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드디어 토요일의 해가 밝았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희성을 상대한 도윤은 아직도 꿈나라였다. 저녁을 먹지도 않고 몸을 섞었더니 세 번째 사정을 할 때 도윤은 배가 고프다며 훌쩍거렸다. 가운만 입혀두고 저녁을 먹으려다 이미 다 준비가 되어있는 것도 꺼내기가 귀찮아 시리얼을 만들어주었더니 훌쩍거리며 열심히 먹었다. 그러다 시리얼 한 그릇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주방에서도 몸을 섞었다. 그만해애…. 먹을 것을 빼앗긴 도윤은 엉엉 울면서 희성을 밀어내기 바빴지만 희성은 지쳐있는 것을 억지로 세워 삼키기 바빴다. 도윤은 주방에서 네 번째 사정을 하고 소파로 끌려와 다섯 번째 사정을 뱉었다. 말이 사정이지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어 물만 찔끔 나왔다.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던 도윤에게 진득한 키스를 했더니 그때서야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지쳐서 잠든 도윤을 씻기는 것은 이제 희성의 전문이었다. 욕조 안에서 잠든 도윤을 끌어안고 가슴을 지분거리기도 해보고 축 늘어진 것을 조물조물 만져보기도 했다. 잠든 와중에도 자극이 주어지니 도윤은 작게 흣, 신음을 흘리다 또 조용해졌다. 희성은 도윤을 열심히 씻기고 말려서 잠옷을 입혀주었다. 이번에도 잠옷 셔츠는 도윤에게 입히고 바지는 자신이 입었다. 뽀송해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도윤을 물끄러미 보다가 또 입을 맞추고 허벅지를 깨물다가 아래를 세우기도 했다. 희성은 아래를 세운 채로 도윤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잠든 도윤을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 분명 자신과 똑같은 것으로 씻었는데 도윤에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도윤의 목부터 상체, 속옷만 입은 하체에 코를 박고 천천히 냄새를 맡던 희성이 허리를 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허벅지가 울긋불긋한 것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쪽, 쪽. 허벅지에 입을 맞춘 희성이 그대로 속옷 위에 코를 문질렀다.
“으응….”
잠든 도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희성은 이불을 덮어주며 이마에 입술을 꾹 찍었다. 본인이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색색 잘만 잤다. 희성이 볼을 깨물어 보곤 침대를 벗어났다.
집안 행사가 아니면 정장은 드레스 룸 구석에 처박히곤 했다. 불편하기도 했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겨 입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희성의 손가락이 넥타이를 훑었다. 흠.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골라낸 희성이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도윤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조금만 더 있다가 출발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아 침대 끝에 앉은 희성이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넘겨냈다.
“하도윤.”
“…….”
“도윤아.”
“…….”
“하도윤.”
머리카락을 넘겨줄 때는 조심스럽던 손이 볼을 칠 때는 조금 매서워졌다. 착, 착. 잘 자다가 뺨을 맞은 도윤이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밤새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만 자.”
“…….”
강제로 잠이 깬 도윤이 입술을 벌리곤 손으로 뺨을 감쌌다. 생각하는 것도 느렸다.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뺨을 쥔 얼굴이 점점 충격에 물드는 과정을 모조리 지켜본 희성이 웃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엄살은. 퉁퉁 부은 눈이 커지더니 다른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왜…왜 때려…?”
“내가 언제 때렸어.”
“방금…! 방금도 때리고…!”
“그건 때린 것도 아닌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어떻게 자신을 때릴 수가 있냐는 눈망울에 희성이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바지를 입지 않아 맨살이 잡혔다. 찰흙을 만지듯 허벅지를 조몰락거리는 손에 도윤이 다리를 꼬았다.
“일어나.”
“나 잠 오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일어나.”
“어제…너 때문에 잠도 잘 못, 못 잤단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 너 나보다 먼저 잠들었어.”
“그, 그게 어떻게 잠든…거야…!”
“기절했으면 잠든 거지.”
말문이 막힌 도윤이 씩씩댔다. 저리 가. 살을 만지는 손길을 피해 데굴데굴 굴러서 일어난 도윤이 욕실로 가려다 또 허전한 아래에 한숨을 쉬었다. 바지를 찾아도 보이질 않는 걸 보면 이번에도 자신에게는 상의만 입히고 하의는 희성이 입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침대에 앉아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눈을 빛내고 있는 희성을 흘겨본 도윤이 후다닥 욕실로 달려갔다.
머리카락에 매달린 물이 톡톡 떨어졌다. 수건으로 닦아냈는데도 맺혀있는 물기에 고개를 털어보았다. 희성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짜증 나…. 중얼중얼 불만을 토해내며 바지를 찾아 떠난 도윤이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물이나 마시려고 주방으로 가던 걸음이 옆으로 오라는 말 한마디에 방향을 달리했다.
“왜.”
“앉아봐.”
“…왜?”
“말 두 번씩 하게 만들지 마.”
“…앉았어.”
희성의 옆에 앉은 도윤이 목을 긁적였다. 씻으면서 거울을 보니 목이 엉망이었다. 여름이라 가릴 것도 마땅찮은데 곤란했다.
“넥타이 맬 줄 알아?”
“넥타이?”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넥타이? 옆을 돌아보자 희성의 손에는 넥타이가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희성은 정장 차림이었다. 아, 오늘이구나. 도윤이 넥타이를 쥐고 고개를 저었다.
“나 할 줄 모르는데….”
“가르쳐줄 테니까 봐.”
넥타이를 쥔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목에 두른 희성이 조종하듯 손등을 잡고 넥타이 매는 법을 알려주었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도윤이 숨을 참으며 넥타이만 쳐다봤다. 솔직히 이렇게 가르쳐줘도 머리에 박히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숨만 참을 뿐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도윤만 보면서 넥타이를 맨 희성이 웃으며 뒷목을 끌어와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나머지 참고 있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알겠어?”
“아직….”
“다음에 다시 가르쳐줄 테니까 그때 봐.”
“꼭 봐야 해?”
“봐야지, 앞으로 네가 해줄 건데.”
“…내가?”
“그럼 누가 하는데.”
네 넥타이를 내가 왜…?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속마음은 그랬다. 희성이 다시 입술을 쪽쪽 쪼아댔다.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는데…. 뒷목이 잡혀 도망도 못 가고 뽀뽀를 당하던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그만하고 싶다는 티를 이렇게 귀엽게 내면 들어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희성이 볼을 잡고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내가 늦으면 먼저 자고 있어.”
“응.”
“일찍 올 수 있으면 전화할 테니까 받고.”
순하게 깜빡이는 눈을 보다 이번엔 볼에 뽀뽀를 남겼다.
“밖에 나가지 마.”
“으응….”
“멋대로 밖에 나가지 마. 알았어?”
“알았어.”
“집에만 있어.”
“알았으니까 이것 좀….”
희성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희성이 마지막으로 입술에 뽀뽀를 찍고 놓아주었다.
“나 가고 나면 점심 먹어.”
“응.”
“뭐 먹었는지….”
“알았어, 너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면 되지? 근데 과자도 찍어서 보내야 해?”
“야.”
“응?”
“내 말 끊지 마. 누가 니 맘대로 내 말 끊어도 된다고 했어?”
“…미안.”
“도윤아,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미안해….”
풀이 죽었다. 도윤은 눈치를 보기 바빴다. 짜증이 난 듯 찌푸려졌던 미간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과자를 먹든 물을 마시든 다 찍어서 보내.”
“알았어.”
“쥐새끼 사진은 보내지 마. 짜증 나니까.”
“…알겠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도윤의 볼을 만지작대곤 일어난 희성이 현관으로 향했다. 배웅을 위해 함께 길을 나선 도윤이 복도를 걷는 뒷모습을 훔쳐봤다. 옷이 몸에 딱 맞아서 어른 같았다. 잠옷만 입고 있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 같기도 했다. 슬슬 배가 고파져 배를 문지른 도윤이 반대편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녀오라고 해야지.”
“으응, 다녀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응. 안녕.”
희성은 자신의 집에서 편한 모습으로 인사하는 도윤을 한참이나 보다가 문을 열었다. 도윤은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야에서 도윤이 사라지자마자 갈증이 일었다. 온종일 보고 온종일 물고 빨았는데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희성이 집을 나가고 도윤이 한 일은 희성에게 사진을 보내기, 밥 먹기, TV 보기, 햄스터와 놀아주기, 희성과 통화하기, 간식 먹기, 희성에게 사진 보내기, 햄스터와 놀아주기, 희성과 문자하기가 다였다. 중요한 자리라고 했으면서 희성은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답장이 이렇게 칼 같을 순 없었다.
6시가 가까워지자 조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채팅 방에 말풍선이 떴다. 집안에 희성도 없으니 도윤은 아주 자유롭게 누워 대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이유정 (20)
[도윤아 오늘 올 수 있어?] 오후 5:20
[아니 나는 못] 도윤이 거기까지 답장을 입력하려다 멈칫했다. 그동안 희성이 하는 얘기를 들어봤을 때 적어도 저녁까지는 자리를 비울 것 같았다. 그러니 먼저 자라는 말도 했을 것이다. 도윤이 침을 꼴깍 삼키며 깜빡거리는 창을 보았다. 잠시 후 액정을 두드리는 손이 빨라졌다.
도윤
[나 오래는 못 있고 그냥 잠깐만 있다가 가도 돼?] 오후 5:25
이유정 (20)
[ㅇㅇ당연~~ 우리도 그냥 밥 먹고 헤어질 듯?] 오후 5:25
도윤
[그러면...나도 갈래!] 오후 5:25
이유정 (20)
[진짜?]
[(웃는 이모티콘)]
[ㅎㅎ그럼 나중에 봐] 오후 5:26
혼자서 먹고 놀고 먹고 놀기만 반복하던 도윤이 벌떡 일어났다. 분주하게 움직여 목에 가득한 흔적을 가리려 파스를 대충 붙이고,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챙겼다. 거실에 나오니 구석에서 빛을 깜빡거리고 있는 카메라가 신경 쓰였다.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망설이던 도윤이 침대에 옷과 베개, 그리고 이불을 이용해 마치 자신이 자고 있는 것처럼 꾸며놓았다. 이러면 카메라를 확인했을 때 자신이 자고 있는 줄 알지 않을까? 도윤이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집을 나오려다 또 멈칫했다. 핸드폰에도 위치 추적이 깔려있는 것을 깜빡할 뻔했다.
도윤이 현관에 서서 머리를 굴리다 조원들과 만나는 식당만 손바닥에 적어두고 핸드폰을 신발장 위에 올려뒀다. 핸드폰을 포기하기 전에 희성에게는 나 잠깐 잘게. 하는 문자도 보내놓았다.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어차피 잠깐 나갔다가 금방 들어올 거니까. 마지막으로 어두워진 집안을 돌아본 도윤이 현관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이 없어서 식당을 찾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땀을 흘리며 식당에 들어선 도윤이 두리번두리번 조원들을 찾았다. 구석에서 익숙한 얼굴이 손을 들어 도윤을 반겼다. 도윤이 멋쩍게 웃으며 연우의 앞에 앉아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유정이는 잠깐 화장실 갔어.”
“늦어서 죄송해요.”
“너보다 늦는 사람도 있으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연우가 도윤의 앞에 컵을 놓아주곤 물을 따라주었다. 오는 내내 불안감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느라 목이 탔다. 시원한 물을 단숨에 들이켜자 연우가 다시 물을 채워주었다. 입가에 묻은 물을 훔치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도윤아!”
“어어, 안녕.”
어색한 웃음으로 유정과 인사를 나눈 도윤이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저녁 장사가 이제 막 시작되어 비어있는 테이블이 더 많았다. 물을 홀짝이며 내부를 구경하던 몸이 다시 앞을 돌아봤다.
“먼저 시킬까?”
“언니 뭐 먹고 싶어요?”
“그냥 삼겹살 먼저 주문하고 부족하면 더 추가하는 거 어때?”
“전 좋아요. 도윤이는?”
“저도 좋아요…!”
“혹시 다들 술은 마셔? 마시면 한 병 시키고.”
“저는 조금만 마실래요.”
“아, 저는 술을 못 마셔서….”
“그러면 맥주 한 병, 콜라, 사이다 하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도윤과 유정을 본 연우가 작게 웃으며 벨을 눌렀다.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직원에게 주문을 마친 연우가 물티슈에 손을 닦았다. 주문이 들어가자 밑반찬이 줄줄이 식탁에 놓였다. 콜라와 사이다를 먼저 가져온 직원이 앉아있는 셋을 보고 말문을 뗐다.
“신분증 확인 좀 할게요.”
“아, 네.”
각자 지갑에서 꺼낸 신분증을 보여주자 직원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분증을 다시 지갑에 넣고 샐러드를 입에 넣은 도윤이 혼자 어색해하며 눈알을 굴려댔다. 멋대로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갔었던 날 이후로 희성의 허락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초조하기도 했다. 희성이 집에 일찍 도착하면 어떡하지? 손바닥에 찬 땀을 바지에 문지르곤 물을 삼켰다. 제발 희성이 집에 늦게 오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동호는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더 지나서야 얼굴을 드러냈다. 죄송함다. 성의 없는 사과에 연우는 대꾸도 하지 않았고 도윤과 유정은 인사를 건넸다. 동호를 제외한 셋은 이미 맥주도 다 비웠고, 주문했던 삼겹살도 거의 비운 상태였다. 연우가 동호에게 메뉴판을 밀어주었다. 동호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고는 소주와 고기를 추가 주문했다. 도윤은 얼음이 녹아 탄산이 조금 죽어버린 콜라를 꼴딱꼴딱 삼키고 조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만 마시겠다던 유정은 소주와 맥주를 섞은 것을 마시고도 멀쩡해 보였다.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술을 꽤 잘 마시는 모양이었다. 직원이 새롭게 구워준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 도윤이 구석에 세워진 술병을 눈으로 셌다. 한 병만 마시겠다더니 맥주가 벌써 세병, 소주가 두병이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고기만 먹던 도윤이 자신이 마신 콜라 캔을 그 옆에 세워두었다.
“도윤아.”
“응? 아니, 네?”
“콜라 더 시켜줘?”
“아니에요, 아직 사이다도 있어서….”
“그럼 얼음 컵 하나 더 달라고 해야겠다.”
벨 대신 손을 든 연우가 얼음 컵과 소주를 주문했다. 얼음 컵은 도윤의 앞으로, 소주는 연우에게 돌아갔다. 까득. 뚜껑을 따고 잔을 채운 연우가 동호에게 병을 흔들어 보였다.
“나 잔 바꿔야겠는데.”
“왜요?”
“아까 실수로 고기 하나가 빠져가지고요.”
“아까 말하지, 사람 또 불러야 되잖아요.”
“걍 여기다 줘요.”
물 컵에 조금 채워져 있던 물을 한 번에 삼킨 동호가 컵을 내밀었다. 연우는 혀를 차며 물 컵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도윤은 그 옆에서 사이다를 따르고 있었다. 유정이 맛있게 구워진 김치를 반으로 찢어 고기와 함께 입으로 가져갔다. 집에서 혼자 놀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더니 지금은 눈만 감았다 뜨면 30분이 훅훅 지나있었다. 희성이 오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서 씻어야 하는데 자꾸 조금만, 조금만 하다 보니 벌써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주를 털어 마시고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은 연우가 지갑을 챙겨 일어날 준비를 했다. 옆에 앉은 유정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언니 어디 가요?”
“앞에 편의점.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저요! 근데 여기서 먹어도 돼요?”
“친구들이랑 몇 번 왔었는데 사장님이 괜찮다고 하셨어.”
“아하. 그럼 저랑 같이 가요!”
“도윤이는? 먹을래?”
“네, 네.”
“그쪽은요.”
“사주는 거?”
“먹을 거냐고요.”
“사주는 거면 감사히 먹죠.”
“왜 일어나요?”
“한 대 하게요.”
졸지에 홀로 남겨지게 된 도윤이 안절부절못했다. 연우도 도윤을 혼자 남겨두고 가기엔 조금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학교에 20살은 널리고 널렸으나 유독 도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다. 살면서 저렇게 순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던 탓이 컸다. 동호는 이미 가게 밖으로 나간 후였다.
“혼자 있을 수 있어?”
“네에.”
“금방 올게.”
“다녀오세요.”
“우리 갔다 올게!”
“으응, 갔다 와.”
다른 테이블처럼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던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윤은 흐르는 시간을 보다가 고기를 집어먹었다. 계속 달달한 탄산만 마셨더니 물이 당겼다. 테이블에 있던 것을 계속해서 치우고 정리하느라 섞인 물건이 여럿이었다. 도윤은 나란히 붙어있는 동호의 컵과 자신의 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뭇머뭇. 컵을 고르는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모르겠다. 도윤이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컵을 기울였고 순간 느껴지는 술 냄새와 혀가 썩는 것 같은 맛에 얼굴을 구겼다. 운이 좋지 않았다. 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도윤이 차라리 화장실에 가서 뱉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머금고 있는데도 속이 안 좋았다. 화장실을 찾는 눈이 바빴다. 성큼성큼 걸어 화장실 앞까지 도착한 도윤은 갑작스레 열리는 문에 놀라 저도 모르게 입에 있던 것을 삼켜버렸다. 목이 타들어갔다. 헛구역질이 났다. 독한 소주의 맛에 눈물도 나올 것 같았다. 도윤이 우는소리를 내며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며 서있기만 하자 문을 연 사람이 인사를 해왔다. 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든 도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여기서 다 만나네.”
“후으, 아, 안녕하세요….”
“안녕 못하겠다면?”
“네?”
“화장실 가려고 온 거지? 들어가.”
“이, 이제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그냥….”
“화장실에 왔으면 가야지. 뭐해, 안 들어가고.”
이미 삼켜버려서 괜찮은데…. 도윤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젓다가 힘에 이끌려 화장실로 들어섰다. 화장실엔 칸이 하나였다. 세면대를 등지고 선 도윤이 호준의 신발을 내려다봤다.
“야.”
“…….”
“오늘은 옆에 매일 붙어 다니던 놈 어디 갔어?”
“…….”
“볼 때마다 붙어 다니더니….”
누굴 말하는 거지? 희성이를 말하는 건가? 도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호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뒷걸음질을 치던 몸이 세면대에 길이 막혔다. 호준이 고개를 숙여 도윤의 얼굴을 확인했다. 물인 줄 알고 마셨던 소주에 속이 뜨거웠다. 심장이 뛰고 목에 열이 오르는 느낌에 도윤의 눈이 갈 곳을 잃고 떠돌았다.
“야. 고개 들어.”
“저, 저 나갈래요.”
“새끼야, 얼굴 들라고.”
“저한테 왜, 왜 이러시는….”
호준이 강제로 턱을 잡아 올렸다. 도윤이 술기운이 오르는 것보다 당장 눈앞의 호준이 더 무서워 말을 더듬었다. 호준이 얼굴을 비틀어 도윤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내가 너 잡아먹냐?”
“놔주세요, 저 가, 가야…!”
“내가 너 잡아먹냐고.”
“윽….”
잡힌 볼이 아팠다. 양옆에서 누르는 힘에 입술이 벌어졌고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윤의 눈이 젖어들었다. 무서워, 무서워….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기세인 눈을 보던 호준이 몸을 숙여 도윤의 목에 코를 가져다 댔다. 느낌이 더러웠다. 똑같은 짓을 희성이 했을 때는 기분이 이 정도로 더럽지는 않았다. 호준이 아쉽다는 듯 목에 코를 박은 상태로 말을 이었다.
“고기 냄새 때문에 오늘은 별 냄새도 안 나네. 파스는 왜 붙였어? 혹시 이거 떼면 뭐 있나?”
“비, 비켜…!”
“너 매일 붙어 다니는 놈이랑 무슨 사이야?”
“무슨….”
“남자 새끼들이 손잡고 다니는 것도 이상한데, 걔가 유독 너한테만….”
학교 안에서는 손을 잡고 다닌 적이 없었다. 있었어도 강의실 구석에 앉아서나 사람이 드문 주차장이 고작이었다. 도윤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뭐, 게이 그런 거?”
“…….”
“맞나 보네….”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양 입꼬리를 올린 호준이 숨을 들이쉬다가 도윤의 살을 핥아보았다. 소름이 돋았다. 도윤이 급하게 호준을 밀쳐내려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 눈물이 톡, 볼을 타고 떨어졌다.
“하,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그럼 너 걔랑 그것도 해봤냐?”
“하지, 마세요…흐으….”
“누가 깔려? 너야?”
“그, 런 거, 아니, 끅, 아니….”
“남자랑 하면 어때? 좋냐?”
우는 도윤을 보며 비웃던 호준이 손을 내려 망설임도 없이 아래를 쥐어왔다. 도윤이 숨을 삼키며 호준을 밀어냈다.
“너 진짜로 남자한테 서?”
“하으, 하지, 마…!”
“난 서더라고. 근데 그게 너 때문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보고 싶은데.”
“하지…마!”
도윤이 있는 힘껏 호준을 밀어냈다. 퍽. 호준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도윤이 손을 덜덜 떨며 현장을 벗어났다. 집에 가야 했다. 애초에 오늘은 집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희성의 말을 무시하고 나왔다가 남들에게 말도 못 하는 일을 당할 뻔했다. 도윤은 눈물을 닦으며 자리로 돌아와 지갑부터 챙겼다. 아이스크림을 사 온 연우와 유정,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동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도윤을 올려다봤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죄송, 죄송해요, 저 집에…집에 가야….”
“도윤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니, 잠깐만 도윤아!”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중얼중얼 사과만 뱉은 도윤이 도망치듯 가게를 벗어났다. 호준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리가 떨렸다. 중간에 힘이 풀려 길에 주저앉은 도윤이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나 택시를 잡았다. 주소를 부르고 도로를 달리는 내내 손과 다리가 불안함에 덜덜 떨렸다. 택시 기사는 차에 올라 내리는 순간까지 떨면서 우는 도윤을 힐끔거렸지만 말은 걸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속이 좋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만 있었다. 20층에 도착해서도 내리지 못한 도윤은 몇 분을 더 엘리베이터에 앉아 있다가 비틀비틀 문 앞에 섰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이가 서로 부딪쳐 아예 입술을 깨물어 봤으나 이젠 입술이 엉망이 됐다. 손이 떨려 비밀번호도 세 번이나 틀렸다. 도윤은 차오르는 눈물을 소매에 닦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도윤은 현관에 못이 박힌 것 마냥 굳어버렸다. 현관에는 점심때 희성이 신고 나갔던 신발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복도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신발장에 올려두었던 핸드폰도 사라져있었다. 숨도 못 쉬고 떨던 도윤의 앞으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푹 숙여진 고개가 천천히 위를 향했다. 희성이 점심에 입고 나갔던 정장 차림 그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호준과 있었을 때보다 더한 떨림이 찾아왔다.
“넌 잠을 밖에서 자고 오나 봐.”
“…….”
“하도윤.”
“…….”
“넌 내 말이 좆같지?”
“…….”
머릿속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도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아주 작정했던데.”
“…….”
“너 생각해서 일찍 들어왔더니, 핸드폰은 현관에 있고. 잔다던 놈 대신 침대에 있는 건 베개랑 이불이 다더라고.”
“…….”
“너 뭐 하는 새끼야?”
“…….”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눈물 방울들이 현관에 떨어졌다. 다가온 희성의 발이 도윤의 신발 앞에 섰다.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문 도윤이 눈을 감았다. 희성이 숙여진 얼굴을 들기 위해 턱을 쥐었다. 온몸이 땀과 눈물범벅이었다. 눈을 꾹 감고 있는 얼굴을 살피던 희성이 손을 들었고 곧 도윤의 뺨이 돌아갔다. 뺨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도윤이 놀라 입을 벌렸다.
희성에게 맞았다. 희성에게 뺨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희성이 때리는 강도는 장난으로 톡, 치는 것이 다였다. 도윤이 뜨거워진 볼을 쥐고 희성을 쳐다봤다. 매달린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외출 허락해 주고 풀어주니까 이젠 네가 나가고 싶을 때 네 맘대로 기어나가도 된다고 생각했어?”
“흐으….”
“술도 마셨나 보네.”
“왜, 왜…왜 때리, 윽….”
아직 따가운 볼을 쥐고 이리저리 살펴본 희성이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목에도 몸에도 새로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국을 가린다고 붙여둔 파스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집에 왔을 때 불이 다 꺼져있어서 난 그냥 네가 정말로 자고 있나 보다 했지.”
“이거 놔!”
“근데 침대에 웬 장난을 쳐놨더라고.”
“아!”
“집을 뒤져도 네가 없어서 카메라도 돌려봤어.”
“머리, 아, 아!”
“근데 네가 신나서 집을 나가잖아.”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강제로 끌려가면서 머리가 아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이제 알겠어?”
“놔줘, 제발…끅, 제발….”
“하긴. 알면 그따위로 굴진 않았겠지.”
“잘, 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 거짓말한 거? 니 멋대로 집 쳐나간 거? 아니면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고 기어들어온 거? 도윤아, 이것 봐. 네가 잘못한 것밖에 없잖아.”
“윽, 잘…못했으니까….”
침대에 던져진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도윤은 머리가 핑 돌았다. 흐윽. 눕혀지자마자 목이 뜯겼다. 몸부림을 치던 도윤의 뺨이 또 한차례 돌아갔다. 하…. 아까 맞았던 뺨을 또 맞았다. 도윤이 눈물을 터뜨리곤 서럽게 울었다.
“좆같이 굴지 마. 진짜 죽여 버리고 싶은 거 참는 중이니까.”
“우윽, 흑….”
“눈 똑바로 떠.”
“끅, 흐으…윽….”
맞은 뺨이 너무 아팠다. 꼭 불로 지진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차오른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 히끅히끅 울던 도윤이 숨이 차 헐떡였다.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티셔츠를 벗기려는 손에 아까 호준의 손길이 떠올랐다. 숨이 턱턱 막혔다. 끅끅 숨넘어가게 울던 도윤이 급기야 토기가 일어 욱, 욱 소리를 냈다.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희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고 도윤이 고개를 틀어 속을 게워냈다. 콜록거리며 숨을 겨우 토해낸 도윤이 흐느꼈다. 씨발…. 낮게 욕을 중얼거린 희성이 도윤을 안아들었다. 내려달라고 반항할 힘도 없었다. 희성은 도윤을 욕실에 앉혀두고 세수와 양치를 직접 해주었다.
“저리 가…. 너, 너 보기 싫어….”
“물 가지고 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끅, 저리 가….”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일어난 도윤이 휘청거리다 다시 앉았다. 그 사이 컵을 든 희성이 욕실로 들어섰다. 벽에 기대 멍하던 눈이 희성을 노려봤다.
“저리 가!”
“네가 마실래, 내가 먹여줄까.”
“필요 없다고 했잖아!”
도윤이 소리치며 입술 앞까지 다가온 컵을 쳐냈다. 컵이 바닥과 부딪치면서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리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희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내 몸에 손대지 마.”
“네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
“도윤아, 모르겠어? 지금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잘못된 거야.”
“대체 내가 뭘 그렇게…잘못했다고, 그러는 건데…?”
“발에 상처 나니까 움직이지 마.”
“…상처? 지금 네가 나 때려놓고 내가 유리 밟아서 상처 나는 게 걱정이야?”
“가만히 있어.”
“너, 넌…미쳤어. 알아?”
“더 미치는 꼴 보고 싶은 거 아니면 닥쳐.”
“넌, 왜…대체 왜….”
“하도윤, 닥치라고.”
몸속 어딘가가 따끔따끔했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또 차오르기 시작했다. 희성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벽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도윤이 입술이 터져라 깨물다가 일어나 유리조각들이 가득한 곳에 발을 내렸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읏…가, 가까이 오지 마!”
“그대로 가만히 있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 했잖아!”
날카로운 유리가 발바닥에 박혀 피가 샜다.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에 도윤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눈에서부터 흐른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발바닥에서 흐른 피가 모여 웅덩이를 만들었다. 아…! 벽을 짚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슬리퍼를 신은 희성이 손을 뻗었다. 후으, 흐…. 눈앞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길 여러 차례 반복됐다. 도윤은 선명해진 시야 속으로 들어오는 손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다 더 깊숙이 박히는 유리조각에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렸다.
“도윤아, 움직이지 마.”
“저, 저리…윽, 가…!”
“그대로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오지 마! 내 몸에, 소, 손…흑….”
“알았어, 알겠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무서웠다. 더운 숨이 터져 나온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발아래로 흐른 피가 욕실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피를 본 적이 없었다. 현기증이 나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희성은 조심스럽게 도윤에게 손을 뻗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위로 희성의 손이 닿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건지 깜짝 놀랐다. 도윤이 손을 뿌리치며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바닥부터 떨어졌더니 이제는 손에서도 피가 샜다. 도윤이 벌벌 떨며 피범벅이 된 손과 발을 쳐다봤다. 피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급하게 슬리퍼로 유리조각을 치우며 다가오던 희성이 커다랗게 깨진 유리조각을 들고 있는 도윤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하도윤, 그거 내려놔.”
“제, 제발 저리 가….”
“도윤아, 그걸로 뭐 하려고. 그거 나한테 줘.”
“너 보기 싫으니까, 제발 내 앞에서….”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거 아니니까 얼른. 도윤아, 나한테 줘.”
유리조각을 쥐고 떨기만 하는 도윤을 살피던 희성이 손을 뻗었다. 자신을 때리고 만지던 손이었다. 도윤이 악을 썼다.
“오지 마! 오, 오면 나 진짜 그을, 그을 거야!”
“도윤아, 하도윤. 나 봐.”
“싫어! 저리 가!”
“도윤아, 손 다쳤잖아. 그거 내려놔.”
희성이 최대한 침착하게 눈을 맞췄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현재 도윤이 겁에 질려있는 상태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유리를 조금이라도 치우려고 발을 움직이자 도윤은 자신에게 오려는 줄 알고 소리쳤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희성에게 울컥한 도윤이 머뭇거리지도 않고 손목에 상처를 냈다. 유리조각을 쥔 오른쪽 손바닥엔 길고 깊은 상처가 났고, 유리조각으로 그어버린 왼쪽 손목으로는 선이 생겨나고 피가 새어 나왔다. 유리를 밟은 발은 이제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쥐고 있던 유리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윤은 일자로 벌어지기 시작하는 손목에서 따끔함을 배로 넘어선 고통이 느껴져 눈꺼풀을 떨었다.
“하도윤!”
도윤이 손목을 그었다. 그 누구의 앞에서도 아닌, 희성이 보는 앞에서 자살시도를 했다. 발바닥과는 또 다른 상처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옷과 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도윤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희성은 손을 떨며 도윤의 손목에 수건을 감았다. 손목을 그은 것은 도윤이었지만 몸 안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은 쪽은 희성이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자 주위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던 유리조각들이 박혀들었지만 아픔은 느끼지 못했다. 도윤의 아래에 고여 있던 피가 희성의 옷에 스며들면서 희성 또한 피투성이가 되었다.
***
도윤의 자살시도는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밤중에 연락을 받은 도윤의 아버지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왔고 희준 또한 정장 차림 그대로 달려왔었다. 1인실로 옮겨 곤히 잠든 도윤의 옆을 지키며 잠도 한숨 자지 못한 희성은 이틀간 식사도 건너뛰었다. 다행히 깊게 파고들지 않아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다지만 몸에 상처가 다분했다.
도윤의 몸과 손목을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도윤의 아버지와 희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을 뻔한 남자는 정신이 없었다. 당연히 일도 하지 못했고 자리를 비우지도 않았다. 평온하게 잠든 도윤을 내려다보던 희준은 마른 세수를 하곤 희성을 데리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혹시나 도윤의 아버지가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비상구로 데려온 희준은 한숨을 삼키곤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
‘지금 네가 입 다문다고 해결될 일 하나도 없어.’
‘신경 꺼.’
‘신경 껐더니 이 사달이 난 거잖아.’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해서 놔뒀더니 도윤이 지금 어디에서 뭐하고 있어?’
‘씨발,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난 할 만큼 했어. 하도윤이 먼저 나랑 한 약속 어기고….’
‘그걸 말이라고 해? 약속을 어겼다고 애가 죽겠다고 덤벼들었겠어?’
‘하도윤이…하도윤은….’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희성은 제 앞의 희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벽을 보며 중얼중얼했다. 희준이 이마를 문질렀다.
‘도윤이 퇴원하면 아버지랑 살게 놔둬.’
‘뭐?’
‘그렇게 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하도윤은 나랑 살아야 돼.’
‘너랑 살다가 죽겠다고 손목 그은 애야. 김희성, 제발 그만 좀 해.’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른 희성이 한숨을 쉬었다. 희준과 나눴던 대화는 쓰레기 같았다. 도윤을 놓아줄 거였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이제 자신은 도윤이 없으면 안 된다. 도윤의 피가 잔뜩 묻었었던 손을 내려다보던 희성이 그 위로 얼굴을 내렸다. 눈만 감으면 자꾸 도윤이 손목을 긋고 쓰러지는 장면이 펼쳐졌다. 손이 떨렸다. 희성이 욕을 씹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가 침대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틀간 잠만 자던 도윤이 끙끙거리며 눈을 떴다. 보호자들을 위해 만들어둔 간이침대에 앉아있던 도윤의 아버지도 벌떡 일어나 도윤을 불러댔다.
“도윤아!”
“…아빠…?”
“도윤아, 도윤아.”
“아….”
자신을 끌어안은 아버지를 힐끔거리다 손목을 들어 확인한 도윤이 천장을 쳐다봤다. 꿈이…아니었구나…. 팔이 다시 침대에 놓아졌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도윤은 다행이라고,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고 흐느끼는 아버지에게 안겨 눈만 깜빡였다. 아버지의 울음소리 속에 느릿한 발걸음이 있음을 눈치챈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희성이 침대에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멈춰 서있었다. 희성을 보자 숨이 조금 가빠졌다.
“아빠….”
“응, 아들. 왜? 어디 아파? 아빠가 너무 세게….”
“쟤…나가라고, 여기서 나가라고…해주세요….”
“…희성이?”
“부르, 지 마세요. 빨리, 나가라고…. 제발….”
도윤이 헐떡였다. 희성은 오도카니 서서 도윤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토할, 흐으…것, 같으니까, 제발 빨리….”
고개를 틀어 눈까지 감아버리는 행동에 희성이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벽에 기댄 희성이 떨리는 손을 감췄다. 씨발, 대체…. 병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먹임에 얼굴이 구겨졌다.
도윤은 입원해있는 동안 계속 희성을 거부했다. 희성이 병실에 들어오면 등을 돌리고 누워 눈까지 감고 있었다. 발도 다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희성이 올 시간이면 항상 휠체어를 이용해 도망 다니기도 했다. 도윤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희성은 화도 났지만 나중에는 허탈함을 느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도윤은 얼굴을 구기다 곧 숨을 할딱였다. 도윤의 아버지도 희성에게 이제 병원에 오지 말아달라며 당부했다. 모든 것이 좆같았다. 정말 말 그대로 좆같음의 연속이었다.
***
도윤은 자신에게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답했다. 병원에 찾아오지 말라고 일렀음에도 희성은 매일매일 병원을 찾았다. 도윤이 자고 있으면 겨우 얼굴 한번 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모습만 잔뜩 볼 수 있었다. 병실 앞에 또 사람을 세워두면 그땐 정말로 뛰어내릴 거라고 악을 쓴 덕분에 도윤의 병실 앞은 깨끗했다.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헤어진 도윤은 혼자 침대에 앉아있다 옆에 놓아둔 목발을 꺼내들었다. 휠체어로 이동하면 편하겠지만 이제 조금씩 걸어도 뛰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었다. 요즘은 화장실도 목발만 짚고 다녀오기도 했다. 목발을 짚고 침대에서 내려와 땅을 밟자마자 발바닥이 잠깐 욱신거리긴 했지만 참을만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쓸고 병실을 빠져나온 도윤이 향한 곳은 병원 1층이었다. 원래 병실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희성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을 마친 몸이 곧바로 ATM 기기의 앞으로 나아갔다. 카드를 넣고 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천천히 세어보았다. 도윤은 그 돈을 모두 현금으로 인출했다. 누가 볼 새라 구석에 꽂혀있는 봉투에 현금을 쑤셔 넣었다. 이제 돈은 해결됐다. 도윤이 옷 안에 봉투를 숨기고 다시 목발을 짚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거 잠깐 돌아다녔다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붕대가 감긴 손으로 땀을 대충 닦아낸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얼굴이 도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최대한 침착하게 눈을 내리깐 도윤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희준은 가운데에 서있었고 도윤은 구석에 처박혔다. 잘못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윤을 훔쳐보던 희준이 입을 뗐다.
“발도 아프면서 왜 나왔어.”
“…….”
“형이랑도 말하기 싫어?”
“…….”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에 비친 도윤만 보고 말을 이어가던 희준이 입을 닫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엘리베이터는 도윤이 입원해있는 층에 멈춰 섰다. 희준은 먼저 내려 버튼을 누른 채로 도윤을 기다렸다. 머뭇머뭇 목발을 짚고 내린 도윤이 눈치를 봤다.
“잡아줄게. 싫으면 말해.”
“…….”
“대답 없으면 괜찮다는 걸로 알아들을게.”
도윤의 팔을 잡아다 목발을 가져간 희준이 중심을 잡아주었다. 도윤이 절뚝거리며 희준에게 기대 병실에 도착했다. 희준의 도움으로 겨우 침대에 앉은 도윤이 옷 속에 들어있는 봉투를 숨기려 이불을 끌어당겼다. 텅 빈 병실을 둘러보던 희준이 물었다.
“아버지는?”
“…제가 오늘은 집에 가도 된다고 해서….”
“그래?”
“네….”
간이침대에 앉아 꼬물거리는 도윤을 한참이나 바라본 희준이 작게 한숨을 터뜨리며 그랬다.
“그거 들고 어디 가려고.”
“네? 뭐, 뭐가요?”
“지금 가진 돈 얼마나 돼?”
“…….”
“어디로 갈 건데? 가서 당장 지낼 곳은?”
“…….”
“가더라도 가서 너 혼자 뭐 어떻게 지낼 건데?”
“…….”
“도윤아. 지금 네 마음이 어떨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
“당장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나중에 고생하는 건 결국 너 자신이야.”
맞는 말이었다. 도윤이 이불을 쥐고 못살게 굴었다.
“…….”
“…….”
“모르겠다. 형이 도와줄게.”
“…네? …왜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 책임이 아예 없지는 않지.”
“…혀, 형은 잘못, 한 거, 없, 없는데….”
“방관도 죄가 되곤 해.”
도윤의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자 몸이 움찔 떨렸다. 희준은 말없이 손을 거두고 도윤을 쳐다봤다.
“아버지는? 아시고?”
도리도리. 양옆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아버지한테도 비밀로 하고 가려고 했어?”
“…아빠가, 희성이한테 말하면….”
“도윤아. 네 아버지잖아.”
“그치만….”
이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목이 살짝 아려왔다. 도윤이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어물어물 말했다.
“진, 진짜로 희성이한테…비밀로 해주실 거예요…?”
“나 도윤이한테 신뢰감이 완전히 바닥이네.”
“희성이…좋아하시잖아요….”
“형은 도윤이도 좋아하는데.”
“…….”
작게나마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눈을 굴리던 도윤이 붕대에 가려진 손목을 내려다봤다. 희준을 믿어도 되는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일단 형은 내일 다시 올게. 좀 쉬어.”
“…….”
방금 전 자신의 손을 피했던 도윤을 떠올리곤 이불만 살짝 흔들었다가 놓아준 희준이 일어났다. 희준이 지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던 도윤이 품속에서 돈 봉투를 꺼내 침대 옆 서랍에 넣어두었다. 갑자기 손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이제는 없앨 수도 없는 상처였다. 도윤이 침대에 누워 손목을 움켜쥐었다. 사고가 일어났었던 때의 기억이 잘나지 않았다. 뜨문뜨문 자리 잡은 기억 속에서 자신은 겁에 질려있었다. 유리가 박힌 발바닥은 아팠고, 유리조각을 쥔 손도 따가웠다. 처음엔 정말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낼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희성을 보니 맞았던 기억과 함께 두려움이 울컥 솟아났다. 정신을 잃기 전 희성의 표정은 놀란 것도 같았고 화가 난 것도 같았다. 누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마냥 머리가 아파와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손을 가슴팍에 가져다 댄 도윤이 눈을 감았다.
희성이 매일 병실을 찾아온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에만 서있는 희성을 지나치는 의료진들은 오늘도 왔네. 하는 생각을 했고 도윤의 아버지는 불편함을 띤 얼굴로 문을 힐끔거렸다. 침대를 올리고 앉아 TV만 보던 도윤이 서성거리는 실루엣에 손목을 문지르다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잠깐만…희성이 좀 불러주세요.”
“…괜찮겠어?”
“네.”
“그러면 아빠는 앞에 있을게.”
“아니에요, 잠시 쉬다가 오세요.”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이거 눌러서 선생님 불러, 알았지? 아빠도 금방 올게.”
“네.”
도윤이 손을 흔들었다. 병실을 나가며 희성에게 말을 붙이는 아버지를 보던 도윤이 아리는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덮었다. 다시 열리는 문으로는 희성이 나타났다. 호흡이 잠깐 불안정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손목을 덮은 손에 힘이 실렸다. 희성의 시선도 붕대가 감겨있는 손목에 닿아있었다. 굳게 닫혀 열릴 것 같지 않던 입술이 조금씩 벌어져 목소리를 냈다.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
“뭘 그만하는데?”
“너랑, 엮인 것들 전부.”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누가 정하는데?”
희성의 시선에 손목이 따끔거렸다. 도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발 그만해….”
“난 그만둘 생각 없어.”
“…대체 넌, 뭐가 문제야? 나, 난…네가 그러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랑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살았어. 몇 년째…몇 년째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있잖아!”
“네가 언제 그랬어? 하도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번에도 네 멋대로 행동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는 생각 안 해?”
도윤의 숨이 가빠졌다.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야? 도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난 너 때문에 밖에도 못 나가고 CCTV가 지켜보는 집안에서만 살았어! 난…난 이제 친구도 없이 살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돼?”
“애초에 네가 얌전히 굴었으면 집에 카메라를 달지도 않았어.”
희성은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항상. 늘. 언제나. 겨우 나온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너랑 있으면 숨이 막혀. 널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지금까지 쭉 그랬어. 나도 숨 좀 쉬면서 살고 싶어,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날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해? 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건…이건….”
“넌 그게 문제야. 넌 항상 네 생각만 하지, 네가 없을 때의 내가 어떨지는 생각 안 해봤어?”
“…난 네가…네가 죽든…말든…상관없어. 나한테 넌 그 정도 가치도…없으니까….”
줄곧 같은 얼굴로 도윤의 말을 듣던 희성도 마지막 말에는 손을 움찔거렸다. 말하는 내내 손목이 너무 아파와 신음이 절로 나왔지만 겨우 꾹 참았다. 도윤이 숨을 고르다 말했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
“왜, 왜 깨어났지? 왜 아직도 살아있지? 대체 왜, 왜 나는….”
“…….”
“겨우 지옥에서 벗어나는 줄 알았는데, 왜 살아있지?”
“…….”
“네 얼굴을, 흐으…보고 있는 지금도 난, 너무…흐….”
희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있기만 했다. 할딱이며 눈물을 떨어뜨린 도윤이 몸을 웅크렸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희성이 걸음을 뗐다. 도윤은 어깨에 닿는 손에 몸을 떨며 경기를 일으켰다. 희성이 급하게 침대 위에 있는 버튼을 연타했다. 잠시 후 병실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희성은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가 비상구에 들어와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쌌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속에서 휘몰아쳤다. 떨리는 숨과 같이 얼굴을 감싼 손도 덜덜 떨렸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희성은 아주 오래도록 비상구에서 시간을 보내다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생각이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도윤이 했던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에 화도 났다가 차갑게 가라앉길 반복했다. 욕실엔 이제 그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깔끔해진 욕실을 지나쳐 침실에 도착한 희성이 눕자마자 도윤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도윤이 쓰던 물건에선 당연하지만 도윤의 냄새가 가득 묻어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이걸론 턱없이 부족했다. 이불까지 끌어와 얼굴을 덮은 희성이 입술을 씹었다.
희준은 희성이 병원을 나가고 몇 시간 후에 병실을 들렀다. 도윤의 아버지에게 도윤의 상태를 물었을 때 경기를 일으켰다고 해서 꽤 걱정을 했는데 잠든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남들이 보기엔 죽이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할법한 쇼핑백을 침대 아래에 둔 희준이 간이침대에 앉았다. 도윤의 걱정에 저녁도 건너뛰었을 남자에게 근처에서 식사라도 얼른 하고 오라고 보냈으니 적어도 20분간은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마른 세수를 하고 있자 곤히 잠들었던 도윤이 작게 앓으며 깨어났다. 희준이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도윤이 힘없는 눈을 깜빡이며 희준을 올려다봤다. 희준이 쇼핑백을 들어 보여주며 속삭였다.
“안에 옷이랑 신발 있어.”
“…….”
“적당한 곳에 넣어둘 테니까, 나중에. 나중에 괜찮아지면 그때.”
“…….”
“발도 다 낫고 괜찮아졌을 때 꺼내는 거야.”
“…….”
“그 외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대신 형이랑 약속 하나만 하자. 지금은 절대 안 돼.”
“…….”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희준은 사람들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쇼핑백을 안으로 쭉 밀어두었다. 가만히 누워 희준이 하는 양을 보고만 있던 도윤이 눈가를 닦아냈다. 마음이 복잡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의 로고가 새겨진 소매가 얼굴을 덮었다. 희준이 그 옆에 앉아 가슴팍을 토닥여주었다.
“끅, 흐으으….”
“괜찮아, 도윤아. 괜찮아.”
“…무서, 무서워….”
도윤이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연신 무섭다 중얼거렸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괜찮다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풀에 지쳐 잠든 숨소리에 벅찬 호흡이 섞여있었다. 도윤을 도와주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희준은 도윤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가슴팍을 토닥여주며 잠든 아이를 달래주었다.
도윤은 희준과 약속을 했다. 도망을 쳐도 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가기로. 하지만 도윤은 또다시 새벽이 찾아왔을 때 잠든 아버지의 뒤에서 아주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가족사진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도윤이 그 위로 입술을 찍었다. 미리 준비한 편지도 핸드폰과 함께 곱게 접어둔 병원복 위에 올려두었다. 희준이 준비해 준 신발은 도윤의 발에 꼭 맞았다. 목발도 없이 걷자 발바닥이 따끔거렸지만 이를 꽉 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희준이 준 쇼핑백을 든 도윤이 모자를 눌러쓰고 최대한 조용히 숨죽여 병실을 빠져나왔다.
비상구를 통해 병원을 빠져나온 도윤은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주세요.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터미널로 가달라는 요구에 앉아서 쉬던 기사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차는 빠르게 병원을 벗어났다. 상처가 터졌는지 발바닥이 아팠다. 도윤이 미간을 좁히곤 쇼핑백을 들여다봤다. 이제 확인해 보니 쇼핑백에는 자신이 챙긴 돈 봉투 외에 편지봉투가 하나 더 있었다. 도윤이 어둠 속에서 봉투를 뜯었다.
봉투에는 편지 한 장과 카드가 들어있었다. 도윤이 모자를 살짝 위로 올려 메모를 읽었다.
[돈 부족할 때 써. 형 카드라 희성이한텐 아무런 연락도 안 갈 거야. 만약 갈 곳이 없으면 아래에 적어둔 주소로 가. 형 집인데 쓰는 집은 아니라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형은 너 도와주고 싶다는 말 진심이었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형한테 연락해. 이번 뒤처리도 형이 알아서 해볼 테니까 남들 걱정하지 말고 너부터 챙겨. 어딜 가든 건강하고, 잘 챙겨 먹고.]
편지의 맨 끝에는 주소와 비밀번호가 있었다. 편지지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겨우 닦아내고 다시 쇼핑백에 넣어둔 도윤이 손톱으로 살을 눌러 눈물을 참았다. 새벽이라 길은 막힘없이 뚫렸다. 택시는 생각보다 빠르게 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