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Interlude (3) (42/52)

18. Interlude (3)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U급 GFG 능력자 장페이는 23세였다.

최초 발현은 15세. 통상적인 경우보다 특별히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최초 발현시에 그의 능력은 A급이었고, 직접 접촉한 사물을 얼리거나 녹일 수 있었다. 그 능력은 그의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끌어 올렸다. 열병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빙결 능력은 전술적 가치가 매우 높았고, 그는 곧바로 센터로 불려 가 국가 요원이 되었다.

중국의 센터는 NGO가 아니라 정부 기관이며, 그는 국가의 유용한 인재로서 대접받았다.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었고 15세에게 시키기에는 위험하고 고된 일도 많았으나, 그것은 가난한 농민이었던 그의 가족을 한꺼번에 신분 상승시켰다. 그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 힘을 타고난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음을 의심치 않았다.

다시 발현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였다. 2차와 3차 발현이 연이어 벌어지며 12일간 폭주한 끝에 그는 그때까지와 달리 접촉만이 아니라 일정 범위의 공간을 지정하여 공기 중의 수분을 얼릴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은 장악하고 있는 공간 안에서 지각계 능력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과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뻤다. A급의 능력이 그를 사람답게 살게 만들어 주었으니 U급의 능력은 천국으로 향하는 열쇠가 되리라 믿었다. 지킬 수 없는 보물을 가져서는 안 되며, 너무 강력한 힘은 공포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15살 때부터 부모에게 매달리듯이 충성해 온 나라는 그를 배신하고 센터는 그의 손발을 묶었다. 재갈이 채워진 채 전신을 구속복으로 묶이고 제어기로 감긴 채 센터 지하의 방공호에 처박혀졌다가 나왔을 때 그의 가족은 이미 세뇌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장윈핑의 초상화에 절을 하고 누나 둘은 장윈핑의 첩이 되었으며 19살의 여동생은 진차오밍의 후처로 들어갔다. 남동생 둘은 비서로 채용되었으나 고등학교도 변변히 졸업하지 못한 그 둘이 진짜로 비서 일을 하기 위해 불려 간 것이 아니라 인질이라는 것은 명확했다.

장윈핑은 아무 말 없이 일주일 동안 그를 고문하여 기를 꺾었고, 가족은 그가 피와 기름에 절어 바닥을 기며 장윈핑의 구두에 키스하는 것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연신 말했다. 더 돌아 버릴 노릇은, 그것을 제외한다면 가족들은 지금까지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사랑하는 그의 가족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목줄이 매인 개가 되었다. 그리고 멋모르고 시키는 일을 하던 때보다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센터가 사실상 장윈핑의 사조직이나 다름이 없다든가, 중국 내의 많은 정부 기관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거나,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이 중국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든가. 불순분자로 찍히거나 제어력이 모자라거나 쓸모없는 종류의 GFG를 가진 능력자들이 연구소로 끌려가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U급의 능력자라고 해도 계열이 완전히 달랐으므로 S급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가 한 세뇌를 풀 방법이 없었다.

그는 종종 해방운동과 반정부 운동을 하는 GFG 능력자를 토벌했고, 그 대부분을 지옥으로 보냈다. 무력시위는 그가 U급 능력자가 된 지 2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강력한 GFG 능력자가 나타나면 능력자 전체의 위상이 올라가지만, 슬프게도 그가 발현함으로써 중국의 GFG 능력자들이 자유를 얻을 확률은 한없이 낮아졌다.

언터쳐블에서 가입 제안이 왔을 때 그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유의사를 가진 U급의 능력자라니. 제게 언제 자유의사가 있었더란 말인가. 4년 전에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지조차 못했고, 그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었으니.

그는 스스로를 죽은 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제 뜻대로 숨 한 번 쉬지 못한 채 GFG 병기로 살 것인즉, 사람다운 생각이나 바람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아마 장윈핑도 그에게서 생각하는 힘 따위는 거세해 버리고 싶었으리라. 그의 가족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가 보유한 A급 능력자의 힘으로는 페이의 정신 방벽을 뚫을 수 없었고, 약물이나 수술로 뇌를 망가뜨리면 GFG를 쓸 수 없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언터쳐블에 가입한 것도 U급 능력자를 보유한 세력으로서 다른 U급 능력자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싶어 한 장윈핑의 뜻이었다.

“결국 그놈의 발밑에서 기기로 한 것도 네 선택이지. 나라면 어차피 쓰레기가 된 가족 따윈 버리고 수퇘지의 목을 땄을 거야. 충성할 가치 없는 나라에 무릎을 꿇은 것도 자유의사에 의한 선택 아닌가?”

옐레나는 경멸하며 그렇게 말했다.

“너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겪은 일이다. 뚫고 나와 자기 삶을 관철했을 뿐이지. 이종(異種)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역시 자신은 이 자리에 걸맞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그는 이들처럼 단호하게 인생에 있어서 소중하고 큰 부분을 잘라 내고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현명하지도, 능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살다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마를린이 말했다.

“실재하는 고통을 부정할 만큼 내 어찌 비정할까마는, 하나 정도는 충고하마. 네 심장 속의 것이 죽었다 생각하지 말거라. 네 손발은 아직 차갑지만 삶은 포근하고, 가슴은 여전히 뜨거우며, 언젠가 그 뜨거움대로 살게 될 것이니, 나는 너를 ‘불타는 눈Blazing Snow’라 부르겠다.”

명명자 마를린도 틀리는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 * *

“암여우 년이 벌써 저만 쏙 빠져나갔다지 않습니까! 비행기가 이미 공항을 떴어요!”

몽롱한 채로 페이는 진차오밍이 펄쩍펄쩍 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다른 이름의 여권을 들고 그를 따라 입국하기는 했지만, 일이 어찌 되어 가는지는 관심사가 아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번에 발현했다는 U급 능력자의 미래가 좀 가련하게 여겨지기는 했지만, 남 걱정을 할 만큼 자신의 팔자가 좋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결정이 끝나서 뭔가 결판을 내든가 자든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기대한 것이 무리였죠. 러시아의 천연자원 의존도를 생각하면 시장이 겹치는 이상 서방의 석유 메이저와 쉽사리 싸울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서로 출혈 경쟁을 해 주면 좋겠다 생각은 했어도, 생각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요.」

코트디부아르의 그라델은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맥 마셜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상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를 뚫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것도 두고 봐야 할 일입니다. 마셜이 정말로 헤리퍼드 공작의 손을 잡기로 했는지, 아니면 이쪽을 견제하려고 그러는 건지도 불분명하고요. 전면에 나섰던 공작이 출국했으니 내일은 좀 더 압박해 보기로 하지요. 왕실과 정부 사이에 균열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SSB가 이렇게까지 침묵하고 있을 리 없으니까요.」

“공작이 나선 것은 왕실의 뜻이고, 정부는 반대하고 있다는 생각하십니까?”

「헤리퍼드 공작이 영국 정부와 그다지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실제로 정치 같은 것에 참여한 일도 없고요. 갑자기 나선 것이 왕실의 뜻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공화론이 다시 머리를 들까 봐 평판이 좋은 대귀족을 대신 방패로 세웠겠지요. 영국은 분명히 그 U급 능력자를 제어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 이번 사태를 생각하면 정부 요인들이 공포에 질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스캔들은 어떻습니까? 공작이 남색가라는 것도, 션 맥케인을 정부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인데.”

「그것도 어디까지가 진실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공작 부인을 저택에서 내보냈을 때부터 위장이었을지도 모르지요. SSB가 정보를 필사적으로 숨긴 것을 생각하면, 아마 그자의 능력 통제를 시도하면서 공작을 위장용으로 이용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흘 안에 해결될 겁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셜이 영원히 눌러앉아 있을 리도 없잖습니까?」

그라델은 그렇게 말했지만, 진차오밍은 그것이 너무 낙관적인 판단이라 생각했다. 그라델의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릴지도 모른다. 그자의 능력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공작이 정말로 션 맥케인에게 빠져서 앞뒤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세뇌되어 있는 상태라면 어쩔 것인가? 공작이 파산을 각오하고 금력을 총동원하여 닥치는 대로 한 나라를 집중 공격하면 미국도 버텨 내기 어렵다.

아타 파닌 칼루의 아래에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코트디부아르와 내부에서 세 개 이상의 세력이 경쟁하고 있는 중국과는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이렇게 집단으로 압박하여 빼앗으면 손해가 된다. 아무래도 GFG 능력자로서 칼루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진차오밍은 가능한 한 새로운 U급 능력자를 통째로 삼키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졸고 있는 페이를 노려보았다.

“너, 단독으로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를 부술 수 있나?”

“불가. 그 션인가 뭔가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빼돌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나는 확실히 죽습니다. 그리고 규약 파기로 마셜 씨는 당신에게도 손을 대겠죠.”

“몰래 빼내는 건?”

“불가. 잠입에는 재주가 없어서.”

“마셜은 지각계가 아니잖나! 정신 조작계를 두 명 붙여 주겠다.”

“글쎄. 마셜 씨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KH47의 용병은 대부분 B급 이상의 능력자입니다. 한꺼번에 열 명쯤 침묵시킬 수 있는 광역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쓸모없는 것!”

욕과 함께 휴지가 날아왔지만 페이는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프게 맞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 모멸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닳아 버렸다. 재미있게도 이자들도 폭언은 마음껏 하지만 장윈핑 본인을 제외하고는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비싼 자원인 것이다.

어차피 오늘 밤 안에 결론이 나지 않을 거라면 자러 가도 되지 않을까. 페이는 몽롱하게 생각했다. 진차오밍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윈핑이나 평소에 그의 핸들러를 맡고 있는 쉬진위라면 필요할 때만 불러내고 평소에는 만전의 몸 상태를 기하도록 수면을 취하게 했을 것이다. 무기가 회의에 참석하거나 결정에 관여할 필요는 없으니까.

전술면의 조언조차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페이 자신보다도 페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차오밍은 아무래도 자기가 깨어 있는 동안에 아랫사람이 쉬거나 잠드는 꼴을 못 보는 타입인 것 같다.

실제로 힘을 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상관없나, 라고 생각하다가 페이는 깨달았다. 뭔가가 밀물처럼 차오르고 있다.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은밀하지만 일단 알아 버리고 나면 구역질이 치솟는 이 느낌은 광역을 커버하는 정신 조작계 GFG이다.

쾅!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페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차오밍이 “뭐, 뭐냐?”라고 말을 더듬었다.

“여기 계십시오.”

그는 내뱉고 뒤따라 나오려는 진차오밍을 방 안에 차 넣고 문을 닫았다. 처음부터 세이프 룸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 문과 창문이 두꺼운 철벽으로 폐쇄되었다. 상위급의 신체 강화계 능력자가 뜯어낸다면 별수 없지만, 일반인이라면 중장비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문 앞에 경호원과 대사가 나란히 자빠져 누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일 텐데 어쩐지 대사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했다. 페이는 몸을 구부리고 대사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호흡은 확실하다. 그러나 거칠게 흔들어 깨워도 미동이 없었다.

그는 몸 주변에 얼음의 창을 십수 개 만들어 띄우며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GFG를 확장시켜 대사관 전체에 미세한 얼음 가루를 흩뿌리고, 그것을 통해서 정보를 받아들여 조립한다. 야간인 데다가 현지 채용은 모두 내보냈으므로 현재 대사관 안에 있는 사람은 150명이 조금 안 되는 숫자였다. 이번에 남몰래 입국시켜 모아들인 병력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다수가 바닥에 누워 있다. 이번에 진차오밍과 동행한 GFG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S급, A급도 쓰러졌군…….”

신체 강화계는 텔레파시스트나 정신 조작계에 비해서 정신 방벽이 약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S급 능력자를 모두 소리 없이 침묵시킨 것으로 볼 때 상대는 매우 강한 자였다. 적어도 S급 이상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 상황으로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U급이라는 그자 본인일 것이다.

의식불명이라는 진차오밍의 정보는 틀렸다.

“좋아.”

이것이 계획된 일이든 그렇지 않든 페이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대한 정신 조작계 능력자라면 죽이는 보람도 날 것이다. 그러다 죽으면, 뭐, 그것도 그뿐이다.

그는 대사관 전체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기척을 향해 다가갔다. 상대방도 이쪽의 기척을 읽는 듯 움직임이 빨라진다. 달아나는 자를 향해 뛴다. 정신 조작계 능력자에게는 물리적 공격 수단이 없다. 일단 꼬리만 잡으면 무조건 이쪽의 승리다.

뒤에서 문이 쾅 열렸다. 페이는 원거리에 띄워 놓았던 얼음의 창을 상대를 향해 내던졌다. 뒤를 잡아 이쪽의 정신에 타격을 주려던 모양인데―.

“커, 억―!”

그리고 그 창이 페이의 등 뒤에 꽂혔다. 앞으로 엎어지면서 페이는 피를 토했다. 섬뜩하게 차가운 느낌이 등으로부터 배를 관통하여 몸을 열리면서 바닥에 꼬챙이처럼 그를 꿰었다. 어떻게 된 건가. 착각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어느 틈에 당했지?

그는 창을 녹일 생각도 없이 바닥에 꿰인 채 이를 악물었다. 녹이는 것은 간단하지만 지혈은 귀찮다. 대신 바닥에 꽂힌 부분만 녹여서 일어서려는데,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다가왔다. 남자의 구둣발이다. 페이는 반사적으로 나머지 창 십여 개를 상대에게 날리며 몸을 튕겨 일으켰다.

“끄꺄아악!”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시간을 벌려고 한 짓이었다. 그리고 그가 날린 창이 벽에 꽂아 버린 몸통은 남자의 것이 아니라 여자의 것이었다. 얼굴은 낯이 익다. 아까 수고하라며 커피를 사 준 대사관 직원 중 하나였다.

“아…….”

넝마가 된 여자의 몸이 스르륵 녹듯이 벽으로 흡수되었다. 남은 것은 얼음뿐이다.

이것은 환각이다. 페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한 번 꽉 감았다가 떴다. 그는 바닥에 그냥 혼자 주저앉아 있었다. 얼음의 창은 없고 배에 뚫린 구멍 역시 없다. 벽에 꽂힌 창들도 없고, 피를 토한 흔적도 없었다. 페이는 재빠르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씨발. 기분 더럽네.”

통증은 남아 있지만 그것도 아마 착각이리라.

그는 배를 싸쥐고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 상대는 U급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이다. 술래잡기를 할 게 아니라 힘으로 때려 박는 쪽이 낫다.

“정신 조작계는 씨발, 다 인간쓰레기 새끼야……. 지구에서 방출해야 돼…….”

그는 한탄하면서 GFG의 방출량을 늘렸다. 대사관 전체가 다 조용하다. 어디서부터 환각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처음 쫓았던 기척은 진실인가? 그것조차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능력자라면 침입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확산, 냉각. 대사관 범위를 벗어나 인근 지역까지 장악 범위를 확장시킨다. 대사관 인근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건물도 텅 비어 있고, 길 여우 한 마리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두 블록 벗어난 곳에서 비로소 여섯 명이 타고 있는 낯선 밴을 찾아냈다.

“거기 있구나, 개자식.”

동시에 뭔가가 뇌를 두드린다. 통증을 참고 페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정신 방벽이 무너지면서 눈앞에 거대한 벽이 나타난다. 상위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가 만드는 환각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뇌에 직접 작용하는 만큼 실제와 똑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몸으로 부딪치는 대신에 그는 수백 발의 화살을 쏴서 벽을 얼리고 커다란 망치를 내리쳐 그것을 파괴했다. 등 뒤에서 벽이 달려오는 것을 얼음벽을 세워 막고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들의 목에 얼음으로 만든 나이프를 박아 버리면서 달려간다.

“환각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일단 본인과 맞대면하기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 이자는 자신의 능력에 숙달되어 있지 않다고 페이는 판단했다. U급 능력자와 싸워 본 일은 당연히 없을 테고.

외줄로 뻗은 길에는 끝이 없다. 대사관 밖에 있는 것은 런던 시가지가 아니라 하늘까지 닿는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나무들 속에 끝없이 나열된 가로등 거리이다. 페이는 시험 삼아 나무를 두드려 보았다. 인위적으로 만든 벽이라는 것을 속이지도 않는 투박한 환각이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길 저편에서부터 가로등 불빛이 물리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길로틴처럼 길을 자르고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페이는 온몸에 날카로운 얼음조각의 회오리를 둘렀다.

“고작해야 이따위 압박으로!”

두 팔을 교차시켜 시야를 가로막아 두려움을 줄이고 온몸으로 길로틴에 부딪치며 달려간다. 챙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환각과 사형대의 칼날들이 한꺼번에 부서졌지만 좀처럼 길이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전 방위에 얼음 칼날을 휘몰아치게 만들었다. 그의 몸 주변의 회오리는 점점 타격점이 되는 얼음 조각을 증가시키며 부피를 늘리다가 한순간에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동시에 세상이 터졌다. 한 번 환한 빛과 함께 숲과 길이 녹아내리고 그는 대사관 건너편 길에 나와 있었다.

“…….”

고요한 런던 거리는 저녁에 봤던 때 그대로였다. 블록 모퉁이의 편의점에 불빛이 들어와 있다. 그의 탐색 능력에 걸리는 거리 전체가 평소대로였다. 사람이 남아 있는 사무실이 드물게 있고, 건물 수위들은 잠이 들어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 몇몇이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완전히 잠든 것은 대사관뿐이었다.

그는 낮게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길을 건넜다. 불현듯 달아나려면 지금이 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감시자는 침묵한 상태이고 여기에서 행방불명되면 그 책임은 아마 영국에 돌아가리라. 이대로 숨어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능력도 숨긴 채로 남몰래 살아간다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은, 알맹이가 빠져 버린 가족의 껍데기 따위는 내버려도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서 인질로 삼은 것이다. 반대로 반항할 자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면 인질을 제거할 필요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 누나들과 여동생은 꽤 예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이 들기 전까지는 귀여움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내쳐진다 하더라도 어차피 세뇌 상태라서 고통을 느끼기나 할지 어떨지 의심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발을 끌고 편의점을 향해 다가갔다. 특별한 의식은 없었다. 그저 음산한 가로등을 제외하면 인간다운 불빛이 보이는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다.

생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 하나가 커피 컵을 들고 편의점에서 나오다가 그와 부딪쳤다. 커피가 페이의 가슴팍에 온통 튀었다.

“아, 죄송해요.”

예쁘다기보다는 곱게 생긴 여자였다. 상냥해 보이는 눈매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한다. 페이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목표하던 밴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닦아 드릴게요!”라고 여자가 손수건을 꺼내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문득 그는 지금 자기들이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를 밀쳐내려는 순간 손수건이 칼이 되어 그의 가슴팍을 찔렀다.

“젠, 장!”

이 여자가 환각인지 칼이 환각인지 거리 전체가 환각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는 가족을 내버리고 도망치려는 생각을 했던 건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동요하면 약점을 내비치는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혼란한 채로 여자를 바닥에 메어꽂으며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편의점에서 불이 꺼지며 세상이 한차례 녹아내렸다.

이대로 있으면 휘둘릴 뿐이다. 정신 조작계 능력자를 상대로 오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되새기며 그는 GFG에 의한 탐색 능력만을 극도로 끌어 올려 밴의 위치를 다시 찾았다. 탐색 능력에 혼선이 생긴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밴 안의 사람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면 밴 전체를 붙잡으면 되는 것이다.

밴이 시동을 걸었다. 그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밴을 통째로 얼려 버린다. 엔진이 차가워지면서 시동이 꺼졌다. 그는 자신의 발밑과 밴이 세워진 공간 밑에서 얼음을 끌어냈다. 거리와 건물들이 뭉개듯이 사라지며 바닥 전체에서 페이가 만들어 내는 얼음덩어리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겅중겅중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얼음덩어리를 밟으며 밴으로 뛰어갔다. 거대한 회전 칼날을 만들어 밴을 동강 내고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속았다. 화가 치솟았지만 애써 참고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작해야 한 번 속았을 뿐이다.

역시 대사관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여 뒤도는 순간 사방에서 총격이 시작되었다. 얼음벽을 세워 총탄을 막고 장악한 공간 전체에 먼지처럼 미세한 얼음을 연달아 일곱 겹으로 깐다. 제아무리 최신식 총기가 방수된다고 해도 얼음을 내부에 채워 버리면 작동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는 저격수들을 향해 사방에 날카로운 꼬챙이를 만들었다.

“그, 아악!”

저격수들을 꿰어 버리는 꼬챙이의 감각이 그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수십 개의 얼음 꼬챙이에 찔리면서 배와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가 메워진다. 쇼크가 너무 심해서 페이는 숨을 멈추고 바닥에 웅크린 채로 바르작거렸다. 실제로는 없는 통증이다.

그렇게 참고 견디는 사이에 이번에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잠든 자의 꿈, 깨어 있는 자의 공포, 역겨운 소리들, 끔찍한 소리들, 혹은 그를 처참한 기분으로 만드는 행복한 소리들. 피가 얼음에 끼얹어지는 가열한 감각이 손끝을 저리게 한다.

‘찾았다. 약점.’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뜻해진 페이는 고개를 들었다. 얼어 죽은 듯 새파란 얼굴의 사람이 둘, 스물, 이백, 이천. 아는 얼굴이 아니라 모르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자신이 죽였던 정신 조작계 능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시에 밀어닥치는 지독한 GFG의 압력에 페이는 고함을 질렀다.

“닥쳐! 너희는 죽었어!”

‘정신 조작계 능력자 중 일부가 자기 자신을 상대의 뇌리에 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잖아. 복수를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네 뇌에 심어진 사람은 몇 명일까? 시한폭탄은 몇 개일까?’

“이건 환각이다.”

그가 아무리 특수 변화계라고 해도 U급이다. 하급의 정신 조작계 GFG가 심령에 뭔가를 새겨 뒀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천 명의 증오를 모조리 얼려 산산조각 낸다. 비산하는 얼음이 빛을 반사하여 밤을 희게 물들였다.

기분 최악이다. 어디에서 어느 놈과 동조가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배를 찢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역시 정신 조작계는 다 잡아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비틀거리고 걸음을 옮겼다. 몸에 뚫렸던 거짓 관통상들은 통증만 남고 사라졌건만, 손가락 사이로 내장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정말 더러운 기분이다. 패배를 인정하고 일단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페이는 GFG의 탐색 능력에 의존하여 대사관으로 되돌아왔다. 시각은 엉망진창이지만 탐색 능력에 의해 조립되는 위치 파악에는 아직 문제가 없었다. 일단 대사관으로 돌아가서, 가능하다면 장윈핑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통화가 되지 않는다면 진차오밍을 끌고, 말을 안 들으면 다리를 한 발 쏴버리고 끌고 공항으로 간다.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광역 능력이다. 범위 안에서 벗어나면 환각은 사라질 것이다. 그 자신도 비슷한 범위 지정 방식을 사용하므로 알지만, 대규모 지역을 커버하는 광역 능력이라는 것은 본인이 이동한다고 해서 쉽사리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것조차도 환각이었다면 대사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사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닫혀 있는 대문 건너편에 삼십여 명의 공안 요원이 그를 향해 총을 장전하고 있었다. 어떤 남자가 중년 남자의 목을 쥔 채로 나왔다. 그곳은 어느 틈에 대사관이 아니라 장윈핑의 저택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도 환각. 틀림없다. 역시 정신 조작계 능력자 따위는 다 씹어 죽일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상대가 입을 열기 전에 남자의 심장에 얼음의 대못을 박아 죽여 버렸다. 동시에 얼음의 배리어를 펼쳐 총격을 막고 공안원들을 얼음 기둥으로 만든다. 수천 번은 생각해 봤던 일이다. 저기 쓰러져 있는 남자가 정말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망설일지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빌어먹을 자유. 개처럼 엎드려 장윈핑의 구두 바닥을 핥으며 살겠노라 결의했을 텐데도 좀처럼 그것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들고 이것이 그 정신 조작계 능력자가 찾아낸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공안 요원에게 총이 겨눠지는 것, 발목 잡히는 것, 시도하더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공포. 양쪽 발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얼려 깨뜨렸지만 걸음은 느렸다. 그는 이대로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장윈핑을 죽이면 자신이 해방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사로잡혔다.

자각하는 순간 뭔가가 머릿속을 쾅 하고 두드렸다.

“끅.”

페이는 짧은 비명을 토했다.

눈을 뜨자 대사관 세이프 룸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페이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진차오밍이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지금이 자고 있을 땐가?”

“제가, 자고 있었습니까?”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몸도 차갑다. 악몽을 꾼 것일까. 모르겠다. 꿈의 내용은 생생했으나 아픔마저 지나치게 리얼하여 그 부분의 기억이 일부 날아가 있었다.

“단독으로 정신 조작계 U급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잖나?”

“아.”

“아직도 정신이 안 들었나?”

“아뇨. 아뇨. 들었습니다. U급 정신 조작계……. 어느 계열인지 알지 못한다면 확언할 수 없습니다.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거리라면 제가 유리합니다.”

그는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역시 몸이 좋지 못하다. 감기라도 걸렸을까.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복부가 아팠다. 어쩌면 이미 공격을 당했을까? 뒤늦게야 그 가능성을 깨닫고 페이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새로운 U급 능력자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었죠?”

“맞아. 아직 추정뿐이다. 하지만 런던 전체를 커버한 것으로 보아 광역계 능력자인 것은 확실하고, 사람의 의식을 빨아들이거나 잠재우는 능력이 있는 것 같더군.”

“혹시 꿈 능력자가 아닙니까? 그런 자가 있었잖습니까?”

“허튼소리! 드림 워커라면 잠을 재우는 능력은 없었어.”

“만약 잠을 재우고, 동시에 꿈도 조종할 수 있다면요?”

“지금 그래서 네가 그런 공격이라도 받아서 그렇게 겁쟁이 같은 면상을 하고 있다는 거냐, 응? 자세 바로 안 해?”

진차오밍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기는. 의식불명이라는 U급 능력자의 공격을 받아서 이러고 있다기보다는 피로가 쌓여서 몸살감기라도 났다는 쪽이 합리적이다.

페이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몸을 폈다. 노크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대사일까 하고 돌아봤는데 들어온 것은 청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누구, 커억!”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서 진차오밍을 쏴 버렸다. 페이는 경악하면서 상대가 총구를 이쪽으로 돌리기 전에 오른손을 얼렸다. 그리고 얼어 있는 것이 자기 손임을 확인한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도, 진차오밍을 쏴 버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것도 자신이었다.

“젠장.”

이것도 환각인가. 페이는 총을 버려 버리고 진차오밍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맥박이 잡히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인지 환각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만약에 이게 진짜로 벌어진 일이라면 곤란하다. 이번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진차오밍을 보호하고 그의 지시를 듣도록 장윈핑에게서 명령을 받았다. 아마도 상대의 술수에 걸려 진차오밍을 죽였다면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잔혹한 처벌이 내려질 것은 명백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전화기를 들었다. 지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국으로 연결 부탁합니다. 진 차관에게 문제가 생겼,”

「페이…….」

가냘픈 목소리가 끊어질 듯 바람처럼 가늘게 들려왔다.

「페이, 살려 줘……. 페이…….」

“씨발.”

그는 전화를 뚝 끊었다. 환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겠다.

몹시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다 싶어져서 그는 팔다리를 내던지고 그냥 진차오밍의 옆에 드러누웠다. 죽은 자의 총상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손을 적셨지만, 그것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어머니가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고 있었다.

“악몽을 꿨니? 심하게 잠꼬대를 하던데.”

“엄마.”

페이는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제 손으로 얹었다. 가족에 대한 의무감은 그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장윈핑에 대한 부분이 망가진 것을 제외하면 평소처럼 다정한 부모 형제들이었으며,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집안을 일으킨 기둥이자 가장으로서 존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됐어요.”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엄마가 오리 사 놨다. 죽으로 끓일까? 아니면 탕 해 줄까?”

“됐다니까요. 나가 봐야겠어요.”

“어딜 나가려고 그래? 어제도 외박했으면서! 너 그렇게 만날 술이나 마시고 다니고 그러면 부주석님이 얼마나 실망하시겠니?”

“됐어요!”

그는 고함을 지르고 벌떡 일어섰다. 붙잡는 어머니의 손을 홱 뿌리치다가 지나치게 힘을 줘 버렸는지 그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페이는 당황하면서 어머니를 부축하려고 몸을 구부렸다.

그러자 어머니의 손에서 얼음의 칼이 나왔다.

“끅!”

심장을 뚫리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페이는 그 칼을 빼앗아서 내던지고 어머니의 형상을 한 환각을 걷어찼다. 굴러가는 그것은 진차오밍의 시체였다.

“글렀군.”

끝장을 보기 전에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는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세우고 GFG를 힘이 닿는 한 최대한 끌어 올렸다. 이미 자신이 정말로 있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환각에 빠져들었으니 순수하게 힘으로 때려 부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자고!”

자의로 이 정도까지 GFG를 끌어낸 것은 처음이다. 초창기에 힘의 절대량을 시험하겠다는 장윈핑의 명령으로 소도시 하나를 파괴한 적이 있지만, 그때에도 8할 정도밖에 끌어내지 않았었다. 앞으로 영구히 좋은 일에 쓰이는 일도 없을 텐데 최대한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옳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화 없다. 그러나 지금은 화가 치솟아서 참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그는 정신 조작계 능력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을 우롱하는 이런 새끼는 잡아서 모가지를 쳐 버려야 마땅하다.

사방 30㎞에 엷은 얼음의 운무를 깐다. 낯선 도시의 구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정말로 런던이든지, 아니면 상대의 능력이 그의 GFG 자체를 교란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의미이다. 후자라면 피해 범위는 줄어들 수도 있지만, 만약 전자이거나 상대가 감당해 내지 못한다면 런던이든 난징이든 도시 하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그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카아아앙―――!

운무를 통하여 직접 발출된 GFG가 반경 안에 거대한 폭발을 발생시켰다. 동시에 세계가 짤그랑하고 깨졌다.

페이는 편의점 앞에 가슴팍에 커피를 묻힌 채로 서 있었다. 대낮이었다. 그에게 커피를 마시러 가지 않겠느냐고 친절을 베풀었던 상냥한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페이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는 이 구김살 없이 밝은 얼굴의 여자에게 조금 두근거림을 느꼈었다. 

그녀는 중국계 영국인으로서, 대사관에는 잡무를 하기 위한 임시 직원으로 고용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페이의 이름을 위조 여권에 적힌 대로 가짜로 알고 있었고, 아직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국가안전부의 인턴이라니 대단하다고 칭찬을 했다. 그녀에게는 페이와 같은 나이의 남동생이 있다는 것 같았다.

‘그런 건 다 사치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커피잔을 건네주었다.

“이게 꿈이 아닐 확률은 몇 퍼센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해요?”

“네?”

“꿈일 수도 있고, 환각일 수도 있고, 현실일 수도 있죠. 대단한 자로군요. 너무 리얼해서 가짜 같지가 않아요.”

말하자 여자의 얼굴이 갸웃거렸다. 정말 잘 만들어진 환각이구나 하고 페이는 손을 뻗어서 여자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동그랗게 놀라는 눈과 따뜻한 감촉이 진짜 같았다. 역시 U급은 달라, 하고 생각하며 그는 여자에게 키스했다.

짜악!

눈에 불이 나게 매운 손이었다. 아, 이거 혹시 환각이나 꿈이 아닌 게 아닌가, 하고 페이는 멍하게 생각하며 여자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말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지진이 있었다.

쾅!

아니. 그 소리도, 흔들림도 모두 머릿속에서 나는 것이다.

쾅!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그는 피를 토했다. 놀란 얼굴의 여자가 눈앞에서 녹아내리고 그는 장윈핑의 집 정원에 무릎 꿇고 있었다. 쾅! 두 번째 방벽이 박살 나고 저택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코와 입에서 뜨끈한 것이 쏟아진다.

페이는 입을 막고 비틀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죽는다면 적어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해야 한다. 그래야 장윈핑은 쓸모없어진 인질을 죽여 버리는 대신에 만약을 대비하여 살려둘 것이다. 애초부터 이 환각 속에서 걷는 게 얼마나 소용 있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세 번째 방벽은 첫 번째보다 훨씬 빠르게 부서졌다. 페이는 핏덩어리를 토하며 그 자리에 엎어졌다. 선혈이 주룩주룩 쏟아지고 작은 살점들이 피에 섞여 흘러나온다. 마지막 방벽에 한 번 망치질을 당할 때마다 피가 쏟아지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다가,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페이는 시각과 청각을 잃었다. 다음으로는 통각과 촉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몸이 무겁다는 감각조차 사라졌다.

페이는 눈물로 젖어서 흐린 눈을 들어 실내를 살펴보았다. 방어 시스템은 하나도 가동되어 있지 않았고, 진차오밍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시곗바늘은 진차오밍이 그라델과 통화를 끊고 그에게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를 습격할 수 있냐고 물었던 때로부터 채 3분도 지나지 않은 채였다.

진차오밍 앞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 번 보면 누구라도 잊지 않을 아름다운 얼굴이다. 처음에 프로필의 사진을 봤을 때 포토샵으로 떡칠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조각가라든가 화가도 아니라 성형외과의가 산 사람의 얼굴을 주물러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각도 아니다. 우습게도 그런 식으로 페이는 자신이 환상에서 벗어났음을 이해했다. 자신의 시시한 상상력으로는 저런 미남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웃겨서 페이는 조금 웃고, 코피를 흘렸다. 목구멍에서 핏물이 올라왔지만 도로 그것을 삼킨다. 아니, 어쩌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환각이거나 매혹에 걸려 판단력이 저하된 탓일지도 모른다.

“언제, 부터였어? 편의점에서 부딪힌 거? 밴을 동강 냈을 때? 아니면 대사관 밖으로 나갔을 때부터?”

페이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묻다가 기어이 한차례 피를 토했다.

“처음부터입니다.”

“처음, 부터?”

“당신은 그 소파에서 한 걸음도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환각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고 몇 번이나 깨뜨렸다. 자기 육체에 환각에 의한 타격이 오더라도 그가 쏟아 낸 GFG의 영향은 남아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세이프 룸이 아무 변화 없는 것을 보면 남자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 방벽을 깨뜨린 것이 제일 먼저 한 일입니다. 환각은 쓴 적은 없습니다. 깊은 곳의 벽을 깨뜨리기 위해서 약점이 될 만한 것을 긁어낸 것뿐이죠. 당신은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페이는 지진이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굉음이 공격이었고, 곧바로 바로 두 번째, 세 번째 굉음과 더불어 정신 방벽이 부서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광역 능력이 아니고, 심지어 환각조차 아니었다. 자신이 싸우겠다고 이리저리 얼음을 날리며 뛰어다닌 것은 션이 휘저어 꺼낸 두려움과 자신의 힘에 대한 과신을 조합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조리 자신의 뇌 속에서 일어난 활극이었다. 심지어 최대한도로 폭발시켰던 GFG조차도 상대의 능력에 묶인 채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큭 웃자 피가 퍽 터져 나왔다.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슴팍을 줄줄 적시며 그는 헐떡헐떡 웃었다.

“역시 정신 조작계 능력자 따위는, 쿨룩!”

“괜찮습니까?”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군.”

그는 소파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몇 번 더 쿨룩거리자 피와 함께 살점이 쏟아졌다. 일반인보다 훨씬 견고한 정신 방벽이 힘으로 깨지면서 쇼크가 육체까지 전달되었고, 뇌 속에서 일으킨 착각 덕으로 온몸에 받은 타격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건, 들어오세요. 여기 3층입니다. 올라와서 이야기하지요. 치유 능력자 한 사람 데려와요.”

그가 통화 상대에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페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페이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메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쇼크 때문에 내장이 실제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인지, 상대의 GFG가 너무 거대하여 무너진 정신 방벽으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당신을 죽일 예정이었습니다. U급 능력자를 죽이는 것이 본보기가 될 거라고 해서.”

“마음이, 윽, 바뀌었나? 허윽.”

“그렇습니다. 당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봤으니까.”

그가 천천히 몸을 구부리고 페이의 비틀린 몸을 바로잡아 편안하게 앉혀 주었다. 적어도 1만 달러는 할 것 같은 반지르르한 슈트에 피가 묻었다.

“나와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뭐?”

페이는 황당한 나머지 곧바로 반문했다. 션이 미소를 지었다.

“SSB에서는 당신을 장윈핑에게 누이들까지 바친 심복인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나에게는 무력이 필요하고, 당신에게는 가족을 구해 줄 사람이 필요할 텐데, 마침 우리가 서로 조건이 맞는 것 같군요.”

“웃, 기지 마, 큭.”

페이는 할 수 있다면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팔다리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몸을 일으키려다가 바닥에 자빠져 피만 더 뱉어 냈을 뿐이다. 션이 몸을 구부려 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 때문에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흘려 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피가 흥건한 그의 입속을 닦아 내었다.

“이 나라라고 썩 믿음직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당신이 살던 곳보다는 훨씬 인간적이에요. 내가 아직까지 멀쩡하게 내 맘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한다는 게 가둬 놓고 종신 계약을 체결하자고 볼펜을 내미는 것 정도니까. 그것도 제가 당했을 때는 꽤 심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억압이라는 게 기껏해야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다그치는 것 정도라는 의미이지요. 어떻습니까?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지 않아요?”

“내 밑바닥을 들여다봤다면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죽어서 식구들이 더러운 꼴을 보는 것은 하다못해 내 눈에 보이지라도 않지,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시퍼렇게 눈 뜨고 그 꼴 보면서 새 삶을 찾아가라 이거야? 구해 준다고?! 어떻게!”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발악하는 그 말을 션은 절반은 알아듣고 나머지 절반은 감응력을 통하여 이해했다.

“그 소굴에서 꺼내서 데려오는 걸로 끝나면 내가 벌써 백 번도, 천 번도 저질렀어! 씨발놈아,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 우리 부모님도, 누나도, 동생들도 장윈핑 그 돼지 새끼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용서한다는 말을 직접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곧바로 숨이 끊어지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제가 정신 조작계의 최상위급 능력자입니다.”

션이 미소를 지었다. 페이가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고칠 수, 있어?”

“어떤 식으로 조작해 놨는지는 봐야 알겠지만, 고작해야 S급의 세뇌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라도 세뇌 능력자가 손대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면 그만이니까요. 기억상실을 감수할 수 있다면, 그다지 어렵지도 않습니다.”

페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작해야, 라니. S급 능력자 세 명이 각자 자기 방식대로 중첩하여 조작해 놓은 것이다. 그는 그것을 풀 방법을 찾아 4년간 남몰래 헤맸다. 

장윈핑의 명령으로 GFG 능력자를 붙잡을 때마다 그것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고 정보를 얻어 보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동생을 빼돌려 오스트레일리아의 U급 정신 조작계 능력자인 마야 리버스를 만나게 해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은 이렇게 복잡한 세뇌는 풀 수 없다고 했었다. U급 능력자인 그녀조차도. 절망이 너무 심하여 돌아와 가혹한 처벌을 받는 동안에도 페이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마음은 그때 희망과 함께 죽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건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그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계열이 다르면 손댈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딴 식으로 회유한다고 해서, 그딴 식으로!”

“할 수 있어요. 나는 정신 조작계의 모든 하위 능력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진심이며, 진실이라는 것은 공유 능력을 통해서 페이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페이는 버둥거리다가 또다시 피를 토했다. 꺽꺽거리면서 신음과 울음을 흘리면서 그는 경련하는 팔다리를 휘저어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션의 발목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그러면 여기로 데려와서 진짜로 이 나라 사람처럼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 진짜로? 당신한테 그런 능력이 있어? 그렇게만 해 준다면 평생 은혜를 갚겠어. 뭐라도 바치겠어. 목숨이면 돼? 능력이면 돼?”

웅얼웅얼 내뱉는 말은 이제 완전히 모국어가 되어 있었다. 뜻은 대강 전달되었지만 션은 말 자체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그냥 달래듯이 발목을 잡은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우선 당신을 무사히 빼돌릴 방법부터 생각해 봅시다. 로건, 아직이에요?”

「다 올라갔습니다.」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잔뜩 긴장한 채 총을 든 SSB 요원들이 달려 들어왔다. 션이 대사관 전체를 잠재워 놓을 것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U급 능력자까지 머무르고 있지 않았던가.

션은 “괜찮아요.”라고 평연하게 말했다.

“안심해도 됩니다. 대사관 전체를 잠재워 놨으니까. 긴장 풀고, 할 일을 하세요. 치유 능력자는?”

“저, 접니다.”

“이 사람부터 치료하세요.”

“맥케인 님이 부상을 당하신 게 아닙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서 치료해요.”

“그, 저기, 이 사람, 장페이 아닙니까?”

로건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괜찮으니까 치료해요. 그는 투항할 겁니다.”

치유술사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페이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손 안에서 하얀빛이 흘러내려 페이의 몸을 온통 적셨다. 호흡이 편안해지면서 피가 멎는다. 그렇지만 벌벌 떠는 손발은 움직여지지 않았고, 관통상의 기억이 남은 위치에서 통증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션은 그사이에 알버트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폰으로 돌려 놓았다.

“접니다. 상황은 보고받고 계시겠죠?”

「지금 카메라를 통해서 보고 있네. 장페이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우리 쪽에서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으리라 믿네. 리스트레인 룸은 자네가 박살 내 버렸으니 연행해도 감금할 장소가 없어.」

알버트가 딱딱하게 물었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여기에서 페이를 죽여야 했다. 처음부터 션은 그를 생포할 자신이 있었지만, 알버트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았으므로 죽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다.

“GFG라면 당분간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그보다 죽은 것으로 위장하든 어떻게 하든 이 사람을 빼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혀 있는 가족을 여기로 데려와서 시민권자로 살게 해 주면 죽을 때까지 은혜를 갚겠답니다. 되죠?”

「자네, 말처럼 간단히 그게 되는 일이…….」

“안 됩니까? 안 되면 여기에서 죽이는 수밖에 없죠. 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는 장윈핑의 수하로 돌아갈 겁니다.”

“당분간! 당분간 몸을 숨기고 치료만 끝난다면 내가 직접 다녀올 수 있어!”

페이는 대화를 전부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강 그게 쉽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듣고 서둘러 외쳤다. 외치다 보니 또다시 중국어로 말해 버렸으므로 로건이 통역으로 나섰다.

“내가 행방불명 상태라면 장윈핑은 겁이 나서 가족을 죽이지 못할 거야! 세뇌만 풀어 줄 수 있다면 빼내서 데려오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해! 도착한 후에 돌봐 주고 지켜 주기만 한다면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장. 그러다가 다시 가족을 핑계로 당신이 주저앉혀지면 여기에 사로잡아 두는 것보다 못하니까요.」

“SSB에서 불가능하다면, 제이 씨한테 의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대로 놓치기는 아깝잖습니까?”

션이 묻자 알버트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JK에게 의뢰는 하지 마.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네. 위장용 시체도 곧 보내겠네.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고 그를 빼돌려 이리 데려오게. 당분간 내가 보호할 테니. 인질 구출은 그다음 이야기야.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잖은가. U급 능력자가 귀순한다는데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시간제한이 있어요.”

「뭐?」

“장의 가족은 일주일마다 한 번씩 허락을 받지 않으면 죽도록 세뇌되어 있답니다. 그게,”

“어제, 부터야.”

“어제부터라면 카운트 4일 남았군요. 최저로 잡았을 때.”

「기다려! 잠깐, 생각하겠다. 생각할 테니 기다려. 왜 그걸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건가!」

“사망 위장은 할까요?”

로건이 물었다. 그것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는 일이다. 결국 알버트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젠장! 아니야, 지금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장의 말대로 행방불명으로 알려져 있다면 인질의 목숨을 좀 더 오래 살려 둘 거야. 일단 데려와!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하겠다. 안 되면 JK든 누구에게든 다 의뢰할 테니까 우선 장을 이곳으로 몰래 데려오고 진차오밍을, 아.」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제 생각에는 이 남자를 포로로 삼아서 협상 티켓으로 쓰는 것보다는 장윈핑에게 겁을 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겁을?」

“꼭 건물을 때려 부숴야 힘을 과시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열 번쯤 헛된 짓을 하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커피를 자기 머리 위에 계속 들이붓게 한다든가, 샐러드 소스를 얼굴에 바른다든가. 진지하게 하자면 본국과의 연락을 교란시킬 수도 있겠고요.”

「그것도 가능한가?」

“방침만 일러 주시면 대사와 진차오밍이 서로 다른 내용으로 본국에 연락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좋아. 이왕 그렇게 할 거라면 다른 루트로도 뚫어 보지. 대사는 장윈핑이 아니라 류위안창 라인이니 그쪽에 정보를 흘리게 하고, 리타, 명단 찾아. 대사관 내에 있는, 그래, 그거. 곧 메일로 보낼 테니 확인하고 할 수 있으면 그대로 해 보게.」

“통신은 어떻게 할까요? 30분 이상 연락망을 차단하고 있으면 중국 쪽에서 알게 될 텐데요? 저쪽은 오전입니다.”

「상관없어. 이 일이 더 급하니까.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을 것 같군. 장페이를 우선 보내고 션, 자네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공작이 끝나면 돌아가겠습니다.”

알았다며 알버트가 전화를 끊었다.

“저는 좀 기다려야겠군요.”

“잠시 앉아 계십시오. 피곤하시죠?”

로건이 그에게 진차오밍의 의자를 끌어다 주었다. 소파에는 페이가 토한 피가 흥건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서 그 광경을 잠시 보고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놔두면 그것만으로도 꽤 무서울 것 같군요.”

“그게 아니라도 무섭습니다.”

“음. 처음에는 쇼크사까지 생각하고 했던 일이니까요.”

완전히 뇌를 파괴할 작정이었는데 죽기는커녕 아직까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자신의 이상 상태를 깨닫고 벗어나려고 시도한 횟수도 적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거기까지 해낼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상당 부분 마모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를린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이유는 이해했다. 가족의 세뇌가 걸려 있는 이상 그를 구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니까. 그에게는 무력이 필요하고, 페이를 자기편으로 만들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지금 놓치면 그것을 되찾는 데는 긴 시간과 비용이 들 것이다.

그녀는 페이에게 동정심을 품은 것 같다. 그리고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 주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예언 능력자라면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 같다고 경계심을 품지만, 동시에 마음이 풀어진다. 운이 나빴다면 페이의 운명은 그의 운명이었을 수도 있었다. U급의 GFG를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엘리엇은 슬퍼해 주었지만, 역시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운이 나빴던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로건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연락이 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커피라도 가져다드릴까요?”

“고마워요. 하지만 의사한테 유동식 지시를 받아 놓고 카페인까지는 좀 그렇군요.”

로건이 부른 구급요원들이 들것을 가져와 페이를 실어 날랐다. 오래지 않아 알버트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겸사겸사 션은 진차오밍의 뇌리에 종이컵 하나에 인스턴트커피와 설탕을 8스푼씩 타서 마시고 싶은 욕망을 심었다. 페이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정도야 애교 어린 장난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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