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30)


규연의 생각과 다르게 졸부는 꽤 봐줄 만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옷차림은 영 촌스럽지만, 얼굴 하나는 끝내주게 예뻤다.

온순하게 뻗은 눈썹, 강아지처럼 내려간 눈꼬리, 긴 속눈썹, 끝이 둥글고 귀엽지만 오똑한 코, 복숭아처럼 물든 뺨, 마지막으로 혈색이 돌아 핑크빛을 내는 입술까지.

수수한 생김새가 어우러지니 꽤 조화로웠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처연미가 돋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졸부의 얼굴 따위나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거친 손길로 아담한 몸을 흔들어 깨운 규연이 짝다리를 짚고 섰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던 졸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아는 주인님이 아니야……!

규연의 침대 위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졸부는 다름 아닌 나루였다. 광공에게서 도망쳐 나와 현실 세계로 빨려오자마자 납치당한.

심부름 업체 측이 사람을 오해한 게 분명했지만, 규연과 나루가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규연은 그렇다 쳐도, 나루가 반박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모르는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차에 탄 나루는 바로 규연의 집까지 온 게 아니었다. 나루는 낯선 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씻김을 당해야만 했다. 남자들은 나루에게 찬물을 퍼부으며 저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뭐랬더라. 정신이 희미해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찬물을 맞아 깨어날 때 즈음 무언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야, 그 졸부를 우리가 무슨 수로 데려오겠냐. 대충 이름도 비슷하고, 거, 외모도 비슷한 놈 찾아낸 게 다행이지. 깨끗하게 씻겨. 부잣집 아들처럼 보이도록 빡빡 씻겨라.’

‘어휴, 그나저나 우리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닥치고 씻겨. 얘 꼬라지 못 봤냐. 꾀죄죄한 게 길바닥에 앉아서는, 이게 노숙자 아니면 뭐야. 돈 벌고 싶으면 그냥 협조해. 의뢰인 성깔도 장난 아니더만. 안 데려다 놓으면 지랄할걸.’

남자들의 비열한 목소리가 꼭 수인을 불법으로 팔아먹는 상인들 같았다. 갑자기 잡아가서 깨끗하게 씻기고, 낯선 장소로 데려다 놓는 행동까지 상인들과 유사했다.

그렇다면 나, 정말 이 사람한테 팔려 온 걸까?

끔뻑끔뻑. 순진한 눈을 깜빡이던 나루가 규연과 눈을 마주했다. 입은 옷도 비싸 보이고, 집도 좋아 보이고, 잘생기기까지 한 사람. 나루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손쉽게 정의 내려 버렸다.

그래, 팔려 왔구나. 팔려 온 거야.

어려서부터 이런 쪽으로 교육이 잘 되어 있던 나루는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를테면 ‘여기는 어딘가요.’ 라거나, ‘당신은 누군가요.’ 같은 말들. 어차피 물어도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규연은 체념한 듯한 나루의 눈빛에 열이 제대로 뻗쳤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짓에 신경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끌려온 주제에 어디 맘 편히 퍼질러 자고 있어.”

“…….”

“간댕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 이 새끼.”

초면에 막말을 퍼붓던 규연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쌍욕을 내뱉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좁은 거리에서 들을 수 있을 만한 데시벨이었다.

그러나 나루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규연이 쏟아내는 막말을 조용히 받아냈다. 상처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고 비는 것도 아니고, 쥐 죽은 듯 조용히 말을 듣고만 있는 태도에 규연이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보통 또라이가 아니네, X발.

나루가 이렇게 반응할 줄 몰랐는지, 헛숨을 뱉던 그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류의 인간은 처음 만나보는 거였다. 규연의 머리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이 새끼를 짓누를 수 있을까.

“야, 네가 이딴 식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긴 하냐? 내가,”

“온, 온몸을 포박하고 지하실에 가둬요.”

“…뭐?”

“이틀 동안 금식하고, 몸 대라고 하면 얌전히 대 줘야 해요.”

“…….”

정상적인 대화가 오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규연은 방금 제가 뭘 들은 건지 의심했다. 황당한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았으나,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 속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뱉은 말은 거지 같은데, 저 눈망울은 좆같이 순수했다는 거다.

“너 지금 나 엿 먹으라고 그러는 거지, X발.”

“아닌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저딴 말을 지껄여. 내가 언제 온몸을 포박하고 지하실에 가둔대?”

“저, 벌 안 받아요……?”

“벌? 받아야지. 벌 받을 짓을 했으니까.”

의사소통에 심각한 오해가 생기고 있다는 걸 두 사람만 몰랐다. 나루가 말하는 벌은, 단순한 뜻의 벌이 아니었다. 그가 여태까지 받아 온 벌은 벌이라기보단 학대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규연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하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루가 옷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 기계적인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규연이 황급히 행동을 저지시켰다.

“너 지금 뭐 하냐?”

“벌, 받을 짓을 했다고 해서…….”

“벌을 받는데 왜 갑자기 벗고 지랄, 하, 설마.”

규연이 나루의 뜻을 알아채고 콧방귀를 꼈다. 개 같은 소문 퍼뜨려서 잡아 왔더니, 잠이나 처자고, 이제는 ‘그런 벌’을 받겠다며 옷까지 벗는다? 순 또라이 같은 행동이었다.

뭘 해도 이런 쪽으로 머리가 굴러가는 건혁이라면 에헤라 좋다, 하고 채찍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규연은 지극히 정상인, 아니, 정확히는 정상적인 성 의식을 가진 인간이었다.

행동을 멈추고 잠시 규연의 눈치를 살피던 나루가 다시 움직였다. 꼼지락거리면서도 옷을 벗는 폼이 아주 야무졌다. 순진한 얼굴로 잘도 저런 행동을 하는 게 신기했다.

“옷 입어라. 누가 네깟 거랑 그러고 싶대? 어딜 벗어, 벗기는.”

“그럼, 화 풀리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의외라는 눈으로 규연을 훔쳐보던 나루가 슬며시 옷을 껴입었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빠서 욕지거리를 읊조리던 규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위협적인 분위기에도 나루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차분하게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다소곳하게 앉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굴림수 몇 년이면 이런 상황쯤은 별것도 아니었다.

화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개소리하네. 딱 봐도 갇힌 것 같으니까 기회 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거겠지. 새끼, 같지도 않은 머리 쓰기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당겨 웃은 규연이 나루의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럴 때일수록 말려들지 않고, 더 밀어붙여야 상대가 무서워하는 법이다.

“네가 같지도 않은 머리를 쓰는데, 난 너 여기서 안 내보낼 거거든.”

“…….”

“네가 미친놈이면, 나는 더 미친놈이니까 각오해. 알겠냐?”

“가, 각오……!”

쿠궁. 어떤 막말을 내뱉어도 꿈쩍 않던 나루가 ‘각오’라는 말에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각오는 나루가 무서워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광공의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 ‘각오’라는 말이 들리면 나루는 늘 고통받아야만 했다. 마음을 다잡고 이를 꽉 깨물어 봐도, 날아드는 매질을 감당해 내는 건 늘 힘겨웠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매질을 당한 후에는 무릎이 다 까지도록 바닥을 기어 다니며 수치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규연이 ‘각오’하란다. 지하실에서 겨우 도망쳐 나왔더니, 다시 저 짓을 반복하게 생긴 것이다. 나루의 눈가가 순식간에 촉촉이 젖어 들었다.

아직 저 사람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쩌지. 얼마나 아프게 때릴까. 몇 대를 맞아야 하는 걸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눈을 꼭 감고 매질이 날아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10초가 지나도, 30초가 지나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규연은 이제야 좀 쫄아서 눈물을 흘리려는 나루를 보고 만족한 듯 웃음 짓고 있었다. 물론, 눈매는 여전히 사나웠지만.

오잉? 왜 아무것도 안 하지. 시간을 두고 갑자기 때리려는 건가. 진짜 악질이다.

마른침을 삼킨 나루가 긴장을 놓지 않고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규연의 몸을 슬쩍 훔쳐본 결과, 키도 크고 손도 큼직해서 예고 없이 맞으면 아플 것 같았다.

“이제 좀 심각성을 느꼈나 보지. 어디 잘 버텨 보시든가.”

“네, 네…….”

버틸 자신은 없지만, 심각성은 제대로 느꼈으니까 차라리 빨리 때려 주세요!

속으로 간절히 외치던 나루가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발발 떨리는 걸 보니 많이 겁먹은 모양이었다.

덜컥, 탁!

무언가 소음은 들리는데,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실눈을 뜬 나루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으엥?”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방금까지 앞에 서 있던 규연이 사라졌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라니,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나간 걸까. 아니면, 때릴 만한 도구를 가지고 오는 걸까.

침대보를 꼭 쥐고 있던 나루가 문 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에 집중해 보아도 특이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지, 뭔가 이상해. 저 사람 이상해! 왜 나 안 때려?

정처 없이 떨리던 몸이 한순간에 진정됐다. 방금까지 두려운 감정이 온몸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거렸다. 허전함에 엉덩이를 매만지던 나루가 포근한 이불에 몸을 묻어 버렸다.

한편, 규연은 욕실로 들어와 찬물을 맞는 중이었다. 졸부 하나 짓누르려고 한 게 다인데, 웬 또라이한테 걸려서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도건혁이 이런 말을 했었지. 원래 순진해 보이는 새끼들이 더한 법이라고.

나루의 겉모습은 꽤 만만해 보였으나, 막상 상대해 보니 고단수 같았다. 아까의 상황을 되짚어 보던 규연이 흐르는 물에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화를 내기도 전에 옷을 벗어서 당황 시키려고 했던 건가. 그리고, 납치당해 왔으면서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 안 내뱉는 게 말이 돼?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규연은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찬물을 따라 마셨다. 보통은 몸 관리를 위해 간단한 유기농 주스 한 잔만 마시고 잠들지만, 오늘은 감정 소비를 많이 해서 그런지 허기가 졌다.

냉장고 안에는 며칠 전에 사다 놓은 재료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규연은 대충 파스타 면과 소스를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파스타 면을 삶고,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소스를 붓고, 또다시 문을 바라보고.

오늘따라 규연의 행동이 산만했다. 파스타에 집중하려고 해도 눈길이 자꾸 침실 쪽으로 옮겨갔다. 방에 갇힌 꼴이 되어버린 나루는 제 손으로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리 조용할 수 있는지.

어렵사리 파스타를 완성한 규연은 빈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방 앞까지 다가갔다. 정작 잡혀 온 건 나루인데, 안절부절하는 건 규연이었다.

덜컥!

침실 문이 다시 열렸다. 규연은 침대에 엎드려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실소를 흘렸다.

“팔자도 좋네, 씹.”

“어, 어엇, 죄송합,”

“나와.”

“네?”

“나오라고. 그 거지 같은 목줄 빼고 나와라.”

대체 저 목줄은 왜 차고 있는 거야, 지가 개야 뭐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규연이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문을 닫고 가지 않았다. 나루는 침대 위에서 내려오며 규연의 혼잣말에 슬그머니 토를 달았다.

“나 개 맞는데…….”

다행히 먼저 나가 버린 규연은 나루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방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바깥을 탐색하던 나루가 본능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새콤달콤한 토마토소스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눈만 도르륵, 굴려 냄새를 따라가 보니 식탁 위에 웬 접시가 놓여 있었다.

경계하며 나가지 않으려던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루는 뭐에 홀린 듯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아, 이런 벌은 처음이야. 맛있는 걸 두고 못 먹게 하려는 셈인 거야!

식탁 주변을 뱅뱅 돌던 나루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데, 음식을 앞에 두고 가만히 있자니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지 말고 앉아.”

“아, 앉아요?”

“한국말 몰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앉아.”

아주 제대로 고문하려는 모양이다. 규연의 명령에 식탁 앞에 앉은 나루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해야 한 입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지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중인데, 나루의 앞에 포크 하나가 놓였다.

으잉? 왜 포크를 주는 거지. 나루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접시도 두 개였다. 포크도 두 개. 물컵도 두 개. 혹시 집에 손님이 있나 싶어 거실을 둘러봤지만, 사람이라고는 규연과 나루 둘뿐이었다.

“멍청하게 있지 말고 먹어.”

“먹, 어요……?”

“하, 너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랬지. 먹으라고 만든 건데, 그럼 버릴까?”

“아, 아니, 아니요! 아니요!”

포크를 사수한 나루가 뺏어가지 못하도록 이를 드러냈다. 성급히 행동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위협해 버리고 만 것이다.

저 사람이 무서워하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규연은 나루를 또라이 보듯 쳐다보고 제 식사에 집중했다. 나루는 경계를 풀지 않고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 안에 넣었다. 토마토의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맛이 환상적이었다.

한 입을 먹어도, 두 입을 먹어도, 규연은 나루를 욕하거나 때리지 않았다. 

아, 진짜 먹으라고 한 거구나.

뒤늦게 안심하고 포크질을 하던 나루가 입술을 꼬옥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규연은 나루가 우는 줄로만 알았다. 자신과 같이 밥을 먹는 게 부담스럽고 무서워서. 하지만 실제 표정은 그 반대였다.

나루의 두 눈이 별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앙증맞은 입꼬리는 스멀스멀 올라가고 있었다.

천사야. 저 사람, 천사 같아!

나루의 눈에 규연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규연이 듣는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법한 속마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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