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August (5)
카드 날아다니는 소리가 사각사각 경쾌하게 울렸다. 이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졸린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카일이 던진 스페이드의 8 위에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에이스를 내려놓았다.
“아, 또 졌군.”
아담 프랫이 비스킷 접시를 내밀며 울적하게 말했다. 카일이 으쓱거리면서 “우리한테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니까.”라며 접시를 끌고 가 이미 산처럼 쌓여 있는 과자 쟁반에 그것을 합쳤다.
“이걸 다 먹으면 뚱보가 되겠는데. 마누라가 싫어할 거야.”
“음.”
엘리엇이 작게 동의를 표했다. 몸매보다는 주로 건강을 관리해 왔지만, 살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션과 함께하면서부터 식사 시간이 길어진 탓에 먹는 양도 그만큼 늘어나, 조금씩 뱃살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션은 아직 너끈하며, 조금 더 말랑해져도 괜찮고, 정말로 살이 찐다면 섹스 다이어트 같은 것도 있다고 설레발을 쳤지만, 아무리 섹스를 좋아해도 그걸로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담이 한숨을 내쉬고, 옆에서 고든이 불만 어린 얼굴을 한다. 카일이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까닥까닥했다.
“뭔가 토해 내야지.”
“다 털려서 이제 내부자 거래법에 걸리지 않고는 뱉어 낼 정보도 없다네. 아, 그게 있었지.”
“뭔데?”
“헤리퍼드가 라오스에 땅을 사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별장이 아니라 연구소를 세우려고. 미확인 정보이지만.”
“본인이 앞에 있는데, 그게 판돈으로 지불할 만한 정보인가 의문이 드는군.”
카일이 헛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가 궁금하긴 했던 듯 엘리엇에게 물었다.
“정말인가? 대체 에너지 연구소는 아르헨티나에 세운다고 하지 않았어?”
“대체 에너지 연구소는 아르헨티나일세. 라오스에는 GFG 연구소를 이전할 부지를 찾아보라고 했어.”
“아. 그런 게 있었지. 의미가 있는 건가? 지금에 와서 GFG라는 건 대부분 센터 관리에 놓여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었다네. 영국 안에서는 규제가 너무 많아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이번에 라오스로 옮기면서 제대로 투자해 볼 생각이라네. 그쪽에는 센터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하니까 지원받지 못하고 있는 능력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사회 공헌 활동의 일환인 거로군.”
“겸사겸사하여 그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원래 그 연구소는 엘리엇의 사건 직후에 부친이 세운 것이었다. 후유증을 치료할 방법을 개발하라고 한 것이지만, 당사자를 연구할 수 없었던 데다가 엘리엇이 물려받은 후에는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 마음을 바꾼 것은 션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기록을 쌓아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라오스는 센터의 공백 지역이다. 혹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GFG를 통제하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도울 가능성이 있는 쪽이 좋다. 물론 그곳에 거점을 가지고 있는 상위 능력자가 없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입지 조건 중 하나였다.
카일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별로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니군.”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정보가 아니지 않은가.”
“엘리엇은 좀 봐줘. 내가 아는 일 중에 자네가 모르면서 자네에게 유용할 만한 일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고든, 자네는 어떤가?”
“글쎄, 나야말로 뭐 아는 게 있겠는가. 이건 편을 잘못 가른 거야.”
“새로운 소식이라면 뭐든 이야기해 보게. 자네, 사교계 소식에는 정통하지 않은가.”
“글, 쎄에……. 정말로 정보라고 할 만한 건 없는걸. 굳이 말하자면, 데본 백작가에서 존 경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했다는 것 정도일까. 아, 그러고 보니 알버트 전하가 휴가를 취소한 일이 있군.”
“오.”
“예년처럼 화이트하벤의 별장으로 가다 말고 급히 되돌아왔다고 들었다네. 그게 우리 배가 스페인에 입항하지 못한 이유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가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이번 것도 엘리엇은 알고 있었지만 소문낼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군. 더 괜찮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게.”
카일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레몬차를 홀짝거렸다. 아담이 시가를 들면서 물었다.
“자네는 안 피울 건가?”
“지난주의 제한량을 다섯 개비나 넘겨 버려서 이번 주에는 안 피우기로 했다네.”
“다섯 개비나? 원래 많이 안 피우잖아.”
“의사가 제한하고 있는가? 어디가 안 좋아?”
고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엘리엇은 레몬차를 더 따르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션이.”
“이런. 바가지까지 긁히고 있어?”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줄여서 나쁠 것은 없지. 과했다는 자각은 있다네. 카일, 트럼프.”
“아. 으응.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네.”
카일이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스페이드였다.
“그러고 보니 존 경은 정말로 니콜스 양과 결혼한다던가?”
“지금의 이야기로는 그래. 하지만 솔즈베리 후작이 허락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결혼 후에도 니콜스 양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묵인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원래도 이 크루즈가 끝난 다음에 전쟁이 예고되어 있었지. 그게 갑자기 폭탄을 터뜨린 꼴이 됐지만.”
“리암은 몰랐던 건가?”
“음. 알고 있긴 했을 걸세. 설마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겠지. 존 경이 니콜스 양과 정말로 결혼을 하려면 상속을 포기하고 성을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존 경의 경제적 능력이 말일세.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가문에 귀속되어 있고, 취업을 하려고 해도 지금까지 솔즈베리 후작가를 물려받기 위한 교육밖에 받지 않았을 테니.”
“솔즈베리는 지금은 농장밖에 하고 있지 않으니까, 물려받지 못하게 된다면 할 일이 없어지겠군. 차남은 상속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회계사가 됐었고. 니콜스 양도 회계사라고 했었지?”
“그 차남이 니콜스 양을 존 경에게 소개시켜 줬었다네. 그래서 지금 이런저런 뒷이야기로 시끄러운 듯해. 형을 부모님 눈 밖에 나게 하려고 니콜스 양을 소개해 줬다는 이야기까지 있던데. 엘리엇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뭘?”
“그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 정말 할 수 있을까?”
엘리엇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통계적으로 어려운 일인 건 사실이로군.”
“니콜스 양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도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작위 상속자들은 이래저래 복잡하군.”
“후계자가 아니라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이지. 그러고 보니 베드퍼드 공작가에서도 시끄러운 일이, 아.”
아담이 카드를 내다 말고 손을 들어 보였다. 카일과 엘리엇도 그를 따라 시선을 뒤로 돌렸다. 턱에 멍이 든 라이언이 침울한 얼굴로 휴게실로 들어오다 말고 엘리엇과 시선을 마주치자 멈칫 걸음을 멈췄다. 엘리엇은 자기가 자리를 피해야 할지, 아니면 라이언이 피하게 해야 할지, 신경 쓰지 말아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라이언은 그보다 훨씬 먼저 결론을 낸 듯했다. 그는 눈인사도 없이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라이언 경도 며칠 전의 그 싸움에 참가했었나?”
“라이언 세인트데이비스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멍든 것을 보지 못했는가? 입속도 찢어졌다고 하더군. 며칠 동안 두문불출한 게 그것 때문이라네.”
고든이 말했다. 확인하러 문병까지 갔었다는 것이다.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언이 패싸움에 끼다니 이상하군.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러는 자네는 그럴 사람이라서 광대뼈에 멍을 달고 있는 건가?”
“내가 맞은 건 실수였다고.”
“자네 때문에 그 난리가 났는데 발을 빼면 안 되지.”
“발을 빼자는 건 아니지만…….”
“그날 다들 이상하게 흥분했던 건 사실이니까. 라이언 경도 예외는 아니었던가 보지. 그러잖아도 요즘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았는가. 런던으로 돌아온 뒤부터 계속 신경질적이었고.”
“맞아. 나도 느꼈다네. 하지만 사람이 성격이 좀 변했을 수도 있지.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원래부터 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
사실 패싸움의 흔적이 아니라 라이언의 얼굴에 멍을 남긴 장본인인 엘리엇은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마지막 카드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카일이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엇은 완만한 미소를 지었다.
“용건이 좀 있거든. 비서에게 시킨 일이 있는데, 슬슬 보고가 들어올 때가 되었다네.”
“성실하긴. 휴가 기간에는 좀 내려놓고 즐기라고.”
엘리엇은 그 말에 미소만 짓고 다른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휴게실의 문 앞에 라이언이 서 있었다.
“엘리엇.”
“멍든 곳은 좀 어때?”
무시할까 했으나 엘리엇은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날의 일은 그날 끝났다. 외부에 알려지면 물론 라이언도 곤란하겠지만 엘리엇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의 일이고, 사실 명예가 손상된다는 점에서는 라이언보다 엘리엇이 더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일도, 그날의 일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의 이성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 엘리엇을 조금 안심하게 했다.
“……별로, 아프지 않아.”
라이언이 약간 초조한 듯이 서성거렸다. 엘리엇은 “그런가.”라고 대꾸했다. 그러고 나자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럼.” 하고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하고 물러나려 하자 그가 엘리엇의 팔을 잡았다.
“엘리엇.”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던가?”
“그……. 미안하다.”
“나야말로. 엉겁결이었다고는 하지만 미안했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엘리엇은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가려 했지만, 라이언이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엘리엇은 정중한 동작으로 그 손을 떼어 냈다.
“라이언, 이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
라이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엘리엇은 그를 뒤에 남기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도 라이언이 자신을 사랑했다고는 역시 생각할 수 없지만,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능한 한 상처 주지 않고 서로 웃는 얼굴로 헤어지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주먹을 갈겨 버린 시점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응접실에서는 예정대로 이자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엘리엇 님.”
“멀리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내 부재를 대리하느라 할 일이 많을 텐데.”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걸요.”
그녀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엘리엇은 그것을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알버트와 마셜 씨의 대화는 어찌 되었는가? 별문제 없었겠지?”
“네. 두 분 모두,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상정 안의 범위에서 합의를 보신 듯합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서를 준비 중입니다.”
“그래. 돌아가서 보겠네. 시간이 애매한데 식사라도 하고 가게.”
“션 님은요? 안 계십니까?”
“오늘은 웨스트베리 남작과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더군. 친구들을 소개받기로 한 모양이야.”
웨스트베리 남작의 친구들이라면 주로 귀족가에서도 육촌 이상의 방계이거나 겨우 경의 칭호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이제 막 사교계에 발을 들인 신흥 부자들이다. 사교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숫자는 다수였고, 션이 안착하려면 그들 사이에 끼어야 한다.
대부분 작위 계승자로 구성된 엘리엇의 주변 그룹은 매우 폐쇄적이고, 외부인이 새로운 멤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앨리스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상대적으로 여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쉬운 것 같지만, 아마 성별의 차이 때문에 그럴 것이다. 정말로 그녀들의 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션이 여자였다면 아마 반대의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어느 위치에든 자리를 잡기만 한다면 신분 높은 숙녀들의 지지는 큰 힘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션이 웨스트베리 남작과 앨리스를 다리로 삼아 의식적으로 친교를 넓혀가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그 이유가 순수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사교계의 친교라는 건 보통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법이다. 실제로 두 사람과 마음도 잘 맞는 것 같고, 션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엘리엇은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자벨이 다정하게 물었다.
“휴가는 즐거우십니까?”
“음. 글쎄. 그런 것 같아. 여러 가지로 시끄러운 사고가 있기는 하지만, 기분은 썩 좋다네.”
엘리엇은 만들어 낸 웃음이 아니라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사람이 기쁠 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이상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무료함을 잊는 것이 즐거운 것이라면, 그는 기억하는 한 지금까지 보낸 어떤 여름휴가보다도 지금이 가장 즐거웠다.
* * *
라이언은 잠시 혼자 서 있었다.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기묘한 기분으로 내려다본다. 붙잡을 뻔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무리 그가 엘리엇과 격의 없이 지낸 사이라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자신은 일개 자작가의 사남에 불과하고 그는 왕실과도 통혼하는 위체 가문의 적장자이다. 제아무리 자유로운 영국 사교계라고 하더라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세 번이나 손으로 붙들어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벌써 두 번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수군거리는 시선들이 다가왔다. 엘리엇은 느릿하고 부드럽게 그를 떼어 내고 사라졌지만, 거절은 거절이다.
‘거절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니고 서로 반말하던 친근한 사이에서라면 특히나. 엘리엇은 많은 사람에게 거절을 말하지만, 태도로 거절을 표하는 일은 많지 않다. 실망했다는 말을 쓰는 적은 더더욱 없다. 기대를 좀처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상 실망시키지 말라니. 그 말은 이미 자신에게 실망을 했다는 뜻이며, 반대로 말하자면 그전에는 자신을 나쁘지 않게 평가했었다는 뜻이다.
등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열이 확 올랐다. 라이언은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에서 나왔다. 온몸에 붙어 있던 시선들이 후드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실망했다는 것은, 10년 전에 마리나의 프러포즈 링을 샀다고 고했을 때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10년이 지났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지난 10년 동안 엘리엇에게 새 사람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딱히 옛 관계를 돌이켜 엘리엇의 애인이 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자신은.
객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배 안에서는 어느 순간에도 진정한 의미로 혼자가 될 수는 없다. 그의 객실도 거실과 침실, 응접실로 구성된 스위트룸이지만, 아내까지 피할 수는 없다.
운이 좋게도 마리나는 객실에 없었다. 몸이 좋지 않다며 요즘 온종일 객실에 머무르고 있는 아내가 어디에 갔을지 생각할 여유도 없어진 채로 라이언은 거실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오랫동안 쌓인 피로가 목 뒤에 매달린 듯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그는 등받이에 목까지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찢어져서 상처가 난 입 안쪽이 얼얼하게 아프다. 펀치를 침착하게도 날렸지. 라이언은 그때를 생각했다. 거부당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이 적어도 외모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엘리엇에게 어필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의 취향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격보다 바뀌기 어려운 것이다. 먼저 욕망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 것은 엘리엇이었다. 10년 전에 말이다.
처음에 강제로 그를 소파에 눌러 눕혔을 때는, 남자에게 당했다고 말한다면 입장상 더 곤란해지는 것이 엘리엇 자신이므로 일이 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가 받아들이리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물론 그것은 이미 10년 전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유혹은 실패하면 물러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라이언은 딱히 엘리엇에게 집착하고 있다거나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떠날 때 미안했던 것은 그가 화를 내거나 그때까지의 나름 좋았던 관계가 완전히 종결되어 버리는 것이 두려워서 제대로 대화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침대에 내버려 두고 가 버렸던 것이 비겁한 일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와 유혹했던 것은 잘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마음을 터놓고 진솔하게 사과한다면 엘리엇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굳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의미한 사죄 대신에 옛정을 기억나게 할 만한 달콤한 말을 던지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사리 뭐가 시작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충동에 몸을 맡기기에는 이미 나이와 신분이 있고, 엘리엇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새 애인이 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특별한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호감을 가져 주거나 매력을 느끼면 좋다. 누구라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냉정하게 굴지 못하는 법이고,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게 되어 있으니까. 물론 즐길 수 있다면 더 좋다. 그러나 가져야겠다고 덤비다니, 그것은 아니다. 도를 지나친 행동이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돌이켜 보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과하면 역효과가 날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생각하지 않았던 말을 뱉고 있다. 옛날처럼 한다고 해서 다시 한번 손에 넣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왜 그러고 있는 건가, 자신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머리가 아프다.
손은 왜 뻗으려고 했던 건가. 마치 정말로 갈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라리 처음부터 접근하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엘리엇과 자고 싶은 건가. 그렇기는 했다. 그것이 엘리엇에게 해방구였던 것처럼 라이언에게도 일종의 해소였다. 다리를 벌려 밀고 들어가고, 울면서 안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면 시원해지겠지.
그는 잠시 그것을 상상해 보았다. 코 안쪽이 찡하게 울린다. 엉덩이를 때리면서 박을 때만은, 자기 물건을 감당하지 못한 엘리엇이 베개를 끌어안고 주체 못 하고 교성을 올리는 것을 볼 때만큼은 늘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열등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곤 했다.
‘천박하게.’
고상함과 세련됨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부의 침착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있으면 세평도 자연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알면서도 내심을 포클레인으로 후벼 파서 바닥 깊은 곳에 가라앉은 찌꺼기까지 휘저어지는 것처럼 지저분해진다. 정신이 아니라 신체까지 통제할 수가 없게 되고, 그러는 자신을 참을 수 없다.
울분이 치솟은 채로 그는 침실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묵직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뒤집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손에 걸리는 것을 아무것이나 집어던져 액자를 박살 내고 다시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기절한 듯이 소파에 쓰러져 있던 라이언은 꿈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에 잠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멍한 채로 그는 뒤집힌 테이블과 깨진 컵, 부서진 액자 틀과 바닥을 뒹구는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잊고 문을 열러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현관 앞에 있는 것은 션이었다. 얼굴에 사람을 매료시키려는 듯이 달콤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고 라이언은 생각했다. 당연한 것처럼 들어오라고 그는 반걸음을 물러섰다. 션이 성큼성큼 응접실로 들어섰다.
“제가 방해를 한 것은 아니겠지요?”
“방해라니. 아닐세. 누가 자네가 방문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언제든 환영이야. 들어오게.”
그것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라이언은 자신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 채로 거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션이 사양하지 않고 거실까지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엉망진창이군.”
“그럼 침실로 갈까?”
“사양하겠습니다.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니까.”
션은 소파에 앉으며 라이언에게도 “앉으시죠.”라고 자리를 권했다.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서성거리는 구둣발에 밟힌 유리 조각이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어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가?”
“라이언 경이 말했던 비즈니스에 대해서 흥미가 생겨서 말입니다.”
라이언은 몇 걸음을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우뚝 섰다. 그리고 션을 바라보고 멍한 얼굴을 했다. 션은 천천히 몸을 젖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물었다.
“개인적인 흥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이성애자에 가까운 바이라는 건 알고 있고, 사실 본인이 남자에게 전혀 흥미가 없다고 생각해왔던 여자나 이성애자 남자가 내게 성욕을 품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이 스피로 호텔에서 내게 말했던 ‘비즈니스’라는 건 분명히 엘리엇 씨에 관한 이야기였을 텐데, 왜 당신 자신이 엘리엇 씨를 유혹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마 신분도 있는 분이 그럴듯한 남자를 찾아내지 못했으니 스스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닐 테고.”
라이언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리엇은 외로움을 타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하고. 하지만 나는 그런 데에 쓸 시간이 없어. 웬만해서는 받아 주고 싶지만, 아내도 있고 사업도 있으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그러니 나 대신 녀석의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해. 마음이 바뀌었다면 잘됐군. 물론 주도권은 내가 쥘 거야. 자네가 분수를 잊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합당한 보상도 해 주지. 자네도 그를 손에 넣기 위해 애를 많이 썼을 텐데, 나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놀라고 당황했을 것도 이해해. 자네가 적절히 예의를 지키고 성의를 보여 준다면 나도 얼마든지 자네 지분을 인정할 생각이 있네.”
“당신 말마따나 저는 이미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굳이 당신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자네 혼자로는 무리일걸. 엘리엇은 자네를 꽤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만, 자네로서는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많을 걸세. 그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함께하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아. 곁에서 다정하게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것 말고 자네에게 가능한 일이 무엇인가?”
“흠. 그런가요?”
“게다가 대적해야 하는 것은 다른 남자들 따위가 아니라네. 아일라 스칼렛은 단순히 별거 중인 처가 아니라 공작 부인이야. 헤리퍼드는 단순히 부유한 가문, 혈연으로 구성된 집안이 아니라 그 역사도, 부도, 권력도, 왕실과 하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찰스 공이 직접 그녀를 끌어 올려 엘리엇의 약혼녀로 세우고, 열 살 때부터 공작 부인으로 교육시켰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자네가 엘리엇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정당한 공작 부인을 혼자서 밀어내고 그 역할을 다할 수는 없을 걸세.”
“뭐, 그렇다고 칩시다. 나 같은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진 것은 그렇다 치고 학력이 낮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뭡니까? 공작 부인을 밀어낸다고 해서 당신이 뭔가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엘리엇 씨에게 뭔가를 부탁한다든가, 친교를 맺는다든가, 그러기 위해서 정부를 밀어 넣어서 줄을 대어야 할 정도로 먼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만약 내가 엘리엇 씨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당신의 비즈니스를 받아들여서 비로소 유혹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에게 좋은 쪽으로 말해 주는 것 정도일 것 같은데요. 헤리퍼드 안에서 아일라 씨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작지는 않지만, 공작 부인의 예산을 유용해서 뭔가를 해 보고 싶어 할 만큼 작은 그릇은 아니실 테고.”
“엘리엇을 가질 수 있지.”
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엘리엇은 내 것이야. 다른 놈 따위에게 넘기려고 10년이나 모르는 척했던 게 아니야. 다른 놈 밑에서 앙앙거리라고 길들인 건 줄 알아?”
션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이언에게 주먹을 날리는 대신에 말을 이으라는 듯이 손바닥을 가볍게 펼쳐 보였다.
“그 녀석에게 키스할 때 혀를 쓰고 상대의 입술을 깨물게끔 가르쳐 줬던 것도 나였고, 엉덩이 구멍을 벌려서 안을 길들이고 몸을 열어 준 것도 나이고, 뒤만으로 싸게 만든 것도 나였어. 어때? 너랑 잘 때도 소리를 많이 지르지? 어디가 좋다 아쉽다 어디를 박아 달라 부끄러움도 모르고 졸라 대고? 그거 다 내가 가르친 거야. 뭘 해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애원하게 시켰지. 처음에는 교성을 내기는커녕 이불 물고 침대에 드러누워서 다리만 벌리고 있던 녀석에게 스스로 뒤를 적시고 남자를 올라타게까지 만드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 것 같아? 몸이 달아서 뒷구멍을 쑤시면서 애원하게 하고 하루 종일 울리면서 장난감으로 놀게 한 적도 있어. 관장도 직접 해 줬었지.”
라이언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억양은 사라지고 대신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듯 온통 추악하게 일그러진 표정만이 꿈틀거리고 움직였다.
“왜 그런 얼굴을 하나? 네 앞에서는 점잖은 척이라도 해? 남자 좆에 정신을 못 차리는 놈이 아니라면 너 따위를 파트너로 삼았을 것 같아? 설마 정말로 엘리엇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신분을 생각해. 스스로 감히 그와 어울린다고 착각하는 건가? 네가 정말로 제대로 된 파트너라서 이 배 안에서 사람들이 네게 웃어 주는 줄 알아? 애완견에게 잘 대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혈통이 좋건 나쁘건 개는 어차피 개니까. 주인이 사랑하기만 하면 그 가치를 다하는 게 아닌가. 어차피 대부분은 엘리엇에게 아첨할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들이고, 그 녀석이 너처럼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꼽추 얼금뱅이를 데려왔어도 지금과 똑같이 대할 거야. 뭐, 취향 문제로 뒷소리는 좀 하겠지. 그렇지만 액세서리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헤리퍼드 공작인 이상 품격이 떨어지는 일은 없어. 너는 결코 엘리엇의 파트너가 될 수 없어. 아마 엘리엇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널 소개시키는 거 아니겠어? 나야말로 어울리는 상대야. 그 녀석의 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나야. 신분도, 지위도 모자라지 않고 침대에서도 즐겁게 해 줄 수 있지. 나라면 그 녀석 옆에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어울릴 수 있어. 보조해 줄 수도 있고, 그 녀석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것도 가능해. 서로 가치 있는 관계라는 건 동등할 때나 가능한 거야. 자네는 아름답고 근사해. 원한다면 얼마든지 셋이 함께 즐겨도 좋아. 물론 자네가 우리 둘을 따로따로 원한다고 해도 용인해 줄 수 있네. 그렇지만 그는 내 거야.”
미친 사람처럼 연이어 말을 쏟아 내던 라이언의 입이 갑자기 딱 멈췄다. 그리고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다가 선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당황해서 션을 쳐다보았다. 션은 무표정한 채, 입꼬리만 올리고 말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 보죠. 요컨대 당신은, 본인이야말로 엘리엇 씨에게 합당한 상대라고 생각한다는 겁니까?”
“그래. 나 이외의 대안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라이언이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말하는 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일이라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몰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말하는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들렸다.
“나는 세인트데이비스야. 명예 선언을 잇는 가문의 아들이면서 가문에 대해서는 아무 의무도 없으니 그에게 헌신할 수도 있지. 나야말로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고, 유일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마땅히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의지해야 해. 나야말로 격에 맞는 상대이니까. 그런데 나를 깔아뭉개? 감히? 고작해야 내 밑에서 엉엉 울면서 다리나 벌리고 있던 주제에? 너 따위를 위해서 나를 때려? 웃기지 마!”
희번덕거리던 라이언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졌다.
“아니, 틀려. 도망간 건 내 쪽이었어. 엘리엇이 너무 끝없이 받아 줘서 그걸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그냥 좀 편하게 놀아 볼 작정이었는데 계속 마음에 부채가 생겨서. 짓밟고 깔아뭉개려고 해도 그 녀석은 굴복하거나 비굴해지는 법이 없고 무슨 짓을 해도 침대에서의 유희로 받아들이고 마음 쓰지 않았지. 그건 스스로에게 당당해서였던 건가? 모르겠어. 그는 지나치게 고결해. 같이 있을 때마다 내가 모자란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게 됐었어.”
라이언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자작가의, 고작해야 사남.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작위에 귀속되어 있어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사교계에서의 지위조차 애매하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스스로 얻어 낸 것뿐이었지만, 엘리엇처럼 사업이나 투자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두뇌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20살 때부터 요나 클럽과 브룩스 클럽의 멤버였고 교우관계는 사교계에서도 최상층부에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나 엘리엇처럼 숨만 쉬어도 당연하게 그 안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교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록 명예 선언에 이름이 올라 있는 귀족가의 아들이라도 아차 하는 사이에 떨궈질 하찮은 신세인 자신이 침대에서나마 그를 정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늘,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 녀석이 형편없는 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면, 아니면 멍청했으면, 병신 같은 놈이었으면, 그러면 손에서 놓지 않았을 거야.”
라이언이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그 손 안은 비어 있었다. 잡은 적이 없는데, 무언가를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얻어 낼 수 없는 걸 그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어. 불공평하지 않아? 매일 집에서 책이나 읽고 있는 게 불쌍해서 클럽에 데리고 가면 모두가 그놈에게 아첨하고 친해지려고 정신이 없지. 내가 데려갔는데 아무도 내게는 관심이 없어져 버려. 엘리엇 자신조차도. 한 번 본가에 데려간 이후에는 아버지조차도 그 녀석의 친구라는 이유로 나에게 잘 대해 주기 시작했었다고. 그 녀석의 비서가 되라고? 미쳤어? 나는 꼬리나 흔들면서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개들과는 달라. 나야말로 특별해. 나만은 달라. 나는 그 녀석과 대등해질 수 있다고.”
“그래서 떠났었습니까?”
“그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고 그러는 방법조차 모르는 채로 오롯이 고결하게 있겠지. 그래. 그것이 좋아. 남자와 파트너라니. 온당하지도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엘리엇이 나와의 거리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좁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네. 그러려고 했다면 아마 나는 곤란해했을 걸세. 매달리기라도 했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테고. 그런데도 돌아 버릴 것 같았어.”
도대체 왜였을까? 엘리엇은 마리나와 데이트를 하고 왔다고 해도, 반지를 주었다고 해도 무반응이었다. 다른 여자와 자고 온 흔적을 남긴 그대로 안으려고 했을 때도, 험한 짓을 하고 때려서 강제로 안았을 때도.
라이언은 그 모든 것을 배설하듯이 줄줄이 말했다.
“그게 무슨 플레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을 도구 취급했다고! 화를 내면 무슨 낑낑대는 개라도 보는 것처럼 쳐다보고!”
자존심 때문에 한 번도 엘리엇에게 말하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아니, 그 자신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술을 잔뜩 마시고 침대에 눕거나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뒤척이다가 언젠가 한 번쯤은 들여다봤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언어로 확인하지 않고 열등감이라는 뚜껑으로 덮어 저 밑바닥에 가라앉혀 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늪 같은 색깔이다.
“그런 관계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 녀석이 반응하는 걸 보고 싶었다고. 울화통을 터뜨리고 분노하고 주먹이라도 휘두르기를 바랐던 거야. 열이 받아서 내 인생을 짓밟아 놔도 상관없으니까 나를 인간으로 봐 주기를 원했어! 하지만 아무리 부추겨도 그 녀석은 온화하고 평연한 얼굴로 좋을 대로 해, 네 인생은 네 것이지, 하고 지지도 반대도 표시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서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그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 무릎을 마구 내리쳤다.
“그랬던 녀석이 연애를 한다고? 누군가의 것이 돼? 나에게 주먹질을 해? 그런 일 있을 리가 없잖아. 이건 말이 안 돼. 논리가 맞지 않는다고!”
션은 나직하게 말했다.
“엘리엇 씨에 대해서는 이제 됐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아내 이야기를 해 보죠. 엘리엇 씨는 당신이 부인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던데.”
“마리나는……. 불쌍한 여자야.”
“그것뿐입니까?”
“호감은 있었지만 사랑했던 건 아닐세. 하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마음먹었네. 자파스 가문과 그녀의 상속 재산은 내 지위를 20년, 30년 이후에도 유지시켜 줄 테니까. 사실 나 같은 애매한 신분의 귀족은 연금권도 적고, 아차 하는 사이에 신분이 떨어지기 십상이라네. 하지만 자파스의 뒷배가 있다면 다르지.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그러니까 나는 자파스 가문의 일원이 되고 그녀에게 정성을 다하기로 했었다네. 가진 것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 내 자식은 나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귀족의 방계 같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수 없었으니까.”
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아내의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그를 휘감고 있던 진득한 오물 같은 것이 흐려지면서 투명한 절망으로 변하여, 션에게는 비로소 사람의 형체가 보이게 되었다.
“내 이름이 어디에도 남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어. 나는 내가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를 원할 뿐이야. 엘리엇은 나를 아주 조금만 도와주면 돼. 당연한 거잖아. 내가 해 줬던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위로를 주고, 약간 도움을 받겠다는 것뿐이라고. 아니야. 이런 건 내가 아니야. 엘리엇도, 마리나도 이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두 사람 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고귀하고 고결한 사람들이야. 내가 염치도 없이 헛소리할 때가 아니지. 미치겠군.”
라이언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여전히 말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그냥 약간의 호의가 필요했던 것뿐이라고. 관계를 되돌리겠다든가 그런 게 아니었어. 그저 예전처럼 가끔 같이 게임도 하고 술이나 마시고, 외로워할 때는 위로해 줄 기회라도 얻으면 그걸로 족했어. 마리나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그녀가 형편없는 집에서 싸구려 옷을 걸치고 병신 같은 남편과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엘리엇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잖아. 새끼손가락만 움직여도 나를 도울 수 있어. 그러니 아직도 혼자 있다면 조금 위로해 주고 교류하는 것 정도는.”
말하다 말고 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불현듯 고개를 들고 션을 쳐다보았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는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지만 손가락 끝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션을 향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그것조차도 평소의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션을 바라보자 그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당신이 냉정하다고 엘리엇 씨가 그러는 걸 믿지 않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보통은 이쯤에서 혼자서 정신을 차리지는 않을 텐데.”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그 말을 하는 순간 깨달음이 치솟아 올라와 목 위까지 턱 막혔다. 이런 이야기를 션에게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그를 거실로 들인 것부터 그렇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응접실에서 하면 족했다. 그러고 보니까 침실로 가자는 이야기도 했었다. 엘리엇에게 했던 말들도 그렇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등골이 차가워졌다. 션이 희미하게 웃었다.
“특별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입을 가볍게 했을 뿐이죠. 지금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신 자신의 감정이고, 의사입니다.”
“이게 나라고……. 그럴 리 없어.”
“증폭 능력은 없는 감정과 의지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니까요. 아, 낯설지요? 정신 조작계 GFG 중 한 가지입니다.”
정신 조작계라니. 영화나 소설에서 간혹 나오는, 세뇌이니 매혹이니 하는 능력을 말하는 걸까. 숫자가 적은 비치유계 GFG 능력자 중에서도 특히나 드문 편이라는 지식을 떠올린다. 라이언은 자신이 왜 그런 것을 알고 있는가 하고 놀랐다. 어디에선가 들었어도 잊어버렸을 법한 것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이 기억 속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나를, 세뇌라도 한 건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제가 뭐 하러 그러겠습니까? 증폭이라는 것도 사용 방법에 따라서는 복잡한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킬 수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고작해야 내심에 묻어 놓고 있던 생각을 끄집어낸 것뿐입니다.”
션이 두 손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놓았다.
“당신을 죽여 버리려고 했었습니다.”
션은 가만히 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엘리엇에게 맞아서 생긴 멍이 남아 있었다. 그가 엘리엇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 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에 문을 열었을 때 엘리엇이 상황을 종료시킨 다음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이성을 잃고 그의 앞에서 저자를 핏물에 담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봐주려고 했었다. 무엇보다도 엘리엇이 그렇게까지 했으니까. 흥분하지 않고 과격한 언사를 쓰는 일도 없는 사람이 조용하게 물러나라고 말하거나 사람을 불러 해결하게 하는 대신에 자기 주먹을 휘둘렀다는 게 너무 놀랍고, 고마워서 가능하면 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옛날에 헤어진 애인이나 파트너에게 미련을 남기는 사람은 아주 많다. 절실한 애정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자존심 문제라든가 소유욕, 그것보다도 더 우스운 이유로도 옛 관계를 돌이켜 보려고 시도한다. 불쾌하기는 하지만, 엘리엇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션도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당신이 엘리엇 씨를 끌고 가 강간할 마음을 품은 것을 압니다.”
“그런 적,”
“없다고 할 수는 없을 테죠.”
라이언이 입을 다물었다.
휴게실 앞의 복도에서 그가 엘리엇과 실랑이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우연이었다. 원래 점심 약속 상대였던 웨스트베리 남작이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면서 휴게실로 가자고 권했기 때문이다. 애스터 하원의원의 조카라는 스티브 애스터와 데스몬드 백작의 대리인으로 상원에 출석하고 있다는 캠벨가의 아들을 소개받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휴게실 앞에서, 라이언이 엘리엇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끼어들거나 엘리엇에게 말을 걸며 인사하지 않은 것은 라이언의 주위를 둘러싼 색채가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봤을 때만 해도 저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당당함, 그리고 사람을 더 매력적이게 만드는 의심 없는 자기 확신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어떤 종류의 절박함과 애틋함이다.
그래도 션은 못 본 것으로 하려고 했다. 엘리엇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사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엘리엇을 믿지 못할 정도의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라이언이 손을 뻗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 순간 그를 둘러싼 공기가 일변했다. 날카롭게 허공을 찌르는 섬뜩한 감촉은 악의였다. 아니, 의식화되지 않은 것이니 음습한 악의보다는 욕망을 전혀 제어하지 못한 야만성에 가까웠다. 순간적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 담겨 있는 잔악한 폭력성과 지독한 갈증이 눈을 찔렀다.
션이 그 자리에서 나서지 못한 것은 웨스트베리 남작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보다 순간의 분노를 우선시하기에는 그는 너무 억누르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야기를, 했을 뿐이야.”
“실행할 자신이 없어서 이야기만 했으니까 당신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겁니다.”
타인의 감정이 보이는 것에 대해서 편리하다거나 좋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지만, 이럴 때는 조금 더 불편하다고 션은 생각했다. 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라이언은 좀 불쾌한 애인의 친구에 불과했을 것이고, 좀 더 속 편하게 접근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를 했든가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채로 참았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신 하나쯤 죽이는 것도,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이미 각오했으니 당신을 그 시작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션은 피곤하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당신은 엘리엇 씨를 진짜로 좋아했었군요. 적어도 10년 전에는. 지금은 순수성을 완전히 잃었어도.”
엘리엇이 변하지 않아서,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어떻게 해도 손이 닿을 것 같지 않아서 자기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려 품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했던 짓을 감당하지 못해서 한 번 달아났던 것조차도 똑같지 않은가. 다만 차이점이라면, 그는 실패했고 자신은 성공했다는 것뿐이다. 또 한 가지, 자신은 엘리엇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저 다정하게 대하고 기분 좋게 해 주는 것밖에는 붙들어 둘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라이언이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당혹하고, 놀란 것 같았다. 충격을 받은 듯이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져 있었다.
“그럴 리가. 나는 어디까지나, 인맥 때문에.”
“시작이야 그랬겠죠.”
션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냉정한 상태로 이익을 따져 접근했더라도 종내에는 옛 감정이 되살아났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아마 자신의 GFG일 거라고 션은 생각했다.
평소처럼 극도로 억제하는 대신에 힘을 몇 번이나 풀어놓았고, 탐색 방법을 익힌다고 지속적으로 증폭 능력을 사용했다. 그것이 오래된, 잊어버린, 그저 바다 밑에 가라앉은 듯 깊은 곳에 잔해처럼 희미하게 남은 것까지도 긁어내어 버렸으리라.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책임일까.
션은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의 정신에는 무의식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보통은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 쪽이 많다. 라이언 자신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설령 내심에 아주 지저분하고 용납 불가능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드러나게 된 것도 십중팔구 자신의 탓이다.
그렇다 해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를, 어쩔, 작정인가?”
션이 고민스럽게 손끝을 까닥거리자 라이언이 두려움에 질린 채 몸을 떨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몸을 움직일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고, 션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이제까지는 ‘실행하지 않은 욕망’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엘리엇도 아마 참는 것이 옳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만약에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자는 감히 엘리엇을 강간하기는커녕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천천히 깍지 낀 두 손의 엄지로 눈 안쪽을 눌렀다. 고삐가 풀리면 언젠가는 맥처럼 권력을 탐하게 될까. 그렇지 않으면 엘리엇을 실망시킬 것이 염려스러워 지금처럼 계속 지낼 수 있을까.
자비심을 가져라, 그러면 알라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그는 무슬림이 아니었으나 은인의 말은 늘 금과옥조로 여겨 왔다. 동시에 한심스러워하고 혐오하기도 했다.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축복을 기대하며 자비를 베풀고 베풀다가 자기 자신만 끝없이 바닥까지 추락하여 너덜거리는 인형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좀 화가 많이 났어요. 하지만 역시 엘리엇 씨가 원하지 않으시겠죠.”
결국 신은 그에게 은총을 내려 주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옳으리라. 그리고 공정한 엘리엇은 힘이 있는 이는 인내해야 하고, 실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벌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고 하겠지. 션은 그렇게 말하는 엘리엇의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라이언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흩어져 있던 유리 때문인지 무릎의 옷자락이 조금씩 붉게 젖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의사인지 라이언 스스로 한 것인지 션 스스로도 애매해져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이 숨이 막히는 듯 끅끅거리고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당신을 살려 주겠습니다. 용서하는 건 아닙니다. 두 번 다시 영국에 오지 마십시오. 엘리엇 씨의 눈에도, 내 눈에도 띄지 말고, 혹시라도 당신의 이름이 엘리엇 씨의 귀에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숨을 죽이고 사십시오. 그리고 한 모금 한 모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으려 했는지 깨달으십시오. 이것은 명령입니다.”
션은 조용하게 말했다. 서늘하고 확고한 선언이 정신 방벽을 일부 부수고 들어가 심령에 새겨진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짓눌려 라이언이 새파랗게 변한 채로 휘청거렸다.
“자기혐오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쓰레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히, 유난스럽게 최악인 쓰레기라는 것도 아니니까. 보통 사람은 밑바닥을 끌어내면 다 똑같거든요. 그리고 희망을 잃을 필요도 없습니다. 신의 자비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지는 모양이니.”
뒷맛 씁쓸한 기분으로 중얼거리고 션은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라이언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 * *
엘리엇은 그 시간에 2층의 메인스트리트에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이자벨을 배웅하고, 도서관에 들러서 추리소설을 한 권 빌리고 내려왔을 때는 벌써 오후 3시에 가까웠다.
션이 이끌지 않으면 대부분 전용 시설만 이용하고, 그나마도 대부분 휴게실이나 테라스의 소파에서 잡지나 읽고 차나 마셨기 때문에 혼자서 2층까지 내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번잡함 속에 묻혀 그는 바다 쪽으로 트인 테라스가 있는 티 룸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내려온 것은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션과 함께 왔을 때는 괜찮은 장소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조용한 분위기인 탓인지 사람이 아예 없었다.
홍차를 시켜 놓고 엘리엇은 먼저 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거의 15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로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친교를 맺는데 점심 약속이 정말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더 이상하기 때문에 엘리엇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소설책을 읽으며 15분 정도를 기다렸다. 결심이 서려면 좀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마리나 세인트데이비스는 약속 시간보다 5분도 늦지 않고 도착했다.
그녀는 커다란 감청색 모자를 쓰고 비슷한 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여 병색이 완연하다. 첫날 디너 파티에 참석한 이후로 줄곧 칭병하고 객실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엘리엇은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합하?”
마리나 세인트데이비스가 천천히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엘리엇은 숙녀를 대하는 예의로 일어서서 의자를 빼 주었다.
“아닙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이런 곳까지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인께서도 남의 눈에 띄는 것은 원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약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엇은 따뜻한 밀크티라도 마시라며 권했지만, 그녀는 건성으로 끄덕이고는 성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남편의 일로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우선 차를 드시지요. 부인에게 해될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겁먹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마리나는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따뜻한 차를 몇 모금 마셨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지 안색이 화평해지지 못했다. 엘리엇은 그냥 용건을 빨리 마치고 그녀를 보내 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돌려 말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은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인께서는 10년 전에 저와 라이언이 친밀한 관계였던 것을 알고 계십니까?”
마리나가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네, 압니다.”
“그건 옛날 일이고, 부인께서 오해하지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라이언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최근 두 분의 재정 상황을 좀 살펴봤습니다.”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옛 친분을 빌미로 다가오는 사람은 결국 돈 문제가 아니면 청탁이다. 그리고 라이언도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직접적으로 금전적인 원조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초반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그가 생각했던 것은 자신과의 친분을 과시함으로써 신용을 높이고, 런던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것 정도였으리라. 실제로 관계가 깊어진다면 쓸 만한 정보를 얻는다거나 먼저 지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사업에 세 번이나 실패했더군요. 스피로 호텔을 인수한 것은 타개책이었겠지만 잘되지 않았던 것 같고요. 자녀 문제로 부인의 상속권도 묶여 있어서 현금이 전혀 돌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물었다. 핸드백 위에 놓인 손이 바들바들 떨었다. 엘리엇은 여기에서 그녀가 울거나 쓰러진다면 무척 곤란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난감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리나에 대해서 잘 알진 못했지만, 옛날에 라이언에게 들은 것과 서류상의 기록들로 그녀가 꽤 용감하고 침착한 여성이라는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는 것이다. 라이언이 변한 것처럼 그녀 역시 변했다면, 이 자리로 그녀를 불러낸 것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문제는 사람을 몰아세운다. 그녀가 신경쇠약에 걸려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엘리엇은 그것을 이제야 생각해 낸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서 더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새파랗게 변하기는 했지만, 고개를 들고 엘리엇을 바라보고는, 정중하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이었어요. 그이가 무모한 투자를 시작하게 된 것은. 죄송합니다. 그이의 잘못을……. 제가 사죄하는 것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부디 옛정을 생각해서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말리지 못한 제가 잘못입니다.”
“부인을 책망하려고 불러낸 것이 아닙니다. 라이언은 도리어 제가 아니라 부인에게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요. 저야말로 지금까지 확실하게 말로 잘라 끊어 내지 않고 어영부영한 태도를 보인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변명은 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이 사적으로 접근해 오는 것에 좀처럼 익숙하지 않아서 대응이 늦었습니다.”
엘리엇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요전의 일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라이언의 태도가 모호하다고 생각하여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가는 사정을 전부 파악한 후에 다시 생각하면, 그 자존심 강한 라이언이 어떻게 끝이 났든 간에 스스로 그만둔 옛일을 들먹여 질질 끌려고 하는 것이 이미 이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과거에 감정이 있었다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결코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리라.
둘러 가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엘리엇은 씁쓸하게 웃었다. 진솔하게 터놓고 사업 문제를 상담했더라면 얼마든지 도와주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모호한 관계로 줄다리기를 하는 것보다는 돈을 주는 쪽이 훨씬 간편하다.
키스하려고 했던 것은……. 그 부분에 대한 것만은 여전히 불확실했으나 반복된 거절로 상한 자존심을 그것으로 만족시키려고 했다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첫 관계를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라이언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무마시킬 수 있다고 믿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라이언에게는 미안하지만, 션을 생각하면 역시 주먹질을 해 버린 것은 잘한 일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육체관계에 단순히 현혹되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향후의 일이라든가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라이언의 생각대로 10년 전의 자신이라면 그러지 않았으리라. 굳이 거절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오늘 이자벨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마리나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게, 뭔가요?”
“스피로 호텔의 양도 관련 서류입니다. 제가 채무까지 한꺼번에 인수하겠습니다. 명의는 부인의 것으로 되어 있으니 직접 서명하시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물론 검토할 시간은 따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그는 한 장의 봉투를 더 내밀었다.
“나머지 채무를 처리하고 부인의 상속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여유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겁니다. 부인의 고향에 작은 저택과 농장을 마련했습니다. 라이언의 성미에 맞는 생활은 아니겠지만, 한동안은 조용한 곳에서 쉬는 것도 마음의 회복에 도움이 되겠지요. 이것을 라이언이 아니라 부인에게 맡기는 이유는, 라이언이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현금을 쥐게 되면 분명히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 사업을 하려 할 테니, 부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다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곱게 발린 립스틱이 반 넘게 사라져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건가요? 이건 큰돈이에요. 그이가 합하께 접근하려 한 이유가 저희 부부가 궁지에 몰려 있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금전 문제를 부탁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빚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라이언은 지나치게 귀족적이지요. 죽는다고 하더라도 제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엘리엇은 어떻게 말해야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스피로 호텔 쪽은 수지타산이 맞다고 생각하고 하는 일입니다. 라이언의 사업 계획에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패한 것은 지나치게 조급해했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여유 자금이 없는 상태였던 라이언과 저는 경우가 다릅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구조 조정을 해 나가면 충분히 채무를 갚고도 적절한 수준의 이득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목적은 부인과 라이언을 런던에서 나가게 하는 일입니다.”
마리나가 망설임이 남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이언의 태도에 제가 불쾌감을 느꼈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제 파트너가 알게 되면 문제가 달라지겠죠. 션은 섬세한 성품입니다. 저를 무척 사랑하고 있고요. 제게 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 같지만, 라이언이 제게 친밀하게 구는 것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스피로 호텔을 인수하는 것은 저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는 흰 봉투를 마리나에게 조금 더 밀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드리는 것은 그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맙, 다고요?”
“10년 전에 저는 매우 기계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잊고 있었지만,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뭔가의 계기가 되어 삶이 바뀌기를 바랐었다는 것을 엘리엇은 기억해 냈다. 퍼블릭 스쿨의 기숙사에 들어갈 때도 작은 집에 혼자 이사하게 되었을 때도 지루한 세상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한 번도 변한 적은 없다.
침구를 제 손으로 정리할 때나 남이 정리해 줄 때나 세상은 언제나 똑같이 무채색이었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신분의 격차가 있어서 허물없이 대해 주는 사람이라고는 앤드류와 알버트, 리암 정도밖에 없었고, 정말로 그때까지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라이언은 저를 강제로 집에서 끌어냈었죠. 혹은 누군가를 데려오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면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코인 세탁소에 가 본 것도, 카페에서 커피를 사 본 것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콜라를 마셔 본 것도 라이언과 함께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펍에도 처음 가 봤고, 택시도 타게 되었죠. 그를 알게 되기 전에는 밤을 새워서 카드놀이를 한다거나 위스키를 마신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웬즈데이 클럽에 가입했던 것도 라이언이 권했기 때문이고, 지금에 와서 혈연이 통하지 않은 사람 중에 친구라고 할 만한 이는 대부분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직접 그의 삶을 바꿨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시도들이 조금도 내면에 쌓이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뒤늦게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라이언 자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일은 없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가 계기가 된 일은 무척 많다. 남자와 자는 것 역시 그렇다. 아마 라이언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벽장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남 일처럼 바라보며 그때까지 많은 일들에 그러했듯이 체념해 버렸으리라.
그리고 그랬다면 션을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혹여 다른 계기가 있어 다른 남자와 자는 일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원나잇을 하기 위해 혼자서 바에 간다거나, 바에서 만난 남자와 싸구려 모텔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으리라. 아무도 모르는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서 션을 만난다는 발상은 할 수 있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누군가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앉아 일회용 그릇에 포장해온 요리를 먹는 일도 없고, 낯선 티 룸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1년도 넘게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도 라이언이라는 선행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하지 못했으리라.
그의 인생은 션을 만나 비로소 변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했던 많은 시간과 경험들 중에 라이언은 분명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런 정도의 금액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덕분으로 저는 인간답게 행동하는 법을 알았고, 제 자신이 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션과도 만나게 되었지요. 지금 같은 식으로 재회한 것이 아니었다면 저는 기꺼이 그에게 오랜 우정을 약속했을 겁니다.”
“합하…….”
“지금에 와서 라이언에게 그러기는 어렵군요. 대신 부인에게 성의 표시를 하려고 합니다. 부담 없이 받아 주시고,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해 주십시오. 두 분이 행복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결코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할 테지만요.”
마리나는 어두운 얼굴을 했다. 재정 문제를 알아본 것은 역시 과한 행동이었는가 싶어 엘리엇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봉투를 끌어당기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저희 상황이 어려워서……. 거절할 수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두 번 다시 저희 부부가 합하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엘리엇은 더 현명하고 좋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 아쉬워졌지만, 마리나가 말한 것 같은 의도도 분명하게 아주 강하게 갖고 있었으므로 첨언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리나와 마주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라이언이 두 번 다시 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다.
마리나와 헤어지고 나서 엘리엇은 리암을 찾아갔으나 바쁜 것 같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업무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일을 찾지 말고 션을 찾아서 공개된 장소에서 키스라도 하는 게 돕는 거라며 쫓겨났다.
션은 웨스트베리 남작과 무어 재미있는 일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3시가 훨씬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고, 기분은 좋은 편이었지만 굳이 휴게실에 가서 시간을 때우고 싶지도 않았다. 장소를 옮겨서 추리소설을 마저 읽고 나자 할 일이 없어졌다.
휴식의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때운다는 이유로 소설책 같은 것을 읽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휴가가 끝날 때까지는 더 이상 일도, 공부도 잡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엘리엇은 한가롭게 도서관에서 한 시간 정도를 돌아다니다가 아까 읽었던 소설과 같은 작가의 책을 열 권 빌려 잔뜩 손에 들고 객실로 올라왔다.
슬슬 연락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션에게서는 소식이 없다. 연락이 없다고 자기 쪽에서 초조해한 것은 처음이라서 엘리엇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침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서류를 해치우듯이 추리소설을 순서대로 끝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엇 씨, 계시죠?”
엘리엇은 일어서지 않고 그가 침실까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션이 문을 열면서 빙긋 웃었다.
“뭐 하고 계셨어요?”
“소설책을 읽고 있었네.”
엘리엇은 마주 웃으며 무릎에 놓아두고 있던 책을 들어 표지를 보여 주었다.
“추리소설 좋아하셨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고 시간이 남아서 그냥 빌려 봤다네. 자네는 연락이 되질 않던데, 뭘 하고 있었는가?”
“음. 비밀이요.”
무심결에 눈썹을 치켜들기라도 한 모양이다. 션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왜요? 질투하세요?”
“아니, 추궁하려던 건 아닐세. 점심 식사 약속이라면 이 시간까지 같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아서…….”
엘리엇은 말꼬리를 희미하게 늘어뜨렸다. 서로 영역을 지켜 주기로 했지만 역시 비밀이라는 말을 듣는 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별로 비밀은 아니고, 제이 씨한테 갔었어요. 어떻게 해야 오늘도 엘리엇 씨를 잘 꾀어서 잡아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죠.”
“그게 자네의 오늘 밤 전략인가?”
그는 션의 손에 들려 있는 살구색 술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이 씨의 추천이에요. 복숭아 향이 나는 리큐르라던데요?”
“그건 실패로군. 준이 자네를 놀렸나 본데? 나는 과일 향이 나는 알코올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네. 밤에 마실 거라면 나는 다른 것으로 하겠네.”
“괜찮아요. 마시는 데 쓸 건 아니니까.”
“그럼?”
션이 술병의 포장을 벗기고 뚜껑을 땄다. 그리고 바지를 벗고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왜 그러는가 하고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하자 부끄러운 듯이 발갛게 물든 얼굴로 션이 술병을 들었다.
“이렇게 해 볼까 하고요.”
목 아래로 확 술을 들이붓는다. 달콤한 복숭아 향과 독한 알코올 냄새가 한꺼번에 침실에 확 퍼졌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질어질한 상태가 되어 엘리엇은 홀린 듯이 션을 바라보았다. 하얀 셔츠가 젖어서 피부에 달라붙고, 단단하게 짜인 조각 같은 몸 위로 살구색 액체가 흘러내린다.
션이 얼굴을 붉히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엘리엇은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온몸을 훑는 시선에 션의 페니스가 브리프 안에서 형태를 조금씩 바꾸어 간다. 흘러내린 술이 배꼽에 고였다가 불룩한 아랫도리를 적시고 다리 사이에서 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엘리엇은 이성을 잃고 션에게 달려들었다.
* * *
그날 저녁에는 리암이 주최하는 디너쇼가 있었다. 거의 언제나 선박 자체에서 여는 공연과 쇼가 있고, 또 사교 모임의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디너를 주최하고 공연자를 섭외하여 자기 취향의 모임을 만들기 때문에 매일 밤 여러 개의 작은 디너 모임과 쇼들이 생기지만, 아무래도 크루즈의 호스트가 여는 것은 규모가 다르다. 참석이 의무화된 첫날의 디너 파티와는 다르지만 멋진 여행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주인의 친절한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으므로,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참석하는 큰 파티였다.
예년이라면 이 파티는 크루즈의 절정을 달렸을 것이다. 상류층의 숙녀들은 보통 사교계 모임에서는 입을 수 없는 파격적인 드레스를 꺼내어 입고, 남자들도 격식을 갖추지 않고 제멋을 다 내고 왔다. 작년에는 주얼리 쇼가 열렸고, 재작년에는 록을 공연했다.
올해에는 모피를 주제로 할까 고민했으나 엘리엇이 참석하는 고로 그 주변인이 많이 올 것 같아서 와인 경매로 바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션에게는 분명히 발목까지 내려오는 모피 코트를 입혀 놔도 썩 잘 어울릴 것이 틀림없으니까. 어차피 와인은 좋은 물품이 나와도 엘리엇 소유의 와이너리에 보관되고 있는 것보다 특별히 대단한 것은 없을 것이다.
‘돈을 우려내자는 건 아니지만.’
헤리퍼드 공작이 애인에게 올해 시즌에 제일 비싼 모피 코트를 사 주었다는 이야깃거리는 와인을 샀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신났을 텐데.
그러나 올해에는 글렀다. 분명히 초대장을 보냈는데 예의 바른 놈이 오지 않는다는 말도 없이 왜 행방불명인 건가 하고 리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올해에는 되는 일이 없다 했더니 디너쇼조차 망하는 건가.
엘리엇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을 겹겹이 쌓아 둔 데다가 패싸움 참가자 다수가 우울증에 걸린 듯한 얼굴로 배에서 내렸고, 그나마 활달함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던 라이언까지 오늘은 아내의 건강을 이유로 급히 내려 달라고 부탁해 왔다. 오늘은 정박 예정이 없다고 하니 그러면 헬기라도 동원하고 싶다고 하는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선을 부탁해 온 마리나 부인은 라이언이 말하는 것처럼 병이 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창백하고, 어떤 결의에 차 있는 것처럼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엘리엇에 관한 일에 빠르게 돌아 버려서 그렇지, 평소에는 멀쩡한 신사인 션이 부인에게 뭔가 손을 썼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엘리엇이 뭔가를 했을까. 옛 남자를 미리 알아서 처리할 만큼 주변머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여하튼 꽃처럼 꾸민 여자들과 단정한 남자들이 장내에 가득하기는 하지만, 역시 가장 핵심적인 인사들이 빠진 것은 숨길 수가 없다. 거기에 엘리엇까지 예고 없이 빠져 버리자 상층부가 뻥 뚫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자칫하면 리암의 교제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든가 이 크루즈 자체가 격하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와인도 훌륭하고 실내장식도, 음식도 완벽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요.”
루이스가 그에게 물었다. 리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표리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뒷소리도 많이 듣지만, 저것이 비꼬는 것이거나 격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게 염려하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면 마음은 오히려 편해진다. 리암은 미소를 지었다.
“잘못되면 그뿐이죠. 뭘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실제로 제가 선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것도 사실이고요.”
“통제력이라뇨. 제멋대로 입방아를 찧어 대고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잘못이죠.”
“글쎄요. 꼭 그렇다고만도 볼 수 없는 게 딜레마입니다. 뭐어, 사교계의 왕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니까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뒤늦게야 엘리엇과 션이 문가에 나타났다. 술렁술렁하던 것이 금세 진정되었다.
“어째 루이스 양과 이야기만 하면 저 녀석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아뇨. 저도 좀 느끼고 있어요.”
엘리엇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리암을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걸음이 불편한 듯 몇 번 멈칫하고, 부축을 하려는 듯이 다가서는 션에게 손을 내젓고, 다시 리암을 향해 온다. 그 얼굴은 평소답지 않게 들뜬 듯 발갛게 붉어져 있었다.
“늦었군, 엘리엇.”
“미안하네. 딴 일에 열중하고 있느라 시간을 확인하지 못했네.”
“근데 너 몸이 안 좋아? 설마 다리가 다시 불편해졌어? 아까 보니 걸음이.”
말하다 말고 리암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휴가 기간 중에 바쁜 일이 있을 것도 아닌즉 시간을 모를 정도로 열중할 만한 다른 일이 설마 카드 게임과 당구는 아닐 터이고, 얼굴은 발그레하게 붉고 눈자위는 상기된 듯한 연분홍으로 물들어 있다. 술 냄새도 났다. 복숭아향도 같이.
“술 때문이라네. 조금 어지럽군.”
대답은 필요 없었는데 엘리엇이 변명처럼 말했다. 리암이 션을 쳐다보자 그가 난감한 듯이 미소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서 좋은데…….”
늘 권장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정작 눈앞에 두자 마치 얌전하던 동생이나 걱정스러울 정도로 따분한 형이 부뚜막에 올라가 앉아 있는 것을 본 듯한 미묘한 기분이 든다. 이런 일에만 눈치가 빠르다니 괴롭다고 리암은 생각했다.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재능이다.
“피곤하니 얼굴만 내밀고, 일찌감치 들어가 보려네.”
“오, 엘리엇. 늦었군.”
“카일. 부인.”
그리고 그만큼 눈치가 빠르지 못한 남자 하나가 끼어들었다. 엘리엇은 느릿한 동작으로 스탠리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카일과도 묵례를 나누었다.
“오전 중에도 감기 기운이 있다더니 심해진 모양일세?”
“약간.”
“배에 유행성 독감 같은 게 퍼지지는 않겠지? 마리나 부인도 계속 몸이 좋지 않다고 하고.”
카일이 염려스럽게 물었다. 리암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런 일은 전혀 없어. 십중팔구 엘리엇은 안 쉬다가 쉬니까 병이 난 거지.”
정말이라며 카일이 키들거렸다. 스탠리 부인이 염려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마리나 부인은 정말 괜찮으신 걸까요? 라이언 경도 오늘은 안 보이시던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치료사와 선의들도 대기하고 있고요.”
“부인은 런던에 돌아왔을 때부터도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을 정도로 계속 건강이 나빴거든요. 안 된 일이죠. 그렇게 활달하던 분이.”
“그렇군요. 전 이번에 처음 뵈어서.”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탠리 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국에 있었을 때는 정말 명랑했었어요. 스포츠도 좋아했고요. 직접 요트도 몰고 배구도 했었지요. 친구들도 그렇고, 친정 식구들도 그리스의 고향으로 요양을 하러 오는 게 좋겠다고 다들 권하는데도 라이언 경을 따라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들었답니다.”
“그렇군요. 런던의 기후는 우울해지기 딱 좋은데.”
“결혼 10년 차인데 아직 자식이 없는 것도 부인의 건강 때문일 거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두 여자가 나직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남자들은 와인 잔을 돌렸다. 엘리엇에게 잔을 건네면서 카일이 물었다.
“근데 자네 낮술 마셨지?”
“표시 나는가?”
“술 냄새가 약간. 더 마셔도 괜찮겠는가?”
“한 잔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라네.”
초대되어 왔다가 이렇게 금세 돌아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므로 엘리엇은 웃으며 덧붙였다.
“대신 오늘 나오는 술은 전부 내가 사기로 하지.”
“뭐?”
파티는 어차피 내가 여는 것이고 술도 전부 내가 지출하는 거라고 리암이 말하려는데 엘리엇이 고개를 저었다.
“경매에 출품하려고 한 게 있을 거 아닌가?”
“한두 병이 아닌데?”
물론 한두 상자도 아니다. 상류층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 만큼 일반 초대객은 한 상자쯤 사기에도 만만치 않은 가격임이 틀림없었다.
“전부 다. 예상했던 최대 낙찰가의, 두 배나 세 배쯤 하면 넉넉할까? 어떤가, 리암? 대리인을 시켜서 하나씩 입찰가를 쓰게 하는 것보다 일괄 구매가 화제가 되지 않겠는가?”
“화제야 되겠지만, 절차 문제가 있으니까 곤란해. 혼자 독점해 버리면 기분 상할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것도 그렇군. 그럼 제일 비싼 것으로 하지.”
“어이, 엘리엇.”
카일이 그를 부르는 사이에 리암이 나중에 열릴 경매의 관리인에게 손짓을 했다. 엘리엇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똑같이 관리인에게 한 후에 그중 가장 비싼 1775년도 빈티지 마산드라 셰리 세 병을 가져오게 했다. 관리인이 황급히 달려가 유리 케이스에 진열하고 있던 병을 조심스럽게 벨벳에 감싸 들고 왔다. 엘리엇은 라벨을 확인하고 물었다.
“같은 게 팔린 일이 있나?”
“예. 소더비에서 4만 3천 달러에 낙찰된 일이 있습니다.”
“그럼 병당 8만 달러로 하지. 그 정도면 충분하겠는가?”
엘리엇이 리암을 쳐다보았다. 카일이 끼어들었다.
“화제야 되겠지만, 너 낭비 싫어하잖아?”
“지금 기분이 무척 좋거든. 고작해야 와인 세 병을 못 살까.”
“난 노코멘트야. 지금 말해 봐야 돈에 눈이 벌게진 사람이 되고 말 테니.”
리암이 손을 털었다.
“지금 약식으로 경매에 올릴까요?”
“분위기를 띄웠으면 띄웠지, 망치지는 않을 걸세. 염려 말고 가지고 올라가게.”
관리인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 병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맑은 망치 소리와 함께 금세 약식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매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헤리퍼드 공작이 병당 8만 달러에 사겠다고 하는데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것에 불과했다. 여태까지 최고가 4만 3천 달러에 팔렸던 와인에 8만을 불러 버렸으니 술렁술렁 놀란 소리가 퍼질 뿐이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경매사가 낙찰을 선언하고 병을 들고 서둘러 다가왔다.
“한 병은 리암 자네에게 선물하지.”
“오늘 놀랄 일만 골라서 하는군. 사양 안 할 거야. 솔직히 이번에 너 때문에 아주 피곤하다고.”
“알고 있다네. 그러니 한 병은 여기에서 따도록 하지. 기념할 일도 있으니.”
“지, 지금 따실 겁니까?”
관리인이 말을 더듬었다가 황급히 안색을 바로 했다.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은 일 있는가?”
“호텔을 하나 인수하기로 했다네. 특별히 축하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술 한잔 정도는 사도 괜찮겠지.”
“호텔? 어디?”
“아직은 비밀이야. 곧 알게 될 걸세.”
관리인이 서둘러 테이블과 코르크 따개를 가져왔다. 병당 8만 달러짜리 와인이라면 따는 것만으로도 구경이므로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션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사이에 또 사업 이야기를 하셨어요?”
“사정이 그리되었네. 나중에 설명하겠네.”
엘리엇은 차분하게 말하고 관리인이 오래된 코르크를 조심스럽게 뽑아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고작해야 한 병이므로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지는 못했다. 엘리엇과 리암, 루이스, 카일 부부와 션에게 한 잔씩 나누어지고, 또 가까이 다가온 몇몇 지인들에게도 와인을 따른다. 마산드라 셰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리암이 서둘러서 오늘 준비된 것 중에 가장 좋은 셰리를 가져오게 했다. 엘리엇은 물론 그것도 자기가 사겠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손에 잔을 들었다. 엘리엇은 주위를 둘러보고 미소했다.
“일이 커졌군.”
그러라고 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카일이 물었다.
“건배는 뭐라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늘 하던 선창을 목소리를 올려 낭랑하게 외치자 웬즈데이 클럽의 남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그리고 잔이 모두 비워졌다.
그 건배사는 라이언이 만든 것이었다. 빈 잔을 급사의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엘리엇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인생이 바뀐 것은 분명히 로테르담으로 션을 찾아갔던 날의 일이었을 텐데, 길고 어두운 동굴을 지나 또다시 한번 삶의 단락이 맺어진 듯한 감흥을 느꼈던 것이다.
엘리엇과 션은 건배가 끝나고 몇 사람과만 인사를 나누고 파티장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했다. 정사의 여운과 취기로 엘리엇은 아직도 휘청거리고 있었고, 션도 상당히 취했으므로 둘 다 걸음은 들뜬 듯 불안정하게 빨랐다.
손에는 와인 병이 들려 있다. 엘리엇은 리암에게 선물한 마산드라 셰리 한 병을 제외하고 다른 한 병도 그 자리에서 관리인에게 따 달라고 했다. 카일은 그 한 병도 나눠 마시려나 두근거리는 얼굴이었지만 엘리엇은 버킷에 담아 올려보내라고 하지도 않고 직접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 사실 좀 걱정이 되는데요.”
“왜?”
션이 목소리를 낮춰 묻는 말에 엘리엇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8만 달러를 몸에 부으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거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로군.”
엘리엇이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션이 얼마나 빨아 댔는지 입술이 아직까지 얼얼한 기분이 든다.
“저는 소시민이라서 그런 엄청난 짓을 하시면 도리어 쓸모없는 놈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럴 기운 없어.”
짧게 말하고 그는 션의 목을 끌어당겨 짧게 입술을 겹쳤다. 간단히 샤워만 한 것으로는 아래에 남은 묵직한 감각이 가시지 않았고, 그가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라서 흥분과 여운이 있다. 하지만 지금도 쓰러져서 눈만 감으면 기절한 듯이 잠들 것이다. 분명히 내일 아침에는 몸살 때문에 못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얼른 몸을 수습해서 푹 쉬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션이 그의 허리를 감아 지탱해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불안한 듯이 와인 병을 든 손을 잡아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엘리엇은 미약하게 웃었다.
“그보다는 밖이 내다보이는 욕조에서 마시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일세.”
“8만 달러를 말이죠.”
“자네가 싫다면 나 혼자 마시겠네.”
“싫은 게 아니라요. 저같이 맛도 모르는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아서요.”
“품평을 해야 맛이라던가. 좋은 걸 같이 먹는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자네가 했던 말인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요.”
션은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훔쳤다.
서로 끌어안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17층에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 몇 사람이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둘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엘리엇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고, 션은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지나쳤다.
객실의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두고 둘은 옷을 벗었다. 션이 와인을 디캔터에 담고 잔 두 개를 준비하는 동안에 엘리엇이 입욕제를 골랐다.
“피곤하시니까 캐모마일로 하시지요.”
“금방 잠들어 버릴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리엇은 노란색 목욕 소금을 물에 풀었다. 연한 꽃향기가 퍼지는 물속으로 먼저 들어가자 션이 쟁반을 곁으로 가져다 놓고 저도 가운을 벗고 곁으로 들어왔다.
공간은 나란히 앉거나 다리를 교차시킨다면 마주 앉아도 될 만큼 넉넉했지만 엘리엇은 그러지 않고 그의 품으로 기어들어 갔다. 션이 그의 가슴을 끌어당겨 다리 사이에 앉히고 너그럽게 안아 주면서 한 손에 와인 잔을 쥐여 주었다.
“엘리엇 씨는요, 제가 좀 심했다 싶을 때 더 귀여워지는 걸 아세요?”
“내가?”
“그래서 반성할 수가 없어요.”
촉촉한 입술이 귓가에서 뺨으로 미끄러져 온다. 엘리엇은 낮게 웃었다.
“귀엽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는걸.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그리고 자네는 결코 나한테 심하게 대하는 일이 없다네.”
“정말로? 맨날 오늘처럼 해도?”
그러자 엘리엇이 약간 난처한 듯이 눈썹을 움직거렸다.
“음. 정정하겠네. 심하지는 않아도, 과하긴 하지.”
션이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웃으며 어깨에 한 번 입을 맞췄다.
“그럼 자제할까요?”
“……매일은 곤란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면 좋아.”
그러자 션이 또다시 웃었다. 등과 어깨로 진동이 전해져서 엘리엇도 그에 이끌리듯이 조금 웃었다.
“우리끼리도 건배할까요?”
“무엇에 대해서?”
“글쎄요. 성공적인 삶에 대해서는 이미 건배를 했으니까, 행복한 삶에 대해서라든가?”
“그건 좋은 생각인 것 같군.”
엘리엇이 동의했다. 그리고 션이 들고 있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자네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위해서.”
“틀렸어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겠죠.”
“그럼 그렇게.”
잔 안에서 달콤한 도취가 찰랑거렸다.
달콤하고 독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조금 어지러워졌다. 엘리엇은 잔을 내려놓고 어리광을 부리듯이 션 쪽으로 돌아앉아 그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션이 살며시 그의 입술을 핥고 쪼듯이 입 맞추었다.
“8만 달러의 값어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엇 씨의 입술에 적셔 놓으니 황홀하긴 하네요.”
“더.”
엘리엇은 입술을 벌리며 눈을 감았다. 션의 혀가 안쪽으로 들어와 입술 안쪽을 보드랍게 매만지고, 애타는 감각을 남기고 사라진다. 무심결에 쫓아가 와인 향기가 나는 입술에 매달려 빨아들인다. 뒤얽히는 숨결에는 나른한 열기와 단맛 끝에 남는 갈증이 섞여 있다.
둘은 그대로 한동안 키스를 나눈 후에, 말없이 가만히 끌어안고 있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문득 션이 물었다. 뭔가? 하고 엘리엇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별일은 아니라면서 엘리엇의 등을 기분 좋게 어루만졌다.
“실행되지 않은 나쁜 생각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자네 능력에 관한 이야기인가?”
션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반론으로서요. 제가 남의 감정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제게만 다른 논리를 적용시켜서는 안 되겠죠.”
엘리엇이 미소를 짓고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네가 자랑스럽네.”
“뭐가요?”
“힘이 있는 사람은 공정해지기 힘든데 자네는 그러려고 하니까. 자네의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마음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놀리지 마세요. 제가 이상하니까, 당연히 일반적인 견해를 신경 써야죠.”
“자네는 이상한 것이 아니야. 훌륭한 것이라네.”
몸을 조금 펴고 다시 션의 입술에 입 맞춘다. 그러고 나서 엘리엇은 션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의도가 중요하냐, 결과가 중요하냐. 마음이 중요하냐, 행위가 중요하냐. 너무 원론적인 철학 문제로군. 나한테 답을 물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엘리엇 씨의 생각이 궁금한 것뿐이에요.”
“나의 기준을 말하자면,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해 왔다네. 작은 행동까지도 타인에게 큰 영향력을 끼쳐 버리는 이상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남에 대해서도 그렇게 판단해 왔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생각을 했더라도 그것을 참아 낼 정도의 절제력이 있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네. 나 자신을 남의 마음을 평가하고 판단해도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다만, 이미 행해진 행동의 결과는 사리에 맞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 자네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네. 자네는 남의 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뇨. 엘리엇 씨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는, 단지 생각만 해 본 것이나, 혹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겠지요.”
션이 엘리엇의 손가락에 입술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아는데도 가끔은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싶어져요.”
“자네는 너무 상냥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힘들어할 필요 없네.”
엘리엇이 다정하게 말하고 그의 뺨과 어깨에 한 번씩 키스해 주었다.
“저는 엘리엇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도, 상냥한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지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드러내지 않은 마음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까. 자네가 간혹 부당하게 화가 나기도 하고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싶어져도, 실제로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사실 내게도 비윤리적인 생각은 종종 떠오른다네.”
“엘리엇 씨가 하는 비윤리적인 생각이라는 거, 뭔지 조금 궁금하네요. 저랑 관계있는 생각 맞아요?”
그렇게 묻자 엘리엇이 말이 없어지더니 아예 몸을 돌려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래도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는 것을 보니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했다. 돌아보라고 뺨을 잡아 돌리려는데도 완강하게 고개를 앞을 향한 채이다. 귓가가 빨갛고 손에 닿는 뺨이 뜨거웠다.
“말씀만 하시면, 제가 웬만한 건 다 이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소리를 낮춰서 은근하게 귓가에 속삭이자 엘리엇이 몸을 조금 떨었다. 그리고는 놀리지 말라며 그의 뺨을 조금 꼬집어 당겼다. 션은 간지러운 듯이 소리를 내서 웃으며 엘리엇을 끌어당겨 안락하게 자기 품에 앉힌다.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래.”
엘리엇은 션이 가만가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입 맞춰 주는 것을 느끼며 피로한 채로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 아래 밤바다, 흰 별빛 위에 검은 파편을 뿌린 듯이 보이는 하늘의 강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물결, 세상은 끝없이 뻗어 있다. 그의 현실은 따스한 팔 안이었고, 이제 안락한 실내에서도 홀로 있지 않았으므로 그 모든 것을 남의 세상처럼 무심히 바라보는 대신에 누군가와 같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이내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졌다. 션은 그의 손에서 와인 잔이 미끄러지기 전에 받아서 쟁반에 올려놓고 두 팔로 단단히 받쳐 안았다. 그리고 정수리에 입술을 누르며 작게 속삭인다.
“엘리엇 씨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따금 심장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따뜻한 감정이 끝도 없이 넘쳐흘러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 마음 그대로 너무 꽉 끌어안아 엘리엇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혼자서 조용히 애달파한다. 자신의 감정도 색으로 볼 수 있다면, 끝이 없는 세상 전부를 늪이 아닌 다른 아름다운 색으로 채워 버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션은 찰랑거리는 바다와 함께 와인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