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욕(2)
갑자기 얹혀살게 된 커다란 저택에서 도윤에게 허락된 일이라곤 그저 씻고 먹고, 공부하고 자는 것이 다였다. 아버지는 회장님의 기사 역할을 하느라 바빴고 도윤은 눈치만 봤다. 설거지라도 하려고 내려가면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실패했고 2층에 있는 화장실 청소라도 하려고 치면 또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올라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희성의 집은 시끄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조용하지도 않았다. 집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도윤을 보면 모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아서 이 집에 얹혀살게 된 사람일 뿐인데도 그랬다. 덕분에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그런 인사를 받는다는 것이 민망하고 불편해서 방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려고 책을 꺼낸 손이 필통에서 펜을 꺼내들었다. 인강이나 들어야겠다. 이 집에 왔을 때 희성이 선물해 준 패드가 도윤의 손에 이끌려 환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끼고 손가락을 움직여 동영상을 튼 도윤이 코를 훌쩍이곤 책과 패드를 번갈아 봤다. 여태 작은 책상에서만 공부를 하다가 이렇게 큰 책상 앞에 앉아있자니 어색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아예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도윤이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딱딱하게 수업만 하는 강의였다면 조금 지루했을 텐데 지금 듣는 강의는 꽤 재미있는 편에 속했다. 도윤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패드를 봤다.
이 선생님이라면 한 번쯤은 현장에서 수업을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도윤이 강의를 들으며 웃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소리를 크게 듣고 있지 않아서 문을 두드리면 다 들렸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하나 없이 그냥 열린 문에 도윤이 웃음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희성을 쳐다봤다. 이 방에 멋대로 들어오는 사람은 이 집안에서 희성밖에 없었다. 편한 옷차림으로 들어선 희성이 잠시 멈칫했다. 강의를 들으며 웃던 도윤이 급하게 웃음을 지웠다. 그게 아쉬워서 혀를 차자 강의를 멈춘 도윤이 이어폰까지 빼고 눈을 깜빡였다.
“왜?”
“그냥.”
“으응.”
“뭐 하고 있었어?”
“나 공부.”
“아는데, 왜 공부하면서 그렇게 웃고 있었냐고.”
“어…. 강의 재미있어서….”
“왜 다른 사람 보면서 그렇게 웃어?”
“…….”
또 왜 저래…. 도윤이 혀로 입천장을 문지르며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문을 닫은 희성이 느릿한 걸음으로 도윤의 침대에 풀썩 누웠다. 먼지가 조금씩 날리는 것을 눈으로 훑은 희성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도윤은 여전히 이어폰을 만지면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 방은 원래 희성의 형인 희준이 쓰던 방이었다. 자주 찾지는 않던 방이라 그런지 조금 낯설기도 했다. 전에는 쳐다보기도 싫었던 방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여기서 살고 싶을 만큼 좋아졌다.
이불에서는 도윤의 냄새가 났다. 희성이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도윤이 다리를 긁적였다. 반바지를 입은 탓에 허벅지가 다 드러난 상태였다.
“도윤아.”
“으응.”
사람을 불러 놓고 잠시 말이 없던 희성이 웃었다. 희성이 웃는 이유를 몰라 눈알만 굴리자 한참을 실실거리던 입술이 열렸다.
“왜 자꾸 으응거려? 귀엽게?”
“…….”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마.”
“…….”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말 섞지를 마.”
도윤이 또 시작이냐는 눈빛을 쏘아 댔다. 그 눈빛에도 한참을 웃던 희성이 웃음을 서서히 지우고 물었다.
“너 자꾸 설거지랑 청소하려고 했다며.”
“뭐라도 하고 싶어서.”
“왜?”
“아빠는 일을 하지만 나는 아니니까….”
“누가 너한테 눈치 줘?”
그런 건 아니지만….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 일 시키려고 데려온 거 아닌데.”
“그래도….”
“관상용 몰라?”
“내가 관상용이라는 말이야?”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어떻게 그래.”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제법 단호한 목소리가 도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일렀다. 도윤이 혀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혀에 희성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희성을 피해 의자를 돌린 도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보았다. 여전히 피하기 바쁜 행동에 희성이 의자를 잡아 돌렸다. 바닥에 발이라도 닿았으면 버티고 섰을 텐데 안타깝게도 두 다리는 모두 의자 위에 있었다.
순식간에 돌려진 의자에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으면서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피부가 좋고 하얬다. 문득 차에서 있었던 일이 도윤의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안으로 말리는 입술을 보던 희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지금 이 꼴을 방어 자세라고 하고 있는 도윤이 하찮고 귀여웠다.
마음만 먹으면 입술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있었지만 희성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몸을 숙여 도윤의 앞머리를 올리고 그 위로 입을 맞췄다. 입술 아래로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윤아, 웬만하면 방에만 있어.”
“왜, 왜?”
“그 얼굴을 하고 어딜 돌아다니려고.”
“그만 좀….”
“집에서도 고개 숙이고 다녀.”
희성이 다시 고개를 내려 도윤의 입술을 찾았다. 말을 하느라 벌어진 입술이 다물렸다. 끙끙거리며 희성을 밀어내던 도윤이 뒷목을 잡는 힘에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술 새로 희성의 혀가 밀려들어왔다. 으응, 응…. 도윤이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희성이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더 들어왔다. 도망갈 곳도 없으면서 요리조리 도망가기 바쁜 혀를 옭아매자 도윤의 목에서 흐윽, 하는 소리가 울렸다.
희성과 키스를 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처음보다 진득하게 섞이는 혀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입안이 간지러웠다. 도윤이 밀어내던 손으로 희성의 어깨를 잡고 끙끙거렸다. 슬슬 숨이 부족할 것 같아 입술을 살짝 떼어내자 도윤이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둘 사이에서 늘어진 타액이 뚝 끊어졌다. 희성이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다가 다시 도윤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정신이 없어서 멍한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희성이 다시 입술을 찾으며 눈을 감았다. 응, 으응…. 힘이 풀린 건지 밀어내는 손이 가벼웠다.
혀를 섞고 입천장을 긁고, 입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도윤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제는 아예 희성의 옷자락만 쥐고 끙끙거리던 도윤이 숨을 쉴 타이밍도 찾지 못하고 또 헐떡였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떨어지고 타액이 또 느릿하게 늘어졌다. 희성이 웃으면서 도윤의 입술을 핥고 떨어졌다. 도윤은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키스 좀 했다고 눈물이 고인 눈이 예뻤다. 희성이 손을 뻗어 도윤의 눈가를 문질러주곤 방을 나섰다.
희성이 방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헐떡이던 도윤이 다리를 바닥 위로 내리고 책상에 엎어져 코를 훌쩍였다. 아까 자기 보고 관상용이니 뭐니 하더니 진짜 관상용의 뜻을 모르는 건 희성이었다. 대체 누가 관상용을 이렇게 막 만진단 말인가. 도윤이 책상에 엎어진 채로 훌쩍거리다 일어나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솔직히 차에서 했었던 키스는 키스라고 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 했던 키스는 진짜 키스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진짜 키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입술이 빨갛게 부어오른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도윤이 손에 힘을 주고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저녁은 웬만해선 그냥 건너뛰려고 했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면 희성을 마주칠 것이 뻔했고, 점심에 그렇게 진한 키스를 나눴는데 차마 얼굴을 보고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혀있다면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방에 없는 사람인 척 조용히 공부만 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문에 귀를 대고 한참을 있다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때 빠르게 다녀왔다.
이 정도 노력을 했으면 눈물겨워서라도 도윤을 모르는 척해줘야 했으나 희성은 저녁을 먹자며 문을 열어젖혔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먹을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희성은 또 도윤의 마음을 쑤시는 말을 했다.
‘너 하나 먹이자고 다들 열심히 만드셨는데….’
‘…….’
‘오늘은 아버지도 없어서 나 혼자 쓸쓸하게….’
‘…….’
‘너 하나 때문에 열심히 준비해 주신 분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머, 먹을 게! 먹으면 되잖아….’
실내화에 발을 넣고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키는 도윤을 확인한 희성이 웃으며 등을 돌렸다. 1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하나는 가벼웠고 하나는 무거웠다.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여자가 그제야 밥과 국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자신에게도 두 사람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꽤 신경을 썼다. 처음 온 날 좋아하는 음식이 있냐는 물음에 다 잘 먹는다는 애매한 답을 줘서 메뉴를 고르는데 조금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 집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또 한 가지. 이 집 사람들은 정말 한 끼를 먹어도 아주 거하게, 아주 제대로 챙겨 먹는 편이었다. 이정도면 식탁 다리에 금이 가지는 않았을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윤이 어색하게 앉아 맛있게 먹으라며 웃어주는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희성은 심드렁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어 생선을 발라 먹었다. 도윤은 수저를 들기 전에 다시 한번 여자에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희성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이 집에서 일을 했던 여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은 자신에게 한 번도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오늘도 익숙하게 식사를 시작한 희성이 도윤의 밥그릇에 생선 살을 올려주면서 그랬다.
“기억력이 안 좋아?”
“응?”
“머리가 나쁜가?”
“…또 왜?”
진심으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희성이 깔끔하게 발린 생선 살을 도윤의 앞 접시에 놓아주며 이유를 알려주었다.
“고개 숙이고 다니라고 했는데.”
“…….”
도윤이 황당함을 얼굴에 내비쳤다. 꼭 그 말이 진심이었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라서 희성은 물을 넘기고 숟가락을 들었다. 생일도 아닌데 미역국이 올라왔다. 미끄덩한 느낌이 싫어서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젓기만 했더니 도윤이 밥을 열심히 씹으면서 눈치를 봤다. 희성이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국그릇을 도윤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커다란 눈으로 눈치를 보던 도윤이 밥을 꼴딱 삼키고 물었다.
“미역국 싫어해?”
“응.”
“왜?”
“기분 나빠서.”
“…뭐가?”
“밥 먹어.”
쓸데없이 말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라는 뜻은 알아들었는지 얌전히 희성이 밀어준 국그릇을 끌어와 옆에 놓았다. 졸지에 국이 두 개가 된 도윤이 자신의 몫으로 나왔던 미역국을 떠먹었다. 미역국은 정말 맛있었다. 물론 엄마가 끓여 주셨던 미역국보다는 덜하지만 꽤 맛있었다. 이걸 왜 싫어하지? 도윤이 미역을 크게 떠먹고 열심히 우물거렸다.
희성은 좋아하는 생선만 골라 먹으면서 도윤을 구경했다. 조금 떨어져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희성에게 다른 국을 먹겠냐 물었다. 혹시 몰라서 다른 국도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희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도윤은 장조림의 고기만 골라서 먹고 있었다. 저렇게 잘 먹으면서 안 먹기는 무슨. 희성이 장조림의 그릇을 들어 여자에게 건넸다. 잘 먹다가 갑자기 빼앗긴 도윤의 입이 느려졌다.
도윤이 입에 있는 것을 느릿하게 씹으면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말없이 건넸을 뿐인데 여자가 알아서 장조림을 다시 채워서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렸다. 그제야 도윤이 씹던 속도를 조금 높였다. 정말 굶겼으면 배가 고프다고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하자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프다고 훌쩍거리는 얼굴을 상상한 희성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도윤은 미역국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얼굴까지 박고 있었다. 희성이 실실 웃으며 천천히 밥그릇을 비웠다.
원래 집에서 살 때는 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를 했었다. 이제는 설거지도 못하고 청소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도윤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빈 그릇들을 모아 식탁의 가운데에 두었다. 희성이 못마땅한 듯 쳐다봤지만 도윤은 꿋꿋하게 정리를 하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까지 꼬박꼬박 했다. 여자가 웃으며 도윤과 희성을 올려 보냈다. 희성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도윤을 따라왔으나 그마저도 아버지의 전화에 막히고 말았다. 도윤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었다.
전화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훔쳐보던 도윤이 욕실로 들어가 양치를 했다. 커다란 욕실은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양치질을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수건도 부드러웠고 바닥은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했다. 이런 집에서 살아보다니. 엄마도 같이 이런 곳에서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도윤이 물로 입안을 헹구고 세수까지 꼼꼼하게 마쳤다. 세수를 했더니 입고 있던 티가 조금 젖어서 가슴팍이 차가웠다. 티를 펄럭거리며 방으로 들어간 도윤은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를 희성을 대비해 문부터 잠그고 봤다.
아빠는 언제 퇴근하시지? 아마 회장님이 오시면 같이 들어오시겠지? 도윤이 시간을 확인하고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지금 전화가 가능하냐고 물었는데 답장은 문자가 아닌 전화로 왔다. 도윤이 침대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놀랐잖아. 밥은 먹었어?’
“네, 방금 먹었어요. 아빠는요?”
‘나도 먹었지.’
“아빠 언제 와요?”
-글쎄,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지금은 뭐해요?”
-차에서 대기 중이지. 도윤이는?
“저는 밥 먹고, 방금 씻었어요.”
도윤이 앞뒤로 다리를 흔들면서 버튼을 눌러 통화 소리를 높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오늘은 뭐하고 지냈냐는 물음에 공부도 하고, 핸드폰으로 게임도 했다고 대답하는 사이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이 문을 쳐다보며 경계했다. 잠시 덜컥거리던 문이 조용해졌다. 말을 하다가 멈춘 아들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물어왔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오늘은 우리 아들 얼굴도 못 보겠네.
“괜찮아요, 내일 보면 되잖아요.”
-그래,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요즘 일찍 자는데….”
도윤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희성은 간 건지 문이 조용했다.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려던 도윤이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분명 문을 잠갔었는데 희성이 열쇠를 들고 나타났다. 도윤이 입을 벌리고 희성을 보았다.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윤아, 이제 끊어야겠다.
“…네….”
-잘 자고, 내일 보자 아들.
“네, 내일, 내일 봐요.”
“내일 누굴 보는데?”
“…….”
핸드폰을 내려놓고 희성과 눈을 마주한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해주지 않겠다는 태도에 희성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도윤은 핸드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누구랑 전화를 하는데 문까지 잠그고.”
“…내 마음이야.”
“누가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어?”
“…….”
“도윤아, 이 집에서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없어.”
“…….”
희성의 손이 도윤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내려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도윤이 흠칫 떨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귓불을 문지르던 손이 이번에는 볼에 닿았다. 희성이 조금 짜증 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야?”
“아, 아빠야. 아빠.”
“아빠?”
“으응.”
“진짜 아버지랑 했어?”
“응, 진짜….”
희성이 볼을 톡톡 두드리곤 침대에 앉아 베개를 들췄다. 베개 밑에 숨어있던 핸드폰이 희성의 손에 올랐다. 버튼을 누르자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도윤이 입을 다물고 핸드폰을 쳐다봤고 희성은 핸드폰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비밀번호 뭐야. 그걸 왜 궁금해하는데? 도윤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희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몰라?”
“몰라.”
“왜 몰라?”
“몰라.”
“자꾸 귀엽게 똑같은 말만 할래?”
“…안 알려줘.”
“왜?”
“내 거니까.”
잠금 화면에는 따로 사진을 설정해두지 않은 탓에 까만 화면이 떠있었고 지문이나 비밀번호가 있어야 잠금을 풀 수가 있었다. 희성의 입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평생 손가락 하나 없이 사는 것보단 그냥 알려주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뭐?”
“풀어.”
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던 희성이 도윤의 손을 끌어와 잠금을 풀어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쉬운 것을. 도윤이니까 한번 놀아줬다. 잠금이 풀리자 첫날에 보았던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희성이 혀로 볼 안쪽을 쓸었다. 그것도 잠시, 엄지손가락이 막힘도 없이 통화기록을 눌렀다.
최근 통화목록엔 [♥아빠♥] 가 대부분이었다. 희성이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자신과 같은 남자가, 이 나이에 부모님에게 하트까지 붙여가면서 저장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도윤은 통화목록만 빤히 쳐다보는 희성을 힐끔거리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하긴, 손가락을 잃는 것보다 그냥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자신은 떳떳했다.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랑 한 건데!
“어머니도 이렇게 저장했어?”
“응.”
“나는?”
“…너?”
“응. 나는 뭐라고 저장했어?”
“너는, 뭐…어….”
희성이 묘하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조용히 눈만 깜빡이던 도윤이 볼을 긁적이자 희성이 허락도 없이 연락처에 들어갔다. 그리곤 딱딱하게 [김희성] 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자신의 이름과, 조금 더 아래로 [서준이] 라고 저장되어 있는 이름에 턱을 비틀었다.
얼굴도 모르고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르는 놈은 성도 없이 서준이라고 저장되어 있고 자신은 딱딱하게 이름만 저장되어 있었다. 도윤이 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쓸었다. 방에 정적이 찾아왔다. 괜히 이불만 구기면서 고개를 돌린 도윤이 닫힌 문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희성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서준이랑 되게, 친한가 봐.”
“응….”
“나랑은 안 친하고?”
“그거는….”
“바꿔놔.”
희성의 손에 있던 핸드폰이 다시 침대 위로 자리를 잡았다. 부모님한테 붙여 둔 하트도 떼. 귀에 박히는 말을 적당히 튕겨낸 도윤이 대답을 미뤘다. 부모님한테 붙인 건 왜…. 중얼중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도 닿았지만 희성은 무시했다.
“내일 뭐해?”
“내일? 병원 갈 거야.”
“그래?”
“왜?”
“그냥.”
딱히 뭐 하는 거 없으면 데리고 나갈까 했는데 병원에 간다니 어딜 가자고 말도 못 했다. 이제 본인 방이니까 마음에 안 들거나 꾸미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방이 아직도 그대로다. 바뀐 건 방주인과 냄새, 침대, 책상이 다였다. 차라리 하루 날을 잡고 방에 있는 가구를 싹 다 바꿔버려야겠다고 생각한 희성이 가벼운 몸짓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잘 자. 그러곤 방을 나가지도 않고 문을 닫지도 않았다. 잘 자라고 인사까지 했으면서 왜 아직도 저러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희성이 떫은 표정으로 도윤과 눈을 마주했다.
“하도윤, 너 진짜 사람 속상하게 만들래?”
“…내가?”
“내가 잘 자라고 인사했잖아.”
“으응.”
“그럼 너는 뭐라고 해야 돼?”
“알았어…?”
“아니….”
희성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고 문제의 원인은 눈치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윤아, 너 일부러 그래?”
“…….”
“나 진짜 속상해서 그래.”
“…미안.”
“내가 너한테 잘 자라고 했으면, 너도 나한테 잘 자라고 해야지.”
“아.”
“해봐.”
“잘 자.”
“그래.”
희성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답답한 건 답답한 거다. 도윤의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졌으나 앞으로 잘 가르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선 희성은 그새 도윤이 보고 싶어져 쯧. 혀를 찼다.
희성의 입장에선 눈치가 좀 많이 없는 편인 도윤은 자신의 얼굴에게 감사해야 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던 희성이 진동을 토해내는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화면을 껐다. 희성의 형은 가끔, 어쩌면 꽤 자주 이유도 없이 희성을 부르곤 했지만 희성은 그 메시지들을 전부 무시할 뿐이었다.
***
주말이면 늘 점심때가 지나서야 겨우 얼굴을 비추곤 하던 희성이 최근 들어 갑자기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에 일을 계속해왔던 사람들에겐 희성의 아버지를 위해 새벽부터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일상이라 아무렇지 않았지만 희성이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지키는 것은 꽤 어색한 그림이었다. 이 행동은 도윤이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도윤은 아침마다 힘겹게 눈을 떠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식탁에 끌려왔다.
세수를 한 의미도 없이 정신이 멍했다. 눈은 뻐근했고 사실 입맛도 없었다. 희성은 잠도 못 깨고 멍하니 앉아있는 도윤을 보는 것을 즐겼다. 아침이 아니었으면 신나게 먹었을 밥을 깨작거리는 모습이 귀여운 탓이었다. 졸린 와중에도 잘 먹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인 도윤이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서 생긴 까치집은 물로 대충 눌렀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기도 했다.
희성의 반찬은 도윤이었다. 도윤의 얼굴을 보면서 밥을 씹으면 그냥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도윤이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반찬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멍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 입에 들어와 있는 게 밥인 것만 겨우 알 정도로 멍하니 씹던 도윤이 자신의 밥그릇에 놓이는 계란말이에 고개를 들어 눈만 깜빡였다. 자신은 지금 잠이 덜 깨서 정신이 없는데 희성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먹어.”
“으응.”
“병원 언제 가?”
“밥 먹고….”
“같이 갈까?”
“…아니.”
거절을 당해도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희성이 반이나 남은 밥을 밀어두고 도윤을 훑었다. 밥이 안 넘어가면 남겨도 되는데 도윤은 그저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저걸 착하다고 봐야 할지, 미련하다고 봐야 할지. 그러나 희성은 그만 먹어도 된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희성이 준 계란말이가 도윤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병원 보내기 전에 뽀뽀나 한번 했으면 좋겠는데. 느릿하게 움직이는 입술을 보던 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윤의 고개가 따라왔다. 식탁을 빙 돌아 주방을 나가려는 몸에 도윤이 밥을 꼴딱 삼키고 물었다.
“밥 안 먹어?”
“다 먹었어.”
“…반이나 남았는데.”
“입맛 없어.”
도윤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누구는 입맛이 있어서 꾸역꾸역 먹고 있는 줄 아나? 도윤이 희성의 등을 보면서 얼굴을 마음껏 구기고 있을 때 희성이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도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폈다.
“밥 다 먹고 내 방으로 와.”
“왜?”
“줄 거 있어.”
“줄 거?”
“밥 먹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뭐지? 희성이 자신에게 줄 것이라는 게 뭘까 생각하며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도윤이 빈 그릇을 정리했다.
“그냥 두고 올라가도 되는데.”
“도와드릴게요.”
“도련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괜찮아요. 이거 여기다 두면 될까요?”
“참….”
도윤이 빈 그릇을 내려놓고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잘 먹었습니다. 희성의 부모님과 희성의 형인 희준에게는 매번 들어왔던 인사였지만 이상하게 도윤에게 받는 인사는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함께 웃으며 어서 올라가 보라며 손짓을 했다. 도윤은 여자를 볼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나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맛있는 밥을 잔뜩 먹었더니 속이 든든했다. 도윤이 계단을 두 개씩 밟아 2층으로 올라가 욕실부터 찾았다. 희성이 바로 오라고는 했지만, 양치도 하고 잠시 방에 들러 가방을 챙긴 다음에 찾아가도 될 것 같았다. 욕실에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까지 따뜻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추운 것보다는 나았다. 도윤이 양치를 꼼꼼하게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 딱히 가지고 갈 건 없었지만 지갑을 넣고 책상 위를 둘러본 도윤이 고민을 하다 패드와 책, 필통을 안에 넣었다.
오랜만에 엄마 옆에서 공부나 해야겠다. 아직 출발할 시간까지는 남았으니 이제 희성의 말을 들어줄 차례였다. 원래라면 희성을 찾아가는 것이 1순위여야 했지만…. 희성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열렸다. 조금 짜증이 난 얼굴은 덤이었다.
“밥이 그렇게 맛있었어?”
“양치하고 왔어.”
“…들어와.”
“줄 게 뭔데?”
희성의 방에 들어와 앉지도 못하고 서있던 도윤이 뜬금없이 안겨지는 쇼핑백에 고개를 숙였다. 이게 뭐야? 궁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자 희성이 입어. 한다. 도윤이 쇼핑백에서 옷으로 추정되는 것을 꺼내곤 멈칫했다. 희성이 연한 노란색의 후드를 들고 머뭇거리는 도윤에게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오늘 그거 입어.”
“…….”
“너 또 검은색 입고 병원 가려고 했지?”
“…….”
검은색 후드를 입고 가려고 하기는 했었지만 갑자기 이런 노란색을…. 이걸 도대체 어떻게 입으라고 준 거지? 태어나서 유치원에 다녔을 때 말고는 이런 화려한 색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도윤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도윤이 머뭇거리자 희성이 다가왔다.
“내가 입혀줘?”
“아니!”
“오늘 그거 입고 가.”
“…다른 거 입으면 안 돼?”
“다른 거 뭐.”
“그냥, 이런 색 말고….”
도윤이 연노란색 옷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 와중에 옷은 부들부들 느낌이 상당히 좋았다. 잠시 말없이 시선을 둔 희성이 성큼성큼 다가가 도윤이 입고 있던 티셔츠의 끝을 쭉 올려버렸다.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맨살이 드러난 도윤이 몸을 파드득거리며 희성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짧은 찰나에 도윤의 맨살을 구경한 희성이 옷을 놓아주었다.
“바지까지 갈아입혀 주기 전에 갈아입어.”
“알, 알았어!”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희성이 옷을 끌어안고 옆방으로 향하는 도윤을 눈으로 좇았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걸어간다. 집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었나? 평생을 살아온 집인데도 갑자기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점심쯤 집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남들의 시선을 끄는 옷을 죽어도 입기는 싫었지만 차마 희성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연노란색의 후드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서니 내자신이 너무 이상했다. 어색하고 이상했다. 덩치가 작지는 않은 편인데도 후드의 품이 커서 헐렁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은 날이 평소보다 좋아서 기온이 높았다. 원래는 반팔에 위에 뭐 하나만 따로 걸치고 반바지를 입으려고 했는데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반바지만 남았다.
울상으로 가방을 메고 방을 나온 도윤이 옆방 문을 두드렸다. 방안에는 희성이 없는지 아무리 문을 두드려 봐도 묵묵부답이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더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없나? 그럼…. 빠르게 갈아입고 나가도 되지 않을까? 도윤이 눈치를 보며 계단을 밟았다. 1층에도 일하는 사람들만 돌아다닐 뿐 희성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 기회에…! 도윤이 신난 걸음으로 다시 계단을 밟아 올라가려 할 때 뒤에서 갑자기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없었는데. 도윤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야.”
목소리는 익숙한데 들려오는 말은 낯설었다. 희성이 도윤을 부를 때는 항상 ‘도윤아.’, ‘하도윤.’ 이렇게 이름만 불렀기 때문에 ‘야.’ 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도윤이 눈치를 보면서 몸을 돌려 1층에 있는 희성을 내려다봤다. 희성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후드를 입으라고 해서 입었는데 왜 또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도윤이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미쳤구나.”
“또…뭐가….”
“올라가.”
“나 늦었는데….”
“야.”
가방끈을 만지는 손이 굳었다. 이제 막 주방에서 나온 여자가 도윤과 희성을 번갈아 보다 조심스럽게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도윤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시 계단을 올랐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지. 입으라는 대로 입었고 병원에 가는 것도 허락했으면서. 2층에 올라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희성이 빠른 걸음으로 올라와 도윤의 팔을 잡아 방으로 끌었다. 잡힌 팔이 아팠다. 희성은 힘이 좋은 편이었다. 문이 조금 거칠게 닫혔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릴 기사님을 떠올리며 시간을 확인한 도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바지 갈아입어.”
“…….”
“그렇게 입고 어딜 나가겠다고.”
“바, 바지도 내 맘대로 못 입어?”
“내가 전에 말했지. 이 집에서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없다고.”
“오늘, 오늘 덥다고 했단 말이야.”
“그래서.”
“…….”
“그래서, 도윤아. 어쩌라고.”
“알, 았어…. 갈아입으면 되잖아….”
도윤이 축 처진 어깨로 옷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다른 색의 반바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희성에게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색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 같아?”
“…….”
그냥, 검은색의 반바지를 입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꺼내 본 건데. 도윤의 기가 죽었다. 긴 바지를 꺼내는 손이 굼떴다. 희성이 눈을 찡그렸다.
“나가야 입지….”
“그냥 갈아입어. 반바지 입고 나갈 생각이었으면 온 세상 사람들한테 네 다리 보여주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거 그냥 지금 나한테도 보여주면 되겠네.”
“…….”
“밑에 너 기다리는 사람 있는 것 같던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
도윤의 귀가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나는 진짜 오늘 덥다니까 반바지를 입은 건데! 희성은 대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훌쩍거리며 희성을 돌아본 도윤이 느릿하게 바지를 갈아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입고 있던 연노란색의 후드가 커서 속옷이 다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반바지는 다시 곱게 접어서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진짜 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눈앞이 흐렸다. 훌쩍거리며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희성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울어?”
“나도, 몰라….”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늘어진 목소리가 희성의 귀에 박혔다. 나도오, 몰라…. 훌쩍. 훌쩍. 도윤이 소매를 끌어와 눈물을 닦았다. 희성은 혀로 볼 안쪽을 쓸다 도윤의 앞에 섰다. 코를 먹는 소리가 컸다.
“반바지 못 입게 한 게 그렇게 서러워?”
“그런 거 아, 니야.”
“그럼 왜 울어.”
“몰라, 짜증 나….”
“짜증 나?”
소매 끝이 젖었다. 희성이 도윤의 손을 잡아내려 얼굴을 쳐다봤다. 그거 잠깐 울었다고 얼굴이 붉어졌다. 젖은 눈을 본 희성이 망설임도 없이 뒷목을 잡고 내리눌렀다. 또다. 또 희성이 입을 맞춰왔다. 도윤이 바르작거리며 밀어내다 뒷목을 누르는 힘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울어서 숨도 부족한데 희성이 자신의 숨을 전부 가져가고 있었다. 도윤이 고개를 틀었다. 하, 하아…. 도윤의 입술에서 숨이 터져 나오자 희성이 떨어졌다.
“병원 가야지.”
“나한테 이런 것 좀, 그만해….”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도윤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닦아준 희성이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도윤이 서러움에 눈물을 몇 번 더 찍어내곤 1층으로 내려갔다. 신발을 신으면서도 서러웠다. 결국 흑, 소리를 낸 도윤이 무릎 위로 이마를 숙였다.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도윤을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도윤이 소매를 끌어와 눈물을 닦고는 문을 열었다.
훌쩍이며 집에서 나오자 정원에서 차를 세우고 대기 중이던 기사님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 죄송해요. 도윤이 울먹거리며 사과하자 기사님이 더 당황하며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도윤이 훌쩍거리는 내내 휴지를 건네주고 운전을 하면서도 뒤를 살폈다. 어느새 도윤의 손에는 이미 젖은 휴지가 한가득이었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도 같아서 코를 훌쩍인 도윤이 젖은 휴지를 둥글게 말았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윤이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 기사님….”
“네.”
“…….”
“휴지 더 드릴까요?”
“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우물쭈물 말을 못 하는 도윤을 룸미러로 힐끔거린 기사가 라디오 소리를 낮추며 기다려주었다. 괜히 코를 한번 훌쩍인 도윤이 휴지만 내려다보며 물었다.
“희성이요.”
“네?”
“원래, 그래요?”
“…네?”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자 또다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도윤이 젖은 휴지로 눈물을 콕콕 찍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룸미러로 쳐다본 도윤의 얼굴이 또 일그러져 있어서 기사가 급하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원래 그렇게, 막. 사람을….”
“…….”
“자꾸, 싫다고 하는데도 막….”
“…….”
“원래, 흑…. 원래 그래요?”
결국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 도윤이 휴지를 눈에 가져다 댔다. 얇은 휴지가 금세 젖어 들었다. 기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운전대만 쓸어 댔다. 희성이 도윤과 많은 말을 나누지 말라고는 했지만 지금은 희성이 없으니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른 기사가 룸미러를 힐끔거렸다.
“도련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아마 나쁜 뜻으로 그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기사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김희성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윤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서러움이 물밀듯 쏟아졌다. 큰마음을 먹고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더 울기 시작하는 도윤이 당황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작게 중얼거린 기사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너무 많이 울었더니 코가 막혀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도윤이 간신히 입으로 숨을 쉬면서 가까워지는 병원을 쳐다봤다.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도윤이 막상 병실에 들어가면 하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기사의 역할은 도윤을 무사히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집까지 옮겨주는 것이었다. 희성의 말이었으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윤이 집에 혼자 갈 수 있다고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바람에 한 번만 눈 감아 주기로 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희성에게 시달린 도윤이 조금 안쓰러워 보인 탓도 있었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리면 데리러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차를 돌린 기사가 약간 초조한 듯 손가락을 두드렸다. 이번 일이 희성에게 들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로 스스로의 몰골을 확인한 도윤이 한숨을 쉬었다. 눈가와 코는 빨갛게 부어있고 옷은 이상한 연노란색이었다. 이상해…. 도윤이 앞머리를 정리하며 눈을 가려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보내고 걸음을 옮긴 도윤이 터덜터덜, 병실로 향했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일반 병실이 아니라 다른 환자들도 없었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의료진들도 없었다. 자신의 발소리만 들리는 복도를 지나 병실로 들어선 도윤이 문을 닫자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마냥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누워있었다. 가방을 소파에 두고 여자의 곁으로 걸어간 도윤이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의자에 앉아 손을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이 정적을 깨기가 어려웠다. 도윤의 입술이 어머니의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머니를 뒤에 두고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시간이 지났다.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도윤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다 이어폰을 뺐다. 어머니는 여전히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동영상을 정지시키고 일어나 어머니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도윤이 머뭇거리다 큼큼, 헛기침을 시작으로 목소리를 냈다.
“엄마, 지금 뭐 해요?”
“…….”
“무슨 꿈 꿔?”
“…….”
“이왕이면 좋은 꿈으로 꿨으면 좋겠다.”
이불 끝자락을 쥐었다가 놓은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는 요즘 엄청 많이 바빠요. 그래서 못 오시는 거니까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
“저희 되게 잘 지내요. 아빠가 용돈도 많이 주시고.”
“…….”
“…….”
“…….”
“…희성이라고, 같은 반 친구가 있는데요. 지금은 걔네 집에서 잠깐….”
도윤이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
“걔네 집이 엄청 부자거든요. 사실 이 병실도 걔네 아버지께서….”
“…….”
“근데, 근데….”
“…….”
“희성이가 자꾸 저 괴롭혀요….”
도윤이 눈을 깜빡이다 여자의 위에 엎어졌다. 그냥. 나쁜 애는 아닌데, 한 번씩….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니 속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어머니의 일정한 호흡을 느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도윤이 슬쩍 웃었다.
“그래도 저희는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보고 싶어요.”
떨리는 손이 어머니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얼른 일어나서 도윤아, 하고 제 이름 불러주세요. 저는 그거면 돼요. 마지막 말은 속에서만 맴돌았다. 미동도 없는 어머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다시 소파에 앉은 도윤이 이어폰을 꼈다. 조금만 더 하다가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집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병원에 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희성에게서 오는 연락이 없었다. 도윤이 영상을 재생시키고 펜을 들었다. 도윤이 조용해지자 병실도 함께 조용해졌다. 가끔 기계가 삑, 삑. 하는 소리만 들릴 뿐.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상에 집중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아주 살짝 움찔거렸다는 것을 도윤은 알아채지 못했다.
거의 반나절을 어머니와 함께 보낸 도윤이 병원에 오기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길을 걸으면서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기사님이 있는 차를 타지 않아도 됐고, 옆에 희성도 없었다. 도윤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정류장까지 씩씩하게 걸었다. 온종일 어머니와 함께 있었으니 집에 가서 희성을 봐도 기분이 괜찮을 것 같았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버스도 3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류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차를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잘 갔다.
버스에 올라 현금을 내고 빈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아버지에게선 저녁에 병원에 다녀오겠다는 메시지도 와있었다. 우리 엄마 오늘 심심하지는 않겠네. 도윤이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록 또 희성에게 입술을 빼앗겼지만 그것만 빼면 괜찮은 하루였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창밖을 쳐다보는 소년의 얼굴 위로 노을이 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기사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는데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냈다. [저 곧 정류장에 내려요.] 희성에게 둘 다 깨지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윤이 가방을 뒤로 메고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정류장에 선 버스가 도윤을 뱉어 냈다.
기사님은 아직 도착 전인지 주변으로 익숙한 차가 보이지 않았다. 도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정류장 구석에 있는 분홍색 케이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케이지 안에는 물통도 있었고, 밥그릇도 있었다. 구석에는 쳇바퀴도 놓여있었다. 누가 봐도 햄스터를 키웠던 흔적이 가득한 케이지였다. 도윤이 주변을 살펴보다 케이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설마 안에 햄스터가 있나? 차마 열지는 못하고 눈으로만 안을 살핀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케이지 안에 가득 깔린 베딩 속으로 무언가 꿈틀, 움직인 탓이었다.
도윤이 숨도 못 쉬고 내려다보는데 베딩 속에서 연한 갈색의 햄스터가 고개를 내밀었다. 헉. 도윤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류장 근처에는 사람이라곤 도윤, 자신뿐이었다. 어떡해. 곧 밤이 되면 날이 추워질 텐데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햄스터는 추위에 떨다가 곧…. 도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심스럽게 케이지를 살펴보자 바람 때문에 넘어간 건지 뒤쪽으로 종이 한 장이 아무렇게나 처박혀있었다.
케이지를 앞으로 끌어와 종이를 꺼낸 손이 떨렸다. 아무나 키우세요. 미안하다는 말하나 없이 그렇게만 적혀져 있었다. 허. 기가 찬 도윤이 숨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걸 집으로 데려가도 되나,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자신의 집도 아니고 남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상황인데…. 도윤이 분홍색 케이지를 품에 안고 혀로 입술을 쓸었다.
그러자 골목에서 익숙한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떡해. 어쩌지. 도윤이 코를 킁킁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햄스터를 내려다보다 앞에 서는 차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이 내려가고 익숙한 얼굴이 도윤을 올려다보는 것 같더니 품에 안긴 케이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저, 기사님….”
“…그게 뭐예요?”
“여기서 주웠, 주웠는데요.”
“정류장에서요?”
“네.”
“…혹시 들고 가시게요?”
“안, 되겠죠?”
“…….”
간절해 보이는 눈빛에 남자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였다. 도련님이 그런 걸 좋아했던 걸 본 적이 없어서…. 도윤이 애처롭게 남자를 내려다봤다. 아, 모르겠다.
“우선 타세요.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네!”
집까지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서로를 위해 차를 탄 두 사람이 집으로 향했다. 도윤을 태운 차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희성이가 많이 싫어할까요?”
“글쎄요.”
“만약에 희성이가 싫어하면, 어….”
“다른 입양처를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도윤이 웃으며 햄스터를 내려다봤다. 햄스터는 케이지에 붙어서 도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윤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1층으로 내려온 희성이 맑게 웃었다가 도윤의 품에 안긴 케이지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도윤이 눈치를 보면서 케이지를 끌어안았다. 빠르게 다가오던 걸음이 느려지고 희성이 품에 안긴 케이지를 빤히 내려다봤다. 도윤이 그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뭐야.”
“이, 이거는 그러니까.”
“병원 간다며.”
“갔다 왔어!”
“그럼 이건 뭐야.”
정류장에서 주웠다고 말하면 기사님과 했던 약속을 깬 사람이 된다. 도윤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알을 굴렸다. 희성이 부스럭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햄스터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집, 앞에서 주웠어.”
“집 앞?”
“으응.”
“근데 이걸 왜 주워 와?”
도윤이 케이지를 품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희성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나 키우세요. 희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무나가 왜 하필 너야?”
“…안 돼?”
“어, 안 돼.”
“…왜?”
“난 이런 거 싫어해.”
“…귀여운데.”
“어쩌라고.”
“얘 밖에 두면 추워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내 방에서만 키워도 안 돼?”
“그게 왜 네 방이야.”
“…….”
도윤은 풀이 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었는데, 도윤은 아직도 희성을 잘 몰랐다. 희성이 케이지를 돌아다니는 햄스터를 보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조용히 키울게….”
“안 돼.”
“…왜애.”
“…….”
도윤이 시무룩한 얼굴로 희성과 눈을 마주했다. 희성의 혀가 입술을 쓸더니 이내 윗니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꽉 물린 입술이 희성이 지금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보여주었으나 햄스터를 포기할 순 없었다.
“희성아….”
“…….”
“…안 돼?”
“아, 마음대로 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희성아…. 하고 불러 놓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큰일이었다. 도윤이 얼굴을 쓸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도윤이 자신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이 햄스터에게 닿았다. 햄스터는 그 작은 케이지를 열심히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희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윤은 실실 웃는 얼굴로 케이지를 끌어안고 2층으로 향했다. 도윤이 햄스터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사이 집으로 들어온 남자를 훑어본 희성이 한숨을 쉬고 도윤의 뒤를 쫓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햄스터가 아니라 보물 상자를 들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문을 연다고 햄스터가 놀라는 것도 아닌데 문을 여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난간을 잡고 그런 도윤의 모습을 보던 희성이 찝찝한 기분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조심스럽게 책상 위로 케이지를 올린 도윤이 가방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아 햄스터를 살폈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
“추운가?”
도윤이 걱정이 잔뜩 서린 얼굴로 케이지 안을 기웃거렸다. 세상에 도윤 혼자 남은 것처럼 도윤만 빤히 보던 희성이 시선을 내려 햄스터를 쳐다봤지만 햄스터는 그냥 잠시 웅크렸다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쏠리던 관심이 모두 햄스터에게 쏠려버리니 언짢기도 했다.
“진짜 키우려고?”
“키워도 된다고 했잖아….”
“너 그런 거 키워본 적 있어?”
“어, 아니….”
도윤이 은근슬쩍 케이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희성의 눈치를 봤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터졌다. 가방이나 좀 벗지. 희성이 가방끈으로 손을 뻗자 도윤이 움찔거리며 어깨를 안으로 말았다. 평소에 자기가 도윤을 때렸더라면 이렇게까지 어이가 없지도 않았다.
“가방이나 좀 벗어.”
“아, 으응.”
“내일 병원 보내.”
“응, 내일 학교 마치고….”
“아니.”
“뭐가?”
“쟤 병원은 다른 사람이 데리고 갈 거야.”
“…누가 데려가는데?”
“누구든지.”
“…….”
도윤의 눈빛이 수상했다. 마치 희성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눈빛이었다. 자기가 학교 간 사이에 희성이 사람을 시켜 햄스터를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희성이 웃음을 흘리자 도윤의 눈빛이 더 수상해졌다.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저 작은 머릿속이 궁금했다.
“내가 버릴까 봐 걱정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도윤아,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건 햄스터 따위가 아니야.”
“나는 그냥, 햄스터가 걱정돼서.”
도윤이 말끝을 흐리자 햄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희성의 눈치를 보기 바쁘던 도윤이 슬쩍 케이지를 열어보았다. 물지는 않겠지? …물면 어떡하지? 잠시 두려움에 빠진 도윤이 짧은 고민을 마치고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햄스터가 냄새를 맡다가 위로 올라왔다. 손을 위로 올리려던 도윤이 멈칫했다. 갑자기 높아지면 혹시 겁이라도 먹을까 봐 손대신 자신의 몸을 숙인 도윤이 손바닥 냄새를 맡느라 바쁜 햄스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덕분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꼭 인절미를 닮은 햄스터가 손바닥에 서서 도윤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귀여워. 도윤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햄스터 한 마리와 사람 한 명을 눈에 담던 희성이 혀를 찼다.
“귀엽지.”
“별로.”
“귀여운데….”
햄스터에게 귀엽다고 말하는 도윤을 보며 희성의 고개가 뒤늦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귀엽네.”
“맞지? 귀엽지?”
“어, 귀엽네.”
희성의 시선은 도윤에게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무슨 햄스터를 저렇게 귀여워하지. 귀엽게. 손바닥에 올려 두고 쓰다듬어보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살펴보던 도윤이 햄스터를 다시 조심스레 케이지에 넣어두었다. 도윤의 손에서 벗어난 햄스터가 케이지를 뽈뽈 돌아다니다 쳇바퀴를 타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방에 소음이 생겼다. 솔직히 거슬렸으나 도윤이 저렇게 좋아하니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햄스터를 놓아준 후, 그제야 가방을 벗어 바닥에 둔 도윤이 또 힐끔힐끔 곁눈질로 희성을 봤다.
“왜.”
“방에 언제 가?”
“갔으면 좋겠어?”
“나 옷 갈아입고 싶어서….”
“갈아입어.”
“너 가면….”
“인형놀이 좋아해?”
“인형놀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어벙해 보일 수가 있지. 희성이 슬슬 걸음을 옮겨 도윤의 앞에 섰다. 그동안 당한 게 있으면서도 멍청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윤이 싫지 않았다. 멍청한 건 딱 질색인데.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 쓰다듬자 도윤의 눈이 흔들렸다. 생각보다 엄청 멍청하지는 않나 보지. 희성이 웃음을 참으며 볼을 쥐었다.
“내가 옷 갈아입혀줄까?”
그제야 인형놀이의 뜻을 알았는지 커다란 몸을 잠시 떨었다가 고개를 돌린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는 희성의 입술에 막혀 끝을 맺지 못했다. 스스로 돌렸던 고개가 조금 강하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잡힌 볼이 아팠지만 평소처럼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가 없어서 그저 눈알만 굴렸다. 희성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입만 맞대고 있었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희성의 속눈썹만 물끄러미 보던 도윤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가는 눈꺼풀에 당황해 눈을 꾹 감았다. 희성은 자신을 밀치지도 않고 얌전히 있는 도윤이 귀여워 입술을 가볍게 핥고는 떨어졌다. 눈은 대체 언제까지 감고 있을 생각인지. 희성이 소리 없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얀 볼을 툭 쳤다. 아까 희성의 눈꺼풀이 떨렸던 것처럼 파르르 떨린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도윤의 앞으로 웃는 입매가 보였다.
“잘 자.”
“…응.”
“잘 자.”
“아…. 너도 잘 자.”
머리를 헝클어뜨려주곤 방을 나가는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킨 도윤이 희성의 손길이 닿았던 제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이런 기분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뭐라고 설명을 할 수는 없는데 그냥, 그냥….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난 도윤이 입술을 질겅였다. 평생 한글을 배웠는데 지금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속이 답답했다. 거울 속 자신은 여전히 희성에게 선물 받은 연노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상해. 도윤이 후드의 끝을 구기다 옷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