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7)

강요(2)

  

  

전에 살았던 희성의 본가는 그나마 일을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마냥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새로 이사를 온 집은 정말 도윤과 희성 둘뿐이라 TV를 틀어두지 않으면 적막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희성보다 먼저 일어나 소파에 앉은 도윤이 소리를 1로 맞춰두고 보지도 않는 예능을 틀어두었다. 웃긴 장면이 나오면 조용히 웃다가 먹는 장면이 나오면 저도 배가 고파 냉장고를 뒤적였다. 샌드위치를 야금야금 먹어치운 도윤이 TV를 보며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깜빡였다. 오늘따라 희성이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평소라면 먼저 일어나서 자신을 보고 있었을 텐데…. TV에서 흘러나오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도윤은 가물가물한 시야에 다시 눈을 감았다.

철저히 희성의 취향으로만 꾸며진 집은 사실 너무나도 편했다. 침대는 성인 남성 4명이 누워도 남을 만큼 컸고, 소파도 도윤이 데굴데굴 굴러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 넓었다. 잠깐의 낮잠을 자고 깨어난 도윤은 속이 답답하고 눈앞이 까만 것을 확인했다. 아마 침대에서 자던 희성이 자신을 찾아 나온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희성의 품에서 일어난 도윤이 눈을 깜빡이다 손을 올려 등을 톡톡 두드려보았다. 눈앞에 있는 가슴팍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걸 봐서는 희성도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미동도 없는 몸에 슬쩍 뒤로 빠지며 고개를 든 도윤이 잠든 희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집에 살고 나서부터 희성은 도윤의 곁을 잠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도윤이 집안을 돌아다닐 때면 항상 희성의 시선이 따라오거나 뒤에서 끌어안는 손이 있었다. 마치 나무에 매달린 매미 같기도 했다. 허리에 감긴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몸을 일으킨 도윤이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자연스레 천장을 봤다. 구석에서는 여전히 빨간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희성이 깰까 봐 꾹 삼켰다. 도윤은 소파에서 내려와 샌드위치를 먹고 남은 쓰레기를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품에서 익숙한 몸이 빠져나가자 희성은 20분도 채우지 못하고 눈을 떴다. 소파를 더듬거려 도윤을 찾은 희성이 느릿하게 일어나 앉아 꺼진 TV를 쳐다봤다. 테이블에 있던 샌드위치의 쓰레기도 없어져있었다. 어깨를 보이며 흘러내린 상의를 다시 끌어올린 손이 눈가를 쓸었다. 바닥으로 내린 발에는 실내화가 신겨졌다. 희성은 제일 먼저 침실부터 확인했지만 도윤은 없었다. 희성의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주방에도 없고, 드레스 룸에도 없었다. 애타게 찾는 얼굴은 서재에도 없었고, 아직 꾸미지 못한 빈방에도 없었다. 희성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지막으로 욕실도 확인했지만 도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구겨진 얼굴이 핸드폰을 찾았다. CCTV를 돌려보면 도윤이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던져둔 핸드폰을 들어 잠금을 푸는 손이 빨랐다. 그러나 CCTV를 확인할 틈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희성은 손에 있던 것을 그대로 집어던지며 방을 빠져나갔다.

왜 테라스를 확인할 생각을 못 했을까. 희성이 테라스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다 마주친 시선에 머뭇거리는 도윤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잘 자고 일어나서 또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도윤이 문을 아주 천천히 닫고 눈알을 굴렸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는 도윤에게 다가간 희성이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코를 묻었다. 꼼지락거리며 올라온 손이 희성의 상의 끝을 잡았다.

“…오늘 날씨 되게 좋아.”

“…….”

“그래서 그냥….”

“나가고 싶어?”

이 집에 들어 온 지도 벌써 2주가 지나고 있으나 도윤이 집 밖으로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능하다면 근처 공원에라도 가보고 싶었다. 지나치게 넓은 집과 밖을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었으나 답답한 것은 사실이었다. 도윤이 입술을 씹다가 대답했다.

“으응….”

“씻고 올 테니까 옷 갈아입어.”

“…진짜? 진짜 나가줄 거야?”

“응.”

“진짜?”

“응, 진짜.”

도윤의 얼굴이 활짝 폈다. 희성이 고개를 틀어 눈앞의 하얀 목에 쪽,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났다. 희성이 작게 웃으며 도윤의 볼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짙은 녹색의 브이넥 니트 안에 흰 티셔츠를 받쳐 입고 코트를 걸친 희성은 아직도 준비 중인 도윤을 기다리다 지쳐 소파에 늘어져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다리를 한 번씩 떨며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가고 있었다. 소파에 기댄 머리가 삐딱했다.

“하도윤.”

“으응, 나가!”

외출하는 동안 먹으라고 콩이의 사료와 간식을 구석에 놓아준 도윤이 허둥지둥 거실로 나왔다. 도윤은 여전히 검은색의 면바지에 회색 후드와 그 위에 청재킷을 입고 있었다. 저렇게 입고 나갔다가 춥다고 덜덜 떨 도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혀를 찬 희성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머플러를 챙겨왔다. 도윤은 현관에 얌전히 서서 머플러를 둘러주는 희성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됐어. 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운동화를 신은 발과 로퍼를 신은 발이 나란히 현관을 벗어났다.

당연하게 1층을 눌렀던 도윤의 손을 쳐내고 다시 1층을 꾹 누르자 취소됐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성은 지하를 꾹 누르고 손을 털었다. 엘리베이터에 달린 거울로 머리를 확인하고 얼굴에 묻은 것이 없는지 보던 도윤이 옆을 돌아봤다.

“운전하는 거야?”

“응.”

“…그냥 택시 타도되는데.”

“뭘 믿고.”

심드렁한 대꾸가 돌아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계기판에 고정시켰던 시선이 스르륵 내려와 열리는 문으로 향했다. 도윤은 앞서 걸어가는 희성을 따라 주차장에 들어섰다. 희성이 키를 누르자 차체가 높은 차가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졸업선물로 받았다는 차가 이 차였나 보다. 도윤은 그동안 뒷좌석에 앉았던 기억을 떠올려 자연스레 뒷좌석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은 희성의 눈이 도윤을 쫓았다. 뒷문이 열리고 도윤이 평온한 얼굴로 뒷좌석에 오르는 것을 지켜본 희성이 피곤하다는 듯 눈두덩을 문질렀다.

“야.”

“응?”

“내가 네 기사야?”

“…아.”

민망한지 볼을 긁적이며 다시 내린 도윤이 조수석에 올라 눈치를 봤다. 희성은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미안….”

핸들에 기댄 희성이 도윤을 빤히 쳐다봤다. 사과를 했음에도 말이 없는 희성이 두려워 눈을 굴리며 차를 구경한 도윤이 갑자기 훅 다가오는 몸에 고개를 뒤로 뺐다. 이어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왜?”

“안전벨트.”

“아. 내, 내가 할게.”

“치워.”

“으응.”

급하게 안전벨트를 끌어온 손이 내쳐졌다. 도윤에게 안전벨트를 매준 희성은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희성의 입술이 닿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튼 도윤이 침을 삼켰다. 희성은 벗은 코트를 도윤에게 넘겨주며 핸들을 쥐었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도윤이 와…. 하면서 작게 감탄을 남겼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도로를 달릴 동안 도윤은 안전벨트를 꼭 쥐고 불안한 눈으로 주변과 희성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하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에는 등을 완전히 기대고 밖을 구경하기만 했다. 희성의 운전 실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언제 이렇게 연습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에서 먼저 내린 도윤이 코트를 들고 희성을 기다렸다. 주차도 두어 번 만에 끝낸 희성이 도윤에게 다가왔다. 희성이 코트를 입으며 입을 열었다.

“한 눈 팔지 말고 잘 따라다녀.”

“응.”

“손.”

“…여기서?”

“손.”

“사람 많잖아….”

“손.”

“…….”

하는 수없이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도윤이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맞잡은 두 손은 오늘도 희성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브런치 카페에 들어온 둘은 각자 원하는 메뉴를 하나씩 골라 주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확인한 도윤이 핸드폰을 들었다. 자신의 몫으로 나온 수플레 팬케이크를 세상 열심히 찍던 도윤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만들어준 사람도 없는데 도윤은 잘 먹겠다는 인사를 꼭 빠트리지 않았다. 아직 철이 지나지 않아 팬케이크 주변으로 딸기가 가득했다. 도윤은 작게 자른 팬케이크 위에 딸기를 얹고 그 위에 또 크림을 얹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달달한 시럽까지 뿌려 한입에 왕, 먹었다. 입술에 묻은 크림도 혀로 핥아먹었다. 도윤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샌드위치보다 아메리카노를 먼저 찾은 희성이 물었다.

“맛있어?”

“응!”

입에 있는 것을 다 씹지도 않고 다음 팬케이크 위에 딸기와 크림, 시럽을 얹은 도윤이 앙다문 입을 바쁘게 움직여댔다. 희성은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도윤이 주문한 아이스초코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천천히 먹어.”

“으응.”

“이것도 마시고.”

“응, 응.”

빨대를 물고 아이스초코를 쪽쪽 빨아 마신 도윤이 다시 팬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도윤이 먹는 것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불렀다. 희성은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도윤은 혹시 몰라서 추가한 크림을 팬케이크 위에 야무지게 올려서 먹고 그냥 포크로 그것만 떠서 먹기도 했다. 주변에 흩어진 블루베리도 콕콕 찍어서 입에 넣은 도윤이 남은 팬케이크를 뒤적였다.

“부족하면 더 시키고.”

“어…. 그래도 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엄….”

도윤이 발을 달랑거리며 가게를 둘러보았고 희성이 손을 들었다. 마침 홀을 둘러보던 직원이 희성을 발견하곤 웃으며 다가왔다.

“팬케이크 하나 더 추가해 주시고 크림도….”

희성이 앞을 힐끔거리자 도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의 시선이 다시 직원에게 향했다.

“추가해 주세요.”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남은 팬케이크를 먹기 시작한 도윤이 신난 듯 가게에서 틀어둔 노래를 흥얼거렸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어치운 희성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딸기를 크림에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발을 까딱이던 희성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아.”

뭐 하냐는 눈초리가 희성의 시선과 부딪쳤다.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도윤의 입에 들어서려다 막혔다.

“아.”

“…….”

탐탁지 않은 얼굴로 포크를 뻗자 희성이 날름 받아먹었다. 그리곤 입안 가득 퍼지는 단맛에 미간을 구기며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았다. 도윤은 그에게 준 딸기와 크림이 아까워 새 딸기를 얼른 자신의 입에 넣었다.

도윤은 총 두 그릇의 팬케이크를 먹어치웠다. 분명 카페에 들어온 목적은 가볍게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으나 도윤의 배는 아주 무거워지고 말았다. 이번 주말만 지나면 정말로 대학생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둘은 서점을 찾았다. 서점으로 가는 과정에서 희성에게 가도 뭐 그딴 곳을 가냐며 욕을 먹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사실 사고 싶은 책이나 필기구는 없었다. 정말로 그냥 오고 싶었다. 서점 특유의 냄새도 좋았고 서점에 가면 책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문구를 다 모아다 파는데 그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서점에 도착해서부터 책에는 관심이 없고 문구류에 정신이 팔린 도윤을 따라다니던 희성이 혀를 찼다. 도윤은 스티커를 모아놓고 파는 곳에 멈춰서 기웃거렸다.

“이거 귀엽다.”

“대체 이딴 걸 왜 사.”

“…귀엽잖아.”

“별게 다 귀엽네.”

희성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가득한 스티커를 보며 별 쓰레기를 돈 받고 판다는 듯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딴 걸 살 바에 차라리 땅바닥에 돈을 버리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옆에서 쏟아지는 폭언에 주위에서 함께 스티커를 보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사라졌다. 도윤은 애써 무시하며 햄스터가 그려진 스티커를 골라들었다. 그러자 희성의 얼굴에 설마 그걸 사려고? 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콩이 닮은 것 같지 않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귀여운데….”

옆에서 뭐라고 하든 도윤은 그 스티커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스티커를 쥐고 다른 것들을 마저 구경하던 도윤이 이번엔 햄스터가 해바라기씨를 품고 있는 핸드폰 케이스를 찾아 들이밀었다. 희성의 눈에는 그저 쥐새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도윤은 귀엽다며 웃었다.

“나 이거 살래.”

“하도윤 서점이 왜 서점인 줄은 알아?”

“아, 알거든?”

“뭘 알아.”

“나도 다 알아!”

“뭘 아냐고.”

“그냥, 그냥 이것저것 다 있으면 좋지…뭐….”

말끝을 흐린 도윤이 괜히 다른 케이스를 뒤적였다. 그때 도윤의 시야에 또 다른 케이스가 들어찼다. 도윤은 화를 내고 있는 햄스터를 보다가 희성에게 보여주었다. 머리가 빨갛게 익은 햄스터는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꼭 항상 화를 내고 있는 희성 같았다. 물론 희성이 햄스터를 닮았다거나, 귀엽다는 뜻은 아니었다. 케이스를 내려다보는 희성의 표정은 이걸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보였다.

“너는 이거 해.”

“뭐?”

“나는 이거, 너는 이거.”

“좆같이 생겼는데.”

“햄스터한테 그런 말 쓰지 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이거 사. 내가 사줄게.”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나 돈 있어. 용돈 모아둔 것도 많아.”

자신만만하게 케이스 두 개와 스티커 하나를 든 도윤이 성큼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하지만 도윤의 지갑을 뺏어다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희성이 카드를 내밀면서 계산을 하겠다던 도윤의 꿈은 또 물거품이 되었다. 계산할 기회를 놓친 도윤은 서점을 나와 차에 오르는 내내 투덜투덜 볼멘소리를 냈다가 하도윤 시끄러워. 하는 희성의 한마디에 얌전히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

고등학생이었을 시절,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뭐만 하면 ‘그건 대학 가서 해.’ , ‘지금 안 해도 대학 가면 질리도록 할 수 있어.’ , ‘대학 가면 다 해결 돼.’ 라고 말하곤 했다. 대학에 가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게끔 아이들을 부풀려 놓았다. 첫날이라 딱히 하는 건 없었지만 도윤의 마음은 내내 콩닥콩닥 뛰어댔다. 희성의 옆에 앉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인 도윤에겐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사람을 신기하게 구경하기도 했다. 그 옆에 앉은 희성은 흐르는 시간이 지루한지 하품만 해댔다.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닌 교수님이라 불러야 하는 것도 신기했다. 도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학교를 구경하다가 희성에게 이끌려 차에 올랐다. 희성은 차에 오르자마자 도윤의 입술을 찾았다. 주차장에 사람이 없다지만 학교 안이라 심장이 떨렸다. 바르작거리며 희성과의 키스를 끝내고 입술을 닦은 도윤이 창밖을 쳐다봤다. 주차장도 신기했다. 도윤은 그렇게 온종일 마치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마냥 시선이 닿는 모든 것들을 신기해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노는 물이 달라질 거라던 말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도윤은 아직 눈인사만 주고받았던 동기들을 힐끔힐끔 살폈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인 탓에 말투가 다 다른 것도 신기했다. 희성은 주변에서 점심을 때울 만한 식당을 찾고 있는 중이라 조용했다. 학식을 먹기 싫어서 식당을 찾아보는 희성과 달리 도윤은 학식은 급식과 또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도윤이 볼펜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급, 아니, 학식 먹어보면 안 돼?”

“하도윤, 맛없는 거 먹고 배 채우면 기분 어때?”

“…별로야.”

“잘 아네.”

“그래도, 오늘만 먹어보면 안 돼? 맛있을 수도 있잖아…. 응?”

대충 먹더라도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핸드폰만 보던 희성의 고개가 그제야 옆을 향했다. 도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급식은 몇 년 동안 질리도록 먹어왔다. 학식이라고 그게 다를 리가 없었다. 희성이 못마땅하게 혀로 볼 안을 문지르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도윤은 그게 허락의 뜻인 걸 알았다. 도윤이 실실거리며 다시 볼펜을 돌돌 굴렸다.

함께 입학을 한 동기들은 도윤과 희성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내왔다. 말을 걸어보고 싶어 알짱거리는 동기들을 무시하고 도윤과 함께 식당에 들어선 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윤은 메뉴를 훑다가 오므라이스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여기서 뭘 골라봤자 그 맛이 그 맛이었다. 희성은 도윤과 같은 메뉴를 골랐다. 빨리 먹고 이 장소를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역시 맛은 형편없었다. 흥미를 잃은 숟가락이 허공을 배회하다 트레이에 놓였다. 그에 반해 도윤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제 막 트레이를 들고 서성이던 동기 둘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희성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고 도윤은 음식을 바쁘게 씹으며 희성을 봤다가 옆에 앉은 얼굴들을 봤다.

“경영 맞지?”

“…….”

“…….”

곁눈질로 희성을 살피던 도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둘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웃었다.

“나는 이재현. 쟤는 김성수.”

“…나, 나는 하도윤. 얘는….”

“…….”

“김…희성…인데….”

싸늘한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도윤은 숟가락을 쥐고 눈치를 봤다.

“다 동갑이지? 혹시 재수했다거나….”

“으응, 아니야.”

“다행이다. 먼저 반말해서 미안.”

“어어, 괜찮아.”

“너네는 매일 붙어 다니더라, 같은 학교였어?”

“밥 처먹으러 왔으면 입 닥치고 밥이나 처먹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뭐?”

“아, 아니…. 미안, 우리 먼저 일어날게. 미안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공기가 얼어붙었다. 도윤은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희성을 잡아 일으켰다. 미안해. 마지막까지 대신 사과를 하며 희성을 끌고 밖으로 나온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작게 욕을 씹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은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처,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러, 그러면 안 되잖아.”

“내가 언제 너한테 남이랑 말 섞어도 된다고 했어?”

“동기잖아, 그냥 같이 밥 먹고 싶다고 온 애들….”

“그러니까. 내가 언제 남들이랑 같이 밥 먹고 싶다고 했냐고.”

“…….”

“왜 그렇게 좆같이 굴어?”

“왜 말, 말을 그렇게 해?”

“남들이랑 말 섞지 마.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지 다 봤잖아.”

“…….”

“그새 까먹었어? 도윤아, 우리는 너만 잘하면 돼.”

“…….”

“너만 잘하면 우리한테는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

가방끈을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희성은 다문 입술에 시선을 고정시켰다가 손목을 잡았다. 도윤은 절로 떨리는 이를 감추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제 강의가 다 끝난 후 동기라기엔 지나치게 초면인 남자가 강의실로 들어섰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윤과 희성도 가만히 앉아 앞에 서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내일 있을 신입생 환영회 이야기를 꺼내며 이름에 맞게 신입생들은 필참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희성은 당연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도윤은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술집에 모여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자리 같았다. 술을 마셔본 적은 없어서 걱정이 됐지만 가보고는 싶었다. 가면 같은 과에 다니는 선배들도 볼 수가 있었고, 동기들의 이름도 대충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은근슬쩍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희성은 무시했다. 하지만 도윤은 꼭 가보고 싶었기에 저녁을 먹으면서도,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면서도, 강의를 듣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희성에게 졸랐다. 신입생들은 필참이라잖아. 안 갔다가 혼나면 어떡해? 도윤의 말에 희성은 기가 찬다는 듯 한심하게 시선을 주었고 도윤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 결과 환영회에서도, 화장실을 갈 때도, 누가 말을 걸어도 자신의 옆에 조용히 있을 것을 약속받고 참석할 수 있었다.

환영회는 이른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통금이 있거나 통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잡았다고는 하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자리를 아예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입생들에게 어떻게든 술을 먹이려고 꾸역꾸역 자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한심했다. 희성은 제일 구석진 자리에 도윤을 밀어 넣고 그 옆에 앉았다. 도윤의 심장이 또 콩닥콩닥 뛰었다. 술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료수도 있었다. 도윤은 남들이 맥주를 마시는 동안 콜라를 따라 홀짝였다.

신입생들이 한 명씩 일어나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중엔 도윤과 희성도 있었다. 선배고 동기고 모두 둘의 인사에 집중했다. 도윤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고 희성은 대충 이름만 말하곤 자리에 앉았다. 둘에게 관심이 쏟아진 만큼 질문도 꽤 많이 들어왔지만 희성이 알아서 쳐내버렸다. 도윤은 콜라를 마시고, 희성은 소주를 들이켰다. 학교 앞이라 그런지 안주도 형편없었다. 희성은 안주를 몇 번 뒤적이다 입맛이 떨어져 술만 마셨다. 도윤은 구석에 앉아 어묵 탕을 몇 번 떠먹고 콜라를 마셨다.

시간이 늦어지자 분위기가 무르익고 눈치를 보던 몇 명은 통금과 통학을 핑계로 술자리를 벗어났다. 재미도 없고 시간만 아까웠다. 희성도 슬슬 집에 갈 생각으로 도윤의 손을 잡았다가 굳이 사람들을 헤치고 구석으로 들어오는 몸을 올려다봤다. 희성은 지금 다가오는 사람이 아까 자신들보다 학번이 높았던 것을 떠올렸다. 남자는 술을 꽤나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익어있었다. 도윤이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를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희성은 본능적으로 도윤을 자신의 옆으로 바짝 당겨 안았다.

“술을 한 잔도 안 마셨네?”

“술을 못해서요.”

“그래도 선배가 주는 술 한 번은 마셔야지.”

“아뇨.”

“남들 다 마셨는데 혼자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하잖아.”

“아니요, 됐습니다.”

“아니, 근데 난 얘한테 말 걸었는데 왜 자꾸 네가 대답을 하지?”

“하도윤, 일어나.”

“아, 아니 잠깐만….”

어정쩡하게 일어난 도윤이 당황했다. 희성은 고개를 돌려 도윤의 팔을 잡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희성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누구한테 손을 대, 씹새끼가. 희성이 손을 쳐내자 남자는 살짝 짜증이 난 듯 희성을 쳐다봤다.

“앉아.”

“가자.”

“앉으라고, 새끼야.”

“하도윤, 일어나.”

“내 말이 안 들리나 보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가운데에 낀 도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희성의 옆으로 살짝 붙었다. 그러자 분위기를 읽은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와 남자를 말렸다.

“야, 이거 취했네. 미안, 취하면 가끔 이래.”

“별….”

“놔봐. 새끼가 싸가지 없게.”

“유호준 하지 마.”

“사람이 말을 하는데 씨발, 너 이름 뭐야?”

“야, 유호준 하지 마! 얘들아, 너희 먼저 가.”

“아니, 저 새끼가 먼저 사람을 개 무시하잖아!”

“그만해 진짜!”

희성은 유호준이란 남자를 벌레 보듯 깔아보곤 도윤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술을 마신 탓에 운전은 못하고 대리를 기다리며 아까 남자의 손이 닿았던 팔을 털어주었다.

“내일 혼나면 어떡해?”

“혼이 왜 나는데.”

“선, 선배잖아….”

“그딴 걸 왜 선배라고 불러.”

“그래도….”

“됐어.”

됐다는 말에도 도윤은 불안한지 연신 가게를 돌아봤다. 희성은 기웃거리며 혹시 대리를 불렀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을 이끌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희성은 도윤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

도윤은 점심을 먹고 나면 산책 겸 학교 주변을 돌거나 학교 안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다. 반대로 희성은 차에 가서 둘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꾸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도윤을 데리고 다니느라 심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이제 희성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심정으로 도윤을 데리고 다니곤 했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도윤은 학교 안에 호수가 있는 것도 신기해했고, 예술대 앞에 작은 분수가 있는 것도 신기해했다. 가끔 분수 안으로 동전을 던져놓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도윤은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이곳을 올 때마다 동전을 하나씩 챙겨왔다. 희성의 눈에는 정말로 땅바닥에 돈을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오늘도 100원을 쥐고 신중하게 거리를 재보던 도윤이 손을 뻗었다. 퐁!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진 동전이 정확히 가운데에 들어갔다. 도윤이 웃으며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오늘은 ‘희성이의 성욕이 다 사라지게 해주세요.’였고, 며칠 전에는 ‘오늘은 정말로 한 번만 하고 끝내게 해주세요.’였다.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눈을 뜬 도윤이 종종걸음으로 희성의 옆에 섰다. 희성에겐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가져갈 소원이었다.

희성의 연락이 아니면 조용했을 핸드폰이 쉴 새 없이 깜빡거리며 메시지를 띄웠다. 단체 대화 방을 만든다고 번호를 가져간 과대가 만든 방에서는 엠티에 대한 대화가 한창이었다. 물론 도윤의 연락처에는 여전히 아버지와 희성이 다였다. 희성은 과대가 도윤의 번호를 알고 있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기에 새 핸드폰을 사주려다가 도윤이 거절하는 바람에 이만 갈고 있는 중이었다.

엠티. 엠티는 TV에서 많이 봐와서 알고 있었다. 가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시고. 도윤은 아직까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계속해서 올라오는 대화를 눈으로만 보며 다리를 달랑거린 도윤이 옆으로 푹 꺼지는 침대에 고개를 돌리려다가 막혔다. 침대에 올라온 희성은 이내 도윤의 허리에 앉아 옆구리를 간질였다.

“아, 하지 마!”

“뭐 봐.”

“우리 엠티 간대.”

“우리?”

“이거 봐.”

도윤이 잠금 화면에 떠있는 대화들을 보여주자 옆구리에서 손을 뗀 희성이 엄지를 쓱쓱 움직여 대화를 읽어내린다. 희성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핸드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희성의 입술이 목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우린 저거 안가.”

“…왜?”

“네가 거길 왜 가.”

“신, 신입생들은 필참이라고 했어….”

“우린 안가.”

도윤이 허리를 비틀며 몸을 뒤집었다. 희성은 마주 보게 된 자세에 익숙하게 입술을 물고 잘근잘근 씹다가 떨어졌다. 뚱해진 얼굴이 희성을 올려다봤다. 희성이 툭 튀어나온 입술을 잡고 작게 흔들어주었다.

“또 왜.”

고개를 홱 돌려 손을 떼어낸 도윤이 희성의 허벅지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엠티 가면 안 돼?”

“왜 가고 싶은데?”

“처음이잖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없을 것 같은데.”

“가자아, 응?”

“안 돼.”

말꼬리를 늘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희성은 단호하게 대꾸하며 도윤의 입술을 머금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토라진 입술이 굳게 닫혔지만 희성은 이미 이런 일에 도가 텄다. 아래로 내려간 손이 유두를 살살 긁다가 힘을 주자 움찔거리며 입술이 열렸다. 꼭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항상 개기는 게 우스웠다. 희성은 이제 만족스럽게 도윤의 입안을 누볐다.

평생 케이스 한번 끼워본 적 없이 핸드폰을 쓰다가 케이스가 생긴 희성은 처음에만 조금 못마땅해 했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도윤이 사지는 않았지만 거의 처음으로 자신에게 골라준 것이라 그런지 열심히 끼고 다니는 중이었다.

식탁의 끝에 올라와 있는 핸드폰을 보며 생각보다 잘 끼고 다니는 게 신기하단 생각을 하던 도윤이 남은 밥을 싹싹 비웠다. 희성도 조용히 밥을 먹었다. 도윤은 은근슬쩍 접시를 희성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전에 도윤은 희성 몰래 일하시는 분께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 쪽지 안에는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아봤었던 음식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의 식사를 책임 지던 남자는 다음날부터 도윤의 부탁대로 요리를 내어주었다.

“다 먹었어?”

“으응. 많이 먹어.”

“됐어, 느끼해.”

“왜? 그래도 더 먹지….”

“배불러.”

도윤이 아쉬운 듯 음식이 담긴 접시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더 먹었으면 좋겠는데…. 입맛을 다시며 욕실로 들어간 둘은 양치를 시작했다. 양치를 하는 내내 희성이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칫솔을 물고 거실로 나가려던 도윤은 몇 걸음 벗어나지도 못하고 잡혔다.

***

희성은 아침부터 집을 비웠다. 장례식장에 갈 일이 생겼다며 아직 잠도 덜 깬 도윤을 끌어안고 가기 싫다는 티를 냈다. 무거운 눈꺼풀을 뜨지도 못하고 웅얼거리는 도윤에게 몇 번이고 뽀뽀를 남긴 희성은 그래도 아쉬운지 목을 쭉쭉 빨아 흔적을 남기고 나서야 떨어졌다. 도윤은 그 흔적을 희성이 나가고 난 후, 1시간이나 더 자고 일어났을 때 뒤늦게 확인했지만 그런 흔적이 워낙 많아 그것이 어제 만들어진 건지 오늘 만들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윤은 홀로 점심을 먹고 소파에 앉아 영화를 봤다. 하필 틀어둔 영화가 죽었던 엄마가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온 이야기였다. 도윤은 채널을 돌리려다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장마가 시작되고 아버지와 아들의 앞으로 죽은 어머니가 돌아와 함께 지내며 추억을 만들다가 장마가 끝난 후 다시 돌아갔다. 도윤은 훌쩍거리며 휴지에 눈물을 닦았다. 아예 옆으로 가져온 휴지를 쑥쑥 뽑아 얼굴을 닦아내고 있자 핸드폰이 격하게 떨었다. 훌쩍. 도윤이 전화를 받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으응.”

-…….

“왜?”

-너 왜 울어?

“…안 울었는데?”

-왜 우냐고.

얼마나 울어댔으면 코가 꽉 막혔다. 도윤은 의미 없는 거짓말을 끝내고 코를 훌쩍였다.

“영화 봤어….”

건너편에서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은 젖은 휴지를 만지다 TV소리를 줄였다.

-나 점심 부모님이랑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응, 나는 이미 먹었어.”

-그래.

“…응, 나 끊을게.”

-하도윤.

“응?”

-나중에 전화할 테니까 내려와.

“왜?”

-같이 편의점 가게.

“편의점?”

-같이 가고 싶다며.

“아, 응.”

-끊어.

도윤이 대답을 뱉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다시 소파에 내려놓고 일어난 도윤이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라도 좀 해야 눈이 좀 덜 붓곤 했다. 숨을 참으며 찬물을 얼굴에 끼얹은 도윤이 물기를 꼼꼼하게 닦았다. 오늘은 희성과 함께 편의점에 가기로 했다. 희성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술을 마셔본 적이 없기도 하고, 앞으로 마실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술을 마셔보고자 낸 의견이었다. 어떤 종류의 술이 있는지도 궁금했고 그 핑계로 잠깐 산책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도윤이 소파에 앉으려다 울리는 인터폰에 눈을 깜빡였다. 희성은 가족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온다고 했고, 일하시는 분이 올 시간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둔 참이었다. 소리를 죽여 인터폰에 다가간 도윤이 화면에 떠있는 택배회사의 유니폼에 버튼을 꾹 눌렀다. 자신은 시킨 것이 없으니 아마 희성의 택배인 것인듯했다. 도윤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택배를 기다리기로 했다. 도윤은 센서가 꺼질 때마다 손을 휘휘 저어 불을 밝혔다. 잠시 후 문 앞에 택배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1층으로 향하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택배를 들고 들어온 도윤이 소파에 앉아 상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택배에는 그냥 일반 서적이라고만 표시가 되어있었는데 무게는 그렇지 않았다. 박스를 흔들자 공간이 남는지 텅텅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책이라기엔 좀 가벼웠으나 책이라고 표시를 해두었으니 그냥 작은 책을 주문했나 싶었다. 좀 궁금했지만 자신의 물건이 아니니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나중에 희성이 오면 뭘 샀냐고 지나가듯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도윤은 그렇게 택배를 방치했다.

***

인사를 드리는 부모님의 옆에서 함께 고개를 숙인 희성이 뒤로 빠지며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대부분 슬퍼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희성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도 오늘내일하던 사람이었던지라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희성은 문득 도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모두가 슬퍼했다. 그 당시 도윤은 툭 치면 깨질, 이미 금이 가있던 유리 같았다. 매일 울다가 지쳐서 잠들기를 반복했다.

도윤의 생각을 하고 있자 얼굴이 보고 싶었다. 여전히 자신을 밀어내도 끝까지 밀어붙이면 이기지도 못하고 딸려 오는 도윤이 좋았다. 희성은 핸드폰으로 집안에 설치해둔 카메라를 확인했다. 도윤은 아닌척해도 소파를 좋아했다. 침대에 없으면 무조건 소파에 있었다. 거실을 비추고 있는 화면을 보던 희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테이블에 못 보던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다 어차피 나중에 집에 가면 알 수 있을 테니 그만두었다. 도윤은 담요를 목 끝까지 올리고 TV를 보고 있었다. 옆에 있었다면 허리를 끌어안고 입이라도 맞췄을 텐데, 아쉬웠다. 손가락으로 핸드폰 속의 도윤을 문질러보다 이제 갈까? 하는 목소리에 화면을 죽였다. 아들을 오랜만에 본다며 좋아하는 어머니를 따라 장례식장을 벗어난 희성이 혀로 입천장을 건드리다 말았다.

도윤이 없는 식사 자리는 솔직히 따분했다. 부모님은 도윤이와 함께 살면서 싸우지는 않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식사를 하는 내내 질문을 쏟아냈다. 나중에 도윤을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대답해 주었다. 안 그래도 넓은 집인데 사람이 한 번에 둘이나 빠져나가니 너무 조용해서 싫다는 말을 들으면서는 조용히 어깨만 으쓱였다.

‘그래도 가끔 도윤이가 1층에서 내려오면 얘기도 하고 좋았는데.’

‘그랬어요?’

‘같이 차도 마시고.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귀엽기도 하고.’

부모님과 헤어져서 집으로 오는 내내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도윤의 칭찬을 곱씹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손이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역시 도윤은 남이 봐도 귀여운 편이었다. 쯧. 희성이 혀를 차곤 창문을 살짝 내렸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주차를 하면서 도윤에게 1층으로 내려오라 이른 희성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을 꾹 눌렀다. 도윤은 공동현관 앞에 서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은 뒤에서 나오는데 왜 밖을 저렇게 구경하고 있는지…. 뒤로 다가간 희성이 팔로 허리를 감싸자 놀란 얼굴이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어, 언제 왔어?”

“방금.”

“나는 아직 오고 있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냥 뭐….”

“예쁜 짓 하네.”

“뭐래…아니거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다가 떨어진 희성이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둘은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도윤은 편의점에 도착해서 괜히 눈치를 보며 주류코너로 향했다. 그게 더 수상해 보이는 줄도 모르고 주류코너를 기웃거린 도윤이 익숙한 소주와 맥주를 보면서 고민했다. 남들이 마시는 것을 똑같이 마셔보고 싶었다.

“이거?”

“마음대로 해.”

“이것도 살까?”

“먹고 싶으면.”

“보통 이거 마시던데, 우리 아빠도 이거 마시는 거 몇 번 봤어.”

익숙한 소주와 맥주를 바구니에 담는 도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희성은 과일맥주와 과일소주를 꺼내 담았다. 예상하건대 도윤은 일반 술을 마시자마자 얼굴을 구길 것이 뻔했다. 도윤을 위해 과일 맛이 나는 술을 담고 도윤이 먹고 싶은 과자를 사서 계산을 했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알바생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는 희성은 담담했고 도윤은 묘하게 설레는 얼굴이었다. 편의점에서 산 것을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온 도윤은 술을 냉장고에 넣으려다 그냥 가져오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벌써 마시려고?”

“그럼 언제 마셔.”

“아직 저녁도 안됐는데?”

“빨리 해치우게 가져와.”

“…알았어.”

냉장고에 넣었던 것을 도로 뺀 도윤이 술병을 끌어안고 거실로 나왔다. 희성은 잔이나 간단하게 먹을 과일을 꺼내왔다. 아직 5시도 안됐는데 술을 마시게 됐다. 도윤이 포크로 딸기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그 옆에 앉아 뚜껑을 딴 희성이 작은 잔에 소주를 반 정도 채웠다. 반만 채운 잔은 도윤의 앞으로, 가득 채운 잔은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희성이 소주 병을 내려놓았다.

“짠.”

“그냥 마셔.”

“짠 해줘….”

별걸 다 하고 싶어 한다며 귀찮아하는 희성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도윤이 냄새를 맡았다. 꼭 과학시간에 맡았던 냄새 같았다. 이런 냄새가 나는데 마셔도 되는 건가? 도윤이 킁킁거리다 아주 조금 홀짝여보았다. 희성은 마시지도 않고 도윤을 구경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예상했던 대로 도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희성이 웃으며 잔을 털어 넘겼다.

“우으….”

“딸기나 먹어.”

“이거, 이걸 왜…왜 마셔?”

딸기를 집어가는 손이 급했다. 쓴맛이 가득했던 입안에 딸기의 단맛이 훅 퍼졌다. 도윤에게서 오독오독, 딸기 씨를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의 잔을 가져가 대신 마셔준 희성이 이번엔 복숭아 맛 소주를 조금 따라주었다. 아까의 고통은 벌써 잊었는지 도윤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눈을 하고 소주를 홀짝였다. 표정이 아까보다 밝았다.

“음료수 같아!”

“맛있어?”

“근데 조금 쓰긴 써.”

과자를 먹고 또 소주를 홀짝인 도윤이 잔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까 소주는 정말로 과학시간에나 쓰일 법한 맛이었는데 지금 건 달고 맛있었다. 딸기를 먹으며 다른 맥주를 기웃거린 도윤이 희성을 돌아봤다.

“이거 마셔 봐도 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뚜껑을 따자 탄산이 나오며 칙, 소리가 났다. 노란 맥주가 컵에 가득 담겼다. 도윤은 이번에도 냄새부터 맡았다.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소주보다는 괜찮았다. 도윤이 맥주를 홀짝여보다 떫은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지켜보던 희성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맥주가 담긴 잔을 슬쩍 희성의 앞으로 밀어낸 도윤이 다시 복숭아 맛 소주에 손을 뻗었다.

“이거 마셔.”

“이게 뭔데?”

“사과주스.”

“사과주스?”

도윤이 입맛을 다시며 작은 캔을 끌어왔다. 이번에도 칙 소리가 났다. 냄새를 맡자 정말로 사과주스 냄새가 났다. 도윤이 조심스럽게 한 모금 넘기곤 입술을 벌렸다. 맛있었다. 진짜 사과주스 맛이 났다. 이것도 조금 쓰기는 했지만, 어쨌든 맛있었다. 도윤이 먹으려고 따랐던 맥주를 대신 마신 희성이 웃었다.

“맛있어?”

“응, 먹어봐.”

“됐어.”

“진짜 사과주스 맛 나.”

복숭아 맛과 사과주스 맛이 나는 술을 번갈아가며 마신 도윤이 목을 긁적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워진 느낌이었다. 과자보다는 딸기를 더 많이 먹던 도윤이 테이블 끝에 올려두었던 상자를 가리켰다.

“이거 아까 받았어.”

“아, 줘봐.”

여전히 책이라기엔 가벼운 상자가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 희성은 박스를 뜯어 내용물을 들여다보다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낸 듯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먼저 뜯어봐도 되는 거였는데.”

“…뭔데?”

“선물.”

“선물?”

“응.”

“뭔데?”

살짝 열이 오른 얼굴이 박스를 바라보았다. 희성은 내용물을 숨기며 도윤의 입술에 뽀뽀했다. 느닷없이 뽀뽀를 당한 도윤이 몸을 뒤로 뺐다.

“나중에 보여줄게.”

“…뭔데?”

“몰라도 돼.”

“선물이라면서….”

“그러니까 나중에.”

찝찝해진 기분으로 박스를 힐끔댄 도윤이 다시 사과주스 맛이 나는 맥주를 홀짝였다.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갔다. 근데 문제는 반도 못 마셨는데 기분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실없이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혼자 맥주 한 병을 끝낸 희성이 남은 소주를 맥주잔에다 다 따라 부었다.

“쪼끔 덥다….”

“더워?”

“쪼끔?”

“하도윤, 취했어?”

“나? 나 아직, 안 취했는데?”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여태 마신 거라곤 소주 1잔과 맥주 몇 모금이었다. 오기가 생겨 맥주를 몇 번 더 마신 도윤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시던 희성이 도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까부터 혼자 실실거리는 모습이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이었다. 생각보다도 더 약한 주량에 희성은 조금 당황했으나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괜찮아.”

도윤이 별안간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을 하면서 실실거렸다. 턱을 괴고 보던 희성에게도 웃음이 터졌다.

“맛있다, 이거 먹어봤어?”

“아니.”

“으응, 맛있는데….”

“도윤아.”

“으응? 응, 나 도윤이….”

“취했어?”

“안 취, 아니? …몰라, 뭐가 취한 거야?”

취해본 적이 없어서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취한 것 같기도 했다. 자꾸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는데 그 생각들이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으니 대충 취한 것 같았다. 맞다, 자신은 조금 취했다. 도윤이 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나 취했다.”

“아까는 안 취했다며.”

“나? 몰라, 안 취했는데….”

웃으며 횡설수설하는 도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기왕 취한 김에 더 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취한 도윤을 봐야겠다. 희성이 곧게 뻗은 손에 캔을 쥐여 주었다. 도윤은 좋다고 맥주를 홀짝였다. 딸기를 먹고, 또 맥주를 마시고, 또 딸기를 먹다가 맥주를 마셨다. 희성은 소파에 기대 늘어진 도윤을 보곤 캔을 흔들어보았다. 반 정도 마셨는지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하도윤.”

“으응…왜애….”

“취했어?”

“취했다.”

“내가 누구야?”

“너? 너는….”

도윤은 자꾸 감기는 눈을 겨우 떠 눈앞의 희성을 봤다. 너어는. 도윤이 입을 다시다가 말했다.

“희성. 김, 희성.”

“내가 누군진 알겠어?”

“으응, 너어. 너는. 희성이….”

“너는 누군데?”

“나?”

도윤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희성을 흘겼다. 그리곤 실실거리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나아는, 도윤이….”

“도윤아.”

“왜 자꾸….”

“…….”

“불러? 나…도윤이 맞는데….”

희성이 웃음을 참으며 도윤을 끌어안았다. 닿아오는 체온이 더운지 도윤이 꿈틀거렸으나 희성은 더 붙어 앉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들어 희성을 보던 도윤이 실실 웃었다. 정말로 취했다. 자신을 보고 이렇게 웃는 도윤이라니, 매일 술을 먹여야겠다.

“희성아아….”

“왜.”

“나, 나 취했다.”

“알아.”

“나 취했다.”

“안다고.”

“어떻, 어떻게 알아? 나 취한, 거….”

“야.”

도윤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희성은 멀리 있는 박스를 봤다가 도윤을 보곤 일어났다. 갑자기 허전해진 옆에 도윤이 고개를 들어 희성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어디 가?”

“기다려.”

“으응, 나 기다리는, 끅, 잘해.”

“가만히 있어.”

“으응. 근데…어디 가는데에….”

말을 반복하는 도윤을 두고 박스를 안은 희성이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도윤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멀어지는 희성을 보다가 꼬물꼬물 맥주를 쥐고 홀짝였다. 맛있다. 도윤이 웃으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욕실에 들어오면서 박스는 애초에 밖으로 던져버렸다. 희성의 흥미로운 시선이 투명한 실리콘에 닿았다. 함께 들어있던 젤은 선반에 올려두고 서비스로 온 콘돔은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얼른 쓰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외출을 하고 돌아왔으니 간단하게 씻으며 투명한 실리콘도 같이 세척을 해보았다. 안의 감촉이 이상했지만 자신이 쓸 건 아니니 일단 넘겼다. 또 중간에 멈춰서 아래를 풀 순 없으니 씻는 동안 부지런히 손가락을 넣어 입구를 넓혔다. 마치 뒤로 자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으나 참았다.

젖은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가운만 걸친 채 욕실을 나온 희성의 손에는 젤과 실리콘이 들려있었다. 도윤은 차가운 테이블에 엎어져 볼을 비비고 있는 중이었다. 침실에 들러 젤과 실리콘을 침대에 던진 희성이 도윤의 옆에 앉아 캔을 흔들어보았다. 캔이 거의 다 비어있었다. 또 맛있다고 혼자 홀짝거린 것이 분명했다. 작게 혀를 차며 볼을 콕 누르자 도윤이 입맛을 다셨다. 희성은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도윤을 안아들어 침실로 향했다. 딱딱한 테이블과는 달리 푹신한 침대에 도윤이 으응…. 하고 제대로 잘 자세를 취했다.

옷을 벗기는 것은 아주 쉬웠다. 술에 취해 잠이 든 도윤은 반항 한번 없이 속옷만을 남기고 탈의를 마쳤다. 간지러운지 배를 긁적이다가 또 쌕쌕 숨을 쉬었다. 어제도 오늘도 자신이 만들어낸 흔적들을 한 개도 빠짐없이 모두 눈에 담다가 일어난 희성이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도윤은 자신의 손이 묶이고 있든 말든 정신없이 잠을 잤다. 까만 넥타이를 도윤의 손에 꽉 묶어두고 양옆으로 벌려본 희성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등에 뽀뽀했다. 여태 선물 받은 넥타이를 이렇게 쓰게 되었다. 희성은 고민을 하다가 도윤의 눈도 함께 가렸다. 어차피 자느라 바쁠 텐데 앞을 못 봐도 상관은 없지 않나, 싶어서였다. 나중에 일어나서 울면 그때 풀어주면 됐다. 희성이 희미해지는 흔적을 따라 살을 씹어댔다. 흐릿해졌던 곳이 다시 붉은색으로 가득 찼고 그 상태에서 조금 더 빨자 검붉은 색이 되었다. 도윤의 몸에서 이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평생 남아서 볼 때마다 자신을 떠올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항상 품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빨아서 상처가 난 유두도 잊지 않고 괴롭혀주었다. 이로 긁을 때면 도윤은 아주 작은 숨을 뱉었다. 술을 마셔서 몸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그것마저도 좋아서 손으로 살을 주무른 희성이 딱딱하게 솟은 유두를 쪽쪽 빨았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지만 그냥 이 작고 동글한 것이 귀엽고 좋았다. 반대편 유두를 만지던 손으로 딱지가 앉은 곳을 긁자 피가 조금씩 샜다. 희성이 피가 나는 유두를 머금고 빨기 시작하자 도윤의 다리가 움찔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혀끝에 비릿함이 느껴졌다. 퉁퉁 부어서 피를 달고 있는 유두를 손톱으로 살짝 눌렀다가 뗐다.

상체를 마음껏 괴롭혀준 희성이 도윤을 뒤집었다. 빠르게 벗겨낸 속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베개에 볼을 대고 누운 도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희성이 말랑한 허벅지를 끌어당겨 둔부를 쳐다봤다. 흐음. 희성이 손으로 살을 움켜쥐다가 살살 쓸기를 반복했다. 도윤은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희성이 혀로 입술을 축이다 몸을 숙였다. 혀가 꽉 닫힌 주름을 핥았다. 살을 옆으로 살짝 벌려 무작정 혀부터 밀어 넣은 희성이 내벽을 문질렀다. 도윤의 발이 움찔거렸다.

닫힌 입구가 조금씩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희성이 입을 떼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구에서 선이 길게 늘어졌다. 움찔거리는 주름을 확인하곤 다시 혀를 밀어 넣었다. 따뜻해진 몸과 함께 더 따뜻해진 내벽이 혀를 감쌌다. 혀에 힘을 실어 내벽을 누르고 문지르면 말랑한 내벽이 움찔거리다 요동을 치곤했다. 혀를 빼고 조금 벌어진 아래를 쭉 빨아들이자 도윤이 허리를 떨며 신음을 뱉었다. 희성은 다시 혀를 깊숙이 집어넣고 오물오물 빨아먹는 내벽을 즐겼다. 그러자 도윤이 흑, 하고 큰소리를 냈다.

“뭐, 뭐…흐으….”

드디어 일어난 모양이었다. 희성이 웃으며 미끄러운 내벽을 핥았다.

“아…!”

앞으로 도망치면 칠수록 허리만 더 세워지는 꼴이었다. 희성이 허벅지를 끌어당겨 말랑거리며 벌어진 입구를 빨다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

“읏, 너, 너….”

“좀 더 자도 되는데.”

“이게, 흑, 뭐하…나, 나 앞이…안 보이는….”

“도윤아, 앞만 안 보여?”

도윤이 손을 들어 넥타이를 벗으려다 굳었다. 손목이 아팠다. 희성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손까지 묶었다. 분명 들려오는 목소리도 희성임을 알지만 덜컥 겁이 들었다. 여태 수많은 관계를 가지면서도 눈을 가리거나 손을 묶어본 적은 없었다. 무서움이 느껴지니 눈물부터 났다. 눈을 가리고 있는 알 수 없는 것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무서, 워, 나 이거 풀, 풀어줘….”

“뭐가 무서워?”

“아무것도 안, 보여서…흐, 풀어줘….”

“글쎄.”

짧은 대답만을 들려준 희성이 다시 뻐끔거리는 아래를 찾았다. 혀로 길게 핥아 올리자 도윤이 흐윽, 신음하며 무너졌다. 허벅지를 당겨 다시 하체를 세워준 희성이 내벽을 꾹 눌러주었다. 도윤이 묶인 손목에 이마를 대고 도리질을 쳤다. 입술에서는 뜨거운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하아, 아!”

내벽을 문지르는 느낌에 소름이 돋고 발가락이 굽었다. 도윤의 도리질이 거세졌다. 도윤이 힘을 주면 내벽과 주름이 함께 희성의 혀를 빨아들였다. 엉망인 호흡을 따라 수축하는 속도와 힘도 엉망이었지만 그게 더 흥분되었다. 도윤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성감에 훌쩍이며 눈물을 터뜨렸다.

“으읏, 그, 만…제발, 흑, 그만…해….”

“좋아?”

“싫, 흣, 아아…! 싫, 어, 아, 잠…읏!”

손목이 묶인 탓에 주먹이 모아졌다. 도윤이 부들부들 떨면서 달뜬 숨을 토했다. 희성이 축축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살을 벌려보았다. 벌어져 틈이 생긴 아래가 빠르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뻐끔뻐끔 야하게도 움직이는 입구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던 희성이 검지를 안으로 밀어 넣어보았다. 혀를 넣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에 달라붙는 내벽에 희성이 길게 뻗은 손가락을 안에서 굽혀보았다. 도윤이 숨까지 참으며 굳었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하, 하지 마. 희성, 윽, 희성아, 그, 그거 빼, 빼줘!”

“왜?”

“싫어, 싫, 하아, 아!”

“여기는 별로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진 않는데.”

“으응, 싫어, 싫, 읏….”

“정말 싫어?”

검지로 내벽을 꾹 누르자 도윤이 헐떡이며 앞으로 기어갔다. 고작 손가락 한 개만 넣었을 뿐이다. 희성은 더한 것도 넣어봤다.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희성은 손가락을 빼곤 다시 허벅지를 아래로 당겼다. 도윤이 벌벌 떨고 있었다.

“도윤아.”

“흑, 흐으, 이상…해….”

“아까 선물 궁금하다고 했지.”

도윤이 훌쩍이며 벅찬 숨을 쉬었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어 정신이 온전치가 않았다. 그저 헐떡이기 바쁜 등허리를 토닥여준 희성이 내팽개친 실리콘과 젤을 찾았다. 도윤이 힘이 풀려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눈을 가린 넥타이를 위로 벗어던졌다. 어두웠던 시야로 갑작스레 들어서는 빛에 눈이 질끈 감겼다.

눈물로 젖은 속눈썹이 서로 달라붙어 엉망이었다. 숨을 할딱이며 뒤를 돌아본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희성의 손에 이상한 투명한 것이 들려있었다. 그런데 하는 짓은 더 이상했다. 젤을 그 안에 쭉 넣고 잠시 안을 보는가 싶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목이 묶인 채로 엉금엉금 기어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희성이 다시 끌어당기는 바람에 헛수고가 되었다. 두려움이 잔뜩 어린 눈이 희성의 손을 따라 반쯤 서있는 성기에 닿았다. 젤을 머금은 투명한 실리콘이 귀두를 머금었다. 도윤이 고개를 저으며 희성을 불렀다.

“희성아, 희성아!”

“왜.”

“하, 지 마. 하지 마.”

“왜?”

“무서워, 싫어, 나 안, 안 하고 싶어.”

도윤이 애처롭게 고개를 저어댔다. 잠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눈에 담던 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의 것을 실리콘에 쑥 넣었다. 차가운 젤과 성기를 감싸는 단단하지만 말랑한 실리콘의 감촉에 도윤이 신음을 쏟아냈다.

“하아! 아!”

“음.”

“흣, 으응, 제, 제발…아…흐으….”

“좋아?”

“끅, 희…성…아으, 읏….”

희성의 손에서 실리콘이 삽입하듯 움직였다. 도윤은 눈앞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눈앞으로 우주가 펼쳐졌다. 입에서는 참지 못한 신음이 자꾸만 쏟아졌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허리가 무너졌다. 떨어진 눈물이 넥타이에 스며들었다. 고개를 숙여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희성이 다시 뻐끔거리는 아래에 혀를 밀어 넣었다.

“흐응, 흑, 아, 하…아….”

내벽을 머금었을 때보다 자극이 더 심하게 다가왔다. 도윤은 이제 아예 엉엉 울기를 택했다. 내벽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희성이 미간을 좁히며 손으로는 실리콘을, 혀로는 내벽을 문질러주었다. 도윤은 숨 막히는 쾌감에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삼키지 못한 타액을 줄줄 흘렸다.

“아! 흐응, 희성, 끅, 아아!”

“씨발….”

“하아, 나, 나아…. 흣!”

도윤이 거센 도리질을 이어가다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입구가 좁아지며 혀에 힘이 실렸다. 도윤이 몸을 떨자 내벽도 함께 떨렸다. 급하게 몸을 일으킨 희성이 도윤을 뒤집었다. 도윤은 묶인 손목으로 얼굴을 가리고 헐떡이기 바빠 보였다. 희성이 망설임도 없이 도윤의 성기를 품고 있는 것을 벗겨주자 허리가 튀었다.

“흐으, 읏, 하아, 아….”

정액과 젤이 함께 도윤의 사타구니에 후드득 떨어졌다. 흥분이 몸을 감싸자 손이 떨렸다. 희성이 떨리는 손으로 정액과 섞인 젤을 몸에 펴 발라주었다.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술기운과 사정의 여운에 도윤의 가슴팍이 빠르게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허벅지까지 번들거리는 손을 문질러 닦은 희성이 점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윤아, 우리 타투 할까?”

“하….”

“어때? 예쁠 것 같지 않아?”

위에서 뭐라고 떠들든 도윤은 생각할 정신도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더웠고, 술기운이 훅 밀려들어 몽롱했다. 멍청하게 깜빡이던 눈이 다시 성기를 자극하는 힘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너는 허벅지에, 나는 어깨에 하는 거야. 어때?”

“…흣….”

“도윤아, 좋지.”

“…으응, 응….”

“예쁘겠다.”

“하아….”

희성이 웃으며 귀두부터 천천히 삼켰다. 하…. 삽입을 하는 순간의 소름과 기분 좋은 느낌이 동시에 찾아왔다. 희성이 기둥을 완전히 삼키곤 아래를 조였다. 좋아…. 천장을 올려다보던 희성이 도윤을 내려다봤다. 도윤은 묶인 손목을 가슴팍에 올려두고 야해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풀린 눈을 엄지로 닦아주고 내벽으로 성기를 주무르자 맞닿은 손끼리 깍지를 낀다. 희성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신음하는 도윤을 보며 허리 짓을 이어갔다.

“저거랑 내 거 중에, 읏…뭐가 더 좋았어?”

“아으, 읏, 몰, 라…응….”

“대답해야지.”

“흐읏, 너, 너…아….”

“내가 더 좋아?”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어도 이것쯤은 정해진 대답이 뭔지 알았다. 도윤이 눈을 찡그리다가 손목을 들었다.

“나, 이거 풀, 어줘….”

“왜, 좋은데.”

“아파…손목이 너무 아파….”

“아파?”

“으응, 아파….”

도윤의 고개가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렸다. 허벅지를 쥐고 움직이던 희성이 배를 짚었다.

“맨입으로?”

“…흑….”

맨입이라니. 양심이 없었다. 희성은 분명 자신이 자고 있을 때 멋대로 뒤를 탐했고 눈과 손을 묶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자신은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내어준 거나 다름없었다. 서러움에 울음이 터졌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끅, 풀어줘어….”

“풀어주면 나한테 뭐해줄 건데.”

“뭘, 뭘 더 바라는, 끅, 거야….”

“하도윤.”

“싫어…왜….”

“풀어주면 네가 박아.”

“…흑, 뭐?”

“내가 싫은 만큼 박아봐.”

“…….”

“그러면 이제 다신 안 묶을게.”

“…….”

“못하겠으면 또 묶이든지. 난 상관없어.”

도윤이 눈물을 닦으며 고민했다. 히끅히끅 울던 소리가 잦아졌다. 싫은 만큼 박아보라는 제안이 생각보다 괜찮게 느껴졌는지 도윤이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이 몸을 일으키자 도윤의 것이 내벽과 함께 딸려 나왔다. 흠칫 떠는 가슴팍에 입을 맞추고 넥타이를 풀어준 희성이 침대에 누웠다. 반대로 침대에 앉은 도윤은 묶였던 곳이 아픈지 손목을 문지르고 있었다. 훌쩍. 침대에 도윤이 코를 먹는 소리만 내려앉았다.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희성이 꺼떡이며 배에 붙은 성기를 쓸다가 물었다.

“왜.”

“…뒤, 돌아서 하면 안…돼…?”

“…….”

“…….”

참을 인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던데, 사실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을 귀찮게 세 번이나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살인 한 번에 겁을 먹고 도망갈 누군가를 알았기에 희성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턱을 비틀어 혀로 이를 문지르다 엎드렸다. 그제야 도윤이 뒤에서 귀두를 맞춰왔다. 빨리 끝내고 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삽입을 시작하자 밑에서 낮은 숨이 들렸다. 내벽을 긁으며 들어가는 성기에 압박감이 더해졌다. 순간 피가 머리끝으로 쏠리는 것처럼 띵해졌다. 술이 깰 만큼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도윤이 신음하며 눈꺼풀을 꾹 내렸다가 떴다.

“읏….”

“하…. 아…희성, 아, 잠깐 너무, 너무….”

“움직, 으음. 이기나 해.”

몸과 정신이 모두 녹아버릴 것 같았다. 성기를 조이던 내벽이 이제는 알아서 주무르기까지 했다. 물속에 들어와 있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이 목을 조여 왔다. 도윤이 성기를 길게 뺐다가 콱 박아 넣었다. 희성이 휘청거리며 숨을 토했다. 끝까지 밀려든 성기가 좁은 부분을 찔렀다가 빠져나갔다. 숨이 턱턱 막혔다. 희성이 팔에 힘을 주며 입을 벌렸다. 좋아서 소름이 끼치고 환장할 것 같다는 게 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이걸 못 느끼고 살았다니 억울해서 욕이 나왔다.

“더, 세게 박아, 아! 그렇, 게….”

“흐으, 읏….”

“하, 좋아, 더…응….”

눈앞이 어질했지만 희성을 만족시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도윤도 그걸 알았다. 허리를 잡고 아까만큼 세게 박자 희성의 팔이 꺾이고 침대로 쓰러졌다. 아래만 들고 있는 자세가 되자 도윤이 어지러운 머릿속에 입술을 깨물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속이 별로였다. 멀미를 하듯 울렁거렸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조금만 느려져도 희성이 더 세게 하라며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세게 박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기와 이어진 곳은 이미 빨갛게 흔적이 남았다. 입으로 빨아줄 때처럼 내벽이 성기를 쭉쭉 빨았다. 도윤은 몸을 떨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뒤를 충분히 빨려서 그런지 박을 때마다 뒤가 함께 움찔거렸다. 자고 싶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희성의 등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만하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야.”

“…알, 았어…. 잠깐만….”

“못하겠으면 비켜.”

“하, 할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일어나 다시 허리를 잡았다. 희성은 쉴 새 없이 박히고도 부족한지 스스로 앞을 만지며 신음하고 있었다. 자신은 희성의 상대로 부족했다. 희성은, 자신 말고 더…더 대단한 사람을 상대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너무 힘드니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었다. 도윤이 허리 짓을 시작하자 앞을 만지는 손이 빨라졌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성의 허리가 떨리며 젖은 신음이 터졌다. 성기를 품은 녹진한 내벽이 떨리며 아플 만큼 조여 왔다. 도윤이 숨을 참으며 성기를 빼려다 안에 사정했다.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는소리를 내고 있자 마찬가지로 떨리는 목소리가 삽입을 요구했다.

막 사정을 마친 탓에 살짝 밀어 넣기만 해도 자극이 심하게 다가왔다. 도윤이 히끅거리며 몇 번이고 세게 박아주었다. 굵은 기둥이 내벽을 채우고 귀두가 끝을 누를 때마다 희성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절로 떨리는 손으로 성기를 빠르게 쓸어내린 희성이 흐윽, 하며 사정했다. 탁한 정액이 침대로 후두둑 쏟아졌다. 침대를 짚고 있는 팔이 떨렸다. 사정과 동시에 뒤를 조이자 우는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후으, 하…도윤아….”

“이제…그만…해….”

“…나 아직 못했으니까 계속 박아.”

“아, 아직? 왜…?”

“네가 못해서 그렇잖아.”

“…내가 못하면, 흑, 그만하면…되잖아….”

“빨리 박아.”

사정은 했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도윤은 울먹였고 희성은 아래를 조이며 성기를 더 끌어안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허리 짓을 시작한 도윤에게 맞춰 성기를 조이고 허리를 움직이던 희성이 미묘한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성기가 내벽의 끝까지 들어와 좁은 곳을 찌르고 문질렀다. 분명 흥분되고 좋았지만 꼭 화장실을 가고 싶은 듯한…. 침을 삼키던 희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윤은 관계 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울었다. 울고 싶지는 않았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희성은 멋대로 성기를 쭉 빼내며 일어나 도윤을 쓰러트렸다. 그리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부어있는 도윤과 얼굴을 마주했다. 희성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성기를 삼켰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쾌감에 도윤이 할딱였다. 여태 밑에서 잘 있다가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며 일어난 희성은 이번에도 스스로 앞을 만지며 허리를 움직여댔다. 미간을 찡그렸다가 성기를 깊게 품으며 허리 짓을 반복하던 희성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도윤이 겁을 먹고 허벅지를 흔들어보았다. 이어서 사정을 마치고도 빳빳하게 기립해있던 성기의 끝에서 물이 터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도윤이 가슴팍과 얼굴까지 튀는 물에 숨을 참았다. 처음이었다. 희성이 꼭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도윤의 몸에 쏟아진 물을 구경했다.

“끅….”

“하아, 이런, 이런 거였구나.”

“너, 너….”

“좋네…. 이게 왜 싫어?”

“으으, 너, 흣….”

도윤의 몸에 쏟아진 물을 만지자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희성이 실실거리며 굳은 얼굴에 입술을 눌렀다. 좋잖아, 이거. 희성이 귀를 핥고 멀어졌다.

“이제, 그, 그만….”

“왜, 너도 하자.”

“싫어, 난 싫어!”

“너도 싸면 그만할게.”

“아! 싫어, 싫어, 아, 제발, 흐응…!”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발버둥을 쳤지만 희성은 성기를 뽑아먹을 것처럼 쪽쪽 빨아들이고 있었다. 열이 오르고 지나친 자극에 부어있는 내벽이 자꾸만 성기를 주물렀다. 자신을 밀어내는 손을 잡아다 위로 올린 희성이 귓바퀴를 핥고 빨면서 힘을 주었다. 내벽과 비슷하게 부어있는 눈이 성감을 참지 못하고 질끈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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