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날이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햄스터를 위한 대리석을 찾아보는 손가락이 바빴다. 신기하게도 날씨가 더워지면 콩이는 쳇바퀴나 자신의 집안에서 호떡처럼 퍼져 있곤 했다. 찾아보니 대리석이 시원하니 좋다는 말이 있기에 검색을 좀 해봤다. 파는 곳도 많고 종류도 많았다. 도윤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햄스터 키우시는 분들 여름에 대리석 애들이 잘 쓰나요?] 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홀린 듯이 글을 클릭한 도윤은 댓글부터 확인했다. [저희 애들은 잘 안 쓰더라고요.] [대리석보다 그냥 에어컨 틀어주시는 게 빨라요.] [몇 번 올라가더니 이젠 쳐다보지도 않아요.] 음. 도윤이 대리석을 찾아보던 창을 꺼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케이지 안을 살펴보니 방금까지도 쳇바퀴를 굴리던 콩이가 뽀르르 달려와 사료를 먹고 뽀르르 달려 구석에 놓아준 나무 사다리를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있었다. 요즘 콩이를 보면 늘 걱정이었다. 길에서 데리고 온 아이라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라 생일도 챙겨줄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함께 지낸지도 벌써 2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같이 살자. 도윤의 중얼거림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놀던 콩이가 그루밍을 시작했다. 동시에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이 화면을 밝혔다. 당연히 과제 때문에 조원들의 연락인 줄 알고 핸드폰을 든 도윤이 주변을 살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심지어 저장되지 않은 사용자라 경고 문구까지 떠있었다. 아무리 삭제를 해도 끈질기게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도윤은 혹시 몰라 문을 보고 서서 메시지를 읽었다.
준
[도윤아 뭐하냐]
[또 씹으면 전화함ㅋ] 오후 6:07
요즘 도윤은 유호준이라는 남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기에 무시했고, 문자로도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주지를 않아 무시했었다. 그랬더니 이젠 메신저로 찾아와 틈만 나면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했다. 자신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땐 조별 과제로 인해 알게 된 동호에게서 번호를 받았다고 했다. 오지랖은 더럽게 넓어서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여나 희성에게 들킬까 봐 대화가 끝나면 바로바로 방을 나가고는 했지만 언제 메시지가 올지 몰라 온 신경이 핸드폰에 가있었다.
도윤
[죄송해요 밖이라서 답장 못 드릴 것 같아요..] 오후 6:10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고 대화는 물론 그 주변에도 가기 싫은 사람이 있다. 호준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호준은 눈치도 없었다.
준
[ㅋㅋ구라] 오후 6:10
이 사람은 도윤의 답장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지 답장을 보내면 되돌아오는 속도가 빛과도 같았다.
도윤
[죄송해요] 오후 6:12
답장을 하기가 싫어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시간차에도 호준은 굴하지 않았다.
준
[ㅇㄷ?] 오후 6:12
답장을 보내기 전 문을 기웃거리며 거실에 희성이 없는 것을 확인한 도윤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도윤
[왜요??] 오후 6:13
준
[근처면 만나서 밥이나 먹게ㅋ] 오후 6:13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도윤이 또 죄송해요. 만 적어놓은 답장을 보내고 채팅 방을 삭제했다. 하지만 채팅 방에서 나가자마자 또 메시지가 떴다.
준
[ㅅㅂ또 쳐나가네]
[ㅋㅋ] 오후 6:14
호준에게서 도착한 욕설에 도윤이 머뭇거리다 다시 방을 나가버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거실로 나온 도윤은 씻고 나왔는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물을 마시는 희성을 힐끔거렸다. 저녁식사가 준비되는 중이라 거실에도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소파에 앉아 희성이 움직이는 걸 따라 고개를 움직였더니 희성이 웃으며 다가왔다. 쪽. 간지러운 소리를 내고 떨어진 입술과 달리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소파에 앉은 희성이 옆으로 손을 뻗어 도윤의 몸을 끌어당겼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도윤의 어깨에 닿자 옷이 젖어들었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허리를 지분거리는 손을 떼어다가 아래로 내렸다. 자석이라도 붙어있는 것 마냥 허리로 돌아온 손이 다시 살을 만져댔다.
“도윤아.”
“으응.”
“오늘 술 마실까?”
“싫어. 또 이상한 거 하려고….”
칼 같은 거절에 희성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적당히 따뜻한 손이 목덜미를 쥐고 입술은 이마로 향했다. 희성은 동글동글 예쁜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눈꺼풀에도 입을 맞춰보았다. 감긴 눈도 예뻤다. 희성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다가 그 위를 머금어 혀로 핥았다. 희성이 멀어지자 도윤이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눈을 떴다. 한쪽 속눈썹만 젖어있는 게 예뻤다. 희성이 속눈썹을 닦아내는 손등을 잡아다가 검지를 앙 물었다.
“이런 거 하지 마, 이상해….”
오늘도 혼자 떠드는 도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검지를 깊게 머금은 희성이 혀로 쪽쪽 빨았다. 처음엔 검지만 빨던 희성이 움찔거리는 손을 펴 손바닥을 핥았다. 손을 뒤로 빼려고 힘을 줘도 희성은 그보다 더 힘을 주며 버텼다.
“하, 지 마아….”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고 사라지는 혀에 도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희성은 마지막으로 손바닥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곤 손을 놔주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에 도윤이 울상으로 희성의 어깨에 있던 수건을 뺏어왔다. 씻고 싶었다. 도윤이 벌떡 일어나자 소파에 기댄 희성이 웃음이 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
“손 씻을 거야!”
“왜 씻어.”
“더, 더럽잖아!”
“깔끔 떨긴.”
씩씩거리며 욕실을 찾아 떠나는 뒷모습을 보던 희성이 소파에 덩그러니 남겨진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잠금을 풀고 메신저에 들어가자 조별 과제를 위해 만들어진 방에 들어간 희성이 무미건조하게 채팅 방을 훑었다. 대부분 과제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가끔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도윤은 답을 하지 않았다. 나름 만족스러운 태도에 이번엔 앨범에 들어가 보았다. 앨범에 있는 사진이라곤 전부 햄스터를 찍어둔 것밖에 없었다. 대체 이딴 걸 왜 찍는 거야. 사진을 내리는 손가락에 속도가 붙었다. 내리고 또 내려도 햄스터와 음식 사진밖에 없었다. 자기 사진이나 찍을 것이지 쓸데없는 것만 잔뜩 찍어 놨다.
“뭐해!”
“보면 몰라?”
“줘!”
“왜?”
“내 거잖아!”
“이 집에서 네 거가 어디 있어.”
“…줘!”
“꼭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구네.”
“그런…건…아니지만….”
“그럼 짜증 나게 하지 마.”
나오라는 도윤의 사진은 안 나오고 죄다 필요도 없는 사진들이다. 희성이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지곤 일어나 도윤의 몸을 돌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희성을 뒤에 달고 뒤뚱뒤뚱 주방으로 걸어온 도윤이 자리에 앉아 물을 삼켰다. 아무래도 그 후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늘도 무사히 비밀을 지킨 도윤이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웠다.
소파를 두고 굳이 바닥에 자리를 잡은 도윤은 테이블에 올려둔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조사한 자료들을 정리한 파일과 그 옆으로 메신저도 띄워두었다. 도윤과 유정이 보낸 것을 확인했는지 수고했다는 연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도윤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도연우 (21)
[이번 주 토요일에 다들 시간 되세요?]
[만나서 정리해도 좋을 것 같아서] 오후 5:24
이유정 (20)
[저는 돼요!] 오후 5:24
박동호 (21)
[오전엔 힘들고 점심이나 오후엔 됩니다.] 오후 5:24
조원들의 메시지가 차례대로 떠올랐다. 이제 도윤의 차례였다. 도윤은 손톱을 물어뜯다가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도윤
[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오후 5:25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봤다. 도윤은 다음에 올라오는 연우의 메시지를 쳐다봤다.
도연우 (21)
[그럼 3시쯤 만나죠. 카페는 나중에 다시 알려드릴게요.] 오후 5:27
유정과 동호가 알겠다며 답장을 보냈다. 도윤도 따라서 답장을 보내곤 희성이 있을 서재로 향했다. 희성은 종종 서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서재에 머물렀다. 문은 애초부터 없었던지라 도윤은 벽을 짚고 서재를 얼쩡거렸다. 지루한 듯 의자에 기대서 모니터만 보던 희성이 눈알만 굴려 도윤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입구만 얼쩡거리는 몸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왜.”
대놓고 서재를 얼쩡거린 주제에 도윤은 자신을 부르니 화들짝 놀라 입을 벙긋거렸다. 마우스에서 손을 뗀 희성이 의자에 깊게 기대며 도윤을 봤다. 쭈뼛거리며 서재로 들어선 도윤이 책상 앞에 서서도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안타깝게도 희성에게는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뭐 어쩌자고.”
“…어, 있잖아….”
“빨리 말해.”
“그게, 그러니까….”
두 손가락이 만나 서로를 못살게 굴었다. 살을 만졌다가 손톱을 뜯었다가 난리가 났다. 희성은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손을 까딱였다.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혀만 굴리던 도윤이 느릿하게 희성의 앞으로 다가왔다. 손목이 잡히고 시야가 낮아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도윤은 희성의 위에 앉아 입을 뻐끔거렸다.
“너 말 못 해?”
“있잖아….”
“있는 것도 없애버리기 전에 말해.”
다부진 손이 말랑한 허벅지를 쥐었다가 그 위에 새겨진 타투를 문질러댔다. 도윤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목소리를 냈다.
“나 주말에 나, 나가도 돼?”
“그래.”
“…어?”
“그러자고.”
“지, 진짜?”
“어디 가고 싶은데?”
허벅지를 지분거리던 손이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섰다. 도윤은 은근슬쩍 중심에 닿는 손을 모르는 척하며 대답을 듣다가 조금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
“나, 나 혼자 나갔다 와도….”
“어딜.”
조금 나른하게 보였던 눈에 힘이 실렸다. 도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토요일에 다 같이, 모여서 과제…한대.”
“집에서 해.”
“다 모인대. 나만 빠지면 안, 안되잖아. 응?”
“왜 안 되는데.”
“다 같이 하는 과제인데 어떻게 그래….”
손에 잡힌 허벅지에서 고통이 일었다. 그제야 희성의 손등을 떼어낸 도윤이 싸해진 분위기에 앓는 소리도 삼켜냈다. 손등을 잡은 손을 잡아다 시선을 고정시킨 희성이 입술을 뗐다.
“손톱 깎아야겠다.”
“…내가 할게.”
“일어나.”
“으응.”
벌을 받는 학생처럼 손을 모으고 선 도윤을 데리고 거실로 나간 희성이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왔다. 도윤은 소파에 앉아 휴지를 뽑고 희성을 기다렸다. 일단 희성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놔두고 외출을 허락받을 생각이었다. 도윤의 앞에 앉은 희성이 말없이 곧장 손부터 가져갔다.
또각또각. 손톱을 깎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도윤은 순서대로 단정함을 되찾는 손톱을 보다가 앞을 힐끔댔다. 또각또각. 오로지 손톱만 보고 있는 희성의 머리카락엔 흔들림도 없었다. 새끼손톱의 차례가 되자 도윤은 손을 작게 흔들어보았다.
“과제만 하고 올게. 가서 과제 말고는 말도 안 할게. 응? 응?”
“…….”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할게. 나 진짜 과제만 하고 올 수 있어. 진짜야.”
“…….”
애원을 하는 사이 왼손이 끝났다. 희성은 대꾸도 해주지 않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또각또각. 도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간다고 했는데 이제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일단 죄송하다고, 일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풀 죽은 어깨가 한없이 처졌다. 그리고 그때 검지 손톱을 자르던 희성이 드디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디서 만나는데.”
“응? 으응, 카페에서.”
“카페 이름.”
“그거는, 나중에 알려주신대.”
“…….”
“…나 가도 돼?”
희성은 다음 손톱으로 옮겨가며 대답해 주었다.
“카페 어딘지 문자로 보내.”
“응, 응.”
“과제하는 것도 찍어서 보내.”
“응!”
“뭐 먹는지도 찍어서 보내.”
“응, 알았어.”
“내가 연락하면 바로 받아.”
“그럴게!”
“끝나기 전에 전화해. 데리러 갈 거니까.”
“응!”
웬일이지? 내일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려나? 도윤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다 살도 함께 잘린다는 말에 다시 얌전해졌다. 단정해진 손톱 끝을 문지르며 손등에 입을 맞춘 희성이 도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외출을 허락해 준 게 그리도 좋은가. 웃음을 헤실헤실 흘리는 도윤의 볼에 보조개가 피었다. 희성은 좋아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하는 보조개를 한참이나 눈에 담다가 그 위로 입술을 찍었다.
희성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몰라 토요일이 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희성은 아침까지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함께 앉아 점심을 먹었다. 지난밤에 TV에서 나오는 파스타를 보며 맛있겠다고 흘리듯 중얼거렸는데 식탁에 파스타가 올라왔다. 도윤은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씹었다.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맛있었다.
포크와 숟가락을 이용해 꼬리를 떼어낸 새우가 도윤의 그릇에 올라왔다. 희성은 파스타를 먹지도 않고 자신의 그릇에 있는 새우의 꼬리를 모두 정리해 도윤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파스타와 새우를 동시에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간 도윤이 발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데려다줄게.”
“괜찮은데….”
“데려다준다고.”
“으응.”
또 다른 새우가 그릇에 올라왔다. 도윤은 파스타를 먹지도 않고 새우만 까고 있는 희성을 잠시간 쳐다보다가 그랬다.
“너도 얼른 먹어.”
“너나 먹어.”
챙겨줘도…. 도윤이 콧잔등을 씰룩이며 새우를 한쪽으로 밀었다.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지. 파스타가 포크에 돌돌 말려 덩치를 키웠다. 볼이 볼록해졌다. 희성은 또 새우를 옮겨주었다. 파스타를 몇 번 뒤적이던 희성은 새우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말라버린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도윤은 가방에 노트북과 필통, 공책을 챙기곤 케이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콩이를 확인했다. 활동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이 신경이 쓰였다. 이제 여름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여름에는 이렇게까지 조용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시원한 거실에 놔두면 조금 괜찮을까 싶어 케이지를 안고 나오자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온 희성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케이지를 방에 놔둬서 밤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사람을 얼마나 짜증 나게 하는지 도윤은 모를 터였다.
“그걸 왜 들고 나와.”
“콩이 더워하는 것 같아서…. 안 돼?”
“어.”
“방보다는 거실이 시원하니까, 나 다녀올 동안만 거실에 두려고….”
커다란 케이지를 안고 서성이던 도윤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 어차피 서재에 있을 거잖아….”
“…….”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도윤이 뒷걸음질을 쳐 드레스 룸으로 가는 동안 희성과 햄스터를 살폈다. 룸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둘을 살핀 도윤은 얼른 눈에 보이는 옷을 꺼내 입었다. 2년이 가까워지는데 둘의 사이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걱정이었다. 사실 콩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희성이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에 더 가깝겠지만. 흰 티셔츠와 까만 면바지를 주워 입고 거실로 튀어나온 도윤은 테이블 위에 잘 놓여있는 케이지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 키를 들고 도윤을 기다리던 희성이 반팔 차림에 쯧, 혀를 찼다. 저러다 에어컨 바람을 잔뜩 쐬고 추우면 또 춥다고 훌쩍거릴 거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반팔만 입고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다 도윤에게 입혀준 희성이 가방을 들어다 복도를 걸었다. 졸지에 반팔 차림에서 카디건을 걸치고 가방까지 뺏긴 도윤이 보폭을 넓게 벌리며 뒤를 쫓았다.
연우가 보내준 주소를 검색해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였다. 안전벨트를 풀고 뒷좌석에 두었던 가방을 가져온 도윤이 인사도 없이 내리려다 붙잡혔다. 몸이 앞으로 쏠려진 채 나누는 입맞춤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희성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일렀다.
“전에 준 카드 써.”
“응. 근데 저번처럼 또 전화 오면 어떡해?”
“그 카드 말고 다른 카드.”
“아아. 알았어.”
지난번에 지갑과 함께 들어있던 블랙카드를 편의점에서 한번 썼다가 소액결제로 도용이 의심된다며 희성에게 전화가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차에서 내리고 싶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뭘 하든지 다 문자로 보내.”
“알았어어.”
“과제만 해.”
“응.”
“끝날 때 전화하고.”
“알았어, 나 이제 가도 돼?”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한지 도윤은 자꾸 카페를 돌아봤다.
“그냥 지금 못 간다고 해.”
“또 왜!”
“그렇게 나가고 싶어?”
“아니이, 나는 그런 게 아니고….”
불쌍한 척 깜빡이는 눈이 또 지나치게 귀여워서 희성은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찍어댔다.
“응, 그만….”
“남들한테 웃어주지 마.”
“알겠으니까….”
“말도 걸지 말고.”
“으응, 좀…그만….”
말이 끝나는가 싶으면 입술이 붙고, 끝나는가 싶으면 붙어왔다. 도윤이 마지막으로 깊게 들어왔다가 쑥 빠져나가는 혀에 몸을 떨었다.
“중간에 집에 가고 싶어지면 전화해.”
“…으응.”
꿈도 컸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도윤은 대충 얼버무리며 문을 열었다.
“나 갈게.”
“응.”
“…집에 가서 콩이랑 싸우지 마.”
“…….”
“이따 봐!”
도윤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카페로 들어가 버렸다. 희성은 핸들에 기대 사라지는 도윤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
카페에는 의외로 동호가 제일 먼저 도착해 조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앞에 앉다가 남들에게 웃어주지 말라던 말이 생각나 입꼬리를 내렸다.
“안녕하세요….”
“네. 일찍 오셨네요.”
“아, 그, 그…어….”
“형이라고 불러요. 불편하면 선배라고 해도 괜찮으니까.”
“그, 어…. 선, 배도 일찍 오셨네요….”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요.”
“그렇구나….”
대화가 끊어졌다. 도윤은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카페를 둘러보다 이제 막 들어서는 연우를 발견했다. 연우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도윤과 동호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메고 있던 가방을 도윤의 옆에 두고 앉은 연우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뭐….”
“안녕하세요.”
“아직 유정 씨는 안온 거죠?”
“네.”
저건 뭐 인사를 받아준 것도 아니고, 안 받아준 것도 아니었다. 도윤은 볼을 긁적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 연우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던 유정이 조원들을 발견하곤 다가와 동호의 옆에 앉았다. 도윤은 이제야 정말로 대학생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들떴지만 조용한 테이블에 애써 들뜬 마음을 내리눌러야 했다.
빨대로 얼음을 휘젓자 달그락 소리가 났다. 음료를 받자마자 사진을 찍어 희성에게 보낸 도윤은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들이며 조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호는 여전히 자신이 발표자라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생각보다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다. 연우가 만든 PPT는 정말로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었으며 유정도 찾아온 자료를 보여주고 있었다. 희성이 걱정하는 그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담은 전혀 없이 과제 얘기만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중간에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다는 유정이 케이크를 사 오면서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유정이 사 온 케이크는 겉과 속에 멜론이 들어있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 집에 갈 때 사서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었다. 아이스티를 마시면서도 시선을 떼어내지 못한 도윤은 앞에서 들려오는 동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다들 말 편하게 하시죠.”
“그래도 돼요?”
“전 괜찮으니까 편하게 불러요.”
“그럼, 저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선배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요.”
“그럼 연우 언니라고 부르고, 음…. 도윤…이? 라고 해도 돼요?”
“네, 네. 말 편하게 해도 돼…요…!”
“그래! 음. 음, 동호, 선배는….”
말을 편하게 하자고 얘기를 꺼낸 사람은 동호인데 유정은 연우부터 챙기고 봤다. 연우는 언니고 도윤은 도윤인데, 동호는 선배가 붙었다. 동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연우는 케이크를 먹으며 유정을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나중에 편해지면 부를게요.”
“마음대로 해요.”
“네, 언니도 저한테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돼?”
“네!”
“너도 편하게 해. 도윤이도.”
또 동호의 이름은 쏙 빠졌다. 이번엔 떫은 얼굴을 보인 동호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동갑인데 우리 둘은 말 놔도 되지 않나?”
“…….”
연우가 동호를 탐탁지 않은 듯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좀 불편해서요.”
“허….”
동호의 입에서 어이가없음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결과적으로는 어쨌든 연우와 동호만 서로 불편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연우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다. 도윤의 옆자리가 공석이 되자 포크를 내려둔 유정이 옆으로 옮겨와 연우의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스티를 마시던 도윤도 슬쩍 몸을 기울여 노트북에 가득 들어찬 PPT를 함께 구경했다. 동호는 홀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깔끔한 PPT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유정이 도윤의 팔을 잡아왔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손에 도윤이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아, 미안. 이것 좀 보라고, 나도 모르게….”
“아니야, 나는 그냥….”
“싫어하는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텐데. 조심할게.”
“아, 아냐. 내가 싫은 게 아니고 누가 좀…싫어해서….”
“누가?”
“어어, 그…있어….”
“여자 친구 있구나?”
“그런 건 아닌데, 암튼 미안해….”
“네가 왜 사과를 해. 내가 미안하지.”
유정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손을 털며 나온 연우가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더 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여름답게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슬슬 저녁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임에도 바깥이 밝았다. 반대로 조원들의 집중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하품을 길게 뱉은 동호가 먼저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왔고 연우가 어깨를 주무르며 노트북을 정리했다. 도윤은 희성에게 이제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내두고 가방을 정리했다. 연우와 유정이 차례대로 수고했다며 자리를 비웠다. 카페에 들어왔을 때처럼 또 동호와 둘만 남게 됐다. 도윤은 괜히 가방을 다시 정리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안가?”
“누가 온다 그래서, 기다리려구요. 형…은요?”
“나도 아는 형이랑 약속 있어서.”
“아아….”
얼음이 다 녹아버려 물맛이 더 많이 나는 아이스티를 빨대로 한번 휘저은 손이 얌전히 무릎을 문질렀다. 희성에게선 조금만 기다리라는 답장이 도착했다. 할 것도 없으면서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만 뒤적거린 도윤이 어, 형! 여기요! 하는 소리에 덩달아 고개를 돌려 입구를 쳐다봤다가 빳빳하게 굳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도윤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카페를 두리번거린 호준이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걸어왔다. 동호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친 호준은 도윤의 옆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되게 오랜만.”
“…안녕하세요.”
“얼굴 보기 한번 더럽게 힘들어, 어?”
“형 뭐 마실래요?”
“어, 난 괜찮아.”
말로는 괜찮다면서 도윤의 앞에 있던 컵을 가져가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빨대까지 빼고 작게 남아있는 얼음을 깨먹은 호준이 컵을 내려두자 동호가 그랬다.
“다 녹은 걸 왜 마셔요, 그냥 새로 사준다니까.”
“난 이거면 돼.”
“그거 그냥 물일 텐데.”
도윤이 가방을 끌어안고 몸을 달싹였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러다 희성이 오면 큰일이었다. 도망갈 준비를 하는 도윤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어깨에 손을 두른 호준이 웃어댔다.
“동호랑 한잔할 건데 같이 가자, 엉?”
“죄송해요. 저 약속이 있어서요, 지금 가야 돼요.”
“그놈의 약속. 암튼 존나 비싸게 굴어. 하긴, 잘 사는 놈들이 다 그렇지.”
잘 사는 놈들? 도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누가 잘 산다는 거야? 도윤이 어깨를 비틀며 손을 털어내려 애썼다. 기분 나쁜 손이 어깨를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볼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던데, 그거 다 진짜냐?”
“…….”
“남자 새끼가 뭐 이렇게 피부가….”
호준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도윤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떼어내곤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붙잡혀있는 사이에도 희성은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도윤이 가방을 끌어안고 떡하니 버티고 앉아있는 호준을 내려다봤다. 동호는 둘을 보기만 하다가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비, 비켜주세요.”
“비, 비켜주세요. 싫은데?”
“…저 진짜 가야 되는데, 진짜로….”
“밥 한번 먹자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가만 보면 세상에서 네가 제일 바빠.”
“진짜, 진짜 비켜주세요….”
“다음에 밥 한번 먹는다고 하면 비켜주고.”
“…….”
도윤이 입술을 씹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제 희성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준이 원하는 걸 얻었다는 듯 실실거렸다.
“그거 받고, 앞으로 내가 전화하면 받아.”
“밥, 먹는다고 했잖아요….”
“네가 여태 깠던 횟수를 생각하세요.”
“…….”
“그게 싫으면 오늘 당장 우리랑 밥 먹고.”
“형, 그냥 보내요.”
“…….”
“형이 전화를 하면 받어. 알아들었어?”
“…네.”
“가봐.”
“안, 안녕히 계세요.”
정말 급하긴 급한지 자신을 지나쳐가는 걸음이 빨랐다. 호준은 낄낄거리며 도윤의 아이스티를 모두 털어마셨다. 대체 쟤한테 왜 그래요? 진심으로 궁금하단 듯 묻는 말에 재미있잖아. 간단하게 대꾸한 호준이 아까 어깨를 만졌던 손에 코를 박았다. 향수를 쓰는 건 아닌가 본데 묘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킁킁 냄새를 맡던 호준이 컵을 들고일어나는 동호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박동, 이거 네 거야?”
“뭐요? 그거 제거 아닌데.”
“그럼 누구 건데?”
“아까 하도윤이 쓰기는 했는데, 누구건 진 모르겠어요.”
“그래?”
“다른 조원들 건가? 주세요, 제가 주인 찾아줄게요.”
“아니, 됐어.”
호준이 펜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일어났다. 어차피 펜이면 뭐 중요한 것도 아니겠죠. 동호가 컵을 정리하곤 호준의 뒤를 따라 카페를 빠져나왔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온 도윤은 이제 막 앞으로 들어서는 익숙한 차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차에 오르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며 호준이 나왔는지를 확인한 눈이 희성에게 돌아갔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어놓고 며칠은 떨어져 지낸 사람마냥 도윤을 끌어안은 희성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묘하게 다른 냄새가 나지만 조원들이 향수를 뿌리고 온 걸 수도 있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으응, 빨리 가자.”
“재미있었어?”
“아니, 몰라.”
“뭘 몰라.”
“집에 갈래, 집에 가자.”
“누가 쫓아와?”
“아니!”
“근데 왜.”
“그냥 집에 가고 싶으니까 그렇지….”
도윤이 답지 않게 집에 가자며 보채자 희성은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훑어보다 볼에 입을 맞춘 후 벨트를 매 주었다. 차가 카페 앞을 벗어나는 순간 동호와 호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발견한 도윤이 끙…. 앓았다. 희성은 핸들을 쥔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도윤을 힐끗거렸다. 도윤은 일단은 현장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라디오도 틀어두지 않은 내부에 정적이 감돌았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것도 같은 손이 안전벨트를 매만지느라 분주했다.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을 때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터덜터덜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벗으려던 도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밀쳐졌다. 가방을 멘 덕에 부딪친 등이 아프진 않았지만 갑작스레 밀쳐져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너무 놀라서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무어라 이유를 묻기도 전에 막혀버린 입술 사이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희성의 입맞춤은 언제나 막무가내였고 오늘도 그 점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응….”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체온이 비슷해 얽히는 혀가 더 소름이 돋았다. 희성이 볼을 쥐고 있어 고개를 틀 수조차 없었다. 눈을 감고 버거운 혀 놀림을 느끼자 몸이 떨렸다. 고개를 어깨 쪽으로 살짝 내리자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희성은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뜨리며 머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입술사이로 생긴 거리에 도윤의 숨이 쏟아졌다. 엄지로 젖은 입술을 꾹 눌러본 희성이 눈을 치켜떴다.
“나 두고 집 나가니까 좋았어?”
“응…?”
“나 버려두고 혼자 나가니까 좋았냐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난 너한테 버림받아서 기분이 꽤 별로였는데.”
“…왜 자꾸 버렸다고 해?”
“네가 버렸잖아.”
억울함을 가득 담은 눈이 뻔뻔한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너 없는 집에 혼자 있으려니까 기분이 더럽더라고. 앞으로는 나가지 마. 희성이 다시 입술을 붙였다. 옷을 쥐는 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목에 두른 희성이 고개를 꺾으며 혀를 더 깊게 들이밀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현관을 채웠다. 목을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앓기만 한 도윤이 절로 풀리는 다리에 우는소리를 흘렸다. 입술을 떼고 잠시 호흡할 틈을 내어준 희성이 사이로 다리를 밀어 넣곤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찾았다.
***
콩이가 더워할 때면 에어컨을 틀어놓기도 했지만 혹시 몰라 사둔 대리석도 요즘은 꽤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다른 햄스터들은 대리석을 잘 안 쓴다고 하던데 콩이는 곧잘 이용해서 다행이었다. 그동안 사료도 바꿔보고 영양제도 꾸준히 먹여봤는데 따로 편식을 하지는 않아서 그것도 다행이었다. 요즘 도윤에게 있어 좋은 소식엔 호준의 연락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만났을 때 이후로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욕실에 갈 때도 핸드폰을 들고 다녔었는데 호준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도윤이 홀로 전전긍긍하던 것과는 달리 조별 과제도 무사히 끝이 났다. 처음치고는 도윤과 유정의 자료조사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연우가 만든 PPT도 괜찮았으며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동호의 발표도 아무런 문제 없이 끝이 났다. 과제를 하는 동안 유독 친해진 조원들은 연우와 유정이었고 도윤은 애매하게 걸쳐있었다. 연우와 유정은 아직도 동호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도연우 (21)
[종강하기 전에 밥이나 먹을까 하는데] 오후 9:17
이유정 (20)
[헉 좋아요~~] 오후 9:17
도윤은 달력을 보다가 볼을 긁적였다. 카페에 나갈 수 있었던 건 과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과제가 끝난 이상 아마 이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도윤이 머뭇머뭇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다 액정을 두드렸다.
도윤
[저는 안 될 것 같아요ㅜㅜ...] 오후 9:20
이유정 (20)
[ㅜ왜??]
[아 여친..? 이 싫어한 댔나?] 오후 9:20
도연우 (21)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되면 말해줘] 오후 9:20
박동호 (21)
[전 되는데] 오후 9:21
도윤
[ㅜ.ㅜ 죄송해요..] 오후 9:21
도연우 (21)
[아냐 ㄱㅊㄱㅊ] 오후 9:21
아쉽다. 도윤이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곤 볼을 부풀렸다가 푸, 하고 바람을 빼냈다. 에어컨을 틀어둔 탓에 책상이 시원하다 못해 아주 차가웠다. 도윤은 볼을 대고 엎드려 눈을 끔뻑이다 진동을 토해내는 핸드폰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호준인 줄 알았으나 발신인에는 오랜만에 보는 번호가 떠있었다. 저장을 하면 희성이 화를 내니 번호로만 대충 외우고 있던 사람, 희준이었다.
“여보세요?”
-어, 도윤아.
“안, 안녕하세요…!”
-그래, 도윤이도 안녕. 요즘 잘 지내지? 딱히 얼굴 볼 일이 없어서 만나지도 못하고.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 것 같네. 학교는? 다닐만하고?
“네에, 근데 조금 어려운 거 빼면 괜찮아요.”
-다행이네.
“근데 전화는 왜….”
-혹시 옆에 희성이 있을까?
“희성이요? 희성이 지금, 샤워하는데….”
-아아.
샤워를 하느라 자리를 비운 희성을 찾는 전화였다. 도윤이 내심 시무룩해져선 손끝으로 책상을 문질러댔다.
-막내가 또 내 번호는 차단해둔 것 같아서, 연락할 사람이 도윤이밖에 없었어.
“차단이요?”
-일상이라 괜찮아. 혹시 희성이 나오면 형한테 전화 한 번만 해달라고 전해줄래?
“네에.”
-그래, 착하다.
“으응, 네….”
-희성이랑 살면서 뭐 불편한 점은 없고?
불편한 점. 불편한 점은 셀 수도 없이 많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불편한 점 투성이었다. 짧은 정적에도 희준은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도윤이 눈알을 굴렸다.
-나중에 도움 필요하면 형한테 전화해.
“네….”
-희성이한테는 비밀로 해줄게.
“으음….”
-왜, 거짓말 같아?
“응, 아니요….”
-거짓말 같다는 거지?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다소 급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희준이 하하, 웃었다.
-아무튼 꼭 말하고, 알았지?
“네에.”
-그럼 이제 끊어야겠다. 오랜만에 전화해놓고 부탁만 해서 미안하네.
“괜찮아요.”
-그래, 잘 자고.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도윤이도.
전화가 끊어졌다. 도윤은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두었다. 문득 희성이 희준의 반이라도 닮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꺼진 화면을 물끄러미 보며 다정해진 희성을 상상했다. 도윤은 눈을 찡그리곤 고개를 털었다. 희성은 다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희준을 닮을 수도 없었다. 형제라는 게 거짓말은 아닐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다.
도윤이 홀로 앉아 남의 가족에게 새로운 가정사를 안겨주는 동안 샤워를 끝내고 나온 희성은 곧장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는지 꺼진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도윤을 일으켜 침대에 던지듯 눕힌 희성이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하게 도윤의 다리를 벌리고 앉은 희성이 몸을 숙이려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희준이 형이 전화해달래.”
“…….”
“차단…풀어달라고….”
“다시.”
“…희준이 형이 전화해달래?”
“다시.”
“희준이 형이…전화해달래…?”
“다시.”
“…형이…전화해달래.”
“하도윤, 다시.”
“…김…희준…이…전화….”
당사자가 없음에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도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희성이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물었다.
“김희준이 너한테 전화했어?”
“으응, 네가 형…. 그…분 전화를 안 받아서….”
손끝으로 입술을 가린 탓에 목소리가 웅얼웅얼 나왔다. 희성은 침대 옆 협탁에 방치해둔 핸드폰을 가져와 뭔가를 만지는 것 같더니 이내 귓가에 붙이곤 도윤에게 다가왔다. 입술을 가리고 있는 손에 한참을 그대로 입술을 묻고만 있던 희성이 입을 열었다. 전화가 연결된 모양이었다. 눈을 내리뜬 도윤과 치켜뜬 희성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용건만 말해.”
“…….”
-도윤이한테 전화하는 게 빠른 방법이었네. 애초에 그렇게 할 걸 그랬나….
“용건만.”
-주말에 황 회장님 뵈러 가는 거 안 잊었지? 아버지랑 어머니도 그날 시간 내셨으니까 웬만하면 너도 와서 얼굴 비추고 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희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도윤이 점점 멀어지는 얼굴을 올려다봤다. 한눈에 봐도 잊고 있었으며 귀찮은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앞으로 흐른 앞머리를 넘기며 일어난 희성이 방을 나섰다.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희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바라보기만 하던 도윤도 몸을 일으켜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리곤 대충 언제가 좋을지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있는 조원들의 대화를 쭉 올려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남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희미해서 지금 이 별것도 아닌 대화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온 도윤이 자판기 앞에 서서 짤랑거리는 동전을 꺼냈다. 그냥 물을 마실까 음료를 마실까 고민에 빠진 사이 자판기에 넣었던 동전이 시간을 초과해 다시 쩔그럭대며 쏟아졌다. 허리를 숙여 동전을 꺼낸 도윤이 다시 동전을 자판기에 넣고 물과 음료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냥 물을 마실까? 그게 낫나? 손가락이 물이 있는 쪽으로 갔다가 도로 돌아왔다. 아닌가? 음료가 낫나? 이게 뭐라고 또 쩔그럭 소리와 함께 동전이 쏟아졌다. 그냥 물이나 마시자. 오랜 고민 끝에 물이 선택을 받았다. 동전을 꺼내 다시 자판기에 넣은 도윤이 버튼을 꾹 누르려다 불쑥 나타난 손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땡큐.”
“어어.”
졸지에 호준에게 음료를 사준 꼴이 되었다. 도윤은 호준이 음료를 꺼내드는 것을 멍청하게 보고만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을 했는데, 허망했다. 호준은 보란 듯이 캔을 따 크, 소리까지 내며 음료를 마셨다. 말도 안 돼. 호준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으며 음료를 마시고 빈 캔을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
“잘 마셨다.”
“…….”
“괜찮지? 너 돈 많잖아.”
“…….”
험한 말이 절로 나왔으나 도윤은 누군가에게 험한 말을 해본 적이 없어 꾹 참았다. 그저 아깝고 억울할 뿐이었다. 호준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도윤에게 다가왔다.
“나 너한테 줄 거 있어.”
“…저한테요?”
“엉. 너 저번에 카페에서 이거 두고 갔더라.”
“아, 감사합….”
“지금 준다고는 안 했는데.”
필통에서 안 보이기에 어딜 갔나 했더니 카페에서 흘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호준이 주웠고. 도윤은 손을 내민 상태로 눈만 끔뻑였다.
“그냥 준다고도 안 했고.”
“제 거잖아요….”
펜이 다시 호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솔직히 저 펜 하나 정도는 새로 사면 그만이다. 그 잠깐 사이에 펜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도윤이 고개를 꾸벅였다. 희성이 나오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어딜 빼려고?”
“저 아직 강의가 안 끝나서요.”
“이 새끼 또 구라 까는 거 아니야? 뭐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지, 진짠데….”
강의실 문을 열어 이것 보세요, 제 말이 맞죠? 하고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도윤의 팔을 잡아챈 호준이 1학년 땐 수업 좀 째도 돼. 하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도윤에겐 학점이 문제가 아니라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희성이 문제라는 것을 눈앞의 이 남자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손목에 닿은 손을 털어내려 호준의 손을 잡은 그때 도윤을 부르는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친한 사람이 없어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부를 사람이 없는데…. 잔뜩 움츠러진 몸이 뒤를 돌았다.
“누, 누나….”
“너 거기서 뭐해?”
이 상황에서 유일한 구세주인 연우가 손을 씻고 나왔는지 물기를 털며 다가왔다. 연우의 시선이 호준의 손에 닿았다가 그 위에 있는 도윤의 손으로 향했다. 시선을 조금만 더 올리면 난처해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연우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강의 늦겠다.”
연우와 시선을 나눈 도윤이 호준을 돌아보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거슬린다는 눈초리가 연우에게 쏟아졌다. 평소의 걸음대로 느릿하게 다가온 연우가 호준에게 잡힌 팔을 당겨 빼주었다. 자유로워지자마자 연우의 뒤로 숨은 도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가자.”
“네에.”
호준의 얼굴은 썩어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썩어있었다. 연우가 뒤를 힐끔거리다 물었다.
“저 사람이랑 친해?”
“아니에요! 하나도 안 친한데 자꾸….”
“저 사람 소문 안 좋으니까 웬만하면 피해 다녀.”
“네….”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물론 네가 말하고 싶을 때.”
“네, 네.”
“근데 둘이 왜 같이 있었어?”
“그게…. 물 사려고 서있었는데 저 사람이 갑자기 자기 음료를 뽑아가서요….”
“네 돈으로?”
“네….”
연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다음에 내가 사줄게.”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돼요, 저 괜찮아요.”
“이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저 진짜 괜찮은데도요?”
“남이 준다고 할 때 받아먹어.”
“진짜 괜찮은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강의실 앞이었다. 도윤은 머뭇거리다 아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문을 열려던 연우가 도윤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교수님께서 일렀던 시간이 다 차지는 않았는지 강의실이 소란스러웠다. 문이 열릴 때마다 뒤를 돌아본 희성이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나자 짜증부터 냈다.
“화장실을 만들어서 다녀왔어?”
“뭐어….”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해?”
“잠, 잠깐이었잖아.”
“네가 뭘 알아.”
또 왜 저래…. 호준을 피해왔더니 희성이 난리였다. 희성은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과 말투를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도윤의 손을 잡아다 주물 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만지는가 싶더니 조금 누그러진 어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토요일에 같이 가자.”
“거길 내가 어떻게 가.”
“같이 갔다가 중간에 나와서….”
“하지 마…!”
손끝에 입을 맞춘 희성이 다시 손을 내려주었다.
“같이 가.”
“싫어.”
“왜 싫어.”
“내가 그런 곳엘 어떻게 가…!”
“못 갈 건 또 뭔데.”
도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가. 굳은 의지가 돋보였다. 희성이 손깍지를 끼곤 혀를 찼다. 도윤을 데리고 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겠지만 벌써부터 이 주제로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끝까지 안 가겠다고 하면 중간에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그 자리는 지루하기만 할 것이었다. 남들이 볼까 봐 불안한지 꼬물거리는 손을 더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문이 열리고 교수님이 나타났다. 희성은 강의가 시작된 후로도 얼마간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조원들과의 채팅 방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늘 조용했다. 희성의 눈을 피해 욕실이나 테라스에서만 핸드폰을 봤기에 아직까지 큰 의심을 사지는 않았다. 도윤을 제외한 셋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있었다. 희성이 서재에 사는 동안 도윤은 소파에 앉아 쭉쭉 올라가는 말풍선들을 구경했다.
이유정 (20)
[그럼 토요일에 6시?] 오후 7:27
도연우 (21)
[너무 늦으면 조금 일찍 만나도 되고] 오후 7:28
이유정 (20)
[어차피 주말이라 괜찮아요ㅋㅋ] 오후 7:28
도연우 (21)
[그래. 도윤이도 되면 와.] 오후 7:28
숫자가 사라지니 도윤이 읽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숫자 1의 주인공은 아마도 동호겠지. 도윤이 서재 쪽을 확인하곤 답장을 보냈다.
도윤
[되면 연락드릴게요!] 오후 7:29
이유정 (20)
[되면 좋겠다ㅎㅎ] 오후 7:29
연우와 유정에게 동호는 마치 투명 인간으로 입력이 되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모티콘을 보내곤 서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핸드폰을 엎었다. 놀란 눈이 서재를 향했다가 다시 조용해진 집안을 둘러보았다. 언제 삭제될지 모르는 채팅 방이었다. 이 즐거움을 조금만 더 누리고 싶었다. 도윤이 숨까지 참아가며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