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7)

마침표

  

  

오전 느지막이 희성의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 카페에 들어온 도윤은 음악만 흐르는 조용한 카페에 덩달아 조용해진 걸음으로 카운터를 기웃거렸다. 카페에는 손님도 없고 정우나 사장님도 없었다. 보통 나가더라도 한 사람은 카페를 지키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카페가 조용했다. 도윤이 가방과 패딩을 차례대로 벗고 앞치마를 찾아서 둘렀다. 손을 씻고 포스기의 앞에 서서 괜히 메뉴를 찍어보고 있자 뒷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으로 똘똘 뭉친 도윤이 침을 삼켰다. 말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죄가 있어 당당하게 마중을 나가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서있기만 하던 도윤은 뒷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장님과 정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 도윤이 왔어?”

“죄송, 죄송해요.”

“뭘 죄송해.”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내가 뭐라고 했어? 하루 정도는 그냥 쉬어도 된다고 했지?”

“그래도….”

“밥은 먹었어?”

“아, 아직 못 먹었어요.”

눈치를 보면서 사장님의 뒤를 졸졸 따라 사과만 하는 도윤의 뒤로는 정우가 따라왔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도윤을 보다가 정우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도윤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목덜미에 이상한 자국이 드러났다가 모습을 감추기를 반복했다. 저게 대체 뭔지 눈까지 가늘게 뜨고 쳐다본 정우는 이내 탄식하며 그들의 사이로 들어섰다.

사장님은 개의치 않고 컵을 정리했고 도윤은 정우에게도 미안하다 사과를 해왔다. 이건 일부러 보여주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우가 이마를 문지르며 도윤을 데리고 사장님에게서 멀어졌다.

“언제 왔어?”

“아, 아까요.”

“방에 올라가서 씻고 와.”

“저 씻었는데….”

“옷…도 다른 걸로 입고 내려오고.”

“네?”

“그러니까….”

도윤의 속눈썹이 빠르게 팔랑거렸다. 난감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는 도윤을 앞에 두고 정우는 고민했다.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정우가 입가를 쓸고 볼을 만지며 뒤를 힐끔거렸다. 도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정우와 사장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정우가 귀를 문지르며 자그맣게 말했다.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목까지 오는 걸로 입고 내려와.”

“저 안 아픈데….”

“가서 옷 갈아입고 와.”

정우가 등을 떠밀었다. 어리둥절하게 쫓겨난 도윤은 계단을 오르는 내내 감기…? 나 진짜 안 아픈데…. 하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왔고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정우가 했던 말의 뜻을 알아들은 듯 숨을 삼켰다.

거울 속 자신의 몸은 엉망이었다. 목덜미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어깨, 그리고 가슴까지 희성이 만들어낸 흔적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걸 제가 아닌 정우가 먼저 알아챘다는 것도 창피했고, 그것도 모르고 목을 드러내고 다닌 것도 너무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목 티를 꺼내 입은 도윤은 신발을 신고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이마를 무릎에 콩콩 박았다. 내려가기가 싫었다. 정우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혹시 사장님도 보셨을까? 보셨겠지? 도윤이 우는소리를 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윤의 걱정과는 달리 정우는 다행히도 도윤을 모르는 체 해주며 평소와 똑같이 대해주었다. 굳이 이상한 점을 꼽자면 평소보다 자주 앉아있으라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딱히 짚고 넘어갈 부분은 아니라 얌전히 앉아있었다. 많이 돌아다니는 일도 자기가 하고 테이블을 닦는 일도 정우가 다 했다. 도윤은 그저 멀뚱멀뚱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였다.

말도 없이 지각도 했는데 일도 하지 못하게 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일하는 정우를 두고 앉아있다가도 일어나 돌아다니려던 도윤은 마침 새로운 손님들을 맞이할 방을 확인하러 간다는 사장님을 따라 카페를 벗어났다. 정우는 도윤이 앞치마를 벗자 또 괜히 힘쓰지 말고 가게나 보라고는 했지만 이제 조금만 더 앉아있다가는 스스로가 너무 불편해 못 견딜 것 같아 일어났다.

빠진 물건은 없는지, 청소가 덜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을 하는 사장님을 졸졸 쫓아다니던 도윤은 다음 방으로 건너가기 전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불을 끄려던 사장님이 도윤을 돌아봤다.

“왜?”

“저….”

“말해.”

“저…. 그게…이제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응?”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사장님은 말없이 도윤을 쳐다봤다. 그리곤 웃으며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언제까지 일하고 싶어?”

“어….”

“우리야 원래 정우랑 나랑 둘이서 일했으니까 괜찮고.”

“음….”

“현지가 좀 아쉬워하겠네.”

도윤이 눈치껏 밖으로 나오자 따라 나온 사장님이 문을 닫았다. 다른 방을 확인하면서도 사장님은 도윤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도윤은 사장님과 방을 돌아다니면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고 나면 아빠한테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도 하고, 서준이에게도 고맙고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 했다. 또 함께 과제를 했던 동기들에게도 그날을 마지막으로 말도 없이 사라져 미안하다고 말을 전해야 한다. 제주도를 나서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번 달까지만 일해도 괜찮을까요?”

“그럼. 한 달을 꼭 다 안 채워도 돼.”

“네에.”

“정우한테도 말했어?”

“아직…이요.”

“내가 말할까?”

“제, 제가 할게요.”

사장님을 따라 엉거주춤 계단을 내려온 도윤은 카페로 들어서자마자 홀에 앉아있는 희성을 발견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희성에겐 할 말이 많았다. 주문은 정우에게 받았는지 테이블에는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다. 사장님이 정우에게 말을 거는 틈을 타 홀로 나온 도윤이 희성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도윤을 힐끔대던 정우가 끌려 나가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훑는 시선을 눈치챘다. 카페를 나간 두 사람은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정우의 관심이 사장님에게로 향했다.

희성을 무작정 끌고 밖으로 나온 도윤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을 여러 번하곤 팔을 놓아주었다. 희성은 웃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너!”

“응.”

“이, 이거 왜 말 안 해줬어?”

“뭘?”

“내 목에, 이거!”

목 티를 끌어내리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만 가리킨 도윤이 씩씩거렸다. 희성은 어젯밤 자신이 남긴 흔적을 다 가리고 있는 목 티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지? 다 알고 있었지?”

“몰랐어.”

“거짓말하지 마!”

“진짜 몰랐어.”

“자꾸 거짓말하면…. 나 서울 안, 안가!”

“…알고 있었어.”

“너어…. 근데 왜…! 왜 말 안 해줬어!”

도윤이 또 원망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냈다. 어젯밤 도윤의 목을 씹어둔 것도 제가 맞았고 따가울 정도로 빨아서 흔적을 남긴 것도 자신이 맞았다. 머리카락으로도 다 가려지지 못하고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곳에다 키스마크를 남긴 것은 흥분해서 무작정 그런 것이 아니라 의도한 것이었다. 정운지 뭔지 하는 놈이 자꾸 자신의 것에다 손을 대니까, 전처럼 도윤에게 대놓고 집착을 할 수는 없으니 티를 내고는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어 생각해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계속….”

“화났어?”

“형이 안 알려줬으면….”

도윤은 세상 속상한 표정을 띠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만족스러운 탓에 희성은 눈치도 없이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우가 봤다니 희성은 본인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아 뿌듯했지만 여기서 티를 내면 도윤이 서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할까 봐 겨우겨우 참았다. 도윤과 함께 들어와 정우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희성이 눈치를 보며 도윤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됐어.”

“오랜만인데다가 너무 좋아서 조절을 못했어.”

희성은 매일 했었을 때도 조절을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못한다는 말은 잘못됐다. 희성은 조절을 할 생각이 언제나 늘 없었다. 도윤이 속으로만 꿍얼거리며 희성을 흘겼다.

“화났어?”

“…….”

“미안해.”

“만지지 마….”

은근슬쩍 엮어오는 손가락을 피해 옆으로 피하자 희성이 입맛을 다셨다.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진 거리를 힐끔거리던 희성이 화제 바꾸기를 시도했다.

“도윤아, 나 머리 잘랐는데.”

“…….”

하지만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말이 없어 실패했다. 더 어색해진 분위기가 생성됐다. 씁쓸했다. 희성은 도윤이 앞머리를 조금만 잘라도 뭐가 바뀌었는지 한 번에 맞추곤 했다. 둘 사이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춥기도 해서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희성이 카페로 들어가기를 권했다. 여기에 더 있어봤자 서로에게 득이 될 건 없어 보였기에 도윤은 희성을 지나쳤다. 그리곤 그대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등을 돌려 희성을 보았다. 몰래 거리를 조금씩 좁히며 따라가던 희성의 걸음도 뚝 멈춰 섰다. 아랫입술이 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앙다물고 있던 도윤이 눈에 힘을 주곤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

“…….”

“가!”

“나 진짜 가?”

“그…으래!”

“화나서? 화나서 나 보기 싫어?”

도윤에게 잘 보이고 싶어 머리까지 정리하고 왔지만 돌아온 건 화가 난 도윤이었다. 이게 아닌데. 희성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너도, 너도 막 예전에 나한테, 어! 갑자기 막….”

“잘못했어.”

“매일 네 마음대로 했잖아!”

“그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버무리자 도윤에게서 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쫓겨나게 된 희성이 머리를 굴렸지만 방법이 나오질 않았다. 그 사이에 카페로 들어간 도윤이 희성의 코트를 가지고 나왔다. 말을 걸 새도 없이 코트가 안겨진 희성이 다시 카페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분명 어제까진 좋았는데. 도윤이 제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도 같았는데. 가만히 굳은 희성이 코트를 입지도 못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희성은 한참 동안 도윤이 없는 자리를 지키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진정시켰다.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카페로 들어가면 도윤이 또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길 한 시간 동안이나 반복했다. 솔직히 요즘 도윤의 상태를 보면 제가 불쌍해서라도 나와 주겠지 싶었다. 하지만 도윤은 밖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한숨을 크게 터뜨리자 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윤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의 도윤이 아니었다. 자신이 밀어붙이면 어쩔 줄 모르고 끌려오던 도윤은 이제 없었다. 오늘은 저녁까지 기다려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희성은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 차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도윤이 너무나도 쉬웠는데 이제는 어렵기만 했다. 너무 어려웠다. 답안지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것도 없어 더 어려웠다.

눈을 감은 희성은 생각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어젯밤으로 돌아간다면. 그러면 그때는 도윤에게 키스마크를 남기지 않았을까? 아니, 자신은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도윤을 물고 빨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침에 말이라도 해줬으면 쫓겨나진 않았을까? 그랬다면…. 쫓겨나진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윤에게 알려줬더라면. 그걸 가리고 갔을 텐데, 그럼 정우에게 자신이 남긴 흔적을 보여줄 기회가 없어진다. 희성이 미간을 구기며 눈을 떴다. 도윤이 얼른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빨리 일을 그만둬서 정우에게서 멀어졌으면 좋겠다. 희성이 타는 속을 달래려 창문을 내렸다.

***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윤을 물고 씹고 빨아댔던 대가는 예상보다 더 혹독했다. 희성은 어쩐지 제주도에 와서 도윤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잠시 가까워졌던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어졌고 요즘 희성은 관심을 받기 위해 제주도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디저트들을 찾아 도윤에게 주기 바빴다. 매일매일. 희성은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 다른 종류의 음식들을 가져와 도윤에게 건넸고 거슬리지 않게끔 밖에서 기다리거나 바로 돌아가곤 했다.

희성이 도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정우에게도 도윤이 일을 그만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언젠가 이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당장 지금일 줄은 몰랐기에 정우는 말을 아꼈다. 그리곤 보통의 밤처럼 마감을 끝내고 잠시 근처를 걷자는 핑계로 도윤을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주변에는 늘 도윤을 기다리고 있던 희성도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의 불빛이 아니면 온통 어두컴컴한 거리라 도윤의 걸음에 맞춰 걷던 정우가 어두워서 더 무섭게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하고픈 말을 망설였다. 도윤은 카페에서 가져온 쿠키를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저 쿠키도 희성이 주고 간 쿠키 중 하나였다. 정우가 헛기침을 터뜨리곤 말을 꺼냈다.

“서울 가면 뭐 하려고?”

“학교도 다시 가야 하고, 아빠도 보고 싶고, 엄마한테도 가야 해요.”

“…….”

“친구도 봐야 하고, 전에 제가 키우던 햄스터 있다고 했잖아요. 콩이도 봐야 하고….”

“그래?”

“네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옆을 돌아보자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고 먹는 도윤이 보였다. 망설임도 없이 입가를 털어준 정우가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멀끔해진 입술에 도윤이 또 쿠키를 먹기 시작했다. 정우가 또 바다를 한번, 하늘을 한번, 차도 다니지 않아 어두운 도로를 한번 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 갇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 말을 해도 되는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도윤이 쿠키를 꺼내며 생긴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가 파도 소리를 뚫고 귓가에 박혔다. 정우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본론을 꺼내들었다.

“…안 가면 안 되나?”

“네?”

“아니, 뭐…. 조금만 더 있다가 가도 되지 않나 싶어서.”

“…….”

“학교는 아직 좀 멀었잖아.”

“음….”

“아니면….”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지금 쿠키를 먹을 상황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았다. 도윤이 쿠키를 쥐고 정우를 쳐다봤다. 정우는 입을 열고도 말을 고르는 듯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혹시 걔가 가자고 해서 가는 거야?”

“…아니에요, 그냥. 이제 가야 할 것 같기도 했고….”

“같이 있어도 괜찮겠어?”

“솔직히 저도 괜찮을 거라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근데…모르겠어요. 예전에 제가 봤던 사람은 맞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같은 일이 일어나면?”

“…….”

“또 네가 아프면?”

“…그러면….”

도윤이 쿠키를 만지작거렸다. 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또 와도 돼요?”

“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

도윤이 소리 없이 웃어 보이자 볼이 움푹 들어가며 보조개가 예쁘게 피었다. 그런 도윤을 보고 있자 마음이 벅차올랐다. 정우의 고개가 급하게 바다를 찾았다. 파도가 정우의 마음을 대변하듯 크게 일렁였다.

사장님과도 이야기를 끝냈고 정우와도 이야기를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현지였는데, 현지는 사장님을 통해 미리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현지는 요즘 카페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말을 전해 듣고 그럴 리가 없다며 울었다고 해서 걱정이 됐는데 찾아가 볼 수도 없고 정말 난감했지만 드디어 오늘 현지가 카페에 놀러 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도윤은 사장님께 그만둔다고 말을 했을 때보다 더 긴장을 했다. 도윤이 일을 그만두기까지 일주일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긴장한 도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성은 또 케이크와 마카롱을 가지고 와있었다.

“이제 그만 좀 사 와…. 다 먹지도 못하는데 왜 자꾸….”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그러니까 그만 사 오면 되잖아.”

말은 그만 사 오라고 하면서 손으로는 마카롱을 꺼내고 있는 도윤을 보며 희성이 웃었다. 오늘은 또 어떤 걸로 사 왔는지 궁금했다. 도윤이 박스를 들여다보며 맛있어 보이는 마카롱을 꺼내들었다. 이거는 내가 먹고…. 달달한 맛을 상상하니 입맛이 돌았다. 초콜릿이 박혀있는 마카롱의 옆에 있던 딸기가 박혀있는 마카롱은 나중에 현지에게 주려고 빼두고, 녹차 쿠키가 박혀있는 마카롱을 꺼내 정우에게 주려고 몸을 일으키자 희성이 손목을 잡아왔다.

“어디 가?”

“이거 정우 형한테 주고 싶어서….”

“너만 먹어.”

“어차피 나 혼자 다 못 먹잖아.”

“너 먹으라고 사 온 거야.”

“그래도….”

“너만 먹었으면 좋겠어.”

어정쩡하게 일어난 자세를 유지하던 몸이 편한 자세를 되찾았다. 녹차 맛을 안에 넣어두고 원래 먹으려고 했던 마카롱을 까서 베어 물자 희성의 자세도 함께 풀어졌다. 희성이 사 온 마카롱은 크기가 커서 한입에 먹기가 힘들었다. 가루가 입술에 묻기도 했다. 도윤은 마카롱을 한입 먹고 입술을 털어내고 또 한입 먹고 입술을 털었다. 전에도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은 탓에 살이 쪘었는데 요즘은 희성이 사다 주는 디저트를 매일 먹느라 살이 더 찐 것 같아 은근슬쩍 배를 문질러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윤만 살피는 희성에게 그걸 딱 들키고 말았다.

“아파?”

“아, 아니.”

“그럼 왜?”

“…몰라도 돼.”

배에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몸을 틀었다. 눈앞에 희성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은 편했지만 뒤통수가 따가웠다. 햄스터가 간식을 먹듯 야금야금 마카롱을 먹어치우는 도윤의 뒷모습을 지켜본 희성이 말했다.

“앞에 보고 먹으면 안 돼?”

“싫어, 계속 쳐다볼 거잖아.”

“지금이 아니면 못 보는데 그럼 어떡해.”

점심이나 오후에 잠깐 보고 저녁이 되면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볼 수 있냐는 말에 도윤이 망설이다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희성이 의자를 끌어당겼다. 반항도 못하고 끌려간 도윤이 마카롱을 씹었다.

“맛있어?”

“으응.”

희성이 더 먹으라며 현지의 몫으로 꺼내둔 딸기 마카롱을 끌어왔다. 도윤은 박스에 든 다른 마카롱을 꺼내 포장을 깠다. 그러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차와 차에서 내리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몸을 일으켰다. 도윤이 얼른 먹기만을 기다리던 희성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마카롱을 맛있게 먹다가 안절부절못하는 몸에 옆을 돌아보자 익숙한 아이가 카페로 뛰어오고 있었다. 희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현지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도윤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잡았지만 지금만큼은 현지가 1순위인 도윤이 손을 뿌리쳤다.

“하도윤!”

현지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들어오자마자 도윤부터 찾았다. 입구까지 마중을 나갔던 도윤은 인사도 없이 팔을 이끄는 힘에 몸을 숙였다. 현지가 숨을 할딱이며 물었다.

“아니지? 집에 가는 거 아니지? 응?”

“현지야….”

“아니지? 아니지? 엄마가, 어! 할머니가 그랬는데! 아니지?”

“현지야, 앉자. 응? 앉아서….”

“나랑, 나랑 여기서 계속 같이 살기로 했잖아!”

“현지야.”

“약속했잖아! 나랑 같이, 같이 산다고…했잖아!”

씩씩거리며 말을 쏟아낸 현지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싫어, 가지 마, 하도윤 가지 마! 도윤에게 매달린 현지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현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수정이 난처하게 웃었다. 도윤이 현지의 등을 토닥여주며 몸을 돌리자 현지의 충격 발언에 더 놀라 앉아있는 희성이 보였다.

“현지야, 미안해. 미안해, 응?”

“시러, 끅, 싫어….”

“전화할게. 현지가 오라고 하면 놀러도 올게.”

“가지 마, 하도윤 가지 마….”

“진짜야, 현지가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놀러 올게.”

“왜, 왜 가? 왜, 왜….”

현지의 팔이 도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홀에 손님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손님이 있었더라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터였다. 어느새 카운터에서 나온 정우와 사장님도 입을 다물고 현지를 보고 있었다. 도윤이 달래면 달랠수록 현지의 울음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 와중에 ‘나랑 여기서 계속 같이 살기로 했잖아!’ 발언에 심장이 덜컹한 희성은 어쩐지 처량한 모습으로 도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는 현지를 끌어안고 자리에 앉은 도윤이 미리 빼두었던 마카롱을 현지에게 주었다. 떨어지기 싫다는 듯 목을 끌어안은 현지가 훌쩍이며 마카롱을 꼭 쥐었다. 고개를 숙여 현지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본 희성이 초조하게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미안해. 꼭 놀러 올게, 응?”

“가지 마….”

“현지가 전화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받을게.”

“우리랑, 같이…살아….”

도윤이 떠난다는 사실이 또 떠올랐는지 현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자신의 손만 한 마카롱을 쥐고 입을 삐죽이는 현지를 끌어안은 도윤이 이마에 뽀뽀를 남기자 이번엔 옆에 앉은 희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현지 보러 올게. 약속.”

“끅, 거짓, 말…. 저번에도…약속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지킬게.”

도윤의 품에 얼굴을 숨긴 현지가 끅끅 울었다. 현지가 우니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아 훌쩍인 도윤이 새끼손가락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얼굴에 새빨갛게 열이 오른 현지가 훌쩍이며 마카롱을 놓고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꼭, 꼭 나 보러 와야, 끅, 와야 돼.”

“응, 응.”

“매일, 매일 와….”

“매일?”

“매일 와, 매일 와서 나랑 놀아.”

“매일은 힘든데….”

“…매일….”

도윤의 새끼손가락을 꼭 쥔 현지가 코를 먹었다. 희성이 도윤을 위해 가져온 냅킨은 현지의 얼굴을 닦아주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조금씩 진정이 되는 몸을 끌어안고 토닥여주던 도윤이 희성을 돌아봤다. 아까부터 같은 표정으로 앉아만 있는 희성이 이상했다. 하지만 당장은 현지가 더 중요했기에 다시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는 말만 속삭였다.

현지는 카페에 있는 내내 도윤의 품에서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오랜 시간 현지를 안고 있어 팔이 저렸지만 지은 죄가 있어 꾹 참아야 했다. 색색 깊게 잠든 현지는 수정의 품에 안겨 차에 올랐다. 나중에 일어나면 또 도윤을 찾느라 울겠지만 수정이 별다른 방법이 있겠냐며 어깨를 으쓱이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가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도윤은 차가 아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뒤를 돌았다. 뒤에는 도윤을 따라 나온 희성이 있었다. 도윤은 우는 현지를 달래느라 진이 빠진 터라 희성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너도 이제 가.”

“…….”

“더 늦기 전에 가서….”

“정말 여기에서 살려고 했어?”

“그건…. 현지 때문에 그냥….”

“혹시…내가 널 못 찾았으면. 그랬으면, 계속 여기에서 살려고 했어?”

“그런 거 아니야.”

“난 너 없이 못 살아.”

“…얼른 가.”

“네가 없으면 숨도 잘 못 쉬겠어. 네가 없으면 잠도 잘 못 자겠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자신도 없어.”

“그만해.”

“난 네가 필요해. 너도…알잖아.”

“나는….”

“나한테 이럴 자격 없다는 거 알아. 아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난 도윤이 네가 너무 좋아. 너라면 내 전부를 줄 수도 있어. 네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고 하면 난 그럴 거야. 난 너 하나만 있으면 돼. 네가, 내 옆에만 있어주면 돼.”

참았던 감정을 쏟아낸 희성이 애처롭게 쳐다보며 도윤의 손을 붙잡았다.

“다 고칠게. 네가 싫어하는 것들 전부 다 고칠게.”

자신을 붙잡는 게 너무 필사적이어서 말문이 막혔다. 도윤의 눈이 조금씩 떨렸다.

“제발, 제발 나 좀 봐줘.”

“…….”

“도윤아, 제발 부탁이니까…. 나 한 번만 봐줘.”

“…….”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내가 어떻게든 변하도록 노력할게.”

“난…. 그러니까, 나는….”

“사랑해.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 도윤아.”

붙잡힌 손은 당장이라도 내칠 수 있었다. 희성의 말들은 모두 필사적이었지만 붙잡은 손의 힘만큼은 달랐다. 뿌리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같았고, 도윤이 겁을 먹지 않게 배려해 주는 것도 같았다. 도윤의 손가락이 움찔움찔 떨었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절절하게 비는 말과는 달리 눈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곧은 눈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마주한 도윤이 희성의 손을 잡았다. 줄곧 단호하던 눈이 이번만큼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맞잡은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한 번만이야.”

“…….”

“널 믿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도윤아….”

“다음은…없어.”

“잘할게. 내가 잘할게, 도윤아.”

이번엔 희성이 손에 힘이 실렸다. 손을 처음 잡는 것도 아닌데 손끝이 저릿했다. 심장이 너무 뛰었고, 숨이 흐트러졌다.

“키스하고 싶어.”

“…안 돼, 밖이잖아.”

“옆에 차 세워뒀어.”

“누가 보면…어떡해….”

당장 입을 맞추고 싶었다. 차를 타고 호텔까지 가서 키스를 하자니 중간에 사고라도 낼 것 같았다. 눈치를 보며 눈을 굴리던 도윤이 희성을 끌고 대문을 넘었다. 해가 지고 있어 도윤의 공식적인 퇴근시간이 훌쩍 넘어간 시간이었다. 혹시나 정우나 사장님과 마주치진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희성과 함께 계단을 오른 도윤이 문을 열자마자 몸이 밀쳐졌다.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부딪힌 입술 사이로 다급함을 티 내는 혀가 밀려들었다. 폭력적인 입맞춤에 도윤이 얼굴을 찡그렸고 희성의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숨이 막혀 희성을 밀어냈지만 희성은 뒷목을 누르며 더 깊게 들어오기만 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현관에 가득 차고 뒷걸음질을 치던 도윤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다 허리를 붙잡는 힘에 중심을 되찾았다.

혀와 혀가 비벼지며 나는 느낌이 소름 끼쳤다. 미끄럽고 축축했다. 희성을 저지하던 손에 힘이 빠졌다.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자 희성이 혀를 빨아 당겼다. 혀가 이어지며 타액이 함께 넘어오기도 했고 틈새로 흘러내리기도 했다. 숨이 너무 모자라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아 혀를 밀어내자 희성이 밭은 숨을 쉬며 멀어졌다. 눈꺼풀에 힘이 풀렸다. 희성의 옷을 쥔 도윤이 헐떡이며 어깨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희성의 가슴팍도 처지는 비슷했다. 빠르게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상체를 보며 힘겹게 눈을 감았다 뜬 도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희성이 아래로 쭉 내려갔다. 순식간에 낮아진 몸에 도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도윤의 바지춤을 쥐고 숨을 고르던 희성이 손을 떨며 지퍼를 내렸다. 지퍼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끌어내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말리지도 못했다. 반쯤 서있는 기둥을 붙잡고 입을 벌리는 희성을 보며 어깨를 붙잡았지만 결국 도윤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어깨를 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윤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어댔지만 희성은 도윤의 것을 더 깊게 물었다. 현관 바닥에 닿은 무릎이 차가웠다. 희성은 허벅지를 잡고 고개를 앞으로 당겼다가 쭉 물렸다. 도윤이 뜨거운 입안에서 몰아치는 쾌감에 눈물을 만들어냈다. 흑…. 도윤이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떨어뜨렸고 입에 힘을 주고 성기를 빨아대는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는 도윤의 배를 뒤로 밀어 지탱해 준 희성이 고개를 쭉 뺐다.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꺼떡였다. 할딱이는 신음이 내려앉았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희성이 다시 귀두를 물고 이를 세워 긁었다.

“흐으, 응…아…그…마안….”

머리를 붙잡고 밀어냈지만 도윤의 손에는 힘이 없었다. 희성이 귀두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다시 목 끝까지 삼켰다. 숨이 막히고 아래에서 성기가 무언가를 토해내는 느낌이 들었지만 도윤의 것에 집중했다. 귀두를 물고 있는 곳이 좁아지고 희성이 침을 삼키자 함께 꿀렁이는 느낌이 생생해 도윤은 도리질을 했다.

“나, 나아, 흣, 나….”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희성은 그 느낌을 꾹 참고 도윤의 사정을 기다렸다. 흑…흐으…. 위에서 도윤이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침을 삼키자 도윤의 것이 버거워 함께 삼켜지지 못한 것들이 턱을 타고 흘렀다. 도윤이 울먹이며 고개를 젓자 귀두의 끝에서 정액이 흘러나왔다. 희성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움직여 귀두를 빨았다. 사탕 빨 듯 쪽쪽 빨자 도윤이 몸을 떨었다. 희성은 입안에 가득 찬 정액을 혀로 굴려보다가 삼켰다.

현관에 서서 펠라를 받은 도윤은 희성이 잠시 멀어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안겨 침대에 눕혀진 도윤은 빨개진 얼굴로 헐떡이기 바빴다. 도윤의 것을 빨아주면서 사정한 탓에 아래가 찝찝했다. 희성은 옷을 벗고 침대로 올라와 도윤의 유두를 물었다. 도윤은 이제 가슴을 괴롭혀주면 알아서 허리를 움찔움찔 떨고 울었다. 말랑했던 유두가 딱딱해지고 그 사이를 혀로 꾹꾹 밀고 누른 희성이 주변의 살을 깨물고 빨았다. 가슴에서 오는 성감을 버티지 못하고 흐느끼던 도윤이 울면서 말했다.

“모, 목, 읏, 에…하, 하지 마….”

“알겠어.”

“아읏….”

목에 흔적을 남길 수 없어 너무 아쉬웠지만 그 마음은 뽀뽀를 하면서 풀어냈다.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도윤의 입술에 뽀뽀를 남긴 희성이 목에도 뽀뽀를 남겼다. 귓불도 이로 물어보고 살살 빨았다. 귀의 뒤에서 입을 맞추고 내려온 희성이 양쪽 다 꼿꼿하게 서있는 유두를 만족스럽게 쳐다보곤 스스로 손가락을 빨았다. 다친 손가락을 쓸 수는 없으니 이번에도 멀쩡한 손을 이용했는데 풀리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차라리 도윤의 것으로 푸는 게 아프긴 하겠지만 더 빠르겠다는 판단에 끝을 맞추자 눈물을 닦던 도윤이 바들바들 떨었다.

“이제 할 거야.”

“으응, 응….”

“하다가 못하겠으면 말해.”

“흐, 으응….”

“무서우면 나 끌어안아.”

“응…. 아, 아프게 하면…안 돼….”

“응, 안 아프게 할게.”

몸을 숙여 도윤에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희성이 뻑뻑한 아래를 맞추고 귀두를 밀어 넣었다. 도윤이 숨을 삼키며 얼굴을 구겼고 희성 또한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내렸다. 도윤의 배를 짚은 팔이 떨렸지만 지금 느껴지는 아픔은 빨리 끝내는 편이 서로에게 나았다. 숨을 고르며 심호흡을 마친 희성이 귀두만 겨우 품고 있던 아래를 꾹 내렸다. 젤이 없어 뻑뻑했고 따끔한 느낌이 났지만 조금만 참으면 됐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아래가 만족스러웠다. 희성이 웃으며 몸을 숙였다.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 도윤의 팔을 목에 감아준 희성이 혀를 질척하게 섞었다.

도윤의 것에서 나온 액이 조금씩 내벽에 발리며 삽입이 수월해졌다. 희성은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터뜨리듯 쉴 새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앞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허리를 따라 도윤의 것이 반쯤 밀려나왔다가 안으로 들어가길 반복했다.

“하아, 아…!”

“도, 윤아, 도윤아.”

“흐, 윽….”

“사랑해. 사랑해 도윤아.”

“으응, 끅, 아!”

“좋아해. 좋아해.”

자꾸 아래로 떨어지는 팔을 붙잡아 손깍지를 낀 희성이 손등에 입을 맞춰주곤 허리를 움직였다. 아래에 힘을 주고 도윤의 것이 주는 쾌감에 내벽이 요동치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도윤은 끅끅 울었다. 위로는 눈물을 쏟아내고 아래로도 사정을 한 도윤이 베개에 머리를 비볐다.

희성은 사정을 할 때마다 그것들을 도윤의 하얀 배에다 꼼꼼히 발랐다. 그렇게 바른 것들이 바르면 또 사정을 한 것을 바르고, 마르면 또 바르고. 아래가 얼얼할 정도로 몸을 섞었지만 부족했다. 희성이 숨을 몰아쉬며 도윤의 배를 짚고 몸을 일으키자 내벽을 채우고 있었던 것들이 툭툭 쏟아졌다.

“이제에…그…만….”

“조금만 더, 응?”

“나, 나 목…물….”

도윤이 조금 쉰 목소리로 물을 찾았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가져오는 동안 벌어진 아래에서 정액이 흘렀다. 희성은 물병을 쥐고 침대로 올라와 다시 귀두를 아래에 맞췄다. 뻐끔거리며 귀두를 삼키자 성기에 쓸려 부은 내벽이 또 도윤의 것을 물어댔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도윤은 울 힘도 없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성이 물을 머금고 몸을 숙였다. 도윤은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물을 얌전히 쪽쪽 받아마셨다. 어미 새가 된 기분이었다. 재미있었다. 희성이 또 물을 머금어 도윤과 입을 맞췄다. 몸도 뜨겁고 입안도 뜨거웠지만 냉장고에 있었던 물만은 차가웠다. 도윤이 시원함을 찾아 희성의 혀를 빨았다. 희성이 웃으며 허리를 들었다가 내렸다. 젤을 바른 듯 미끄러운 기둥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하아, 도윤아, 너무 좋아.”

“응, 으응….”

“예뻐.”

“아….”

예뻐, 도윤아. 희성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고 턱에도 뽀뽀를 남겼다. 내벽이 쓸리고 쓸려 닿는 곳마다 신음이 절로 터졌다. 말라버린 정액이 가득한 배를 짚고 고개를 든 희성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 너무 좋아서 허리가 떨렸다. 희성이 실실거리며 도윤의 것을 주물렀다. 희성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성기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도윤은 귀두를 빨아들이는 내벽의 끝에 입술을 깨물었다. 익숙한 느낌이 찾아온 탓이었다. 도윤의 손이 희성의 배에 닿았다. 남의 살가죽 아래서 느껴지는 자신의 성기가 징그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끅, 성아, 희성아, 나…화, 화장…화장실…!”

“괜찮아.”

“안 돼, 안, 하읏, 아!”

“뭐든지, 응…. 다 내 안에 해.”

“아! 잠, 깐…아…!”

희성은 관계 중에 멈추는 법이 없었다. 처음과 같은 속도로 성기를 삼켰다가 뱉고, 빨았다가 놓아주는 힘에 자극을 견디지 못한 도윤이 눈을 꾹 감았다. 내벽에서 터진 물이 기둥을 타고 뚝뚝 흘렀다. 동시에 도윤이 눈물을 터뜨렸고 몸을 떨었다. 덜덜 떨리는 몸의 위에서 내벽을 채웠다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즐기던 희성이 이어서 사정했다. 누구의 숨이라고 할 것도 없이 헐떡이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내벽에선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희성이 우는 도윤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잔 도윤은 갑자기 몸이 너무 답답한 것을 깨닫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방안은 어두웠고 이불 속은 더웠다. 몽롱하게 눈을 깜빡이던 도윤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에 잠시 숨을 고르다 잠에 빠져들었다.

시계의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도윤은 밤새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희성의 품에서 겨우 벗어났다. 조용히 잘만 자는 희성을 구경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온 도윤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한 도윤은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날이 바뀔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희성은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욕실은 좁았고 소리도 울렸다. 큰소리를 냈다간 다른 손님들이 들을 수도 있었다. 도윤은 너무 힘들어 자신의 허벅지도 내어주었지만 희성은 부족한지 그 좁은 공간에서 도윤의 것을 삼켜냈다. 입을 틀어막아도 소리는 자꾸 새어 나왔고 결국 희성은 도윤의 허락을 맡아 손가락을 물렸다. 도윤은 그게 본인에게 더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도 모르고 소리를 참기 위해 희성의 손가락을 쭉쭉 빨았고 희성은 당연히 폭주했다.

세수를 하고 나온 도윤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앉아 희성을 내려다봤다. 희성은 무슨 힘이 그렇게 펄펄 나는 걸까. 도윤이 코를 훌쩍이며 잠든 희성을 기웃거렸다. 관계가 끝나면 늘 희성이 자신을 씻기고 말려주었다. 어제도 그랬다. 너무 신기했다. 희성의 얼굴 앞에 손을 댄 도윤이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희성이 이렇게 자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봤다. 그게 뭐라고 너무 신기해 손을 몇 번 더 흔들자 희성이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헉. 도윤이 황급히 손을 거뒀다.

희성이 도윤을 빤히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다시 자나…? 도윤이 조심스럽게 기웃거리자 희성이 팔을 뻗어 도윤을 끌어당겼다. 어어. 도윤이 요상한 소리를 내며 희성의 품에 안겼다.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 출근까지 시간은 남아있었다. 도윤이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다 희성의 팔을 톡톡 쳤다.

“응.”

“…….”

“왜.”

“…….”

희성이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품 안에 있던 몸이 움찔 떨었다.

“나, 나 조금 있다가 나가야 되는데….”

“응.”

“…너는 나중에 내려와서 가.”

“가기 싫은데…. 나 여기에 있으면 안 돼?”

“…….”

“얌전히 있을게.”

“…….”

“카페에 내려가지도 않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을게.”

도윤이 꼼질꼼질 희성을 밀어냈다. 몸을 뒤로 빼고 일어난 도윤이 침대를 문질렀다.

“그럼 밥은…?”

“굶지 뭐.”

도윤만 다시 온다면 굶어도 좋았다. 희성이 일어나 도윤을 끌어안았다. 도윤이 헛기침을 하면서 희성을 밀어냈다. 그래도 좋았다. 희성은 내내 웃는 얼굴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고 도윤은 좁은 방을 둘러봤다. 침대 시트는 몰래 가지고 내려가서 다른 시트랑 섞어서 세탁을 맡기면 되겠다 싶었다. 뺨이 붉어진 도윤이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희성은 정말로 나가지 않을 생각인지 출근 준비를 하는 도윤만 졸졸 쫓아다녔다. 도윤은 혹시 몰라 자신이 먹으려고 사둔 빵을 보여주기도 했고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도 보여줬다. 어색한지 볼을 긁적이면서 할 말을 고르는 눈치기에 희성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웃었다. 도윤이 못 미더운지 계속 힐끔거리다가 양말을 신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희성이 뒤에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도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도윤은 뻣뻣하게 굳어서 양말만 만지작거렸다.

“좋아해.”

“…….”

“도윤아, 좋아해.”

등에 얼굴을 기댔는지 말을 하면서 진동이 느껴졌다. 도윤이 마른 입술을 쓸어댔다. 허리를 감은 탓에 희성의 손이 배에 올랐다. 머뭇머뭇 손등을 톡톡 두드린 도윤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나…여기 그만둬도 바로 서울 안 올라가려고….”

“…그럼?”

“그러니까…. 아, 아빠한테…갔다가….”

“…….”

희성이 등에서부터 멀어졌다. 팔이 풀리고 긴장감에 굳어있던 몸이 돌려졌다. 도윤이 고개도 못 들고 양말만 만지작거렸다.

“아버지만 보고 바로 올 거지?”

“…….”

“같이 갈까?”

“…아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얼마나. 얼마나 있다가 올 건데?”

도윤은 계속 양말만 만지작댔고 희성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양말만 가지고 놀던 도윤이 고개를 들어 희성을 봤다.

“그전에, 나 궁금한 거 있어.”

“말해.”

“내가 여기 있는 거…어떻게 알았어?”

“네가 귤 보냈잖아.”

“너한테…보낸 적은 없는데….”

“나한텐 없었지. 아버지나…네 친구한테는 보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 너 혹시 아빠랑 서준이 찾아갔었어?”

“나한텐 그 방법밖엔 없었어.”

“가서 뭐 했어? 뭐라고 했어?”

“…….”

도윤이 심각해졌다. 희성은 심각한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너 어디에 있는지 제발 알려달라고 했어.”

“또?”

“…그게 다야.”

앞에서 잠깐이지만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윤이 희성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희성은 대답을 미루다가 마지못해 할 말을 털어놓았다.

“화…도 조금 냈어.”

“누구한테? 아빠한테? 서준이한테?”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자 도윤이 화난 얼굴을 했다.

“너 마, 막 소리치고 그랬어?”

“나도 모르게 그랬어. 난 네가 필요한데 아무도 알려주질 않잖아.”

“사과는? 사과는 했어?”

“잘못했어.”

“나중에 아빠랑 서준이한테 제대로 사과해!”

“그럴게.”

희성이 다친 검지로 도윤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차마 다친 손가락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도윤은 그저 입꼬리만 내렸다. 자신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니, 너무 속상했다. 자기 한 명 때문에 몇 사람이 피해를 보는 건가 싶기도 해서 더 속이 상했다. 무릎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이번에는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윤은 간지러운 느낌에 다리를 옆으로 틀었다.

“나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거 또 누가 알고 있어?”

“아빠랑 서준이가 다야.”

“…김희준은?”

“형은 몰라.”

병원에서부터 도망치는 것을 도와준 사람은 희준이 맞지만 희준이 준 카드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아빠와 서준이가 다였다. 도윤의 대답에는 하나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았다. 손과 멀어진 무릎에 또다시 희성의 손가락이 닿았다.

“얼마나 있다가 올 건데? 일주일이면 돼?”

“몰라….”

“매일 보러 갈게.”

“안 돼, 오지 마.”

“왜?”

“그냥….”

“보고 싶으면?”

“좀 참아….”

“그걸 어떻게 참아?”

목소리와 대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냥 쪼옴…참아봐…. 희성의 당당함에 도윤의 귓가가 홧홧해졌다. 나 이제 가야 되는데 너…는…조용히 있어야 돼. 알았지? 이번에도 민망함은 도윤의 몫이었기에 출근을 핑계로 말을 돌렸다. 희성은 알겠다며 함께 일어나 신발을 신는 도윤을 바라봤다. 도윤과 뽀뽀를 하고 싶었지만 느낌상 지금은 뽀뽀를 해주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도윤은 침대 시트를 품고서 자신의 방에 희성이 있는 게 어색한지 문을 닫기 전까지도 계속 안을 힐끔거렸다. 문이 닫히자 도윤이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찾아온 고요함에 한숨을 쉰 희성이 침대로 돌아와 푹 엎어졌다. 벌써부터 도윤이 보고 싶어 우울해졌다. 카페에 내려가지 못하는 대신 도윤의 베개를 끌어안은 희성이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

원래 일을 그만두는 날짜를 정해두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던데 도윤의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 문제였다. 현지는 그동안 매일 카페를 찾아와 도윤의 옆에 붙어있었고 도윤은 정우네 가족모임에 섞여 식사를 하곤 했다. 도윤을 독차지할 시간이 줄어든 희성은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도윤이 틈만 나면 서울에 가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불씨를 키우지도 못하고 꺼트려야 했다.

도윤의 마지막 날은 현지가 차지했다. 현지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날에는 자신과 함께 놀아야 한다며 매일 전화를 하고 수정을 시켜 문자를 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갑작스럽게 전해 놀랐을 현지를 위해 시간을 뺀 도윤이 카페에 앉아 현지를 기다렸다. 희성은 어제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갔다. 내일 함께 가겠다며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리긴 했으나 이번에도 서울에 가지 않겠다는 협박이 통했다. 희성은 공항으로 가기 전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도윤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현지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일찍 도착해 도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윤과 현지를 둘만 보내기엔 너무 걱정이 됐던 정우가 슬쩍 함께하길 원했으나 현지의 강력한 의견에 밀리고 말았다. 둘 다 핸드폰도 없어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었다. 정우가 둘이 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며 자신의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정우도 그렇고 둘을 쳐다보는 수정의 얼굴에도 걱정이 한가득이라 도윤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받아 카페를 빠져나왔다.

나란히 입구에 서서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손을 잡은 도윤과 현지는 우선 택시를 타기로 했다. 현지는 버스도 좋다고 했지만 아이와 돌아다니기엔 택시가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몰라 자신이 먼저 타고 현지를 태운 도윤이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말한 후 현지를 살폈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윤에게 가야 한다며 떼를 썼다더니 도윤의 손가락을 잡은 작은 손에는 힘이 꾹 들어가 있었다.

“나중에 힘들면 말해야 돼, 알았지?”

“응.”

“배고프거나 갑자기 어디가 아파도 전부 얘기해야 돼.”

“알았어.”

“나중에 뭐 먹을까?”

“으음, 음.”

머리를 묶었지만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묻자 현지가 끙끙 앓았다. 밥은 영화관에 가서 팝콘이나 콜라를 먹으면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을 것 같았고 당장 급한 일은 아니라 천천히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도윤이 현지의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어주었다.

오늘 도윤이 현지와 함께 보러 온 영화는 애니메이션이었는데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대부분 부모님과 애니메이션을 보러 온 아이들이 다였다. 현지의 손을 잡고 티켓을 뽑고, 매점에 들러 팝콘과 콜라를 산 도윤이 팝콘을 들 손이 없어 망설였다. 그러자 현지가 자기가 팝콘을 들겠다며 팔을 뻗었다. 이제 도윤의 손에는 콜라와 현지의 손이, 현지의 손에는 도윤의 손과 팝콘이 들려있었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도윤은 문득 시야에 들어서는 키 높이 방석에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현지야, 이거 필요해?”

“응!”

“어어, 그러면….”

현지와 잡은 손을 놓으면 방석까지 들 수 있었지만 현지는 끝까지 잡은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감하게 현지를 내려다보던 도윤이 일단 영화관에 들어와 현지를 자리에 앉혔다.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몸을 숙인 도윤이 현지와 시야를 나란히 했다.

“방석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야 돼.”

“같이 가면 안 돼?”

“누가 팝콘이랑 콜라 가져가면 어떡해. 현지가 지키고 있어야지.”

“…빨리 와.”

“응. 금방 올게.”

“1초 만에 와. 빨리.”

“빨리 올게.”

도윤이 웃자 불안하게 쳐다보던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팝콘을 끌어안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현지에게 손을 흔들어준 도윤이 뛰듯 걸어 키 높이 방석을 품에 안고 또 걸음을 빨리했다.

영화는 딱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영화라 도윤에겐 재미가 없는 편에 속했다. 현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을 터뜨렸고 도윤은 현지를 보며 웃었다. 도윤은 영화에 집중하는 대신 현지에게 팝콘을 먹여주고 콜라를 먹여주기도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는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 영화에 나왔던 캐릭터의 인형도 받았다. 내내 도윤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던 현지도 그때만큼은 손을 놓고 인형을 끌어안기도 했다. 인형을 안고 한참을 좋아하던 현지는 뒤늦게 도윤의 손을 놓은 것을 눈치채고 급하게 손가락을 잡아왔다. 도윤은 잡힌 손가락을 살살 흔들며 영화관을 나와 주변을 구경했다.

영화도 봤고 배도 고프지 않으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도윤과 현지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다양한 소품들을 파는 가게를 발견해 홀린 듯 들어갔다. 안에는 기념품을 고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윤의 손을 꼭 잡고 가게를 훑어보던 현지가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는지 손을 끌어당겼다. 귀여운 소품들을 구경하기 바쁘던 몸이 현지에게 이끌려 머리끈과 핀이 가득한 곳에 도착했다.

“뭐 가지고 싶어?”

“음, 나 저거!”

“어떤 거? 이거?”

“아니, 그 옆에 빨간색!”

“이거?”

“응!”

하트를 가득 품고 있는 머리끈을 내려주자 현지가 와아. 했다. 덩달아 웃으며 현지를 본 도윤이 고개를 틀어 노란 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색이 노래서 현지가 꽂으면 귀여울 것 같았다. 현지야. 작은 부름에도 귀신같이 듣고 고개를 든 현지가 눈을 깜빡였다. 도윤은 노란 핀을 머리에 대보고는 웃었다.

“이것도 사줄게.”

“응!”

“귀엽다.”

현지가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났다. 머리끈과 핀을 고르니 이제 더 이상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현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도윤이 계산을 하는 동안 현지는 도윤의 다리에 딱 붙어있었다. 감사합니다. 도윤이 고개를 꾸벅이곤 떨어지려 하지 않는 현지를 대롱대롱 매단 채 가게를 벗어났다.

날이 조금만 따뜻했어도 좋았을 텐데…. 해가 지니 순식간에 추워지는 날씨가 아쉬웠다. 창가가 아니라 밖을 못 본다는 점도 아쉬웠지만 우선 따뜻한 곳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현지가 먹고 싶다는 메뉴로 주문을 하고 물을 홀짝인 도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현지를 바라봤다. 아주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라 최대한 맛있는 저녁을 먹여주고 싶어 찾아온 패밀리 레스토랑은 포근했다. 현지가 인형을 안고 다리를 달랑거렸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스테이크는 현지가 먹기엔 너무 커서, 도윤이 아주 작은 조각으로 잘라줬다. 현지는 도윤이 먹는 대로 따라 먹기 바빴다. 도윤이 샐러드를 먹으면 같이 따라서 샐러드를 먹었고, 스테이크를 먹으면 또 따라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도윤이 목이 말라 에이드를 마시면 현지도 함께 빨대를 물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는 말도 못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 앉혀둔 인형이 옆으로 쓰러진 것도 모르고 현지는 볼이 빵빵해질 만큼 먹었다.

도윤은 처음으로 희성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본인이 먹을 것까지 모두 자신에게 주었던 마음을 이해했다. 현지가 먹는 것만 봐도 좋았다. 도윤이 에이드를 밀어주자 포크를 내려둔 현지가 빨대를 쪽쪽 빨았다.

식사까지 마치고 나오니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수정에게 이제 들어간다는 문자를 보내두고 택시를 탄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사이좋게 꾸벅꾸벅 졸았다. 나중에는 아예 도윤의 다리를 베고 잠을 잔 현지가 정우에게 안긴 채로 택시에서 내려졌다. 졸음이 쏟아져도 기사님에게 인사는 잊지 않고 허리를 숙인 도윤이 정우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도윤은 원룸과도 같았던 방의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6개월 가까이 지냈던 방이라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이곳에 와서 새로 산 옷들은 서준이 준 캐리어에 다 담기지도 않아 택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준의 캐리어에는 당장 필요한 것들과 정우가 사준 드림캐처, 현지가 선물로 준 그림이 들어갔다. 소중한 물건들이니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꼼꼼하게 챙겨두었다.

빠진 건 없겠지? 도윤이 짐을 뒤적거렸다. 따로 체크를 해두며 짐을 챙겨서인지 빠진 물건들은 없어 보였다. 내일 입을 옷을 꺼내두고 침대에 눕자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정신도 말똥말똥. 눈도 말똥말똥. 도윤이 옆으로 돌아누워 조용한 방을 쳐다봤다. 이제 이곳을 떠나 집으로 간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처음 제주도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한 달을 버티면 다행일 정도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발가락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늦지 않으려면 얼른 자야 하는데…. 도윤이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늘 드림캐처가 있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도윤이 몇 번이고 뒤척이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조금 늦게 자기는 했지만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밤이었다. 몸이 무겁지도 않았고 괜스레 마음도 두근거렸다. 저녁에 미리 빼둔 옷으로 갈아입고 캐리어를 정리한 도윤이 마지막으로 현관에 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던 방이었다. 혼자서 매 끼니마다 라면과 김밥만 먹었던 날들, 매일같이 찾아오는 밤과 새벽이 무서워 떨었던 날들, 혼자가 무서워 울었던 날들. 남들에겐 그냥 지나가는 숙소일지는 몰라도 도윤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다. 들어올 때는 몸과 마음이 모두 엉망이었지만 나갈 때는 아니었다. 도윤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고 지내는 동안 몸과 마음을 다치지도 않았다. 도윤은 정든 방을 훑어보곤 문을 열었다.

사장님과는 카페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일을 도와주느라 고생 많았다며 나중에 언제든지 놀러 와도 좋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보인 사장님은 도윤을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우는 사장님을 따라 훌쩍인 도윤은 감사했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드렸다.

도윤은 자신의 짐을 들어주는 정우에게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정우는 끝까지 무시하며 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곤 도윤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우는 도윤을 점심도 먹이지 않고 보내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기다리는 내내 간식을 사다주었고 함께 있어주었다.

“다 챙긴 거 맞아?”

“네에.”

“빠진 거 없어?”

“다 확인했어요.”

“티켓은?”

“여기 있어요.”

정우는 자식이 처음으로 밖에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보호자가 된 기분이었다. 곧 도윤이 정말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윤이 떠난다니 초조해진 정우가 도윤을 쳐다봤다.

“내 번호 적어뒀지?”

“네!”

“도착하면 전화해.”

“그럴게요.”

“그럼 아버지랑 지내는 거야?”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비행기 잘 탈 순 있겠어?”

“저 올 때 비행기 타봤어요!”

도윤이 당당하게 티켓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불안한지 정우가 혀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슬슬 들어가는 줄이 생기고 있었다. 뒤를 힐끔 돌아본 도윤이 웃으며 정우를 마주 봤다.

“저 이제 들어갈게요.”

“어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치지 말고.”

“사장님께도 또 전해주세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

도윤이 고개를 꾸벅였다. 정우는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도윤을 다시 만나려면 어쩐지 시간이 꽤 지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의 입이 어렵사리 열렸다.

“도윤아.”

“네?”

“한번 안아 봐도 돼?”

“…네.”

작게 팔을 벌리고 선 도윤을 물끄러미 바라본 정우가 걸음을 뗐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도윤을 끌어안은 정우의 손이 뒤에서 머뭇거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손이 느릿하게 등에 닿았다.

“밥 잘 챙겨 먹고.”

“네….”

“아프지 말고.”

“으응.”

“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네가 먼저야.”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붙었던 몸이 떨어졌다. 정우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도윤을 쳐다봤다.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끝이라는 생각. 도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티 낸 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후련하기도 했다. 정우가 웃었다. 도윤을 위해서.

“그동안 고마웠어.”

“…….”

“늦겠다. 들어가.”

“나중에…전화할게요….”

“잘 가, 도윤아.”

도윤이 줄을 서서 계속 뒤를 돌아봤다. 정우는 도윤을 위해서 끝까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도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웃고 있던 정우는 도윤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아픈 입가를 문질렀다.

도윤이 떠났다. 도망을 친 것도 아니었다. 혼자였던 도윤의 곁에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남았다. 도윤은 친구를 만들었고 또 다른 가족이 생겼으며 아프지도 않았다. 세상이 무서워 숨었던 도윤은 이제 없었다.

***

제주도에서 돌아온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분명 살이 쪘는데도 도윤의 아버지는 도윤을 보자마자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냐며 속상해했고 배가 부르다는데도 조금만 더 먹어보라며 음식을 밀어주었다. 도윤이 언제 올지 몰라 늘 준비하고 있었다던 방이 있었지만 도윤은 매일 아버지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잤다. 희성은 찾아오지 않았고 서준은 여전히 도윤을 걱정해 주었다.

서준은 캐리어와 함께 선물을 이것저것 가져온 도윤에게 이런 건 또 뭐 하러 사 왔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나중에는 고맙다며 머쓱해했다. 서준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빈손으로 떠나 꽤 고생을 했을 터였다. 도윤은 제주도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밥도 사고, 학생 때처럼 서준의 집에서 놀기도 했다. 전에는 희성이 언제라도 찾아올 것 같아 불안해했다면 지금은 마음이 편하기만 했다. 도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평화를 누렸다.

그래서 제주도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놀고먹기 바빠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도윤이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도윤의 가방에는 늘 희성의 연락처가 있었지만 연락을 해본 적은 없었다. 찾아오지 말란다고 정말로 조용한 희성이 낯설었다. 도윤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리할 그런 시간이.

반면에 희성의 시간은 좀 달랐다. 좋게 말하면 평화롭고 나쁘게 말하면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 넓은 집에 홀로 남아 도윤을 기다리는 건 너무 지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성은 도윤이 너무 보고 싶어 집 근처까지 찾아갔다가 그대로 되돌아온 적이 몇 번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한숨만 쉬다가 도윤에게 들킬 새라 다시 차를 되돌렸던 날들이 있었다.

도윤이 언제 올지 몰라 햄스터도 도윤의 방에 가져다 뒀다. 최대한 도윤의 취향으로 꾸며둔 방은 주인이 없어 쓸쓸해 보였다. 희성은 집에 있을 때면 늘 거실이 아니면 도윤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곧 도윤이 쓸 의자에 앉아 도윤이 쓰게 될 책상을 만져도 보고, 도윤이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옷들을 모두 사모아 채워 넣은 옷장도 괜히 열어보고, 도윤이 매일 밤 눕게 될 침대에도 누워봤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도윤이 아니었기에 속이 탔다. 도윤의 얼굴이 보고 싶고, 도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도윤의 냄새를 맡고 도윤을 만지고 싶었다. 도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그냥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도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도윤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희성은 종종 소파에 누워 고요한 집안을 훑어보다가 도윤의 이름을 불러봤다. 입안에서 굴려지는 이름이 좋았다. 도윤아, 라고 부르면 응. 이라던가, 으응. 이라고 대답할 도윤이 보고 싶었다. 희성은 핸드폰으로 도윤의 사진을 보다가 한숨을 터뜨리며 눈을 감았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도윤이 없는 희성은 말라가는 잎과도 같았다. 곧 바스라질 것만 같은 상태로 누워있던 희성이 핸드폰을 끌어안았다.

한동안 가족모임에는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던 희성이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보이자 희준은 대충 눈치를 챘다.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도윤이 없었던 날들보다는 상태가 봐줄만했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 걸 보면 도윤이 카드를 들키지는 않았나 보다. 희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희성을 쳐다봤다.

부모님의 말에 간간이 대답만 하면서 깨작깨작 식사를 이어가던 희성은 자꾸만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결국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희준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마주했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사람을 더 짜증 나게 만들고 있었다. 팍 구겨진 얼굴에도 희준은 웃었다. 희준은 왜 태어났을까. 입맛이 뚝 떨어진 희성이 젓가락을 내려두고 일어났다.

“벌써 다 먹었어?”

“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네. 저 먼저 올라갈게요.”

밥을 반도 못 먹고 일어난 희성이 계단을 올랐다. 전에는 도윤과 함께 올랐던 계단이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도윤의 방을 없앤 이후로 계속 쭉 함께 지냈던 방문을 열었다. 방도 크게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다. 희성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방을 둘러봤다. 저 책상도 도윤이 썼었고, 이 침대도 도윤이 썼었다. 희성의 몸이 뒤로 풀썩 넘어갔다. 팔을 뻗어도 닿는 도윤이 없었다. 혀로 입안을 훑으며 도윤을 떠올리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 마나 희준이겠지. 희성은 무시했다. 그러자 무시에 익숙해진 희준이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가.”

“도윤이는 잘 지내?”

희준이 문을 닫고 침대에 널브러진 희성의 옆에 앉았다. 도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살짝 꺼지는 침대가 짜증 났다. 여긴 도윤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앉거나 누울 자격이 없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잔뜩 구긴 희성이 희준을 올려다봤다.

“꺼져.”

“도윤이는?”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는데.”

“궁금하지. 그러고 갔는데 몸은 괜찮은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러니까 그걸 왜 궁금해하냐고.”

“그 정도도 못해? 형인데?”

“형은 무슨….”

희성이 아예 보지 않겠다는 듯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그런 희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희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이 집에 없나 보네.”

“…….”

도윤이 집에 있었으면 본가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식사를 끝마치고 이 방에 올라오지도 않았겠지. 알만하다는 시선이 희성을 훑었다. 희준은 문득 장난기가 일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도윤이 돌아오면 나한테 연락 좀 해달라고 전해줘.”

“내가 왜.”

“도윤이한테 받을 게 있어서.”

“…뭔데.”

“글쎄.”

그제야 팔을 내린 희성이 눈을 치떴다. 뭐냐고.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묻는 말에 희준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윤이한테 물어봐.”

희준이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방을 나갔다. 남겨진 희성은 또 자기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식에 턱을 비틀었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동안 도윤이 희준에게 뭘 받았다는 말은 전해 들은 적이 없었다. 짜증 나…. 용수철마냥 튀어 올랐던 몸이 다시 풀썩 쓰러졌다.

***

도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흘려보냈던 몇 달보다 도윤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는 지금이 희성에겐 더 고문이었다. 잠시만이라더니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희성의 꿈에는 매일 도윤이 나왔다. 어떤 날은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서준의 옆에서, 또 어떤 날은 아버지의 옆에서 웃고 있었다. 어떤 날엔 정우의 옆에서 웃고 있기도 했는데 희성은 그때마다 꿈에서 깨 욕을 중얼거렸다.

도윤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너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또 어떤 날엔 잠에서 깨자마자 차를 타 도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물론 도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희성은 도윤을 떠올리면 손까지 떨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꿈에서라도 도윤을 보기 위해 수면제까지 먹었다. 희성은 딱 죽을 맛이었다.

오늘도 꿈에 도윤이 나왔는데 오늘은 도윤이 자신을 피하며 멀어졌다. 가까이 다가가도 희성이 다가간 만큼 더 멀어졌다. 애가 타 도윤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봤지만 도윤은 더 멀어지기만 했다. 이런 꿈을 꾸려고 수면제까지 먹어가며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다. 희성이 식은땀으로 범벅인 몸을 벌떡 일으켜 숨을 헐떡였다. 씨발…. 희성이 이마를 문지르며 욕을 뱉었다. 꿈을 꿔도 꼭 이런 꿈을 꾼다. 기분이 나빴다. 마른 세수를 하는 손도 떨렸다.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꾹 깨문 희성이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하루의 시작부터 기분 나쁜 꿈을 꾼 탓인지 입맛도 없었다. 희성은 커피만 홀짝이며 소파에 널브러졌다. 순전히 도윤이 좋아하니까 도윤을 위해 놔둔 TV도 켜두지 않았더니 고요하다 못해 꼭 사람이 없는 집처럼 느껴졌다. 속이 쓰렸다. 가능하다면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잠을 자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희성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려 눈을 감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있다 한들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간 오겠지 싶어서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머리맡에 내팽개쳐둔 핸드폰이 눈치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일단 무시했다. 진동은 계속해서 울었다. 끝까지 무시했다. 잠시 진동이 끊긴 핸드폰이 조용해졌다가 또 웅웅, 울어댔다. 신경질적으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본 희성이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번호지. 모르는 번호가 둥둥 떠다녔다. 희성이 아이콘을 쭉 밀어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네.”

-…….

“여보세요.”

-…저…난데….

“…….”

-여, 여보세요? 아…. 아닌가…?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넘어왔다. 희성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뇌가 멈춘 사람처럼 굳어있던 희성이 벌떡 일어났다.

“하도윤?”

-어어.

“어디, 어디야?”

-나…집에 왔는데…. 아, 아무도 없어서….

“집?”

-으응, 전에 살던 집…. 근데 아무도 없고, 비밀번호도 틀려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핸드폰을 쥔 손도 떨렸고 입술도 떨렸다. 순간 머리가 띵해져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거기서 기다려.”

-응.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으응.

“금방 가. 조금만 기다려.”

-알겠어. 끊…을게.

도윤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일어난 희성이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주차장에 내려와 차에 타면서도 손이 떨렸다. 핸들을 꾹 쥐고 있어도 손은 여전히 떨렸다. 이러다간 도윤과 만나기도 전에 사고로 먼저 세상을 뜰 것만 같아 심호흡을 했다. 소용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전에 살던 집까지 잘 찾아온 도윤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 당황했고, 비밀번호를 눌러봤지만 틀렸다는 소리만 흘러나와 또 당황했다. 비밀번호를 바꿨나 싶어 자신의 생일도 눌러봤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너무 당황해서 땀이 났다. 침착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주변을 둘러본 도윤은 근처에 공중전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곤 편의점에 들어갔다. 당황해서 목이 말랐기 때문에 우선 물을 하나 사고 계산을 끝내면서 직원에게 핸드폰을 빌렸다.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하자 직원은 흔쾌히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희성의 번호를 중얼거리며 전화를 걸자 처음에는 신호음만 들려왔다. 이 번호가 아닌가? 또 땀이 났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자 이번에는 신호음이 길게 울렸지만 그래도 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냐는 물음에 집이라고 말해주자 희성은 금방 오겠다며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도윤은 전화를 끊고 직원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래도 남의 전화를 빌리기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사탕을 하나 계산해 직원에게 주고 편의점을 나온 도윤은 다시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희성을 기다렸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 탓에 다리가 자주 저렸다. 도윤은 앉았다가 일어나 주변을 걸어보고 다리가 괜찮아지면 또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희성을 기다렸다. 도윤은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다. 방을 얻어준다고 해도 괜찮다는 아들의 말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건 아닌데…. 희성이가…. 였다. 전에 그 꼴을 당하고도 또 그놈과 살 생각이냐는 말에 도윤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버지는 크게 화가 나 며칠간 도윤과 말도 하지 않았다. 서준도 그게 말이 되냐며 화를 냈다. 하지만 결국 도윤은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졌다. 아버지는 도윤이 집을 나서기 전까지도 말을 아끼다가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전화를 해야 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집도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다고 했다. 도윤은 그저 죄송하다며 말을 흐릴 뿐이었다.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푹 쉰 도윤이 코를 훌쩍이며 신발을 바라보다가 가까워지는 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윤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차가 입구에 서자마자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그리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나타났다. 도윤이 침을 삼키곤 눈을 깜빡였다. 희성은 도윤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도윤!”

가만히 서서 머뭇머뭇 쳐다보기만 하는 도윤에게 달려간 희성이 팔을 벌렸다. 희성의 말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도윤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너무 세게 끌어안아 숨이 턱턱 막히기도 했다. 도윤이 끙끙 앓으며 희성을 밀어내려다 뼈가 부러질 만큼 끌어안는 팔에 손을 아래로 내렸다. 희성은 도윤을 안고 연신 ‘도윤아, 도윤아….’ 하며 이름만 중얼거렸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파란 하늘을 보던 도윤이 희성의 허리를 토닥였다. 이어서 희성의 어깨에 도윤의 볼이 닿았다. 도윤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 세게 실렸다.

도윤이 돌아왔다. 희성에게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도윤은 다시 돌아와 희성을 선택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언젠간 이 선택을 후회할 날이 올지라도 도윤은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돌아온 도윤은 새로운 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희성이 강요해서도 아니었다. 도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도윤이 희성에게 돌아왔다.

  

  

구원의 자격(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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