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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언터쳐블 (3) (51/52)

외전. 언터쳐블 (3)

다음 날 아침에도 션은 누가 문을 두드려서야 깨어났다. 우선 노크 소리에 눈꺼풀을 들고, 엎드린 채 베개를 끌어안고 여기가 어딘지를 기억해 낸다. 숙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졸린지. 지하 벙커 안의 클럽하우스에서는 기계장치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밤낮을 구분할 수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기상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 늦게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려나, 하고 멍하게 생각하면서 잠긴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자고 있어, 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처음 보는 얼굴의 청년이다. 20대 전반이나, 많이 잡아야 중반일까. 페이보다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션은 일어나다 말고 자신이 반라인 것을 깨달으며 당황하여 시트를 끌어당겼다. 청년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누구십니까?”

“응? 아.”

청년이 제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처음인 거로군.”

“처음?”

“만난 거 말이야. 나는 음, 하나, 둘……. 열여섯 번째야.”

그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세어 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션은 이번에도 “뭐가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도 똑같았다.

“만난 거 말이야. 아, 처음이면 인사를 해야 하지? 어떻게 하더라?”

그가 조금 헤매다가 마치 무도회에서 만난 상대에게 춤이라도 신청하듯이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팔을 저었다. 그리고 션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게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누구십니까?”

경계심을 퍽 잃어버린 채로 션은 물었다. 그리고 일단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청년은 아예 악수를 모르는 것은 아닌 듯, 약간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션의 손을 잡았다.

“음. 만나서 반가워. 이 말이 맞지? 탭이야.”

“아. 시간 이동을 한다는!”

션은 깜짝 놀라 감탄사를 흘려 냈다. 탭이 귓가를 긁적였다.

“새삼스럽네. 지금이 몇 살 때지?”

“올해 생일에 서른셋이 됩니다.”

그가 다시 손가락을 꼽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요새는 영 시간 축이 헷갈려서. 라운지에 밥 준비되어 있어. 다들 일어났어.”

“아, 고맙습니다.”

“뭐가?”

“뭐가, 라뇨?”

“고마울 일이 없잖아. 내가 킹크랩 샌드위치를 가져다준 것도 아닌데. 아하.”

탭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서른세 살이니까.”

션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는 혼자서 납득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침대에 앉은 채 션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자다가 옷을 벗을 만큼 더웠던 탓에 땀을 흘린 머릿속이 갑갑했다. 그는 시트를 걷고 일어서서 샤워부터 하러 들어갔다. 생일이 안 되었으니 아직 서른두 살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정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라운지에는 간단한 조식 뷔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탭은 ‘다들 일어났다’라고 말했지만, 라운지에 나와 있는 멤버는 준형과 사니아, 탭 본인뿐이었다. 자기만 식사에 늦었는가 싶어 급하게 나섰던 션은 억울한 기분이 된 채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잘 잤어요?”

“실내 온도가 좀 높은 것 같더군요. 탭……이 다들 일어났다고 하는 것 같던데.”

“음. 일어날 사람은 다 일어난 게 맞을 거야. 아드난은 숙취인 것 같고, 옐레나는 마리아 조제를 감시 중이고, 마를린은 언제 일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나오코 씨는 옐레나와 교대하자마자 자러 들어갔고, 맥은 부재중.”

“어쩐지 저만 한가한 것 같군요.”

“널 한가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지금 네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 맥은 죽고 싶은 기분일걸.”

“마야는 어땠습니까? 언제 돌아왔어요?”

“오늘 새벽에. 마야 쪽 사람이 와서 교대했어. 깨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쇼크가 심한 모양이라서, 마음 다잡으려면 조금 걸릴 것 같아. 동종 계열 페널티라니, 상상도 안 가는군.”

“준은 단순 지각계이니까요. 페널티 같은 건 안 받잖아요?”

“섬세한 능력이 아니라서 이럴 때는 다행이라니까. 밥 먹어야지.”

“커피부터요.”

션은 일어서서 바에서 커피부터 뽑았다. 요리사는 따로 없지만, 조식 뷔페는 갓 만든 듯한 음식으로 전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빵과 소시지를 몇 조각 가져와 자리에 앉으면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공조기 말인데요.”

“아. 그거. 마를린 때문에 난방을 해서 그럴걸.”

“실내 온도를 방마다 맞출 수가 없어요. 설비 자체가 워낙 옛날 거라서요. 하지만 이 지하에 있는 벙커를 뜯어내고 재공사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늘 밤에도 벗고 자는 신세가 될 것 같다고 션은 생각했다.

“아침 먹고 나면 뭐 할 거예요?”

“글쎄요. 아무 계획도 없으니까. 잠깐 쇼핑이나 하러 갈까 생각 중이긴 합니다.”

“뭐 사러 갈 건데요?”

“중요한 물건이요.”

“뭔데 그래요?”

“엘리엇 선물이라도 사러 가는 거겠지.”

“그 문제로 그러고 보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제이 씨.”

“으응?”

“말도 안 되는 폭리를 취하셨더군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그건 예전에 그가 엘리엇에게 주려고 샀던 프러포즈 링 이야기였다. 한 번 손가락에 끼워 보고 맞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자선 가게에 기부해 버렸던 그 반지 말이다.

엘리엇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션은 부끄러움에 타 죽을 뻔했다. 그는 이제 와 무어 부끄러워할 일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엘리엇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짐 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떼를 쓴 것도, 제 욕심에 그를 죽일 뻔하고서도 포기하지 못한 채 그 손에 반지를 끼워 봤던 일도 부끄러웠다.

그 반지를 기부해 버렸을 때는 수많은 물건들에 파묻혀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다.

“내가 뭐? 거래는 수요 공급이 일치하면 발생하는 거잖아.”

“그래서 보석상에서도 신품으로도 1만 5천 파운드였던 물건을 자선 가게에서 7천 파운드에 사서 엘리엇에게 16만 파운드에 파셨다는 겁니까?”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양심적인 가격이었지. 백지수표를 줬는데 그거만 쓴 거야.”

준형이 매우 즐거운 태도로 검지와 중지를 까닥거렸다. 샀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어떻게 샀는지는 몰랐던 션은 반쯤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16만 파운드가 청구되었다는 것도 이자벨을 찔러서 알아낸 일이다.

“산 사람에게는 충분히 그 가치가 있었다는 이야기잖아?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안에 새겨진 각인을 보더니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바로 백지수표를 끊어 주더라고. 역시 투자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니까.”

“……당신, 엘리엇 씨가 나랑 다시 만나는 거 반대 아니었어요?”

“그건 친구로서고, 장사는 장사지. 어차피 네 손을 떠난 물건인데 누가 사고팔든 상관없잖아?”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었다. 션이 말을 잃고 있자 사니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무슨 이야기예요?”

“프러포즈 링. 이 녀석이 처음에 샀던 건데, 이래저래 일 있어서 처분해 버렸던 걸 내가 회수했거든. 고맙다는 인사는 못 들을망정 욕먹을 일은 안 했어. 기뻐하라고. 네 반지에 백지수표를 매겨 줬다는 건데.”

“그건,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션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은 지금 그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다. 사이즈가 작았기 때문이다. 조금 늘리긴 했지만, 약지에 낄 만큼 늘리려면 각인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말에 그러면 됐다며 그냥 새끼에 끼었다.

션은 그 반지를 돌려받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사이즈도 맞춰서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약지에 끼워 주고 싶었다. 그것을 살 때 자신의 마음이 지금보다 못하다든가 최선을 다해 고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손에서 놓아 버렸던 그 반지가 마치 자신의 약하고 어리석은 마음처럼 보여서 볼 때마다 가슴을 쿡쿡 찔리는 듯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자신이 처분한 것을 준형이 되찾아서 엘리엇이 16만 파운드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되사다니.

마를린이 일어나 나온 것은 그때였다. 간병인이 휠체어를 밀고 나왔다. 소시지를 우물거리면서 소파에 늘어져 있던 탭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들 잤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늘 그렇지 뭐. 늙어서 그런걸.”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습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특별히 쓰러졌다기보다는 요즘 하루에 눈뜨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어서. 혼자 있으면 금세 잠들어 버리거든.”

“아무 일 없으시니 그저 다행입니다.”

션은 다정하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쥐었다. 마를린이 주름진 입매를 우물거리듯이 움직여 웃었다.

“기분은 어때요? 피곤하진 않구? 악몽을 꾸었을 것 같은데.”

“아뇨. 푹 잤습니다. 음. 식사는?”

“오늘은 이미 하셨습니다. 식단을 관리받고 계셔서 따로 하세요.”

간병인의 대답에 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마도 묽은 수프나 조금 넘기는 정도일 것이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외할머니의 손이 이렇게 가늘고 약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보다 손이 커졌기 때문인지 더 약하게 느껴졌다.

“일기예보에 날씨가 맑다던데, 괜찮다면 산책이라도 할까요?”

“저야 좋습니다. 의사만 허락한다면요.”

“볕은 자주자주 쬐라고 듣고 있으니까. 이런 미남하고 데이트하는 게 건강에 나쁠 리가 없잖아요?”

“아, 뭔가 엄청나게 억울하고 분한데요. 저도 미남과 데이트하고 싶어요.”

“임자 있는 남자와 데이트할 수 있는 건 늙은이의 특권이지요.”

마를린이 방글방글 웃었다. 션은 “마를린의 데이트 신청이라면 언제든지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간병인 대신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섰다.

바깥은 화창하니 햇살이 아주 좋았다. 녹아 버린 라운지는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가구도 그대로 남아 있고, 대신 임시로 큰 차양막을 쳐서 그늘을 드리워 놓았다. 널찍한 정원에는 봄다운 연초록빛이 감돌았다.

리스트레인 룸에서 빠져나온 것에 약간의 해방감과 막막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시각도 차츰 평소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션은 불쾌감은 느끼지 않았다. 정원에는 그와 마를린뿐이었고, 그녀는 마치 솜사탕처럼 온화한 연분홍색이었다.

션이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세상을 안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인 채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는……. 그런 기억이 났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마를린의 휠체어를 밀고 정원으로 향했다.

“절반밖에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언제나 포근했던 외할머니에 대해 떠올릴 때도 그녀는 세상을 몰랐던 거라며 오만한 생각을 하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을 뿐이다.

“어릴 때는 제 삶만큼 깔깔히 느껴지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나라도 예외는 아니에요.”

“그러셨을 것 같지 않은데요?”

“그랬어요. 그냥 다정히 말 한마디 해 주면 되는 일에조차도 그러지 못하고 툭툭 내뱉기 일쑤였고. 희망도 많고, 절망도 많고,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에도 절망하고, 끝나지 않을 일에도 괴로워하고, 그런 만큼 숨쉬기도 힘들었거든. 사실 좋은 시대도 아니었고.”

“맥에게 늘 듣고 있습니다.”

“그 영감쟁이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 혼자 힘들지.”

마를린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무얼 말씀입니까?”

“페이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건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편지를 보내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이, 생각 없는 행동이라는 것조차 모른 채 아까운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을 겁니다.”

“자기 사람, 자기 가족, 자기 나라를 우선 위하는 일이 나쁘다고 누가 하겠어요? 당신의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고, 좀 더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굴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고 있습니다.”

“선한 이유로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 할 수 없어요. 책임을 묻고자 했다면, 중국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사람을 보내어 핍박했던 사람 모두에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옐레나도, 사니아도, 이토도, 모두 당신의 자비에 기대어 살아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답니다.”

“과대평가하신 겁니다. 전 그저 안전을 추구했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맥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맥이 과소평가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예언 능력자의 말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바싹 마른 가지 같은 어깨가 흔들렸다.

“페이에게 당신은 은인이 되었을 테지요.”

“음. 그렇게 페이가 생각하고 있기는 합니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할 거예요. 앞으로 그런 일이 점점 많이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고요. 나도, 맥도, 옐레나도, 마야까지도, 이유는 각각 달라도 모두 페이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그저 제 능력의 종류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적은 리스크로 그를 도울 수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득이 되니까 한 일이었지요.”

“그 애의 사연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손을 선뜻 내밀었을까?”

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해는 있었다. 그러나 그 이해가 동정과 교감을 가져다주었는지, 아니면 손익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는지를 말하자면 이 자리에서 확고하게 어느 쪽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라면 마를린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해당하지만, 후자라면 그녀의 과대평가를 정정해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선량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느낌이 든다. 외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션이 입을 다문 채로 있자 마를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자신을 비하할 필요 없어요, 션. 마음속에 자기 자신을 위한 계산이 단 하나도 없이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남들보다는 이타적으로 있기 쉬울 겁니다. 저의 능력이 동조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당연히 가져야 할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보다 제가 훨씬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제멋대로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그다지 죄책감을 갖고 있지도 않고.”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부담감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데.”

“부담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그렇지만 부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역시 선행을 하고 있지 않은데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페이만이 아니라 마리아 역시도 이 세상에 이미 없을 텐데요?”

“저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마를린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션이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긴, 그녀는 예언자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훨씬 이전부터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션은 웃어 버렸다.

“네, 마를린 앞에서는 숨겨도 소용없겠죠. 적당히 사과만 받고 용서할 생각이긴 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고, 그녀의 마음이나 신념, 존재가 제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여러 가지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고. 다만 용서를 하더라도 얕보이는 것은 곤란하니까 시간을 좀 끌려는 것뿐이죠.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요.”

마를린이 방긋 그를 따라 웃었다. 션은 다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정원은 대단히 넓어서, 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보다는 그 반대편으로 더 틔어 있었다. 특별히 가꾸거나 하지는 않은 듯, 풀은 깎여 있었고 길도 나 있었지만 나무도, 잡초도, 무릎까지 오는 작은 꽃나무들도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나는 전에 당신이 옐레나의 편을 들까 봐 염려했답니다. 페이도, 마리아도, 마야까지도, 현존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제거해 두는 쪽이 안전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마를린이야말로 옐레나와 같은 위치에 서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남들이 하나로 묶어 생각한다고 해서 꼭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법은 없지요. 나도 한때는 내가 여러 가지를 불행을 예방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그러려고 애썼던 때가 있었다오. 이 나이가 되어서 내린 결론은 내 예지력이란 믿을 바가 못 된다는 거였고요. 고작해야 미래의 일부, 그것도 결과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로서는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었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를린이 그렇게 말했다. 션은 그녀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걸음을 멈췄다. 편지에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라고 씌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의례적인 인사라고 생각했었다. 대답이 없는 것이 말하기 힘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구부려 마를린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녀는 별반 힘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걷다 보니 지름 15m는 될 듯한 큰 연못이 하나 있었다. 도심 중앙에 그냥 물만 채워 둔 웅덩이가 있다면 썩어 버릴 것 같은데, 못은 제법 맑았다.

“물 냄새가 나는군요. 연못 앞에 서 있나요?”

“예.”

“맥이 만든 거랍니다. 벙커를 깨려다 실패한 흔적이죠. 그도 힘의 집중법을 잘 몰랐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션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옛일이다. 신기한 기분이 된 채로 그는 마를린의 휠체어를 밀고 못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가 잠깐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션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한 번 박살 났던 마를린의 왼쪽 다리뼈는 거의 기능하지 못했고, 오른쪽 무릎은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심하게 아팠다. 보행기 없이 서 있게 하기 위해서는 거의 끌어안듯이 하여 허리를 세워 주어야만 했다.

“고마워요.”

그녀가 일어서서 연못을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지막으로 이 냄새를 맡으러 왔어요. 눈으로는 매일 밤 꿈꾸지만, 예지몽과 달리 내 꿈에는 냄새도, 촉감도 없으니까.”

“마를린…….”

“그건 좋은 일이지요. 여기에 서 있는 예지몽을 꾸지 않는다는 건, 일평생 우려했던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그렇군요.”

그녀는 조금 더 서 있고 싶어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다리에 무게가 거의 실리지 않도록 션이 들어 올리다시피 하고 있는데도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만다. 그는 마를린을 안아 올려 휠체어에 앉히고 무릎 담요를 꼼꼼히 여미어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정원과 연못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따스해서, 그것이 노인의 피부에 닿는 것을 지켜본다. 마를린이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말했다.

“맥과 나는 50년 동안 신경전을 벌여 왔어요. 이치를 따지자면 세상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합의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겠지만, 현실에 임해 보면 이치에 닿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니까. 맥은 점점 과격해졌고, 나는 신경질적이 되었어요. 견해는 평행선이 되었고, 함께 도와서 살자, 서로를 보살피자, 죽은 이가 남기고 간 것을 돌봐 주자, 그런 약속도 빛이 바래고……. 그조차도 오래된 일이긴 하군요. 내가 걷기 어렵게 되고 나서부터는 맥이 움츠러들었으니까.”

“마를린의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그야 그럴 테지요. 우리는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고, 그때 함께 지냈던 사람은 대부분 갔고 자식들조차도 떠나갈 나이가 되었어요. 예전에 이 벙커를 공격했을 때 죽은 친구들의 자식들을 보살펴 주었고 손자까지도 보았지만, 그 손자들까지 늙어 가고……. 맥은 결국 혼자 남겠지요. 그것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 것이 우려되더군요.”

개인의 행복을 말하기에는, 그에게는 자손조차 남지 않았다고 마를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년의 나는 여기에 없을 거예요.”

“마를린.”

“오래 살았죠. 사실 너무 오래 버텼어요.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가기 전에 당신을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션은 머뭇거렸다. 예언 능력자가 말하는 스스로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이게 첫 만남인 그녀가 자신에게 기울이는 마음의 크기에도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노파의 걱정이나 기우라고 생각하면 좋아요. 당신의 힘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미래 역시 가늠할 수 없지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고, 모든 사람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곧 모든 증오심까지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당신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부터 계속 걱정하고 있었어요. 과연, 당신이 인간인 채로 존재할 수는 있을까, 하고.”

마를린은 그조차도 알고 있다는 듯이 평화롭게 말했다.

“그래서 기다렸어요. 이 몸에 담고 있는 것은 백 년의 인생. 눈에 새겨진 것은 수백 년에 이르는 결과들이니까 당신에게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앞을 조금 더듬었다. 그것이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인지,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션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동조를 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여태까지 한 사람의 GFG 능력자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왔죠. 이름 모를 신의 은총은 드러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고, 드림 워커가 압도적으로 강했다지만 아홉 명의 다른 능력자를 견뎌 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내 눈에 비치는 당신은……. 유일하게 그게 가능한 사람이에요.”

“과대평가입니다.”

“파워량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힘의 ‘질’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신의 은총은 죽음에서 삶을 되돌려줄 수 있었고, 드림 워커는 삶과 죽음을 가를 수 있었지만, 당신은 산 자의 삶을 바꿀 것이니……. 페이의 세상을 바꾸었고, 마야의 세상을 바꾸게 될 것처럼, 당신에게 지워진 이름은 ‘지배자Dominator’입니다.”

선언처럼, 예언자가 말했다.

션은 가만히 연못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을 맞으며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명자’가 그의 영혼에 이름을 붙인 다음에도 갑자기 풍경이 변하거나 심경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SSB의 코드네임이 지칭할 때와는 달리 그 이름이 정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낯선 기분이었다.

“제이 씨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붙이는 이름은 그저 상대의 힘과 영혼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다른 사람이라고 하여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준은 명민한 지각계 능력자이고, 남의 힘을 꿰뚫어 보는 것에 능하답니다.”

션은 침묵한 채로 다시 마를린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의 GFG는 3차 발현과 더불어 단순한 동조에서 벗어나 좀 더 복합적인 방식으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이 특별히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히 시간을 들인 뒤의 일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타인의 인생 같은 것에는 관심 없으니까. 제 인생, 제 삶, 제 소중한 사람이 너무 중요해서, 세상을 바꿀 만한 여유는 없어요. 아마 그 사람이 죽는다면 저도 이미 숨 쉬고 있지 않을 테니, 마를린이 걱정하시는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니 많이 행복해지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평화롭게 하세요. 나를 끝까지 인간에게 실망하게 하지 않았던 원동력은 남편이었답니다. 그는 50년이나 나를 홀로 두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무덤가에 꽃이 피는 것이 보고 싶답니다.”

“행복하셨습니까?”

“눈 감는 순간까지 후회 없이 그럴 테지요.”

자신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션은 생각해 보았다. 50년이 아니라 자신은 아마 5일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엘리엇의 발밑에 꽃을 피우는 꿈을 꾸리라. 그것만은 마를린도 믿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왜 전화를 꺼 두셨습니까?”

로건이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션은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미안합니다. 아침에라도 했어야 했는데 클럽하우스가 지하 깊이 있어서 전화가 안 터지더군요. 중계기에 연결하면 된다는데 어제는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아서 거기까지 여력이 없었습니다.”

로건에게 굳이 변명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연락하는 게 필수였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지만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퀭한 얼굴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셨군요. 다른 문제나 이상은 없으시지요? 어제 마야 리버스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피를 너무 많이 토해서 수혈까지 받았다고 하더군요. JK가 밤새도록 병상을 지켰고요.”

“아아. 생각보다 심했군요. 하기는, 그만큼 저항했으니까.”

션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아무 일 없습니다. 신고식을 하다가 약간 사고가 생긴 것이니까요.”

“신고식 때문이라니, 별일 없으신 게 맞지요? 아, 이럴 때가 아니라 국장님께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한잠도 못 주무셨을 겁니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션은 애매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알버트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다. 어제는 엘리엇에게도 전화하지 못했는데, 설마 거기까지 이야기가 들어가지는 않았기를 빈다. 알버트가 어련히 알아서 막아 줬을까 생각하면서도 염려되었다.

로건은 뭔가 기기를 노트북에 연결하고, 시간이 걸린다며 션에게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기 모임인데 매번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이번이 처음이니까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장 요원이 신고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습니다. 부딪치면 아무래도 일이 생길 가능성이 늘어나니까요.”

“음. 그쪽에도 이야기했군요.”

작은 일이니까 굳이 SSB에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회선이 연결되었다. 로건이 그에게 헤드셋을 건네주었다. 제법 큰 모니터에 피곤해 보이는 알버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사했군. 아주 건강해 보이고.」

“아무 일 없었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쪽이 오히려 곤란할 것 같아서 그냥 있었는데, 밤늦게라도 연락을 하는 쪽이 나았을까요?”

「아니. 올바르게 행동했네. 그렇지만 전화는 켜 두는 게 좋겠군.」

“일부러 끈 건 아니었습니다. 오늘 오전 중에 중계기에 연결하고 왔으니까 앞으로는 끊길 일 없을 거고요.”

「그렇군……. 마야 리버스는 어떻게 된 건가? 장은 별일 아닐 거라고 말했지만, 피를 토했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텐데.」

“동종 계열 페널티 때문입니다. 음. 그 용어는 이번에 맥에게 처음으로 들었지만, 매우 적절한 표현이더군요. 이럴 때 우리나라의 GFG 연구가 뒤처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군요.”

션은 가볍게 손으로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 아랍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할 줄 알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세 개 언어로 출간되거나 번역된 GFG에 관한 책과 연구 논문을 읽어 보았으나 공개된 수준의 연구에서 실제로 의미 있는 결과는 거의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어기와 리스트레인 룸의 개발, 텔레파시의 응용 방법을 제외하고서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GFG에는 상하관계가 존재합니다. 센터에서 측정하는 파워량과는 별개로 파워의 종류와 질에 차이가 있지요. 텔레파시는 예외입니다. 텔레파시가 텔레파시 계통이라고 불리지 않고 텔레파시라고만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 것 같더군요.”

「그렇지.」

“반대로 계통이 있는 GFG의 상하 우열은 명확합니다. 동일한 대상을 타깃으로 삼아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하위 능력이 상위 능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많은 파워량이 필요합니다. 비슷한 변화계라도 페이가 마리아 조제와 같은 타깃을 두고 경쟁한다면, 주먹만 한 조약돌을 얼리기 위해서 적어도 집 한 채 정도는 흔적도 없이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GFG를 쏟아부어야 할 겁니다.”

그러므로 페이는 개인전에 있어서 대부분의 언터쳐블 멤버에게 우세를 점하지만, 대부분의 멤버에게 열세에 있는 마리아 조제에게는 패배하게 된다. 알버트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에게 들은 적 있네. 그것을 동종 계열 페널티라고 부르는군. 같은 능력끼리 부딪치는 경우에 하위 능력자가 상위 능력자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이야기이지.」

“정신 조작계의 경우에는 동일 타깃을 두지 않아도 부딪치게 됩니다. 치유계나 지각계에는 원래 공격성이 전혀 없고, 강화계나 변화계 같은 능력자의 경우에는 일부러 동일 타깃을 향해 힘을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좀처럼 부딪칠 일이 없겠죠.”

그러나 정신 조작계는 다르다. 심지어 인식하는 세상조차 타인들과 다르다. 그것은 준형 같은 단순 지각계가 인지하는 세상이 일반인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이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과 전혀 별개의, 요컨대 ‘정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영향 범위가 눈에 보이지 않고 확장성은 무한하여 당사자조차도 그것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컨트롤이 되지 않을 때는 자기 자신의 경계선조차도 불분명해진다.

따라서 정신 조작계 GFG 능력자는 의도적으로 억제하지 않는 한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속적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리스트레인 룸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정신 조작계 능력자 두 명이 함께 있다면 부딪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마야의 GFG는 션에게 뒤진다 하더라도 강대하며, 굴종의 자세를 취했어도 마음으로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이 다 정신 조작계 능력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 무릎을 꿇는다든가 하는 신체적인 항복의 표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저도 미처 몰랐었습니다. 그 정도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를 만나 본 일이 없으니까요. 아마 그녀는 제 GFG에 억압되었기 때문에 자기 힘을 내부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겁니다.”

션은 짧게 설명하고서 씁쓸하게 대꾸했다. 동조를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능력이 내부로 돌려졌을 때는 그가 타인의 자아에 동화되는 것에서 끝났다. 그러나 마야의 GFG는 매혹과 억압이고, 그 본질은 흡수에 가깝다. 흡수를 내부로 돌리면 깎아 먹을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블랙홀에 던져진 별처럼 찌부러지고 말았으리라.

어쩔 수 없었다. 션의 능력을 흡수하여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는커녕 저항하는 것조차 간신히 할 정도로 격의 차이가 크다.

알버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모니터 너머로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웃음을 참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만큼 션은 최근에 그를 자주 보았다.

“신사가 아니군요, 전하. 우리는 지금 죄 없는 여자가 쓰러진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웃기라도 했다는 건가?」

“뭐, 표정을 숨기는 것은 예절의 기본이지만.”

「내가 자네에게 예절 교육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고는 생각지 않네. 마야 리버스는 그 힘의 성질상 이제까지 방첩 활동에 가장 위협적인 능력자 중 하나였으니, 안심하지 않을 수 없군.」

“제가 그녀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해서 SSB의 일이 편해지는 것도 아닐 텐데요. 사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리스트레인 룸 밖으로 나왔으니 곧 그녀는 정상적인 상태가 될 겁니다. 그보다 전하에게 말씀드려야 할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맥 마셜과 아드난 마타르가 브라질 정부에 은밀하게 연락을 취한 것과 관계되는 문제인가?」

“알고 계시는군요.”

「그 정도도 몰라서야 정보기관이라고 할 수가 없지. 그쪽은 무슨 문제인가? 마리아 조제 머레이에게 무슨 사고라도…….」

“그녀가 저를 공격했습니다.”

로건이 숨을 들이켰다. 알버트가 얼어붙는 것이 화면 너머로도 보였다. 션은 자세를 고치고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리스트레인 룸 안이라서 GFG를 일으키는 것조차 하지 못했으니 혹시라도 부상이라든가 큰 싸움이 되었을까 봐 염려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리아 조제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도 무슨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성격이 충동적이라서 그런 것 같고요.”

「그러나 불가침 조약을 어겼군.」

“설마 이 문제를 영국과 브라질의 문제라고 확장시키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션은 헛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만들 수도 있겠지.」

“저는 이미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정했고, 요는 그녀가 과연 적절한 정도의 사과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사태를 확장시키려고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간단히 자네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건가? 이건 마리아 조제의 목숨을 받아 낼 수도 있는 문제야. 브라질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조건을 제시할 걸세.」

“근본적으로 언터쳐블 내부에서 일어난 능력자 간의 문제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아직 이건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전하. 정기 모임의 첫 참석부터 싸움닭처럼 굴고 싶지 않습니다. 작은 이권 때문에 적을 만드는 것은 근시안적인 생각 아닙니까?”

「빈정대는 건가?」

“조언을 구하려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다들 알고 있는데 정작 저와 연관이 있는 조직만 모른다는 건 우스운 일이니까 미리 알려 드린 거지요. 맥이 중재로 나섰고 브라질이 캄포 베르데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위자료로 제시했다더군요.”

「받지 않기로 했나?」

“안 받을 겁니다. 살의에 불가침 조항 위반, 노린 것은 제 목숨이고 대가로 받아 낼 수 있는 것도 마리아 조제의 목숨인데, 그걸 고작해야 다이아몬드 광산과 바꿀 수는 없잖습니까?”

「지극히 옳은 말이로군. 자각이 생긴 것 같아 기쁘네.」

알버트가 너무 쉽게 긍정하자 션은 이상한 기분이 되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얼굴을 보고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왜? 훈계라도 들을 거라 생각했나?」

“약간은.”

「자네가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지금으로서는 할 이야기가 없네. 사태가 변해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로건을 통해 연락하게.」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돌아가서 뵙죠.”

알버트가 수고하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로건이 통신을 끊었다. 션은 한숨을 내쉬고 헤드셋을 벗었다. 그리고 로건에게 투덜거렸다.

“뭔가, 제가 저 사람 부하 취급받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전혀요.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는 저렇게 부드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장 요원 정도는 꽤 우대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만.”

“저게 부드러운 정도라면 리암 경이나 왕세자 전하에게는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해야……. 아, 실제로 그런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어요, 로건. 이제 당신은 쉬어도 될 것 같네요.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죠. 이제는 전화도 되고.”

“션 님은 클럽하우스로 돌아가실 겁니까?”

“1시에 나오코와 밖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로건과 식사하는 건 출국일로 하죠.”

그가 경쾌하게 로건의 어깨를 한 번 치고 호텔을 나섰다. 로건은 잠깐 나오코라는 게 누구인지 생각했다. 그게 이토 나오코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로건은 한숨을 내쉬고 부족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 침실로 기어들어 갔다.

* * *

이토의 용건은 베를린에 있는 어느 유명한 철공소에 들르는 것이었다. 션은 독일의 강철 제품이 가지는 값어치라든가 철강 기술과 현대의 냉병기 제작 문제에 대해서 별로 원치 않은 일대일 레슨을 듣게 되었다. 그녀에게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일은 탄성과 강도를 모두 갖춘 멋진 레이피어를 제작하는 게 아니라 보다 더 명중률이 높은 플라스틱 총기를 만드는 일일 텐데 말이다. 혹은 지금보다 먼 거리가 보이는 망원렌즈라든가, 강화된 장갑을 가진 전차라든가, 월등히 강한 파워를 가진 자주포 같은 것 말이다. 

이토는 그가 자기가 만든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매력도, 품위도 없는 일이라고 한탄했다. 장검을 제작하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취미인 듯했다.

보상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가 처음에 만들어 주겠다고 말한 별로 필요 없는 펜싱 검 대신에 지팡이 칼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엘리엇의 드레스룸에 진열된 지팡이 중에 가장 멋진 것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와 친분을 쌓는 것도 귀중한 일이다. 준형처럼 그녀가 만들어 내는 것들에 목을 매달 처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탐나는 능력이었다. 온건한 그녀 자신의 성향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목적성 확실한 쇼핑은 2시간 반 만에 끝났다. 두 사람이 클럽하우스로 돌아온 것은 오후 4시도 되기 전의 일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부터 날이 흐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다행이라며 둘은 서둘러 클럽하우스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션은 지하 1층의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 2층에는 뭐가 있습니까?”

“별건 없어요. 기념관 같은 거하고, 혹시 공간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방이 몇 개. 아, 그리고 정식 만찬장도 거기에 있고요. 만찬장이라고 할까, 회의실이라고 할까. 오늘 칼루가 온다고 했으니까 어차피 내려가 보게 되겠네요.”

“그렇군요. 기념관은 조금 궁금한데요.”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에요. 드림 워커에게 죽은 U급 능력자들과 예전 멤버들의 초상화가 있더군요. 마를린의 컨디션이 좋을 때 이야기를 청해 보세요. 맥에게 물어보는 건 솔직히 비추천이고.”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지면서 뻥튀기가 될 거라며 이토가 투덜거렸다.

션은 그녀의 방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 주었다. 이런 게 공항에서 통과가 되려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봤지만, 내릴 때도 수하물 검사가 없었는데 탈 때라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밀수 같은 거 해도 안 들키는 거 아니야?”

라운지로 나오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자니 탭과 마주 앉아 늘어져 있던 준형이 푸하하 웃었다.

“어차피 무기를 들고 들어오든 빈 몸으로 들어오든 위험하긴 매한가지이니까.”

“저 자신의 위험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밀수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막을 수 없다고 해도 장벽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다르잖아요?”

“하하. 고작해야 한 사람이 가방 들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이 아쉬워서 품위를 떨어뜨릴 만한 사람은 여기 없으니까.”

“제이 씨 말고?”

준형이 정색했다.

“쉿, 비밀이야.”

“농담이에요. 문제가 생겨서 곤란해지는 걸 더 싫어할 거라는 건 저도 압니다. 마를린은요?”

“쉬고 있지 않을까? 왜?”

“지하 2층에 있다는 기념관을 구경할까 하고요. 나오코가 맥보다는 마를린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고 권하더군요.”

“아, 맥은 뻥이 너무 심하지.”

준형이 현명한 충고라고 키들거렸다.

“탭은 어때?”

“나? 뭐?”

탭이 거의 몽롱한 얼굴로 물었다. 션은 고개를 저었다. 만난 지 반나절 만에 션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고양이였다.

션은 마를린의 방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준형의 말처럼 쉬고 있었다. 간병인이 대신 나와서 하루의 대부분을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여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나왔다. 그녀는 남들과 함께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웃으며 활달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남은 시간을 모조리 소진하고 있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의 수명이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조금 무거워진 기분으로 그는 이번에는 맥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젯밤에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결국 아드난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맥은 거의 대자로 뻗어 있었다. 아드난은 그것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아침나절에 멀쩡한 척하는 얼굴로 본국과 연락하느라 고생했다며 침대에 들러붙어서 전쟁이 발발하거든 깨워 달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서 오늘 옐레나를 건드리기에는 껄끄러웠다. 사니아는 병원에 가 있었으므로 상대해 줄 사람이 없었다. 이거 정말 친목 모임 맞기는 하냐고 투덜거리면서 션은 혼자서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기념관은 이토의 말보다는 훨씬 멋졌다. 넓은 홀에 걸린 널찍한 간격을 두고 이십여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1945년, 베를린 대(對) 드림 워커 전투에서 사망.”

초상화 밑에는 간단한 약력이 새겨진 동판이 붙어 있다. 초반일수록 내역은 화려하고, 개인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 국적, 그 외에는 어느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뿐이다. 전쟁에 남긴 이름밖에는 그들을 규정지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첫 여섯 명이 대 드림 워커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했고.

그 뒤에는 그보다 조금은 나았다. 하지만 이름, 나이, 태어난 곳. 그리고 죽은 곳. 5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에게서 떼어져 연구소에 보내진 자도 있었고, 작은 나라 출신으로서 강대국에 팔려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자도 있었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그 기록들은 나아져 갔다. 센터 설립 이후에는 조금 더. 치유계 능력을 계발할 방법을 찾아낸 다음에 또 조금 더. 정신적 안정성과 파워의 상관관계가 밝혀진 다음에 조금 더.

그리고 그리운 얼굴도 그곳에 있었다.

[이스마일 알 다하브]

갈색 얼굴에 터번을 두른 옆모습이었지만 션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억이 어렴풋하여 만나도 모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미란과 더불어 평생의 은인인데도, 이름도 맥이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더랬다.

“선행을 하고 동정심을 가져라. 네게 홀리는 이를 불쌍히 여겨라. 그것이 알라의 보살핌을 구할 것이다.”

그리운 기분으로 엘리엇을 만나기 전까지 늘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금언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자네가 곧 그 동정심의 결과로군.”

션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것은 바싹 조여진 연회색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머리는 올백으로 넘긴 중년의 남자였다.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타 파닌 칼루 씨군요.”

“이스마일은 바보 같은 남자였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그가 션의 곁으로 다가와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선한 남자이기도 했다네.”

“칼루 씨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밖에 없습니다만, 선과 어리석음을 같은 자리에 두실 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부정하지 않겠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션은 약간 웃었다.

“글쎄요. 어리석지 않은 선자가 있음을 아니까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고 하긴 어렵겠군요. 제게 한정해서 말한다면, 선행을 하려고 애써도 늘 어리석은 짓밖에 하지 못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지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타 파닌과 나란히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구나, 하고 내심으로만 한숨을 내쉰다.

“U급 능력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엄밀하게 파워량으로만 따진다면 U급에 미치지는 못했지. 하지만 등급이 높은 봉인 능력자는 희귀하니까 마를린만큼이나 대우를 받았어. 그의 GFG를 끝장낸 것이 자네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션은 놀라서 아타 파닌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느긋하게 돌아서서 몇 걸음을 걸어가 홀 한중간에 섰다. 그리고 빙글 돌아섰다.

“몰랐나?”

“몰랐습니다.”

“보통 GFG는 무한하다고 생각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 알고 있었겠지만.”

“여러 차례의 고갈을 겪으면 파워량 자체가 유의의한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듣긴 했습니다.”

“이스마일은 자네의 GFG를 봉인하기 위해서 7차례에 걸쳐 고갈을 겪었다고 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에 반대했어. 그것보다는 차라리 자네를 죽이는 편이 낫다고.”

“정신 조작계 능력자보다는, 봉인 능력자가 여러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이지요. 은인께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셨군요.”

가슴 아림을 느끼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자 아타 파닌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알고 있다니 기쁘군. 앞으로 생겨날 일은 알 수 없는 법이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언터쳐블에서 살아 있는 채로 탈퇴한 것은 그가 유일해. 그리고 가진 것을 잃은 사람이 겪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 UAE의 분노도 보통이 아니었고. 봉인 능력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슨 일이든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제 죄책감을 부추기고 싶으십니까?”

“다소는.”

아타 파닌이 발끝을 까닥거리는 태도에는 여유가 넘쳤다. 품위 있는 그 여유는 맥이 가진 것과는 또 다르다. 그에게는 자신의 힘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운명을 확신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션은 조금 그가 부러워졌다.

“봉인 능력이라는 것은 GFG 능력자가 일반 사회에 섞일 수 있기 위한 전제 조건이야. 반대로 말하자면 봉인 능력이 없으면 GFG 능력자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이나 거부반응은 지금보다도 훨씬 격렬했겠지. 너 스스로도 잘 겪어 보았겠지만, 션 맥케인.”

“부정할 수 없군요.”

“이스마일은 S급 이상의 통제 불가능한 능력자를 보통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실상 하나뿐인 사람이었어. 앞일은 모르는 법이지만, 그냥도 희귀한 U급 능력자, 그것도 특정한 능력자가 다시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이겠지. 다시 말해 앞으로 태어날 모든 S급 능력자는 그만큼의 리스크를 지게 되었다. 너 때문에.”

“적어도 지난 시간을 포함하여 최소한 30년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션은 무슨 뜻이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타 파닌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 살겠다? 공존할 수 있다? 모두 머리가 꽃밭이 될 만큼 안이한 작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 폭주할 가능성이 있는 능력자를 일반인들은 이득 없이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세상은 제로섬 게임이다. 일반인이 이득을 얻는 만큼 능력자는 박탈당한다. 넌 능력자의 편에 서야 해.”

“그분에게서 받은 은혜를 실체 없는 집단에 갚기 위해서 말입니까?”

션은 미소를 지었다.

“그 리더는 당신이고? 오만하시군요.”

션이 그렇게 말하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자네만큼은 아니야.”

“우리는 초면이고, 저에 대해 판단하실 만한 재료는 이제 겨우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설령 제가 카이루완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제오늘의 일만 봐도 그쯤 알기란 어렵지 않지. 마리아 조제를 아직까지 살려 두고 마야를 밖으로 내보내고 마셜의 중재 제안을 거절하고 미하일로바와도 트러블을 만들었다?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뇌라는 게 없는 멍청이일 테고, 알면서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랬다면 마셜과 미하일로바 양쪽을 모두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는 뜻이 되지. 15년 동안 마셜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들키지 않고 능력을 숨기고 살아온 U급 능력자가 어느 쪽일까 확률을 생각해 보면 빤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정체를 숨겼으니만큼 단순히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내키는 대로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사실 정신 조작계 능력자 중에는 미치는 사람의 비율을 생각해 보면, 뇌가 녹아 버린 멍청이일 확률이 훨씬 높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헤리퍼드 공작은 뇌가 녹아 버린 멍청이의 껍데기에게 반지를 끼워 줬다는 뜻이로군.”

션은 얼굴을 굳혔다.

“엘리엇 씨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주의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저는 평소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그에 관한 일이라면 너무 빠르게 돌아 버린다고 하더군요.”

“공작을 모욕할 생각은 없네. 사실 그는 일반인 중에서는 드물게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지.”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타 파닌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듯한 태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션은 그가 몇 걸음을 서성이는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결론을 낸 것 같았다.

“동조를 하게. 그편이 훨씬 서로에게 간단하지.”

아타 파닌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리스트레인 룸이라고 해서 블러핑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신 조작계 능력자를 자발적으로 내부에 들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시지 않을 텐데.”

“입이 아플 만큼 떠들어 댄다고 해서 설득이 될 만큼 자네가 연약하지도 않을 테고, 자네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고 해도 적어도 무엇을 계획하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것뿐인 사람이 되는 거겠지. 내 GFG의 작용 기점은 저기 있다.”

그가 천장을 가리켜보았다. 곧 벙커 밖의 땅을 말함이다.

그러시다면야, 하고 션은 대꾸했다. 아타 파닌이 자신을 시험하겠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다. 제아무리 단단한 리스트레인 룸이라도, 그가 벗어나려고 마음먹으면 이제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려워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쉽다.

그는 GFG의 작용 기점을 외부로 끌어 올렸다. 벙커 밖으로 쭈욱 올라가 깊은 땅을 뚫고 대지에 고개를 내민다. 이슬비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멋지군요.”

사람을 되살리는 부활의 힘으로 GFG가 그 존재를 알린 이래 이보다 기적에 가까운 GFG는 없었으리라. 션은 비에 스며 있는 아타 파닌의 GFG를 통하여 그의 내부로 파고들어 갔다.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정신 방벽을 완전히 내린 상태였다.

정신 방벽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아를 망실한다는 것과 같다. 아타 파닌은 그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작해야 타인의 GFG 따위는 자신의 영혼을 해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환히 열린 정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아타 파닌의 정신은 견고하고 기반이 단단하다. 그것은 강철의 갑옷을 뒤집어쓴 맥의 강인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오히려 바닥을 높게 돋우어 단단하게 쌓은 제단과 같아 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에 흙발을 디디는 일처럼 무척 무례하게 느껴졌다.

“인간에게는 선도, 악도 없어.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그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바보들뿐이지. 그래서 나는 세상을 이기주의자와 멍청이로 구별하고 있으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익부터 지지한다. 그것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리기로 했을 뿐이지.”

“맥처럼 물렁하게 하지 않고 말이지요.”

션은 맥이 물렁하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맥이 더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미하일로바가 더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항상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둘이 훨씬 낫군.”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물끄러미 션을 바라보았다.

“넌 실망스러울 정도의 소인배야.”

“맞습니다. 저는 당신이나 맥, 옐레나처럼 신념을 위해 자신을 던지기는커녕 마를린처럼 개인의 행복과 대의를 양립시킬 생각조차 없습니다. 죄 없는 소년이 기우제의 제단에서 일곱 번이나 피를 흘리더라도 제 소중한 사람이 마실 물 한 모금이 더 마음 쓰이니까요.”

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신 말처럼 세상 사람은 모두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시선과 자기 경험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지요.”

“그것을 보면서도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제가 뭔가를 한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삶을 선택하는 것은 본인의 결정입니다.”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자네의 힘이 사람을 이해시키고, 통일시키고, 공감시키고, 자네 스스로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결국 애인 얼굴이나 쳐다보고 살겠다면 그것이 ‘이해한다’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 이해에 무슨 가치가 있나?”

“동조 능력이라는 것은 폭력적인 겁니다, 칼루 씨.”

그가 자신의 정신에 깊게 접속하여 런던 사태 때의 체험으로 파고들려는 것을 막고서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이 능력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하나의 집단이 말 그대로 한 덩어리의 유기체가 되어 생존과 향상을 향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실 테니. 당신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런 것일 테지요. 하지만 동조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폭력적입니다. 지금의 당신처럼 가볍게 받아 내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그것이 문제가 되나? 유약하고 어리석은, 혹은 철없는 자들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이 될 터이다.”

“모든 사람의 의지는 다 같은 무게입니다.”

션은 미소하면서 동조를 끊었다. 마를린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폭력도, 짓뭉갬도 발생하지 않은 동조의 경험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라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동조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제게는 대부분 비슷하게 느껴지지요. 당신이 어리석다고 부르는 것도, 이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혹은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도 하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도 전부 각자의 인생이고, 그것을 충고와 조언, 격려가 아니라 정신 지배함으로써 방향을 돌리는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는 폭력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옐레나도, 맥도, 또 마야도, 마리아 조제도, 그 누구도, 각자의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면 되는 일입니다. 저 역시도. 그리고 제게 그것이 보인다면, 그저 결과를 지켜보려고 합니다.”

아타 파닌이 그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에 열이 고인 뜨거운 얼굴이었다.

“신처럼 굽어살피겠다는 뜻이군. 역시 오만해.”

“어떻게 해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저 자신의 행복밖에 모르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션은 그렇게 말했다.

다만, 마이너리티로서 느꼈던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남과 섞여 살지 못하는 사람의 고독, 부모 없는 아이였던 기억, 사람을 해쳤을 때의 고통, 갈 곳 없는 자의 의식, 누구와도 오랜 시간 함께 있지 못하고 쫓기듯 살던 때의 감각, 그리고 동조를 통해 타인에게서 받아들인 모든 것들.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에게는 신념도 없고, 사상도 없고, 방향도 없으니 적어도 타인의 소망을 잊지 않음으로써 빈 부분을 채우리라고 마음먹었다.

* * *

만찬장에는 열세 개의 테이블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 원탁처럼. 그러나 원탁만큼 거리가 가깝지는 않다. 모든 테이블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빈자리는 세 개였다. 페이, 마야, 마리아 조제. 마야는 깨어났다고 듣긴 했지만 리스트레인 룸에 아예 들어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인지 어떤지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다.

열세 자리 중에 세 자리가 빠진 것은 션의 눈에 꽤 휑하게 보였다. 불참자의 자리가 늘 이런 식으로 비워진다면 결속력의 문제가 한눈에 드러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목적인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목적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 GFG 능력자로서 일반 사회에 대해 어떤 태세를 취할 것인가. 갈린 의견에 대한 싸움조차도 이 안에서 한다. 그리고 바깥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관된 태도를 취한다. 결정은 우리가 한다,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 사람이 들어왔지만, 자리가 휑해졌군.”

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와 마를린, 아타 파닌의 자리는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자리가 둥글게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무게 중심이 그쪽에 쏠린 것처럼 보였다. 션의 자리는 그 정면에 있었다.

“연설이라도 할 참인가? 환영이라면 이미 각자 충분히 했잖아.”

아타 파닌이 지루한 얼굴로 말했다. 마를린이 주름진 입매로 웃었다.

“원년 멤버에게, 새로운 가입자를 위해 건배사를 할 정도의 여유는 주어도 좋잖아요, 아타.”

“그래, 맞아. 술 따르는 건 언제나 내 몫이라고. 내가 산 거니까.”

맥이 경쾌하게 말하고 자기 자리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디캔터의 뚜껑을 열었다. 아타 파닌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바퀴를 돌면서 모두의 잔에 조금씩 술을 따른다. 빈자리까지 남김없이 말이다.

“1938 몰트락. 전쟁 중에 포상으로 받은 돈으로 이걸 사서 수통에 넣었었지. 죽기 직전에 마시려고.”

“술은 잘 마시지 못하지만, 이 구덩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입술에 적시는 향은 황홀했지요.”

마를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는 마실 수 없게 되었지만.”

“맞아. 오래 살려면 자제해야지.”

맥이 껄껄 웃었다.

“당신은 냄새만 맡아. 마시는 건 내가 하지. 그때 한 모금씩 마시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땅에 부었었어. 그리고 언터쳐블을 결성할 때, 우리 정부에서 뭘 지원해 줄까 묻기에 그걸 사 달라고 했더니, 증류소의 창고에 있던 오크통까지 싹싹 긁어서 주더군. 그래서 지금까지, 멤버가 떠나면 이것을 마시고 들어와도 마시기로 했어. 노인네들의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래도 원년 멤버의 결정이니까, 눈앞에서는 존중해 줬으면 좋겠군.”

“누구든 두 분을 존중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위스키를 마실 기회라면 더더욱.”

“갈수록 향이 좋아지는군요. 가치가 점점 늘어날 겁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옐레나에 이어 아드난이 황홀한 얼굴로 감탄했다. 아타 파닌조차도 별말 없이 “흠.”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을 뿐이다. 맥이 잔을 들었다.

“좋아, 그럼 언제나처럼 내가.”

“지금까지도 혼자 말하고 있었어요, 맥.”

“그것도 언제나의 일이죠.”

“허, 노인을 존중하라니까.”

“자기 좋을 때만 노인이라고.”

션은 그 입씨름을 웃는 얼굴로 보았다. 맥이 떽 하고 소리를 지르고 다시 잔을 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만큼 점잖게 말했다.

“새로운 동지를 환영하며.”

“환영합니다.”

맥의 선창에 이어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만찬장에 울렸다. 션은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잔을 비웠다.

관리 재단의 직원들이 애피타이저를 날라 왔다. 지난 이틀간의 식사도 괜찮았지만, 오늘의 것은 만찬이라 더욱 훌륭했다. 그러나 식사를 맛보기만 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평화로운 덕담이 몇 마디 이어지고, 내년에는 누가 일정을 결정할 것인가, 슬슬 제비뽑기보다 참신하고 재미있는 게임이 없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사니아가 포문을 열었다.

“페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션은 흘긋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사니아는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 태도로 포크에 토마토를 꽂은 채 흔들었다.

“일단 자리가 마련된 것을 보니 옐레나는 그가 멤버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이건 확실하게 말로 해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녀가 션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자기 입술에 꽂히는 것을 느끼며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를 쳐다볼 일입니까, 이게?”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와는 관계없는 일 같군요, 사니아.”

아드난이 끼어들었다.

“영국 왕실에 편입된 이상 장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장이 여기 앉기에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맥케인 씨에게 두 표의 권리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다수결 투표를 하는 줄은 몰랐군요. 친목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장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규정은 명확해야 분쟁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 의견은 조금 다른데.”

이토가 끼어들었다.

“션과 페이는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가 아니잖아?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우리들 중 하나였던 사람에게 ‘여기에서 나가라.’라고 말하는 게 더 우스운 일 아니야? 애초부터 누군가의 부하는 멤버가 될 수 없다고 해 버리면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절반은 일어서야 할걸.”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 봐요, 이토. 맥케인이 ‘이렇게 하겠다.’라고 결정하면 페이도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 분명한데, 그가 굳이 여기에 와서 앉아 있을 필요가 있는가.”

“이래서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그렇게 치면 돈만 주면 같은 말을 반복해 줄 JK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는데?”

“왜 날 끌어들여요. 나오코 씨, 나는 돈이 아니라도 당신 말에는 무조건 ‘Yes’를 반복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요.”

준형이 웃으면서 농담으로 받았다. 션은 피식 웃고 말았다.

“페이는 지금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지만, 제가 그의 상급자는 아니니까요. 이번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의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다음번에는 아마 참석이 가능할 테니까, 그때 직접 만나 보고 판단하시지요. 그전에라도 영국에 오신다면, 물론 환영하겠습니다.”

“좋은 일이에요.”

마를린이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페이는 아직 젊으니까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도 많이 필요하겠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계획이라던가?”

맥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션은 잘 모른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망명을 요청하는 사람이 꽤 많아서 선별해서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굳이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페이가 크게 마음 쓰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페이의 밑에 있던 능력자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수용 능력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정부는 너무 많은 중국계 능력자가 영국에 들어오는 것을 꺼릴 겁니다. 오히려 그 대부분이 다시 중국 쪽으로 투입되겠지요.”

“오히려 이건 마셜 씨에게 묻는 게 낫겠군요. 티베트에 부대를 투입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실력 있는 사람을 구할 기회는 놓칠 수 없지. 이 기회에 중국을 찢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고.”

옐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도 몽골을 통해서 능력자 부대에 일부 병참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몽골이나 티베트의 독립군과는 손발이 맞지 않을 텐데.”

“하지만 폭발적인 공격성을 드러낼 거야. 지금까지 기도 못 펴던 능력자들이 일제히 터질 테니까.”

“치는 건 좋지만 빠지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쉬진위는 아직도 살아 있어요.”

“질기기도 하지, 그 영감은!”

맥의 말에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음. 아.”

“탭.”

마를린이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지금 하려는 말은 때가 맞지 않아요.”

“아.”

뭔가 말하려던 탭이 도로 주르륵 늘어졌다. 션은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쉬진위는 이미 죽었습니다.”

“뭣?”

“센터 고위층의 정보이니까 틀리지 않을 겁니다. 조만간 센터는 붕괴할 겁니다.”

그러면 능력자를 빼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자 아타 파닌과 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지원은 어렵겠지만 도피처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겠지. 지원이 필요하면 말하게, 마셜.”

“음. 아무래도 땅이 필요한 건 어쩔 수가 없으니까.”

맥이 한숨을 내쉬었다.

메인 코스가 나왔다.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면서 옐레나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중국 상황은 각자 다들 생각이 있으실 테지만, 지금은 머레이에 관한 이야기부터 마무리하죠. 그녀는 불가침 규약을 어겼습니다. 지금 운이 좋아 살려 두기는 했지만, 제재 조치는 어떻게 할 겁니까?”

“실제 피해는 아무것도 없고, 그녀가 충동적으로 실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나. 적절한 보상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맥이 션에게 화제를 돌렸다. 션은 미소를 지었다.

“우선 그녀가 뭐라고 말할지 들어 보고 싶군요. 저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의 이야기입니다만.”

“최소한 변명을 들어 보긴 해야겠죠.”

옐레나는 내키지 않는 투였지만 이토와 아타 파닌까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어느 정도는 사전에 언질이 있었던 건지, 맥이 데려오라고 말하자마자 슈미트가 밖으로 나가서 마리아 조제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풀어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션이 그렇게 말했다. 마리아 조제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게 또다시 적의를 보여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머레이 씨.”

여유가 있어 보이면 좋을 텐데. 생각하면서 션은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은 많이 연습했다. 자연스러운 냉정, 부드러운 냉혹, 공감을 버리고 자신과 상대가 서로 다른 단 위에 서 있음을 알고서 상대를 내려다본다. 사실 알버트와 엘리엇의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그는 어떤 얼굴이든 남의 절반만큼만 해도 훨씬 놀라운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마리아 조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뭘 원하지?”

“네게 질문할 권리는 없어, 머레이. 지금 결정해야 하는 건 네 처벌 문제이니까.”

“…….”

“할 말은?”

“없어. 이유 따윈 어쨌든 죽여 버릴 작정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맥과 아드난이 솔직하게 내뱉는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마리아 조제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처벌이든 제재든 마음대로 해. 목숨이 아까워서 비굴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지금이라도 기회가 있다면 저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해.”

션은 천천히 깍지를 끼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그는 마리아 조제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사과도 받지 않고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워 놓은 계획도 어그러지고 말이다.

“나는 그다지 마야 씨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평범하게, 평화로운 정도로 거리를 두고 괜찮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네 뜻이 어떻든 관심 밖이야. 정신 조작계 능력자는 그 능력이 상위로 갈수록 공존하기 힘들어져. 넌 마야의 존재를 위협해. 하지만 마야로서는 저항할 수 없을 테니, 나라도 대신해 주는 수밖에.”

“음…….”

맥을 비롯하여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대부분이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말해 버리면 제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션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가 만찬장 문을 열었다.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야 리버스였다.

“마야!”

마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늦었습니다만, 만찬에 참석해도 괜찮을까요? 제 몫의 요리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하얀 목에는 세 겹의 진주 목걸이를 감았지만 파리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물론이에요, 마야. 당신의 자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답니다.”

마를린이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그녀에게 배정된 자리의 옆에 앉아 있던 준형이 일어서서 의자를 빼주려 했지만, 마야는 제자리로 가는 대신에 션에게 다가왔다. 션은 조금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어서서 그녀를 자리까지 에스코트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의자를 돌리는데, 마야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용서를 청합니다.”

션은 엉거주춤 일어선 채로 당혹하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서의 관계들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건도,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보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그저 진솔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저 남은 무릎과 두 손바닥까지 땅에 대고 말이다.

“마야!”

마리아가 또다시 고함을 질렀다. 마야가 “입 다물고 있어요.”라고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마리아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마야는 다시 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충동적인 성품이지만, 저를 몹시 아끼기 때문에 그런 거랍니다. 그녀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제 죄입니다. 부디 제게 책임을 물으시고, 그녀를 단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찬장에 정적이 흘렀다. 마야가 이렇게까지 말했기 때문에 옐레나조차 쉽사리 비난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필사적인 계산이 사방에 흐르고 있을 테지만, 션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리에서 힘이 빠져서 도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마야는 아직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 용서는 값싸니까 머레이 씨의 진심 어린 사과와 사적인 부탁을 한 번 들어주겠다는 보상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잠깐, 나는 인정 안 했어!”

“감사합니다.”

마야가 마리아 조제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션 씨에게 사과하세요.”

“나는 사과할 일 같은 건!”

“사과하세요.”

그녀가 강경하게 말하자 마리아 조제가 찔끔 기어들어 갔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덧붙였다.

“나도 입장이 있어. 아무 부탁이나 들어줄 수는…….”

“머레이 씨의 직위를 이용한다든가 국가 문제에 개입한다든가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들어줄 수 없다고 판단하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도 덧붙이지요.”

“그런 게 보상이 될 리 있어?!”

“마리아.”

마야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핏기 없는 얼굴로 속에서 넘어오는 것을 참으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쥔다. 새파랗게 변색한 손이 파들파들 떨었다. 그녀가 위험성을 알면서도 마리아 조제 때문에 클럽하우스에 들어왔다는 것은 명백했다. 마리아 조제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최대한의 관용을 보여 준 겁니다.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어.”

“사과는?”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션은 미소한 채로 그녀의 사과를 기다렸다. 그리고 원탁 저편에서 맥이 웃음으로 가늘어진 눈을 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잘못, 했어. 미안해.”

“좀 더 정중하게 하십시오.”

“죄송합니다!”

마리아 조제가 버럭 소리 지르듯이 말하고는 작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레이 씨를 용서합니다. 이번만이라는 단서를 달아서. 그리고 당신도.”

그는 마야를 내려다보았다.

“내 지배력 안에서 당신의 존재를 허락합니다.”

순간 마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밀랍 같던 얼굴이 발그레한 장밋빛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정신 조작계 능력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야의 몸이 편해졌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일어나시죠.”

션은 그녀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마야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옐레나가 짤그랑 소리가 나도록 포크로 접시를 두드렸다.

“고작해야 사과 하나로 이 일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건 규약의 첫 번째 조항을 어긴 문제예요! 개인 간의 사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글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션은 그렇게 말해 버렸다. 맥이 벙글벙글 웃으면서 편을 들었다.

“사실 죽으라고 말한 것 정도로 공격이라고 해 버리면 볼 때마다 우리 매번 전쟁하고 있지 않나? 이 정도로 끝내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아타?”

“동의합니다.”

아타 파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옐레나가 마를린을 쳐다보았지만 마를린까지 미소를 지었다.

“화해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지요.”

당사자인 션에 이어 그 세 사람이 덮기로 하면 옐레나 혼자서는 판세를 뒤집을 수 없다. 그녀는 이토와 사니아를 돌아보았지만 사니아는 모르는 체 딴청을 피우고 이토도 “좀 찝찝하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말하면서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탄식하면서 말하고 식기를 도로 탁 내려놓고 일어섰다.

“상대 못 하겠군요. 나는 먼저 가겠어요.”

그녀가 쌩하니 바람이 불 정도로 거칠게 돌아서서 만찬장에서 나가 버렸다. 션은 난처해져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 분노도 못 다스려서야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야.”

이토가 마리아 조제를 가리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울컥하기는 했어도 거기에서 또 언성을 높이거나 하지는 못했다. 션은 마야를 자리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마리아 조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션은 두 사람에게 와인을 따라 주고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마야, 그런데 몸은 정말로 괜찮아요?”

“사실 썩 좋지는 않아요. 지금도 그다지. 하지만 만찬에 늦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오자마자 무릎부터 꿇는다는 판단은 하지 못할 겁니다.”

“이런. 마타르. 션 씨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나 역시 정신 조작계의 U급 능력자야. 저분이 무엇에 마음이 흔들릴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녀가 방긋 웃었다. 션은 “부정할 수 없군요.”라고 대답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긍지 높은 사람이다. 아마도 마리아 조제의 일이 없었다면 마음으로부터 무릎을 꿇는 대신에 탈퇴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군.”

아타 파닌이 느긋하게 말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보지. 마야, 중국 센터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들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요청받은 도움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늘 그렇듯이.”

마야가 미소를 지었다. 저녁 식사는 평화롭게 재개되었다. 놀랄 만큼 말이다.

* * *

「그래서 그녀는 이제 괜찮은 건가?」

“완전히 괜찮다, 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피를 토한 것이라든가 쇼크 후유증만이 아니라 말이에요. ‘굴복했다’라는 것이 그냥 그 자리에서의 일이 아니라 일종의 상흔으로 남을 테니까요. 아마 앞으로 저와 맞대면했을 때 속인다든가, 거짓을 말한다든가, 제가 원하지 않는 능력을 사용한다든가, 그런 여러 가지가 불가능해지겠지요. 사실 제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날 밤에 통화하면서 션은 마리아 조제의 일은 매우 축소시키고 마야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엘리엇에게 말했다. 어차피 숨기려고 해도 전부 다 숨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엇에게도 나름의 정보망이 있고, 그에게 거짓말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엘리엇도 평화롭게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래. 어떤 방식으로든 우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낫지.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방식으로 그럴 수 있다면 더 좋고. 무엇보다도 만찬이 즐거웠다면 다행이로군. 자네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데.」

“와인하고 위스키가 좀 들어가서 그래요. 1938년 몰트락.”

「좋았겠군. 1938년 몰트락이라면 전설의 빈티지라네.」

“음. 맥과 마를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술이라고 하더라고요. 대 드림 워커 전투와 관련해서요. 언터쳐블 결성 때부터 가입 환영이나 추모주로만 마신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그렇게 오래된 위스키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처럼 비싼 가격은 아니었겠지만요.”

「그렇군. 나도 듣기는 했다네. 위스키 빈티지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마셜 씨가 드림 워커를 격파한 포상으로 그해 몰트락의 캐스크를 전부 달라고 요구한 것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들었네. 맛있었는가?」

“햇수가 오래되었으니까 예전보다 더 훌륭해졌겠지요? 감별은 할 줄 모르지만 정말 좋았어요. 남은 양이 꽤 많지 않으냐고 했더니, 맥은 앞으로 백 년은 더 살 예정이라서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더라고요.”

「오래도록 모임을 유지하려면 상징적인 물건이나 의례도 중요한 법이니까.」

“굳이 모임을 만들어서 집단을 이루어야 하는가 싶어서 참석하기 전까지는 좀 거부감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즐거웠어요.”

「회원들은 어떻던가?」

“글쎄요. 개개인으로서는 좋은 점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고, 그냥 그렇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들 좋아요. 음. 사람이 좋다기보다는, 제가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소속감이 든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더라고요.”

션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팔다리를 늘어뜨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어디에도 소속감 같은 것은 느껴 본 일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거리를 두었고, 오브라이언의 팀원들과도, 대학 시절 동기들과도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언제나 자신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는 같은 무리의 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 대한 신념도 다르거니와 언터쳐블의 멤버는 모두 한 가지만은 공유하고 있다. 자신이 이종이라는 인식.

“동류를 만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리스트레인 룸도 완전 멋지고요.”

「그래?」

“진짜로 아무 느낌도 안 들어요. 마리아 조제가 한 번 GFG를 끌어 올렸는데 반응도 하지 않더라고요. 뭐어, 그녀의 파워량이 멤버들 중에서 뒤처지는 편이기는 하지만요.”

「부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아주 조금?”

엘리엇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묻는 말에 션은 대꾸하고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말로 조금이에요. 어디까지 버텨 낼 수 있나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이렇게 멋진 클럽하우스를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아요.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인지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게 굉장히 기분 좋아요.”

「그렇군.」

엘리엇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션은 그 대답의 간격이 평소보다 아주 약간 길다는 것을 알아챘다.

“엘리엇 씨, 설마 지금 타운 하우스에 리스트레인 룸을 만들어 줄까 그런 생각 하고 계시는 건 아니시죠?”

「……어떻게 알았는가?」

“엘리엇 씨가 고심할 때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제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숨 쉬는 느낌까지 알 수 있는데요. 괜한 생각 마세요. 낭비예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걸.」

“타운 하우스는 지금 그대로도 완벽하니까요. 대규모 공사로 괜히 역사를 해칠 필요는 없어요.”

저 때문에 그러시면 안 돼요, 라고 마음속으로만 작게 덧붙인다. 그는 이미 헤리퍼드가 잃어서는 안 될 모든 것을 강탈했다. 역사와 희망 말이다. 미래로 이어지게 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과거마저 파손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이게 기분 좋다고는 해도, 엘리엇 씨와 같이 있었던 모텔 방보다 못한걸요.”

「예전부터 자네는 날 참 기분 좋게 만드는 거짓말을 잘했지.」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설마 같이 있는 사람보다 방의 시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음, 그런 뜻은 아닐세. 그저 자네가 나 때문에 그 무렵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리라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인생 전반을 두고 본다면야 평균적으로 지금이 훨씬 행복하긴 하지요. 지금은 이렇게 엘리엇 씨와 길게 통화할 수도 있고, 하루 만나지 못한 것으로도 아쉽다 보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음, 내가.」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려고요? 그러지 말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자넨 요새 내가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는군. 입도 안 열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어.」

“항상 엘리엇 씨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션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말해 주세요.”

「……어쩐지, 전화로는 어색한데.」

“듣고 싶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엘리엇이 조금 더 침묵했다. 그리고 정말로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봐 염려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사랑해.」

“한 번 더요.”

「자네를 사랑한다네. 션.」

션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소리의 떨림까지 모조리 가슴 속으로 들이려고 말이다. 전화 너머로 듣는 고백은 손을 맞잡고 이마를 마주한 채 하는 고백만큼이나 달콤하고 황홀하다. 새어 나가는 것 하나 없이 온전히 귀에 모두 스며들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흘리지 않고 전해지는 마음 같았다.

“저도요. 사랑해요.”

「션.」

“키스하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아니, 저 지금 돌아갈까요?”

「지금 새벽 1시라네. 그리고 자네는 중요한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잊지 말게.」

“정해진 일정이라고 할 건 만찬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어차피 내일 저녁에는 돌아갈 건데.”

「어차피 내일 저녁에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더 참게. 1년에 한 번뿐인 귀중한 기회가 아닌가. 이제 겨우 이틀째인데.」

“그래도요. 보고 싶어요.”

「자네는 가끔 어린애처럼 굴어.」

엘리엇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션은 웃으면서 쿠션을 껴안고 몸을 반 바퀴 굴려 엎드렸다. 그리고 화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 화면이 켜졌다가 툭 꺼졌다. 션은 반쯤 흥분하여 벌떡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엘리엇 씨, 잠깐만요!”

「방금 화상 통화를 연결한 건 실수였네.」

“왜 제 방에 계신 건데요?”

수화가 저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션은 심장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침대에 계세요? 지금?”

「묵비권을 행사하겠네.」

“저 이미 다 봤어요.”

「다 봤으면 나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엘리엇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션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제가 그리우세요?”

「……그래.」

“이제 겨우 이틀째라고 한 건 엘리엇 씨잖아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션은 겨우 즐거운 웃음을 멈추고 침대를 한 바퀴 굴렀다.

“지금 돌아갈까요?”

「안 된다지 않았는가. 내가 거짓말로 그러는 것 같은가?」

“아닌 것 같아서 슬퍼요. 그러면……. 할까요?”

「무얼?」

“섹스.”

수화기 건너편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밀어붙이면 무조건 통한다. 션은 알버트의 그 말을 요즘 들어 통감하고 있었다. 특히 침대에서는.

「자네는 그러니까, 폰 섹스를 하자는 건가?」

엘리엇의 입에서 나오면 폰섹스 같은 단어도 품위 있게 들리는 것이 이상하다. 반면, 그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왔다는 사실에도 흥분이 부추겨진다. 션은 몸을 기울여 다시 엎드리면서 물었다.

“그냥 새로운 시도일 뿐이니까요.”

「……음.」

“엘리엇 씨, 지금 조금 흥분했지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에 약간 밭은 숨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션은 숨을 죽이고 그 숨소리를 모조리 주워 올려 귀에 담았다.

“저도 그래요.”

이제 션의 목소리도 욕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엘리엇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트에서 자네 냄새가, 나서.」

말꼬리가 흐트러진다. 션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가만히, 평이하게 들리도록 애쓰면서 물었다.

“섰어요?”

「……묻지 말게.」

“저는 섰어요. 엘리엇 씨 생각하면서. 그러고 보니 제 생각하면서 한 적 있으세요?”

이번에도 흐트러진 숨소리만 들렸다. 션은 작게 웃었다.

“없다고 하셨으면 서운할 거예요.”

「별로, 자위 자체를 그다지 하지 않으니까.」

“끝부분, 만져 보세요. 엘리엇 씨 거기로 느끼니까요. 점 있는 자리. 만지고 있어요? 제가 하는 것처럼, 검지를 세워서.”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 하지 마. 으응.」

“제가 어떤 목소리를 하고 있는데요?”

「…….」

수화기 너머로 약한 호흡 소리만 돌아온다. 션은 애가 타서 물었다.

“소리 좀 더 들려주세요. 억누르지 말고요. 전화로 들려주는 건 부끄러워요?”

「으음…….」

대답인지 신음인지 불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또다시 소리가 막혔다.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린 것 같았다. 분명히 목덜미가 붉어져 있으리라고 생각하자 숨이 막힌다. 션은 자신도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사타구니로 손을 가져갔다.

“전부 섰어요?”

「자네는……?」

“저도요. 키스하고 싶어요. 엘리엇 씨 입술이랑, 목이랑, 가슴에도. 느끼면 엘리엇 씨는 유두가 서니까요. 파자마 단추는 푸셨어요? 그러면 만져 보세요. 섰어요?”

「응……. 하아.」

“양쪽 다?”

「양쪽 다…… 섰어.」

“아래는 어때요? 속옷 벗었어요?”

「시트에 묻을 텐데…….」

“벗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트 속에서 팬티를 벗고 있는 모양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션은 자기 물건을 몇 번이나 비볐다. 엘리엇이 자기 침대 속에서 속옷을 벗고 있다고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다, 벗었네.」

엘리엇이 망설임이 남은 어조로 말했다. 션은 거의 헐떡거리면서 속삭였다.

“엘리엇 씨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다리 벌려 주세요. 젤 어디 있는지 아시죠? 손가락, 혼자서 넣을 수 있겠어요?”

말로만 하자니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벌릴 때보다 노골적인 느낌이 든다. 엘리엇이 회선 건너편에서 가늘게 신음했다. 션은 다급하게 물었다.

“충분히 적셨어요?”

「자네가, 해 줬으면…….」

좋겠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 사이로 사라진다. 가쁜 숨소리와 참으려고 애쓰는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엘리엇이 지금 혼자서 몸을 웅크리고 젤로 적신 손가락으로 뒤를 쑤석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미칠 지경이었다.

「션, 안 닿아. 자네가 넣어 줘야……. 으응.」

“조금만 더 깊이 넣어 보세요. 하아, 엘리엇 씨, 깊이 넣어서, 조금 앞쪽으로 만져 봐요.”

「하읏!」

느끼는 곳에 닿았는지 교성이 들려왔다. 션은 몸을 떨면서 정신없이 제 것을 손으로 비볐다.

「들어와, 줘, 응, 션, 부족해.」

“내일, 바빠요?”

「내일? 으응, 저녁은, 비웠지만, 하음.」

“오후에는요? 엘리엇 씨, 앞쪽 비비는 것도 잊지 말고요. 항상 제가 하는 것처럼.”

「더는, 안 되겠어. 으, 으응.」

“오후에는 바빠요?”

다시 물었지만 열중하고 있는 듯 숨죽인 흐느낌 소리만 들려왔다. 션은 더 말을 거는 대신에 자신도 신음소리를 들려주면서 성기를 문지르는 것에 열중했다.

“할 것 같아요?”

「이제 곧. 션, 하아, 목소리…….」

“으, 읏, 목소리요?”

「뭔가, 말해 줘. 목소리, 들리게. 션, 빨리…….」

“엘리엇 씨,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제 해 버려요. 응? 해 버리세요. 저랑 같이.”

엘리엇이 경직한 채로 떨리는 숨소리를 뱉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션도 지쳐서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잠시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손은 정액으로 젖어 있었다.

키스하고 싶은 욕망에 입술이 저릿하다. 션은 그대로 잠시 숨을 고르고는, 티슈를 뽑아서 손을 닦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주워 들었다.

“엘리엇 씨.”

「응……?」

몽롱한 물음이 되돌아왔다. 분명히 뜨거운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아직 몸을 떨고 있을 것이다. 그 몸을 끌어안아 피부를 쓰다듬고, 키스하고, 어루만져 달래고 싶었다.

“내일, 오후에 시간 없어요?”

「비울, 수 있을 걸세.」

엘리엇이 떨림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션은 시트 속에 몸을 파묻으며 소곤거렸다.

“내일, 오후에 캐번디쉬에서 만나요.”

「오후부터?」

“인사만 마치고,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까요. 기다릴게요. 아니면, 엘리엇 씨가 기다려 주세요.”

「알겠네……. 기다리겠어.」

엘리엇은 이번에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도 포옹과 키스가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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