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언터쳐블 (4)
사흘째의 아침에 션은 깨우는 이도 없이 번쩍 눈을 떴다. 시계를 보자 아직 아침 8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다. 사실 일찍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제 술을 마시고 늦게 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른 기상이다.
라운지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식 뷔페가 차려져 있었고, 맥과 준형, 옐레나가 나와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다들 한밤중처럼 퍼 자고 있는데.”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 생겼어?”
“네, 약간. 개인적인 일입니다. 잘 잤어요, 옐레나?”
“형식적인 질문은 그만두게. 오히려 기분이 나쁘니.”
“미안합니다.”
그러면서도 벙글거리는 것을 자제할 생각도 없이 환한 웃음을 흩뿌리며 션은 접시에 먹을 것을 챙겼다. 맥이 그를 손가락질했다.
“저 얼굴을 분명히 본 기억이 있는데. 공작이랑 싸웠다가 화해를 했을 때였어.”
“모로 봐도 화해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지, 저건.”
“했구먼, 했어. 전화? 화상? 사진?”
“시끄러워요. 묻지 마세요.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짐작도 하지 말고. 성희롱입니다.”
션은 미리 일침을 놓고는 느슨해지려는 입을 매만져 억지로 굳혔다. 그리고 타이머가 다 돌아간 토스트기에서 노릇해진 식빵을 꺼내면서 물었다.
“머레이 씨는 아직 안 일어났지요?”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옐레나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화가 나 있는 게 아직도 역력하여 션은 조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특별히 죄지은 것도 없으므로 평이하게 대답했다.
“부탁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오, 그 사적인 부탁이라고 하는 조건, 미리 생각해둔 게 있는 거였어?”
“기대하지 말아요, 맥. 진짜로 사적인 거니까.”
“어디 가? 접시 들고?”
“방으로요. 짐 싸러 갑니다.”
“짐? 벌써 가려고?”
“점심 전에 출발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뭐 용건 있어요?”
맥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션은 춤추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방으로 되돌아갔다.
아침을 대강 입에 욱여넣으면서 션은 트렁크를 싸고, 커피로 나머지를 모조리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로건과 전용기 파일럿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전후에 출발할 수 있게끔 부탁하고 나서야 로건에게 점심을 사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뭐, 상관없을 것이다. 런던에서도 점심 약속은 잡을 수 있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이토가 깨어 있었다. 아침부터 어디 가느냐고 놀라서 묻더니, 오늘의 계획을 알려 주자 신나는 얼굴로 동행을 요청했다. 어차피 잠깐 뭘 사러 갔다 올 뿐인데, 전문가가 함께 가 준다면 나쁠 건 없다.
그리고 목적하던 품목과 장미 한 다발을 사서 다녀왔을 때는 고맙게도 목적하던 마리아 조제가 깨어나서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마를린과 마야도 함께 말이다. 션은 마를린의 뺨에 키스하고, 마야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리아 조제는 싫은 얼굴을 했지만, 별수 없이 션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침부터 어디에 갔다 왔어요? 예쁜 꽃이네?”
“잠깐 살 게 있어서 말이죠.”
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장미 한 송이를 뽑아서 마를린에게 건넸다. 그녀가 꽃향기를 맡고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고마워요.”
그는 마야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마리아 조제에게도 한 송이씩 꽃을 건넸다. 그리고 세 사람이 카드를 들고 있는 것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마를린은 눈이 보이지 않을 테니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카드 점이에요. 션도 한 장 뽑아 봐요.”
마를린이 카드를 내밀었다.
“예언 능력자가 치는 카드 점이라니, 무서워서 뽑을 수가 없군요.”
“뽑아 봐요. 어차피 재미 삼아 하는 거니까. 정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리스트레인 룸 안이잖아요. 확률은 반반이죠.”
“카드 점이 맞을 확률이 반이라는 건 엄청난 거 아니에요? 확률이 문제가 아니라 맞으면 진짜로 예언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아니라는 건 아니죠. 그냥 마를린이 매년 해 주는 덕담이에요.”
이토가 끼어들어서 쓱 한 장을 뽑았다. 손때 묻은 카드는 리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타로 카드 같은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 그림이 수 놓여 있었다.
“휘유. 들국화네요. 뭐 좋은 거예요?”
“올해에는 일하는 데 장애물이 생길 것 같군요, 나오코. 막히는 일이 있으면 손을 놓고, 포기하면 상쾌할 거예요.”
그것 보라며 이토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션도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런 말은 누구에게라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포기하면 상쾌할 거라는 건 덕담인지 잘 모르겠군요.”
“나야 뭘, 보이는 대로 말할 뿐인데.”
“막히는 일을 포기하면 상쾌하긴 하겠죠. 인생의 진리 아닌가요?”
마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션은 다시 마를린에게 재촉받아 카드를 뽑았다. 카드에는 푸른 색실로 놓인 장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아하. 이건 정말로 쓸 만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푸른 장미에 뭔가 특별한 뜻이라도 있습니까?”
“이제까지 불가능을 의미하는 카드였지만, 앞으로는 가능해지리라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지는 일이 세상의 변화 때문에 가능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하세요.”
“음.”
“그리고 오늘 꽃은 리시안셔스로 하세요. 장미는 이미 있으니까.”
먼저의 이야기는 역시 일반론이었지만, 지금 들고 있는 장미만이 아니라 꽃을 더 살 예정이라는 것을 들켜 버려서 션은 얼굴이 붉어졌다.
마를린이 기념으로 가지라며 푸른 장미 카드를 그에게 주었다. 그 카드를 손수건으로 싸서 안주머니에 넣고, 그는 마리아 조제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마리아 조제는 기분 나쁜 듯이 흠칫 몸을 굳혔지만, 어제의 일이 있어서 일어서지 못했다. 이토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의자를 끌고 왔다.
“뭐야, 무슨 용건이야?”
“어제 말한 이야기입니다만, 그 부탁, 오늘 바로 하려고 합니다.”
“무슨, 부탁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만, 들어주고 싶지도 않은 마리아 조제가 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의 물성 변화 능력은 종류에 상관없이 사물의 상태를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꽃도 가능합니까?”
“꽃을?”
그녀가 놀라면서 션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장미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션은 들고 온 작은 쇼핑백을 풀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꺼내 놓았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여러 개 들어 있는 주머니와 세라믹으로 만든 거푸집도 내놓았다. 그리고 자기 왼쪽 약지에서 반지를 뺐다.
“이것과 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데, 금으로 된 부분을 다이아몬드로 대치하고, 다이아몬드 부분은 장미로 만들 수 없을까 해서. 당신의 능력이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잡지를 펼친 채 무관심한 척하는 얼굴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귀만 기울이고 있던 옐레나와, 뭔가 심각한 의논을 하고 있던 맥과 아타 파닌이 동시에 일어서는 바람에 지익 의자 미는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잠깐, 지금 머레이에게 목숨 값 대신 받겠다는 게 고작해야 반지 만드는 일인가?”
옐레나가 반쯤 소리를 질렀다. 아타 파닌은 도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맥은 완전히 흥미진진 반짝반짝한 얼굴로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건너왔다. 마야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부탁이실 거라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와, 이게 무슨 배포야? U급 GFG로 반지를 만드느니 차라리 이 사이즈의 다이아몬드를 사서 반지 모양으로 깎는 게 더 싸게 먹히지 않겠어?”
“제가 제 기회를 어떻게 쓰던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옐레나 씨, 사람의 인생에 결혼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게 있기는 합니까? 남은 삶을 몽땅 거는 건데?”
“아니,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소인배라니까.”
아타 파닌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보고 있던 보고서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가능한지 아닌지만 알려 주십시오, 머레이 씨.”
“아니, 불가능, 하지는 않은데…….”
마리아 조제가 거의 쩔쩔매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거, 상징물, 이잖아? 게다가 헤리퍼드 공작에게 주는 거라면, 그……. 화제가 될 텐데?”
“디자이너에게는 이미 양해를 구했습니다. 거푸집도 그쪽에서 보내 준 것이고요. 한 번 사진을 찍어서 카탈로그에 싣도록 허락만 해 주면 얼마든지 만들어도 좋답니다.”
“그거야말로 더 큰 일이잖아. 비공개로라면 모를까 공개적으로 공작을 위한 상징물을 만들 수는 없어.”
“그 정도의 부담감은 있어야 보상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닙니까?”
션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게 무슨 머레이 씨와 헤리퍼드 공작가 사이의 상징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제가 더 곤란합니다.”
마리아 조제는 조금 더 머뭇거렸다. 마야가 생긋 웃었다.
“카탈로그에 이름을 표기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요? 물성 변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마리아만인 것도 아니니까. 장미를 다이아몬드로 만들 수 있는 건 마리아 말고는 없겠지만, 굳이 제작 과정을 공개할 필요도 없고.”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 조제가 소극적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로 이런 걸로 되는 거야?”
“음. 장미가 나중에 썩어 버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분자 단위까지 분해해서 재조립하게 되니까 상관없어. 오히려 썩을 만큼 생체 구조를 남겨 놓을 수 없다는 점에 능력의 한계가 있는 거니까.”
마리아 조제가 그의 손에서 주머니를 받아서 안에 들어 있는 다이아몬드를 모조리 손바닥에 쏟았다. 맥이 그중 하나를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투명도가 높은 게 꽤 비싸 보이는데. 네 돈으로 살 수 있었어?”
“통장 다 털었으니까 묻지 마세요. 작은 걸로 산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니까.”
“하지만 반지로 만든 후의 가치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겠군. U급 GFG로 만든 통짜 다이아몬드 링에 장미라.”
이토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테두리에 물리는 건 내가 해 주려고요. 겸사겸사 강화도 해 줄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로맨틱한 반지가 되겠죠. 아, 션, 내 이름은 카탈로그에 넣어도 상관없어요.”
마리아 조제의 손 안에서 다이아몬드가 주르륵 흘러서 거푸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는 장미. 한 다발의 장미가 조그만 다이아몬드 사이즈로 응축되어 가는 것을 사람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션은 깨알만 한 심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상한 감흥을 느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이다. 이토의 플라스틱 권총이나 무기들이 그런 것처럼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 되리라. 엘리엇의 손가락에 끼워 주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자란 느낌이 든다. 심장의 피를 모조리 뽑아내어 그를 적시기 전에는 이 마음을 다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의 손가락에 어울릴까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다. 피보다는 꽃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장미가 어울린다고 말해 주니까. 그렇게 보아준다면, 언제나 그의 앞에서는 꽃 같은 상태로 있고 싶었다.
* * *
런던 시티 공항에 헤리퍼드 전용기가 착륙한 것은 오후 2시의 일이다. 션은 파일럿에게도, 로건에게도 저녁까지 자기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고 택시를 잡았다.
캐번디쉬 광장에 차를 세우고 꽃집에 들른다. 그는 마를린의 충고를 떠올리고 백합이나 장미를 사는 대신에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한 아름 샀다. 엘리엇에게 꽃을 완상하는 감수성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션은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것만큼이나 자주 꽃을 안겨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아마도 한 번 보고 조금 난처한 듯한 웃음을 띠거나 무덤덤한 얼굴로 “고맙다.”라는 형식에 가까운 감사의 말을 할 것이다. 션은 그래도 서운하거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꽃을 주고 싶은 것은 언제나 자기 충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그 자신이 과연 그만큼 꽃을 좋아하느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참으로 이상한 충동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한 나머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여는 대신에 벨을 눌렀다. 엘리엇은 가끔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벨을 누른 적이 있는데, 션도 그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 열고 들어가도 상관은 없지만, 열어 주는 것이 기분 좋다. 좁은 현관에서 마주 보면 한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엘리엇도 틀림없이 자각은 없어도 그런 기분이라서 벨을 누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션은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현관 너머의 인기척을 기다린다.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가 들리고, 곧 엘리엇이 현관을 열었다. 션은 꽃다발을 내밀면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아.”
한 아름 안기는 큰 꽃다발에 엘리엇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당혹은 평온으로 바뀌고 그는 언제나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만 지은 채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고맙네.”
그것은 션이 생각하던 그대로의 표정과 목소리였다. 그래서 션은 꽃다발째로 엘리엇을 껴안고 뺨에 키스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꽃 같은 건 사 올 필요 없었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어차피 정리하여 꽃병에 꽂는 것도 자신이 될 테지만 말이다. 건네고 엘리엇이 받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35파운드나 되는 돈을 쓸 가치가 있는가 하면, 그는 언제라도 ‘그렇다.’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엘리엇이 미소하며 “고맙네.”라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션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션은 그의 곁에 다가앉아 손을 마주 잡고 다시 한번 뺨을 마주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엘리엇의 체취에 코롱 냄새가 섞여 난다. 그는 그 향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물속에서 갓 땅 위로 올라온 척추동물처럼, 이럴 때마다 그는 폐가 자기 갈비뼈 속에서 새로이 생겨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곤 했다.
같이 살고 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한다. 엘리엇의 방에서도, 자신의 방에서도 그저 문을 닫고 잠그면 단둘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여기만은 특별하다. 처음으로 엘리엇이 그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함께 뭔가를 먹었고, 마셨고, 아침까지 함께 보냈었으니까.
그를 위해서 요리를 만들 수도 있었고, 그를 위해 신문을 사고 시가에 불을 붙여 주기도 했고, 싸움도 했었다. 지금도 션은 이 집에서 그를 보면 낯설고 행복하고, 또 가장 절실하게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실감을 느끼곤 했다.
엘리엇이 난감한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보고 싶었어요.”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말일세.”
“일부러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무한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뺨 언저리에 몇 번이나 입술을 대고, 미끄러뜨려 가볍게 키스한다. 죽은 자가 살아나기 위해 생명을 받아들이듯이 그가 내쉬는 숨결, 그의 생명이 내보내는 것들을 들이마신다.
“하, 음.”
길어지는 키스에 엘리엇의 입술에서 달콤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목덜미에 입 맞춰 보자 비누 냄새가 났다.
“씻은 지 얼마 안 되셨군요?”
“자네가 온다고 했으니까. 어제……. 그런 통화를 하고 나서 급하게 오겠다고 한 거니까 바로 그럴 생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일단 다른 계획이 있긴 했는데 말이에요.”
“무슨 계획?”
“엘리엇 씨에게 잔뜩 키스하고, 음, 그다음에는 같이 시장을 보러 가서.”
말하는 도중에 엘리엇이 뺨을 끌어당겨 한 번 더 입 맞춰 버렸기 때문에 션도 이내 포기하고 도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 두 번째 키스가 끝났을 무렵에는 원래의 계획 따위는 둘 다 머릿속에 없었다.
카디건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얇은 셔츠 위로 체온을 느낀다. 입천장을 혀끝으로 긁으며 더 깊이 입술을 겹치자 엘리엇이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션은 그대로 허리를 받치면서 그를 소파에 눕혔다.
“음. 지금 여기서?”
흐트러진 금발을 어루만지면서 션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마며 관자놀이, 눈가와 뺨에 입술을 누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싫어요?”
“싫을 리가 있는가. 어제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얼마나 곤란했었는데.”
엘리엇이 대답하면서 션의 벨트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안에서 나온 속옷은 예전에 리암이 그의 생일 선물로 보냈던 세 가지 속옷 중의 하나로, 페니스만 겨우 가려지는 설탕 재질의 하얀 티백이었다.
“자네, 이거.”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자네의 계획이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는지 알 만하군. 입안자부터 실현할 생각이 없었으니.”
션이 얼굴을 붉혔다. 엘리엇은 그의 다리 사이에 깔린 채로 손으로 부풀기 시작한 그것을 가볍게 손에 담았다.
“단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엘리엇 씨.”
“기꺼이 맛있게 전부 먹어 주겠네.”
션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뒤는 떨리는 숨소리와 작은 웃음만이 키득거리고 서로의 피부를 스쳤다.
샤워 소리를 들으면서 엘리엇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잠깐 잠이 들어 버렸던 것 같다. 배도 고프고, 졸렸다. 씻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꾸물꾸물 움직여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엉덩이에 젤이 말라붙은 것이 신경 쓰였다.
곧 샤워 소리가 멈췄다. 션이 커다란 타월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 깨셨어요?”
“음.”
“엎드려 보세요. 닦아 드릴 테니까요.”
엘리엇은 허리를 돌려서 완전히 엎드렸다. 션이 시트를 걷어 내고 타월을 그의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덮었다. 따끈따끈한 물로 적셔져 있어서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소리 내시면 또 덮칠 거예요.”
“무서운 말 말게. 난 벌써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게 걱정인데. 평일에는 이렇게까지는 곤란하다고 몇 번이나……. 음. 거기 기분 좋아.”
“엘리엇 씨가 은퇴하실 나이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큰일인데요.”
“은퇴할 나이까지 이렇게 할 수는 없지.”
땀을 흘린 뒷목부터 등과 허리를 지나 엉덩이와 다리 사이까지 꼼꼼히 닦고, 그가 한 장의 따끈따끈한 수건을 엉덩이에 얹어 주었다. 혹사당한 터라 찜질이 기분 좋았다. 션은 잠시 그를 혼자 놔두고 이미 사용한 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가 새 수건을 몇 장 더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다시 한번 등을 닦아 주고 그를 돌려 눕힌다.
엘리엇은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로 그가 목덜미와 가슴팍을 닦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여러 번 빨린 유두가 부어서 수건이 스치자 조금 민감해진 채로 엘리엇은 숨을 들이마셨다.
“유혹하시면 안 돼요.”
“이게 유혹이라면 24시간 나는 자네 밑에서 울고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체력만 따라 준다면 그러고 싶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서 손톱 밑과 발뒤꿈치까지 닦아 주는 손길에 몸을 맡기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원한다면 사람을 시켜 이런 서비스를 받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테지만, 게으르게 남에게 몸을 맡기는 것 자체가 행복감을 느끼는 원인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션의 손바닥에서부터 전달되어 오는 체온 쪽이었다. 몸을 물들이는 상냥함이나 배려도.
온몸을 꼼꼼하게 닦고 나서 션이 그를 일으켜서 비키게 한 후에 시트를 바꿔 깔았다. 그리고 도로 엎드리게 했다. 엘리엇은 무기력한 환자처럼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등허리와 엉덩이에 로션을 발라 주무르는 손길에 저절로 갈라진 목소리로 신음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원래 계획이라는 건 뭐였던 건가?”
“음. 시장을 봐다 가 뭔가 만들 작정이었죠. 저녁 만들어서 먹고, 와인 한 잔 마시고, 그다음 침대에서.”
속삭이듯이 말하고 션이 가볍게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순서가 바뀌었네요.”
“지금은 벌써 시간이 늦어 버렸을까?”
“아직 저녁 시장을 보기에 늦지는 않았어요. 피곤하실 테니까 저 혼자 다녀올게요. 생선 어떠세요? 생선찜 요리에 도전해 볼까 하는데.”
“생선도 좋지만.”
엘리엇은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것보다는 그냥 자네랑 누워 있고 싶은데.”
“그럼 잠드실 때까지 옆에 있어 드릴게요. 잠깐만요. 옷만 정리하고 올 테니까.”
로션을 제자리에 치우고, 션이 거실로 나갔다. 그러는 동안에 엘리엇은 멍하게 침대에 누워서 달콤한 온기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며 초조감을 느꼈다.
션이 옆자리로 기어들어 왔다. 엘리엇은 고개를 움직여 그의 어깨를 베고 누웠다. 나른하고 느긋하게 서로의 손등을 쓰다듬는다. 시곗바늘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에 진짜 휴식이 몸과 마음 위로 내려앉았다.
션은 엘리엇의 머리를 가만히 한 번 쓰다듬고, 머리칼에 입술을 누르며 팔로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해 질 녘에 만나서 함께 시장을 보고, 직접 뭔가를 만들어 먹고, 서로 끌어안고 잠든다. 고작해야 그 정도의 시간을 내는 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엘리엇이 어려운 시간을 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도 정말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자신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던 리암의 그 말도, 이제야 진심으로 가슴에 스며들어 폐부를 아프게 했다.
“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엘리엇이 의아하게 물었다. 션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다시 한번 입 맞추었다.
“그냥요. 엘리엇 씨가 너무 좋아서요.”
엘리엇이 또다시 곤란한 얼굴이 된다.
션이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고는 왼손을 끌어당겼다. 엘리엇은 의아하게 그에게 손을 내주었다. 션이 손에 숨겨 가지고 있던 반지를 끼워 주었다.
“아.”
자신이 그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다. 백금의 자리에는 금, 금의 자리에는 다이아몬드가 들어가 있었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던 자리에는 붉은 벨벳처럼 보이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남자의 반지이므로 매일 끼기에 부담이 없도록 일부러 투박한 디자인을 고른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기본이 되는 지환이 통짜 다이아몬드가 되자 다소, 사실, 지나치게 화려해 보였다.
“자네가 내 반지를 빼간 건 사이즈를 늘리기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세트인 편이 좋잖아요. 결혼반지 대신도 쓸 수 있고. 그리고 그 반지는…… 솔직히 엘리엇 씨한테 너무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리암도, 준형도, 심지어 콕스 총리조차도 어이없는 얼굴로 이런 반지를 고르다니 눈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고개를 저었었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 반지는 엘리엇의 손가락에는 너무 가늘었다.
그래도 엘리엇은 별 불만 없이 그 반지를 끼고 다녔다. 션의 손에서 직접 건네받지 못했다든가 16만 파운드를 주고 되샀다는 것도 그다지 불만을 가질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샤워할 때 빼기 어렵다는 것이 유일한 불만이었다.
“자네 보기에도 어울리지 않던가?”
“놀리셔도 괜찮아요. 리암 경에게도 이미 실컷 들었고요. 눈짐작을 그렇게 못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엘리엇 씨 손이 너무 예쁘니까 가늘어 보였나 봐요.”
“그런 이야기는 아닌데 말일세.”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었다. 디자인은 그렇다 치고, 사이즈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션의 눈이 이상하다는 알버트나 리암의 말에 반박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전혀 동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반지는 좀 부끄럽기도 했고요.”
“자네가 처음 청혼하려고 했을 때 샀던 반지 아닌가. 그런데도 부끄러운가?”
“제가 아무것도 몰랐구나 하는 마음도 있고요. 그리고 그때 엘리엇 씨를 덜 사랑했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훨씬 훨씬 더 많이 사랑하니까. 마음이 커진 만큼 다른 것으로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반지, 여기에도 녹여서 넣었어요.”
그는 엘리엇의 손을 끌어당겨 반지 위에 키스했다.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럴 리 있겠는가. 조금 의문으로 생각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새로 줄 거라도, 그건 남겨 두었으면 좋았을걸.”
“전 굉장히 복잡하거든요. 그걸 엘리엇 씨가 늘 끼었으면 하는 마음과 너무 부끄럽다 하는 마음 두 가지요. 그러니까 이해해 주세요.”
“그래…….”
엘리엇은 부드럽게 말하고 몸을 돌려 션과 마주하며 그의 뺨을 반지 낀 손으로 어루만졌다. 션이 그 손을 끌어당겨 또다시 손등에 키스했다.
“이런 통짜 다이아몬드는 구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사실 제가 그런 다이아몬드를 구할 만큼 돈이 많지는 않죠. 머레이 씨에게 부탁했어요. 특수 변화계의 U급 능력자요.”
“그렇군. 다이아몬드에 홍옥이라니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건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안 어울리긴요. 그리고 커팅 같은 것도 없어서 특별히 빛나지도 않잖아요?”
반지 위에 다시 한번 키스하고 엘리엇을 추어올려 더 편안하게 품에 안고는 션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요.”
“응?”
엘리엇이 졸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식은 언제 올려요?”
“글쎄. 우선 자네가 동성 결혼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킨 후에,”
“조만간 되겠죠. 제가 상원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그것 말고 또 뭐가 필요해요?”
“국교회의 견해도 바꾸어야 하겠지. 완전히 돌려세울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대대로 헤리퍼드 대성당에서 대주교님의 집전으로 혼인 성사를 해 왔는데…….”
“…….”
“설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걸세.”
“절 놀리고 계시는군요. 뭐, 괜찮아요. 앞으로 한 10년쯤 너끈히 버틸 수 있어요. 갈 길이 멀어도 같이 가는 거니까.”
엘리엇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키스해 오는 션의 입술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션이 그의 손에 깍지를 끼어 잡았다.
“사랑해요.”
“나도 그렇다네.”
그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고, 같은 말을 다시 귓가에 한 번 반복해 주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