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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ugust (6) (36/52)

12. August (6)

애초에 약속했던 2주가 지났다. 마지막 주의 토요일 오전에 엘리엇과 션은 발레아레스 제도의 이비자 항에서 내렸다. 한동안 죽을상이었던 리암은 와인 경매 이후에 완전히 얼굴이 피어 있었다. 리암이 먼저 타라고 권하기는 했지만, 빈발하는 사건에 아무래도 자신들의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을 느꼈던 엘리엇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용기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둘은 바로 런던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휴가는 월요일까지였으므로 하루의 여유가 더 있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시원한 그늘에서 과일주스를 마시며 쉬었다. 보안 문제로 해변이 통제되었으므로 둘은 넓은 백사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둘이 된 기분이에요.”

석양이 지고 기온이 떨어지자 션은 걷자고 엘리엇을 이끌고 나왔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모래를 사박사박 밟는 소리가 몸을 간질이고 지중해의 짠바람이 피부를 따스하게 스친다.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절반도 넘을 텐데?”

엘리엇이 말했다.

“그래도 끊임없이 남을 신경 썼어야 하잖아요. 벽과 천장에도 눈과 귀가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고요. 엘리엇 씨가 왜 신분이랑 이름을 숨기고 다니셨는지 좀 알 것 같았어요.”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네. 익숙해질 걸세.”

“그러겠지요.”

엘리엇이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션도 생각에 잠긴 채로 둘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나란히 걸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엘리엇 쪽이었다.

“마음이 바뀌었는가?”

“뭐가요?”

“같이 사는 일 말일세. 사교계에는 이번 한 번만 얼굴을 내밀면 될 거라고 말했었지만, 아마 그래도 타운 하우스로 들어오면 완전히 연을 끊기가 어려울 걸세. 내가 홈 파티 같은 것을 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친지들을 불러야 하고, 방문객도 있고, 고용인들도 있으니까.”

션이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엇은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그것을 알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가 원치 않는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네.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는 방법은 다시 생각해 봐도 괜찮을 거야. 방은 비워 둘 테니 언제든 오는 건 상관없고.”

“엘리엇 씨의 생각과는 반대로 마음이 바뀌었어요.”

션은 조용하게 말했다.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지금까지는 엘리엇 씨의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왔었거든요. 집 안에서는 물론 엘리엇 씨의 파트너로서 그에 맞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바깥 문제는 또 다르니까.”

“생각을 많이 했었군.”

“몇 달 전에 알버트 전하가 저를 불러내신 걸 기억하세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그 이야기 말인가?”

“네.”

션은 약간 웃었다.

“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원래는 엘리엇 씨한테 굳이 이야기할 것까지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알버트 전하가 제게 정치를 해 보라고 말씀하셨었어요.”

엘리엇은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턱을 조금 쓰다듬었다. 션은 그가 숙고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곧 전후 사정을 맞춰서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대부분 짐작해 낸 듯 엘리엇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그가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서 션은 간략하게 알버트와 나눈 대화를 간추려서 설명했다. 이혼을 졸라 보라고 했다는 부분만 제외하고 말이다.

“수단의 불쾌함과 별개로, 알버트 전하의 말씀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틀렸네. 알의 목적은 상원의 개혁에 있지 않으니까. 자네를 기만한 것이지. 알에게 그런 일이 급하지도 않지만, 설령 정말로 어떤 법안의 통과가 급하다고 생각한다면 자네를 이용하는 대신에 나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러 오면 돼. 상원의 개혁도 장기적으로 내다보면 분명히 앤드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이지만, 그건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해. 핵심은 예시처럼 꾸민 동성 결혼 합법화에 있네.”

엘리엇은 눈살을 찌푸렸다. 션은 놀랐다. 그냥 예시로 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일에 굳이 찬반을 표시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어차피 순리대로 될 일이기 때문일세. 지금 상원에서 그 법안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국교회 때문이라네. 국교회가 상원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니까.”

“아.”

“알은 법안의 통과 여부 자체에는 흥미가 없어. 교리에 관계된 문제이니까 국교회는 물러설 수 없지. 하지만 어차피 그 법안은 통과될 걸세. 세상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미적거리다가 통과되는 것과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는 건 전혀 다르잖나. 국교회에서 4회기 동안이나 막은 것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면 더더욱 달라지고, 게다가 헤리퍼드 공작의 동성 배우자가 상원에 들어간다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일이 될 걸세. 알은 자네를 이용해서 의회에서 국교회의 영향력을 줄일 작정인 거야. 더불어, 자네가 인기몰이를 하고 나서 국교회가 여전히 동성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여론도 나빠지겠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로군요. 저는 왕실과 국교회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션은 어이가 없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밀접하다는 쪽이 맞을 걸세. 그리고 국교회가 왕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권력은 역전되었다네. 여왕 폐하의 다른 형제들이 모두 계승권을 잃고 영국의 작위조차 계승하지 못하게 되는 데에 국교회가 일조하기도 했고. 그 이전에도 그런 일이 드물지 않았지.”

“그렇군요.”

“알이 앤드류를 위해서 국교회를 눌러 두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이해할 만하고 반대하지도 않는다네. 하지만 자네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은 불쾌해. 이용당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무엇보다도, 설령 자네가 명예욕 때문에 하고 싶어 해도, 사적인 관계를 이유로 공적 권리를 행사할 생각은 없네.”

“네, 동의합니다. 그러시면 안 되지요.”

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이 허락하리라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거니와 그럴 작정도 없었다. 그가 정계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명예욕 때문도, 권력욕 때문도 아니다. 엘리엇과 대등하게 서는 것이 목표이니 그의 지원을 받아 대리인으로서 상원 의원이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논외였다.

“알버트 전하의 제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방향은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정말로 정치를 해 볼 작정입니다.”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가 침묵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하던 얼굴이 살짝 흐려진다.

“자네가 그런 일에 뜻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치에 뜻이 있다는 것과는 좀 다르지만요. 이번에 맥을 만나 봤을 때도 그렇고, 언터쳐블에 가입하기로 한 이상 제게도 힘이 필요하니까요. 나라에 대한 뜻이라든가, 이상이라든가……. 그런 것을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타인의 이상을 수합하여 실현하는 데에는 제 힘이 틀림없이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래…….”

“그리고 저한테는 엘리엇 씨가 있으니까요.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갈 길을 모르게 될 때 분명히 지혜와 식견을 빌려주실 거잖아요.”

되묻는 듯이 살짝 말꼬리를 올려 동의를 구한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을 좌우하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이상이라든가 신념을 가져 본 일은 없다. 공정하게 균형을 잡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눈을 지니고만 있다면,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고 볼 수 있으리라.

“자네는 분명히 잘 해낼 걸세. 그러면,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베드퍼드 공작 각하의 비서가 조만간에 그만둘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앨리스의 소개로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경력을 좀 조사해 봤는데, 존경할 만한 분인 것 같더군요.”

“베드퍼드 공작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아주 훌륭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오브라이언은 그만두게 되겠군?”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걱정했었는데 풀러 씨에게 연락해 봤더니 반대는커녕 대환영하고, 후원회는 언제부터 만들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헤리퍼드와 상관있는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엘리엇 씨를 의식하고 있겠지요.”

“그런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

엘리엇이 생각에 잠긴 채로 천천히 말했다. 여전히 흐린 얼굴이 펴지지 않아서 션은 염려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불쾌하세요?”

그가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했던 일이다. 그러나 엘리엇의 안색은 생각보다도 더 안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하겠다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불안감이 마음이 퍼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션은 조심조심 손을 뻗어 엘리엇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그냥 조용히 엘리엇 씨 옆에만 남아 있는 쪽이 좋을까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엘리엇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거예요.”

“자네 뜻을 꺾을 생각은 아닐세. 다만.”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필요하다는 자네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자네 스스로 그것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해서 그렇다네. 내가 가진 힘은 작지 않아. 마셜 씨를 상대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네. 충분히 자네를 지켜 줄 수 있어.”

“엘리엇 씨.”

“자네는 원래 남의 눈에 띄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상황에 휘말려서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면 내가 슬플 것 같아. 나는 그냥 자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오브라이언을 그만두는 것은 좋아.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해서 비는 시간에 차라리 자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네.”

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 속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고, 동시에 조여들기도 한다. 잡고 있던 엘리엇의 손을 두 손으로 끌어당기고 고개를 숙여 그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그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게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엘리엇 씨에게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옆에 나란히 설 만한 자격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공간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요.”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잠든 이의 손가락에 남몰래 끼워 보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반지를 건넬 것이라고 결심한다.

엘리엇이 이번에도 미묘한 얼굴을 했다.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돕는 게 옳을까?”

“아니요.”

션은 확고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을 마주 잡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다리세요. 저, 높이 올라갈 겁니다. 엘리엇 씨가 저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리고 제가 엘리엇 씨를 보호할 수 있게 될 만큼요. 그때가 되면 뭐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서로 도와도 괜찮겠지요. 기댄다는 것은 서로에게 하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엘리엇 씨가 저를 지금 지켜 주고 있듯이, 저도 엘리엇 씨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래…….”

엘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는 지금 이대로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켜 주겠다는 그의 말은 따뜻하게 가슴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자네를 지킬 거라네. 거기에는 동의하겠지?”

“빨리 올라가겠습니다.”

미소하며 말하자 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엘리엇은 그의 손을 끌어당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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