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30)


“어, 규연아! 여기!”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음악이 클럽 내부를 웅장하게 채웠다. 규연의 뒤를 따라 한 걸음씩 내딛던 나루는 음악 소리가 쿵쿵 울릴 때마다 어깨를 웅크려야만 했다.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규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옷 끄트머리를 꼭 붙잡고 걷다 보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음악 소리에 사람들 떠드는 소리까지 더해져서 힘껏 소리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보기 좋게 묻혔다.

그러나 나루는 단번에 소리의 근원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다른 말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규연의 이름이 들려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키가 훤칠하고, 인상이 밝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규연은 남자가 부르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루가 잡은 옷 끝을 당겨 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애들 다 모였어. 걔는?”

“내 뒤에.”

규연에게 어깨동무를 하던 건혁이 등 뒤에 숨은 나루를 발견했다. 애매하게 생겨서 졸부 티나 낼 줄 알았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보여서 놀란 모양이었다. 의외라는 듯 크게 떠진 눈동자 속에 악의적인 흥미가 차올랐다.

“안녕?”

“…….”

규연의 말에는 잘만 대답하던 나루가 입을 열지 않았다. 눈치는 없어도 싸한 분위기 하나는 귀신같이 알아챘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건혁을 천천히 뜯어 보던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아예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친절한 척 인사를 건네지만, 눈에 악의가 있는 사람. 규연이는 왜 저런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지?

음악 소리가 여전히 크게 들렸으나 순간 나루의 주변만 조용해지는 착각이 일었다. 나루에게 제대로 무시당한 건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규연을 룸 안으로 이끌었다. 나루는 의심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규연아, 왔어?”

“뒤에 저건 누구야?”

“야, 뭘 물어. 딱 봐도 답 나오는데.”

룸 안에는 열댓 명이 넘는 인원이 앉아 있었다. 남자, 여자, 가릴 거 없이 섞여 앉아 술잔을 맞부딪치던 이들이 막 들어온 규연을 반겨 줬다. 그들과 딱히 친하지도 않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던 규연은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도착했지만 가장 가운데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앉은 그가 위스키 병을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어, 규연…….”

나루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재빨리 규연을 따라 들어가 옆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사람들 시선에 짓눌려 있느라 동떨어진 것이다.

이건 나루가 생각한 데이트가 아니었다. 나가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신기한 것도 구경할 줄 알았는데 낯선 사람들이 잔뜩 모인 클럽이라니. 처음으로 규연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머, 쟤 좀 귀엽게 생겼어. 얼굴 봐.”

“비실비실하게 생겼구만, 뭘.”

고양이처럼 생긴 여자가 나루를 향해 삿대질했다. 남자들은 모두 아니꼽게 쳐다봤지만, 여자들은 생각보다 귀엽다며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나루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제로 떠들어대는 것, 그중 몇몇은 사람을 완전히 깔보고 있었다. 나루는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주로 전 주인이 벌을 줄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지하실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짓밟기. 처음 당했을 땐, 도망쳐 나와서 하염없이 울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욕먹는 일은 언제 당해도 서글펐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 반복되다 보니 조금씩 무뎌졌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게 된 나루는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이 상태에서 반응하지 않고, 날아오는 욕을 견뎌 내기만 하면 끝이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힐끔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 본인인데 알게 모르게 후회됐다. 특히, 나루가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땐 착잡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이, 거기! 왔으면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분위기 좀 띄워. 눈치가 없나?”

“가만히 둬 봐, 지금 누가 제일 돈 많은지 계산하고 있나 본데.”

“제일 돈 없는 새끼가 그런 걸 따져서 뭐 해? 푸흡, 크큭.”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남자 세 명이 돌아가며 나루를 자극했다. 같잖은 텃세에 불쾌한 언행까지 재수 없었다. 저들은 최선을 다해 나루를 까 내렸다. 돈이 없다느니, 부모가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다느니, 선 넘는 발언들이 허공에 마구 흩어졌다.

정작 나루는 익숙하게 듣고 넘겼다. 이 안에서 열받은 사람은 오직 규연뿐이었다. 나루를 짓누르기 위해 데리고 왔다지만, 저런 말을 듣고도 얌전히 앉아만 있는 태도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

그때였다. 앞만 바라보던 나루가 살며시 눈동자를 굴려 규연을 쳐다봤다.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둘은 잠시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규연은 누가 제 마음을 바늘로 쿡쿡 찌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쓸데없이 아련한 눈망울이 두어 번 깜빡였다. 나루는 금세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규연은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충격을 받았다.

X발,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지.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찝찝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차분하게 내뱉어진 목소리가 오늘따라 가냘프게 들렸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일어선 나루는 길게 늘어선 다리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나갈 테면 지나가 보라는 듯 꼬아져 있는 다리들이 얄미웠다.

탁!

“윽……!”

어정쩡한 자세로 남자들을 지나쳐 오던 나루가 마지막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기 직전에 테이블을 짚지 않았더라면 무릎이 다 까졌을지도 모르겠다.

규연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시선은 어느새 나루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 소리를 철저히 무시한 나루가 문을 열고 나갔다. 눈에 보일 때도 불안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불안감이 더 커졌다.

“하, 내가 미쳤지.”

“생각보다 재미없다, 규연아.”

“……닥쳐.”

규연의 옆에 앉은 건혁이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재미없다고 했다. 울음을 터뜨린다던가, 화를 내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아서 흥미가 식은 것이다. 규연은 그런 건혁을 매섭게 쏘아봤다.

실은 규연도 건혁과 같은 생각이었다. 차라리 나루가 울거나, 화를 내길 바랐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덜 신경 쓰였을 텐데, 그 눈빛은 대체 뭐였을까.

나루를 붙잡기 위해 자리를 뜨려던 규연이 옆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건혁이 먼저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시 데려와 볼게.”

“네가 왜.”

“안 돼?”

둘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규연은 건혁을 내보내지 않으려 했고, 건혁은 그런 규연의 행동을 의심했다.

어, 안 돼.

규연은 안 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내비칠 수는 없었다.

그래, 걔가 내 애인도 아니고.

규연이 됐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루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원수에 가까웠다. 대답을 얻어낸 건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룸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눈이 까칠하게 변했다.

룸에서 나온 나루는 사람들 틈에 껴 가며 겨우 화장실까지 도착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냄새가 나서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말은 반 정도가 거짓이었다. 불편한 분위기가 싫어서 그저 핑계를 댄 거였고, 다른 길로 새는 게 양심에 찔려서 억지로라도 화장실에 온 거였다.

나루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천사라고 생각했던 규연이 전 주인과 똑같은 행동을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루 만에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걸까. 걱정이 똘똘 뭉칠수록 표정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

세면대에서 의미 없이 손을 씻은 후에는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룸까지 향했다. 오면서 길을 외워 두지 말 걸 그랬나. 차라리 길을 잃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장실 간다더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

“아직도 나 경계하네. 잠깐 얘기 좀 할까?”

나루의 눈앞에 반갑지 않은 상대가 나타났다. 매너 없이 손목을 낚아채 잡은 건혁이 나루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하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걸 보니, 이런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녔나 보다.

온순하던 나루의 눈매가 다시 매서워졌다. 물론 건혁의 눈에는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흥미를 자극했다면 모를까.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

“응? 이름 몰라?”

“나루.”

“하하, 강아지 이름 같다. 나루. 얼굴도 귀엽게 생겨서 잘 어울려.”

분명 칭찬인데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나루는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나 너 진짜 싫어! 떨어져!’라고 외치는 듯한 눈동자가 사나웠다.

나루는 건혁이 진짜 싫었다. 보면 볼수록 말하는 게 싸하고, 뒤가 심히 구려 보여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건혁은 강적이었다. 두 걸음 가까이 다가와서는 손끝으로 나루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소름 끼치는 느낌에 손을 쳐낸 나루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규연이한테 다 말할 거예요.”

이 능구렁이 양아치 같은 놈아.

뒷말은 속으로만 하고 굳이 내뱉지 않았다. 말했다가 얻어맞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건혁은 나루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규연한테 다 말한다니.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규연은 누가 고자질을 한다고 해서 들어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건혁이 웃는 사이, 나루가 쏙 빠져나와 룸으로 돌아갔다. 일부러 발을 쿵쿵, 구르며 갔는데 아무도 화난 걸 알아주지 않아서 기분이 상했다.

“어, 쟤 왔다.”

“모자라서 화장실을 제대로 못 찾았나? 무슨 화장실을 이십 분씩이나 걸려서 다녀와.”

아까부터 시비를 걸어오던 남자들이 여전히 나루를 비웃고 있었다. 그딴 건 모르겠고, 나루는 규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빨리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다.

어라…….

그런데 규연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썩어들어가 있었다. 기분 나쁜 일을 당한 건 나루인데, 표정만 보면 규연이 당한 것 같았다.

나루는 곧바로 제 앞의 남자들을 의심했다. 설마, 저 남자들이 내가 없는 사이에 규연이를 건드린 걸까. 규연이한테 뭐라고 해서,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여기 모여있는 이들 중, 감히 규연에게 쓴소리를 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루는 제대로 착각했다. 저들이 규연을 괴롭힌 것이라고.

“야, 불 좀 붙여 봐.”

“…저, 저요?”

“네, 너요. 여기에 불붙일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니.”

담배를 꺼내 문 남자가 나루에게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계속되는 무례한 행동에 규연의 표정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고 있었다.

나루는 순순히 라이터를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일반적인 라이터는 많이 봤는데, 남자가 건넨 건 구조가 조금 달라서 헷갈렸다.

나루가 어리둥절한 태도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답답함을 느낀 남자가 손을 대차게 내리쳤다. 짝, 소리와 함께 손을 맞은 나루가 놀라서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툭! / 챙그랑!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메탈 라이터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글라스가 남자 쪽으로 날아왔다. 그대로 맞았다면 기절했을 만한 속도였다. 다행히 날아온 글라스는 벽을 맞고 산산조각나 버렸다.

나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글라스가 날아든 쪽을 바라봤다. 시선 끝에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규연이 있었다. 맹한 얼굴로 규연을 마주하던 나루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부릅떴다.

이 사람인가? 이 사람이 내가 없는 사이에 규연이를 괴롭힌 건가? 맞겠지. 규연이가 저렇게 화를 내는데!

다시 고개를 돌린 나루가 남자를 쳐다봤다. 규연이를 괴롭힌 나쁜 사람. 인식이 이렇게 박히고 나니 치아가 근질거렸다.

나루는 자신이 당하는 일에는 무심했지만, 주인이 당하는 건 눈 뜨고 못 봤다. 아까부터 이 남자가 대놓고 얄밉게 굴기도 했고. 아무튼 가만히 당하고 있기 싫었다.

“아아아아아악!”

“송나루!”

앙! 나루가 기회를 보다가 남자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 단순히 깨물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일부러 더 아프라고 송곳니에 힘을 주고,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루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규연이 이름 석 자를 크게 외쳤다. 차분하다 못해 우아하게 남자의 팔을 문 나루는 규연을 향해 살랑살랑 웃어 보였다. 

규연아, 나 잘했지? 잘했지?

입은 살벌하게 살덩이를 깨물고 있으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쓸데없이 무구하고, 또 예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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