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7)

제주도(2)

  

  

현지가 놀러 오는 날이면 도윤만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현지와도 놀아줘야 하고 사람들의 수에 맞춰 모든 것을 세팅해야만 했는데 이때만큼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현지는 도윤이 하는 것이면 뭐든지 자기도 다 따라서 하고 싶어 했다. 도윤이 종이컵을 놓으면 괜히 뒤를 따라다니며 컵을 들었다가 놓았고 젓가락을 놓는 도윤을 따라 그 옆에 젓가락을 또 놓았다. 덕분에 도윤은 현지가 안 보는 사이 젓가락을 다시 회수하고 컵을 바르게 놓는 아주 귀찮지만 또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을 했다.

“나 이거 먹어도 돼?”

“어떤 거?”

“이거! 햄!”

“어어, 그거 아직 안 구웠어!”

“먹고 싶은데….”

“조금만 이따가 먹자, 응?”

“그럼 이거는?”

“으응, 그거는 먹어도 돼.”

현지가 작게 잘라둔 당근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현지가 얌전해진 틈을 타 도윤은 남은 것을 마저 세팅했다. 현지가 또 다른 당근을 가져와 도윤에게 들이밀었다. 도윤은 당근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현지가 주니 일단 받아먹고 현지의 손을 잡았다. 한 손에는 당근을 쥐고 다른 손으론 도윤의 손을 꼭 쥔 현지가 카페로 들어섰다. 추운 밖에 있다가 따뜻한 카페로 들어오니 몸이 녹았다. 고기와 함께 주방에서 나오려던 정우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당근을 오독오독 먹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곤 입꼬리를 올렸다.

“형 불 지금 피워두실 거예요?”

“그래야지. 왜?”

“현지 소시지 하나만 먼저 구워주실 수 있어요?”

“소시지?”

“응, 나 소시지!”

“뭐 예쁘다고 소시지를 구워줘?”

일곱 살을 상대로 뒤끝이 길었다. 제가 한 말도 아닌데 당황한 도윤이 현지의 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으응, 구워주신대!”

“누가?”

“형….”

“이상하다, 나는 조카가 없는데.”

“이…. 바보야!”

“누구지? 누구세요?”

“삼촌은 바보야!”

“아니야, 삼촌이 구워주신대. 현지야, 구워주신대!”

“어라, 진짜 이상하네….”

“혀엉….”

당근을 쥐고 소리를 빽 지르는 현지를 달래느라, 조카에게 장난을 치는 정우를 말리느라 도윤은 바빴다. 정우가 껄껄껄 웃으며 고기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도윤이 얼른 현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씩씩거리는 아이를 달랬다.

“삼촌이 구워주신대!”

“삼촌은 진짜 바보야!”

“아니야, 삼촌이 장난친 거야.”

응? 응?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현지를 달랬다. 씩씩거리던 어깨가 조금씩 평온함을 되찾았다. 현지를 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 앉은 도윤이 금방 또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정우가 불을 피우고 제일 먼저 한 일은 현지에게 줄 소시지를 굽는 것이었다. 스물네 살이나 먹고 일곱 살 조카와 싸우는 철없는 삼촌이 되고 말았지만 건들면 씩씩거리는 현지의 반응이 귀여워 자꾸 건들고 싶었다. 현지가 짜증을 내면 그 옆에 있는 도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도 재미있었다. 남들이 보면 애가 셋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정우에게는 현지와 도윤, 이렇게 애가 둘이었다.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진 소시지를 젓가락에 꽂아주자 양손에 젓가락을 쥔 현지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곧장 도윤에게 달려갔다. 키워봤자 헛수고다. 정우가 혀를 차며 불어오는 바람에 불씨가 커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사람들은 추운 날씨도 술과 고기로 이겨내고 밖에서 왁자지껄 떠들었다. 도윤과 현지는 추위를 피해 카페에 앉아 소시지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전에는 스케치북에 현지의 그림과 가끔 정우나 현지의 어머니의 흔적이 있었다면 이제는 현지의 그림과 도윤의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첫날 브라키오사우루스를 거북이로 그려주고 현지에게 혼이 아주 단단히 났던 도윤은 이제 브라키오사우루스도 잘 그렸다. 현지가 스케치북 구석에 꽃을 그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 과자 먹고 싶어.”

“과자? 밥 안 먹고?”

“으응, 과자.”

“삼촌이 고기 구워주신 댔는데….”

“으으응, 과자아.”

“…그럼 과자 먹으면 밥 먹을 거야?”

“응!”

“약속.”

“약속!”

정우나 현지의 어머니가 들었으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도윤은 오늘도 현지에게 넘어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현지는 도윤이 이래서 좋았다.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도윤이 너무 너무 좋았다. 현지가 남은 소시지를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휴지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아준 도윤이 먼저 일어나 현지의 옷을 입혀주었다. 밤엔 더 추우니까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주고 목도리도 둘러주었다. 흐흥. 현지가 신나서 옷을 입는 도윤을 올려다봤다. 자신과 똑같이 뽀글거리는 옷을 입는 도윤이 좋았다. 현지가 히히 웃었다.

“우리 옷 똑같다 그치?”

목도리에 파묻혀 눈만 내놓은 현지가 귀여워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손을 내밀었다. 현지가 냉큼 손을 잡고 도윤을 이끌었다. 일곱 살의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했지만 일곱 살이라 나올 수 있는 힘 같아서 얌전히 카페를 나왔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 저렇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도윤과 현지가 손을 잡고 나오자 한참을 웃던 여자가 아는 체를 해왔다.

“얼른 와서 같이 먹어요!”

“저 잠깐 편의점 좀….”

“편의점? 왜? 뭐 필요해?”

정우가 덩달아 아는 체를 해오며 묻자 현지가 고개를 젓곤 도윤의 손을 아래로 쭉쭉 잡아당겼다. 도윤이 입을 뻥긋거리다 대꾸했다.

“…그으냥….”

정우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현지를 한번, 눈알을 굴리고 있는 도윤을 한번 보다가 웃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길 잘 보고.”

“다녀오겠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은 둘이서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저마다 말을 꺼냈다.

“둘이 되게 귀엽지 않아요?”

“어려서 그런가, 둘이 말이 잘 통하나 보네.”

“도윤 씨도 다른 사람들이랑은 낯가리면서 애기랑은 또 잘 지내네요.”

“현지도 낯 되게 가려요. 근데 도윤이한테는 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애기들은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낯짝을 가린다는 말이 진짜라니까요.”

마지막 말에 모두가 그런 거냐며 시끄럽게 웃어댔다. 잔에 술을 채우던 정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의 밤은 유독 더 어두웠다. 낮에는 사람이 많아 이렇게까지 선명히 들리진 않았지만 밤이 되고 사람들이 없어지니 파도 소리가 지나치게 잘 들려왔다. 밝을 때 보는 바다는 예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편이라면 어두울 때 보는 바다는 꼭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고 고요해 무서웠다.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현지가 없었더라면 혼자는 무서워서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현지는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하게 과자 코너로 달려갔다. 감자 칩과 초코 볼을 품에 안고 나타난 현지에게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했더니 또 불쌍한 척 시무룩하게 올려다보기에 도윤은 또 져주고 말았다. 현지는 편의점에서 나오기 전에 초코 볼을 까서 입에 넣었다. 같이 온 사람이 정우였더라면 한 개도 주지 않고 혼자 다 먹었을 테지만 오늘은 옆에 도윤이 있었다. 현지가 과자 하나를 도윤의 입에 넣어주었다.

도윤과 현지가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였다. 해변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근처 숙소에 있던 사람들이 밤바다를 구경하러 나온 듯했다. 현지가 도윤의 팔을 쭉쭉 잡아당겼다.

“왜?”

“우리도 내려가자!”

“안 돼, 어른들이 걱정하셔.”

“으응.”

“안되는데….”

“으으응.”

“그럼 잠깐만이야. 진짜 진짜 잠깐.”

밤인데도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도윤이 먼저 해변으로 내려온 뒤 현지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바닥이 온통 모래라 발이 푹푹 꺼졌다. 도윤이 철썩이는 파도를 보며 현지의 손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낮에는 예쁘기만 했던 바다가 온통 검은색이었다. 남들은 모두 사진을 찍고 웃으며 노는데 도윤과 현지만 조용히 바다를 구경했다. 현지가 말이 없는 도윤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손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현지를 내려다본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하도윤 있잖아.”

“응.”

“엄마가 그러는데….”

“응.”

“하도윤은 나중에 다시 집으로 가야 한대.”

“…….”

“아니지? 여기에, 어, 있을 거지?”

“…….”

“가는 거 아니지? 하도윤 여기에서 살 거지?”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도윤의 엄지손가락이 현지의 손등을 문질렀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현지가 도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작은 머리통이 도윤의 다리에 붙어 흔들렸다.

“가지 마.”

“현지야.”

“가지 마, 하도윤 나랑 여기서 살아.”

“알았어, 그럴게.”

“진짜?”

“으응.”

“진짜지?”

“…응, 그럴게.”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현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파도가 철썩이며 다가왔지만 두 사람의 발치까지는 오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도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찬바람이 가슴을 뻥 뚫고 들어왔다가 다시 내뱉어졌다. 작은 입으로 바쁘게 과자를 먹는 현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보았다. 현지가 말간 눈을 들어 올렸다.

“이제 갈까?”

“응!”

“손!”

“손!”

현지와 도윤의 손이 다시 맞닿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멀어졌지만 파도 소리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현지가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

내일은 현지가 그토록 바라고 또 바랐던 토요일이었다. 현지는 저녁 내내 전화를 걸어 도윤을 찾아댔다. 정우는 그런 둘을 보며 참 애절하다고 생각했다. 평생 자신에겐 전화 한 통 없더니 도윤에겐 줄기차게 전화를 걸어대는 현지에게 드는 감정은 서운함이 아니라 어이가 없음이었다.

밖에는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오늘 밤은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파티도 없는 밤, 정우와 도윤은 카페를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가려다 말았다. 간단하게 과자를 안주 삼아 카페에서 술자리를 만든 정우가 술과 컵을 가져왔고 도윤이 과자를 뜯어 펼쳤다. 술을 마시지 않는 도윤을 위한 음료수도 있었다. 창문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매서웠다. 도윤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겨울비를 보다가 맥주 캔을 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이 말랐는지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는 목울대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광고에 나오는 모델처럼 크…. 소리를 내는 정우를 보던 도윤이 작게 웃었다. 정우가 의자에 편하게 기대며 과자를 씹었다.

“비 엄청 내리네.”

“내일 엄청 춥겠다.”

“겨울이니 어쩔 수 없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올리고 과자를 먹던 정우가 콜라를 홀짝이는 얼굴을 빤히 봤다. 확실히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붙었다. 그동안 잘 먹인 보람이 있었다. 촘촘한 속눈썹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도윤의 얼굴을 뜯어보던 정우가 문득 목이 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속눈썹보다 더 신기하게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안주도 없이 맥주만 마시는 정우에게 도윤이 과자를 밀어주었다. 이번엔 붉은색을 띤 입술이 시야에 확 들어찼다. 정우가 캔을 따라 흐르는 물기를 문질렀다.

“도윤아.”

“네?”

“너 그, 입술에 뭐 발라?”

“아니요?”

“…그래?”

“그냥 립밤…?”

“지금도 발랐어?”

“…아니요?”

“그렇구나.”

도윤이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작댔다. 립밤은 주로 자기 전에 발랐다. 지금은 아무런 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였다. 정우의 시선이 부산스럽게 카페를 훑었다.

“왜요? 저 뭐 묻었어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으응.”

도윤이 다시 과자를 먹었다. 정우는 혼자만 어색해진 분위기에 남은 맥주를 전부 삼켰다. 도윤이 새 캔을 따주곤 정우에게 밀어주었다.

“너도 마실래?”

“저 술을 잘 못해서….”

“조금만 줄게.”

맥주를 아주 조금만 따라준 정우가 도윤의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술은 조별 과제를 했던 조원들과 마셨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도윤이 머뭇거리다 맥주를 홀짝였다. 역시 술은 입에 안 맞았다. 도윤이 급하게 과자를 주워 먹자 정우가 웃었다.

“천천히 먹어.”

“너무 써요.”

“그럴 수 있지.”

정우는 계속 안주도 없이 맥주를 마셨다. 도윤은 맥주도 마셨다가 쓰면 과자를 먹고 또 목이 마르면 콜라를 마시다 한 번씩 맥주를 홀짝였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지만 쏟아지는 빗소리에 마냥 조용하지는 않았다.

도윤은 정우가 준 맥주를 다 마셨다. 조금씩 잘 마시는 것 같아 그때마다 컵을 채워줬더니 얌전히 다 받아마셨다. 그 결과 도윤의 얼굴에 붉은색이 피어올랐고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정우는 처음 보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도윤이 과자를 입에 넣고 씹다가 또 혼자 웃었다.

“도윤아, 취했어?”

“안 취했는데….”

“취한 것 같은데.”

“으응, 안 취했다니까.”

“취했는데.”

“아닌데.”

“아니야?”

“으응.”

도윤은 말대꾸를 하면서도 재미있는지 실실거렸다. 정우가 웃음을 참으며 말을 걸었다.

“도윤아.”

“네에.”

“졸려?”

“네에, 좋아요….”

“졸리냐니까 좋긴 뭐가 좋아?”

“저는…좋아요….”

컵을 쥔 도윤이 다시 맥주를 홀짝였다. 으응, 써…. 그러더니 콜라를 마시곤 행복한 얼굴을 보였다. 계속 실실거리는 탓에 눈이 접혔다. 정우는 소리 없이 웃는 도윤을 뚫어져라 봤다. 보조개가 볼에 깊게 박혀 시선을 끌었다.

“좋아?”

“으응, 좋아….”

“뭐가 좋은데?”

“그냥…다….”

“다 좋아?”

“네에. 형도 좋고…현지도…귀엽고….”

“나 좋아?”

“끅, 네에. 희, 끄응…. 성이는 무서웠는데…형은…착하니까….”

“누구?”

도윤이 또 맥주를 홀짝였다. 입맛을 다시며 정우를 쳐다보는 눈이 풀려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정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뭐가요…?”

“희성이가 누군데?”

“…어어…. 형이 희성이를…어떻게…?”

도윤이 신기하다며 웃었다.

“누군데?”

“으응, 무서운 애…. 나한테 막…무섭게 하구…응….”

“걔가 너 괴롭혔어?”

괴롭혔냐는 질문에 도윤이 풀린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에. 내가 싫다고, 응, 했는데…자꾸…막 하고….”

“뭘 했는데?”

“…으응.”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정우가 맥주를 마시곤 도윤의 손목을 쳐다봤다. 사람은 항상 이상한 곳에서 촉이 오기 마련이었다. 컵을 쥔 손목에는 처음 봤을 때보다 상태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깊은 흉이 남아있었다. 정우가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가 물었다.

“도윤아 혹시 그거…희성이라는 애가 그런 거야?”

“…….”

“미안.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이거는…제가 그랬는데….”

“네가?”

“내가 잘못해서…. 응….”

“뭘 잘못했는데?”

“어…. 내가, 약속을 했는데…안 지켜서, 희성이가…화나서 내가, 응.”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컵을 물고 웅얼거리는 모습에 정우가 컵을 뺏어들었다. 조금 촉촉해진 눈이 컵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네 잘못 아니야.”

“…….”

“네 잘못 아니니까 일어나자. 너 자야겠다.”

“…아닌데, 희성이는…전부 내가…잘못한 거라고 했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건 대충 알겠다. 일어나자.”

“희성이가….”

“도윤아, 그만.”

“…….”

단호한 목소리에 도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정우가 뒤늦게 아차 싶어서 도윤을 달랬다.

“화낸 거 아니니까 들어가자.”

“…….”

“도윤아, 일어나.”

“…….”

“도윤아.”

잠깐 단호하게 굴었다고 도윤이 시무룩해졌다. 정우가 자신에게 화를 냈다. 술에 취해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똑똑히 새겨졌다. 도윤이 입을 다물고 일어났다. 정우의 손이 팔을 잡아왔다. 도윤이 훌쩍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다른 손님들이 있어서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방 앞까지 데려다준 정우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도윤이 코를 먹으며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혼자 씻고 잘 수 있겠어?”

“으응….”

“도윤아, 나 너한테 화낸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

“형 진짜 화 하나도 안 났어.”

“근데 왜…무섭게 해요….”

훌쩍이는 소리에 정우가 몸을 숙였다. 도윤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정우는 갑자기 울먹이는 얼굴을 보곤 당황해 손까지 흔들며 해명했다.

“진짜 화낸 거 아니야. 무서웠으면 미안. 형이 잘못했어.”

“네….”

“얼른 들어가서 자.”

“먹은 거 치워야 하는데….”

“형이 치우고 들어갈게.”

“응…. 안녕히 주무세요….”

소매로 눈물을 훔친 도윤이 고개를 꾸벅였다. 정우는 취해서도 예의 하나는 끝장나게 바른 도윤의 방 앞에서 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서있었다. 사람이 우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픈 것보다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은 처음이었다. 예쁘고 귀엽기도 했다. 정우는 자신이 맥주를 몇 캔이나 마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걸 마시고 취할 리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은 지금 제정신이라는 소린데, 어떻게 우는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부터 들 수가 있지? 정우가 찬 공기를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머리가 맑아지기는커녕 더 심란해졌다. 평소에도 도윤을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근데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정우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팠다. 더 심란했다. 이번엔 뺨을 때려보았다. 아팠다. 정우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컵과 쓰레기들을 정리하며 또 멍을 때렸다. 오늘 자신이 자야 할 곳은 침대가 아니라 바로 이곳. 쓰레기통 안일 지도 몰랐다. 쏟아지는 쓰레기들을 보며 정우가 안으로 머리를 박으려다 관뒀다.

정우가 스스로를 쓰레기라 칭할 때 도윤은 훌쩍거리며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가 또 훌쩍거리며 씻으러 들어갔다. 훌쩍거림은 씻으면서도 계속됐다. 씻으면서 자꾸 보이는 희성의 얼굴이 불편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니 몸이 노곤했다. 로션을 바를 힘은 있었는데 머리까지 말릴 힘은 없었기에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불을 껐다. 도윤은 비척비척 걸어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으응….

푸르스름한 새벽, 곤히 잠든 도윤에게서 끙끙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게 펴져있던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고개가 돌아갔다.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는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도윤은 꿈을 꾸고 있었다. 배경은 희성과 단둘이 함께 살던 집이었고 앞에는 당연하게도 희성이 있었다. 평소에는 욕실에서 시작했더라면 오늘은 침실이었다. 꿈속에서의 도윤은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그 위로 희성이 다가왔다. 희성이 자신의 위에 올라타는 일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도윤은 밀어내지도 못했다. 희성이 웃으며 몸을 숙여 입을 맞춰왔다. 순간 배경이 흐릿해지고 침대와 희성만 선명해졌다. 질척하게 얽히는 혀를 따라 저도 혀를 섞었다. 희성은 늘 그랬듯 타액을 핥아먹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몽롱했다. 도윤이 숨을 내쉬며 희성을 올려다봤다.

꿈속에서의 희성은 자꾸만 웃었다. 도윤과 살을 맞대고 있어 행복해 보였다. 희성의 입술은 목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까지 아주 느릿하게 내려갔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피부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쩐지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도윤은 그저 헐떡거리며 살을 머금고 빨아대는 희성을 쳐다봤다.

분명 꿈인데. 이건 꿈인데. 꿈이라는 것을 자신도 다 알고 있는데 희성의 안에 들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희성이 눈 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아먹었다. 살이 비벼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익숙하고 선명했다. 밀어내고 싶어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희성은 기분이 좋은 듯 귓가에 웃음을 흘렸다. 도윤이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눈을 꾹 감았다. 동시에 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좋아해.’

꾹 감겨서 인상을 찌푸리고 끙끙 앓던 도윤의 눈이 번쩍 떠졌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눈 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에 도윤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상했다. 희성을 상대로 이런 꿈을 꾼 적은 처음이었다. 도윤이 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축축함에 급하게 이불을 걷어냈다. 속옷이 잔뜩 젖어있었다. 말이 안 됐다. 희성의 꿈을 꾸고….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욕실로 뛰어간 도윤이 샤워기를 틀었다.

옷을 벗는 손이 급했다. 겨울이지만 찬물을 머리에 부었다. 입술이 떨릴 만큼 차가운 물이었는데 머리는 쉽게 식혀지지가 않았다. 한번 사정을 마친 것이 다시 꺼떡였다. 도윤은 앞을 만지지도 않고 한참을 찬물만 맞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도윤은 겨우 가라앉은 아래를 확인하곤 따뜻한 물을 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희성의 꿈을 꾸고. 희성을 상대로. 도윤이 벽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머리를 타고 흐른 물이 손목을 지나쳤다. 도윤이 그 위를 긁었다. 자신은 희성의 꿈을 꾸고 사정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세우기까지 했다. 입술이 불안한 듯 떨렸고 손목을 긁는 손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흉이 남은 손목에 빨간 손톱자국이 생겨났다.

결국 도윤은 새벽부터 피를 봤다. 도윤은 뒤늦게 잔뜩 긁힌 손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하고 놀라 손을 뗐다. 팔을 타고 흐른 물이 상처에 닿자 따끔함이 느껴졌다. 도윤의 시야가 흐려졌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도윤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스스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새로운 상처가 생긴 손목에 연고를 바르고 한숨을 쉰 도윤이 얼굴을 쓸었다. 누군가를 상대로 그런 꿈을 꾼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아직 아침을 준비할 시간도 아니었다. 도윤은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새벽바람에 드림캐처가 흔들렸다. 새벽이라 그런지 해변에는 사람도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도 속이 갑갑했다. 희성에게서 도망친 것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런 날이 온다면…. 한숨을 푹 쉬자 입김이 흩어졌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상한 꿈까지 꾼 도윤은 제일 먼저 카페에 내려와 정우를 기다렸다. 정우는 분명 비밀번호를 알려줬지만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박고 있는 도윤을 보고 놀라 소리를 칠 뻔했다. 정우는 피곤해 보이는 도윤을 안으로 데려와 히터부터 틀어주었다. 대체 왜 그러고 있었냐는 질문에도 도윤은 말을 아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도윤의 주위를 맴돌았다. 샌드위치를 만들면서도 조용, 손님들이 내려와서도 조용. 정우는 도윤이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자신을 어색해하는 거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새벽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눈치만 보던 정우는 도윤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대신해 주며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다.

아침에 할 일을 끝내고 차에 오른 정우와 도윤은 카페 밖까지 나와서 배웅을 하는 사장님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숙소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현지네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정우는 묵묵히 운전만 했고 도윤은 창문에 머리를 박고 지나치는 풍경만 바라보았다.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라디오를 틀자 정적만 감돌던 차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우가 창틀에 팔을 기대고 밖을 쳐다봤다. 전날 쏟아졌던 비가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았다.

뻥 뚫린 도로와는 달리 꽉 막힌 가슴이 답답해서 창문을 살짝 열까 말까 고민하던 때였다. 유일하게 떠들던 라디오가 끊기고 벨 소리가 울렸다. 차선을 바꾸려던 정우가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삼촌! 어디야? 오고 있어?

“누구세요?”

-옆에 하도윤도 있어? 어디야?!

“이거 저희 누나 핸드폰인데 누구세요?”

-바보야! 옆에 하도윤도 있냐구!

“있어, 있으니까 소리 좀 그만 질러.”

-하도윤!

“현지야, 우리 가고 있어.”

-진짜? 언제 와? 빨리 와!

삼촌을 대하는 목소리와 도윤을 대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달랐다. 정우가 허탈하게 웃으며 핸들을 두드렸고 도윤이 으응, 조금만 기다려. 하며 현지를 달랬다. 현지는 대체 언제 오는 거냐며 자기는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왜 지금 오고 있는 거냐고 둘을 닦달했다.

“이현지, 삼촌 지금 운전 중이거든?”

-근데? 그게 왜?

“운전 중이라 전화 오래 못 받아.”

-으응. 빨리 와!

“알았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응!

현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몇 초 뒤 라디오가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지의 전화로 분위기가 살짝 달라졌다. 정우가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매만졌다. 마찬가지로 작게 웃은 도윤이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신호에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정우는 히터 바람이 도윤에게 닿는지 손을 뻗어 확인하고는 시선을 올렸다. 중간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라디오는 애초에 소리를 죽인지 오래였다. 라디오 대신 색색 숨 쉬는 소리를 들으며 달려온 정우가 집 앞에 주차를 하고 조용히 차를 빠져나왔다. 도윤은 그때까지도 얌전히 잠들어있었다.

정우가 벨을 누르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것은 당연하게도 현지였다. 현지는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 보이는 정우를 무시하고 도윤부터 찾아댔다. 분명 같이 온다고 했는데 왜 정우만 서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이 정우를 올려다봤다.

“도윤이 차에서 자.”

“왜?”

“피곤하대. 어디 가?”

“하도윤한테!”

잡을 새도 없이 요리조리 피해서 달려가는 현지를 힐끔거리며 누나에게 인사를 하곤 정우도 다시 차로 향했다. 현지가 운전석을 열어 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현지는 곧장 도윤을 깨울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잠든 도윤을 살피고 있었다. 정우가 문을 잡고 서서 현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청으로 된 멜빵을 입고 도윤을 기웃거리는 뒤통수가 동글동글 귀여웠다.

“현지가 오빠 깨워.”

“으응.”

대답은 잘하지. 정우가 대답만 하고 깨울 생각은 없어 보이는 현지의 뒤에 서서 도윤을 힐끔거렸다. 보통 차에서 자면 입을 벌리고 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도윤의 입술은 다물려있었다. 현지가 갸웃거리며 도윤을 올려다보다가 다리를 흔들어보았다. 그제야 응…. 하고 눈을 뜬 도윤이 현지를 발견하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도윤 졸려?”

“언, 언제….”

“도착한지 별로 안됐어.”

“아…. 죄송해요, 자려던 게 아니라….”

“괜찮아. 일단 내리자.”

“죄송해요….”

당황한 몸이 허둥지둥 차를 벗어났다. 정우를 밀치고 차에서 내린 현지가 도윤의 손을 잡으며 집으로 이끌었다. 또 홀로 남겨진 정우가 활짝 열린 양쪽 문을 다 닫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윤은 생각보다 규모가 큰 귤 농장이 눈앞에 펼쳐지자 당황했다. 귤 나무가 정말 끝도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갑을 끼고 현지의 손을 잡고 멍하니 서있던 도윤이 자신의 옆을 지나쳐 익숙하게 귤을 따러 가는 정우를 졸졸 쫓았다.

“형, 이거 오늘 다 따는 거예요?”

“아니? 이거 다 따려면 한참 걸려.”

“아…. 그럼 어떤 걸 따야 하는 거예요?”

일을 도우러 왔으니 1인분은 해야 했다. 도윤이 벌써 귤을 까먹고 있는 현지와 함께 정우의 설명을 들었다. 하다가 먹고 싶으면 그냥 따먹어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도윤이 귤을 따면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지가 귤을 바구니에 넣는 역할을 했다. 정우가 벌써 바구니를 한번 비우고 왔을 때 도윤과 현지의 바구니는 이제 반 정도 차있었다. 도윤이 딴 귤을 까서 입에 넣은 현지가 도윤에게 귤을 먹여주었다. 정우가 바구니를 바닥에 놓으며 둘의 문제점을 확인했다. 도윤은 꼼꼼하게 고르고 고른 귤을 따서 현지에게 주고 있었고 현지는 그 귤을 까먹고 있었다. 어이가 없고 귀여운 콤비였다. 손을 털면서 다가온 현지의 엄마, 수정이 현지의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귤껍질을 보곤 낄낄 웃었다.

“하여튼, 기대도 안 했어.”

“둘 다 나중에 밥 못 먹겠는데.”

“나중에 배고프다고 할 때 먹이면 돼.”

구경꾼이 생긴 것도 모르고 열중해서 딴 귤을 현지에게 내민 도윤이 바구니를 확인하고 그제야 뒤늦게 의아함을 느꼈다. 엄청 많이 딴 것 같았는데 왜 아직도 바구니가 안 찼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바구니를 뒤적이던 도윤이 입으로 들어오는 귤에 현지를 쳐다봤다. 멜빵의 끈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도 상관이 없는지 귤만 오물거리는 아이가 귀여웠다. 도윤이 웃으며 끈을 올려주곤 다시 심각하게 바구니를 확인했다가 바닥에 쌓인 귤껍질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순간 현지가 또 귤을 입에 넣어주었다. 도윤이 허탈하게 웃으며 귤을 받아먹었다.

“현지야, 귤을 다 먹으면 어떡해.”

“왜애?”

“우리도 얼른 바구니 새로 채워야지.”

“엄마가 그냥 놀아도 된다고 했는데?”

“일은 하고 놀아야지.”

“으응.”

도윤이 엄지손가락으로 현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손에 남은 귤을 한입에 털어 넣고 도윤이 주는 귤을 바구니에 넣기 시작하는 현지를 멀리서 지켜보던 수정과 정우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늘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제일 어린 현지와 도윤은 벌써 자리에 앉아 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들이 바구니를 3번 비울 동안 도윤과 현지는 1개의 바구니도 겨우 비울 수 있었다. 귤을 따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의욕은 넘쳤으나 그 의욕을 현지가 다 먹어버리는 바람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지는 쉬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귤을 까먹었고 도윤의 손에는 귤껍질이 산을 쌓고 있었다. 옆에서 일을 하던 수정이 도윤에게 말을 걸었다. 현지가 주는 귤을 받아먹던 도윤이 콜록거리며 고개를 틀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니….”

“오늘 우리 귤 도윤이랑 현지가 다 먹네.”

“그게, 그러니까….”

도윤은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수정이 피식 웃으며 귤을 골라내다가 물었다.

“혹시 귤 보내주고 싶은 사람 있어?”

“귤이요?”

“널린 게 귤인데 집에도 좀 보내주고 해.”

“어….”

“오늘은 일도 했으니까. 있어?”

“…아, 아빠한테 보내드려도 돼요?”

“그럼. 주소 여기다 적어줘.”

아버지의 주소는 서준에게 전달받고 계속 외우고 다녔다. 도윤이 귤껍질을 다리에 쏟고는 종이에 주소를 적었다. 아버지의 이름과 전화번호도 적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도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제 친구한테도 보내줘도 될까요…?”

“그럼.”

“감사합니다.”

도윤이 고개를 꾸벅였다. 의자에서 내려온 현지가 도윤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구경하다가 서준의 이름을 따라 읽었다.

“이서준? 이서준이 누구야?”

“으응, 친구.”

“친구? 하도윤 친구?”

“응. 제일 친한 친구야.”

“이서준이랑 제일 친해?”

현지에게 도윤은 친구였다. 어른들이 오빠한테 도윤아가 뭐야, 도윤아가! 오빠한테 하도윤이 뭐야! 하고 화를 낼 때도 현지에게 도윤은 그저 친구였다. 그러니 도윤의 친구인 서준도 현지의 친구였다. 현지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도윤을 올려다봤다.

“응.”

“이서준도 하도윤 좋아해?”

“응?”

“하도윤도 이서준 좋아해?”

“…친구니까 좋아하지?”

“나는?”

“현지도 좋아하지.”

서준의 번호까지 적어둔 종이를 수정에게 건네자 현지가 다리에 있던 귤껍질을 전부 바닥에 던져버리곤 그 위를 차지했다. 도윤이 다리를 통통 튕기며 장난을 치자 현지가 히히 웃었다. 4번째 바구니를 비우러 온 정우가 그들의 앞에 서서 괜히 장난을 걸어댔다. 현지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도윤의 손을 잡았다.

“하지 마! 괴롭히지 마!”

“내가 뭘 했다고?”

“엄마아! 삼촌이 또 괴롭혀!”

“그래, 괴롭히지 마라.”

일을 하느라 바쁜 수정이 대충 대꾸하자 현지의 씩씩거림이 더 커졌다. 정우가 낄낄거리며 차가운 귤을 현지의 볼에 가져다 댔다.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현지를 꼭 끌어안은 도윤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다.

“바보야, 하지 마!”

“싫은데, 싫은데.”

“삼촌은 진짜 못된 악당이야! 그러니까 하도윤이 싫어하지!”

“뭐?”

“어?”

“하도윤은 나 좋다고 했거든? 근데, 근데 삼촌은 악당이니까 싫어해!”

자신이 정우를 싫어한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도윤이 당황한 얼굴로 정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정우가 상처받은 눈으로 도윤을 내려다봤다. 기세가 등등해진 현지가 정우에게 혀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랬구나. 나를…그랬구나….”

“아니에요, 형 아니에요!”

“도윤아, 미리 말을 좀 해주지….”

“형, 형!”

“난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휴….”

“형…진짜 아니에요….”

“난 괜찮아…. 좀 슬프긴 하지만…. 근데 뭐…괜찮아….”

슬퍼하는 척 어깨에서 힘을 빼는 정우에게 현지가 메롱 했다. 도윤만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하기 바빴다. 옆에서 한편의 드라마를 시청한 수정이 혀를 차며 정우를 불렀다.

“애들 괴롭히지 말고 일이나 해.”

“괴롭히다니, 아까 못 봤어? 얘네가 먼저 나 괴롭혔어.”

“애기들 괴롭히지 말고 이거나 옮겨.”

“억울하네.”

지금 제일 억울한 건 도윤이었다. 정우가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도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곤 수정과 함께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고개를 쳐들어 울상인 도윤의 턱을 콕콕 찔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지에게 왜 그랬냐며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윤이 우는소리를 내며 현지의 머리에 턱을 콕콕 찍었다.

귤을 따면서 하도 많이 까먹은 탓에 배가 부른 도윤과 현지는 점심을 건너뛰었다. 다른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도윤은 현지의 지도하에 집을 구경했고 현지의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사람들이 점심을 다 먹은 후에는 함께 나가 귤을 땄고 입이 심심하면 귤을 까먹었다. 일을 하던 사람들은 둘에게 귤을 따는 것보다 까먹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며 웃었다. 민망했지만 자꾸 귤을 까주는 현지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다 받아먹었다.

저녁엔 현지의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했다. 평소에 돼지고기를 질리도록 먹어왔다며 오늘만큼은 일을 했으니 소고기를 먹어야겠다는 정우의 의견에 온 곳은 소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현지는 밥을 먹기도 전에 아이스크림부터 찾다가 수정에게 혼이 나 시무룩해있었다. 도윤이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꾸물꾸물 움직여 현지의 다리를 콕 찔렀다. 엄마에게 혼이 나 우울하게 자리를 지키던 현지가 손가락을 밀어냈지만 눈치를 보던 도윤은 다시 다리를 콕 찔렀다.

“하지 마.”

“왜애.”

“나 기분 안 좋아.”

“왜 안 좋아?”

“몰라.”

“아이스크림 못 먹게 해서?”

“흥.”

“나중에 밥 다 먹고 먹자. 응?”

“난 지금 먹고 싶단 말이야.”

“나중에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하도윤도 바보야.”

“으응, 밥 다 먹고 많이 쌓아서 줄게.”

“…세 번 쌓아줘.”

“알았어.”

가게의 입구에 있는 아이스크림은 손님들이 알아서 퍼갈 수 있도록 만들어둔 시스템이었다. 도윤이 실실거리며 현지의 다리를 콕콕 찔렀다. 처음엔 토라져서 거부하던 현지가 마음을 풀었는지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서로 이마를 맞대고 웃는 모습에 앞에 앉아서 집게를 들고 있던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소고기는 많이 익히면 소고기를 먹는 의미가 없었다. 신중한 얼굴로 소고기를 뒤집던 정우가 알맞게 익은 것을 잘라 도윤과 현지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살짝 핏기가 도는 소고기에 도윤이 눈치를 보며 고기를 불판에 몇 번 더 지지다가 맛있게 먹었다.

가게가 집 근처에 있는 곳이라 정우와 도윤, 그리고 현지를 제외한 모두가 얼큰하게 취했다. 도윤은 껄껄 웃으며 자신들만의 세상을 걷고 있는 어른들의 뒤를 따라 현지의 집으로 향했다. 시간도 시간이고 정우도 술을 몇 잔 마셨기에 운전을 해서 1시간을 달릴 정신이 없었다. 현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씻으러 가는 도윤을 쫓아 저도 손을 씻고 물기를 닦을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도윤은 거실에서 정우와 함께 이불을 펴놓고 잘 생각이었지만 자신의 방에서 자야 한다는 현지의 강력한 의견 어필에 지고 말았다.

현지는 도윤과 함께 잘 생각으로 침대도 포기했다. 바닥에 이불을 까는 도윤의 옆에 현지의 이불이 함께 놓였다. 수정과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온 현지의 볼엔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도윤의 베개 옆에 크기가 작은 현지의 베개가 놓였다. 헤실헤실 웃던 현지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도윤이 웃으면서 작은 발바닥을 간질였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아이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웃고 있을 때 정우가 베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웃기 바쁘던 현지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정우를 올려다봤다.

“나도 여기서 자야겠다.”

“왜? 삼촌은 왜?”

“삼촌은 여기서 자면 안 돼?”

“안 돼!”

“왜 안 되는데? 삼촌도 도윤이랑 잘 건데?”

“삼촌은 왜? 삼촌은 왜?”

“왜긴, 악당은 원래 착한 사람들 좋아하는 거야.”

“삼촌은 왜? 삼촌은 왜?”

“조용히 하고 자자.”

“삼촌은 왜? 삼촌은 왜?”

“이현지, 그만.”

“삼촌은 왜!”

머리를 말리고 나온 수정이 또 시작이라며 혀를 찼다. 현지는 도윤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을 방해받아 뿔이 났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에 도윤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7살에게 재롱을 부리는 20살을 구경하는 것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정우가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곤 어깨를 들썩이다 도윤을 밀어내고 가운데에 자리 잡는 현지를 내려다봤다. 기가 찼다. 정우는 오늘도 사이좋은 남매를 강제로 찢어놓는 눈치 없는 역할을 맡았다.

“뭐 하냐.”

“여기에서 잘 거야.”

“니 자리로 가.”

“여기가 내 자리야.”

“아니잖아.”

“맞아.”

이번엔 스무 살이 일곱 살과 스물 네 살이 말싸움을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둘이서 열심히 싸우고 있을 때 도윤은 현지의 베개와 자신의 베개를 바꾸고 이불도 끌어왔다. 삼촌은 나가서 자! 왜, 같이 좀 자자. 정우가 현지를 끌어안자 현지가 아아악 하면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도윤은 조용히 일어나 불을 끄고 맨 끝에 누웠다. 둘은 그때까지도 밖으로 나가라, 아니다 같이 좀 자자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전쟁 통에서도 얌전히 이불을 덮은 도윤이 눈을 감았다.

기껏 샤워를 해놓고 자기 전에 땀을 뺀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짜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현지가 옆을 돌아봤고 정우는 몸을 일으켜 도윤을 살폈다. 앞머리가 갈라져 동글한 이마가 드러났다. 현지는 이불 위로 손을 모으고 곤히 잠에 빠진 도윤을 보고 백설 공주를 떠올렸다. 난쟁이가 된 기분으로 도윤의 옆에 딱 붙은 현지가 코를 킁킁거렸다. 정우가 작게 속삭였다.

“뭐해. 그러다 깨겠다.”

“하도윤 좋은 냄새나.”

“무슨 냄새?”

“으응, 좋은 냄새.”

현지가 아예 다리를 도윤에게 올리면서 딱 붙어 누웠다. 어둠 속에 익숙해지니 도윤의 실루엣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까만 속눈썹이 촘촘한 눈은 미동도 없이 감겨있었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있었다. 정우가 다시 턱을 괴고 잠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전부터 그랬지만 최근 들어 도윤을 보고 있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곤 했다. 잠을 자는 도윤을 구경만 하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우가 도윤에게 딱 붙어서 잠을 청하는 현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곁에 도윤이 없는 동안 희성은 가족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저녁을 먹고 싶다는 어머니의 말도 무시하고 집에만 있었다. 결국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약도 도윤을 이기지는 못했다. 보통 사람들은 약을 먹고 눕기만 하면 잠을 잔다던데 희성은 약을 먹고도 몇 시간 동안 잠을 설쳤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않은 탓에 속이 울렁거리고 쓰라리기도 했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 집에도 찾아오지 않는 아들의 생사가 궁금해 주현이 처음으로 집에 들렀을 때도 희성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계속해서 울리는 벨에 안 그래도 예민해져있던 희성은 욕을 씹으며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고 주현은 살이 빠지고 피부도 까칠해진 아들을 보자마자 미간을 좁혔었다. 대체 밥은 먹고사는 거냐며 묻는 어머니의 걱정도 귀찮았다. 도윤이 썼던 침구가 곁에 없으니 불안하기까지 했다. 주현은 자꾸만 침실을 힐끔거리는 희성을 보며 이상함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해 주었다. 보아하니 사람은 주기적으로 오는 것 같은데 어째서 꼴이 이 모양인지 가늠이 어려웠다. 희성은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부른 어머니 몰래 한숨을 쉬었다. 늘 도윤이 꽂고 있던 링거 바늘이 자신의 팔에 꽂혀있었다.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주현을 피해 고개를 튼 희성이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 도윤 같은 사람은 없었다. 도윤은 그냥 도윤이었다. 그동안 도윤과 비슷한 사람을 봤다고 해서 찾아가 봤지만 모두 도윤의 ‘ㄷ’자도 닮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멀쩡한 눈을 달고도 이상한 것만 보고 다니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희성은 도윤을 찾기 위해 갈아치운 사람들을 떠올려보다 눈가를 꾹꾹 눌렀다.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있기에 반년이 되도록 머리털 하나 찾지 못한단 말인가.

희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주일마다 도윤의 아버지와 서준을 찾아갔다. 처음엔 패악을 부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제발 도윤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자존심도 버리고 애원하기도 했다. 도윤이 없어진 후의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도윤만 찾을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평생 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희준에게도 도윤을 찾아달라며 약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도윤은 여름이 시작되던 때에 모습을 감추었고 지금은 해가 지나기 직전의 겨울이었다. 해가 지나기 전에 도윤을 찾지 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TV도 틀어두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디선가 자꾸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분명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희성은 홀린 듯 집을 들쑤셨다. 그래봤자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에게 아무리 화가 났어도 꿈에서라도 한 번쯤은 찾아와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희성은 꿈으로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도윤이 원망스러웠다. 도윤이 꿈에 나온다면 기절을 해서라도 잠을 잘 의향이 있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게 24시간이었지만 희성은 남들이 잘 때도 깨어있었으니 하루하루가 너무 피곤하기만 했다.

희성이 도윤의 아버지와 서준을 찾아가는 날은 그때그때 달랐다. 일정한 날마다 찾아가면 혹시라도 집에 도윤이 왔어도 그들이 숨겨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생각이 날 때마다 무작정 찾아가는 게 그럴 일을 방지할 수도 있어 좋았다. 몇 달간 그들의 집에 도윤이 있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참하게도 그게 희성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희성은 도윤의 아버지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도 10분간 차에만 있었다. 핸들을 쥔 손등에 이마를 박은 채 눈을 감고 믿지도 않는 신까지 불러댔지만 오늘은 도윤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희성의 방문이 몇 달간 이어지자 도윤의 아버지는 이제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도 없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계단에 앉아 이마를 문지르던 희성의 시야에 자연스레 문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귤 박스가 들어섰다.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귤을 먹을 정신은 있나 보지. 희성이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도 굳게 닫힌 문 앞에서 30분을 더 버티고 앉아 있다가 차에 오른 희성이 서준의 집으로 향했다. 서준은 도윤의 아버지보다 좀 나았다.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도윤의 친구 아니랄까 봐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었다. 서준을 찾아가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대를 할 힘도 없었다. 차는 오래 달리지도 못하고 다시 멈췄다. 희성이 한숨을 한번 쉬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희성의 손이 주먹을 말아 쥐고 문을 두드렸다. 마침 늦은 점심을 시켜두었던 서준이 배달이 온 줄 알고 누구세요라는 말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가 당황했다. 희성은 인사도 없이 서준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빨리 확인하고 가.”

희성이 올 때마다 서준은 차라리 빨리 확인을 하고 가라는 말을 했다. 희성의 고개가 힘없이 집안을 둘러봤다. 저번 주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찾는 사람도 없었고, 흔적도 없었다. 정적 속에서 서준의 방에 들어간 희성이 눈으로만 방을 살폈다. 늘 벽에 붙어있던 엽서, 언젠가 선물을 받았다며 놔뒀다는 캔들. 똑같았다. 희성의 걸음이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서준이 잘 가라며 현관까지 따라왔다. 신발을 신으려 몸을 숙인 희성이 현관 구석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노란 박스를 보고 멈칫했다. 왜 낯익지? 곰곰이 생각해 보던 희성이 느릿하게 박스를 끌어당겼다. 순간 뒤에 서있던 서준이 당황해 숨을 삼켰다.

아까 도윤의 아버지 집 앞에 있던 박스와 똑같은 박스였다. 그 박스에서 적혀있던 주소도 제주도였고 이 박스에 있는 주소도 제주도였다. 희성이 주소를 중얼거렸다. 똑같은 곳에서 온 택배. 순간 서준의 방에 있던 푸른 바다를 상징하는 캔들과 바다를 찍어 만든 엽서가 번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이가 없음에 웃음이 터졌다. 앞머리를 쓸어 올린 희성이 뒤를 돌았다.

“다 알고 있었네.”

“뭘?”

“하도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정말 나만 몰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귤은 내가 그냥 산 거야.”

“하도윤 아버지한테 온 것도 네가 샀고?”

“…그래.”

“재밌어?”

아침에 집으로 택배가 왔었다. 제주도에서 왔고 내용물이 귤이기에 대충 도윤이 보냈구나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안에 든 편지도 없어서 이걸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보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싸늘하지만 어딘가 비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준에게서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우는 것도 아니고 화내는 것도 아닌 표정이 되었다.

“하도윤이 어디에 있는지 진짜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겠네.”

“…도윤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아무도 몰라.”

“그만해, 제발….”

“하나만 묻자. 너 대체 도윤이한테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냐고? 네 눈엔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

답을 주지도 않고 귤 박스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집을 나가는 희성을 보며 불안하게 핸드폰을 꺼내든 서준은 이내 도윤과 연락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손톱만 물어뜯었다.

집에 들렀다가 갈 여유가 없었다. 희성은 주소를 중얼중얼 외우며 핸드폰에 저장부터 했다. 왔을 때와는 달리 차를 모는 희성에게 다급함이 느껴졌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무시한 신호만 한 손가락이 넘어갔다. 위험하게 달리는 희성에게 클랙슨을 울려댔지만 지금은 그들의 불만을 품어줄 시간이 없었다. 달리는 것은 차인데 어째선지 숨이 가빴다.

도윤이 없으니 남는 것이 시간이고 돈이었다. 희성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빠른 시간대로 표를 끊었다. 몇 달 만에 제대로 된 흔적을 찾았으니 도윤이 그곳에 없어도 좋았다. 제주도는 좁았고 사람을 더 보내면 도윤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차를 고르는 시간도 사치였다. 희성은 직원의 말을 듣지도 않으며 일단 차부터 렌트했다. 보통 차를 받고 나면 사진부터 찍는 사람들과 달리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출발하는 희성을 바라보던 직원이 오랜만에 보는 인성에 혀를 찼다. 저러다 사고 나면 누구 탓을 하려고….

귤 박스에 적힌 주소는 공항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도착하고 나니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도윤을 보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라도 정리를 하지 않으면 다짜고짜 도윤을 끌고 차에 태울 것 같았다. 자신이 싫다고 도망친 애였다. 희성이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맞았다.

얼굴이 차가워질 정도로 창문을 열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예 내려서 정신을 차릴 생각으로 안전띠에 손을 가져다 댄 희성은 덜컹이며 열리는 대문에 다시 핸들을 쥐었다. 거리가 조금 있어 차에 탄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차를 확인하려는 눈이 가늘어졌다. 차가 완전히 빠져나가고 대문이 닫혔다. 희성이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 홀린 듯 차를 따라갔다.

누구를 태웠는지도 모를 흰 차를 따라가다 보니 또 한 시간이 흘렀다. 몇 달을 기다렸는데 이 정도는 껌이었다. 흰 차가 어느 대문 앞에 섰다. 희성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를 세우고 앞을 주시했다. 차에서 내린 것은 한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도윤이 아니었다. 허탈했다. 희성이 의자에 기대 그들을 쳐다봤다. 여자와 아이는 서로 무어라 이야기를 하다가 똑같이 한곳을 봤다. 희성의 시선도 덩달아 옆으로 향했다. 아이가 팔을 뻗으며 달려갔다. 희성은 고요한 눈으로 그를 살피다가 웃으며 나와 아이를 끌어안는 얼굴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도윤이었다. 도윤이 아이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여자와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여자가 다시 차를 타고 앞을 벗어났다. 도윤과 아이가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둘은 또 서로를 마주 보며 웃어댔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희성이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가려다 툭, 툭 떨어지는 소리와 코에서 흐르는 감각에 미간을 좁혔다.

도윤을 보자마자 코피가 쏟아졌다. 무슨 둑 터지듯 쏟아지는 코피에 희성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가 입술과 턱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렸다. 희성이 글러브박스에 있던 휴지를 꺼내 코를 틀어막았다. 손과 옷이 엉망이 되었다. 이 상태로 도윤의 앞에 섰다 간 상황이 악화될지도 몰랐다. 손에 묻은 피를 대충 휴지로 닦고 현재 위치를 핸드폰에 저장한 희성이 호텔을 검색해 차를 돌렸다.

겨우 이런 곳에 숨어 있으려고 모두를 버리고 도망을 친 건가 싶었다. 희성은 벌써 며칠째 도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차에서 도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분명 도윤을 찾기 전에는 도윤을 보자마자 싫다고 뿌리쳐도 데려오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반년 만에 본 얼굴이 전과는 다르게 환하게 피어있어서 자꾸만 멈칫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 차를 대고 지켜보느라 도윤이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도윤이 밖으로 나올 때는 곁에 항상 어떤 남자가 있었고 첫날 보았던 아이가 있었다. 도윤은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희성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숨만 삼켰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또 도망이라도 칠까 봐 두려웠다. 희성은 두려웠다. 도윤이 손목을 그었던 날에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반년이었다. 몇 주도 아니고, 몇 달도 아니고 꼬박 반년. 희성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았다. 도윤과 닿고 싶었다. 도윤의 이름을 부르고 도윤의 손을 잡고 싶었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웃음을 자신에게도 똑같이, 아니, 자신에게만 보여줬으면 했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던 희성이 문을 열었다. 일주일 만에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희성이 활짝 열려있는 대문으로 향했다. 손님이 빠졌는지 건물은 고요했다. 카페로 쓰고 있는 1층에서도 음악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희성은 잠시간 서서 마른 세수를 했다. 조금만 더 걸어서 카페 문을 열면 도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입이 말랐다. 이기적이라고 소리를 쳐도 좋았다. 희성은 도윤이 필요했고 한 번만 더 이기적으로 굴어보기로 했다.

문이 열리자 음악소리가 더 크고 선명해졌다. 희성은 카페를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의 옆에 진열된 기념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준의 방에 있었던 엽서와 똑같은 엽서가 시야에 들어왔다. 희성은 멀거니 익숙한 엽서를 눈에 담다가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도윤과 함께 외출을 하곤 했던 남자였다. 희성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네.”

웃으며 카드를 건네는 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윤은 이 남자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지금 입을 열면 도윤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볼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카드를 쥐고 자리에 앉은 희성이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도윤이 외출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카페에는 도윤이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편두통이 희성을 덮쳤다. 그런 희성의 앞에 정우가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서비스인지 작은 쿠키도 함께였다.

희성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다 식을 때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서비스로 나온 쿠키에도 손을 대지 않은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시계를 확인하자 대충 1시간이 지나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얼굴이 나타나지 않았다. 희성은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가져온 짐이라곤 지갑이 다였다. 다 식어빠진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쉰 희성이 의자를 뒤로 끌 때였다. 카페의 뒷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정우를 불렀다. 그대로 굳은 희성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봤다. 후드를 입고 나타난 도윤이 실실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려다 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도윤은 숨까지 참고 귀신을 본 사람마냥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반대로 희성은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도윤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렸다. 홀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린 도윤에게 정우가 왜 그러냐며 손을 뻗었다. 불안한 듯 뒷걸음질을 치던 도윤이 대꾸도 못하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정우는 영문을 몰라 도윤을 불러댔고 홀로 남겨진 희성은 씁쓸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희성은 그대로 일어나 카페를 벗어났다.

그 후로도 희성은 매일매일 카페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정우는 올 때마다 커피엔 손도 대지 않고 시간만 보내다 가는 희성에게 의아함을 느꼈지만 돌연 처음 봤을 때처럼 돌아간 도윤의 모습이 더 신경 쓰였다. 도윤은 가시를 잔뜩 세운 채 몸을 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픈 것도 아닌 듯해서 더 걱정스러웠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서 도윤의 방에 올라갈 수도 없어 더 답답했다.

카운터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도윤을 걱정하던 정우는 뒷문으로 들어와 앞문으로 나가는 도윤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너무 순식간에 나가버린 터라 붙잡을 새도 없었다. 도윤이 나가자 계속 자리만 지키고 있던 희성이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정우는 자꾸 뒤를 돌아보는 도윤을 보며 미간에 힘을 줬다. 도윤은 어디를 가면 간다고 꼭 말이라도 해주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아무런 말도 없고 대문을 나서는 걸음이 급했다. 본능이 따라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우가 카운터를 빠져나오려다 막 카페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를 지켰다.

숙소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걸음이 초조했다. 도윤은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는 희성을 힐끔거리다 멈춰 섰다. 바로 옆에는 해변이었고 사람들도 많았다. 도윤이 몸을 돌려 따라 멈춘 희성을 쳐다봤다. 꿈에서만 보던 희성이 현실에, 그것도 자기 앞에 있었다. 몇 달 만에 마주친 희성은 피로한 낯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지도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도윤이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내리깔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안, 안가.”

“…….”

“너랑, 안 갈 거야.”

“…….”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어, 어떻게…알았는지 모르겠는데….”

“…….”

희성은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도윤이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숙였다. 떨어진 거리가 낯설었고 손을 뻗지 않는 희성도 낯설었다. 희성은 그저 도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카페에 찾아오지 마.”

“…….”

푹 숙여진 머리통은 계속 바닥을 향했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희성의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보고 싶었어.”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도윤이 몸을 떨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미묘하게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도윤이 고개를 들어 희성을 쳐다봤다. 이상했다.

“…난…너 없이도 잘 지내고 있어.”

“그래 보여.”

“…네가 없어도 나는….”

“그러네. 그런 것 같아 보여.”

희성은 처음부터 도윤만 쳐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시선에 도윤은 바다를 쳐다봤다가, 바닥을 쳐다봤다가 희성을 봤다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희성은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않고 서서 입을 열었다.

“도윤아.”

“…….”

“내가 그동안 네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댔는지 알아?”

“…….”

“네가 사라지고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안 궁금해?”

“…….”

참 이상했다. 희성이 서글퍼 보였다. 도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숨은 곳을 나만 모르고 있었더라고.”

“…….”

“그동안 네 옆에 있었던 건 난데.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어.”

“…….”

“…하도윤.”

“…….”

“아무런 말이라도 좋으니까 말 좀 해. 그동안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내가 아무리 싫어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희성이 이상했다. 벌써 자신을 끌고 가도 남았을 시간에 다가오지도 않고 부탁을 하고 있었다. 도윤은 차분하게 숨을 쉬었다가 뱉기를 반복했다. 이 상황에 무슨 말을 꺼내야할 지도 몰랐고 자신을 배려하는 희성이 낯설었다. 그때였다. 희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될까.”

“…뭐?”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봐줄 건데?”

“뭐, 뭘….”

“내가 이렇게 찾아오는 게 싫으면….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이렇게 얼굴 보고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

“네가 싫으면, 내 얼굴이 꼴 보기도 싫으면 도윤아. 그러면.”

희성이 얼굴을 찡그렸다. 도윤은 자신의 귀로 흘러들어오는 말의 뜻을 해석하려 애썼다. 희성은 자신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김희성이, 애원을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항상 커다랗기만 했던 희성이 작아 보였다.

“그냥 멀리서 보다가 갈게.”

“…….”

“말도 안 걸고 그냥 보다가 간다고.”

“…그러지 마.”

전보다 단단해진 목소리가 말을 완성시켰다. 희성이 턱을 비틀다 소리쳤다.

“그냥 보기만 한다잖아, 너한테 아무런 손도 안 대고 보기만 한다는데 그것도 안 돼?”

“난 아직….”

“잘못했다잖아! 나한테 기회만 좀 달라는데 그것도 어려워?”

“소, 소리치지 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도윤을 보자 정신이 들었다. 희성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난…아직도 네가 나오는 악몽을 꿔. 꿈에서 나는 매일 자살시도를 하고 울어. 그런데 너는…. 너는 왜….”

“도윤아.”

“꿈에서 너는 매일 웃다가 화내다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도 하는데 난, 그게 너무 무서워.”

“도윤아, 도윤아.”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다 잘못했으니까 봐달라고 하면 나는 어떡해? 나는 아직 무서운데, 난 아직….”

희성이 한걸음 내디뎠을 때, 도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희성이 고개를 틀어 일렁이는 바다를 쳐다봤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윤은 동시에 따끔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눈물을 떨어뜨렸다. 욕만 나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성이 속에서 울컥거리는 것을 꾹 내리누르고 도윤을 쳐다봤다.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

“네가 빌라면 빌고 기라면 길게.”

“…흐….”

“네가 가라고 하면 갈게. 말 걸지 말라고 하면 그럴게.”

“…….”

“대신 얼굴만 보여줘. 내가 다 포기할 테니까, 하루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끅….”

“얼굴만…보게 해줘. 정말…아무것도 안 할게.”

처절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리고 온 지 오래였다. 희성에게 남은 것은 도윤밖에 없었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했다. 움찔거리다 끝난 손은 끝내 도윤에게 닿지 못했다. 도윤은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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