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4)
본인의 생일도 아닌데 혼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도윤의 마음도 모르고 해는 제시간에 뜨거운 열을 내뿜으며 떠올랐다. 그리고 방학을 맞이해 집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현지가 심심하다며 아침부터 카페를 찾았다. 오늘은 할머니와 자기로 했다며 장난감과 그림 그릴 것들을 야무지게 챙겨서 들고 온 현지의 가방이 빵빵했다. 희성은 또 밖에서만 기다리고 있는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생일이면 뭐. 그게 뭐. 도윤이 툴툴거리느라 입술을 내밀고 있다가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온 현지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리는 동안 간식으로 먹으라고 줬던 도넛이 가루도 남기지 않고 없어져있었다. 도윤이 그릇을 받으려다가 고개를 흔드는 현지를 보고 도넛 박스를 가리켰다.
“더 먹을 거야?”
“응!”
“나중에 밥은 어떻게 먹으려고?”
“으응, 빵 먹고 싶어.”
“그럼 반쪽만 먹자.”
“왜?”
“나중에 밥 먹어야지.”
“빵 먹고 싶은데….”
“나랑 나눠먹자, 응?”
반으로 나눈 도넛이 현지의 손에 있던 그릇에 놓여졌다. 한 개를 다 못 먹게 해서 살짝 뿔이 난 현지가 치. 하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냅킨에 도넛 반쪽을 올리고 현지를 따라 나온 도윤이 앞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크로 도넛을 콕 찍어 입에 넣던 현지가 흥,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현지를 벌써 몇 달째 보고 겪었지만 도윤은 아직도 현지가 이렇게 나올 때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결국 도윤이 자신의 몫이었던 반쪽을 또 반으로 갈라 현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풀린 듯 고개를 똑바로 든 현지가 도넛을 오물오물 씹었다. 제가 속았다는 것도 모르고 현지의 기분이 풀렸다는 것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삼촌 언제 와?”
“30분 뒤에 오시지 않을까?”
“30부운?”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오실 거야.”
“너무 길어어.”
“나랑 놀고 있으면 되지.”
현지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반의 반쪽을 입에 넣고 현지의 입가에 묻은 가루를 닦아준 도윤이 습관적으로 창밖을 확인했다. 곧 점심때인데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노트북을 보고 있는 손님을 제외하면 카페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 현지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작았다. 똘망똘망 도윤만 보던 현지가 속삭이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대꾸했다.
“아무도 없었는데?”
“으응, 그렇구나.”
“엄마랑 나만 있었어!”
“어어, 옷에 손 닦지 마.”
옷에 손을 닦으려던 현지가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일어나 물티슈를 가져온 도윤이 작은 손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현지가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나 밖에 나가서 놀아도 돼?”
“추운데?”
“옷 입으면 되잖아!”
“그래도 춥잖아.”
“나갈래, 나갈래.”
도윤이 난감한 듯 테이블에 펼쳐진 쓰레기들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것만 치우고 금방 올게. 도윤이 쓰레기와 빈 그릇을 들고일어나며 기다리라 당부했지만 현지는 참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스스로 옷을 입고 끙끙 문을 열었다. 설거지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나가버리는 모습에 도윤이 옷을 입지도 못하고 따라 나갔다. 아무리 앞이라도 아이를 혼자 두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현지의 장갑과 목도리를 들고 따라간 도윤이 맨손으로 눈을 굴리는 손을 잡아다 장갑을 끼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자유로웠던 몸이 한순간에 갑갑해진 현지는 싫은 소리를 냈지만 도윤은 꿋꿋하게 추위를 막는 것에 열중했다.
도윤은 자신이 바로바로 볼 수 있는 카페의 앞에서만 놀아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현지는 카페 앞에 쌓인 눈을 굴리며 작은 눈사람을 만들다가 땀이 나 목도리를 풀었다. 도윤이 벗지 말라고 했지만 당장 더운 것이 문제였다. 목도리를 근처 의자에 던져둔 현지가 대문 앞까지 눈덩이를 데굴데굴 굴렸다. 더 크게 만들어서 도윤이 나오면 올려달라고 해야지! 현지가 히히 웃으며 눈을 굴리다가 활짝 열린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자기 몸만 한 눈덩이에 손을 올린 현지가 대문 밖에 서있던 희성과 눈이 마주쳤다. 킁. 현지가 흐르는 콧물을 훌쩍였다. 희성이 눈덩이와 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
“…….”
킁. 현지가 또 훌쩍였다. 둘 다 일단 눈은 마주쳤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킁. 현지가 코를 먹으며 희성을 올려다봤다. 희성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현지를 훑어봤다. 별안간 벌어진 눈싸움의 승자는 희성이었다. 현지가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봤다. 도윤은 카페를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느라 바빠 보였다. 킁. 현지가 다시 희성을 올려다봤다.
“나 이거 올려줘.”
“…….”
“빨리이.”
현지가 눈덩이의 방향을 다시 마당으로 돌렸다. 희성이 뒤를 따라오지 않자 눈덩이에서 손을 뗀 현지가 발을 구르며 달려왔다. 빨리이! 작은 손이 벌겋게 언 손을 붙잡고 이끌기 시작했다. 미간을 좁히고 대문을 넘은 희성이 카페를 힐끔거렸다.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도윤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눈덩이를 가리키며 올려달라는 빽빽거림에 한숨을 쉰 희성이 두 개의 눈덩이를 차곡차곡 올려주었다. 자기보다 커진 눈사람에 현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얼어있던 손이 눈을 만진 탓에 더 차가워졌다. 희성이 손을 털면서 눈사람을 쳐다봤다. 아직 눈코입이 없어서 영 어색했다. 현지가 주변을 뛰어다니며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주워왔다. 손이 닿는 곳까지만 눈사람을 꾸미던 현지가 결과물이 못마땅한지 심각한 얼굴을 했다. 희성의 눈에는 그게 그거라 다 이상하기만 했다. 현지가 눈사람에 꽂아둔 팔을 빼고 희성에게 그랬다.
“팔 찾아봐!”
“내가 왜.”
“팔이 없잖아!”
“네가 알아서 해.”
겨울의 날씨보다 차가운 태도에 현지가 입을 떡 벌렸다. 7년 평생 자신에게 이렇게 쌀쌀맞게 대한 것은 희성이 처음이었다. 평생 예쁨만 받고 자란, 자라나는 새싹은 충격을 적잖이 받고 말았다.
“바보야!”
“시끄러워.”
“팔 찾아야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현지야!”
“하도윤!”
설거지를 끝내고 테이블을 닦으려고 홀로 나왔던 도윤은 무심결에 창밖을 쳐다봤다가 희성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현지를 발견하곤 급하게 튀어나왔다. 말대꾸를 하는 현지에게 귀찮음을 티 내던 희성이 입을 다물었다. 서러움에 도윤을 부르며 달려간 현지가 희성을 노려봤다.
“하도윤! 내가! 어, 내가 눈사람 같이 만들자고 했는데! 어!”
“나를 부르지! 괜찮아?”
“아니이, 내가 눈사람 어!”
“목도리는 또 어디다가 놔뒀어?”
“아니, 하도윤!”
훌쩍이는 현지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 희성을 쳐다본 도윤이 자연스레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용기를 내 눈을 마주했다. 희성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경계부터 하는 태도에 씁쓸해져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현, 현지 괴롭히지 마.”
“맞아!”
“안 괴롭혔어.”
“아니야! 괴롭혔어!”
“내가 언제 그랬어.”
“그랬잖아!”
“현지한테 그러지 마.”
“맞아!”
희성이 도윤의 뒤에 숨어서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는 현지를 내려다봤다. 자기편이 생겼다고 기세등등해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이 그저 우스웠다. 도윤이 눈치를 보며 의자에 버려진 목도리를 품에 안았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나보고! 나 혼자 하라고!”
“그랬어?”
“응! 막 나보고 알아서어! 어!”
흥분한 아이가 아까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희성이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점수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없는 점수도 깎이게 생겼다. 도윤이 자꾸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희성에게서 등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에 현지가 또다시 코를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다 못 만들었단 말이야.”
“감기 걸려.”
“그래도….”
“지금도 자꾸 훌쩍거리잖아.”
“눈사람….”
정우에게는 먹히지 않지만 도윤에게는 먹히는 불쌍한 눈빛을 쏘자 도윤이 또 입술을 달싹였다. 눈치 빠르게 고민하는 기색을 읽어낸 현지가 냉큼 희성의 옆으로 뛰어가 코트를 잡아끌었다. 현지와 도윤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쉽게 파악한 희성이 현지에게 이끌려 주변을 살폈다. 지금 현지와 시간을 보내면 이곳에 조금이나마 더 오래 있을 수 있었다. 희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뭇가지를 찾는 척 바닥을 훑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음에도 희성과 현지를 둘만 남겨둘 수가 없어서 오랜 망설임 끝에 현지에게 다가간 도윤이 함께 나뭇가지를 찾아댔다. 얇은 나뭇가지를 꽂아도 충분할 텐데 현지는 자꾸만 더 크고 긴 것을 찾아댔다. 현지의 지도하에 돌멩이로 눈을 꽂아둔 희성이 구석에서 기웃기웃 움직이는 도윤을 훔쳐봤다. 현지는 이제 입을 돌멩이로 만들 건지 나뭇가지로 만들 건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걸음을 옮겨 도윤의 근처에 선 희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끝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은 도윤은 쓸 만한 나뭇가지를 모으고 있었다. 대충 봐도 현지의 기준을 만족시킬 나뭇가지는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말을 걸지도 못하고 뒤에서 서성거리자 그림자를 먼저 발견한 도윤이 고개를 돌려 희성을 올려다보았다. 코트를 입은 자신과 달리 도윤은 달랑 맨투맨에 바지가 다였다. 희성이 코트를 벗어 도윤의 몸에 덮어주었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에 코트 끝이 바닥에 끌렸지만 상관없었다. 도윤이 이제는 니트 하나만 입고 있는 희성을 보던 시선을 내려 바닥에 모아둔 나뭇가지를 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뭇가지를 품에 안고 일어난 도윤이 코트를 벗어다 희성에게 안겨주는 걸 택했다. 희성은 옷을 돌려주곤 그대로 옆을 지나쳐 현지에게 가는 도윤의 뒷모습을 보며 품에 안은 코트만 만지작거려야 했다.
“이거 꽂아줘!”
“여기에? 이렇게?”
“응!”
“이제 됐어? 이렇게 맞아?”
“응!”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도윤이 찾아온 나뭇가지니 일단 꽂아두기로 했다. 현지가 이번엔 자신의 목도리를 눈사람에게 둘러줄 것을 요구해왔다. 도윤은 하는 수없이 목도리까지 둘러주고 현지의 옆에 섰다. 현지보다는 크지만 도윤에겐 허리까지만 오는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현지가 히히 웃으며 코를 훌쩍였다. 이러다 현지가 정말로 밤에 앓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 카페를 가리켰다.
“이제 들어가자, 응?”
“왜? 하도윤 추워서?”
“으응, 들어가자.”
“음, 김, 으음…. 김…. 음….”
“왜?”
“저기, 저….”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희성이 있었다. 현지가 희성의 이름을 몰라 부르지도 못하고 가리키기만 하고 있었다.
“왜?”
“응, 우리랑 같이 안 들어가?”
“…같이 들어가고 싶어?”
“하도윤이 춥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리고 눈사람도 같이 만들었는데….”
현지가 도윤의 다리에 착 달라붙어 몸을 흔들었다. 난처했다. 말 그대로 난처했다. 도윤이 작은 머리통을 쓸어주고는 머뭇머뭇 희성을 불렀다.
“김희성….”
“응.”
“…잠깐 들어왔다가 가.”
“…….”
“현지가 너도 들어…오래.”
“…그래도 돼?”
“잠깐만 있다가 가면….”
도윤이 카페 문을 열자 현지가 또 희성을 잡아끌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힘이면서도 못 이기는 척 딸려온 희성은 자리에 앉아 도윤을 쳐다봤다. 생일이니까, 한번 눈감아준다는 생각으로 현지에게 따뜻한 물을 내어준 도윤은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창밖을 보면서 셋이 함께 만든 눈사람을 구경하기 바쁘던 현지의 시야에 정우가 나타났다. 벌떡 일어난 아이가 문을 당기며 정우를 반겼다.
“삼촌 왜 이제 와!”
“많이 기다렸어?”
“나 눈사람 만들었어!”
“눈사람?”
고사리 같은 손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빨간 목도리를 두른 채 웃고 있는 눈사람이 있었다. 정우가 픽 웃으며 누구랑 만들었냐고 물어보려다 희성을 발견하곤 말끝을 흐렸다. 어정쩡하게 일어나 다가온 도윤이 눈치를 봤다. 정우가 작게 속삭였다.
“뭐야?”
“청소하는 동안 그냥 앞에서 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보니까 같이 있었어요….”
“현지 너 삼촌이 모르는 사람한테 막 말 걸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했어.”
“근데 왜 그랬어?”
“모르는 사람 아닌데! 하도윤도 아는데 왜 모르는 사람이야?”
“이현지.”
“…….”
평소에 장난만 치던 삼촌이 얼굴을 굳히자 현지는 도윤의 뒤에 숨어 바지만 꾹 쥐었다. 잘못한 건 도윤도 마찬가지라 눈치가 보였다. 정우가 한숨을 내쉬었고 도윤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희성은 그런 도윤을 보면서 눈에 힘만 줄 뿐이었다.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해.”
“제가 잘 봤어야 했는데….”
“넌 잘못한 거 없으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그래도….”
“괜찮다고 했잖아.”
정우가 도윤의 머리칼을 흩트려주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지를 돌아보려는데 희성과 눈이 마주쳤다. 아…. 도윤이 정우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아까보다 싸늘해진 눈빛을 피해 도망치듯 주방으로 들어온 도윤이 괜히 냉장고를 열어 미리 준비해둔 재료를 꺼냈다.
정우가 왔으니 이제 현지와 약속했던 초콜릿 만들기를 할 차례였다. 조금 전 정우에게 혼이 난 현지는 시무룩해져 도윤에게만 붙어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달래 봐도 현지는 도윤의 뒤에 숨어 고개만 저어댔다.
같은 시간 희성은 오늘 도윤을 봤고, 대화도 나눴고 그것도 모자라 도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다는 것에 만족하며 돌아가려고 했었으나 정우가 도윤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보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정우가 현지에게 먼저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우를 피하며 도윤에게 파고들던 현지도 점점 마음이 풀리는지 정우를 밀어내거나 노려보기도 했다. 살살 반응이 오자 씩 웃으며 현지를 달랑 들어 올린 정우가 무작정 목말을 태우고 봤다. 놀이 기구를 타듯 소리를 친 현지가 정우의 머리카락을 쥐고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도윤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희성은 정우와 도윤, 그리고 현지가 나란히 웃는 모습을 뒤에서만 지켜보며 마른 입술을 쓸었다. 꼭 불청객이 된 느낌이 없잖아있었다.
셋이 옹기종기 모여 뭘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곧 카페에 달콤한 냄새가 가득 찼다. 주방은 희성이 주문한 커피를 만들 때만 잠깐 조용해졌다가 또 금세 시끄러워졌다. 의자를 밟고 일어선 현지가 도윤의 도움을 받아 초콜릿을 녹이다가 따로 놔둔 과자를 콕콕 찍어 먹었다. 정우는 만들기도 전에 네가 다 먹고 있다며 현지를 탓했고 현지는 공범을 만들기 위해 도윤의 입에 과자를 넣어주었다. 입술에 묻은 초콜릿을 핥아먹고 다 녹은 초콜릿을 휘휘 젓자 정우가 틀을 가져왔다.
가끔 들리는 도윤의 웃음소리와 목소리에 희성은 애가 탔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도윤이 들어오라고는 했으나 당장 가라고 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희성은 저 좋을 대로 합리화를 끝냈다. 마침 커피도 많이 남아있었다.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진동을 할 때 안에서는 도윤이 애타게 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잘 안됐는지 돌아다니는 발소리도 잦아졌다. 커피 머신에 가려져 도윤이 보이지 않았다. 빨대를 빼고 얼음을 씹던 희성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모님과는 아침에 간단하게나마 전화를 했었다. 부모님에게 대충 들었을 텐데 왜 자꾸 전화를 하는 건지 짜증이 났다. 희성이 구겨진 얼굴로 창밖을 보며 희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할 짓 없어?”
-이제야 받네.
“안 받으면 그럴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이번엔 또 어디야?
“그거 묻자고 전화한 거면 알려줄 생각 없으니까 전화 그만해.”
-그래도 생일인데 혼자보단 가족이랑 있는 게 그래도 낫지 않겠어?
“어, 아니야.”
-서운하네. 밥은? 보나 마나 안 먹었겠고. 또 어디로 가서 소식도 없어?
“좀 끊어.”
-이사한다며. 이제 겨우….
“끊어.”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든다. 희성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해맑게 웃고 있는 눈사람을 노려봤다. 하다못해 눈사람한테도 착하게 구는 도윤이었지만 자신은 쳐다봐주지도 않았다. 아예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오늘은 이쯤 하면 됐다. 어제보다는 많이 봤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더 있어봤자 도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도, 말을 걸어주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순전히 제 욕심 때문에 지킨 자리였다. 아까 이름을 불러줬으니 그걸 선물로 생각하면 됐다. 저에겐 그것도 과분했다.
컵을 픽업대에 놓아두고 느릿하게 밖으로 빠져나온 희성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쏟아졌다. 차에 올라서도 그저 핸들을 쥔 손등에 이마를 박고만 있었다. 도윤이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그 시간을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정신만 차리면 몸이 먼저 나가있었다. 한숨이 끊임없이 터졌다. 방금까지 도윤을 보고 나왔는데 도윤이 보고 싶었다. 병이라면 병이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봤자 해결되는 일도 없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편 희성이 시동을 걸고 창문을 살짝 내렸다. 속이 답답해서 호텔까지 창문을 열고 달려야 할 듯싶었다. 겨우 돌아갈 마음을 먹고 힘없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쭉 내리던 때였다. 열린 창문 사이로 누가 달려오는 소리가 귀에 틀어박혔다. 희성이 핸들을 쥐고 정면을 쳐다봤다. 머리가 잔뜩 헤집어진 도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 눈을 깜빡였다. 머뭇거리며 안전벨트를 푼 희성이 몸을 일으켰다. 도윤은 차에서 내리는 희성을 발견하곤 언제 달려왔냐는 듯 침착하게 다가왔다.
“김, 김희성.”
“무슨 일 있어? 왜….”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반갑고 기쁘지만 의아한 얼굴. 도윤이 등 뒤에 감춘 것을 만지면서 희성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윤이 시선을 여기저기 튀면서 말끝을 흐렸다. 희성은 문만 잡고 서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에 심장이 뛰었다. 희성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새, 생일…이잖아, 오늘….”
“…….”
“생일….”
“…….”
고개가 숙여졌다가 희성을 향해 올라왔다가 바삐 움직였다. 희성은 심장소리가 너무 커져서 입이 자꾸 말랐다.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비닐을 내민 손이 희성에게 다가왔다. 멍하니 있던 희성은 손에 들어온 비닐을 확인했다. 과자에 묻힌 초콜릿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아 비닐 곳곳에 묻어있었다.
“이거는, 그냥 너무 많이 만들어서…그래서….”
선물이라고 칭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이었지만 도윤은 빼빼로를 주고 반응을 살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희성은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넌….”
“으응?”
“넌…사람이 어떻게 그래?”
“…어?”
“내가, 내가 너 괴롭혔잖아.”
“…….”
“난 그동안 너한테 잘해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넌 왜….”
“…….”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손에 쥔 비닐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희성이 반대편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희성은 헛웃음을 터뜨리곤 엉망으로 포장된 빼빼로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희성이 중얼중얼했다. 푹 숙여졌던 얼굴이 아주 천천히 정면을 향했다.
“도윤아.”
“…응.”
“미안, 한데…. 한 번만, 한 번만…안아 보면, 안될까?”
“…….”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안고 떨어질게. 한 번만….”
“…….”
망설임은 짧았다. 도윤이 가만히 서있자 더듬더듬 다가온 희성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힘을 주지도 않고 팔을 두르기만 했다. 희성은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몸이 닿자 눈을 감고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숨이 떨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도윤은 하늘을 쳐다보기로 했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은 비도 눈도 오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줄곧 제자리를 유지하던 손이 조금씩 위치를 달리해 희성의 허리에 닿았다. 희성이 숨을 멈추는 것까지도 느껴졌다. 도윤은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희성의 허리를 토닥여주었다. 누군가에겐 큰마음을 먹은 순간이었고 누군가에겐 숨통이 트이며 동시에 죄책감이 뒤따르는 순간이었다.
여태 자신이 도윤을 끌어안았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도윤이 함께 자신을 끌어안아줬던 적은 없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저에게 닿았던 도윤의 손만큼은 머릿속과 온몸에 강하게 새겨졌다. 희성은 씻으면서도, 자려고 누웠을 때도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도윤이 준 빼빼로는 먹지도 못했다.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때마다 냉장고를 열어 빼빼로를 확인했다. 비록 빼빼로의 모양과 포장도 엉망이었지만 희성에게는 남들이 무엇을 주며 바꾸자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보물과도 같았다.
게다가 도윤은 자신을 끌어안은 팔을 끝까지 밀어내지도 않았다. 한 번만 안아본다고 했기에 되도록 오래 그 순간을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희성은 힘겹게 닿은 몸을 아주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도윤아.’
‘으응.’
‘나 내일도 와도 돼?’
‘…오지 말라고 해도 계속 올 거잖아.’
‘네가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올게.’
‘몰라….’
‘오지 말까?’
‘…몰라, 네 마음대로 해….’
희성의 귀와 도윤의 입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웅얼웅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정확하게 들렸다. 도윤이 오지 말라고 할까 봐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희성은 남몰래 안도하며 도윤에게서 떨어졌다. 도윤의 시선은 희성의 어깨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으면 허리에 닿았던 손이 떠올랐다. 희성이 소리 없이 웃다가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소중한 보물은 어디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만지기도 아까웠다. 눈빛으로 쓰다듬듯 보물을 쳐다보기만 한 희성이 다시 침대에 누워 도윤을 떠올렸다. 보고 또 봐도 계속 보고 싶었다. 희성은 또 벌떡 일어나 지갑을 꺼내왔다. 지갑에는 도윤의 그림도 있었고 도윤의 증명사진도 있었다. 이번에는 핸드폰을 켜 도윤의 사진을 훑었다. 사진 위로 입술을 짧게 눌렀다가 뗀 입가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도윤과 처음 몸을 섞었던 생일에도 행복했지만 그보다 더 행복한 생일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어제의 기분을 더 느끼고 싶어 꿈에도 도윤이 나와 주길 바라며 눈을 감았으나 아쉽게도 암흑만 펼쳐질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씻기 전에 빼빼로가 잘 있는지 확인부터 하고 옷을 입고도 확인하고, 거울로 머리를 정리하고 또 냉장고를 열어 빼빼로를 확인했다. 자신이 뭘 입고 머리를 어떻게 만지든 도윤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희성이 시계를 쳐다봤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희성이 다시 냉장고를 열어 빼빼로를 확인했다. 이건 그냥 빼빼로가 아니었다. 도윤이 직접 만든 빼빼로였다. 도윤이 직접. 자신을 위해 만든 빼빼로였다.
희성은 아예 냉장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빼빼로를 구경했다. 모양이 엉망이어도 좋았다. 도윤이 직접 자신에게 만들어준 빼빼로니까. 초콜릿이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자신에게 주려고 가져왔을 도윤을 상상하니 또 웃음이 나왔다. 희성이 비닐을 손끝으로 살짝 문질러보곤 냉장고를 닫았다. 이렇게 계속 보고 있다가 초콜릿이 녹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렀다. 출발하기 전까지 냉장고만 몇 번을 열었다 닫았는지 셀 수가 없었다. 희성은 결국 도윤이 일을 시작하는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호텔을 벗어났다. 도윤이 완전히 받아준 것도 아니고 그냥 빼빼로를 주고 안아주기만 했는데 세상이 달라 보였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시원했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도 푸르고 예쁘기만 했다. 자기들끼리 웃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희성이 시도 때도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매만지며 신호를 기다렸다.
이제는 거의 지정석이 된 자리에 주차를 하고 내린 몸이 가뿐했다. 얼른 도윤을 보고 싶어 마음이 들떴다. 멀리서 본 카페 안은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손님들로 자리가 꽤 차있었다. 도윤이 만든 샌드위치도 먹어보고 싶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아침을 먹던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희성에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던 정우가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며 고개를 쭉 뺐다가 손님이 희성임을 알고 다시 커피를 만들었다. 희성이 주방을 기웃거리며 도윤을 찾았으나 오늘은 보고 싶은 얼굴이 없어 혀로 볼 안의 살을 문질렀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정우가 음료를 찾으러 온 손님에게 웃어주고는 카운터에 서서 표정을 지웠다. 계속해서 안쪽만 힐끔거리던 희성이 정우를 쳐다봤다. 어제 현지와 그랬던 것처럼 눈싸움이 시작됐다.
“하도윤 보러 왔는데.”
그 짧은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도윤을 보러 왔는데 도윤은 어디에 가고 왜 네가 여기 서있냐는 말에 정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 봤을 때도 반말을 하더니 지금도 쭉 반말이었다.
“없는데.”
그래서 정우도 똑같이 받아쳤다. 희성의 미간에도 주름이 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디 갔는데.”
“모르겠는데.”
주문을 받을 생각이 없는 자와 주문을 할 생각이 없는 자의 싸움이 이어졌다. 허리에 손을 얹고 희성을 쳐다본 정우가 입을 열었다.
“도윤이 그만 괴롭혀.”
“하도윤이 그래? 내가 괴롭혔다고?”
“그랬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말 안 해도 다 알 수 있어.”
“너 하도윤 좋아해?”
“좋아하면.”
“하도윤은 너 안 좋아해.”
“그럴 수 있지. 근데 적어도 널 좋아하는 것보단 많이 좋아할 것 같은데.”
정우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희성의 턱이 비틀렸다. 다들 각자 함께 온 일행과 이야기를 하며 아침을 먹는 중이라 이쪽으론 관심도 없어 보였다. 정우가 피곤한 듯 한숨을 쉬곤 눈에 힘을 풀었다.
“주문 안 할 거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정우가 문 쪽으로 눈짓을 했다. 자신은 도윤에게만 기면 됐다. 도윤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길 이유가 없었다. 희성이 그동안 참아왔던 욱함을 터뜨리려다 다녀왔습니다! 하며 카페에 들어서는 도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정우가 입을 열었다가 꾹 닫아버리는 희성을 보다가 도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침으로 먹을 도시락을 포장해서 들어온 도윤은 카운터 앞에 서있는 희성을 훔쳐보며 정우의 옆에 섰다.
“이모가 계란말이 서비스로 주셨어요.”
“맛있겠다. 먼저 먹고 있어.”
“…형은요?”
“잠깐 얘기 좀 하고.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무, 무슨 얘기….”
희준을 형이라고 불렀을 때 희성이 보였던 반응 때문에 형이라고 부르기도 눈치가 보였다. 도윤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가 희성과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앞을 봤다. 희성은 입을 다문 상태 그대로 도윤을 보고 있었다. 정우는 희성이 자신을 대할 때와 도윤을 대할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그 점을 살짝 이용한 것뿐이었는데 희성은 정말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도윤이 도시락을 만지작대다가 희성을 데리고 뒷문으로 향했다. 정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둘을 봤지만 도윤이 얼른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붙잡을 수가 없었다.
뒷문으로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단이 보였다. 저 계단을 올라가면 도윤이 살고 있는 방으로 갈 수 있었다. 도윤을 따라가던 희성이 몰래 계단을 올려다보다가 휙 돌아보는 몸에 도윤을 쳐다봤다. 도윤은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짧은 확인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아무런 얘기도 안 했어.”
“…형한테 못되게 굴지 마.”
“그런 적 없어.”
“형 어, 엄청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도윤이 자신의 앞에서 남의 편을 들고 남의 칭찬을 했다. 갑자기 ‘적어도 널 좋아하는 것보단 많이 좋아할 것 같은데.’라고 말했던 정우의 목소리가 귓가를 돌아다녔다. 희성의 얼굴에 또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걸 물어봐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 혀만 굴렸다. 희성이 말이 없자 도윤은 손톱으로 손가락 살을 꾹꾹 눌러댔다.
“형한테 그러지 마.”
“…….”
“나 처음 봤을 때도 도와주고, 일도 시켜주고 진짜 고마운….”
“나는?”
“…너?”
솔직히 서운했다. 약간 시무룩해진 얼굴이 도윤을 향했다.
“나도…너 도와줬잖아.”
“…….”
“도윤아, 너 혹시 저 사람 좋…아해?”
“…뭐?”
“아니지? 저 사람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
“아니잖아 도윤아. 아니잖아.”
자신도 처음에 도윤을 봤을 때 많이 도와줬다. 어머니의 병실도 옮겨주고 아버지의 일자리도 구해주고 자신의 집도 내줬다. 몸도 마음도 다 내줬다. 도윤이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선물도 매일 줬다. 희성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감추지도 않고 다 보여주자 도윤이 당황했다.
“안, 안 좋아해. 형한테 그런 적 없어.”
당연히 그런 적은 없었다. 정우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정우에게 설렜다든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건 정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다 똑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할 여유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도윤이 한숨을 쉬었다. 희성은 그럼 나는? 하고 묻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도 똑같이 그런 적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꾹 참았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희성은 어제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물었다.
“…손잡아도 돼?”
“싫어.”
“…….”
“차, 착한 짓을 해야 봐주지!”
착한 짓? 희성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눈치를 보던 도윤은 이제 모든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아까도 형이랑 싸우려고 했, 했고!”
“그런 적 없어.”
“계속 형 노려봤잖아!”
“…….”
“그러니까 손, 그거는 안 돼.”
어이가 없었다. 말싸움을 하던 현장을 들킨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노려보기만 했을 뿐이다. 착한 짓이 도대체 뭔데. 희성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착한 짓’이라는 게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냥…. 형이랑 안 싸우고, 현지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
“그리고 온종일 카페에만 있지 마. 바, 밥도 먹고.”
“…….”
“밤에 기다리지도 말고, 아침에 너무 일찍 오지도 마.”
듣다 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혀로 입천장을 문지르던 희성이 말문을 뗐다.
“그럼 넌 언제 볼 수 있어?”
“그거는….”
“너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
“그거느은….”
“난…잘 때도 네가 보고 싶어.”
“…….”
“씻을 때도 보고 싶고, 밥 먹을 때도 보고 싶어. 잠깐 눈만 돌려도 네가 보고 싶어. 돌아가서 다음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 도윤아,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거짓말….”
“널 보고 있는 지금도 네가 보고 싶은데 이게 왜 거짓말이야?”
“…….”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을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도윤이 손가락을 만졌다. 희성이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좋아한다는 티를 낼 때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가슴께가 따끔따끔했다. 희성은 저도 모르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었다가 뒤늦게 아차 했다.
“미안.”
“뭐가…?”
“내가 또…. 너한테 내 마음을 강요한 것 같아서.”
“…….”
“미안해. 그럴 생각은 없었어. 진짜야.”
“…응.”
“…오늘은 조금만 있다가 갈게.”
“으응.”
착한 짓. 착한 짓. 희성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옆으로 비켜주었다. 머뭇거리던 도윤이 희성을 지나쳐 카페로 들어갔다. 착한 짓. 착한 짓.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연신 중얼거린 희성이 카페로 들어가 음료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리곤 정우가 주문을 받고 도윤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희성이 앉은 테이블에는 곧 정우가 만든 커피와 도윤이 만든 샌드위치가 놓였다. 도윤이 만든 샌드위치. 희성은 빼빼로처럼 먹지도 못하고 쳐다만 봤다. 도윤이 밥도 먹으라고 했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함께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반이 넘게 줄어들었지만 샌드위치는 한입도 먹지 않은 희성이 잠깐 핸드폰을 확인하는 사이 테이블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제 허락도 없이 앞자리에 앉고 보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본 희성이 핸드폰을 엎었다. 대충 꽂은 머리핀에 앞머리만 겨우 고정시킨 꼴이 어제와는 달리 엉망이었다. 딸기잼을 바른 식빵과 우유를 가지고 찾아온 손님은 희성이 무섭지도 않은지 입을 바쁘게 움직여댔다.
현지와 눈을 마주한 희성이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카운터를 힐끔거렸다. 정우와 도윤의 시선이 모두 현지에게 쏠려있었다. 현지가 식빵을 베어 물자 작은 입모양을 따라 식빵에 모양이 났다. 볼록한 볼이 터질 듯 씰룩였다. 현지가 우유를 마시곤 컵을 내려놓았다. 컵 모양을 따라 입가에 우유가 묻어났지만 현지는 그것도 모르고 식빵을 먹었다. 가만히 입가에 묻은 우유를 보던 희성이 휴지를 슬쩍 밀어주었다. 현지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식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묻었어.”
“어디?”
“입.”
“으응.”
작은 혀가 입가를 핥았다. 하지만 반대편 입가에 묻은 우유는 여전했다. 희성이 반대편을 가리켰다. 현지가 휴지를 끌어와 입술을 아무렇게나 문지르곤 다시 식빵을 먹기 시작했다. 전보다는 불안한 마음을 조금 떨치고 둘을 지켜보던 도윤이 슬금슬금 카운터를 벗어났다. 어디에 가냐고 묻지 않아도 도윤이 현지에게 가고 있다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챘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해놓고 자꾸 희성에게 다가가는 도윤이 이해되지도 않고 그럴 마음도 없었던 정우가 아주 작게 혀를 찼다.
뒤통수가 살짝 따가웠지만 현지의 옆에 앉는 것에 성공한 도윤이 엉망으로 꽂아진 머리핀을 빼주자 현지가 기다렸다는 듯 등을 돌려 앉았다. 뭘 하는 건지 의아하게 지켜보는 눈이 도윤의 손에 닿았다. 도윤은 이제 능숙하게 현지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엉망이었던 머리카락이 모두 한곳으로 모아져 하나로 묶였다. 하얀 손가락이 현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도윤은 머리를 묶어주고 앞머리도 머리핀을 꽂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시야가 깨끗해진 현지가 웃으며 다시 식빵을 먹었다.
기껏 머리를 잘 묶어주고 머쓱해진 도윤이 희성을 보려다가 손도 대지 않은 샌드위치를 발견했다. 정우가 만든 아메리카노는 거의 다 마셨는데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는 그대로였다. …왜 안 먹었지? 남들에게 주는 것처럼 열심히 만들었는데 먹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보니 마음이 좀 그랬다. 제가 손을 대거나 안아주면 좋아해놓고 자신이 열심히 만든 샌드위치는 먹지도 않다니…. 인식하지도 못한 입술이 저 혼자 삐죽거렸다. 남은 고무줄을 당기면서 꽁해진 마음을 툴툴거리던 도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왜 샌드위치 안 먹어…?”
“…….”
눈은 샌드위치에 고정시킨 채였다. 현지가 식빵을 먹으면서 도윤을 돌아보고 희성을 돌아봤다. 붉은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었다가 혀와 함께 나오기를 반복했다. 희성은 슬쩍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혀를 쫓다가 대꾸했다.
“아까워서.”
“뭐가 아까워, 그냥…먹으면 되잖아….”
“네가 만들어준 건데 당연히 아깝지.”
“그냥 먹어…. 나중에 또 사 먹으면 되잖아.”
“또 만들어줄 거야?”
“…뭐어.”
도윤이 말끝을 늘리며 괜히 현지를 봤다. 귀엽고 예뻤다. 그제야 샌드위치를 한입 먹고 내려둔 희성이 그래도 아깝다는 듯 아주 느리게 씹었다. 그러는 중에 식빵을 다 먹은 현지가 도윤에게 귓속말을 하려 몸을 일으켰다. 도윤이 눈치껏 몸을 숙여 현지와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왜 자꾸 하도윤 쳐다봐?”
“응?”
“자꾸 자꾸 쳐다봐.”
현지의 속삭임은 너무 작아서 간지러웠다. 도윤이 작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희성은 자기만 쏙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도윤도 대답을 해주지 않자 현지는 흠…. 하고 희성을 쳐다봤다. 지금도! 자기가 쳐다보고 있는데 희성은 도윤만 보고 있었다. 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희성에게 결투장을 내밀 듯 당차게 말했다.
“하도윤 보지 마!”
“왜.”
“보지 마!”
희성이 싫다고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의자 위로 일어난 현지가 도윤의 목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격한 포옹에 도윤에게서 기침이 터졌다. 목을 끌어안은 힘이 너무 셌다. 도윤이 콜록거리며 현지의 등을 토닥이자 팔이 살짝 느슨해졌다. 희성은 꽤 황당해 보였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도윤이 현지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고 속삭였다.
“쟤 이름 김희성이야.”
“김희성 저리 가!”
“으응, 잘했어.”
속닥속닥. 둘만의 비밀 이야기가 오갔다. 희성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김희성이 하도윤 괴롭혀?”
“응, 응.”
“내가 저리 가라고 했어.”
“응, 잘했어.”
또 속닥속닥. 웃음을 지우지도 못하고 고개를 든 도윤이 희성을 봤다. 뚱하게 앉아있던 희성의 몸이 움찔 튀었다.
희성은 결국 샌드위치를 반쪽만 먹고 나머지 반쪽은 따로 포장을 했다. 이건 또 냉장고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빼빼로와 함께 놔두고 도윤이 떠오를 때마다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러려면 1초도 쉬지 않고 냉장고만 봐야 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한 팀이 체크아웃을 하면 두 팀이 체크인을 하러 카페를 찾았다. 덕분에 늦은 점심쯤 출근을 한 사장님도 바빴고 정우와 도윤도 덩달아 바빠진 결과 희성은 현지와 또 단둘이 남아버렸다. 둘만 남은 게 희성에게도 탐탁지 않은 상황이었고 현지에게도 썩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현지는 희성의 이름을 안 그 순간부터 또 혼자 친구를 먹었다.
눈과 입이 떨어진 눈사람을 다시 손보기 위해 마당으로 나온 둘은 대화도 없이 할 일만 했다. 도윤이 없으니 딱히 할 얘기가 없었다. 도윤을 괴롭히는 사람은 전부 나쁜 사람이었다. 적어도 현지에겐 그랬다.
도윤이 현지와 싸우지 말라고 했으니 그 말을 들으려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법밖엔 없었다. 착한 짓. 착한 짓. 희성은 현지가 톡톡거릴 때마다 착한 짓을 떠올렸다. 도윤이 현지는 귀엽게 봐준다고 해도 희성을 귀엽게 봐주지는 않았다. 희성에게는 도윤이 걸려있었다. 착한 짓을 하면 손도 잡아줄 거고 또 착한 짓을 하면 안아줄지도 몰랐다. 그래서 희성은 현지를 무시했다. 마찰이 없으려면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현지는 자꾸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희성에게 약이 올라 눈 뭉치를 냅다 집어던졌다. 뜬금없이 눈 뭉치를 맞은 희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현지를 내려다봤다.
“그거 거기다 하는 거 아니란 말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받아치면 모든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희성은 또 무시를 택했고 현지는 이익! 짜증을 내며 희성에게 머리를 들이박았다. 눈 뭉치보다는 아팠다. 희성이 짜증스레 현지를 내려다봤다. 현지는 쫄지도 않고 희성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네가 아까 여기다 하라며.”
“내가 언제! 거기가 아니고 여기라고 했잖아!”
“네가 분명 여기다가 박으라고 했어.”
“언제! 내가 언제! 언제!”
“이 콩알만 한 게 진짜, 야.”
“왜!”
“그렇게 불만이면 네가 알아서 해.”
희성의 성격에 너무 많이 참아줬다. 희성이 손을 털자 현지가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만들어냈다. 현지가 우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도윤이 아닌 누군가를 달래준 적이 없었던 희성은 당황했다. 현지가 가만히 서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희성이 카페를 돌아보곤 현지의 주변을 서성이며 다가갔다. 현지는 엉엉 울지도 않고 그저 씩씩거리며 울었다. 희성이 난감한 듯 이마를 문지르다 현지를 안아들었다. 번쩍 들어 올려진 현지가 그때서야 훌쩍이며 우는소리를 냈다.
“끅, 바보야, 바보….”
“그쳐. 하도윤이 알면 나 진짜 큰일 나.”
“내가 다, 다 이를 거야, 하도윤한테…내가….”
“이르지 마. 나 하도윤한테 잘 보여야 돼.”
“바보…멍청이….”
현지가 훌쩍거리며 희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물이 점점 멎어 가는지 현지는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등을 두드려주지도 않고 딱딱하게 그치라는 말만 했지만 현지는 코만 훌쩍이며 안정을 되찾았다. 눈사람의 주변을 서성이며 현지를 안고 있던 희성은 문을 열고 나오는 도윤을 발견하곤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도윤에게 현지의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도망이었다. 도윤은 다가가면 갈수록 뒤로 도망가는 희성을 수상쩍게 보았다.
“왜 자꾸 뒤로 가?”
“그냥.”
“하도, 으으응!”
도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쳐드는 뒤통수를 꾹 눌러 어깨에 묻은 희성이 뒷걸음질을 쳤다. 현지가 답답함에 버둥거리며 희성의 등을 때렸다. 도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를 좁혀왔다.
“왜 도망가?”
“내가 언제.”
“지금.”
“그런 적 없어.”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현지가 버둥거리다 희성의 어깨를 깨물었다. 잠깐 찾아온 통증에 손을 떼자 희성에게서 겨우 벗어난 현지가 도윤에게 달려갔다. 코를 훌쩍이는 현지를 살핀 도윤이 얼굴을 굳히고 희성을 쳐다봤다.
“너….”
“…….”
“너 이제 내가 하는 말 잘 들을 거라고 했잖아.”
“…….”
“됐어, 애초에 너한테 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현지도 그 분위기를 읽었으니 말 다 했지 싶었다. 도윤이 아닌 땅 어딘가를 쳐다보는 희성과 자신을 뒤로 숨기는 도윤을 보던 현지가 희성의 편을 들어주었다.
“우, 우리 싸운 거 아닌데에….”
“들어가자.”
“하도윤….”
“얼른.”
“진짠데…우리 싸운 거 아니잖아, 그치 김희성!”
“…….”
“진짜 아닌데….”
“현지야.”
아직도 땅만 바라보는 희성에게 손을 뻗었지만 희성은 미동도 없었다. 현지가 계속 어어, 하면서 희성을 바라보았다. 말이 심했다는 것을 안다. 도윤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서 현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현지가 안에서 올려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도윤이 뒤를 돌아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굳은 듯 서있던 희성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도윤이 뒤를 쫓았다.
“김희성…!”
나가면서도 도윤의 부름은 무시할 수 없는지 잘 걸어가던 다리가 멈췄다. 도윤이 숨을 삼키며 희성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그러니까 아까는 내가….”
“네 말이 맞아. 나한테 뭘 바라겠어.”
“…김희성.”
희성이 허탈하게 웃다가 입꼬리를 정리한 뒤 뒤를 돌았다. 도윤이 했던 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여태 좆같이만 굴었는데 그런 나한테 대체 뭘 바라겠어. 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부러 울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
“근데 도윤아.”
“…….”
“나 아직 멀었다는 거 아는데, 다 아는데….”
말을 고르고 있는 모양인지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바람이 불자 희성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고개를 숙였다가 도윤을 쳐다보던 희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조금은 봐주면 안 되냐.”
“…희성아.”
“노력하고 있는데, 그냥 조금만. 조금만….”
“희성아, 아까는 내가….”
“아까는 내가 잘못한 거 맞아. 추우니까 나 때문에 나오지 마.”
희성이 먼저 등을 보였다. 차에 올라 잠깐 망설이지도 않고 시동을 걸었다. 도윤은 옆을 지나쳐가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말을 심하게 했다고 말했어야 했다. 희성이 현지를 많이 봐주고 놀아주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또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다 지켜봤다. 남의 눈치 한번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왔던 희성은 내내 자신의 눈치만 보았다. 도윤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운 흔적이 보이는 현지를 보자 말이 잘못 나왔다. 잘해보겠다고,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도윤이 울상으로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초조했고 불안했다. 도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도윤이 하라는 대로만 하고 싶었다. 자꾸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애가 탔다. 도윤의 앞에 있으면 머릿속이 백지장이 됐다. 희성이 입술을 씹으며 허공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