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여기 있었네?”
“내 매장이니까. 넌 그대로 돌아 나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건혁이었다. 클럽에서 봤을 때와는 정반대의 옷차림이었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것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단정하게 드라이 되어 있었다.
규연은 건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안 그래도 나루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골치 아프게 하는 놈이 더해져서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건혁은 힘들 때 도움이 되는 친구보다는, 힘들 때 짐 하나 더 얹어주는 친구였다.
규연의 매정한 반응에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민 건혁이 자연스레 합석했다. 앉는 와중에 서연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아 맞다, 내 목줄은?”
“목…! 하아, X발. 목줄 얘기하지 마.”
“설마, 너 내 목줄 누구랑 쓴 거 아니겠지.”
“제발 입 좀 닥쳐.”
아니나 다를까, 건혁은 규연의 신경을 툭툭 건드려댔다. 자신이 놓고 간 목줄을 돌려달라고 말한 것뿐인데, 규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 찔러 보는 거였다. 실눈을 뜨고 규연의 안색을 훑어보던 건혁이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웃었다. 둥글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능글맞았다.
“나 알겠다, 알겠어. 너 그 졸부랑 뭐 있는 거 아니야?”
“있긴 뭐가 있어.”
“아 규연아, 나한테만 알려줘. 너 나 눈치 빠른 거 알지. 어?”
건수를 제대로 잡은 건혁이 규연을 귀찮게 졸라댔다. 딱 봐도 재미있어 보이는데, 눈치를 보니 규연이 자신을 끼워주지 않을 거 같아서 일부러 더 보챘다.
컵에 든 얼음을 빨대로 마구 휘젓던 규연이 집에 혼자 있을 나루를 떠올렸다. 집에서 나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설마 그사이에 또 뭘 깨거나 망가뜨린 건 아니겠지. 천진난만한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갔다.
“그 졸부 잡았어? 잡긴 한 거야?”
“아까부터 질문이 쓸데없이 많다.”
“궁금해서 그래. 뭐, 너라면 이미 사과받아 냈겠지만.”
사과? X발. 사과는 무슨. 규연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사과를 받았다면, 지금 이렇게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애써 한숨을 삼킨 규연은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품위 없이 들이켰다. 냉정하게 건혁의 질문을 뚝뚝 끊어내던 그가 드디어 단답이 아닌 대답을 내놓았다.
“사과는 지랄, 그 새끼 개또라이야.”
“역시, 뭐 있었던 거 맞네. 왜, 어떻게 또라인데.”
“그것까지 설명해야 하냐? 됐고, 머리 아프니까 좀 꺼져.”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건혁의 발을 걷어찬 규연이 다시 손을 휘저었다. 진심으로 귀찮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슬슬 눈치를 보던 건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시선은 규연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 서연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든 컵을 건혁에게 내밀었다. 단 걸 좋아하는 건혁을 위해 특별히 바닐라 시럽까지 두 펌프 넣은 아메리카노였다. 물론 시럽 추가 비용은 서연의 지갑에서 빠져나갔다.
“어, 아메리카노…….”
“그건 우리 서연 씨 먹어요. 내가 주는 선물.”
“서, 선물이요?”
“마카롱도 먹을래요? 규연이가 못 먹게 할 텐데, 내가 하나 사 줄게요.”
건혁은 기껏 만들어 온 아메리카노를 서연에게 선물했다. 다른 사람이 저런 느끼한 멘트를 던졌다면 인상부터 찌푸렸겠지만, 오히려 서연은 두 뺨을 붉히고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했다.
여자를 대하는 데 능숙한 건혁은 플러팅을 거는 게 습관이었다. 그는 서연에게 마카롱 세트까지 선물한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나가기 전에 규연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잠시 돌아보던 건혁은 허리를 숙여 규연에게 귓속말을 시도했다. 곧바로 징그럽다며 내쳐졌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제 할 말을 꿋꿋하게 이어 나갔다.
“규연아, 오늘 밤에 걔 데리고 클럽으로 와.”
“무슨 개소리야, 또.”
“개또라이라며. 그런 애들은 지보다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수치를 당해 봐야 좀 수그린다니까.”
건혁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건넸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졸부이길래, 천하의 유규연이 개또라이라고 인정하는지 궁금해서였다. 누가 규연의 친구 아니랄까 봐. 인성이 영 좋지 못했다.
규연은 고민에 빠졌다. 누구 하나 짓밟는 일을 수도 없이 행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기분이 오묘했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고 하면 나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상해 봤는데, 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규연이 쌍욕을 해도 끄떡없었으니, 그 맑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멍청한 표정이나 지어 보일 것이다.
규연은 문득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옳다구나, 건혁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짓밟아 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고작 며칠 붙어 있었다고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미친 거지. 미친 거야.
며칠 동안 나루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번뜩 정신을 차린 규연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알겠으니까, 좀 꺼져.”
“그럼 애들 부른다? 저녁에 봐.”
그렇지, 이런 반응이 나와 줘야지. 기어코 규연의 긍정을 받아낸 건혁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건혁이 돌아가고, 그 자리에 남아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규연이 결심했다는 듯 일어섰다. 독기에 가득 찬 눈이 얼마나 사납던지, 갓 나온 마들렌을 포장지에 넣던 서연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언제 봐도 싸가지 없고, 소름 돋는 눈이었다.
규연은 새로 뽑은 스포츠카를 몰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혼자 남아있을 나루가 신경 쓰여서 가는 건 아니었다. 그냥, 클럽에 데리고 가기 전에 기강이나 잡아 놓으려고 일찍 들어가는 거였다. 아마도, 그랬다.
오늘따라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재빨랐다. 규연은 하나도 조급하지 않은 척, 여유로운 척을 하며 문을 열었다.
“뭐냐?”
그런데 눈앞에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솔직히, 규연은 자신이 없는 동안 나루가 사고를 쳐 놓을 거라고 예상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일찍, 오셨네요?”
맑은 미소가 규연을 반겼다. 나루는 현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최소 한 시간은 된 것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라던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허리가 안쓰러웠다. 누가 봐도 고된 시간을 보낸 사람 같아서, 규연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나루는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웃고, 입꼬리를 은은하게 올릴 뿐이었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그야, 규연이 기다렸는데…….”
“……미친 새끼.”
나루가 당당히 기다렸다는 걸 알렸다. 하긴, 나루에게는 외출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지하실에서 지낼 때는 문이 열릴 때까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렸으니 말이다.
심지어 나루는 규연을 제 주인으로 인식한 상태였다. 이름은 또 언제 알아냈는지, 잘도 규연이, 규연이, 했다. 규연을 대하는 건 조심스러우면서, 이름을 부를 때는 존대를 날려 먹는 게 어이가 없었다.
신발도 벗지 않고 서 있던 규연이 나루의 팔을 붙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소 격한 행동에 저항도 못 하고 일어서게 된 나루가 눈을 깜빡거렸다. 와중에 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설 수 없어 힘들었다.
“누가 기다리래? 미련스럽긴. 얼마나 멍청한 거야.”
“걱정…….”
“내가 널 왜 걱정해.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
나루가 저린 다리를 손으로 쳐 가며 발꿈치를 들었다. 규연보다 키가 한참 작은 나루는 발꿈치를 올려야만 시선이 엇비슷해질 수 있었다. 적당한 시야를 확보한 뒤에는 규연의 머리를 잘 살폈다. 앞에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고.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걱정인데. 규연이가 총을 맞은 걸까? 아니야, 아무리 봐도 없어. 애초에 총을 맞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나 그렇게까지 멍청이 아닌데.
알고 보니, 진짜 머리에 총을 맞기라도 한 건지 확인해 보는 거였다.
“이게 미쳤나, 어딜 쳐다봐.”
“아, 아니…….”
“이따 나갈 거니까 준비나 하고 있어.”
“나가요? 어디? 산책이요?”
손가락으로 나루의 이마를 밀어낸 규연이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나간다는 소식에 들뜬 나루는 또다시 붙어오며 질문을 던졌다. 며칠,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나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던 규연이 흔쾌히 나가자고 해서 신이 난 것이다.
산책? 아니, 아니, 사람인 상태에서는 산책이라고 하면 안 돼. 보통 사람들은 이런 걸 데이트라고 한댔어. 설렌다, 데이트. 나 데이트 해 본 적 없는데, 어떡하면 좋아.
규연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루를 쳐다봤다.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고,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스러워졌다.
“좋냐?”
“좋아요. 나가면 신기한 것들도 구경할 수 있고, 또…….”
X발. 자꾸 동정심 자극하네, 저게. 서울이라면 질리도록 돌아다녔을 텐데, 왜 저렇게 어린애같이 좋아하는 거냐고.
알게 모르게 동정심을 느끼던 규연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짓밟을 생각으로 데리고 나가는 거였지만, 최소한 외출복 정도는 빌려줘야 했다. 딱히 불쌍해서는 아니고, 같이 다니기 쪽팔리니까.
규연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와 드레스룸에 들어선 나루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옷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번 신상 재킷부터, 한정판으로 나온 명품 옷들이 온 사방에 걸려 있었다. 물론 나루의 눈에는 그저 ‘예쁜 옷’으로밖에 안 보였다.
“적당히 입고 나갈 만한 거 골라.”
“제, 제가요?”
“어, 사이즈 맞는 걸로 골라라.”
“진짜 그래도 돼요?”
“한 번만 더 물어보면, 그 입 꿰매 버릴 줄 알아.”
살벌한 경고에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루가 옷걸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옷을 고르는 태도가 영 소심했다. 십 분이 지나도록 옷을 고르지 못하던 나루가 눈치를 보며 대충 손에 집히는 옷을 내밀었다.
실크 소재로 된 셔츠였다. 그것도 짙은 녹색의 색감을 가진 실크 셔츠. 냉한 이미지인 규연이 입으면 분위기가 한층 더 고풍스러워지겠지만, 이목구비가 유순한 나루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옷 고르는 센스가 쓰레기 수준이네.”
보다 못한 규연이 나서서 옷을 골라 줬다. 어깨선이 예쁘게 떨어지는 얇은 티셔츠에 옅은 색의 청바지, 포인트로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까지. 캐주얼하지만 나루의 이미지와 딱 맞는 코디였다.
나루는 한 시간 동안 거울을 바라봤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해서 자꾸만 보고 싶어졌다. 이 상태라면 밖에서도 규연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갈 준비를 완전히 마친 뒤에는 밤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무슨 데이트를 밤에 가는 건지 의아했지만 시간 따위 상관없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하늘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나루는 규연이 준비를 끝내기 전부터 신발장으로 나와 워커를 끼워 신었다. 낡은 제 운동화가 아닌, 규연이 준 새 워커를 신는 게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타.”
“우와아.”
차 키를 챙겨 나온 규연이 익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어 앉은 나루는 두 발을 흔들거렸다. 번쩍거리는 차도 신기했는데, 안에 타니까 좋은 향까지 나서 기분이 붕 뜬 듯했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오른 기분은 단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땅바닥에 처박혔다.
“여기가, 대체 뭐 하는……?”
지하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 쿵쿵거리는 진동, 화려하게 빛나는 입구, 마지막으로 그 앞을 막아선 건장한 남자들. 나루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뭐 해, 들어와.”
“모, 못 가.”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남자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규연이 나루를 잡아끌었다. 한 걸음 가까워졌을 뿐인데, 노랫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나루는 두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 진동이 쿵쿵 울리는 게 수상해서 발을 들여놓기가 힘들었다.
규연이는 괜찮은 걸까? 여기 엄청 시끄럽고, 사람도 많은데.
겁먹은 나루의 모습에 되돌아갈까, 고민하던 규연이 애써 생각을 지워냈다.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규연은 먼저 등을 보이고 내려갔다. 나루가 도망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지나치게 태연해 보였다.
“으윽, 버리고 가지 마세요!”
규연의 냉정한 태도에 착잡해진 나루가 발을 동동거렸다. 들어가기엔 무섭고, 규연은 벌써 계단을 다 내려갔고.
버림받기 싫었던 나루는 어쩔 수 없이 규연의 뒤를 따랐다. 한 계단씩 내려갈수록 어두워지는 주변과 텁텁한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