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2)
요 며칠간 도윤은 침대에 머리만 대면 잠에 빠져들었다. 집에서만 잤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상관없이 졸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샤프를 쥐고 고개를 꾸벅이던 도윤은 가끔 졸다가 혼자 놀라서 움찔거리며 일어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희성은 수업 시간에 칠판 대신 도윤을 쳐다보곤 했다. 졸면서 하는 필기는 당연히 엉망이었다. 수업 시간이라 대놓고 자지는 못하고 휘청거리기만 하는 도윤이 미련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도윤은 어쩐지 4일씩 굶었었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도 희성이 밤낮으로 자신을 안았었다. 지금은 밥이라도 주지만 그때보다 더 자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요즘 희성은 자신이 울다가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그만해달라고 빌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과외가 있는 날이면 과외를 받느라 쉴 수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과외가 끝나면 희성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그렇게 저녁 내내 희성의 안에 자신의 것을 넣고 울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아침이었다. 마지막 기억으로는 힘들다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이제 나올 것도 없다고 울다가 이상한 물까지 쏟아내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몸에서 그런 것이 나왔다는 것에 충격을 먹고 병원에 가야 하나 생각했지만 막상 병원에 가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서 가지 못했다.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난 관계는 또 이른 아침이 되면 시작되었다. 학교에 가야 하니 오늘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희성을 말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밥을 먹다가도 졸았고 수업 중에 코피도 흘렸으며 관계를 가지는 도중에도 코피를 쏟았다.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에게 희성은 너무나도 벅찼다. 기절을 하고 나면 꿈도 꾸지 못했다. 꿈을 꿀 시간도 없이 잠만 잤다. 차라리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던 지난 새벽의 시간들이 그리웠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우는 것보다 슬퍼서 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잠깐 울고 진정할 수 있었다. 밤새 신음을 흘리며 우는 것보다 천 배는 나았다.
결국 졸다가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의자가 넘어가는 줄 알고 놀라서 눈을 크게 뜬 도윤이 가슴팍을 문지르다 몸을 숙였다. 밤낮으로 혹사당한 가슴이 아팠다. 약을 바르고 그 위에 반창고를 붙여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도 당연했다. 희성이 매일 물고 빠니까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떨어지는 거 아닌가…? 도윤이 훌쩍거리며 샤프를 쥐고 희성의 교과서를 확인했다. 자신이 펼쳐놓은 페이지와 달랐다. 또 자신이 조는 사이에 진도가 많이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점심을 최대한 빨리 먹고 매점도 들르지 않고 교실로 올라온 도윤은 재빠르게 양치까지 끝냈다. 체육복을 책상에 올리고 엎드려 눈을 감았다. 희성이 또 화장실로 끌고 가기 전에 자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후드의 모자가 도윤을 잡아먹었다.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른 도윤이 자는 척을 하려다 점점 흐려지는 정신에 색색, 숨을 뱉었다.
칫솔을 통에 넣으며 교실로 들어온 희성은 급하게 도망가더니 자고 있는 도윤을 내려다봤다. 도망간 것이 아까였는데 벌써 자고 있다니. 하긴, 도윤은 오늘 새벽에 이상한 물을 두 번이나 쏟아냈다. 히끅거리며 기절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괴고 후드를 들어 올리자 체육복에 눌린 볼과 살짝 벌어져있는 입술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밤에는 저 입술에 자신의 것이 들어갔었다. 목이 아프다고 우는 걸 무시하고 쑤셔 넣었더니 나중에는 침을 삼키기도 힘들다고 울었다. 물을 마셔도 목이 따갑다고 우는 얼굴에 꼴려 아래를 세우면 도윤은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
교실에 누가 있든 없든 희성은 검지를 벌어진 입술에 밀어 넣었다. 말랑한 입술을 누르고 뜨뜻한 입안을 누비다 혀를 톡톡 건들자 미간을 좁힌 도윤이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벌어졌던 입술이 모아지고 희성의 손가락을 빨았다. 희성은 도윤의 아래 주름과 내벽을 상상하면서 혀를 꾹 눌렀다. 손가락이 빨리는 느낌에 아래가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희성이 손가락을 빼고 자신의 입에 넣었다. 도윤의 입술이 잠시 오물거리다 잠잠해졌다.
오늘은 계속 조는 것이 안쓰러워서라도 그냥 재우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저 입에 내 것을 한 번이라도 물리고 재워야겠다. 희성이 휴지에 손가락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충격에 빠진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아, 아니….”
희성이 불쾌하단 기색을 보이곤 도윤의 머리에 모자를 덮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빠진 도윤의 등이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어째 공부를 하러 온 학교에서 잠만 자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대학은 무슨, 당장 시험도 못 보게 생겼다. 5교시에는 밥을 먹은 후였으니 교실은 전멸이었다. 그래서 다른 시간보다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가 있었다. 6교시는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온 도윤은 반창고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려고 칸에 들어왔다. 옷을 올리고 고개를 숙여 가슴팍을 확인했다. 반창고는 잘 붙어있었다. 도윤이 상체에 가득한 붉은 점을 문질러보다가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칸을 나가려다 들려오는 발소리와 말소리에 멈칫했다.
“야, 하도윤이랑 김희성 그거 진짜야?”
“뭐가 진짜야?”
“둘이 진짜 그거냐고. 게, 그거.”
“게이냐고? 딱 보면 모르냐?”
“진짜래?”
“진짜겠지. 야, 내가 오늘 뭘 봤는지 아냐?”
“뭐 봤는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윤이 눈을 깜빡이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까 점심시간에 하도윤 자고 있었거든? 근데 김희성이 씨발, 아. 떠올리니까 존나 더러워. 김희성이 하도윤 입에 손가락 넣고 움직이다가 빼서 그거 다시 지 입으로 가져가더라니까?”
“미친.”
“그리고 평소에 누가 하도윤 쳐다만 봐도 김희성 미쳐서 날뛰잖아. 지상우 뭣도 모르고 나대다가 이마 깨진 거 못 봤냐.”
“그거 진짜 김희성이 깬 거야?”
“그때 우리 반 존나 분위기 박살이었어.”
“나 게이 처음 봐.”
떨리는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윤이 숨까지 참고 떨리는 손을 내렸다.
“그럼 걔네도 그거 했을까? 남자끼린 진짜 뒤로 하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이미 뜨지 않았을까? 걔네 같이 산다며. 하도윤이 깔렸겠지?”
“김희성이 깔릴 새끼처럼 보이냐? 뭐, 당연히 하도윤이 깔렸겠지.”
“야, 근데 솔직히…. 하도윤이면 함 해볼 수 있을 것 같지 않냐?”
“미친 새끼, 아 더러워 미친놈아!”
“걔 가끔 멍 때리고 있는 거 보면 솔직히 좀 그래. 걔 좀 예쁘잖아.”
“그만해, 존나 토나와.”
“새끼야, 진짜 다 까고 이런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없어! 진짜 토나와.”
“웃기시네, 솔직히 있잖아!”
웅성거림이 멀어졌다. 자신을 향한 질 낮은 대화에 토기가 치밀었다. 도윤이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몸을 웅크렸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희성의 옆에만 있으면서 이런 소문이 아예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럴 거라고 대충 짐작만 하고 있던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또 달랐다. 도윤이 소매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다가 흐…. 하고 삼키지 못한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희롱하는 말과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나 도윤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울다가 다시 변기를 붙들었다. 점심에 먹은 것을 토하고 나자 헛구역질이 일고 위액이 나왔다. 계속되는 헛구역질에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도윤이 헐떡이며 휴지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목도 아프고, 속도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쪼그리고 앉아 숨을 고른 도윤이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욱, 하고 또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칸칸마다 열어보다 들려오는 소리에 희성이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문은 안에서 잠겨있어서 열리지 않았다. 희성이 문을 두드리며 도윤을 불렀다.
“하도윤, 안에 있어?”
“…….”
“너 안에서 자는 건 아니지?”
“…….”
“…야, 문 열어.”
“…욱….”
“하도윤, 문 열어.”
도윤이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굳게 닫힌 문이 거칠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물을 내리고 잠금을 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렸다. 희성은 잠에서 깨려고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간 도윤이 1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아 찾으러 온 참이었다. 앞머리가 깨끗한 걸 봐선 세수는 하지 않은 것 같고, 눈이 젖어있는 걸 봐선 혼자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체 왜? 희성의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닿았다가 다시 얼굴에 박혔다.
“너 뭐야.”
“으…. 흐윽….”
“너 뭐냐고.”
“점, 심시간에, 내, 내 입에…. 손가락, 넣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넣었어…?”
“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왜, 왜 그랬어?”
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희성은 조용한 복도에 목소리를 낮췄다.
“누가 그래?”
“학교에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 했잖아!”
“누가 그랬냐고, 도윤아.”
“몰, 흑, 몰라아….”
“뭘 몰라, 똑바로 대답해.”
“진짜, 진짜 몰라! 자기들끼리, 끅, 얘기하다가 나갔, 나갔단 말이야….”
“그리고.”
“뭐가, 끅, 뭐가?”
“그것만 말했어? 그 새끼들이 또 뭐라고 했냐고.”
“…….”
“말해.”
“…….”
도윤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손안에 있던 휴지를 굴렸다. 그 역겨운 대화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가 너무 수치스러웠다.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자 또 눈물이 퐁퐁 나왔다. 도윤이 훌쩍거리며 말하기 싫다는 티를 내자 희성이 한숨을 쉬고 칸에 들어와 도윤을 밀친다. 벽에 부딪힌 등이 아팠다.
“똑바로 말해.”
“시, 싫어….”
“싫어?”
“흐으, 싫어어….”
눈물에 젖은 눈이 희성을 쳐다봤다. 도윤이 축축한 눈을 하고서 말을 하기 싫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희성이 하얀 목을 쥐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도윤의 얼굴이 붉어지고 숨을 힘겹게 뱉어냈다. 눈 꼬리를 따라 흐르는 눈물에 도윤이 손목을 잡아 입을 열었다.
“말, 할게, 말, 하….”
“말해.”
“콜록, 윽, 하아….”
“하도윤.”
“너랑, 나, 랑…. 게, 게이냐고….”
“또.”
“…….”
“또.”
“…같, 이. 사니까…. 그, 그것도 해봤겠다고….”
“또.”
“…….”
“말하기 싫어?”
“…내, 내가…깔렸, 겠, 다고….”
희성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굳었다. 도윤은 무서워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흑, 나, 나 정, 도면, 하, 한번, 해볼, 수….”
“하….”
“끅, 다른, 사람들도 다…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 어떡해?”
“닥쳐.”
“나는, 나느은….”
“도윤아, 닥치라고 했잖아.”
도윤이 떨리는 숨을 뱉으며 눈물을 닦았다. 자꾸만 자신을 희롱하던 도 넘은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희성은 자신을 달래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화를 내고 있었다. 진정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매는 눈물로 이미 축축해져있는 상태였다. 도윤이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눈가를 벅벅 문지르다가 팔이 잡혀 화장실을 벗어났다. 이대로 교실에 가면 또 다들 무슨 말을 만들어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버티며 고개를 젓자 희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무서웠지만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들에게 쏟아질 수많은 시선이 더 두려웠다.
“교실 들어가기 싫어…!”
“이 꼴을 하고 교실로 가겠다고?”
“…그럼?”
“양호실 가게 따라와.”
그제야 도윤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도윤이 움직이자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해졌다. 도윤이 훌쩍거리며 희성을 따라 양호실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린 후 열자 안에서 컴퓨터를 보던 선생님이 고개를 옆으로 쭉 뺀다. 슬쩍 스치듯 봐도 아파 보이는 얼굴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야?”
“아파서요.”
“어디 가 아픈데? 일단 거기 앉아봐.”
머뭇거리며 침대에 앉은 도윤이 고개를 숙여 축축하게 젖은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희성의 앞에서 울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에게 민망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앞에선 조금 민망했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도윤을 살핀 선생님이 이것저것 물어왔고 도윤은 희성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선생님이 물과 두통약을 먹고 이번 시간은 누워 있다가 가도 좋다는 말을 했다.
물을 머금고 약을 입에 넣은 도윤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알약이 목에 걸리는 느낌이 싫어 알약을 싫어했던 도윤이 급하게 남은 물을 모두 털어마셨다. 희성은 도윤이 알약을 무사히 삼키는 것을 보고 양호실을 나갔다. 희성이 나가자 양호실엔 선생님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도윤이 누워서 창밖을 올려다보다가 일어났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도윤을 쳐다봤다.
“왜?”
“…죄송한데 혹시 가글…도 할 수 있을까요? 아까, 토를 했는데….”
“아, 잠시만.”
아프다는 게 결코 부끄러운 점이 되지는 않았지만 남에게 토를 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흔치는 않아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선생님은 가글 대신 새 칫솔과 자신이 쓰던 치약을 건네주었다.
“바로 앞에 화장실 있으니까 하고 와.”
“감사합니다….”
화장실에 도착해서 포장을 벗긴 칫솔을 물에 한번 헹구고 치약을 짠 도윤이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시작했다. 그거 좀 울었다고 눈이 퉁퉁 부었다. 어차피 최근엔 밤낮으로 늘 부어있긴 했지만…. 이런 꼴을 보고도 예쁘다고 해주는 희성을 이해하기란 아직까지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5교시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교실에 가기 싫었다. 한두 명이 자신을 놓고 질 낮은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고 나자 이젠 모두가 그 주제로 떠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찬물로 입을 헹궜지만 입안만 시릴 뿐이었다. 한숨을 쉬며 입을 닦고 양호실로 돌아온 도윤이 침대에 누웠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고 싶었다. 오랜만에 꿈에 엄마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불을 끌어올린 도윤이 눈을 감았다.
도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5교시가 끝난 후였고, 쉬는 시간마저 5분이나 지나있었다. 옆에는 희성이 있었다. 의식이 몽롱했다. 눈을 깜빡이다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또 잠이 들 뻔했다. 느릿하게 일어나 앉은 도윤이 눈을 비비다 저지당했다.
“눈 없어지겠다.”
“…응….”
“이제 일어나.”
“…….”
다음 수업을 들으려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교실로 가야 했지만 몸이 무거웠다. 교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도윤이 머뭇머뭇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자리는 비어있었다. 덕분에 인사도 못하고 양호실을 나온 도윤이 앞서 걷는 희성을 졸졸 쫓아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섰다. 이제 이 계단만 오르면 3학년들이 쓰는 층이 나왔다. 도윤이 난간을 붙잡고 희성을 올려다봤다. 뒤를 쫓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고개를 돌린 희성이 삐딱하게 서서 애처로운 눈으로 보고만 있는 도윤을 내려다봤다.
“거기서 뭐 하려고.”
“…가기 싫어.”
“가기 싫으면. 여기서 평생 그러고 있을래?”
“…….”
“너랑 내가 다음 시간에도 안 들어가면 또 무슨 소문이 나는지 알아?”
“…….”
“또 학교 어디선가 너랑 자고 있다고 소문날걸.”
“…….”
“그러고 싶어? 원하면 사실로 만들어주고.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건 어렵지도 않아.”
도윤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내 희성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런 소문 때문에 왜 네가 숨어 다녀야 하는데?”
“그건….”
“너 나한테 박혔어?”
“아, 아니.”
“왜 남들이 하는 얘기에 휩쓸려 다니려고 해?”
“그럼 어떻게 해? 나는…이런 적, 처음인데….”
“무시해.”
“어떻게 그래?”
“처리는 내가 할 거니까 넌 무시만 해.”
처리…? 도윤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 희성의 뒤에 숨어 교실로 들어왔다. 다행히 대놓고 날아드는 시선은 없었지만 혼자 눈치를 봤다. 다른 아이들이 말하는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도윤은 그 소리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종이 울렸지만 굳어있는 몸은 다음 교시 교과서를 꺼낼 생각도 못 했다. 희성이 딱딱하게 굳어서 책상만 내려다보는 도윤을 보다 턱을 비틀며 교과서를 꺼내주었다. 그제야 저 멀리 도망갔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도윤이 아무 페이지나 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을 읽으며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당연하게 자신의 방으로 올 거라 생각했던 희성이 자신을 지나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도윤이 의아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짓을 하든, 안 하든 무조건 자신의 곁을 지키던 희성이 말도 없이 모습을 감추자 기분이 이상했지만 한 편으로는 좋았다. 오늘은 안 할 건가 봐! 오늘은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는 설렘에 기분이 좋아졌다.
바로 침대에 누우려던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은 도윤이 케이지를 톡톡 쳤다. 요즘 희성이 밥 먹을 시간과 씻을 시간만 주고 괴롭히는 탓에 콩이와 자주 놀아주지 못했다. 겨우내 잘 먹고 잘 자더니 콩이의 몸이 더 커졌다. 케이지가 워낙 커서 불편하지는 않겠지만 조금 답답할까 봐 책상 위로 꺼내주자 냄새를 킁킁 맡으며 돌아다니기 바쁘다. 책상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통통한 등을 콕 찔러보기도 하고 손바닥에 올려 구경도 하다가 문이 열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허리를 편 도윤의 시선이 잠시 문 쪽에 닿았다.
희성이 방을 나갔다. 도윤이 눈을 깜빡이다 손바닥에 콩이를 올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침대에는 처음 올라온 건가? 연한 갈색의 털 뭉치가 낯선 침대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윤이 실실거리며 콩이를 보다가 손바닥을 내려주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손바닥에 올라오는 콩이가 귀여워 등을 쓸어주었다.
희성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씻자마자 도윤의 방을 찾았다. 자기 전까지도 콩이와 놀던 도윤은 이미 꿈나라로 떠난 후였다.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린 도윤은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씻는 동안 몸에 있던 찬 기운은 모두 빠져있었기에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간 희성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잘못했다고 빌던 듣기 싫은 울음소리가 귀를 더럽혔다. 평화롭게 자고 있던 도윤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고 당기자 작게 앓는 소리가 났다. 귀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납작한 배를 문질렀다. 도윤이 자꾸 몸을 더듬는 손길에 뒤척이다 눈을 떴다. 몸이 갑갑했다. 자기 직전에도 방에 없어서 오늘은 진짜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도윤이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다 고개를 돌렸다.
도윤의 등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숨만 쉬던 희성이 눈을 떴다. 뒤를 힐끔거리는 도윤의 배를 문지르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씻고 또 약을 발랐는지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더러운 것만 보고 와서 정화가 필요한데 영 거슬린다. 반창고 위를 문지르자 도윤이 팔꿈치로 희성을 밀어냈다.
“오늘은, 진짜 하기 싫어….”
“안 해.”
“근데 왜 자꾸, 흣, 막 만져?”
“좋아서.”
“…….”
어둠 속을 굴러다니는 눈알이 바빴다. 가슴팍을 토닥이고 다시 내려간 손이 배를 문지르다 빠져나갔다. 도윤이 올라간 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나 보고 누워.”
“으응.”
“오늘은 말을 왜 이렇게 잘 들어?”
“…안, 안 한다 그래서….”
얌전히 돌아누운 도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희성의 검지가 입술에 닿았다. 이번에도 입술만 만지고 떨어진 손에 도윤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하도윤.”
“응?”
“넌 내가 본 것 중에서도 제일 예뻐. 알아?”
“…나는 남잔데 왜 매일 예쁘다고만 해?”
“예쁘니까.”
희성의 손이 귓가에 닿았다. 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눈가를 문지르는 엄지에 도윤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남자한텐 예쁘다고 말하면 안 돼?”
“그건 아닌데, 나한테만 막….”
“너만 예쁘니까.”
눈가에 머물렀던 엄지가 이번엔 볼에 닿았다. 손바닥이 옆얼굴을 덮고 엄지가 볼을 문질렀다. 환하게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나타나는 곳을 문지르고 떨어진 손이 가지런히 모여 있던 도윤의 손을 끌어왔다. 이 손으로 피아노를 치면 더 예쁠 것 같았다. 나중에 피아노를 하나 사서 도윤을 앉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손가락을 잘근잘근 물다가 놓아준 희성이 손끝에 입을 맞춰주었다.
“손톱 잘라야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를 거야.”
“잘라줄게.”
“혼자 할 수 있어.”
“난 네가 나 없이 아무것도 못했으면 좋겠어.”
“왜?”
“그래야 날 찾을 테니까.”
“…….”
“이제 자.”
“으응….”
“잘 자.”
“…너도 잘 자.”
도윤의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이 아래로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희성은 그 아름다움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다 완전히 감기는 눈에 도윤을 끌어안았다. 이건 내 거다. 아무도 탐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할 수 없는 내 것. 허리를 감아오는 팔에 힘이 실렸지만 도윤은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저 숨만 색색 내쉬었다.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야 좋다는 말에 자신은 밥과 반찬으로 식사를 해결했는데 희성은 고작 샌드위치 하나로 식사를 끝냈다. 가끔은 밥이 아닌 빵이 먹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희성이 허락해 주지 않아 오늘도 입맛이 없는 아침에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자기는 빵 먹고, 나는 밥만 주고. 양치까지 마치고 교복을 차려입은 도윤이 의자에 앉아 손톱깎이를 쥐었다. 새벽에는 희성이 자기가 해주겠다며 도윤을 말렸지만 어차피 빨리 깎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휴지를 깔기 시작했을 때 문이 열리고 희성이 들이닥쳤다. 손톱깎이를 쥐고 고개를 든 도윤이 어색하게 웃다가 성큼성큼 다가온 희성에 의해 손톱깎이를 빼앗기고 말았다.
또각, 또각. 희성에게 붙들린 손에서 손톱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희성은 도윤의 앞에 서서 손톱을 잘라주는데 열중했다. 손톱깎이가 지나간 손은 아주 깔끔했다. 단정해진 손톱에 오른손을 살펴보던 도윤이 왼손을 쥐는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자신의 손과 희성의 손의 차이점이 눈에 들어왔다. 희성의 손가락은 확실히 남자다웠다. 손등 위로 드러난 힘줄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손을 확인한 도윤은 머쓱해졌다. 자신의 손등은 깨끗했다.
말없이 집중해서 손톱을 잘라준 희성은 손톱깎이를 내려두고 고개를 숙였다. 동글동글, 단정해진 손톱에 뽀뽀한 희성이 움찔거리며 말리는 손에 이번엔 입술을 찾았다. 이제 뽀뽀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도윤은 할 때마다 처음인 것 마냥 반응했다. 말랑한 입술이 꾹 눌렸다가 다시 통통해졌다.
“가자.”
“응, 응.”
잘린 손톱이 담긴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1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늘 타던 차에 올라 학교로 향했다. 도윤은 학교에 도착하는 내내 짧아진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자리에 앉아 책상 위를 정리하고 책상 안을 정리하는 손이 부산스러웠다. 어제 희성이 무시하라고는 했지만 남들의 시선이 자신을 스치기만 해도 속이 좋지 않았다. 남들과 눈을 잘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침부터 교실에서 제일 바쁜 도윤을 힐끔거리던 시선이 빈자리에 꽂혔다. 종이 치고 아침조례를 위해 선생님이 들어왔지만 앞자리는 비어있었다. 출석부를 뒤적이느라 고개를 숙인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지각한 사람 없지?”
“김동우 아직 안 왔어요.”
“아, 동우는 당분간 못 나올 거야. 어제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네.”
“엥?”
“다들 제발 차 조심 좀 하자.”
이번엔 필통을 정리하던 도윤이 고개를 들어 빈자리를 쳐다봤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한참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말 한마디 못해봤던 애였다. 교통사고라니, 순간 어머니가 생각나 기분이 안 좋아졌다. 희성은 샤프를 돌리다 문제집에 내던졌다.
아침 자습시간도 끝나고 1교시도 무사히 끝이 났다. 희성의 돈으로 산 젤리를 냠냠 먹다가 옆 분단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저도 모르게 집중한 도윤의 입이 느려졌다.
“4반에 조민규도 입원했다던데.”
“둘이 같이 사고 난 건가?”
“모르지 뭐.”
젤리를 씹던 입이 완전히 멈췄다. 도윤은 옆을 돌아봤다. 옆에는 희성이 무미건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혹시나,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의 직감이란 것이 소리치고 있었다. 게다가 희성은 어제저녁 집을 나가 아주 늦게 들어왔었다. 평소라면 집에만 있었을 사람이, 자신을 두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혹시….”
“죽이진 않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차로 친 것도 아니니까 관심 꺼.”
“어제 어디 갔었어?”
“이제 와서 그게 왜 궁금한데?”
“어디 갔었냐니까!”
마음이 급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순식간에 쏠리는 시선에 도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걔네 걱정해 주는 건가?”
“걱정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천 번도 너랑 뒹굴었을 쓰레기들을, 지금 걱정한다고?”
“말을 왜 그, 그렇게 해?”
“도윤아, 널 욕 한 사람들을 걱정하는 건 착한 게 아니라 미련한 거야.”
“…….”
“멍청한 거라고.”
희성이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을 입원까지 시킨 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도윤이 눈으로 교실을 훑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말로 경고만 해주면 된다고….”
“쓰레기통이 왜 만들어졌는지 알아?”
“…….”
“그런 쓰레기들을 버려야 하니까 존재하는 거야.”
“…….”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들은, 그냥 버려져야 하는 게 맞아.”
“대체 어떻게, 했어…?”
“그게 왜 궁금한데? 그러다 너한테 쓰레기 냄새라도 옮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말로 잘 설명하면…!”
“난 내걸 남들하고 같이 쓸 마음은 없어. 상상만으로도 좆같은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내, 내가 왜 네 거야?”
“그럼 아니야?”
도윤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종이 울렸다.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다시 조용해지고 희성도 시선을 거두었다. 분명 아까까지 맛있게 먹던 젤리였는데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졌다. 꼭 잘나가다가 이렇게 한 번씩 브레이크를 밟는 희성이 무섭고 질렸다. 당장이라도 희성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힘이 없었고, 그럴 용기도 없었다. 펼쳐야 하는 페이지를 알려주는 목소리에도 가만히 있던 도윤이 한숨을 삼켰다. 희성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가 됐든 자신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
***
김동우와 조민규가 입원을 하고 결석한지 3일째 되던 날, 친구라는 이름으로 병문안을 다녀온 아이들의 입에서는 ‘아주 박살났던데.’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김동우는 다리가 부러졌고, 조민규는 팔이 부러졌다고 했다. 또 대체 뭘 어떻게 다쳤기에 볼일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냐는 말까지 돌았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윤은 그 후로 희성을 피해 다녔다. 물론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아주 최대한 희성을 피했다. 집에서는 희성이 마음대로 굴지 못하게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다 방으로 올라와 기절하듯 잠을 잤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했고 점심시간에도 말없이 밥만 먹었다.
도윤이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자 희성은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의미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딱 붙어있었던 책상에도 자그마한 거리가 생겼다. 하찮은 반항이었다. 이젠 화장실에 간다는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곤 했다. 말없이 교실을 나가는 도윤을 빤히 보던 희성이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손에 볼펜이 묻어서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온 도윤은 거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숙였다. 화장실에는 도윤을 제외하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래서 안심했던 것도 있었는데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도윤이 손을 씻는 것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나가.”
“어?”
“너네 다 나가라고.”
“어, 어.”
대충 손을 씻은 두 명이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쏴아, 하는 물소리가 도윤과 희성의 사이를 갈랐다. 문이 닫히고 느릿하게 다가온 희성이 물을 잠갔다. 거울로 마주친 희성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야.”
“…….”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
“난 네가 다른 사람이랑 뒹구는 걸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넌 아니야?”
“저, 저리 가.”
“왜, 너도 그 새끼들이랑 뒹구는 상상이라도 했어?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그런 상상한 적 없어!”
“그렇게 뒹굴어보고 싶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행동 똑바로 해.”
“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희성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찼다. 젖은 손이 희성의 카디건을 붙잡았다.
“내가 뒤 빨아주니까 이젠 다른 사람한테 박혀보고 싶어?”
“아, 아니야…!”
“근데 왜 좆같이 굴어?”
“흐, 아파, 머리 아파, 윽.”
도윤의 몸이 세면대에 부딪히고 고개가 뒤로 조금 더 젖혀졌다. 고통에 신음하며 훌쩍이기 시작하는 도윤을 잠시 쳐다보던 희성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하으, 싫어, 하지 마!”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도윤의 머리카락을 더 세게 당기자 앓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기어이 가려지지도 않는 위치에 자국을 남긴 희성이 흐르는 눈물을 핥았다.
“이제 다른 사람들은 진짜로 너랑 내가 학교에서 섹스라도 한 줄 알겠다.”
“콜록, 흐윽….”
“목 예쁘다, 도윤아.”
“너, 너어….”
“내가 말했지, 소문을 사실로 만드는 건 쉽다고.”
기침을 토하며 목을 감싸는 손이 단정했다. 저것도 오늘 자신이 만들어준 단정함이었다. 희성이 기침을 하느라 벌어진 입술로 혀를 밀어 넣었다. 도윤은 싫다고 저항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입안을 훑는 혀를 세게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희성은 미간만 찌푸릴 뿐 혀를 더 깊게 들이밀었다. 그리곤 도윤의 입술을 깨물어 상처를 내고 떨어졌다.
“입술 가리지 마.”
“네가 뭔데…!”
“가리지 마. 그래야 남들이 보지.”
“따가워….”
손가락에 묻어나는 피에 울컥 설움이 복받쳤다. 너를 만나고 나서부터 되는 일이 없다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엄마도 돌아가셨고, 친구도 잃었고,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잃었다고. 그렇게 쏟아내고 싶었으나 입을 열자 제일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가진 게 없으니 정말로 희성이 아니면 밖에 나가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자존심이라곤 애초에 짓밟힌지 오래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난 똑같이 처리할 거야.”
“대체 왜, 왜 그렇게까지 해?”
“날 건드는 건 상관없어. 쓰레기들이 주제도 모르고 내걸 건드는 게 짜증 나는 거지.”
“끅….”
“넌 내 거야. 모르겠으면 외워.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할 거니까.”
터진 입술을 손톱으로 꾹 누르는 힘에 또 눈물이 찔끔 났다. 따가워서 그만하란 뜻으로 손목을 잡은 건데 희성은 그대로 다시 입술을 붙였다. 상처를 핥고 입안에 있는 타액을 모두 끌어가 삼킨 희성이 물을 틀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윤이 고개를 뒤로 뺐다.
“세수해.”
“…….”
“목이랑 입술이면 됐지, 이 꼴을 또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저리 가….”
손에 별다른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희성은 얌전히 물러나주었다. 세수를 하려고 허리를 숙인 도윤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떨림을 감추려 차가운 물을 연신 얼굴에 쏟아부었다. 세수를 하고 뚝뚝 떨어지는 물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는 도윤에게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손수건을 거절하고 휴지로 얼굴을 닦을까 고민을 하던 도윤이 반항해 봤자 더 고통받는 건 자신밖에 없음을 깨닫고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물기를 다 닦고 거울로 목을 확인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위치에 붉은 자국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거 진짜 어, 어떡해….”
“예쁜데.”
“아, 진짜….”
상체나 하체에 자국을 남기는 것은 봐줄 수 있었다. 어차피 옷을 입으면 잘 안 보이니까. 근데 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여긴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도윤이 목을 감싸고 거울 속의 희성을 노려보다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눈을 깔았다.
“네가 원하던 거잖아.”
“내가 언제 원했어!”
“다른 새끼들이랑 뒹구는 상상했잖아, 너.”
“내가 언제!”
“그럼 왜 자꾸 걱정해?”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왜.”
“그거는, 그러니까….”
도윤이 얼른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희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맞잖아, 걱정한 거.”
“내 말은….”
“속도 좋다. 걔네가 머릿속으로 널 얼마나 어떻게 깔았을 줄 알고 걱정이나 하고 앉았어?”
“…….”
“도윤아, 머리가 나쁘면 외우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 그건 착한 게 아니고 멍청한 거야.”
손수건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도윤의 팔을 잡고 화장실 문을 연 희성이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얼굴을 흘겨보다 반으로 향했다. 도윤은 목을 감싼 채 자리에 앉아 급하게 체육복으로 자국을 가리려 애썼다. 그 짧은 시간에도 소문은 착실하게 퍼졌는지 대부분이 아닌 척하면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의도가 더러운 시선에 고개를 저은 희성이 체육복을 목에 두르고 소매를 묶고 있는 도윤의 손을 잡아챘다. 체육복을 망토마냥 소매로 두르고 있던 도윤이 기겁을 하며 손을 털어냈지만 다부진 손이 깍지를 껴오는 것이 더 빨랐다.
“하, 하지 마아…!”
도윤의 불안정한 시선이 교실을 훑었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두 사람을 향했다가 사라졌다. 희성은 깍지를 낀 손을 책상 위에서 흔들어 보이다가 놓아주었다.
“왜 그래 진짜?”
“다들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하지 마, 진짜. 나 화, 화낼 거야.”
“내.”
“…다음에….”
귀엽긴. 희성은 말랑한 볼을 콕콕 찌르며 장난치는가 싶더니 책상에 엎드렸다. 이제 곧 선생님이 들어올 텐데 잘 거냐고 물어보려던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지금 화가 난 상태였다. 선생님들도 웬만하면 희성을 잘 깨우지 않았으니 오늘만큼은 자신도 깨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희성의 얼굴이 보이는 오른쪽으로 교과서와 문제집을 차곡차곡 쌓은 도윤이 벽을 만들어냈다. 이러면 희성도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도 희성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홀로 편안해진 마음을 안고 수업들을 준비를 마친 도윤은 1분도 지나지 않아 바닥에 와르르 쏟아지는 책들에 허망함을 잔뜩 끌어안았다. 그리곤 뒤에서 터지는 큰소리에 모두가 짠 듯이 뒤를 돌아본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누가 이딴 거 세워두래.”
“…….”
“나한테 벽 세우지 마.”
“…….”
도윤이 대꾸도 없이 몸을 숙여 책을 주섬주섬 주워 책상 안에 넣었다. 희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먼지를 털어내고 책을 모두 정리한 도윤이 입술을 내밀고 교과서 끝을 구겼다. 조금이나마 편안했던 마음이 불만으로 가득 찼다. 멀쩡했던 교과서가 단정한 손끝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화장실에 있던 두 명을 쫓아내고 도윤과 단둘이 화장실에 남게 되었을 때, 꽤 오랜 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왔을 때, 다들 아닌 척하지만 교실로 돌아온 도윤의 입술이 터져있고 목에는 못 보던 자국이 생겨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모두가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 입원한 두 사람이 도윤과 희성의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흘리듯 말을 한 것도 아주 큰 도움이 됐다. 희성은 원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묘하게 손을 써 주변에서 치우곤 했다. 입학하고 뭣도 모르고 희성을 건드렸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는 없었던 이유도 만들어내 전학을 갔다.
도윤의 주변은 전보다 더 삭막해졌다. 올해도 친구는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봄이 지났다.
***
따뜻해진 날씨에 도윤의 옷도 얇아졌다. 이제는 후드 대신 교복만 깔끔히 입고 다녔는데 이것도 곧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희성은 도윤이 교복만 입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도윤은 교복이 남들보다 유난히 잘 어울리기도 했고 이제 몇 달만 지나면 볼 수가 없으니 더 그랬다.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졸업을 하고도 교복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만큼 교복을 입은 도윤은 예뻤다.
와이셔츠가 불편해 체육복을 입고 싶어도 희성이 허락해 주지 않아 오늘도 교복을 입은 도윤이 살짝 더운지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교실에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필기를 하는 소리,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른한 분위기에 창밖을 보자 피구를 하는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체육복의 색을 보니 1학년인 것 같았다. 날아드는 공을 피해 다니는 모습이 웃겨서 소리 없이 슬며시 웃은 도윤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는 말에 샤프를 내려두고 본격적으로 구경을 시작했다.
좋겠다. 재밌겠다. 운동장에서 피구를 하는 1학년을 구경하던 도윤의 감상은 그랬다. 나도 1학년 때는 친구들이랑 같이 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랬었는데…. 이 학교에 전학을 오고는 남들과 섞여본 적이 없어서 더 부러웠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도윤의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희성은 그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보고 있다가 책상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손에 깍지를 끼웠다. 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1학년이 혼자 공을 피해 다니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던 도윤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습관적으로 둘러본 교실은 대부분 자고 있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 이쪽으로 닿는 시선은 없었다. 도윤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소리 없이 말했다.
“잡지 마.”
운동장을 보면서 웃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희성이 찡그려진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놓아주었다. 웬일로 순순히 놓아주는 손에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던 도윤이 다시 운동장을 돌아봤다. 그러나 피구를 하던 아이들은 이제 수업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윤은 저들과 같이 피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더 아쉬워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종례가 끝나고 차를 타러 가는 길에 문득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진 도윤은 희성에게 눈치를 보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솔직히 무시당할 줄 알고 일단 말해본 거였는데 차는 방향을 꺾어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이제는 병원에 갈 일도 없어서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가야 했던 도윤의 일상에 아이스크림 가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희성과 함께 가게로 들어와 눈을 빛낸 도윤이 수많은 아이스크림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먹고 싶은 맛이 너무 많았다. 도윤이 고민을 시작하자 앞에 서있던 직원이 친절하게도 먼저 맛보기를 권해왔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희성을 돌아봤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희성에게 시달린 도윤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도윤의 옆에 선 희성이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았다.
“뭐 먹고 싶은데.”
“나 이거.”
“이걸로 주세요.”
작은 숟가락에 아이스크림이 푹 떠졌다. 맛보기치고는 너무 많은 것 같은데. 희성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신난 도윤은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이며 숟가락을 받은 도윤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 혀를 굴렸다. 달달한 초콜릿 맛이 입안을 즐겁게 해주었다. 맛있다. 숟가락을 쪽쪽 빨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희성이 직원을 보지도 않고 이것을 담아 달라 말했다.
“또.”
“어…. 이거!”
“이것도.”
“나 이것도 먹어도 돼?”
“담아주세요.”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초코 볼이 박힌 것과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고른 도윤이 신나서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사두면 집에 먹을 사람이라곤 도윤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서 도윤이 먹고 싶은 대로만 담았다. 정량보다 많이 담았다는 말에 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직원이 건네는 아이스크림을 받고 가게를 나온 도윤이 가벼운 걸음으로 차에 올라 봉지를 끌어안았다. 애도 아니고 무슨 아이스크림에 저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옆에 앉은 희성이 문을 닫자 차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아이스크림이 어지간히도 먹고 싶었는지 도윤은 교복을 벗지도 않고 손만 씻고서 뚜껑을 열었다. 앞에 앉은 희성은 물을 마시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손을 따라 눈을 굴렸다.
“맛있어?”
“응, 응. 먹을래?”
“줘봐.”
새 숟가락의 포장을 벗기고 아이스크림을 떠준 도윤이 손을 흔들었다. 미동도 없이 새 숟가락을 보던 희성이 고개를 저었다.
“왜?”
“네 숟가락으로 줘.”
“내가 먹던 건데….”
새 숟가락에 뜬 아이스크림은 도윤의 입으로 사라졌다. 자신이 쓰던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뜬 도윤이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자 이번엔 희성이 기다렸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먹고 다시 의자에 기댔다.
“맛있지?”
“너무 달아.”
“으응….”
희성은 아이스크림을 삼키자마자 물을 마셨다. 아이스크림은 원래 달달한 맛에 먹는 거 아닌가?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먹은 도윤이 통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희성은 관심이 없어 보이니 전부 자신의 몫이었다. 이번엔 딸기 맛을 먹을 생각인지 분홍색 숟가락이 분홍색 아이스크림에 꽂혔다. 희성은 TV를 보는 것처럼 도윤을 구경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를 켰다. 아이스크림을 뜨느라 고개를 숙인 모습을 찍자 찰칵, 소리에 놀란 눈이 자신을 향한다. 희성은 그 놀란 얼굴에 또 화면을 터치했다. 찰칵.
“왜 찍어…?”
“내 마음인데.”
“…….”
찰칵. 희성이 또 사진을 찍자 도윤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찰칵. 이제는 아예 턱을 괴고 사진을 찍었다. 숟가락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빨며 눈치를 본 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만 찍으면 안 돼?”
“내가 내 핸드폰으로 찍겠다는데 네가 뭔데 찍으라 마라야.”
“…….”
“계속 먹기나 해.”
통을 쥐고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려고 해도 자꾸 들려오는 찰칵 소리에 도윤이 손을 뻗었지만 몸을 뒤로 빼는 희성이 더 빨랐다.
“왜 자꾸 찍어어.”
“귀여워서.”
“아니야.”
“뭐가 아니야?”
“나 안, 안 그래.”
“너 안, 안 그래?”
“따라 하지 마!”
“따라 하지 마?”
“아, 진짜…!”
도윤이 씩씩거리며 숟가락을 물고 아이스크림 뚜껑을 닫았다.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둔 희성이 씩 웃었다.
“안 찍을 테니까 먹어.”
“싫어, 나 안 먹어.”
“삐졌어?”
“아니야.”
“또 아니야?”
“너….”
씩씩거리던 몸이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숟가락을 정리했다. 몸만 돌린 채 주방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도윤을 보다가 말도 없이 2층으로 올라가려는 걸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사진 몇 장 찍었다고 가시를 세우는 도윤이 귀여웠다. 찔려도 아프지 않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것도 가시라고 세우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워서 방에 따라 들어간 희성이 대뜸 입술부터 붙였다. 방금까지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탓에 입안이 달달했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있고 달달한 입안이 만족스러워 한참이나 혀를 쪽쪽 빤 희성이 아랫입술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늘어졌다.
도윤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입술을 닦아내는 행동에도 그저 귀여워서 침대에 눕힌 희성이 이마와 볼에 차례대로 뽀뽀를 남겼다.
“그만, 그으만 좀 해!”
“도윤아.”
“왜? 아, 진짜 그만….”
뽀뽀를 그만하라고 했더니 이젠 볼을 깨문다. 도윤이 고개를 틀어 희성을 피했다. 그러나 이번엔 목에 쏟아지는 뽀뽀세례에 도윤이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방학 때 놀러 갈까.”
“…놀러?”
“응.”
“어디로 갈 건데…?”
꼬물거리던 몸이 멈추고 도윤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왔다. 기대에 찬 눈에 몸을 숙인 희성이 눈가에 뽀뽀를 해주었다.
“어디든.”
“둘이?”
“그럼 누구랑 가려고.”
“아, 아빠도 있고….”
“…….”
진심이냐는 표정에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터뜨린 희성이 입을 벌리고 오른쪽 눈을 머금었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오른쪽 시야에 도윤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닿은 혀가 눈꺼풀을 핥았다. 도윤은 이상한 기분에 감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희성의 혀가 쓸고 지나간 속눈썹이 젖었다.
“바다 보러갈까?”
“바다?”
젖은 눈을 비비려다 저지당한 손목이 가슴에 올려졌다. 졸지에 다소곳한 자세가 된 도윤이 오른쪽 눈을 찡그렸다.
“가서 바다도 보고….”
“…….”
이마에 닿은 입술이 웅얼댔다.
“너 먹고 싶은 것도 먹고….”
볼에 내려앉은 입술이 다시 입술을 찾았다. 그러나 혀는 들어오지 않는 짧은 입맞춤이었다. 도윤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떨렸다.
“어때?”
“응?”
“좋아?”
“뭐가…?”
“여름방학 계획.”
“…….”
지금은 희성의 얼굴이 무섭지 않았다. 자신의 볼을 쥐고 있는 희성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도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아?”
“…응, 좋아.”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도윤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었다. 희성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좋다는 말이, 이렇게도 좋은 거구나. 소름이 돋고 아랫배가 절로 당겼다. 좋다는 말을 한 번만 더 해주면 만져주지 않아도 세울 것 같았고, 또 한 번만 더 해주면 좋다는 말 한마디에 사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희성이 몸을 숙여 도윤의 입술을 머금고 빨았다. 도윤은 여전히 목석같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도윤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좋다’라는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