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Interlude (5)
11월 12일. 한국에 도착한 장페이의 가족이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탔다. 중국 영공을 피하여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아 미국을 경유하여 오는 코스였다.
「아, 뭐. 베트남 쪽으로 돌 수 있으려나 했는데, 작정하고 습격하면 별도리 없을 것 같아서. 중국에는 별별 능력자가 다 있단 말이지. 염동력으로 비행기를 끌어 내린다고 해도 놀랄 게 하나 없다니까. 인해전술만큼 무서운 것도 없고.」
오랜만에 통화가 된 준형이 투덜거렸다. 션은 웃으면서 말했다.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페이의 가족들이 연명 조치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딱 맞춰서 감옥에서 빼돌린 능력자가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돌아가면 추가 수당을 요구할 거야. 이자를 잔뜩 붙여서.」
“제이 씨도 고리대금업자가 되기로 했어요?”
「무슨 소리야? 나는 빚을 놓을 만큼 팔자 좋은 자본가가 아니라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거지. 원래 월급이나 퇴직금 밀리면 이자는 줘야 하는 거야. 제1세계의 팔자 좋은 전문직이라서 잘 모르나 본데.」
“그걸 누가 몰라요? 이자를 ‘잔뜩’ 붙인다면서요.”
「네가 배수로에서 전신 고무 타이즈 입고 드러누워서 9시간씩 대기해 봐. 1분이 한 달 같지. 위로금으로 이자 정도는 좀 쳐 줘도 되잖아?」
“알버트 전하와 계산하십시오. 인질들은 협조 순순히 해 주던가요?”
「세뇌당한 상태에서 협조해 줄 리가 있냐? 그냥 재웠어. 연달아 열흘 넘게 향정신성 약물을 쓰면 보통은 문제가 생기겠지만 뭐, 너 어차피 정신적인 문제 전부 치료할 거잖아?」
“글쎄요. 치료와는 개념이 다르고 이미 변질된 신경세포를 되살리는 기적을 발휘하는 게 아니니까요. 약물중독은 치료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릅니다. 그랬더라면 지금쯤 치유술사로 떼돈을 벌고 있겠죠.”
「아, 괜찮아. 신체적 의존성을 일으키는 건 아니니까.」
“그럼 괜찮겠네요. 도착하면 뵙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틀간 한국에 있었잖아요. 화염을 뿜게 되는 닭 요리는 먹었어요?”
「오랜만에 왔더니 제대로 된 매장은 다 망하고 없더라. 대체 매운 음식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왜 맵지 말라고 치즈를 뿌리는 거야?」
생존 본능 아니냐는 반론이 저절로 일어났지만, 준형이 수화기 너머에서 혼자 불을 뿜었기 때문에 션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돌아오면 위로금 대신에 불닭을 사다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튼 모레 오전 중에 들어간다. 시간 빠듯하니까 비워 놔.」
“염려 마세요. 제가 딴짓을 하고 있으면 알버트 전하가 멱살을 잡고 끌고 가겠죠.”
「페이의 상태는 어때?」
“오전 중에 소식 듣고 신체 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래도 내상이 심해서 당분간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겁니다. 한 시간 후에 기자회견을 할 거랍니다.”
「아예 그쪽에 도착하고 나서 하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높으신 분들이 초조한 모양이라서요. 저쪽에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선수를 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네가 바로 그 높으신 분이야. 그나저나 진차오밍은 어떻게 되었어? 카메라 앞에서 그놈의 입을 열면 장윈핑은 끝장나지 않으려나?」
“대안도 없이 장윈핑을 너무 갑자기 무너뜨리면 곤란하다는 것 같아요. 엘리엇 씨도 그냥 두는 쪽이 낫겠다고 해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 둘이 싸우다가 같이 무너지면 어부지리를 얻는 놈만 이득 아닌가? 하긴, 어련히 알아서 결정했을까.」
“하하. 무사히 돌아오기나 하세요. 끝내주는 선물을 마련해 놓을 테니까.”
그 선물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준형이 입맛부터 다셨다.
통화를 끊고 나서 그는 일정 수첩을 펼쳤다. 원래 스케줄러까지 써 가며 바지런히 생활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이 생긴 후에 다람쥐 쳇바퀴 같은 소시민적 생활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생기는 새로운 일과 예전에는 만나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과의 약속에 부닥쳤으므로 제대로 된 일정 관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좀 더 엄밀하게는, 비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자신이 말단 비서로서 현재 베드퍼드 공작의 일정 관리용 수첩과 비슷한 존재였지만 말이다.
신뢰할 만한 사람을 미리 물색해 두라는 웨스트베리 남작의 충고는 지당했다. 지금 당장 아무나 고용할 수는 없는 일이고, 엘리엇의 비서진에게 신세를 지자니 그쪽이야말로 지금 눈 돌아가게 바빠서 말단의 말단까지 집에 못 가고 굴려지고 있는 처지였다. 자신의 일정이야 스스로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엘리엇이 왜 주말까지 바쁜지 그는 절실하게 이해했다.
수첩에 따르면 다음 일정은 오스트리아 대사와의 약속이었다.
이 정도면 마음 편한 일이다. 일단 면식이 생긴 사이였고, 상호 우호도 확실하다. 마를린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션을 조금 더 마음 편하게 해 주었다. 언터쳐블 안에서 그에게 호감을 가져 주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는 것은 무척 든든한 일이었다.
그는 마를린에게 보낼 답장과 손뜨개로 짠 두툼한 숄을 선물로 준비해 두었다. 선물을 고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상자를 쇼핑백에 담아 놓은 채로 과연 이렇게 가져가도 되는 것인지 어떤지 좀 혼란스러워서 션은 고민했다.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쇼핑백을 건네며 이걸 전해 달라고 해도 되는 건가. 아니면 헤리퍼드 가의 전령을 시켜서 미리 아랫사람에게 전달해 둬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마를린에게 보낼 방법을 물어보는 게 옳을까. 집사가 돌봐 주는 생활에 익숙해졌어도, 새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난국이었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나.’
엘리엇이 언젠가 같이 살자고 말했을 때도, 사교계에 소개하겠다고 했을 때도 1년에 한두 번 파티장에나 동반 모임에 따라 나가는 것이나 상상했지, 단독으로 외국 사절을 만나는 것을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정치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준비 기간을 최소한 10년은 잡고 있었다. 조금씩 배우면 익숙해지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국의 U급 GFG 능력자로서 확고하게 인지되었고, 페이를 행방불명시키고 중국 쪽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힘을 증명했다. 그게 무슨 정치적‧법적 지위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만나 보고 싶어 했다.
알버트는 그가 일정 수준까지는 외부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고 했고, 션은 거기에 동의했다. 엘리엇은 불만을 표했지만, 필요성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페이나 맥처럼 일반인들에게까지 공개적인 정보로 노출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를 알리고 한정된 사람과 만나는 수준까지는 해야 한다고 합의를 보았다. 최소한 이번 일로 영국에 날아온 외국 사절들에게는 모두 얼굴을 보여야 했다.
내각의 요인들과는 콕스 총리가 자리를 마련하여 국무회의에 참관인으로 참석하는 것으로서 급하게나마 인사를 마쳤고, 유럽 쪽 국가의 대사들은 대부분 엘리엇과 안면이 있었으므로 접견실에서 화기애애하게 차를 마시며 소개를 받고 안부를 나누는 것으로 끝났다. 적대적이었던 것은 프랑스에서 왔다는 그린 국장뿐이었다. 그는 거의 볼멘 태도로 이제야 능력 통제가 가능한 정상 상태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고 말했는데, 정말로 불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매우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가 안도한 나머지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그 밖에도 인도와 일본 대사를 각각 따로 만났다. 양국 모두 U급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트러블이 생길까 봐 다소나마 걱정했는데, 인도에서는 단순히 친교를 맺고 싶을 뿐이라며 전통 술을 한 병 주었다. 술보다 병이 예술품이라는 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다.
일본 대사는 우에노 정보본부장의 섣부른 짐작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함께 작은 상아 페이퍼 나이프를 선물했다. ‘신의 망치’ 이토가 직접 만든 것으로 다이아몬드도 절삭할 수 있는 것이라는데, 직접 잘라 보지는 않았지만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를 만나지도, 선물을 보내지도 않고 떠난 것은 그라델 부통령이었다. 션은 알버트와 의논하여 그와 진차오밍의 통화를 녹취한 사본을 보냈고, 그는 그것을 받은 당일 바로 비행기를 띄워 귀국했다. 경고는 충분했으리라.
션이 일정 수첩에 모레 오전에 ‘페이’라고 적어 놓고, 그만큼의 시간을 비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는데 벤이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집무실로요?”
“중국 대사가 방문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접견하실 건데, 원하시면 함께 만나 보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죠.”
션은 펼쳐 놓고 있던 서류들을 쓸어서 대강 서랍에 넣어 놓고 재킷을 걸치고 벤을 따라나섰다.
본관 1층에 있는 접견실은 공적인 문제로 방문하는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지난 며칠 동안 션은 벌써 여러 번 이 방에 드나들었다. 익숙하게 문을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려 들어가자 엘리엇과 대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대사가 일어섰다. 션은 그와 악수를 나누고 평소처럼 엘리엇에게 키스하는 대신에 대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엄한 태도에 저절로 정중한 어조로 말하게 된다.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오 대사가 사과를 하고 싶다더군. 내가 받을 사과가 아닌 것 같아서 자네에게 오라고 했네.”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만나 주신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는 것쯤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션은 유하게 말했다. 대사는 류위안창의 파벌이고, 류위안창은 작센 공작과 인연이 깊으며, 엘리엇은 작센 공작과 친하다. 작센 공작도 이제 류위안창의 견제 세력이 필요해지리라는 것에 동의했으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 당장 등을 돌릴 것도 아니니 대사와도 적절히 친분을 유지할 것이라고 엘리엇에게 들었다.
“진차오밍 차관이 맥케인 씨와 합하께 저지른 모든 무례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시겠지만 그는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서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의 주장을 믿고 대표로 삼아 보낸 본국의 경솔함에 대해서도 깊이 사과하고 싶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왕이면 외무부에도 한마디 말씀해 주시면 제가 체면이 살겠습니다. 여러모로 저 때문에 수고를 끼쳤으니까요.”
션은 깨끗하게 말했다. 대사가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시간 후에 페이가 기자회견을 하고 나면 양국 관계는 매우 복잡해질 것이므로 사과를 한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가능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사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엇은 류위안창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와 헤어졌다.
“이것으로 전부 끝난 건가요?”
션은 다시 소파에 앉아 물었다. 엘리엇이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런 셈이지.”라고 대답했다.
“일단락되었네요.”
“외교 문제는 말이지. 알이 자네에게 만나야 한다고 했던 사람은 전부 끝난 건가?”
“이따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갈 거예요. 대사 부인의 티타임에 초대를 받았거든요. 목록에 있는 건 전부 끝났고, 그것 말고도 초대장이 몇 개 더 있는데 시간 내기가 애매해서 고민 중이에요.”
“보여 줄 수 있는가?”
“수첩을 안 가져와서요. 나중에 가르쳐 주세요. 어차피 직장 때문에 내일모레까지는 절대 무리이고요.”
“그렇군. 베드퍼드 공작도 나랏일 하시는 분이니 자네가 두 배로 바쁘겠어.”
“한때이니까요. 페이 문제만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제가 무슨 외국 대사를 만나느니 어쩌니 하는 일은 없어지겠죠. 왕세자 전하도, 총리님도 제가 이름만 걸어 놓고 가능하면 관여하지 않기를 원하시고요.”
“자네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니까.”
“페이가 장기 계약을 할 모양이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그렇겠지. 뭐, 이런저런 일을 하는 데 불편한 건 없고?”
“서재까지 내주셨는데요.”
션은 임시로 옷가지와 급하게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싸 가지고 와서 지금은 엘리엇의 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션의 개념에 동거란 원래가 이런 식으로 함께 생활하는 것이고, 게다가 엘리엇의 침실, 프라이빗 룸, 거실, 응접실은 충분히 서로 사생활을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어디든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하면서, 그것과는 별개로 혼자서 쓸 방이 필요할 것이라며 2층 반대편에 있는 서재를 내주었다.
그 서재는 엘리엇 개인의 것이 아니라 원래 공작가 전체의 것이었다는데, 지금은 쓰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양의 장서와 책상이 갖춰져 있고 서랍도 넉넉해서 불편한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엘리엇은 제대로 처소도 마련하지 않고 더부살이를 하게 한다고 미안해했지만, 도대체 뭐가 더부살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괜찮다면 다행이고. 케이론의 방도 곧 완성된다니 그러면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진짜, 요만큼도 불편한 점이 없어요. 조만간 엘리엇 씨랑 따로 자야 된다는 게 불편하다면 불편한 점인걸요.”
“자주 자러 오면 될 게 아닌가. 싫다고 하지 않을 테니.”
“그러느니 그냥 아예 한 침실 쓰는 게 좋지 않아요?”
“그래도 별개의 방이 있는 쪽이 좋지. 서로 취침 시간이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도 않고, 법도도 있으니까.”
“날마다 갈 거예요.”
투정 부리듯이 말하자 엘리엇이 웃었다. 션은 “키스해도 돼요?”라고 물었다. 엘리엇이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의 입가에 쪽, 하고 짧게 키스를 남긴 후에 입술을 엄지로 닦으며 나직나직하게 달랬다.
“자네가 하는 건 안 돼. 금세 여기가 어딘지 잊어버리게 되니까.”
“싫으세요?”
“싫지 않아서 곤란한 거라네.”
“그럼 손등에.”
엘리엇은 그것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션은 그의 중지에 입 맞추었다.
“아참, 엘리엇 씨, 저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말해 보게.”
“페이의 가족을 여기 머무르게 하면 어떨까 하고요?”
“타운 하우스에?”
“네. SSB쪽에서는 아예 신분 세탁을 하기를 원하고 있고, 국방부에서는 그냥 경호를 붙인 후에 정부 지원으로 생활 보조를 해 주겠다고 하지만요. 신분 세탁을 해 버리면 페이와는 영영 이별하는 셈이 되고 정부 지원이라고 해도 솔직히 충분히 돌봐 주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장은 어떻게 하길 바라던가?”
“헤어지는 것을 원할 리는 당연히 없죠. 하지만 안전이 걱정되니까 신분 세탁을 하는 쪽이 좋을 거라는 쪽이에요. 그렇다면 아예 이 집에 살게 하면 보안은 걱정 없지 않겠어요? 페이도 안심할 수 있을 테고요. 당분간 그 가족은 재활이 필요할 텐데, 그것도 도와주고 싶고요.”
마치 이번에 생각해 낸 것처럼 말했지만, 처음에 페이에게 손을 내밀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헤리퍼드 보안부만으로는 역시 타운 하우스의 안전이 성에 차지 않는다. 페이의 가족을 식솔로 들이면서 겸사겸사 SSB의 경비 인력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두터운 방호 체계를 만들고, 페이를 출퇴근시키면 U급 능력자라 하더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요새가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아예 엘리엇의 보디가드로 붙여 주고 싶었지만 알버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페이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SSB와 외무부 직원들이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엘리엇에게 시선이 몰릴 우려가 있다는 알버트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양보했다. 페이 자신도 이제까지 어려운 일을 겪어 온 만큼 앞으로는 자율성이 있는 자리에서 느슨하게 여유를 가지고 가족과 함께 보내게 해 주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로테이션을 돌리는 것도 아니라 24시간 내내 한 남자―그것도 이제 23살밖에 안 됐고 키가 헌칠하며 제법 귀엽게 생긴―를 엘리엇 옆에 붙여 놓을 거냐는 알버트의 질문이 매우 뼈아팠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션이 향후 페이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페이는 SSB와 장기 계약을 맺게 되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연봉과 휴가, 복지만큼은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다.
엘리엇이 약간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음에 드는가 보군.”
“동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고요,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를 설득한 게 저니까, 가족이 여기 머무를 수 있다면 여러 가지로 그도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본관 이야기는 아니고요. 서관이나 동관에 있는 아파트먼트를 하나 쓰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사정을 엘리엇이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침묵이 생각보다 길었다. 션은 혹시 싫은가 염려하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게.”
길었던 침묵에 비해서 대답은 간단히 나왔다. 션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왜? 뭔가 또 걱정이 있는가?”
“아뇨. 엘리엇 씨가 내키지 않으신 건가 싶었거든요. 괜찮으신 거죠?”
“내가 불편할 게 무어 있는가? 자네가 잘 생각해 보고 적당한 공간을 내주게. 사람도 필요하면 붙여 주고.”
“네. 고맙습니다.”
션은 그렇게 말하고도 역시 엘리엇의 표정이 석연찮게 느껴져서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들여다보자 엘리엇이 고개를 돌렸다. 귓불이 붉었다. 이것은 좋은 징조였다. 션은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확인차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온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건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잖아요. 엘리엇 씨.”
턱을 쥐어서 억지로 시선을 마주하자 엘리엇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눈을 마주쳐왔다.
“자네가 무척 다정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라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질투하셨어요?”
“조금.”
결국 엘리엇이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래서 서운하다는 건 아닐세. 여기에서 키스하면 화낼 거야. 나는 조금 더 일이 있으니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만찬에 참석할 준비는 다 된 건가?”
“벤이 옷을 준비해 주면 입고, 엘리엇 씨를 따라가서 얌전히 앉아 있으면 되는 거겠죠.”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면 안 된다네. 다들 자네를 보러 오는 거니까. 그리고 자네 목표를 위한 일보 아닌가.”
“음. 글쎄요. 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GFG 능력자로서의 자네와 정치를 하는 자네 자신을 분리할 생각인가?”
“그렇다기보다는, 능력자라는 이유로 갑자기 행정부의 핵심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는 게 맞겠죠. 그래 봐야 이용이나 당하든가, 엘리엇 씨 말처럼 회의실에 앉아 멍하게 남의 말이나 듣고 있게 될 테니까요. 일단 얼굴을 익혀 두는 건 이번 일이 커졌기 때문이니까 그냥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알려 두는 정도로만 할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남보다 앞선 라인에서 출발한다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제대로 된 과정을 밟고 싶어요.”
“좋은 생각일세.”
엘리엇은 몸을 일으켜 션의 뺨에 짧게 키스하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저녁에 만나세.”
“네.”
션도 짤막한 작별 키스를 남기고 접견실을 나섰다.
* * *
그날 저녁의 만찬은 켄싱턴궁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비공식 만찬이지만 사적인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공적인 모임도 아닌 중간 정도의 애매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션을 직접 만나 보고자 하는 각료들과의 친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션 자체가 그럴 만한 공적 지위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초대장에는 ‘헤리퍼드 공작의 파트너’라고만 적혀 있기 때문이다.
버킹엄궁 투어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 왕세자의 만찬에 초대된다는 사실은 션에게 일종의 뿌듯함과 동시에 어깨 무거운 부담을 가져다주었다. 외할머니가 아신다면 무덤 속에서도 펄쩍 뛰실 거라고 션은 생각했다.
가을에 정장을 맞출 때 테일러가 겨울용 디너 슈트를 두 벌 만들어 주었는데, 언제 입을 일이 있겠는가 생각하면서도 받아 두었더니 이렇게 실제로 쓸 일이 생겼다. 벤은 그중에서 보다 인포멀한 디자인을 골라 꺼냈다. 배에 커머번드를 두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편하기는 했지만, 이런 것도 괜찮으냐고 묻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교계 첫 데뷔 때와는 위상이 다르십니다.”
역시 죽을 때까지 감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션은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면서 벤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커프스링크는 지난번에 엘리엇에게 받았던 에메랄드를 꺼냈다. 그러자 벤이 이번에도 안 된다고 막아섰다. 같은 것을 두 번 연달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가 가져온 것은 얇은 무색 사파이어를 씌운 카메오였다.
“이것도 귀한 보석인 것 같은데요.”
“주인님께서 션 님을 위해서 준비해 두게 하신 것입니다. 초상이 누구의 것인지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션은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면 오래된 조각처럼 보여서 생각도 안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자 왼쪽 손목에 달린 것은 엘리엇의 옆얼굴이고 오른쪽 손목에 달린 것은 자신의 옆얼굴이었다. 손을 모아 나란히 놓아 보자 마주 보는 듯이 초상의 시선이 맞는다. 그는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주인님에게는 반대로 만들어진 것이 한 쌍 있습니다.”
물론 엘리엇은 직접 이런 물건을 만들라고 말한 일이 없고, 필요한 것을 모두 준비해 두라고 떼어 준 예산 중에서 벤이 주문하여 만든 것이지만, 굳이 그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애에 대해서는 먹통이나 다름없는 주인을 보좌하는 것은 집사의 의무이고, 기뻐하는 사람에게 굳이 산통을 깰 필요도 없으니까. 그리고 엘리엇이 이 커프스링크를 보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서랍에 넣어 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션도 엘리엇에게 이렇게 섬세한 센스가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까지 새겨진 한 쌍의 물건을 받고 기쁘지 않을 리 없다.
“남이 알아보지는 못하겠죠?”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알려지는 게 곤란하다면 주인님께서 착용하지 못하게 하셨을 겁니다.”
소매를 다듬어 주면서 벤이 말했다. 아마 엘리엇은 곤란한지 아닌지에 대한 개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션은 그 말을 기꺼이 믿기로 했다.
보타이를 매고 나자 벤은 마치 션이 제 작품이기라도 한 양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아주 근사합니다.”
“고마워요.”
“재단사가 다음에는 언제 션 님의 옷을 만들게 되겠느냐며 저를 독촉합니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다음번에 주인님께서 새 옷을 맞추실 때 션 님도 함께하실 수 있도록 일정을 맞춰 보겠습니다.”
스스로 아첨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찌나 입속의 혀처럼 구는지 션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부탁합니다.”라고 말하자 벤이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막 준비를 마쳤는데 엘리엇이 문을 두드렸다.
“준비 끝났는가?”
문을 열고 잠시 눈이 부신 듯 엘리엇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다가 한 번 헛기침을 했다.
“가세.”
“저 어울려요?”
“아주 잘 어울리네.”
엘리엇이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션은 그를 뒤따라 드레스룸에서 나가면서 손을 잡아 보았다. 역시 엘리엇의 커프스링크도 그가 차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가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키자 엘리엇이 “왜?” 하고 돌아보았다. 션은 붙잡은 손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보였다. 두 개의 소매에서 한 쌍의 커프스링크가 서로를 바라본다.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잠시 생각한 후에 얼굴을 붉혔다.
그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션은 꽉 잡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윌리엄이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건네며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엇이 한 번 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션은 놓지 않고 차에 올랐다. 결국 엘리엇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션의 손가락에 부드럽게 손가락이 얽혀 왔다.
차가 켄싱턴궁에 들어갈 때까지,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