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November.
알버트가 햄프턴 궁의 핼러윈 파티에서 빠져나와 홀본의 안가에 도착한 것은 자정 직후의 일이다. 코드네임 어시밀레이터Assimilator, 션 맥케인이 자기 힘에 대한 컨트롤 능력을 잃고 스스로 제어기를 찬 채 리스트레인 룸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가의 리스트레인 룸은 지난번에 션이 과부하로 폭발시켰던 때 이후로 새로 강도 높게 보강한 상태였고, 제어기 역시 독일에 아쉬운 소리를 해 가며 중첩 사용이 가능하다는 현존 최고의 제품을 12개나 들였다. 션이 그것을 손발에 각각 두 개씩 총 8개를 착용하고 들어갔다니 지난번에 비해 제어력은 족히 수십 배에 달할 것이다.
U급의 GFG가 일반적인 리스트레인 룸에서 어느 정도 제어되는지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너 명의 S급까지는 동시에 통제 가능하고, U급도 상당히 강력한 수준까지 억누를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그것의 수십 배 정도 되는 억제력이라면 션 맥케인의 측정 불가능한 GFG라도 제어되리라는 것이 알버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난 후에, 제어실에 놓아둔 측정기에 GFG가 잡히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알버트는 서둘러 파티에서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고 안가로 향했다. 문을 열어 주는 요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상황 보고.”
“10월 31일 22시 7분에 어시밀레이터가 당도했습니다. 당직 책임자 리타 왕 밑으로 4명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들어오면서 리스트레인 룸을 열고 가장 강력한 제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만큼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어실의 측정기가 순식간에 한계 수치를 넘어섰기 때문에 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요.”
“요청이 아니라 거부 불가능한 명령이었겠지. 그리고?”
“신원이 확인된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확인하러 들어갔던 앤더슨은 현재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그것은 굳이 확인하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홀본의 안가는 리스트레인 룸을 개조하면서 GFG 능력자 문제를 전담하고 있었다. 당연히 션의 얼굴과 인적 사항은 최우선적으로 암기하게 되어 있다. 평범한 얼굴이라면 또 모르되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신원을 확인하겠다고 굳이 리스트레인 룸 안으로 들어갔다니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23시 27분부터 통상 억제 상태가 버틸 수 없게 되었으므로 최대한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GFG는 지속적으로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으며, 파워 역시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리스트레인 룸 자체가 파괴된 것은 아닌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제어장치도 제대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시밀레이터의 파워량이 그 한계치를 월등히 넘어섰을 뿐입니다.”
“과부하가 되지 않는 이유는?”
“과부하로 룸 자체가 파괴되면 통제력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한 어시밀레이터 자신이 외부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댐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적은 양을 방류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것만이라면 아직 괜찮다. 문제는 점점 넘치는 양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어시밀레이터는 GFG의 작용 기점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리스트레인 룸 외부에 7개의 새로운 기점이 관측되었습니다. 벌써 홀본 전체에 영향력이 미치고 있습니다, 국장님.”
“젠, 장…….”
알버트는 이를 악물었다. 리스트레인 룸이 파괴된다면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최고 수준으로 가동되고 있는 룸 안에서 제어기 8개를 차고도 이만큼의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 억제력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는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운이 좋지 않다면 홀본가 전체가 알 아시리의 마굴처럼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단순히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외부 억제 장치를 발동한다.”
그것은 정말로, 만약의 정말을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이차적인 리스트레인 룸이었다. 그는 단순히 리스트레인 룸을 보강한 것만이 아니라 안가 전체의 바닥과 벽, 가옥을 감싼 도로와 인근 주택까지 이용하여 거대한 억제력의 감옥을 만들게 했었다. 실제로 사용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션의 GFG에 지배당했던 공포의 기억 때문에 과도하게 안전을 추구했던 것뿐이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드림 워커Dream Walker 1)라는 GFG 능력자를 막기 위해 그 정도의 설비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의 억제 장치와 지금은 그 기술 수준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정도의 규모를 최신식으로 만들어 홀본가에 깔았던 것이다.
“전력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퍼레이터가 말했다.
“외부 억제 장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동한 적이 없습니다. 전체를 다 가동하려면 어마어마한 전력이 필요합니다. 런던 전체가 블랙아웃 될 겁니다.”
알버트는 잠시 침묵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조언했다.
“국장님, 헤리퍼드 공작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직권으로 CE에서 끌어올 수 있는 양으로는 어디까지 가동 가능하지?”
“우선 1차 경계선까지는 발동 가능 할 겁니다.”
“우선 할 수 있는 만큼 해. 공작에게는 내가 직접 전화하지.”
그는 서둘러 제어실에서 나오면서 핸드폰을 찾았다. 초조감에 손이 떨렸다. 눈 안쪽이 깜박깜박한다. 손발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타인의 수중에 넘겨주는 순간의 황홀과 공포가 도로 기억 속에서 새어 나오며 심장을 짓누른다. 식은땀이 흘렀다.
신호 대기음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도대체 엘리엇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애초에 션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지금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누구보다도 엘리엇이 먼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와 있어야 했다. 그가 션의 애인이라는 인간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션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그의 탓이므로, 마땅히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센터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쪽의 측정기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1차 경계선을 발동한 이후 이야기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측정 장치를 확보할 수 있는 만큼 확보하여 홀본을 중심으로 3㎞ 간격으로 배치해. 어디까지 영향력을 미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그제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러나 받은 것은 엘리엇이 아니라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군가?”
「집사부의 벤자민 스미스입니다. 함부로 전화를 받아서 죄송합니다, 전하. 주인님께서는 핸드폰을 두고 외출하셨습니다. 다급하신 것 같아서 무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데려가신 기사 쪽에 연락하여 통화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네.”
이 밤중에 어디를 간 걸까. 자기 집의 파티를 놔두고 다른 파티에 갔을 리도 없고 말이다.
연락이 오기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알버트는 초조를 숨기지 못한 채 성큼성큼 걸어 제어실로 향한다. 긴급호출에 모여든 요원들로 안가에는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1차 경계선은 아직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7개 기점에서 시작되는 GFG는 막았지만, 대신 기점 자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어시밀레이터는 폭주 상태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흘려내지 않으면 외부 억제 장치도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연구원 하나가 모니터를 가리켜 보였다. 리스트레인 룸의 모습을 비추는 CCTV이다. 션은 CCTV의 카메라에 정면으로 비치는 자리에 두 팔과 두 다리에 두 개씩의 제어기를 찬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입이 뭐라고 움직였다. 알버트는 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스피커를 켜.”
“위험합니다. 그는 동조 능력자입니다. 이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해도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놈의 능력은 시각이나 청각을 통해서 작용하는 게 아니야. 본인의 협조가 필요해. 어서 켜.”
오퍼레이터가 스피커를 연결시켰다. 알버트는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들립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네. 자각은 있겠지?”
「있습니다.」
“컨트롤 불가능한 건가? 작용 기점을 옮겨서 리스트레인 룸을 파괴하지 않고 흘려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꽤 섬세한 제어가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션이 두통이 이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컨트롤 능력의 상승 속도가 파워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도 저는 한계입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알버트 전하. 이대로 있으면 조만간에 리스트레인 룸도, 제어기도 과부하로 작동 중지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카이루완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자세한 과정까지는 모르네. 당시 내실에 머무르던 여자와 아이 전원이 자네의 GFG에 정신 방벽이 소실되어 장애를 일으킨 채 다투다가 살인 사건이 9건, 자살이 3건, 그 외에 상해 사건과 자살 미수가 87건 발생하고, 증폭 능력 때문에 고용인과 인근 주민 대다수가 장기간 정신질환을……. 설마 그것이 지금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범위 내에서 동일한 규모로 벌어질 거라는 건가?”
「잘 들으십시오, 전하. 당시에 그 사건이 살인, 자살, 싸움 같은 ‘자발적인 행동’에서 끝났던 것은 제가 타인에게 동조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동조 능력은 근본적으로 타인과 자아를 동일시하여 의지와 감정을 모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폭주가 발생하면서 저는 자아를 포기하고 무조건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써 GFG의 벡터를 제 내부로 돌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향을 받던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번에는 그게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아마 정신 방벽이 깨진 자 대부분이 자아를 상실하고 코마 상태에 빠질 겁니다.」
알버트는 잠시간 정신이 아뜩한 것을 느꼈지만 곧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
“작용 범위는?”
「모릅니다. 적어도 카이루완에서보다는 월등히 넓을 겁니다. 저 자신이, 언제까지 이성을 가지고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알버트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손 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 정보를 소화하기 위해 잠시 마이크를 끈다.
정신 방벽이 깨지면 자아를 상실한다. 동조 능력은 션 맥케인과 타인을 동일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션 스스로 자아를 버림으로써 타인이 되었으므로 피해자 대부분이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반대로 피해자 대부분이 곧 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여왕 폐하와 왕세자 전하를 피난처로 모셔라. 지금 당장 준비해!”
“알겠습니다.”
“당시 기록을 다시 확인해. 알 아시리가 잠식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이 기록은 도움이 안 됩니다. 첫 번째 발현 시기가 15세로 추정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알 아시리가 완전히 잠식되는 것에 2년에서 3년이 걸렸다고 생각되고, 그때 당시에 어시밀레이터의 파워는 반경 17㎞의 범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1차 경계선의 억제력 정도로 모두 제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파워 상승 곡선을 보면 4시간 안에 1차 경계선이 기능을 상실합니다. 최소한 런던 서부는 확실히 영향권 안에 들어갈 겁니다.”
알버트는 마이크에 거의 얼굴을 붙이면서 반쯤 소리쳤다.
“그때처럼 스스로 감당할 수는 없는 건가?”
「노력하고 있는데, 마음대로 안 되는군요.」
화면 너머에서 션이 쓰게 웃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엘리엇 씨를 강제로라도 피신시켜 주십시오. 엘리엇 씨는 약간, 스스로의 방어력을 과신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만 한다면, 향후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알았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제어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SSB에 자문으로 와 있는 연구원이면서 본인도 B급의 정신 조작계 능력자인 로저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유형화되고 있습니다.”
“유형화라니?”
“밀도가 높아진 나머지 GFG가 눈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외부 억제 장치를 모조리 가동시키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원래부터 이 정도의 파워를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정말로 파워가 상승하고 있는 건가. 알버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느 쪽이든 막지 않으면 런던이 끝장날 것이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알버트는 액정에 찍히는 이름을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급한 용건이라면서, 알? 빨리 끝내 주게.」
“엘리엇. 상황이 위급해. 전력의 무제한 사용 허가가 필요하네.”
「무슨 일인데?」
“션 맥케인이 지금 여기의 리스트레인 룸에 있네.”
수화기 건너편에서 엘리엇이 신음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버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당장 외부 억제 장치를 가동시켜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 대량의 전력이 필요하네. 시범 가동조차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얼마나 들어갈지도 알 수 없고 언제까지 써야 할지도 알 수 없어.”
「……허가하겠네. 지금 즉시 CE에 전화하지. 거기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 주게.」
알버트는 안가의 주소를 불러 주었다.
런던 전역의 전기 공급이 중단된 것은 그로부터 15분 뒤이다. 삽시간에 거대한 도시가 암흑에 휩싸이고, 막대한 양의 전기가 홀본으로 몰려들었다. 땅과 벽에 묻은 코일이 웅웅거리고 소리를 내면서 억제력을 발휘한다. 벽 너머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신발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뜨거워진다. 위태롭게 떨리던 측정기의 바늘이 멎었다.
“하, 아.”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버트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은땀 때문에 갑자기 몸이 식어 춥게 느껴졌다.
“이건 임시방편에 불과해. 맥케인이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는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본인 입으로 컨트롤 능력이 상승하고 있다고 말했고,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하면서 능력을 분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외부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통제 가능한 것 같으니까요.”
“봉인 능력도 일정 수준으로는 통했던 것이 맞을 겁니다. 지금 억제력의 힘을 빌려 컨트롤 하고 있는 것처럼 아동기에는 봉인 능력의 힘을 빌려 숨기고 있었겠죠.”
“U급은커녕 S급의 봉인 능력자도 없어. 만약 컨트롤을 익히지 못한다면 정말로 처분 문제를 고민해 봐야겠군.”
그 순간이었다. 측정기의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제일 먼저 그것을 본 요원이 가늘게 신음했다. 곧이어 제어실의 모든 측정 장치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표시한다. 오퍼레이터가 소리를 질렀다.
“누수되는 파워가 또다시 늘어나고 있습니다!”
탄식하는 소리 사이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끼어들었다.
“드림 워커는 모르겠지만 아타 파닌은 확실히 이것보다 못하지.”
알버트는 흠칫 놀랐다. 제어실의 사람들이 일제히 구석진 쪽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준형이 “하이-.” 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JK!”
“어떻게? 같은 건 지금은 좀 생략합시다. 갑자기 정전이 되기에 최근에 런던에 설치된 것 중에서 돼지처럼 전기 빨아먹는 장치라고는 이것밖에 없는데 싶어서 혹시나 하고 와 봤더니만.”
그러면서 태연하게 컴퓨터를 두드려 다른 화면을 띄운다. 알버트는 신음하며 물었다.
“언터쳐블이 개입하기로 건가?”
“글쎄요. 우리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상하죠. 확실히 맥이나 옐레나, 아타 파닌은 개입하기를 원할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면 마를린은 벌써 연락을 했을 테고, 탭은 어떤 경우에라도 끼어들지 않으니까.”
그런데 개입한다고 해도 시공 회귀를 하지 않고서야 저걸 감당할 수나 있으려나, 하고 준형이 평화롭게 말했다. 알버트는 그 뜻을 알아듣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네도 감당할 수 없다는 건가?”
“죽이는 것이라면야 지금은 가능하겠죠. 폭탄으로 건물째 묻어 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확실히 죽을 테니. 리스트레인 룸이 터지더라도 런던에 미사일을 쏴 버리면 되잖아요? 요즘 유도 미사일은 엄청나게 정확하던데. 폭격으로는 안 될 겁니다. 조종사도 영향권 안에 들어갈 테니까.”
“그런 수단으로는 확실하게 죽인다고 말할 수가 없어! 나는 GFG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세. 자네에게 맥 마셜과 옐레나 미하일로바, 아타 파닌 칼루가 합세해도 제거가 불가능한가?”
“될 것 같아요?”
준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뱉으며 모니터를 알버트 쪽으로 돌려주었다.
“리스트레인 룸의 억제력이 없으면 반경 45㎞를 지배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 GFG 안에서 동조 능력자에게 살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GFG의 발동 전이라면 틈을 노릴 수라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있을 때는 불가능합니다.”
“지난번에, 자네는 해내지 않았나?”
“그때의 맥케인은 마치 식칼을 들고 있는 13살짜리와 비슷했으니까 그렇죠. 자기가 들고 있는 게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쪽을 위협하면서도 혹시라도 휘두르게 될까 봐 잔뜩 겁을 먹고 경계하고 있었으니 틈도 많았고. 지금은 다릅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저 녀석은 자신의 힘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다스리는 법도 알고 있어요. 삶의 중심도 확고하죠. 힘의 방향이 동화에서 융해 쪽으로 바뀐 것은 그 때문입니다. 런던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컨트롤 능력은 결국 파워를 따라잡을 테고, 3차 발현이 끝나고 나면 당신들은 아마도 션의 코드네임을 동화자Assimilator가 아니라 지배자Dominator라고 바꿔야 할 겁니다.”
* * *
7개의 작용점을 13개로 늘린다.
작용 방향은 증폭. 최대한 확산시켜 밀도를 낮춘다.
션은 피로감을 느끼며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외부 억제 장치의 1차 경계선이 발동되면서 확실히 여유가 생겼지만, 리스트레인 룸이 폭발하지 않을 정도로 억누르면서 외부로 힘을 발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워의 상승은 컨트롤 상승 속도를 벗어나 아득히 높은 곳까지 솟구치고 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않는다.
느끼지 않는다.
바라지 않는다.
심장을 비워 내고 머리를 비워 낸다.
내부로부터 흘러가는 ‘힘’을 관조하며 그것을 조절하는 기계가 된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션은 머릿속 깊은 곳에 뿌리박은 봉인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때, 그의 컨트롤이 완성되기 전까지 그를 완전히 GFG에 잠식되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은인의 힘 말이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통제 가능하게 되고부터 그는 그것을 의식한 적이 없다. 힘이 언제나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넘쳐흘렀으므로 그는 단순히 봉인의 힘이 언젠가부터 사라졌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봉인은 그의 안에서 수원이 되는 어느 부분인가를 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컨트롤 능력에 비해서 거의 언제나 파워가 조금씩 넘쳤던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잘 막아 놓아도 물은 몽글몽글 조금씩 새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의 컨트롤 능력은 자신이 사용 가능한 파워량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인지된 것 이상의 양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깨졌다. 억눌렸던 만큼 힘은 단번에 쏟아져 나왔지만, 여전히 션의 컨트롤 능력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양밖에 다루지 못했다.
일정량의 파워에 반드시 동량의 제어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힘에 자기 의지를 개입시켜 사용해본 경험이 매우 적었고, 큰 힘을 다룬 경험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언제나 억누르고 통제하는 방향으로만 사용해 왔으며, 이따금 사용할 때도 바가지 하나 이상의 분량을 써 본 일이 없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몰아닥치는 해일을 한꺼번에 다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도움받을 수 있는 외력은 봉인 능력자의 GFG도 아니라 약하기 그지없는 리스트레인 룸과 외부 억제 장치뿐이다. 수용량이 아무리 커도 근본적으로 유리 상자이다. 틈새로 적당히 흘려보내지 않으면 압력에 의해 금세 깨져 버리고 만다.
션은 눈을 감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의식을 잃고 있지도 않고 통제력을 상실하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확실히 컨트롤이 파워를 따라잡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지금 상승하는 파워는 결코 기존에 가지고 있던 GFG에 비해 적지 않다. 일상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봉인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다.
과거 그의 제어력이 완성되는 데는 6년의 세월이 걸렸다. 제어기를 찬다 해도 리스트레인 룸에서 나갈 수 있게 되는 데 적어도 4년 이상 걸릴 것이다. 그것도 새로 생성되는 파워가 과거의 GFG와 동량이라는 전제하에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 파워의 상승 속도와 압력을 생각하면 그것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미란 님이 보시면 무어라 할까.
이제 그는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아니다. 아니, 서른셋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라면,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어른이다. 서른셋에 그의 아버지에게는 6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온당하게 보호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션은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려는 것을 다잡았다. 정신 조작계 GFG의 제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이다. 감정이 격해진다고 해도 능력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신체 강화계나 지각계, 치유계와 달리 정신 조작계는 정서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힘의 양도, 감정도. 상위급의 정신 조작계 GFG는 순식간에 타인을 파멸시킨다. 동시에 자기 자신도.
여하튼 미란 님이 보시면 틀림없이 화를 내시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 그늘 밑의 아이에게는 자상해도, 어른에게는 엄격한 분이었다. 남자에게는 더더욱. 밀리가 알면 성차별이라고 화낼지 몰라도 아직 카이루완은 그런 곳이다. 당신은 아버지의 부고가 왔을 적에 화를 내셨다. 제 아내, 제 아이조차 지키지 못하는 남자는 사내가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사내아이인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눈물을 허락하셨다.
슬퍼하고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넌 이제까지 기운 내어 웃으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하고 용감한 아이임을 증명했으니 울어도 된다고. 어차피 어른이 되면 긴 생애, 홀로 견디듯 버티듯 살아야 할 테니 당신의 그늘에 있는 동안에는 안심해도 좋다고 말이다.
기억조차 불완전한 아버지의 죽음보다 그것이 더 마음에 박혀서 그는 울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도 얼은 듯 함부로 뛰지 못했던 심장이 녹아내리듯 했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사랑하여 미쳐 버린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나 이제 와 생각하면 그를 지켜 주겠다, 말한 것은 당신을 제외하면 엘리엇뿐이었다.
그는 엘리엇을 만나기 이전에는 과거를 돌이켜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GFG가 없는 그저 보통의 사람인 자신을 생각해 보곤 했었다. 그랬더라면 카이루완을 떠나는 일은 없었으리라.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알 아시리의 가신이 되기를 꿈꾸었었다. 당신의 직속 부하가 되는 일은 틀림없이 어려웠겠지만 당신의 아들, 혹은 손자를 섬겼으리라.
이 능력이 딱 운 좋을 만큼만 주어진 쓸모 있는 것이었더라면, 기꺼이 당신의 막하에 들어 어떤 일이라도 해냈을 것이다. 30살의 사내에게 어릴 적처럼 다정히 웃어 주시는 일은 없겠지만, 잘했노라 어깨를 두드리실 것을 기대하며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는 용서를 받았으되 증오 역시 받았으며, 원죄를 몸속에 품은 이상 영원히 돌아갈 길은 없었다. 또한 영원히 은혜를 갚을 길도 없었다. 새삼스럽게 없어진 것이 아닐진대 그는 그것이 가슴 아팠다.
연세가 있는 분이었다. 그가 거기를 떠날 무렵에 이미 쉰이 넘었으니 이제 일흔은 되셨으리라.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알 아시리와 연을 끊은 지도 오래되었다.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힘의 한 방울이라도 튀게 하여 내 영혼을 더럽히지 마라. 그것이 설령 네 잘못이 아니더라도 나는 네 존재를 참을 수가 없구나. 두 번 다시 카이루완의 땅을 밟지 말 것이며 알 아시리의 혈통과 관련되지 말지어다. 나는 너를 용서하지만,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않겠다.’
당신은 그를 가련히 여겼고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또한 동시에 망가뜨리고 죽이고 싶어 했다. 당신은 연민하고 증오하면서, 그것이 또한 인간적인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당신은 그 모든 감정이 자기 자신의 것이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에 동조하면서 션은 GFG에서 분리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션과 션의 GFG를 따로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연달아 혼란을 일으키며 션 자체를 증오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그것이 GFG에 의한 것이며, 그 밑바닥에 자기가 보호해 주기로 한 아이가 있음을 기억해 냈다.
금세 꺼질 듯 위태롭게 깜박거리기는 했지만, 온갖 것으로 휘저어진 감정의 늪에서 자기의 피를 흘려서라도 뜻을 지키는 기개와 의지는 얼마나 높고 빛나는 것이었던가.
당신은 원한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었고, 소유할 수도 있었다. 붙잡아 두고 학대하는 것은 당신의 증오와 욕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당신의 그늘에서라면 안심해도 좋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을 봉인하고 당신이 손대지 못할 곳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하여 너의 탓이 아니라는 말을 끝끝내 지켰다.
그는 오래도록 미란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왔다. 그가 용서했으므로 죽어 버리는 대신에 살아남았다. 그가 타인을 더럽게 만든다고 말했으므로 가능한 한 GFG를 억눌러 왔다. 선해지는 것은 죄 갚음이고 자비는 형벌이다. 그는 자신이 본래 결코 선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것은 다만 당신이 그리하라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엘리엇은 그를 용서했다. GFG를 포함하여 그를 받아들이고 용납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힘과 본질을 억누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 어디에선가는 지금도 당신의 뜻을 지키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누구와도 동조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고, 고독도, 외로움도, 한탄도 모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일 없이 생의 종언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아아, 그래서.”
그는 무심결에 소리를 내서 중얼거렸다.
봉인이 풀린 것은 주박이 풀렸기 때문이다. 사실 봉인이 풀린 것 자체는 훨씬 예전의 일이다. 그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이어 그 봉인을 구성하고 유지하던 것 역시 자신의 GFG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션은 또 한 번 놀랐다. 그의 정신 조작 능력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미란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야말로 그의 힘을 봉인해 놓고 있던 것이었다.
션은 눈을 감은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처럼 자신을 텅 비워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사태가 훨씬 완화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상황을 축소시키고 고치 속에 웅크린 채 소망을 버리고 감정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잊는다. 마음을 비운다. 타인을 느끼지 않고 인간임을 잊고 고독한 힘의 덩어리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조를 포기하고 공유를 차단하고 증폭된 욕망들을 껍데기에 불과한 육체에 대신 받는다.
관계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자신을 지우기 위해서는 타인을 지워야 한다.
타인을 내부로 들이기 위해서 타인을 지워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션은 조작 능력을 내부로 돌려 떠오르는 사람을 하나씩 지웠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밀리를 삭제하고, 올리버를 삭제하고, 앨리스를 삭제하고, 웨스트베리 남작 역시 지운다. 현재를 지우고, 과거로 넘어간다. 어리고 그리운 리지 월리스의 얼굴을 새하얗게 파내고 샐리 맥켄지 부인의 웃음을 지워 낸다. 그리고 외할머니. 사진을 보지 않으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었는데, 심층 심리 깊은 곳에는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새겨져 있다.
‘야히아.’
그리 부르는 이름 위에도 먹물을 덧칠한다.
션은 마치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는 것처럼 리스트레인 룸의 딱딱한 철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다.
과거에 자아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GFG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의사로 그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의사로 어머니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자신의 의사로 그를 귀하게 여겼던 것이 아니었다. 알 아시리의 수많은 다정한 여인들과 친구들은 자신의 의사로 그를 아꼈던 것이 아니었다.
션 맥케인이라는 개체에는 의미가 없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GFG에 기인한 것이다. 타인에게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인격이 아니라 GFG였다.
고통 속에서 끝끝내 자신이 인간임을 지켜 낸 사람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었다. 그에 기대어 그는 GFG의 덩어리가 되는 대신에 인간으로 살아왔다.
10년이 지나 비로소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오롯하게 지켜 낼 수 있는 사람도 있음을 알았다. 감히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악을 저질렀는데도 그를 용서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에는 그를 온전하게 사랑스러운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자네를 사랑해.’
그 목소리를 생각한다.
‘자네를 사랑해.’
그 눈물의 맛을 떠올린다.
GFG의 영향 없이도 그렇게 말해 주는 이가 있었다.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그것만은 분명히 션 자신의 것이다.
겉껍질도, GFG도 사라진 그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쭉정이이고, 매달려 기대는 것으로밖에 숨 쉴 수 없는 멍청이 병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 맞춰 주는 사람이 있다.
“솔직해지자, 우리.”
션 맥케인이 말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기회?”
“모르는 척하지 마. 늘 생각했었잖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리고 그를 가져야겠다고 말이지.”
또 한 사람의 션 맥케인이 나타나서 등 뒤에서 그를 소곤거렸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는 오로지 우리와만 함께 있을 수 있게 돼.”
“다른 사람이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볼 일도 없게 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하는 일도 없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일도 없게 되고,”
“우리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일도 없게 되고,”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션 맥케인은 아홉으로 늘어나 있었다. 책상에 앉은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아?”
“사실 별로 신경 쓰실 것 같지도 않다고.”
“어쨌든 우리 것이 되는 거잖아.”
“화를 내셔도 좋아. 그런 모습도 틀림없이 사랑스러울 테니.”
“어차피 어떻게 화를 내더라도 우리한테밖에 못 내잖아.”
“그러면 충분해.”
“엘리엇이 다치지도 않을 테고.”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고.”
“그러지 않겠다고 결정했어.”
입 안이 텁텁하지만, 물이 없었다. 어차피 이 쓴맛은 물로 헹궈지는 것도 아니다.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더러운 능력이지만 그를 독점할 수 있다면 처음으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억누르고 참아 왔지만, 내밀한 곳에 그런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션은 인정했다.
아버지와 같은 인종이다. 자신은. 새삼스럽게 이해하며 웃음을 띠고 만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다. 몹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남자도, 혹은 여자도, 심지어는 션조차도 그녀를 눈에 담는 것이 싫다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살해는 분노와 충동으로 저지른 것이었지만, 폭력은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그릇된 소유욕에서 온 것이었다.
션은 이따금 무방비하게 몸을 내맡기는 엘리엇을 볼 때마다 자신이 느끼는 흉악한 충동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런 충동이 증폭 능력에 의해 풍선처럼 부푼다면 그 순간에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인자인지, 밑바닥에 각인되어 있는 기억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욕망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이었다.
“유효기간도 없이 언제까지 참고만 살 생각이야?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데? 지긋지긋해. 이젠 좀 자유로워지고 싶어. 마음껏 숨 쉬고 싶다고. 이걸로 우리가 사람을 해치기를 했어, 자기 욕심을 만족시키기를 했어? 왜 갖고 싶다고 바란 적도 없는 이딴 힘 때문에 내가 참아야 하는데?”
“엘리엇 씨가 슬퍼할 테니까.”
그는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대답했다. 책상에 걸터앉은 션 맥케인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그는 무정하지 않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사랑하는 법을 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반응할 뿐이다.
오래된 아름드리나무처럼 제자리에 서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지켜보고, 그 길가에 선 사람들이 자신의 걸음에 어찌 되는가를 염려하고 생각하며 느리게 내디딘다. 그 고요하고 긍지 높은 자태는 션이 되고 싶고 되어야 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으며 지향점이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엘리엇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기껏해야 기생목이 되어, 운이 좋으면 푸른 그늘을 더 짙게 만들어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양분이나 빨아 마시듯 타는 목을 관용과 애정으로 적시며 매달려 살아가는 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아마 그는 용서하겠지만, 그래도 남 보기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작용 기점을 493개로 늘린다.
493개는 1,892개가 된다.
1,892개는 9,999개가 되고, 이내 무한해졌다.
증폭은 개체를 끌어들이고, 공유는 끌어들인 개체를 집단으로 묶는다.
동조는 집단을 융합시켜 군체로 만들고, 군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GFG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맑은 검은색이 실내에 가득 차오른다. 션은 런던의 모든 인간이 자기 권능 아래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션 자신이었고, 션 맥케인은 인간의 군체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 그 자체였으며 공유 능력을 통하여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직결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꺼낼 수도, 지울 수도, 새로 써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바꿀 수 있었다.
수많은 생과 사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과해 간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외할머니의 죽음. 가정교사의 죽음, 알 아시리의 부인들, 딸들, 경호원들, 또 알지 못하는 타인들의 죽음. 그것은 모두 그가 겪은 것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것과 같았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과 너무 많은 것을 공유했으므로 타인의 일을 자기 것처럼 슬퍼할 수 있었으나 가끔은 자기 일조차 타인의 것처럼 느꼈다.
그 안에서 오로지 엘리엇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자신의 것이다. 그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역시 자신이다.
그는 확인한다. 또한 확신한다.
여기 있는 것은 션 맥케인이다.
그는 성령의 잔이 넘쳐흐르는 환각을 보았다. 잔 하나에서 끝없이 흘러넘치는 포도주는 템스강을 따라 서쪽으로는 웨섹스를 집어삼키고 동쪽으로는 그레이스를 넘어 바다에 닿는다. 그는 잔을 두 손으로 받쳤다. 힘을 원형으로 만들어 한정된 범위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퍼지지 않도록 막는다.
다수의 사람에게 피해를 나누게 할 것인가. 소수의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것인가. 고작해야 자신 같은 자가 결정할 일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 *
“3차 발현이라니. 그게 뭔가? 그런 이론은 없어!”
“왕자님이 모른다고 해서 실제로 없는 일은 아닙니다. GFG도 결국 힘의 종류입니다. 너무 많으면 형태를 바꾸든가 그릇을 바꾸는 수밖에 없지요.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알버트는 준형이 뭘 어쩌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쏘아보고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리암 경에게 피난하라고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뭐?”
“아니, 빨리 런던에서 빠져나가야 된다고 해도 진짜 말을 안 듣더라고요. 자기도 온다는 걸 말리느라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대신 제가 여기 와 있으니까, 일 잘 해결될 거고 신경 쓰지 말고 몸부터 피하라고 하세요. 알버트 전하 말은 그런대로 잘 듣는 것 같던데.”
그것이 이런 시간까지 둘이 통화하고 있었다는 뜻이라는 걸 알버트는 조금 늦게야 알아들었다. 기가 막혀하거나 화를 낼 여력은 없었다. 그는 준형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통화는 이미 걸려 있었다.
“외삼촌.”
「아, 그쪽에 어떻게 된 거야? 제이가 정말로 거기 가 있어? 무슨 일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버트는 한숨을 내쉬면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준형과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여러 차례 경고했던 것 같은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JK는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버킹엄으로 가세요. 여왕 폐하와 앤드류 형을 피신시킬 겁니다. 함께 출발하십시오.”
「무슨 일인데 그래? 너는?」
“나는 여기에서 마지막까지 사태 수습을 해야 합니다. 제발, 이번만큼은 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 말 들어요. 사람 보낼 여력 없으니까 당장 버킹엄으로 가요. 어머니와 형을 잘 부탁합니다.”
알버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차피 길게 통화해 봐야 리암은 무슨 일이냐고 묻느라 시간이나 끌 것이 틀림없다. 이만큼 말했으니 알아듣겠지 하고 준형을 쳐다보자 그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외삼촌과 무슨 관계인가?”
“골치 아픈 손님.”
“그것뿐인가?”
“아직은 그래.”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나 사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헤리퍼드 공작의 위치는 어디인가? 아직도 파악 안 되고 있나?”
“아마 리버풀 스트리트에 있을 겁니다. 센터로 간 것 같더라고요. 전화는 안 되고.”
여기에 리스트레인 룸이 있는 것은 모르니까, 라고 말하면서 준형이 제어기 두 개를 알버트에게 던졌다. 알버트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차십시오. 도움이 될 테니.”
“…….”
“아무한테나 가르쳐 주는 비법 아닙니다. 어서 차요. 어차피 능력자가 아니니까 손해 볼 것 없잖습니까?”
알버트는 순순히 그것을 두 팔목에 찼다.
“이것으로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난 것 같군요. 엘리엇은 내가 챙겨서 피신시키겠습니다. 전하도 건투를 빌죠.”
준형이 산뜻하게 발을 돌렸다. 오퍼레이터가 고함을 지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작용 기점이 493개로 증가!”
“18㎞ 거리 구간에서 GFG 측정기가 맥스 수치를 표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퍼어엉.
폭음이 울렸다.
“리스트레인 룸이 폭발했습니다.”
“누수 파워……. 한계 수치를 넘어섰습니다. 외부 억제 장치도 곧 과부하 될 겁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알버트는 두통을 느끼며 힘없이 팔걸이에 기대었다.
“요인 피신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해. 지금 영향력은 어디까지 가고 있는 건가?”
“서쪽으로 22㎞ 권역을 넘어서고 그 이상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동쪽으로는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를 피해 가고 있습니다.”
“결계 때문인가. 그렇다면 아직 런던을 빠져나가지 못한 주요 인사는 전부 거기로 보내. 거기에서부터 헬기로…….”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 결계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설령 끝까지 버텨 낸다 하더라도 헬기를 띄우면 결계 범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조종사가 잠식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국장님.”
전화를 받고 있던 요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페어와 소호에서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증폭 능력 때문인가. 폭동이 번지겠군.”
“이미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킹스 크로스에 측정기를 설치하러 간 애덤스의 말로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도리어 홀본만은 조용했다. 침묵 속에서 재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코일의 울림만이 기묘한 화이트아웃을 일으킨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알버트는 소스라치며 담당자에게 어서 받으라고 손짓했다. 담당자가 전화를 받더니 멈칫멈칫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런던 시경에 상주하는 필 요원으로부터 보고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에서 무차별 약탈이 발생했는데, 청장이 발포를 명령했다고 합니다.”
“위원회는 뭘 하고 있나! 상황실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침을 삼켜 가며 담당자가 간신히 대답했다. 알버트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그 자리에 힘없이 늘어졌다.
두 번째 폭음이 들렸다. “1차 경계선.” 하고 오퍼레이터가 말을 하다 말았다. 알버트는 주위를 돌아보고, 사방이 정적에 휩싸인 것을 알았다. 요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혹은 정면을 바라본 채로 눈을 뜬 채 마네킹처럼 정지해 있다.
시야가 어두웠는데, 그것이 전력이 모자라서 불이 깜박거리고 있기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혹은 GFG에 짓눌리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손목에 찬 제어기는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직접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외부 억제 장치는 과부하 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폭음이 들리는 순간 완전히 기능이 정지되었다.
블랙아웃이 일어나는 순간에 엘리엇은 리버풀 스트리트에서 막 벗어나고 있던 중이었다. 가로등과 거리의 불빛이 순식간에 꺼진다. 미리 기사에게 예고를 했으므로 사고는 생기지 않았지만, 거기에서부터 얼마 가지도 않아 차가 앞뒤로 꽉꽉 막혔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차가 막히는 모양입니다. 핼러윈이라서 축제 때문에 봉쇄된 도로도 많았을 테고요.”
기사가 교통 정보를 보겠다며 내비게이션을 켰지만, 방송국이라고 전파를 쓸 수 있을 리 없다.
“돌아서라도 가야 할 텐데.”
“외곽으로 빠져 보겠습니다.”
그러나 차를 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블랙아웃 된 순간에 여기저기에서 접촉 사고가 일어난 데다가 그 문제로 사방에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견인은 불가능하고 경찰력이 마비된 것도 명백하다.
한 시간도 넘게 걸려서 겨우 시티 오브 런던에서 벗어났지만 차는 굼벵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엘리엇은 내려서 걸어가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은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닐 듯해서 추세를 지켜보기로 했다.
두통이라도 생기는 듯 기사가 몇 번이나 한숨을 쉬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자세 또한 고용인의 요건 중 하나라 늘 반듯함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였는데 말이다. 엘리엇은 상황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야 션부터 따라갈 것을 그랬다고 생각한다. 혼자 있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놓아 보낸 것이 잘못이었다. GFG 문제가 감정과 직결된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센터가 그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차분하게 뒷일을 해결하고, 알 아시리에 보낼 조문에 대해 결정하고 나서 출발했다. SSB가 션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니 그쪽에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다.
후회는 길지 않았다. 원래부터 후회 같은 것을 하는 성품도 아니거니와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거나 편의점을 터는 남자를 몇 건이나 목격하기는 했지만, 블랙아웃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영…….”
길은 캄캄하고 어둡다. 전조등에 의지하여 정지해 있는 차들 사이로 비집고 느릿느릿 차를 몰면서 기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엘리엇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누멘트 역을 막 지났을 때였다.
멀리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한 번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에 뒤이어 또다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린다. 고함과 비명, 울부짖음이 몰려오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거리가 폭동에 휩쓸렸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무리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무리처럼 보였고, 사실이 그렇기도 할 것이었다.
“합하.”
기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시동을 끄게.”
이 어둠 속에서는 불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사가 “하지만.”이라고 말했지만, 어차피 길 저편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서 차가 움직일 방도는 없다. 그는 서둘러 길가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무사히 넘어가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행군하는 군중의 무리는 목적이 확고한 시위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가 엘리엇이 타고 있는 차의 앞유리창을 힘껏 내리쳤다. 방탄유리는 깨지지 않았지만, 놀란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뒤이어 거리 전체가 적막해졌다. 노래를 부르며 걷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각목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뭔가를 부수던 사람도 멈췄다. 그들을 말리려다가 싸우게 된 사람도, 겁에 질려 달아나던 사람도 멈췄다. 엘리엇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돌아가십시오. 위험합니다.”
기사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다정함을 숨기고 애써 딱딱하게 말하는 그 말투를 엘리엇은 금세 알아챘다.
“자네, 션인가?”
“돌아가세요.”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엘리엇은 잠시 그를 바라보고, 창밖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어도 달빛이 약한 거리에서 뭔가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사가 시동을 걸었다.
“이것은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인가?”
“그렇습니다. 당신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차가 이내 차도 한복판으로 나선다. 도로를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길이 열렸다. 거리를 채우고 있던 차들도 어느 틈에 길을 열었다. 차 주인들이 차를 가장자리에 대어 놓고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처음에는 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차는 이스트 스미스필드를 지나 이내 라임하우스 링크로 접어들었다. 도로의 차가 모두 비켜났기에 엘리엇이 탄 차는 쏜살처럼 런던을 가로질렀다.
“런던 시티 공항입니다. 가시면 이륙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션.”
“……이런 상황에서도, 진짜 저에게 말씀하시듯 하시는군요.”
“자네이니까.”
엘리엇은 조용히 대답했다. 겉모습이나 목소리는 그를 현혹하는 요소가 아니다. 아름다운 얼굴과 달콤한 밀어에 홀리듯 키스하고 싶어지곤 했지만, 그것이 션과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차를 세우게.”
“가시면, 바로 출국하십시오. 우선 프랑스에 내리게 하겠습니다. 알랑 부부와 이네가 뒤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영국에 돌아오시면 안 됩니다.”
“차를 세우게.”
엘리엇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세워, 션. 내 말 듣게. 화가 날 것 같으니.”
기사가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한탄하듯 말했다.
“제발요, 엘리엇. 가셔야 됩니다. 저도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요.”
엘리엇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어둠 속에서 걸을 수는 없었기에 앞좌석을 열어 기사를 끌어냈다. 그가 말없이 좌석 주변을 뒤져 손전등을 찾는 동안 기사는 멍하게 서 있다가 또다시 “가셔야 해요.”라고 말했지만, 적극적으로 엘리엇을 말리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다.
손전등과 핸드폰을 확보하고 그는 캄캄한 터널을 걸어서 나갔다. 차는 모두 멈춰 있었고 사람도 그러했다. 핼러윈 파티를 하고 있던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가 걷는 거리는 완전히 고요하다.
어떤 여자가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았다.
“제발요.”
“비키게.”
그는 여자를 뿌리치고, 또다시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한 무리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갱이 가게 유리창을 부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모두가 일제히 조용해진 채 움직임을 멈췄다.
한참을 걷는 사이에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왔다. 엘리엇은 CE에 전화를 걸어 보려고 했지만, 통신 시설에 문제가 생겼는지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멀리 시티 오브 런던의 빌딩들에 불이 들어오고, 전광판이 깜박였다. SSB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는 것이 멈추자 자동 시스템에 의해 중요한 것부터 복구되고 있는 것이다. 엘리엇은 손전등을 껐다. 거리에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션의 말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세요.”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디라는 건가?”
“제발요.”
“비키게.”
“런던을 떠나야 합니다.”
“나는 달아나지 않을 걸세.”
“지금은 런던 안에 힘을 붙잡아 두고 있지만, 언제까지 컨트롤이 가능할지 저도 몰라요. 빨리 가시지 않으면 엘리엇 씨도 위험할 거라고요.”
“나를 비겁자로 만들고 싶은가?”
“다른 사람들은 그냥 영향을 받을 뿐이지만 당신은 플래시백을 일으킬지도 모르잖아요.”
“그것 역시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겠지.”
“엘리엇이 이렇게 오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예요.”
“모든 일이 끝장난 다음에 말인가?”
“어차피 제이 씨가 해결할 겁니다. 맥이 개입할 수도 있을 거고요.”
“이해할 수 없군. 왜 내 도움을 받기 전에 타인의 개입을 원하는 건가? 그리고 그 해결이라는 게 설마 자네 목숨을 끊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이건 당신 목숨에 관계된 일이라고요. 이런 일로 당신이 다치면, 저는 죽을 겁니다.”
“이것이 자네에게 작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내가 조금 다치는 것보다 지금 자네가 잘못되고 있는 게 작은 일이라고?”
“제발, 오지 마세요.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제 슬슬 화가 나려고 하고 있어, 션.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자네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길 때까지 그것은 내 역할이라고.”
그리고 엘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말로 설득해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시면 안 돼요.”
“와 주세요.”
“도와주세요.”
“당신이 온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수십 개의 입이 동시에 말하고 수백 명이 한숨을 내쉰다. 수천 명이 탄식하고, 수만 명이 겁에 질린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걷기가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이 달라붙어 오기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 무겁고 밀도 높은 것이 공기 중을 잠식하고 있다. 그의 뇌 속에 있는 작은 호두는 좀처럼 그것을 가르고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심해 속을 걷는 것 같다. 실제로도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로등의 불빛이 검은 안개가 내리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둑하고 흐리게 보인다. 전광판의 광고들도 본래의 색을 잃고 있었다.
션은 항상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건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어둠이라면, 틀림없이 그는 늘, 아주 많이 두려워하고 있으리라. 자신이 다가가는 것조차도 말이다.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더라면 미리 알 수 있었을까. 션의 괴로움을 위로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며 미루는 대신에 조심스럽게라도 미리 운을 띄웠더라면 그는 지금 견뎌 내기 쉬웠을까. 별일 아닌 것처럼 냉정하게 말하는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까. 그랬으면 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후회를 별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래로 이어지는 반성은 하되 과거를 되씹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흔들리고 괴로워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를 한다. 미래가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하고, 미래에 자신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으면서 후회한다. 용서한다고 말하고 안아 주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면 뭔가를 했어야 했다.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래도 이처럼 깊은 곳까지 열어 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했어야 했다.
차의 엔진 소리가 들린 것은 그가 한 시간을 훨씬 넘게 걸어 세인트폴 대성당 앞에 왔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들리는 정상적인 소리에 엘리엇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육중한 SUV 한 대가 곧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엘리엇, 타.”
준형이 조수석을 열며 말했다.
“너 데리고 가려고 찾아다녔다.”
“션은?”
“지금은 안 돼.”
그가 고개를 젓는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가?”
“보는 대로야. 런던의 모든 인간의 의식이 전부 션에게 녹아 버렸다. 당분간은 계속 팽창할 거야. 빨리 타. 영향권 밖까지 데려다줄 테니. 영국을 떠야 해.”
“가지 않아.”
엘리엇은 느릿하게 말했다. 준형이 차에서 뛰어내려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 네가 그 녀석 걱정할 때가 아니야. 위험한 건 그 녀석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라고. 나조차도 지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 힘들어. 30분만 지나면 침식이 시작될 거야. 하물며, 넌!”
“내가 목숨 따위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건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네가 훨씬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준.”
그는 가볍게 준형의 손을 털어 냈다. 솔직히 발목이 좀 아파서 태워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도움은 기대할 수 없을 모양이다.
“30분이 자네의 리미트라면 어서 떠나는 게 좋아. 잘 가게.”
작별 인사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엘리엇은 간결하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준형이 다시 뒤따라와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놔둬. 급하게 가지 않아도 돼. 3차 발현은 어차피 언젠가는 끝나. 능력의 질이 변한 다음에는 컨트롤도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맥케인은 U급 능력자야. 이미 자기 GFG를 다룰 줄 알아. 지금은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고――.”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를 허용하지 못하게 되겠지.”
“엘리엇.”
“지금도 이미 아슬아슬하지 않은가.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진 자는 어디에서도 용납될 수 없어. 션에게는 맥 마셜처럼 대량 학살을 하거나 자네처럼 수만 명을 죽인 경력이 있더라도 덮고 넘어갈 힘이 없어. 빠르게 정리된다 해도 아무도 모르게 사형대에 올려지든가, 최악의 경우 도시째로 불태워 버리겠다는 결론이 날 게 아닌가.”
“그때 가서 생각해. 넌 그걸 막을 힘이 있잖아.”
“그런 힘이 있다고 착각할 만큼 바보가 아닐세.”
엘리엇은 탁 준형의 손을 뿌리쳤다. 전례 없는 일도 아니다.
언터쳐블의 U급 능력자들이 합심하여 션을 죽이겠다고 하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두려움에 질린 권력자들이 그를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막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엘리엇에게는 권력이 있지만, 모든 권력자 위에 군림하는 왕은 아니었다. 돈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공포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션의 목숨이 밝은 세상에서 결정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협상을 하기 위해서 그는 최소한 자신이 이 일을 종결지었다는 카드라도 가져야 했다.
“이전처럼 행동해. 냉정하게 생각해. 엘리엇, 이건 완전히 바보짓이야. 너한테 달려 있는 목숨들을 생각해 보라고. 아일라 스칼렛과 그 아이는 어때? 네 부모님이 네게 맡긴 의무는 또 어때? 중심을 잃어버린 헤리퍼드는 어떻게 되겠어?”
“컬러 영상을 보던 사람은 흑백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어. 음악을 알고 나면 적막하게 살 수는 없지. 일광 아래 살다 보면 어둠 속을 기어 다닐 수 없고, 타인의 손을 잡는 법을 알게 된 후에는 고독하게 살 수 없는 법이라네.”
그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준형을 등졌다. 자신을 위하여 해 주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 이 순간에 그는 션 이외의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단순히 오래 걸었기 때문에 다리가 아팠다. 홀본까지 얼마나 남았으려나 표지판을 올려다보는데 준형의 차가 다시 옆으로 왔다.
“타. 데려다줄 테니.”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자네는 빨리 벗어나게. 지금은 지불할 여력이 없어.”
“돈 안 받을 테니까 타. 너 내려 주고 바로 가면 되니까.”
그렇다면, 하고 엘리엇은 차에 올랐다. 준형이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
걸었다면 20분은 걸렸겠지만, 차로는 5분 남짓했다. SSB의 안가가 있는 골목 앞에서 차를 세우고 준형이 갈등하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들어가지 않겠어.”
“자네에게 그런 의무는 없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게.”
“리스트레인 룸은 6층에 있어. 잠금장치는 2층 제어실에서 풀 수 있을 거야.”
“고맙네. 만나서 반가웠어.”
엘리엇은 부드럽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큰 식료품점과 신발가게 사이로 나 있는 골목에 SSB의 신분증을 걸고 있는 남녀가 잔뜩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려는데 준형이 뒤에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또다시 말릴 생각인가 하고 엘리엇은 그를 바라보았다. 준형이 그의 손목에 묵직한 금속 고리 두 개를 채웠다. 제어기였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네 경우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고 가.”
“자네가 차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을 자신에게 주어 버리면 그가 위태로운 것이 아닌가 하며 엘리엇은 준형을 바라보았다.
“나는 U급 능력자야. 맥케인에 비해서는 별 볼 일 없지만, 내 마음 정도는 지킬 수 있어.”
“고맙네.”
엘리엇은 진심을 담아 짧게 말하고 준형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떼어 내고 안가로 다가갔다.
건물 안은 어두웠다. 층마다 모두 불이 켜져 있는데도 그랬다.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농도가 짙어지던 션의 GFG는 이 건물 안에서는 거의 물상화된 것 같다. 엘리엇은 건물 전체에 검은 젤리 같은 것이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걸음 내디디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감상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공기가 없을 것 같다는 오감의 착각 때문이었다. GFG는 그저 힘일 뿐이고 물리적 실체를 가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잠시 머뭇거린다. 그러나 엘리엇은 그러는 자신에게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망설인 만큼 션에게 미안해졌다.
로비로 발을 들이는 순간 건물 전체의 공기가 출렁였다. 그런 느낌이 든다.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요원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내진 것 같다. 엘리엇은 건물 전체의 현황을 파악할 능력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이 건물이 완전히 무인 상태라는 것은 알 수 있을 만큼 인적이 없었다.
그는 혼자서 천천히 로비를 가로질렀다. 여러 개의 사무실 이름과 위장용 광고들이 붙어 있다. 전기는 멀쩡히 들어오는데, 엘리베이터는 가동되지 않는다. 외부 억제 장치가 파손되면서 건물의 기능이 일부 망가졌기 때문이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그는 천천히 올라섰다.
“내가 온 것을 알고 있는가?”
GFG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살처럼 부드럽게 물러선다. 여기에는 질문에 대신 답해 줄 입이 하나도 없기에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션은 알고 있으리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피로 때문에 팔다리가 무거웠지만, 기묘하게도 가장 저항을 받는 것은 머리였다. 엄밀하게는 머릿속의 작은 어느 부분이다. 바깥에서도 느꼈지만, 이 안에서 그 저항은 더욱 현저하다. 엘리엇은 작은 쇠구슬로 젤리를 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통은 오히려 조금 줄어들었는데, 그것이 정말로 아픔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처럼 특정 위치에서 오는 통증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적으로 압력이 가해져서 둔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층의 제어실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여러 대의 모니터만이 알 수 없는 수치를 토해 내거나 그래프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몸은 극도로 피로하고 점차 이성도 예리함을 잃어 가서, 엘리엇은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면서 모니터와 기계들을 살펴야 했다.
“리스트레인 룸의 잠금장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반복해서 중얼거리면서 끝부터 끝까지 모니터를 훑는다. 다행히도 절반도 오지 않아 그는 리스트레인 룸의 기능을 완전히 중단시키는 버튼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을 누르자 제어실 모니터의 절반이 침묵했다.
“하아.”
동시에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거세어졌다. 단순히 느낌일지도 모른다. 엘리엇은 자신의 오감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션의 GFG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준형의 말에 따르자면 리스트레인 룸은 6층에 있다. 억겁 같은 몸을 끌고 엘리엇은 그리 걸음을 옮긴다. 다리 한 번을 옮기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야만 했고, 시야는 투명하고 검은 것으로 뒤덮여서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지 혹은 감고 있는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엘리엇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화를 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하면서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꼭 그만큼씩 정신 방벽이 갈려 나간다. 그때마다 션에게 해야 할 말을 생각하지만, 또 한 걸음을 옮기면 곧 잊어버리고 만다. 눈앞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린다.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엘리엇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농도가 옅은 곳에서 짙은 곳으로 천천히 들어온 탓인지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가 결코 예전에 션에게 직접적으로 당했던 때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 높지도 않은 계단인데 벌써부터 숨이 찼다. 그는 몇 번이나 무릎을 꺾었지만 온 힘을 다해 버텨 선다.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간을 잡고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더 내디디고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단정하게 고른다. 그의 머리는 GFG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았다. 목 아래로부터 포화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과식이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쁘다.
그는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서너 단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잠시 쉬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꺼번에 6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6층의 분위기는 그 아래와 또 달랐다. 두 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 농도 짙은 어둠이 칼날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저것이 뇌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바깥의 사람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버린 힘이 저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려움은 한순간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이 힘도 션의 일부이다. 그리고 엘리엇에게는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걸음을 내디디자 힘의 구체가 우그러지며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엘리엇은 그것을 보고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한 걸음을 더 내디디자 구체는 조금 더 우그러졌다. 마치 션이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엘리엇은 좀 더 얼굴을 찡그린 채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물론 잘되지는 않았다. 물리적인 저항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무릎을 꺾었다. 벽을 짚고 간신히 서서, 가슴을 움켜쥔 채로 닫힌 문을 향해 간다. 도중에 한 차례 더 무릎이 꺾여 허리를 깊게 숙인 채 바닥을 들여다본다.
코에서 따뜻한 것이 흐르더니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빨간 핏방울마저 검게 보였다. 뇌진탕이 일어난 모양이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의 뇌는 녹아 버리는 대신에 물리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힘으로 짓눌리고 있으니까.
소맷자락으로 그것을 스윽 훔쳐 내고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지친 몸은 억겁 같고 신체는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검은빛의 농도가 점점 진해져서 마침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차가운 철문을 만져 보고 그곳이 리스트레인 룸임을 확인했다.
그는 천천히 문을 밀었다. 2층에서 이미 잠금장치를 풀어 두었기 때문에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들어오지 마세요.”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만 들렸다.
“들어오시면 안 돼요. 지금 당장, 돌아서 나가세요.”
“션.”
션에게는 자기가 보이는 걸까. 엘리엇은 그것이 조금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가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했다.
“안 된다니까요.”
그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너무 어두워서 눈을 떠도, 감아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엘리엇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설령 앞에 뭐가 있어도 걸려 넘어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엘리엇.”
“손, 이리 내밀게.”
목소리는 닿을 듯이 가깝다. 그러나 손을 내저어도 좀처럼 션을 붙잡을 수가 없어서 엘리엇은 그렇게 말했다. 션이 다시 “안 돼요.”라고 말했다.
“화내기 전에 내 손을 잡아. 아니, 이미 화가 났지만.”
“얼굴에 피가 묻어 있어요, 엘리엇 씨. 빨리 돌아가세요. 제이 씨가 아직 런던에 있으니 지금이라도 연락하면 달려와 줄 거예요.”
“자네 얼굴을 후려치기 전에 헛소리 그만하고 손 이리 주게.”
조심조심, 주춤거리고 따뜻한 손끝이 엘리엇의 손가락 끝에 와 닿았다. 엘리엇은 그 손을 확 잡아챘다. 손 너머에서 션이 딸려 왔다. 그 순간에 고정되어 있던 모든 것이 휘청거리고 흔들리는 것을 엘리엇은 몸으로 느꼈다. 세계의 좌표가 흔들리고, 동시에 그의 뇌도 흔들렸다. 코에서 피가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제 바로 두 손 안에 감싼 션의 얼굴은 보였다. 그 뺨은 눈물로 몇 겹이나 젖어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위험해요. 엘리엇 씨 지금 상태가 어떤 줄 알기나 해요?”
“코피가 흐르는군. 양쪽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었으니 먼지투성이에, 땀범벅이겠지. 봐 줄 꼴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아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철썩.
엘리엇은 망설임 없이 그의 따귀를 때렸다. 하얀 뺨에 손자국이 남을 만큼 말이다. 션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반대편 뺨도 내리쳤다.
“그럼, 자네를 버리고 도망쳤어야 했다는 건가?”
“……네.”
션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대답했다. 엘리엇은 울화가 나서 어금니를 물었다. 볼 안쪽을 같이 씹어 버려서 피 맛이 났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그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 분노와 슬픔은 션과 함께하게 된 이후로 종종 맛보게 된 기쁨과도, 예전부터도 알고 있었던 초조함이라든가 애정, 새로 알게 된 불안 같은 것과도 달리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머릿속 끝까지 치솟아 흔들리는 뇌를 달구어 익혀 버리려고 하는 이것이 분노가 아니라면 그는 정말로 인간이 아닐 것이다.
해야 할 말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목구멍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를 못했다. 대신에 그는 션의 멱살을 움켜쥐고 입술을 겹쳤다. 키스에서는 피 냄새가 났는데, 그것이 자기 입 안의 상처 때문인지 션의 입술이 말라비틀어져 갈라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와 달라고 말한 건 자네 의사가 아니었나?”
“아뇨, 그건…….”
“위험할 것 같은 이야기는 나에게 의논하겠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는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나에게만 한정된 이야기였는가?”
“엘리엇 씨…….”
“자네는 나한테 오지 말라고 등을 돌려서 달아나는 대신에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야 했네. 멋대로 비행기 따위를 준비해서 공항으로 보낼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빨리 와 달라고 했어야지.”
“어쩔 수 없었어요. 여기 있으면 위험하실 테니까. 지금도 그래요. 빨리 떠나 주세요. 엘리엇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저를 위해서라도.”
“그래서 나를 보내고, 자네는 여기에서 죽겠다는 거로군.”
언젠가는 컨트롤이 완성되느니 어쩌느니 준형이 말하긴 했지만, 엘리엇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시간을 많이 보내면 준형의 말마따나 뒤늦게 컨트롤이 완성될 수도 있다. 지금의 파워는 그때 가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저지른 사태를 모조리 수습하고 피해자를 원상 복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가. 그때까지 설령 피해자들이 단순한 마네킹이 아니라 능동적 인형이 되어 션을 돌본다 해도, 이 일이 언제 끝난단 말인가. 끝난 뒤에 그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려니와 아마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도 않으리라. 각국 정부는 유도 미사일 한 방으로 침묵한 런던을 초토화시켜 이 위협적이고 강대한 GFG 능력자를 끝장내 버리는 쪽을 선택할 테니까.
션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가기로 결정했어. 나를 두고, 자네 혼자. 아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리엇 씨…….”
“가려면, 나를 데리고 가야지. 나는 자네가 그렇게 해 줄 줄 알았는데.”
이제 분노 대신 슬픔이 메어 와 엘리엇은 가만히 속삭였다.
“자네가 나를 또다시 이 세상에 고독하게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언젠가 죽는다면, 션의 손에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라든가 병마라든가, 아마도 십중팔구 남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의 그 모든 무가치한 것들에 앞서 션이 먼저 자신의 숨을 거두어 주기를 바랐고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언젠가 그가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 놓은 욕심을 참지 못하게 되어, 다정한 시간보다도 영혼을 더 원하게 되는 어느 날에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 딱딱한 껍데기를 부수고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안아 줄 것이라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아마 자신은 진짜로 션과 같은 세상을 보게 되리라고 말이다.
션이 숨 막히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두 팔을 뻗어서 그를 가슴에 안았다. 자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바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안에는 동시에 도움을 애걸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떠나야 한다.”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입으로 말했던 “와 달라.”는 말 역시 진심이리라.
“그 힘, 갈 곳이 없어 이렇게 혼란한 거라면 전부 내게 쏟아붓게.”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이 일을 끝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저 밖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자네가 이제까지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사는 줄 몰랐네. 알았다면 기꺼이 먼저 이렇게 말했을 거야. 나를 데리고 가게. 나는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것이 없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마 이 정도가 전부겠지. 그러니 자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전부 내게 쏟아부어.”
“견뎌 내실 수, 없을 겁니다.”
“예전에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견디지 못하게 된다면 나를 부수고, 그다음 행복하게 하라고.”
“엘리엇 씨…….”
“피안으로 간다면 단둘이 좋아.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자네 세상에 있는 건 나로 족해. 자네에게는 안 그런가?”
션이 눈물과 더불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엘리엇의 등을 끌어안았다.
세상이 어둡다니.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어두운 속에도 이 사람은 이렇게 빛나고 있으니까.
온전한 별을 품에 안는다. 그것은 심장으로 들어와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되고, 삶이 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영혼 그 자체였다.
세상은 별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것을 목도하는 순간 그의 GFG는 일렁이는 물색으로 변했다가 북구의 여름 하늘색으로 물든다. 그것은 엘리엇의 눈동자와 같은 빛깔이다.
무한대의 작용 기점을 9,999개로 줄인다.
9,999개는 9개가 되고 이내 단 하나에 모인다.
그것은 그를 안아 주고 있는 팔 안의 좁은 공간이다.
“션.”
다정한 목소리가 부르는 것이 그의 이름이다.
보드라운 입술이 스치는 것이 그의 뺨이다.
이곳에 있는 것은 오롯하게 유일한 이이며, 그가 사랑하므로 결여된 자신조차 완전하다.
자각은 동조를 해제하고 한 사람을 향하는 마음은 공유를 중단시킨다. 군체는 해체되고 션은 그저 한 남자가 되어 자신의 별을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속삭임이 울먹임이 되고 만다.
“죄송해요.”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저항력을 뚫고, 두통을 이기고, 뇌진탕 때문에 피를 흘리고 구역질을 하면서. 아무리 그가 감정에 둔감하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와 주었다. 런던이 어찌 되었는지 알면서. 떠나는 게 옳다는 걸 알면서. 혐오하게 되지도, 증오하지도 않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두 팔로 안아 준다.
‘나는 처음부터 자네를 용서하고 있었다네.’
한 사람의 용서가 세상 사람 모두의 용서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의 용서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션을 용서하고 있다.
션은 자신의 힘이 완전히 변화했음을 알았다. 미란의 말이 그를 구속시키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엇의 말에도 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GFG와 더불어 하나의 인간으로서 용납되었음을 이해한다. 마치 손에 컵을 쥐고 있으면서 줄곧 그것을 찾아다녔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넘쳐흐른 힘을 역행시킨다. 쏟아진 물을 주워 담는다. 그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션은 모든 것을 돌이켰다. 망가진 정신 방벽의 자리에 자신의 GFG를 대치시켜 강력한 경계선을 세우고, 모든 이의 기억을 어루만져 시간을 되돌린다. 그것은 동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끝났을 때 다시 한번 이유가 너무 많아서 도리어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할 수 있었어야 했어요.”
과거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어야 했다.
엘리엇은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이번에는 해냈으니 됐다. 과거에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너의 잘못은 아니었고, 이번에는 그 이상으로 훌륭한 일을 해낸 것이라고 속삭인다.
션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엘리엇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션이 모든 일을 끝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릿속 깊은 곳을 살랑거리면서 쓸어가는 서늘한 감촉을 느낀다. 그것은 두통까지 깨끗하게 씻어서 끌고 사라진다. 뇌진탕의 후유증도, 피로도 남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숙여 션의 머리칼에 입술을 누른다. 그의 등에 감겨 있던 팔이 힘없이 풀려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션을 끌어안은 채로 바닥에 앉으며 그를 눕혀 주었다. 그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 * *
런던을 경계로 휘몰아치던 검은 소용돌이가 점차 푸르게 변해 가다가 하늘색으로 변하여, 마침내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는 맑은 것이 된다. 사이클론의 탄생부터 소멸까지의 영상을 빠른 속도로 돌리는 것처럼 밤하늘이 되돌아오는 모습은 기적처럼 보였다. 그 뒤를 따라 사라져 있던 자아들이 하나둘씩 준형의 GFG 속으로 튀어 들어온다. 건물과 빌딩이 빽빽한 현대의 숲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고요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상이 된다.
아마 이런 광경을 본 사람은 근 수십 년 사이에 단 두 사람뿐이리라. 3차 발현은 U급 GFG 능력자라고 해서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다. 단둘이라든가 그런 로맨틱한 수식어를 붙이기에 저기에 보드카 병과 권총을 함께 쥐고 바닥에 앉아 있는 30대 남자는 매우 부적절한 상대였지만 말이다.
“그것 보세요. 결국 해결되게 되어 있다니까.”
“엘리엇이 목숨을 걸어서 말이지.”
알버트가 보드카 병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내뱉었다. 준형은 웃었다.
“전하는 엘리엇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요?”
“싫어해. 네놈도 싫고, 엘리엇도 싫고, 맥케인은 죽이고 싶고, 외삼촌도……. 끔찍해.”
“리암 경이 들으면 서운해할 겁니다. 엘리엇은 그런 감각도 없을 테지만.”
“서운해하라지.”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말로 바래다주지 않아도 됩니까? 취한 것 같은데?”
“혼자서 취한 채 네놈 차에 탈 정도로 안이하지 않다.”
“그것도 그렇군요.”
준형이 등을 돌렸다.
“하나 물어보자.”
“네?”
“네놈, 진짜 아무 계획도 없이 엘리엇 때문에 남아 있었던 건가? 언터쳐블의 사신인 네놈이? 콩고의 죽음의 낫이며, 예멘과 시리아의 악마라는 말을 들었던 네놈이?”
“그런 부끄러운 별칭을 꺼내셔도 곤란합니다. 사선에서 병사들이 저격수에게 공포심을 가지는 건 흔한 일이잖습니까.”
“논리적으로 하는 말이다. 네놈은 절대로 자기 목숨을 위태로운 곳에 내던질 놈이 아니니까. 엘리엇에 대해, 우정, 하.”
알버트가 조롱조로 말했다. 준형이 빙긋 웃었다.
“뭐, 대책이 전혀 없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닙니다. 한 시간 반도 넘게 엘리엇만 찾아다닌 건 아니니까.”
“리모컨 내놔.”
“네?”
“보나 마나 원격 기폭 장치가 된 폭탄이라도 설치해 놨겠지. 당장 이리 내.”
어쩔 수 없다고 준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내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이유가 뭐야?”
“그게 중요합니까?”
“이번 일에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그렇다. 어지간해서는 준형은 그것이 합당한 의문이라 하더라도 타인에게 정보를 주거나 하지 않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말해두는 것이 손익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객관적인 판단 외에 최선의 결과와 멋진 광경을 본 덕분으로 기분이 몹시 좋았기 때문이다.
“자기 보존 때문입니다.”
“자기 보존?”
“GFG 능력자라는 건 말이 좋아 능력자이지, 그저 돌연변이일 뿐이니까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맥이 어쩌고 아타 파닌이 어쩌고 해도, 결국 ‘인간’이 배척하기로 결정하면 그냥 죽는 수밖에 없잖습니까? U급 능력자는 위험하다, 제거해야 한다는 인상만큼 무서운 게 없죠.”
“그래서, 직접 손을 쓴다는 건가?”
“GFG 능력자는 GFG 능력자로 대응해야 한다, GFG 능력자가 문제를 일으키면 GFG 능력자를 불러온다, 언터쳐블은 GFG 능력자를 통제할 수 있다. 사람들이 GFG의 폭주를 대할 때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두는 겁니다. 전하가 제일 먼저 건물에 폭탄을 설치하여 뼛조각도 추리지 못하게 날려 버리거나 코일에 역방향으로 전류를 흘려보내어 리스트레인 룸을 1,000℃의 오븐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을 강구하는 대신에 저에게 대책을 묻거나 맥과 아타 파닌이 협력해도 제압하는 게 불가능하냐고 물은 것처럼. 우리가 만일 하나의 종족이라면, 종족 전체의 보존을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정보를 줬던 건가. U급 능력자인 네놈에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비로소 이해하고서 알버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언터쳐블은 상호 불가침이 제1 규약 아니었나?”
“상호 불가침입니다. ‘자기 능력을 통제할 수 있는’ U급 능력자에 한해서.”
알버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친목 모임이라고 말해도,
“네놈들은, GFG 능력자의 군주로군. 룰을 만들고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고 존재 가치를 판정 짓고, 집단의 미래를 결정하고 인식마저 바꾸려 하고 있어.”
“실제 위협 요소로 여겨지는 것이 U급인 우리뿐이기 때문에 그렇죠, 뭐. 무슨 대표성 있는 의정 기구인 것도 아니고. 맥이나 아타 파닌은 정말로 왕이 된 기분인 것 같지만, 대다수는 동의 안 합니다. 우리 목표는 언제나 살아남는 것이죠. 그런데 그 총은 언제까지 쥐고 있을 겁니까?”
알버트가 왼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슬라이더는 당겨져 있고, 실탄은 탄창에 꽉 차 있다.
“상관 마라.”
준형은 대수롭지 않게 “그럼 쥐고 계시든지.”라고 말했다.
“섣불리 목숨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사실 전하 정도로는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 버티고 있어 줘야지, 저어기 어느 나라 첩보 조직처럼 비합리적인 머저리들만 모여 있으면 살기 힘드니까.”
가능한 한 영국을 뜨기 싫다고 투덜거리면서 준형이 이번에야말로 등을 돌렸다. 알버트는 잠시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왼손을 들어 등을 쏴 버리면, 저자는 죽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김준형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런던 안에서, 저자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김준형은 결코 준비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U급의 지각 능력은 매우 놀랍지만, 그가 가진 진짜 힘은 GFG에서 오지 않는다. 총을 드는 순간 죽는 쪽은 자신일 것이 틀림없다.
어차피 충동적인 생각일 뿐이었지, 진짜로 쏠 것도 아니었다. 알버트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던져 버린 보드카 병을 보았다.
자결할 작정이었다.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준형처럼 혼자서 폭탄을 설치하여 건물째 션을 묻어 버릴 방법이 없다면, 그냥 차를 몰고 런던을 탈출하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리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그의 가족을 위해서도, 핑계 같지만, 나라를 위해서도. 그는 SSB의 국장이었다. 그가 여기에서 죽으면 SSB는 마비될 테고 그것은 런던을 잃으면서 국력의 절반을 상실하게 될 영국을 위해서 결코 긍정적인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왕실을 가장 먼저 피신시킨 것이 결코 대의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냥 사리사욕이었다. 남보다 빨리 정보를 알았기에 남보다 빨리 국가권력을 동원해서 자신의 가족을 대피시킨 것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왕실 가족의 한 사람 정도는 런던과 운명을 같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권총을 선택한 것은 의식을 망실한 채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을 끝낸다면 자기 자신인 채로 정확하게 끝맺고 싶었다. 그러니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권총을 물고 방아쇠를 당길 작정이었다. 보드카를 취하도록 마신 것은 죽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허락한 방종이었다.
“살아남고 나면 추한 것이로군.”
그는 권총을 깨진 보드카 병 옆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준형에게 받은 기폭 장치를 내려다본다. 이것으로 지금 묻어 버릴 수 있다면, 두 사람을 같이 건물 밑에 깔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션만이 아니라 엘리엇 역시 제거할 수 있다면 해 두는 것이 좋다.
헤리퍼드는 너무 번영했다. 그는 혼자 몸에 너무 많은 금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내부 세력은 없다시피 하다. 지금이라면 런던의 블랙아웃과 GFG 사건에 섞어서 처리할 수 있다. 헤리퍼드의 기반을 빼앗고, 집중된 금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그의 주군이 펼치기 원하는 미래를 위해 훨씬 좋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한 번도 너를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엘리엇.”
늘 그러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내뱉고, 그는 기폭 장치를 밟아서 부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