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별장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몰아친 후폭풍이 꽤 거셌다. 길어봤자 주말 동안 놀다가 오겠지 싶었던 여행은 일주일이나 더 이어졌고 수영도 질리도록 하고 돌아왔다. 물론 수영을 한 만큼 몸을 섞기도 했다. 몸과 정신을 모두 탈탈 털리고 돌아온 도윤은 일주일 동안 각방을 쓸 것을 선언했고 이주 째 되는 날부턴 야릇한 분위기만 잡히면 희성을 밀쳐냈다.
“하.”
키스 좀 하고 분위기를 잡아 다음으로 넘어가려던 희성이 오늘도 예외 없이 비어버린 품에 소파에 기대 마른 세수를 했다. 도윤에게 삽입을 했던 것이 꿈만 같았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많이 하고 오는 건데.
지난날의 자신을 향해 쓴소리를 중얼거리던 희성은 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채 얼굴을 반만 내놓고 있는 도윤을 봤다. 방으로 도망쳤다가 빼꼼 나타난 도윤이 우물쭈물 말했다.
“너어…. 내, 내일 뭐해?”
“왜?”
“내일 나랑 같이…. 나갈래? 대신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야 돼.”
“가고 싶은 곳 있어?”
“나가는 거지?”
“응.”
나가겠다고 답을 해주니 벽에 붙어있던 도윤이 사라졌다. 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누운 희성이 천장을 노려봤다.
역시 그때 한 번만 더 할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만하라는 애원도 못 들은 척 한 번만 더 해볼걸. 후회를 해봤자 늦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후회가 됐다. 한숨 섞인 숨을 뱉은 희성이 팔을 들어 눈 위를 덮었다.
***
함께 나가자고 했으면서 시간도 일정도 알려주지 않아 그저 시키는 대로 현관에 선 희성은 콩이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사라진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햄스터한테 인사를 십분째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도윤이 없으니 할 일이 없었다. 현관에 오도카니 서서 도윤을 기다리던 희성은 일 분이 더 지나서야 복도를 걸어오는 도윤을 발견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도윤은 알아서 자리를 비웠던 시간 동안 했던 일을 줄줄 읊었다. 콩이한테 인사했는데 배고픈 것 같아서 사료랑 간식도 주고, 손바닥에 올라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올려주고, 그러다 보니까 몸도 쓰다듬어주고…. 차에 오르는 도윤을 확인하고 문을 닫아준 희성이 운전석에 타고도 도윤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핸드폰을 보며 주소를 찍는 손가락을 따라 내비게이션을 보던 희성이 자꾸만 제 눈치를 보는 도윤을 대놓고 쳐다봤다. 자신을 두고 햄스터와 시간을 보내고 온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주소를 다 찍었는지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내비게이션 주위를 맴돌았다. 다 했으면 내리면 되지 왜 머뭇거리고 있는…. 손을 대신 잡아 내려주려던 희성이 도윤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하곤 뚝 멈췄다.
얼굴만 보던 시선이 손가락에 고정됐다는 걸 눈치챘는지 도윤이 어색하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말없이 주먹 쥔 손을 따라 내려오는 고개에 도윤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오른손으로 손등을 덮었다.
“아, 안 가?”
“…….”
“…….”
차 안에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머쓱해진 도윤이 반지를 만지작댔다. 끼고 있으면 분명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희성이 보인 반응은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괜히 끼고 나왔나 싶어 반지를 살살 돌리고 있는데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이 닿았다.
속눈썹이 내려온 눈을 보다가 따라서 눈꺼풀을 내린 도윤이 혀를 맞이했다. 혀를 옭아매면서도 반지를 낀 손을 잡은 희성이 혀를 더 깊게 들이밀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거칠게 움직이면서도 마지막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멀어진 희성이 눈을 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터뜨리는 숨이 서로의 입술에 닿았다. 타액이 늘어졌다가 뚝 끊겼다. 희성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도윤을 봤다. 도윤의 눈동자에는 자신이 담겨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롯이 자신만이 도윤의 눈동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도윤이 쳐다보는 사람은 자신이었고, 약지에 끼워진 반지도 자신이 준 것이었다. 한 달도 더 전에 선물했었던 반지였다. 고개를 숙여 도윤의 손을 바라본 희성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등을 쓸어보았다.
손을 뒤집자 없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흉터가 드러났다. 빠져나가려는 손을 잡아다 몸을 숙인 희성이 흉터에 입을 맞췄다. 눈을 감고 벅찬 감정을 정리해 보려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힘을 주었지만 아프지는 않게끔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뗀 희성이 몸을 일으켰다.
귓가가 빨갛게 익은 도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 손목이 홧홧했다. 젖은 입술을 안으로 감쳐 문 도윤이 손목을 다른 손으로 덮으며 주차장을 쳐다봤다. 에어컨을 틀어놓았는데도 내부가 더웠다.
“잘 어울려.”
“응….”
“예뻐.”
“뭐어….”
“고마워.”
볼에 뽀뽀를 해주고 떨어진 희성이 자신의 약지에도 자리를 잡고 있는 반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어색하게 안전벨트를 쥐고 창문에 머리를 기댄 도윤이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희성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표정. 벅참을 억누르려 애쓰던 표정. 기분이 이상해진 도윤은 도로를 달리는 내내 애꿎은 반지만 만지작거려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먼저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커플 한 쌍과 함께 같은 층에서 내린 두 사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앞서 걸어가는 커플도 같은 곳에 가는 듯 보였다. 희성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도윤을 따라 걸었다.
식당 앞에는 웨이팅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힐끗 살펴본 내부에도 테이블마다 사람이 꽉 차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머뭇거린 도윤이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예약하셨나요?”
“네, 하도윤으로 2시에 예약했었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운터에 서서 예약 명단을 훑어본 직원이 음? 하며 명단을 재차 확인했다. 옆에 서서 직원을 내려다보던 희성이 마침 도윤의 뒤를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하곤 도윤을 앞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죄송하지만 명단에 없으셔서…. 성함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오, 오늘 예약했는데. 하도윤이에요.”
당황했는지 팔로 감고 있는 몸이 바르작댔다. 도윤의 이름을 찾아 명단을 넘겨보던 직원이 혹시나 싶어 내일 날짜로 예약된 명단을 훑어 내렸다.
“고객님, 예약이 내일로 되어있네요.”
“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직원을 쳐다본 도윤이 핸드폰을 꺼내 예약했던 페이지에 들어갔다. 분명 오늘 예약을…. 했었는데 어째서 내일로 되어있는 거지? 뻣뻣하게 굳어버린 도윤의 허리를 만지작대다가 고개를 든 희성이 물었다.
“예약을 오늘로 바꿀 수는 없나요?”
“오늘 예약은 이미 다 차버려서요.”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지금은 대기 중인 팀이 많아서…. 저녁쯤 가능하실 것 같아요.”
매니저님, 잠깐…. 누군가 말을 걸자 직원이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곤 사라졌다. 아까부터 말도 없이 굳은 도윤의 허리를 쓸어준 희성이 입을 열었다.
“먹고 싶으면 기다려도 돼.”
“…….”
“기다릴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예약 페이지만 내려다보던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인 줄 알았어….”
“여기 먹고 싶었어?”
“맛있다고 해서…. 너, 너도 이런 거 좋아하니까….”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골랐다는 말에 희성이 갸웃거리는 사이 직원이 돌아와 둘을 쳐다봤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소침해진 도윤이 먼저 말을 건넸다.
“저 내일 예약 취소 가능할까요?”
“취소 도와드릴까요?”
“네….”
예약을 했던 것처럼 취소를 하는 것도 빨랐다.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온 도윤은 터덜터덜 걸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연우에게 추천을 받은 곳이었는데 아쉬웠다.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여기 말고 생각해둔 곳도 없어 더 막막했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오르는 내내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안전벨트를 당기며 입술을 내밀었다.
“뭐 먹고 싶어?”
“그냥….”
“어떤 거.”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여기랑 비슷하면 돼?”
“그냥 너 먹고 싶은 거어.”
힘 빠진 목소리가 늘어졌다. 볼을 긁적이며 차를 출발시킨 희성이 순간 떠오른 가게로 향했다. 파스타를 먹고 싶었던 것 같으니까 비슷한 메뉴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겠지 싶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과 비슷한 점이라고는 메뉴가 다였지만 도윤은 맛있게 먹어주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정신이 퍼뜩 들어 입을 닦은 도윤이 물을 마시는 희성을 훔쳐봤다.
오늘은 자신이 알아보고 직접 예약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해가 지면 소화를 시킬 겸 거리를 구경하고, 카페에 잠깐 들렀다가 예전에 함께 갔었던 한강에 가는 것이 도윤의 계획이었다.
점심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맛있는 식사를 했으니 다음은 소화를 시킬 겸 거리를 걸으며 구경을 할 차례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핸드폰을 보는 희성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난 도윤은 화장실이 있는 방향이 아닌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평소에 희성이 해주던 것을 제가 다 해보고 싶었다. 가격이 조금 세기는 해도 매일 고가의 선물을 주는 희성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턱없이 모자랐다.
계산을 먼저 하러 왔다는 말에 카드를 받아 결제를 마친 직원이 도윤에게 카드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이며 자리로 돌아온 도윤은 희성과 함께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을 하겠다는 희성에게 이미 결제가 끝났다며 웃어준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희성이 뒤를 돌아보자 한껏 의기양양해져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윤이 있었다. 도윤이 돈을 썼다는 사실에 희성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네가 계산을 왜 해.”
“오늘은 내가 사주는 날이야.”
“카드 줘.”
“왜?”
“취소하게.”
취소를 왜 해? 도윤이 고개를 젓자 희성이 성큼 다가와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싫어! 도윤이 작게 소리치며 몸을 뒤로 빼자 희성이 턱을 비틀었다.
“다음부턴 이런 짓 하지 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당했던 태도가 조금 죽어버렸다. 가게를 나오며 입술을 씹은 도윤이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나도 사주고 싶을 수도 있지…. 꼭 그렇게 정색을 해야 하나? 나도…돈 있는데….
생각해 보면 희성은 제게 뭘 받는 걸 싫어했다. 아니, 근데 제주도에서 준 빼빼로는 아직까지 먹지도 않고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런 건 왜 싫어하는 건데? 희성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꿍얼댄 도윤이 주차장으로 가려는 몸을 잡아당겼다.
셔츠의 끝자락을 당기는 힘에 뒤를 돌아보자 도윤이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집에서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도윤에게 검은색 데님 셔츠와 같은 색인 면바지를 들이밀었더니 오늘도 희성의 취향대로 입게 된 도윤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좀 걸으면 안 돼…?”
“너 덥잖아.”
“나는 괜찮아.”
“그럼 그렇게 해.”
비슷한 색으로 맞춰서 입으니 꼭 커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성은 자신이 입고 있는 남색 셔츠와 도윤이 입고 있는 검은 셔츠를 번갈아 보았다. 그늘을 찾아 걷던 도윤이 시선을 눈치채고 옷을 내려다봤다.
“왜? 나 옷에 뭐 묻었어?”
먹다가 흘렸나…? 옷을 들추는 도윤을 빤히 보던 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디?”
“거기.”
“안 보여, 어디?”
동글동글 귀여운 머리통이 인사를 하듯 숙여졌다. 아래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에 작게 웃은 희성이 거짓말임을 알려주자 쑥 올라온 도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거짓말해?”
“그냥.”
“왜 자꾸 나 놀려?”
“알려줘?”
“내가 너 놀리면 기분 좋아?”
“응.”
“난 하나도 안 좋거든?”
희성이 씩씩거리며 지나쳐 걸어가는 도윤을 따라 보폭을 늘렸다. 매일 귀엽게 구니까 자꾸 괴롭히고 싶어지지. 속으로만 대꾸해 준 희성이 은근슬쩍 손을 잡자 화들짝 놀란 도윤이 손을 밀어냈다. 밖이잖아! 누가 봤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얼굴을 잡아다가 뽀뽀나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희성과는 주로 집에서만 지냈으므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희성은 구경보단 도윤을 끌어당기며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게끔 신경 썼다.
마켓이 열렸는지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곳을 기웃거리던 도윤이 그 옆 건물에서 무리를 지어 나오는 학생들을 발견하곤 시선을 고정시켰다.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손에 사진을 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 같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켓에 흥미가 떨어진 도윤이 희성의 팔을 잡고 옆 건물로 향했다. 내부가 온통 분홍색이라 들어가기가 꺼려졌지만 도윤이 잡아당기니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희성이 안을 둘러봤다. 벽마다 사람들이 찍고 붙여둔 사진이 가득했다.
이런 걸 왜 벽에 붙여두는 거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마침 밖으로 나가려던 사람들이 도윤과 희성을 힐끔거리며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빴다. 집에 가고 싶었다.
사진이 가득 붙어있는 벽의 반대편에는 모자나 가발, 안경 그 외에도 꾸밀 수 있는 소품들이 쌓여있었다. 도윤은 만화 캐릭터 모자를 머리에 써보곤 옆을 돌아봤다. 찝찝하게 서있던 희성의 얼굴에는 얼른 나가고 싶다는 말이 써져있었다.
“그걸 왜 써.”
“너도 쓸래?”
“…….”
“나는 빨간색 썼으니까 너는 파란색 써.”
“…….”
“내가 파란색 쓸까…?”
빨갛고 파란 털모자 가운데에는 커다란 눈알이 박혀있었다. 거절을 하려고 해도 도윤이 옆에서 쓰고 사진을 찍고 싶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어 어려웠다. 남들이 다 쓰고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하니 찝찝해서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희성이 쓸 파란색 모자를 들고 서 있던 도윤이 시무룩하게 모자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도윤이 얼굴을 무기로 쓸 때면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삼키며 모자를 들자 도윤이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거울을 봤다.
“어때? 이거 쓰고 찍을까? 아니면….”
“아무거나 써.”
“공룡 할까?”
“너 하고 싶은 걸로 해.”
“같이 써줄 거야?”
“…대충 골라.”
공룡과 만화 캐릭터 중에 뭘 쓰고 찍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도윤이 결국 공룡을 내려두었다. 실실거리며 천으로 가려진 공간에 들어온 도윤이 이것저것 만져보더니 제 카드를 꺼냈다. 쓰고 찍기로 했으면서 아직도 모자를 손에 들고만 있던 희성이 눈가를 구기며 도윤의 카드를 뺏어들었다.
“왜?”
“왜 자꾸 네 돈을 쓰려고 해?”
“그러면 안 돼?”
“안 돼. 내가 싫어.”
“네가 왜? 나도, 나도 돈 있어!”
짐짓 엄한 얼굴을 보이며 카드를 꽂은 도윤이 새초롬하게 돌아봤다. 카드는 이미 꽂았고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모자를 쓰고 나란히 선 둘은 대뜸 시작된 카운트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첫 번째 사진을 날렸다. 사진을 새로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다행이었다. 도윤이 기계 앞에서 스틱을 쥐고 화면을 콕 찍었다. 아까 찍었던 사진이 없어지고 새로운 화면이 떴다.
“어, 어떻게 찍지?”
“그냥 찍어.”
“으응, 조금 웃어봐.”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선 두 사람은 화면을 응시했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카운트에 도윤이 웃었고 희성은 담담하게 카메라를 쳐다봤다. 찰칵. 찍힌 사진을 확인한 도윤이 뚱하게 희성을 돌아봤다.
“웃어야지.”
“이거 꼭 쓰고 찍어야 돼?”
“싫어? 왜? 귀엽잖아….”
“너나 귀엽지.”
“…벗고 찍어, 그럼.”
꿍얼꿍얼. 도윤이 모자를 벗어 바닥에 마련된 바구니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마찬가지로 모자를 던져서 넣은 희성이 머리를 정리했다. 모자만 벗었을 뿐인데 아까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카메라를 보며 어색하게 서있던 도윤의 허리를 당겨 안자 타이밍 좋게 사진이 찍혔다.
놀라서 커다랗게 뜨인 눈이 웃음을 머금은 희성을 향해있었다. 희성만 잘 나오고 자신은 영 이상하게 찍혀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왜, 왜 안아? 사진 이상하게 찍혔잖아!”
“예뻐.”
“안 예뻐.”
“내가 예쁘다면 예쁜 거야. 너 예뻐.”
울상으로 화면을 보던 도윤이 줄어드는 숫자를 보고 사진을 찍기 위해 웃어 보였다. 예쁘게 웃고 있는 도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희성이 입꼬리를 올리자 도윤이 신나서 입까지 벌리고 웃었다.
네 번 만에 만족스러운 사진이 찍혔다. 보조개가 피어있는 볼이 예뻤다. 이제 마지막 사진만 찍으면 끝이었다.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웃고 있는 도윤의 볼을 잡아 돌린 희성이 입을 맞췄다. 밀어내기도 전에 찰칵, 소리가 났다.
놀라서 희성을 밀친 도윤이 입술을 틀어막고 눈을 깜빡였다. 다시 찍을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초반에 써버렸기 때문에 뽀뽀를 한 사진을 마지막으로 기계가 웅, 웅 소음을 내며 사진을 뱉어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어버버 거리고 있는 도윤 대신 사진을 꺼내든 희성이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에 어깨를 으쓱였다.
“가자.”
“왜 뽀…그거 해!”
“좋아서.”
왜 뽀뽀를 했냐는 말은 크게 소리칠 수가 없는지 목소리가 작았다. 모자를 들고 밖으로 나온 도윤은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오늘만큼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놀고 싶었는데 희성에게 그걸 바란 제가 바보였다.
모자를 제자리에 두고 가게를 나서는 내내 입술을 못살게 굴기 바빴지만 결과물은 또 궁금해서 희성에게 다가간 도윤이 사진을 구경했다.
첫 번째 사진엔 빨간 모자를 쓴 채 웃고 있는 한 사람과 파란 모자를 쓴 채 무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한 사람이 있었고, 두 번째 사진엔 희성에게 안겨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도윤이 있었으며 세 번째 사진에는 도윤과 희성 두 사람이 모두 예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엔 희성의 손에 얼굴이 붙잡혀 뽀뽀를 당하는 도윤이 있었다.
벽에 붙은 사진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분위기였는데 희성이 들고 있는 사진에선 그런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 어색하거나 이상했다. 유일하게 잘 나온 것은 세 번째로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웃고 있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잘 웃을 줄 알면서 왜 매일 정색을 하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윤이 사진을 한 장 가져와 세 번째 컷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키도 비슷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제일 평범한 사진이라 마음에 든 점도 있었다.
“이거 잘 나왔다. 그치?”
“이제 집에 가자.”
“벌써?”
“집에 안 가?”
“으응, 나 목말라서…카페 갈까?”
집에 가고 싶은데. 사진 속 도윤과 코앞에 있는 도윤은 번갈아 가며 보던 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갈 때 차를 타야 하니 근처에 있는 개인 카페에 들어와 각자 메뉴를 주문하고 앉았다. 음악으로 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컵에 있는 얼음이 달각거리며 부딪쳤다. 희성은 테이블에 올려둔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에 반지를 끼고 다녀본 적이 없는 탓인지 무의식중에 자꾸만 반지를 낀 손가락에 손이 갔다. 아이스초코를 마시곤 반지를 내려다본 도윤이 살살 돌려보았다. 반지가 낯설었다. 다른 사람의 반지를 빌려 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침 고개를 든 희성이 시선을 내려 반지를 쳐다봤다. 도윤이 끼고 있으면 예쁠 것 같다고 막연히 상상만 했었는데 정말로 도윤을 위해 만들어진 반지는 제 주인을 찾아 예쁘고 잘 어울렸다. 나랑 같은 반지. 희성이 반지를 엄지로 쓸어보다가 도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레 허리를 감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 희성이 숨을 들이쉬었다. 잔잔한 피아노의 선율을 들으며 도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져보았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손바닥을 뒤집어 손목을 쓰다듬자 도윤의 시선이 따라왔다.
흉이 진 손목을 보고 있으면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도윤을 때리지도 않을 거고, 도윤에게 소리치지도 않을 텐데. 당시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안아줬어야 했다. 도윤의 말을 한 번이라도 침착하게 들어줬어야 했다.
상처를 쓰다듬으며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희성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고 손가락만 움찔거린 도윤이 시간을 확인했다. 계절 특성상 해가 늦게 지기는 하지만 지금 출발하면 적당히 어두워졌을 때 도착하겠다 싶었다.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는 것보단 그편이 더 나았다.
“나갈까?”
“집에?”
“으응, 집 말구.”
“또 어딜.”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는 티를 내며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깍지를 낀 희성이 어깨에 턱을 얹었다. 뒤에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이런 자세는 좀 곤란했다.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 어깨를 슬쩍 내리자 희성이 깍지 낀 손을 들어다 반지에 입술을 비볐다.
“하지 마.”
“집에 가자.”
“거기만 갔다가 가면 안 돼?”
“어디.”
“가보면 알아!”
“집에 가고 싶어.”
깍지를 풀고 먼저 일어난 도윤이 컵 두 잔을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얼른 집에 가서 도윤을 끌어안고 싶은데 온종일 어딜 그렇게 간다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은 집에만 있어도 충분한 날이었다. 왜냐면 도윤이 반지를 껴주었으니까. 반지를 끼고 있는 도윤과 집에서 자유롭게 뒹굴기만 하고 싶었다.
컵에 남아있었던 음료를 일회용 컵에 옮겨서 차에 탄 도윤은 핸들을 쥔 희성을 대신해 내비게이션을 콕콕 찍었다. 어딜 가나 했더니 한강이었다. 한강엘 왜 가고 싶어 하는 건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쉰 희성이 차를 출발시켰다.
지금이 퇴근 시간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퇴근 시간과 맞물리니 도로가 꽉 막혀있었다. 해가 완전히 져버리기 직전의 하늘이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어 조금 기대를 했었는데 다 의미가 없어졌다. 두 사람은 사방이 어두워진 뒤에야 한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오자고 했던 곳이라 눈치가 보였다. 도윤이 다 마신 음료 컵을 버리기 위해 차에서 내리면서도 희성의 눈치를 봤다. 쓰레기통이라도 빨리 보였으면 좋겠는데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사람과 강아지가 다였다.
“쓰레기 줘.”
“쓰레기통 있어?”
“버리고 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응, 근데 같이 가도 되는데.”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그대로 있어.”
“으응.”
분명 제가 봤을 때는 쓰레기통이 없었는데 희성은 쓰레기통을 잘도 찾아갔다. 말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제자리에 서서 희성을 기다린 도윤은 해가 져 어두워진 물을 봤다. 건물에서 반사된 빛을 품은 물이 일렁였다. 예전에도 이런 풍경을 봤었던 것 같은데…. 무의식중에 반지를 만지고 있자 쓰레기를 버린 희성이 다가왔다.
“우리 저기 앉자.”
그때와 같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운 좋게 비어있는 벤치가 있었다. 앉기 전에 대충 손으로 툭툭 털어준 희성이 도윤을 앉히고 그 옆을 차지했다. 해가 져도 더웠다. 희성이 더운 걸 싫어했으니 오래 앉아있지는 못할 듯싶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치킨과 술을 먹고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도 많았고,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묵묵히 찰랑이는 물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몸을 흔들며 웃는 사람들을 눈에 담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우리 예전에, 같이 밥 먹고…여기 왔었는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이번에는 건너편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때 나 여기 처음 왔었다고 했잖아.”
“응.”
“난 너랑 있으면서 처음해 보는 게 너무 많았어.”
“…….”
“난 그게 너무 싫었어. 알아?”
“…응.”
희성은 욱신거리는 가슴에 반지를 만지며 볼 안의 살을 문질렀다.
“거짓말.”
“…….”
야경을 구경하던 도윤이 고개를 돌려 희성과 마주 봤다.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전에…제주도에서….”
“응.”
“내, 내가 약속 까먹어서 너 오래 기다리게 했던 날.”
고개를 숙여 희성의 손을 바라본 도윤이 반지를 훑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도 내가 밉거나, 나한테 화나지는 않았어?”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다부진 손이 얇고 긴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많은 눈을 다 맞으면서 서있었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게…돼?”
“너한테 쓰는 시간은 안 아까워.”
“…….”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네 거야. 네 마음대로 써도 돼.”
희성이 손등을 살살 쓸어주며 눈을 맞춰왔다. 부모님에게도 이런 애정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무섭기도 했고, 마음이 요란해지기도 했다.
“사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또…. 난…너처럼 할 자신이 없어.”
“네 몫까지 내가 대신해줄게.”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도윤이 시끄러운 속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물었다가 놓아주었다.
“내가 오늘 왜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야 한다고 했는지 알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힘을 준 희성이 고개를 저었다. 도윤은 침을 한번 삼키곤 입을 열었다.
“널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 평범하게. 남들처럼 똑같이.”
“응.”
“친구를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사진도 찍고 놀러 다니면서.”
“…….”
“난 이렇게 지내고 싶어.”
희성의 앞이면 늘 말을 더듬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도윤이 이번만큼은 말도 더듬지 않고 눈도 똑바로 맞춰왔다. 희성은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도윤이 원하는 삶. 오늘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하루였다. 도윤은….
“너랑. 평범하게.”
“…나랑, 평범하게.”
도윤의 말을 따라 하며 곱씹은 희성이 고개를 숙여 하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봤다. 도윤이 원하는 삶은 그런 거구나. 자신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일 수도 있었다. 도윤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나머지 그 사실을 모른 척 외면하며 살아왔다. 희성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가르쳐줘.”
“으응.”
“노력할게.”
“같이 노력하면…돼.”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이 웃었다. 반지를 낀 손으로 희성의 손을 잡고서, 희성이 유독 좋아하는 보조개까지 보여주며. 같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유독 반짝거렸다.
시작점은 달라도 서툰 것은 비슷했다. 희성은 도윤을 사랑하기에 아직 서툰 부분이 많았고, 이제 막 새로운 감정을 알아가기 시작한 도윤도 서툰 것이 많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서툰 부분을 채워나갈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다고, 너라면 언제든 기다릴 자신이 있다는 말에는 거짓이 없었고 함께 노력하면 된다던 웃음에도 거짓은 섞여 있지 않았다.
도윤의 마음속에 새로운 길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낯선 길의 끝에는 희성이 서 있을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도윤은 자신을 기다려주는 한 사람을 위해 낯선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걸음을 옮기다 방향을 잃어도 좋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그 길의 끝에는 희성이 서 있을 테니.
구원의 자격 외전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