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January.
딩딩딩. 맑은 종소리가 울려서 션은 침대 시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조금 움직이고 눈을 반개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엘리엇이 어딜 갔을까 하고 몽롱하게 생각하다가 그는 침대가 바뀌었음을 기억해 냈다.
며칠 전에 케이론의 방이 완성되었다. 도중에 공사가 한 달도 넘게 중단되는 바람에 시일이 오래 걸렸다. 션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탄력이 붙어서 며칠 만에 완성되어 버렸다. 별수 없이 그는 엘리엇의 방에서 쫓겨나 이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 갔지만, 이래서 언제 익숙해지겠느냐며 엘리엇이 사흘 전부터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째 독수공방이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그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18세기나 19세기 배경의 영화를 찍어도 될 것 같았던 고풍스럽고 화려한 실내 공간은 완전히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되었다. 금전적인 값어치나 전통적인 의미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션이 보기에는 엘리엇이 쓰는 공간보다 더 훌륭했다. 아마 자신에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집을 가지게 해 준다고 해도 이보다 세련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 봐야 엘리엇이 없지 않은가. 그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기어 나와 목욕 가운을 챙겨 욕실로 발을 질질 끌며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종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공들여 이를 닦고 매끈하게 코밑과 턱을 정리한다. 침실에 딸려 있는 욕실에는 매일 아침 그가 일어나기 전에 새 면도칼이 준비된다. 어제저녁에 사용한 수건은 이미 치워지고 새 수건이 걸려 있다. 이 집에 묵는 것은 집에서 잔다기보다는 호텔에 숙박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는 텅 빈 곳이다.
엘리엇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느껴지지 않지만, 그가 자리를 떠나면 그렇게 된다. 그건 단순히 션에게 있어서 엘리엇의 존재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집에 있는 사람이 엘리엇 혼자이기 때문이었다. 메이드, 풋맨, 운전사, 요리사, 정원사, 그 외에도 각자 일을 맡아 오가는 고용인은 수백이지만, 그들은 이 집의 부속품일 뿐이지 사람이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든 존중하지 않든 상대를 사람으로 인정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중을 받으면서 편안히 있기 위해서는 고용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훌륭한 고용인들도 주인이 그렇게 느끼지 않도록 행동한다.
헤리퍼드의 고용인들은 지나치게 잘 훈련되어 있었고, 원한다면 아무 곳이나 휘적거려도 하루 종일 한 명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명확한 접촉을 해 오는 사람은 집사와 하녀장 정도인데, 그나마도 특별히 시중을 시킬 때가 아니라면 먼저 말을 걸거나 시선을 주고받는 일이 없다.
션이 그런 집의 생활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알 아시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미란 알 아시리에게는 부인이 넷이고 자식은 열셋이었으며, 그 자식들에게도 자녀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유모가 붙어 있었고 학교에 다닐 아이들에게는 가정교사가 있었다.
미란의 형제들 중 두 명이 같은 집에서 살았고, 선대 에미르의 아내들도 각각 별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놀이 상대로 불려 온 고용인의 아이들, 션과 같은 피보호자들이 있고, 거의 매일 손님과 친척들이 드나들었다. 천 명에 달하는 고용인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고양이처럼 다녀도 집은 늘 북적거렸고, 지나칠 정도로 질척했다.
그에 비해 헤리퍼드 저택은 어떠한가. 이 집에서 인간인 것은 오로지 엘리엇 혼자뿐이다. 온도와 습도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을 공기조차도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바스락거린다.
이런 곳에서 혼자서 몇 년이나 살고 있다면 엘리엇이 아니라도 가슴이 메마를 것이다. 아일라가 떠났을 때 그가 느꼈을 고독을 생각하면 션은 가슴 저림과 일종의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만들겠다고 션은 생각했다. 캐번디쉬의 아파트나 자신의 집에서처럼 다정하고 편안하게 함께 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단둘만의 삶이 아니라도 괜찮다. 션은 거기까지 욕심부리지는 않았다. 개인으로서의 엘리엇은 호화나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 단출한 생활도 지금의 삶과 다르지 않게 받아들이겠지만, 헤리퍼드 공작의 삶은 이 저택과 떼어 놓을 수가 없으니까.
뜨거운 물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자 벤이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션 님?”
“깨워 줘서 고마워요. 애쉬튼은요?”
“오늘 비번이라서 제가 대신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쟁반을 들어 올려 션에게 커피 잔을 내밀었다. 케이론의 방에는 커피 머신을 설치했으니 굳이 아침에 차나 커피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집사들은 좀처럼 듣지 않고 직접 내린 커피를 가져오곤 했다. 그러나 10년 이상 훈련한 차와 달리 커피를 제대로 내릴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임시로 파티시에가 만들었다는 커피를 가져왔지만, 수준이 헤리퍼드에 맞지 않는다는 듯하고―그것도 션에게는 충분히 맛있었다― 본래 자기 일이 아니라며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윌리엄이 전속 바리스타를 채용하려는 것을 션은 2차 면접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것도 누구의 커피가 제일 맛있는지 마셔 보라고 하여 알게 된 것이다.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으므로 별수 없이 그는 계약 내용을 바꾸었다. 그중 가장 젊은 사람을 채용하고, 자신의 전속으로 만드는 대신 타운 하우스 안에 작은 구내카페를 차리게 한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집에서 커피를 마시더라도 설비해 놓은 머신에서 뽑으면 그만이다. 끝까지 거부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 2차 면접까지 왔으면 그중 하나는 채용한다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갑자기 전부 백지로 돌린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만큼이나 보수적인 헤리퍼드의 고용인들 다수가 커피보다는 차를 선호했다. 그러나 카페인이 필요한 사무직원들과 종이컵을 들고 다니기를 원하는 젊은 사람 여럿이 기뻐한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제대로 된 다기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정식 애프터눈 티 때뿐이다. 애프터눈 티라고 해서 직장에서 우아하게 티 포트에 홍차를 우리는 일 같은 것은 오브라이언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집사들은 고심 없이 아침마다 바리스타가 내린 진한 드립 커피를 가지고 올라오곤 했다. 션으로서는 그냥 거실에 설치해 놓은 머신의 버튼을 누르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한 일이었지만, 그가 좀 더 시중받는 일에 익숙해져야 모시는 사람도 편해진다는 윌리엄의 충고 때문에 말없이 받아 마시고 있다.
그러나 너무 부리는 쪽의 입장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엘리엇이 사람의 존재에 쉽사리 무신경해지는 만큼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윌리엄의 충고는 가능한 한 존중하고 싶지만,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였다.
“주인님께서는 장미 온실에서 벌커리 경과 함께 계십니다. 션 님이 깨어나시면 같이 아침 식사를 하셨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커피는 반만 마셔야겠다. 커피 잔을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비가 오고 어두운 것이 오늘은 춥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벤이 말했다.
“저녁까지 계속 쏟아질 거랍니다. 주인님께서 참가하시기로 하셨던 폴로 경기는 취소되었습니다. 원래 오늘 일정은 경기 후에 팀원들과 함께 애프터눈 티를 즐기신 후에 클럽에서 저녁 식사를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취소되었으니 애프터눈 티에 꼭 참석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티타임 시간에 맞춰 가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요.”
션은 호로록 커피를 들이마시다가 잔 너머로 벤과 눈이 마주쳤다. 벤이 싱긋 웃었다. 그는 엘리엇이 애프터눈 티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벤의 말이 자의적인 판단임을 알았다.
처음에 션은 약간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션이 이 집에 방문한 첫날부터 단순한 집사의 자리를 넘어 사무적인 것 이상의 호의를 보여 왔는데, 이유 모를 호의만큼 션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없다. 게다가 그는 키가 크고 훤칠하며 집사라는 이미지에는 전혀 맞지 않은 탄탄한 몸에 호남형의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빈틈없이 갖춰 입은 정장 아래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역삼각형의 체형과 긴 다리를 보면 아마 몸매도 잘 가꾸어져 있을 것이다. 션은 엘리엇이 그에게 성적인 흥미를 느낀 적이 있으리라는 것에 1백 파운드쯤은 걸어도 좋았다.
15분 만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이다. 그의 욕망은 야심이고 자존심이며, 호의 역시 그에 의한 것이다. 션은 그런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이 훨씬 낫다. 맹목보다는 계산속이 있는 호의가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도 주고받는 것이 정확한 사람은 폭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션도 마주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커피 잔을 내려놓고 침실로 도로 들어갔다. 드레스룸에서 간편한 검은 바지와 체크무늬 셔츠를 꺼내 갈아입는다. 벤이 팔에 가운 한 벌을 걸치고 뒤따라 들어오더니, 그것을 스툴에 내려놓고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새하얀 리넨 셔츠를 꺼내어 권했다.
“이것으로 하시지요.”
“음. 겨울에 입기엔 얇지 않아요? 온실이 많이 더운가요?”
“비 때문에 기온이 떨어졌으니 어차피 셔츠 한 벌로는 추우실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걸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가지고 들어온 가운을 펼쳐서 보여 주었다. 그것은 왼쪽 자락에 녹색의 비단실로 자수가 놓인 군청색 벨벳 가운으로, 약간 낡은 감은 있지만 깨끗하게 손질된 상태였다. 벤은 션이 설명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선대 공작님께서 즐겨 입으시던 가운입니다.”
“아.”
겹쳐 입으려면 확실히 흰색이 좋을 것이다. 션은 이런 것을 입어도 되는가 약간 고민하면서 흰 셔츠로 갈아입었다. 벤이 정중하게 션의 어깨에 가운을 입혀 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나온 것은 윌리엄의 허락 없는 돌출 행동이다. 그리고 그는 윌리엄이 꾸짖을 리 없으며 엘리엇이 흡족해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장이 약간 짧은 듯도 했지만, 아주 잘 어울렸다. 하긴, 누더기를 걸쳐도 오트쿠튀르처럼 소화해 낼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찬사했다.
“딱 맞군요. 훌륭하게 어울리십니다.”
화려한 용모이니 무슨 장식을 해도 눌리는 일은 없겠지만, 반대로 장식 없는 흰색 셔츠만 대어도 미목수려함이 돋보인다. 거기에 가운에 묻어 있는 세월이 연륜처럼 품위 있게 어깨에 내려앉자 션은 마치 저택의 진짜 주인처럼 보였다. 벤은 매우 만족했다. 엘리엇은 기호가 희박한 편이지만, 약혼자가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정작 션 본인은 이런 옷이 낯설어서 약간 어색하게 거울을 보았다. 이 가운은 실제 입을 옷이라기보다는 박물관에 전시해야 될 종류의 작품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다르지도 않으리라.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벤이 그에게 우산을 받쳐 주었다.
온실은 몇 대 전인가의 공작 부인이 고향인 플로렌스를 그리워하여 저택의 뒤편에 따로 만들게 했다는 작은 이탈리아풍 정원의 옆에 있었다. 여러 구획으로 나뉜 타운 하우스의 정원은 계절에 따라 돌아가며 일부분을 외부에 공개하고 있는데, 겨울에 이 온실과 정원이 비공개 구역이라고 벤이 설명했다. 겨울에는 장미 도둑이 평소보다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실의 공기는 생각하던 것처럼 텁텁하거나 하지 않았다. 새초롬히 젖은 장미에서 향기가 피어올라 흙냄새와 비 냄새와 뒤섞여 후각을 현혹한다. 천사의 조각상을 타고 오르는 덩굴장미의 조각에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빗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엘리엇은 온실 끝에 만들어진 낮은 스탠드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쌓여 있고, 빵 바구니와 쿠키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이자벨 벌커리가 그 옆에 서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데이비드가 공손한 자세로 찻주전자를 기울이고 있었다.
“엘리엇 씨.”
한 단짜리 계단을 올라가며 션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불렀다.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가 일어나 시트 속에서 마주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아침에 만나는 것에도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엘리엇이 그를 바라보고는 잠깐 말을 잃었다. 션은 의아한 기분으로 그에게 다가가 안녕히 주무셨느냐고 인사하면서 뺨에 키스했다. 엘리엇이 놀란 듯이 움칫했다가 약간 머뭇거리며 키스를 되돌렸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의례적인 칭찬보다 확실히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척, 잘 어울리는군.”
억눌린 목소리였지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게 명백했다. 귓불도 약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괜스레 션도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제가 입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옷장에서 묵히고 있던 헌 옷일세. 자네에게 잘 맞으니 기쁘군. 생각도 못 했는데. 벤이 꺼냈나?”
데이비드가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벤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이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가 미소했다.
“하긴,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더 드물겠지. 쓸 만한 게 더 있을 거야. 어깨 폭이 문제가 되려나. 벤.”
“찾아보겠습니다.”
“합하, 그건 헤리퍼드의 가전인데…….”
이자벨이 끼어들었다. 엘리엇이 대꾸했다.
“어차피 딱히 입을 사람이 없어서 놔뒀을 뿐인 물건이야. 가전이니 뭐니 이름을 붙여서 귀하게 놔둘 만한 것들도 아니지만, 자네가 상관할 일도 아닐세.”
“……예.”
그녀가 할 말이 더 있는 듯이 입을 벌렸지만, 그 말을 밖으로 뱉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벤이 비어 있는 찻잔을 카트에서 내려 션의 앞에 내려놓고 홍차를 따랐다. 션은 바삭바삭한 크루아상을 집어 들었다.
“저 없이 잘 주무셨어요?”
“늦잠을 잔 건 내가 아니라 자네 쪽이라네.”
할 말이 없었다. 션이 웃자 엘리엇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일요일인데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이자벨도 와 있고.”
“자네가 바쁜 것 같기에 일부러 미뤄 두었네.”
“저랑 상관있는 일이에요?”
“걱정하지 말게. 심각한 일 아니니.”
그가 들고 있던 서류에 서명을 해서 이자벨에게 건네주었다.
“이걸로 끝인가?”
“이제 션 님께서 서명하시면 됩니다.”
이자벨이 쌓아 올린 서류들을 확인하고 조금 전에 엘리엇이 서명한 서류를 션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스피로 호텔의 구조 조정이 끝나서 경영이 제 궤도에 올랐으니 자네에게 주려고 하네.”
“네?”
“카드를 쓰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기껏해야 물건이나 살 수 있지 않은가. 앞으로 여기저기 돈이 들어갈 곳이 많을 테니까. 신탁예금도 생각해 봤는데, 역시 자네가 희망하는 일을 생각하면 좀 더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쪽이 낫겠지 싶어서.”
션은 당혹하여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겨 뒀으니 그냥 두어도 알아서 잘 굴러갈 걸세. 관심이 생기면 그때 가서 좀 들여다봐도 괜찮고. 자네가 원할 때까지는 내 회사에서 함께 관리하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뇨. 그게 아니라……. 엘리엇 씨는 이것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냥 선물로 주시기에는 너무 과하지 않아요?”
“그럼 약혼 예물이라고 하지.”
“이렇게 큰 약혼 예물이 어디 있어요?”
말하면서도 션은 얼굴을 붉혔다. 기쁜 것은 기쁜 것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엘리엇의 입에서 나오는 약혼이라는 단어는 매번 이게 꿈이 아니구나 싶어서 몹시 그를 수줍게 했다.
“장래성으로는 확실히 크지만, 현재 가치로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닐세. 오히려 내가 예물이라고 주는 게 작아도 곤란하지.”
그렇다고 진짜 관습적인 의식으로 주는 건 아니라고 엘리엇이 말했다. 션은 이마를 긁적였다. 엘리엇이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재산을 과하게 퍼 주려고 할 확률과 그랬을 때 이자벨이 입 다물고 있을 확률을 합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마 받는 게 맞는 것이리라.
역시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서류에 서명했다. 이자벨이 이십여 장의 서류를 차례차례 내밀었다. 어련히 알아서 해 줄까 생각하면서 션은 서류에 무차별로 서명했다.
마지막 서류까지 서명하고 나자 엘리엇이 이자벨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휴일까지 수고를 끼쳤네.”
“아침이라도 들고 가시지 않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녀는 션에게 방긋 웃어 보이고 두 사람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갔다. 션은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이자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알고 나서 이제 반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러고도 테이블에는 서류가 더 남아 있었다. 션은 빵에 잼을 바르면서 물었다.
“일이 또 있어요?”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못 되고, 단순한 보고서일세. 아일라와의 서류 정리가 드디어 끝났다네.”
“아…….”
션은 짧게 신음했다. 이혼 신고서는 진즉에 수리되었지만, 그에 따르는 긴 계약서의 처리가 남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좀 더 빨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것도 션이 친 사고로 인해 늦어진 것이다.
“예물도 되돌아와서 자네에게 보여 줄까 했다네. 약혼반지와 결혼반지는 가문의 역사에 관련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일라가 파리로 갔을 때 그냥 각자 정리하기로 했지만, 공작 부인의 반지도 그렇고 다른 예물들은 남아 있었거든. 여성용이니까 자네에게 줄 수는 없겠지만 의논은 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가 금장식과 붉은 실크로 화려하게 꾸며진 상자를 션의 앞으로 밀었다.
“의논이요?”
“보관은 자네가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박물관으로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네. 보석 세트는 할머니가 결혼 선물로 받은 것을 어머니에게 물려주셨다가 아일라가 받았던 것이고, 반지는 대대로 공작 부인에게 물려지던 것이야. 하지만 헤리퍼드는 내 대에서 끝일 테니 더 이상 이것을 물려받을 사람은 없겠지. 여러 가지로 미리 준비하려고 생각하고 있네.”
엘리엇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은 어쩐지 조금 슬프게 들렸다.
션은 “네.”라고 중얼거리면서 엘리엇의 손등을 가볍게 덮어 어루만졌다. 엘리엇이 느끼지 못하는 만큼 자신이 그 감정을 전이 받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가문의 끝을 준비한다는 것이 엘리엇 자신의 끝을 준비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며,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그를 양보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상자 안에는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티아라와 목걸이, 귀걸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다른 상자에 들어 있는 공작 부인의 반지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한 오렌지색 다이아몬드와 수십 개의 다른 보석들로 만들어진 값진 물건이었지만, ‘끝’이라는 말과 함께 보면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데도 저무는 석양처럼 쓸쓸하게 보이는 것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멋지네요. 이쯤 되면 보물이겠죠? 실물을 구경한 게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네요.”
션은 미소하면서 상자 뚜껑을 닫았다.
“박물관에 보내서 여러 사람이 보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데이비드에게 맡겼다.
손을 뻗어 엘리엇의 손끝을 톡 건드리자 그가 약간 웃음을 띠었다. 가볍게 손가락이 서로 얽힌다. “식사를 해야지.”라고 엘리엇이 타일렀다. 핑거 쿠키보다는 엘리엇의 손가락 쪽을 먹으면 안 될까. 빼내려는 손끝을 붙잡아 끌어당기고 손톱 위에 입 맞추고, 더 끌어당겨 이번에는 반지 위에 키스한다. 검지 손톱을 가볍게 빨아 들이자 엘리엇이 손에 힘을 주었다.
“션.”
부르는 목소리에는 달콤한 한숨이 섞여 있었다.
벤이 눈치 빠르게 데이비드를 끌고 사라졌다. 데이비드는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불만 때문에 꾸물거렸으나 벤이 팔을 콱 움켜잡자 엘리엇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상을 쓰며 하는 수 없이 끌려갔다.
션은 내심으로 벤에게 고마워하면서 혀를 내밀어 엘리엇의 손가락을 좀 더 깊이 물고 혀로 휘어 감는다.
“션, 자네는 아직 식사도…….”
“엘리엇 씨한테 키스부터 하고요.”
엘리엇의 얼굴이 붉어졌다. 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곁으로 건너갔다. 가볍게 아랫입술을 어루만지자 엘리엇이 눈을 감으며 입술을 벌렸다. 션은 고개를 기울여 그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에서 단 향기가 났다. 부드럽게 비비고 깨무는 키스가 이내 깊어졌다. 엘리엇의 손이 션의 목뒤에 감겼다. 두 입술을 꼭 모아 혀를 빨아 온다. 션은 헐떡이며 그의 등을 젖히고 검지로 선을 긋듯이 턱부터 목까지 훑어 내렸다.
온실에 가득 차오르는 빗소리와 꽃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엘리엇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션은 아쉽게 그를 놓아주었다. 젖어 든 입술과 인중을 마지막으로 한 번 깨물고 물러나자 엘리엇이 눈가까지 발갛게 변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왜요?”
“심장이 뛰어.”
엘리엇은 당혹한 얼굴을 한다. 헤매는 아이처럼 시선이 흔들리며 션의 얼굴을 훑다가 결국 목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은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쿵쿵대는 소리가 자신의 가슴 속이 아니라 밖에서 나는 소리 같은 느낌도 든다.
엘리엇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지만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아서 다시 길게 내뱉었다. 이상하다. 가슴이 욱신거리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지만, 특별한 일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요즘 자꾸만 그렇게 된다.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왜인지 션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도로 시선을 들려다가 키스로 붉게 물든 입술에 눈길이 닿자 도로 떨어뜨리고 만다. 얼굴에 화기가 올랐다. 션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깍지를 잡아 얽혀 든 손가락에 엘리엇은 시선을 주었다. 왜인지 무척 무력해진 기분이 들었는데, 그것이 기분 좋았다.
“저도, 그래요.”
션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엘리엇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가운 아래로 밀어 넣었다. 엘리엇은 더듬거리고 얇은 셔츠 위로 션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잠시 손바닥 전체로 맥동하는 감각을 느꼈다. 왜 그러는지는 확실하게 닿아 오지 않아서 엘리엇은 의아한 기분으로 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엘리엇만큼이나 빨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자연스러운 건가?”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은 션의 가운 자락을 풀어 헤쳤다. 그리고 끌어당겨 안고 왼쪽 가슴에 귀를 대었다.
“정말이야, 빠르게 뛰는군.”
“터질 것 같으니까요.”
“그렇군.”
엘리엇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대답하면서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자기가 가슴이 아파지는 것과 똑같은 리듬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심한다. 션이 그의 등을 끌어안고 머리칼에 키스했다.
“당연한 거예요. 저는 항상 그러니까.”
“언제부터?”
“엘리엇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요. 엘리엇 씨는 기억하지 못할 때부터도.”
션이 미소를 담아 속삭였다. 엘리엇은 눈을 감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션의 박동 소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전부 압도하여 그는 다른 것을 전부 잊었다.
그리고 온전히 그의 품에만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그 두근두근하는 소리에 맞추어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프트 프롬 갓 : 열두 달(12months)>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