소중히 껴안고 돌아왔다. 그런 게 뭐가 좋아서 먹냐고 잔소리를 하려는데, 타이밍 좋게 대리 기사가 나타났다.
“대리 부르신 분 맞지요?”
“……네.”
나루와 함께 뒷좌석에 탄 규연이 붕어빵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제 차에 오묘한 기름 냄새가 배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나루는 그 눈빛을 오해하고, 붕어빵 하나를 꺼내 입 앞에 내밀었다.
“드세요.”
“안 먹어.”
“이거 맛있는데.”
“안 먹는다니, 웁!”
“맛있죠?”
안 먹는다는 말에 먹어 보라며 강요하던 나루가 기어코 규연의 입에 붕어빵을 쑤셔 넣었다. 붕어 몸 절반이 입에 틀어박힐 정도로 쑤셔 넣고 나서는 맛있냐고 해맑게 물어온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야, 뭐야.
기막힌 표정으로 나루를 내려다보던 규연이 입 안에 들어온 붕어빵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위생이 철저하지도 않고, 맛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맛이 조금 괜찮게 느껴졌다.
“맞다, 너.”
붕어빵을 다 씹어 삼키고, 아까의 일을 떠올려 보던 규연이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걸었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사람을 물면 어떡하자는 건지. 그 새끼 때리면 깽값도 물고, 불이익도 갈 텐데, 다음부터는 상황 봐 가면서 물어.”
“왜요?”
“너 돈 많냐? 나만큼 많아?”
규연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덤벼든 나루에게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얘기해줬다. 상황을 봐 가면서 무는 것도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차마 가만히 당하고 있으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나루는 순순히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자기가 왜 그래야 하냐고. 마냥 순진해 보여도 이럴 때를 보면 또 성깔이 있어 보였다. 규연은 아직도 나루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차분해 보여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었다.
“아니요. 돈 없어요. 그런데 이런 나한테 밥도 주고, 침대도 주는 규연이는 최고.”
“……뭐?”
지금도 그랬다. 깽값 물어낼 돈이 많냐고 물어본 건데, 뜬금없이 규연이 최고를 외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규연은 이제 나루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아가며 머리를 쓸어 넘긴 규연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 이제 나한테 사과할 마음은 생겼냐.”
“규연이 친구 문 거요? 잘못했어요…….”
“아니, 그거 말고.”
“그거 말고는? 으음, 잘못한 거 없는데요.”
그래, 규연은 정말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어도 정신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사과할 생각이 안 든다니. 내 소문을 그렇게 퍼뜨려 놓고서는, X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 규연은 할 말을 잃었다. 나루가 세상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가 나를 놀리나? 아니면, 뭐, 나 가지고 노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규연은 피곤함을 더하기 싫어 대화를 단절해 버리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자는 게 나을 듯했다.
고요해진 차 안, 나루는 잠든 규연을 확인하고 몰래 자장가를 불러 줬다. 심히 골 때리는 짓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