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1)
도윤은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유독 기분이 가라앉았다. 지난주에는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했는데 자신과 함께 있을 때면 조용하기만 했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병원을 다녀온 날이면 항상 그런 생각이 잇따랐다. 세상 모든 우울함은 모두 떠안고 집으로 돌아온 도윤은 간단하게 씻고 케이지 안을 살폈다. 연한 갈색의 햄스터가 자신의 집에 숨어 있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도윤이 씻느라 어느 정도 따뜻하게 열이 오른 손을 케이지 안에 넣어주자 햄스터가 갸웃거리며 다가오더니 손바닥 위에 자리를 잡았다. 여태 이름을 정하지 못해서 계속 햄스터라고만 불렸던 햄스터는 이제 ‘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래 후보에는 ‘콩’이와 ‘솜’이가 있었는데 어쩐지 콩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렇게 정했었다.
“잘 놀고 있었어?”
콩이에게서 돌아올 대답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도윤은 매일매일 이렇게 말을 걸곤 했다. 콩이는 전에 정인이 준 사료와 간식이 다행히도 입에 맞았는지 잘 먹었다. 콩이를 책상에 두고 두 손을 둥글게 말아 동굴을 만들자 빠르게 다가온 콩이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귀여워…. 도윤이 웃으며 엄지로 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콩아. 병원에서 그러는데, 엄마가 곧 깨어날지도 모른대.”
“…….”
“엄마가 일어나시면,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
“그냥 같이 예전처럼 밥 먹으면서 얘기도 하고 싶어. 그게 다야.”
엄마도 너 보면 좋아하실 텐데. 손으로 파고드는 콩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냥 들뜨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콩이를 보며 작게 웃은 도윤이 구석에 두었던 간식을 꺼냈다. 식빵 모양의 아주 작은 간식이었는데 정인이 준 간식 중에 이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는 아주 작았지만 햄스터에게는 아주 커다란 간식을 안고 열심히 먹기 바쁜 콩이를 보고 있자 이상하게 배가 고픈 느낌이었다. 도윤이 콩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케이지 안에 넣어두고는 방을 나섰다.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고 살금살금 걸어서 1층으로 내려간 도윤이 아버지가 지내는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지만 아직 퇴근 전인지 방은 조용했다.
배고픈데…. 배를 만지작거리며 주방으로 향한 도윤이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주변을 살폈다. 희성의 집에는 그 흔한 라면조차 없었다. 예전에는 가끔 부모님과 함께 야식을 먹기도 했었는데 이 집에서는 저녁을 먹고 가볍게 과일이나 차를 먹는 것이 다였다. 배에서 작게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서 뭘 먹고 오든, 시켜 먹든 희성의 허락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도윤이 다시 2층으로 올라가 희성의 방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똑똑.
“저기, 난데.”
발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도윤이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곤 머쓱한 듯 목소리를 죽였다.
“나 배, 배고파서….”
“…….”
“편의점 갔다 와도 돼?”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은데.”
희성이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도윤이 입술을 꾹 다물고 희성의 팔만 바라보았다.
“뭐 먹고 싶어?”
“…라면?”
“왜 그런 걸 먹어?”
“배고파….”
도윤이 저도 모르게 힘없이 배를 문질렀더니 희성의 시선이 따라왔다.
“아니면, 어, 나 뭐 시켜 먹어도 돼?”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나도 용돈 받아!”
“받아봤자 뭐 얼마나 받는다고….”
흘리듯이 말했지만 그 목소리가 작지는 않은 탓에 도윤의 속이 조금 상했다. 희성에게는 내가 받는 용돈은 돈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말할 건 없지 않나…. 싶은 거다.
“이걸로 계산해.”
“나, 나도 돈 있어.”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들지 마.”
“으응….”
희성이 건네는 카드를 쥐고 방으로 돌아온 도윤이 메뉴를 고민하다 치킨을 주문했다. 문 앞에서 벨을 누르지 말고 전화만 해달라는 말도 까먹지 않고 적어두었다. 치킨 말고도 다른 메뉴도 먹고 싶었지만 자신의 돈이 아니니 일단은 꾹 참기로 했다.
배달이 오는 동안 도윤은 인터넷 강의를 틀어 두고 콩이가 노는 것을 구경했다. 쳇바퀴를 타면서 내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바닥에 깔아둔 베딩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햄스터들은 시력이 나빠서 자신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괜히 콩아, 하고 이름을 불러 보기도 했다. 기껏 강의를 틀어 놓고 진도를 따라갈 생각이 없던 도윤은 반짝하고 밝아지는 핸드폰에 카드를 챙겨 1층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지 않았으니 아마 배달원은 대문 앞에 있을 것이었다. 도윤이 신발을 구겨 신고 넓은 정원을 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뜨거운 치킨을 품에 안고 고개를 꾸벅인 도윤이 뛰어왔던 정원을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집으로 들어왔다. 오전만큼 일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조용한 집은 어쩐지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들기도 했다. 치킨을 식탁에 두고 2층을 올려다본 도윤이 짧은 고민을 마치고 희성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나 도윤이.”
어차피 2층에 올라오는 사람이라고는 도윤과 희성 둘뿐인데 도윤은 꼬박꼬박 자신임을 알렸다. 희성이 작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알아.”
“나 치킨 시켰는데, 같이 먹을래?”
“…….”
“그리고 네가 사준 거니까….”
“알았어.”
도윤에게 받은 카드를 책상에 던진 손이 문을 닫았다. 먼저 내려가는 것 같던 작은 머리통은 희성이 내려오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기 바쁘다.
오랜만에 먹는 치킨이라 그런지 포장을 뜯는 손길이 빨랐다. 고소한 냄새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희성은 앞에 앉아 도윤이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얀 손이 쥐고 있던 젓가락으로 치킨을 뒤적이더니 다리를 찾아 희성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희성이 자신의 앞 접시를 밀어 비어 있는 앞 접시와 바꿔가자 도윤의 눈에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다리 안 좋아해.”
“왜…?”
“귀찮아.”
이번엔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이 됐다. 노릇노릇 잘 튀겨진 닭 다리를 보며 입맛을 다신 도윤이 젓가락을 들며 물었다.
“그럼 다리 내가 다 먹어도 돼?”
“응.”
“진짜?”
“진짜.”
닭 다리를 양보해 주고 뼈가 많이 붙지 않은 살을 찾은 희성이 치킨을 먹지도 않고 남이 먹는 모습만 구경했다. 처음에는 젓가락으로 먹던 도윤이 눈치를 살살 보면서 손으로 치킨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저녁을 굶긴 것도 아닌데 도윤은 첫 끼 마냥 잘 먹었다. 먹이를 저장하는 햄스터처럼 볼이 부풀었고 입술은 번들거리는데도 그게 귀여워 보였다. 쩝쩝 소리도 내지 않고 꼭꼭 씹어 먹던 도윤이 손도 대지 않은 희성의 치킨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입안에 음식이 있어서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도윤이 급하게 치킨을 삼켰다.
“안 먹어?”
“갑자기 치킨보다 다른 걸 더 먹고 싶어서.”
“어떤 거?”
“궁금해?”
“음….”
정말 궁금하기는 한지 치킨을 먹지도 않는 모습에 희성이 웃으며 발을 뻗었다. 식탁 아래에서 희성의 발과 도윤의 무릎이 닿았다. 도윤이 화들짝 놀라며 다리를 뒤로 물렸다.
“뭐해!”
“궁금하다며.”
“이제 안 궁금해졌어.”
“왜, 좀 더 궁금해보지.”
“나 치킨 먹을 거야.”
도윤이 고개를 푹 숙이곤 치킨 한 조각을 집었다. 희성이 아쉬운 듯 볼 안을 혀로 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윤에게 마실 것이 필요한 것 같아 컵을 꺼낼 요량으로 일어난 건데 치킨을 먹던 도윤이 다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도윤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떠드는 TV도 없이 환하게 불만 켜져 있는 이 커다란 집이 조금 무서웠다. 그런데 이 분위기 속에서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더 무서운 일이라 일단 희성을 붙잡고 봤다.
“어디, 어디 가?”
“컵 가져오려고. 너 목마르잖아.”
“아…. 응, 응.”
“내가 갈까 봐 무서웠어?”
“그런 거 아니야.”
머쓱한 듯 도윤의 귀에 열이 올랐다. 유리잔에 가득 차는 콜라를 보는 빤한 시선에 희성이 컵을 들고 도윤의 옆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주면 되지 왜 굳이 옆으로 오냐는 듯한 눈이 순진하게 움직였다. 희성이 컵을 옆에 두고 엄지로 도윤의 입술을 닦아냈다.
“마시고 싶어?”
“응.”
“내 말 잘 들으면 줄게.”
“…….”
“뽀뽀.”
“…싫어.”
“싫어?”
“싫어.”
“그럼 치킨만 먹든지.”
도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목은 마른데 희성의 말을 듣기는 싫었다. 그치만 콜라는 마시고 싶었다. 떨리는 눈으로 희성과 시선을 마주한 도윤이 아랫입술의 속살을 깨물다 몸을 살짝 일으켰다. 쪽. 간질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희성이 만족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유리잔을 쥔 도윤이 콜라를 마시다 따끔거리는 목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희성이 유리잔을 도로 가져가버렸다. 탄산에 힘겨워하던 얼굴 위로 당혹감과 불안함이 금방 차올랐다.
“콜라 마시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망했다. 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잔뜩 억울해 보이는 도윤이 남겼던 입술자국을 따라 유리잔에 입을 댄 희성이 콜라를 마셨다. 콜라는 차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그런 것쯤은 별 상관이 없었다.
***
어제 야식이라고 치기엔 조금 이르고, 저녁이라고 치기엔 많이 늦은 치킨을 먹고 잤더니 아침에 속이 더부룩해서 밥을 반이나 남겼다. 그리고 콜라를 마시기 위해 희성에게 얼마나 많은 뽀뽀를 했던가. 선생님을 따라 필기를 마친 도윤이 몸을 떨었다. 이제는 콜라도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다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직 5분 정도 남았으니까 교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네.”
“반장은 애들 못 떠들게 해. 간다, 점심 맛있게들 먹고.”
선생님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실을 나가자 잠깐 소란스러워졌던 분위기가 반장의 말에 가라앉았다. 교과서를 책상 안에 넣고 필통 정리를 마친 도윤이 시계를 쳐다봤다. 어차피 종이 쳐도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희성이라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얼른 종이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는 다들 옆에 앉은 짝과 이야기를 하거나 아예 몸을 돌려 옆과 뒤에 앉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곧 있을 방학에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지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유난히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쓸쓸해지는 도윤이었다. 부러운 시선이 교실을 쭉 훑다가 손등에 닿는 온기에 옆으로 돌아갔다.
희성의 손가락이 손등에 닿는가 싶더니 이내 새끼손가락끼리 얽혔다. 책상 위에 올려뒀던 손을 황급히 아래로 내리자 이번에는 아예 손깍지를 껴왔다. 빠져나오려 손을 털어내면 낼수록 희성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희성이 퍽 애처롭게 쳐다보는 눈을 보며 웃었다.
“가까이 와봐.”
“왜?”
“할 말 있어.”
“그냥 하면 안 돼?”
“여기서 그냥 해도 돼?”
“…….”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희성에게 박혔다. 도윤이 느릿느릿 희성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댔다. 훅 끼쳐오는 샴푸 냄새에 숨을 깊게 들이쉰 희성이 작게 쪽, 소리를 내자 도윤이 귀를 막은 채 펄쩍 뛰며 도망친다. 희성이 소리까지 내서 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종이 울렸다. 모두 무리를 만들어 점심을 먹기 위해 교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희성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윤은 아예 두 손을 써서 희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끙끙거렸다.
“손 아파, 놔줘!”
“이러고 점심 먹으러 갈까?”
“싫어, 이거 놔…!”
“그게 좋겠다.”
“안 해, 싫어!”
“왜 자꾸 싫다고만 해. 누가 들으면 내가 너한테 못할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겠다.”
“진짜 아파, 나 아픈데…!”
그제야 손에 힘을 풀어준 희성이 텅 빈 교실을 훑었다. 복도에는 급식실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도 교실 안으로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손을 잡고 씩씩거리는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준 희성이 몸을 일으켜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 행동이 마치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는 것과 같아서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교실에 아무리 둘 밖에 없다지만 이건 좀 위험했다. 도윤이 벌떡 일어나 희성에게서 떨어졌다.
“앉아야지.”
“나 화장실 갈 거야.”
“같이 갈까?”
“오지 마!”
마치 포메라니안이 왕왕 짖는 것 같은 모습에 희성이 그저 귀엽다는 얼굴을 보이자 여전히 씩씩거리던 도윤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제는 교복만 입기에는 추운 날씨이기 때문에 후드를 위에 덧입고 나왔다. 오늘 입은 검은색 후드도 희성이 선물해 준 옷이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화장실로 들어서려던 도윤이 막 나오던 덩치와 부딪혀 휘청거렸다.
“아!”
“아….”
“씨발,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미안….”
도윤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사과를 했지만 꽤 큰 덩치를 가진 호원은 마침 잘 걸렸다는 듯 도윤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누가 봐도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모양새였다.
“사람 쳐 놓고 그게 다야?”
“안, 안쳤….”
“나 쳤잖아, 새끼야.”
“미안해.”
“안 그래도 기분 좆같았는데 씨발.”
“네 기분이 좆같은 걸 왜 남한테 풀어?”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에 도윤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희성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호원에게도 겁을 먹기는 했으나 희성에게 비하면 이건 겁을 먹는 축에도 못 낀다. 도윤이 호원을 보며 빨리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눈치를 밥 말아먹은 호원은 얼굴만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도윤아, 왜 그딴 얼굴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어?”
“나, 나 배고파.”
“기다려.”
“희성아 가자, 응?”
“하도윤, 조용히 해.”
순식간에 투명 인간이 된 호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희성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나 봐.”
“희성아….”
덩치는 크지만 자신들보다 작은 키를 가진 호원의 얼굴이 매서운 소리와 함께 옆으로 돌아갔다. 도윤의 눈이 평소보다 훨씬 더 커다래졌다.
“씨발, 쳤….”
호원의 입술이 열리기도 전에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 고작 두 대만 맞았을 뿐인데 호원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시 올라간 희성의 손이 호원의 뺨을 내려쳤다.
“너….”
“…….”
“아!”
똑같은 곳을 연달아 맞은 호원의 뺨이 무서울 정도로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도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희성의 팔을 잡았다.
“희, 성아, 하지 마.”
“아, 씨이발…!”
“희성아, 하지 마, 하지 마….”
“미, 안하니까 그만, 씨발, 미안하, 악!”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희성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호원이 잘못했다며 빌기 시작하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수많은 눈들 앞에서 잘못했다 빌던 호원의 머리채가 희성의 손에 붙잡혀 벽과 부딪혔다. 결국 도윤이 훌쩍거리며 희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희성아, 이제, 윽, 그만해….”
“…….”
“무서워, 그만해. 그만….”
바닥에 쓰러진 호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도윤의 손목을 잡아 복도를 걷던 희성은 급식실에 도착해서도 말이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느라 숟가락을 들지도 못하는 도윤을 보며 희성이 다리를 꼬았다.
“남들 앞에서 울어도 된다고 한적 없어.”
낮은 목소리에 도윤이 눈물을 닦고 숟가락을 쥐었다. 숟가락이 덜덜 떨렸다. 희성과 거의 1년을 함께 지내면서 손을 쓰는 것을 처음 보았다. 도윤이 숟가락을 쥔 손을 아래로 내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희성이 식판을 도윤의 옆에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울고 싶어도 자꾸 퐁퐁 솟아나는 눈물에 도윤이 소매를 끌어당겨 눈두덩이 위를 꾹 눌렀다. 근처에 앉은 아이들이 도윤의 옆에 앉는 희성을 힐끔거렸다.
“아.”
도윤이 흐릿한 시야를 이겨내려 눈을 비비적거리다 입술에 닿아 있는 숟가락을 확인하곤 고개를 뒤로 뺐다.
“아, 해야지.”
“싫, 내가 할 수, 있어.”
“못하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안 그래도 급식실에 앉아 울고 있던 터라 자신에게 닿는 시선들이 꽤 많았다. 차라리 눈치가 없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도윤은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기에 그 관심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다물고 고개만 젓고 있자 희성이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아까 희성이 호원을 때리던 모습이 생각나 도윤이 얼른 입을 벌렸다. 희성이 도윤의 입에 밥을 넣어주었다.
두 손이 모두 멀쩡한데 앉아서 밥을 받아먹자 쏟아지는 시선이 배로 불어났다. 도윤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몫으로 가져왔던 숟가락을 들었다. 이제는 스스로 먹겠다는 뜻이었는데 희성이 그 의견의 싹을 아예 잘라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밥 위에 반찬이 얹어진 숟가락이 또다시 도윤의 입술에 닿았다.
하나의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점심을 먹던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는 도윤으로 인해 잠시 멈춰졌다. 별안간 신경질적으로 숟가락을 식판에 던지듯 내려놓은 희성이 축축하게 젖은 소매를 보다가 주변을 훑었다. 다들 아닌 척하면서 자신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윤이 우는 얼굴을 모두가 보고 있었다. 화가 발끝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일어나.”
“왜, 왜? 나 안 울게, 이제 진짜 안 울게.”
“일어나.”
“끅, 희성아….”
우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주제에 이제 울지 않겠다고 붙잡는 얼굴이 이미 충분히 엉망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잡고 일으키자 잠깐 휘청거리다 식판을 들고 따라나선다. 혹여나 희성을 놓쳐서 화를 부를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뒤를 쫓은 도윤이 급하게 식판을 정리했다. 물도 마시지 못하고 희성을 따라 급식실을 벗어나자 찬바람이 얼굴에 쏟아졌다.
“희, 희성아.”
“…….”
“화내지 마, 응?”
“…….”
“무서워, 화내지….”
“도윤아, 난 너한테 화낸 적 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은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한 사람 같았다. 희성이 열병이라도 앓은 사람처럼 얼굴 여기저기 발갛게 열이 오른 도윤을 훑었다. 평생 자신에게만 보여줬어야 할 꼴을 모두에게 보여줬다는 사실이 아까부터 거슬렸다. 희성은 교실로 가기 위해 소매에 가려진 도윤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미지근한 손이 안에서 꼼지락거리길 반복했다. 희성이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복도에서 최호원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팼다는 소문과 최호원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실제로는 양호실에 누워있느라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소문은 끝도 없이 부풀려졌다. 왜 싸운 거래? 최호원이 하도윤한테 시비 걸었다던데. 하필 걸려도 김희성한테….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모두 비슷한 주제로 떠들었다.
소문이 퍼지는 것도 희성이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로 불려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성이 자리를 비우자 둘로 나눠졌어야 할 관심이 모두 도윤에게로 쏠렸다. 도윤이 양치를 하러 들어가자 안에서 먼저 양치를 하던 무리가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소문에 대해 입이 아프게 떠들기 바쁘더니 도윤이 나타나면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던 공간에서 도윤은 더욱더 고립되고 말았다. 마치 넓은 바다에 홀로 남겨진 무인도같이.
5교시가 시작되고도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던 희성은 5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다. 그 정도로 팼으면 아무리 김희성이라도 학폭위가 열릴 것이라는 의견과 김희성은 돈으로 다 막을 수 있다는 의견이 조용히,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싸우던 중이었다. 희성은 문제를 일으켜서 1시간이나 넘게 교무실에 있었던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부모님이 왔다는 말도 없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
종례를 할 때도 담임선생님은 잠시 희성이 있는 쪽을 쳐다본 것 말고는 별말이 없었다. 아마 학폭위가 열린다는 의견과 무엇이든지 다 막을 수 있다는 의견 중에서 후자가 이긴 것 같았다. 피가 날 정도로 때렸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가 있다니. 도윤이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희성의 뒤를 졸졸 쫓아 교문을 등지고 섰다. 그러자 평소에 타던 차가 아닌 낯선 차가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희성이 미간을 구겼다.
“오랜만이네.”
“뭐야?”
“뭐긴,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일 치워준 사람이지.”
“갈 길 가.”
“그러는 중인데. 도윤아, 타.”
“네?”
“도윤아?”
희준이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에 옆에서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가 찬다는 목소리였다. 도윤이 눈만 깜빡이며 희준을 내려다보다 희성의 눈치를 살폈다. 희성은 희준의 입에서 나온 도윤의 이름에 1차로 열이 받았고, 언제 봤다고 저렇게 다정하게 ‘도윤아’ 하고 부르는 것인지에 대하여 2차로 화가 났다. 희성의 기분이 엉망인 것도 모르고 도윤은 차가 교문의 절반을 막고 있어서 슬슬 곤란해졌다.
“데려다줄게, 타.”
“안탈 거니까 가.”
“그럼 집에 어떻게 가려고? 우리 막내 버스 탈 줄은 알아?”
“내가 버스를 타든 걸어서 가든 이 좆같은 차는 안타.”
“희성아….”
“그럼 도윤이만 타면 되겠다.”
희준이 생글생글 웃으며 도윤에게 손짓했다. 뒤로는 교문을 빠져나가려는 줄이 생겼다. 안 그래도 점심부터 온갖 소문에 휩싸였던 둘이었다. 도윤이 희성의 손을 잡고 차 문을 열었다.
“희성아, 그냥 타면 안 돼?”
“…….”
“그렇게 버티고 있어도 오늘 나 말고는 아무도 안 와.”
“…….”
“희성아아….”
“…….”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욕을 씹은 희성이 차에 오르자 운전대를 잡은 희준이 씩 웃었다. 희성을 먼저 태운 도윤이 차에 오르자 그제야 교문을 막고 있던 차가 길을 터주었다.
“그래서 좆같은 차에 탄 기분이 어때.”
놀리는 투로 건넨 말이었지만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희준이 룸미러를 통해 희성을 보다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알만 굴리고 있는 도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도윤이는 집에서 봤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네, 네.”
가방을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이던 도윤의 손을 잡아챈 희성이 말없이 힘을 주었다.
“잘 지냈어?”
“네, 아…!”
“왜? 어디 아파?”
“아, 아니요…. 아….”
희준에게 대답을 하면 할수록 잡힌 손이 아려온다. 힘을 얼마나 줬는지 손끝으로 피가 몰려 터질 것처럼 빨갰다. 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술이 절로 열렸다. 소리도 못 내고 빠져나오려 끙끙거리던 도윤이 고개를 들어 희성을 쳐다보았지만 희성은 창밖만 보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뒤를 힐끔거린 희준이 소리 없이 웃었다.
“도윤이 죽겠다.”
“…….”
“애 울겠어.”
“…….”
“아아…, 나 손….”
신호가 꽤 길었다. 도윤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여태 혼자 떠들고 있던 라디오도 꺼버렸다. 아프다고 우는소리를 내는데도 희성은 창밖만 보며 손을 풀지 않았다.
“나 아프다고 했, 했잖아.”
“…….”
“왜 그래….”
이어지는 간절한 목소리에도 희성은 꿋꿋하게 창밖만 보았다. 혹시 창밖에 신기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힐끔거렸지만 평범하게 신호를 기다리는 차만 보였다. 신호가 바뀌고 희준이 운전을 하느라 도윤에게서 관심을 거두자 손에 슬슬 힘이 풀렸다. 느슨해진 틈을 타 손을 빼낸 도윤이 손을 주물렀다. 이 정도 아픔이라면 못해도 부러졌을 것이다. 아마 분명 멍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늘 그랬듯 엄살을 부리지는 못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또 이런 일이 벌어질까 지레 겁을 먹은 도윤이 끌어안고 있던 가방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음 주면 생일인데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생일이요?”
“도윤이는 아직 모르나? 희성이 다음 주면 생일인데.”
“…진짜?”
처음 듣는 소식에 도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자신의 생일은 여름이었으나 그때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던 때라 생일을 챙길 정신이 없었다. 희성이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도윤과 눈을 마주했다. 희준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룸미러를 힐끔댔다.
“왜 말 안 했어?”
“했으면.”
“했으면 축하해 줄 수 있잖아.”
“어떻게 축하해 줄 건데.”
“…필요한 거 있어?”
“없어.”
“으응, 가지고 싶은 거는?”
도윤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희성을 떠보려고 뱉은 말 같은데 귀신같은 희성은 가볍게 흘려들었다.
“이미 가졌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래도 생일인데….”
“됐어.”
“…왜? 생일이잖아….”
귀엽게 노네. 눈으로는 도로를 보고 귀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희준이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웃었다. 다시 창밖을 보려던 희성이 소리도 없이 웃고 있는 희준을 발견하고 눈을 찡그렸다. 희준에게 도윤의 목소리를 너무 많이 들려줬다. 희성이 작게 터지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도윤은 여전히 ‘생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물이나 케이크 따위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희준이 쏘아 올린 생일이라는 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막막했다. 가끔 자신을 막대하거나 무섭게 굴어도 어쨌든 희성이 아니었으면 어머니의 병실을 옮기지도 못했을 거고, 이렇게 커다란 집에서 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었다. 희성은 매일 특별한 날도 아닌데 도윤에게 옷을 사주곤 했다. 여태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선물을 매일 자기 전까지 고르고 또 골랐는데 이거다, 하고 나오는 답은 없었다.
희성은 게임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모으는 취미도 없어 보였다. 평생 부족함이라곤 모르고 살았을 것이 뻔했고 실제로도 다 가졌으니 선물은 필요 없다고 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꾸준히 용돈을 받았지만 비싼 선물을 살 만큼은 못됐다. 도윤이 고민을 하는 사이 희성의 생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이제 당장 이틀만 지나면 희성의 생일이었다. 도윤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뜯다가 피를 보고서야 그만두었다.
우선 희성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선 집 밖으로 나가야 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대체 뭐라고 핑계를 대고 나가야 하지? 옷까지 다 입어 놓고 정작 중요한 허락을 못 받아서 의자에 앉아있던 것이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도윤이 신경을 써서 마련해 준 집에서 자다가 깨서 돌아다니길 반복하던 콩이가 기웃거렸다. 초조하게 떨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콩콩 치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한 도윤이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섰다.
희성은 주말이면 곧잘 어머니에게 끌려다니곤 했으니 오늘도 1층에 있을 것이 뻔했다. 10년 만에 얻은 늦둥이라더니 희성은 정말로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귀찮아했지만 말이다. 도윤이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식탁이 있는 주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립밤을 발랐음에도 입술이 자꾸 마르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식탁에는 희성의 어머니와 희성이 앉아있었다. 먼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쭈뼛쭈뼛 다가오는 도윤을 주현이 먼저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해왔다.
“도윤이 어디 가려고?”
언제 봐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미소에도 도윤은 우물쭈물 망설였고 지루한 얼굴로 과일을 먹던 희성이 몸을 일으켰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고개만 꾸벅 숙인 도윤이 희성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희성은 2층으로 올라가지도 않고 계단의 근처에 서서 도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병원은 어제 다녀왔잖아.”
“그게 그러니까….”
“어디 가려고?”
“엄마 보고 싶어서, 병원 가려구.”
“…….”
“…나도 엄마 보고 싶어.”
“…….”
희성의 생일선물을 위해 엄마의 핑계를 대다니. 나중에 엄마한테 사과해야지. 아무리 도윤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희성이라도 병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웬만해선 보내주곤 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병원을 핑계로 다른 곳에 가본 적은 없었던 터라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찼다. 마치 경찰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도윤이 가방끈을 매만지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같이 가.”
“어?”
“병원. 나도 같이 가자고.”
“왜, 왜?”
“인사드리게.”
“안 그래도 돼! 우리 엄마 아직….”
“그럼 너도 가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아니, 괜찮은데, 진짜 괜찮은데….”
도윤의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렸다. 병원 안 갈 건데! 계절에 맞게 입은 패딩을 당장 벗고 싶을 만큼 더웠다. 밖에 나가서 선물을 사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졌다.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쿵쿵 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간 도윤이 욕실에서 나오는 희성과 마주쳤다.
“왜 올라와.”
“나, 나 병원 안가.”
“왜.”
“다른데 갈 거야.”
“어디.”
“…백화점?”
“거긴 왜.”
“뭐 사려고….”
다 닦았다고 생각했던 물이 턱에서부터 톡, 떨어졌다. 희성이 손등으로 턱을 닦아내곤 방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패딩을 입은 도윤과는 달리 코트를 걸친 희성이 방에서 나오며 입을 열었다.
“가방은 왜 메고 있어?”
“어….”
차마 병원에 간다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메고 있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고 그 선물을 가방에 넣고 숨겨서 들어오는 것이었는데 선물의 주인공이 동행하게 생겼다. 즉, 자기 선물을 사는 것을 그 주인공이 실시간으로 다 지켜보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사실 아직도 무슨 선물을 줘야 할지 몰라서 돌아다니며 고를 생각이었는데 아주 큰일이 났다.
백화점에 들어선 지 30분이 지난 지금, 도윤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여러 개가 들려 있었다. 평소에 입고 다녔던 외투는 길이가 짧은 패딩이었는데 희성이 자기 마음대로 롱패딩을 사주었다. 그것도 뜬금없이 보라색 롱패딩을 사주려고 하던 것을 겨우 말려 무난하게 검은색으로 샀다. 분명 희성의 생일선물을 사려고 온 백화점인데 어쩐지 본인의 몫만 잔뜩 늘어나고 있었다.
“너는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이거 입어봐.”
“아니, 나 이제 괜찮은데.”
“입고 나와.”
희성이한테는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급기야 그런 생각도 들었다. 쇼핑백을 구석에 놔두고 옷을 한 아름 안고 탈의실로 들어선 도윤이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곰 인형이 가운데에 크게 박힌 맨투맨을 입고 베이지색 면바지까지 입은 도윤이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서있던 희성이 흠. 하고 낮은 숨을 터뜨렸다.
다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문으로 뻗던 손이 턱 막혔다. 아직 문도 반이나 열려 있는데 희성이 다짜고짜 입술을 찾았다. 본능적으로 도망가려던 뒤통수가 뒤에서 막혔다. 짧지만 강렬하게 입안을 훑고 빠져나가는 혀의 미끄덩한 느낌에 도윤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여긴 엄연히 밖이었다.
“갈아입고 나와.”
“밖이잖아!”
씩씩거리는 도윤을 안으로 밀어 넣자 마침 다가온 직원이 말을 걸었다. 도윤이 직원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지 사이즈는 괜찮으세요?”
“네. 네.”
“지금 입고 있는 거 전부 계산해요.”
희성이 건네는 카드를 받고 사라지는 직원을 허망한 눈으로 보던 도윤이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 나와 희성의 옆에 섰다.
“나 옷 필요 없어.”
“그럼 환불해.”
희성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도윤이 직원에게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시야에 가위가 나타나 옷에 달린 줄을 툭툭 끊어냈다. 그걸 왜…. 직원은 앞에 서있는 둘을 보지도 않고 빠른 손길로 쇼핑백을 꺼내 옷을 담았다.
아직 희성의 선물은 사지도 않았는데 손이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희성은 안을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옷이 보이면 고민도 하지 않고 도윤에게 입혀보고 사기를 반복했다. 니트 하나에 몇십만 원이 결제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통장을 떠올린 도윤이 침을 삼켰다.
“희성아, 이제 진짜 그만 사면 안 돼?”
“응.”
“나 이거 다 못 입어, 응?”
“그럼 벗고 다녀.”
쇼핑백이 너무 많아서 손목이 아팠다. 도윤이 울상으로 따라다니다 캐러멜색의 코트 앞에서 멈춘 희성으로 인해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진짜 무리였다. 도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나 코트 안 좋아해.”
“상관없어.”
“싫어, 나 안 입을 거야.”
“네 의견 물어본 적 없어.”
멀리서 둘을 지켜보던 직원이 희성과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다가와 코트를 꺼내 주었다.
“어느 분이 입으실 건가요?”
“아니요, 괜찮….”
도윤의 손에 있던 수많은 쇼핑백들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났다. 눈치가 빠른 직원이 웃으며 다가와 코트를 내밀었고 도윤이 패딩을 벗었다. 희성의 말처럼 애초에 자신의 의견은 필요가 없었다. 코트를 입은 도윤이 어정쩡하게 서서 옆을 돌아보자 희성과 직원이 눈을 빛냈다.
“새 상품으로 준비해드릴까요?”
“그럼 남들이 다 입고 갔던 걸 들고 갈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왜 말을 그렇게 해….”
말을 뱉은 사람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그 옆에 서서 옷을 입던 사람만 괜히 눈치를 봤다. 희성이 입으라는 옷을 입고 벗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무거운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다녔더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기 시작했다. 도윤이 끙, 소리를 내며 쇼핑백을 쥐고 계산을 마친 희성의 옆에 붙었다.
“저, 있잖아.”
“응.”
“조금만 쉬면 안 돼?”
조금 전에 계산한 코트가 든 쇼핑백까지 드니 정말 한계였다. 코트를 입은 자신과는 달리 패딩을 입어선지 도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덥고 힘들어서 끙끙거리는 볼 위로 열이 올라 있었다. 보고 있자니 문득 저 볼을 한 번만 깨물고 빨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배가 저릿한 것도 같았다.
“카페 갈까.”
“으응.”
희성이 웃으며 도윤의 볼을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도윤이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희성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바깥이 한눈에 보이는 창가 자리에 짐을 내려놓고 패딩부터 벗어 의자에 건 도윤이 니트를 펄럭였다. 희성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카운터 앞에 서있었다. 아직 선물도 못 샀고 딱히 필요도 없는 자신의 옷만 잔뜩 샀으니 카페에선 희성에게 무엇이든지 사주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줄게.”
“배고파?”
“으응, 조금.”
“이거 먹을까.”
진열대에 놓인 허니브레드의 모형을 가리키는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게.”
“허니브레드 하나, 아메리카노 하나.”
“어, 어. 저는 아이스티요.”
도윤이 돈을 꺼내려 지갑을 여는 순간 희성이 카드를 내밀었다. 당황한 손이 희성의 소매를 잡았지만 이미 카드는 직원의 손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카드와 진동벨을 건네는 직원은 웃고 있었다. 도윤이 지갑을 쥐고 자리로 돌아와 입술을 내밀었다.
“뽀뽀하고 싶어?”
“아니야!”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오해하게.”
“내가 산다고 했잖아.”
희성이 계산을 한 것이 꽤 못마땅했는지 도윤은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아무튼,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희성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옆으로 와.”
“왜?”
“한 번만 더 되물으면 여기서 키스할 거야.”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자꾸! 도윤이 시끄러운 속과는 달리 얌전히 희성의 옆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연인이나 가족, 친구끼리 온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자신과 희성도 일단은 친구이니 이상할 건 없었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지라 자꾸 마음이 불편했다.
슬쩍슬쩍 엉덩이를 들썩이는 도윤의 몸짓에 의자에 기대고 있던 희성이 손을 뻗어 허리를 감았다. 얇은 니트 한 장만 입고 있던 도윤이 흠칫 떨었다.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에 닿았다. 불안함에 들썩거리던 하체가 건전지라도 뺀 로봇마냥 뚝 굳었다.
“하지 마….”
도윤이 희성을 말렸지만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이번엔 니트 안으로 침범했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손에 소름이 돋았다. 파르르 떨리는 살을 만지며 도윤의 어깨에 기댄 희성이 낮은 숨을 뱉었다. 살을 만지기만 했을 뿐인데 어쩐지 숨이 트였다.
“차, 차가워.”
“도윤아.”
“싫어…. 하지 마, 응?”
“이제 좀 살 것 같아.”
“읏, 그만….”
희성이 머리를 비비적거리다 고개를 들어 도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거의 튀어 오르듯 놀란 도윤이 손으로 목을 가림과 동시에 진동벨이 울기 시작했다. 도윤의 귀가 붉어졌다. 진동벨을 들고 도망치듯 일어난 도윤이 멀어졌다. 따뜻했던 감각이 사라지고 찾아온 것은 아쉬움이었다. 니트의 오른쪽이 밖으로 빠져나와 엉망인 것도 모르고 도윤이 제자리를 찾아왔다.
허니브레드의 달달한 맛이 입에 맞았는지 도윤은 생크림을 푹 찍어서 잘도 먹었다. 목이 막히면 아이스티를 마시고, 또 입이 심심하면 허니브레드를 먹고. 의자에 양손을 대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도윤이 아이스티에 꽂힌 빨대를 쪽쪽거렸다.
“맛있어?”
포크에 꽂힌 빵보다 그 위에 얹어진 생크림이 더 많았다. 도윤이 입안 가득 들어차는 달콤함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희성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입술에 묻은 생크림이나 닦고 먹으라는 뜻이었는데 도윤의 혀가 날름 그 위를 핥고 사라졌다. 붉은 혀가 새하얀 생크림을 핥아먹었다. 단순히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먹으려는 행동이었는데도 충분히 색정적이었다. 희성이 아랫배에서부터 또 한 번 느껴지는 저릿함에 빨대를 물었다.
***
도윤은 토요일에 간 백화점에서 끝내 아무런 선물도 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은 오히려 자신이 잔뜩 받아버렸고 카페에서도 희성이 돈을 썼다.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제 선물도 없이 그저 말로만 축하를 해주게 생겼다. 토요일에도 나갔는데 일요일에도 나간다 그러면 희성이 화를 낼 것 같아서 말도 꺼내지 못했다.
편지. 편지라도 쓰자. 그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은 지 벌써 30분이 지났다. 그마저도 편지지가 없어서 A4용지에 자를 대고 줄을 그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공책을 찢어서 편지를 쓰는 편이 더 나았겠다,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희성이에게.]
도윤이 볼펜으로 쓴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보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도윤이 고민을 하며 볼펜의 뒷부분을 케이지 앞에 들이밀자 콩이가 볼펜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귀여워.
“뭐라고 쓸까?”
자꾸 따라다니는 콩이가 귀여워 볼펜을 천천히 움직이던 손이 다시 종이 위에 올랐다.
[나 도윤이.
희성아 생일 축하해.
선물은 네가 뭘 가지고 싶어 할지 몰라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서 아직 못 샀어.
너는 자꾸 필요 없다고 그러고, 나는 주고 싶었는데….
생일은 원래 그런 거잖아. 선물 받으면 기분 좋으니까.
너는 맨날 나한테 다 사주는데 나는 받기만 하고 그래서 미안해서….
그러니까 가지고 싶은 거 말해주면 안 돼?
아무튼…. 생일 축]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일단 적고 봤더니 내용이 이상했지만 아직 시간은 있으니 새로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도윤이 축하한다는 말을 다시 쓰기 위해 고개를 숙이다 갑자기 열리는 문에 황급히 종이를 뒤집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희성이 양팔로 종이를 가리고 있는 도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왜?”
“…….”
희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색하게 종이를 가린 도윤이 종이를 아무렇게 접어 책에 끼우고 덮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도윤이 뚝딱거리며 일어났다.
“나 씻어야, 씻을래.”
“…….”
“씻고 올게.”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쏙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희성이 고민도 하지 않고 끼워져 있던 종이를 꺼냈다. 엉망으로 접힌 종이를 펼친 희성이 내용을 읽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맨 마지막에 쓴 ‘축’이라는 글자는 엉망이었다. 편지를 쓰다가 놀랐는지 글자가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생긴 것처럼 글씨도 귀엽고 예뻤다. 희성이 편지를 들고 방으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꼼꼼하게 말린 도윤이 마지막으로 로션을 바르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온종일 집에만 있었지만 침대에 누우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려서 덮고 있으니 몸이 노곤했다. 끔뻑끔뻑.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부드러운 이불이 스친다. 좋다…. 이불에서는 좋은 냄새도 났다. 도윤이 이불에 얼굴을 비비다 벌컥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렸다.
“하도윤.”
“으응.”
“나 하고 싶은 거 생겼어.”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게 생겼다니 좀 이상했지만 도윤은 일단 눈만 끔뻑거렸다. 문을 닫고 이불에 파묻혀 눈만 내놓고 있는 도윤에게 다가온 희성이 망설임도 없이 이불을 치워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이불에 도윤이 당황할 틈도 없이 희성이 위로 올라탔다.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을 이해하려 도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내려와서 얘기하면 안 돼?”
내려와 달라는 부탁에 희성이 씩 웃었다. 희성은 웃으면 입술에 동굴이 생기곤 했다. 희성의 몇 안 되는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게 왜 지금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생일선물.”
“뭐 가지고 싶은데?”
“너.”
“…나?”
“응, 너.”
시원하게 웃으며 다가온 희성이 곧장 입술부터 찾았다. 아래에 깔린 도윤이 벗어나려 바르작거렸지만 희성이 팔을 잡아 자신의 목뒤로 감아버리는 바람에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봤자 희성은 그만두는 법이 없었고 결국 자신의 힘만 빠지기 일쑤였다. 희성의 목에 팔을 두르고 미간을 찡그린 도윤이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지는 희성을 쳐다보았다. 잘근잘근 깨무는 느낌이 간지럽기도 했다. 오늘따라 희성이 잘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만들어내는 웃음에 정신이 조금 멍했다.
희성의 혀를 따라잡지 못해서 벅찬 숨을 간간이 쉬기만 하던 도윤이 티셔츠 아래로 들어서는 손에 눈을 번쩍 떴다. 음, 읍. 입술이 떨어지자 도윤의 입에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아!”
도윤의 볼을 깨물고 그 위로 짧은 뽀뽀를 남긴 희성이 목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를 빨았다. 방금 씻은 탓에 도윤의 목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귀밑에 입을 맞추고 핥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상, 이상해, 하지 마!”
희성은 늘 그랬듯 도윤의 부탁을 거절했고 티셔츠를 위로 쭉 잡아 올렸다. 도윤이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며 옷을 잡아 내렸다.
“싫어, 이거 싫어.”
“뭐든 다 해주겠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
“나 생일인데.”
“그래도 이건!”
“넌 나한테 다 받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 받으면 억울하잖아.”
“내가 달라고, 한 적 없잖아….”
“근데 다 받았잖아.”
할 말이 없었다. 도윤이 입을 다물고 희성을 노려봤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눈빛이었다. 희성이 옷을 끌어올려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얼굴부터 목까지는 벌써 분홍빛이었다. 쇄골을 깨물고 빨기를 반복하자 마치 흰 종이에 빨간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붉은 점이 생겨났다. 희성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넌, 여기도 예쁘네.”
희성의 시선이 닿은 곳은 도윤의 가슴이었다. 하얀 가슴팍과 분홍빛의 유두가 예쁘고 귀여웠다. 도윤이 옷을 끌어내리려 버둥거렸지만 희성이 유두를 입에 머금자 우뚝 멈췄다. 입에 들어선 말랑한 유두가 빠르게 딱딱해졌다. 달달한 사탕을 빨 듯 힘을 주다가 혀로 문지르자 도윤에게서 신음이 터졌다.
“아, 하아….”
듣기 좋은 신음에 웃음이 샜다. 희성이 꼿꼿하게 일어선 유두를 이로 살짝 깨물었다.
“아! 희, 성아, 이상…. 흐으….”
몸을 일으킨 희성이 도윤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다시 내려와 반대편 유두를 물고 빨기 시작했다. 흐으, 흐…. 끙끙거리는 소리가 황홀했다. 남이 자신의 가슴을 빨아 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한쪽은 희성의 입안에서 빨리고 비벼지고 잘근잘근 씹히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손가락으로 작고 동그란 구슬을 만지듯 굴려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살을 따라 입을 맞추고 깨물던 희성이 곳곳에 빨갛게 물든 자국을 보며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 바지를 붙잡았다. 쪽.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도윤이 배에 입맞춤을 내리는 희성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예뻐, 도윤아.”
“이제 그만, 그만해….”
“여기도 예뻐?”
“흑, 어디…?”
손을 살짝 내려 희성을 쳐다본 도윤이 쑥 내려가는 바지에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싫어! 하지 마!”
“도윤아, 내가 일어나라고 한 적 없잖아.”
“하지 마, 하지 마.”
잠깐 마주친 눈이 흥미로움에 젖어있었다. 희성이 몸을 일으켜 도윤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섰다. 반쯤 내려온 티셔츠를 다시 올려 유두를 만지기 시작하는 느낌에 도윤이 몸을 움츠렸다. 으응…. 저도 모르게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입안을 휘젓는 혀에 도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사이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섰다. 아! 반쯤 서있는 성기를 붙잡자 도윤의 입술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 깊숙이 들어간 혀가 입안을 난폭하게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