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30)


길었던 하루가 폭풍처럼 지나갔다. 따스한 볕에 눈을 뜬 나루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나루의 머릿속에서 규연은 완전한 천사였다. 어떤 기억을 떠올리던 규연의 등 뒤에는 새하얀 날개가 붙었다. 까칠하던 표정은 환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누워 있던 나루는 눈을 꾹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규연이 자기를 쫓아내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서 얼굴을 마주하기 싫었다.

아침을 좋아하던 나루는 오늘 처음으로 아침이 싫어졌다. 이 햇살 따듯한 날에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져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야.”

“…….”

“아직 아픈 건가.”

“……!”

한참 자는 척을 하고 있는데, 나루의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나루를 바라보던 규연은 손가락 끝으로 볼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안 돼, 여기서 대답하면 자는 척하는 게 들켜! 그런데 볼 만져주는 거 좋다. 으음.

나루가 대답하지 않자, 규연이 한 걸음 물러섰다. 별다른 뜻은 없었고, 아직 많이 아픈 줄 알고 내버려 두려는 생각이었다. 그의 작은 중얼거림에 좋은 꾀를 떠올린 나루가 콩콩,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아프다고 하면 나를 내보내지 않을 거야. 계속 아픈 척을 해볼까?

비척거리며 일어난 나루가 눈도 뜨지 않은 채, 규연에게 매달리듯 몸을 기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규연은 허리를 단단히 껴안은 손을 황당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파요…….”

“뭐냐, 일어나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아파서…….”

“소화제도 먹었고, 손도 따서 괜찮을 텐데. 어디가 어떻게 아파.”

나루의 말문이 제대로 막혀 버렸다. 급한 대로 규연을 붙잡고 아픈 척을 하긴 했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어젯밤, 규연의 완벽한 케어를 받고 잠든 나루는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소화제 효과가 좋았던 걸까. 아침에 일어나니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몸이 이렇게나 말짱한데 아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말해야 좋을까. 머리를 굴려 보던 나루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규연에게 딱 달라붙어 있던 탓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옷에 닿아 엉망이 됐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니까.”

“으음…….”

“이게 어디서 꾀병을 부리고 있어, 안 떨어져?”

“꾀병 아닌! 데…….”

자신감 있게 거짓말을 하려던 나루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고개를 올린 곳에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규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무룩하게 팔을 풀어내자,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간 규연이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얇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난 나루는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욕실 앞을 서성거렸다. 문 너머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규연은 제 생활 패턴을 악착같이 지키려 들었다. 비록 자유로운 망나니처럼 살고 있지만, 노는 것도 전부 규칙이 필요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씻고, 간단한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취미 시간을 보내다가, 운영 중인 디저트 카페에 들르는 것. 규연의 아침부터 저녁 시간은 주로 이렇게 흘러갔다.

물론, 밤부터는 시간을 좀 더 느슨하게 사용했다. 즉흥적으로 술 약속을 잡아 놀다 오거나, 건혁을 불러 게임을 하는 둥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처럼 흘러가던 일상에 금이 가고 말았다. 모두 나루 때문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규연은 욕실 앞에 서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

“야, 너도 들어가서 씻어. 왜 이렇게 꼬질꼬질해.”

“꼬질, 꼬질……?”

“깨끗하게 씻고 나와라.”

꼬질꼬질. 지금 나루의 상태를 잘 나타내 주는 단어 선택이었다. 규연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나루를 돌려세워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대화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얼떨결에 욕실 안으로 들어온 나루는 낯선 곳을 빙 둘러봤다. 규연이 방금 막 씻고 나와서 샤워 부스가 물에 젖어 있었고, 욕실에 뿌연 김이 가득 차 있었다.

엉성한 폼으로 옷을 벗은 나루가 샤워 부스로 들어와 코를 킁킁거렸다. 유독 이쪽에서 좋은 향이 난다 했더니, 바디워시 향이었나 보다. 나루는 바디워시라는 걸 몰랐다. 머리카락은 질 나쁜 샴푸 하나로 감았고, 몸과 얼굴은 늘 비누로 씻어왔다.

꾸욱.

펌프를 누르자 미끌미끌한 흰색 액체가 쭉, 흘러나왔다. 그중 반절은 바닥에 떨어지고, 반절은 나루의 손 위에 남았다.

킁킁.

손을 대고 냄새를 맡자 좋은 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나루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펌프를 누르는 것도 재미있고,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향이 나는 것도 새로웠다.

꾸욱. 꾸욱. 꾸욱.

펌프를 누르는 손이 대담해졌다. 손바닥을 한가득 채울 만큼 펌프를 누른 나루가 잽싸게 옷을 벗고 바디워시를 몸에 문질렀다.

이번에는 더 신세계였다. 비누를 쓸 때는 거품이 잘 나지 않았는데, 바디워시는 물을 조금만 더해도 거품이 퐁퐁 솟아올랐다. 신이 나서 거품을 내다보니, 샤워 부스 안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바디워시로 머리까지 감은 나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씻어냈다. 거품이 씻겨 내려갈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규연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씻어야 했다.

“아, 양치!”

샤워는 다 끝냈고, 이제 양치를 할 차례였다. 마땅한 칫솔을 찾지 못한 나루는 선반을 조심스레 뒤적거렸다. 칼같이 정리된 선반 안을 열심히 헤집어 놓다 보니 새 칫솔이 보였다.

양치까지 완벽히 끝낸 나루는 한쪽에 걸린 커다란 타월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 오랜만에 따듯한 물로 씻었더니 몸이 포근포근한 게, 기분이 좋았다.

“다 씻었, 이런 X발.”

“다 씻었어요.”

“일단 물기부터 좀 제대로 닦아. 옷은,”

“이거 입으면 되는데…….”

“그 촌스러운 걸 입겠다고? 얌전히 있어라, 옷 들고 올 테니까.”

나체 상태의 나루를 마주한 규연은 저도 모르게 쌍욕부터 뱉고 봤다. 수건을 걸쳤다고 하지만, 뽀얀 다리와 어깨선이 다 드러나 있어서 식겁하는 줄 알았다.

나루가 거지 같은 옷을 다시 입겠다고 집어 들자, 그 손을 대차게 쳐낸 규연이 방으로 향했다. 기껏 씻고 나와서 입었던 옷을 입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가진 옷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을 가지고 나온 규연이 나루에게 그것을 건넸다. 언젠가 이름 모를 여자에게서 선물 받았던 티셔츠였다. 입지 않고 구석에 쑤셔 박아놨는데, 이렇게 쓸 일이 생기다니.

연보라색 티셔츠는 나루에게 잘 어울렸다. 품이 많이 크긴 했지만, 순진한 이목구비에 옅은 색 옷을 입혀 놓으니 여리여리한 느낌마저 들었다. 캐주얼한 바지는 길이도, 허리 사이즈도 커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힌 뒤 조절 끈을 꽉 묶어 두었다.

“욕실은 제대로 썼겠지.”

“몸 씻는 거, 향이 엄청 좋았어요.”

“당연하지, 그거 내가 아끼는 바디워시거든. 하나에 얼마인 줄은 아냐?”

“비, 비싸요……?”

“어, 존나 비싸.”

자랑하는 듯한 규연의 말에 나루가 좌절했다. 비싼 건 줄도 모르고, 펌프질하는 게 신나서 마구 써댔는데…….

사색이 된 얼굴로 규연을 쳐다보던 나루가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규연이 언제 내쫓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고를 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깔끔히 썼는지 좀 봐야,”

“배, 배고파요. 저 배고파요!”

“내가 네 밥 챙겨 주는 사람이냐. 비켜 봐.”

“아, 안 돼……!”

여리고 얇은 팔이 규연의 상체를 단단히 옭아맸다. 지금 욕실 안의 상황을 본다면, 규연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나루가 배고프다며 말을 둘러대자, 수상함을 느낀 규연이 몸을 밀어내고 욕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이 미친, 이게 다 뭐야!”

기어코 욕실 상태를 들켜 버리고 말았다. 규연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욕실 안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샤워 부스 안은 다 씻겨 내려가지 못한 거품들이 가득했고, 한쪽에는 규연이 아끼는 바디워시가 처량하게 떨어져 있었다.

이게 끝이면 다행이었다. 각도 맞춰 정리해 놓았던 선반은 다 헤집어진 채였고, 칫솔과 치약은 세면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심지어 샤워 부스가 있는데도 욕실 바닥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씻으면 욕실을 이렇게 개판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걸까. 믿기지 않는다는 허망한 얼굴로 욕실을 바라보던 규연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 X발…….”

“제가 금방 치우고 나올게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눈치를 살피던 나루가 위기를 감지하고 욕실로 다시 들어섰다. 자기가 어지른 걸 치우라고 할 수도 없으니, 재빨리 나서서 치우려고 한 것이다.

쿠당탕!

“으아악!”

꼭 마음이 급하면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욕실로 들어서던 나루가 바닥을 딛자마자 미끄러져 넘어져 버렸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자, 지켜 보고 있던 규연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화를 낼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루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나루를 안아 든 규연이 가벼운 몸을 소파에 던져 놓았다.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

“…….”

“더 열받게 하지 말고, 거기 꼼짝 말고 있어.”

“…….”

“대답 안 해?”

“네, 네엡!”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앉은 나루가 경직된 자세로 규연을 기다렸다. 십여 분 동안 욕실에 들어가 청소를 한 규연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나와 나루를 노려봤다.

나루는 자기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건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건지 몰랐다. 온몸을 콕콕 찔러대는 듯한 규연의 시선이 무서워서 침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나, 무조건 쫓겨날 거야…….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규연이 나루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할 말이 있으니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나루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규연의 앞까지 힘껏 달려갔다.

“저, 이제 여기서 나가는 거예요…?”

최대한 불쌍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묻자 규연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뭐? 여기서 나가는 거냐고? 이렇게 쉽게 내보낼 거였으면, 심부름 업체에 의뢰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저 새끼, 아직 나한테 사과도 안 했잖아? 어제는 뭐라더라. 아 그래, 죄송한 게 없어서 죄송하다고 했었지. 저 건방진 게.

규연은 나루를 쉽게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사과라도 했다면, 적당히 괴롭히다가 풀어줬을 텐데. 이건 뭐, 괴롭힘은 본인이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받은 피해가 더 누적된 것이다.

“이게 돌았나. 너 진짜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지.”

“그, 그런 거 아닌데…….”

“네가 뭘 까먹고 있나 본데. 넌 지금 내 집에 감금된 거야, 절대 안 내보낼 거라고. 그러니까, 어디 내 마음이 풀릴 수 있게 알아서 잘 기어 봐.”

규연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며 이해하던 나루가 눈을 반짝 떴다. 그냥 안 내보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절대 안 내보낼 거라니. 규연의 천사 같은 마음씨에 나루의 마음이 살살 녹아내렸다.

봐, 내가 어제 생각한 게 맞아. 여긴 천국이라는 거!

따듯한 물로 씻을 수 있고, 맛있는 밥도 주고, 푹신한 곳에서 잘 수 있고, 주인 앞에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되고.

아아, 행복하다. 행복해. 규연이는 최고야. 규연이 짱!

속으로 규연을 찬양하던 나루가 쉽게 지나친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규연은 분명 ‘내 마음이 풀릴 수 있게.’라고 했다.

어떡하지. 나, 규연이가 너무 좋아서 빨리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마음을 푼다는 건 역시 그런 거겠지. 으음, 상대에게 마음을 푼다. 마음을 연다. 

좋아한다?

내가 너한테 마음을 열 수 있게 노력해봐라, 이런 뜻인가? 좋았어.

나루는 다짐했다. 규연을 완벽하게 꼬셔서, 마음을 열게 만들겠다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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