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외전) (24/27)

그 후의 이야기

  

  

새로운 집에 처음으로 들어온 도윤은 놀라기도 잠시 곧바로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CCTV가 없는지 확인했다. 도윤과 약속했던 것처럼 집에는 CCTV도 없었고 도윤이 혼자서 쓸 수 있는 방도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방마다 문이 달려있었다는 점이었다. 지켜야 할 것을 정할 때 문은 생각도 나지 않아 말하지 못했었는데 멀쩡히 잘 달려있는 문을 보니 마음이 더 편해졌다. 그 후로 도윤은 마음이 조금 편해져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집을 구경했다.

도윤이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희성이 지켜야 할 것들을 정리해서 뽑아온 종이는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도윤은 물을 마시거나 주방에 갈 일이 생기면 그 종이를 보고 혼자 뿌듯해져 지장이 바르게 찍혀있는 부분을 아주 유심히 보곤 했다.

이제 도윤에겐 핸드폰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날 희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핸드폰을 사주는 것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기종으로 사주곤 자기 번호부터 저장하기도 했다. 도윤은 그 핸드폰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기도 했고, 서준과 정우, 그리고 현지에게도 전화를 했다. 희성과는 매일 함께 있으니 딱히 전화를 할 일은 없었다.

희성이 더 이상 무섭게 굴지도 않고 밤마다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지도 않으니 도윤은 먹기도 잘 먹었고 잠도 잘 잤다. 도윤은 희성과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몸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희성의 경우는 좀 달랐다.

희성은 도윤이 집으로 돌아온 후 일주일 정도를 잠도 자지 못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도윤이 또 언제 집을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온몸을 억눌렀던 것이다.

도윤은 밤에 잘 시간이 되면 알아서 씻고 잘 자라는 인사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들어가 자곤 했는데 희성은 혹시나 자신이 자고 있는 사이 도윤이 도망을 칠까 봐 겁이 나 도윤의 방문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희성은 일주일 동안 차마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손잡이에 손만 올렸다가 내려놓기도 했다. 어둡고 고요한 새벽은 희성이 땅을 파고 들어가기 딱 좋을 시간이었다.

희성은 도윤이 자러 들어간 밤부터 해가 뜨는 아침까지 매일 그 짓을 반복했다. 덕분에 머리는 또 깨질 듯 아팠고 입맛도 사라져 함께 식사를 하러 앉으면 물만 마셔댔다.

도윤이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희성은 자신의 상태가 더 악화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 도윤도 희성을 보면서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수면제라도 다시 처방받아야 할 것 같았다.

희성은 집을 나서기 전까지 도윤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바로 전화를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혹시 어디 나갈 일이 생겨도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라는 말도 했다. 집에 도윤을 혼자 두자니 너무 불안했다.

자신이 병원에 가는 사이 도윤이 또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희성은 신발까지 신고도 한참을 도윤의 손만 붙잡고 있었다. 정작 도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알겠다며 고개만 끄덕였는데도.

수면제를 처방받으러 간 병원에서 희성은 의사의 권유로 상담을 받았고 결국 불안증이 정도를 모르고 치달아 수면제뿐만 아니라 다른 약까지 함께 처방받고 돌아왔다.

도윤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숨도 가빠졌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수준으로 차를 몰고 돌아온 희성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도윤을 보자마자 끌어안았다.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도윤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희성은 약을 자신의 방에 두었다. 도윤이 자신의 방에 들어올 일은 없으니 이렇게만 둬도 괜찮겠지 싶어서였는데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삼일 정도가 지났을 때 혼자 집 구경을 하러 돌아다니던 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

희성의 방에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 괜히 주변만 기웃거린 도윤은 뭐 어떤가 싶어 들어간 방에서 책상 구석에 처박혀있는 약을 발견했다. 처음엔 비타민인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찾아보니 정신과에서 처방해 주는 약이었다.

도윤은 자기가 잘못 읽은 줄 알고 창을 껐다가 다시 검색을 했다. 그러나 검색 결과는 똑같았다. 희성이 이걸 왜? 도윤은 약을 들고 희성을 찾아 나섰다.

희성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다가오는 도윤을 올려다봤다. 도윤이 소파에 앉으면 끌어안고 잠깐이라도 잘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던 희성은 갑자기 눈앞에 내밀어진 약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윤은 희성에게 어디 아프냐며, 이걸 네가 왜 먹고 있냐고 물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도윤을 옆에 앉힌 희성은 어깨에 기대 침만 삼켰다. 정적이 길어지자 도윤은 너 진짜 어디 아파? 하며 진지하게 물어왔고 도윤이 약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면 네가 또 어디론가 가 버렸을까 봐 너무 불안해.’, ‘밤에 네가 문을 닫고 들어가면 숨도 못 쉴 만큼 불안해서 잠이 안 와.’, ‘내가 잠깐 외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네가 없을까 봐 미칠 것 같아.’, ‘자고 일어났는데 네가 없으면? 또 내가 싫어서 사라진 후면?’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도윤을 잡은 희성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성이 그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을 줄 몰랐다. 자신은 돌아왔고, 늘 집에서 함께했기 때문에 괜찮겠지 싶었다.

희성의 고백 이후로 도윤은 오랜 고민 끝에 문을 열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희성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나니 행동 하나하나가 어려웠다.

욕실을 갈 때도 욕실에 다녀오겠다며 행선지를 말하곤 했고 잠깐 근처의 편의점에 가고 싶을 때도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다. 욕실까지는 따라오진 않았지만 도윤이 가는 곳이 집 밖인 편의점이면 희성은 하던 일도 그만두고 따라왔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희성은 이제 약을 먹지도 않았고 밤마다 도윤의 방으로 들어와 도윤을 끌어안고 잠을 잤다. 찾아보니 정신과에서 처방해 주는 약은 함부로 끊으면 안 된다고 하던데…. 도윤이 걱정했지만 희성은 너만 있으면 다 괜찮다는 대답만 들려줄 뿐이었다.

***

희성의 상태가 좀 괜찮아지나 싶었던 시기에 새로운 일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희성이 화를 내지 않고 도윤이 하자는 일이면 뭐든지 하고 보는 날들이 계속됐던 때가 있었다. 도윤이 나가고 싶다고 하면 희성은 초조해졌지만 또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눈을 떴을 때 도윤이 없을까 봐 외출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처음에는 희성이 너무 불안해해서 혼자면 집 앞에도 나가지 못했지만 이제는 버스도 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도윤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과정은 조금 힘들었지만 결국엔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 서점에 가기 위해 홀로 버스에 오른 도윤은 창문을 살짝 열어 찬바람을 쐬며 자유를 되찾은 과정을 떠올렸다. 희성과 제주도에서 썼던 계약서와는 또 다른 계약서를 쓰는 날이었다.

‘30분!’

‘1분.’

‘…25분.’

‘5분.’

‘…20분.’

‘10분.’

‘30분!’

‘10분.’

‘…….’

‘5분.’

‘10분….’

두 사람은 흰 종이를 가운데에 두고 도윤이 홀로 외출을 하는 날이면 희성에게 언제 언제 연락을 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한 시간이라고 패기 있게 날렸던 도윤의 말은 듣지도 않는 희성에 의해 기각 당했다.

솔직히 일 분은 너무했다. 일 분으로 정한다면 도윤은 밖에 나가서 핸드폰만 봐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삼십 분이 제일 적당했는데 희성은 자꾸만 시간을 줄여댔다. 도윤은 어쩔 수 없이 십 분으로 합의를 봤고 그 종이는 이번에도 냉장고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매번 올 때마다 희성과 함께했던 서점에 혼자 오니 기분이 색달랐다. 도윤은 사야 할 것들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다른 물건들에 홀려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면 쓸모도 없을 물건들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 이런 걸 사 가면 희성이 이런 건 대체 어디에 쓰냐며 물어볼 것이 뻔했기에 도윤은 구경만 했다. 서점에 잘 갔는지 궁금해하는 희성에게는 대충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올 때는 가벼웠던 가방이 서점에서 산 책들로 무거워졌다. 제주도에서 돌아다녔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엔 현지와 전화도 했었는데 자꾸만 언제 놀러 오는 거냐고 재촉하는 바람에 날이 따뜻해지면 가겠다고 약속까지 해야 했다. 물론 옆에서 대화를 훔쳐 듣는 희성의 기분은 안 좋아졌지만.

도윤은 가방이 무거워도 다 좋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도윤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희성이 또 그새를 못 참고 전화를 한 건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빠?’

-도윤아 집이야?

‘으응, 밖이에요! 왜요?’

-아빠 서울 올라왔는데….

‘지금? 지금 올라오셨어요? 어디예요?’

전화를 건 주인공은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서울에 올라왔음을 전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아버지는 대답을 피했고 도윤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희성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도윤이 걱정을 하며 급히 정류장에 섰다.

희성에게는 가는 길에 아버지가 서울에 오셨는데 집으로 가도 되냐는 문자를 보냈었다. 읽어놓고도 잠시 답장이 없던 희성은 삼분 정도가 지난 후에 그러라며 답장을 보내주었다. 도윤은 버스에서 내려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도윤이 도착하고도 이십 분 정도가 지나 도착을 했고 도윤을 보자마자 얼굴을 살펴댔다.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향한 도윤은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희성을 보며 몸을 떨었다.

연석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도윤의 침대에 늘어져 있던 희성은 전화를 끊은 그 순간부터 현관에 서 있었다. 진작 찾아가 사과를 했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 그러질 못했다.

도윤을 따라 집으로 들어선 연석은 희성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희성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연석은 헛기침을 하며 지나쳤다. 희성의 옆에 서서 그런 둘을 바라보던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희성은 연석이 마실 물을 컵에 따라 가져왔지만 또 무시당했다. 가운데에 낀 도윤만 안절부절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연석은 딱 봐도 도윤의 방처럼 보이는 곳을 한참이나 훑어보다가 뒤를 힐끔거렸다.

자신의 뒤에는 도윤이 있었고 그 뒤로는 희성이 있었다. 연석은 도윤과 할 이야기가 있다며 문을 닫았다. 희성은 닫힌 문 앞에 서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도윤아, 여긴 아니야. 다른 집 알아보자. 아빠가 알아볼게.’

‘네?’

‘도저히 안심이 안돼서 그래.’

‘어….’

‘아빠 말대로 하자, 응?’

‘…저 괜찮아요. 희성이도 전처럼… 안 그래요.’

‘정말 괜찮아? 저놈이… 너한테 또….’

혹여나 희성이 듣고 있진 않을까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 연석을 물끄러미 보던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걱정하시는 그런 일 전혀 없었어요. 연석은 정말이라는 듯 웃기까지 하는 도윤을 보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제가 꼭 연락드린다고 말했었잖아요. 저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빠.’

‘응.’

‘진짜 걱정하시는 일 하나도 없었어요.’

보세요, 제 방도 있고 햄스터도 마음대로 키워도 되고, 오늘은 혼자서 밖에도 나갔다가 왔어요! 도윤은 아버지를 위해 웃어 보였고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던 연석은 입가를 매만졌다.

도윤과 그의 아버지가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희성의 초조함은 배가 되었다. 연석은 도윤을 데리러 온 게 분명했다. 도윤은 아버지를 좋아하니까 아버지를 따라갈 가능성이 컸다. 불안하게 손톱을 뜯던 희성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온 도윤이 희성을 힐끔거렸다. 도윤의 뒤로는 그의 아버지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도윤은 아빠가 너랑 얘기 좀 하고 싶대. 하고 연석이 자신과 대화할 마음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희성의 속은 연석이 도윤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할까 봐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집에서 대화를 나눠도 됐지만 희성과 연석은 밖으로 나와 카페를 찾았다. 굳이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일어난 희성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연석의 입에선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카페에 앉아 한참을 침묵만 유지했다. 연석은 어떻게든 도윤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고, 희성은 무슨 말을 어떻게 먼저 꺼내야 할지 어려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 놓인 음료는 전혀 줄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정리한 희성이 먼저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희성이 먼저 꺼낸 말은 사과였다. 희성은 그동안 자신이 무례하게 군 것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희성에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사과를 받고도 입을 열지 않는 연석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넨 희성은 자신이 도윤을 좋아하고 있음을 밝혔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희성이 제 입으로 도윤을 좋아한다고 밝히니 연석은 적잖이 당황했다.

‘도윤이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제가 부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저한테는 도윤이가…필요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도윤이는 너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었는데.’

‘…죄송합니다.’

‘부모라는 게 도윤이가 힘들어하는 것도 몰랐으니….’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도윤이를 데리고 그 집에서 나오고 싶은데, 나는 도윤이를 이길 수가 없어.’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연석이 혀를 찼다. 희성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자신의 아들을 좋아한다는 희성을 보니 착잡하기만 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가늠도 되질 않았다.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혼자 앓는 것도 모르고 좋다고 일만 했으니…. 나중에 도윤의 어머니인 민영을 만나면 얼굴을 들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죄송하다는 사과만 반복하고 있으니 다른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어 보였다. 연석은 희성이 산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일어났다. 희성은 정적이 내려앉은 테이블에 남아 눈을 감았다.

도윤은 아버지에게 자고 가도 된다며 당장 내려가는 것을 말렸지만 연석은 용돈만 안겨주고 떠났다. 무슨 일이 있으면 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좋으니 전화를 해야 한다는 말은 떠나기 직전까지도 반복됐다.

괜찮다는 데도 억지로 안겨진 용돈을 쥐고 아버지를 배웅한 도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희성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나중에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될 듯싶었다.

희성은 연석이 다녀간 날 온종일 도윤의 근처를 서성였다. 도윤이 옷장이라도 열면 짐을 싸는 건가 싶어서 혼자 불안해했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면 또 떠나려고 씻는 건가 싶어서 불안해했다. 정작 도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씻고 나왔지만 희성은 방으로 들어가는 도윤의 뒤를 쫓기 바빴다.

희성은 그날 밤에 도윤에게 떠나지 말라고 빌었다. 자려고 침대에 앉은 도윤을 끌어안으며 자신이 다 잘못했고 앞으로 잘할 테니 제발 떠나지 말라고 빌었다. 아버지에게 사과도 했다며 다급하게 끌어안는 팔에 도윤은 할 말을 잃고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

희성은 오늘도 방문을 열고 자는 도윤의 곁으로 다가가 누웠다. 도윤이 없는 방에서 자기가 싫었다. 괜히 도윤의 아버지가 찾아왔던 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도윤은 얌전히 숨만 색색 뱉으며 자고 있었다. 도윤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호흡에 안정이 찾아왔다.

희성은 정자세로 자고 있는 도윤을 옆으로 돌려 팔을 자신의 목에 둘렀다. 그리곤 도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은 도윤의 가슴팍에 묻었다. 도윤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도윤을 끌어안고 자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도윤에게 안겨 자는 것도 좋았다.

도윤이 없을 때는 잠도 오지 않았는데 도윤을 끌어안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잠이 솔솔 쏟아졌다. 저에게 나는 냄새가 도윤에게도 똑같이 나고 있었다. 희성은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싣고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혼자였던 도윤은 이제 혼자가 아닌 둘이 되었다. 희성의 상태를 알게 된 후로 문을 조금 열어두고 자면 늘 희성이 찾아와 함께 잠을 자곤 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니 앞에는 희성이 있었다. 밤마다 잠을 못 잔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요즘 도윤은 희성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커튼을 쳐둬서 방안은 어두웠지만 대충 아침이 찾아왔다는 것쯤은 알았다. 도윤은 한참을 누워 잠에서 깨는 동안 희성을 구경했다. 저번 주에는 입술이 터 있더니 오늘은 좀 나았다. 만져보지는 못하고 눈으로만 훑어본 도윤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허리에 감긴 팔에서 벗어났다.

희성은 오늘따라 꽤 깊게 잠든 것 같았다. 보통 도윤이 침대에서 내려올 때쯤엔 일어나 도윤을 찾곤 했는데 오늘은 미동도 없었다. 소리를 죽여 침대에서 벗어난 후 뒤를 돌아봤지만 희성은 고요했다.

이럴 때라도 좀 잤으면 했기에 문까지 살살 닫은 도윤은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나왔다. 배가 고프기 전에 뭐라도 만들어둘까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주방 일을 해주시는 분이 아직 오지 않아 텅텅 비어있었다.

흠. 도윤이 물을 마시곤 조용한 집을 둘러봤다. 아니면 나가서 사 올까? 희성은 아직 자니까…. 도윤이 물을 넘기며 생각했다. 요즘 희성의 상태도 조금 좋아졌고 당장 자고 있으니 빠르게 다녀오면 괜찮을 수도 있었다. 물을 한 번 더 삼키고 컵을 내려둔 도윤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희성과 집 주변을 산책했을 때 봐둔 가게가 있었다. 케이크의 종류도 많았고 다른 빵들도 많아서 언젠가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늘 먹게 되었다. 도윤은 희성이 마실 아메리카노와 자신이 마실 아이스티, 그리고 샌드위치와 빵 몇 종류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으니 희성이 자고 일어나면 같이 먹으면 될 것 같았다. 희성의 허락도 없이 혼자 자유롭게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비밀번호를 꾹꾹 누른 도윤은 집에 들어와 신발도 가지런히 벗어놓고 복도를 걸었다.

아직 불이 다 꺼져있으니 희성이 자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캐리어를 식탁에 올려두기가 무섭게 뛰듯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몸이 휘청거렸다.

어어…. 커피를 내려둬서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바닥으로 다 쏟아졌을 뻔했다. 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조금 아팠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지만 이따금 떨리는 몸과 숨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디 갔었어.”

“…앞에 카페….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사람 시키지. 나 깨웠어야지.”

“너 자니까….”

“네가 또…가버린 줄 알았어. 내가 싫어서 네가 또 사라진 줄 알았어.”

“…….”

“도윤아, 가지 마. 그러지 마.”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몸이 안쓰러웠다. 도윤이 숨을 들이켜며 희성의 등을 토닥였다.

“너 자고 있어서…. 금방 다녀오면 괜찮을 줄 알았어.”

“안 괜찮아.”

“나는 그냥, 같이 먹으려고….”

“눈을 떴는데 네가 없었어. 침대에는 핸드폰도 그대로 있고, 드레스 룸에는 네가 입었던 옷만 있고, 계속 찾았는데 돌아오는 대답도 없고.”

“…….”

“제발…제발 도윤아….”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불안함을 토해내는 희성을 토닥여주던 도윤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입을 열었다.

“나 커피랑 샌드위치 사 왔어.”

“…….”

“씻고 와, 같이… 먹게.”

“같이 가.”

“욕실에?”

“응.”

“나는 이미 다 씻었는데….”

“나 씻는 거 봐.”

“그걸 왜…. 아, 알았어.”

그걸 왜 봐야 하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안긴 허리가 아파져 말을 아꼈다. 희성은 도윤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욕실까지 뒤뚱뒤뚱 걸었다.

희성은 정말로 도윤을 근처에 앉혀두고 씻었고 도윤은 멀뚱멀뚱 희성이 씻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물기를 닦고 돌아선 희성은 얌전히 앉아있는 도윤이 귀여워 얼굴 구석구석에 뽀뽀해 주곤 왔던 때와 같이 도윤을 끌어안고 식탁으로 향했다.

도윤은 자꾸만 자신의 위에 앉아 먹으라는 말을 무시한 후 희성의 품에서 어렵게 벗어났다. 도윤과 희성은 마주 보고 앉아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도윤이 만든 음식은 아니었지만 도윤이 자신을 위해 직접 사 온 음식이었다. 희성은 이것마저도 먹기가 아까워 아메리카노만 마시다 왜 먹지 않는지 의문을 가지는 도윤의 말에 묵묵히 포장을 벗겼다.

샌드위치는 제주도에서 도윤이 만들어준 것이 훨씬 더 맛있었다. 희성이 느끼기엔 그랬다. 하지만 도윤이 사 왔으니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만 움직여댔다. 앞에 앉은 도윤은 맛이 그저 그런 빵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도윤아, 이거 네 돈으로 계산했어?”

“으응.”

“내가 준 카드 쓰라고 했잖아.”

“나도 돈 있어.”

“그래도 내가 준 카드 썼으면 좋겠는데.”

“나도 돈 많은데….”

돈이 많다는 말을 끝으로 빵 먹으려던 도윤이 멈칫했다. 희성의 앞에서 돈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민망하기도 하고. 희성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더 머쓱했다.

“도윤아 혹시 김희준한테 뭐 받은 거 있어?”

“응?”

“김희준은 뭐…. 돌려받아야 할 게 있다고 하던데.”

희성이 도윤을 빤히 쳐다봤다.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으나 쳐다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도윤은 어색하게 눈알을 굴리며 아이스티를 쪽쪽 빨았다. 누가 봐도 받은 것이 있는 눈치였다. 희성이 샌드위치를 완전히 내려두었다.

“뭐 받았어?”

“…….”

“화 안 낼게.”

“…….”

“진짜 안 낼게. 알잖아. 응?”

“약속….”

도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약속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윤이 귀엽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서, 희성은 새끼손가락을 잡고 흔들었다. 새끼손가락이 잡힌 도윤이 입술을 달싹이다 우물쭈물 말했다.

“카, 카드….”

“…….”

“너 약속, 약속했어!”

“카드….”

“근데 나 한 번도 쓴 적 없어!”

“…….”

“진짠데….”

희성의 반응을 살피며 은근슬쩍 새끼손가락을 뺀 도윤이 남은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희성이 무슨 말을 하든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볼이 빵빵해져라 빵을 씹던 도윤이 컵을 들고일어났다. 보나 마나 또 자신의 방으로 도망을 갈 것이 뻔했다.

희성은 뒤를 힐끔거리며 도망가는 도윤을 눈으로 좇다가 마른 세수를 했다. 화는 났지만 화가 난 대상이 도윤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준에게 화가 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도윤을 끌어안고 싶어졌다. 당장 도윤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희성은 남은 샌드위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나 도윤에게 향했다. 이제 희성은 도윤을 끌어안고 싶으면 당장 달려가 끌어안을 수 있었다.

도윤의 냄새가 그리우면 언제든 도윤의 침대에 누울 수도 있었고 도윤의 옆에 붙어 코를 박을 수도 있었다. 도윤의 목소리가 그리우면 도윤을 부르면 됐고, 도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땐 도윤이 좋아하는 것을 해줄 수도 있었다.

도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희성은 이 정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둘의 관계에서 바뀌어야 할 사람은 도윤이 아니었다. 바뀌어야 할 사람은 오로지 자신 한 사람뿐이었다. 희성은 도윤을 위해 변하려고 노력했고, 비록 속도는 느릿하지만 변하고 있었다.

도망을 친 주제에 자신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둔 도윤이 미치도록 좋았다. 희성은 살짝 열린 문을 활짝 열어 도윤에게 달려들었다. 아직도 빵을 씹고 있던 도윤이 끙끙거리며 희성을 밀어냈다.

***

희성과 아버지를 제외하면 깨끗했던 도윤의 연락처에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생겨있었다. 정우와 사장님, 그리고 현지와 연락을 할 수 있는 수정의 번호도 있었고 얼마 전 희성과 산책을 핑계로 나왔었던 날 우연히 만났던 유정의 번호도 있었다.

유정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다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도윤을 한눈에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해왔었다. 이어폰을 뺄 생각도 못 하고 눈을 커다랗게 뜬 유정은 도윤의 이름을 크게 불렀고 밖인데도 자꾸만 손을 잡으려 하는 희성에게서 도망치려던 도윤은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주변을 돌아봤다.

유정은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자신과 연우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냐며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도윤의 뒤에 서 있던 희성은 입안의 살만 잘근잘근 씹으며 유정을 내려다봤다. 도윤은 희성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 앞에서 번호를 교환했다.

연우 언니한테도 네 번호 알려줘도 돼? 유정이 도윤의 번호를 저장하며 물었고 도윤은 또 뒤에 서 있는 희성을 힐끔거렸다. 그때의 희성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윤을 말리면 계약서에 쓴 조항을 어기는 꼴이 되고 도윤이 또 사라져 버릴까 봐 꾹 참아야 했다.

도윤과 연락이 닿은 연우의 반응은 유정과 똑같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말도 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고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왔다. 도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것이 다였다. 도윤이 답장을 보내는 동안 희성은 도윤을 끌어안고 있었다.

도윤은 연우와 유정에게 희성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연우와 유정은 착하고, 대학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니까 자신의 친구들이라고 소개를 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연우와 유정에게 희성을 뭐라고 소개해 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희성이 싫어해 실패로 돌아갔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있잖아, 내 친구들…이랑 같이 만나볼래?’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희성은 고민도 하지 않고 ‘싫어.’라고 대답하며 도윤의 앞접시에 반찬을 덜어주었다. 연우와 유정은 괜찮다고 했는데, 정작 본인이 싫다 하니 넷의 만남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희성은 도윤이 연우와 유정과 함께 만나 놀고 그것도 모자라 같은 채팅방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만이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도윤은 올라가는 말풍선들을 보며 웃기도 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보면서 웃는 도윤을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났다. 희성은 그럴 때면 은근슬쩍 도윤의 핸드폰을 내려두고 입술을 찾았다. 대화를 하고 있는데 방해를 하는 희성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입을 맞춰오면 도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밀려들어 오는 혀를 받아내는 것뿐이었다.

콩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놀고 싶어 케이지를 연 도윤이 손을 내려놓자 냄새를 맡던 콩이가 손바닥에 올라와 도윤을 올려다봤다. 그동안 희성이 잘 돌봐준 덕에 콩이는 아직 아픈 곳도 없이 건강했다.

콩이가 누군가의 집에서 지냈던 날들과 밖에서 지냈던 날들, 희성의 집으로 데려와 키웠던 날들, 그리고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날들이 생각보다 길어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병원을 찾았지만 콩이는 신기하게도 행복한 삶을 사는 중이라고 했다.

여전히 희성에게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또 여전히 침대나 소파에 올려두는 것을 싫어하긴 하지만, 도윤은 오늘도 콩이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내려주면 콩이는 잠시 냄새를 맡다가 소파를 뽈뽈 돌아다니고 도윤에게 간식을 얻어먹었다.

콩이에게 간식을 주고 자신의 간식을 꺼내온 도윤이 사탕을 입에 넣고 굴렸다. 희성이 사다 준 사탕이었는데 일반 마트나 편의점에서는 살 수가 없는 사탕이라고 했다. 전문가가 수제로 만든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다 보면 안에서 달콤한 것이 흘러나왔다. 맛있었다.

도윤이 사 왔지만 취향이 아니라 재미가 없었던 책을 서재에 넣어두고 거실로 나온 희성은 소파에 앉아있는 도윤에게 다가갔다. 멀리서 봤을 땐 도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햄스터가 가까이 다가가니 그제야 보였다.

햄스터는 도윤이 준 간식을 입에 욱여넣고 있는지 볼이 통통했고 사탕을 먹은 도윤의 볼도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희성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도윤의 옆에 앉아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탕을 굴리던 도윤이 손바닥을 보여주자 콩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위로 올라왔다. 도윤은 검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희성에게 보여주었다. 덕분에 도윤에게 기대서 눈을 감고 있던 희성이 눈을 떴을 땐 웬 햄스터가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콩이는 희성을 바라보며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엽지.”

“…….”

도윤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희성에게 콩이는 그저 쥐와 같아서 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약간 시무룩해진 도윤이 콩이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와 등을 만져주었다.

희성은 허리에 감긴 손을 움직여 도윤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잘 먹이고 씻긴 덕인지 배가 말랑말랑했다. 원래도 말랑말랑했지만 희성은 이 말랑거리는 감촉이 좋아 한참을 만져댔다. 도윤은 희성이 살을 만지는 게 민망한지 몇 번이고 떼어냈다.

“쫌….”

“네가 더 귀여워.”

희성이 고개를 들어 도윤의 목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목을 긁적인 도윤이 콩이만 쳐다봤다. 아직도 희성이 이상한 말을 할 때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손바닥에서 내려온 콩이는 소파를 돌아다녔다. 그 작은 몸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얼굴이 희성에 의해 옆으로 돌아갔다. 희성은 익숙하게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혹시나 콩이가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을지, 소파에 끼여 큰일이 나진 않을지 늘 걱정이라 눈을 뗄 수 없었던 도윤은 고개를 틀어봤지만 볼이 잡혀 쉽지가 않았다. 도윤이 쪽, 쪽 들려오는 낯간지러운 소리에 발가락을 말았다.

“그…으만….”

간신히 뱉은 말에도 희성은 입술을 쪼아댔다. 도윤이 숨을 쉴 때마다 사탕의 단내가 훅 끼쳤다. 쉴 새 없이 입만 맞추던 희성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섰다. 사탕을 먹고 있어 입안이 축축했다.

희성은 목덜미를 끌어와 깊게 입 맞추며 입안을 핥아먹었다. 도윤은 희성의 옷자락을 쥐고 끙끙 앓았다. 도윤이 만들어낸 것을 모두 먹어 치우겠다는 듯 혀를 움직인 희성이 마지막으로 사탕을 가져가며 떨어졌다.

꼭 이런 식이었다. 도윤이 사탕을 먹고 있으면 늘 찾아와 키스를 하고 사탕을 뺏어갔다. 오늘도 사탕을 빼앗긴 도윤이 숨을 들이쉬며 희성을 밀어냈다. 만족스러운 키스에 웃어 보인 희성이 사탕을 깨 먹으며 또 짧은 입맞춤을 해주곤 떨어졌다.

눈이 촉촉해진 도윤이 훌쩍이며 콩이를 안고 방으로 도망쳤다. 아까는 도윤의 입에서만 났던 포도 향이 이번엔 자신에게도 나고 있었다. 희성이 입맛을 다시며 도윤을 따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어젯밤 도윤에게 희준이 연락을 해왔다. 주변에 희성이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희준에게 카드를 줘야 했기에 언젠가 연락을 한번 했어야 했다. 희준이 도와줬던 날 이후로 처음으로 닿은 연락에 도윤은 문을 살짝 닫고 전화를 받았다.

희준은 그동안 잘 지냈냐며 안부를 물어왔고 도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내일 점심에 시간이 되면 함께 점심을 먹자기에 도윤은 희성이도요? 하고 물었다. 당연히 희성과 함께 하는 자리일 줄 알았다. 도윤은 ‘아니, 도윤이만.’ 하고 말하는 희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고민했다.

희성에게 희준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분명 또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도 하지 않고 몰래 만났다가 전처럼 크게 화를 낸다면? 도윤이 머뭇머뭇 닫힌 방문을 쳐다보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희준은 문자로 시간과 장소를 보내주겠다며 인사를 하곤 전화를 끊었다. 도윤은 밤새 고민을 하다가 결국 희성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더니 희성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도윤을 쳐다봤다. 희성이 말없이 쳐다보면 늘 긴장부터 됐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도윤은 물을 마시곤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어제는 그런 말 없었잖아.”

“…깜빡했어.”

“누구랑? 어디서 만나는데?”

“으응, 연우 누나랑 유정이….”

도윤은 희성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작년에 희성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갔다가 큰일을 당했었다. 오늘은 희준을 만나는 자리니 그런 일은 없겠지만, 도윤은 괜히 물만 마셨다. 희성은 도윤의 외출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식사도 멈추고 식탁을 훑었다. 도윤이 나간다니 갑자기 입맛이 떨어진 탓이었다.

긴장감이 내려앉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아침을 먹은 도윤은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바빠졌다. 드레스 룸에서도 한참을 살다가 나온 도윤은 이번엔 방으로 들어가 콩이를 찾았다.

햄스터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도윤은 늘 햄스터에게 최선을 다했다. 나갔다 올게. 도윤이 웃으며 콩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늘어져 있는 희성을 쳐다봤다. 도윤이 없는 집이라니, 벌써 재미가 없었다. 집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도윤을 말없이 보기만 하던 희성이 옆자리를 톡톡 쳤다.

가방에 지갑을 넣으며 다가간 도윤이 옆에 앉아 가방 정리를 끝냈다. 가방을 닫고 돌아보는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본 희성이 도윤의 손을 잡았다.

“일찍 들어와.”

“응.”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해.”

“으응.”

“그냥 안 가면 안 돼?”

또 시작이었다. 도윤의 손을 잡은 희성의 손에 힘이 실렸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약속 시간에 늦을 수도 있었다. 도윤이 잡힌 손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희성은 몸을 일으키는 도윤을 올려다보며 퍽 애처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나갔다 와도 된다고 했잖아….”

“너 없는 동안 나는 뭐해?”

“그냥… TV도 보고, 책도 보고, 콩이랑 놀아주면 되지.”

“난 너랑 있고 싶은데.”

“…다녀올게.”

도윤이 걸음을 떼자 따라 일어난 희성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뒤에 희성을 달고 다니는 것쯤은 이제 익숙했다. 희성을 뒤에 매달고 뒤뚱뒤뚱 현관까지 걸어간 도윤은 신발을 신고 허리에 감긴 팔을 콕콕 찔렀다.

“나 지금 나가야 돼.”

“내가 더 재미있게 해줄 수 있는데.”

“늦는다니까아….”

희성이 한숨을 쉬곤 도윤의 목에 입을 맞춰주고 떨어졌다. 입술이 닿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아본 도윤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와. 희성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도윤이 문을 열었다.

오늘도 희성이 데려다준다고는 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다. 희준도 데리러 가겠다고 연락을 했지만 혹시나 희성에게 들킬까 봐 거절한 참이었다.

도윤은 미리 알아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열심히 걸었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엔 어플로 버스가 몇 분이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지금부터 같은 속도로 걸어가면 조금 빠듯할 듯싶었다. 도윤은 걸음을 재촉했다.

겨우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선 도윤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버스를 확인했다. 찍을 카드를 꺼내는 사이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토하며 울었다. 발신자는 희성이었다. 가까워지는 버스를 힐끔대곤 전화를 받은 도윤이 생각했다. 내가 뭘 안 챙겼던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왜?”

-언제 와?

“…나 아직 버스도 못 탔어.”

-내가 데려다준다니까.

“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뭐….”

-보고 싶어.

“…….”

매일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간지러운 말에 도윤이 홧홧 해진 귓가를 문질렀다. 마땅히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도윤은 고개를 숙여 신발 앞코를 내려다보다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희성은 카드를 찍으며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말했다.

-꼭 가야 돼?

“약속했으니까….”

-얼른 와.

“으응, 문자할게.”

방금까지도 봤으면서 매일 보고 싶다고 말하는 희성이 신기했다. 희성이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쏟는 애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희성을 감당하기에 도윤은 아직도 너무 벅찼다. 창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버스 안으로 훅 들어왔다. 더웠지만 에어컨 바람으로는 부족할 때가 종종 있었다. 도윤은 멍하니 밖을 쳐다봤다.

희준이 주소를 보내준 식당은 초밥을 파는 일식집이었다. 외관부터가 너무 비싸 보여 들어가기가 민망했지만 도윤은 머리만 대충 정리하곤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도윤을 맞이했다. 고개를 꾸벅이는 직원을 따라 허리를 숙인 도윤은 일행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잠깐의 확인을 마친 직원은 이내 도윤을 룸으로 안내했다.

식당에는 잔잔한 음악이 깔려있었다. 옷을 막 입은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했다. 손바닥에 찬 땀을 바지에 문지르곤 룸으로 들어간 도윤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드는 희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물로 목만 축이던 희준은 도윤을 발견하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 나으면 떠나기로 약속해놓고 약속을 어긴 채 떠나버렸던 것이 마지막이라 어떻게 인사를 받아야 할지 몰랐다. 허둥지둥 앞에 앉은 도윤은 희준이 따라준 물을 조금 급하게 마시다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천천히 마셔.”

“아,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네…에….”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양심이 너무나도 아팠다. 도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물만 마시다가 메뉴판을 밀어주는 손을 쳐다봤다. 희준의 손은 희성의 손과 비슷했다. 이런 데서 그들이 피가 섞인 형제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희준의 손이 조금 더 굵어 보였다. 그 점만 빼면 손이 닮아있었다. 희준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엉뚱한 곳에만 시선을 두는 도윤의 얼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움찔 놀란 몸이 메뉴판을 훑었다.

희준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좀처럼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복학은 언제 할 예정인지, 필요한 건 없는지…. 그런 것들만 물었다. 중간에는 희성도 이 식당을 좋아한다는 새로운 소식도 들려주었다.

어떤 것이 맛있을지 몰라 희준이 주문한 것을 참고했더니 처음 먹어보는 초밥들도 섞여 있었다. 초밥은 먹는 것마다 모두 비리지도 않고 맛있었다. 희성이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갔다. 초밥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서 삼킨 도윤은 음식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희준을 만난 이유도 까먹어버렸다.

도윤을 위해 추가로 주문한 새우튀김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이 도윤의 앞으로 그릇을 놓아주었지만 희준이 더 가까운 곳으로 새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입안의 음식물이 보일까 봐 손으로 입을 가린 도윤이 작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 도윤이 그저 귀여워 웃어 보인 희준이 물을 마셨다.

초밥을 꿀떡 삼킨 도윤은 이제 새우튀김을 집어 들었다. 소스를 푹 찍은 새우튀김을 먹으려 입을 벌린 도윤은 저를 빤히 구경하고 있는 희준과 눈을 마주치곤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자 희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한 웃음에 민망해진 도윤이 얼굴을 붉혔다.

“미안, 마저 먹어.”

순식간에 더워져 어쩔 줄 몰라 하던 도윤은 찬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덕분에 초밥을 다 먹지도 못했는데 물배가 찼다. 도윤이 눈치를 보며 새우튀김을 먹었다. 희준은 아까보다 조심스럽게 새우튀김을 먹는 입술을 보며 말했다.

“카드는 가지고 있다가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써.”

“아!”

“왜? 씹었어?”

“아, 아니요.”

새우튀김을 오물오물 씹으며 일어난 도윤이 벽에 걸어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앉았다. 희준은 도윤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잃어버릴까 봐 지갑에 소중하게 보관 중이던 카드가 도윤의 손에 들려졌다.

“카드, 돌려드릴게요….”

“왜?”

“어쩌다 희성이가 알았는데,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숨겨두고 쓰면 되지.”

도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희준이 카드를 가져가 주머니에 넣었다. 입안에 새우튀김이 거의 다 없어져 갈 즘 도윤은 먹느라 정신이 팔려 희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희준은 다시 일어나 가방을 뒤적이는 뒷모습을 구경했다.

무음으로 바꿔둔 핸드폰에는 이미 수많은 메시지와 전화가 쌓여있었다. 희성을 두고 외출하는 일이 생기면 되도록 연락은 시간에 맞춰 해주려고 했는데 곤란하게 됐다. 부재중은 조금 전까지도 찍혀있었다. 핸드폰을 쥔 도윤이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다며 급하게 룸을 나섰다.

마음이 급해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다. 신발을 꺾어 신은 도윤이 가게를 나섬과 동시에 다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몰랐어.”

-…….

“희성아?”

-뭐 하고 있었어?

“바, 밥 먹고 있었어. 넌?”

-약속했잖아.

“그게….”

-사진 찍어서 보내주기로 했잖아. 전화해 주기로 했잖아.

“미안해….”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인 도윤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나 잊지 않기로 했잖아. 내가 잊지 말아 달라고 빌었잖아.

“김희성, 오늘은 내가 그러니까.”

-다른 거 안 바란다고, 날 좋아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잊지만 말아달라고 했잖아.

“…….”

-보고 싶어. 집에 네가 없으니까 숨이 막혀.

“…밥은 먹었어?”

-네가 없는데 음식이 넘어갈 리가 없잖아.

눈을 감은 도윤이 목을 더듬던 손을 올려 눈가를 덮었다.

-난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겠어.

“…….”

-네가 집에 없으면 자꾸 불안해. 너는 나를 안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내가 싫어서 또 어디론가 떠나버린 거면 어떡하지? 난 이제 네 연락만으로 네가 어디에서 뭐 하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 연락마저 없으면…. 나도 모르게 옛날 생각이 나.

희성은 숨도 쉬지 않았다. 꼭 마음속에 쌓아뒀던 것들을 모조리 토해내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이러는 것조차 너한테 독이 되고 네가 날 질려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네가 좋아서 평생 이렇게 살아온 것도 바꾸려고 노력 중인데 그게 잘 안돼.

“…….”

-난 매일 새벽마다 깨서 네가 내 옆에서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해. 새벽마다,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게 기대가 될 때도 있고 무서울 때도 있어.

“…….”

-내가 왜 네가 나갈 때마다 내 카드만 쓰라고 하는지 알아?

“…….”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나는 네가 있는 곳을 모르니까. 네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나는 알 방법이 없으니까.

“…….”

-난 네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사소한 거 하나라도 다 알고 싶은데 넌 그게 싫은 거잖아. 내가 몰랐으면 하잖아.

마지막 말의 끝에는 떨림이 묻어났다. 도윤이 입술을 깨물고 바닥을 쳐다봤다. 희성에게서 한숨이 넘어왔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또 숨 막히게 했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재미있게 노는데 방해해서 미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기다릴게. 집에 꼭 와.

“희성아.”

-내가 싫어도 와.

희성의 이름을 재차 부르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붙잡고 입술만 씹던 도윤이 다시 가게로 들어섰다. 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카운터에 서서 자신이 먹었던 메뉴를 그대로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룸에 들어가니 희준이 없었다. 도윤은 다 비우지도 못한 음식들을 확인했다. 앉지도 못하고 서 있기만 하자 문이 열리고 희준이 나타났다. 희준은 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도윤에게 물었다.

“왜 서있어?”

“아….”

희준을 따라 자리에 앉은 도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만 먹었던 초밥을 앞에 두고 깨작거렸다. 사람이 둘이나 있어도 지나치게 넓다고 느껴지는 집에 홀로 남겨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희성을 떠올리자 밥이 아니라 모래를 씹는 느낌이 들었다. 도윤은 초밥을 놔두고 국이나 물 따위의 씹지 않아도 바로 삼킬 수 있는 것들만 골라 먹어댔다.

그런 도윤을 유심히 지켜보던 희준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이어서 문이 열리고 식당의 로고가 그려진 봉투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주문한 적이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도윤이 감사 인사를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도윤은 희준이 묻지도 않은 말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희성이… 사다 주려구요.”

의외였다. 희준은 봉투를 끌어안고 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을 하는 머리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도윤이 내려놓은 젓가락은 몇 분이 지나도 그대로 테이블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윤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어날까?”

“그래도 될까요?”

“그럼.”

평소의 도윤이라면 다 드셨냐며 물어봤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좋지 않은 것 같다. 식당을 빠져나온 도윤은 초밥이 포장된 봉투를 쥐고 희준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희준과 헤어지면 바로 택시를 탈 생각이었는데 희준이 먼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으로 가야 했던 도윤은 사양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도윤은 봉투를 끌어안고 손톱을 매만졌다. 창밖 풍경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도윤이 세워달라는 곳에 차를 세운 희준은 어쩐지 급한 손길로 안전벨트를 푸는 모습을 쳐다봤다.

“저, 오늘 감사했습니다.”

“응. 얼른 가봐.”

“죄송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뛰듯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희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 모습을 곱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고도 희성과 사는 도윤을 내심 걱정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있었다. 희준이 창문을 살짝 내리곤 도로를 달렸다.

정성스레 포장해 준 초밥이 흐트러질까 봐 봉투를 끌어안은 채 비밀번호를 누른 도윤이 가쁜 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었다. 도윤이 발을 내딛자 복도에 불이 들어왔다. 원래 비밀번호를 누르고 복도를 걸으면 희성이 나타났는데 오늘은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없었다. 이상했다. 도윤이 숨을 고르며 식탁에 봉투를 올려뒀다.

주방에서 거실로 나왔지만 도윤이 찾는 얼굴은 소파에도 없었다. 희성은 자신의 방에 있는 것을 좋아했으니 방에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활짝 열린 문 너머에도 희성은 보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녔더니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다시 거실로 나간 도윤은 발코니에서 이제 막 집안으로 들어서는 희성을 발견했다.

“김희성!”

“…….”

“거기 있었으면 말을 하지….”

자신을 향한 얼굴이 어쩐지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도윤이 조심스레 다가가자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쥔 희성이 입을 열었다.

“오늘 누구 만났어?”

“여, 연우 누나랑 유정이 만났다고 했잖아.”

“왜….”

“응?”

“왜 거짓말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해.”

“김희준은 왜 만났어? 또 도망가려고? 김희준이 또 도와준대?”

“어, 어떻게….”

“네가 왜 김희준 차에서 내려? 둘이 뭐 했어?”

희성의 눈동자가 떨렸다.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져 버렸다.

“내가 또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야, 네가 걱정하는 일 없었어.”

“잘못했다고 했잖아. 오늘은, 내가 잠깐 돌았었나 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너를 탓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네가 옆에 없는데 연락도 안 되니까.”

“김희성, 내 말 좀….”

“나 노력하고 있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줘. 알려주면 다 고칠게. 다 고쳐서 너한테 맞출게.”

“희성아.”

“제발 알려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그래. 대체 어떻게 하면 내 옆에 있어줄 건데? 내가 뭘 해야 돼? 내가 뭘 하면 네가 행복하겠어?”

“김희성, 제발….”

“난…네가 없으면 안 돼, 도윤아. 이젠…. 널 모르겠어. 제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줘.”

절절했다. 희성은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신이 없는 사이 혼자 이 커다란 집에 남은 희성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팠다. 희성에게 다가간 도윤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계처럼 제발 알려달라는 말만 반복하던 희성이 뚝 굳었다.

“도, 도망가려고 했던 거 아니야. 형 만나는 거 비밀로 해서 미안해. 형한테 받았던 카드 돌려주려고 갔었어. 근데 너한테 말하면 네가 못 가게 할까 봐, 그래서 말 못 했어.”

“…….”

“거짓말해서 미안해….”

희성의 어깨에 기대 진실을 털어놓자 희성이 허리를 안아왔다. 힘이 잔뜩 실려 허리가 아팠다. 도윤과 마찬가지로 어깨에 입술을 묻은 희성이 눈을 감았다.

“나 초밥 사 왔는데….”

“…….”

“너도 좋아하는 곳이라고 형이….”

“김희준이 사준 거면 안 먹어.”

“내, 내가 산 건데….”

몸이 확 떨어졌다. 도윤은 양팔이 붙잡힌 상태로 눈을 깜빡였다.

“네가?”

“으응, 내…돈으로….”

“왜?”

“네가 좋…아한다고 해서….”

“나 주려고?”

“으응.”

“왜?”

“…말했잖아.”

초밥이 뭐라고. 희성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도윤이 제 생각을 해서, 제가 좋아하는 초밥을 사 왔다. 마음이 벅차오른다. 머리가 어지럽기도 했다. 희성은 대뜸 도윤의 얼굴을 붙잡아 입술을 비볐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희성의 입맞춤은 늘 시도 때도 없는 편이었기에 도윤은 끙…. 입술을 열어주었다. 거칠게 들어온 혀는 곧 부드럽게 움직였다. 입술을 벌려 도윤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빨던 희성이 저도 모르게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도윤이 흠칫거리며 희성을 밀어냈다. 하아…. 희성은 길게 늘어진 타액도 아까워 도윤의 입술을 핥았다.

“으응…. 초밥, 먹어.”

“나중에.”

“나중에 먹으면 맛없을 수도 있잖아….”

“그럼 같이 먹어.”

“나는 먹고 왔는데….”

“나 먹는 거 봐.”

희성이 도윤의 손을 꼭 잡아 주방으로 이끌었다. 식탁에는 정말로 초밥이 포장된 봉투가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니…. 도윤을 먼저 의자에 앉혀준 희성이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좀 전까지 키스를 한 탓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도윤은 초밥을 꺼내주곤 희성의 반응을 살폈다.

초밥을 좋아한다는 희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희성은 초밥을 먹으며 도윤의 입에도 넣어주었다. 괜찮다고 거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도윤은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얌전히 초밥을 받아먹었다. 도윤과 희성은 초밥을 다 먹고 나란히 서서 양치를 했다. 희성은 도윤이 입을 헹구는 것을 지켜봤고 도윤도 희성에게 붙들려 헹구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희성은 행복해 보였다. 도윤이 콩이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뒤에 붙어 얼굴을 비빈 희성은 침대에 누워서도 도윤의 볼이며 목이며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도윤이 꼼짝도 못 하게 끌어안은 채 대화를 나눴다. 도윤은 살짝, 조금 많이 불편했지만 꾹 참았다. 막 웃고 그러는 건 아니었는데 희성이 너무 행복해 보인 탓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몽롱한 정신에 눈을 깜빡인 도윤이 고개를 돌려 밖을 확인했지만 커튼이 쳐져 있어 해가 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비비적대며 희성을 돌아본 도윤은 눈을 감고 자고 있는 희성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걸까…. 도윤의 손이 희성의 얼굴 위에서 쓰다듬듯 움직였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잠든 사람을 깨울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조심조심 일어나 침대를 벗어난 도윤은 욕실을 다녀왔다가 냉장고를 열었다.

아까 희성의 초밥도 몇 개 얻어먹었지만 배가 고팠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밥을 먹기엔 좀 부담스러웠고 간단하게 먹을 것이 필요했다. 오랜 고민 끝에 시리얼을 선택한 도윤이 우유와 시리얼을 식탁에 내려뒀다.

혹여나 잠든 희성이 깰까 봐 그릇과 숟가락도 소리 없이 꺼냈다. 의자도 들어서 꺼낸 도윤이 자리에 앉아 시리얼을 붓고 우유를 부었다. 달그락 소리도 나지 않게끔 숟가락을 움직인 도윤이 시리얼을 한입 떠먹었다.

정적 속에서 묵묵히 시리얼만 먹던 도윤의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났다. 도윤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돌렸다. 느낌이 이상해서 깼더니 품에 있어야 할 도윤이 없었다. 욕실에 갔을 수도 있고 잠시 물을 마시러 갔을 수도 있는데 희성의 마음이 급해졌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나온 희성은 불이 켜진 주방에서 혼자 숟가락을 물고 있는 도윤을 발견했다. 도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우유를 삼킨 후 시리얼을 씹고 있었다. 그제야 숨이 터졌다. 희성이 도윤의 옆에 의자를 꺼내 앉아 허리를 끌어안았다.

“배고프면 다른 거 먹지 왜 이런 걸 먹고 있어.”

“그냥.”

“놀랐잖아.”

“으응….”

희성이 깨어났는데도 도윤은 소리를 죽여 시리얼을 먹었다. 희성은 이제 식탁에 쓰러지듯 기대 도윤을 쳐다봤다. 우유와 함께 시리얼을 먹으면 볼이 잠깐 부풀었다가 꺼졌다. 그 모습이 꼭 햄스터 같았다.

시리얼을 먹는 도윤을 구경만 하고 있어도 재미있었다. 한참이나 씰룩거리는 볼과 오물거리는 입술을 빤히 보던 희성이 일어나 방으로 사라졌다. 옆자리가 빈 사이 도윤은 시리얼을 한 번 더 쏟아부었다. 숟가락으로 시리얼을 꾹꾹 눌러보고 다시 입을 벌려 시리얼을 먹었다. 어디 갔나 싶어서 뒤를 보려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온 희성이 의자에 앉았다.

도윤은 입을 바쁘게 움직이며 옆을 살폈다. 방에 다녀온 희성의 손에는 작은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도윤이 시리얼을 삼키자 희성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도윤아.”

“왜애.”

말꼬리를 늘리는 도윤이 너무 귀여워 순간 심장이 아팠다. 희성은 손안의 케이스를 만지작댔다.

“더 좋은 곳에서 더 멋지게 주고 싶었는데.”

“뭘?”

희성이 케이스를 도윤에게 밀어주었다. 희성을 봤다가 케이스를 보는 눈이 바빴다. 도윤은 그릇을 조금 앞으로 치워두고 케이스를 집었다.

“이게 뭔데?”

“선물.”

“…선물?”

희성이 주는 선물에는 항상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도윤이 케이스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케이스 안에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도윤의 손가락은 가늘고 예쁘니까 반지가 화려하면 오히려 덜 예뻐 보일 것 같아 다이아도 박지 않은 아주 심플한 반지였다. 도윤의 머리가 굳었다. 반지를 뚫어져라 보던 도윤의 시선이 희성의 손가락에 닿았다. 희성의 손가락에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도윤을 위해 만든 반지였기에 도윤의 반응이 제일 중요했다. 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반지로 다시 만들어주면 됐다.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그건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꼭 지금 안 껴도 돼.”

“그게 무슨…말이야?”

“네가 끼고 싶을 때 껴.”

희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그러고 싶을 때. 내가 조금은 좋아졌을 때, 그럴 때.”

희성의 사랑은 필사적이었고 맹목적이었다. 도윤이 아마 평생을 쫓아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의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지금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

“이런 옷차림으로 이런 공간에서 주고 싶진 않았는데.”

“…….”

아쉬워 보였다. 희성의 말마따나 차려입은 옷이 아닌 잠옷을 입고, 호텔이나 더 멋진 야경이 있는 곳이 아닌 집에서, 맛있는 음식이 아닌 겨우 시리얼이나 먹고 있는 도윤에게 반지를 선물해 줘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너무 어려웠다. 도윤은 꺼낸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반지를 살피던 도윤이 다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케이스에 넣었다. 시리얼은 이제 다 눅눅해져 있었다. 도윤은 케이스를 가운데에 놓고 그릇을 치웠다. 양치와 세수를 하고 돌아왔을 때도 희성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 자려구….”

“응.”

케이스를 쥔 도윤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희성이 쫓았다. 도윤이 반지를 당장 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책상에 반지가 든 케이스가 덩그러니 놓였다.

신경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만 케이스가 있는 책상으로 시선이 쏠렸다. 희성은 애써 외면하며 침대에 누워 도윤을 끌어안았다. 도윤이 자신의 가슴에 올라온 희성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있잖아….”

“응.”

“우리…그러니까, 우리.”

“응.”

“우리…혹시….”

“응.”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나 했다. 내려간 손이 도윤의 손을 붙잡아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우리…사, 사귀는 거야?”

“…….”

깍지 낀 손이 흔들렸다. 희성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 난…. 어….”

“난 너랑 결혼도 하고 싶어.”

“결, 결혼?”

이건 좀 너무 나갔나. 희성이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너만 괜찮으면 난 너랑 그러고 싶은데.”

“…….”

“난 너랑 사귀고 싶어.”

“…….”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난 네가 하자는 거면 뭐든 다 할 거야.”

“음….”

“헤어지는 것만 빼면.”

“으응.”

근데 그걸 빼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도윤이 깍지 낀 손을 꼼지락댔다. 당장 답을 내놓기엔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윤은 반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옆에서 도윤의 얼굴만 보던 희성이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잘 자.”

“으응, 너도….”

희성은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관찰하듯 봤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말들이 입안에서 뒹굴었다. 손끝으로 도윤의 코끝을 톡, 만져본 희성이 눈을 감았다. 이게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이 아님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면서.

마지막 기억엔 분명 도윤이 자신의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희성은 또다시 혼자가 되어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은 집에도 없었고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희성은 그제야 이게 꿈임을 눈치챘다.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아채자 갑자기 발밑이 훅 꺼졌다. 희성은 저항 없이 빨려 들어가기를 택했다.

숨을 삼키며 눈을 뜬 희성은 옆에 있을 도윤부터 확인했다. 도윤은 희성이 있는 쪽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따금 떨리는 손가락이 도윤의 코밑으로 향했다. 도윤은 숨을 색색 내쉬며 잠을 자고 있었다.

도윤이 살아있고 아주 편안한 상태로 잠을 자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쉽사리 진정되질 않았다. 몸을 조금 더 당겨서 도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댄 희성은 한참을 그러고만 있었다. 눈을 감고 마주 대고 있는 도윤의 입술에만 집중했다. 입술이 막힌 도윤이 코로 호흡하는 것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눈을 뜬 희성이 입술을 떼어냈다.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에 도윤이 입을 오물거렸다. 희성이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려보다가 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도윤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입안으로 들어온 검지를 빨았다. 이게 뭔 줄 알고 빨아. 희성이 웃으며 검지로 혀를 꾹 눌렀다.

응….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소리를 내는 도윤을 보던 희성이 검지를 빼주었다. 희성의 검지는 도윤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희성은 검지를 입에 넣었다. 도윤의 타액이 희성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한번 잠에서 깨고 나니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희성은 앞머리가 갈라져 드러난 이마나 감긴 눈, 코, 볼, 입술을 차례대로 만져보았다. 도윤은 사랑스러웠다. 모두에게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도윤을 떠올리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도윤은 자신의 사랑만 받아도 충분했다. 모두를 대신해 도윤을 사랑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도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도윤이 보여주질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깊게 잠든 얼굴을 따라 시선을 내린 희성은 사라지지도 않고 선명히 남아있는 흉터를 빤히 보다가 엄지로 살살 문질러보았다. 도윤은 아마 이 흉터를 보고 평생 그날을 떠올리겠지. 나는 그런 도윤을 보며 평생을 죄책감에 빠져 살 터였다. 엄지는 계속 흉터 위를 쓰다듬었다.

“하도윤.”

낮은 목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가르고 새어 나왔다.

“난 네가 욕심나.”

“…….”

“나한테 그럴 자격 없다는 거 아는데….”

가슴께가 따끔거렸다.

“제발 부탁이니까, 다시는 떠나지 마.”

미동도 없는 입술에 다시 입술을 살포시 누르고 떨어진 희성이 속삭였다.

“사랑해.”

도윤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진심과 다시는 곁에서 떠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담긴 절절한 진심이 섞인 고백이었다. 희성은 도윤의 품을 파고들었다.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도윤의 냄새가 희성을 끌어안았다.

어서 이 울적한 새벽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도윤의 품에 스스로 갇히기를 택한 희성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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