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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언터쳐블 (1) (49/52)

외전. 언터쳐블 (1)

「수고하셨습니다.」

이어폰 너머로 훈련 종료를 알리는 말을 듣고 장페이는 멈춰 서서 헤드셋을 뺐다. 그를 전담하여 관리하는 로스바드가 수건과 물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고, 수건으로 땀을 닦고, 다음은 마무리 운동을 하는 스트레칭 훈련실로 이동한다. 장기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남은 인생은 노예처럼 굴려지리라 믿었는데, 노예가 아니라 소황제, 아니, 숫제 황금 덩이 대우였다.

생활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도 그는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으니까. 귀중한 U급 능력자이다. 형편없는 환경 때문에 쇠약해진다면 그보다 더한 낭비는 없을 것이다.

훈련 자체도 낯설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도 할 일을 부여받아 외유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육체적 단련과 집단 훈련에 매진했으니까. 그의 능력은 첩보 같은 것보다 대규모 군사행동 단계에서 더 쓸모가 많다. 영국에 왔다고 해서 특별히 자신의 능력이 다른 곳에 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SSB는 우선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데이터로 축적하기를 원했고, 국가 소속, 특히 SSB 소속의 다른 능력자들과 함께 훈련함으로써 그를 주축으로 하는 특수 팀을 만들고자 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놀랄 일은 그 훈련의 강도와 방식이었다. 군인이나 다른 요원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무슨 박사라는 사람들이 열 명도 넘게 전담으로 붙어서 훈련 일정을 짜고 본 적도 없는 기계며 도구를 가져와 이용하게끔 했다. 페이는 처음에는 그것이 훈련이 아니라 실험이라든가 검사인 줄 알았다. 훈련이라고 하기에는 강도가 너무 약했던 탓도 있다. 하루에 5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중국에서 했던 훈련의 삼 분의 일도 안 되는 양이었다.

“우리 계약은 30년일세.”

의문을 표시하는 그에게 알버트 왕자는 그렇게 말했다.

“3년이 아니라 30년간 자네를 부려 먹을 예정이야. 젊은 시절에 혹사시키는 것은 장기간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안 돼. 우리는 자네에게서 GFG 능력을 기대하고 있지 근력이나 민첩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며, 하루에 12시간 트레이닝을 하여 근육을 키운다고 해서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또한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에도 방해가 되겠지. 나는 최대한 자네가 오래 건강을 유지하며 SSB에 종사하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합당한 관리를 제공할 생각이네.”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방식이었다. 그가 장윈핑을 증오하는 U급 능력자가 아니라 단순히 센터의 S급 전투 요원이었을 때도 누구도 그런 식으로 그의 미래를 관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몇 달간 붙어 다니는 사이에 사정을 이것저것 알게 된 로스바드는 중국의 센터가 그에게 과다한 육체적 혹사를 강요했다면, 아마 의지를 꺾고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두 번째 놀랄 일은 그가 맡게 된 첫 번째 임무로, 어느 학교에 난입한 테러범을 진압하고 강당에 설치된 폭탄을 무력화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해 본 일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인도적인 임무였는데, 고초라고 할 만한 것은 끝나고 나서 고맙다고 붙드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일뿐이었다. 할 일이 고작해야 이 정도라면 30년이 아니라 60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뻐근한 다리 근육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로스바드와 페이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션이었다. 페이가 벌떡 일어서려 하자 로스바드가 그를 막았다. 밖에서 누가 션에게 헤드셋을 가져다주었다. 션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천천히 나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스트레칭에 집중하기는 이제 무리였다.

로스바드의 집중하라는 잔소리를 들어 가며 페이는 30분의 스트레칭을 끝내고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옷을 갈아입고 튀어 나갔지만 션은 거기 없었다. 하긴, 거의 40분이나 걸렸는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훈련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그가 사격장으로 갔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로스바드와 헤어져서 혼자서 지하에 있는 사격장으로 향했다. 사격장에는 션과 사격 조교 두 사람밖에 없었다. 페이는 유리창 바깥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션은 헤드폰과 고글을 장착하고 손바닥만 한 작은 베이지색 권총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호흡을 조절한다. 집중하고 있는 얼굴은 수려하여 어떻게 봐도 같은 현실 속에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누나들이 염치도 잊고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 야단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누나들이나 어머니에게는 이미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도, 그 약혼자가 신세 지고 있는 집의 주인이며 장윈핑 못지않은 거물이라는 것도, 그가 함부로 말 붙이기도 어려운 은인이라는 것도 별로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수적이라기보다는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서 살던 형편이니 남자끼리 약혼이라니 말이 되느냐며 농담이라고 웃어넘기고는 지금까지도 장난처럼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의 가족은 U급 능력자가 어떤 존재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 A급 능력자도 큰돈을 벌 수 있었으니 U급은 더 대단하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션에 대해서도, 우리 아들이 U급이니 비슷한 수준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능력의 고하는 둘째 치고 현실적으로 그와 자신은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기억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누나나 어머니가 그에게 말을 붙일 때마다 페이는 벼랑에서 밧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기억을 지우는 것은 페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잠들어 있는 가족을 살펴보고 나서 션은 분명히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었다.

‘기억을 유지한 채로 세뇌만 푸는 일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간의 기억을 견뎌 낼 수 있을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군요. 아마 부모님과 누이들은 어려울 겁니다. 남동생들 쪽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이는 한 시간도 넘게 고민했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따위 기억은 없는 편이 낫다. 그런데도 쉽사리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모두 함께 도시로 올라와 쌓아 올렸던 기반을 버리고 갑자기 영국으로 와 있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족이 받아들인다 해도, 과연 자신은 아무런 정신적 지지 없이 그것을 혼자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는 결국 가족 모두의 기억을 지우는 쪽을 선택했다. 자신의 GFG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 전부 혼자 감당해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션은 그것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았다. 다만 미소한 얼굴로 “용감한 결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용감하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영어가 짧은 페이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칭찬인 것은 확실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페이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냥 영국에서 더 좋은 대우를 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이민하기로 결정했고, 그것을 알고 센터에서 그를 막으려다가 사고가 생겨서 의식불명이 되었었다는 것으로 거짓말을 했다. SSB에서는 그의 거짓말에 그럴듯한 증거까지 만들어 주었다. 지난 4년의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로 했다.

부모님도, 누이들도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놀라운 능력자가 되었다면,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이 하나 없는 타국에서 사는 것보다 모국에서 출세하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 말은 통장에 찍힌 정착 지원금의 액수와 호화로운 저택 생활로 인해 한 달 만에 쑥 들어갔다.

그러나 좁은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 태도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페이는 가족들이 헤리퍼드 공작이나 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두 사람의 비호 덕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장윈핑을 따라다녔던 경험 덕으로 헤리퍼드 공작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도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다. U급 능력자가 비록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공작이 가진 힘은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누나가 션에게 던지는 장난 반 진담 반의 추파를 볼 때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진심으로 누나들이 아직 영어를 거의 못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남도 아니고 은인에게 무슨 짓인가 이 말이다. 션은 정신감응으로 대강 알아듣는 것 같지만, 어차피 말을 하든 하지 않든 타인의 감정은 모두 알 수 있고, 무엇보다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런 식으로 들이대는 것에 너무 익숙하여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션은 사격을 마쳤는지 헤드폰을 벗고 있었다. 사격 조교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페이 쪽을 가리켜 보였다. 션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장비를 정리했다.

페이는 아직 모니터에 떠 있는 점수판을 보았다. 주로 3부터 7까지의 점수가 나열되어 있다. 이 SSB 안에서는 썩 높다고 할 수 없는 점수였지만, 그가 쥐고 있는 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아주 잘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션이 나왔다.

“미안합니다. 기다린다고 해 놓고.”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으니까요. 사격을 잘하시는군요.”

“예전에는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으로 연습하다 보니까 그렇지가 않아요. 이동하는 과녁은 영 맞히기 어려워서……. 평균 점수도 안 나오잖습니까?”

그가 모니터를 가리켜 보였다. 페이는 고개를 저었다.

“총열까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권총은 원래 명중률이 떨어지니까요. 그만큼 쏘는 것도 대단하신 겁니다.”

“그래요? 제이 씨는 양손에 하나씩 쥐고도 날아다니는 원반을 맞추던데.”

“JK는 JK대로 비인간의 영역이니까요. 말이 단순 지각계이지, 그의 진짜 U급 능력은 날아가는 비둘기의 눈알을 맞추는 사격 실력이라고 하잖습니까?”

“그거 정말이에요?”

“사실이라고 들었습니다. 적어도 저격 총으로 날아가는 헬기의 연료실을 정확히 관통시켜서 폭발시킨 건 맞습니다. 그건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니까요.”

션이 휘파람을 불었다.

“진짜 사람이 아니군요.”

GFG로 보나 용모로 보나, 페이는 준형보다는 그가 훨씬 더 비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션이 나가자며 고갯짓했다. 페이는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알버트 전하와 이야기할 게 있어서 들렀습니다. 페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잠깐 어디 좀 가려는데 괜찮습니까? 용건이 있다면 여기에서 간단히 이야기하고, 가족들 보러 가야 하면 집에 태워다 주고. 오늘은 이제 퇴근이라면서요.”

“딱히 바쁜 용건 같은 건 없습니다. 태워다 주시는 건, 아뇨. 기다려 주세요.”

대답하면서 페이는 자기 대답이 왜 이렇게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는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아직 영국에서 통하는 운전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평소라면 로스바드가 태워다 주므로, 그는 로스바드에게 전화해서 오늘은 따로따로 가도 괜찮다고 설명했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는 맥라렌이었다. 문이 밖으로 튀어나오더니 수직으로 세워졌다. 션이 운전석에 타면서 페이에게도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단순히 값비싼 차라면 장윈핑을 경호하기 위해 적지 않게 타 봤지만, 중후한 세단이나 리무진과 달리 날렵하게 빠진 슈퍼 카에는 페이의 심장을 두드리는 뭔가가 있다.

션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정말로 용건 없어요? 틸다라는 그 아가씨랑은 잘 안 됐어요? 전화번호 받았잖아요.”

“…….”

“아. 너무 사적인 걸 물어봤나. 미안합니다. 둘이 서로 호감이 있다고 봤는데.”

“아닙니다.”

션이 액셀을 밟았다. 차가 순식간에 도로로 튀어 나간다.

페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틸다는 중국 대사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그 중국계 영국인 여자의 이름이다. 먼저 가서 전화번호를 물어봤던 것은 자신이었다. 상황이 일단락되고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는 가장 먼저 대사관 앞에서 기다려 그녀의 번호를 땄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손에 얻은 자유 그 자체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는 전화를 걸지 못했다. 페이는 아마도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뒤집으려는 순간의 흥분된 행동력이 가시고 나자 남은 것은 애매함과 불안함이 동반된 위기였다.

“아직 연애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제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반대로 생각해 봐도 좋지 않을까요? 먼저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안정될 수도 있으니까.”

“경험담이십니까?”

션이 부정하지 않고 명쾌하게 웃었다. 페이는 그 웃는 얼굴을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운이 좋으셨던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진짜로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절대로 흔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아마 페이에게 동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게 있어요.”

“예.”

“능력에 짓눌려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남들이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내게 무엇을 기대하든……. 결국 능력을 이루는 나 자신은 그저 인간에 불과하니까요.”

“예.”

페이는 조용히 긍정했다. 아직까지 그는 인간인 자신이 실감 나지 않았고, 인간인 자신과 도구인 자신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었다.

값비싼 차는 도로가 텅 빈 것처럼 빠져나갔다. 페이는 도로 눈을 내리깔며 뭐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초조해졌다. 그러나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손이 예쁘시네요.”라는 헛소리를 익히려다 말아 어설프기 그지없는 일본어뿐이었다. 이게 무슨 생각이냐고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션의 손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사실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페이는 역시 누나가 이 사람에게 들이대다니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멍한 채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누나와 여동생들은 장윈핑과 진차오밍이 첩이나 후처로 삼을 만큼 제법 예쁘게 생겼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 옆에서 눌리지 않을 만큼 미인은 아니다. 옛날처럼 가볍게 말할 수 있었다면 대체 뭘 믿고 그러느냐고 비웃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게이가 아닌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빤히 알고 있던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고 페이는 흠칫 놀랐다. 당혹감 때문에 몸에 열이 올랐다.

“그러고 보니 훈련하는 것을 잠깐 지켜봤는데, 어마어마하더군요. 무슨 프로스포츠 선수 같던데.”

“신체 강화계는 아니지만 결국 제 능력은 몸을 통해 이용하게 되니까요. 비상시에 순발력 있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신체도 단련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음. 그게 일반론이었죠. 저는 정신 조작계니까 정신과 의사를 만나 보라는 권유를 받았었어요.”

“만나 보셨습니까?”

“만나 보긴 했는데, 두 번 만에 그만뒀습니다. 이것 참. 페이에게 비유한다면 냉각 전문가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요? 맥이 헬스 트레이너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과 똑같을 겁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군요.”

페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전문가라고 해도 GFG 능력자의 능력 구조와 한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텐데요. 저야 강한 신체가 능력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면서도 어디까지나 몸은 보통 인간이라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주군……께서도, 상당히 몸이 좋으신데.”

“단순히 건강과 스스로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었죠. 지금은 몸을 가꾼다는 측면이 있고. 그런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부하로 삼으려고 페이를 살려 준 것도 아니고요.”

“은인이시니까.”

“페이의 은인은 알버트 전하입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서 알버트 전하가 반드시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으면 죽였을 테니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U급 능력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까요. 그게 음, 합리적? 이론적? 대책이었죠.”

“합리적이 맞아요.”

“공부하고는 있는데…….”

페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션이 미소를 지었다.

“발음도 그렇고 많이 나아졌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나에게 필요한 건 부하가 아니라 믿을 만한 동맹자입니다. 그리고 SSB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이상 페이가 헌신할 상대는 왕실이에요.”

“말씀하시는 뜻은 압니다. 국장님에게도 감사하고 있고, 할 수 있는 한 은혜를 갚을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명백하게 당신입니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기회 자체가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희 가족이 머무르실 곳을 마련해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음. 그 이야기는 벌써 스무 번쯤은 들은 것 같은데 말이죠. SSB의 경호를 집중시키고 페이를 헤리퍼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타운 하우스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혜라든가, 신세라든가, 그렇게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하고 한 일이니까. 아직은 내가 주는 쪽이 많을지 모르지만, 조만간에 역전될 겁니다.”

“한번 받은 은혜는 은혜입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죽을 때까지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으니 그 말을 지킬 생각입니다.”

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은혜를 입었으니 갚겠다고 이쪽을 도와준다면 그야 고마운 일이기는 했다. 페이의 가족을 구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준형이고, 준형에게 돈을 자루로 퍼부은 것이 알버트라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가만히 집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GFG를 조금 사용한 것으로 이렇게까지 은혜라며 감사를 받는 쪽이 더 껄끄러웠다. 자신의 능력이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그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혜택이나 이득을 본다는 것 자체가 낯설다. 그것보다는 준형이 말하는 것처럼 일대일의 교환 거래가 마음 편했다.

그 생각을 깊이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페이가 중요한 문제로 자신을 도울 일도 생길 테고, 자기 자리를 잡으면 차차 변할 것이다. 관계는 어차피 단시간에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동맹이라고 해도 이쪽에서 살짝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뭐어, 어쨌든 ‘주군’ 같은 말은 이상하군요. 시대착오적이고.”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그냥 션이라고 하세요.”

“션…… 님.”

“고용인들처럼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션…….”

“잘했어요. 훨씬 낫군요.”

그 이름의 발음은 혀 위를 매끄럽게 굴러 빠져나갔다. 페이는 어쩐지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내기는 어떻습니까? 뭐 불편한 점은 없고요?”

“전혀 없습니다. 스미스 씨가 많이 신경 써 주시고요. 모두가 너무 과분하게 잘해 줍니다. 가족들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생활과는 비교하기 어렵겠지요. 가족들은요? 남동생 둘은 다시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고 했었고.”

“이민자 지원이 잘되어 있는 학교로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큰애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지만 본인이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션……의 말처럼, 적응도 제일 빠르고요. 여동생에게도 권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능하다면 세 사람 다 대학에 보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가족들은 일단 언어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단시간 내에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제 시간이 아주 많지 않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라고 붙이는 게 좋을까. 페이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차는 템스강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갑니까?”

“적당히 사람 없는 공원까지 달려 보죠. 아, 커피 괜찮습니까?”

“단 것이라면…….”

“기다려요.”

션이 길가에 차를 대더니 내렸다. 작은 카페가 보였다.

페이는 곤란한 기분이 되어 두 손에 깍지를 낀 채로 공연히 차 안을 둘러보았다. 이 차도 공작이 선물해 준 것일까. 공작을 만난 것은 여태까지 단 두 번뿐으로, 한 번은 감사의 인사를 하러 갔던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우연히 마주쳐 잠깐 스치듯이 인사를 한 것뿐이었다. 미남은 아니었지만 훤칠하고 품위 있는 신사였다. 서른여덟인가 아홉이라고 들었다. 엄격한 풍모에는 연륜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강건한 육체에 젊음의 예용함 역시 갖추고 있었다.

역시 어떻게 생각해도 누나들에게는 승산이 없지 않은가. 페이에게도 남자들끼리 약혼을 한다든가 결혼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누나보다 공작 쪽이 션에게 백배는 어울렸다. 혀 밑이 쓰다. 쓰리다. 페이는 입속에서 혀를 굴리며 사탕이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내 션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뚜껑이 열려 있는 쪽에는 휘핑크림이 말 그대로 탑처럼 쌓아 올려져 있었다.

“어.”

페이는 그것을 받아 들면서 놀랐다. 션이 웃었다.

“휘핑크림 많이 달라고 했더니 진짜 많이 주더군요. 흘리지 않게 조심해요.”

“고맙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스틱으로 휘핑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사르륵 녹아 없어지는 단맛에 눈이 내리감긴다. 예전에 센터에서 일하던 시절에 동료 중 하나가 애도 아니면서 유치하다고 비웃었지만, 페이는 도시에 나와서 먹어 본 것 중에 이것보다 황홀한 것이 없었다.

션이 자기 종이컵을 홀더에 내려놓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페이는 크림을 야금야금 먹으며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션이 변명처럼 설명했다.

“집에서 이야기해도 안 될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귀가 아예 없는 것과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지요.”

“예.”

오래 가지 않아 작은 공원이 나왔다. 저수지를 끼고 있는 작은 공원에는 산책하는 노인과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렸다. 페이의 종이컵에 쌓인 휘핑크림은 먹기도 하고 녹기도 하여 절반 넘게 사라져 있었다. 작은 티룸이 있었지만, 사람의 귀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아예 들어가지 않는 쪽이 낫다. 둘은 잠시 걷다가 호수를 바라보고 놓인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뻥 뚫려 있는 장소였다.

“별일도 아닌데 괜히 멀리까지 왔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냥 드라이브나 할까 해서 나온 거니까. 차를 굴려 볼 기회도 별로 없고.”

“아닙니다. 하실 말씀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언터쳐블의 정기 모임 때가 다가왔으니까요.”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받았다. 올해는 옐레나가 발송했다. 기존의 메일 주소는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고, 새로 만든 메일 주소는 알리지 않았는데도 잘도 알아내서 보냈다. 페이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일을 하는 입장이라서 관심 없지만, 그런 것도 아는 사람들끼리는 일종의 힘겨루기, 신경전이 되는 것 같았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페이는 짧게 대답했다. 션이 “음.” 하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매년 날짜가 바뀌는 것 같던데 그게 맞습니까?”

“JK가 알려 주지 않던가요?”

“물어보면 말해 주기는 하겠죠. 하지만 빚을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SSB 본부 안에서 물어보지 않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내가 뭘 알고 있다든가, 알지 못하고 있다든가 하는 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국장님과 션은 한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한편이라는 것과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페이라면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통제되기 시작하면 단순한 도구가 되기까지는 순식간이다.

“날짜는, 매년 모인 사람끼리 제비뽑기를 합니다. 모임이 있었던 달의 3개월 후부터 그 이후 1년 사이에 당첨자의 일정에 맞추어서 날짜를 결정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니까.”

자신의 경우 스스로 일정을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도 제비뽑기에 참가한 적은 없다.

“클럽하우스는 베를린에 있다죠?”

“예. 관리인이 따로 있습니다. 실제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멤버 누구와도 연관 없는 사람입니다. 건물 자체는 겉보기에는 지하 벙커를 개조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경호원은 물론이고 가족도 동반할 수 없기 때문에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요. 지상층에서는 GFG 사용이 가능하지만, 지하는 층 전체에 가장 강력한 리스트레인 룸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지상층에는 라운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군요. 일정도 딱히 쓰여 있지 않던데.”

“특별한 일정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다 같이 식사 한번 하고 사나흘 숙식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정도이고요. 그사이에 협상을 하거나 물밑싸움 같은 것이 있기도 하는가 본데, 저는 그럴 입장도 아니고 관심도 없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분위기는 알 것 같군요.”

“아, 그리고 처음에 신고식이 있었습니다.”

“오.”

“장난에 가깝지만, 결국 힘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곳이니까요. 대인 공격력이 전혀 없는 마를린과 칼루, 이토를 제외하고는 누구라도 조금씩은 기 싸움을 합니다. 사실 모임의 목적이 그것이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서열이 정해지고 나면 1년간 그 서열에 따라서 양보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세력 서열도 결정되는 모양이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결정권자가 아니라서 실감해 본 일은 없습니다만.”

션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 혼자 몸이 걸린 게 아니니까 신경을 써야지요. 페이도 도와줄 거고,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요.”

션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페이는 그제야 휘핑크림이 윗입술에 묻어 있는 것을 알았다. 혀를 내밀어 핥기는 추접스러운 것 같고, 손등으로 닦자니 더러워 머뭇거리다 말고 열없이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빨아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내가 빨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페이는 입술을 닦아서 그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 먹어 버린 휘핑크림 밑의 커피에 달지만 예쁘지 않은 잔여물이 남아 지저분하게 보였다.

“저는, 이번에는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페이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션이 흘끗 곁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버트가 이미 이야기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미 국장님과도 이야기된 사항입니다. 여태까지 한 세력에서 두 U급 능력자가 참석한 전례가 없으니까요.”

“음. 단순히 U급 자체의 숫자가 너무 적은 것이 아니고요?”

“칼루의 밑에 U급 능력자가 있었던 적이 있긴 합니다. JK도 마셜의 회사에서 일했었고요. 칼루의 부하는 끝까지 언터쳐블에 가입하지 않았고 JK도 퇴사한 뒤에야 가입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스마일 알 다하브도 사망할 때까지 가입하지 않았는데, 마타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이토가 추측하더군요.”

“그게 관례입니까?”

“관례, 라고 할까……. 저도 가입한 지는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유의사를 가진’이라고 하는 가입조건에 걸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의 명령을 따르는 상태가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건 이상하군요. 남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옐레나 미하일로바나 사니아, 아드난 마타르도 예외가 아닐 텐데요. 지금까지 페이도 장윈핑의 부하였지 않습니까?”

“언터쳐블에 한하여 말하자면, 다른 U급 능력자의 밑에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상급자가 언터쳐블에 가입한 것만으로도 세력 자체가 이미 불가침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U급 능력자의 독자성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국장님은 그러시더군요. 션은 아마 이런 조직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문제가 중대한 사안일수록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아닌가, 컨디션이 어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직접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다른 U급 능력자와 싸우는 문제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냥 잃기에는 아까운 자원이니까?”

“그것도 그렇고요. 많은 경우 관계자들은 자기 단체 소속의 GFG 능력자조차도 두려워합니다.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있던 곳의 특수성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사견입니다만, GFG 능력자의 힘에 대해서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페이는 남아 있는 캐러멜 향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휘핑은 산처럼 올렸어도 시럽을 타지 않았는지 커피가 썼다. 션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미지는 두려우니까.”

그 말이 맞다고 페이는 생각했다.

“SSB도 예외는 아니죠. 강한 능력자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능력자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하지만 미묘하군요. 군대처럼 계급이 잘 짜인 조직이라면, 자율성을 부여받거나 전문가로서 견해를 피력할 수는 있어도 의사 결정 권한 자체가 주어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언터쳐블의 그러한 태도는 오히려 마치 U급 능력자가 아니라면 조직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타 파닌 칼루라든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그는 GFG 능력자를 단순한 소수파나 돌연변이 초능력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류의 진화 형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션이 고개를 기울이며 페이를 바라보았다.

“동조자가 많을 것 같진 않은데…….”

“제법 많습니다. 칼루는 강하고 추종자가 많은 데다가, 칼루를 추종하지 않아도 자기 힘에 도취된 능력자는 많으니까요. 권력을 얻을 수 있다면 개의치 않겠다는 사람도 있고요. 아마 영국 출신인 션은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GFG 능력자가 배척되거나 저주받았다, 혹은 축복받았다고 여겨지는 ‘비문명권’, 아니…….”

“의미는 이해했습니다. 요컨대 사회 자체가 능력자를 배척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경우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능력자들이 칼루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군요.”

“정도는 다르지만, 중국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른 소수자와 달리 저항할 힘이 있으니까.”

“서글픈 일이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언터쳐블 내부적으로 파벌은 크게 세 개로 갈린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한쪽에 아타 파닌 칼루를 위시하여 GFG 능력자가 헤게모니를 쥐고자 하는 쪽이 있고, 반대쪽은 공존을 바라는 쪽으로, 성향을 생각해 보면 마를린과 이토는 현상 유지를, 맥 같은 경우에는 능력자 우위에 입각한 공존을 원하고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준형은 여기에서도 부외자일 것이다. 사실 그는 공평하게 모든 인간을 혐오하므로 능력자라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공존 역시 희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 자체의 성향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군요. 페이는 어떻습니까? 아,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너무 내적인 질문이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억압을 당해 왔고, 현상 유지가 공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운이 좋아 괜찮은 나라의, 괜찮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GFG 해방운동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죄악감과 부채를 느끼고 있고요. 하지만 그것을 포함해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에 대한 태도라든가 생각이 ‘자유의사’라면, 아마 저는 자유의사를 갖고 있지 못한 거겠죠.”

“그렇군요.”

션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침묵했다. 둘은 입을 다문 채로 바람 부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션이 식어가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종이컵을 구겼다. 페이는 써진 다음부터는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죠. 이제는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까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둘은 조금 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봄바람은 완연히 따스해져서, 해가 거의 졌는데도 몸이 싸늘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션이 가자고 일어선 것은 페이가 간신히 커피를 전부 비웠을 때였다. 아직 하늘이 밝은데도 산책로를 따라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페이는 션을 흉내 내어 종이컵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집에 전화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예고 없이 늦게 가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요. 요즘처럼 퇴근 시간이라는 게 있었던 때가 없었으니까 별로 걱정하시지 않을 겁니다. 남자는 사회활동이 중요하다는 게 아버지의 입버릇이기도 하고.”

차는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매끄럽게 도로를 굴러갔다. 페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뒤따르는 차를 눈치챈 것은 템스 강변도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한 대는 눈에 익은 SSB의 비밀 경호 겸 감시역으로 공원에서도 맥라렌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지만, 다른 한 대의 밴은 명백히 수상쩍다. 페이는 그것을 션에게 말해야 좋을지 어떨지 조금 헤맸다. 그냥 둬도 비밀 경호들이 알아서 처리할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아니면 그냥 SSB에서 경호 인원을 늘린 것일지도 모른다.

션이 강변도로를 계속 타는 대신에 다음 나들목에서 빠져나오더니 다시 인적 드문 교외의 길로 들어섰다.

“알고 계셨습니까?”

“밴에 S급 능력자가 타고 있군요. 신체 강화계가 4명, 물리 변화계가 3명, A급의 텔레파시스트가 하나입니다. 확실히 영국인은 아니고요. 이런 상급 능력자 8명이 아무런 용건 없이 미행하고 있지는 않겠죠.”

“등급과 능력의 세부 내용까지 판단하실 수 있는 겁니까?”

“세부 내용까지는 몰라요. 정신 방벽의 단단함과 감촉으로 대략적인 계열만. 시내에서는 SSB에서도 처리하기 어렵겠지요. 그런데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이런 대로변에서 습격하기도 하는 겁니까? 겨우 S급 능력자 7명으로?”

“시간은 그렇게 문제가 되는 요소가 아니죠.”

페이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능력자 간의 싸움은 사람의 눈에 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에 있을 때 습격하기 더 어렵겠지요. 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크고.”

“텔레파시스트가 있잖습니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GFG 능력자는 같은 계통일 때에 한정해서 자기와 비교하여 상대가 상급인지 하급인지밖에 구별하지 못합니다. 텔레파시스트나 정신 조작계의 경우에만, 그것도 자기보다 능력이 낮은 경우에 상당히 넓은 범위로 추정하는 게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션……처럼 등급까지 추론해 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3차 발현 후 션의 능력은 영향력을 미치는 폭이 너무 넓어서 다른 능력자로서는 상위인지 하위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경우 정신 조작계 능력자가 그보다 한 단계나 두 단계 아래의 신체 강화계 능력자에게 살해됩니다. 단번에 상대의 정신 방벽을 꿰뚫어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압도적으로 불리하니까요. 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 슈퍼 카가 폭음을 내며 순식간에 쏘아지듯 가속했다. 경호 차량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페이는 귀찮게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뒤집어 무음으로 바꿨다.

“내려 주십시오.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잠깐 달려 보죠. 액셀 밟을 일도 잘 없는데.”

션이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이는 희한한 기분이 되어 상기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게 흥분할 만한 일이던가. 사선을 오가는 전투를 몇백 번은 겪어 온 그로서는 이런 것은 장난 같은 숫자에 장난 같은 일이지만, 션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에서 주어졌던 임무라는 것들의 수준을 생각해 보면 이게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만한 일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다.

“아, 걱정 말아요. 150마일 이상은 밟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운동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따돌리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저쪽은 이런 일의 프로일 텐데 내 능력으로 따돌릴 수는 없겠죠. 여기에서 처리해 버려야 안심하고 런던을 떠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순식간에 런던을 벗어나 시외의 국도로 접어들었다. 페이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국장님입니다.”

페이는 알려 주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돌리게.」

알버트는 얼어붙은 목소리로 제일 먼저 그 말부터 했다. 페이는 얌전히 소리를 스피커로 돌렸다. “말씀하십시오.”라고 하자 알버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 둘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션, 엘리엇이 추격전을 하라고 그 차를 사 준 게 아닐 텐데!」

“아.”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엘리엇에게 전화하겠네!」

알버트라고 해서 엘리엇에게 이른다는 선택지가 내키는 일이었겠느냐마는, 페이는 몰라도 션을 제어하는 수단으로는 이것이 제일 빨랐다. 션이 “죄송합니다.”라고 생각에도 없는 사죄를 했다.

“여기 음, B375 국도입니다. 수습할 사람 몇 명만 보내 주세요. 페이, 만약에 뒤따라오는 차가 미끄러지거나 사고가 나면 확산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방에 얼음벽을 세워 제 위치에 고정시킬 수는 있지만, 그런 식으로 세울 경우 신체 강화계를 제외한 다른 탑승자의 목숨은 확보할 수 없습니다.”

“전원 다 살려야 해요?”

「텔레파시스트는 살렸으면 좋겠군. 뭘 할 셈인가? 페이가 시동을 끄고 자네가 제압하면 위험할 것도 없이 간단히 끝날 것 같은데.」

“연습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요. 페이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충분하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숙련도가 떨어지니까. 흔하지 않은 기회이잖습니까?”

「알았네.」

알버트가 곧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션이 속도를 줄이자마자 도로가 푹 녹아서 패였다. 뒤차의 물리 변화계 능력자가 한 일이다. 션은 다급하게 핸들을 비틀어 구덩이를 피했다. 다음 순간 뒤따르던 밴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끼익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페이는 밴이 미끄러지는 것을 따라 얇은 얼음벽을 여러 겹 쳐서 운동에너지를 감소시켰다. 밴은 스키드마크를 남기며 팔십여 미터를 미끄러지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조금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션은 차를 돌려 밴으로 다가갔다. 정신 방벽을 뚫는 것에서부터 완전히 의식을 장악하기까지의 사이에 시간이 걸렸다. 길에 아무도 없었고 페이가 완충을 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런던 시내에서 할 만한 일은 정말로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동적인 일에는 맞지 않는다.

신체 강화계를 제압하는 데도 시간이 이만큼 걸린다면, 정신 조작계는 꽤 신경이 쓰일 것이다. 단순히 GFG의 성질만으로 따진다면 션 자신에게 위험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지금처럼 차로 사고가 난다거나 한다면 곤란하다.

맨몸으로 위험물이 없는 공간에 서 있는 이상 두 사람 다 S급 능력자를 상대로 위험해질 일은 없으므로 그들은 별생각 없이 내렸다. 밴에서도 사람들이 내렸다. 공손하게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여 내미는 모습에서는 적의의 파편도 찾아볼 수가 없다.

“누가 보냈습니까?”

“류위안창 전인대 위원장이십니다.”

대표인 듯한 남자가 대답했다.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채였다. 페이는 헛웃음을 쳤다.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사람이 조종당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의식을 장악해 버리는 것은 그에게 은혜를 입은 자신에게도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션은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기분 나빠해도 됩니다. 페이의 말마따나 정신 조작계 능력자는 지구 밖으로 추방해야 마땅한 쓰레기라고 나도 생각하니까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

페이는 머뭇거렸다.

“거부감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션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싸워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비록 현대전에 최적화된 GFG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것이 유용하니까 좋다든가 물리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 가치가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U급이 된 뒤에는 말이다.

“싸워 이긴다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션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생각은 알고 있습니다. 그게 내가 당신을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이유이니까요.”

“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이상할 정도로 목구멍이 꽉 막혀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페이는 거의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가가 심장 아래를 막고 혈관을 두드리는 것처럼 힘들어지고, 그것이 들킬까 봐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면서 페이는 왜 들킨다든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건지 스스로 의구심을 느꼈다. 더는 생각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어차피 눈앞의 이 사람을 상대로는 내심을 숨긴다든가 드러낸다든가 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 피부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살점의 경계는 그의 시선에서 마음을 가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뒤처졌던 경호 차량이 곧 따라붙었다. 요원 세 명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가,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아무 행동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알고 멈칫했다.

“맥케인 씨, 장 요원.”

“괜찮습니다.”

션이 다가와도 된다는 제스처를 했다.

“국장님에게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이들이……?”

“무기력 상태로 만들어 두긴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데려가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S급 능력자라면 제가 없는 곳에서 완전히 협조적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세뇌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 것 같군요.”

“그럼 함께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국장님께서도 가능하다면 협조를 구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오늘은 좀 곤란하군요.”

“그럼 홀본 지부에 잠깐만 들르시죠. 구속 조치를 한 후에 풀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나, 하고 션이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장 요원은 우리와 같이 타는 게 좋겠군요.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션은 고개를 기울이고 조금 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목표는 애초부터 저였을 겁니다. 류 위원장이 션을 노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염려 마십시오. 이런 일에는 익숙합니다.”

션이 그럼 홀본 지부에서 만나자며 혼자 맥라렌에 올랐다. 페이는 다른 요원들과 함께 경호 차량과 밴에 나누어 탔다. 앞서 달리던 맥라렌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운전을 하던 남자가 짧게 탄식하는 소리를 내면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에게 빠르게 뭐라고 말했다. 그것이 질투인지 감탄인지 페이로서는 확실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관심을 돌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창밖에 펼쳐지는 이국의 거리에는 일평생 한 번도 그가 연관될 일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삶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의 삶도 이제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펼쳐질 것이 틀림없었다.

밴과 경호 차량을 앞질러 한발 먼저 홀본에 도착한 션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알버트가 타고 다니는 연식 오래된 회색 소형차가 세워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는 알버트가 이 지부에 올 때마다 사무실로 사용하는 작은 회의실로 직행했다. 런던 사태가 있었던 이래 홀본 지부는 일개 안가에서 벗어나 제2의 본부 같은 느낌이 되었다. 페이가 SSB 소속이 되면서 조직 내부에서 GFG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SSB는 전보다 적극적으로 GFG 문제에 대처하게 되었으며, 중국 내부의 권력 투쟁과 GFG 능력자 해방운동에도 개입하고 있었다. 홀본 지부는 SSB 내의 GFG 능력자와 연구원들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것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부어 새로 구축한 리스트레인 룸과 외부 제어장치가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하튼 남에게 뱃속을 다 까놓지 않고, 좋은 일을 함께 축하하는 것조차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믿는 알버트의 성격상 직접 말한 적은 없어도, 지금의 SSB가 전에 없이 활력 넘치는 상태인 것만은 분명했다.

사무실에는 예상대로 알버트가 혼자 있었다. 문을 한 번 두드리고 열자 그는 통화를 하고 있다가 션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션은 잠깐 복도로 나가 알버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들어오게.”

잠시 무료하게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션은 다시 문을 열었다. 알버트가 언제나의, 약간 기분이 상한 듯한 찌푸린 얼굴이다. 감정 상태는 평이한 불호이다. 션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 같으면 기분 나빠했겠지만, 알버트가 특별히 이쪽에 불만이 있거나 불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고민이 많아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었다.

“자네 혼자 돌아왔나?”

“페이는 경호 차량에 함께 탔습니다. 다른 요원들이 포로가 정신을 차릴 것을 우려하는 것 같더군요. 제가 전하에게 여쭤볼 것도 있었고.”

“말해 보게.”

“S급 능력자가 7명이나 입국했는데 정말로 몰랐던 겁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습격을 방치한 겁니까?”

알버트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파일을 덮으며 등을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만약 후자라면, 뭔가 문제라도 생기는 건가?”

“아니요. 그냥 제가 조금 더 전하를 경계하게 될 뿐이겠죠. 그게 문제인가 문제가 아닌가는 전하께서 판단하실 일이고.”

알버트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방약무인해지는군, 자네. 이제는 진짜로 U급 능력자같이 굴고 있어.”

“방자하다고 화내지 않으십니까?”

오히려 알버트는 눈매를 느슨하게 하고 그를 보았다.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으나 눈빛이 약간 온화해진다. 엘리엇도 비슷한 얼굴을 종종 하기 때문에 션은 어렵지 않게 그 얼굴을 웃음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내가 혐오하는 건 비굴함과 오만함이라네. 양쪽 모두 멍청하니까. 예전의 자네처럼.”

“겸손하려고 애썼던 거죠.”

“겸손과 비굴은 전혀 다른 것일세.”

맞는 말이다.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버트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아, 그래. S급 능력자가 입국한 걸 모르고 있었느냐면, 그건 아닐세. 알고는 있었지만 손댈 수 없었다는 게 맞지. 류위안창은 외무부를 손에 넣고 있어. 그자들은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었네.”

“듣기만 해도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짐작이 가는군요.”

“S급 능력자라는 이유만으로 입국을 불허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먼저 손을 쓸 수도 없었다네. 상대가 장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언제 습격할지, 정말로 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만전의 호위라는 것은 낭비야. 어차피 장에게는 위험하지도 않을 텐데.”

“습격을 유도한 후에 제압하는 쪽이 모든 부분에서 간편하지요. 이해했습니다. 페이의 동의를 구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알버트가 손톱 끝으로 파일을 두드렸다.

“요원으로서, GFG 능력자로서 장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중국 내부 정황을 모두 알려 주고 자문이나 조언을 구할 만한가 하면,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네.”

“그래서 전부 숨기고 장윈핑과 똑같이 그를 병기로 다룰 생각입니까?”

“일개 요원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하고 있을 뿐이야.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조언을 구하고, 적절한 사람에게 임무를 부여하지. 장이 예외인 게 아니라네. 시간의 문제도 있어. 장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자네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의논을 함께 기에는 그는 아직 신참자에 불과하지. 자네와는 경우가 달라. 장은 자네가 아닐세.”

영국 국민이며, 헤리퍼드의 일원이고, 튜더의 혈맹인 자와는 말이다. 또한 그만큼이나 다른데도 션이 지나치게 장페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서 알버트가 그를 바라보았다.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적인 불만은 남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는 압니다.”

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버트가 시계를 잠깐 보고는 “좀 늦을지도 모르겠군.”이라고 운을 띄웠다.

“장은 어떻던가? 이야기해 본다고 하더니.”

“정서적으로는 꽤 안정되어 있습니다. 고민이 많은 건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더군요. 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으니 아무 생각도 없는 쪽이 오히려 걱정이겠죠.”

“그야 그렇지. 여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던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션의 대답을 듣고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나로서는 빨리 결혼이라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정착해 주면 좋겠지만.”

“하하, 아직 일러요. 스물다섯도 되지 않았는데. 아마 그럴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는 지금의 가족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외출 금지가 풀리자마자 제일 먼저 여자의 전화번호를 얻으러 갔다고 했을 때는 놀랐는데 말일세. 그 여자의 근황에 대해서는 자네 말대로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있네. 그런데, 그게 필요한 건가?”

“절박한 순간에 마음을 두드린 사람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겁니다. 페이의 정신은 상당히 마모되어 있었어요. 연애 감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게 페이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었는지 션은 거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페이가 안정되고 나면 한 번쯤 더 만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네 생각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글쎄. 나와는 견해가 다르군.”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션은 약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언터쳐블 정기 모임에 참석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셨다고요.”

“상황이 너무 예민해. 중국 센터 출신의 GFG 능력자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네. 이력을 조사하여 일부는 받아들일 거지만, 장이 영국 내부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건 그를 위해서도 좋지 않아. 이건 오히려 그의 안전을 위해서라네.”

“그렇군요.”

“정신적 안정성의 중요함은 자네 덕에 실컷 알았으니까 앞으로도 신중을 기해야지. 당분간 장은 적응에 초점을 두게 될 걸세. 언터쳐블 문제는 자네가 알아서 하길 바라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친목 모임인데.”

내부에 파벌 같은 것이 있어도 말이다. 이번이 처음이니, 적당히 분위기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알버트의 핸드폰이 울렸다. 포로들을 리스트레인 룸에 감금하는 작업이 끝났다는 보고였다.

요원들은 밴과 경호 차량에 반씩 나누어 실은 포로들을 내리게 하여 리스트레인 룸으로 연행했다. 션도, 페이도 걱정하지 않았으나 다른 요원들은 행여나 무기력 상태가 풀리기라도 할까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페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제정신이 든다 하더라도 그는 15초 안에 S급 능력자 30명 이상을 격살할 수 있었다. 능력을 전개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가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숫자로 세지 않고 땅의 넓이로 세게 된다.

류위안창이 S급 능력자 7명을 보낸 것은 페이의 능력에 대해서도, GFG 능력자의 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윈핑이었다면 부대 단위를 동원하기 전에는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U급 능력자에 대한 공포는 폭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종종 환상 속의 괴물처럼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반대로 그것이 과장된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에 맞추어 재단하는 자도 있다. 사실 그 두 가지에서 벗어난 자는 흔치 않았다.

포로들의 손발에 제어기를 채우고 제어실로 돌아오자 잠시 후에 션과 알버트가 뭔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어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페이는 어휘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아직 상대가 느리고 정확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띄엄띄엄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알버트의 발음이나 억양은 일대일로 이야기할 때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알버트가 션에게 GFG를 해제하도록 말했다.

“전부 제어할 수 있어요? 외부 제어장치 수리는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2차 방어 라인까지 완성되었네. 애초에 자네를 기준으로 설계하고 있는 거야. S급 7명에게 뚫릴 만큼 자네가 좀 약했으면 좋겠군.”

얼마나 돈을 퍼붓고 있는 줄 아느냐며 알버트가 투덜거렸다. 션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딸각 손가락을 튕겼다. 리스트레인 룸을 비추는 모니터에서 일곱 명이 한꺼번에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비쳤다.

포로들은 서로 빠른 속도로 대화를 나누더니 GFG를 끌어 올렸다. 스피커를 통해서 “어떻게 된 거지?”, “괜찮아?”, “여긴 어디지?”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일곱 명이 동시에 GFG를 발현했어도 션이 힘을 내보낼 때와는 전혀 달리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체 강화계 능력자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오퍼레이터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션에게 한 번 데고 나서, 페이가 직접 실험하여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두 명도 찾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SSB는 여전히 리스트레인 룸에 대한 신뢰를 되찾지 못한 채였다.

“제어력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7명도 가뿐하군.”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션을 돌아보았다.

“심문을 참관할 생각은 없겠지?”

“바쁩니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애스터 하원 의원과 만나기로 했었지.”

“엄밀하게는 조카인 애스터 씨이지만요. 준비도 있으니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합니다. 좀 늦었어요.”

션이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다고 인사하는 그에게 알버트가 말했다.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뭔가, 호의로 말씀하시는 것은 알지만, 전하에게 그런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해요, 페이.”

페이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션은 여러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네고 제어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알버트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두지 않는 쪽이 좋아.”

“예?”

페이는 당황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냉엄한 눈동자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나……. 그렇다면 됐네.”

알버트는 짧게 그렇게만 말했다. 페이는 어금니를 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속 깊은 곳에서 열처럼 올라왔지만, 이내 도로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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