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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언터쳐블 (2) (50/52)

외전. 언터쳐블 (2)

션이 엘리엇의 전용기로 베를린 공항에 도착한 것은 초대장의 일정표에 적힌 그 날 정오였다.

헤리퍼드가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혼자서 전용기를 타는 것까지 단숨에 자연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차 이보다 더 큰일에도 태연한 얼굴을 해야 하리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션은 비행기에 올랐다. 이것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슈퍼 카를 모는 일이나 몸을 편안히 감싸 완벽하게 감는 맞춤 정장에 익숙해진 것처럼 말이다.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할 만큼 먼 비행은 아니었으므로 션은 호화로운 소파에 무료하게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영국 항공의 표를 예약했었다. 퍼스트 클래스라면 헤리퍼드의 체면에도 어긋나지 않고, 자신이 부리기에도 적절한 사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일정을 묻더니 그 자리에서 비행기표를 취소시키고 전용기 스케줄을 잡게 했다. 굳이 소박해져야겠다고 애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화로움을 좋아한다든가 부귀로 체면을 꾸미고자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어쩐 일인가 션이 의문을 갖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 자네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나러 가는 자리야. 말하자면 U급 능력자로서의 데뷔전이 아닌가. 의전이라는 건 모름지기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네.”

“그냥 친목 모임인데요. 엘리엇 씨와 같이 살고 있지 않으면, 최고로 사치를 부려 봐야 비즈니스를 타고 갔을 거예요.”

“언터쳐블을 그냥 친목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앞으로 자네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야 할 사람들인데 중요한 일이지.”

엘리엇은 미소하면서 손수 넥타이를 골라 매 주기까지 했다. 그걸 생각하자 숨이 조금 가빠져서 션은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열병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기나 할지 모르겠다.

여하튼 이왕 전용기를 띄울 거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타는 게 아깝지 않을 것 같아서 그는 준형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준형은 “남의 차에 얻어 타는 것은 불편해서 싫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SSB에서 사람을 딸려 보낼 것을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승객으로 타는 사람은 둘이지만, 자신의 보좌를 태워 봐야 온전히 자기 용건 때문에 비행기를 띄우는 셈이 된다는 점에서 전혀 당혹스러운 마음이 줄어들지 않았다. 션은 건너편 자리에 앉은 로건을 바라보았다.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알버트는 굳이 그에게 보좌관으로 로건을 붙여 주었는데, 친목 모임에 보좌관이 따라가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관리인 말고는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수 없다고 들었는데, 수행원으로 따라와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알버트 전하가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고 있지만.”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른 이유입니다. 언터쳐블의 클럽하우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여러 기관이 흥미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무모한 도전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국장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션 님이 베를린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위상과도 관련이 되고요.”

왕족도, 수상도 아닌데 우스운 이야기였다.

“불편하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실 수 있도록 제가 연락책으로서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수행원 없는 모임이라고 해도, 정말로 수행원을 하나도 데려오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대부분 밖에서 따로 호텔을 잡아 묵을 뿐입니다. 숙박이 허락된 외부인은 현재로서는 마를린 아델슈타인의 주치의와 간병인뿐이지만요.”

“하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맥 같은 경우에도 정말로 며칠 내내 놀아 버릴 수는 없는 일이겠죠. 로건은 어디 묵을 생각입니까?”

“가까운 곳에 호텔을 잡아 두었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쓰실 수 있도록 사무실이 붙은 스위트입니다. 규모는 작습니다만.”

“친목 모임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힘겨루기가 있다고는 해도, 불가침이라든가 친목을 명목으로 걸고 있는 이상 아무 일 없어요.”

규모는 어떻든 남학교에서 학기 초반에 이루어지는 서열 싸움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보다 동물적인 본능에 가깝다는 점에서 능력자들 간의 관계는 단순하다. 그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기관들이었다.

“언터쳐블 클럽하우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드림 워커의 벙커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드림 워커는 불안 증상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잠들어 있는 동안에 누구라도 수중에 넣을 수 있지만, 반대로 자기 자신의 육체에 머물러 있지 못했기 때문에 꿈이 끝나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날 수 없었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하 벙커를 만들고 거기에 리스트레인 룸을 설치함으로써 잠든 사이에 자신의 육체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연합국의 능력자들이 공격할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것도 리스트레인 룸입니다. 제어장치의 영향력이 단순히 벙커만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외부 범위에까지 미쳐서 GFG는 통하지 않았고, 벙커 자체가 워낙 깊고 튼튼하게 지어져서 그랜드 슬램으로도 뚫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랜드 슬램?”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가장 거대한 항공 폭탄의 이름입니다. 영국에서 만들어졌는데…….”

전쟁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션으로서는 폭탄의 이름 같은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흥미가 조금 생겨서 수첩에 이름을 메모해두었다.

“그 이전에 이미 S급 능력자 76인이 연합하여 공격했지만 뚫리지 않았었지요. U급의 물리 변화 능력자 두 명과 신체 강화 능력자 두 명이 특수 강화계의 보조를 받아 동시에 최대급으로 능력을 사용한 다음에야 벙커에 구멍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제어장치는 전파, 인근 지역까지 불타올랐습니다. 당시에 드림 워커를 죽이고 살아남은 세 U급 능력자가 추념의 뜻으로 그 자리에서 언터쳐블을 결성하고 벙커를 클럽하우스로 재구축했다고 들었습니다. 연합국은 드림 워커에게 승리한 능력자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언터쳐블의 클럽하우스를 완전한 중립 지역으로 정하고, 정기 모임과 클럽하우스 관리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최대한 우대해 주기로 협약을 맺었습니다. 이후로 사설 활주로를 세우고 멤버가 정기 모임을 위해 입국하는 것에 대해서 절차를 간편화하는 등 독일이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주고 있지요.”

“종전 협약과도 관계가 있는 거군요.”

“국장님께서 특별히 그런 것에 신경 쓰시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비해서 U급 능력자의 위상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협약이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기도 했고요. 다만, 일반인에게까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션 님이 모르고 계실 가능성이 크니까요.”

“앞으로 관계할 곳인데 알고 있는 쪽이 좋지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션은 그렇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편하게 있어요.”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도 로건은 여전히 긴장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대지 못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작년 여름에 그를 통해 말을 전달한 이래로, 션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한 듯 알버트는 일이 있을 때마다 로건을 연락책이나 보좌로 붙여 주었다. 이제 거의 1년이나 지나 로건도 어느 정도 션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얼어 있는 것은 소파가 너무 호화롭기 때문이리라. 사실 처음에 이 전용기에 탔을 때는 자신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션은 조금 미소를 지었다. 

“로건은 이런 환경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요. 자기 것은 아니라도, 경호라든가 보좌라든가 그런 이유로 타 볼 기회는 종종 있지 않아요?”

“거의 없습니다. 기업용 전용기라든가 정부 전용기는 타본 일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건…….”

로건이 말을 잇지 못했다. 션은 “둘러보고 와도 됩니다.”라고 고갯짓했다. 그가 흡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지금 근무 중이고…….”

“알버트 전하에게는 비밀로 하면 되죠, 뭐. 제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서 따돌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할 거 없어요.”

그는 갈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눈을 굴리고는 유혹에 이기지 못해 일어섰다.

“그럼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천천히 둘러봐요.”

션은 웃으면서 그를 보내 주고 일정 관리용 수첩을 폈다. 앞으로 사흘간 휴가를 냈으므로 일정은 텅 비어 있다. 수습 기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막내 주제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비행기는 오래지 않아 리히텐베르크 자치구에 있는 사설 활주로에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입국 관리국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션 맥케인 씨. 독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고마워요.”

사설 공항으로 간다고 하기에 대범하게 생각하여 엘리엇이 런던 시티 공항에 가지고 있는 전용 게이트 정도를 상상했던 션은 조금 당황했다. 활주로에는 비행기가 오가기 위한 모든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공항 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입국 관리관이 미리 작성된 입국 신고서와 검역 신고서를 받고, 활주로 옆에 가져다 놓은 책상에서 입국 도장을 찍어 주었다.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수하물 검사는 아예 하지도 않는다. 션은 조금 얼떨떨한 채로 캐리어까지 들어다 주는 입국 관리관을 따라 활주로 끝에 마련된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앞뒤가 전면 유리창으로 된 건물은 대기실 같은 것인 듯했다. 푹신한 소파가 몇 개 마련되어 있었다. 갈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맥케인 님. UCH 관리 재단에서 나왔습니다. 펠릭스 피셔입니다. 펠릭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UCH 관리 재단?”

그거 설마 언터쳐블 클럽하우스 관리 재단이라는 뜻은 아니겠지? 하고 멍하게 생각하는 사이에 입국 관리관이 션의 가방을 펠릭스에게 건네주었다. 펠릭스는 당연한 것처럼 그 가방을 받아들고 션을 안내했다. 건물 바깥에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생각해 보면 마중을 나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초대장에 형식적으로 클럽하우스의 주소가 적혀 있기는 했지만, 전용기를 타고 와서 택시를 타고 거기로 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션은 잠깐 영국 항공의 이코노미석을 타고 왔어도 이런 대우를 받게 되는 건가를 생각해 보았다.

펠릭스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트렁크에 가방을 넣었다. 로건은 거기에서 션과 작별 인사를 했다. 도착하여 짐을 풀면 연락을 주겠다고 말하고 션은 뒷좌석에 앉았다.

차가 곧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설 공항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서비스가 무척 좋군요.”

“언터쳐블의 멤버님들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활주로입니다. 미리 외무부에 연락해 두면 오늘처럼 입국 관리관을 보내 줍니다. 정기 모임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베를린까지 오시는 분은 정기 모임 때가 아니라면 거의 없다고 펠릭스가 말했다. 션은 멤버 명단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트리아의 마를린은 가깝긴 해도 쉽사리 외유를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건강 상태가 아니다. 그다음으로는 자신이 가까운 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베를린에 올 일은 아마 좀처럼 없을 것이다.

“맥케인 님이 마지막으로 도착하신 분입니다. 이번 모임의 불참자는 페이 장 님 한 분뿐입니다.”

“그렇군요.”

특별히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는 상대는 없지만, 그래도 다들 한 번씩 얼굴은 봐 두고 싶었으므로 션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펠릭스는 꽤 수다스러운 편이었는데, 20분 정도 차로 달리는 사이에 션은 UCH 관리 재단의 UCH가 정말로 언터쳐블 클럽하우스의 약자이며, 직원은 정규직이 18명으로 평상시 클럽하우스의 관리와 정기 모임을 전후하여 청소, 요리, 기타 잡무를 처리한다는 것을 알았다. 보안 문제 때문에 청소부까지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있고, 클럽하우스가 위치한 땅이 국유지인데도 돈 한 푼 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과연.”

흥미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션이 화창한 바깥 날씨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차는 공원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고급 리무진이 몇 대 주차되어 있었고, 녹지 사이에 유리로 만들어진 2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펠릭스가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트렁크를 열어서 꺼낸 가방을 들고 앞장서려고 했다. 션은 그에게 나중에 오라고 이르고 혼자서 먼저 그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술렁거리는 공기가 예리하게 피부를 스쳤다.

* * *

“헤리퍼드 전용기가 베를린에 들어왔다는군.”

옐레나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마리아 조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야 그 비싼 얼굴을 보는군.”

“여러 의미에서.”

마야 리버스는 웃음을 띠면서 대꾸했다.

“비싸긴 정말 비싸지. 세상의 그 어떤 미인도 금괴 3천 톤을 제시받은 적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사실이긴 한가요, 마타르 씨?”

“어느 쪽이 말이니까? 헤리퍼드 공작이 금괴 3천 톤을 보유했다는 것 말인가요, 아니면 션 맥케인의 보증을 위해 그것을 전부 걸겠다고 말한 것 말인가요? 둘 다, 완벽하게 사실이지만.”

아드난 마타르가 건배라도 하듯이 술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불성실한 무슬림인 그는 술을 좋아했으나, 자국에서든 타국에서든 남의 눈 때문에 마실 수 없었다. 오로지 수행원이 출입할 수 없는 이 클럽하우스에서만 안심하고 마실 수 있었으므로, 그는 언터쳐블 가입 이래 정기 모임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었다.

“후자의 일이야 증인이 워낙 많으니 의심할 것도 없잖아요? 제가 궁금한 건 정말로 한 사람이 금괴 3천 톤을 보유하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랍니다. 부자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헤리퍼드 공작은 일개인이라고 하기 어렵지요, 사니아. 공작가가 4대째 독자 상속을 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부계의 친족이 거의 남지 않고 공작 혼자라는 상황이 되긴 했지만, 만약 친족이 많았다면 지금처럼 ‘개인’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8백 년 동안 영국의 두 번째 가문이었으니까.”

“그 두 번째라는 것이 바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드난이 옐레나의 설명에 첨언했다.

“지금은 석유 메이저로서 왕실보다 영향력이 강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지난 8백 년 동안 왕실의 견제를 받아 온 가문입니다. 듣자 하니 장미전쟁에 승리한 바로 다음 날부터 위기에 빠졌을 경우를 대비하여 자산의 일부를 금으로 바꾸어 숨겨 두라는 정교를 지켜온 것 같더군요. 가문이 멸문한 경우에 후손이 재기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건 전 더비 은행장이었던 모턴 준남작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틀림없습니다.”

“8백 년 동안 쓰지 않고 모아 왔다는 건가? 현실감이 없군.”

“설마 내내 지속적으로 모으기만 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몹시 신경 써서 안전 자산을 확보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공작이 소유하고 있는 더비 은행에만 우선 8백 톤, 미국의 베어스턴스, JP모건 체이스에 각각 5백 톤씩, 그 외에 독일, 프랑스, 일본, 스위스, 캐나다에 분산하여 1천 톤가량을 보관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확인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파 봤을 뿐이지, 별로 숨길 만한 정보도 아닌 데다가 술이 들어가서 기분이 좋았으므로 아드난은 술술 불었다. 라운지로 올라온 맥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이런. 다른 나라는 그렇다 치고 베어스턴스의 금고는 어떻게 알아냈어?”

“아, 이런. 맥. 설마 내가 미국 은행에 누가 예금을 했는지 알아냈다는 것만으로 화를 내려는 겁니까?”

“베어스턴스와 JP모건 체이스를 빼면 거래할 은행이 없어지잖나. 그렇다고 내가 헤리퍼드 공작처럼 은행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일세.”

맥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사니아가 방실방실 웃었다.

“맥은 진짜로 만나 본 적이 있지요? 어땠어요? 그 얼굴, 진짜로 3천 톤의 가치가 있어요?”

“말할 것도 없이 진짜배기지.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30년 전에 본 게 마지막이야. 거울 속에서.”

“그걸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하는 겁니까?”

옐레나가 딱딱하게 말했다. 맥이 무색해하지도 않고 말했다.

“넌 실물 못 봤잖아?”

“맥케인은 무척 사진이 잘 찍히는 타입인 모양이군요.”

맥은 자기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옐레나는 그렇게 받아쳤다. 그 옆에서 마야가 한숨을 쉬었다.

“금괴 3천 톤이라니. 내가 먼저 꼬셨어야 했는데.”

“아서. 그놈 앞에서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아주 예민하니까. 질투가 어찌나 심한지 식사 초대 한 번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그건 상대가 맥이라서지. 마야는 괜찮아.”

“뭣? 내가 왜?”

“마야는 여자니까. 엘리엇한테는 완전히 대상 외거든.”

맥이 “호오.” 하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진지하게 라이벌로 보이기는 한다는 거로군.”

“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지해지고도 남지. 아마 진심으로 20살부터 45살까지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맥은 엘리엇의 수비 범위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발기는 가능하니까. 여자가 대상 외인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아직 튼실하지, 암.”

소파에 늘어져 있던 준형이 맥을 쳐다보고는 눈이 썩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야가 “어차피 농담이니까.”라며 웃었다. 남자가 대상 외라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됐습니다. 그것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션 맥케인이 어느 정도의 능력자이냐 하는 겁니다.”

“페이가 일대일로 싸워서 졌다는 것으로는 답이 안 되나?”

맥이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그걸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마셜? 장의 시체라도 나왔다면 모르거니와 멀쩡하게 살아서 중국의 GFG 해방운동을 지지하는 성명까지 발표한 이상 싸웠다는 것 자체를 신뢰할 수가 없는데. 확실히 U급인 만큼 능력은 있겠지요. 장에게 영향을 미쳐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면 그것은 이해하겠습니다만.”

“아, 뭐. 역시, 직접 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가겠지. 처음에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했었으니까.”

준형이 나른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맥이 동의했다.

“맞아. 여기 애들은 알 다하브도 모르니까 말이야.”

“알 다하브를 아는 저도 확신하기 어렵군요. 봉인능력자가 봉인한 GFG가 재발현한 예는 없고.”

“요즘 애들은 전례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데.”

맥이 조금 불쾌해하는 태도로 내뱉었다.

“알 다하브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어. 그는 2세대 봉인 능력자야. 귀납법으로 규칙을 만들기에는 아직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알 다하브는…….”

아드난이 어물거리며 말하는데, 문득 준형이 일어섰다.

“도착했다.”

“어디 가? 마중 안 나가?”

마리아 조제가 물었다. 준형은 고개를 저었다.

“집단행동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나도 사양하지. 정원을 폭발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마를린이나 데리러 갈까.”

맥도 동의를 표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때쯤에 준형보다는 늦었지만 옐레나가 상대를 인지했다.

“쉿. 안 돼, 이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드난, 마야, 마리아 조제, 사니아가 동시에 정신 방벽을 내리고 그녀의 텔레파시에 자신을 연결했다. 다섯 명이 인지하는 정보가 공유되면서 막대한 GFG의 접근을 경계한다. 사니아가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천장에 달라붙었다.

문이 열리는 한순간에 모든 승부가 결정되었다.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막대한 GFG의 덩어리가 내리쳐 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아드난의 염동력이 상대를 찍어 누르고 마리아 조제가 액화된 합금으로 발목을 붙잡는다. 사니아가 뛰어내려 상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이 쏜다. 페인트 탄을 맞고 깜짝 놀라는 남자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그녀는 쿵 하고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섯 명 모두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옐레나는 이미 텔레파시가 끊어진 것을 알고 고함을 질렀다. 등에서부터 그녀를 바닥으로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드난의 염동력이다. 그녀만이 아니라 마리아 조제도, 사니아도, 마야도 모두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마타르, 이게 무슨 짓인가!”

“아, 내가 하려고 한 게, 아니야.”

아드난이 멍하게 대답했다. 마리아 조제의 GFG가 현관과 라운지를 전부 날려 버려서, 철근과 유리가 녹아내려 만들어진 액체가 바닥에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 다섯 사람의 몸을 적셨지만, 그 액체들은 션의 주위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투명해진 사니아의 몸 위에도 예외 없이 탁한 회색 액체가 흘러 석조로 만든 조각상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가 페이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야 리버스는 굴종했고 아드난 마타르는 능력까지 빼앗겼으며 마리아 조제 머레이는 일순간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다. 옐레나와 사니아 역시 저항하지 못했다. 다섯 명이 협공을 했음에도 말이다.

션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겨우 다섯 명뿐입니까? 좀 더 여러 명이 괴롭히려고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물줄기가 쏘아졌다.

“윽!”

션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뒤를 돌아보자 준형이 싱글거리며 들고 있던 알록달록한 물총을 폼 나게 빙그르르 돌렸다.

“내가 이겼지?”

“비겁해요.”

“싸우는 데 비겁 안 비겁이 어딨어? 이제 그만 풀어줘. 진짜 싸울 건 아니잖아.”

가용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션의 GFG가 스르르 사라진다. 아드난이 헐떡이면서 몸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있던 염동력을 풀었다. 그리고 쇼크받은 얼굴로 션을 쳐다보고는 휙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사니아와 마리아 조제가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사니아는 투명화를 풀었지만 일어서지 못해서 주저앉은 채로 몸에 묻은 액체들을 손으로 닦아 떨어냈다. 아드난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제압당한 채 폭발적으로 GFG를 터뜨린 마리아 조제 역시 멍청해진 채로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드난의 염동력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마야는 오체투지 하는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같은 계열의 상위 능력자에게 느끼는 압박감이 너무 커서 굴종하는 자세가 아니고서는 버티고 있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아, 이런. 신고식치고는 일이 너무 거창해졌는데? 이제까지 재산 피해 최대 규모는 페이가 놀라서 라운지를 얼리는 바람에 유리가 다 깨진 거였고, 정신 피해 최대 규모는 마야한테 흥분해 버린 아드난과 마리아 조제가 걸음을 못 걷고 주저앉아서 한 시간 동안 이불 덮고 있었던 거였거든.”

“음. 적당히 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아직 연습이 부족해서인지 섬세하게는 안 되는군요.”

션이 몸을 바르게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도 건축 자재가 뒤섞인 액체들은 그의 발밑을 피하는 것처럼 흘렀다. 준형이 말했다.

“마리아. 이제 정리해.”

“아아, 아니야. 아니야. 정리할게. 응, 정리해.”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곧 액체는 뒤섞인 채로 사람의 몸에 묻은 것을 제외하고 다시 고체가 되었다. 너른 정원에 물감을 뒤섞은 듯이 탁한 액체가 번져 가다가 굳고, 그 위에 안락의자와 소파들이 놓여 있는 모습은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보였다.

옐레나가 콘크리트가 묻은 채 굳은 겉옷을 벗어서 바닥에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내던졌다. 계산은 끝났다. 개인전에서 텔레파시스트인 그녀가 정신 조작계인 션을 이길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지만, 집단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를 이용하여 전장을 ‘건축’하더라도 션의 능력은 옐레나의 능력 근간까지 뚫고 들어와 부대를 산산조각 낼 것이 틀림없다.

개인전에 있어서 장페이, 집단전에서 있어서 옐레나, 기습에 있어서 사니아를 격파하고 아드난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적어도 개인의 능력으로서는 무소불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은 어떨까. 과연 맥이라면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정면 대결이라면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의식불명인 동안에 손에 넣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이상, 환영해야 할 때였다.

“언터쳐블에 온 것을 환영하네, 션.”

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옐레나는 패배감과 불안감을 잘 가려진 미소로 숨기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악수를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앞으로 계획되어 있는 가스프롬과 헤리퍼드의 장기간의 동반 관계를 생각하면 더 그러하다. 그러나 션은 그 대신에 그녀의 손끝을 살짝 쥐고 손등에 키스했다.

“환대 감사합니다, 옐레나.”

옐레나의 얼굴이 웃는 그대로 굳어지더니 곧 이마부터 붉은 기가 내려와 광대뼈 아래까지 빨개졌다. 그리고는 잡힌 손을 빼내고는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이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중학교 때에 첫사랑이었던 남자애에게 생일 선물이라며 꽃 한 송이를 건네받은 이래 이렇게 당황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준형이 션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굴에 진지한 질시가 가득했다.

“넌 능력이고 뭐고 다 떠나서 얼굴이 깡패야.”

“헛소리.”

“헛소리라고 하고 싶으면 얼굴이나 제 색깔을 찾고 나서 말씀하시지.”

“흥.”

옐레나가 발을 돌려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 버렸다. 사니아가 까르르 웃으며 다가와 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요. 미남에게 손등에 키스 받아 보고 싶네요.”

“음. 사니아 양이지요? 사진으로 뵈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션은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묻은 액체를 닦아 주고 마찬가지로 손등에 키스했다. 그녀가 정말 즐거운 것처럼 환한 얼굴이 되었다. 남성 혐오 기미가 있는 마리아 조제마저도 붉은 얼굴이 되는 것을 보고 준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세상의 모든 남자를 대신하여 내리는 징벌이라면서 물총을 연발 쏘아, 결국 션은 머리부터 셔츠까지 전부 적시고 말았다.

* * *

엘리베이터는 충분히 모두 함께 탈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사니아는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는 마야를 부축하고서는 애교 어린 얼굴로 옷을 망친 여자들의 부끄러운 마음을 이해하라며 션의 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션과 준형은 별수 없이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펠릭스는 망연자실한 채로 프로페셔널 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러지 못한 채로 멍청하게 둘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드림 워커의 벙커는 깊고도 깊었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버튼은 지상과 지하 1층, 지하 2층을 표시하는 세 개뿐이었다. 준형이 깊이는 지하 120m부터 시작이라고 알려 주었다. 고속 엘리베이터로도 한참을 내려가는 것에 션은 조금 감탄하고, 그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서 열리자 보이는 라운지의 호화로움에 또 감탄했다.

“이게 정말 1인당 연 5만 달러로 유지가 돼요?”

“여기저기에서 지원을 못 해 줘서 안달이거든.”

“아.”

“땅값도 안 들고, 세금도 안 들고, 그럭저럭 괜찮아. 평소에는 쓰는 사람도 없고 보안 설비도 별로 없으니까. 시설비는 좀 나가는 것 같던데, 궁금하면 나중에 UCH 관리 재단에 연락해 보면 돼.”

그래도 회비는 내가 칼처럼 걷는다며 준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라운지에 맥이 휠체어를 밀고 나와 있었다.

“신고식이 꽤 격심했나 봐? 마야가 울면서 들어가던데?”

션은 “평범하게 반격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다가섰다. 휠체어에는 늙고 작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떠도는 공기가 온화한 봄볕처럼 보여서, 션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진은 본 적이 없지만 알겠습니다. 당신이 마를린이로군요.”

가만히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춘다. 노파의 눈은 완전히 색이 빠진 백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정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션을 정확히 향한 채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션.”

“제가 이 만남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션은 다정하게 말하고 마를린의 뺨에 입 맞추었다. 그녀가 션의 손을 한 번 꽉 잡아 주며 마주 뺨에 키스했다. 앙상한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이 아프지는 않지만, 어쩐지 인상적이었다.

맥이 눈을 흘겼다.

“나는 안 보이냐?”

“마를린이 사랑스럽냐, 맥이 사랑스럽냐 하면, 단연 전자입니다.”

“옷이나 갈아입고 와라, 이 녀석아. 엄청 위험해 보인다.”

“하하. 잠깐 기다려 주세요.”

“준형, 앞으로 이놈에게 물을 뿌리려면 구정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생각에도 그래. 후회했어.”

준형이 문득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걱정 마. 엘리엇한테 보낼 거니까.”

“제이 씨.”

션은 그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준형의 손에서 마술처럼 핸드폰이 사라졌다. 그리고 훌쩍 뛰어서 도망쳐 버렸다.

도대체 얼마에 팔아먹으려고 그러느냐고 쫓아가 따지려 했지만, 이토 나오코가 나타났기에 그러지 못했다. 탄탄한 몸에 시원스럽게 머리를 올려 묶은 중년 여성은 션을 보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두 마디 중얼거리고는 유창한 영어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토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선물로 주셨던 페이퍼 나이프는 애용하고 있습니다.”

이토가 잠시 눈썹을 치켜뜨더니 “아.” 하고 뒤늦게 중얼거렸다.

“선물용으로 만든 건 아니었는데 그게 그리 갔군요. 하긴, 그나마라도 성의를 보일 정신머리가 있는 내각이라 다행이지. 강도는 괜찮을 테니 그럭저럭 쓰다가 페이한테 줘요. 환영 선물은 제대로 된 걸로 하나 줄 테니. 그래, 사브르 같은 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 사브르라는 게 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펜싱 같은 건 배워 본 적이 없어서요.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요? 어울릴 것 같은데. 배워 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맥이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무기에 사람을 맞추는 건 별로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나한테 정글도라도 하나 만들어 주는 게 자원의 최적화를 이루는 길이지.”

“됐습니다. 마셜 씨의 얼굴도, 몸도 내 미학에는 전혀 맞지 않으니까. 하던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 저녁에 만나요.”

그녀가 명쾌한 인사를 남기고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갔다.

“느낌이 좋은 사람이군요.”

“편안하지. 그럼 인사는 다들 한 건가? 아타 파닌은 아직 안 왔고.”

“탭이라는 분을 아직 못 뵈었는데요.”

“때 되면 보이겠지. 걔한테는 굳이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라. 감기 걸리겠다.”

맥이 말했다. 확실히 몸에 달라붙은 셔츠가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해서 션은 이만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그때까지도 멀찍이 서서 가만히 있는 펠릭스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정신을 차리게 했다.

“아.”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지상 라운지는…….”

“슈미트에게 보고하게. 괜히 다시 짓기 쉽게 골조에 유리만 설치해 놓은 게 아닌데. 그런 일 하라고 자네들이 있는 게 아닌가?”

“아, 알겠습니다.”

맥이 말하자 펠릭스가 얼른 대답하고 가방을 들고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그때, 사니아가 안에서 뛰쳐나왔다. 얼굴은 냉정하지만 몸짓에서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두 손을 온통 피로 적시고 있었다.

“마야가 피를 토했어요!”

“뭣?”

맥이 경악했다. 준형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개인실이 있는 복도로 달려 들어가고 맥이 그 뒤를 따라 달려간다. 션은 당황했지만 마를린을 혼자 그 자리에 둘 수가 없어서 머뭇거렸다. 안에서 “의사를!”이라고 외치는 마리아 조제의 비명이 들려왔다. 션은 마를린에게 여기 계시라고 양해를 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소리를 지른 마리아 조제, 사니아, 준형, 맥은 물론이고 각자의 방에 있었을 아드난과 이토도 마야의 방에 있었다. 옐레나가 객실 문을 열어 마를린의 주치의를 끌어냈다. 주치의는 당황하면서 뒤뚱뒤뚱 마야의 방으로 들어섰다. 마야가 토해 낸 선혈이 복도까지 흘렀다.

션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췄다. 의사보다도 그가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 때문에 생긴 일이다. 아니, ‘때문에’라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신고식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공격적인 행동을 한 것은 마야 쪽이었다. 따라서 원인을 말하자면 신고식에 있다.

상호간에 암묵적인 양해할 수 있는 선에서 작은 규모로만 GFG를 행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각자의 근간,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경험한 션의 GFG였지만, 동종 계열인 마야에게는 쇼크가 올 정도로 지독한 충돌이었던 듯하다.

“리스트레인 룸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그가 말하자 모두가 션을 돌아보았다. 션의 말뜻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맥이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동종 계열 페널티냐?”

처음 듣는 말이지만, 그건 꽤 적절한 표현이었다.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트레인 룸 밖으로 나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쇼크가 육체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GFG의 가용 공간을 제가 모두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GFG를 통제할 방도를 잃고 내부로 돌려 공격하고 있군요. 외부로 열린 공간이라면 괜찮겠지요. 그녀의 본질은……. 아니. 이것은 제가 해도 되는 이야기는 아니로군요.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션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준형이 들것을 준비시키겠다며 밖으로 나서고 옐레나도 길을 비켜 주었다. 의사가 얼른 일어섰다.

“그런 말을 믿어?”

마리아 조제가 션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사니아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아요, 마리아. 이것이 병이라든가 부상이 아니라 GFG 문제라면 동종 계열 능력자인 션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당연해요.”

“큰 문제는 아닙니다. 공간을 확보해 주면 그만이니까.”

션은 마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다가 쓰러졌는지 약간 마른 듯 늘씬한 몸에는 검은 원피스가 반쯤 걸쳐져 있었다.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있는 모습이 현실감 없이 아름다워서, 실제라기보다는 도착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내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리스트레인 룸 때문에 컨트롤이 막혀 있으니 제가 의도적으로 GFG를 억눌러 응축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니까요.”

“그건 마야가 다시는 클럽하우스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야?”

마리아 조제가 날카롭게 말했다. 만월 모양으로 당겨진 시위만큼 팽팽한 적의가 방 안에 당겨졌다.

“웃기지 마. 아픈 사람을 내보내라니! 나가려면 네가 나가! 신참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야!”

“아픈 사람이니까 병원에 보내요.”

“마야에게는 적이 많아. 노리는 사람이 하나둘도 아니고. 매혹 능력을 가진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볼 머리도 없어?!”

션은 가만히 마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을 비록 불쾌하게 하긴 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흡수를 기반으로 한 매혹 능력, 아름다운 여자, 빈민가 출신이라는 세 가지 사실만 조합해 보아도 그 과거가 한없이 지옥에 가까웠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꼭 그것만이 아니라도 그가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옳았다. 그는 신체 건강한 남자였고, 여기에 있는 것은 아픈 여자였으니까. 그게 션이 배워 온 올바름이고, 예의이고, 신사도였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바닷바람이 부는 그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엘리엇이 그에게 “자네가 물러가게.”라고 말한 이유를 이해하기 전이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으리라.

션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직까지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니라 오브 헤리퍼드이며, 영국의 션 맥케인이었다. 친절은 베풀 수 있지만 물러나서는 안 된다. 겸손은 비굴과 다른 것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냉정하게 말하며 마리아 조제를 바라본다. 마리아 조제가 “뭐?!”라고 울컥 되물었다. 션은 될 수 있으면 얼굴을 찡그려 불쾌감을 드러내는 일조차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본의가 아니다. 다듬어진 위엄을 가장하며 그는 무감정하게 말했다.

“마야 씨가 쓰러진 것은 그저 능력으로 내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보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네놈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능력자가 동시에 한곳에 존재할 수 없다면, 이 언터쳐블에서 누가 나가야 할지는 명명백백하다고 보는데. 아니면 그녀를 깨워서 확인해 볼까요? 감히 내 말을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션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야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마리아 조제가 격분하여 션을 공격한 것은 그 순간이다. 그녀가 끌어 올린 GFG와 코일의 제어력이 충돌하여 바닥에서 파지직 소리를 내며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그녀의 GFG는 발동하지 못하고 꺼졌다. 맥과 옐레나, 아드난이 동시에 그녀를 막아섰다. GFG 없이는 그저 보통 여자에 불과한 마리아 조제는 군인인 세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바닥에 엎어뜨려졌다. 옐레나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야의 옷장에서 허리끈을 꺼내어 그녀의 손목을 묶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가 발악했다. 사니아가 창백해진 채 말했다.

“불가침을 어겼어요, 마리아.”

“그건 따지고 보면, 악!”

옐레나가 그녀의 팔을 비틀어서 일으켜 세웠다. 션은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그는 여러 명의 여자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공격을 받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남자로서 여자를 보호해야 마땅하다고 늘 생각했으므로 상대가 칼을 휘둘렀을 때조차도 폭력이나 억압을 행사한 일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U급 능력자와 U급 능력자일 뿐이다. 션은 마리아 조제에 대한 자신의 능력적 우위를 확신하면서도 괜찮으니까 놓아주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 잘못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관용 역시 무책임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무책임해도 되는 입장이 아니었다.

맥이 “방에 가둬 놔.”라고 무겁게 말했다. 옐레나가 그녀를 질질 끌고 방 밖으로 나가고, 사니아가 그 뒤를 따랐다. 이토는 마스터키를 가져오게 하겠다며 관리재단에 연락하러 갔다. 준형이 들것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마리아 조제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아가 결국?”

“우리 둘이 날라야겠군요. 옐레나와 사니아는 마스터키를 가져올 때까지 머레이 씨를 지켜야 할 테니.”

아드난이 그렇게 말하고, 준형에게 마야의 발치 쪽을 가리켜 보였다. 션이 도우려고 나섰지만 맥이 막았다.

“넌 마를린 옆으로 돌아가 있어.”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중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죠.”

여기에서는 물러서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션은 선뜻 긍정하고 발길을 돌렸다. 라운지에 혼자 남아 있는 마를린이 마음에 걸린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소리 질러 의사를 부르게 되었다. 마를린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 * *

사실, 클럽하우스는 멋졌다. 푹신한 소파가 있는 라운지에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바가 딸려 있었고, 큼직한 식당과 일을 하거나 글을 쓰기에 편안하게 만들어진 테이블이 있는 휴게실, 편안한 거실이 있었다. 싱글보다 약간 넓은 침대, 작은 책상, 책장과 티 테이블이 놓인 개인실은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고 딱 즐길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엘리엇과 같이 다니면서 구경한 호텔의 스위트룸이라든가 펜트하우스, 공간의 넓이를 따지는 게 무의미한 호화로운 별장보다는 고급 호텔의 싱글 룸 정도가 사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치라고 션은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부수적인 것들과 비교도 안 되게 멋진 것은 바로 클럽하우스의 GFG 제어력이었다. 가장 완벽한 리스트레인 룸이 있다는 준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클럽하우스 내부에서 어느 누구의 감정도 볼 수 없었으며, 누구와도 교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손발을 잃은 듯이 무력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유로웠다. 엘리엇과 같이 있을 때처럼 완전한 행복은 아니지만, 온전한 고독 역시 일종의 행복임은 틀림없다.

션은 마치 꿈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그 감각을 즐겼다. 마야의 일만 없었더라면 좀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일은 발생해 버렸고,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준형은 마야를 따라 병원으로 갔고, 마리아 조제는 수갑이 채워진 채 방에 갇혔고, 사니아가 그녀를 감시하게 되었다. 맥과 아드난도 각각 외출하고, 아타 파닌 칼루는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은 채였다.

마야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니 그렇다 치고 마리아 조제도 자업자득이니 동정할 필요는 없지만, 마를린이 쓰러지게 만든 것은 마음이 아렸다. 의사가 늘 있는 일이며, 특별히 충격 같은 것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이 본래도 하루에 서너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지만, 마음이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았다.

U급 예언 능력자로서 발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라의 핵심에 있었던 그녀에게 평범한 할머니에 불과했던 외할머니를 겹쳐 보는 일은 어리석을지도 모르지만, 션은 어릴 때부터 항상 왜소하고 늙은 여인들에게는 도무지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괜찮겠지.’

그녀는 예언 능력자이다. 적어도 자기 자신의 미래는 보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정기 모임에 참석한 것은 충분히 자신이 일정을 견뎌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1백 살도 넘은 그녀가 연이어 불참한다고 해서 자동 탈퇴되는 일 같은 것은 없을 텐데 말이다.

션은 조금 고민했다. 엘리엇과 이번 일에 대해 의논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엘리엇은 그가 공격당했다는 이유로 화를 낼 것이다. 걱정해 주는 것은 좋지만 일부러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알버트에게 미리 이쪽의 상황을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션은 꿈을 꾸었다.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대지만 도무지 벗어나지를 못하고 가라앉아 죽어 가는, 어떤 여자의 꿈이었다.

딱히 여독이 쌓일 만큼 긴 비행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피곤했었던 것 같다. 노크 소리에 깨어나면서, 션은 자기가 진흙처럼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잠깐 기다려 주세요.”

젖은 셔츠를 갈아입었을 뿐이고, 정장 바지를 입은 채 그대로 잠들어 있었으므로 몸차림을 수습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션은 당황하면서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바지에서 빠져나온 셔츠를 도로 밀어 넣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문을 열었다. 문간에 서 있는 것은 옐레나였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은 채였지만, 여전히 사복이라기보다는 군복처럼 보이는 각이 맞는 유니폼에 연보라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자고 있었나?”

“예. 음. 죄송합니다. 지금 잠깐 들어오시라고 권할 수는 없겠는데요.”

보시다시피 이런 모양새라, 하고 션은 자기 옷과 머리를 가리켜 보였다. 옐레나가 살짝 웃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 일러 주러 왔을 뿐이야. 천천히 준비하고 식당으로 오게.”

“아. 감사합니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무슨 상황의 변화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식당에 가 보면 알 것이다. 션은 문을 닫고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 미묘하게 가슴 언저리에 남아 다소나마 답답한 기분이 된다.

딸려 있는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적셨지만, 준형이 쏴 댄 물총에 맞아 젖은 채로 베개에 비벼 버린 머리는 좀처럼 원상회복이 되지 않았다. 션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통째로 물에 적셔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양복이 얼마짜리였던가를 잠깐 생각했지만, 귀신같은 세탁사가 잘해 주리라고 믿고 잊기로 했다.

식당에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부르러 왔던 옐레나를 제외하고는 이토와 요리사뿐이다.

“이렇게 셋뿐입니까?”

이미 식사 중인 두 사람 옆에 앉으며 션은 물었다. 이토가 “음…….” 하고 말했다.

“사니아는 마리아 옆에 있고, 준도 아직 병원. 마를린은 아직 자는 중이고요. 맥과 아드난은 한창 바쁠 테니까.”

이토가 평범하게 대답했다. 요리사가 그에게 물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음, 이거 일식이죠? 초밥?”

“먹어 본 적 없어요?”

“한 번인가 먹어 보긴 했는데 뷔페였어요. 어떻게 먹는 거죠?”

“말씀하시면 이 자리에서 만들어 드립니다.”

요리사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션이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옐레나가 태연하게 이것저것 주문하고는, 션에게 생물이 껄끄러우면 달걀부터 먹어 보라고 권했다. 그러는 그녀의 앞에도 달걀 초밥이 네 개나 놓여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도 분위기는 전혀 나쁘지 않았다. 션은 조금 희한하게 생각하지만, 바꾸어 생각하자면 마리아 조제나 마야와 이 두 사람은 가깝지 않다는 뜻이 된다. 중재하겠다고 나선 맥이나 바쁘게 뛰고 있는 아드난은 가깝다는 뜻일까. 마음속으로 사람의 이름을 이리저리 바꾸어 위치를 잡아 본다. 

요컨대, 옐레나와 이토는 명명하자면 현상 유지파, 맥과 아드난은 GFG 능력자의 우위에서 일반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병존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야는 모르겠지만 마리아 조제는 확실히 온건한 경우에도 병존, 그게 아니라면 아타 파닌처럼 차별주의자이리라. 그녀는 기존 능력자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성격은 차별주의로 흐르기 쉽다.

달걀 초밥은 맛있었다. 입속에서 약간 단맛과 산미가 함께 퍼져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션은 무심결에 감탄사를 냈다.

“맛있군요.”

“맛있다니 다행이네.”

이토가 방글방글 웃었다.

“매 끼니 이런 식사를 합니까?”

“저녁만요. 돌아가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요리를 요청하곤 하지요. 사실 준만 아니면 누가 원하는 식사도 다 괜찮아요.”

“아, 알 것 같습니다. 제이 씨 차례에는 요리가 아니라 화학 물질이 나오는군요.”

“화학 물질이라고까지야. 사실 곤혹스럽기로 말하자면 이토가 처음으로 살아 있는 낙지를 가지고 왔을 때가 최고였지.”

“그것도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남 이야기 말아요, 옐레나. 한때는 순번을 정해서 직접 준비해 보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땐 매 끼니 지독했지만, 옐레나가 압권이었죠. 션, 러시아군 전투식량에 소금에 절인 돼지비계가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식사 준비로 전투식량을 가지고 왔었습니까?”

“처음 들어가 보는 주방에서 뭘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 신형 캔은 출시 때부터 꽤 평판이 좋았,”

“열 명 넘는 사람의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깡통을 딴 건 이해해요. 하지만 솔직히 그것보다는 빅맥 세트를 50개 사 들고 들어온 맥이 백배 나았죠.”

옐레나가 얼굴을 붉히고 션은 파안했다.

“그래도 재미있었을 것 같군요. 서로 친해지기도 쉬웠겠고.”

“친해지긴요. 칼루는 그것 때문에 3회 연속 불참했다가 탈퇴당할 위기까지 왔었는데요. 마를린과 마리아 말고는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던 사람도 없었고.”

“제이 씨는 사실 솜씨 자체는 괜찮지 않습니까? 술안주 같은 것도 잘 만들던데.”

“파는 물건 한정이겠죠. 하지만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을 때에는.”

이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화염방사기를 만들었을까 하고 션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돌아가면서 취향의 요리사를 부르는 게 백번 낫겠군요.”

초밥은 맛있었다. 션은 젓가락질에 서툴렀기 때문에 몇 번 포크로 먹으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손으로 먹는 신세가 되었다.

이토가 먼저 식사를 끝내고 사니아와 교대해 주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면서 감시한다고 했다. 아무리 리스트레인 룸이라도 U급 능력자이니 개인실에 감금한 채 혼자 놔두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테고, 션은 당사자이므로 논외였다.

곧 사니아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초밥이었군요!”라고 그녀가 환한 얼굴을 했다.

“마리아 조제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음. 좋지 않아요. 옐레나, 좀 살살 때리지 그랬어요. 뒤통수에 혹이 이만큼 생겼더라고요.”

“자업자득이지.”

옐레나가 코웃음을 쳤다.

“빨리 맥이 뭐라도 정리를 끝내고 와야 할 텐데. 션, 음, 저 같은 게 끼어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말씀하십시오.”

“그녀의 처벌을 결정할 때, 아주 조금만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 줄 수 없을까요? 마리아는 마야를 아주 좋아해요. 거의 숭배하고 있지요. 그녀는 아직 어리고, 마야를 삶의 지침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것이 큰 잘못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지만, 조금쯤 정상참작을 해 주시면 어떨까, 싶은데.”

“사니아.”

옐레나가 녹차를 마시다 말고 손톱 끝으로 톡톡 접시를 두드렸다.

“불가침 조약은 우리 모임의 근간이야. 그걸 어긴 사람에게 심정적 동정으로 선처를 바란다는 게 말이 되나?”

“글쎄요. 규약의 문제라면 모두 함께 결정해야 할 일이지만, 피해자인 제게 일정 부분이라도 권리가 있다면,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션이 그렇게 말하자 옐레나가 씁쓸하게 러시아어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일어서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사니아가 난처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옐레나는 옐레나 나름의 방식대로 션을 설득할 생각이겠지만, 미리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듣는 것만이라면야.”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마리아는 성품이 과격해요. 그렇지만 그게 별반 신념이라든가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은 아니죠. 형식상으로 마야와 아타 파닌을 제외한 모두가 공존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 방향은 모두가 달라요. 그중에 어떤 사람은, 공존에 방해가 되는 튀어나온 돌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게 옐레나라는 뜻입니까?”

“옳고 그름을 논하자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타 파닌처럼 확고한 자기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이상으로 마리아처럼 내키는 대로 움직여 버리는 사람이 현존 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요. 옐레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말할 거예요.”

“그렇다면 사니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난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살짝 웃었다.

“마리아를 경계하는 옐레나나, 내키는 대로 살고자 하는 마리아나 기득권자들에게 구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한가지이지요. 내가 아는 마리아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우리끼리 서로 싸워 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션은 의외의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도 연구 분석원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나라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그녀라면 분명히 옐레나에 가까운 성향을 띠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니아는 웃으며 말했다.

“마를린은 저를 ‘부자유’라고 불러요. 부자유스러운 자가 현실을 사랑할 리 있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럴 만큼 성숙한 인간이 아니에요.”

“그렇군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사니아는 방에 가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겠다며 일어섰다. 션은 요리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일어서서 라운지로 나갔다. 옐레나는 혼자 다리를 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션은 그 모습을 보고, 바에서 티 세트를 찾았다. 주로 진열된 것은 술병들이지만, 괜찮은 티 세트와 홍차, 녹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마시는 사람은 별로 없는지 비닐도 뜯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뜨거운 물을 정수기에서 받아서 홍차를 우려낸다. 맛은 알 수 없지만, 잎이 좋은지 향기도, 티 세트도 훌륭했다. 션은 잔 두 개와 티 포트를 쟁반에 얹어서 옐레나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차를 마시는 영국인.” 하고 옐레나가 웃으면서 건너편 자리를 권했다. 션은 쟁반을 내려놓고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전 커피파라서 이거 잘 못 합니다.”

“사실 나도 맛을 잘 몰라. 뜨거운 물만 줘도 감지덕지라서.”

옐레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티 포트에서 따라 주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샤로노프 회장님은 아주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엘리엇 씨도 감탄하던걸요. 선물받은 사모바르를 몇 번 써 봤는데 회장님처럼은 안 되더라고요. 도무지 홍차는 늘지를 않아서. 각설탕? 사탕?”

옐레나는 사탕이 들어 있는 작은 접시를 받았다. 사모바르에 짙게 끓인 러시안 티가 아니니까 굳이 사탕까지는 필요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약간 밍밍한 찻물에 사탕을 물고 있는 입이 너무 달았다.

“아직까지 이야기를 못 했는데, 약혼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션이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희한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런던 사태로부터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상당히 과감한 편이라 할 수 있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봐도 친절하기는 해도 심약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공작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첫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년처럼 얼굴이 변한다.

옐레나는 약간 헛웃음을 머금었다. 오히려 헤리퍼드 공작 쪽이 이렇게 군다면 션의 GFG 중 하위 능력으로서 매혹이 있으므로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샤로노프 회장이 터키 스트림 투자 관련으로 공작과 회동하기 위해 영국에 다녀온 뒤에 런던 사태 때의 대처가 대부분 공작의 뜻이었지 션 맥케인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도 반신반의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자 알겠다. 그와 공작의 관계는 U급 능력자와 숭배자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렇게 매력이 있었던가, 하고 옐레나는 돌이켜 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을 것처럼 딱딱해 보였다는 것 말고는 그리 특별한 게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정신 방벽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강하고……. 거기에서 옐레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가 공작의 어디에 반했는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피라미드 최상부에 편입되어 있으며, 옐레나 자신보다도 훨씬 탄탄한 기반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런던 사태 때에만 해도 공작이 정말로 자네의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네. U급 정신 조작계 능력자가 기반이 필요해서 공작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기가 쉬웠지.”

“엘리엇 씨는 이전에는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니까요.”

“설령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도, 사람이 보통 애인을 위해서 거기까지 할 수 있겠는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러기는 어려워. 때문에 그가 이미 자네에게 사로잡혀 있고, 주인의 위치에 있는 자네가 폭주한 이상 종속자까지 애꿎은 방향으로 달릴 가능성마저 우려했던 것이지. 뭐어, 실제 만나 보고 나니 전혀 GFG에 의한 타격을 느낄 수 없었지만.”

“이제 믿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옐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프롬과 헤리퍼드의 동반 관계, 샤로노프 회장님과 공작의 친분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도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네. 자네는 입장상 마야보다는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니까. 과거가 어떻든 간에.”

“현존 체제의 유지를 원하니까.”

션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런던 사태 때부터 당신의 행동은 한 가지 방침으로 설명할 수 있지요. 통제 불가능한 사건을 제거하는 것. 맥이나 칼루의 경우 과격한 성미라든가 가지고 있는 사상·신념과는 별개로 이미 사회 최상층부에 있는 이상 그 움직임은 향해가는 방향성과는 별개로 세상의 흐름 중 하나가 되지요. 그건 아마 당신이 판단하기에 세상에 필요한, 없을 수도 없는 갈등일 테고. 하지만 엘리엇 씨의 그늘에 숨어 있는 저나 마리아 조제처럼 신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자는 해악일 뿐이니까.”

“사니아가 그러던가? 뭐, 그렇다네. 숨길 생각은 없어. 나는 자네가 내 생각에 동의하리라 믿고, 설령 동의하지 않아도 헤리퍼드 공작의 약혼자인 이상 맥이나 칼루의 손을 잡지는 않으리라고 믿네. 이종에게는 그에 걸맞은 삶의 방식이 있어. 우리는 인간 이상의 존재도, 이하의 존재도 아니고 그저 조금 다를 뿐이니까. 조금만 발을 물려 양보하면 얼마든지 기존 체제에 편입하여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몇 사람의 상위 능력자를 위해서 세상을 뒤집겠다는 칼루의 생각도, 능력자 상위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맥의 생각도 터무니없고, 세상 전체를 증오하는 마야는 더욱 그렇지. 아무 생각도 없이 마야를 추종하는 머레이는 말할 것도 없어. 나는 이 기회에 자네가 그 두 사람을 솎아 낼 수 있었다는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네.”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자신을 공격했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견해는 달라도 우정 정도는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옐레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정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의 앞에서는,”

“당신의 대의에는 맥이 농담하는 세계 정복만큼의 깊이도 없습니다.”

옐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불쾌감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만큼 인내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뭐어, 정신 조작계 능력자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당신의 대의는 전혀 마음에 울리지 않아요. 텔레파시스트인 이상 그것이 당신의 한계일지도 모르지요. 사실 다소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텔레파시스트는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적대적이지 않죠. 쌍방향 소통이며 서로의 허가 아래 보여 주고자 하는 범위 안에서 서로 의미를 나누는 일이며 그 근본은 대화가 아닙니까? 신체 강화계나 변화계처럼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명확한 경계선을 가지고 아종인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계처럼 상대를 사물로 만들어 인식하는 것도 아니죠. 치유계도, 텔레파시스트도 근본적으로 정신적인 부분에서 인간과 똑같으므로 당신이 스스로를 ‘이종’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당신들은 환영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그저 선천적인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필요한 치유와 대화를 좀 더 여러 방법으로 늘릴 뿐이니까.”

션은 고개를 숙여 깍지 낀 두 손의 엄지로 미간을 한차례 눌렀다가 떼었다.

“우리는 다릅니다. 정신 조작계는 상대방이 의식하고 있든 하지 않든 무의식을 후벼 내어 제멋대로 뒤틀죠. 근본적으로 공격적입니다. 동의가 없다는 점에서 동조조차 일방적입니다.”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또 위험하다. 정신 조작계 GFG의 공격성은 언제든 외부 요인에 의해 본인에게 돌려질 수 있다. 이번에 마야가 겪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위험성을 감지한다.

“물론 저는 맥이나 칼루처럼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면 당신의 편을 들 겁니다. 그건 당신의 대의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말한 것처럼 현존 체제의 유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GFG 능력자의 사회에서의 포지션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그것이 엘리엇 씨의 세상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적인 감정과 욕심 때문이죠. 그게 마리아 조제의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옐레나가 무표정한 채로 약간 눈가를 찡그렸다. 션은 목이 말라서 찻잔을 비우고 티포트에서 새 찻물을 따랐다.

“옐레나는 발현 직후부터 국가의 유용한 인재로 대접받아 왔었다지요? 러시아의 센터는 매우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고, 텔레파시스트는 치유계와 더불어 폭주했을 경우의 위험도가 매우 낮은 계열이기도 하지요.”

“자네는 나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건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입장상 당신과 같은 편입니다. 위험성이 있다면 배제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대의에는 공감하지 않아요. 내게는 그 대의가 사치스럽고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라운지의 엘리베이터가 열린 것은 그때였다. 맥과 아드난이 들어오다가 옐레나와 션이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둘밖에 없어?”

“사니아는 피곤하다고 쉬러 갔고 나오코 씨는 감시입니다. 제이 씨는 병원에 붙어 있을 모양이지요?”

“아. 있을 만한 사람도 없나. 모든 게 엉망이군.”

맥이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마구 비볐다. 그리고 션에게 이야기 좀 하자며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옐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강경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까?”

“이미 할 이야기 다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뭘 그래? 일대일로 이야기했으면 이쪽에도 그럴 기회를 줘야 공정하잖아.”

옐레나가 션을 돌아보고, 다시 맥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분 상했나 본데. 뭐라고 했어?”

션은 어깨만 으쓱했다. 맥이 옐레나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아서 티 포트를 들어 보더니 잔에 기울였다. 하지만 남은 양은 반 잔도 채 되지 않았다.

“나도 줘.”

“맛없을 겁니다.”

“뭐야? 차별이야? 여자만 주는 거야? 공작한테 이른다?”

션은 쓴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타르 씨도 앉으시죠.”

“고맙습니다.”

아드난이 한숨을 내쉬고 맥의 옆자리에 앉았다. 션은 새 티 포트를 꺼냈다. 이 기회에 연습이나 하지 뭐, 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훈기가 올라오는 찻잔을 받고 나자 맥도 길게 숨을 내뱉고는 미간을 긁적였다. 가벼운 태도를 하고 있어도 생각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션은 더 마실 생각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이 한숨 돌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마리아의 본국에 연락해 봤어.”

“브라질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본국과 교섭해야 할 일입니까? 언터쳐블 내부 문제가 아니라? 저는 그녀가 규약 위반으로 제재될 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지.”

맥이 열없이 말했다. 아드난도 기운 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이마를 짚었다. 지금쯤 패배의 충격으로 처박혀 우울을 씹어야 할 때인데 남의 일을 중재해야 한다니 처량한 기분이었다.

“마리아 조제는 브라질 미개발 지역 개척의 핵심적인 인사입니다. 그녀가 저지른 짓이…… 가장 중요한 규약을 어기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기꺼이 그 대가를 나눠질 겁니다.”

“캄포 베르데 근처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과 면세 혜택을 위자료로 내놓겠다는군. 물론 마리아로부터도 별도로 배상금을 받게 될 거야.”

“제게 금전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아실 텐데요.”

“젠장.”

맥이 등받이에 늘어졌다.

“하지만 돈이 아니라면 뭐로 보상할 수 있다는 거야? 마리아는 U급 능력자야. 감옥에 가뒀다가 풀어주는 건 원한밖에 살 수 없잖아. 실제 감금할 수 있는 시설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고. 제재는 곧 처형이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브라질과 원한 관계가 될 거라고.”

“배후 세력을 두려워해서 멤버가 첫 번째 규약을 어긴 것조차 제재할 수 없다니 불가침이고 뭐고 이 모임의 규약은 유명무실하군요.”

션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그냥 그녀를 탈퇴시키시지요. 나머지는 저와 그녀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탈퇴해도 될 것 같군요.”

“션!”

맥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네가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런 말로 나를 흔들어 보려고 해도 소용없어. 네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규약은 지켜진다. 그렇지만 실제로 뭐가 있었던 건 아니지 않으냐? 마리아가 계획적으로 널 죽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홧김에 그런 건데. 너는 강건한 남자이고, 마리아는 단련이라고는 한 적이 없는 여자야. 리스트레인 룸에서 서로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네가 다칠 일은 없는 거나 다름없지 않으냐? 조금만 양보해 주면 안 될까?”

“실제로 리스트레인 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능력이 제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닙니다만, 그것이 양보해야 할 이유가 됩니까?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그녀가 나를 죽일 생각으로 GFG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동등한 능력자입니다. 남녀의 차이는 매너를 지키는 것 정도면 족하다고 봅니다만.”

“션.”

“이게 파벌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섣부른 동정심 때문에 그런다고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어차피 믿지 않을 거니까요.”

아드난이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맥을 돌아보았다. 맥이 조금 미지근해진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그것을 말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션을 바라보며 간곡히 말했다.

“현재로서는, 옐레나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입니다.”

“상성 문제인가요?”

“옐레나의 능력은 최대 9만 명의 정신을 하나로 연결하여 구축할 수 있는 텔레파시로, 전장의 건축가라고 불리고 있지요. 집단전에 있어서 그녀는 대체 불가능한 키 멤버입니다. 물리계에서 맥이 아무리 절대적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옐레나가 건축한 전장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현재 광역계 능력자로서 가장 강하다는 페이도 아마 승률은 5할 이하일 겁니다. 30㎞ 반경에 얼음의 제국을 건축한다고 해도 외부에서 오는 화력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니까요. 게다가 군을 궤멸시켜도 옐레나에게는 타격이 가지 않습니다.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마리아만이 무기의 물성 자체를 바꿔 버리면서 사람은 살려 놓은 채로 있어서, 옐레나의 ‘건축’을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맥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아가 네게 한 짓에 대해서 대신 변명해 주려는 건 아니지만, 내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만 참아다오.”

션은 고개를 숙인 채 조금 생각에 잠겼다. 맥의 말마따나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굳이 마리아 조제의 제재를 요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이것이 현상 유지파와 병존파의 게임이 되고 있다면 거기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을 뿐이다.

“선후 관계가 틀린 것 같습니다, 맥. 우선 마리아 조제의 사과를 받았으면 좋겠군요. 보상이라는 것도 그녀가 보이는 성의라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맥의 안색이 확 풀어졌다. 션은 씁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걸로 빚은 없는 겁니다.”

“반만.”

“그래요. 반만. 그리고, 빚 까는 건 사과할 기회를 주는 것까지만입니다. 본인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용서 안 할 거예요.”

아드난이 물었다.

“그러면 다이아몬드 광산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브라질 정부에서 보상하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까?”

“마리아 조제가 브라질 정부와 직접 연결되는 일로 저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개인 간의 일로 묻어 두지요.”

“글쎄. 그냥 받아 두는 게 좋지 않겠어? 적절한 성의 표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여겨질 텐데. 간만에 애인한테 거한 선물도 해 보지 그래? 공작한테 용돈 받는 생활도 다른 의미에서 즐겁긴 하겠지만 남자로서 모양 빠지잖아.”

“이런 일로 그런 걸 얻어서 선물할 수는 없어요. 엘리엇 씨가 저한테 노발대발하실걸요. 생각만 해도 무섭네요.”

션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이 화를 내는 것도 그 나름대로 달콤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빌면 된다지만,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할 때는 무조건 빌 수도 없고 말이다. 런던 사태 이후로 엘리엇은 확실히 과보호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첫 번째 참석인데 이렇게 되셔서 유감입니다.”

“낯선 일을 시작한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다, 라뇨. 저 때도, 사니아 때도, 마리아 조제 때도 그리고 페이 때도 아무 일 없이 사흘간 술만 마시다 돌아갔는데.”

“신고식에서 다섯 명을 때려눕힌 사람이 어디 있었어야 말이지. 아드난은 그때 젤라틴 범벅이 되었고.”

“마타르 씨는 무슬림 아닙니까? 젤라틴은 돼지비계로 만들지 않아요?”

“종교 전쟁을 일으킬 뻔했죠.”

그렇게 말하면서 아드난이 일어서서 술병을 가지러 갔다. 맥이 그에게 “나도.”라고 손짓해 보이고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를린이 미리 알고서 그 젤라틴을 생선으로 만든 것으로 바꿔 놨었더라고.”

“마타르 씨 술은 마시면서 돼지고기는 안 됩니까?”

“아드난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리고 제가 지옥에 가는 건 상관없지만 남이 제 신을 모욕하는 건 곤란하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션은 아드난이 건네주는 잔을 받고, 술병을 들어 맥에게 따라 주었다.

“이것만 마시고 다들 자러 가자고. 벌써 시간이 늦었는데.”

“아까 낮잠을 좀 잤는데도 피곤하긴 하네요.”

“그러고 보니 왕자는 뭐래?”

맥이 뺨을 눌러 홀쭉한 알버트의 인상을 흉내 내며 물었다. 션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이야기 안 했어요. 별거 아닌 이야기로 지나갈 수도 있는 건데.”

“고마워. 귀찮은 일이 하나 줄었군.”

“그럼 이걸로 빚 나머지 반도 탕감?”

“네 녀석은 악덕 채무자가 될 소질이 다분해. 어쩌다 이런 게 나왔나 모르겠어.”

맥이 션의 뺨을 꾹 찔렀다. “유전자의 확률이죠.”라고 션은 가볍게 대답했다가 코끝을 손가락으로 얻어맞았다. 아드난이 “사이가 좋으시군요.”라고 희한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을 했다. 맥이 그 지위와 입장에 맞지 않을 만큼 유별나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알았지만, 결국 주고받는 것이 있다고 션은 생각했다. 외모로 인해 호감을 받는 것만큼이나 GFG로 인해 호감받는 것을 혐오해 왔지만, 이제는 뭐,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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