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7)

제주도(3)

  

  

희성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똑같은 시간에 카페에 들어와 마시지도 않을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도윤을 쳐다보기만 했다. 도윤이 근처를 지나쳐도 붙잡지도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정우는 매일 희성에게 음료를 만들어주면서 도윤에게 아는 사람이냐 묻지도 못했다. 정우는 눈치라는 걸 가진 현대인이었다. 구석에 자리한 희성의 존재는 도윤에게 그저 불안함만 안겨줄 뿐이었다.

그동안 겪어왔던 희성은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우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희성의 눈치를 살폈다. 정우가 평소처럼 손을 뻗으면 저도 모르게 피했다. 정작 희성은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는데 혼자 겁을 먹은 도윤은 가시를 세웠다.

정우가 음악소리를 살짝 높이곤 커피 머신에 몸을 가리고 있던 도윤에게 물었다.

“방에 올라가있을래?”

“네?”

“이제 바쁜 것도 없는데 불편하면 올라가있어.”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괜찮아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네. 근데 저 진짜 괜찮아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도윤이 멋쩍게 웃었다. 정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희성에게 향했다. 동상처럼 앉아 카운터만 쳐다보던 희성과 눈이 마주쳤다. 남몰래 한숨을 쉰 도윤이 카운터를 벗어났다. 그러자 내내 이쪽만 바라보던 희성의 고개가 방향을 달리했다. 열린 문 사이로 훅 들이닥친 바람에 도윤의 앞머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후드만 입고 카페를 나서는 도윤을 쫓던 희성이 일어나 뒤를 따랐다. 정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희성은 맹목적으로 주인만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도윤을 쫓았다. 도윤은 의자에 있던 나뭇잎을 털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멀찍이 서있는 희성이 신경 쓰였지만 무시하고 담요를 꺼내 덮었다. 근처가 바다라 불어오는 바람이 꽤 차가웠다. 숨을 뱉는 입술에서 입김이 풀풀 흩어졌다. 손이 금세 차가워졌다. 도윤은 담요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로 옆에 희성이 있는데도 혼자 남겨진 사람마냥 주변이 조용했다. 바람이 불자 마른 나뭇잎이 땅바닥을 굴렀다. 도윤이 굴러다니는 나뭇잎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고개를 틀어 희성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희성은 다가오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던 도윤이 그랬다.

“…카페엔 오지 마.”

“…….”

대화가 또 뚝 끊겼다. 도윤은 대답도 없는 희성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손을 쳐다봤다. 손톱 옆에 생긴 거스러미가 거슬렸다. 짧은 손톱으로 거스러미를 뜯어냈다. 도윤이 깔끔해진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줄곧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던 희성이 똑같은 자리에 서서 물어왔다.

“그럼 난 널 언제 볼 수 있는데?”

“…….”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잖아.”

“…불편해.”

“…….”

“네가 있으면 자꾸 네 눈치를 보게 돼.”

“내 눈치 보지 마.”

“…어떻게 그래? 너라면 그럴 수…. 있겠구나.”

“넌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할게.”

“…….”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아무것도 하지 마.”

“너는…모든 게 다 쉽지?”

“어려워.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거짓말.”

도윤이 고개를 틀어 반대편을 바라봤다.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담요를 의자에 놓고 일어난 도윤이 희성을 지나쳤다. 문을 열기 전 도윤은 알 수 없는 얼굴로 서있는 희성과 눈을 마주했다.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

“내일부터 난 여기에 없을 거야.”

“그러지 마.”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했잖아. 네가 그랬잖아.”

“…지금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오늘은 그만…그만 보고 싶어.”

“…….”

도윤이 떨리는 손을 감추려 황급히 문을 열었다. 쓸쓸하게 남은 희성의 시선은 한동안 바닥에 처박혀있었다. 도윤이 지친 기색으로 다가와 방에서 쉬다가 내려오겠다는 말을 건넸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은 도윤이 방으로 올라가 모습을 감추고도 계속 그 자리에 굳어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카운터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빨라졌다가 점차 느려졌고 이내 완전히 멈췄다. 희성이 앉아있었던 자리에 주인을 잃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코트를 쥔 정우가 문을 열어 희성에게 다가갔다. 정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든 희성이 눈을 찡그렸다.

“…코트 두고 가셔서.”

빼앗듯 코트를 가져간 희성이 입술을 씹었다. 무시해야 했다. 무시하고 싶었다. 희성은 따가움이 느껴질 만큼 입안의 살을 씹다가 물었다.

“하도윤이랑 무슨 사이예요?”

“예?”

“…됐어요.”

“저희는 그냥….”

“됐다고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희성이 발을 뗐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정우가 걸음을 빨리했다. 낯선 이에게 잡힌 팔에 희성이 미간을 구기며 손을 털었다.

“혹시 이름이 희성이에요?”

“그쪽이 알아서 뭐 하려고.”

“도윤이 그렇게 만든 사람이죠?”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도윤이 이제 겨우 남들처럼 살아요. 몇 달을 웅크리고 있다가 겨우 남들처럼 산다고.”

“지금 본인이 주제넘는다는 생각은 안 하나 봐.”

“도윤이를 생각한다면 그러지 마세요.”

“그쪽이 대체 뭘 안다고 이딴 식으로 굴어? 할 짓이 그렇게 없어?”

“적어도 도윤이가 여기에 온 이후로는 그쪽보다 잘 알 것 같아서요.”

빌어먹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우를 쳐다보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은 도윤이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듣는 충고는 기분이 더러웠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윤과 말을 섞었다고 오늘 하루가 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10분 전이 무색해졌다. 주변이 온통 도윤의 편이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남자와 조금만 더 함께 있다가는 도윤이 싫어할 만한 짓을 벌일지도 몰랐다. 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에서 멀어졌다.

***

눈앞에 도윤이 있어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로 그동안 도윤에게 닿은 적은 없었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정상적인 대화라고 볼 수도 없었지만 말을 섞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희성은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수면제도 먹지 않고 깊은 잠을 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도 기억이 흐릿했다. 아침에 일어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도윤을 보기 위해 준비하는 내내 정신이 지나치게 멀쩡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느낌이 좋았다. 오늘은 도윤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도윤에게 가는 길은 마치 자신을 제외하고 짜기라도 한 듯 평화로웠다. 신호는 희성이 가까워지자 빠르게 바뀌었고 도로도 깨끗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해 주변에 주차를 하고 내리려던 희성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작은 가방을 멘 도윤이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길을 건널 때는 항상 주변을 둘러보고 건너야 한다는 기본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도윤에게 다가간 희성이 저도 모르게 팔을 쥐었다. 갑작스레 잡힌 팔에 놀란 도윤이 뒤를 돌아봤다가 얼굴을 굳히며 손을 쳐냈다. 탁, 소리와 갈 곳을 잃은 손에 희성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내쳐진 손이 저릿했다.

“…만, 만지지 마.”

“…….”

의도한 건 아니었는지 희성의 손을 살피는 눈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잠깐 놀랐을 뿐이다. 정말 잠깐. 이 정도는 괜찮았다.

“어디 가.”

“…….”

“데려다줄게.”

“…싫어. 네, 네 차는…안타.”

“말 안 걸게. 그냥 데려다주기만 할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가방끈을 쥔 손이 희게 질렸다. 희성의 눈을 봤다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고 또 고개를 들어 희성의 손을 본 도윤이 다시 뒤를 돌았다. 희성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도윤을 따라 걸었다. 자신이 사준 옷이 아닌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처음 보는 신발을 신고 낯선 길을 걷는 모습이 익숙해 보여 또 숨이 찼다. 다른 사람의 손을 탄 도윤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토 나오게 역겨웠다.

“씨발….”

희성이 욕을 중얼거리곤 한숨을 쉬었다. 도윤이 아니었더라면 살면서 후회라는 단어를 평생 입에 올리지도 못했을 희성이었다. 희성은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모든 것이 서툴렀다.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착하려면 아직 5분이나 남은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정류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도윤이 허공을 보다가 옆을 힐끔거렸다. 희성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정류장의 밖에 서있었다. 매일 주위에서 서성거리며 눈치를 봤던 사람은 저였는데 이제는 희성이 그러고 있었다. 솔직히 막막했다. 희성이 나타난 이후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평범했던 일상이 조금씩 틀어졌다. 카페에 있을 때는 희성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고 방으로 들어가서는 희성이 들어올까 봐 온 신경을 문 쪽으로 두고 있었다. 꿈에서는 여전히 막무가내인 희성이 나왔다.

저 멀리서 도윤이 타야 할 버스가 모습을 보였다. 느릿하게 일어난 도윤이 정류장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카드가 없어 현금으로 버스비를 내면서 고개를 꾸벅인 도윤이 빈자리에 앉았다. 도윤을 따라 버스에 오른 희성이 카드를 찍고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지만 희성은 도윤을 지나쳐 뒷좌석에 앉았다. 한숨만 나왔다. 도윤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고 한 칸을 더 띄우고 앉은 희성은 기울어진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전히 동글동글한 곱슬머리가 귀여웠다.

도윤과 희성을 태운 버스는 15분을 더 달리고서야 둘을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버스에서 내린 도윤은 빵집부터 들렸는데 뒤따라 들어가 보니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만들 때 쓰는 빵을 사러 온 듯싶었다. 가게를 돌아보며 고른 빵을 계산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희성은 그 옆에서 도윤이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지켜보았다.

“오늘은 왜 정우랑 안 오고?”

“카페에 사람이 많아서요.”

“옆엔 누구야? 친구?”

“…저 가보겠습니다!”

“어어, 조심히 들어가!”

“네에.”

희성이 성큼성큼 곁에서 멀어지는 도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윤의 다음 행선지는 마트였다. 햄과 치즈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어선 도윤은 올 때마다 정우와 함께 끌었던 카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얌전히 도윤을 따라다니던 희성이 입을 뗐다.

“들어줄게.”

빵이 들어있는 봉지를 가져가려는 손을 피해 등 뒤로 숨긴 도윤이 그 말을 무시하곤 계속 발을 움직였다. 아까부터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지만 이것 또한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괜찮았다. 희성이 다시 도윤을 졸졸 쫓았다.

저 작은 가방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걸까. 계산을 마치고 작은 가방에서 꺼낸 장바구니에 산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손을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 지갑도 나오고 장바구니도 나오고 얼핏 봤을 땐 수첩도 있었다. 마법의 가방 같았다. 도와주려고 손을 뻗자 이번엔 정리도 포기하고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넣는 행동에 희성이 한걸음 물러났다. 끙…. 짐이 생각보다 많아진 도윤에게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줄게.”

또 무시당했다. 도와준다는 말에 힘이 생긴 건지 장바구니를 번쩍 든 도윤이 마트를 빠져나갔다. 뭘 하려고 해도 기회조차 주지 않는 도윤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자신에게 티끌만큼이라도 기회를 줬으면 했다. 뭐든 좋았다.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왼손으로 옮겨갔다. 뒤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걸 지켜보던 희성이 손잡이를 뺏어들었다. 잠깐 놀랐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린 도윤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뭐 하는 거야?”

“도와준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너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네가 이런 걸 왜 들어.”

“줘.”

“나한테 기회라도 줘. 기회를 줘야 내가 잘못했다고 빌 수 있잖아.”

“…….”

“감기 걸려. 오늘은 너 데려다주고 갈게.”

자신은 코트만 하나 입어놓고 패딩을 입은 도윤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윤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명령하지 마.”

“뭐?”

“넌 아직…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

“난 너 때문에 죽으려고 했어.”

“도윤아.”

“네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나한테 용서해달라고 강, 강요하지 마.”

단단한 말과는 달리 도윤은 하나도 단단하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뺏어든 도윤이 그대로 희성을 지나쳐 택시를 잡았다. 도윤을 태운 택시는 빠르게 모습을 감췄고 허전해진 손과 옆을 바라보기만 하는 희성만이 자리를 지켰다. 손에 쥐고 있던 모래가 모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저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고 말하던 표정이 너무 서러워 보였다. 아파 보였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던 희성이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두통에 이를 악물었다. 느낌이 좋아? 하도윤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아? 다 개소리였다.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되는 일도 없는데 하늘마저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마냥 어두워졌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도윤과의 관계는 진전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도윤을 지켜보는 것은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뻗자니 도윤은 자신이 다가간 만큼 뒤로 도망쳤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도윤과 함께하고 싶었다. 뭘 하든 도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도윤이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도윤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도윤이 뭐 하는 거냐고 궁금함을 느끼는 정도라도 좋았다. 내가 웃었을 때 도윤이 함께 웃었으면 했다.

눈앞에 도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눈을 감아도 여전했고 눈을 떠도 여전했다. 문득 도윤이 더 이상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는 얼굴이 아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울렸다.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한숨이 샜다. 눈물도 모자라 상처까지 냈다. 심지어 힘겹게 만나놓고 또 도윤에게 내 마음을 강요했다. 떠오르는 기억들을 곱씹자 한숨만 나왔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한자리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자신은 침몰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후회를 한들 의미가 없다는 것쯤은 희성이 제일 잘 알았다. 발을 잡아먹은 물이 점점 차올라 허리까지 왔다. 오로지 내 이익을 위해 도윤을 울리고 혼자가 되게끔 만들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아픈 어머니를 내세워 도윤을 붙잡아뒀다. 허리에서 찰랑이던 물이 가슴팍까지 차올라 넘실거렸다. 밥을 먹지 못해 힘들어하는 도윤을 수도 없이 안았다. 싫다고 우는 도윤을 순전히 ‘그러고 싶어서’ 마음대로 굴렸다. 목 끝까지 차오른 물에 희성이 숨을 헐떡였다.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희성의 앞으로 유리조각을 든 도윤이 나타났다. 희성은 머리까지 범람하는 물에 숨 쉬는 것을 포기했다.

도윤을 위해서라면 이제 카페에 출근도장을 찍는 일은 그만둬야 했다. 희성은 카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건물 앞에 서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비나 눈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여태 조용한 하늘이 신기했다.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이 했던 일을 되돌아보기나 했던 희성은 오늘은 도윤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제 도윤이 어디에서 뭘 하며 지내는지도 아는데 도윤을 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냥 멀리서라도 한번 보고 다시 돌아갈 생각도 있었다. 숨과 함께 터져 나온 입김이 희성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들어가서 도윤이 잘 있는지만 보고 나오자. 희성이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다짐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당장 도윤이 보고 싶었다. 추위에 빨갛게 언 코끝을 문지르며 걸음을 옮긴 희성이 자신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는 차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첫날 봤었던 차였다. 이번에도 차에서는 여자와 어린아이가 내렸다. 아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희성은 잠시 멈춰서 아이를 보자마자 활짝 웃는 도윤을 눈에 담았다. 정신이 멍했다. 아이는 도윤의 목을 끌어안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카페 안에 있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희성은 홀로 현실과 동떨어진 기분으로 한참을 멍청하게 서있기만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카페로 들어갔을 때 도윤은 아이와 함께 앉아 스케치북을 펼치고 있었다. 희성은 늘 그렇듯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키고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와 마주 보고 앉은 자세가 아닌 나란히 앉은 탓에 맞은편에 앉은 희성에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들어온 순간부터 의자를 끌어 앉은 지금까지도 아이와 이야기만 할 뿐 희성에게 닿는 시선이 없었다. 정우가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 잠시 희성을 내려다보다가 안으로 사라졌다. 희성은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살짝 문질러보았다.

원래는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여태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꾸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아메리카노가 반이나 줄어들었다. 입안이 씁쓸했다. 도윤과 아이는 서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마를 맞대고 웃기 바빴다. 중간에 투명한 벽이라도 세워둔 듯 공기가 달랐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둘을 바라보던 희성과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희성을 힐끔거리더니 손을 동그랗게 말아 도윤의 귀에 귓속말을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몸을 숙여주는 도윤을 따라 시선을 내린 희성은 그제야 저에게 향하는 얼굴을 보고 숨을 참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잠깐씩 저에게 닿는 시선에 긴장이 됐다. 도윤이 작게 웃으며 아이에게 고개를 저었다. 희성은 모든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아이가 또 희성을 힐끔거리더니 도윤에게 속삭였다. 하얀 손에서 빠져나온 색연필이 테이블을 굴렀다. 또 둘만의 속삭임이 시작됐다. 희성은 이 카페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잔을 다 비웠다. 도윤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성과 아이의 고개가 동시에 도윤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카페에는 정말 손님으로 온 한 팀과 카운터를 보는 정우, 얌전히 앉아 도윤을 기다리는 현지와 희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윤이 돌아오면 일어날 생각으로 빈 잔을 기울여보던 희성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아이를 살피던 정우가 이름을 불렀지만 아이는 눈치도 보지 않고 희성의 앞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희성이 낙서가 가득한 스케치북을 보다가 아이를 봤다.

“하도윤 조금 늦는대.”

“…….”

“누구야? 하도윤은 친구 아니라고 했는데.”

“…….”

친구가 아니라는 대답이 참 한결같았다. 도윤은 남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죽어도 친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도윤과 자신이 친구는 아니었다. 친구보다 좀 더 특별하고 서로밖에 없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다. 희성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미뤘다.

“어, 근데 하도윤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

“하도윤한테는 비밀이야.”

아까부터 도윤에게 하도윤, 하도윤거리는 아이는 당돌했다. 친구가 따로 없었다. 희성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하도윤한테 왜 자꾸 반말해?”

“으응, 하도윤이 해도 된다고 했어.”

“너 도윤이랑 친해?”

“응!”

“좋겠네.”

희미하게 보여주던 웃음을 정리하고 스케치북을 보는 희성에게 아이가 손을 뻗어 앞으로 밀어주었다.

“전부 네가 그린 거야?”

“응.”

“이건 너고?”

“응!”

“이건 네 이름?”

“응!”

왕관을 쓴 사람이 그려진 곳 밑에 ‘현지’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옆으로는 또 다른 사람이 그려져 있었는데 밑에 ‘도윤’이라고 써져있었다. 자신은 왕관을 쓰고 도윤은 밋밋하게 그려놓았다. 희성이 이유를 물었다.

“나는 왕인데 하도윤은 아직 아니야.”

“왜.”

“어, 원래 왕이랑 결혼해야 왕관도 같이 쓸 수 있어.”

“…너 하도윤이랑 결혼하고 싶어?”

“으응, 하도윤 좋아.”

도윤의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였다니. 희성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가 입꼬리를 내렸다. 스케치북을 훑자 구석에 검은색으로 그려진 얼굴이 보였다. 이름도 없는 그림에 희성이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리던 현지가 희성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어, 그거는 김희성이래.”

“누구?”

“기미성? 히성? 몰라. 하도윤이 그랬어.”

“…언제?”

“아까.”

“이거 내가 가져가도 돼?”

“왜? 마음에 들어서?”

“응.”

“음, 음. 하도윤 그림인데….”

색연필의 끝을 꼭꼭 물면서 고민에 빠진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려진 부분만 조심스럽게 잘라 지갑에 넣고 다시 현지를 살펴보고 있자 도윤이 뒷문을 열고 나타났다. 잠시 정우와 대화를 나눈 도윤이 다가와 스케치북과 색연필, 그리고 현지를 챙겨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부적이 생겼다. 희성은 지갑에 자리 잡은 그림을 떠올리며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으니 도윤을 조금이라도 더 보다가 가야겠다. 희성이 지갑을 코트에 넣고 도윤을 쳐다봤다. 현지가 그린 그림에 색칠을 하는 건지 손이 바빴다. 아까 현지가 왔을 때 도윤이 그린 그림이나 더 보여 달라고 할걸. 작은 후회도 했다.

조금만, 조금만이 벌써 30분을 넘겼을 때였다. 내내 카운터에만 있다가 홀로 나온 정우가 도윤의 옆에 섰다. 희성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도윤은 머리카락에 닿는 손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정우를 올려다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상상만 해왔던 것이 바로 앞에서 펼쳐지자 속이 울렁거렸다. 현지는 또 자신을 놀리는 정우에게 저리 가라며 짜증을 냈고 도윤은 웃고만 있었다. 괜히 현지의 스케치북에 색을 칠하자 현지가 스케치북을 아예 품으로 끌어당겼다. 오늘도 조카 놀리기에 성공한 정우가 뿌듯하게 색연필을 내려놓았고 도윤은 현지에게 붙어 아까처럼 귓속말을 했다.

도윤을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고 앉아있었던 것은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이 꼴을 보려고 앉아있었던 게 아니었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굳힌 희성이 입가를 매만지며 카페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현지의 기분을 풀어주던 도윤도 멀어지는 희성을 쳐다봤다. 도윤이 방으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먼저 일어나 카페를 나간 적은 없었으나 지금은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희성에게서 불안한 숨소리가 연신 쏟아져 나왔다.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도윤을 보고, 또 떠올리자 헛구역질이 일었다. 비틀거리며 차에 오른 희성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악몽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시동도 걸지 못하고 머릿속을 정리하려 노력해 봤지만 정우의 쓰다듬을 받고 웃는 얼굴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희성이 결국 급하게 문을 열어 울렁거림을 토해냈다. 붉게 열이 오른 얼굴이 계속해서 기침을 토했다.

***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희성의 몸에서는 열이 올랐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희성이 달뜬 숨을 쏟아냈다. 온몸이 덥고 어지러웠다. 꼭 성장 통을 심하게 겪는 아이처럼 아팠다. 그러나 돌봐줄 사람 하나 없고 연락할 사람 하나 없는 희성은 그저 몸을 웅크리고 눈만 감을 뿐이었다.

전날 늦은 오후에 호텔에 도착해 앓으며 잠든 희성은 다음날 오전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이 꼴로 도윤을 만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희성은 시야가 어지러운 것도 참고 샤워를 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면 열이 조금이라도 내려갈 줄 알았다. 가운을 걸치고 나온 희성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창밖을 확인했다. 전날부터 내린 눈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했을 때 제주도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려있었다.

질린 얼굴로 들어와 약을 받아 가는 희성을 보고 약사는 병원에 갈 것을 권했지만 희성은 물과 함께 약을 넘기곤 약국을 벗어났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 탓에 도로가 꽝꽝 얼어있었다. 희성은 이 상태로 차를 타고 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이번엔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나왔다. 약을 먹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 안일한 생각을 하며 눈을 밟았다. 호텔에서 도윤이 지내는 곳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40분, 빨리 걸어봤자 30분에서 20분이 걸렸다. 희성은 차를 탔어야 했나, 고민을 하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몸이 성치 않아서 그런지 걸음이 무거웠다. 늦게 일어나 출발하는 시간도 평소보다 늦었는데 도착하고 나면 점심때가 넘을 것만 같았다. 시야가 빙글 돌았다. 우산을 고쳐 잡고 멈춰 선 희성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 것이 눈 때문인지 밤새 오른 열 때문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희성이 다시 발을 뗐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익숙한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입안이 뜨거워 허공으로 흩어지는 숨도 뜨거웠다. 흩어진 입김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희성이 어지러운 것을 참고 다가가자 길을 따라 눈을 치우던 도윤이 나타났다. 아픈 와중에도 도윤을 봤다고 가슴이 뛰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눈을 한쪽으로 모아두던 도윤이 가까이 다가온 희성을 보고 다시 눈을 치웠다. 희성이 다가가 도윤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주인이 바뀐 덕에 희성의 머리에 눈이 내려앉았다. 빗자루를 쥐고 있던 도윤이 희성을 쳐다봤다.

“힘든 일은 다른 사람 시켜. 네가 왜 이런 일을 해.”

“…….”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살짝 붉었다. 우산을 잡고 있는 손등과 손끝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빗자루의 끝을 만지작댄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거 하지 마.”

“도윤아.”

“나 여기 좋아. 여기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

우산이 도윤의 쪽으로 살짝 더 기울었다. 희성의 머리 위로 쌓이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 도윤이 우산을 희성에게 밀어주었다.

“우산도 필요 없어.”

“도윤아, 잠깐 얘기 좀 해.”

“나는…할 얘기 없어.”

“잠깐만. 잠깐이면 돼.”

“…….”

도윤은 다시 자신에게 향하는 우산을 힐끔거렸다. 간절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도윤이 카페를 돌아보다 희성을 돌아봤다.

“…….”

“해.”

“…….”

“…….”

희성의 입술이 달싹였다. 작게 흘러나온 입김을 쫓던 도윤이 조금씩 젖어드는 머리카락을 쳐다봤다. 감기는 내가 아니라 희성이 걸릴 것 같았다. 도윤이 우산을 밀어주려다 멈칫했다.

“내가….”

“…….”

“내가 잘못했어.”

“…….”

“도윤아, 내가 다…잘못했어.”

“…….”

현기증이 나 눈을 꾹 감았다 뜬 희성이 말을 이었다.

“용서해달라고 안 해. 근데 도윤아.”

“…….”

“제발…부탁이니까….”

“…….”

“내 앞에서…다른 사람한테 웃어주지 마.”

“…….”

“제발…. 제발 도윤아….”

우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윤은 멍해졌다. 희성이 숨을 참았다가 도윤의 앞에서 무너졌다. 순식간에 훅 꺼진 시야에 도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바닥에 나뒹구는 우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희성이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도윤아, 내가 잘못했어. 고개를 숙인 희성이 중얼거렸다. 희성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굳은 도윤이 뒷걸음질을 쳤다. 새하얗게 쌓인 눈 속에 파묻힌 무릎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윤만 곁에 있어준다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희성은 조금씩 멀어지는 발을 보며 눈을 감았다. 정우에게 웃어주는 도윤의 모습이 또 되풀이됐다. 눈치도 없이 나풀나풀 내린 눈이 희성의 손등 위에서 녹아내렸다. 염치없지만 살고 싶었다. 자기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던 도윤의 앞에서 정말 염치도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윤이 말을 얼버무리며 희성에게서 멀어졌다. 주인을 잃고 바닥을 뒹구는 우산과 꼴이 똑같았다. 희성이 입술을 씹으며 일어났다. 머리가 아팠다. 우산도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뒷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했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성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 도윤이 손톱을 뜯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았던 손목에서 따끔함이 일었다.

무슨 정신으로 호텔까지 돌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굵어졌고 발이 푹푹 꺼졌다. 머리와 옷이 모두 젖은 채로 약국에 들러 또 다른 약을 사서 올라온 희성은 머리를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코트만 벗어두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입만 열면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고 시야가 흐릿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도윤을 보러 다녀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이마에 손등을 대자 평소와는 다른 체온이 느껴졌다. 약을 먹었는데 어째서 열이 더 오르는 건지, 약사가 약을 잘못 준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찬바람과 눈을 맞아 얼었던 몸이 녹기도 전에 으슬으슬함이 희성을 덮쳤다. 다시 일어나 이불을 덮을 힘도 없어서 눈만 감았다. 무릎을 꿇었던 탓에 바지도 젖어있었으나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약이라도 더 먹어야겠다 싶어 힘겹게 일으킨 몸이 코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비틀비틀 걸어 물을 꺼낸 희성이 약을 털어 넣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다시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희성이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코트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자 제일 먼저 도윤이 그린 그림이 나타났다. 도윤이 그려준 그림을 보고 있자니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희성이라고 그려둔 그림은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림을 쓸어보는 엄지가 느릿느릿했다. 희성은 그림에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슬슬 약기운이 도는지 잠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약에 취한 희성은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내내 잠만 잤다. 지독한 감기라도 찾아온 듯 약이 쉽게 들지 않았다. 그저 잠만 올 뿐이었다. 잠깐씩 정신을 차리면 여전히 눈앞에 도윤의 그림이 있었다. 희성은 그 그림이 도윤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이마를 묻고 잠을 청했다.

매일 도윤을 보러 가야 한다는 의지도 열병을 이기지는 못했다. 희성은 시체처럼 잠만 자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져 눈이 떠지면 약을 찾았다. 빈속에 들어간 약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다. 아픈 모습을 보여주면 도윤이 자신을 조금이나마 불쌍하게 여기고 손을 뻗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릴 정도로 절절 끓는 열에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빈속에 털어 넣은 약은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희성은 이틀째 이어지는 열에 사경을 헤맸고 사흘째엔 그나마 열이 내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모님과 희준에게 몇 개의 연락이 와있었지만 역시나 도윤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씁쓸했다. 희성은 지갑을 끌어와 그림을 쳐다봤다. 차마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 위로 입술만 짧게 붙였다가 뗀 희성이 몸을 일으켰다.

도윤을 보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야 했다. 앓느라 흘린 땀을 씻어내고 새로운 옷을 걸친 희성은 고민을 하다가 바에 들어섰다. 밤이 늦어서인지 사람이 꽤 있었다. 아직까진 미열이 남아있었으나 마음이 복잡해서 술을 시키고 봤다. 사흘간 물과 약만 넣은 속이 욕을 할지라도 지금 당장은 술이 필요했다. 적당히 마시고 올라가 잠을 잔 뒤 정신을 차리고 도윤을 보러 가야겠다. 주위를 둘러보자 바를 찾은 대부분이 연인과 함께였다. 이따금씩 머리가 아팠지만 술은 잘 들어갔다. 깨끗하게 빈 잔을 밀어두고 마른 세수를 한 희성이 도윤을 떠올렸다. 언젠간 도윤과 함께 와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욕심도 많았다. 희성이 실소를 터뜨렸다. 도윤이 자신과 이런 곳에 와줄 리가. 희성은 추가로 주문한 것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속이 싸했다.

답지 않게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멀쩡한 얼굴로 일어난 희성은 룸으로 올라가려다 충동적으로 호텔을 벗어났다. 손님을 기다리며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를 잡아탄 희성은 목적지를 말하고 고개를 젖혔다. 길이 얼어서 도로를 달리는 속도가 느렸다. 속이 답답해져 창문을 살짝 내리자 찬바람이 들어왔다. 희성은 쓰린 속을 문지르면서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봤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숨을 쉬는데도 술 냄새가 났다. 맨 정신에 찾아가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데 술까지 마셨으니 도윤이 더 싫어할지도 몰랐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카페는 불이 꺼져있었다. 도윤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도윤이 없었다. 희성은 혀를 차며 카페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가까운 곳에 도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희성이 추운 것도 모르고 눈을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사람이 빠져나간 공간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게 좋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쁘기도 했다. 멍하니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희성이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희성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젠 헛것이 다 보였다. 도윤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정말로 도윤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술에 취한 듯싶었다. 희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안 좋으니 취하기라도 했나. 헛것이라도 도윤을 보는 것은 좋았다. 희성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도윤의 모습을 한 환상을 바라봤다. 이젠 환상도 저를 보고 놀란다. 돌아가야겠다. 희성이 숨을 내쉬며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눈은 멀쩡하리라 생각했는데 자꾸 도윤이 보이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돌아가야겠다. 희성이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일어날 준비를 하는 사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도윤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성의 손이 뚝 멎었다.

“…왜 왔어.”

“…….”

“며칠 동안 안 오더니….”

“…….”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술에 취했어도 아무 데서나 자고 그러지는 않는데. 희성이 눈가를 구겼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도윤을 봤다. 거리를 둔 채 서있던 도윤이 작게 숨을 뱉었다. 어둠 속에서도 도윤의 얼굴 하나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우, 우산 가져가.”

“…….”

“가지고 올게.”

“…도윤아.”

“…….”

도윤을 부르는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끝이 떨리기도 했다. 다시 계단을 오르려던 도윤이 가만히 희성을 응시했다. 열이 다시 오르는 기분이었다.

“도윤아.”

“…왜.”

“…도윤아.”

“왜 자꾸….”

“…….”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서글펐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도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희성이 고개를 숙여 입매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윤을 붙잡고 싶었다. 사람이란 게 참 그랬다. 욕심이 많았다. 같은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 얼굴을 조금만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희성은 당장 떠오르는 것을 말하기 바빴다.

“…햄스터, 아직 우리 집에 있어.”

“…….”

“너 오면…찾을 것 같아서….”

“…….”

“좋아했잖아, 햄스터.”

“…….”

희성이 횡설수설했다. 그런 모습이 도윤의 눈에 오롯이 담겼다. 도윤을 붙잡고 싶은데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비참했다. 도윤과 함께 2년을 지냈는데 붙잡을만한 것이 햄스터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네가 싫어하지 말라고 했잖아.”

“…….”

“도윤아, 나는….”

입술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살짝 깨물었다가 떼어놓았다. 희성이 숨을 한번 삼키고 도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이제 널 붙잡을 방법이, 이런 것밖에 없어.”

“…….”

“미안해, 도윤아. 이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한테는 더 이상 남은 게 없어.”

“…김…희성….”

“잘못했어. 도윤아, 내가 잘못했어.”

희성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볼을 타고 턱까지 흘렀다. 도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희성이 눈물을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희성의 눈물에 도윤이 숨을 떨었다. 희성의 시선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누가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감각이 이어졌다. 울음을 토해내는 입술에서 도윤의 이름이 뭉개졌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몸이 폭설이 내렸던 그날처럼 무너져 내렸다.

“미안해, 도윤아. 미안해.”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 말하는 희성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오늘은 도망을 치지 않고 희성에게 다가간 도윤이 머뭇머뭇 손을 뻗었다. 도윤의 손이 어깨에 닿자 희성이 몸을 떨었다. 일어나라고 말하려던 입이 손을 붙잡는 체온에 꾹 다물렸다. 마치 며칠간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오랜 고생 끝에 겨우 물을 마실 기회를 얻은 듯이 닿은 손을 다급하게 붙든 희성이 얼굴을 비볐다. 다급하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희성은 필사적이었다.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도윤의 손이었다. 이마를 가져다 댄 희성이 울음을 삼켰다. 도윤은 그런 다급함이 무서워 손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희성이 놓아주질 않아 실패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전부, 다….”

“…왜 그랬어?”

“윽….”

“나한테, 도대체 왜, 왜 그랬어?”

“…좋아해서 그랬어. 좋아해 도윤아, 좋아해서, 좋아해서 그랬어….”

“좋아하면, 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난 너만…있으면 되는데 넌, 넌….”

“내가 그동안 얼마나….”

“미안해, 도윤아…. 난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관심을 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도윤아….”

손등에 닿은 이마가 살짝 따뜻했다. 도윤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희성을 살폈다. 희성이 말을 할 때마다 간혹 술 냄새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희성은 하얀 손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숨 쉬는 법을 이제야 알아낸 사람처럼, 보는 사람이 다 힘겹게. 희성은 그렇게 호흡했다.

“너 혹시, 술, 술 마셨어?”

“…….”

울음을 참는 입술 새로 흘러나온 숨과 함께 쏟아진 입김이 바닥까지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눈을 감고 있던 희성이 눈앞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겨우 그거 마셨다고 취하지는 않았겠지만 원래 있던 열과 술기운이 합쳐진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성이 손을 다시 고쳐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술…냄새 나는데….”

“잠깐만…잠깐만 이러고 있어….”

“…일어나.”

“잠깐만….”

무릎을 꿇은 그대로 도윤에게 절절하게 부탁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도윤은 혹시라도 누가 나올까 봐 주변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희성이 뱉는 숨이 손등으로 느껴졌다. 확실히 숨이 뜨거웠다. 도윤이 몸을 살짝 숙여 희성을 살폈다. 추위에 얼어버린 귀가 새빨갰다. 한동안 가만히 숨만 고르던 희성이 고개를 들어 붙잡힌 손을 쳐다봤다. 소매에 가려진 흉이 빠끔히 모습을 내비쳤다. 희성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린 도윤이 그제야 손을 뒤로 숨기며 희성에게서 멀어졌다. 희성은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도윤은 죄 없는 입술만 깨물었다. 멍하니 도윤을 쫓던 희성의 입술이 열렸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

“그날…때린 것도, 너한테 소리친 것도, 다….”

“…….”

“미…안해…. 미안하다고 밖에 못해서, 미안해 도윤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를 처음 듣게 된 도윤이 꾹꾹 눌렀던, 남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혼자만 삼켜왔던 감정이 복받쳐 오르자 눈물을 퐁퐁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에 눈앞이 흐려졌다. 사과를 받았음에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도윤이 떨리는 숨을 삼켰다.

“그 말을…왜…이제 해….”

“울지 마, 제발.”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 흐, 는데…. 왜, 왜 이제….”

“제발…도윤아….”

손바닥으로 눈물을 아무리 훔쳐내도 전혀 닦이지가 않았다. 도윤이 끅끅거리며 몸을 숙였다. 울음을 토하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희성과 눈높이를 나란히 했다. 스스로의 떨림을 감당하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은 도윤이 처음 온 곳에서 부모님의 손을 놓친 탓에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도윤이 울자 심장에 쥐가 난 듯 아팠다. 멀지 않은 거리를 기어서 도윤의 앞까지 도달한 희성이 떨리는 손으로 푹 숙여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인상을 찡그린 도윤이 눈물로 젖은 눈과 마주치자 소리까지 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추위에 얼어버린 손이 눈물로 범벅인 얼굴을 닦아주었다. 혹시나 깨지고 망가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떨리는 손이 얼굴로도 다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차갑게 식은 손에 갇혀있던 얼굴이 방향을 틀었다.

“나, 난, 아직 너…미워….”

“알아, 계속 미워해도 돼. 넌 그래도 돼.”

“끅, 나한, 테, 그러지, 말았어야지…그랬어야지….”

“미안해, 미안해….”

희성의 손바닥 안에서 웅얼웅얼 목소리를 내던 도윤이 몸을 뒤로 뺐다. 어렵게 닿았던 온기가 사라지자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벅찬 숨을 고르며 땅바닥만 보던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과정에서 비틀거림이 있었으나 곧장 따라 일어난 희성이 잡아준 덕분에 뒤로 넘어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팔을 잡은 손을 밀어낸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가.”

“너 들어가는 것만 보고.”

“…….”

“정말 그것만 보고 갈 거야.”

짧은 새에 너무 많이 울었는지 머리가 띵했다. 도윤은 뒤에 희성을 달고 카페를 돌아 계단에 도착했다.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뒤를 향했다. 희성은 계단을 올라오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는 모양새에도 희성은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오지도 않고 기다려주었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눈이 따가웠다. 도윤이 눈가를 문지르다가 희성을 불렀다.

“김희성….”

도윤의 입에서, 도윤의 목소리로 완성된 자신의 이름에 희성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응.”

“일주일, 정도…찾아오지 마.”

“…….”

“그냥…그렇게 해줘….”

“…일주일이면 돼?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보러 와도 돼?”

“…모르겠어.”

“그렇게 할게.”

“…….”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이제 진짜 가.”

충성심이 가득한 강아지처럼 도윤이 멀어지는 것만 바라보던 희성은 혼자가 되고도 10분 정도 더 남아 정적을 느꼈다. 반년을 혼자 버텼다. 도윤을 다시 만나게 된 지금 시점에서 일주일은 어쩌면 반년보다 더 길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성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늘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었는데 이제 선택권을 쥔 사람은 도윤이 유일했다. 희성은 도윤의 볼을 잡았던 손을 들어 손바닥에 입술을 짧게 눌렀다가 뗐다.

***

희성에게 사과를 받은 후로 도윤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밥을 먹다가도 멍, 씻다가도 멍, 정우와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다가도 멍. 희성이 카페를 찾아오면서부터 나타난 증상에 정우는 걱정이 늘었지만 도윤이 괜찮다니 더 참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울이라 비성수기를 맞이한 제주에는 당장 몇 달 전보다 찾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조용한 것도 지금이 잠깐이었다. 곧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다가오니 쉴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카페에서 쓸 비품을 정리하고 손을 털며 바깥을 둘러본 정우가 또 멍하니 서있는 도윤을 힐끔거렸다. 슬쩍 보니 한참 전에 먹으라고 준 핫초코가 그대로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놀라지 말라는 의미에서 헛기침을 뱉은 정우가 도윤의 옆에 섰다. 그제야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피곤하면 올라가서 쉬어.”

“괜찮아요.”

“아니면 좀 앉든지.”

“서있는 게 편해요.”

앉아있으면 잡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도윤이 고개를 저으며 다 식어버려 더 이상 핫초코가 아니게 된 미지근한 초코를 홀짝였다. 정우가 충분히 깨끗한 커피 머신을 괜히 한 번 더 닦았고 도윤은 또 멍하니 커피 머신을 쳐다봤다. 정우가 코로만 숨을 내쉬곤 옆을 돌아봤다. 잔을 쥔 도윤이 어깨를 떨었다.

“네?”

“아무 말도 안 했어.”

“아….”

“…손님도 없는데 잠깐 앞에 좀 걷다 오자.”

“그래도 돼요…?”

“올라가서 옷 입고 와.”

“네….”

미지근한 초코를 한 번에 마시고 카페를 나가는 뒷모습을 쫓던 정우가 문에 외출 중 팻말을 걸어두었다. 최근 도윤의 상태를 보면 옷을 입고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듯싶었다. 정우는 눈에 보이는 쓰레기들만 대충 쓸어 쓰레기통에 넣고 패딩을 입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윤은 또 15분이 훌쩍 넘은 시간에 모습을 보였다. 패딩을 입고 내려온 도윤은 기다리다 지쳐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정우의 앞에 섰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뉴스만 보던 정우가 일어나 먼저 문을 열었다. 뒤를 쫓아 카페를 나온 도윤이 문을 잠그는 것을 물끄러미 봤다.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 차 손잡이를 잡고 흔들자 덜컹이는 소리가 났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입술을 감춘 도윤이 정우를 졸졸 쫓았다. 대문을 나서기 전, 정우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뭘 찾는 건가 싶어서 덩달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도윤이 얼굴을 조금 들었다.

“오늘은 안, 안 올 거예요.”

카페에 없으면 밖에서 서성거리고 그것도 아니면 늘 차에 타있던 희성이었다. 도윤이 눈치를 보며 정우에게 희성의 행방을 알렸다. 잠시 서서 아무 말이 없던 정우가 발을 뗐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을 하고 선생님에게 불려가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다시 패딩에 입술을 폭 파묻은 채 정우만 따라 걷던 몸이 얼마 못가 멈춰 섰다. 정우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도윤은 정우가 뻗은 손을 잡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소리와 쏴아, 하고 파도치는 소리를 들으며 걷던 두 사람은 앉아서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게 만들어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추워 주머니에 들어간 손이 계속해서 꼼지락거렸다. 얼굴을 들어 바다를 보는 정우와 도윤의 입술에서 김이 새어 나왔다. 사람이 없어 파도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어서 정우의 목소리가 철썩이는 소리를 가르고 귓가에 들려왔다.

“도윤아.”

“네에.”

“솔직히 나도 이게 참견인 걸 알고, 오지랖이라는 거 아는데.”

“뭐가요?”

“나 너 도와줄 수 있어.”

“…네?”

느슨히 앉아 바다만 구경하던 시선이 정우에게 닿았다. 정우가 한숨을 쉬자 입김이 풀풀 흩어졌다.

“네가 싫고 도와달라고 한다면 널 도와줄 사람은 많아.”

“…….”

“그 사람이잖아. 맞지?”

“아….”

“그 사람이 계속 찾아와서 불안한 거면 다른 데에 보내줄 수도 있고.”

“저는….”

“네가 말만 하면 돼.”

정우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배려만 깔려있었다. 도윤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정우와 눈을 맞췄다.

“감사해요. 근데 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네. 그리고 희성이도…이제 저한테 안 그럴 거예요.”

어떻게 확신을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그럴 것 같았다. 희성은 그럴 것 같았다. 도윤이 주머니에서 꺼낸 손을 만지작거리다 손목을 문질렀다. 희성을 생각하면 손목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졌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도윤이 손목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제가 또 없어지는 것보단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서….”

“…….”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어쩌면 희성이한테는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요.”

“왜?”

“…왜냐면….”

손목을 문지르며 잠깐 침묵을 지킨 도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정우는 하얀 손목에 향했던 시선을 입술로 옮겼다.

“걔는, 저를 좋…아하니까, 근데 제가 아무것도 안 하면….”

“…….”

“쳐다보지도 않고, 손도 뻗지 않으면….”

“…….”

“걔는 그게 더 고통스러울 거예요.”

겨우 말을 끝맺은 도윤이 손목을 가리고 모래를 툭툭 찼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진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도윤이 모래를 발로 찼다가 다시 덮으며 위를 꾹꾹 눌렀다가 발 장난을 쳤다. 정우는 희성이 고통스러울 거라는 말을 하면서 제가 더 힘들어 보이는 얼굴을 눈에 담았다. 도윤이 파도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주변에 괜히 코를 훌쩍였다.

“…제가 너무 못됐어요?”

“아니,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자신과 희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잘못한 것이 없다며 자신의 편만 들어주는 정우가 고맙기도 했고 웃기기도 했다. 도윤이 발 장난을 이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요, 형.”

“말해.”

“저 그동안…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응.”

“이 정도는 해도…되는 거잖아요. 저 진짜…. 힘들었는데….”

“당연하지. 너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해.”

과거 희성은 항상 도윤이 잘못했다고, 자기가 하라는 대로만 하라고 했다. 함께 지내면서 한 번도 네 탓이 아니라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풀어준 적이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희성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직 미운 감정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사과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진심이었다. 도윤이 눈물을 참으려 눈에 힘을 주다가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희성이 떠올라 눈을 감고 말았다. 떨어진 눈물이 옷에 투둑 자국을 남겼다.

“잠깐 근처에 있을게.”

자리를 피해주려 일어난 정우가 머뭇거리며 도윤의 머리통을 살짝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여주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멀어졌다. 정우가 곁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숨을 토해낸 도윤이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미 터져버린 눈물은 막을 수도 없이 새어 나왔다. 우윽…. 눈물을 참는 법은 정말이지 없는 건가 싶었다. 고개를 숙인 도윤이 최대한 소리를 참으며 울었다. 파도 소리가 자신의 울음을 감춰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쏟아내는 몸이 점점 더 아래로 숙여졌다.

***

희성에게 말했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정우에게 스스로의 힘듦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았던 날, 도윤은 밀려드는 파도에 아무도 모르게 썩어있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버리고 돌아왔다. 연말이 다가오자 숙소에는 다시 예약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도윤은 청소가 끝난 방에 들어가 필요한 것들이 다 있는지 모자란 것은 없는지 확인을 했고 밑으로 내려가 하나하나 체크를 했다. 도윤이 확인을 다 끝내면 정우와 사장님이 손님을 받았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비행기가 결항됐다는 이유로 기간을 연장하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다.

도윤은 요즘 묘하게 드는 기시감에 찝찝함을 느꼈다. 평소처럼 청소를 하고 손님을 받고 카페에서 일을 하고 또 쉬는 시간엔 방에 올라가 쉬거나 바닷가를 산책하곤 했는데 자꾸 무언가를 까먹은 듯 속이 답답했다. 도대체 뭘 잊어버린 건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서준과 전화도 했고, 아버지와도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서준을 통해 연락을 계속 받고는 있었지만 도윤이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라 목소리를 듣는 내내 아픈 곳은 없는지, 돈은 부족하지 않은지, 자신이 제주도로 가거나 도윤이 이곳으로 돌아오거나 정말 여러 가지를 물었다. 돌아오면 편히 지낼 수 있는 집이 있고 네가 원하면 또 이사를 갈 수 있다는 말도 했었다.

인생을 길게 산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불효란 불효는 다 저지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윤은 아버지에게 그저 죄송하다며 곧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다며 전화를 끊는 그 순간까지도 도윤을 걱정했다.

대체 뭘까. 뭘 까먹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속이 답답한 걸까? 도윤이 달력을 뚫어져라 훑다가 번뜩 떠오르는 숫자에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21일. 희성에게 말했던 일주일은 내일이면 끝이 난다. 그리고 23일. 도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12월 23일. 희성의 생일이었다. 도윤이 달력을 내려놓고 눈을 굴렸다. 23일. 희성이 까먹지 말라고 같이 살던 집 비밀번호로까지 설정해둔 날이었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유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냥 초조했다.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카페에 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희성은 오후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날엔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올 것처럼 굴었으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일을 하면서도 도윤의 온 신경은 문에 가있었다. 손님이 오면 움찔 놀라 문을 쳐다보고 희성이 아니면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손님은 꽤 있었지만 바쁜 것을 다 쳐낸 상태에서 노래를 바꾸던 정우가 뜬금없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도윤을 꼬였다. 희성이 언제 올지 몰라 내내 긴장을 하던 몸도 슬슬 풀어져 입맛이 돌았다.

“잠깐 보고 있어. 가서 사 올게.”

“제가 다녀올게요!”

“밖에 추운데.”

“앞인데요 뭐. 무슨 아이스크림 먹을 거예요?”

앞치마를 벗고 정우에게 카드를 받은 도윤이 이번엔 정우가 입혀주는 정우의 패딩을 주섬주섬 입었다. 도윤이 하는 일이라곤 카페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뿐이라 늘 간단하게 입고 내려오는 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패딩은 항상 방에 있었다. 지퍼를 쭉 올려주며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사 오라는 말을 해준 정우가 손을 흔들었다. 정우의 패딩을 입고 정우의 카드를 쥔 채 성큼성큼 대문을 벗어난 도윤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뚝 멈췄다. 놀라기는 희성도 마찬가지였는지 벽에 기대고 서있던 희성이 떨떠름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어, 언제….”

“아침에.”

“…….”

그러면 아침에 와놓고 지금까지 밖에 서있었다는 말이 된다. 뻣뻣하게 굳은 도윤이 눈치를 봤다. 빨갛게 언 귀를 만지작대던 희성이 중얼거렸다.

“아직…네가 날 안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

“…어디 가?”

“편, 의점…에….”

도윤이 카드를 쥔 손에 힘을 줬다가 풀었다. 조금 어색했다. 희성은 뻣뻣해진 도윤을 살피다가 낯선 옷에 잠시 눈을 찡그렸다. 말없이 희성을 지나친 도윤이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도윤을 따라온 희성이 편의점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도윤을 기다렸다. 오랜 시간 밖에 있었더니 이젠 바람이 차갑지도 않았다. 5분 후, 편의점에서 나온 도윤의 손에는 검은색 봉지가 달랑달랑 들려있었다. 또 들어준다고 하면 필요 없다고 할 도윤이었기에 희성은 얌전히 또 거리를 두고서 뒤를 쫓았다.

희성은 도윤이 대문 앞에 도착하자 오늘은 그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해왔다. 도윤은 입을 꾹 다물고 희성을 쳐다봤다. 그나마 피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희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

봉지를 꾹 쥐고 희성을 힐끔거린 도윤이 대문을 지나쳤다. 카페 문을 열기 전 뒤를 돌아봤을 때 희성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도윤이 침을 삼키곤 문을 열었다. 투명한 유리에 도윤이 정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다 보였다. 움직이지도 않고 둘을 빤히 바라본 희성이 주차된 차로 향했다. 얼굴을 봤으니 오늘은 됐다. 시동을 걸자 차가 작게 떨었다. 희성은 출발하기 전 도윤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고 핸들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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