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30)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클럽 내부에 울렸다. 규연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핸드폰만 바라볼 뿐이었다. 도도하게 꼰 다리라던가, 찌푸려진 짙은 눈썹이 그의 까칠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기껏 혼잡한 곳을 피해 룸을 잡았건만, 어찌 룸 안이 더 소란스러웠다. 규연의 친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건혁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폭탄주를 타기 바빴다.

“야, 야, 도건혁, 적당히 말아!”

“뭘 모르네, 이 정도는 적셔 줘야지.”

일렬로 늘어선 유리잔에 맥주 거품이 가득 차는 동안, 규연은 인내심을 다졌다. 건혁이 제 친한 친구만 아니었다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쌍욕을 박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쌍욕을 뱉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규연의 찌푸려진 눈썹은 되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새카만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가 진동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미쳤어, 도건혁!”

“야, 봤지. 이 오빠 어때.”

“오빠는 얼어 죽을, 푸하핫!”

현란한 손짓으로 여자들의 시선을 끌던 건혁이 정성스레 쌓아 놓은 유리잔들을 밀어 쓰러트렸다. 쨍, 소리를 내며 엎어진 잔들이 폭탄주 안으로 쏙 들어가 마지막 거품까지 화려하게 장식했다.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가려고 했던 규연이 욕지거리를 곱씹으며 일어섰다. 친구라는 놈이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정신 사납게 굴고 있으니 욕이 저절로 나왔다.

규연이 일어서자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잘 빠진 다리에, 적당히 근육이 붙어 보기 좋은 상체, 날카롭게 잘생긴 얼굴은 신이 빚어 놓은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분위기를 망쳐 놓았는데도 그들은 핀잔 하나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어딜 가는 거냐며 아쉬워했으면 했지. 저런 미남을 놓치기에는 심히 아쉬웠다. 게다가 규연은 그 유명한 YK전자의 막내아들이었다.

“어디 가, 규연아.”

“너희들끼리 마셔라.”

“아 왜애, 내가 폭탄주까지 말았는데.”

“도건혁, 내일부터 내 얼굴 안 보고 싶냐?”

“아이고, 얘 또 이러네. 야, 나 규연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 놀고 있어 봐.”

능글맞게 웃으며 분위기를 유하게 풀어놓은 건혁이 여전히 똥 씹은 얼굴을 한 규연을 끌고 나왔다. 비교적 작게 들리던 음악 소리가 문을 열자마자 고막을 찢을 것처럼 쿵쿵, 울렸다.

구하기 힘들다고 입소문 난 브랜드의 가죽 재킷을 당당히 걸쳐 입은 규연이 제 긴 다리를 뽐내며 클럽 안을 누비고 다녔다.

캐주얼하지만 고급스러운 차림새에 워커까지 더해지니 안 그래도 눈에 띄던 자태가 더욱 빛나 보였다. 당연히 규연이 신은 워커 또한 유명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그를 위해 직접 제작해 선물한 것이었다.

입구까지 나와 담배를 꺼내 문 규연은 곧장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폐 안 깊숙이 들이마시고 나니,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신경질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규연아, 너 그 소문 때문에 그러지? 어떤 미친놈인지, 내가 그 자리에서 잡았어야 했는데.”

“하, 뭐? 내가 집에서 버린 자식? 그리고, 김유영이 나를 찼다고? 좆까는 소리 하네.”

허공에 연기를 내뱉던 규연이 아직 다 타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입술 새로는 무분별한 쌍욕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규연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바로 소문 때문이었다. 며칠 전, 건혁은 DK항공 막내딸 생일 파티에 얼굴을 비췄다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다.

먼저, 규연이 집안에서 버린 자식 취급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규연이 DK항공의 차녀 김유영에게 차였다는 것. 소문의 출처는 웬 이름 모를 졸부라고 했다.

입이 가벼운 건혁은 파티에서 돌아오자마자 규연에게 이 엄청난 소문을 알렸고, 자존심이 센 규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진위는 이러했다. 첫 번째, 규연은 집안에서 사랑받는 막둥이다. YK전자 회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형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규연은 회사 물려받기를 포기하고 그저 놀러 다니기 바빴기에 미움 살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규연이 밖에서 어떤 망나니짓을 하고 다녀도 온 가족들이 우쭈쭈해 줬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규연은 한 달 전에 DK항공 차녀인 김유영을 차 버렸다. 몇 번 만나달라고 애원하길래 데이트해 줬는데, 핸드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집착해대서 대차게 까 버렸다.

가장 열받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고작 졸부 새끼가 퍼뜨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DK항공 막내딸 생일 파티에서.

자존심이 하늘을 뚫고 올라갈 정도로 높은 규연은 졸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제, 심부름 업체를 고용해 망할 졸부의 뒷조사를 의뢰했다.

이런 일은 유능한 비서를 통해 해결하는 게 좋았지만, 규연의 형인 규성이 사소한 일로 제 비서를 못살게 굴지 말라며 잔소리를 해서 하는 수 없이 업체를 쓴 거였다.

“내가 그 새끼 가루가 될 때까지 짓밟아 놓는다.”

“아니, 규연아. 너 어제 심부름 업체에 의뢰 넣었다고 했나? 야, 그런 인간들한테 맡기면 일 제대로 안 한다니까. 지금도 봐, 연락 안 오네.”

“아가리 좀 닥쳐, 도건혁.”

깐족거리던 건혁이 닥치라는 말에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주눅이 들어 미안하다고 했겠지만, 거친 언행이 익숙한 건혁은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괜히 규연의 친구가 아니었다.

규연이 담배를 새로 꺼내 물었을 때, 드디어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낯선 번호로 걸려온 걸 보아하니 심부름 업체가 맞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예, 의뢰 주셨던 유규연 님 되시죠? 조사가 끝나서 연락드렸습니다.

“더럽게 느리네, 일 처리 빨리빨리 안 돼요? 내가 자그마치 하루를 기다렸어요, 하루를.”

-빨리한다고 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허허. 정보는 문자로 보내 놨습니다.

“일단 확인하고 다시 연락할게요.”

싹수없는 말투는 덤이고, 전화 받는 태도까지 엉망이었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건 뭐 하늘에 있는 신도 이렇게 거만하게 굴지는 않을 거다.

정보를 손에 넣은 규연은 더 이상 클럽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며 자리를 떴다. 규연이 전화를 받는 동안 담배를 태우던 건혁이 황급히 뒤돌아서는 몸을 잡아 세웠다.

“야, 규연아!”

“바쁘니까 잡지 마라.”

“아니, 저번에 네 방에 목줄 놓고 갔는데, 나중에 그거 좀 가져다줘.”

“변태 같은 새끼야, 내 방에 그딴 거 놓고 가지 말라고. 죽여 버리고 싶네.”

“부탁해!”

경멸 담긴 시선으로 건혁을 바라보던 규연이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외제차 한 대가 굴러왔다. 2개월 전, 클래식한 느낌의 외제차가 질려서 바꾼 한정판 스포츠카였다.

건혁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은 규연이 조수석에 탑승하자, 운전대를 잡은 개인 비서가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미친놈.”

사이드미러를 힐끔거린 규연이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뒤로 보이는 건혁이 제 목을 매만지더니, 입 모양으로 ‘꼭 가지고 와.’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깔끔히 무시해 버린 규연이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 함을 터치했다. 아까 보냈다고 하더니, 방금 막 도착한 메시지가 알림을 울리고 있었다.

심부름 업체에서 알아낸 정보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의뢰한 인물의 프로필도 없고, 사진도 없고, 그저 글 여러 줄이 전부였다.

[나이는 21, 이름은 송나운. 지 아버지가 운영하는 엔터 회사에서 아이돌 하나가 대박을 터쭈고, 떵떵거리면서 사나봅니다~ 보니까 부모도 전혀 신경 안 쓰는 거 같고, 혼자 삽니다. 뭐, 여기저기 다니면서 비호감을 사고 다니더만요. ^^ 우리 손님 에게도 어쩌다 똥 묻은 것 같은데, 똥이 뭐 무스워서 피한답니까. 드러워서 피하지요. ^^ ~]

“뭐라는 거야, 이 새끼들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친 규연이 심부름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뭣도 아닌 졸부 새끼가 내 소문을 거지 같이 내고 다녀서 체면 다 깎였는데, 뭐? 똥 묻었으니 그냥 피하라고? 좆같은 소리였다.

규연은 졸부 새끼의 기를 죽여 놓는 걸로 모자라, 제대로 겁을 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이를 갈았다.

-예, 손님. 문자는 보셨습니까?

“아저씨. 똥이니 뭐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그 새끼 잡아 와요.”

-손님, 그런 일은 위험이 따르고, 저 불법이기도 해서…….

“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좀 하라고.”

-아이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문 앞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심부름 업체 직원이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잘 세팅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어 놓은 규연이 버튼을 눌러 창문을 열었다.

같잖은 졸부 새끼, 면상 마주 보고도 그딴 개소리 지껄일 수 있나 보자.

매섭게 뜬 눈매가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규연은 성깔이 더럽기로 유명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건 그의 특기이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해한 적은 없지만, 누구든 잘못 걸리면 정신적으로 고통받다가 끝내 규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몇 번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로는 다들 규연을 건드리지 않았다. 지랄 맞은 인간은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 졸부는 오늘 규연에게 먼지 털리듯 털리게 될 것이다.

* * *

잠금장치에 카드키를 가져다 대자, 고급스러운 효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호화스러운 문을 열고 나면, 더 호화스러운 내부가 펼쳐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야만 확인할 수 있는 높은 천장,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수영장까지 모든 게 완벽한 집이었다.

혹여 졸부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규연이 심부름 업체 사람들에게 따로 지시한 사항이 있었다. 잡아 온 졸부를 집에 들여놓고, 문을 바깥쪽에서 잠그라는 지시였다. 특수한 잠금장치를 써서,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규연이 지시한 대로 움직인 심부름 업체는 완료했다는 문자까지 보내 놓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집 안을 둘러봐도, 사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설마 튄 건 아니겠지. 감히.”

부엌부터 거실, 베란다까지 모조리 뒤져 보던 규연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제 침실을 확인했다. 잡혀 온 놈이 여유롭게 이런 곳까지 들어올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침실 쪽을 향했다.

“뭐야, 저 쓰레기 같은 건.”

“…….”

황당한 장면이 규연의 눈앞에 펼쳐졌다. 웬 남자 하나가 목줄을 맨 채, 제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저거 남자 맞나. 체형이 워낙 왜소해서 그런지 남자 같지도 않았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체 왜 저 남자가, 그것도 규연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가. 지금 이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은 규연과 졸부, 둘 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심부름 업체에서 잡아 온 ‘졸부’라는 것인데…….

“저거 또라이 새끼 아니야.”

규연의 발밑을 빌빌 기며 잘못했다고 빌어도 봐줄까 말까인데, 저 멍청한 졸부는 길게 늘어진 목줄을 손에 꼭 쥔 채 자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규연은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새끼가 감히, 내 침대에 올라가? 그걸로 모자라서 처자기까지 해?

침대 가까이 다가간 규연이 곤히 잠든 남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돌렸다. 배려 없는 거친 손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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