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Interlude (2) (41/52)

17. Interlude (2)

머리를 식히려 잡지를 읽거나 음악을 들으려 했지만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소설을 읽는 것도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이럭저럭 잘 가 버려서, 알버트가 결국 책을 내던지고 오디오를 끈 것은 거의 자정이 넘어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밤낮없이 일하는 그로서는 평소보다 늦은 것은 아니다. 쉬는 동안만이라도 일찍 잠들고 늦잠을 자는 사치를 누리려 했으나 이삼일 만에 몸에 밴 습관이 고쳐지지도 않아, 피곤하면서도 일찍 자려 하면 뭔가 낯설고 늦게 일어나려 해도 눈이 떠져 버려 온종일 멍한 채로 보내곤 했다.

그는 핸드폰을 끄고, 컴퓨터도 켜지 않았다. 머리를 잃어버린 SSB에서 부국장이 자꾸 의견을 묻는다고 전화를 하고, 정보원들 중에도 소식을 알려 준다며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는 스스로 연락을 끊고 언론에 공개되는 수준의 정보조차도 거절했다. 더 이상 생각거리를 늘리지 않아도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했다. 경호 요원들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런던 외곽의 현대식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었는데, 보안이 충실하다고는 하지만 왕족의 경호를 물릴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에만 있겠다고 해도 경호를 안 할 수는 없어.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한 것은 너잖니? 런던 경찰을 의심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때고 생각하지 못하는 일은 터지는 법이니까. 네가 여왕 폐하와 우리 가족을 가장 먼저 피신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네가 걱정되는구나. 현실적으로, 근신하겠다고는 했지만 뭔가 문제가 터지면 역시 네가 나서 주지 않으면 안 돼. 넌 런던이 그리되는 와중에서도 혼자 온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 아니니?’

앤드류는 그렇게 말했다. 혼자서 경호를 거부하는 것도 역시 차별인 데다가 담당자들을 곤란하게 하는 일이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내심 편하지 않았다. 런던이 그리되는 와중에도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그가 그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준형이 신형 제어기를 차라고 말해 준 덕분이고,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는 일어선 채 그대로 서재의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제어기 두 개를 바라보았다. 준형이 알려 줄 때까지 그는 그 제어기가 착용자의 GFG를 제어할 뿐만 아니라 다른 GFG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신형 제어기의 기능인지 아니면 제어기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정보 조직의 수장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것을 알려 준 것이 준형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으며, 심지어 남자로서도 형편없는 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삑.

그는 괜스레 테이블에 놓인 전화를 눌러 그날 세 번째로 자동 응답기를 재생시켰다.

「32개의 부재중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습니다. 3번 메시지를 재생합니다.」

「알, 나야. 기분은 좀 어때? 괜찮아? 앤디에게서 근신할 거라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베개에 화풀이하면서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니지? 멋도 모르면서 그날 너한테 막 따지듯이 말한 것도 그렇고……. 미안하다. 제이가 하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니까 진짜로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서 괜히 너만 힘들게 했었지. 사실 지금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으니까 시간 나면 전화해. 지금 한가한 게 나 말고 누가 있겠냐.」

이런 천진하도록 상냥한 대응이야말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마 이 철없는 외숙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알버트는 버튼을 눌렀다.

「녹음된 메시지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의 엄지로 미간을 잠시 누른 후에 술이라도 한잔할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지 않고서는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실에 있는 홈 바로 가서 잔에 코냑을 반쯤 따르고 발을 질질 끌며 침실로 향한다. 복도에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들이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경직돼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원래부터 집 안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여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헉!”

창가에 놓은 안락의자에 션이 여유로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알버트는 거의 뒤로 주저앉을 뻔했으나 운 좋게 그러지는 않고, 문고리에 허리를 부딪치며 물러나 복도까지 나가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그러는 것을 보면서도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알버트는 그것을 보고 치를 떨며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션이 적의가 없다는 듯이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놀라시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놀라시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죄송하다는 말은 취소할까요? 사실 우리가 상냥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죠.”

“형식적으로나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그러자 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알버트는 숨을 들이켰다. 마주하고 진의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준형이 말한 ‘3차 발현’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항상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마다 느꼈던, 알버트를 불편하게 하던 그 기묘하게 속을 들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한 감각도, 미묘하게 머리부터 내리누르는 듯하던 압력도 사라지고, 불필요하게 사람을 홀리던 매혹적인 분위기도, 몽환처럼 눈앞을 흐리게 하던 것도 없어졌다.

평범해졌다. 굳이 요약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용모가 아름다운 것은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일주일 전의 그가 알버트에게 본능적으로 치 떨리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존재였다면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되었다. 다만 눈동자만이 심연처럼 깊게 푸르러져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원래도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나. 알버트는 좀처럼 기억해 낼 수 없었다. 프로필에 그저 ‘파란색’이라고 적어 온 그 빛깔이 이런 색이었던가. 아마 화가라든가 시인이 아니라면 그것을 표현해 낼 방법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여유가 생겼다. 여름에 로건 스미스를 통해 협력하겠다는 뜻을 전한 뒤로도 날카롭게 사방을 경계하며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단순히 ‘힘을 쓰겠다’라고 마음먹은 상태와는 다르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서도 그가 역력하게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알버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 그의 힘은 온전히 그 혼자의 것이 되었고, 더 이상 주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일어서는 게 옳겠지만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고작해야 5일 잠들어 있었던 것뿐인데도 생각 외로 몸이 힘들더라고요.”

엘리엇의 앞에서는 티 내지 않느라 고생했다면서 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눈이 움푹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언제 깨어났는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부터 묻지 않으십니까?”

“이다음에 물을 작정이었네.”

“그러시군요. 깨어난 것은 아까 저녁 8시쯤의 일입니다. 11시 전에 엘리엇 씨를 보내고, 상황 파악이 막 끝난 참입니다.”

“엘리엇이 어디 갔는데?”

“모르십니까?”

션이 이채를 띠었다. 알버트는 불쾌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근신 중인 몸이라고 해도, 남에게 한발 뒤처지는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근신 중이라고 듣긴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는가 보군요. 저는 분명히 근신은 위장이고 뒤에서 SSB를 조종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엘리엇 씨는 리야드로 가셨습니다.”

“석윳값으로 러시아라도 잡고 흔들 작정이라던가?”

“엘리엇 씨가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션에게 그것을 알려 준 것은 이자벨이다. 그는 엘리엇이 떠나자마자 제일 먼저 이자벨에게 전화를 걸고, 쉬고 있던 윌리엄과 오스카를 호출했다. 사태 파악까지는 한 시간가량이면 충분했다.

오스카는 원래부터도 경호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션의 능력이 이번 사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해 주리라는 판단이 있었고, 윌리엄은 이제 엘리엇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션에게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자벨은 션이 받고 있는 총애의 정도가 자신의 입장에서 경중을 잴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엘리엇에게서 도와주라거나 하는 별도의 명령이 없었어도 세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것을 합치자 엘리엇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대강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직후에 션은 알버트를 만나러 왔다. 의논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지금까지 국제 관계니, 정치 역학이니 경제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여 본 바가 없다.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조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헤리퍼드의 자문들에게까지 자신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꺼려지고, 맥과 준형은 아군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준형은 적어도 엘리엇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계약에 의해 묶인 관계가 아니라 그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개인적인 호의일 뿐이다. 

타운 하우스의 경호에 KH47의 용병들을 참여시킨 것을 보면, 엘리엇은 맥과 일종의 계약 관계를 성립시킨 모양이지만 션은 그를 믿지 않았다. 엘리엇과 자신은 입장이 다르다. 더 이상 빚을 지워서 엘리엇에게 부담이 되어서도 안 되고, 맥과 그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그렇다. 이쪽에서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기 이전에 약점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그렇다면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알버트, 정확히는 영국 왕실이리라. 알버트가 자신을 매우 싫어하며 엘리엇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비호감과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을 엘리엇과 한 묶음으로 이해하고 있고 엘리엇에 대한 싫은 감정이라는 것도 굳이 말하자면 미운 정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라는 것을 션은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맺어 주는 인연도, 혈연의 위력도 그는 결코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그간 벌어진 일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신다면 우선 이것부터 보십시오. 제가 정리하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니지만 벌커리 경에게서 받은 설명을 요약했습니다. 이게 제가 이해하고 있는 현재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니. 그전에.”

알버트가 건네받은 서류 봉투를 도로 테이블에 던졌다.

“목적이 뭔가?”

“아아. 그것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반격하려고 합니다.”

“반격? 자네를 내놓으라고 한 자들에 대해서 말인가? 어차피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면 명분이 없어져. 이 일도 이제 끝났네.”

“끝내려고 한다면 그럴 수는 있겠죠.”

션은 냉정하게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게 처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알버트 전하, 런던 시민들, 영국 왕실, 정부, 그 외에 피해자들이 부과하는 책임에 대해서 회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자들은,”

그는 톡톡 서류 봉투를 검지로 두드렸다.

“늘 그 이상을 요구하죠. 아무 권리도, 자격도 없이. 카이루완에서는 실제로 군병에 의한 습격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어린 데다가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 피해가 어느 정도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네 번 이상 습격 때문에 옮겨졌던 건 기억합니다.”

“…….”

“엘리엇 씨가 여러 가지로 저를 지키기 위해 애쓰셨지만, 저는 잘 모르긴 해도 국제 관계라는 게 그렇게 예의 바르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 대가 관계가 있겠고, 막 나가는 자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장페이가 몰래 입국한 것도 그렇고요.”

그 말을 듣고 알버트는 흠칫 놀라 재빨리 서류 봉투를 끌어당겼다.

“코트디부아르에서 S급의 신체 강화계 능력자 넷을 보낸 것도, 러시아의 옐레나 미하일로바가 자기 밑의 작전대를 거느리고 온 것에도 의도가 있겠죠. 맥이 동관에 묵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오늘 밤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선공하겠다는 건가?”

“먼저 건드린 것은 저쪽이니 명분은 충분할 겁니다.”

알버트는 빠르게 봉투 안의 내용들을 훑었다. 그러는 동안에 션은 한결 편안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맥과 제이에게서 U급 능력자가 국가 수준의, 어떤 의미에서 독립적인 존재라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영국이 설마하니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엘리엇이 나서지 않았거나, 제가 깨어나지 못하고 열흘 정도 병원 같은 곳에서 앓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만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지금쯤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었겠죠.”

“그게 겉만 번지르르하고 해 지는 나라의 실체인 거라네.”

알버트가 헛웃음을 쳤다.

“GFG 능력자가 나타난 이후로 각국의 위상은 예전과는 달라졌어. 경제력을 포함하여 국력을 말한다면 여전히 어디에도 뒤지지 않겠지만, GFG에 관해서 우리는 약소국이라네. 정규군을 아무리 훈련하고 치안을 정비해도 능력자를 막을 방도가 없어. 총력전이라면 모를까, 첩보전과 국지적인 전술전에서도 우리는 완전히 약자라네.”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맞아. 사실상 유럽 대다수의 나라가 그렇지. GFG 발현은 확률에 좌우돼. 인구가 적은 우리나라로서는 보유 능력자의 숫자도 적지만, 설령 상위급 능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으니까.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제게 계약을 강요하신 거군요.”

“U급은 너무 귀해. 실제로 종신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자네를 굴릴 수는 없었겠지만, 확보할 수 있을 때 확보하는 게 당연하지.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사과할 생각이 없네.”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라는 건 결국 법률에 묶여 있어. 왕실이 초법권적 지위로서 SSB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정부가 눈을 감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라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방첩할 수가…….”

말하다 말고 알버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준형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일부러 심어 놓은 생각인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리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GFG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문제이다 보니 이제까지 연구된 분야는 치유계 능력을 계발, 발전, 사용시키는 법에만 주로 치우쳐 있었다. 상위급 능력자는 자신의 힘을 숨기고 능력의 근원이나 발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옐레나 미하일로바나 맥 마셜처럼 다른 능력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국가와 밀접하게 연관된 U급 능력자를 보유한 국가가 아니라면 대부분 비슷한 형편일 것이다. 오히려 GFG 분야에 대해서라면 중국이나 코트디부아르, 인도가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해는 합니다. 직접 만나 본 것은 제이 씨와 맥뿐이지만, 손발이 묶인 채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죠. 저도 신중하지 못했었습니다.”

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형이 말한 ‘자위 수단을 생각해 보라.’라는 말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이 얄팍했다는 것을 션은 인정했다. 언터쳐블 내부에서도 물론 의견이 갈릴 테고 불가침 규약을 제일 상위에 놓은 것으로 보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미 가입 의사를 밝힌 자기에게 곧바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사실 그것은 나라를 약간 믿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SSB의 유능함을 절대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국민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할 만큼 약한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아마 좀 더 적극적으로 소속을 결정해서 그것을 외부에 밝혔더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으리라.

“반대로 말하자면, 저도 그들과 마찬가지이죠.”

“어쩔 작정인가?”

“두 번 다시 감히 이런 요구를 할 수 없도록 만들 겁니다. 저는 이 일을 단순히 ‘깨어났으니 됐어. 이제 끝.’ 하고 마무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순히 자기 자신과 엘리엇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이와 그 가족들, 그가 가진 것,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어떤 꼴을 보게 될지 확실히 알려 줌으로써 경고할 것이다.

엘리엇을 눈물 흘릴 정도로 힘들게 만든 자들을 그냥 용서할 작정도 없다.

원래도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된 채로 눈매를 어둡게 물들이고, 몇 시간 자지 못해 피곤했다고 하면서, 곁에 있어 줘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비행기를 타러 가게끔 하고 말았다. 그렇게 지치고 힘든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사태가 급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엘리엇에게 가지 말라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푹 잠들 때까지 안아 주지도 못했다.

걱정해 주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 자신이라는 것을 내려놓고 션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버트가 메모들을 내려놓고 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어쩌라는 건가?”

“일벌백계를 한다면 어디가 가장 좋을지 알고 싶습니다. 모처럼 엘리엇 씨가 수습하려고 애써 주셨는데 이들 전부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딱 한 곳만 본보기로 삼을 생각입니다.”

션은 이자벨이 만들어 준 명단을 집어 들었다.

“제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첫째, 거친 행동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는가.”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지워졌다. 실제로 무력 행사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오래된 우방 관계로 보아 그렇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나선 것은 정말로 두려움에 의한 것이며, 션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둘째,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가.”

일본이 지워진다. 일본의 U급 능력자는 특수 강화계로서 일신에 무력이 될 만한 힘을 지니지 않았고, 성품도 온화하다고 들었다.

“셋째, 엘리엇 씨의 제안이 통용되는가.”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워지고 UAE와 중국, 코트디부아르, 인도와 CIA가 남았다.

“UAE는 괘씸죄입니다. 엘리엇 씨가 호의적인 제안을 했는데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은 엘리엇 씨가 선을 대려는 라인과 지금 와 있는 진차오밍이라고 하는 자의 윗선이 서로 적대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맞네.”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인도의 U급 능력자가 남몰래 입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CIA는……. 맥의 반대 파벌이라고 들었지만, 미국이니까 부담스럽군요. 제가 맥의 편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쳤을 때의 효과는 높지 않을까요?”

알버트가 이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하려고 한다면 이 목록의 인사 전부를 처리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것은 맥 마셜도 못 하는 일이다. 김준형은 할 수 있을까? 가능은 하겠지만, 아마 상당한 준비 기간이 없이는 어려우리라.

“가능합니다. 꽤 간단히. 필요하다면 증거인멸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황증거까지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 정도로 크게 벌이고 싶진 않군요. 적어도 맥과 제이 씨의 눈은 피하지 못할 테고요. 그러니 공포심을 심어 주되 외교적 마찰은 최소화할 수 있는 곳, 가능하다면 이 일이 향후 ‘우리’가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 행사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갑자기 애국자라도 된 것 같군?”

“이제부터 그래 볼 작정입니다.”

빈정거리는 말에 션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나라에 산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이 조금 정도는 도움이 되도록 해야죠. 이기적인 방식이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집단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국과 긴밀히 연관을 맺은 다른 U급 능력자들처럼요. 저는 지금 영국 국민이고, 앞으로도 헤리퍼드의 일원이자 튜더의 혈맹으로서 살아가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얕은 소견입니다만, 전하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있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여왕 폐하와 왕세자 전하께서 전하를 몹시 신뢰하신다고 들었으니까요.”

알버트는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이것의 10배쯤 오만하게 굴어도 따지기 어려울 텐데 공손하고 호의적인 태도가 오히려 소름 돋았다.

“지금까지의 자네 태도로 보면 놀랄 만큼의 변화인데? GFG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드러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그편이 좋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서까지 엘리엇 씨의 그늘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할 만큼 비겁한 남자는 아닙니다.”

“책임이라.”

알버트는 인상을 찡그리고 잠시 침묵한 채 있었다. 그가 원하던 방식의, 정부의 우위에서 션을 다스리는 방식이 아니라 해도 타협의 여지가 있다면 당연히 그를 표면에 끌어내야 한다. 미국의 맥 마셜, 러시아의 옐레나 미하일로바처럼 영국의 션 맥케인이 되기로 결정했다면, 무거운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기꺼이 그 손을 잡는 게 옳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결정은 빠른 게 좋겠지. 자네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건 누구누구인가?”

“현재로서는 의료진과 엘리엇 씨의 심복 몇 명뿐입니다. 운전은 직접 했고, 이 건물의 수위와 경호원들은 모두 잠재워 두었으니까요. 맥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좋아.”

마음의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갑자기 몸에 활력이 돌았다. 알버트는 탁자에 내려놓았던 술잔을 바닥까지 비우고 벌떡 일어섰다. 션이 깨어나자마자 여기로 온 것은 시간제한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엘리엇이 부재중인 동안에 일을 끝마칠 작정이리라. 그가 알면 위험하다고 틀림없이 반대할 테니까.

엘리엇에게는 일단 저지른 다음에 알린다. 또한 그가 깨어난 뒤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 역시 불시에 허를 찌르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네.”

“정신 조작계 능력에 대해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션이 싱긋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다루는 몸은 지금은 상당히 형편없지만요. 뛰는 건 좀 힘들더군요. 건강 체질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럼, 장페이를 이길 수 있겠나? 특별한 지원 없이 단독으로.”

“빙결 능력자라고 했었지요? 자세한 데이터가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상성이 불리할 것 같지 않군요.”

“장페이는 강해. 단순히 파워량으로 따진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맥 마셜과 동급이네. 알려진 것만 해도 20㎞ 반경을 장악하여 얼음의 제국으로 만들 수 있다네.”

“공식적인 파워량 측정 방식은 잘 모릅니다만, 단순히 장악만이 목적이라면 제 반경은 런던 끝까지 닿습니다. 사실 그것도 전부 터뜨린 것이 아닙니다.”

알버트가 약간 멍한 얼굴을 했다가 “그렇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어.”

그가 중국을 가리켰다.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있으므로 중국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U급 능력자를 박살 내는 것보다 더한 과시는 없다는 점에서도 이것이 최선이다. 언터쳐블이 생겨난 이래 수십 년 동안 U급 능력자끼리 싸운 예는 없다. 충격적인 사건이 되리라.

“좋습니다.”

“잠시 기다리게. 이쪽에서도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하니.”

그가 일어서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션은 깍지를 끼고 앉은 채 활달하게 움직이는 알버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알버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협력을 약속한 뒤에 필요에 의해서 만나고 형식적으로 웃으면서 얄팍한 친교를 쌓으려 애쓰기는 했지만, 자신을 GFG라는 능력으로만 보고 있는 그가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알버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오히려 능력과 완전히 별개로 매우 인간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겉껍질과 그 안을 채워 넣은 GFG를 헤치고 나면 그 밑바닥에 있는 션 맥케인이라는 인간은 하다못해 선하고 좋은 자이기는커녕 평균 정도의 도덕심도 갖지 못한 콤플렉스와 강박증 덩어리였다. 그것을 안다면 귀중한 친구의 반려로서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에는 알면서도 감정적인 거부감과 분노를 느꼈지만, 그것은 자격지심과 돼먹잖은 방어기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서 조금 정도는 공감하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부드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역시 생겼다.

션은 그의 심장 바닥 깊은 곳에 깔린 본심을 들여다보았었다. 강하지만 약한 그것은 그저 인간의 것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가짐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가진 것과 닮아 있었으니까.

날만 좀 덜 세우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심결에 웃음을 흘렸는데 통화 중이던 알버트가 휙 돌아보았다. 션은 얼른 입을 다물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뭐 먹을 것 좀 주시면 안 됩니까?”

“뭐?”

“의사가 정밀 검진 끝날 때까지 유동식 말고는 안 된다고 해서 윌리엄이 절대로 먹을 걸 안 주더라고요. 고구마 수프 반 컵 마시고 돌아다니자니 힘드네요. 링거 맞아서 공복감 자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뭐라도 좀 먹으면 훨씬 힘이 날 것 같은데.”

알버트가 황당한 얼굴을 한 채로 통화를 잠깐 중단하고 인터폰으로 가정부를 불렀다. 자기가 부탁하고서도 션은 여기의 가정부는 24시간 대기하는 거냐고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헤리퍼드에서도 요리사와 하우스 키퍼는 밤에는 퇴근한다.

“노동법 위반 아니에요?”

“먹을 걸 달란 게 누구 쪽인가. 보통 2시나 3시까지는 일하니까 밤 시간에도 일하는 사람이 있을 뿐일세.”

“상류 계층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군요. 저는 그렇게 일하면서는 못 살 것 같은데. 엘리엇도 그렇고.”

션이 턱을 괴며 중얼거리자 알버트가 수화기를 다시 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도울 일이 없으니 입이나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중요한 걸 하나 여쭤봐야 했어요.”

“뭔가?”

“그 처형권이라는 거 말이죠. 기본권이 헤리퍼드에 귀속되는 거면, 세금 안 내도 됩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알버트가 찌릿 그를 쳐다보고 무시했다.

“사실 세금은 상관없는데 피선거권이나 공무담임권도 없어지면 그건 좀 곤란해서요. 여권은 어떻게 되는 거죠?”

“사문화된 법을 가지고 별걸 다 신경 쓰는군. 말이 처형권이지 진짜로 행정 처리까지 할 리가 없잖은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

날카로운 질책을 듣고 션은 입을 다물었다. 간식은 5분 후에 보내졌고, 알버트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20분 후에 당도했다. 그리고 30분째에 중국 대사관 인근의 도로와 건물에서 사람을 모두 비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션은 샌드위치 한 접시를 비우고 가뿐하게 일어섰다. 알버트가 붙여 준 요원 몇 명이 그를 보조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아파트 앞에 고급 세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젊더라도 부유한 사람만 살고 있는 건물이니 그런 차가 새벽에 들어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바짝 군기가 들어 있는 요원들은 황급히 션의 주위를 둘러쌌다.

세단에서 중년 남자가 내렸다. 상대가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듯하여 션은 가볍게 손을 들어 요원들을 물리고 남자와 마주 섰다.

“안녕하십니까, 션 맥케인 씨? 알렉산다르 드라고비치라 합니다. 미력하나마 영국 내에서 오스트리아 외교단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션은 “션 맥케인입니다.”라고 예의 짧은 인사를 건네며 그와 악수를 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새벽의 방문을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해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가 연보라색의 봉투를 하나 션에게 건넸다. 션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헤리퍼드 공작 합하께도 이미 말씀드린 일이지만, 우리는 결코 귀하에게 어떤 적대감이나 해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능한 한 오래도록 친교를 나누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와 영국이 그러하고, 우리와 헤리퍼드 공작이 그러하듯이요.”

“저는 일개인에 불과합니다. 과분한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제가 이 시간에 여기에서 나오리라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그 편지는 마를린 아델슈타인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까지 지정하셨지요. 그럼 전할 것을 모두 전해 드렸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다음에는 천천히 이야기할 만한 곳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드라고비치 대사가 고개를 숙였다. 션은 그와 마주 인사를 하고, 세단이 떠나자마자 봉투를 뜯었다. 모두가 몹시 궁금해했지만, 남의 편지를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살짝 향수 냄새가 남은 편지 안에는 둥글둥글 예쁜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션 맥케인.

일간의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안녕히 지내시느냐는 인사로 글머리를 열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깝군요.

이 편지가 도착할 때는 간두지세에 서 있을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노파가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한답시고 공연히 날씨 이야기며 친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 길게 늘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세상을 더 오래 산 사람의 작은 지혜로 헛된 걱정을 한다고 비웃으며 보시면 됩니다.

세상에 의인이 있어도 선인은 없으며, 악자가 있으되 악마는 없다는 것을 우리처럼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귀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가장 채우기 어려운 자산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으며, 늦게 기회를 되찾으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 법이니까요.

이것은 늙은 할멈이 귀하에게 그저 호의로 드리는 편지입니다. 내년의 정기 모임 때에 상면할 것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마를린 아델슈타인 』

“무슨 내용인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궁금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로건이 물었다. 숨길 만한 내용도 없지만, 뭐든 다 보여 줄 필요도 없으므로 션은 그냥 편지를 도로 접어 봉투에 넣은 다음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별거 아닙니다.”

“예.”

대답은 공손했지만, 호기심의 기색이 조금 느껴졌다. SSB의 밴에 탑승하고 나서 그는 요원들이 감청 요원이니 기술 팀이니 하는 사람들과 통신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가장 필요한 것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되찾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드는 것. 차가 새벽 거리를 달려서 목표 지점으로 향하는 동안에 션은 그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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