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희성이 실실거리며 눈앞의 하얀 어깨에 뽀뽀를 남기자, 도윤이 수치스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고 우는 도윤의 가운을 아래로 내리자 팔을 올리고 있느라 가운이 반만 벗겨졌다. 희성은 등에도 입을 맞추며 도윤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샤워기로 온몸을 간단하게 씻고 욕조에 들어온 순간부터 도윤은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열기에 얼굴이 익든 말든 상관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윤의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희성이 발로 도윤의 다리를 쓸어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훌쩍.
“어차피 다른 것도 다 싸면서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어?”
훌쩍.
“하도윤.”
훌쩍.
희성이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훌쩍이는 소리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희성이 가까이 다가가 손목을 붙잡고 떼어내자 열기에 익은 얼굴이 울고 있었다. 한두 번만 더 하고 싶은데…. 이게 물인지 눈물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대충 눈물이겠거니, 도윤의 얼굴을 닦아준 희성이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덕분에 예쁜 이마가 드러났다. 이마에도 입을 한번 맞추고 젖은 눈가에도 입맞춤을 남긴 희성이 입을 열었다.
“계속 울 거야?”
“…….”
“이제 나랑은 말도 안 할 건가 보지?”
“…….”
얼룩덜룩 엉망인 몸을 끌어안고 훌쩍거리던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희성이 실실거리며 손으로 물을 튕겨내자 도윤의 노려보는 시선이 1초간 닿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하도윤, 너 진짜 유치원생이야?”
“하지 마.”
“도윤이 몇 살이야?”
“하지 말라구.”
도윤이 아예 몸을 돌려 앉았다. 욕조 밖으로 넘쳐나는 물을 쳐다보던 희성이 뒤에 딱 붙어 팔로 허리를 감았다. 벗어나려 뒤척이던 도윤이 또 한 번 코를 먹었다.
“도윤아, 전에 그랬지. 네가 어떻게 하면 내가 질려 하겠냐고.”
“…….”
“다음부턴 질릴 틈이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해.”
“…….”
“네가 이러는데 내가 질릴 리가 없잖아.”
다부진 손이 배를 문질렀다가 다시 죽은 성기에 닿았다. 도윤이 읏, 하고 몸을 떨며 물속에서 손을 떼어냈다. 거절당한 희성은 개의치 않고 허리를 뒤로 끌어당겨 욕조에 기대앉았다. 도윤은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에 입술을 내밀었다.
“자꾸 닿잖아….”
“너랑 있으면 늘 이 상태긴 해.”
쪽. 촉. 촉촉. 어깨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을 말릴 힘이 없었다. 도윤이 물속에서 손을 쥐었다가 펴며 물장난을 쳤다. 어깨너머로 도윤이 물장난을 지켜보던 희성이 작게 웃으며 그랬다.
“오리라도 사줄까?”
“오리?”
“꽥꽥.”
“오리…? 아…. 나 애기 아니야!”
“아니야?”
희성의 말을 이해하고자 잠시 멈췄던 손이 얼굴을 쓸었다. 분명 아니라고 했음에도 어깨에서 웃는 것이 느껴졌다. 도윤이 꿍얼거리며 팔꿈치로 희성을 밀어냈다. 뒤에서 자꾸 닿아오는 단단함을 피하고자 몰래 몸을 떨어뜨리려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눈치챈 희성이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냥 가만히 있어. 자꾸 움직이는 게 더 자극돼.”
“…….”
“맘 같아선 너한테 벌써 처박고도 남았어.”
“…으응.”
“이대로 얌전히 있어.”
“응….”
도윤이 욕실을 둘러보며 몸에 힘을 살짝 빼자 희성이 아예 연한 살을 쭉쭉 빨아댔다.
“그만 좀…해.”
“싫어.”
“따가워….”
그 말에 씹던 살을 확인한 희성이 그 위로 입술을 내렸다. 어깨가 엉망이었다. 뿌듯했다. 도윤의 몸은 오직 자신만이 이렇게 만들 수 있었다. 도윤의 등에 비벼지는 아래가 자꾸 꺼떡였지만 무시했다. 지금 이대로도 좋았다. 도윤의 볼을 돌려 입을 맞춘 희성이 혀를 섞었다. 끙끙거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하도윤이 너무 좋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혀를 쪽쪽 빨면서 몸을 더듬기 시작한 희성은 결국 발기가 풀린 도윤의 성기를 붙잡고 쓸어댔다. 이제 그만하기로 해놓고 또 약속을 어기는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손으로는 유두를 꼬집고 굴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분홍빛 성기를 열심히 주물렀다. 도윤이 끙끙거리며 목에 달뜬 숨을 뱉으니 희성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머금었다. 따뜻한 물속에서 주어지는 감각에 도윤의 입술이 벌어졌다. 도윤은 혀를 섞으며 다리를 오므렸지만 두 무릎이 닿으려고 할 때마다 희성이 다리를 벌리며 성기를 자극했다.
“흐으, 응, 이제, 그으만….”
“다리 더 벌려.”
“읏, 힘, 힘든데, 하아…!”
“응, 예뻐.”
잔뜩 풀린 눈이 희성을 쳐다봤다가 무너졌다. 감긴 눈꺼풀과 이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희성은 찰박거리며 성기를 문지르다 훌쩍거림과 동시에 맑은 물에 퍼지는 탁한 정액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만, 이제 나 그만, 하고 싶, 흐윽, 어어….”
“알았어.”
“흑, 진짜 그만할 거야?”
“응.”
“나 진짜, 진짜 힘들었는데….”
“알아.”
울컥, 정액을 뱉어내는 성기를 마지막까지도 쥐어짜낸 희성이 다시 키스했다. 헐떡거리느라 숨도 모자라 죽겠는데 혀를 빨고 놓아주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린 도윤이 다리를 모았다. 이때만큼은 희성도 다시 다리를 벌려주거나 막지 않았다.
***
1학기가 다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드디어 자리를 바꾸면 안 되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반대했고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만 목소리를 키웠다. 선생님은 오늘까지만 참고 오후에 있을 자습시간에 자리를 바꾸는 걸로 하자며 교실을 정리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도윤도 내심 기대를 하는 중이었다. 만약 희성과 자리가 멀어진다면? 상상만 했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간표를 확인하고 교과서를 꺼낸 도윤이 괜히 모서리에 동그라미를 그려댔다. 별 모양도 그려보고, 세모, 네모도 그려봤다. 희성은 가만히 앉아 도윤의 낙서를 구경했다.
점심엔 치즈돈가스가 나왔다. 희성은 별로 맛이 없다고 했지만 도윤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희성이 자신의 것도 먹으라며 건네준 것도 맛있게 먹었다. 급식에는 요구르트도 나왔다. 빨대가 없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물을 마시는 대신 요구르트를 마시며 반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몫을 얼른 마시고 희성이 준 요구르트도 먹을 계획이었다. 달달한 요구르트의 맛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입맛을 다시며 희성의 요구르트도 까서 홀짝거린 도윤이 먼저 양치질을 시작한 희성에게 시선을 주다 남은 것을 빠르게 목으로 넘겼다. 맛있다. 혀로 입술을 쓸면서 일어난 도윤이 빈병을 쓰레기통에 넣고 칫솔을 들었다. 운동장에서 열린 축구 경기를 지켜보며 이를 닦은 도윤이 교실을 나서는 희성의 뒤를 졸졸 쫓았다.
목적이 있으니 시간은 잘 갔다. 6교시가 끝나고 청소도 열심히 했다. 본인의 몫인 교실 바닥 쓸기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만화를 보기도 했다. 희성은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는 얼굴로 음악실을 청소하러 가서 자리에 없었다. 자유시간. 정말 말 그대로 자유 시간이었다. 방송실에서는 점심시간과 청소시간에 노래를 틀어주었는데 가끔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오늘은 옛날에 유명했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옛날에 아빠 차를 타면 종종 듣곤 했던 노래였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도윤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자습이 시작되기 전, 교무실에서 작은 통과 선생님이 만들어준 종이를 가지고 돌아온 반장은 칠판에 자리 표를 만들었다. 도윤은 허리를 펴고 앉아 반장의 손을 따라 눈을 굴렸다.
“선생님은 못 들어오신대서 그냥 우리끼리 바꿔야 돼.”
“아싸.”
“나온 번호 그대로 앉으라고 하기는 했는데, 자리 바꾸려면 각자 알아서 해.”
“누구부터 뽑아?”
“1분단 맨 처음에 앉은 사람이랑 마지막 분단 끝에 앉은 사람끼리 가위바위보 해.”
도윤이 양옆을 돌아봤다. 가위바위보가 한 세 번쯤 이어지고 도윤이 앉은 분단이 제일 첫 번째로 번호를 뽑게 되었다. 결과를 확인한 반장은 종이를 통에 넣고 몇 번 흔들더니 조용히 뽑으라며 통을 밀어주었다. 차례대로 일어나 종이를 뽑은 아이들은 본인의 번호를 확인하곤 칠판에 이름을 적고 자리로 들어갔다.
이제 곧 도윤의 차례였다. 앞에 앉은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오자 도윤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 통에서 번호를 하나 뽑았다. 29번. 칠판을 훑은 도윤이 29번에 이름을 적고 몸을 돌리자 언제 나온 건지 희성이 종이를 뽑고 있었다. 도윤은 잽싸게 자리로 돌아와 희성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희성도 칠판을 훑고 있었다. 희성의 손이 올라가고, 도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20번. 20번에 ‘김희성’ 이라는 이름이 적혔다. 도윤은 눈을 크게 뜨고 칠판을 쳐다봤다. 자신은 3분단의 맨 끝, 희성은 1분단의 중간이었다! 완전히 찢어졌다! 도윤이 절로 튀어나오는 행복함을 꾹 누르곤 희성을 살폈다.
희성은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희성을 마지막으로 1분단의 자리 뽑기가 끝나자 2분단의 자리 뽑기가 시작됐다. 앞자리에 걸린 누군가는 욕을 했고 뒷자리를 뽑은 누군가는 좋아했다. 도윤은 얼른 자리를 바꾸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마지막에 앉은 사람까지 모두 번호를 뽑았고, 칠판에 만들어진 표는 빈 곳 없이 빽빽했다. 다른 반은 수업 중이니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옮기라는 반장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책상을 옮겼다. 학기가 반이나 지나가고 있는데 인사도 못 해본 짝과 어색하게 앉아 교실을 둘러보던 도윤이 볼을 긁적이는 척 웃음을 숨겼다. 희성과 멀어졌다.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혼자 실실거리며 문제집을 펼친 도윤은 동그라미가 보이는 족족 볼펜으로 그 안을 색칠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자습이 끝나자 희성은 도윤의 짝에게 다가와 자리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말이 요구지 완전히 강제였다.
“바꿔.”
“어?”
“자리 바꾸라고.”
도윤은 자신의 새로운 짝이었던 아이에게 간절함을 내비쳤다. 안 돼, 가지 마…. 도윤의 눈이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짝에겐 희성이 더욱 무서운 존재였다. 문제집을 정리하고 책상을 옮기려는 짝을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도윤은 차마 희성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희성의 배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 선생님이 자리 바꾸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선생님이….”
“자리 바꿔서 좋은가 보네.”
“…….”
도윤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둘의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짝은 책상을 끌고 희성의 자리로 향했다. 원래 희성의 짝이 될 뻔했던 아이가 희성의 책상을 끌고 와 옆에 놓아주기까지 했다. 도윤은 절망했고 희성의 짝이 될 뻔했던 아이와 도윤의 짝이 될 뻔했던 아이는 서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윤, 머리 그만 굴려.”
“…….”
짜증이 났는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성은 가방을 들고 도윤을 기다렸다. 이번엔 희성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풀이 죽은 도윤이 가방을 메고 희성의 뒤를 따랐다. 신발을 신고, 교문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교문 앞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라 가방을 끌어안고도 상한 속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저녁을 먹었다. 희성도 아버지가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가족들과 저녁을 먹어야만 했다. 1차로 희성의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2차로 도윤과 도윤의 아버지가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그동안 아버지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구 풀어냈다. 연석은 아들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냐며 웃었고 도윤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아버지와 식사를 마치고도 2층으로 올라가지 않은 채 아버지의 방에서 뒹굴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버지의 냄새가 가득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안고 코를 박기도 했다.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즘 학교에서 별일은 없고?”
“네, 괜찮아요.”
학교에서 희성에게 당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점령했지만 그것을 아버지에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빠는 희성이가 있어서 좀 안심이 되네.”
이불을 끌어안고 꼼지락거리던 발이 뚝 멈췄다.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과외도 같이 해주고, 학교에서도 잘 지내주는 것 같고.”
“…….”
“나중에 회장님이나 희성이한테 여태 받은 걸 다 갚으려면 고생 꽤나 하겠어.”
“…….”
“아빠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신경도 많이 못써주고.”
“…아니에요.”
“나중에 여유 생기면 같이 여행도 가고 다시 그렇게 살자, 응?”
“네….”
내가 당한 일들을 털어놓으면 아빠는 뭐라고 할까? 당장 이사를 가자고 할까?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도윤이 이불에 얼굴을 박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연석은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도윤의 기분은 착잡해졌다.
“저 그만 올라가 볼게요.”
“응,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얼른 올라가서 자.”
“아빠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도윤이도 잘 자고.”
“네에.”
계단까지 도윤을 바래다준 연석은 웃으며 얼른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뒤를 돌아본 도윤이 한숨을 삼켰다. 그리곤 닫힌 희성의 방문을 잠시 노려보는 시간을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 도윤은 터덜터덜 걸어와 침대에 엎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꼬인 건지…. 한숨만 나왔다. 침대에 얼굴을 박고 있자 숨이 막혀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도윤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아버지의 회사가 망했고, 잠시 방황하던 아버지에게 친구라는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선택권이 없었던 아버지는 친구의 손을 잡았지만 그것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친구 하나만 믿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 길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희성을 만났고,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했다. 희성은 어머니의 병실을 1인실인 것도 모자라 VIP실로 옮겨주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에겐 새로운 직업이 생겼고 나에게는 새로운 집이 생겼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매일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희성이 주는 선물은 모두 고가의 물건들뿐이었다. 선물을 주면서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옆에 있어주면 된다고 했다. 남들은 이것을 보고 다 무너져가는 것을 바로 세워주었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원하지 않는 구원은 받고 싶지 않았다. 아까 희성에게 고맙다고 했었던 아버지처럼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만이 구원 타령을 했다.
희성과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싫었다. 희성은 관계 중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았고 지쳐서 기절을 해도 그만두지 않았다. 억지로 짜낸 쾌감이 무서웠고 희성과 관계를 맺는 날이면 항상 모든 것이 무서웠다. 사정한 것을 먹어야 하는 것도 싫었고, 희성이 씻겨주는 것도 싫었다. 수치스러웠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감히 구원이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내가 원해서 얻은 것들이 아니었다. 받는 사람이 싫어하는데 이게 어째서 구원이라 불린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희성은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탐할 수 있었고 그 사실은 둘만의 비밀이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곤 몸을 일으킨 도윤이 핸드폰으로 동영상 어플을 틀었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더 이상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늘은 뭘 보지. 침대에 엎드려 엄지만 움직이던 도윤이 액션 영화의 예고편을 발견하곤 톡, 클릭했다.
옛날에 서준과 함께 자주 보러 다녔던 영화 시리즈였는데 스포를 당할까 봐 개봉을 하자마자 보고는 했던 영화였다. 재미있었는데.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이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고, 게임을 하고.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였다. 영상이 재생되자 웅장한 소리와 함께 히어로들이 나와 빌런들과 싸우는 모습이 나타났다. 도윤은 멍하니 주인공들을 따라 눈을 굴렸다.
예고편을 하나 보다 보니 다른 영상도 보고 싶어졌다. 도윤은 현재 올라와 있는 예고편들을 모두 재생했다. 영화보고 싶다. 영화관에 간 게 언젠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영화관에 가려면 희성이 허락을 해줘야만 가능했는데 희성이 허락해 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자신이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이걸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또 풀이 죽어 예고편만 돌려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희성이었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희성이 도윤의 위에 올라타 어깨에 입을 맞췄다. 허리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도윤이 몸을 뒤척였다.
“다른 냄새나.”
“무슨 냄새?”
“…싫은 냄새.”
“아빠 방에 있다가 와서….”
“다른 냄새가 나야 되는데.”
희성이 숨을 들이쉬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그냥 뭐.”
“그냥, 그냥….”
웅얼웅얼. 도윤이 핸드폰을 끄고 베개 밑으로 밀어 넣자 이번엔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던 희성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갔다. 비밀번호는 이미 공유된 지 오래라 잠금을 푸는 것은 쉬웠다. 희성이 최근 목록을 눌러 도윤이 봤던 동영상 어플에 들어갔다. 재생 목록에는 모두 한 영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뒤에서 흐음. 하고 작은 소리가 내려앉았다.
“이거 보고 싶어?”
“으응….”
“집에서 봐.”
“…….”
도윤이 손등에 턱을 얹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희성은 그 뚱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다시 도윤의 머리카락과 목덜미에 코를 박은 희성이 느릿하게 내려와 슬금슬금 잠옷을 끌어올렸다. 도윤이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싫어어.”
“안 해.”
“그럼 왜!”
“그냥.”
희성은 잠옷을 위로 올려 드러난 하얀 살에 쪽쪽, 뽀뽀를 남겼다. 척추뼈를 따라 입술을 찍은 희성이 다시 잠옷을 내려주었다. 뽀뽀를 남길 때마다 움찔 떨리던 몸이 잠잠해지고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영화관 가고 싶어….”
“영화관?”
“응.”
“왜.”
“영, 영화 보고 싶어서.”
“집에서 보면 되잖아.”
“싫어, 영화관….”
“…영화 보러 갈까?”
“진짜?”
“응.”
도윤의 위에서 내려온 희성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언제? 언제 가?”
“그렇게 가고 싶어?”
“응, 나 팝콘도 먹어도 돼?”
“마음대로 해.”
“응, 응. 언제 갈 건데?”
“토요일에.”
“진짜 가?”
영화 보는 게 그렇게 좋은가…. 희성이 말랑한 볼에 얹은 손을 토닥거렸다. 도윤은 기대에 찬 눈을 빛내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자신을 보라는 희성의 말 한마디에 얌전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토요일에 사진 찍고, 영화 봐.”
“진짜 영화관 가?”
“가기 싫어?”
“아니, 가고 싶어.”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진이 필요했다. 토요일에 사진을 찍고 영화를 보러 가면 될 것 같았다. 희성은 온종일 보고 또 봤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질리지도 않고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었다.
“불 끄고 올까?”
“아니.”
“안자?”
“졸려?”
“조금…?”
자신을 피하는 눈을 뚫어져라 보던 희성이 도윤의 목을 끌어당겼다. 졸지에 희성에게 안긴 꼴이 된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으음.”
“자.”
“…이러고?”
“응.”
“불편한데….”
“자라고, 도윤아.”
“으응.”
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몸을 힘주어 끌어안자 도윤이 얌전해졌다. 희성의 가슴팍이 눈앞에 있었지만 너무 가까워서 어둡게 보이기만 했다. 조금 불편하기는 했으나 희성은 자신이 잠들 때까지는 계속 이러고 있을 사람이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 위에서 희성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은 암흑 속에서 저도 모르게 그 호흡을 따라 숨을 쉬다가 느껴지는 심장박동소리에 집중했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 손을 희성의 허리에 얹어보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빨리 뛰는 느낌이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도윤은 허리에 얹었던 손을 내림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
***
도윤의 원래 계획은 까만 와이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으려던 것이었으나 희성에게 기각 당했다. 사진관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은 도윤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거울을 확인했다. 더워죽겠는데 자신은 교복 차림이었다. 하복이면 모를까, 긴팔의 하얀 와이셔츠에 남색의 넥타이와 짙은 회색 니트인 춘추복을 입고 있었다. 입고 왔던 셔츠를 들고 화장실을 나온 도윤이 터덜터덜 걸어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희성이 고개를 들어 도윤을 쳐다봤다. 역시, 도윤은 교복이 잘 어울렸다.
사진은 도윤이 먼저 찍기로 했다. 쭈뼛거리며 흰 배경을 등지고 앉은 도윤이 어색하게 카메라를 쳐다봤다. 희성은 그 뒤에 서서 도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사는 테스트 삼아 한번 찍은 사진이 괜찮았는지 그 후로 이것저것을 요구해왔다.
“조금만 웃을게요.”
희성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카메라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네, 한 번 더. 사진이 찍히는 소리가 몇 번이나 더 들려오고 수고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도윤은 뻣뻣하게 앉아있었던 몸에 힘을 풀었다. 사진만 몇 장 찍었을 뿐인데 기가 빨렸다. 답답했던 넥타이를 살짝 아래로 내리고 단추를 풀었다. 힘들어…. 도윤이 지친 기색으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아주 간단한 보정만 들어간 사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저렇게 생겼었나? 볼을 긁적이며 사진을 보다가 사진이 찍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희성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런 사진을 찍는 것이 익숙한 건지 희성은 요구가 들어오기도 전에 알아서 표정을 정리했다. 찍힌 사진이 연결된 컴퓨터에 들어오고 도윤은 화면에 뜬 희성의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눈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사진이 더 찍히고 희성의 사진이 폴더에 들어오자 사진을 확인하던 직원이 입을 열었다.
“둘이 뭐 연습생 이런 건 아니에요?”
“네?”
“친구가 다 잘생겼네.”
“아….”
“이거 잘 나왔다.”
화면에 뜬 희성의 얼굴을 보던 도윤이 고개를 틀었다. 이제 막 촬영을 다 끝낸 건지 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칭찬하던 직원은 아까 도윤의 사진을 보정했던 것처럼 희성의 사진도 빠르게 보정을 끝냈다.
교복을 넣어둔 가방을 메고 증명사진이 담긴 작은 봉투를 쥔 채 사진관을 나온 도윤은 영화관으로 가는 내내 사진을 구경했고 영화관에 도착해서도 사진을 계속 꺼내봤다. 신기했다. 내가 이제 주민등록증을 만들 수 있다니. 아직은 학생이었지만 마음만은 성인이 된 듯 설렜다.
“사진 줘봐.”
“여기.”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 카페에 들어온 둘은 음료를 하나씩 시켜놓고 사진을 구경했다. 희성의 손에 들어간 증명사진은 그대로 희성의 지갑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증명사진을 빼앗긴 도윤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뭐야? 내 사진 줘.”
“내 거야.”
“그게 왜 네 거야? 내 사진이야. 줘.”
“네가 줬잖아.”
“나는 그냥 보려는 건 줄 알고 준 건데….”
“너도 내 거 가지든가.”
“…난 괜찮아.”
거절의 말에도 희성은 자신의 사진 하나를 도윤의 봉투에 넣어주었다. 가져봤자 필요도 없는 사진을…. 도윤이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 마시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전부 영화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빨대를 휘젓자 얼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도윤아.”
“응.”
“좋은 말로 할 때 눈 돌려.”
“응?”
“왜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봐? 뭐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있어?”
“…….”
또 시작이다. 도윤이 눈을 내리깔고 얼음만 쳐다봤다. 오늘 보러 온 이 영화는 꼭 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영화도 못 보고 집에 갈 순 없었다.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아이스티를 꿀꺽꿀꺽 삼켰더니 순식간에 반이나 줄어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10분 전에 극장으로 들어온 도윤은 콩닥콩닥 설레는 마음을 끌어안고 광고를 지켜봤다. 품에는 먹고 싶다던 팝콘도 들려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달콤한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10분 동안 팝콘을 열심히 주워 먹었다. 광고가 지루한지 도윤의 어깨에 기대 하품을 하는 희성에게도 팝콘을 주었다. 처음엔 거절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먼저 입을 벌리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희성은 자신들을 힐끔거리며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봤다.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내내 이쪽에 관심을 두는 것이 불쾌했다. 어깨에 기댄 머리를 비비적대자 팝콘을 달라는 뜻인 줄 알았는지 입안으로 팝콘이 들어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팝콘을 씹었다.
“목말라.”
“콜라 마셔.”
“줘.”
“…네가 마시면 되잖아.”
“줘.”
괜히 주변의 살핀 도윤이 빨대를 물려주었다. 콜라가 담긴 컵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의 피규어가 뚜껑에 달려있었는데 도윤은 컵을 받자마자 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피규어를 가방에 넣어두었다. 캐릭터들이 한가득 박혀있는 컵에서 시선을 뗀 희성이 콜라를 마시는 사이 극장에 불이 꺼졌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양쪽에 달린 스피커에서 웅장한 소리가 영화관을 울렸다. 기댄 머리를 살짝 틀어 도윤을 쳐다보자 팝콘을 먹는 것도 멈추고 집중하기 시작한 얼굴이 보였다. 희성은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희성에게 영화는 그냥저냥 그랬다. 이 영화의 시리즈를 챙겨보는 편도 아니었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윤에게는 꽤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극장을 나오면서도 쫑알쫑알, 화장실을 갔다 와서도 쫑알쫑알. 머리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는데도 쫑알쫑알. 희성은 대충 대꾸를 해주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닿는 도윤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자리가 바뀌어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도윤은 입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있었어?”
“응, 응.”
“배고파?”
“팝콘 먹어서 별로 고프지는 않은데….”
도윤이 주변을 구경하며 대답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 희성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에는 신기한 것이 많았다. 만화에 관련된 물건들을 파는 곳에서 열심히 기웃거리던 도윤은 결국 키링 하나를 얻었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찾아와 키링을 만지작거리기에 가지고 싶냐고 했더니 아니, 뭐어…. 하면서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도윤은 작은 캐릭터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희성을 졸졸 쫓는 동안에도 계속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대충 구경이 끝났으니 계산을 하고 나가려던 희성의 눈에 작고 동글동글한 오리 캐릭터가 들어왔다. 파란 모자를 쓴 오리와 분홍 리본을 달고 있는 캐릭터들이었는데 인형에 관심이 없는 희성에게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모양새였다. 희성은 분홍 리본을 단 인형을 쥐고 옆을 돌아봤다.
“뭐야?”
“이거 너같이 생겼다.”
“…아닌데.”
인형은 희성의 손에서 솜이 죽었다가 살아나길 반복했다. 인형이 불쌍해서 다시 제자리에 놓아주자 희성이 미련 없이 키링을 가져가 계산을 했다. 도윤은 그 뒤에 서서 계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실실거리며 키링을 가방에 달고 걷는 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지금 도윤의 모습은 꼭 산책을 나온 강아지 같았다. 희성은 구경을 하느라 바쁜 도윤을 보며 역시 외출은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윤이 걸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키링이 달랑달랑 움직였다. 꼭 그게 자기는 도윤이가 좋아해 주는데 너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 희성의 기분이 저조해졌다. 사주질 말걸 그랬다.
“저기.”
“응.”
“나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아이스크림?”
“으응, 아이스크림….”
키링을 노려보던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근처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었다. 도윤은 어린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아주 높이 쌓아주는 직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먹고 싶어?”
“응!”
도윤이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여러 번 끄덕이자 머리카락이 붕붕 흔들렸다. 아이스크림은 콘과 컵 중에 고를 수 있었다. 도윤은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컵을 골랐다.
“맛은 어떤 맛으로 하시겠어요?”
“어어….”
맛은 바닐라와 초코, 딸기가 있었다. 도윤이 가방끈을 매만지며 고민을 하다가 초코 맛을 고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사진도, 영화도 팝콘도 키링도 모두 희성이 사주었으니 아이스크림 정도는 스스로 사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드를 건네는 손이 더 빨랐고 직원은 빠르게 카드를 긁었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됐어.”
“그래도….”
“앉아있어.”
“아이스크림은 내가 가져갈래.”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마.”
“응….”
웅과 비슷한 발음으로 웅얼거린 도윤이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직원을 쳐다봤다. 직원은 컵을 살살 돌려가며 아이스크림을 쌓고 있었다. 회오리 모양으로 올라가며 꽤 높아진 아이스크림을 받고 다가온 희성이 컵을 내려놓자 도윤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투명한 숟가락으로 맨 위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푹 떠서 입으로 가져간 도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부모들이 왜 자식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말하곤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도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아이스크림이 녹기도 전에 열심히 퍼먹은 도윤은 아직 반이나 남은 것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숟가락이 도윤의 입술을 스쳤다가 입속으로 들어갔다. 입술에 아이스크림이 묻은 것도 모르고 열심히 먹기만 한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던 희성의 다리가 풀렸다. 도윤은 갑자기 입술을 닦아내는 엄지에 고개를 뒤로 뺐다.
“다 묻히고. 네가 애야?”
“그, 그럴 수도 있지! 여기 휴….”
희성은 그것도 아깝다는 듯 엄지를 쪽, 빨았다. 덕분에 휴지를 밀어주는 손이 느려지다 아예 멈춰버렸다.
“그걸 왜…먹어…?”
“맛있어 보여서.”
“…준다고 할 때는 안 먹겠다고 해놓고….”
“도윤아 말 좀 크게 해.”
“나 아무런 말도 안 했어.”
도윤은 혼자 꿍얼거려놓고 희성이 되물을까 봐 아이스크림을 빠르게 퍼먹었다. 입안이 너무 시렸지만 참을만했다. 먹는 내내 또 희성이 손으로 닦아 줄까 봐 경계하며 휴지로 입을 닦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
모두가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물론 고3들에겐 보충수업이 필수라 방학 중에 학교를 나와야 했지만 몇 주만 나오면 일주일 동안은 정말 제대로 된 방학을 즐길 수 있었다. 천장에서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쏟아졌다. 도윤은 집에서 가져온 카디건을 입고 자습을 하고 있었다. 면접을 보러 간 사람들도 있고 교실이 너무 추워 차라리 복도에서 하겠다며 책상을 들고나간 사람들도 있었기에 교실은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필기를 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문제집을 본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목이 아파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던 도윤은 턱을 괴고 공부 중인 희성을 힐끔거렸다. 자신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복을 입으라고 집착하더니 본인은 와이셔츠를 벗고 까만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반팔을 입고 있어서 드러난 팔이 탄탄했다. 도윤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의 팔을 만지작댔다. 말랑했다. 가끔 희성의 팔을 만질 때가 있었는데 자신의 팔과는 영 딴판이었다.
괜히 머쓱해져 입맛을 다신 도윤이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려다 책상에 엎드리는 희성으로 인해 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도윤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뜬 희성이 손을 뻗어 도윤의 오른손을 잡아 내렸다. 오른손잡이인 도윤이 손을 털어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놔줘.”
“싫어.”
“그러면 나 공부는 어떻게 해?”
“그건 네 사정이지.”
작게 속삭이며 나눈 대화에 도윤이 입술을 내밀고 문제집 끝을 구겼다. 자신들이 맨 끝자리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남들이 이 모습을 다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희성은 아예 깍지를 낀 후 눈을 감았다. 혹시 몰라서 교실을 둘러본 도윤은 모두 각자 할 일을 하기 바쁘다는 것을 확인하곤 문제를 읽기만 하다가 희성을 쳐다봤다. 정말 잠을 자는 건지 희성의 등이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잘 땐 저렇게 멀쩡한데…. 차마 손을 뻗지는 못하고 볼펜으로 희성의 머리카락을 건드려본 도윤이 입술을 씹다가 책상에 엎드렸다.
틈만 나면 맞춰오던 입술을 한번 보고, 평소 자신이 무서워하던 눈도 마음껏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한참을 보고 있었지만 희성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고 가슴께가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결국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도윤이 그 상태로 평화로운 교실을 쳐다봤다.
희성과 맞잡은 오른손이 따뜻했다. 혹시나 힘이 풀리진 않을까 손을 꼼지락대자 희성이 손을 더 꽉 잡아왔다. 도윤은 오늘도 벗어나기를 포기하며 허리를 폈다. 오른손이 잡혀있어서 공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왼손이 남아있었다. 복도가 보이는 창문으로 선생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한번 하고 핸드폰을 꺼낸 도윤이 동영상 어플을 찾았다. 시간을 때우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
도윤은 보충을 듣는 기간 동안 담임선생님과 과외 선생님에게 여러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도 성적이 나쁘지는 않아서 상담은 무리 없이 잘 진행되었다. 희성의 경우도 비슷하거나 도윤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또 한 가지, 두 사람에게는 학생증이 아닌 주민등록증이 생기기도 했다. 도윤은 주민등록증을 받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신나서 사진을 찍고 지갑에 잘 넣어두었다. 희성도 잠시 앞뒤로 훑어보고는 지갑에 넣어두었다. 몇 달만 지나면 정말로 성인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도윤, 혼자 돌아다니다 길 잃어버리지 말고 빨리 따라와.”
“응, 근데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앞에 있을 테니까 다녀와.”
“응.”
“다른 사람이 말 걸면 무시해.”
“응.”
“다녀와.”
“으응.”
둘만의 여행이 가고 싶었다. 기사가 붙어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그런 여행 말고, 정말 단둘이서. 차가 있었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아직 면허를 딸 나이가 아니라 기차로 만족하기로 했다. 도윤의 가방을 옆에 두고 앉아서 목을 돌리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희성은 손을 털며 나오는 도윤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물기를 털며 다가온 도윤에게 손수건을 내밀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손을 닦는다. 희성은 시간을 확인하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가자.”
“응, 근데 나….”
“또 뭐.”
“편의점 한 번만 갔다가 가도 돼?”
“거긴 왜.”
“물 사려고….”
귀찮게. 희성이 대놓고 귀찮다는 티를 냈더니 도윤은 입을 다물고 눈알만 굴렸다. 지는 쪽은 결국엔 마음이 있는 쪽이었다. 혀를 차곤 편의점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윤이 졸졸 쫓아왔다.
도윤은 편의점에서 물과 새콤달콤을 샀다. 새콤달콤은 2개를 사면 1개를 더 준다기에 총 3개를 샀다. 포도 맛, 딸기 맛, 복숭아 맛. 포도와 딸기는 물과 함께 가방에 넣어두고 복숭아 맛을 까면서 희성을 쫓았다. 제일 먼저 깐 것은 자신이 먹고 그다음에 깐 것을 희성에게 내밀었다. 도윤의 가방을 짐칸에 올리고 앉은 희성이 손바닥에 올라온 포장지를 내려다봤다.
“맛있어.”
“…….”
“맛있는데….”
입에 있는 것을 열심히 굴리다가 씹던 도윤이 희성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희성은 이런 걸 딱히 먹어본 적이 없었다. 꼭 불량식품 같기도 했다. 도윤은 묘하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왔다. 먹기 싫은데. 희성은 길고 긴 고민 끝에 껍질을 벗긴 복숭아 맛을 입에 넣었다. 도윤은 아직도 희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맛있지?”
“…….”
“별로야?”
“맛…있네.”
“맞지? 맛있지?”
도윤이 실실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입안에 가득 찬 복숭아 향에 희성이 미간을 좁혔다. 양치를 하고 싶게 만드는 맛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보지 못한 도윤이 새로운 것을 하나 까 희성의 손에 올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간단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새콤달콤을 까먹으며 바깥을 구경하는 도윤은 계속 신난 모습이었다. 가끔 고개를 돌려 말을 할 때는 복숭아 향이 코끝을 스치고 갔다. 아까는 그 냄새가 별로였는데 이제는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도윤은 가는 내내 창밖을 구경하고, 입이 심심하면 새콤달콤을 까먹고 그것도 지루하면 잠을 잤는데 꼭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자서 희성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주곤 했다. 허벅지에 올라와 있는 손을 잡아 깍지를 낀 희성이 도윤의 머리에 살짝 기댔다. 공간이 불편하고 앉아있는 좌석도 찝찝했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종착지 없이 계속 달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역에 도착해서는 택시를 이용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기도 했고 역에서 우르르 빠져나온 사람들과 함께 섞여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희성에겐 버스보다 택시가 좀 더 편했다. 택시 기사님은 가는 내내 맛집이나 가면 재미있을만한 곳을 추천해 주었지만 듣는 것은 오직 도윤 한 명뿐이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탓에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바로 바다를 보러 가기보다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둘 다 딱히 먹을 곳을 정해두고 온 게 아니라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곳을 택했다. 이것저것 따져가며 조금 더 고르곤 싶었으나 배가 고프다는 도윤의 말에 일단 아무 가게나 들어왔다.
음식들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분명 들어올 때는 손님이라곤 자신들밖에 없었는데 음식이 나오자 가게가 꽉 찼다. 도윤과 희성은 구석진 곳에 앉아 식사를 이어갔다. 세트로 함께 나온 생선도 살이 통통하니 맛있었고 두부찌개는 생소했지만 먹다 보니 괜찮았다.
“우리 밥 먹고 뭐해?”
“뭐 하고 싶은데.”
“으음.”
희성은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진 생선 살을 발라 도윤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던 도윤이 숟가락으로 남은 밥을 싹싹 모아 생선 살과 함께 입에 넣었다. 조금 씹다가 국물을 떠먹으면 이미 먹고 있음에도 침이 고였다.
두 사람의 밥그릇이 깨끗했다. 잠깐 앉아서 물을 마시며 에어컨의 바람을 쐬던 둘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성이 카드를 받는 것을 확인하고 신발을 꺼내 신은 도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이 막히는 온도에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모자라도 가지고 올걸. 햇빛을 받는 머리가 뜨거웠다. 도윤이 손으로 머리와 눈 위를 가리며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옆에 서서 걷던 희성이 욕을 씹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 카페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아 두리번거리자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널리고 널린 게 카페 같았다. 도윤은 그중에서도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카페를 찾아 희성을 이끌었다.
자신도 더위에는 약했지만 희성은 그보다 더했다. 걷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지나가던 사람이 실수로 희성과 부딪혔을 때는 도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벌써 경찰서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첫 여행부터 경찰서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열에 익어서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희성을 대신해 음료와 케이크를 사서 돌아온 도윤이 카드를 쭉 밀어주었다.
“…많이 더워?”
“어.”
“그럼 해지기 전까지는 안에 있어야겠다….”
“…됐어.”
느릿하게 일어난 희성이 도윤을 빤히 쳐다봤다. 도윤도 열에 익어 볼이 살짝 붉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보며 손을 뻗자 도윤이 대충 손등으로 닦아냈다. 덕분에 희성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버렸고 분위기도 싸해졌다.
“야.”
“으응, 응?”
뒤늦게 희성을 살피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진동이 울렸다. 도윤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일어나 픽업 대에서 음료와 케이크가 든 트레이를 가져왔다. 케이크는 얘기도 안 꺼냈는데 알아서 사 왔다는 것이 웃겨서 잠깐 솟았던 화가 누그러졌다. 오늘도 희성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고 도윤은 아이스티였다. 무슨 복숭아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희성이 빨대를 빼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반이나 마셔버렸다. 좀 살겠네. 희성이 다시 빨대를 꽂고 도윤을 봤다. 도윤은 앞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맛있어?”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뭔데.”
“몰라, 그냥 처음 봐서 주문해 봤는데….”
“네 돈도 아니면서 왜 네 마음대로 주문해?”
“…….”
포크를 문 도윤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바빴다. 희성은 웃으며 도윤의 포크를 뺏어들었다.
“여기 새 포크 있잖아아.”
“네가 그걸로 먹어.”
“씨….”
“씨?”
“…씨이원하다고, 여기. 응…그래서….”
희성이 시원하게 웃으며 케이크를 푹 떴다. 아까 택시에서 흑임자가 유명하다더니 아마 흑임자로 만든 케이크 같았다. 맛은 그냥 그랬다. 한 번쯤은 사 먹을 수 있었지만 두 번은 아닌 그런 맛. 희성은 포크를 내려두고 아메리카노나 쭉쭉 빨았다.
“가서 다른 케이크 하나 더 사 와.”
“그래도 돼?”
“이번엔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사 와. 또 처음 봐서 신기하다고 사 오지 말고.”
“으응, 나 다녀올게.”
다시 카드를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도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케이크를 가리키며 주문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귀여워서 뽀뽀나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크는 금방 나왔고 도윤이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멀리서 봐도 초코케이크임을 알 수 있었다. 흑임자케이크는 구석으로 밀어두고 초코케이크에 집중한 도윤이 그제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케이크와 아이스티를 야무지게 먹는 도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희성이 발을 뻗어 도윤의 신발을 자신의 신발 사이에 가두었다. 잘 먹다가 발의 자유를 잃은 도윤이 테이블 밑을 보고는 빨대를 물었다.
“하도윤.”
“으웅.”
“나 뽀뽀하고 싶은데.”
“…….”
“응?”
희성이 발을 흔들자 가운데에 가둬졌던 신발이 함께 흔들렸다. 빨대를 물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래도 사람이 조금 있었다.
“안 돼….”
“왜 안 돼?”
“여, 여기서 어떻게 해?”
“여기서 하고 싶어? 누구 좋으라고?”
“…그럼?”
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카페를 울렸다. 도윤은 옆으로 다가오는 희성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 어디 가?”
“어디든.”
도윤이 머뭇거리다 희성에게 끌려 화장실로 들어왔다.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고 희성이 턱에 쪽쪽 입을 맞췄다. 턱을 아프지 않게 깨물던 희성이 볼에도 입술을 찍었다. 도윤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화장실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이어서 입술끼리 맞닿았다. 희성에게선 커피향이 났다. 도윤이 천장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열고 들어서는 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커피 향을 품은 혀가 달달함에 절여진 혀를 감싸고 입안의 살을 문질러댔다.
“으응….”
미끄러운 혀끼리 질척하게 엮이는 느낌은 아무리 겪고 또 겪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도윤의 손이 절로 말렸다. 잡을 곳이 없어 주먹만 쥐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볼을 잡고 있던 손이 내려와 도윤의 팔을 잡아챘다. 희성이 고개를 틀자 혀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도윤이 끙끙거리는 소리와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사라지지도 않고 귀에 박혀들었다. 희성은 잡고 있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하며 혀를 빨았다.
“읏, 응….”
도윤과 희성의 몸이 더욱더 밀착했다. 숨이 모자라 입술을 떼려는 도윤을 끝까지 따라가 잠시도 틈을 주지 않은 희성이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손이 배를 문지르고 올라가 유두를 긁자 도윤의 몸이 떨리고 입술이 더 벌어졌다. 실실거리며 혀를 빨고 입술을 빨며 늘어진 희성이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주었다.
“흣, 하아….”
“도윤아.”
“흐으, 아….”
“하도윤….”
티셔츠에서 손을 뺀 희성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헐떡이는 도윤을 끌어안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도윤을 안고 칸으로 들어온 희성이 커버를 내리고 위에 앉아 도윤을 끌어당겼다. 으응…. 희성의 위에 앉아 얼굴을 기댄 도윤이 눈을 감았다. 지금은 당장 아래에서 느껴지는 희성의 단단함을 신경 쓸 여유 따위가 없었다. 도윤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희성이 끌어안고 있던 허리를 살짝 움직이자 귓가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마….”
“왜?”
“여기…에선…싫어….”
“하자는 건 아닌데.”
“그래도 가만, 읏, 가만히….”
“흠.”
슬쩍슬쩍 도윤을 움직여 아래를 비벼보던 희성이 아쉬운 듯 어깨에 뽀뽀했다. 도윤은 희성의 어깨에 볼을 비비다 이마를 박았다.
“나가야 되는데….”
“어차피 남자는 우리밖에 없어서 괜찮아.”
“…….”
“도윤아, 너 왜 그렇게 예뻐.”
“…….”
희성이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어깨에 이마를 박고 호흡을 고르던 도윤이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나가고 싶어.”
“그러고?”
“세수 한번 하고….”
“예뻐, 도윤아.”
도윤을 따라 고개를 든 희성이 뒤로 살짝 물러나 뚱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귀여운데 예쁘고, 예쁜데 귀엽고. 희성이 웃으며 입술에 뽀뽀를 해주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놔줘.”
“뽀뽀해 주면.”
“…….”
“눈 감고 있을까? 그럼 할래?”
“…내려갈래.”
“뽀뽀.”
“…….”
“싫으면 사람들이 우리 찾으러 올 때까지 이러고 있고.”
도윤이 입술을 씹으며 망설였다. 허리에 감긴 팔은 풀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널따란 어깨를 쥐고 망설이던 도윤이 손으로 희성의 눈을 가렸다.
“지, 진짜 하면 놔줄 거지?”
“응.”
“…진짜지?”
“응.”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지 손바닥 안이 조용했다. 도윤은 올라간 입꼬리를 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추고 급하게 떨어졌다.
“이, 이제 놔줘.”
“후….”
“나갈래, 나 나갈 거야.”
허리에 감긴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던 도윤은 뒤통수를 잡아 누르는 힘에 다시 입술을 맞대고 말았다. 으읍, 읍! 어깨를 밀어내려고 해봤지만 입안을 훑고 빠져나가는 혀에 소름이 돋아 굳어버렸다. 희성이 웃으며 팔을 풀어주었다.
“뭐해, 나가자며.”
“이, 이…!”
부들부들 떨면서 내려온 도윤은 칸을 나가자마자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아, 재미있네. 도윤보다 먼저 화장실에서 나온 희성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떨며 자리를 찾았다.
여름이라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길었다. 카페에서 얼음을 와작와작 깨먹고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더웠다. 공기는 후끈했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뜨거웠다. 겨우 말랐던 땀이 택시를 기다리는 사이 또 송골송골 맺혔다. 택시를 타면 잠시나마 에어컨을 쐴 수 있으니까 그 차가움을 바라고 택시를 기다린 건데 예약을 걸고 다가오는 택시는 따뜻했다. 희성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불어오는 바람도 여전히 따뜻했지만 가만히 서있을 때보단 나았다.
감사합니다. 도윤이 고개를 꾸벅이곤 택시에서 내렸지만 희성은 감사한 마음이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기에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꾸 치미는 짜증을 꾹 누르고 도윤의 손목을 잡은 희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건넜다. 날도 덥고 도윤의 체온도 높았으나 희성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오래 걷기가 싫어 근처에 내려달라고 했더니 정말로 코앞에 바다가 있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푸른 물결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쉰 도윤이 입을 열었다.
“바다 냄새나!”
“바다니까.”
“사람 되게 많다.”
“한 눈 팔지 말고 붙어있어.”
“응.”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내려와 도윤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체온끼리 만나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도윤을 잃어버리는 것보단 이게 천 배는 나은 방법이었다. 파도가 철썩이며 모래를 잡아먹었다가 다시 뒤로 빠지길 반복했다. 도윤은 멍하니 서서 파도를 구경했다. 시원하겠다. 도윤이 멀어지는 파도를 보며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발 담그고 싶어.”
“뭐?”
“그래도 돼?”
“더럽게 무슨….”
“시원할 것 같아.”
도윤으로 인해 손이 살랑거렸다. 응? 응? 간절함을 담아 보내는 눈빛에 희성이 찝찝하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도윤이 웃자 보조개가 드러났다. 희성은 신발 안에 양말을 말아서 넣어두는 모습을 보다가 볼 안을 쓸었다. 맨발로 서서 바지를 접은 도윤이 허리를 펴고 희성을 바라보았다.
“왜.”
“같이 안가?”
“난 싫어.”
“나 혼자 가?”
“난 여기서 보기만 할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너 나 해.”
“…알았어. 그럼 여기 있어, 알았지?”
“너만 잘 찾아오면 돼.”
“응….”
“없어져도 내가 찾으러 갈 테니까 놀기나 해.”
“으응, 나 갔다 올게.”
가방까지 신발 위에 얹어두고 조심조심 걸어 발을 담근 도윤이 맑게 웃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맑게 웃고 있는 도윤을 보고 있자니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도윤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처음 알았다. 희성이 도망가는 파도를 따라가다 급하게 뒤로 빠지는 도윤의 모습을 한순간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빛에 반짝거리는 바다와 그 안에서 반짝거리는 도윤이 너무 아름다웠다. 꼭 반짝거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이. 멍하니 도윤을 보던 희성이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사진도 실물을 완벽히 담지는 못했다. 함께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잘 놀고 돌아온 도윤이 발을 털어댔다.
“진짜 짱 시원해!”
“…….”
“발 씻어야겠다.”
“…….”
“희성아?”
“응.”
“나 발 씻고 싶어.”
“그러게 누가 들어가래?”
도윤이 가방을 메고 양손으로 신발을 들었다. 신발에 묻었던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도윤은 모래사장을 벗어나 깨끗한 물로 발을 씻었다. 이제 닦아야 하는데 올 때 지갑이나 혹시 몰라서 우산만 들고 온 탓에 수건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도윤이 턱에 걸터앉아 발을 털었다.
“조금 마르면….”
“발 가만히 있어.”
“으응.”
오전에 도윤이 손을 닦았던 손수건을 꺼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발목을 쥐고 발을 닦아주자 민망한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남의 발을 닦아주는 희성을 힐끔거렸다. 발에 묻은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주고 양말을 신겨준 희성은 마지막으로 신발까지 신겨주었다.
거의 막차를 예매했더니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기껏 모래를 털어낸 보람도 없게 다시 모래사장을 찾은 도윤과 희성의 사이에는 오가는 말이 없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와 사람들이 웃으며 소리치는 것이 다였다. 걷는 내내 바다만 봤지만 질리지가 않았다. 도윤이 친구들과 놀러 온 듯 단체로 서서 사진을 찍는 무리를 보고 옆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희성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지만…. 도윤이 다시 바다를 보며 걸었다. 나중에 또 와서 보고 싶은 바다였다. 보고만 있어도 답답함이 풀리고 속이 시원해졌다. 도윤은 지금의 기억으로 또 하루하루를 살아갈 예정이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하루를 자고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 좌석에 앉은 도윤이 피곤했는지 하품을 했다. 눈 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지도 않고 새콤달콤의 껍질을 깐 도윤이 이번엔 포도 맛을 입에 넣었다. 느릿하게 새콤달콤을 씹는 입을 보니 출발을 하면 바로 잘 기세였다. 희성은 도윤이 까주는 새콤달콤을 입에 넣고 주변을 훑었다. 좌석이 하나둘 차더니 곧 빈자리가 완전히 없어지고 기차가 출발했다.
출발한 지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도윤은 꾸벅꾸벅,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새콤달콤을 꼭 쥐고 졸았다. 앞으로 쏟아지는 도윤의 머리를 잡아다가 어깨를 내어준 희성은 새콤달콤을 빼내고 손을 잡았다. 새콤달콤이 간이 테이블에 내팽개쳐지는 소리가 나자 대각선에 앉아있었던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희성은 무심하게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도 그냥 소리가 난 것에 반응했는지 금방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이 남았다. 도윤의 손을 잡고 핸드폰을 보던 희성이 아까부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또다. 또 대각선에 앉은 사람이 뒤를 힐끔거리고 있다가 희성에게 걸리고 말았다. 기분이 더러웠다. 뭘 자꾸 훔쳐보는 건지 희성이 턱을 비틀며 기분 나쁨을 티 냈다.
아, 씨발. 희성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길바닥에 눌러붙은 씹다 뱉은 껌처럼 생긴 놈이 아까부터 희성을 거슬리게 했다. 희성은 이제 핸드폰도 내려두고 남자를 쳐다봤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희성은 기다렸다는 듯 쥐고 있던 도윤의 손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닌 척 도윤과 희성을 보던 남자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뭘 봐, 씨발놈아.’
도윤의 손을 내려둔 희성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남자가 굳어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은 사라졌지만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다. 남자에게 욕을 해주기 위해 버려뒀던 핸드폰을 들어 아까 바다에서 찍었던 도윤의 사진을 클릭했다.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희성이 엄지로 액정을 문지르곤 다시 도윤의 손등에 뽀뽀를 남겼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