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0)


밤하늘을 뚫고 내리는 비가 거대한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지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나루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둥글게 말아 몸을 감쌌다. 추적이는 빗소리도, 쓰레기통 안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도, 주택가 주변의 고요한 공기도, 공포스럽기만 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 유독 시렸다. 발목에는 족쇄를 풀어낸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살이 오르지 않은 몸 위로 빗물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자그마한 등이 오들오들 떨렸다.

나루는 광활하고도 작은 세상에 갇혀 살았다. 피폐한 BL 세계관 속의 굴림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심하게 구르고, 상처받고, 학대까지 당한 비운의 굴림수.

인생의 절반은 광공의 지하실에서 지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 계단만 올라가면 따스한 방을 마주할 수 있는데, 재활용도 불가능한 수준의 쓰레기 광공은 따스함을 절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이 피폐한 세계관의 굴림수라는 걸 전혀 몰랐던 나루는 광공이 어떤 쓰레기 짓을 해도, 그저 내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이며 체념했다. 다른 사람들이 밝은 내일을 보며 나아갈 때, 나루의 인생은 한없이 캄캄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루는 수인이었다. 그것도 최약체인 강아지 수인. 나루가 사는 세계 안에서 수인이라는 존재는 저 밑바닥에 깔려 무시 받는 게 일상이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권리도, 의식주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불쌍한 삶이었다. 나루에겐 매 순간, 모든 것이 고통이었다. 지쳐 쓰러진 밤이면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제발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들키지 않게…….”

아무튼 나루가 주택가 골목에 숨어 덜덜 떨고 있는 이유는 모두 쓰레기 광공, 최범현 때문이었다. 그는 연락을 제때 받지 않은 나루에게 ‘벌 받을 준비’를 하라며 조소를 흘렸다.

나루는 무조건 도망치기로 했다. 최범현이 어딘가 싸하게 웃는다는 건, 그날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벌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손에 자란 나루는 이제 표정만 봐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최범현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나루는 익숙하게 발목의 족쇄를 풀어내고 지하실을 뛰쳐나왔다. 굴림수로 몇 년 살아 보니, 요령이 생겨 이런 족쇄 정도는 손쉽게 풀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후부터였다. 그래, 도망을 나온 건 좋았다고 치자. 하지만 나루는 도망가는 것에 재주가 없었다. 여러 번 도망쳐 봤지만, 늘 최범현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붙잡혀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도 오늘은 꽤 멀리까지 도망을 나와 숨었다.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니 한 주택가 골목에 발을 들인 채였다. 골목 끄트머리에 놓인 큼지막한 쓰레기통은 나루의 작은 몸을 숨기기 딱 좋았다.

좋아, 여기면 살아남을 수 있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아, 배고프다. 살려주세요.

간절히 살려달라는 기도만 반복하고 있을 때 즈음, 눈앞이 일렁거렸다. 눈물 때문에 앞이 흐릿한 게 아니고, 그냥 허공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꼭 멀미하는 것처럼.

으엥? 이게 뭐지?

새하얗고 앙증맞은 귀가 쫑긋거렸다. 몸을 감싸고 있던 꼬리도 어느새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나루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조금만 만져 볼까? 아니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그런데 궁금하다. 만질까? 아니야. 만지자!

등 뒤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이 조심스레 내밀어졌다. 여린 피부 위로 빗방울이 투둑, 떨어지자 겁 많은 나루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깜짝이야!

손바닥을 털어내고 다시 허공에 집중했다. 부릅뜬 눈과 앙다문 입술, 그리고 쫑긋 선 귀가 집중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어라, 일렁이던 허공 속에서 또 다른 냄새가 흘러들어온다. 으음, 사람들 냄새. 퀴퀴한 냄새. 그리고……. 고소한 빵 냄새!

킁. 킁킁. 킁킁. 코를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던 나루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기가 막히게 유혹적이었다. 며칠 지하실에 갇혀 있느라 밥을 못 먹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오직 빵을 위해 손을 내민 나루는 2초 후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갑자기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속도 울렁거렸다. 어지러워서 두 눈을 꼭 감은 나루는 지옥 같은 느낌이 사라지길 바라며 몸을 공처럼 말았다.

“하하, 아니 그래서 어제는 내가…….”

“네, 부장님. 네, 메일로 보내뒀…….”

“어어, 자기야. 나 지금 여기 백화점 앞…….”

뭐지? 분명 아무도 없는 골목길이었는데, 갑자기 사람들 말소리가 들린다.

서서히 경계를 풀며 고개를 든 나루가 눈을 깜빡였다. 무릎 사이로 삐져나온 동그란 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온통 낯선 곳이었다. 거대한 쓰레기통은 사라졌고, 빌라로 빼곡하던 골목길에 높은 빌딩들이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온 사방이 불빛과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렸다.

응……? 이상하다. 나 방금까지 숨어 있었는데. 그냥 눈만 꾹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바닥을 짚고 일어선 나루가 빌딩 벽을 따라 걸었다. 소심한 걸음으로 나아가다 보니, 모퉁이가 보였다.

쏘옥.

모퉁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본 나루는 그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세상이야……!”

고개를 완전히 꺾어야만 끝이 보이는 높은 빌딩, 커다란 전광판이 걸린 백화점,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기발한 광고들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이 나루에게 다가왔다.

놀람과 동시에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발을 동동 구르던 나루가 다시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잘 보니 돌아다니는 사람 중, 꼬리나 귀를 드러낸 수인이 없었다.

여기는 다 수인이 아닌 건가? 나도 우선 꼬리랑 귀를 숨겨야겠어. 자아, 들어가라. 꼬리야, 귀야.

“……어?”

꼬리와 귀를 집어넣기 위해 집중하던 나루가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머리를 더듬거렸다. 그다음으로는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톡톡, 쳐 봤다.

없다. 없어. 사라졌다.

꼴깍. 마른침을 삼키고, 심호흡한 뒤에 다시 집중해본다. 그래, 사라질 리가 없어! 자아, 다시 꺼내 보자.

……안 나온다. 꼬리가, 귀가, 안 나와. 진짜 사라진 건가 봐.

울망한 눈으로 제 엉덩이를 돌아보던 나루가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평생 수인을, 이 강아지를 못 벗어날 줄 알았는데! 꼬리가! 사라졌다! 귀도 사라졌어!

킁. 킁킁.

한창 기뻐하고 있을 때 즈음, 아까 맡았던 고소한 빵 냄새가 코끝을 타고 들어왔다. 꼬리와 귀는 사라졌어도, 코는 제 기능을 확실히 하는 모양이다.

냄새를 따라가려면 이 모퉁이를 돌아 나가야 했다. 그러니까, 사람들로 빽빽한 저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잔뜩 긴장한 나루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다가, 빵 냄새에 굴복해 걸음을 옮겼다.

“무슨 빵일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달콤한 냄새가 더해졌다. 나루의 발길이 멈춘 곳은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건물 앞이었다. 값비싼 쥬얼리를 판매할 것처럼 꾸며진 이곳은 다름 아닌 디저트 카페였다.

깔끔한 흰색 판 위에 금빛으로 제작된 글씨가 필기체로 박혀 있었다. 나루는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글씨를 쳐다보다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데, 스틴, 으음, 이이…….”

나루는 자신을 가두고 키운 최범현이 미워졌다. 이런 간단한 간판 하나 못 읽는 게 서러웠기 때문이다. 공부라도 열심히 가르쳐 줬더라면, 도망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쳇.

‘destinée’

언어에 취약한 나루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불어로 적힌 이름은 나름 좋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운명’

가게 외부가 투명한 통창으로 되어 있어서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넓은 카페 안에는 호화스러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가운데에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맛있겠다, 츄읍…….”

양손을 통창에 올려두고 몸을 가까이 붙인 나루가 안을 유심히 관찰했다. 유리창에 딱 붙은 볼이 호떡처럼 눌렸다.

“저건 바게트, 한 번 먹어본 적 있었어. 음, 그리고 저건, 으음, 모르겠고, 또 저건, 음, 모르겠다.”

모두 이름을 알 수 없는 디저트들이었지만, 확실한 건 전부 맛있어 보인다는 거였다. 나루가 디저트 구경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타르트를 포장하던 가게 직원이 이상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헛, 눈 마주쳤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리까지 반듯이 숙여 사과 인사를 건넨 나루가 디저트 카페 앞을 잽싸게 벗어났다. 역시,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건 겁이 났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는 내내, 나루는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큼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들, 쇼윈도에 진열된 아름다운 옷들, 그리고 TV 여러 대가 열을 맞추고 있는 전자 상가.

네모난 서류 가방을 든 중후한 남성이 진열된 TV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나루는 슬금슬금 다가가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화면을 바라봤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TV에서는 강아지와 관련된 다큐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모든 TV가 다 같은 방송을 틀어 주고 있어서 어떤 화면을 봐야 할지 고민됐다.

돌아다니느라 다리가 아팠던 나루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가장 아래에 있는 TV를 시청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그런 나루를 이상하게 보고 지나갔지만, 정작 본인은 프로그램에 집중하느라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강아지를 왜 버리는 거야, 강아지는 아무 죄가 없는데…….”

유기견, 이대로도 괜찮은가. 궁서체로 쓰인 로고가 화면 끄트머리에 박혀 있었다. 나루는 제 동족과도 같은 강아지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참았다.

너무 불쌍해, 강아지들은 다 불쌍하게 사는 거야? 나도 주인 잘못 만난 불쌍한 강아지 수인이고…….

화면이 클로즈업되며 다리 다친 유기견의 모습이 보였다. 나루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아냈다. 아아, 불쌍해. 너무 불쌍해.

톡톡.

닭똥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금씩 훔쳐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루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가 내리는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본 나루는 낯선 얼굴들을 발견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구세요?”

“어, 들은 거랑 비슷하네. 키 조그맣고, 체형 왜소하고. 얼굴도 예쁘장하니.”

“제가 예뻐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송, 나루…….”

“뭐라고? 송나, 어쩌구, 이름도 비슷하구만. 얌전히 갑시다.”

“으웁?!”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두 명이 나루의 얼굴을 확인해 본 후,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다른 한 명은 나루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능숙히 행동하는 걸 보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근처에 세워 둔 차까지 끌려가던 도중, 나루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강아지 다큐를 볼 땐 눈물을 퐁퐁 흘리더니, 이런 일에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오히려 순순히 제 발로 걸어가며 협조했다.

이런 일은 익숙했다. 도망갔다가 잡혀 오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나루는 이번에도 최범현이 사람을 고용해 자신을 잡아들이는 거라고 판단했다.

꼭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만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못 둘러본 건가? 솔직히 이번에는 탈출에 성공한 줄 알았어.

잠깐이지만, 세상 구경을 제대로 해 본 게 처음이라 행복했는데. 정말 행복했는데…….

몇 시간 뒤에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깨어나겠지. 팔이랑 다리는 다 묶여 있을 테고, 정신이 다 깨기도 전에 채찍이 날아들 거야. 팬티 두 장 입을걸. 그래도 처음 다섯 대는 옷 입은 상태에서 때려 주시는데. 진짜 슬프다.

“맞기, 싫어…….”

차에 타자마자 코와 입으로 수면제 묻은 손수건이 닿아왔다. 무의식중에 맞기 싫다는 속마음을 중얼거리던 나루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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