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욕(1)
도윤의 아버지인 연석이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한평생을 성실하게 다녔던 회사가 크게 휘청거리면서 내부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10년을 넘게 함께 출퇴근을 했던 동료가 잘리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그러나 생각보다 아주 빠른 속도로 직원들이 옷을 벗고 회사를 나갔다. 연석은 불안했으나 가족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하루하루 힘겹게 출근을 했던 남자가 무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던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대표도 많이 힘든 얼굴이었다. 연석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그날 밤, 홀로 술을 마시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도윤도 이제 머리가 자랄 만큼 자랐고,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아주 잘 알았다. 부모님께서 아무리 자신에게 숨기고 또 숨겼다 해도 도윤은 다 알았다.
내일 학교에 가려면 얼른 자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도윤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유난히 작아 보이는 아버지의 등을 끌어안고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녀석, 참. 연석의 슬픈 목소리와 함께 힘이 없는 손이 도윤의 팔을 토닥거려주었다. 어린 아들의 위로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연석은 꾹 참았다. 지금 여기서 무너지면 평생 자신을 응원해 준 아내와 아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참았다. 말로는 괜찮다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회사는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고 위로를 해주던 도윤의 어머니인 민영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어깨가 무거워진 연석은 홀로 술을 마시며 긴 새벽을 보냈다. 이렇게 구는 것도 오늘만이다, 오늘만. 안주 대신 그 말을 삼킨 연석이 소주를 한 번에 털어마셨다. 지금은 이 소주보다 당장 자신의 앞에 닥친 일이 더 썼다.
연석은 일을 쉬게 되면서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았다. 일찍 일어나 가족들이 먹을 아침을 만들기도 했고 아내와 함께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으며 아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서 차를 끌고 학교 앞까지 가기도 했다. 일을 다녔을 때는 바빠서 해보지 못했던 일들도 했다. 가족들과 여행을 가기도 했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민영의 의견에 바로 짐을 챙겨 차를 탔고, 세 사람은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바다를 보고 돌아왔다. 겨울바다는 잔잔하니 아름다웠다. 찬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좋았다.
이 행복이 평생 갔으면 좋겠다고, 도윤은 잔잔한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 사진은 도윤의 핸드폰 배경화면이 되었다. 가운데에 서서 부모님의 팔짱을 끼고 이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가진 도윤은 핸드폰을 볼 때마다 멍하니 그 사진 속 부모님을 쳐다봤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가족이 다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었다.
연석은 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아직 자신이 편안하게 쉬기에는 아내가 있었고 아직 대학도 보내지 못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자존심 따위를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도 혹시 사람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고 다니기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인에게서 서울에 있는 아는 형님이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혹시 함께할 생각이 있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당장 살고 있는 집과 가지고 있는 것들, 그리고 대출을 받는다면 서울에 집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지금보다는 훨씬 작은 집이겠지만 연석은 가족들과 짧은 상의를 끝내고 그러겠노라 답장을 보냈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세 사람은 가진 것 하나 없이 서울로 향했다. 도윤은 이렇게 갑자기 가는 것이 어디 있냐며 서운하다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자주 하겠다며 웃었다. 가능하면 방학에 자주 내려오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도윤에게 약속을 받아내고도 서운한지 서준의 어깨가 축 처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붙어 다녔으니 서운할 만도 했다. 도윤이 웃으면서 서준을 끌어안았다. 혹시 나 없다고 누가 괴롭히면 바로 말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뱉은 농담에도 서준은 우울하게 도윤의 등을 끌어안았다. 남들이 보면 오해를 할 만한 분위기에도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끌어안고 연락을 하겠다며 속닥였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서울은 생각보다 신기하지도 않았다. 전에 살았던 곳도 다 사람이 사는 곳이었기에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은 것은 좀 신기했다. 부모님께서 미리 왔다 갔다 하면서 구한 집은 아파트였는데 확실히 전에 살았던 집보다 평수가 좁았다. 없는 형편에도 아들을 위한 방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조금 무리해서 얻은 집이었다. 도윤의 방에는 침대나 작은 책상, 옷장이 겨우 들어갔다. 그마저도 침대와 옷장의 사이가 좁아서 밑에 있는 서랍이 다 열리지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연석은 당장 다음날부터 출근을 했고 민영도 식당에 일자리를 얻어 출근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도윤이 새로 입게 될 교복을 사러 갔었다. 전에 다녔던 학교보다 예쁜 교복은 아무리 봐도 영 낯설었다. 새로운 교복을 입고 거울을 쳐다본 도윤이 사진을 찍어 서준에게 보내주었다. 그 사진에 서준은 배신이라며 울었다. 도윤은 자신보다 작은 서준이 동생 같았고 귀여웠다. 웃으며 답장을 보낸 도윤이 바닥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새 교복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포근한 냄새. 아들의 교복을 신경 써서 세탁한 민영은 어서 아침을 먹으라며 손짓했다.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알았지?”
“엄마는…. 내가 뭐 초등학생도 아니고.”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내.”
“엄마, 저 18살이에요.”
“걱정되니까 그렇지.”
“내가 어디 가서 왕따라도 당할까 봐?”
“무슨 그런 말을 해.”
“걱정 마세요, 나 전학 오기 전에도 친구 많았어요!”
“알지, 누가 우리 아들을 싫어하겠어.”
도윤이 씩 웃으면서 밥을 크게 떠먹었다. 민영은 도윤의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며 웃었다. 민영은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는 도윤을 붙잡았다. 나중에 엄마 늦을 수도 있으니까 이걸로 저녁 사 먹어. 손에 만원 두 장을 쥐여 주며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오늘 파이팅! 자신을 끌어안고 힘을 내라며 소리치는 아들의 목소리에 민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학교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전에 다녔던 학교는 아이들이 많이 없어서 작았는데 이곳은 운동장도 넓었고 건물도 컸다. 낯선 교문을 통과해 건물로 들어선 도윤이 신발을 들고 교무실을 찾았다. 교무실이 2층에 있다고 미리 전해 들었는데도 길을 헤맸다. 어색하게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도윤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담임선생님이 될 이름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컵을 들고 걸어가던 남자가 도윤을 힐끔거렸다. 도윤의 목에는 학생증도 없었다.
“누구 찾아?”
“아, 안녕하세요. 저 혹시 이정민 선생님 자리가 어디인지….”
“이정민 선생님?”
“네. 오늘 전학 와서, 아침에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는데 어디 계신지 모르겠어서요….”
“아아. 전학.”
컵을 든 남자가 자신의 자리에 컵을 내려 두고 손을 까딱였다. 도윤이 머뭇거리며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머리 짧고 서 계신 분. 도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도윤을 보내주고 느릿하게 다시 등을 돌렸다. 담임선생님에게 가기 전에 괜히 코를 한번 훌쩍인 도윤이 눈치를 보며 그 옆에 섰다. 갑자기 다가온 낯선 얼굴에 정민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아이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학생증도 없고. 정민이 잠시 고민하다 눈을 크게 떴다.
“도윤이?”
“안녕하세요.”
“안녕. 나인 거 어떻게 알았어?”
“저기, 다른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
“다행이네. 잠시 옆에 앉아 있을래?”
도윤이 얌전히 의자에 앉아 교무실을 둘러보았다. 교무실은 꽤 부산스러웠다. 다들 아침조례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교실에 가져갈 출석부를 들고 교무실을 나가는 선생님들도 꽤 보였고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어 차를 마시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민은 출석부와 도윤의 서류를 넘겨보며 펜을 들고 있었다. 도윤이 자신의 증명사진이 붙어있는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이거 먹을래?”
정민이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사탕을 꺼내주었다. 사탕을 두 손으로 받은 도윤이 고개를 꾸벅였다.
“학생증은 아마 내일이면 나올 거야. 교무실에 와서 받아 가면 돼.”
“네.”
사탕을 손에서 굴리며 대답한 도윤이 출석부를 들고일어나는 정민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갈까?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자리를 정리한 정민이 앞장서서 교무실을 나섰다. 학교를 두리번거리며 정민을 쫓던 도윤이 급식실이랑 매점은 1층에 있는데, 나중에 반장한테 알려 달라고 해. 아무래도 제일 궁금해할 것 같아서 미리 알려 줄게. 작게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도윤이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외에도 정민은 학교에 뭐가 있는지, 교칙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직까지는 좋은 선생님 같았다.
도윤이 신발장에 신발을 넣는 것을 기다려 주기까지 한 정민이 진지한 얼굴로 준비됐니? 하고 교실을 가리켰다. 어디 전쟁을 나가는 것도 아닌데 진지한 얼굴이 웃겼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좋아. 하고서 문이 열렸다. 다들 자리에 앉아. 정민이 출석부로 교탁을 치자 아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도윤이 마른 입술을 혀로 쓸면서 교실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얼굴이 들어서자 잠시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정민의 말에 가라앉았다.
“여기는,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 지내게 될 전학생.”
“안녕, 하도윤이야. 잘 부탁해.”
“다들 도윤이가 금방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네.”
“반장은 나중에 도윤이한테 급식실이나 매점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
“네.”
“그리고 도윤이는….”
정민이 교실의 끝, 뒷문과 가장 가까이 있는 빈자리를 확인하곤 손가락으로 끝을 가리켰다. 모두가 정민의 손가락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도윤이는 저기 앉으면 되겠다.”
“네.”
도윤이 쏟아지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맨 뒤에 있는 빈자리로 향했다. 가는 동안 모두가 도윤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새로운 사람을 향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묘하게 기분이 이상한 시선이 섞여있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들이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은 도윤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가 멈칫했다. 여전히 그 시선들이 뒤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서 볼을 긁적이며 옆으로 고개를 돌린 도윤은 역시나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까맣고, 고요했다. 사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도윤을 보는 시선이 묘했다. 짝이 됐는데 무시를 할 수는 없었기에 작게 안녕. 하고 인사를 했더니 도윤을 빤히 보던 눈이 눈꺼풀에 덮여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안녕.”
“으응.”
“아까 잘못 들어서. 이름이…?”
“하도윤. 너는?”
“…희성. 김희성.”
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은 그 웃음을 한참이나 보다가 따라 웃어주었다. 그것이 도윤과 희성의 첫 만남이었다. 도윤은 그날 희성에게 웃음을 보여줘서는 안 되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모르고 도윤은 맑게 웃었다.
첫날은 그럭저럭 꽤 괜찮은 하루였다.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거나 어디서 왔는지, 전에 다녔던 학교는 어디였는지 물어보는 질문들이 많았다. 점심을 같이 먹겠냐는 물음에 당연히 먹겠다고 답도 했다. 하지만 교실에 이상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도윤이 전학을 온 지 일주일이 조금 안됐을 시점이었다.
도윤에게 웃으며 다가오던 아이들이 이제는 눈치를 보며 도윤을 멀리했다. 아이들은 묘하게 선을 그었다. 급식을 먹으러 가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교실에 앉아있을 때면 자신을 모르는 척하기도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눈치가 빠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은 도윤이 슬슬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교실에서 말수를 줄였다. 그러다 도윤이 울컥한 것은 일주일간 함께 점심을 먹었던 차현이 이제 자기는 다른 친구들과 먹겠다고 조심스럽게 전했을 때였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아이들은 도윤의 옆에 희성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눈치를 봤다. 말은 도윤에게 걸면서 눈은 희성을 향했다. 차현이 희성의 눈치를 보며 이제 점심을 따로 먹겠다는 말을 했을 때 도윤이 처음으로 미간을 좁히며 차현을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희성은 말없이 차현에게 닿은 도윤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 수가 없는 도윤은 복도로 향했고 차현의 얼굴은 조금씩 질려갔다. 도윤이 복도에 서서 차현을 쳐다봤다.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사과를 하면 됐다. 도윤이 물었다.
“혹시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니, 그게….”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줘.”
“넌 잘못한 거 없어.”
“일단….”
“미, 미안한데 그렇게 해주라. 부탁할게.”
차현이 말을 더듬으며 도윤의 손을 피했다. 도윤은 그제야 얼굴을 완전히 굳혔다. 분명 문제가 있었다. 내가 실수를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져본 적이 없는 도윤이라 이 상황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윤의 입에서 차현아. 하고 차현의 이름이 나오기도 전에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짝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친해지질 못했던 희성이었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차현은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쳐다봤다. 희성이 차현의 앞머리를 보다가 도윤에게 걸어왔다.
“더운데 왜 나갔어?”
“잠깐 얘기 좀 한다고.”
“왜?”
“어?”
“덥잖아. 들어와.”
그래도 일주일간 짝을 했다고 김희성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몇 가지가 있었다. 희성은 묘하게 이상한 말을 많이 했고 대화가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더운 것을 싫어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했다. 또, 도윤과 많은 말을 하지도 않았고 함께 노는 일도 없었는데도 희성은 도윤이 시야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 불안한 듯 굴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윤에게 말을 걸면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도윤이 남에게 손이라도 대면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드러냈다. 지금도 그랬다. 차가운 눈으로 도윤의 팔을 잡고 교실로 들어간 희성이 자리에 앉자 조용하던 교실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소란스러워졌다. 마치 복도로 나간 자신과 차현, 그리고 희성을 의식이라도 한 듯이.
차현이 떠나가고 도윤은 희성과 함께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다른 친구들과 먹더니 이제는 도윤이 아니면 점심을 먹지도 않았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했지만 희성은 딱히 반응이 없었다. 자기가 먼저 도윤의 과거에 대해 물었으면서도 그랬다. 희성과 둘이 있으면 말은 대부분 도윤만 했다. 희성과 있으면 입이 아팠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닌데 희성의 옆에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랬다. 덕분에 도윤은 집에 가면 목이 아프곤 했다.
희성과 둘이 다니게 된 지 한 달이 겨우 지났을 때 도윤은 그제야 희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희성의 집안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희성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만한 기업의 아들이었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그 형과는 친하지 않다고 했다. 가끔 아버지가 부르면 집으로 오는 형이라 마주칠 일도 없다고. 도윤은 저녁에 부모님이 틀어 둔 뉴스에서나 들어봤던 이름에 조금 기가 죽었다. 자신이 그런 대단한 회사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도 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아침에 보면 차를 타고 교문 앞에서 내리는 희성을 볼 수가 있었는데 차를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비싸고 좋아 보이는 차였다. 아침저녁으로 희성을 데리러 오는 남자는 희성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아 보였는데도 깍듯하게 고개를 꾸벅이곤 했다. 또 희성은 친구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가끔 이야기를 하고 밥을 함께 먹는 멤버가 있었지만 도윤과 서준 같이 막 친해 보이진 않았다. 희성은 서준의 존재를 굉장히 궁금해했다. 도윤이 핸드폰을 보며 웃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대화 내용을 보거나 서준에 대해 물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다고 했을 때는 조금 멍하게 앉아있기도 했다.
도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적응을 했다. 이 상황을 돌이키고는 싶었으나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시간이 지나면 대화를 해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은 헛수고였을 뿐이다. 도윤이 혼자가 되자 희성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몄다. 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냐는 듯.
염색을 해본 적이 없는지 희성의 머리카락은 아주 새까맸다. 눈동자도 그랬다. 쳐다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눈동자를 가졌다. 보기와는 다르게 웃는 입매가 귀여웠다. 그냥 보고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웃음이었다. 누가 봐도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잘 생겼고, 웃으면 귀여웠다. 같이 있으면 평소보다 말을 더 많이 해야 해서 그 점은 불편했지만 다른 것은 다 괜찮았다. 희성은 도윤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모두가 도윤에게서 등을 보일 때 혼자 도윤의 옆을 지켰다. 도윤은 스스로 늪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희성과 함께했다.
살다 보면 유독 평화로운 날이 있었다. 친구를 많이 사귀진 못했지만 1학기를 무사히 마친 도윤은 짧은 여름방학을 보내고 2학기를 맞이했다. 아침에 지각도 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앞으로 나가 문제를 푸는 시간에도 운이 좋아 아는 문제가 나온 탓에 막힘없이 술술 풀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희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오랜만에 반장과 이야기도 해봤다. 웃으면서 반장의 이야기를 듣고 대꾸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남들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물론 희성이 오자마자 반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피했지만.
오늘은 점심도 맛있게 먹었고 희성과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교실에 올라오기도 했다. 희성도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어제 집에 형이 왔었는데 친하지도 않으면서 자꾸 자신의 안부를 물어 대서 짜증이 났었다는 이야기였다. 질린다는 듯 미간을 구긴 얼굴이 귀여워서 웃었더니 멈칫한 희성이 곧 따라 웃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상하게 모든 것이 행복했다.
그러다 일은 수업이 한창인 오후에 터지고 말았다. 졸음을 참으며 필기를 이어가던 도윤이 문을 똑똑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수업을 하던 선생님도 잠시 멈춰서 복도로 나갔고 잠시 후 도윤아, 가방 챙겨서 나가봐라. 하는 소리에 잠이 다 달아났다. 도윤의 필기를 멍하니 구경하던 희성도 허리를 펴고 앞을 봤다. 도윤은 잠시 엄습하는 불안함에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섰다. 자고 있던 아이들마저 일어나 도윤을 쳐다봤다. 복도에는 담임인 정민이 난처한 얼굴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손이 떨렸다. 정민은 긴장한 도윤의 얼굴을 보다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전해왔다. 일을 하다 쉬는 시간에 잠시 은행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신발을 쥔 손이 떨렸다. 정민은 도윤을 교문까지 데려가서 택시까지 잡아주었다.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하고 떨던 도윤은 병원에 도착해서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항상 웃던 아들이 무너지자 연석의 마음도 무너졌다. 그러나 지금 자신까지 무너지면 아들에게 못할 짓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다가 수술실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음주운전이었다. 대낮에 면허정지 수준으로 술을 마신 운전자가 도로를 돌아다니다 신호에 맞춰서 걷던 어머니를 치고 지나간 것이다. 운전자는 사람을 치고도 한동안 도로를 달리다 붙잡혔다고 했다. 긴 수술 끝에 민영이 병실로 옮겨졌다. 도윤은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울었다. 엄마가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TV는 조용히 소리를 울리며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고 도윤은 의자에 앉아 얼굴을 감쌌다. 연석은 눈을 감고 숨만 쉬는 민영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병실을 빠져나왔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아들을 찾기 위해 복도를 서성인 연석이 의자에 웅크리고 있는 도윤을 발견하곤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윤아.”
“…….”
“엄마 괜찮을 거야. 배 안 고파?”
키가 180이 훌쩍 넘어 어느새 187 정도가 된 커다란 아들이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였다. 웅크리고 있던 등이 살짝 떨렸다. 연석이 도윤의 등을 쓸어주며 눈을 깜빡였다. 의사선생님이 수술도 잘 됐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도윤이 허리를 조금 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과는 달리 연석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이 무서울까 봐 아버지는 힘겹게 달래 주고 있었다.
힘이 없어 보이는 얼굴에 도윤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우윽…. 도윤이 인상을 찡그리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주변에서 꼭 아들이 아니라 딸 같다고 하던 예쁜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연석이 아들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다, 도윤아. 엄마 괜찮아. 귓가에 속삭이는 연석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으나 단단했다. 도윤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숨을 참았다.
연석은 출퇴근을 모두 병원에서 했다. 밤새 민영을 간호하고 피곤한 얼굴로 출근을 하고 또다시 병원으로 퇴근을 했다. 도윤은 이제 적막이 가득한 집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갔고 학교에서는 온종일 멍하게 있었다. 옆에서 희성이 말을 걸어도 응, 응. 그런 대답만 할 뿐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멍한 정신으로 학교에서 나오면 또 멍하니 집에 가자마자 아버지의 옷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속옷과 옷이 담긴 가방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도윤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며칠 사이에 살이 꽤 많이 내린 아버지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들 왔어? 항상 깨끗하던 인중과 턱에 수염이 올라와 있었다. 도윤이 다시 어머니를 보며 손을 잡았다. 민영은 깨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상처가 난 팔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곤 손등에 입을 맞춘 도윤이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눌렀다. 어머니의 손은 따뜻했다. 도윤이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 두고 민영을 쳐다봤다. 엄마. 엄마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안에서 사라졌다. 엄마가 얼른 눈을 떠서 자신을 봐주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들 했던가. 도윤이 평생 믿지도 않았던 신까지 찾으며 빌었다. 엄마가 깨어나셨으면 좋겠어요.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연석의 손이 도윤의 어깨에 닿았다. 도윤이 눈을 깜빡이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김희성]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아들이 비운 자리는 아버지가 채웠다.
“여보세요?”
-…….
“희성아?”
-응.
“왜?”
-…뭐해?
“나 병원 왔어. 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건너편에서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도윤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너는 뭐해?”
-나? 나는, 그냥 있어.
“그래?”
-응.
“…….”
-도윤아.
“으응.”
-…괜찮아?
희성의 입에서 나온 괜찮냐는 말에 도윤이 잠시 멍 해졌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다고 답을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도윤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니.”
-…….
“안 괜찮아.”
-…….
“…….”
-…어느 병원인지 알려줘.
“…왜?”
-병문안, 가고 싶어.
“귀찮게 뭘….”
-가고 싶어. 전화 끊으면 문자로 알려줘. 끊자마자 바로.
“어어….”
-끊을게. 보내줘.
희성의 단호한 목소리처럼 전화가 뚝 끊어졌다. 이걸 진짜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도윤이 입술을 깨물다 주소를 적어서 보냈다. 희성에게서는 [금방 갈게.] 하고 짧은 답이 도착했다. 도윤이 창밖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얼른 깨어나셔서 저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길 간절히 빌었다.
희성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10분이 지나지 않아 복도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때까지도 창밖만 보고 있던 도윤이 몸을 돌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도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 사람들이 가는 방향은 어머니의 병실이 있는 쪽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윤이 쿵 떨어지는 심장과 함께 뛰듯이 걸어 병실로 향했다.
어머니가 있는 병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도윤이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 병실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옮기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도윤이 성큼성큼 걸어가 사람들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부터 병실을 옮기실 겁니다.”
“네?”
“중환자실로 옮기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눈을 깜빡인 도윤이 아버지를 쳐다봤다. 연석은 도윤의 어깨를 안고 뒤로 물러나주었다.
“1인실로 바꿔 주신다는구나.”
“1인실이요?”
“응. 갑자기 무슨 이유인지는 나도 잘….”
도윤이 미간을 좁혔다. 1인실로 가게 되면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장 수술비도 부족해 아버지께서 주변에 도움을 청하셨는데 1인실이라니, 말도 안 된다. 연석과 도윤은 멍하니 안내에 따라 1인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1인실은 정말 넓었다. 다 함께 쓰던 병실보다 넓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조금 더 편안해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던 도윤이 뒤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의사선생님일 까봐 급하게 달려간 도윤은 문 앞에 서있는,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에 몸을 굳혔다. 희성이었다.
분명 자신은 옮기기 전 병실을 알려주었는데 희성은 어떻게 안 건지 1인실의 앞에 서있었다. 도윤이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병문안을 오고 싶다던 희성은 정작 병실 안은 쳐다보지도 않고 도윤만 좇았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물어봤어.”
“…….”
어째서였을까, 문득 희성의 집안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갔다. 도윤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고 물었다.
“혹시….”
“응.”
“…혹시, 네가 그랬어?”
“응.”
자신이 무엇을 묻는 줄 알고 지금 응, 이라고 대답을 하는 걸까. 도윤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네가 우리 엄마 병실 옮겨 달라고 했어?”
“응.”
“왜?”
“그러고 싶었으니까.”
“…왜?”
“너희 엄마니까.”
“…그러니까, 대체 왜?”
희성이 알 수 없는 눈으로 도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윤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빨리 일어나셨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그럼 내가 옮겨준 대로 있어.”
“뭐?”
“다른 사람들하고 함께 지내야 하는 더러운 병실보다는, 1인실이 더 낫지 않겠어?”
“…….”
“그냥 1인실도 아니고 여기는 VIP실인데.”
“…VIP실?”
“이제부터 이 병원에서도 제일 능력 있는 의사들이 어머니를 봐주실 거야.”
“…….”
“도윤아.”
“…….”
“이럴 때는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자꾸 묻지 말고.”
“…….”
말하는 동안에도 싸늘함을 유지하던 희성이 열리는 문 사이로 나타나는 연석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아까까지의 싸늘함은 어디로 가고 예의 바른 학생인 척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에 도윤은 이상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희성이 도윤의 친구라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지어주었다. 희성은 그럴싸한 태도로 연석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도윤은 뻣뻣하게 굳어서 희성의 웃고 있는 입매를 보았다. 머릿속으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
1인실인 것도 모자라 VIP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확실히 전보다 빠른 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며칠 사이에 눈을 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좋아지자 아버지 쪽에 문제가 생겼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는 연석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최대한 도움을 주려 노력했지만 전 회사가 그랬던 것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자 사장은 조금만 시간을 달라며 시간을 끌다가 사라졌다. 희성이 병원비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연석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병원비를 갚기 위해 일을 했다. 하지만 회사가 없어지자 연석은 또 한 번 절망에 빠졌다. 새벽마다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졌고 민영의 손을 붙잡고 우는 날 또한 많아졌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도윤의 마음도 덩달아 찢어졌다. 연석에게 회사를 소개해 준 지인은 정말 미안하다고, 자신과도 연락이 닿질 않는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사실 회사를 소개해 준 지인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흔들리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도윤의 학교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수업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영혼이 없었고 밥도 자주 걸렀으며 쉬는 시간에는 잠만 잤다. 전학을 왔었던 초에는 곧잘 웃으며 놀던 도윤의 상태가 나빠지자 희성은 점점 심기가 뒤틀렸다. 처음 봤을 때 도윤처럼 생긴 사람을 처음 봐서 놀랐었다. 이렇게 예쁜 남자는 처음 봤다.
잘생기긴 했으나 잘생겼다라는 말보단 예쁘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쌍꺼풀이 짙지는 않지만 커다란 눈과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 옆으로 나는 보조개가 세상 그 누구보다 어울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볼에 보조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도윤에게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툭 치면 꺾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시들어서 치면 그대로 축 처지는 꽃 같았다. 얼른 저 얼굴이 다시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한 탓에 민영의 상태는 꽤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저도 들었다. 근데 도윤은 어째서. 희성이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도윤을 보다 턱을 괴고 실눈을 떴다. 사람을 써서 누군가의 뒷조사를 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희성이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였다.
***
민영이 술 때문에 이리 되었으니 웬만하면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겨우 구했던 집까지 팔아야 하는, 당장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너무 버거워 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아들을 보고서도 마셨다. 민영은 확실히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눈을 뜨거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등, 아무런 활동이 없었다. 연석은 새벽마다 누워있는 민영에게 한탄하듯 혼잣말을 하는 것이 익숙해지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이 시간마저 익숙해졌다.
복도는 조용했고 창밖은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만 들려왔다. 연석이 호흡을 하고 있는 민영을 보다 마른 세수를 했다. 민영아, 대체 언제 일어나줄 거니. 이러면 안 되는데 가만히 누워있는 민영이 미웠다. 민영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이고 싶었고, 민영에게 밉다고 말하는 자신도 죽이고 싶을 만큼 숨이 막혔다. 연석이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숙이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연석은 힘없는 목소리로 네…. 대답했다.
민영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러 오는 간호사인 줄 알았던 연석은 낮지만 묵직하게 들리는 구두 굽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밥은 먹지 않고 술만 마셨다. 속이 쓰리고 정신이 없어서 한참을 손님의 얼굴만 보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연석이 고개를 꾸벅였다. 뉴스에서나 보던 희성의 아버지, 김호태였다. 지금 민영의 상태를 훨씬 좋아질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 연석이 어버버거리며 서있자 작게 웃어 보인 호태가 앉으라는 듯 손을 올렸다가 아래로 내렸다.
“하연석 씨 되시지요?”
“네, 네.”
“저는 김호태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희성이한테 많이 들었습니다. 아드님이 우리 막내 친구라고.”
“도윤, 도윤이가 희, 희성군에게 도움을 많이….”
“희성이가 아드님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죄, 죄송, 아니, 감사, 아니….”
“우선 앉으시죠.”
침대 앞에 마련된 소파에 앉은 희성의 아버지, 호태가 병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가져온 연석이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병실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호태가 연석을 훑곤 입을 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도 됐었지만 어떻게 그리합니까.”
“예?”
“내 사람을 만들고자 하면 제가 직접 와야지요.”
“…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괜찮으시다면 사모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저희 집에서 머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예?”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잘….”
“병원을 제외하고서 당장 지내실 곳은 있으십니까.”
“…….”
“사모님이 당장 깨어나시면, 지내실 곳이 계십니까.”
“…….”
연석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맞잡았다. 호태가 그 손을 바라보다가 턱을 문질렀다.
“조금 전, 제가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예.”
“마침 기사님 한 분이 일을 그만두셔서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
“물론 월급도 드릴 겁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에게 어째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턱을 매만지던 호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석은 그 웃음에서 희성을 보았다. 가만히 있을 때는 희성과 닮은 점을 찾을 수 없던 얼굴이 웃으니 영락없이 똑같았다. 연석이 눈을 내리깔고 호태의 구두를 눈에 담았다.
“희성이가 부탁하기도 했고 제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부모로서 아이들이 하고 싶다는 일은 최대한 도와주고자 합니다.”
연석이 희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예의 바르고 예뻤다. 문득 자신은 부모로서 도윤이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연석에게서 말이 없어지자 호태가 작게 웃어 보였다.
“생각할 시간은 드리겠으나 많이 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
“내일 점심쯤, 저희 쪽 사람이 찾아올 겁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점심이요?”
“계약서를 들고 올 텐데 생각이 있으시면 계약서를 읽어 보고 작성만 해주시면 됩니다.”
“…우선 알겠습니다.”
“최대한 오시는 쪽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막내가 무섭거든요.”
“…….”
“오늘 약속도 잡지 않고 멋대로 찾아온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호태가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연석 또한 급하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호태가 병실을 나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제야 연석은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폭풍이 휘몰아친 느낌이었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명함을 보던 연석이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선택권이 없었다.
연석은 도윤이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도윤을 이끌고 병원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연석의 얼굴은 멀끔했다. 늘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던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마치 사고가 일어나기 전처럼. 그래서 도윤은 마음이 들뜨고 말았다. 메뉴를 정하면서도 웃고, 메뉴를 기다리면서도 웃었다. 수염이 없는 연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눈이 마주치면 괜히 씩 웃어주기도 했다. 연석이 예쁘게 웃는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연석은 혹시 모르니 오늘 있었던 일을 식사 후에 알리기로 했다. 보글보글 맛있게 끓는 김치찌개가 도윤의 앞에 놓였다. 연석은 오랜만에 칼질을 하고 싶다며 돈까스를 시켰다. 도윤이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 후후 불고는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연석도 돈까스를 잘라 제일 큰 조각을 아들의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도윤은 또 웃기만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행복을 아주 오래도록 느끼고 싶었다.
어머니의 사고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 같았다. 집에서 혼자 있을 때 했던 요리와 급식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았다. 텅 빈 그릇을 밀어두고 휴지로 입을 닦은 도윤이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아버지의 행동에 물을 마시며 물었다.
“왜요?”
“도윤아.”
“으응.”
“지금부터 아빠가 하는 말 잘 들어봐.”
“네에.”
도윤이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건가 싶었다. 연석은 목이 타는 듯 물을 연신 넘기곤 손바닥으로 입을 쓸었다.
“도윤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네?”
“그러니 오늘 집에 가면 당장 필요한 짐부터 챙겨놔.”
“그게 무슨, 그럼 저희는 어디에서 지내요?”
“오늘…. 김호태 회장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어.”
“누가 와요?”
“자신이 희성이의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대.”
“…….”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사정을 이미 다 아시는 눈치였어.”
“…….”
“그래서 말인데, 도윤아.”
“…….”
“당분간 회장님의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떨까?”
“…….”
“물론 우리가 몸만 가는 건 아니야. 나도 그럴 생각은 없고.”
“그럼요?”
“기사님 한 분이 얼마 전에 일을 그만두셨다네.”
도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연석이 아들의 반응을 살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우리에게 여유가 없는 건 사실이야.”
“…….”
“일하면서 돈을 충분히 모으고, 엄마가 괜찮아지면 그때 나오면 돼. 응?”
“…제 대학 등록금. 등록금으로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면 되잖아요.”
“그 돈은 정말 너 대학 보내려고 엄마 아빠가 모아둔 돈이야.”
“지금 당장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 대학 안 가도 돼요!”
“하도윤!”
갑작스럽게 커진 목소리에 식당에 앉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돌아봤다. 도윤이 입술을 물고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연석은 아들에게 소리쳤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도윤아, 지금 우리한테는 이 방법밖에 없어.”
“전 싫어요.”
“도윤아.”
“싫다고 했어요.”
도윤이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윤아, 도윤아! 연석이 곧바로 계산을 하고 뒤를 쫓았다. 도윤은 가게 근처에 우뚝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게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연석이 말없이 도윤의 앞에 서서 얼굴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붙잡아 올렸다. 울음을 참느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안쓰러웠다.
“싫, 어요….”
“그래, 아빠도 알아.”
“나는, 난….”
“그래.”
“엄마는 왜, 왜 안 일어나요?”
“…….”
“왜 아직도….”
눈을 깜빡이자 굵은 눈물방울이 투둑, 아래로 떨어졌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린 아들이 평생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다 겪고 있었다. 연석이 도윤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미안하다, 아빠가 너무 미안해. 아버지의 진심 어린 사과에 도윤이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도윤과 연석을 힐끔거리며 쳐다봤지만 도윤은 상관없다는 듯 한참을 울기만 했다.
어젯밤 도윤은 집에 가자마자 퉁퉁 부어터진 눈으로 짐을 챙겼다. 옷을 가방에 넣으면서도 혼자 눈물을 쏟아냈다. 씻으면서도 울었고, 자려고 누워서도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반이나 줄어든 시야에 도윤이 따가운 목을 문지르곤 아침부터 샤워를 했다. 점심쯤 아버지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오후에 집으로 사람이 온다고 했다. 이 집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새 정이라도 든 모양인지 자꾸 코끝이 찡했다.
안방으로 들어가 부모님이 썼을 침대에 앉자마자 또 시야가 흐려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웃으면서 도윤아, 하고 자신을 부르던 엄마를. 코를 훌쩍이며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다 옆으로 돌아누운 도윤이 몸을 웅크렸다. 베개와 이불에서도 엄마의 냄새는 희미했다. 으응…. 도윤이 눈을 감자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도윤은 엄마의 냄새가 희미한 이불을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음을 토해냈다.
연석은 집에 혼자 있을 아들이 걱정이 됐다. 잠은 잘 잤는지, 혼자 울고 있지는 않을지, 밥은 먹었는지 그런 부모의 기본적인 걱정들이었다. 정신은 없었지만 진지하게 계약서를 훑어보고 펜과 도장을 든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꾹 찍었다. 이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물은 엎질러졌고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연석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김호태 회장이 보낸 사람을 쳐다봤다.
“오후에 집으로 사람이 갈 겁니다.”
“예.”
“우선 아드님과 간단한 짐부터 옮겨드릴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에게 언제든 말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잘 선택하신 겁니다. 회장님께서는 좋으신 분이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연석이 정말 괜찮다는 듯 작게 웃었다. 일이 끝나자 병실이 또 텅 비었다. 연석이 한숨을 쉬며 마른 세수를 하다가 일어나 민영의 옆에 섰다. 여자는 평온한 얼굴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깨어날 때도 됐는데 고요하기만 한 얼굴을 쓸어주며 이마에 입을 맞춘 연석이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민영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아버지에게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오후에 집으로 사람이 간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너무 많이 울어버린 탓에 코가 꽉 막혔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찬물을 마시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거실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리가 저렇게 행복했던가…. 보기 좋게 웃고 있는 부모님과 자신의 모습에 도윤이 또 차오르는 눈물을 아무렇게 닦아냈다. 차라리 밖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훌쩍거리며 밖을 멍하니 봤다. 하늘은 맑았고 구름은 예뻤다. 만화 속에나 나올 법한 구름의 모양에 도윤이 숨을 들이켰다.
모르는 번호로 두 시에 데리러 오겠다는 문자가 왔고 정말 두 시가 되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 약속은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커다란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도윤이 느릿하게 걸어가 문을 열어주자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도윤에게 인사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도윤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현관에 서서 바닥을 보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작은 사이즈의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나왔다.
“지금 가져갈 물건들은 이게 다인 가요?”
“네.”
“알겠습니다. 나가시죠.”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집을 나가는 행동이 깔끔했다. 도윤이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남자들을 따라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아파트 앞에는 새까만 차가 아주 깔끔한 상태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들고 있던 짐을 모두 차에 싣고 도윤이 차에 오르기를 기다려주었다. 곧 회장님의 기사가 될 남자의 아들을 챙기는 행동이라기엔 너무 도련님을 대하는 태도 같았지만 도윤은 말없이 차에 올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풍경이 들어서자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족사진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숨을 참자 울컥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조용한 목소리가 도윤에게 출발을 알렸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도윤이 도착한 집은 말 그대로 거의 궁전 같았다. 그래서 커다란 저택과 커다란 정원을 멍하니 보느라 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남자가 문을 열어주며 알리는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도윤이 머뭇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손에는 여전히 가족사진이 들려 있었다. 도윤의 앞으로 한 사람, 뒤로 두 사람이 붙었다. 이어서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인 듯 유니폼을 차려입은 사람이 문을 열어주었다.
도윤은 눈치를 보며 집으로 들어섰다. 안내에 따라 신발을 갈아 신고 들어선 집은 정말 넓었다. 집에 무슨 계단이 이렇게 많은지. 홀린 듯이 집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안내해 주는 사람을 놓칠 뻔했다.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쫓은 도윤이 2층의 맨 구석, 활짝 열린 문 앞에 섰다. 일하는 사람이 지낼 공간이라기엔 또 지나치게 넓었다. 그 방안에는 커다란 책상도 있었고 커다란 침대와 옷장도 있었다. 창문에서는 빛이 따사롭게 들어오고 있었고 알 수는 없으나 누군가의 작품인 것 같은 그림도 걸려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여기서요?”
“네.”
“…이런, 이런 방은 필요 없어요. 그냥, 잘 수만 있으면….”
“더 넓은 방으로 바꿔줄까?”
방을 둘러보던 도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건지 희성이 문에 기대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도윤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희성은 이제 그만 내려가보세요. 하며 익숙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사람들은 희성에게 고개를 꾸벅이곤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희성은 희미해지는 발소리에 계단을 내려다보다가 문을 천천히 닫았다. 캐리어 한 개와 가방 한 개가 다인 것 같은 짐에 희성이 흐음. 소리를 내며 도윤에게 다가왔다.
“안녕.”
“…….”
“울었어?”
“…….”
희성이 손을 뻗어 도윤의 눈가를 문질렀다.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던 눈이 부어있었다. 얼굴에 닿는 온기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윤이 뒷걸음질을 쳤다. 희성이 작게 웃으면서 도윤의 손에 있던 액자를 가져갔다. 줘! 도윤이 손을 뻗었지만 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액자를 내려다봤다. 도윤은 어머니를 조금 더 닮았다. 아버지와도 닮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더 많이 닮은 편이었다. 희성이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도윤의 얼굴을 문지르곤 액자를 책상에 내려 두었다.
“방이 마음에 안 들어?”
“…너 어떻게 알았어?”
“뭘?”
“우리 집….”
“아아.”
희성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윤의 집안은 지극히 평범한 집안이라 뒷조사가 그 어느 때보다 쉬웠다. 조금만 털어도 나왔다. 희성은 도윤의 아버지가 다녔던 회사가 망해서 지인의 소개를 받고 서울로 올라온 것까지 너무나도 쉽게 알아냈다. 그런데 소개를 받아 들어간 회사가 또 망했다는 것까지. 어머니는 사고를 당해 상태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는 병원비와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아파트는 대출로 어렵게 받았지만 그마저도 이제 팔아버려야 할 수준이었다. 희성의 입장에서 도윤의 집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이다.
“밥 먹었어?”
“어떻게 알았냐고 묻잖아.”
“점심을 먹을 시간은 아니긴 한데, 뭐 간단하게 먹을래?”
“야, 김희성!”
도윤이 처음으로 희성에게 성까지 붙여가며 소리를 쳤다. 희성이 도윤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윤아.”
“…….”
“내가 전에 가르쳐줬잖아.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하는 거야.”
“…….”
“길바닥에 나앉으면 너도 창피하잖아.”
“…….”
“살려줬으면 고맙다고 하는 게 예의지.”
희성이 또 웃었다. 묘하게 어긋난 웃음이었다. 도윤이 주먹을 쥐고 희성을 보았다.
“나는 너와 너의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살려준 거야.”
“이게 어떻게….”
“내가 병실을 옮겨주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을지도 모르지.”
“너….”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게 부탁을 드리지 않았다면 너희 아버지는 진작 무너지셨을 거고.”
“…….”
“넌 어떻게 됐을까…. 여전히 시들어갈 텐데 난 그 꼴을 지켜보기가 싫거든.”
“…….”
“넌 지금처럼 항상 예쁘게 있었으면 좋겠어.”
“…….”
“예쁜 것이 못 나지면 가치는 그만큼 떨어지잖아.”
“…….”
“난 그 예쁨이 못 나지지 않고 평생 예뻤으면 좋겠어.”
희성이 천천히 다가와 도윤의 볼을 쓰다듬었다. 도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굳은 채 희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그러니까 예뻐해 줄 때 얌전히 있어.”
“…….”
“배고프겠다. 내려갈까?”
볼을 쓰다듬던 손이 목선을 타고 내려와 도윤의 목을 쓸었다. 희성이 웃으며 도윤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영혼이 털린 기분이었다. 도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희성의 힘에 이끌려 1층으로 내려왔다. 식탁에는 이미 간단한 과일과 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뜻한 차가 잔에 채워졌다. 도윤이 입술을 깨물고 잔을 노려봤다. 희성은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눈으로는 도윤을 쫓으며 차를 마신 희성이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도윤의 발을 툭 쳤다. 뜬금없는 접촉에 도윤이 어깨를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식으면 별로야.”
“…….”
희성의 잔이 소리도 내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도윤이 양손을 덜덜 떨며 잔을 쥐고 차를 마셨다. 냄새가 달았다. 희성이 턱을 괴고 도윤의 떨리는 손을 쳐다봤다. 눈을 내리깔고 차만 홀짝이는 얼굴이 예뻤다. 도윤이 자신의 집으로 왔다. 희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과일을 먹었다.
***
연석은 바로 다음날부터 운전대를 잡았다. 자신을 데리러 왔었던 사람들처럼 정장을 차려 입고 서있는 아버지가 낯설었다. 이상하냐고 묻는 말에 도윤은 고개를 저었고 아버지를 배웅했다. 뉴스에서나 보던 회장님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하지만 어린 네가 고생이 많다며 웃어주는 얼굴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회장님은 연석과 도윤이 지내는 방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식사는 입에 맞는지 묻기도 했다. 그리곤 막내를 잘 부탁한다며 희성을 가리켰다. 대체 평소에 집안에서 어떻게 지내는 건지 다들 겨우 고등학생인 희성의 반응을 살피는 눈치였다.
희성의 어머니는 잠시 친구들과 함께 해외로 여행을 갔다고 들어서 아직 인사를 드리진 못했고 형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도윤은 남의 집에 들어와 거의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걸을 때도 조심조심 걸었고 목이 말라도 참고 참다가 사람들이 없을 시간에 내려가 물을 마시곤 했다. 배가 고프면 언제든 말해달라는 상냥한 말에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게다가 아버지와 함께 쓸 줄 알았던 방은 오로지 도윤만을 위한 방이었다. 아버지의 방은 1층에 또 따로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을 내어주다니. 아버지가 쓸 방은 따로 있다며 말해주던 희성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의아하게 보는 시선에 희성이 그랬다. 나는 뭐든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는 건 싫어.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어차피 쓰더라도 희성이 아닌 자신과 아버지가 쓸 방이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희성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내 물건에 손대는 건 싫다는 뜻이야. 도윤은 3초간 멍하니 희성을 쳐다봤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희성의 말대로라면 저는 희성의 ‘물건’이라는 소리였다. 자신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뭐라고 따지려던 찰나 희성이 귀찮은 티를 내면서 도윤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희성의 방은 도윤의 방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신이 쓰게 될 방보다 더 넓은 방은 깔끔했다. 검은색의 침대 위로 이불도 베개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어쩐지 희성을 닮은 것 같았다.
‘넌 이 방에 언제든지 들어와도 돼.’
‘…왜?’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자격?’
‘내 침대에서 자도 되고, 내 방에서 공부해도 돼.’
‘…싫어.’
‘너는 싫은 게 뭐가 그렇게 많아?’
정말 몰라서 묻는 목소리였다. 도윤이 인상을 찌푸리곤 희성의 방에서 도망쳤다. 어차피 나가봤자 자신의 집이었으니 희성은 잡지 않았다. 이제 언제든지 문을 열고 나가면 집에 도윤이 있었다.
낯선 집에 들어 온 지도 벌써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커다란 저택 안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도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등하교의 모습도 달라졌다. 도윤은 희성과 함께 차에 올라 등교를 하고 하교를 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모두 도윤을 힐끔거렸다. 쟤 아침에 김희성이랑 같은 차 타고 학교 왔대. 마치고도 같이 간다던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말이어도 다 들렸다.
김희성이 뭐라고 갑자기 관심이 쏟아졌다. 전에는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더니 이제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입에 올리는 게 짜증 났다. 이제는 학교에서도 희성과 함께하고 집에서도 함께해야 했다. 희성은 도윤이 어딘가로 나가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나타나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도윤은 차마 집에 있기가 너무 눈치 보이고 답답해서 나가고 싶다는 말도 못 했다.
도윤에게 허락된 곳은 병원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오면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윤에게 주어진 자유였다. 아버지와 저녁을 먹는 시간에도 희성은 근처를 맴돌았다. 속이 답답했다.
오늘은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병원으로 왔다. 아무리 괜찮다고, 집까지 혼자 갈 수 있다고 해도 희성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기사를 쳐다보자 운전대를 잡은 기사도 어쩔 수 없다는 눈치였다. 기사와 도윤의 시선이 마주치자 희성이 같이 갈까? 하고 묻기에 얼른 다녀오겠다고 빠져나왔다. 병실에 들어와 한숨부터 쉰 도윤이 어머니의 옆에 앉아 침대에 이마를 박았다.
“엄마….”
“…….”
“엄마….”
돌아올 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다 알면서 애타게 불렀다. 도윤이 코를 훌쩍였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있었다. 손이 따뜻했다. 도윤이 손을 잡고 그 위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엄마, 보고 싶어요. 도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던 도윤이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민영이 덮은 이불 위로 도윤이 만들어낸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길을 만들었다. 엄마. 울음이 가득 섞인 거친 숨이 터졌다. 결국 도윤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쏟아졌다.
도윤이 없는 시간은 따분했다.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은 희성이 핸드폰을 뒤적이다가 앞에서 오십니다. 하는 목소리에 화면을 껐다. 도윤이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윤의 어머니는 여전히 사경을 헤맸다. 수술도 잘 끝났고 좀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차로 가까이 걸어오는 도윤을 좇던 희성이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서는 몸에 꼰 다리를 풀고 고개를 숙였다.
도윤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출발할까요? 희성이 의자를 두 번 탁탁, 치자 기사가 익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희성이 손을 뻗어 도윤의 볼을 잡아 올렸다. 병실에서 한참을 울어댄 탓인지 눈가에 발갛게 열이 올라있었다. 볼이 잡혀서 강제로 들어 올려진 도윤이 손목을 잡고 털어냈지만 희성은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눈도 빨갛고, 코끝도 빨갰다. 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아픈지 도윤의 입술이 벌어졌다. 더운 숨이 터졌다. 희성이 도윤의 붉은 입술을 보고 있자 앓는 소리를 내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동시에 울컥했는지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서러웠다. 도윤이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뒤로 뺐다.
“제발 좀…. 흑, 놔….”
“왜 울어.”
“아파, 아파.”
“왜 우냐고.”
“아프니, 흐윽…. 까….”
“하도윤, 왜 우냐고.”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희성의 손가락에 닿았다. 엄마가, 끅. 엄마가 너무, 너무 보고 싶어…. 도윤이 엉엉 울었다. 기사가 거울로 도윤을 힐끔거렸다가 희성과 눈이 마주치곤 급하게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도윤이 그대로 몸을 숙여 웅크렸다. 떨리는 널따란 등이 유독 작아 보였다. 희성이 손에 닿은 눈물을 보다 혀를 내어 그 위를 핥았다. 짰다. 희성이 떨리는 등을 천천히 쓸어주다 토닥여주었다.
도윤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울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우는 도윤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힐끔거리던 기사가 평소에 잘 틀지 않던 라디오까지 틀어주었다. 소리를 조금 높여도 희성은 별말도 없이 도윤의 등을 쓸어주기만 했다.
그 손길도 온기라고, 위로라고 도윤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지만 도윤은 여전히 울고 있었고 희성은 앞만 보며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기사는 난처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다가 희성이 먼저 올라가라는 말을 건네자 나중에 다시 내려오겠다며 차에서 빠져나갔다. 우는데도 저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 기사가 넥타이를 고치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훌쩍, 훌쩍. 시간이 지나자 우는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희성이 휴지를 뽑아주자 도윤이 끅끅거리며 휴지로 눈물을 콕콕 찍었다. 코나 풀라고 준 휴진데 눈물만 닦고 있다. 희성이 물끄러미 보다가 휴지를 더 뽑아 내밀었다. 도윤은 코가 꽉 막힌 목소리로 고마워…. 했다. 그 고맙다는 말도 웅얼거리는 바람에 고마어, 라고 들렸다. 희성이 슬쩍 웃었다.
“다 울었어?”
“으응….”
“더 울 거야?”
“…아니.”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희성이 손을 뻗어 볼을 잡아 올리자 도윤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눈물이 묻은 속눈썹이 예뻐 보였다.
“또 왜….”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도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희성이 다른 손을 뻗어 도윤의 눈가에 붙은 휴지조각을 떼어냈다. 킁. 도윤이 훌쩍거렸다. 그새 퉁퉁 부어버린 눈이 깜빡였다. 도윤이 손을 올려 희성의 팔을 잡아 내렸고 희성은 그 손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도윤이 머쓱하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원하게 울고 나니 드는 감정은 창피함이었다. 코를 먹는 소리가 차를 울렸다. 희성이 그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다시 얼굴을 잡아챘다. 강제로 돌아간 목이 아팠다. 도윤이 눈을 깜빡이자 희성이 무작정 달려들었다. 입술이 닿았다. 도윤의 눈이 빠질 것처럼 커다랗게 뜨였다. 희성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말캉한 입술이 닿고 놀라서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읍, 읍! 도윤이 희성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혀까지 섞은 사이가 됐다. 희성이 밀려난 자세로 입술을 혀로 쓸면서 도윤을 쳐다봤다. 도윤이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너, 너….”
“도윤아, 앞으로 우는 건 내 앞에서만 해.”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그렇게 생긴 얼굴로 우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
“너, 너 미쳤어?”
“넌 안 그럴 것 같아? 도윤아, 너도 곧 미치게 될 거야.”
희성이 차에서 내려 도윤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도윤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희성을 올려다봤다. 친절히 문까지 열어준 희성이 손을 뻗었다. 도윤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 손을 쳐내고 차에서 내렸다. 희성의 입술과 혀가 들어왔던 감각이 자꾸 생각나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자 희성이 실실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희성은 도윤과 키스를 했다고 생각했고 도윤은 희성에게 입술이 훔쳐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희성을 피해 다니려고 노력했으나 노력만 했을 뿐이었다. 도윤이 도망칠 만한 싹이 보이면 희성은 그 싹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희성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친 채 도윤의 방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학교가 끝나면 도윤의 가방을 잡고 차에 올랐다.
감히 자신의 첫 키스를 훔쳐 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분해서 말을 걸고 싶지가 않았다. 도윤은 희성과 함께 있게 되면 입을 꾹 다물었다. 학교에선 툭툭 건드는 손을 무시하기도 했고 급식도 최대한 고개를 숙여 먹었다. 덕분에 속이 답답해져서 소화제를 얻어먹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희성도 그런 도윤의 눈물겨운 노력을 봐주려는 듯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잠도 없는지 수업 시간에도 자기만 보더니 쉬는 시간이 되고도 자기만 쳐다보는 시선을 참지 못한 도윤이 벌떡 일어났다. 희성은 여유로운 얼굴로 도윤을 올려다봤다.
“어디 가?”
“…….”
“어디 가냐고.”
도윤이 희성의 말을 무시하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결국 희성이 손을 뻗어 도윤의 손목을 잡았다. 사람 좋은 얼굴로 손에 힘을 주자 손목이 아팠다. 도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장실 갈 거야.”
“화장실?”
“그래, 그러니까 좀 놔.”
“가지 마.”
희성이 웃었다. 가지 말라고 말하며 웃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윤은 그 입술을 보다가 급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희성에게 당했던 키스가 또 생각이 났다. 도윤이 급하게 손목을 탈탈 털었다. 희성은 그제야 손을 놓아주곤 도윤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귀엽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린 희성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시선들과 마주쳤다. 뭘 봐. 도윤을 보며 웃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냉랭한 얼굴만이 남았다. 희성의 한마디에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짜증 나게. 도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희성이 도윤의 필통을 뒤적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수업이 끝났다. 이제 야자를 할 사람들은 급식실로 갈 시간이었고 야자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도윤은 희성을 피해 야자를 하려고 했으나 희성은 도윤이 야자를 하면 함께 남아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꼭 감시 카메라 같았다. 도윤이 한숨을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고 힘없이 교문 앞에 섰다. 집에라도 혼자 가고 싶었지만 그게 제일 힘든 일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면 처음엔 당황하겠지만 곧 적응을 마치고 살아가는 동물. 희성이 뒤를 따라오다가 차에서 내리려는 기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정쩡하게 일어난 남자가 다시 자리에 앉았고 희성이 웃으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도윤은 결국 타게 될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일부러 가만히 서있었다. 희성은 또 시작이냐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타야지.”
“…나 그냥 버스 타고….”
“기사님이 너 데리러 오셨잖아.”
“…….”
“바쁘신 분이 너 하나 때문에 이렇게 왔잖아.”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고개가 희성을 향했다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다시 앞을 돌아봤다. 희성은 꼭 이렇게 사람 마음을 쑤시는 말을 하곤 했다. 도윤이 체념한 듯 차에 올라 가방을 끌어안았다. 도윤이 얌전히 차에 오르자 그제야 만족한 건지 희성이 옆에 앉아 문을 닫았다.
“병원으로 갈까요?”
“…아니요, 오늘은 집으로 가주세요.”
가방에 보물이라도 들었는지 양팔로 소중하게 안고 있는 꼴이 귀여웠다. 희성이 창문에 팔을 기대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쳤다. 도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열렬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창밖을 쳐다봤다. 날이 슬슬 추워지고 있는 터라 도윤은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가 길어서 손등을 다 덮고 있었다. 덕분에 가방을 안고 있는 손은 손가락만 보였다. 손톱도 단정하게 깎아서 손끝이 동글동글했다.
“앞으로 버스 같은 거 타지 마.”
“그럼 나는 어떻게 다녀?”
“집에만 있어.”
“…싫어.”
“학교랑 병원 아니면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왜?”
“왜 이렇게 같은 말을 하게 만들지….”
“…뭐가?”
“도윤아, 나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는 거 싫어한다고 했잖아.”
“…….”
“집에만 있어.”
“…내가 무슨 물건이야?”
“도윤아.”
“…으응.”
가방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윤이 다시 창밖을 보면서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런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희성이 소리 없이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초록색으로 가득하던 나무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있었다. 가을은 짧으니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 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