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Interlude (1) (40/52)

16. Interlude (1)

11월 1일에는 거의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후유증 때문이다. 런던 시민의 거의 대다수가 심력을 모두 소모한 듯이 극도로 지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밤사이에 이루어졌어야 하는 일이 전부 스톱된 것은 물론이고, 9시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할 학생들마저 넋을 놓고 집에 주저앉은 채 가족의 얼굴을 바라보고 확인하느라 집에서 나서지 않았다. 

반면, 갑자기 모든 것을 내던지고 고향 집에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블랙아웃 순간에 교통사고가 너무 많이 나서 도로가 엉망진창이었지만 운전자들은 차를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사실상 대중교통도 마비되었으며 공항도 정지하고 가게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신문조차 나오지 않고 방송국은 뉴스 없이 이미 제작되어 있던 프로그램만 틀거나 그조차 하지 못하는 곳도 많았다.

사태가 끝난 이후에 런던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움직였으나 그들만으로 대도시가 온전히 기능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 동안 런던은 죽은 도시였다. 금융과 공공기관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중단되어 버리는 사태에 외부에서는 당혹을 금치 못했지만, 런던 내부는 그에 대응조차 하지 않고 무감각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정상적으로 사람들이 눈을 뜬 것은 11월 2일 아침부터의 일이다. 온화한 밤의 손길이 머리를 한 번씩 쓸어 준 덕분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사람들은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제와 그제의 일은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런던 외부의 언론에서는 “런던을 지배한 핼러윈의 악령”, “유령의 하루”, “영혼의 블랙아웃” 같은 자극적인 타이틀을 뽑았지만, 런던 사람들은 거기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도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 11월 1일 아침에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의 자기 침대에서 깨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핼러윈 파티의 의상을 그대로 입은 채였고, 어떤 사람들은 외출복을 입은 채, 어떤 사람들은 거품 목욕을 하던 그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길가에 차조차 버려두고 자기 발로 한 시간씩 걸어서 집에 돌아왔거나 야간 근무를 방기하고 걸어서 귀가하여 침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곁에 잠들어 있는 배우자나 애인도, 한집에 살고 있는 부모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기 혼자만 기억에 공백이 있다면 과음이라든가 정신질환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라도 같은 순간부터 기억이 없음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사람들 역시 단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루 전과 무언가 달라진,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들은 겁에 질렸다. 당장 오늘은 무사하지만, 내일은 무언가가 또 달라질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지구가 끝장날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시한부 환자들처럼 여러 가지를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열어젖힌 채 사랑한다는 말을 주위에 퍼붓고, 교회와 성당에 나가고, 또다시 삶과 마주한다.

그리고 11월 3일이 되면서부터는 조금씩 그 상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사건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던지라 오히려 착각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TV에서는 ‘핼러윈 축제 때문에 집단 환각이 발생했다’든가 하는 견해를 말하기 시작하고, 축제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과음을 핑계 댔다. CE에서 11월 1일 새벽에 발생한 4시간 동안의 대정전에 대해 사과문을 발표하자 분위기는 확실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시각이 인지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자기 집과 직장, 그 밖의 모든 곳에서 불이 꺼졌으리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안도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선택한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빈 시간을 자기의 일상사와 상식으로 채워 넣었다. 예리한 이성을 가진 사람은 기억의 공백을 여전히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설명할 방법을 얻지 못한 채 공포를 외면하고 사실을 밝히려 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그렇게 속 편하게 잊고 넘어갈 수 없었다. 대량의 교통사고, 확실하게 증거로서 남아 있는 소요 사태, 갑작스럽게 불붙었다가 이유도 없이 꺼져 버린 시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폭력과 강도 사건, 치정과 원한에 의한 살인 사건 역시 통상의 세 배에 이르렀고, CE의 대정전 사과문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런던 시경의 발포였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발포를 명령한 청장 본인조차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직접 방아쇠를 당겨 사상자를 낸 경찰들 역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 구의 시신과 이십여 명의 총상자가 남아 있었으며, 그것은 그날 밤의 일이 집단 환각이 아니었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관련자를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근신하며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청장은 평소에 침착하고 온후한 성품으로서, 결코 함부로 발포를 명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이 변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다 쏴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모두 기록에 남아 있었다. 그에 대응하여 다른 간부들이 진정하라든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리기는커녕 다 같이 욕설을 지껄이며 전원 사살해 버려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소리도.

청장은 그 녹음을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기억에 없음에도 그것이 자신이 한 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전 직후에 런던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소요들은 또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목적조차 불분명하고 제대로 된 구호 하나 없었던 시위와 마찬가지로 이 소요들 역시 왜 생겼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 테러일까. 최근 정부가 말리 내전에 개입하면서 테러 대상이 되었다는 주장에는 얼핏 설득력이 있었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것이 테러일 경우 좀 더 실질적인, 기반 시설의 파괴라든가 주요 건물의 폭파, 정치적 선언 같은 일이 동반되었으리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다.

정부는 침묵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원회와 회의들이 연일 열렸지만, 진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억에는 없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태연하게 들을 만큼 용기 있는 자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직 인사일수록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날 밤에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명령을 하고,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러나 기억은 없다. 콕스 총리 같은 경우에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고 런던을 뜨려고 긴급히 헬기를 준비시킨 기록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관저의 자기 침대에서 눈을 떴고, 서류 가방에 중요한 문건을 챙겨 넣다 만 것을 보고서도 통화 내역과 CCTV를 확인할 때까지 자신이 런던을 떠나려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11월 4일, 사태가 또다시 변했다. 각국의 주요 인사가 입국 의사를 밝혀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통보에 가까웠다. 이번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말에도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일단 외무부가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해명을 거절하는 것조차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국에서 런던 사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앤드류 왕세자가 사실상 죽은 법이라고 여겨지던 비상대권을 발령하여 각의를 소집한 것은 이 시점의 일이다.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헌정 질서를 위협할 생각은 없으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사안이 긴급하고, 다른 것보다도 여기 계시는 각료 여러분보다 제가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소집했습니다. 이는 여왕 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늘 참관석에 앉아 있던 왕세자의 발언에 각료들은 숨을 들이켰다.

“기억, 을, 말입니까?”

콕스 총리가 어렵게 되물었다.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 시간이 되감기기 전에 런던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저는 해당 날짜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리퍼드 공작 역시 관계자로서 오늘 회의를 진행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참관석이 아니라 회의 탁자에 앉아 있던 엘리엇이 살짝 좌중에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이것 역시 왕세자가 각의를 소집한 것만큼이나 이례적인 일이다. 명예 선언을 이어 가는 공작들은 국가의 주요 기관으로서 내각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관습에 불과하고 실제로 내정에 참여하는 일은 없다. 엘리엇의 부친 찰스 공은 정치에 깊이 관여했지만, 그 활동 역시 상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니 엘리엇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통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중대한 자리에 출석하는 것은 언제나 알버트였는데 오늘은 자리에 없다.

비서가 자료를 배부해 주었다.

“SSB의 국장은 근신을 청했으므로 허락했습니다. 본인은 징계를 요청하고 있는데,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오늘의 마지막에 의논해 봅시다. 우선은 이번 사태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지요. 헤리퍼드 공작.”

“우선 자료를 보십시오.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이 자료는 모두 기밀이며, 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불태워질 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엇은 짧게 말했다. 그 자료는 션이 SSB의 안가로 들어간 시각부터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의 런던의 모든 유의미한 움직임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홀본의 리스트레인 룸이 한계에 도달한 시점에서 왕실을 피난시킨 것, 엘리엇에게 전화하여 런던의 전력을 모두 끌어다 쓴 것처럼 중요한 부분은 물론이고 당시 사태를 보고하는 SSB의 모든 통화가 녹음되어 있었으며, 그것의 원본은 엘리엇에게 넘겨졌다. 

본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런던에 있던 SSB의 중추적인 간부들은 모두 션에게 굴종했고, 동시에 그에게 동화되었던 체험을 무의식에 간직하고 있었다. 알버트가 전면적으로 협력하라는 명령도 내렸기 때문에 아무 말도 없이 요구하는 자료 전부를 내주었다. 엘리엇은 이 사태가 정리되고 나면 원본 자료까지 모조리 파기할 작정이었다.

잠시 회의실 안에 서걱서걱 자료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10분이 지나갈 무렵부터 침음성이 간간이 들리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나갈 때부터는 “이럴 수가.”라든가 “신이시여…….”라는 탄식이 시작되었다. 콕스 총리가 끝 페이지를 넘긴 것은 30분이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째서 자신이 피난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합하, 합하께서는……. 이 모든 사태가 GFG 능력자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무부 장관 쿠퍼가 물었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되어 있다시피 모두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있소.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확인시켜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

“아무리 U급 GFG라 해도, 이게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확실히,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드림 워커가 발휘했던 힘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의 은총’이라고 불렸던, 그 최초의 GFG 능력자는 어떻습니까? 그에 비하면 런던의 일은 오히려 작은 규모로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드림 워커와 같은 GFG 능력자가 있었던 겁니까?”

국방부의 리처드슨이 전율하면서 물었다. U급 GFG 능력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국방력의 증대를 의미한다. 언터쳐블의 존재를 감안하면 전쟁 억지력을 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당혹스러웠다.

“지금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그 U급 GFG 능력자는 자기 능력을 통제 못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능력 통제가 불가능한 U급 능력자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폭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자기 능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엘리엇은 각료 모두를 향해서 대답했다.

“런던 시민 모두가 기억을 잃은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게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아주 섬세한 컨트롤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이상 없이 전원을 안전한 자기 집의 침실로 돌려보내고, GFG에 지배되었던 기억을 삭제하면서 아무 이상도 없이 정신 방벽을 재구축시키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행되었던 것은 폭주 중이 아니라 폭주가 끝난 다음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보았으므로,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나는 기꺼이 가문의 문장을 세우고 성서에 손을 얹은 채 지금 말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합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너무 놀라운 일인지라…….”

가문의 문장이라든가 성서에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관용적인 말에 불과하지만, 명예 선언을 지키고 있는 귀족 가문이 옛날 그대로의 형식대로 맹세를 하겠다는 것이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저는 합하를 신뢰합니다.”

쿠퍼 장관이 제일 먼저 말했다.

“합하께서는 GFG 면역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직접 목격하셨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이 자료에 따르면, 많은 수는 아니라도 몇 사람 정도는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고 말입니다. 알버트 전하도 그러신 것 같고.”

“GFG가 발현을 먼저 하고, 그 뒤에 제어력이 따라온다는 것은 꽤 잘 알려진 사실이죠. 이 자료에 따르면, 션 맥케인은 청소년기에 한차례 U급으로 추정되는 파워량의 발현이 있었고, 힘을 봉인했군요.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어떤 계기로 봉인이 깨져 재발현하고 비로소 제어력이 성장한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논리는 맞지요.”

교통부 장관 웰즈가 약간 이맛살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미심쩍은 부분이 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자는 지금 어디……. 그러고 보니 이 이름……?”

콕스 총리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드문 이름은 아니지만,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깜짝 놀라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엘리엇은 태연하게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는 내 파트너입니다, 총리.”

총리가 약간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총리에 뒤이어 회의실 전체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은 벌써 오래된 것이고, 8월에 크루즈에서 파트너로 사교계에 소개시켰으므로 자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해도 헤리퍼드 공작에게 남자 파트너가 있다더라는 것 자체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엘리엇, 그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개회만 하고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앤드류가 부드럽게 말했다. 엘리엇은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싶어 약간 입매를 굳혔다. 아니, 놀라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기묘하게 얼어붙은 이 공기는 무엇일까.

다행히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서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그가 직접 자리에 참석하여 자기가 능력의 제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의사의 말로는 심력을 너무 소모하여 그런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 자리에 내가 참석해 있는 것은 물론 CE의 오너이자 헤리퍼드 공작으로서이기도 하지만, 그의 보호자로서이기도 합니다.”

“하, 합하.”

“여러분을 긴급하게 소집하여 이 모든 사실을 알리는 것은, 사후 처리와 대처에 있어서 사태의 이해가 필요하시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갓 발현한 GFG 능력자의 폭주 사태에 대해서 이미 해당 법령과 규정이 여러 가지 있을 터입니다만,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단순히 적용하는 것만으로 넘어갈 수는 없겠죠.”

GFG 능력자가 통제력을 잃고 폭주하는 경우에 대해서, 법은 상당히 여러 가지 경우의 수까지 고려하여 규정하고 있다. 그 규정에 따르면 발현 직후의 폭주에 의해서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책임 능력이 없다고 본다. GFG의 발현은 본인이 예측이나 조절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고, 심신상실이 동반된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처벌은 당연히 없고 센터의 결정에 따라 봉인 혹은 훈련이 결정되며, 어느 쪽이든 간에 교육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책임 능력을 길러 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션의 경우에 책임 능력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봉인의 힘을 빌려서이든 어떻게든 분명히 10년 이상 자기 능력을 다스려 왔고, SSB에는 그가 능력을 이용하여 엘리엇을 죽일 뻔하고 홀본의 리스트레인 룸을 파괴한 기록 역시 남아 있다. 발현 직후가 아니라 본인이 능력을 다룰 줄 알게 된 이후에 생긴 일이라면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문제는, 도대체 션이 져야 하는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그의 능력은 크게 동조, 공유, 증폭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 중 동조와 공유 능력에 의해 발생했던 문제는 영향을 받았던 시간대의 정신을 그 이전으로 되돌림으로써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증폭 능력의 영향은 고스란히 남았다. 런던 시경에게 사살당한 사람과 부상자들, 소요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평균보다 월등히 치솟은 자살률과 살인 사건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나 그 일들에는 션 자신의 의지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사람의 감정을 요동치게 한 것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예술가와 정치가, 언론인들도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파생적인 문제로서, 블랙아웃으로 인해 발생한 재산상의 피해와 런던 시민들이 무기력해진 하루 동안 발생한 경제적인 손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그의 책임인가? 만약 이 일을 사건으로써 법정에 올린다면 판사는 머리가 벗겨질 게 틀림없었다.

그의 책임이 맞다면 처벌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것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사 이래 세 손가락 안에 꼽힐지도 모르는 U급 GFG 능력자이다. 그를 보유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인 이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면적인 면책 특권을 주어서라도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제가,”

“제가…….”

콕스 총리와 리처드슨 장관이 동시에 말했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외무부의 베넷이 신중하게 말했다.

“누가 대신 책임을 질지, 어떻게 질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도 됩니다. 정 곤란하다면, 봉인이 깨지면서 처음 발현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고 해서 책임 능력을 면제시키거나 사후 면책을 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각국에서 해명을 요구하며 와 있는 인사들입니다. 그들이 이 정보를 모르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가 자료를 검지로 몇 번이나 두드렸다.

“파워의 제어가 되는 능력자라면 제거를, 되지 않는 능력자라면 신병 양도를 요구할 겁니다.”

“그 문제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엘리엇이 말했다. 좌중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사태의 성질이 성질인 만큼 외부에도, 국민들에게도 너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유가족과 부상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지원 체계를 만들며, 재산상 피해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선에서 헤리퍼드에서 보상하겠습니다. 대신 처형권의 행사를 요구합니다.”

“합하!”

리처드슨이 소리를 질렀다.

“능력 통제가 가능한 자국의 U급 GFG 능력자를 제거하시겠다는 겁니까! 게다가 합하의 파트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여기에서 내가 설명을 해야 하는 거군.”

앤드류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명예 선언의 상세한 항목 같은 걸 외우고 있는 건 이제 와서는 왕실과 해당 가문들뿐이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공작에게서 제안을 듣고 나서 나도 다시 찾아보고 왔어요. 처형권이라는 건 엄밀하게는 생살여탈권을 말하는 겁니다. 목숨을 가져가서 살려 놓든 죽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차라리 오브 헤리퍼드로 만들어서 면책권을 요구하지 않고, 공작은.”

“그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나는 그에 대한 무한대의 권리를 원합니다. 시민권으로부터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그러므로 처형권을 행사하고자 합니다. 두 번 다시, 설령 모국이라 해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 그에 대해 어떤 종류의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 책임도 묻지 못하도록. 그러니 베넷 경의 걱정은 무용합니다. 영국 정부는 더 이상 그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내 일이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의 목숨의 주인으로서, 모든 책임 역시 대신하겠습니다.”

엘리엇은 냉엄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설령 사문화되어 가는 법이라 하더라도 처형권은 그가 가지고 있는 당연한 권리이므로 영국 정부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다. 만약에 그것을 부정하려면 션이 GFG를 이용하여 엘리엇을 해쳤던 사실을 부정해야 하고, 그러면 공식적으로 그는 GFG를 다루지 못하는 봉인 상태였던 것이 되어 이번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하게 된다.

그는 헤리퍼드와 콘월을 이으면서 그저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였을 뿐이지, 특별히 거기에서 자랑스러움이나 명예를 느낀다거나 잘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만은 달랐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헤리퍼드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엇은 한발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주어야 할 정보는 모두 줬고 자신의 뜻도 밝혔으니, 사후 대책에 관하여 구체적인 결정은 각료들이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방침에 따르면 된다.

밖으로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롱펠로우가 따뜻한 물병과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우선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재무부 건물을 나왔다. 기사가 서둘러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차에 털썩 앉자마자 물었다.

“그사이에 연락은?”

“벌커리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있었습니다. 페트로 피나의 이사회가 합하의 안건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중국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시차가 있으니까요. 모건 스탠리의 카일 스탠리 경으로부터, 쉐브론사의 긴급 이사회가 우리 시각으로 모레 오전 중에 열릴 것이라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음.”

엘리엇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틸다는 오늘 비번이 아니지?”

“긴급사태이니까요.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근무 중입니다.”

“그럼 이 뒤의 스케줄은 마틸다에게 인계하고 자네는 내 대리로서 모건 스탠리로 가게.”

“합하.”

롱펠로우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헤리퍼드에 근속한 지 이제 7년 차로서, 스스로 유능하다고 자부하기는 했으나 아직 엘리엇의 대리를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미 마음을 결정한 듯 담담하게 덧붙였다.

“카일에게 사정은 대부분 말해 뒀으니 자네가 가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네. 내가 자네를 보내는 것은, 지난 며칠 동안 자네가 내 옆에 붙어 있었으므로 내 뜻을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네. 자신 없는가?”

“아닙니다.”

롱펠로우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큰 기회였다. 믿어 주는 주인에게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때인데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가서 특별히 할 일은 없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실수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평연한 얼굴로 “맡기겠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심경이 결코 평온하지 않으련만 티끌만큼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롱펠로우는 “큰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다시 한번 고개를 깊게 숙였다.

시급히 마틸다에게 인계받으러 오라고 전화하고 그는 엘리엇에게 나머지 보고를 마쳤다.

“합하께서 각의에 참석하신 사이에 코트디부아르의 부통령이 입국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외무부에 파악된 입국자의 명단입니다.”

그가 태블릿 PC를 건네주었다. 엘리엇은 명단을 훑어보았다. 러시아 육군의 미하일로바 중장, 미국 존슨 CIA 부국장, 프랑스의 그린 대외 안보총국장, 중국의 국가안전부 진 차관, 일본의 우에노 정보본부장, UAE의 알 데예야 중앙정보국 부국장이 주요 인사들이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사는 각각 회합에 참석하겠지만, 적대적 의사는 절대 없노라고 미리 이쪽에 전달해 왔다.

지금 막 입국했다는 코트디부아르의 부통령 셰이크 그라델은 아직은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코트디부아르의 정보력이 거기에까지 닿았으리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코트디부아르의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타 파닌 칼루의 성향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결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리라.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나흘째 하루에 2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졸리지는 않았지만 눈 안쪽이 뻑뻑하여 뜨고 있기 쉽지 않았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이제 슬슬 물리적인 한계가 다가왔다.

“차가운 안대를 드릴까요?”

“음. 됐네. 기분이 좋아지면 잠들어 버릴 것 같으니. 일단 외무부에 갔다가,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쉬도록 하지.”

“예.”

롱펠로우가 공손히 대답하고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누군가가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 앤드류였다.

엘리엇은 창을 내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각의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을 터인데 앤드류가 왜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

“타면 안 돼?”

“안 될 거 없지.”

그는 롱펠로우에게 내리라고 눈짓했다. 앤드류의 비서가 차 문을 열었다. 롱펠로우가 서둘러 내린 자리 쪽으로 엘리엇은 옮겨 앉았다.

“무슨 할 이야기라도 남았어?”

“콕스 경에게 맡기고 나왔어. 널 혼자 보내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앤드류.”

엘리엇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앤드류는 비록 실질적으로 발언하거나 국정에 간섭하는 일은 없지만, 언제나 참관인으로서 각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곤 했다.

“이번에 이례적인 사태 때문이라고는 해도 이미 너무 많이 관여해 버렸기도 하고. 이쯤에서 슬슬 발을 빼야지.”

“그렇군.”

단순히 각의를 소집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비상대권을 발령했다. 게다가 왕실의 권한으로 모든 자료를 모아들이고 주재자가 되어 각의를 진행시키고, 엘리엇이 내세운 처형권에 대해서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처형권은 헤리퍼드가 가진 권리로서 정부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구시대의 권리로서, 이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왕정 시대의 잔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한 사람의 기본권에 대한 권리를 귀족이 주장하고 왕세자가 승인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것쯤은 둘 다 알고 있다. 비밀리에 처리했으면 또 모르되 각의에 정식으로 올려 요구했다면, 설령 그 목적이 당사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쉽사리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각료들이 자기 기억의 공백과 정보 없이 밀어닥치는 막막함을 다 소화하지 못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뭐어, 그래도 간만에 사람 소집도 해 보고 나서서 이야기도 하니까 뭔가 시원하기도 하고 그래. 네게는 미안하지만.”

“아니.”

엘리엇으로서는 알 길 없는 감상이었다. 단지 그늘에서의 힘은 어떻든 겉으로는 늘 군림할 뿐인 왕세자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앤드류가 공개적으로 처형권을 승인해 주고, 그 밖에도 여러모로 정보를 몰아 주고 도와주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을 하려고 생각했지만, 입매가 일그러진 채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맙다, 수고했다, 인사말은 언제나 습관처럼 입에 익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앤드류가 빙긋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고맙다고 말 안 해도 돼, 엘리엇. 면책권을 주고, 장관이나 총리도 자기가 대신 책임을 져서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재야. 내 입장에서 알버트의 바람처럼 SSB에서 포섭해서 왕실의 충신으로 만드는 것보다 좋지는 않겠지만, 네가 꽉 붙들어 주고 있는 것도 좋지. 네가 충성과 신의를 보여 주는 이상 안심할 수 있으니까.”

“그렇군…….”

“현실적으로도 그래. 콕스 경과 베넷 경이 무능하다는 건 아니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탐욕스러운 자들을 물리치는 것은 네가 훨씬 잘할 거잖아.”

“……염려할 것 없어. 션은 내가 지킬 거니까. 그리고 헤리퍼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튜더의 우군이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거야.”

어쩐지 당혹스러워져서 엘리엇은 조금 그를 외면한 채로 중얼거렸다. 원래 하려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했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종종 션을 상대로 그랬었던 것처럼 말이다.

앤드류는 미소를 지었다.

“변했구나. 사실 지금까지 보면서도 믿지는 않았는데.”

“내가 뭘?”

“아니. 지금 쪽이 좋아. 그래.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조금 더 우리를 신뢰하도록 해. 알이 입으로는 이러고저러고 하지만 그 애는 너를 좋아하고, 나 역시 언제나 너의 벗일 테니까. 네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엘리엇이 가문 대 가문으로서 한 말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홀로 헤리퍼드인 엘리엇과 달리 앤드류에게는 형제와 아들, 숙부들이 있었다. 곧 엘리엇이 앤드류의 우군이라는 말이 헤리퍼드가 튜더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말이 되는 것과 달리, 앤드류가 엘리엇의 벗이라는 것은 튜더가 헤리퍼드를 지켜준다는 것과 동치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감각이 퍼져서 마치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물속에 발을 담근 것처럼 발바닥이 간지러워진다.

차가 이내 외무부 건물 앞에 섰다. 뒤따라온 경호팀이 내리고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앤드류가 먼저 내리고, 엘리엇은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어지간히들 빨리도, 많이도 모여들었어. 장관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절대로 알은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SSB의 기밀 유지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는 거지. 내 생각에는 행정력이 정지한 만큼 오히려 외국에 정보가 흘러나가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러고 보니 알은 괜찮지?”

엘리엇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상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알버트는 타인의 능력을 경시하고 무슨 일이든 자기 손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다. 징계를 청하더라도 근신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사태 수습을 위해 뛰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정신에 상처를 입거나 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네가 걱정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야. 그냥 좀 많이 지친 것 같더라고. 후회도 하고. 혼자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징계를 핑계로 해서라도 당분간 쉬게 할 셈이야.”

“그렇군.”

“여유가 생기면 한 번 만나 줘.”

“글쎄. 알이 환영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애는 너를 좋아하잖아. 그나저나 내가 무슨 도움이나 되긴 할지 모르겠군. 말이 좋아 왕세자이지, 무슨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니.”

“겸손이 지나치군. 정통성이 있는 나라의 대표라는 것으로 충분해.”

둘은 외무부에서 가장 큰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대부분 비정상적인 방문이고, 참석자 전원이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회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실무진들이 쓰는 회의실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왕세자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하여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엇은 찬찬히 면면을 훑어보았다. SSB에서 어떤 경로로 이들이 진상을 알아냈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터이지만, 그 과정은 엘리엇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그는 가볍게 사람들과 묵례를 나누고 착석했다.

“왕세자 전하께서 이런 자리에 참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존슨 부국장이 포문을 열었다. 앤드류는 예의 차분히 달래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국 대표의 모임이 아니었소? 우리 런던과 우리 국민의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빠질 수는 없지 않소.”

“GFG 능력자의 이야기입니다. 당사자도, 전문가도, 정보 제공자도, 영국의 실권자도 아닌 왕실의 대표가 참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옐레나 미하일로바가 말했다. 엘리엇이 대꾸했다.

“그거야말로 놀랍군요, 미하일로바 중장. 이것은 우리나라의 일이지, 러시아와는 하등 상관도 없을 텐데 당사자도, 전문가도, 정보 제공자도, 영국의 실권자도 아닌 중장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니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자리에, 아니, 이 나라에, 유럽 전역을 다 합쳐도 저만큼의 ‘전문가’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언터쳐블의 멤버는 상호 불가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엘리엇에게 호의를 보이겠다고 약속한 오스트리아의 드라고비치 대사가 의뭉스럽게 물었다. 옐레나가 날카롭게 웃었다.

“지금은 언터쳐블의 ‘건축가’가 아니라 러시아 대표로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말이 안 되지 않소. 이것은 영국의 일이오. 런던이 설령 멸망했다 해도, 역시 영국의 일이지. 이건 내정간섭이오.”

“이게 어떻게 영국만의 일입니까!”

앤드류의 말에 그린 대외 안보총국장이 벌떡 일어섰다.

“자기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 조작계 상위 능력자가 어떤 재앙인지 이 자리에서 모르시는 분은 아무도 없을 터! 이번에는 운이 좋아 런던에서 끝났다지만,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우리 프랑스로서는 절대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린 국장.”

엘리엇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재앙이 통제되었음은 보시는 바대로요.”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헤리퍼드 합하. 일시적으로 파워가 고갈되어 폭주가 멈추었다 해도, 봉인하지 않는 한 제어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GFG는 반드시 다시 폭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U급의 파워를 일부라도 봉인할 수 있는 능력자는 전 세계를 뒤져 봐도 없지요. 이번에 실패한 이상 영국이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추측합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옐레나 미하일로바와 오스트리아, UAE,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표를 제외하고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동의했다. 엘리엇은 사람들의 얼굴을 차근히 살폈다. 알 데예야 부국장은 아마도 자국으로부터 상황을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고, 옐레나는 신중해지기로 결정한 듯하다. 사실 본인이 U급 능력자이면서 이곳까지 직접 달려온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언터쳐블의 규약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제재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엘리엇은 모두가 동의한다는 말을 끝낸 후에 물었다.

“그래서, 존슨 부국장은 어떻게 하고 싶다는 뜻인가?”

“이 자리에서 제가 특별한 제안을 내놓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고,”

그가 옐레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원론을 말하자면, 신뢰가 있는 여러 국가에서 대표성 있는 사람을 뽑아 단체를 만들고 만약의 경우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곳에 장소를 마련하여 보호 조치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실로 놀라운 복안이로군. 멀쩡하게 자유의사가 있는, 자기 능력을 통제 가능한 자국민을 상위급의 GFG 능력자라는 이유만으로 내놓아라?”

“그가 자유의사가 있고 능력 통제가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 직접 나오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린 국장이 맞받았다. U급 능력자를 통제, 실험하는 것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하고 있는 존슨과 달리 그린은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런던은 프랑스에서 결코 멀지 않다.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고 해도 거리는 미미하다. 지금에야 처음으로 션의 정보를 얻고, 출입국 기록을 통해 그가 종종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고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설마 존슨 씨는 그 대표성 있는 나라라는 것이 미국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진 차관이 끼어들었다.

“확실하게 말해 둡니다만, U급 능력자 션 맥케인의 보호관찰을 미국에서 하겠다는 것에 우리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앞으로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개인인 헤리퍼드 공작의 사저가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실 거라 믿습니다.”

존슨은 그와 신경전을 하는 대신에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시선을 돌려 그린과 옐레나를 쳐다보았다. 이중 어디까지가 옐레나, 혹은 중국이 보유한 U급 능력자와 이야기된 사항일까. 무표정한 채로 그는 좌중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시간이 한 일이든 내가 한 일이든, 현재 런던은 안전하며 그 방법이 여러분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만은 명확히 하겠소. 그는 현재 나의 보호 아래 있으며,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그를 제어할 수단이 있다고 보증합니다. 이 말에 틀린 점이 있을 경우 무제한 책임을 지도록 하지요.”

“말로 하는 보증, 말로 하는 책임을 누군들 지지 못 하겠습니까? 물론, 합하 같은 분께서 함부로 말씀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어디까지나 사인의 신분이면서도 GFG 연구소 같은 것을 운영하고 있고, 반대로 영국법을 유명무실하게도 만들 수 있는 분인 줄을 뻔히 아는데, 의지할 곳 없는 능력자의 권리를 과연 온전히 지켜 주실 수 있을지 의문이 있습니다. 유혹이란 무거운 것이니까 말입니다.”

알 데예야가 말했다.

“말로 하는 보증을 믿을 수 없다면 담보라도 걸어야 하겠소?”

엘리엇은 평온하게 말했다.

“사실 미하일로바 중장이나 진 차관은 내 말이라든가 약속 같은 것보다 3천 톤의 금괴에 더 관심이 있을 듯한데.”

삽시간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앤드류마저 말이다.

“엘리엇.”

목소리를 매우 낮추었지만, 회의실은 지나치게 조용했기 때문에 우렁우렁 울렸다.

엘리엇은 지금 실수를 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소리가 다 들렸기 때문에 말하지는 못했다. 엘리엇의 자산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앤드류도 다 알고 있지 못했다. 그 발언은 앤드류에게도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지나친 발언을 했다. 도발이 지나치다. 또한 공개한 정보가 지나치다. 그가 부유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영국의 기간산업과 유럽의 에너지 사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그가 그 정도의 현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무제한 책임이라는 것까지는 아직 수사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3천 톤의 금괴를 말하면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된다.

“무제한이라면, 그것을 내놓기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진 차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 양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의 두 배에 가깝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엇이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강탈할 힘과 명분이 생긴다면 가져갈 만한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오. 무제한이라 함은 목숨까지 포함하는 것인데, 설마 돈을 아낄까?”

그것은 도발이며 이간질이고, 협박이기도 했다. 금괴 3천 톤이 한 나라의 경제를 향해 저지를 수 있는 일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엘리엇은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는다.

‘엘리엇은 비합리적인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형님, 엘리엇의 과격한 발언이 수단일 뿐이고 사실은 모든 일에 온건한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까지 그래 왔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그 녀석은 지금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겁니다. 말 그대로 무엇이라도. 그걸 적절한 선에서 멈춰 줘야 합니다. 그 녀석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상태를 겪은 일이 없으니까, 맹목적이 되어 버리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돼요.’

알버트가 지친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앤드류는 엘리엇이 처형권에 대해 말했을 때 그것이 알버트가 말한 ‘비합리적인 상태 때문에 저지르는 맹목’이라고 생각했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앤드류가 처리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염려라든가 정치적인 고려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순수하게 형의 입장으로서 다소나마 귀엽게까지도 생각했었다. 그렇게까지 원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앤드류는 엘리엇이 비합리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알버트의 말을 진짜로 이해했다.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이런 과격한 말을 했을 리 없다. 개인으로서 국가 경제에 도발을 걸다니 터무니없다. 3천 톤의 금괴 같은 것은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

그만하라는 뜻으로 그는 엘리엇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분명히 보았을 텐데도, 엘리엇은 동요하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한 것을 내가 걸었으니 강탈해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각오를 해야 할 거요.”

우에노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허언이 분명하오! 그렇게 말하여 공작께서는 U급 GFG라는 보물을 독점할 생각이 아닙니까!”

“조금 전에는 재앙이라 하지 않았소?”

엘리엇의 말투에는 억양이 전혀 없고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우에노 본부장의 말이 헛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만, 그의 말에는 한 가지 유념할 만한 점이 있군요.”

옐레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만큼이나 가지려고 하는 대상이라면, 그녀가 애초에 생각한 것보다 더한 능력자가 틀림없다 싶었다. 그녀는 본국의 반대를 감수하고 여기에 와 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 같아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공작, 공작은 션 맥케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법률상의 배우자가 아닌 것은 물론, 사실혼 관계도 아니고 약혼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가 재앙이든 보물이든 관여할 이유가 없지요. 차라리 왕세자 전하라면 형식상으로나마 자국민 보호라는 그럴듯한 이유나 있겠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그의 보호자나 대리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의 후견인이었던 알 아시리 쪽이 맞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작은 녹음기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재생하자 안에서는 나직하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우리는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션의 가까운 친척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생각입니다. 언제든지 환영할 거예요. 그러니 듣고 있다면 야히아, 이제 돌아왔으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반대하시지 못해.」

거기까지 듣고 옐레나는 녹음기를 껐다.

“알 아시리의 에미르 자인이 발언한 겁니다. 지금은 녹음기로만 들려드렸지만, 영상으로도 녹화되어 있으며, 물론 직접 연락해서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이것에는 확실히 엘리엇도 놀랐다. 고작해야 이틀 만에 상 중일 알 아시리에 가서 모종의 계획이라도 짜고 온 건가. 옐레나의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알 아시리가 그에 굴복했을 리는 없으니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션에 대한 지분을 분할하기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답답해졌다.

“션은 성인입니다. 중장은 10년도 더 전에 신세를 졌던 후견인이 그의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작정입니까?”

“설마요. 그가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라면 누가 법정대리인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누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가져온 것뿐입니다. 공작께서는 그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계시는 입장이니 일어서실 이유는 없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같은 GFG 능력자로서 힘이 없을 때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군요.”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공작께서는 아주 잘 보살펴 주고 계시겠지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앤드류는 몹시 지친 기분이 되었지만, 억지로 미소 띤 얼굴로 마치 긍정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곳에서 애인의 보살핌을 받는 것보다 마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편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때였다. 밖에서 들어온 비서가 앤드류에게 작게 접은 쪽지를 건넸다. 앤드류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게 했다.

“방문객이 있는데 입실시켜야 할 것 같군.”

“누구입니까?”

우에노가 묻자마자 앤드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비서며 부관이 쪽지를 전달했다. 엘리엇에게도 있었다. 롱펠로우가 가져온 쪽지에 적힌 것은 맥 마셜이 영국에 입국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모두 자기 라인을 통해 그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맥은 이번 회합에 참석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졌다. 아니, 회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이상하다. 사건이 터지고 그 바로 다음 날부터 정보를 알아낸 나라에서 추궁하기 위해서 대표를 보내오고, 그 숫자가 늘어나자 회의실을 열어 한꺼번에 답변하기로 한 것뿐이니까. 맥 마셜은 런던이 블랙아웃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용기를 띄우거나 대리인을 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니 관망을 선택했다고 다들 생각했다.

뒤늦게 마음이 바뀐 모양이다. 방문객이 맥이라고 생각했으나 들어온 것은 50대 중반의 갈색 머리 남자였다. 그는 KH47의 비서실장으로, 오래된 맥 마셜의 그림자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앤드류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절하고, 그다음에는 엘리엇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충분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헤리퍼드 합하. 저희 사장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중요한 자리인 줄 알면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직접 오지 않으신 이유가 있겠지. 말해 보게.”

“딱히 참석할 자리가 아닌 듯하니 그냥 션 맥케인 님의 문병을 할 겸 합하의 저택으로 바로 방문하고 싶으시다고 여쭈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친구의 집이라고 하지만 사전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요.”

신중치 못하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몇 군데서나 났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문안을 거절할 리 있겠는가. 션도 기뻐할 걸세. 런던에 체류하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시키지.”

“감사합니다. 합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남자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정말로 방문 의사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을 리 없다. 중요한 것은 맥 마셜이 션이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곳을 친구의 집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에 있다.

간접적으로 지지를 표시하는 것은 오히려 이 자리에 참석하여 편을 들어 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맥이 사실상 미 육군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미국이 이쪽 손을 들어 준다면 러시아나 중국이라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고, 더군다나 맥 마셜 본인이 U급 능력자였다.

웅성거리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명확하게 뭐가 결정되지는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대다수는 상황을 보러 오고 둘러서 압박을 줄 정도의 뜻으로 온 것이다. 그린이나 진, 알 데예야처럼 전권 대리인이라고 말한 경우에도 헤리퍼드와 영국의 태도에 따른 방침의 가이드 라인에 따라 부분적인 권한을 가진 정도이다.

미국, 특히 맥 마셜과 적대해도 될지 어떨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존슨의 경우 심지어 자국 내에서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당해 버렸고 말이다. 사실상 이 자리에서 진짜 전권을 가진 자는 옐레나 미하일로바와 진차오밍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이상 적대하지 않는 쪽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맥 마셜을 적으로 돌리느냐의 문제 역시 중차대한 것이지만, 그의 스탠스를 보고 션이 자기 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미리 약속된 대로 언터쳐블의 멤버이며, 자신은 규약을 지켜야 한다. 지금 그녀가 와서 엘리엇을 찔러 본 것은, 이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 션이 결코 제 파워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최소한 판단 능력이 극도로 취약해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 나름 경험적인 판단에 의거한 것이다.

약점이 있는 동안에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단 헤리퍼드로부터 신병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그 뒤의 문제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맥을 위시하여 언터쳐블의 다른 멤버들이 좋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U급 GFG를 수중에 넣었을 때의 이득을 생각하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맥이 저렇게 나온다면 문제는 다르다. 정보력에 있어서 절대로 자신이 그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옐레나는 인정하고 있다. 맥이 U급 능력자를 탐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물러나 ‘친구’ 같은 물렁하고 다정한 단어로 원호하는 것은 그가 션 맥케인을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손에 넣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옐레나가 아는 한 지금까지 맥에게 그만큼 존중받은 이는 ‘명명자’ 마를린과 ‘나그네’ 탭, ‘신의 망치’ 이토뿐이다. 그들 사이에서 그 세 사람이 가지는 위치를 생각하면 옐레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토의 경우 그 능력의 특수성이, 마를린의 경우 함께 보내온 연월이 그 존중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신참자인 션이 그들만큼 존중받는다는 것은 그 힘의 크기와 위력을 짐작하게 한다.

‘드림 워커의 재래인가.’

옐레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혼자 몸으로 연합군을 거의 괴멸에 몰아넣었던 절대자의 이명을 떠올렸다. 그자는 북반구 전역을 GFG의 사정거리에 넣고 있었고, 자신의 벙커 안에 들어앉은 채 잠드는 자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다. 당시 연합국의 핵심 인사들은 각성제를 사탕처럼 씹으며 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었다.

강대한 자이니 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지금까지 언터쳐블이 불가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절대자가 도래하는 것은 결코 반갑지 않다.

드림 워커 때보다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당시에는 전쟁 중이었다. 연합군의 U급 능력자 9명이 동맹을 맺고 습격하는 일에 도의적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옐레나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안도하고 있는지, 화를 내고 있는지, 혹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걱정하고 있는지, 흰 돌을 주물러 만든 듯한 얼굴에서는 읽어 낼 길이 없다.

그가 션 맥케인을 격리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본인의 말처럼 보호하고 있다면,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예 파고들 틈이 없으리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기간 시설과 에너지를 양손에 쥐고 금괴를 깔고 앉은 부호를 합법적으로 건드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자국 내에서라면 또 모를까, 영국에서라면 더더욱.

‘칼루, 장과 의논해 봐야겠군.’

그녀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 자리에서 압박을 주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힐긋 그라델을 바라본다. 텔레파시로 간략히 생각을 전달하자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녀는 진 차관과 존슨 부국장에게도 같은 뜻을 전달하고는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합하. 내각회의 때문에 피곤하실 터인데 저희가 실례를 했군요.”

앤드류가 조소의 모양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나 엘리엇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어서 심동이 있는지 없는지 조금도 알 수 없다. 계교를 즐기거나 알기 어렵게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도 아닌데 상대하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옐레나가 잘하는, 상대의 뇌를 GFG로 가볍게 두드려 그 진동에 의해 격동시키는 수법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던져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저녁쯤에는 저도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마셜과 만난 지도 오래되었고, 같은 정신계 GFG 능력자로서 맥케인 씨에게는 선배가 되는 입장이니 말입니다.”

“정신 조작계와 텔레파시스트는 전혀 계열이 다르지요.”

엘리엇이 느릿하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아직 병석에 있으니 새로운 사람과 친교를 맺기 어렵습니다.”

그가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게 눈을 가늘게 했다. 그러나 역시 감정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이라 옐레나로서는 그가 거절에 포인트를 둔 것인지, 자신이 보호자라는 말에 근거를 두기 위해 위선적인 걱정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걱정이 되어 그러는 수도 있기는 했다. 사진 너머로 본 션 맥케인의 미모와 기록된 능력의 종류를 생각하면, 쓸모와 아무 상관 없이 남색가 하나가 넋을 놓고 미친 사람처럼 굴기에는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내일을 기약하고 회합은 폐회되었다. 옐레나가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 다급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각하.”

“에미르 자인과 자리를 마련해. 그리고 공작의 약점을 찾아야겠어. JK는 여전히 헤리퍼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나?”

“그전에 받아 보셔야 할 전화가 있습니다.”

부관이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옐레나는 당황하며 그 전화를 받았다.

「돌아오세요, 옐레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옐레나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동지인 가스프롬의 샤로노프 회장이었다.

「헤리퍼드가 터키 스트림 가스관에 투자 규모를 세 배까지 늘릴 용의가 있다고 제안해 왔습니다.」

“네?”

「이것은 놀라운 제안입니다. 옐레나, 단번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금 경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차피 지분을 인정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외국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주느니 국채 발행이 낫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투자 계획이라는 게 그렇게 단시간에 결정되는 것도 아닐 텐데.”

「헤리퍼드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어차피 BO를 통해서라도 일정 부분 유치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는 국제 석유 메이저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자입니다.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거의 그의 수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유럽의 에너지 시장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절대로 경쟁 상대로 돌려서는 안 돼요.」

“샤로노프 회장님, 하지만 U급 GFG는…….”

「끝까지 들으세요. 만약에 우리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헤리퍼드는 아예 투자를 중단할 겁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텡기스와 ACG에서 석윳값을 지금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려는 계획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것을 BO와 쉐브론이 받아들일 리가…….”

「ACG에서 BO와 페트로 피나가 가진 지분을 합치면 53%에 이릅니다. 그리고 BO의 최대 주주이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화이트 포인트는 헤리퍼드 공작의 자산 운용 기관입니다. 화이트 포인트는 동시에 페트로 피나의 지분 38%를 소유하고 있고, 공작 자신이 사외 이사로서 이사회에 소속되어 있어요. 쉐브론에서 41%의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모건 스탠리의 경영권을 행사하는 카일 스탠리는 헤리퍼드 공작의 절친한 친구이며, 공작 본인이 BO를 통하여 6%를 더 행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손해날 게 없는 제안이죠. BTC 파이프라인의 사용료를 할인받는 것만으로도 메꿀 수 있을 테니까요. BTC의 최대 주주 역시 BO이며, BO에서 화이트 포인트가 배당받아야 할 이익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할인을 선택하면 우리는 최소한 반년 이상 유럽 시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샤로노프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헤리퍼드가 치킨 레이스를 시작해 버리면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옐레나. 가스프롬이 유동성 문제로 부도가 날 거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원했던 투자 유치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편이 낫습니다.」

옐레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쓸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U급 GFG가 문제가 아니라며 샤로노프 회장은 그녀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뒷일은 외무부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돌아오세요.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지금은 공작의 마음을 사야 할 때입니다.」

본국에서는 이미 결정이 끝난 듯했다. 옐레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복도에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거나 시뻘겋게 물든 자들이 각자 전화통을 붙잡은 채 우글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몇 시간 사이에 각자의 상황이 바뀐 모양이다. 아마 공작은 오늘의 회합이 있기 전에 미리 모든 일을 준비했으리라. 시간이 촉박하여 그것이 이제야 당도한 것이다. 그가 시종 무표정하고 여유로웠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이것은 과시이다. 자기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일이 틀어질 경우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눌러 버리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그런 시대가 아니다. 영국에서 그가 가진 위치를 생각하면 무력 시위도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맥 마셜이 끼어들었으니.

뒤늦게야 회의실에서 나온 앤드류 왕세자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당혹한 표정을 했다. 기분 탓인지 그의 얼굴도 창백한 것 같다. 나란히 걷는 헤리퍼드 공작의 얼굴에는 놀랄 만큼 아무것도 없다. 만족감, 불안감, 혹은 자기 힘에 대한 도취조차도.

그는 평범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떠났다.

* * *

귀가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외무부에서 나오면 바로 귀가해서 쉬려고 생각했지만, 뒤이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저녁 전에 돌아왔지만,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라 정원에는 벌써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유 도로로 들어서자 평소와 달리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둘씩 짝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순찰을 도는 KH47의 용병들이리라. 타운 하우스 내부에서는 맥이 머물 동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경호원을 들일 수가 없으니 아예 외곽 지역에서 멀찍이 살피는 모양이다. 사실 이쪽도 사유지이므로 보안부의 허가 없이 아무나 드나들 수 없지만, 경호원의 대다수를 타운 하우스에 집중시켜 배치한 지금으로서는 막을 방법도 없다. 말이 사유지이지,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지역도 아니니 공공도로나 다름없었다. 

사실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맥 마셜은 경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를 물리적으로 해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엄중한 경계 태세는 맥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헤리퍼드 보안부의 약점을 보조하여 타운 하우스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함이 옳았다.

차는 본관 앞에 섰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애쉬튼이 나와 그를 마중하고, 모자와 겉옷을 벗겼다. 보안부 차장인 웨스너가 다가와 허리를 구부렸다.

“합하, 급히 보고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셜 씨가 동반한 경호 인력 이야기라면 보고할 필요 없네.”

“그러면…….”

“저쪽 실무진과 이야기해서 인력이 부족한 곳에 보충할 수 있도록 해. 마셜 씨에게는 내가 이야기하겠네.”

엘리엇은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또, 새로운 소식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션 님도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마셜 씨는? 동관에 계신가?”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동관 전체를 비웠고, 체류하시는 동안에는 윌슨이 모시기로 했습니다.”

“데이비드 말고 벤을 보내.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한 데이비드로서는 역부족일 테니.”

그러면서 그는 응접실로 바로 향했다. 션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피곤한 몸에 더해져 팔다리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중요한 손님을 응접실에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조금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시간인데도 건물 안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복도에는 빈틈없이 헤리퍼드의 경호원들이 서 있다. 엘리엇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응접실로 향했다. 애쉬튼이 문을 열었다.

맥 마셜은 소파에 걸터앉아서 도감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일어서는 동작은 반보쯤 늦다. 사교계의 까다로운 눈과 입들이 오만하다는 평을 내릴까 말까 하는 딱 그 경계선에 놓인 태도였다. 그리고 그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좀 더 예의 없이 굴었어도 지금이라면 엘리엇은 주저 없이 감사의 인사를 할 것이었다.

테이블에 반쯤 빈 티 세트가 있었다.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동관에서 편히 계셔도 되었을 것을. 기다리셨습니까?”

“신세 지는 입장에서 당연히 집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친절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저야말로 감사를 해야 마땅합니다.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바깥에 경호원을 두셨더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악수를 하려 손을 잡고서 엘리엇은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맥이 “하하.” 하고 웃었다.

“큰 거래에는 원래 사은품이 따르는 법이니 신경 쓰지 마시구려. 그런데, 원래는 선물을 준 게 아니라 빚을 지우러 왔는데 인사를 받아 버리면 이자를 비싸게 매기기 뭐하잖소.”

“당연히 지불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리고 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션과 저 자신밖에 없지요.”

“그럼 빚은 좀 묵혀 두기로 할까. 원금이 크면 이자도 커지고.”

맥이 빙그레 웃었다. 엘리엇은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이것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에는 우열이 생겼지만 상관없었다. 이것으로서 그가 갖지 못한 마지막 조각―무력―이 채워졌다.

이번에 가장 염려한 게 타운 하우스의 안전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한 경호 인력을 끌어다가 집 안팎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션을 이 집에서도 가장 안전한 자신의 침실에 눕히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신경을 쓴다고 해도 준형이 심심하면 들락거릴 수 있는 수준의 보안을 갑자기 극적으로 끌어 올릴 수는 없다. 경호원이라고 해도 모두 믿기는 어렵다. 풋맨이라든가 메이드, 요리사 같은 일반 고용인을 대부분 집에 들이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보안부나 비서부에도 스파이는 숨어 있을 터이고 경호원들 중에도 매수되거나 다른 설득에 의하여 마음을 바꾸는 자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간신히 행정력이 돌아오고 있는 런던의 치안은 지금 결코 안전하다고도 할 수 없는 데다가 테러설까지 퍼지고 있다. 타운 하우스를 무력으로 깨부순 후에 션을 납치해 버리고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고 주장해 버리면 엘리엇으로서는 손쓸 수가 없다.

맥의 체류는 그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준다. 그가 데려온 용병 몇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감히 맥 마셜이 머무르는 ‘친구의 집’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옐레나 미하일로바가 U급 GFG 능력자라고는 하지만, 국지적인 범위에서 행사할 수 있는 폭력에 있어서는 감히 맥에게 근접할 수조차 없었다.

“션은 어떻소?”

“자고 있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불안하시오?”

맥이 미소하며 물었다. 엘리엇은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불안한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잠들어 있으면 불의의 사태에 대처할 수가 없으니까요. 빨리 깨어나 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뭐, 그것도 맞는 말이오. 그런데, 미하일로바는 순순히 물러나더이까?”

“사실 마셜 씨의 전언이 아니었으면 꽤 곤란할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영 대응할 수 없는 상대는 아니니까요. 준비는 여러 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소? 하긴, 공작처럼 인맥과 연줄을 가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집단 전체를 상대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지. 하지만 중국과 코트디부아르는 꽤 까다로울 텐데.”

“맞는 말씀입니다. 그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었기 때문에 아무런 인맥도 갖고 있지 못하고요.”

“칼루는 욕심이 많아서 말이오. 땅속에 있는 것이든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남과 나누지 않으니까. 염려는 하지 마시오. 션이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안 되려고?”

“언터쳐블의 규약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저 녀석이 깨어나기까지가 모든 사람의 제한 시간이니까. 안에서도 시끌시끌하겠지만, 그건 잘 처리하시겠지.”

그렇게 말하고 맥은 기지개를 켰다.

“그럼 주인에게 인사도 했으니 이만 물러가 볼까. 시차 때문에 여엉 피곤해서.”

신체 강화계 능력자가 시차 같은 것으로 맥을 못 추는 일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사흘 전에 카이루완에 갔다가 소식을 듣고 바로 왔다오. 자인, 괘씸한 그놈이 붙들고 있는 바람에 오늘 오전이나 되어서야 이쪽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미하일로바와 손을 잡고 수작을 부리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회합에 의도적으로 늦은 게 아니라 정말로 소식이 늦었던 모양이다. 엘리엇은 조금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맥은 교우관계가 넓은 사람이다. 친구의 목록에 미란 알 아시리가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몰랐다.

“에미르 미란의 장례식에 가셨습니까?”

“장례식은 못 봤소. 성묘만 하고, 추모예배에 참석하고, 사람들 좀 만나고, 그랬지. 젊어서 좀 알고 지내던 거고 사실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어서……. 그래도 아주 특별한 친구였다오.”

“그러셨군요. ……애통하시겠습니다.”

“내가 유가족도 아닌걸. 여하튼 그쪽에 다녀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션을 보내서는 안 되오. 늘그막에 노망이 나서 마지막 유서에는 헛소리밖에 없었지만, 절대로 알 아시리의 혈육과 션을 만나지 않게 하고 싶다는 게 평생 미란의 결심이었소. 션이 충격받는 꼴을 보니 혹시 옛날 약속을 어길까 봐 염려가 되어서 공작에게 말씀드리는 거요. 게다가 자인은 션의 ‘생존자’요. 멀쩡한 척해도.”

그가 빈정거리는 얼굴로 머리 옆에 손가락으로 원을 한 바퀴 그려 보였다. 엘리엇은 점잖게 그것을 못 본 것으로 하고 물었다.

“영국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음. 한도 끝도 없이 있을 수는 없고, 길어도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다오. 설마 그 안에는 깨어나겠지.”

“알겠습니다. 아마 저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자주 뵙지 못하겠습니다만, 계시는 동안 편안히 지내십시오.”

“고맙소.”

그럼 가 볼까, 하고 맥이 응접실을 나서려다가 “아.” 하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이 집 총집사 말이오.”

“예?”

“아끼시구려. 그 나이에 자식에 손자까지 달린 사람이 목을 걸고 나 같은 사람 막는 거 쉬운 일이 아니라오. 사람이라는 게 보통 몸이 약해지면 자연 용기도 없어지기 마련이거든.”

그가 싱글거리며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엘리엇은 잠시 혼자 선 채로 그가 말한 것을 한차례 되새겼다. 이면의 뜻은 없는가, 이것은 어느 정도의 빚인가.

에미르 자인은 ‘생존자’이다, 션을 카이루완에 보내서는 안 된다. 우선 그 두 개를 향후의 방침으로서 유념하고, 그가 아타 파닌 칼루와 옐레나 미하일로바에게 보이는 적의에 대해서 기억한다. 이유는 어쨌든 맥과 손을 잡았으니, 그 두 사람과는 이제 적이었다.

맥이 펼쳐 놓고 간 도감을 보자 타운 하우스의 역사에 대해 편찬되어 있는 책자였다. 그는 그것을 덮어 놓고 응접실에서 나와서 침실로 향했다.

침실이 있는 복도에는 경호원이 별로 없다. 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적은 수의 사람으로만 통제하고 있다. 의료 팀 아홉 명이 머무르고 있지만, 그들은 가족과의 연락조차 차단하고, 바깥과 연락하도록 허락한 것은 주치의 리, 보안부장 오스카를 제외하면 윌리엄뿐이다.

필요하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엘리엇으로서는 그나마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의 일이라 스스로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그가 납치되었던 때를 생각해 보면 갓난아이를 맡겨 기르게 할 정도로 완전히 신뢰받은 유모조차도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법이다.

“다녀오셨습니까, 합하?”

복도 끝까지 마중 나온 오스카의 눈 밑이 칙칙하게 물들어 있다. 엘리엇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자네는 가서 쉬게.”

“합하, 지금 상황은…….”

“마셜 씨가 당분간 동관에 머무르시기로 되어 있으니 괜찮아. 자네도, 자네 팀원들도 가서 쉬는 게 좋겠네. 교체할 사람을 부르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서른 명이나 되는 용병을 데려왔다고 하던데.”

“맞네. 일단은 아군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네.”

오스카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맥 마셜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를 논쟁하려면 길고 골치 아픈 이야기가 되겠지만, 엘리엇이 괜찮다면 정말로 괜찮은 것이다. 앞일은 또 어찌 될지 모르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 한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경호원을 교체하고 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섰다. 엘리엇은 성큼성큼 그를 지나쳐서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열자 침대 곁에 앉아 있던 윌리엄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졸고 있었는지 눈가에 조금 눈물이 말라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주인님.”

“앉아 있게. 피곤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곧 비행기를 탈 거니까 가는 길에 하려네. 식욕도 없고.”

“또 나가십니까?”

윌리엄이 조금 원망스럽게 물었다. 엘리엇은 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야드로 갈 걸세. 9시간은 비행해야 하니까 잠도 푹 잘 수 있겠지. 목욕물을 준비해 주게.”

출발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피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하자 윌리엄이 알았다며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엘리엇은 소매와 넥타이를 풀고 침대로 다가갔다. 션은 그의 침대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꿈꾸는 듯 고요한 얼굴이다. 맥박은 확실하고 가만히 바라보면 호흡으로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도 확인할 수 있지만, 링거며 무슨 검사 장치며, 잔뜩 머리와 가슴에 붙어 있는 줄들을 보면 많이 아픈 사람 같아서 몹시 불안해진다. 최고의 의사 아홉 명이 검사 결과 아무 이상 없이 그저 자고 있는 것뿐이라고 보장했어도 말이다. 그것이 비이성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엘리엇도 알았다.

침대가에 앉아 그는 손등으로 가만히 션의 뺨을 쓸었다. 문득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었을 때 션이 다녀갔었더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어떤 기분으로 그는 자신을 보고, 그리고 일어서서 등을 돌렸던 걸까. 엘리엇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자면 깨어나리라는 확답을 받고, 이렇게 제 품에 넣어 지키고 있어도 숨이 막히는데. 대체 어떤 기분으로 혼자서 로테르담의 낯선 거리에서, 낯선 방에 틀어박혀 숨을 죽인 채로 견디고 있었을까.

“자네가 무슨 짓을 했어도 나는 용서했을 거야……. 앞으로도 그럴 거라네.”

그는 작은 소리로 잠든 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마치 눈을 감기듯 눈꺼풀을 한 번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됐다고 했는데도 윌리엄은 달콤하고 부드럽게 끓여진 고구마 수프를 미지근하게 식혀서 컵에 담아 왔다. 식욕은 없었지만 한 모금 마셔 보니 공복이었던 듯 배 속에서 흡수하듯이 사라졌다. 따끈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뭔가를 먹고 나자 얼마간 활력이 돌아와, 엘리엇은 비교적 맑은 눈으로 윌리엄에게 엄하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 쉬어.”

“저는 괜찮습니다, 주인님.”

“며칠이나 밤을 새워 가며 자리를 지키지 않았는가. 윌리엄, 오늘은 돌아가 쉬게. 내일모레까지 푹 쉬어도 괜찮아.”

“이 늙은이가 없으면, 누가 션 님을 돌봐 드리겠습니까? 노인은 원래 잠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가 엘리엇의 손에서 수프 컵을 받아 들고 이번에는 작은 그릇에 가득 담긴 블루베리 콩포트를 건네주었다. 찻숟가락까지 받기는 했지만 엘리엇은 애매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이렇게 단것을 전부 먹어도 된다고 허락된 일이 없다. 나이 들어서야 가져오라고 명령하면 요리사가 거역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성인 남자가 이런 것을 먹어도 된다는 인식도 없었거니와 특별히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바쁘고 지칠 때는 당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들어 보세요.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윌리엄이 주름진 얼굴에 다정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엘리엇은 어색한 기분으로 작은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었다. 윌리엄의 말처럼 피곤한 몸에 단맛이 기분 좋게 퍼진다. 그 감각은 거의 쾌감에 가까웠다.

엘리엇은 문득 자신이 이것을 무척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살, 아니, 4살 8개월의 그 납치 사건 이전에. 잔뜩 먹어도 된다고 허락받지 못했던 것이 그 이전의 일이라는 사실도 갑작스럽게 알게 된다. 왜냐하면, 돌아와서부터는 이것이 달콤하고 향긋하다는 것을 느낄 만큼 음식의 맛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먹으라고 받았어도 탐닉하지도, 즐기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좋아한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두 번째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어른이 되어 먹기에는 역시 달았다. 그러나 맛있었다. 맛에 대한 감각마저 잃었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법은 잊었던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도 션의 덕분일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혀와 목의 기쁨을 알게 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이 단맛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을 테니까.

“다음에는 설탕이 조금 적었으면 좋겠어.”

빈 그릇을 윌리엄에게 건네면서 말하자 그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울고 있었다. 엘리엇은 몹시 곤란해졌다. 윌리엄이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거니와, 여자나 아이라면 또 모르되 나이 먹을 만큼 먹은 남자를 달래는 법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심 깊은 노집사에게 자세가 그릇되었다고 꾸짖어 쫓아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네, 피곤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러게 가서 쉬래도.”

“그러게요. 그래야겠습니다. 주책없이 이게 왜 이러는지. 틀림없이 지쳐서 그런 게지요. 암요.”

그가 혼잣말처럼 몇 번이나 중얼거리고는 손수건도 아니라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엘리엇은 오늘은 되었으니 이만 물러가 쉬라고 다시 말하고 욕조 안에서 눈을 감았다.

윌리엄이 뒷걸음으로 욕실에서 물러 나가며 문을 닫았다. 어쩐지 더 피곤해진 기분이 되어 엘리엇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수십 년 동안 윌리엄이 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이게 어쩐 일인가 싶기도 하고, 이것도 션의 GFG가 일으킨 일의 후유증인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엇은 채 20분도 자지 못하고 퍼뜩 눈을 떴다. 몸은 이미 더워져 있었고, 땀까지 조금 났다.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8시 전이다. 공항에 가기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는 욕조에서 나와 정신이 들도록 약간 서늘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실로 나왔다. 고요한 침실에는 션의 심박수와 뇌파를 측정하는 기계만이 소음을 내고 있었다.

핸드폰에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작센 공작 부인 에바였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그녀는 그리스의 공주로서 엘리엇의 이종사촌이었고, 어려서는 꽤 왕래가 있었다. 남편인 작센 공작 빌헬름 에른스트는 바이오산업 분야로 중국에 진출했다. 그쪽에 별반 연줄이라든가 인맥이 없는 엘리엇이 거의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끈이다. 그는 서둘러 발신을 눌렀다.

「안녕, 엘리엇! 방해되는 시간은 아니지?」

“내가 걸었잖아. 받지 못해서 미안해.”

「바쁠 텐데. 아, 하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왔어. 빌리가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연락했어. 류위안창 전인대 위원장이 길길이 날뛰고―날뛰는 척이겠지만― 있다고 하더라고. 진 차관은 장윈핑 부주석의 심복이니까 아마 그쪽에서 독단적으로 나선 것 같아. 중국의 GFG 센터는 장윈핑 라인이고, U급 능력자인 장페이도 이미 영국에 입국해있다는 것 같아.」

“그렇군.”

「류 위원장이 압박해 주겠지만, 돈이 좀 들 거야. 늘 그렇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값싼 거지. 내일 중에 대리인을 보낼게. 빌헬름도 바쁘겠지만 급한 일이니까 잘 부탁해.”

「뭐 어려운 일이라고. 걱정 마. 남편도 너한테 긴한 일로 부탁받았다고 콧대가 높으니까. 나도 솔직히 네가 이렇게까지 무슨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처음 보는걸. 도와달라는 말을 한 것도 처음인 거 알아?」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나만 놀라는 일 아니야. 오는 건 언제 올래? 남편도 그렇지만, 저쪽과도 자리를 한 번 마련해야지.」

“앞으로 사나흘은 리야드에 머무를 거야. 그 뒤에 돌아와서 런던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그쪽에 맞추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보름 후에나 가능할 것 같군.”

「알았어. 이쪽 일은 급한 건 아니니까. 송금만 확실히 된다면 류 위원장은 기꺼이 힘을 쓸 거야. 자리는 나중에 마련해도 되고.」

“돈과 별개로 선물도 몇 가지 준비해 뒀으니 대리인 편으로 보내지.”

「내 것도 있어?」

“잊지 않았으니 염려 마. 장페이가 입국했다는 소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정황증거뿐이라고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면 메일로 보내라고 할게.」

그렇게 통화를 하면서 문득 돌아봤는데, 션이 눈을 뜨고 있었다.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던 에바가 수화기 너머에서 “엘리엇?” 하고 그를 불렀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 에바. 내가 다시 전화하지.”

「아, 응. 기운 내, 엘리엇.」

전화가 끊어지는 것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잘못 보았는가 싶어 다시 확인했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션은 확실히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잘못하여 그를 놀라게 하거나 충격을 줄까 두려워 엘리엇은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션이 눈을 도로 내리감았다가 다시 뜰 때는 조금 더 또렷한 시선이 되어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일부러 느릿한 어조로, 평소보다 조금 더 톤을 낮추어 묻자 전보다 더 깊게 푸르러진 눈동자가 깜박거리며 엘리엇을 향했다.

“엘리엇 씨 방이다…….”

“션.”

“제가, 자고 있는 건 아니죠?”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성대는 모래처럼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다.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션이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꿈이어도, 아니어도, 행복하네요.”

“이제 그만 일어나게. 벌써 닷새나 지났어. 날 얼마나 걱정시킬 셈인가?”

그렇게 말하자 션이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너스 콜이 눈에 띄지 않아서 직접 의사를 불러오려고 엘리엇은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도 나가기 전에 션이 손목을 잡았다.

“아…….”

그도 잡으려고 잡은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잡아 버린 것이므로 당황한 소리를 냈다. 션이 얼굴을 붉히며 “아뇨.”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고 꿈지럭거린다. 그것에 엘리엇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를 미묘한 기쁨과 정말로 괜찮은 것 같다는 안심감을 동시에 느끼며 션의 이마에 한 번 키스해 주었다.

“의사를 불러오려고 그러는 거니 잠깐만 기다리게.”

“저 괜찮아요. 의사까지는…….”

“닷새 동안 의식불명이었으면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엘리엇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팀은 바로 옆방에 대기실을 만들어 쉬고 있었다. 리를 불러 션이 깨어났음을 알리는 찰나에 삐이이 하고 측정기들이 정지를 나타내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심박수 정지, 뇌파 정지를 알리는 소리다. 

리가 펄쩍 뛰어 일어서더니 아홉 명의 의사가 엘리엇을 앞질러 우르르 침실로 달려 들어갔다. 션은 제멋대로 센서와 링거 바늘을 떼어 내고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뻣뻣한 몸을 펴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자네!”

엘리엇은 맨 뒤에서 들어갔다가 제일 먼저 소리를 질렀다. 그의 외침을 들은 의사 두 명이 고용주의 노성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그를 끌고 가 침대에 억지로 앉혔다. 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 함부로 일어서면 되겠는가!”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그냥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아요.”

“그래도 장기간 의식을 잃고 있으셨으니 검사를 해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고명한 의사인 리가 그렇게 말하면 일반인인 션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리가 라이트로 눈동자를 비춰 보고 근육 여기저기를 만져 보는 것에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괜찮다니까요. 체감으로는 하루 정도 잔 것 같은 느낌이고…….”

“체감이 문제가 아닐세.”

“단순히 너무 많은 분량의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바람에 내적으로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에요.”

보통 같으면 자의식이 녹아 버릴 정도로 팽대한 집단의식을 삼켰던 것이다. 중심이 있어 살아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것을 소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난 지금, 오히려 그는 일평생의 그 어느 날보다도 머리가 맑았다. 극적으로 상승한 제어력이 처음으로 GFG를 압도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GFG는 한 올도 몸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균형을 잡아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시각을 흐리게 하는 지각 능력도 완전히 통제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걱정과 염려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엘리엇의 얼굴에 대고 검사를 안 받겠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무사히 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의료기기는 함부로 떼어 내시면 안 되는 겁니다.”

리가 휴우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아홉 명의 의사가 동시에 달려들어 팔다리의 근육을 만져서 감각이 온전한가 확인했다. 악력을 검사하고, 관절이 잘 구부려지는가를 체크한다. 션은 껄끄럽게 웃었다. 아픈 데가 없는데 여러 명의 의사에게 몸을 내맡기고 여기저기 만져지면서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웃어 보세요.”

“네?”

“검사입니다.”

션은 어줍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것도 검사가 맞긴 했는지 누군가가 차트를 적는다.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봐라, 혀 뒤를 눌렀을 때 구역질이 나는지 봐라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리에게 인계된다. 리가 직접 작은 망치로 무릎관절을 톡 두드리면서 물었다.

“두통이 있다거나 달리 어디 불편을 느끼시는 부분은 없습니까?”

“전혀요. 머리는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맑은 편이고, 오래 누워 있어서 허리가 좀 아프긴 하네요. 손가락도 뻣뻣하고.”

“그럼 이제 일어서 보세요.”

그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고는 일자 보행을 시켰다. 다리가 저려서 조금 비틀거리자 엘리엇이 달려올 뻔했지만, 5일 동안 누워 있었던 정도로 근섬유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거의 지장 없었다.

한 시간에 걸쳐 이런저런 검사를 마치고 나서 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신체적인 문제는 일단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신경계와 정신 쪽의 검사는 좀 더 상세히 해 봐야 하겠지만…….”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판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내 깨어나지 않는데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인을 짐작도 할 수가 없으니 더더욱. GFG 능력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정신 조작계 능력자가 간혹 타인과의 정신 접촉 때문에 심력을 소모하여 그러는 경우가 있다는 연구논문을 근거로 하여 엘리엇에게 설명을 하기는 했으나 본인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간신히 불안감이 해소되어 부가적인 검사에 관해 이야기하자 션이 막았다.

“그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리 선생님. 저는 정신 조작계 능력자이니까요.”

“음. 일반적으로 정신 조작계나 텔레파시계의 GFG 능력자는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래도 신경계 검사는 하셔야 합니다.”

“시설을 이곳으로 옮겨 오지.”

“병원 쪽이 낫습니다, 합하. 가져올 수 있는 설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정밀 검진도 해야 하고요. 내일부터 하죠. 기억은 어떻습니까? 쓰러지기 전의 기억은 확실하십니까?”

션은 조금 얼굴을 어둑하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그 문제는 내가 확인해 보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대화 나누시고, 필요한 일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아직 과격한 운동은 안 됩니다. 천천히 움직이시고, 내일까지는 식사도 유동식으로 하실 겁니다.”

아직 더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여의사에게 리가 눈치를 주며 그렇게 말하고 사람을 우르르 몰고 밖으로 나갔다.

침실에 다시 단둘이 되었다. 엘리엇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션에게 다가섰다. 션도 그에게 다가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대로 말이 없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이야기도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이, 걱정하셨어요?”

“안 했기를 바라는가?”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자 션이 고개를 저었다. 리가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오래 서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를 끌어당겨 소파에 앉히고 엘리엇은 다정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은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네. 자네가 또 나를 두고 갈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윽.”

말이 마치기 무섭게 션이 힘으로 그를 끌어당겨서 품에 끌어안았다. 푹 파묻히듯이 안기면서 엘리엇은 놀랐다.

“자네 몸이 멀쩡하다는 건 이제 믿을 만하군.”

“진짜. 지금 잠깐만 제가 행복을 맛보게 놔두세요.”

낯익은 체취와 온도에 몸이 금세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션은 그대로 잠시간 엘리엇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몇 번이나 입술을 비볐다. 이제부터 책임져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지만, 바깥으로 발을 내디디기 전에 조금만, 잠시만 마음을 다스리고 싶었다.

“션.”

엘리엇이 둔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편안히 안겨 있었더니 졸음이 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부른 뜻을 알아들었는지, 혹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션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리고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죠. 저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그래. 뭐라도 좀 먹는 건?”

“배고프진 않아요. 커피는, 아직 마시면 안 되겠지요? 따뜻한 물이라든가 좀 부탁드릴게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엇은 몸을 일으켰다. 인터폰으로 하녀장을 불러 홍차와 따뜻한 물, 묽게 끓인 수프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비서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리야드로 갈 비행기가 준비되었으니 언제든 출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원래는 10시에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엘리엇은 시간을 한 시간 더 늦추었다. 막 깨어났을 뿐인 션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야드에 9시 이전에는 도착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해도 그 이상은 무리였다.

전화를 끊었는데, 션이 말끔한 얼굴로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리야드에 잠시 다녀와야 한다네. 마음 같아서는 자네 옆에 있어 주고 싶지만, 미룰 수 없는 약속이라서……. 아마 일정은 길어도 나흘을 넘기지는 않을 거야. 그사이에 무리하지 말고, 리의 말 잘 듣고, 검진도 전부 받고…….”

“엘리엇 씨.”

션이 엘리엇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어렵게 물었다.

“그거, 저 때문인가요?”

“션.”

“저 때문이죠? 5일이나 지났다니, 그간 위협이라든가 회유가 있었을 테고요. UAE가 제게 흥미를 보였던 건 올해 초부터의 일이었으니,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견제 세력으로 나타났어요?”

“지금 자네는 건강부터 챙기게. 그런 일은 자네가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리야드에 가는 건 그냥 사업 문제라네.”

“엘리엇 씨.”

션은 조금 초조해졌으므로 손에 깍지를 끼어 무릎에 내려놓았다.

“저는 지금 완전한 상태예요. 염려해 주시는 건 알지만, 나흘이나 늦추고 싶지 않아요.”

“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혹은 벌어지고 있는지, 피해가 얼마나 생겼는지, 엘리엇 씨가 무엇을 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저는 바보가 아니고,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기도 해요. 제가 왜 병원이 아니라 엘리엇 씨의 침실에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만큼 지각이 모자라지도 않고요.”

“자네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엘리엇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책임을 회피하라는 건 아닐세. 하지만 꼭 지금 당장, 서두를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아. 나는 이번 일이 불가항력이었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먼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회복하고, 그러고 나서 대면하세.”

“엘리엇 씨가 너무 다정해서, 마음에 찔리네요.”

션은 애써 가볍게 말했다. 그래도 목까지 치솟는 것을 참기 어려워 잠시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결국 제 잘못은 제 잘못이잖아요. 제가 고개를 돌려 회피하고 이 일을 전부 엘리엇 씨에게 미뤄 버리면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려요.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 둘째 치고 저의 신병에 관한 문제라면, 엘리엇 씨한테 그렇게까지 부담을 드릴 수 없어요.”

“……거의 다 해결했네.”

거짓말은 엘리엇 자신이 듣기에도 어색했다. 션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없죠. 제가 카이루완에서 폭주를 했을 때는 거의 1년 가까이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봉인될 때까지 센터가 몇 번이나 습격당했고요.”

“습격?”

“U급 능력자는 희귀하니까요. 제어가 된다면 되는 대로, 안 된다면 안 되는 대로 쓸모가 있죠. 미란 님이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어딘가에 감금되어 산 채로 능력을 뽑히고 있든가, 연구를 명목으로 해부되었을 거예요. 그때 그랬던 자들이 지금이라고 해서 물러났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프게도 그것은 현실이었다. 한탄스럽게도, 그의 유일한 사람은 그런 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끌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손을 뻗자 션이 그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저는 놀랄 만큼의 행운아로군요. 운명이 제게 혹독해지는 순간마다 늘 이렇게 지켜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자네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네.”

목구멍에 돌덩어리가 틀어박힌 것 같았다. 엘리엇은 눈꺼풀 밑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어야 비로소 행운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신이 천칭에 올려놓은 한쪽의 추가 너무 무거워서 그 반대편에 무엇을 얹어 주어도 도무지 수평이 맞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능력이 없었더라면 지금 자신이 온몸을 던져 지키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일 같은 것도 없었을 테니까. 그가 행운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힘은,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저 금고에 쌓인 금과 종이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행운아는 나라고 말해야 마땅하건만, 그를 불행하게 만든 능력을 두고 그것이 나에게 행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엘리엇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말해 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라든가, 런던의 피해 상황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그것은 션의 말처럼 그 스스로가 알고 대처해야 하는 일이며, 그는 이제 스스로를 지킬 힘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를 불행하게 만든 네 힘을 탐욕하여 네가 이리 숨 쉬며 미소하는 인간인 것조차 무시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네가 원치 않은 힘이 사람을 다치게 하여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자네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돼.”

엘리엇은 간신히 그 말만 한마디 더 뱉어 놓고 션의 손에 잡혀 있지 않은 쪽의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나는 자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자네는 그냥, 내 사람으로 있는 것이 좋아.”

그것은 예전에도 한 번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무게가 달랐다. 이번의 것이 훨씬 가벼웠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진심으로 그가 그리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그렇게 해 줄 수 있기에 한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되지도 않을 일인 줄 알면서 내뱉은 무의미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벼운 깃털이라도 날카로운 모서리로 눈알을 스치는 것은 할 수 있었는지, 눈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만다. 엘리엇은 손바닥 안에 물기가 고이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리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던 건지 모르겠다.

“내가 자네를 지키게 하게. 나한테 의지해. 자네는 그래도 돼.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지 않아도, 나에게는 그래야 해.”

션이 그를 끌어당겨 두 팔로 품에 안았다. 의식불명이었다가 깨어난 사람 무릎에 앉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런던 사태와 앞으로의 수습에 대해서 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는데, 눈물이 눈 속만이 아니라 머릿속과 입속까지 들어찬 건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션이 달래듯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왜 엘리엇 씨가 우세요? 그러시면 안 돼요. 엘리엇 씨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제 몸에서 피가 1리터씩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고요.”

“자네가 나한테 뭔가 한 게 아니고?”

말할 때마다 입속에 짠물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엘리엇은 더듬더듬 말했다. 션이 손등으로 그의 뺨을 닦으며 웃었다.

“저는 엘리엇 씨한테만은,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요.”

“솔직히 믿기 어렵다네.”

그렇게 말하고 엘리엇은 두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우선 순서를 틀리는 일도,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일도 거의 없는데, 마틸다가 시간이 다 되었다고 문을 두드릴 때까지 하염없이 서로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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