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Interlude (4)
UAE가 사실상 굴복했다.
연락이 온 것은 엘리엇이 리야드에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의 일이다. 히자드 네지드 왕제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알 데예야 부국장이 사절단 전부를 끌고 급히 귀국하고, 그 직후에 UAE 대사가 사죄를 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왔다. 우선은 왕실에 사과의 뜻을 전하고, 귀국하면 엘리엇에게도 따로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것이다.
아직 그쪽에는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엘리엇은 당황했다. 그의 행보에 압박을 느낀 것이라면 회의장에서 그만큼 강경하게 나왔을 리 없다. 그 후에 생긴 문제로 인해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인데, 아무리 UAE가 전제정에 가깝다 해도 이렇게 쉽게 방침을 바꿀 수 있을 리 없다. 어찌 된 거냐는 말에 앤드류가 “그렇게 되었어.”라고만 말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근신 중이라던 알버트가 뭔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들을 수 있었다.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기밀이라서 알 수가 없었다. SSB에서 대규모로 공작을 시작한 것 같지만 얼마나 꽁꽁 기밀로 숨기고 있는지 엘리엇이 갖고 있는 어느 라인으로도 파악할 수가 없다.
별수 없이 직접 전화를 걸어 그게 션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알버트 대신 연결된 부국장은 “맥케인 씨에 관한 일은 아닙니다.”라고 확고하게 말하고 죄송하지만 지금 인력도 모자라고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보통 때라면 이런 식으로 그를 무시할 수 있을 리 없는데 말이다. 그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국장에게 무시당했다든가 하는 그런 사소한 문제에 화를 낼 만큼 엘리엇은 마음이 좁지 않았다. 그저 션에 관한 일일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뿐이므로 그는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의 통화에 션은 평온한 목소리로 “보고 싶어요.”라고 말해 왔다. 엘리엇은 안달하며 걱정한 자신이 몹시 우스워졌다고 느끼고, 또 그런 기분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화까지 났다.
어찌 되었든 UAE가 물러나고 러시아에서 급하게 옐레나 미하일로바를 본국으로 송환하면서 투자 제안을 받아들였으므로 리야드에서의 일정은 애초 계획보다 가벼운 친목 도모 같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두 번째 소식이 왔다. 인도의 U급 GFG 능력자 사니아가 입국했다가 점심을 먹고 두 시간 만에 도로 출국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멋모르는 공무원 몇 명이 ‘런치 비행’이라고 농담한 사건이었는데, 왜 입국했는지는 짐작이 갔으나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출국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엘리엇은 인도 쪽에도 연줄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미리 정부 요인 여러 사람에게 찔러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날아온 것을 보면 그녀와 그녀가 소속된 기관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녀는 유턴했다. 그 원인이 엘리엇의 영향력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본도 정중한 사죄의 뜻을 전하고 물러났다고 하고, CIA는 갑자기 입국한 요원 대부분에게 단기 휴가를 주었다. 그 외의 나라들도 침묵했다. 분명히 강경 수단으로 나올 것이라고 예측한 코트디부아르나 이렇게 간단히 끝낼 리 없는 중국조차 말이다. 다른 나라들이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미리 빠진 것일까.
사태는 일단 소강상태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어서야 향후의 대처도 할 수 없고 불안할 뿐이다. 결국 엘리엇은 준형에게도 전화해 보았다. 그러나 준형 대신 클로이가 배시시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마스터는 중요한 의뢰가 있어서요. 지금 런던에 안 계세요.」
이번 사태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무리였다. 알지 못하는 것은 답답하지만, 거기에만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다. 긍정적으로 해결된 일에도 문제들은 따라오기 때문이다. 드로즈바 송유관을 차단하는 대신 저가에 원유와 천연가스를 공급받기로 했던 벨라루스나 가스프롬 압박에 동참하기로 한 쉐브론에서는 갑자기 그걸 전부 취소하고 가스프롬에 투자하겠다니 무슨 소리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엘리엇은 상층부에 뇌물을 먹여 입을 다물렸다. 현대 회화를 수집했던 어머니의 취미가 처음으로 도움이 되었다. 전시실을 비우다시피 하자 작품을 관리하고 있던 미술관장은 울부짖었지만, 가전의 보물이라든가 유출 금지된 문화재도 아닌 물건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가전으로 아껴 온 물건이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큰 문제는 내부적인 것이었다. 화이트 포인트는 완전히 개인의 소유이지만, BO나 페트로 피나에서는 장기 프로젝트들을 취소시키거나 경영진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들을 뭉개고 새로운 계약을 하거나 불확실성이 높은 투자를 강요했으므로 불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 가지 방침을 쭈욱 밀어붙인 것도 아니고, 두 가지 방안을 두고 회사 이익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해서 며칠 간격으로 이랬다저랬다 했으니 경영진에서 전부 사표를 내미는 방식으로 항의하고 노조에서 성명을 발표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엘리엇은 경영진에게 직접 사과의 편지를 쓰고 노조에게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함으로써 임시로 갈등을 봉합해 두었다. 자문단에서는 이 기회에 내부를 정비하고 충성심 높은 사람들로 자리를 채우라고 권했지만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헤리퍼드가 이때까지 줄곧 사업을 성장시키고 권위를 유지한 것은 대대로 공작 스스로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경영권을 쥔 채로도 전문가에게 잘 맡겨 왔기 때문이다. 경영진의 유능함은 익히 알고 있으니 가능하면 신뢰 관계를 원상 회복시키고 싶었다. 물론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한 번 저지른 일은 두 번째도 저지를 수 있다고 여겨지게 마련이다.
신의는 헤리퍼드가 쌓아 온 가장 큰 자산이었는데, 제 욕심 때문에 그것을 전부 부수고 말았다. 되찾으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가장 빠른 방법은 그가 전면에서 물러나고 사실상으로도 지분을 처분하거나 신탁으로 묶어 손에서 놓아 버리는 것이겠지만,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렇게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또다시 사리사욕을 위해서 회사를 제멋대로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사실은 정확한 것이었다.
자신이 이렇게도 옳지 못한 인간이었던가 하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공정하고 사려 깊은 헤리퍼드 공작, 지위에 걸맞게 행동하고 신분을 잊지 않고, 나서지 않되 물러서지도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고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왕실에 충성하고 신실한 헤리퍼드 공작. 그 껍데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엘리엇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뭔가가 있다는 것조차 최근에 알았다. 션이 다정하게 안아 주고 키스해 주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껍데기 안에 있는 엘리엇 자신이라 말했어도, 너무 불확실하여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립하기는 하는 걸까 의구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다. 진짜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은 제멋대로이고 탐욕스러우며 참을성이 없고,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할 줄도 모르는, 악인 수준도 되지 않는 어린애이다.
‘마음을 단단히, 눈을 공정히, 귀를 현명하게, 입을 무겁게, 손을 어질게 해라. 내려다보기 위해 위에 있는 것이며, 떠받치기 위해 힘이 있는 것이란다. 고귀함이란 명예에 뒤따르는 의무를 지킬 때만 존재한다.’
아버지의 교훈을 떠올려 본다. 그의 마음은 전혀 단단하지 않았고, 공정함과 현명함은 흉내에 불과했으며, 어짊도 위선에 불과하다. 위에 있고 힘이 있어 의무를 다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를 우선으로 생각한다. 명예 따위는 모조리 바닥에 팽개쳐 진흙밭에 굴려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션이고, 션뿐이며, 그가 가진 것은 전부 션을 위할 때만 가치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고요하게 호흡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는 그것을 절감했다. 공감하는 대신에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훈련으로 만들어 온 판단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기실 그는 사람이 죽었든가 아니든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션의 마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은 자신의 본질에 대해 참담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이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시간대를 보아 오전 일찍이었으므로 엘리엇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을 테니 아직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항에 내려서 전화를 걸었는데도, 여전히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시각은 오전 10시. 아무리 늦게 일어나도 아직까지 자고 있을 리는 없다. 병원일까. 생각하면서 비서에게 윌리엄에게 전화해 보라고 하고 출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보안부 정보 팀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공항까지 마중을 나오게 하는 일은 없으므로 틀림없이 전화로는 말할 수 없는 용건일 것이다. 정보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다기보다는 중요한 일입니다. 중국 대사관에서 장페이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행방불명?”
“중국 측에서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는데 내부 혼란이 너무 심해서 다 숨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행방불명된 사람이 사람인 만큼 중국 본국에서도 난리랍니다. 진 차관이 집무실로 쓰고 있던 세이프 룸에 1ℓ 이상의 피가 남아 있었다고 하니 거기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모습을 감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진 차관이 장페이를 살해하고 시체를 숨겼다는 말도 나오고요.”
“말도 안 되는군. 일반인이 U급 GFG 능력자를 무슨 수로 살해한다는 말인가? 아니, 독살이라면 가능하겠군.”
“그래서 진 차관과 루오 대사가 서로 상대방이 장페이를 독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군요. 중국에서는 우리 정부에 장페이가 행방불명된 11월 5일 당일 새벽에 3시간 동안 SSB가 대사관의 전파를 차단하고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항의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장페이가 입국한 사실이 없는데 무슨 말이냐고 대응하고 있고요.”
“시간 끌기인가.”
혈액이 남아 있다면 입국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리라. 엘리엇은 딱딱한 얼굴로 상대를 재촉했다.
“또?”
“대사관 직원들에게 전파가 차단된 동안 기억의 결락이 있다고 합니다. 새벽까지 태반의 직원이 근무 중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겁에 질려서 현지 직원들은 무작정 사표를 내고 출근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도 문제가 되고 있는가 봅니다.”
그가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11월 5일 새벽이라고?”
설마 션이 한 일일까. 그렇다면 알버트와 앤드류가 뭔가를 숨기려고 했던 것도 납득할 수 있다. 사니아가 갑자기 점심만 먹고 돌아가고 UAE가 발을 뺀 것도, 일본이 사죄하고 CIA가 침묵한 것도 설명된다. 이유 없이 일정 범위의 사람이 기억을 잃었다니, 런던 사태와 동일하지 않은가.
엘리엇은 화가 치솟아서 주먹을 쥐고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보안부의 책임인 것은 아니지만 노기를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몸조심하고 기다리라고 했건만 성치도 않은 몸으로 U급 능력자와 싸웠단 말인가? 앤드류와 알버트도 그렇다. 션이 설령 하겠다고 나섰더라도 자신을 생각했으면 말리는 게 옳았다.
보안부 직원이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일개 고용인에게 말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 그는 손을 내저어 상대를 물렸다.
“타운 하우스로 가겠다.”
“예.”
어차피 돌아오면 바로 션의 얼굴부터 볼 생각이었으므로 그는 곧바로 말했다. 차 안에서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에 타운 하우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만, CIA의 존슨 부국장이 오전 일찍 찾아와 지금까지 마셜 씨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모두 물린 상태로요.”
“알았네. 방해하지 말고 지켜보게.”
그는 짧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차는 오래지 않아 타운 하우스에 도착했다. 고용인들이 모두 나와 대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엘리엇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렀다.
“오스카!”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오스카 대신 웨스너가 나와서 절을 했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엘리엇의 뒤로 따라붙은 데이비드가 그의 어깨에서 재킷을 벗겨 낸다. 엘리엇은 거실로 통하는 복도까지 따라 들어온 웨스너에게 물었다.
“경비 상태가 어떻게 된 건가? 왜 평시대로 되돌아가 있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보안부 전원이 근무하며 내외로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션 님이 회복하셨기 때문에 평소보다 경계 태세는 올리되 긴급사태 지침을 따르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스카가 명령한 건가?”
“션 님이 그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엇은 멈칫했다. 션의 말을 따랐다는 웨스너의 공손한 말투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스카와 자네는 션의 명령을 듣기로 한 건가?”
“임시입니다. 긴급태세로 다시 전환하기를 원하신다면 바로 그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라는 의미는 아닐세.”
조금 머리가 식었다. 션에게 다른 곳도 아니고 보안부를 마음대로 할 만큼의 권한을 준 일은 없다. 잡을 수 있다면 잡는 게 좋으리라고는 생각했다. 핼러윈 파티를 준비할 때 뭉뚱그려 ‘창고를 마음대로 열어라.’라고 말한 것에는 분명히 그런 의도가 있었다. 가솔들은 그 말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행동할 것이고, 많은 숫자가 션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엘리엇은 션이 그 안에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권위를 얻어 내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고서 자기가 무작정 권한을 쥐여 준다면 아랫사람이 따르지도 않을 터이고, 감당해 내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션은 그가 생각했던 최대한의 권위를 이미 얻어 낸 모양이다. 저택의 보안 상태를 변경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션이 쓰러져 있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했으며, 그것이 남들에게 어떻게 이해될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로 그는 놀랍게 생각했다.
어쨌든 션이 깨어났다면 전처럼 긴급사태는 아닌 것이 맞았다. 냉정하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화가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경비를 줄인 거라면 션을 꾸짖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딱딱하게 말했다.
“알았네. 물러가게.”
웨스너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갔다. 엘리엇은 데이비드에게도 물러가라고 말하고 침실로 향했다. 션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직도 몸이 좋지 않은 건가, 하고 침실 문을 열려는데, 데이비드가 우물쭈물하다가 그 직전에 재빨리 말했다.
“션 님은 외출하셨습니다.”
“외출? 병원에 갔는가?”
“그게……. 출근을 하셨습니다.”
“출근?”
“베드퍼드 공작저로 말입니다. 아픈 곳이 없는데 언제까지 병가를 내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셔서 말리지 못했습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엘리엇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도 표정을 정돈하기가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송구한 얼굴로 변명처럼 말했다.
“검진은 어제 그제 받으셨습니다. 이상 소견은 하나도 없고, 몇 가지 아직 시간이 걸린다는 검사는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까지는 피곤해하시더니, 점심부터는 식사도 제대로 하실 수 있게 되어서 원기를 차리셨습니다.”
“윌리엄은?”
“휴게실에 눈을 붙이러 갔습니다.”
엘리엇은 도로 차를 대기시키라 말하고 데이비드에게 재킷을 빼앗듯이 하여 걸쳐 입으며 밖으로 향했다. 이후의 일정은 화이트 포인트로 가서 터키 스트림 투자에 관한 중요한 서류들을 처리하는 것이었으나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단 션을 데려오고, 사직서를 나중에 보내게끔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는데, 로비에서 윌리엄이 그를 붙들었다.
“주인님.”
“가서 쉬게.”
왜 션을 보냈느냐고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 숙인 정수리가 온통 새하얀 것을 보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어서 엘리엇은 짧게 말했다.
“차를 들고 가시지요.”
“바쁘니까 저녁에.”
“들고 가십시오. 그리 화가 난 채 가시면 안 되십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네.”
“데이비드, 가서 준비해 오게.”
그가 엘리엇의 팔을 잡으면서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엘리엇은 화를 내려 했지만, 윌리엄은 다정하게 그의 팔을 잡아끌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렇게 가시면 션 님의 체면에 해가 됩니다.”
엘리엇은 멈칫했다. 비로소 시야가 넓어져 당혹스러운 얼굴들이 눈에 비친다. 그는 자신이 감정적이 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윌리엄이 이끄는 대로 거실로 되돌아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왜 감정적인 행동이 사교계의 금기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판단력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데이비드가 서둘러 티 세트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윌리엄은 문 앞에서 그것을 받아 들고 데이비드를 내보냈다. 그리고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느린 손짓으로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했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십시오. 션 님에게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병원을 오가는 것조차 불안한 마당에 출근이라니.”
“션 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알고서도 결정하신 일이십니다.”
예열한 물을 따라 버리고 맑은 찻물을 따뜻한 잔에 따른 후에 얇게 저민 레몬을 띄운다. 익숙한 향기에 익숙한 루틴, 느긋하고 능숙한 손놀림을 지켜보는 사이에 안정감이 들어서 엘리엇은 긴 한숨과 함께 노기를 털어 내었다. 그러자 뱃속이 조금 편해지고 머리도 다소나마 맑아졌다.
“자네가 우려 주는 차를 굉장히 오랜만에 마시는 기분이 드는군.”
“계속 바쁘셨으니까요.”
“……고맙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따스한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잠시 눈을 감고 한 박자 쉰다. 그리고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션에게 다 알려 주었는가?”
“예. 물으시기에 제가 아는 만큼은 전부 알려 드렸습니다. 어린 분도 아닌데 언제까지고 품에 숨기고 눈을 가리고 있으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의지가 굳건하고 판단력이 있는 분입니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믿어드리십시오. 무슨 일이든 의논하여 결정하셔야지요.”
엘리엇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의 말이 백번 옳다. 자신은 이대로 달려가 보호라는 핑계로 그의 직장을 없애고 침실에 감금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션이 그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것은 굳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부끄러움을 느껴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지켜 준다는 말에는 구속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헤리퍼드라는 이름이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으면서도 그보다 더 무거운 제 욕심을 얹으려 했던 것이구나 하고 한탄한다.
“자네 말이 맞네.”
엘리엇은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션은 스스로 올라와 옆에 나란히 서겠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켜 줄 때에야 비로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뜻을 꺾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지켜 주는 게 아니라 같이 손을 잡고 헤쳐 나가야 한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단 사나흘만이라도, 자신이 알려 줄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고 품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윌리엄이 가만히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등을 주름진 손으로 감싼다. 엘리엇은 그 손의 따스함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돌아가신 큰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늘 가장 걱정하신 게 무엇인 줄 아십니까?”
“글쎄. 아일라 문제였나?”
아니면 후계자 문제였을까. 아일라와 그가 각방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끝끝내 걱정하셨으니까 말이다.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잊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말입니다. 두 분이 아일라 님을 그렇게 붙잡고 싶어 하셨던 것은, 그분마저 떠나 버리면 주인님이 정말로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될까 봐 걱정하셨기 때문이랍니다.”
윌리엄이 그의 손등을 두드리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하루의 일, 좋았던 일, 싫었던 일, 그런 걸 이야기하고, 어려운 일, 고민되는 일이 생겼을 때 같이 머리 맞대고 의논하고 대화할 사람이 없는 삶은 너무 외로운 것이니까요. 션 님이 주인님에게 그런 분이 되어 주실 것 같아서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
엘리엇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션에게도 약속했었다. 화나는 일에 대해서도, 서운한 것에 대해서도, 뭔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로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자신은 틀린 것이다. 션이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나가 버린 것이 화가 난다면, 그렇다고 말해야 했다. 직장 일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만두게 할 것이 아니라 내게 있어 그의 건강과 안전이 아주 많이 소중해서 그러기를 바란다고 설득을 해야 한다.
“만나러 가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화를 내셔도 괜찮습니다. 많이 이야기하고, 많이 의논하십시오. 주인님은 아직 이야기하는 것에 서투르시니까 조금 정도의 실수는 션 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이 “잘하고 계십니다.”라고 속삭이고 일어섰다. 그리고 션에게 미리 연락을 넣어 보겠다고 말했다.
엘리엇은 혼자서 앉아서 찻잔을 끝까지 비웠다. 윌리엄이 왜 오지 않는가 생각하면서 일어서는데, 벤이 문을 두드렸다.
“존슨 부국장이 뵙고자 하십니다.”
“마셜 씨는?”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다.”
“알았네. 이쪽으로 모시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이 알았다고 절을 하고 물러났다.
윌리엄이 돌아왔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때쯤에는 이미 완전히 차분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으므로 션을 만나러 가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정한 뒤였다. 냉정한 상태에서 말하자면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지 몰라도 바쁜 일은 많이 있었던 것이다. 대신 경호를 위해 따라갔다는 오스카에게 전화하여 그가 안전하게 베드퍼드 공작저에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그는 비서에게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도록 명령한 후에 데이비드에게 인포멀한 재킷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존슨 부국장이 응접실로 안내받아 왔다. 맥과 4시간이나 무슨 밀담을 했는지 다소 궁금했지만, 그것을 먼저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엘리엇은 평화로운 얼굴로 응접실에서 두 번째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리야드에는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합하?”
응접실로 들어서면서 존슨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엘리엇은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자리를 권했다. 데이비드가 차를 들였다.
“헤리퍼드의 울타리가 높기로 유명하고, 홍차가 향기롭다고도 익히 들었는데 이렇게 대접받을 기회가 오다니 기쁩니다.”
“마셜 씨의 손님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고, 방문객에게 차도 내지 않을 만큼 가난한 집은 아니오.”
내 손님은 아니라는 뜻을 담아 말하자 존슨이 미세하게 굳어진 얼굴로 미소했다.
“가셨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합하께서 사업에 실패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지만요.”
“운이 좋아서 문제를 빨리 처리할 수 있었소. 그런데, 존슨 부국장도 그랬던 모양이오? 수행원들이 대부분 단기 휴가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걱정하던 일이 모두 해결되었으니까요. 목숨도 걸 각오로 여기까지 따라와 주었는데, 잠시라도 쉬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숨이라니? 우리나라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들은 일이 없는데?”
엘리엇이 짐짓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존슨이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 런던에는 아무 일도 없지요. 저희가 오해를 하여 합하와 맥케인 씨에게 큰 심려를 끼쳐 드린 것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왔습니다.”
“사과라.”
“제 독단적인 판단으로 섣불리 맥케인 씨의 능력이 컨트롤 되지 않고 있으리라고 믿고, 합하의 보증마저 신뢰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 말입니다. 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존슨이 조금 헛기침을 했다. 엘리엇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CIA에는 책임이 조금도 없고 존슨 부국장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로군?”
“국장님께서는 알지도 못하십니다. 폭주가 발생한 것 같다고 알려졌을 때 제가 독단적으로 요원들을 불러들여서…….”
“그렇다면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니라 조직 내부에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게 아니겠소?”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경솔한 성격이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돌아가면 사퇴할 예정입니다. 행여나 이 일로 인해 오랜 우호 관계가 틀어진다면 저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실내 온도가 서늘하게 맞춰진 상태인데도 존슨이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를 닦았다. 엘리엇은 쓴웃음을 지었다. 맥과 이미 나름대로 이야기를 마쳤을 테고, 영국에서 책임을 요구한다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며 혼자 뒤집어쓸 각오를 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영국을 대표하는 사람도 아닌데, 설령 조금 서운한 일이 있다 한들 나라 간의 우호가 깨질 일이 있겠소? 양국을 위해 좋지 않은 일이 아니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존슨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오?”
“사죄의 뜻으로,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했다. 존슨이 약간 망설이더니, “아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하고 운을 띄웠다.
“쉬진위는 위궤양이 아니라 췌장암입니다.”
엘리엇은 침묵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쉬진위는 장윈핑의 심복이자 브레인이다. 지금은 위궤양으로 수술하고 입원 중이라는 것이 대외적으로 공표된 근황이었다. 그가 죽으면 장윈핑의 세력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장페이까지 잃은 현재 상황에서라면 권력 기반 자체가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장윈핑이 마음에 들어 하는 진차오밍은 세력의 수장이 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그는 아직 류위안창 쪽에도 선을 제대로 댔다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중국에 뭔가 이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이제 막 관심을 두기 시작하려는 형편이다. 이것이 뭔가 결정적인 정보라든가 보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을 존슨은 뒤늦게야 깨달은 듯했다. 당혹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중국을 도모하시려던 게 아닙니까?”
말해 놓고 실수했다는 얼굴을 한다. 경솔한 성격이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엇은 냉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존슨이 헛기침을 했다.
“합하께서 하시는 일에 간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달리 견제할 세력을 찾아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쎄. 나는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말이오.”
“그러시군요. 제가 괜한 말씀을 여쭈었군요.”
존슨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실수했던 것도 다시 생각하면 별일 아니다 싶었던지 태도에 여유도 웃음도 돌아왔다.
“그럼, 바쁘실 텐데 더 방해하지 않고 물러가겠습니다.”
“언제까지 런던에 계실지 모르겠지만 짧은 휴가 기간, 즐겁게 보내시오.”
엘리엇은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했다. 실제로 존슨이 휴가를 즐길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일정 수첩을 든 비서가 들어왔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가? 이 뒤는 바로 화이트 포인트로 갈 건데.”
“저녁의 일정을 결정하시기 전에 미리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코트디부아르의 그라델 부통령, 일본 대사, 한국 대사가 각각 접견 신청을 했고, 중국 대사관의 무관부장이 역시 접견 신청을 했습니다. 작센 공작께서 급한 일로 전화 통화를 원하시고, 벌커리 수석 비서가 벨라루스 정책에 대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밤 비행기로 벨라루스로 출발한다고 합니다.”
“이자벨에게는 오늘 밤 안에 연락하겠다고 하게. 작센 공작에게는 화이트 포인트로 가기 전에 전화를 하도록 하지. 오늘 접견은 하지 않겠네. 임원진에게도 먼저들 식사하라고 해. 그런데 중국의 무관부장이라고?”
“예. 진차오밍 차관과 대사에게 둘 다 문제가 있어서 본국 명령으로 근신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관부장이 책임자 자리에 있는 듯합니다.”
“오늘은 어렵고, 내일 시간을 잡을 수 있다면 잡아 보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라델 부통령은 어떻게 할까요?”
엘리엇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무시해.”
“알겠습니다.”
비서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먼저 물러갔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예상한 것보다 한 시간도 넘게 흘렀다. 원래는 화이트 포인트에서 임원들과 같이 오찬을 들 생각이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일이 늘어날 것 같다. 사실 자기 일이 이렇게 바쁘다면, 당사자는 아니라도 베드퍼드 공작도 안팎으로 정보를 구하느라 난리일 것이다. 션은 오늘 퇴근할 수 있기는 한 건가. 자기가 일주일도 넘게 비서들을 퇴근 안 시키고 굴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화이트 포인트에서의 회의를 끝내자 해 질 녘이 되어 있었다.
서류는 단어 그대로 산만큼 쌓여 있었지만 엘리엇은 집무실로 돌아가지도, 앤드류를 만나러 가지도, 접견을 하러 가지도 않고 그날의 일을 마쳤다.
나머지는 내일부터. 그런 말은 좀처럼 해 본 일이 없지만, 오늘만은 그렇게 말했다. 겨우 숨을 돌릴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오늘만큼은 션과 같이 있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그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벌써 오후 4시였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하늘이 이미 붉었다.
그때까지도 션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비서 일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 비서를 부리는 입장이었지만, 수습 기간도 채 끝나지 않은 신입이 지금처럼 격변하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사적인 통화를 할 수 있는 형편일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마 션의 처지에서는 오스카를 위시하여 경호원들을 데려가는 것도 꽤 부담이었으리라.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화를 냈겠지만 말이다. 션이 부담을 느낀다는 것까지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면구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아직까지 퇴근하지 않았다면 직접 베드퍼드 공작저까지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오스카에게 전화해 보자 두 시간 전에 조퇴를 했고, 지금은 브롬턴 공동묘지에 있다고 했다.
차로 그쪽으로 향하는 도중에 비서가 사정을 알려 주었다. 런던 시경의 발포로 사망한 네 명의 피해자가 브롬턴에 묻혔고, 오늘 네 집안의 유가족이 모여 함께 추모식을 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엇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이미 대리인을 시켜 장례식을 돌봐 주게 했었다. 그것이 충분히 성의 표시가 되었다든가 유가족의 슬픔을 씻어 주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션이 거기 참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묻기 전에는 알려 주지도 않았다.
그것이 션이 생각하는 ‘책임’의 일부라면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섬세한 성품이 상처받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묘지 앞에 차를 대고 그는 서둘러 내렸다. 비서가 내렸지만 따라올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젓고, 안에서 오스카와 합류할 테니 경호도 많이 필요 없다고 두 명만 데리고서 그는 혼자서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늦어 묘지를 가로지르는 길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일몰 직전이라 성묘객도, 산책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엘리엇은 노을이 새어 들어오는 길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오래지 않아 낮게 웅얼거리는 듯한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엇은 그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붉은 흙이 드러나 있는 새 묘지 앞에 검은 옷을 입은 남녀들이 서 있다. 그리고 션도 그 앞에 있다. 위아래 검은 정장을 입고 낮은 소리로 찬송가를 따라 부른다. 경호원들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엇은 다가서려다가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오스카가 이쪽을 돌아보고는 가만히 입술에 손을 대었다. 확실히 지금 자신이 나서서 저기에 끼어들어 션에게 가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사가 끝났다. 션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유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가 오열하면서 주저앉았다. 엘리엇은 경호원만 한 명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지금 자기 같은 사람이 끼어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션이 브롬턴 묘지에서 나온 것은 해가 지고 저녁 시간도 훌쩍 넘은 8시였다. 엘리엇은 그때까지 묘지공원 정문 건너편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거리가 물에 젖어 검은색으로 물들고 유리창에 타닥타닥 소리가 난다.
공원 문이 닫히고, 션이 유가족들을 배웅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는 동안에 카페 주인이 가게도 닫을 시간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해 와서 그는 지갑에서 대강 현금을 얼마 꺼내 주고 가게를 아예 다음 날까지 빌렸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션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스카가 문을 열었다.
“엘리엇 씨.”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는 환하게 밝은 얼굴로 팔을 벌려 왔다. 엘리엇은 약간 망설였지만, 가만히 그를 한 번 끌어안아 주었다.
“왜 오셨어요? 타운 하우스로 바로 갔을 건데.”
“자네야말로……. 여기까지 왔어야 했는가?”
“제 ‘책임’이니까요. 적어도 눈에 새겨 두기는 해야죠. 아, 커피 주실 수 있어요?”
그가 카운터 너머를 향해서 물었다. 주인이 물론 된다고 친절하게 말하고 커피를 뽑았다.
션은 엘리엇을 자리에 앉히고 자기도 그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 재킷을 벗어서 젖은 어깨를 손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내면서 오스카에게 이제 물러가라고 말했다. 오스카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엇에게 인사를 하고 경호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윌리엄은 그렇다 치고 오스카와 이자벨은 설득하기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했는가?”
“아, 엘리엇 씨. 저를 보호하겠다고 그렇게까지 하시고서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션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벌커리 경에 비해서 확실히 오스카 씨 쪽이 설득하기 어려웠지만, U급의 GFG 능력자를 해칠 수 있는 것은 같은 U급 능력자뿐이라고도 하니까요. 오랫동안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어요. SSB쪽의 제안도 있었고요. 지금 그쪽에서도 지켜보고 있거든요. 경호인지 감시인지 애매하기는 하지만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요. 아, 커피다. 고마워요.”
엘리엇은 주인에게 이만 나가 보라고 말했다. 션이 갈 때 문자를 주겠노라며 그에게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커피 잔을 들며 엘리엇에게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며칠간 못 마시니 죽겠더라고요.”
“자네는 커피 중독이야.”
“그런 것 같아요.”
“웃지 말게.”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엇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방에서 뛰쳐나가 혼자 가 버린 것이 8일 전의 일이다. 4일 전에 깨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잠깐이나마 말을 나누었다. 그러나 마치 8년과 4년이 지난 것처럼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션이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조용한 카페에서 작은 테이블을 놓고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되고 엉덩이가 들뜬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해서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겪고 나서부터 자신은 침착성을 잃은 데다 충동적인 성미가 된 것 같았다. 별로 좋은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유족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힘들진 않았고?”
“진짜 이야기는 할 수 없었으니까요. 제 GFG가 문제가 되어서 경찰에서 그런 일이 생겼고, 당신의 아내가, 남편이, 딸, 아들이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죠. 이번 일 자체가 기밀이 되어 버려서……. 정말로 사죄를 하려면 그렇게 했어야겠지만요. 그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고, 묘 앞에서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못했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자네 탓이 아닐세.”
“엘리엇 씨는 저한테 무르시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제 잘못이에요. 저기 묻힌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실제 방아쇠를 당긴 사람과 그러도록 명령한 사람에게까지도 죄를 지은 거지요.”
“자네는 방아쇠를 당기라고도, 명령하라고도 하지 않았어. 그런 일이 생긴 것은 당사자들이 본래부터 그런 충동을 내적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대응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런던에 있던 95만 명의 사람 중에 오로지 엘리엇 씨만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어요. 아마 거기에 95만 명이 아니라 950만 명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지킨 사람이 채 열 명은 되지 않을 테지요. 보통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강한 의지를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에요.”
“션.”
“그건 제 잘못이었어요.”
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어서 안심하고 있어요.”
“션…….”
“가족들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제가 알고 있는 한 죽은 사람의 기억을 되살려서, 그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해 주고 싶어 했는지, 그들로 인해 얼마나 삶을 삶답게 살아갔는지, 그런 이야기뿐이었어요. 거짓은 없지만, 생략이 많이 된 것이죠. 원망이라든가 한이라든가 죽음에 대한 억울함 같은 것은 숨기고……. 조금 더 살고 싶었다든가 하는 소망이나 분노, 세상을 향해 외쳤던 저주도 숨기고, 고작해야 7살 난 딸에게 발레를 시켜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든가, 사랑한다든가, 그런 말만 골라서요. 죽을 때 그 말들을 전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을 전해 준다고 해서 죄가 덜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앞으로 수십 년을 함께하며 쌓아 갈 시간을 그저 빼앗겼는데.”
“…….”
“다하지 못했을 말을 전하고, 울부짖는 사람을 기억에 담아 두고,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시간 동안 잊지 않는 것 정도가 아마 할 수 있는 속죄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받아 뒀어요.”
션이 가볍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엘리엇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동조를 사용했군.”
“네.”
“자네…….”
가고서 다시는 오지 않을 이에 대한 슬픔을 자기 것과 똑같이 온전히 받아 가슴에 묻는다. 엘리엇으로서는 도무지 션의 마음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션 하나를 보내는 것도 할 수가 없어서 죽어 버릴 뻔했는데, 그는 그것과 같은 것을 몇십 명분이나 받아들이고서도 환하게 미소하고 있다.
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대어 본다. 터져 버리지나 않을까 해서. 그러자 션이 그의 뒷목을 가볍게 잡아 끌어당겨 이마를 콩 찧었다.
“괜찮아요. 알고 계시잖아요. 저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엘리엇 씨가 더 소중하니까요.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엘리엇 씨가 있는 이상 저는 두 번 다시 무너지지 않아요.”
눈동자가 전보다 더 그윽하게 푸르다. 질리도록 본 얼굴이었고 아름답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워 엘리엇은 눈을 내리깔았다. 션이 가만히 입술을 겹쳐 왔다. 그는 손을 뻗어 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몇 번이나 입술 끝을 댔다 떼었다. 촉촉한 점막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피아노 선율만이 조용하게 흐르는 가게 안에 울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되는 입맞춤에 넋을 잃을 듯이 되고 만다.
갈증은 풀릴 줄을 모르고 입맞춤은 한없이 길었다. 손가락을 애타게 서로 얽고 입술로 서로의 뺨과 코를 비비고,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듯이 서로의 숨결을 들이마시면서 연약한 곳을 겹친다.
그리고 나서야 둘은 미소하면서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네.”
엘리엇은 그의 손끝에 키스하면서 말했다.
“용기라뇨.”
“사람을 자기 손으로 찔러 죽이고서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아. 슬픈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걸세.”
“으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되는데……. 엘리엇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정말 괜찮은 사람 같이 느껴지잖아요.”
션이 부끄러워하면서 엘리엇의 손을 끌어다가 달아오른 얼굴을 숨겼다. 엘리엇은 가볍게 그의 코끝을 꼬집었다.
“잘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네. 자네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시점에서 꼭 그래야 하는가 의문이 있네. 아직 안전한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고, 자네도 다 회복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전 이제 괜찮아요.”
“나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생각지도 않는가?”
션이 멈칫 조용해졌다. 엘리엇은 잔잔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추모식에 온 것은 이해하네. 유가족을 위하는 일도 더 늦출 수 없었겠지. 자네의 그런 다감한 성품을 나는 사랑하고, 이런 일에 내가 간섭할 깜냥이 안 되는 것도 알고 있다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걱정하는 걸 알면서 꼭 출근했어야 했는가?”
“아직 수습 기간도 안 끝났는걸요. 잘릴 수는 없었다고요.”
“일할 곳이 베드퍼드 공작가밖에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만둔다고 해도 내가 자네 한 사람 못 보살펴 줄까?”
“돈 때문이 아니니까요. 아, 엘리엇 씨.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션의 손이 뻗어와 그의 뺨과 눈 밑을 쓸었다.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요. 이해해 주세요.”
“자네는 아직도 예전에 말했던, 정치를 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추궁하듯이 말하자 션이 두 손을 깍지 끼었다. 그리고 곤란한 얼굴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아직 뭔가 시작했다고 하기도 어려운걸요. 지켜보겠다는 마음이 바뀌셨어요? 제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세요?”
“자네가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 던져 넣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엘리엇 씨.”
“중국 대사관을 습격한 것은 자네였지?”
“네.”
아니길 바라고 물은 질문에 션이 즉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알고 계셨군요. 어차피 숨길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했지만, 조금만 늦게 알게 되시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에게 숨기려 했는가? 위험한 일을 하기 전에 내게 상의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가슴 언저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의 안색이 침울해지자 션이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닿지 않는 마음 대신 체온이라도 겹치면 연결이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적 제한이 있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엘리엇 씨는 분명히 반대하실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반대할 줄 알았더라면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지.”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었어요.”
“어떤 필요가 있었어도, 자네가 내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는 되지 않네. 그리고 그 이전에, 그 어떤 것도 자네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이유는 못 돼. 그럴 필요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네.”
엘리엇은 딱딱하게 말했다. 머리가 조금씩 욱신거려서 션의 손 안에서 손을 빼내어 이마를 짚는다. 션이 당황하며 물었다.
“엘리엇 씨, 머리 아파요?”
“대수롭지 않네. 자네가 끼친 걱정에 비하면.”
“죄송해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엘리엇 씨 두통은요. 의사에게 보이셨어요? 리 선생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단순한 두통이야. 과민반응 하지 말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대체 왜 그랬던 건가?”
“이유가 합리적이라면 용서해 주실 건가요?”
엘리엇은 검지 끝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션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 얼굴은 뭔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자네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뭘 어쩔 수 있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자네와 헤어질 생각이 없고, 자네 인생, 자네 선택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단지 자네가 날 믿어 주지 않았다는 것, 자네가 약속을 어겼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 실망하게 되겠지.”
“용서해 주지 않겠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씀이네요.”
션이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자네가 내게 언제나 당당하면 되는 일 아닌가?”
“진실하면 실망시킬까 걱정스럽고,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거짓을 꾸며 대면 기만하는 것이 되니까요. 차라리 네 인생에 선택지 따위는 하나도 필요 없다, 전부 달라고 하시면 편할 텐데요.”
“그랬다 하더라도 자네는 또다시 이번처럼 행동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션이 자신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그랬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서로를 위해서 서로가 원치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 자신은 또다시 션을 저택 깊은 곳에 숨겨두고 싶어 할 테고, 션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나서려 할 것이다.
“엘리엇 씨를 믿을 수 없다든가, 엘리엇 씨가 지켜 준다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영역의 문제예요.”
션이 엘리엇의 손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제 양손을 다시 깍지 낀 채 말했다. 그리고 결심을 한 듯이 고개를 들어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GFG 능력자에게는 그 나름의 방식이 있어요. 엘리엇 씨가 설령 러시아를 침묵시키고 유럽을 인맥으로 묶어서 금력을 동원함으로써 그 바깥을 누르려고 해도, GFG 능력자를 상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리는 일인이 나라만큼 강할지 몰라도, 결코 단체가 아니니까. GFG 자체는 경제 가치로 환산될 수도 있고 금전으로 사용권을 살 수도 있겠지만, 능력자를 억압하려면 무력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이 사회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니까요.”
“의미를 모르겠군. 사회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니.”
“법률, 도의, 인간관계의 규칙, 이런 것들이 모두 일반인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쉬워요. 사람들을 구속하는 모든 종류의 룰이 사실상 아무 의미도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으로 사회에 편입되어 있는 건 치유계 능력자와 미약한 수준의 텔레파시스트뿐이고, 힘이 강대해지면 강대해질수록 소속감을 느낄 수 없게 돼요. 제이 씨처럼 아예 벗어나서 아웃사이더로 살든가, 맥처럼 위로 올라가 룰을 만드는 입장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려면 저처럼 필사적으로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 봐야 남의 삶을 흉내 내는 것밖에 되지 않았지만.”
“…….”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살아가든 간에 우리는 개인이에요. 설령 ‘자기’가 확장되어서 맥처럼 강대국의 일부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가 되거나 옐레나 미하일로바처럼 멋지게 적응해서 요직 인사가 되더라도, 혹은 아타 파닌 칼루처럼 그 자체가 나라가 되더라도요. 구속적인 룰, 사회가 없는 개인이라는 건 훨씬 야만적이에요.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힘의 우열이 관계를 구성하죠.”
지금까지 GFG 능력자로 살기보다 구속복을 입은 듯이 갑갑하더라도 일반인으로서 사회에 섞여 살기를 선택했던 션이었지만, 일단 바깥으로 나서자 그 무규칙한 질서는 마치 그의 안에 내재해 있었기라도 한 듯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준형과 처음 능력자와 능력자로서 ‘진짜’로 만나 맞대면하여 농담처럼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쪽의 사람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 올여름의 크루즈 여행에서 들쑤셔지지 않았더라도 결국 엘리엇의 옆에서 착한 강아지처럼 웅크린 채 보호받으며 끝까지 조용히 살 수는 없었으리라.
“저는 너무 강해요. 다른 능력자들에게 인지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죠. 전에는 한편으로 끌어넣으면 좋은 상대 정도였겠지만, 이제는 아군이 아니라면 살려 둘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위협적인 상대가 되었어요.”
“그래서 본보기를 보인 건가?”
“네. 두려움과 인정이 필요했으니까. 이건 능력자끼리의 이야기에 한정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엘리엇 씨가 저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은 빙 둘러 주변 조직을 이용하여 압박을 가하는 수단이잖아요. 옐레나 미하일로바가 본국으로 소환되게 만든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일반 사회의 방법이지요.”
경계심은 그를 배척시킬 것이다. 공포는 적의를 가져온다. 그의 힘은 지나치게 강하여 이미 다른 이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힘으로 적의마저 짓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준형의 말이 맞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결국 밖으로만 나가야 하고,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언터쳐블은 공존을 원한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헌장이라도 내세우지 않고서는 공존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능력자들끼리도,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에서도. 아마도 진짜로 공존을 원하는 사람은 일부일 것이고, 단순히 가입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리라.
“사회의 룰을 지킬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러나 자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반대로 말하면 GFG 능력자는 일개인에 불과해.”
“그 일개인이 저질러 버릴 수 있는 일은 런던의 파멸이었죠.”
션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생겨난 피해를 진짜로 되돌릴 방법은 없어요. 엘리엇 씨도 위험하다는 걸 아니까 맥과 손을 잡았던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결국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게 단순히 일시적인 동맹이라서가 아니라, 그와 손을 잡는다고 해서 공격이 멈춘다는 보장이 없다는 거예요. 게다가 그는 본질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맥을 좋아하지만요.”
엘리엇은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원하는 건 단순히 남을 누르는 것이 아니에요. 상대보다 강한 힘을 가지려는 것도 아니고요. 전 사후 대책이 아니라 예방을 원해요. 헤리퍼드가 저로 인해 아무런 손해도, 피해도 입지 않았으면 좋겠고, 가솔들이 안전하기를 바라고, 무엇보다도 저와 엘리엇 씨의 생활에 아무런 방해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제가 다른 U급 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뚝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자네는……. 자네의 힘을 싫어하지 않는가? 나 때문에 그런 희생을 치를 필요는…….”
“네. 싫어요. 하지만 그것이 또 저 자신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이건 제 문제이고, 저는 이제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제 결심에는 변한 바가 없어요. 높이 올라갈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말해 버리면 엘리엇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숙고한 뒤에 션의 말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고서도 여전히 마음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엘리엇은 그것이 단순히 감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았다. 션이 싫어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 벌써 자신이 더 지켜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두 가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거기에도 익숙해지리라. 이 가슴 저미는 감각에 익숙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자 션이 불안한 듯이 물었다.
“왜요? 역시 이해하실 수 없으세요? 이 일만큼은, 엘리엇 씨가 안 된다, 싫다고 하셔도 저도 양보할 수 없어요.”
“그게 아니야. 이해는 했네.”
목이 말라서 그는 션이 마시다 놓아둔 커피 잔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차갑고, 커피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는 자네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네.”
“말씀하세요. 엘리엇 씨가 제게 사과할 일이라니 있을 턱이 없는데…….”
“에미르 미란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나는 벌써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네.”
션이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거렸다. 왜 지금 그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알고 계셨을 거라는 건 저도 알아요. 알 아시리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시키셨었다면서요. 그게 사과하실 일이라는 건가요?”
“화내지 않을 건가?”
“제가 왜 화를 내요?”
“자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는데, 내가 그것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사과해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네.”
“아아, 엘리엇 씨.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고작해야 그런 일로 제가 왜 엘리엇 씨에게 화를 내겠어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러셨던 거지요?”
엘리엇은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션이 그의 손을 끌어다가 손등에 한 번 입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자네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 충격이 덜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네. 타계하시기 전에 만나러 가 볼 수 있었을 텐데.”
“미란 님은 제게 두 번 다시 카이루완에도, 알 아시리에도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는걸요. 알았더라도 뵈러 갈 생각은 안 했을 거예요. 그리고 폭주한 것은……. 어차피 언젠가는 터졌을 일이에요. 엄밀하게는 폭주를 했다기보다 봉인이 깨지면서 발생한 일이니까요. 3차 발현을 일으킨 것도 역시 미란 님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런 계기는 어디에서라도 있을 수 있었을 거예요.”
자신의 GFG가 변했다면 미란 때문이 아니라 엘리엇 때문이다. 봉인이 깨진 것 역시 그의 용서로 인한 것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시간들이 그를 녹였고, 세상으로 나설 수 있게 만들었다.
“저한테 숨기는 일이 그것뿐이었어요?”
션은 거의 완전한 행복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엘리엇이 입을 일자로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션의 손 안에서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사업상의 기밀을 제외하면 내 비밀은 전부 말했네. 그러니……. 자네도 그러게.”
“네?”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자네에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네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나는 그 상태가 싫어. 내게 비밀을 만들지 말고, 자네 안위에 대한 것을 자네 문제라고 말하지 말게. 부탁이니까.”
사실은 책망을 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몰랐다. 위험한 일을 하기 전에 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질책하면 아마 션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러지 못했다. 화는 낼 수 있어도 션을 꾸짖을 수는 없었다. 그런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러지 말아 달라고 고개를 숙이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자네 문제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문제야.”
“……네.”
“이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모든 일이 그러기를 바라네.”
“네.”
션이 두 손 안에 그의 손을 감싸고 힘껏 쥐었다. 그 손 안은 뜨겁고 축축했다.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마주한다. 키스는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살며시 더듬고 빨아 들이는 입술에 혀를 내주고 몇 차례 잘근잘근 깨물리면서 그는 짧은 숨을 몇 번이나 들이켰다.
그 한 번의 키스는 정말로 길었다. 마주 잡은 손이 따스해지다 못해 더워질 정도로 말이다. 안타깝게 물러나며 엄지로 입술을 닦아 주는 감촉이 얼얼하여 엘리엇은 눈을 감은 채로 여운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른해진 눈을 간신히 뜨자 깊은 눈매가 웃음을 담고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엘리엇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 뒤는, 집에 가서 해요.”
“격렬한 운동은 허락받은 건가?”
“말로 확답받은 건 아닌데, 리 선생님한테 전화로 물어볼까요?”
션이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하는 시늉을 했다. 마침 그 순간에 정말로 진동이 울렸다. 엘리엇이 받아 보라고 손짓했다.
“죄송해요. 잠시만요. 예, 전하.”
앤드류가 전화를 했을 리는 없으니 알버트일 것이다.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하고 션이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다행이군요.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 도착하면 바로. 예, 오늘은 안 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엘리엇은 굳은 얼굴로 션을 쳐다보다가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다.
“별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인질로 잡힌 장페이의 가족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답니다. 지금 베이징의 영국 대사관에 1차로 몸을 숨긴 참이라고요. 제이 씨가 정말 대단하네요. 아, 이 이야기도 드리려고 했어요. 장페이는 무사합니다.”
엘리엇은 눈만 깜박거렸다. 션이 미소를 지었다.
“가족을 구출하고 시민권을 주는 조건으로 귀순하기로 했어요.”
“뭐?”
“애초부터 장윈핑에게 자의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따르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설득했습니다.”
설득의 과정에서 장페이가 피를 토하고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정신 방벽을 때려 부쉈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뺐다. 엘리엇이 눈을 둥글게 떴다.
“그렇다면, 자네와 장페이는 싸움을 한 게 아니라…….”
“싸우기는 싸웠죠. 위험할 정도의 일은 전혀 없었지만요. 그는 빙결 능력자인걸요. 맞대면해서 물리적으로 싸웠으면 제가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런가? 그런 거라면 진즉 말을 했어야지.”
엘리엇이 폐부에서부터 신음을 토해 내며 몸에서 힘을 쭉 빼고 의자에 기대었다. 션은 방긋 웃었다. 적어도 페이 쪽에서는 엘리엇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션에게 위험할 정도의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문제이니 무엇이든 의논하자고 해도, 약간의 생략으로 그를 안심시켜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면 장이 피를 흘리고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조작이로군. 그 과정에서 알버트가 개입하고, 준에게 의뢰를 한 건가?”
“그런 셈이지요.”
“장윈핑의 세력에서 GFG 센터와 장페이가 가지고 있었던 비중은 매우 높았지.”
“알버트 전하 말씀으로는 페이가 U급 능력자이기 때문에 그 수하에 들어간 상위급 GFG 능력자의 숫자가 적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페이가 단순한 행방불명이 아니라 자의로 장윈핑에게 등을 돌린다면 상당수가 빠져나온다고 봐야 하겠죠.”
“쉬진위까지 투병 중이라니 장윈핑은 센터를 잃게 되겠군. 게다가 세뇌를 이용하여 가족을 인질로 삼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GFG 능력자들이 전면적으로 등을 돌릴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외면할 테고. 명예도 땅에 떨어지고 도덕성도 완전히 상실할 테니 몰락은 불 보듯 뻔하군. 그래서 존슨 부국장이 중국을 도모할 생각이냐고 물었던 건가. 류위안창에게 줄을 대면서 장윈핑을 몰락시킨 것이 내 뜻이라고 생각했군. 빌헬름이 당황하고 있던 이유도 이제 이해했네.”
아니면 자네 뜻이라고 생각했든가, 라고 엘리엇이 미소를 띠었다.
“그 류위안창이라는 사람이 장윈핑의 가장 큰 경쟁자였죠?”
“그래. 내가 그와 교분을 쌓으려 했던 것은 장윈핑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그가 가장 인맥을 만들기 쉬운 상대였기 때문일세. 하지만 장윈핑이 확실하게 제거될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 오히려 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걸세. 이 일은 앤드류, 알과 의논해야겠군. 시작한 일이 있으니만큼 모르는 척할 수는 없겠어.”
“네.”
“자네도 같이 생각해 줄 텐가?”
션이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함박 미소를 지었다.
“장페이 문제에서 시작되는 일인 걸요. 절 빼놓으시면 안 되죠.”
“그래.”
엘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션이 커피를 홀짝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 “돌아가요.”라고 말하며 엘리엇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엘리엇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션이 아까 받아 둔 가게 주인 전화번호에 가게 닫으러 오라고 문자를 찍고는 아예 핸드폰을 꺼서 주머니에 넣었다.
둘은 나란히 가게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마셜 씨는 만나 보았는가?”
“네. 저녁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슬슬 돌아가지 않으려나요?”
그가 웃으면서 깍지 끼어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엘리엇의 손등에 또 키스했다.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었던 경호원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션은 신경 쓰지 않고 엘리엇에게 웃음만 보였다.
차에 올라 나란히 앉아 다시 손을 잡고 엘리엇이 말했다.
“잊을 뻔했는데, 할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네.”
“뭔데요?”
“이사를 했으면 좋겠어.”
션이 입을 딱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는 것을 아네. 아직 준비도 충분하지 못하고 자네 방도 마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선 내 침실을 같이 쓰더라도 일단 들어오면 어떨까? 자네 아파트는 좋은 곳이라도 충분히 안전하다고 하기는 어려우니까. 내키지 않는가?”
말이 없는 것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오해해서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는데, 션이 갑자기 잡고 있지 않은 쪽의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치겠네.”
“션……?”
“이런 이야기는 제발 집에서 해 주세요. 폭주할 것 같으니까.”
흠칫 놀란 것은 엘리엇 혼자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션이 말한 폭주는 다행히도 GFG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잡아먹힐 듯이 키스당하면서 엘리엇은 그것을 몸으로 실감했다. 다행히도 차가 리무진이라 앞좌석에서 칸막이를 불투명하게 바꾸고 뒤따라 타려던 오스카가 재빨리 문을 닫아 준 것만이 위안이었다.
차 안에서 단추 두 개를 잃어버렸다. 거기에서 끝났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엘리엇은 셔츠를 끌어 올려 수습하려고 애썼다. 입술 끝이 얼얼한 것으로 보아 터졌든가 찢어졌든가 할 것 같았다. 션이 끝부분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면서 연고가 필요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경호원이 없고 단둘이 운전해서 나와 있었더라면 분명히 차 안에서 일이 터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키스라기에는 과격한 행위에 열이 오른 몸을 가라앉히며 엘리엇은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앞으로 이러지 말라.”고 말하자 션이 심각한 얼굴로 “경호원이나 기사가 있을 때는 조심하겠다.”라고 대답했다. 밖에서 그런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죄책감이 없는 태도였다.
결국 걷어차 버리지 않고 같이 흥분해서 그걸 다 받아 준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엘리엇은 떨떠름하게 이제 그러지 말라고 한 번 더 말한 후에 차에서 내렸다. 침대와 욕실이 간절했다. 션도. 피곤한 것을 생각하면 전혀 욕구를 느낄 법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현실은 물어뜯겨 다시 피멍이 든 쇄골만큼이나 뒤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로비로 들어가자 방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마셜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션이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엘리엇도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션에게 먼저 가 보라고 하고 자기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맥이 로비로 나왔다.
“저녁 데이트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기다리는 사람 목 빠지겠소.”
“맥.”
션이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니까 무슨 일인지 빨리해 주세요.”
“급해? 뭐가?”
그가 음흉하게 웃으며 옷깃이 단정치 못한 엘리엇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션이 반걸음을 앞으로 나서서 엘리엇을 몸으로 가리듯이 하며 “맥.” 하고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역시 한판 붙고 싶어졌어요? 자리 깔아요?”
“무슨 농담을 못 하게 해. 젊은 놈이 재미가 없어.”
“성희롱범, 성추행범들이 꼭 농담이다, 장난이다 이러던데, 저 그거에 무척 예민합니다.”
“많이 당해 봐서?”
“…….”
“워워워, 앞으로 큰일 하겠다는 포부도 있으면서 이렇게 인내심이 없어서야 되나.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일반인으로서는 인지할 수 없는 부분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지 맥이 순식간에 로비 벽으로 달라붙으며 손을 내저었다. 엘리엇은 희한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맥 마셜이 실없는 태도로 아이처럼 구는 것도 놀라웠거니와 션이 이처럼 무람없이 행동하는 것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에 벤이 옷핀을 가져와 단추가 떨어진 엘리엇의 옷깃을 수습했다. 엘리엇은 한 걸음을 더 내디디려는 션의 팔을 잡았다. 그만하라고 달래자 션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엘리엇 씨가 말려서 참는 겁니다.”
“알어, 알어. 거참, 인사 한번 하려다가 집도 들어먹겠네.”
“그만하시고 응접실로 가시죠. 오래 기다리시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아니오. 이제 집에 가려는데, 출발 전에 인사나 할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인걸.”
방금까지 장난 가득한 어린애처럼 굴었지만 엘리엇을 향하는 태도는 변함없이 오만에 한 발을 담근 채로도 흠잡을 곳 없는 신사였다.
“벌써 말입니까? 아직 제가 저녁 식사 한 번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는데.”
“공작은 바쁜 사람인데 굳이 밥 한 끼 먹자고 내가 귀찮게 하겠소? 요즘은 더 바쁠 터인데. 거기다 나흘이나 뭉개고 앉아서 아침, 점심, 저녁을 최고급 요리사에게 대접받았는데 제대로 대접 못 했다니 그것도 말도 안 되지. 다음에 한 번 션이랑 같이 미국에 오시구려. 우리 집 요리사가 미슐랭 스타급은 아니지만, 바비큐는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태평양이 넓다지만 어차피 쉐브론 문제로 한 번 올 거 아니오.”
“꼭 가겠습니다. 션과 함께.”
“공작이 온다는데 넌 또 뭐가 그리 불만인 얼굴이야?”
“맥의 호의가 그냥 호의라면 불만이 없겠죠.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호의를 쌓아 주는 게 몇 배로 되돌아올지 겁나서 그럽니다.”
“넌 어차피 나한테 빚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어.”
맥이 킬킬 웃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와 있던 보좌관들에게 손짓을 했다. 보좌관 하나가 큼직한 상자를 가져왔다. 션이 대학 때 쓰던 낡은 복합기만 한 크기의 매끈한 나무상자였다.
“원래 이거 전해 주러 왔었던 건데. 다른 일은 덤이고.”
“뭡니까?”
“유품.”
션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제정신인 것 같으니까 주고 가는 거야. 잘해라, 션. 마음 안정되면 그놈한테도 좀 잘해 주고.”
션의 팔에 상자를 떠안기고 나서 맥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놈이요?”라고 모르는 체 되묻는 말에 그가 싱글거렸다.
“모르는 척하려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여하튼 잘해 줘. 그 녀석,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싹싹하니 능력만 됐으면 내가 건졌을 거야.”
“부하로 삼으려고 말이죠?”
“그건 선행에 따르는 부수입이고.”
맥이 껄껄 웃었다. 그리고 또 만나자며 손을 흔들고 성큼성큼 바깥으로 나갔다.
폭풍이 휘몰아쳐 간 뒤의 날씨가 맑듯이 로비가 조용해졌다. 션은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엇은 부드럽게 그에게 물었다.
“침실로 갈까?”
“네.”
션이 웃으며 대답하고 엘리엇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지난 며칠 사이에 익숙해진 침실로 들어가 상자를 콘솔 위에 올려놓았다.
끌어안아 오는 팔에 몸을 맡기고 엘리엇이 물었다.
“열어 보지 않을 건가?”
“아직…… 용기가 부족해서요.”
“내가 옆에 있어도?”
“그럼 엘리엇 씨가 열어 주실래요?”
션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웃음은 어느 틈에 작은 신음으로 바뀌어 엘리엇의 어깨에 묻혔다. 끌어안은 팔이 조금씩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냥 맡겨 두었다가는 상자 위에 먼지만 쓸 것 같아서 엘리엇은 그를 밀어내고 일어서서 상자를 침대로 가지고 왔다.
션이 다시 뒤에서부터 그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열자는 것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엘리엇은 뚜껑에 손을 댄 채로 망설였다. 허락 없이 멋대로 열면 사생활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가, 이제 그런 배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모든 것이 두 사람의 문제라면, 이것 역시 션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 않을까?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상자 뚜껑을 한 번 어루만졌다. 반질반질한 원목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늘 이렇게 어루만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열겠네.”
“네…….”
션의 입김이 닿은 어깨가 축축하다. 엘리엇은 상자를 열었다.
겁먹을 만한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피로 새긴 저주의 말 같은 것 말이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책 몇 권과 차곡차곡 개어진 옷가지들이었다. 그리고 편지가 수십 묶음 들어 있었다. 세어 보면 족히 1천 통은 될 것 같았다.
엘리엇은 편지 같은 것은 자기가 손댈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옷가지를 펼쳐 보았다. 한 벌은 열서너 살짜리 아동용 사이즈의 전통 의상이었고, 나머지는 평범한 티셔츠 한 벌, 청바지, 털 조끼, 두툼한 모직 코트까지 해서 그렇게 한 벌이었다.
“어릴 때 입던 거예요…….”
션이 중얼거렸다. 처음 카이루완으로 갈 때 입었던 거네요, 라고 말하면서 그가 티셔츠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입고 갔던 옷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큰일이었으니까.
“옷 가방을 하나 가져가긴 했었지만, 피후견인이 많아서 대부분 작아진 옷은 물려주거나 주위에 나눠 줬거든요. 이것 한 벌만 처분하지 않고 옷장에 놓아두었었는데.”
카이루완에서 나올 때는 개인적으로 짐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하여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다음에 비서인가 누군가가 그 나이 때에 입던 옷가지만 상자에 챙겨서 보내 주었다. 나머지는 당연히 버려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은 손때 묻은 아랍어 사전과 프랑스어 사전이었다. 그리고 미란이 직접 필사한 코란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션이 사전을 한 번씩 쓸어 보고, 코란을 폈다. 책장 사이에서 네 번 접은 긴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엘리엇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아랍문자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그에게는 장식 띠처럼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희가 저희 스스로 욕되게 하였으니 당신께서 저희를 용서하여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는 잃은 자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션이 글귀를 아랍어로 한 번 읽고, 영어로 바꾸어 다시 한번 읽었다. 그 밑에 있는 읽지 않은 글월은 편지였다. 처음에는 션을 위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미란 자신을 위한 것이 되었고, 그 끝에는 죄의 고백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시는 오지 않을 나날과 제 손으로 죽인 아내들에 대한 사죄, 지켜 주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자책과 다 책임지지 못한 가솔과 백성들에 대한 후회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고작해야 채 열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소년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와 집착을 버리기 위한 참회의 글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션은 엘리엇을 품에 끌어안은 채로 말없이 그것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반으로 접어 다시 코란에 끼워 넣고 상자 뚜껑을 덮었다.
“편지는 읽지 않을 건가?”
“제게 보내려고 쓰신 건 아닐 테니까요.”
넓은 침대 구석으로 상자를 밀어 놓고 엘리엇을 껴안은 채 코를 비비자 그가 위로하듯이 머리를 손가락으로 애무하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션은 그대로 엘리엇을 침대에 눕혔다.
“이대로? 아직 샤워도 안 했는데?”
“그건 아니고요. 그냥 좀 이렇게 있어요.”
끌어안은 채로 따뜻한 시트 속에 파묻힌다. 한동안 그대로 엘리엇의 체취를 들이마시고 있는데, 엘리엇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괜찮은가?”
“뭐가요?”
“뭐든지.”
“엘리엇 씨만 계시면 항상 괜찮다고 했었잖아요.”
“안 괜찮았었잖은가?”
“결국 괜찮아졌잖아요.”
엘리엇은 지금 에미르 자인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인지 어떤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론만 말했다.
“내 옆에서 떠나지 말게.”
“억지로 떠미셔도 떠나보내기 쉽지 않으실걸요.”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엇의 허리를 다시 끌어당겨 안고 속삭였다.
“같이 샤워할까요?”
“샤워만이라면.”
“진짜로 샤워만?”
“오랜만이니까 침대에서 느긋하게 키스하고 싶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샤워부터 해 보고요.”
션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면서 펄쩍 뛰어 일어서서 엘리엇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내일 새벽에 또 출장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엘리엇은 순순히 그의 손에 잡아끌려 욕실까지 갔다. 션이 웃어 주는 게 고맙고 기뻐서 끌려가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러자 션이 그것에 이끌리듯이 웃음소리를 내고 결국 엘리엇도 또 웃어서, 욕실이 금세 훈김과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