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7)

제주도(6)

  

  

방에는 희성이 준 꽃다발을 꽂아둘만한 꽃병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도 없었기에 식탁에 올려둔 도윤은 출근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것을 확인하곤 미리 옷을 갈아입었다. 보는 눈이 있어 전날과 똑같은 옷을 입고 내려갈 수는 없었다.

침대에 앉아 입술을 계속 만지작거리다 바르게 놓여있는 꽃다발에도 시선을 주고 다시 입술을 만지작댔다.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입술인데 남의 입술같이 생소했다. 문득 어제 희성의 쇄골에 있던 타투가 떠올랐다. 방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CCTV도 없는데 괜히 주변을 확인한 도윤이 바지를 벗어 허벅지를 들여다봤다. 처음에만 가리고 다녔지 이제는 타투 위로 밴드도 붙이지 않았다.

매일 밴드를 붙이고 씻을 때마다 혹시나 없어질까 해서 상처가 나도록 문질러댔던 희성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숨까지 참으며 희성의 이름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 도윤이 다시 바지를 입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좋아하던 희성이 생각났다.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많이 들려왔다. 도윤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입술을 확인하곤 신발을 신었다. 아마 올해 첫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손님들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도 못 들었고 희성과 새해를 맞이하는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상관은 없나…. 도윤이 볼을 긁적이며 카페로 내려왔다. 정우가 벌써 출근을 했는지 문이 열려있었다. 어제 혹시 몰라 미리 인사는 했지만 정말로 외박을 했기에 조금 눈치가 보였다.

숨죽여 카페에 들어선 도윤은 조용히 손을 씻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정우의 옆에서 얼쩡댔다. 조식을 만들기 전에 피곤함을 깨우려 커피를 내리던 정우가 컵에 뜨거운 물을 받고 샷을 쏟아부었다. 아메리카노를 식히기 위해 몇 번이고 후, 후 불던 정우가 한 모금 넘기곤 도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네, 네. 형은요?”

“대충.”

정우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눈으로는 도윤을 쫓았다. 정적이 찾아오자 도윤은 얼른 행주를 찾아 더럽지도 않은 곳들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삐딱하게 기대서 도윤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우가 컵을 내려놓고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

“네?”

“밤에 같이 맥주나 한잔할까 싶어서 찾았더니 없던데.”

“어….”

행주를 내려두고 컵을 정리하던 손이 뚝 멈췄다. 삐걱삐걱. 누가 봐도 당황한 눈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뚝딱거리는 도윤을 보며 고개를 저은 정우가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입술은 벌어졌다가 꾹 다물리길 반복했고 눈도 빠르게 깜빡거렸다. 도윤은 어디 가서 거짓말은 절대 못할 사람이었다. 정우가 눈치껏 샌드위치를 만들 준비를 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윤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도왔다.

해가 바뀌기 전에는 그렇게 바쁘더니 오히려 해가 바뀌니 주변이 차분해졌다. 조식을 신청한 사람도 많지 않아 샌드위치 만들기도 금방 끝이 났다. 대부분 새벽에 일출을 보고 온 건지 자느라 점심까지도 내려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의 벽을 두긴 했지만 같은 공간에서 희성과 잠을 청한 것치고 놀랍도록 깊게 자고 일어난 도윤이었지만 오후가 되자 몸이 늘어졌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도윤의 걱정으로 잠을 설친 정우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서있는 내내 하품을 쩍쩍 해댔다.

카페에 틀어둔 음악도 하필이면 발라드라 잠이 솔솔 왔다. 의자에 기대 밖을 바라보던 도윤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솟아오르고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음악이라도 바꿔볼까 싶어서 목록을 훑던 정우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도윤을 발견하곤 웃었다. 방에 올라가서 자도 되는데 꼭 홀에 앉아 졸았다. 정우는 마음을 바꿔 음악을 그대로 두고 홀로 나가 도윤의 옆에 앉았다.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조는 도윤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머리를 어깨에 얹어주었다.

정우는 도윤에게 어깨를 내어준 자세 그대로 핸드폰만 봤다. 도윤을 자세히 보고 싶어 얼굴을 숙이면 깰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카메라만 켜둔 채 잘도 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목이라도 아플까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정우가 카메라를 끄고 창밖을 쳐다봤다. 어제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눈도 비도 오지 않고 깨끗하기만 했다.

어깨에 기댄 머리통이 움직인 것은 도윤을 위해 깔아둔 게임을 대신 깨주고 있을 때였다. 흠칫 놀라 눈을 뜬 도윤은 막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없었고 정우는 소리 없이 웃으며 게임을 깼다. 어깨에 기대고 잔 덕에 옆머리가 살짝 눌렸다. 상황을 파악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시 침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입가를 만지며 허리를 편 도윤이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죄송할 것도 많다.”

“일부러 자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차라리 방에 올라가서 자.”

“괜찮아요, 저 이제 안 졸려요.”

“하긴, 그렇게 잤는데 졸리면 안 되지.”

“…죄송해요.”

“농담이야.”

정우가 실실거리며 게임을 종료했고 도윤은 머쓱하게 앉아 머리를 정리했다. 밖에서부터 들어온 햇빛에 허공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먼지들이 시선을 가로챘다. 빠른 것 같으면서도 느릿하게 떠다니던 먼지들이 도윤의 옷에 달라붙었다.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듯 털어내고 있자 정우가 앓으며 기지개를 켰다. 큰 동작에 먼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녁에 치킨 시켜 먹을까?”

“맛있겠다.”

“치킨 안 먹은 지 오래됐지.”

“무슨 치킨 먹을 거예요?”

“지금 미리 골라둘까?”

“으응, 그래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순간 희성과 했던 약속을 어길 뻔했다. 도윤의 얼굴이 금세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플을 켜 엄지를 휙휙 넘기던 정우가 옆을 돌아본다. 까먹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목록을 쭉 내리기 바빴던 손이 멈춰 섰다.

“왜?”

“오늘은…안 될 것 같아요….”

“왜 안 되는데?”

“약속이….”

도윤을 쳐다보던 정우가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홱 도윤이 있는 쪽을 봤다. 도윤이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요즘 외출만 하면 누구를 만나고 오는지 정우는 다 알았다. 심지어 어제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했으면서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윤이 제주도에서 만날 사람은 딱 정해져있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제 괜찮은 거야?”

“잘 모르겠어요.”

“뭘 몰라, 나도 잘 알겠는데.”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그냥…. 모르겠어요.”

“솔직히 너 처음보다는 많이 편해 보인다는 거 알아?”

“제가요?”

“그래. 처음엔 무작정 무시하고 피하기만 하더니. 지금 봐. 너 어제도, 아니다. 됐다.”

정우가 혀를 찼다. 괜히 엮여서 피곤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짐과는 달리 걱정이 먼저 고개를 쳐드는 건 사실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남들한테 휘둘리지 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네….”

“하고 싶은 말도 참지 말고.”

“네에.”

말만 잘하지, 말만. 정우의 손이 도윤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에 눈을 감고 목까지 움츠린 도윤이 괴롭힘을 가장한 예쁨이 끝나자 헤헤 웃었다. 뭘 웃어. 남의 속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잘도 웃는다. 정우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도윤의 볼을 잡아당겼다. 도윤이 이번엔 아! 하면서 아픈 티를 냈다. 이번 기회에 혼을 아주 단단히 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잡은 볼을 놓자마자 꾹꾹 눌러 문질렀다. 도윤이 벗어나려 손목을 잡고 고개를 뒤로 쭉 뺐지만 정우의 힘이 더 강했다.

“아, 아하여!”

“아프긴 뭘 아파.”

“아흔데, 혀엉….”

도윤이 아프다며 우는소리를 냈다. 웃으며 손을 뗀 정우는 빨갛게 물든 볼을 보고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고인 눈물을 대충 닦으며 볼을 문지른 도윤이 코를 훌쩍였다.

***

정우와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카페를 청소했더니 어느덧 희성과 약속했던 일곱 시가 다가왔다. 도윤은 약속시간에 맞춰 방으로 올라간 사이 홀로 남아 카페를 지키던 정우가 먼저 대문에서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는 희성을 발견했다. 손님도 없고 도윤도 없으니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연 정우가 희성을 향해 보폭을 넓혀 걸어갔다. 사실 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카페로 돌아가기엔 희성과 눈이 마주친 후라 이미 늦어버렸다. 보고 싶었던 도윤이 아니라 제일 꼴 보기 싫었던 정우가 나타나자 희성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저기요.”

“뭐.”

“참견하고 싶지는 않은데, 자꾸 나타나서 도윤이 흔들지 마세요.”

“참견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 내가 너 같은 거랑 대화나 나누려고 온 줄 알아?”

“왜 자꾸 오는 건데요?”

“그걸 네가 왜 알고 싶은데.”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애한테….”

“시간이 남아돌면 새로 일할 사람이나 구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귀가 먹었나 보네….”

희성이 혀를 차며 뒤를 힐끔거렸다. 짜증을 품고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우가 뒤를 돌아보자 도윤이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허….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려고 카페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어서 당황했던 도윤은 밖에서 희성과 함께 서있는 정우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온 참이었다. 또 희성이 정우에게 예의 없이 굴거나 못된 말을 할까 봐 걱정이 됐다. 헐떡이며 정우의 앞에 선 도윤이 희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뭘 했다고 정우부터 숨기고 보는 점이 거슬렸지만 오늘도 예쁜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도 싹 사라졌다. 도윤은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정우에게 다녀오겠다는 말만 전한 후 희성을 끌어다 주차장으로 향했다. 도윤에게 잡혀 끌려가고 있었지만 먼저 손을 잡아줬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미리 차를 따뜻하게 해둔 희성은 문을 열어 도윤을 태웠다.

“형한테 뭐라고 했어?”

“인사 먼저 해줘.”

“뭐라고 했냐니까!”

“아무 말도 안 했어.”

“…진짜?”

“응.”

도윤이 위아래로 작게 흔들리는 얼굴을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훑었다. 정말이야, 아무런 말도 안 했어. 희성이 조심스럽게 새끼손가락을 잡으며 해명했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당장 정우에게 달려가서 희성이가 뭐라고 했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윤이 손을 빼내고 안전벨트를 맸다. 떨어진 손이 아쉬워 주먹을 쥐었다가 편 희성이 차를 출발시켰다.

맛있는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도착한 곳은 근처 카페였다. 밥을 잔뜩 먹고도 아이스초코와 와플을 시킨 도윤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디저트를 먹었다.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와플은 도윤이 혼자 반이나 먹어치웠다. 초코크림을 찍어 먹기도 하고 초코크림이 질리면 하얀 생크림을 찍어 먹기도 하며 부지런히 먹는 도윤은 꼭 볼에 먹이를 저장하는 다람쥐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메리카노에 서비스로 나온 쿠키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빨대만 씹던 희성이 빨대를 뱉곤 와플을 잘라주며 운을 뗐다.

“도윤아, 혹시 서울…다시 가고 싶지는 않아?”

“응?”

“나랑 같이 돌아가자.”

“…….”

“돌아가면, 절대 예전처럼 굴지 않을게.”

“서울…?”

“응.”

와플을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도윤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멈춰버린 볼을 하고서 희성을 봤다.

“싫어?”

“…….”

“응?”

“자, 잘 모르겠어.”

입에 있는 와플을 꿀꺽 삼키고 포크도 내려뒀다. 희성은 그릇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사실…아빠도 보고 싶은데….”

“응, 아버지도 보고 그러자.”

“근데 갑자기 그만두면….”

“괜찮아.”

“그래도….”

몸을 당겨 앉은 희성이 포크에 와플을 콕 찍어다 도윤의 앞에 들이밀었다. 포크를 받아서 와플을 먹은 도윤이 심각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이번엔 아이스초코가 도윤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얌전히 빨대를 문 도윤이 아이스초코를 쪽쪽 빨아마셨다.

“생각…좀 해볼게….”

“응, 생각 정리되면 언제든지 말해. 와플 더 시켜줄까?”

“아니이….”

도윤은 희성이 잘라둔 와플 조각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도 보고 싶었고 서준이도 보고 싶었다. 올해엔 복학도 해야 했고, 학교를 가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게 맞았다. 생각을 하는 동안 입안에 든 와플을 다 먹었다. 도윤의 입이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와플 조각이 다가왔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 도윤이 와플을 먹고 희성을 흘겼다.

“근데 있잖아.”

“응.”

“…콩이 사진 있어?”

“…왜?”

“보고 싶어서….”

크림이 묻은 입술을 휴지로 닦으며 묻는 말에 혹시 몰라서 햄스터를 관리해 주는 사람에게 받아두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아주 핸드폰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사진을 들여다본다. 맛있게 먹던 와플도 뒷전이었다. 도윤이 웃으며 질문을 쏟아냈다.

“콩이 안 아파?”

“응.”

“밥은? 밥은 잘 먹어? 집에 영양제도 사뒀었는데, 그것도 잘 주고 있어?”

“…….”

“응? 잘 줬지?”

“어.”

“병원은? 병원도 데려갔어?”

“어.”

“사진 더 없어?”

“없어, 그게 다야.”

도윤이 손가락으로 화면 속 햄스터를 살살 문질렀다. 햄스터는 2년이 되면 어디가 아프거나 그보다 오래 살지는 못한다고 했었는데 콩이는 2년이 넘도록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도윤이 핸드폰 화면을 확대해두고 테이블에 내려놨다.

“햄스터가 그렇게 좋아?”

“귀엽잖아.”

“네가 더 귀여워.”

“또 이상한 말….”

희성을 흘기며 남은 와플을 크림에 찍어 먹은 도윤이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의자에 기댔다. 눈은 다시 확대된 햄스터 사진에 꽂혀있었다.

“근데 콩이가 나 못 알아보면 어떡해?”

햄스터는 원래 시력이 좋지 않아 주인을 알아보지 못 한다. 그러나 희성은 말을 아끼며 핸드폰을 끌어왔다. 도윤에게 새로운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그러니까 얼른 가서 보면 되잖아. 햄스터도 나보단…널 더 좋아할 텐데.”

무작정 서울로 가자고 할 때는 생각이 많아 보이더니 햄스터를 위해서라도 일찍 올라가자니까 동요하는 몸에 기가 찼다. 자신은 도윤에게 햄스터보다도 못한 존재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갈 길이 너무 멀었으나 이건 모두 자신의 업보였다. 했던 짓들을 주워 담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면 정말로 긴 시간이 필요할듯했다.

와플을 다 먹고 배가 불러 의자에 기대앉아있기만 하던 도윤에게 희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은 언제가 좋은지 물어왔다. 도윤은 배에 올린 손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이며 괜히 딴청을 부렸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른 곳만 쳐다보는 눈에 희성은 애가 탔다.

“언제가 괜찮아?”

“음.”

“잠깐이라도 괜찮아. 싫으면 멀리서 얼굴만 보고 갈게.”

“으음.”

희성만 피해 다니는 눈이 카페를 훑었다. 도윤은 이제 자기가 대답을 주지 않아도 희성이 무섭게 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일부러 희성을 피하던 시선이 앞을 향했다. 희성은 제게 어렵사리 닿은 시선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받아냈다.

“뭐든 괜찮아?”

“당연하지.”

“가고 싶은 곳이 있긴 한데….”

“어디?”

도윤이 가고 싶다 말해준 곳은 만화 캐릭터를 주제로 꾸민 전시회였다. 보고 싶은 것도 꼭 자기 같은 것만 보고 싶어 했다. 희성에겐 흥미가 티끌만큼도 없는 곳이었지만 도윤이 가고 싶었다니 꼭 가야만 했다. 둘은 도윤의 퇴근시간에 맞춰 전시회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음엔 앞까지 데리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도윤은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다며 거절했다. 전시회장으로 가는 그 순간부터 도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기회를 날린 희성이 알겠다며 약속 장소와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윤을 데려다준 희성은 이번에도 입맞춤을 바랐지만 도윤이 고개를 저으면서 실패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던 정우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늘은 희성과 뽀뽀를 하고 싶지 않았다. 희성은 아쉬워 보였지만 도윤은 뿌듯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아직까지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카페에 들러 인사를 하려고 했던 도윤은 정우와 함께 있는 사장님을 보고 고개를 꾸벅였다.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던 정우는 시계를 힐끔거리곤 도윤에게 손을 흔들었고 포스기를 만지던 사장님도 고개를 들어 도윤을 맞이했다.

“잘 놀고 왔어?”

“네에.”

정산을 마친 사장님이 작게 웃었다. 사장님을 따라 헤실헤실 웃던 도윤은 주방으로 들어가 그 옆을 기웃거렸다. 영수증을 뽑아 한번 살피곤 반으로 접은 사장님이 도윤에게 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해.”

할 말이 있는 걸 어떻게 아셨지…! 흠칫 놀란 몸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 도윤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내일…조금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아니면 내일은 그냥 쉬어도 돼. 어차피 내일은 나도 있고 정우도 있을 거라서.”

“아니에요, 도와드리다가 갈게요.”

“도윤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사장님이 웃으며 전원을 껐다. 매일 카페에서 살다가 시간이 끝나면 방으로만 올라가더니 요즘은 밖을 돌아다니기 바쁜 도윤이 그저 장했다. 홀 청소를 마친 정우가 포스기의 앞에 섰다.

“내일 어디 가?”

“전시회 보러 가요!”

“전시회?”

“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내일 보러 가기로 했어요.”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웃음을 띤 도윤이 먼저 올라가 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잘 자고. 사장님의 배웅에 도윤이 또다시 고개를 꾸벅였다. 카페를 빠져나가는 도윤의 뒷모습을 눈에 담던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

오전에 배달 온 우유를 정리하고 잠깐 쉬던 도윤에게 또 원두가 배달이 왔다. 원두를 차곡차곡 채우는 김에 창고까지 정리를 마친 도윤은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와 일을 도왔다. 손님이 빠져 한가해진 시간엔 사장님과 정우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체크인 전에 짐을 먼저 맡기러 왔다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손님의 짐을 방으로 옮겨주기도 했다. 오늘따라 너무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직접 만든 아이스초코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던 도윤은 할 일을 찾아 밖으로 나섰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찾아 나서고 마당에 돌아다니는 쓰레기와 낙엽을 치운 도윤은 말끔해진 마당을 둘러보곤 뿌듯함을 느꼈다.

카페에선 배달을 따로 하지는 않지만 가끔 근처에 있는 지인들을 위해 배달을 나갈 때가 종종 있었다. 오늘 정우는 도시락을 살 때마다 서비스로 반찬을 얹어주고 가끔 그냥 가져가라며 돈을 받지 않았던 사장님께 커피와 샌드위치를 전하러 자리를 비웠다.

정우가 비운 자리는 도윤이 채웠다.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는 사장님을 대신해 포스기 앞에 서있던 도윤은 남은 아이스초코를 모두 털어마셨다. 이상하게 평화롭고 순조로운 날이었으나 자꾸 무언가를 까먹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퇴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찝찝했지만 시럽을 추가해달라는 손님의 말에 도윤은 컵을 들고 움직였다.

편의점에 다녀온 사장님과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눌 때였다. 도윤은 메모장에 의미 없는 그림을 그리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배달을 갔다가 돌아온 정우가 머리에 묻은 눈을 털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엄청 내리네. 정우가 머리를 정리하다가 낙서를 하고 있는 도윤을 발견하곤 시계를 쳐다봤다. 분명 어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도 되냐고 묻던 도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할 시간 아닌가? 정우가 옷을 벗으려다 물었다.

“도윤아, 너 오늘 전시회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네?”

“어제 전시회 보기로 했다며.”

“어머, 나도 까먹고 있었네. 얼른 가봐.”

“어….”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며, 몇 시….”

급하게 시간을 확인한 도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세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은 세 시를 넘기고도 3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전시회장까지 가려면 적어도 40분이 더 걸렸다. 정우가 허둥지둥 카운터를 벗어나 방으로 올라가려는 도윤을 붙잡았다.

“앞치마 벗어야지!”

“아, 아!”

“옷 갈아입고 내려와, 데려다줄게.”

마음이 급했다. 앞치마를 개지도 못하고 정우에게 안겨준 도윤이 뛰듯이 계단을 올랐다. 사장님은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미안해했다. 벗으려던 옷을 다시 입고 카페를 나선 정우는 애써 주차를 마친 차에 다시 올라 도윤을 기다렸다.

다녀오겠습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사장님에게 다녀오겠단 인사를 남긴 도윤이 달려가다 빵, 하고 울리는 클랙슨에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창문을 내린 정우가 손을 흔들었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도윤이 차에 올랐다. 하늘에선 굵은 눈송이가 펄펄 내리고 있었다.

늦는다고 연락을 할 방법도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안전벨트를 쥐고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던 도윤이 남은 거리를 쳐다봤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예상보다 10분은 더 늦게 도착할 듯싶었다. 약속을 해놓고 그걸 까먹다니,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걔도 어디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까요?”

“누가 이 눈을 다 맞으면서 기다리고 있겠어.”

“그렇겠죠…?”

“그럼.”

유리를 가리는 눈을 치우기 바쁜 와이퍼를 보며 정우에게 위로를 받아도 마음이 불편했다. 희성이 제발 어디라도 들어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와이퍼가 눈을 치우자 펑펑 쏟아지는 눈에 꽉 막힌 도로가 나타났다가 또 눈에 가려 흐려지길 반복했다.

정말 힘겹게 도착했다. 정우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안전벨트를 풀고 튀어나간 도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줄어들지도 않고 더 거세지기만 했다. 희성을 찾는 눈이 빨라졌다. 그리고 도윤은 전시회장의 근처에서 거세게 쏟아지는 눈을 오롯이 다 맞고만 있는 희성을 발견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만 보고 있던 희성도 숨을 몰아쉬며 서있는 도윤을 발견했다. 뒤늦게 차에서 내려 우산을 챙긴 정우가 도윤에게 우산을 씌워주었고 얼굴과 귀가 빨갛게 얼어있던 희성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윤의 입술에서 나온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적이 흘렀다. 희성은 도윤에게 다가오지도 않고 그 자리에 얼어버린 듯 서있었다. 우산을 받는 손이 떨렸다. 도윤에게 우산을 건네준 정우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희성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다시 차로 향했다.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쌓인 희성을 보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했다. 희성은 도윤이 다가와 우산을 씌워줄 때까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온몸에 쌓인 눈과 빨갛게 얼어있는 몸이 희성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손잡이를 쥔 손이 떨려왔다.

“너 바보야?”

“…….”

“어디 들어가 있기라도 하던지!”

“…….”

“내가 안 오면…들어가서 기다려야지….”

희성의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걸 다 맞고 있기만 하면 어떡해.”

“…….”

“내가 언제 올 줄 알아서, 내가 안 오면 어떡하려고!”

“도윤아 왜 울어.”

“너는, 넌…넌 대체 왜 그래…? 왜, 왜 그렇게…제멋대로야?”

“왔잖아. 결국 왔잖아. 그거면 돼.”

“대체…뭐가…. 뭐가 됐다는 건데?”

“괜찮아, 이렇게 왔잖아.”

도윤의 얼굴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눈을 감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산을 쥐고 있을 힘이 없었다. 주인을 따라 바닥으로 향했던 우산이 희성에게 의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춥겠다, 들어가자.”

그 한마디에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지고 말았다.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날씨에 우산도 없이 미련하게 쏟아지는 눈을 다 맞으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희성에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파르르 떨리는 몸이 눈을 맞지 않게 우산을 기울여준 희성이 손을 뻗었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희성을 쳐다봤다. 우산이 앞으로 쏠려있는 탓에 희성의 머리로 다시 눈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희성은 소리까지 내며 우는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울지 마.”

“끅….”

“들어가자. 내가 티켓 먼저 사놨어.”

“이러고 어딜, 어딜 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야?”

“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끅끅거리며 희성의 팔을 잡은 도윤이 전시회장 앞을 벗어났다. 희성은 끌려가면서도 도윤이 눈을 맞을 새라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차 어디에 주차했어?”

“왜?”

“호텔로 가.”

“…전시회는?”

“지금 그게 중요해?”

“나한텐 중요해.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나는 밖에서 기다릴게. 너 보고 와.”

“김희성!”

도윤이 화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도윤이 우느라 열이 오른 얼굴로 화를 냈다.

“너는 내가 너 놔두고 전시나 보러 갔으면 좋겠어?”

“보고 싶어 했잖아.”

“널 두고 들어가면, 내가 그걸 잘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도윤이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진짜…진짜 싫어….”

싫다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걸음을 뗀 희성이 주차된 차를 찾아 문을 열어주었다. 훌쩍이며 조수석에 앉은 도윤은 고개를 돌리고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밖에서 눈을 털어낸 희성은 차에 오르자마자 도윤을 위해 히터를 틀어두고 운전대를 잡았다. 도윤은 차가 호텔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옆을 봐주지 않고 창문에 머리만 대고 있었다.

저번에 한번 와본 기억을 더듬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룸에 도착한 도윤은 희성이 문을 여는 것을 지켜봤다. 희성이 먼저 신발을 벗고 그 뒤를 도윤이 따랐다. 감기에 걸리기 전에 씻으라는 말에 희성은 또 도윤이 먼저 갈까 봐 불안한 티를 냈다. 욕실 앞에 서서 들어가지도 않고 자신만 쳐다보는 희성의 의도를 파악한 도윤이 가방을 내려두고 패딩을 벗자 희성은 그때서야 욕실에 들어갔다.

희성이 씻는 동안 소파에 앉아 한숨만 쉬던 도윤은 갈증이 일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아직도 빼빼로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도윤은 물을 마시고 조용한 룸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있는 빈 물병을 제외하면 매일 청소를 해서 그런지 모든 곳이 깨끗했다. 저건 왜 안 치웠지. 물기도 없이 말라있는 물병을 들여다보다가 쓰레기통에 넣은 도윤은 또 소파에 앉아 창문을 바라봤다. 눈이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전에는 머리도 말리지 않고 급하게 나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면 오늘은 씻고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고 머리카락에서 물도 떨어지지 않았다. 희성은 가운 차림으로 도윤의 옆에 앉았다. 희성이 씻고 나오니 이제 할 일이 없었다. 자신이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전시회를 둘러보고 그다음으로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을 희성이라 일단 호텔로 데려온 것이었다.

씻고 나온 것을 봤으니 돌아가야 하나, 생각을 하던 중 어깨에 젖은 머리가 닿았다. 목덜미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차가워 목을 움츠렸더니 희성이 손을 잡아왔다. 손가락 사이마다 희성의 손가락이 얽혔다. 힘을 주지도 않고 깍지만 끼고 있던 희성이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미지근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윤아.”

“…응.”

“아까.”

“응?”

“…그 사람이랑 계속 같이 있었어?”

“누구?”

되묻는 말에 희성이 다시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정우 형 말하는 거면, 내가 늦었다니까 데려다준 거야.”

“…내가 데리러 간다고 할 때는 필요 없다고 했잖아.”

“어, 어제는 나도 내가 늦을 줄 몰랐으니까….”

“왜 늦었어? 바빴어?”

“…….”

“아니면…까먹었어?”

“…….”

말을 끝마칠 때마다 손등에 닿았던 입술이 까먹었냐는 말에는 닿지 않았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까먹고 있었다. 도윤이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랜 침묵에 희성이 다시 손등에 입술을 찍었다.

“도윤아, 나 잊어버리지 마.”

손등에 닿은 입술이 웅얼댔다. 한참을 입술만 문지르던 희성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보니 도윤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웃음이 샜다. 희성이 굳은 어깨에 입을 맞추고 도윤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갈 곳을 잃은 눈이 희성의 이마를 쳐다봤다가 볼을 쳐다봤다가 입술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굳게 다물린 입술을 보던 희성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 입술을 머금었다.

내리깐 눈으로 희성을 보던 도윤이 눈을 감았다. 희성은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다시 틈을 주며 도윤의 반응을 살피다 혀를 밀어 넣었다. 입술이 떨어지면 잠시 숨을 고르다가도 다시 붙으면 서툴게 따라오는 혀가 귀여웠다. 키스를 하면서 몸을 뒤로 살살 넘기자 끙끙거리던 도윤이 어느 순간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가 됐다. 키스만으로도 버거워 할딱이던 도윤은 눈을 뜨니 달라진 시야에 눈을 깜빡였다. 헐겁게 묶어뒀던 가운의 끈이 풀어져 희성의 가슴팍이 다 보였다. 도윤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도윤아.”

“…….”

턱에 닿았다가 목으로 내려가는 입술에 도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쉬던 희성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윤은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서워?”

“…….”

“도윤아.”

“…으응, 응….”

“무서워?”

“네, 네가…또…아프게, 무섭…게…하면….”

“안 그럴게.”

도윤은 실눈을 뜨고 희성을 올려다봤다. 마치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인 사슴을 보는 기분이었다. 희성이 다시 입술을 찾아 아랫입술을 빨다가 혀를 옭아맸다. 끙…. 으응…. 키스만으로도 앓는 소리를 내는 도윤이 나중에는 어떤 소리를 어떻게 내는지 떠올랐다. 희성의 손이 옷 사이로 들어서자 타액도 삼키지 못하고 앓던 몸이 화들짝 놀라 떨었다. 밭은 숨을 내쉬는 도윤에게 뽀뽀를 해주고 내려간 희성이 옷을 끌어올려 배에 입을 맞췄다. 도윤의 살이 닿자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이 살을 만지고 싶어서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배에 입술을 찍으며 올라와 결국 도윤의 상의를 벗기는데 성공한 희성은 반년 만에 마주친 가슴팍에 머리가 핑 돌았다. 하아…. 희성이 한숨과도 같은 신음을 뱉으며 가슴팍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아, 아프게 하면 안 돼, 응? 알았지? 알았지?”

“알았어.”

“아….”

마사지를 하듯 가슴을 주무른 희성이 아직까지는 납작한 유두를 머금었다. 혀로 조금만 문질러도 꼿꼿하게 서는 유두가 떠올랐다. 가슴을 쥔 손이 떨렸다. 희성이 사탕을 빠는 것처럼 유두를 살살 빨곤 혀끝으로 문질렀다. 하아…. 위에서 도윤의 신음이 흐르고 유두가 꼿꼿하게 섰다. 희성은 반대편 유두도 손으로 똑같이 문질러주다가 보호대를 차고 있는 검지가 거슬려 입에 있는 유두를 조심스럽게 이로 깨물어 보았다. 아! 도윤의 몸이 펄떡였다.

“아, 아프게 안, 하겠다고, 흣, 해, 했잖아…!”

“응….”

“후으, 읏….”

깨물던 것을 놓아주고 살살 긁자 도윤이 작게 앓았다. 더 많은 곳을 빨아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소파가 너무 작았다. 희성이 도윤의 팔을 끌어와 자신의 목에 둘러주었다. 할딱이던 도윤은 저도 모르게 희성을 끌어안았다. 이다음에 이어질 행동이 뭔지 너무 잘 알았다. 알아서 일어난다고 밀어내기도 전에 들어 올려진 도윤이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흑….”

“너 힘들까 봐.”

“그럼 안 하면…되잖아….”

“그건 내가 힘들 것 같아서.”

팔에 얼굴을 묻고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다 대꾸를 해준 희성이 도윤을 침대에 눕혔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가슴팍까지 모두 붉어진 도윤을 보자 아래에서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귀두 끝으로 액이 뚝뚝 떨어졌다. 희성이 숨을 고르며 도윤의 바지를 벗겼다. 속옷을 벗기면서는 이게 꿈은 아닐까 겁이 났다. 반쯤 일어선 성기를 쥐고 몸을 숙인 희성이 기둥에 입을 맞췄다.

“흣….”

“도윤아.”

“으응, 왜애….”

“나 한 번만 때려봐.”

“뭐?”

기둥을 쥐고 몸을 일으킨 희성이 부탁하자 도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뭐, 뭘 때려? 당황해 대답도 못하고 있자 도윤의 팔을 직접 들어 올린 희성이 자신의 뺨을 쳐댔다.

“하, 하지 마!”

“아프네….”

“당연히 아프지!”

“…진짜네.”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만 중얼대는 희성을 올려다본 도윤은 문득 무서움을 느꼈다. 하지만 희성은 이유를 알려주지도 않고 다시 내려가 도윤의 것을 쥐었다. 자신을 기다리느라 추운 날씨에 눈을 오래 맞아서 아픈 거 아니야? 겁을 먹은 도윤이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도윤의 것을 얼른 빨고 싶어 입맛을 다시던 희성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아, 안 할래, 흐, 나 안 하고 싶어….”

“왜? 아파?”

“무서워, 무서워서….”

“뭐가 무서워?”

“너, 너…아까 왜, 왜 그랬어? 나 무서워서….”

“…아까?”

도윤이 훌쩍이며 눈물을 퐁퐁 쏟아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윤을 달래고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희성은 하던 것을 멈추고 도윤을 끌어안았다. 가운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등을 쓸어주면서도 자꾸 아래가 꺼떡거려 신경이 쓰였다.

도윤은 한참을 앉아 훌쩍거리기만 했다. 도윤이 울기만 하는데 아래는 죽지도 않고 힘이 더 실렸다. 눈을 감아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희성이 조금씩 진정을 되찾는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너어….”

“응.”

“어디 아파?”

“안 아파.”

“근데, 근데 왜….”

“내가 왜 아픈 것 같다고 생각했어?”

“갑자기 때려달라고…하고….”

“아.”

희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품 안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가 또 꺼떡였다. 맨살에 쪽쪽 입을 맞추던 희성이 대꾸했다.

“너랑 이러고 있는 게 거짓말 같아서.”

“…….”

“그래서 그랬어. 꿈인 것 같아서.”

“…….”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랬어.”

“…으응.”

도윤이 가운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오해가 풀렸으니 무서움도 조금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몸을 뒤로 눕히자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달래듯 잘게 뽀뽀를 남기며 내려간 희성이 도윤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베개를 끌어와 얼굴을 가린 도윤이 연신 훌쩍거렸다. 얼굴을 보고 싶지만 지금은 뭘 해도 도윤이 무서움을 느낄까 봐 걱정이 앞섰다. 애써 벌려둔 다리가 움찔거리며 사이를 좁혔다. 희성은 가까워지는 다리를 벌리곤 허벅지에 입술을 내렸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허벅지를 핥고 빨자 허벅지 안쪽이 떨렸다. 희성의 이름이 희성의 입안으로 사라졌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하더니 붉은 꽃이 피었다. 너무 좋아서 코가 찡해졌다.

도윤이 베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신음이 자꾸 먹혔다. 끙끙거리는 신음을 들으며 귀두를 핥고 입안 깊숙이 삼키자 허리가 튀었다. 깊게 찔리는 귀두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았다.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희성이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양옆으로 잡아 벌리곤 서서히 딱딱해지는 것을 빨았다.

“흐으, 흑….”

도윤이 허리를 비틀자 성기가 더 깊숙이 박혀들었다. 작게 기침을 하며 딱딱하게 발기한 것을 뱉어낸 희성은 아예 허벅지 뒤로 손을 넣어 도윤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잠시 찬 공기가 닿았던 성기는 다시 희성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허리가 들려 희성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울던 도윤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흣, 희, 성아, 아!”

“으응.”

“읏, 흐으, 으응…!”

도윤의 것을 머금은 채로 침을 삼키자 차마 삼키지 못한 것들이 기둥을 타고 흘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깊게 삼켰던 희성은 거친 숨을 뱉으며 성기를 뱉어냈다. 허리가 침대에 닿기가 무섭게 다시 잡힌 성기는 귀두가 깨물리는 느낌에 울컥 액을 토해냈다. 다리를 세울 힘도 없는지 허벅지가 움찔움찔 떨렸다. 사정을 하고 있음에도 성기를 주무르며 쪽쪽 빤 희성은 그것도 부족한지 입에 정액을 머금고도 기둥을 깊게 머금었다가 뱉었다. 입술 새로 흐른 정액이 귀두를 타고 흘러내렸다. 희성은 입안을 가득 채운 미끌거리는 정액을 고민도 하지 않고 삼킨 채 다시 유두를 물었다. 사정의 여운을 느끼고 있던 도윤이 손을 뻗어 희성의 머리를 밀어냈다.

“흐, 잠깐….”

“조금만.”

“아파, 읏, 아파.”

입안에서 굴려지고 있는 쪽이 아픈 건지 아니면 손으로 만져지는 곳이 아픈 건지 헷갈렸다. 고개를 옆으로 틀자 고여 있던 눈물이 눈 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한 손으로는 희성의 머리를 밀어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두를 만지고 있는 손을 붙잡아 내린 도윤이 발로 침대를 밀었다. 사탕도 아닌데 질척이는 소리가 날 만큼 유두를 빠느라 정신이 없었던 희성이 입술을 떼자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희성의 손이 번들거리는 가슴을 쥐고 주물렀다. 단단하지도 않고 그저 말랑한 살이 귀여워 턱에 뽀뽀를 남기자 호흡을 고르고 있던 도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윤아.”

“으응….”

“혹시 그동안, 나 말고….”

“응?”

“…….”

“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물로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윤의 얼굴을 쥐고 엄지로 볼을 쓰다듬던 희성이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다른 사람이랑, 이런 거….”

사람을 홀딱 벗겨놓고 묻는 질문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했냐는 말이라니. 도윤은 황당함에 어이가 없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도윤의 눈에 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희성이 얼굴 곳곳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왜…그런 말을, 끅…해애….”

“미안해, 도윤아. 도윤아.”

“너어…진짜, 미워….”

“응, 미안해.”

엉엉 우는 도윤의 양 볼을 붙잡아 입술을 내린 희성이 혀를 섞었다. 울음을 토해내느라 끅끅거리는 몸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입안을 훑자 혀가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또 자신을 의심하는 희성이 괘씸해 도망 다니다 아예 입을 다물자 희성의 손이 유두를 굴렸다. 이건 반칙이었다. 본능적으로 신음을 내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시 혀가 밀려들었다. 흐응…. 도윤이 눈을 감고 끙끙거렸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뒤를 써본 적이 없었기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기도 버거웠다. 심지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써서 넓혀야 했기에 시간이 더 걸렸다. 애무로 너무 많은 시간을 끈 탓인지 도윤은 벌써 지친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몸을 섞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기절한 도윤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눈이 풀려 숨만 고르는 도윤의 위에 앉아 스스로 손가락을 빨고 뒤로 가져간 희성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손가락을 늘려댔다. 젤이 없어 금방 뻑뻑해지는 손가락이 원망스러웠다. 희성이 다시 질척해진 손가락을 뒤로 가져가 무작정 쑤셔 넣었다.

“아, 아플 것 같아….”

“별로, 안 아파.”

찌푸린 미간을 풀고 손가락을 휘저은 희성이 한숨을 쉬곤 도윤의 것을 쥐었다.

“이제 넣을 거야.”

“으응….”

도윤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넣겠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삽입을 시작한 희성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래가 빡빡하게 열리는 느낌이 생생했다. 희성에게선 한숨과도 같은 신음이 쏟아졌고 도윤에게선 훌쩍임과 소리를 참는 신음이 쏟아졌다.

뒤로 손을 뻗어 남은 기둥을 쓸어본 희성이 허리를 살짝 들었다. 반쯤 들어간 기둥이 느릿하게 빠져나왔다가 다시 희성에게 먹혀들었다. 삽입의 순간에는 언제나 소름이 돋았다. 아래를 억지로 벌리며 들어서는 느낌이 거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게 좋기도 했다.

아래에 누워있는 도윤은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 떨고 있는 도윤은 이 세상 무엇보다 예뻐 보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희성은 아직 내벽이 적응을 하기도 전이었지만 몸을 완전히 내려 도윤의 것을 뿌리까지 머금었다. 하아…. 희성이 고개를 젖히며 몸을 떨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동안 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너무 억울하기까지 했다.

“흐으, 아, 아!”

“도윤아, 너무…너무 좋아….”

“읏, 흐, 하으….”

“도윤아, 나 봐. 도윤아.”

“싫, 싫, 으응.”

“보고 싶어, 도윤아.”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도윤이 실눈을 떴다. 코앞에 희성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혼자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벌써부터 부어있었다. 희성이 평소보다 도톰해진 쌍꺼풀에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켜 허리를 움직였다. 내벽이 도윤의 것을 쭉쭉 빨았다. 희성이 힘을 주면 아래도 함께 도윤의 것을 꽉 물어댔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도윤은 그대로 얼굴을 가렸다.

가끔 꿈을 꾸면 희성이 지금처럼 자신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곤 했다. 희성의 꿈을 꾸면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 몸에 상처를 냈던 모습도 떠올랐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고 팔이 간지럽기도 했다. 미간을 좁힌 도윤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 팔을 긁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윤의 것을 삼키고 자신의 것을 매만지던 희성의 몸이 굳었다. 도윤이 다시 눈물을 흘리며 팔을 긁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심각해진 얼굴로 도윤을 살피던 희성이 팔을 긁는 손을 잡아 저지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윽, 흐으, 으….”

“하도윤.”

“후으, 욱….”

“하도윤!”

급기야 헛구역질까지 하는 도윤의 얼굴을 붙잡자 초점도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희성을 쳐다봤다. 잔뜩 구겨진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윤이 덩달아 얼굴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희성은 덜컥 겁이 났다. 우는 도윤을 얼른 끌어안아 달래주자 울음은 멈추지도 않고 더 커지기만 했다.

“도윤아, 도윤아.”

“희성…끅…희성아…나….”

“응, 말해.”

“나, 나아….”

“응.”

“이상, 이상해…무서, 워….”

도윤이 울음을 밀어두고 겨우 말을 뱉느라 헐떡였다. 그러는 중에도 내벽이 요동쳐 몸이 떨렸다. 얼굴을 확인하려 살짝 떨어진 틈을 타 희성의 손목을 붙잡은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안, 안 하고 싶어….”

“…….”

“무서워, 희성아…나 안, 안 할래….”

“알았어.”

“무서워…. 무서워….”

“응.”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도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키자 성기가 내벽을 따라 쭈욱 빠졌다. 내벽에 쓸린 기둥과 귀두가 빠져나오자 코를 훌쩍인 도윤이 몸을 웅크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도윤에게는 이불을 덮어준 희성이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채웠다.

욕실을 가득 채운 물소리를 배경 삼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희성에게서 한숨이 푹푹 터졌다. 몸을 섞는 중간에 도윤이 스스로 팔에 상처를 내고 헛구역질을 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너무 성급했다. 도윤이 가진 상처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지나치게 심했다. 마른 세수를 하고 거울을 쳐다보는 눈엔 힘이 없었다.

커다란 욕조에 물이 다 채워질 때까지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던 희성은 물을 끄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침대에는 도윤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팔을 살피자 손톱에 긁힌 자국이 많이 남아있었다. 허리를 숙여 드러난 손목에 입을 맞춘 희성이 이불을 걷어내 잠든 도윤의 목과 다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응…. 도윤이 작게 뒤척였다. 도윤을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온 희성이 가운 차림 그대로 욕조에 들어가 도윤을 끌어안았다. 잠든 도윤은 조용했다. 희성은 도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입술을 문질러보았다. 도윤에게 좋은 것만 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또 상처를 냈다. 죽고 싶었다. 희성이 어깨와 목에 잘게 입을 맞춰주곤 도윤의 손을 들어 흉이 진 손목에도 입을 맞췄다. 왼쪽 손목에 난 흉은 자신이 평생 보고 반성을 해야 할 상처였다. 손으로 문질러보기도 하고 한참을 바라만 보던 희성이 다시 손목에 입을 맞췄다.

희성의 몸에 기대 색색 숨만 뱉으며 자던 도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잠들기 전에 봤던 풍경이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몸을 뒤척이자 등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이 단단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도윤이 잠에서 깨기 위해 물이 묻은 손을 얼굴에 문질렀다. 찰박이는 소리가 나자 어깨에 뜨거운 숨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일어났어?”

“응….”

“미안.”

“…….”

욕실에 쪽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늘어져있던 다리를 세운 채 팔로 끌어안은 도윤이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입술을 묻었다. 욕조가 넓어 양옆으로 뻗은 희성의 다리가 잘 보였다. 조금 창피했다. 혼자 겁을 먹고 무섭다며 희성을 거부했다.

“도윤아, 나 보고 앉아봐.”

“…차, 창피해.”

“뭐가 그렇게 창피해.”

입술을 무릎에 대고 있어 말이 웅얼웅얼 나왔다.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듣고 몸을 당기는 힘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마주 보고 앉자 희성이 다가왔다. 몸이 가까워지는 동안 욕조의 물이 넘쳐 바닥에 쏟아졌다. 단단한 몸과 마찬가지로 단단한 손이 도윤의 볼을 붙잡아 올렸다. 민망함에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희성의 어깨만 쳐다보던 도윤이 타투를 발견하곤 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낸 희성은 도윤이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몇 분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하는 시선을 이기지 못한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볼에 닿은 입술이 느릿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눈을 내리깔고 희성과의 입맞춤을 이어가던 도윤이 시야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애초에 도윤만 보고 있던 눈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놀란 몸이 흠칫 떨렸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달뜬 숨이 오가는 입맞춤 속에서 도윤의 손이 희성의 팔을 따라 내려왔다가 팔꿈치를 매만졌다. 곧게 감긴 희성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던 도윤이 손을 완전히 내리려다 물속에서 빳빳하게 서있는 희성의 것을 스쳤다. 처음엔 놀랐지만 키스를 이어가니 어쩐지 놀람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도윤은 서로의 혀가 문질러지는 감촉을 느끼며 고민을 하다가 희성의 것을 쥐어보았다. 이번엔 희성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희성이 눈을 뜰까 봐 얼른 눈을 감은 도윤은 조심스럽게 귀두를 만지고 기둥을 쓸어보았다. 혀에 힘이 실렸다. 도윤이 뜨거운 숨을 터뜨리며 희성의 것을 살살 흔들어주었다.

“후….”

“하아….”

“이런 거, 읏, 안 해도 돼.”

“왜…?”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

“…….”

“아….”

자기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했으면서. 도윤은 이상한 부분에서 심술이 났다. 서툴지만 서툴러서 더 흥분이 됐다. 희성의 이마가 도윤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투명한 물속에서 자신의 것을 쥐고 있는 도윤의 손이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뜬 희성이 고개를 틀어 도윤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며 축 늘어진 성기를 쥐었다. 씻느라 보호대를 빼고 있어서인지 검지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만했다. 남의 자위를 도와주다 자신의 것이 잡힌 도윤이 신음을 터뜨렸다.

“아….”

“도윤아….”

“후으….”

“좋아해, 좋아해 도윤아.”

“흐응, 읏…!”

희성의 왼손이 도윤의 목을 붙잡았다. 목덜미를 빨았다가 놓고 아프지 않게 깨무는 감각과 오른손이 성기를 쥐고 주무르는 감각에 다리가 떨렸다. 이제는 물의 온도보다 더 뜨거워진 숨이 서로의 사이에서 흩어졌다. 희성의 허리 옆으로 세워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때쯤 희성의 것을 만지던 손이 멈췄다. 뒤늦게 만져줘도 먼저 사정하는 도윤이 예뻐 목에 입을 맞추자 헐떡이는 숨과 함께 어깨로 쓰러진 도윤이 우는소리를 냈다.

어깨에 기대 헐떡이느라 신음이 귀에 바로 처박혔다. 희성이 도윤의 허리를 끌어당긴 후 허벅지에 늘어진 손을 가져와 자신의 것을 쥐여주었다. 자신의 것을 쥔 도윤의 손을 붙잡고 자위를 시작한 희성이 어깨를 물어댔다.

“김희성…하아….”

“응.”

“나 힘들어….”

“조금만 더.”

“팔…아파….”

“응, 예뻐. 도윤아, 예뻐.”

도윤의 어깨를 콱 물며 손에 힘을 준 희성이 얼굴을 구겼다. 투명했던 물이 조금씩 탁해졌다. 사정의 여운을 더 느끼고 싶어 도윤의 얼굴을 들어 올린 희성이 곧바로 입을 맞췄다. 지쳤다는 말이 사실인지 혀를 빨면 빠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힘없이 움직이는 혀에 희성이 웃음을 흘렸다.

반항도 없는 혀를 마음껏 가지고 놀던 희성은 어깨를 밀어내는 손에 아쉬운 듯 멀어졌다. 젖은 눈이 풀려 깜빡이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숨이 모자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가고 싶어….”

“졸려?”

“으응…. 근데 나 다리에 힘이…안 들어가.”

“내가 옮겨줄 건데 뭐가 문제야.”

“싫어어….”

“왜 싫은데?”

“창피, 하잖아…. 아, 쪼옴….”

도윤이 말을 할 때마다 얼굴 곳곳에 입술을 쪼아대던 희성이 웃었다.

“그만 좀 해….”

“예뻐서. 귀여워서.”

“아니야.”

“예뻐. 도윤아, 너무 예뻐.”

“아, 하지 말라고 했잖아아…!”

결국 짜증을 내며 얼굴을 뒤로 뺀 도윤이 씩씩거렸으나 마냥 귀엽기만 했다. 도윤이 멀어진 만큼 다가간 희성이 따끈한 몸을 끌어안았다.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나가자.”

“찝찝한데….”

“씻겨줄게.”

“…….”

“머리도 말려주고, 침대까지 안아서 데려다줄게.”

“…….”

희성이 얼굴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이젠 밀어낼 힘도 없었다. 도윤이 몸에 힘을 빼며 희성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또 눈을 뜨면 머리가 말려지는 중이거나 아예 침대에 있을 수도 있었지만 창피함은 나중에 일어나서 느껴도 되는 일이다. 자는 동안 희성이 무슨 짓을 할지는 조금 걱정이 됐지만 우선은 몸이 피곤한 게 먼저였다. 마침 등을 토닥이는 손길도 느껴졌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졸려…. 하고 중얼거린 도윤의 눈꺼풀이 완전히 닫혔다. 희성은 귓가에 머무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

희성이 씻겨주는 중간중간에 잠깐씩 잠에서 깨곤 했던 도윤은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곤 다시 잠을 잤다. 머리를 말려야 하니 잠깐 앉아있으라는 말에도 정신없이 꾸벅이며 졸았다. 희성은 자꾸만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머리를 지탱하기 위해 도윤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머리를 말려주었다. 바람이 뜨거운지 싫은 소리를 내면 희성은 잠시 드라이기를 끄고 도윤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도윤은 그렇게 희성의 배에 머리를 기대고 정신없이 꿈나라를 헤맸다.

잠든 도윤을 옮기는 것은 매일같이 해왔던 일이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잠든 도윤을 옆에 두고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점이 제일 큰 고역이었다. 희성은 천장을 보고 자는 도윤의 몸을 돌려 머리 아래로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졸린데 자꾸 방해하는 희성이 귀찮은지 얼굴을 찡그리며 밀어내긴 해도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희성은 아까보다 좀 더 가까워진 도윤을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꽂아주고 엄지로 눈썹도 쓸어보았다. 부드러운 볼도 만져보고 끝이 동글동글 귀여운 코도 쓸어보았다. 숨을 쉬느라 벌어진 입술도 만져보고 조심스레 다가가 뽀뽀를 해보기도 했다. 도윤과 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모자라 도윤을 끌어안고 있다니 꿈만 같았다. 이게 꿈이라면 평생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도윤의 허리를 끌어당겨 거리를 좁힌 희성이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르곤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달리 갑갑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뜬 도윤은 시야가 어두워 아직 새벽인 줄 알았으나 그게 희성의 가슴팍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낯선 듯 익숙한 이 느낌은 희성의 품이 맞았다. 눈을 떴어도 아직 정신이 반쯤 꿈나라에 가있었기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밀어낼 수도 없었다. 아마 힘이 있었어도 자신이 희성을 밀어내지는 못했겠지만, 도윤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을 떼어내려다 도리어 더 당겨지는 몸에 어깨를 두드렸다.

“더 자.”

“나 화장실….”

품에 안겨 속닥이는 목소리에 희성이 이마에 짧은 뽀뽀를 남기곤 팔을 풀어주었다. 꼼질꼼질 품에서 벗어난 도윤은 멀쩡히 입혀진 옷에 잠시 놀랐다가 얼른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세수를 끝낸 도윤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곤 거울을 보며 멀끔해진 모습을 확인했다. 눈이 부어있긴 해도 못 봐줄 꼴은 아니었다. 희성의 앞에서 울었던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 한숨이 나왔다. 수건을 걸어두고 욕실을 둘러본 도윤은 욕조를 보자마자 어제 저질렀던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너무 창피했다.

스스로가 봐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찬물로 세수를 한 번 더 하고 나온 도윤은 욕실의 앞에 서있는 희성과 마주치곤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 앞에 서있어?”

“보고 싶어서.”

“뭐래….”

애써 가라앉힌 낯이 또 뜨거워졌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옆을 지나친 도윤은 침대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있다가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집었다. 비밀번호가 뭘까 하다가 혹시 싶어 자신의 생일인 0827을 눌러봤다. 허탈하게도 쉽게 풀린 비밀번호에 도윤은 눈치를 보다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희성은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라 볼 것이 더 없었다. 재미없어. 도윤이 중얼거리며 사진첩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사진밖에 없는 것을 보곤 귓가를 뜨겁게 달궜다. 이상해…. 도윤이 핸드폰을 끄려다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났다. 카페가 오픈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어쩐지 자꾸 뭘 잊어버린 듯 찝찝한 기분이 들더라니, 큰일이었다. 오늘은 정우나 사장님께 미리 늦는다고 말을 해두지도 않았었다.

말도 하지 않고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방을 돌아다니며 우당탕탕 옷을 갈아입고 가방까지 메니 그 사이에 씻고 나온 희성이 얼굴을 굳히고 다가왔다. 누가 봐도 당장 외출할 준비를 끝낸 도윤이라 희성도 똑같이 마음이 급해졌다.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 다급하게 옷의 끝자락을 붙잡은 희성이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 가?”

“어어, 나 늦는다고 말도 못 했는데, 어떡해?”

“…안 가면 안 돼?”

“가야지!”

“지금 연락해서 못 간다고 하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

“…꼭 가야 돼?”

“미리 연락도 못해서….”

도윤이 가방끈을 손톱으로 긁고 뜯으며 불안한 티를 냈다. 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선의를 베푼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옷을 놓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희성이 데려다주겠다며 멀어졌다. 희성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도윤은 신발을 신고 발만 굴렀다.

대충 옷만 걸치고 나온 희성의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있었다. 차마 정리를 해줄 생각은 못 하고 가만히 시선만 주던 도윤은 차에 올라서도 옆을 힐끔거렸다. 도로를 달리면서도, 신호에 걸려 잠시간 멈춰있으면서도 계속 머리를 힐끔거리자 희성이 먼저 이유를 물어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는 말에 도윤은 안전벨트를 만지며 머리카락이 떠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희성은 거울을 보지도 않고 머리를 정리했고 카페의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풀고 바로 문을 열려던 도윤이 뒤를 돌아 희성을 바라봤다. 운전대에 손을 올리고 도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문을 잡고 연신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따라서 올 거면, 바로 들어오지 마.”

“왜?”

“조금만 있다가 들어와. 주변에 산책 좀 하다가….”

“꼭 그렇게 해야 돼?”

“암튼, 알았지?”

“…….”

“김희성, 알았지?”

“알겠어.”

“갈게!”

도윤이 문을 닫고 떠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지각을 한 도윤은 바로 옆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뛰어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도윤이 왜 힘들게 뛰어가야 하는지, 자신은 왜 도윤과 함께 카페에 갈 수가 없는지, 왜 혼자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도윤이 그러라니 꼭 그래야만 했다.

도윤이 내렸으니 차가 필요 이상으로 따뜻해질 이유는 없었다. 무심하게 버튼을 꾹 누르자 차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바람이 뚝 끊겼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희성은 어젯밤 욕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도윤이 처음으로 자신을 만져줬다. 자신이 시킨 것도 아닌데 도윤이 먼저 나서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도윤을 떠올린 희성이 창문을 살짝 내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도윤을 만날 수가 있는데 생각도 없이 아래를 세우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전적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스스로에게 온 기회를 날릴 순 없었다.

이 벽만 넘어가면 도윤이 있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지루했다. 차에서 가만히 기다려보기도 하고 도윤의 말대로 주변을 걷기도 해봤으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너무나도 느려 다시 차에 올랐다. 핸드폰으로 시간이 가는 것을 체크하고 답답해지면 창문을 내려 숨을 크게 터뜨리는 등,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정신 사나운 짓들을 해댔다. 조금만 뒤에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지도 모르겠고, 늦게 들어가자니 도윤이 너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희성은 운전대에 이마를 박고 한숨만 쏟아내다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봤다. 문득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갔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기도 했고…. 희성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다가 안전벨트를 맸다. 미용실에 가면 머리를 자르느라 시간이 좀 걸릴 테고 무작정 차에서 기다리는 것보단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평소에 가던 미용실이 아니라 머리를 어떤 식으로 자를 건지 설명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며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본 희성이 손을 들어 턱을 문질렀다. 살이 조금 빠져 보인다. 거울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도윤이 어떤 얼굴을 좋아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좋아하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들쯤 미용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확실히 평소에 유지하던 머리와는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짧아진 뒷목을 매만지며 계산을 하고 나온 희성이 주차되어 있던 차에 올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훑어봤다. 앞머리를 들었다가 놓고 귓불을 만졌다. 전보다 조금 짧아지긴 했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봐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없으니 도윤이 봐도 비슷하겠지 싶었다. 희성이 오후가 가까워지는 시간을 확인한 후 차를 몰았다. 도윤이 얼른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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