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December.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었다.
그때까지 엘리엇은 미친 듯이 바빴다.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헤리퍼드 공작이 사방팔방 뒤흔들어 놓은 덕분에 베드퍼드 공작도 미친 듯이 바빴다. 따라서 베드퍼드 공작의 비서들도 하루가 다르게 마를 만큼 바빴고, 션도 숨 쉴 틈 없이 굴려졌다. 자업자득이라 남 탓도 못 하고 쉴 생각도 못 하고 수첩을 들고 쫓아다니기를 꼬박 한 달, 12월 셋째 주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후에야 여유가 생겼고 엘리엇도 그랬다.
어떤 의미로는 둘의 시간표가 맞았다는 점에서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란히 서서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 정원에 세운 트리 구경을 할 시간도 없었지만 말이다. 외부 손님을 초청하는 일이 거의 없는 헤리퍼드에서도 고용인들을 대상으로 타운 하우스 동관을 개방하여 파티를 했지만, 션은 엘리엇과 함께 거기에 얼굴을 내밀기는커녕 그날 베드퍼드 공작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공작의 보좌를 해야 했다.
공작은 파티에 션을 데리고 다니기를 몹시 좋아했는데, 용모가 좋으니 눈이 즐겁고 자기 체면이 살면서도 여자가 아니라서 부인에게 바가지를 긁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 번은 엘리엇과도 마주쳤다. 베드퍼드 공작과 엘리엇이 서로 안부를 나누고 있는데 말없이 베드퍼드 공작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션을 무척 난감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엘리엇은 그럴 때마다 무어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웃어서 션을 더 곤란하게 했다.
여하튼 선배들을 제치고 날마다 베드퍼드 공작을 따라다닌 덕에 12월 셋째 주 금요일부터는 신년 첫 번째 주까지 2주간의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고용주가 쉬어도 쉬기 어려운 가문 소속 비서의 사정상 크리스마스와 정초에도 누군가 한 사람쯤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 역할은 주로 배우자가 없거나 자녀가 없는 독신에 말단인 사람이 희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션이 요청을 하자마자 비서실장은 두말없이 휴가 신청서를 승인했다. 그것이 엘리엇을 고려해서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를 배경으로 삼아 유세를 부릴 생각은 없지만,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하여 조금 민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양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휴가를 다녀오겠노라고 고하자 베드퍼드 공작이 시시덕거렸다.
“헤리퍼드 공작이 연말쯤의 초대장에 모조리 거절의 답장을 썼다던데, 크리스마스에 어디 좋은 데 가나?”
“웨스트모어랜드로 갑니다. 애플비성이라는 곳에서 며칠 묵기로 했습니다.”
“호오. 애플비?”
“한적하고 작은 성이라고 들었습니다.”
“거기 뒤에 큰 숲이 있지, 아마? 옛날 사냥터인.”
“예, 숲이 있다고 하더군요.”
“재밌겠군. 요즘에는 좋은 사냥터 찾기가 참 힘들지. 잘 다녀오게.”
“감사합니다.”
션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두 달간 바빴으므로 자연이 있는 한적한 곳에서 푹 쉬는 것도 좋을 것이다.
* * *
큰 숲이 있다는 베드퍼드 공작의 기억은 맞았다. 지적도에 거주자 3,400명이라고 적힌 조그만 애플비시의 뒤편으로 셔우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너른 숲이 펼쳐져 있고, 호수와 작은 강도 보였다. 애플비성은 숲에 둘러싸이듯이 세워져 있었다. 성을 중심으로 세 곳으로 뻗은 도로는 잘 닦여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리는 가까워 보이지만, 아마 애플비시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은 달려야 하는 거리일 것이다. 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수직이착륙기가 이내 성에 당도했다. 내려다볼 때는 숲에 뚫린 작은 구멍처럼 보였지만 내리고 나자 절대 부지가 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성은 작은 편이다. 작은 편이라고 해도 성이었지만 말이다. 션의 지식으로는 어느 시대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벽돌 성곽은 굉장히 오래되어 보였다.
넓은 마당에 네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션은 가져온 트렁크 하나를 들고 발판을 딛고 마당에 내려섰다. 네 사람이 한꺼번에 고개를 숙이고, 그중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션의 손에서 트렁크를 받아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션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애플비의 집사를 맡고 있는 포스터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소피, 아들 애덤, 딸 제시카이고요. 여기 머무르시는 동안 두 분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포스터 씨, 포스터 부인. 수고를 끼쳐 드리는군요. 엘리엇 씨는요?”
“주인님께서는 산책을 하러 가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엇은 하루 먼저 출발했다.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션에게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이쪽의 부동산 관련으로 작은 일이 있다는 모양이라, 아쉽지만 보냈다. 이왕 국내 여행이니 같이 긴 드라이브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이 부서졌지만, 특별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 과로 기미가 있으니 장거리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기도 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음 기회’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놀랍고도 행복하다.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느끼며 션은 행복하게 웃었다.
“성곽은 가능한 한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내부는 28년 전에 싹 수리를 했고 거주 공간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습니다. 올해 중에 다시 한번 카펫을 새로 깔았고요. 지내시기에 특별히 불편하신 점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이렇게 오래된 성이면 유적지라든가 문화재일 것 같은데…….”
“수리할 때 특별히 당대의 이름 있는 건축학자들을 불러서 전통 방식을 이용해 수리했습니다. 평소에는 거주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개방하고 있는데, 옛것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서 관광지로 찾는 사람은 없고 주로 여름이나 겨울방학 때에 고건축이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찾아옵니다. 중건이 잘 되어 있어서 가치가 있다고 하더군요. 애플비시는 그렇게 해서 유지되고 있는 곳이죠. 사실 이제는 도시라고 하기 어렵지만, 옛날 명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요.”
“차를 쓰시려거든 뒤뜰에 차고가 있으니 거기로 가시면 됩니다. 차고 열쇠는 거실에 놓아두었습니다. 야간에는 경비원 대여섯 명이 뒤뜰에 따로 세운 별채에서 숙직을 하고, 성안에는 저와 아내만 남아 있을 겁니다. 머무르실 곳은 이곳입니다.”
큰 돌계단을 밟으며 3층까지 올라가 그가 묵직한 나무 문을 열었다. 안에는 말한 대로 완전한 현대식의 아파트가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깔끔하고 쾌적해 보이는 공간이다. 바닥에는 단정한 녹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난로에서는 인조 석탄이 만드는 불꽃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인터폰을 들면 저희 집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설렁 줄을 당기셔도 되고요.”
“이것도 전통 방식이로군요.”
“호출 벨도 있긴 합니다.”
포스터가 싱글거리면서 큼직한 무선호출기를 보여 주었다.
“숲에 있을 때는 간혹 안 터질 때도 있지만요.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편히 지내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션은 그의 손에서 트렁크를 받아 들었다. 포스터는 짐도 정리해 주려는 것 같았지만 그가 거절하자 순순히 물러났다.
사실상 현관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 문을 닫고 나자 긴장이 풀려 한숨이 나왔다. 거주 공간은 마음에 들었지만, 정작 성이라고 생각하면 위압감이 있다.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가 대단한 대저택이기는 해도 런던에 아무런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데다가 상대적으로 현대적인 공간이지만, 이 성은 진짜 말 그대로 고성이다. 가이드 투어를 해야 할 것 같은 성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이상하게 시간을 뛰어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열한 대의 슈퍼 카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신용카드보다도 헤리퍼드가 어떤 곳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그는 마음을 바꾸고 트렁크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은 약간 묘한 형태였는데, 트윈룸 두 개가 문짝이 달리지 않은 큰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부부 침실이라든가 트윈룸이라기보다는 기숙사 같은 느낌이었다. 침대 옆에는 작은 책상, 반대편 벽에는 옷장이 각각 따로 있다. 포인트 색상이 맞춰져 있어서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가 각각 한 세트인 것 같았다.
엘리엇은 그중 하나의 침대에 짐을 푼 모양이다. 시트는 반듯했지만, 여행 갈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태블릿 PC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어느 쪽에 짐을 풀어야 하는 건가. 션은 고민하면서 옷장을 열어 보았다. 방 하나에 한 사람씩인 건가. 같은 방을 쓰자니 어차피 트윈룸이고 하나씩 쓰자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침대는 크니까 두 사람이 같이 자려면 잘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열려 있는 방 하나를 비워 놓고 한쪽만 쓰는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옆 침대로 밀려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옷장이라도 저쪽 것을 쓸까, 생각하며 열어 보자 자신이 챙긴 것 말고도 코트라든가 목욕 가운, 실내복 같은 것이 이미 걸려 있다. 션은 트렁크를 풀어서 순순히 거기에 옷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엘리엇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반 시간 안의 일이다. 현관을 여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보자 그가 십여 마리의 개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엘리엇 씨.”
“쉿. 들어오면 안 돼. 안 된다니까. 아, 자네 왔군.”
그가 방심한 틈에 잉글리시 세터 한 마리가 엘리엇의 다리 옆으로 빠져나와 션에게 돌진했다. 뒤이어 무너진 성벽으로 병졸이 쏟아지듯이 개들이 와글와글 실내로 들어왔다. 엘리엇이 “손쓸 수가 없게 됐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인터폰을 들었다.
“웬 개가 이렇게 많아요?”
“사냥터가 있으니까. 모처럼 산책 가는 길이라서 데리고 나갔던 건데……. 자네는 개한테도 인기가 좋군.”
“낯선 사람이라서 그렇겠죠.”
덩치 큰 사냥개 십수 마리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올라타는 것은 솔직히 좀 무서운 일이었지만 션은 애써 태연한 안색을 유지했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냥개 관리인이 뛰어 올라왔다. 그가 개들을 수습해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짐을 풀고 있었는가?”
“어디에 해야 할지 좀 고민하고 있었어요. 방 구조가 특이해서요.”
“어린이용으로 설계해서 그래.”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9살 때 아버지가 나한테 주시려고 개축했거든. 나, 아일라, 리암, 알버트, 이렇게 네 사람이 같이 잘 수 있도록 만든 거지.”
“그렇군요. 기숙사 같다고 생각했어요. 음. 그럼 9살 때 이 성을 선물로 받으신 거예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네. 정리는 끝났는가?”
“아직이요. 식사는 어디에서 하죠?”
“오늘은 일단 대식당에 차리라고 했네.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솔직히 좀 그렇죠. 평범하게는 해 볼 수 없는 체험이니까. 전 이쪽 침대 쓸게요.”
엘리엇과 같은 방의 다른 쪽 침대 옆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잡동사니는 일단 침대 위에 쏟아 놓았다. 엘리엇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션이 가지고 다니게 된 일정 수첩, 핸드폰 배터리, 충전기, 선글라스, 이어폰, 만년필 케이스, 라벤더 오일이 들어 있는 갈색 병 같은 것이 널브러졌다.
몇 가지는 정말로 직접 들고 다녀야만 하는 것이지만, 자기 손으로 충전기 따위를 챙겨 본 적이 없는 엘리엇에게는 좀 번거로워 보였다. 션은 “세면도구를 안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엄청 편리한걸요.”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습관이 달라서 집사가 짐을 싸 주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젤과 콘돔이 있다. 확실히 이것은 남에게는 맡길 수 없는 것이다. 엘리엇은 콘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열 개들이 상자가 세 개이다. 그리고 여기 머무르는 것은 열흘 예정이었다.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루에 세 개씩 쓰면 되죠. 딱 적당한데요?”
“…….”
섹스를 안 할 생각은 없지만, 열흘 내내 하루 세 개씩 사용하겠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고 그는 션을 쳐다보았다. 복상사는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이제 자신은 30대 후반이라는 전혀 기쁘지 않은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시켜야 하는 건가 생각하는 사이에 션이 싱글거리면서 트렁크를 닫아 밀쳐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쏟아 놓은 잡동사니 대부분을 쓸어서 서랍에 넣는다. 털썩 등이 매트리스에 닿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보자 그가 엘리엇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우리 한 달 넘게 아무것도 못 한 거 알아요? 지난주부터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잖아요.”
“날짜를 세 보진 않았지만 그런 것 같긴 하군.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자기는 했어도 말일세. 그런데 션, 아직 점심도 먹기 전인데.”
“휴가잖아요.”
쉬는 날, 특히 휴가에는 평소보다 너그러워지면서 기꺼이 난잡해지기를 선택하는 엘리엇은 그 말에 웃으면서 션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나는 자네가 이 성에도 좀 관심을 가져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복부터 해결하고요.”
“공복?”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엘리엇도 금방 이해했다. 원하는 마음이 굶주림과 같은 것이라면 그도 공복 상태였다. 션의 손이 능숙하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납작한 아랫배를 빙글빙글 돌며 어루만지는 손에 엘리엇은 열이 오른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허리를 들어 그가 바지와 속옷을 쉽게 벗겨 내도록 도왔다. 그리고 션의 벨트를 풀어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으면서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 생각엔 말일세.”
“네?”
“하루에 세 개씩 쓸 게 아니라 하나도 안 써도 될 것 같아.”
션이 목 안으로 갈라진 신음을 흘렸다. 엘리엇의 손 안에서 그렇지 않아도 큰 물건이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엘리엇은 신음할 여유도 없이 통째로 그에게 잡아먹혔다. 꽤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던지라 다급하게 덤비는 션을 감당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눈을 뜨자 벌써 해가 져 있었다. 엘리엇은 깨고 나서야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기억은 욕실에서 나온 직후에 끊어졌는데, 식사를 가져오게 하라고 시키고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션은 옆에 없었다. 차가운 옆자리를 더듬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엘리엇은 잠시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깨어났을 때 옆에 엄마가 있어 주지 않으면 눈물부터 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서른여덟이나 먹은 남자가 되어서 일어났을 때 그가 곁에 있지 않다는 것에 쓸쓸하고 서운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스스로 당혹한다.
배가 고팠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고 체력을 소모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션도 이제 슬슬 서른 중반을 향해 다가가는데, 아직도 놀랄 만큼 왕성하다. 결코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무슨 복이 있는 건가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 체력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식사량도, 운동량도 늘려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몸에 좋은 것도 먹고.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저녁을 대식당에서 차리라고 했었지, 하고 무거운 다리를 끌고 드레싱 가운을 걸친다. 이 성에 전기 설비가 되어 있는 곳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엘리엇은 실내에서 등불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계단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조심조심 비춰가며 1층까지 내려간다. 그쯤 해서 션이 갈 만한 곳이 어차피 고용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일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불빛이 없으니 밤중에 돌아다닐 만한 곳이 달리 없다. 아마 포스터 가족이 머무는 구역에 있든가 별채로 갔으리라.
도로 3층으로 올라가 인터폰으로 션이 어디 있는지 먼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려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엇은 고개를 돌렸다. 대연회장의 커다란 문을 션이 두 손으로 밀어 열다가 엘리엇과 마주치더니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자네 거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잠깐 구경하러 나왔다가 해가 져 버려서요.”
그가 열없는 태도로 말하고는 엘리엇의 곁으로 부리나케 다가왔다.
“어두우니까 좀 무섭더라고요.”
“손전등도 없이 다니기는 좀 어렵지.”
“처음에는 인기척이 들려서 유령인가 했는데.”
“유령을 무서워하는가? 깜짝 놀라더니.”
“천사가 있어서 놀란 거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를 태도로 웃으며 션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놀리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엘리엇은 그의 미간을 가볍게 밀었다.
“그런데 정말 오래된 성인가 봐요. 설마 전깃불이 하나도 없을 줄 몰랐어요. 이거, 멋지네요.”
그가 엘리엇의 손에서 등불을 받아 들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등롱은 겉보기에는 골동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건전지로 작동하는 LED 등이었다.
“거실에 세 개 더 있네. 저녁에 나올 때는 잊지 말게. 그리 넓지 않은 성이라서 어둡다고 헤매지는 않겠지만 계단은 조심해야지.”
“아까는 몰랐으니까요. 주방 쪽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대식당은 있어도 주방은 못 찾았어요. 아궁이 걸린 곳은 있긴 하던데.”
“중세 시대 성이라네. 벽난로는 살아 있지만, 요리는 별채에서 해서 가져오지.”
“그렇군요. 분위기가 엄청 멋지더라고요. 무슨 영화 속에 들어온 줄 알았어요.”
엘리엇의 손을 끌어당겨 팔짱을 끼우고 션이 대연회장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등불을 껐다.
11세기 중엽에 지어진 성에는 창문이 매우 적었고, 있어도 아주 작았다. 그렇지만 대연회장에만은 제법 규모 있는 크기의 달 모양 별 모양 창문을 내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다. 그것은 본래 형태가 아니라 28년 전에 개축할 때 새로 만든 것이고, 별도의 동판을 만들어 안내문도 붙여 두었다.
덕분에 대연회장의 분위기는 실제보다 훨씬 동화적이었다. 노란 달과 푸른 별이 바닥에 떠오르고, 반들거리는 돌 타일에 그려진 무늬들은 요정이 춤춘 자리처럼 반짝거린다. 션이 문가에 선 채 그것을 보면서 웃었다.
“가문의 역사라든가 그런 거 말이에요. 가계도라든가 창고의 마차 같은 걸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웠거든요. 런던에서는 정말 오래된 물건들은 대부분 박물관에 있었잖아요. 그건 꼭 그냥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엘리엇 씨가 물려받은 것이라고 해도 이런 것을 다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어요.”
“음.”
“이런 성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으셨다니 신기하네요. 피처버트 씨도 부자였지만, 피처버트 씨가 사셨다는 성에 갔을 때는 그냥 고택을 샀구나, 하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오래된 성도 아니었고.”
“아마 아이들 놀게 하려고 개축한 거라서 그럴 걸세. 그 이전의 성을 사진 찍어 놓은 도감을 보면 고택 수준조차 되지 못하고 폐허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 오래된 건물이라네.”
엘리엇이 그렇게 말하고 션의 팔에서 팔을 빼내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드는 별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닥을 조금 살피고 한 걸음을 더 뒤로 물러섰다.
“음. 이쯤에서 시작했던 게 맞을 것 같은데.”
“뭐가요?”
“수수께끼.”
그렇게 말하고 엘리엇이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세 걸음 다섯 걸음 열두 걸음 걸어
세 걸음 다섯 걸음 서른 걸음 뒤돌아
매 위에 비둘기, 비둘기는 구름까지
구름 위에 벌새, 엄마가 가져온 꿀을 빨지
별 그림자 없는 자정, 정오의 고양이 수염 끝.
텅 빈 대연회장에 노랫소리가 반사되어 여러 겹으로 울렸다. 션은 엘리엇이 노래 부르는 것을 처음 보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수를 치려 드는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거짓말은 시도하지도 말게. 그냥 수수께끼라네.”
“엘리엇 씨가 목소리 좋은 건 부정할 수 없는걸요. 무슨 수수께끼예요?”
“이 성에는 비밀의 방이 있어.”
엘리엇이 대연회장의 천장 쪽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말했다.
“개축할 때 만든 것이라네. 아버지가 옛날에 내게 주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숨겨 놓았던 곳이지. 그리고 이 동요를 가르쳐 주고, 그걸 따라가면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었다네.”
“멋진데요. 그래서 아일라 씨와 리암 경, 알버트 전하까지 다 같이 보물찾기를 하셨던 거예요?”
“내가 활동적이지 못한 걸 걱정하셔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하려고 고안하신 것 같던데 말일세.”
그가 션을 돌아보면서 빙긋 웃었다.
“자네 선물도 거기에 숨겨 놨다네.”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션은 해연한 얼굴로 웃으며 되물었다.
“열흘 안에 찾아야 할 걸세. 아니면 내년 크리스마스에나 받을 수 있을 테니.”
“아, 큰일인데요. 저 수수께끼 같은 거 잘 못 푸는데.”
“별로 어려운 건 아니야. 9살짜리들이 풀어낸 거라네.”
“그 9살짜리에는 엘리엇 씨랑 알버트 전하가 끼어 있었던 거잖아요.”
“사실 아일라와 리암이 도움이 안 되기는 했었지.”
엘리엇이 미리 일침을 박았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꾀어서 답을 들어 낼 생각을 해서는 안 되네. 부정행위로 간주하고 선물 전부 압수할 거야.”
션이 으윽, 하고 신음했다.
“진짜로 열흘 안에 못 찾으면 어떻게 해요?”
“그럼 올해는 못 받는 거지.”
“압수당하나 못 받으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찾으면 될 게 아닌가? 내 비밀기지인데 찾기 귀찮은가?”
엘리엇이 웃음을 머금었다. 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거라면 꼭 찾아내야죠.”
큰 랜턴의 불빛이 빼꼼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왔다. 포스터였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저녁 준비가 끝났는데 3층에 안 계셔서 모시러 왔습니다. ”
“음.”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던 참인데 잘되었다며 성큼성큼 포스터의 뒤를 따른다. 문 앞에서 션이 그의 팔을 잡았다.
“왜?”
“같이 가요.”
그럼 같이 안 갈 작정이었던가 하고 의아하게 쳐다보자 션이 웃으며 다시 팔짱을 끼었다. 아무리 관계를 공개했다고 해도 포스터도 있는 앞에서 이렇게 가는 건 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가, 옆구리에 닿는 체온이 따뜻해서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팔짱 좀 낀다고 해서 고용인들이 흉을 볼 것도 아니고 말이다.
* * *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노트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들을 고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 보자 밀리였다.
「사진 봤어! 진짜 그 식당에서 밥 먹은 거야? 촛불 그렇게 켜 놓고?」
“어. 전기 설비가 안 된 곳이라서 불이 안 들어와. 진짜 횃불 처음 봤다.”
「우와. 그래도 랜턴 같은 걸로 밝힐 수도 있었을 텐데.」
“작업용 랜턴을 켜 놓고 디너를 할 수는 없잖아.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쓰기는 하지만 말이야. 무슨 타임머신 타고 온 것 같아. 거주 구역은 평범한데.”
아이들용으로 만들었다더니 상대적으로 값비싸지 않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기도 했다. 책장에도 그림책이나 옛날 만화책 같은 것이 꽂혀 있었다. 이걸 보셨느냐는 물음에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한 권 뽑아 보니 리암의 낙서가 있었다.
「다른 데 사진도 보여 줘!」
“이따가 밖에 나가면. 어제 깜박 잊고 찍어 놓은 게 없다. 아, 전망을 보여 줄게.”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침대에서 굴러 내려가 창가로 향했다.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넓은 숲과 호수, 구름에 가려진 페나인산맥이다. 멀리 보이는 작은 지붕들이 그림처럼 사랑스러웠다.
사진을 전송하고 나서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밀리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멋지다…….」
“사진에 보이는 마을 있지? 거기가 애플비시인데, 거기까지 사유지라고 하더라. 시가지 자체도 사유지 안에 세워져 있어서 임대료랑 지대 수입이 나오나 봐.”
「진짜?」
“개발이 덜 된 곳이라서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라는데, 그래도 신기하잖아.”
「정말. 땅 빌려주고 돈 받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닌데, 아무리 작아도 마을이나 도시 단위라니 막 상대적 박탈감 느껴져.」
“맞아.”
「넌 뭐 하러? 네 애인인데.」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네. 그냥 돈이 많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서. 아 참,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뭘 원하는 건데?”
「그걸 묻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 벌써 22일인데. 오늘 주문해도 크리스마스 안에 도착 못 하겠다.」
“어쩔 수 없잖아.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하는 일이 아니라 로테이션 짜서 돌리는 일도 처음 해 보는 거였고. 남 시중드는 거, 정말 만만치 않더라. 단순히 클라이언트 비위 맞추는 거하고는 차원이 달라. 엘리엇 씨하고의 관계 문제도 있으니까 마음 편히 막내 노릇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알 것 같긴 하다. 나라도 24시간 풀러 씨 비위를 맞추느니 그만두고 말지.」
“그래. 그 기분이라고. 게다가 진짜 많이 바빴어. 직장도 직장이지만, 가문의 일도 있었고.”
「베드퍼드 말고 헤리퍼드의 일?」
“응. 엘리엇 씨가 이혼을 했으니까.”
공작 부인의 업무가 바로 션에게 쏟아졌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혼 서류가 수리되고 션이 엘리엇과 동거를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가내의 여러 가지 일이 그에게 이전되어 왔다. 아랫사람이 임의로 결정하기는 어렵고 엘리엇에게 직접 가져가 묻기에는 사소한 일들 말이다.
작은 것으로는 해리 왕자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부터 크게는 박싱 데이에 고용인들에게 나눠 줄 상자에 넣을 선물과 크리스마스 파티의 예산 문제까지 말이다. 거기다가 이자벨은 또 모를까, 윌리엄은 약간 의도적으로 일을 몰아주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미묘한 기분으로 이야기하자 밀리가 까르르 웃었다.
「내조네, 내조. 아예 직장 그만두고 공작 부인으로 들어앉아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야. 엘리엇 씨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니라서 사실 나중에 꾸중 들을까 봐 조금 무섭다.”
「설마 모르고 계시려고? 그리고 들어 보니까 총집사랑 비서실장이 인정했나 본데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네 입장이면 애인을 걱정할 게 아니라 집안사람들 텃세를 걱정해야지.」
“그것도 그렇긴 한데……. 하지만 엘리엇 씨는 원래 공사 구분이 확실한데, 얼렁뚱땅 너무 많이 간섭하게 되면 싫어하실지도 모르잖아. 나도 공작 부인이 될 생각은 없고. 직접 필요한 일이나 바깥일 쪽이라면 오히려 마음 편히 말할 수 있는데.”
애초부터 ‘부인’이 될 수 없는 거 아니냐고 션이 반농담, 반진담으로 투덜거렸다.
「공작 부인은 몰라도 부군은 될 수 있잖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샀던 프러포즈 링은 어떻게 됐어? 청혼은 다시 안 했어?」
“…….”
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야 또 사면 되는 거지만, 청혼이라는 게 두 번 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엘리엇의 신분이라든가 부유함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무것도 몰랐던 때가 말하기는 월등히 쉬웠다. 마음은 다르지 않아도 그에 대해 알게 될수록 무게는 더해지는 느낌이 든다.
“또 거절당하면 어떻게 해?”
「이제는 이혼도 하셨다면서.」
“그래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야.”
「옆에서 보기에는, 지난번에는 좀 무리수처럼 보이는 도박이었고 이제는 자연스러운 걸로 보이는데 말이야.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남이 옆에서 이래라저래라할 일은 아니지만.」
“천천히 생각하려고. 일단 나도 적응도 하고 안정도 된 다음에 기회 봐서.”
「하긴, 오죽 기회만 노리고 있겠어.」
밀리가 빈정거렸다. 션은 피식거렸다.
“그래. 기회만 노리고 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뭘 원하는데?”
「꼭 비싼 거라고 내 입으로 말해야 되겠니?」
“알았어. 비싸기만 한 거면 되지?”
「잠깐, 잠깐, 션! 진짜로 알아들으면 안 돼!」
밀리가 아우성을 쳤지만, 션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물론 장난이었다. 밀리가 계속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그리고 보고 있던 식기 쇼핑몰에서 크리스마스 디너 세트를 결제했다. 밀리가 원하는 것이 있거나 비싼 것은 안 된다고 했다면 안 할 작정이었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생각하고 있던 것을 사 버리면 그만이다.
사실 친구에게 선물하기에는 지나치게 값비싼 물건이었지만, 이제까지 신세 진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타일러와 동거하려고 이사했을 때 집들이 선물도 주지 못했다. 게다가 요즘 주머니가 두둑했다. 비서로 이직하면서 연봉은 세 토막 났지만, 생활비도, 보험료도, 자동차 유지비도 들지 않고 오히려 월세 수입이 생길 예정이니 말이다. 심적으로도 든든해서 그런지 주변 사람한테 이것저것 퍼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제를 마치고 다시 전화를 받자 밀리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너 정말로 비싸기만 하고 쓰잘 데 없는 물건을 사서 보내려는 건 아니겠지?!」
“이미 샀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션!」
“나중에 또 신세 지려고 미리 아부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둬.”
「또 뭘 얼마나 귀찮게 하려고.」
밀리가 툴툴거리면서도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면 비싼 거 받은 걸로 안 치겠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션은 가볍게 그녀와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품목들을 결제했다. 리지에게는 커다란 치즈 케이크를 배달시키고, 샐리 아주머니에게는 마을 사람 모두와 나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초콜릿과 쿠키 상자를 보냈다. 풀러나 웨스트베리 남작, 앨리스처럼 새로 생긴 교분에는 미리부터 선물과 카드를 챙겼으면서 정작 정말로 가깝고 귀중한 사람들은 뒤로 미루게 된다는 것에 약간 회의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한정된 시간을 쪼개 쓰자니 어쩔 수 없었다.
2, 3년 전의 크리스마스 때만 해도 고작 카드나 몇 장 썼던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 다른 의미에서도 뒤집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는 엘리엇을 위해서는 아로마 오일을 샀다. 엄밀하게는 오일이 선물이 아니라 그걸로 마사지를 해 줄 작정이었다. 음흉한 생각은 절대 없다, 고 션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간단히 따뜻하게 주물러 주는 것은 원래도 자주 하던 일이다. 몇 달이나 바빠서 해 주지 못했다. 여유가 있으면 본격적으로 배워 볼 생각도 있는데, 좀처럼 그럴 만한 시간이 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노트북도 덮고 그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할 일이 없으니 그럼 수수께끼나 풀어 보기로 한다. 어차피 특별히 놀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고, 성도 작아서 둘러보는 데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늘은 엘리엇도 없다. 개가 없는 것을 보니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간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엘리엇이 일러 준 동요의 가사를 적어 놓은 메모지를 꺼내서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낮의 분위기는 동화 같았던 밤과는 퍽 달랐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대연회장을 환하게 만들지만, 오래된 벽의 단단함이 시각적으로 느껴져서 그런지 좀 더 딱딱한 예스러움이 느껴진다.
션은 엘리엇이 아마 이쯤일 거라고 말했던 위치에 서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기쯤에서 시작이라고 했지. 세 걸음 다섯 걸음 열두 걸음 걸어.”
첫 번째 문장을 읽어 보지만,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션은 일단 문 쪽을 향해 걸어 보았다. 원형의 홀에서 거의 입구까지 닿아 버린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션은 잠시 고민했다. 노래 가사대로 돌아서서 셋, 다섯, 서른 걸음을 걷는다고 해도 반대편 벽에 가까운 곳에 멈추게 될 뿐이다. 션은 고민에 잠겼다. 애초부터 방향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걸어 봐야 소용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매라, 매…….”
천장 밑의 돌림띠를 쭈욱 살피며 그럴듯한 조각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자정이라든가 정오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대연회장에 걸린 커다란 괘종시계의 시곗바늘도 돌려보지만, 뤼팽 소설처럼 간단히 되지는 않는다. 하긴, 어른이라고 해서 바로바로 찾아낼 수 있는 간단한 수수께끼였다면 엘리엇이 거기에 선물을 숨기진 않았으리라.
“매 위에 비둘기, 비둘기는 구름까지. 구름 위에 벌새, 엄마가 가져온 꿀을 빨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밀의 방을 엘리엇의 부친이 만들었다고 해도, 아마 노래까지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수께끼 전문가나 동화 작가가 쓴 가사일 가능성도 있었다.
고민하면서 빙글빙글 대연회장을 돌고 있는데, 창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엇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다녀오셨어, 요?”
정원으로 나가며 말하다 말고 션은 멈칫했다. 들고 있던 엽총을 애덤에게 던져 준 엘리엇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 꽁무니에 죽은 여우가 세 마리 달려 있고, 산 여우도 한 마리 있다. 온몸이 잡티 하나 없는 흰색이었다.
“사냥, 하고 오셨어요?”
“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개 관리인이 흥분하여 날뛰는 개들을 수습하고 집사가 엽총과 사냥물을 챙겼다. 엘리엇이 피가 묻은 장갑을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평소에는 그림 속의 정물이나 박물관의 골동품처럼 정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때보다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피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거, 살아 있는 거 아니에요?”
“희귀한 게 보여서 일단 다리를 쐈는데 운 좋게 맞았어. 자네 줄까?”
“저요?”
“꼬리가 풍성한 게 아주 귀한 모피가 될 겁니다.”
“머플러로 만들면 적당할까? 작아서 조끼까지는 안 되겠고.”
“아, 잠깐만요. 잠깐.”
애덤이 캥캥대는 흰 여우를 붙잡는 것을 보고서 션은 어지럼증을 느끼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걸, 잡아서 주신다는 거예요?”
“모처럼 귀한 걸 얻었으니까. 남자인데 역시 흰 여우 꼬리 같은 건 곤란할까?”
“아뇨, 아뇨. 그, 저기, 살아 있는데.”
“그래? 가죽 제품은 문제없이 쓰는 줄로 알았는데. 하긴, 모피는 또 다른 문제이니까.”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여우가 죽은 걸 처음 봐서…….”
“그런가.”
션이 더듬거리자 엘리엇이 곤란한 듯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포스터는 개들을 데리고 가고, 애덤도 죽은 여우와 엽총을 치웠다. 남은 것은 말과 손발이 묶여 내던져진 하얀 여우뿐이다.
그때까지도 엘리엇이 결론을 내지 못한 듯하여 션은 곤란해졌다. 모피에 문제가 있다든가 사냥에 반대한다든가 그런 게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산 것을 죽인 경험은 모기와 날파리 정도밖에 없고, 죽은 짐승도 쥐 정도밖에는 보지 못했다. 운이 좋아 로드 킬조차 경험한 적이 없었다.
사람을 죽일 각오도 했었지만―직접 죽이지 않아도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이 적지 않고― 그것은 ‘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관계한 사람을 직접 찔러 피를 나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GFG에 의한 살해보다 야만적이라고 책망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능적인 껄끄러움까지는 어쩔 수 없다.
“사냥은 싫은가?”
“좋고 싫은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별로 채식주의자도, 모피 반대론자도, 여우 사냥 폐지론자도 아니니까요. 그냥……. 살아 있는 모습을 봤는데 그 죽은 흔적을 갖고 싶진 않아요.”
“그런가…….”
엘리엇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자신은 전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지만, 션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고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직접 자기 손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도살하던 시대의 사람이 아닌 이상 사냥감을 시체로 받아들이고 거북살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우 사냥은 오래된 스포츠로서 엘리엇으로서는 12살 때부터 외조부를 따라다니며 해 온 일이다. 잠시 생각해 본 결과 굳이 의논을 통해서 의견을 일치시킬 필요까지도 없을 것 같았다. 션이 정 싫다면 그만둘 수는 있지만, 작은 여가 활동일 뿐이지 않은가.
하얀 여우를 주겠다는 것도 좋은 물건이 생겼으니 주겠다는 정도의 생각에 불과했다. 거북하다면 앞으로는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네. 자네가 갖지 않겠다면 다른 사람을 줘야겠군.”
“죄송해요. 모처럼 준다고 하셨는데.”
션은 약간 한숨을 내쉬며 여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완전히 기가 죽은 채 고통스러운 듯이 낑낑대는 신음만 흘리던 여우가 칵 그를 물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 직전에 엘리엇이 션의 팔목을 잡아챘다.
“아.”
“위험하게 무슨 짓인가? 작아도 어엿한 육식동물이라네. 물어뜯기면 손 정도는 순식간이야. 사람에게 익숙한 런던의 길 여우와는 다르네.”
“너무 귀엽게 생겨서…….”
션은 멋쩍게 말했다.
“여왕 폐하께 진상하는 건 어떨까요? 모처럼 귀한 것을 잡으셨으니까요.”
“여왕 폐하는 모피를 입지 않으신다네.”
“아뇨. 그러니까 죽이지 않고요. 애완용이라든가, 동물원이라든가……. 안 될까요? 다시 풀어줄 수 없다면요.”
“음……. 그래.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 여왕 폐하께서는 여우를 좋아하시니까. 길들여서 정원에서 길러도 나쁘지 않겠지.”
엘리엇이 미간을 긁적이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애덤에게 손짓했다. 애덤이 얼른 다가와서 여우를 묶은 줄을 끌어당기고 입마개를 씌웠다.
“일단 수의에게 보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애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엘리엇은 그때까지 얌전히 옆에 서 있던 말의 콧등을 쓸어 주고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내 먹였다. 션은 흥미롭게 그 곁에 다가섰지만, 여우에 놀란 경험 덕분에 함부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저도 해 봐도 돼요?”
“그러게.”
그가 주머니에서 각설탕 주머니를 꺼내서 션에게 건네주었다. 션은 두근두근하면서 각설탕을 손바닥에 얹어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보드라운 혀가 날름 손바닥에서 각설탕을 주워 갔다.
“우와.”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탄성을 지르며 하나를 더 꺼내자 엘리엇이 미소했다.
“거기까지만 줘. 오늘 벌써 많이 먹어서 더는 안 된다네.”
“네. 당근도 있어요?”
“마구간에 있을 걸세.”
두 번째 각설탕을 말이 먹어 치우고 나서 엘리엇이 손수 고삐를 당겼다.
“마구간으로 가는 거예요? 말 더 있어요?”
“여기에는 두 마리밖에 없네. 별로 오지도 않는데 관리인까지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에 드는가?”
“저는 개보다 이쪽이 귀엽네요. 멋지고요.”
“배워 볼 텐가?”
“승마요?”
“관심이 있다면. 운동이 된다네.”
“제가 배울 수 있으려나요?”
“운동신경도, 자세도 좋으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걸세. 자네가 캔터로 달릴 수 있게 되면, 내가 가진 말 중에서 제일 좋은 놈을 자네에게 선물해 주겠네.”
“좋아요. 제일 멋진 말이라도 타면 솜씨가 없어도 좀 그럴싸해 보일 테니까요. 주말에 같이 교외로 나갈 수도 있을 거고요.”
“나쁘지 않군.”
엘리엇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콘월에도 큰 마사가 있었죠? 거기에서도 사냥을 하세요?”
“거기는 전통 있는 사냥터라네. 외조부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매년 박싱 데이에 크게 여우 사냥을 열었지. 클럽도 있어.”
“엘리엇 씨도 가입해 있어요?”
“일단은. 여우 사냥 존폐 논쟁이 불거진 뒤에는 그렇게 크게 대회를 열거나 하지는 않는다네. 매년 관습적으로 해 오기는 했지만…….”
마구간에 남아 있는 말은 온순해 보이는 갈색의 암말이었다. 션은 곧바로 타게 되려나 긴장했지만 엘리엇이 그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신발과 바지를 준비시켜야겠군. 장갑은 내 걸 낀다 하더라도 신발은 안 맞을 테니까. 처음이니까 안전 장구도 필요할 테고. 오늘은 일단 안면이나 익혀 둘까? 안녕, 올리비아.”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션은 두 시간 가까이 엘리엇과 함께 말의 갈기를 빗고 몸을 솔질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엘리엇은 특별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션은 이제 그가 즐거워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척 행복해졌다. 아마 자각은 없었을지라도 예전에도 이렇게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으리라는 게 기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웃자 엘리엇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저기 여러 마리 가지고 있으실 것 같은데, 이름을 전부 알고 계신가 봐요.”
“대부분은 알고 있다네. 젊을 때는 런던에 있는 마사에서 승용으로 데리고 있다가 나이가 들면 한가한 곳으로 보내거든. 올리비아는 십여 년 전에 자주 탔었는데, 겁이 워낙 많아서 한 번도 사냥에는 데려간 적이 없어. 이제 15살도 넘었군. 알릭스는 올리비아와 사이가 좋아서 같이 보냈지.”
“그렇군요.”
“외조부께서 말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엄밀하게는 사냥을, 하고 엘리엇이 덧붙였다.
“관리는 전문가에게 맡기더라도 한 번씩 솔질 정도는 직접 하라고 가르치셨다네. 말은 예민한 동물이니까 자주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보살핀다는 느낌을 줘야 안심한다는 걸세. 타고 있는 동안에는 목숨을 맡기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곤 하셨지.”
“런던에서도 자주 하세요?”
“부끄럽게도 자주 못 해. 시간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그만큼 여유가 없고 순혈 아랍종이나 아칼 테케는 비전문가인 내가 함부로 손을 대도 되는 게 아니니까. 훌륭하긴 하지만 좀처럼 타게 되지 않더군.”
아마도 직접 솔질을 하는 쪽이 더 정이 가기 때문일 것이라고 션은 생각했지만 엘리엇이 깨닫지 못한 것에 스스로 실망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솔질하는 그의 옆에서 알릭스의 꼬리를 빗겨 주려다가 걷어차일 뻔하고 얌전히 당근이나 내미는 신세가 되었다.
“자네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엘리엇 씨가 내준 수수께끼를 풀고 있었죠.”
“실패했겠군.”
엘리엇이 미소를 띠었다.
“꼭 그러리라는 법이 있어요?”
“그러리라는 법이 있다네.”
알릭스의 몸에 가벼운 솔질을 마친 엘리엇이 작업용 면장갑을 벗어서 아무 데나 던져 놓았다. 나머지는 일하는 사람이 알아서 할 것이다. 사냥복의 스카프를 풀면서 그가 먼저 성 쪽으로 향했다.
“힌트 좀 주세요. 짐작도 안 가요.”
“힌트라……. 하나를 가르쳐 주면 다 가르쳐 주는 셈인데.”
“저 머리 나빠요.”
“농담은.”
엘리엇이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혼자 찾으려면 어려울 수도 있겠군. 마지막 줄을 처음에 붙여 보게. 그리고 머리를 조심하고.”
“마지막 줄이요?”
션은 메모지를 꺼내어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별 그림자 없는 자정, 정오의 고양이 수염 끝.”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더는 못 알려줘. 그냥 길을 안내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어려워요.”
“너무 쉬우면 수수께끼의 의미가 없잖은가. 점심은 먹었는가?”
“아직이에요. 방에서 먹을까요?”
“자네는 지금까지 방에 있었지? 나가는 건 어때?”
“엘리엇 씨는 피곤하실 것 같은데.”
“샤워만 하면 돼. 자네가 싫지 않다면 애플비시에 가 볼까 하는데 어떤가?”
“그냥 밥만 먹으러?”
“다른 일이 있나?”
“아뇨. 혹시 또 누구랑 인사를 해야 한다든가 그런 일이 있는가 해서요.”
“그런 일 없어. 집사 말로는 맛있는 샌드위치집이 있다더군. 가겠는가?”
“좋아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기다리게.”
금세 씻고 나오겠다면서 엘리엇이 3층으로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션도 코트를 가지러 가야 했으므로 그의 뒤를 따라 거주 공간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도무지 키스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엘리엇의 팔을 잡아 돌려세우고 일단 입을 맞췄다. 엘리엇이 눈을 크게 떴다가 어깨를 잡고 눈을 감았다. 보드랍게 혀를 마주하며 인사를 하고 떼어 낸다.
“갑자기 왜?”
“아직 모닝 키스를 못 했으니까요.”
엘리엇이 웃었다. 션은 그에게 씻고 나오라고 재촉하여 욕실로 들여보냈다. 그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고 말한 게 몇 번째의 일인가 생각하면서 말이다.
* * *
힌트도 얻었고 수수께끼는 금방 풀릴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만만치 않았다. 션은 연필을 물고 침대를 구르면서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나서 다시 대연회장에 갔다 왔다. 그것이 오늘만 세 번째, 날짜로는 사흘째였다.
도로 침대에 주저앉아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있자 창가에 앉아서 홍차를 마시고 있던 엘리엇이 힐긋 시선을 들어 쳐다보았다.
“오늘이 벌써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아직도 못 찾은 건가?”
“솔직히 짐작도 안 가요. 힌트 좀 더 주시면 안 돼요?”
“글쎄. 알려 줄 건 다 알려 준 것 같은데.”
고개를 기우뚱하는 모습은 사랑스럽고도 원망스러웠다. 엘리엇은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조언은 좀처럼 해 주지 않았다.
아직 체류 기간은 좀 남아 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까지는 찾고 싶었는데 당최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션은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첫날에는 뭐 내일쯤 천천히 찾아보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까지 못 찾고 이러고 있으니 간단한 수수께끼가 아니라는 사실이 팍 실감 났다.
“안 찾을 건가?”
“머리 좀 식히고요. 계속 생각하니까 엉뚱한 쪽으로만 생각이 튀어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말이다. 아침 식사 전에 엘리엇과 함께 가볍게 산책을 하고, 오전 중에는 말 등에 오르는 법을 연습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같은 공간에서 각자 시간을 보낸다. 엘리엇은 명상을 하거나 쉬면서 책을 읽거나 하고, 션은 수수께끼를 풀었다. 온 성안을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그럴듯한 느낌이 드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행여나 힌트가 남아 있을까 해서 책장의 책도 대부분 뽑아 보았다. 서투른 글씨의 편지 쪽지가 한 장 남아 있기는 했다. 내용을 봐서 리암이 쓴 것 같았는데, 자기는 무척 신나는데 알버트가 자꾸 비웃어서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답장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도 아마 비밀을 만드는 놀이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암호라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암호로 다음 편지는 몇 번째 책장의 어느 책에 꽂아 두겠다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물론 그 두 번째 편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비겁한 어른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건축학도도 자주 찾아온다고 하니 주요 건물이나 문화 유적이라면 정보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 그는 아예 애플비시의 시립 도서관까지 가서 건축 도면까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도면은 중건 이전의 것뿐이었다.
“내 생각에는 자네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지금보다 10배쯤 진지해져도 못 찾을 것 같은데요?”
“시점을 바꿔 보게. 이걸 건물로 생각하지 말고 장난감이라고 생각해. 9살짜리에게 주려고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 9살짜리 아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모험을 시켜 주려면 어떻게 해 주고 싶은지 생각해 봐. 알은 유치하다고 비웃었지만 말일세.”
“음. 글쎄요. 놀이동산에라도 혼자 갈 수 있게 허락할까요? 저는 어렸을 때 그게 제일 모험이었던 것 같거든요. 리지와, 음, 지금은 이름이 기억 안 나지만, 리지의 사촌오빠라는 어떤 형이랑 셋이서 이동식 놀이공원에 갔었던 거요.”
션은 말하다 말고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엘리엇 씨는 놀이동산에 가 본 적 있어요?”
“디즈니랜드 같은 곳 말인가? 도쿄에서 가 본 적이 있긴 하다네. 아일라와 같이 갔었던 거지만. 나이 먹어서 가서 그런지 별로 즐거운 줄은 모르겠더군.”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시니까요. 사실 저도 좀 그렇긴 한데, 윈터 원더랜드에 못 가 본 건 꽤 나이가 들 때까지 한이 됐어요.”
“올해는 이미 늦었으니 안 되겠고, 다음에 시간이 맞으면 한 번 고려해 보세.”
“네.”
엘리엇이 창밖을 내다보며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눈이 오는군.”
“아. 정말.”
션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창문에 희고 차가운 것이 달라붙었다가 물방울로 변했다.
“쌓일까요?”
“눈송이가 굵은 데다가, 보게, 엄청나게 내릴 것 같은데.”
엘리엇이 가리키는 하늘은 온통 회색으로 물든 채 허공에서 분수가 비산할 때처럼 새하얀 눈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군요.”
션은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이 나쁘지 않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온이 떨어져서인지 난방을 충분히 하고 있는데도 밤에는 조금 추웠다. 션은 공기가 차가워서 이불 밖에 나와 있는 코끝이 시린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리고 품 안에 있어야 할 따뜻한 체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엘리엇 씨……?”
무심결에 불러 보지만 대답은 없다. 션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다. 부드러운 주황색 전등으로 밝혀진 침실에는 혼자뿐이었다.
그는 잠시 그대로 누워서 몽롱하게 있다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차갑다. 슬리퍼를 찾아 신고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덧창을 열어 보자 눈은 그쳐 있었다. 성을 둘러싼 숲에도, 앞의 공터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생크림을 얹어 만든 케이크처럼 보였다.
그러나저러나 엘리엇은 어디에 갔을까. 탐색 능력을 사용해 보자 성의 최상층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눈 구경이라도 하러 갔을까.
엘리엇에게 그런 감수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여기는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중 하나가 남은 장소가 아닌가. 귀중하거나 특별하게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 세상에서 진짜로 ‘친구’라고 느끼는 세 사람과 함께 만든 추억이 있는 곳이다.
션은 겉옷을 찾아 걸치고 두툼한 양말을 신었다. 신발도 따뜻한 털신으로 갈아 신는다. 나갈 때는 손전등 대신 등롱을 가져가라는 엘리엇의 이유 모를 충고를 떠올리며 일꾼용의 환한 랜턴 대신 등롱에 불을 켠다. 작업용 랜턴보다 이 등롱이 단연 10배는 멋지고 흥미로웠다.
“피터팬이 된 것 같군.”
한밤중에 창문으로 날아들어 오던가.
그때야 그는 엘리엇의 말뜻을 이해했다. 눈에 반사된 달빛이 환한 밤, 아이들의 모험을 경험해 보기에는 아주 좋은 날이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어른이 생각하는 아이의 모험, 9살이라도 알버트가 유치하다고 비웃을 만한 수준의 모험, 그러나 리암은 충분히 신나 할 법한 모험.
한밤중에 침대에서 빠져나와 베이비 시터도, 가정교사도, 경호도 없이 아이들끼리 네 개의 등롱을 들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오래된 성을 돌아다니는 것만 한 것이 또 있을까. 엘리엇이나 알버트라면 외부인이 드나들지 못하게끔 충분히 경호되고 있는 성안에서 위험한 일이라고는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것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것조차도 어른들로서는 크게 양보한 것이리라.
션은 그 모습을 상상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해 보면 대연회장의 모습도 밤에 봤을 때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엘리엇이 낮에 그가 답을 못 찾았으리라고 확신한 이유도 이제야 알겠다.
그는 엘리엇을 찾으러 가는 대신에 비밀의 방을 찾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닌가. 선물을 받기에는 절호의 날이었다. 그리고 근거 없는 믿음이기는 하지만 엘리엇도 그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의 최상층에는 변변한 가구도 없다. 맨바닥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 대연회장의 문을 연다. 첫날 여기 도착했던 때보다 눈에 반사된 달빛이 더 환해서인지 그때보다 더 환상적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 그림자 없는 자정, 정오의 고양이 수염 끝.”
하나를 알고 나자 나머지는 술술 풀렸다. 션은 달 모양과 별 모양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열대여섯 번은 샅샅이 대연회장을 뒤졌으므로 그는 대연회장에 비치되어 있는 긴 작대기 중 하나가 높다란 창을 닫는 데에 쓰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등롱을 바닥에 내려놓고 작대기를 가져다가 별 모양 창문을 닫는다. 이미 해 봐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창문은 낮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별 창의 덧문과 함께 달 창의 덧문 일부가 움직였다.
철커덕.
대연회장 전체에서 기계장치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여러 개의 살로 가려진 달창으로 스며드는 빛은 고양이 수염처럼 가늘었다. 션은 흥분하여 빠른 걸음으로 괘종시계 쪽으로 다가갔다.
“자정과 정오.”
시곗바늘을 둘 다 12에 맞춘다. 그러자 바닥에 어지럽게 여러 개의 어린아이 발자국이 떠오른다. 괘종시계에서 쏘아 내는 빛이다.
션은 고양이 수염 끝에 가 섰다.
“세 걸음 다섯 걸음 열두 걸음.”
해당되는 개수만큼의 발자국이 찍힌 쪽을 향해 걷는다. 아이 발자국 세 걸음이 션에게는 한 걸음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열두 걸음째에 뒤돌아 세 걸음 다섯 걸음 서른 걸음의 발자국을 다시 센다. 그 서른 걸음 앞에는 벽이 있다.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하고 잠깐 한숨을 내쉬다가 그는 이내 이것이 9살 아이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벽 아래쪽을 더듬었다.
“있다!”
거기에는 등롱을 걸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척 신났다는 것을 느끼면서 들고 있던 등롱을 그 고리에 걸었다.
철커덕.
기계장치 움직이는 소리가 또다시 났다. 등롱이 쑥 안으로 들어가면서 안에서 쏘아지는 빛이 등롱을 렌즈로 삼아 대연회장 전체에 요정의 군무처럼 가득 찼다.
션은 감탄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난감’이라는 엘리엇의 말이 맞구나 싶었다. 스케일은 어마어마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원더랜드였다.
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빛이 만드는 춤의 향연 끝에 등롱에서 나오기라도 하는 듯이 큰 매의 실루엣이 나타나, 발밑에서부터 바닥을 타고 쭉 벽까지 타고 올라가더니 천장에 머물렀다.
그 위라면 위층밖에 없다. 션은 작업용 랜턴도 가져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거주 공간까지 다녀올 여유가 없어서 그냥 핸드폰의 손전등 앱을 켜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대연회장의 바로 위에 있는 공간은 그냥 빈방들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복도에 여러 마리 작은 비둘기 모양의 불빛들이 보인다. 아래층에서 쏘는 빛이 2층 바닥으로 비치는 것이다.
“비둘기는 구름까지.”
션은 완전히 익은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구름을 찾아 비둘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복도 끝에 있는 것은 망루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벽에 프레스코 화가 복원되어 있다. 션은 그 그림에 그려진 구름을 보고 좁디좁은 나선계단을 밟고 벽을 따라 올라갔다.
엘리엇의 말처럼 단순한 수수께끼가 맞았다. 모르고 봤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알고 보자 한 층 위에 절대로 본래 이 성의 구조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장식용 나무 패널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하기로는 아마 여인과 아이의 조각이었던 것 같다. 션은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의 눈높이 주위에 핸드폰의 플래시 불빛을 가져다 대었다. 벌새는 거기에 조각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벌새 조각을 가볍게 만져 본다. 그는 조각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흔들어 보았다. 벌새가 자연스럽게 움직여 여인의 발치에 놓인 단지까지 날아가더니 쑥 단지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쿵 하고 소리가 나며 발밑이 움직였다. 바닥이 천천히 위로 솟구친다. 자칫 넘어질 뻔하여 션은 패널을 짚고 버텼다. 그리고 소리 내서 웃었다. 며칠 전에 성을 돌아볼 때 나무 바닥이 반만 있어서 위화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있는 구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머리를 조심하라.”는 엘리엇의 말이 기억나서 위를 쳐다보았다.
막혀 있던 망루 꼭대기가 열리며 마침내 비밀의 방으로 들어간다. 구궁 소리를 내며 바닥이 멈췄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션은 상당히 조심하고 있었는데도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그 방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타닥거리고 가짜 벽난로가 탄다. 인공의 불빛을 따뜻하고 안심된다고 느끼는 시대의 인간인 션은 미소하면서 허리를 구부려 방 안으로 올라섰다. 리프트보다 방은 조금 더 높이에 여유가 있었지만, 허리를 쭉 펴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았다.
거기는 정말로 아이 방이었다. 바닥에 앉거나 뒹굴 수 있도록 발목까지 파묻히는 푹신한 러그 위에 네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은 상이 놓여 있고, 벽에는 온갖 종류의 테이블 게임과 장난감이 진열되어 있었다.
상 위에 작은 리모컨이 하나 놓여 있었다. 션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때, 옥상으로 연결된 나무 문을 열고 엘리엇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엇 씨.”
“드디어 왔군.”
엘리엇은 놀라지도 않고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션은 거의 뛰듯이 그를 따라 사다리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옥상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엘리엇 씨가 밤중에 나가지 않으셨다면 찾지 못했을 거예요. 혼자 뭘 하고 계셨어요?”
“눈 구경.”
그가 웃었다.
“자네가 끝끝내 이 방을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네. 과연 올해 이때를 넘기면 내년에는 제대로 줄 수 있을지도 염려되고.”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그것도 그렇고. 리모컨 가지고 왔지?”
“아, 네. 상에 있던 거.”
션은 리모컨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엘리엇이 리모컨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버튼을 눌렀다.
성의 다른 두 망루에서 삐이잉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다음에는 공터 네 곳에서 불꽃이 올랐다. 커다란 오렌지색 해바라기 불꽃이 허공에 머무르는 동안 무지개색의 꽃봉오리 수십 개가 밤하늘을 수놓고, 그 뒤를 이어 원반이 달을 가른다. 숲 위로 시계초 무늬가 떠오르고 분수처럼 푸른 불티가 쏟아진다. 열두 개의 오색 불꽃이 하나씩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동시에 열두 개가 떠올라 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폭음에도 높낮이가 있어 타악기 두드리는 소리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음향이 가슴을 두드린다. 션은 압도된 채로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는 20분 정도 계속되다가 하늘에 빛나는 녹색의 트리 장식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게,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마음에 안 드는가? 물건 쪽이 좋았을까?”
션은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꽉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뇨. 일평생 받은 것 중에 가장 멋진 선물이에요. 고맙습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확실히, 제때 찾지 않으면 받지 못할 선물이었네요.”
“그건 그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다네.”
엘리엇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바깥쪽을 가리켰다. 불꽃에 이어 어두운 하늘을 물들이는 것은 오색의 레이저로 만드는 그림들이었다.
“자네가 나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선물로 주었으니까 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남에게 선물할 만큼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네. 자네는 이런 것을 좋아할 것 같았고. 그래서 불꽃놀이로 결정은 했지만, 아무래도 시끄러워서 제대로 말소리가 전달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네?”
그때까지도 션은 엘리엇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선물은 여기까지이고, 이것은 다른 것이라네.”
그가 하늘을 가리키고, 이번에는 성 아래의 땅을 가리켰다. 밤하늘에는 하늘색 리본 같은 불빛이, 공터에 소복한 눈 위에는 붉은색의 열선이 글씨를 써 내려간다. 그 글씨가 Will you의 뒤를 이어 m자를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션은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글씨가 끝까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린 엘리엇이 그것을 내려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아마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가 걸치고 있던 드레싱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정장을 해야 하나 생각해 봤었는데, 날마다 그러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예의가 부족하지만 용서하게.”
“엘리엇 씨.”
션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엘리엇이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와 결혼해 주겠는가?”
“이거, 제가 해야 하는 거…….”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션은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목구멍을 닫았다. 소리 내서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간신히 흐느끼지 않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손가락 사이와 손바닥이 따뜻한 물기로 젖어 들었다.
자신이 했어야 했다. 진짜 그럴 자격과 능력이 생겼을 때 다시 한번, 두 무릎을 다 꿇고 매달려서 내가 당신의 것이듯이 당신도 내 것이 되어 달라고 청할 작정이었다.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조금만 더 멋진 남자가 되어서, 그다음에 말이다.
션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변명도, 고백도 하지 못한 채로 눈물만 흘리고 있자 엘리엇이 곤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뻐하며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리암과 윌리엄이 입을 모아 눈물 흘릴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거절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지 상자 뚜껑을 닫아서 주머니에 넣고 술을 마시러 갔을 참이었다.
“자네는 이미 한 번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생각했다네.”
“하지만.”
“대답해 주지 않을 건가?”
대답 따위야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결정되어 있었다. 션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다음에야 “예.”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 있었다. 말하고 나서는 다시 눈물이 솟구쳐, 참아 보려 했는데도 눈앞이 흐려지고 만다.
엘리엇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짓고 “고맙네.”라고 말했다.
“준비에 사람을 썼으니까 실패했으면 무척 민망할 뻔했거든.”
그렇게 말하고 그가 비어 있는 션의 약지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일어서서 반지 상자에서 백금과 금으로 만들어진 심플한 반지를 꺼내어 션의 약지에 끼웠다. 션이 눈물에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고 있어서 그는 소매로 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 되었어.”
“심장마비로 죽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예고하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도요. 뭔가 낌새라도 주실 수 있었잖아요.”
션이 한탄처럼 말하면서 그를 끌어안아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다. 엘리엇은 “아직 안 끝났는데?”라고 말했다.
“뭐가 또 남아 있어요?”
“자축.”
엘리엇이 리모컨의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Will you marry me?’라고 썼던 레이저의 빛이 다시 리본으로 변해 양 끝으로 사라졌다. 삐이잉 하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쏘아진 폭죽이 커다란 장미 모양으로 찬란하게 터지고, 뒤이어 쏘아 올린 작은 불꽃들이 마치 천 송이의 꽃다발처럼 환하게 하늘을 물들였다. 아직도 눈물이 조금 고인 눈으로 션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요.”
“글쎄. 앤드류의 권유였는데 말일세.”
그가 션의 품 안에 기대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불꽃놀이의 폭음이 커서 귓가에 대고 말하지 않으면 전달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서로 끌어안은 채로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청혼하고, ‘이제 집에 가자.’라고 마무리하는 게 무척 어색했다고 그러더군. 경험자의 말이니까 믿어 봤지.”
“하하.”
션은 소리 내서 웃었다. 단순히 소리 내서 웃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를 질러 외치고 싶을 정도로 발밑부터 머리끝까지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사람이 너무 기쁘면 그것을 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도 어려웠다. 그는 마치 자신이 풍선이나 저기에서 터지고 있는 불꽃놀이의 폭죽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터져 버리는 일은 없었다. 왼손 약지가 타서 떨어질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엘리엇을 끌어안았다. 엘리엇은 당연한 것처럼 그에게 입 맞춰 주었다. 둘은 머리 위에서 폭발하는 둥근 불꽃 아래에서 그 소리가 모두 끝날 때까지 서로만 바라보며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