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August (4)
오전 8시의 바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바 뒤에서 서 있는 것은 준형뿐이고, 그 앞에 맥이 손님으로 앉아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맥을 감시하는 SSB 요원이 몇 명 웨이터로 가장하고 있지만, 손님이 이렇게까지 없으면 가까이 오거나 남몰래 훔쳐보기도 쉽지 않다.
션은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일상적인 동작으로 잔을 닦고 있던 준형이 미소하며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야. 얼굴이 빤질빤질한데. 광채가 나는걸.”
“원래 잘생긴 얼굴이잖아.”
“그래도 기분에 따라 계열은 달라지지. 오늘은 금가루라도 뿌린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약간요.”
“엘리엇이랑 싸웠다면서. 소문 다 났어.”
“화해에는 역시 이게 최고지.”
맥이 음흉한 얼굴로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검지로 쑤석거리는 흉내를 냈다. 준형이 주책없는 노인네라고 핀잔을 주었다. 션은 어제의 일은 단순한 섹스 이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을 동네방네 자랑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냥 웃어 보였다.
“무슨 일로 싸웠던 거였어?”
“별거 아닙니다. 엘리엇 씨가 맥의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서요. 저를 걱정하셔서 그런 겁니다.”
“걱정할 걸 걱정해야지.”
맥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준형도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엘리엇의 입장에서야.”라고 선선히 동의를 표했다.
“인간적으로 위험한 쪽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맥케인이 위험하다고 보지만, 맥은 위험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핵폐기물이잖아.”
“내가 왜?”
“션의 위험성은 혼자 감당하면 되지만 댁은 세상을 끌어들여서 자자손손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할 테니까. 그보다, 그래서 엘리엇한테 뭐라고 했어? 걱정 때문에 화를 낸 거라면 간단히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할 거라고요. 엘리엇 씨는 원칙주의자이니까 동의하지 않으실 수 없었겠죠. 저 깔루아 밀크 한 잔 주세요.”
“아침부터?”
“휴가 중이잖아요. 그러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맥은 슬슬 출발해야 할 시간 아니에요?”
“음. 주인공은 조금 늦게 등장해 줘야지. 재미 대가리 하나 없는 국가 에이전트 따위에 둘러싸여서 뭘 하고 있으라는 거야. 준형, 술 한 잔 더 줘.”
“어차피 내 바의 술은 아니니까 상관은 없지만.”
준형이 어깨를 으쓱하고 그의 앞에 놓인 스트레이트 잔에 코냑을 찰랑찰랑 채워 주었다. 맥은 아예 담배까지 빼 물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급 시설에서 경호원을 세우고 양복 빼입고 도청기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만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아니지. 이쪽이 훨씬 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모임이잖아?”
“샐러리맨 하나, 바텐더 하나, 회사 사장 하나가 만나서 무슨 세상을 움직인다는 거야? 세상을 움직이고 싶으면 아타 파닌이나 찾아가든가.”
“왜 이렇게 야심이 없어. 션, 너도 말이야, 높은 데까지 올라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세계 제국의 재상 정도는 해 봐야지.”
“황제는 맥이 하고 말입니까?”
션은 피식 웃었다.
“그거 별로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인 것 같은데요.”
“적국의 요인은 준형이 쏴 버리고, 군대는 내가 다루고, 내치는 션이 다스리면 점령지의 안정도 금방일 거라니까. 3년 정도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권 정도는 충분하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건당 의뢰비만 두둑하게 주면 언제든지 한다니까. 손을 잡자는 핑계로 공짜로 부려 먹으려고 하지 말고.”
“그 범위를 GFG로 안정시키려면 그냥 종교를 하나 만드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요. 노력 대비 이익만으로 생각한다면.”
맥은 세계 일통 만민 평등의 꿈이라는 둥 인간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위업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증명해 보자며 투덜거렸지만, 처음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션도 15분 만에 헛소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웃어넘겼다.
“알버트 전하가 아시면 쓰러질 것 같은 모임이긴 하군요.”
“그건 좀 마음에 드는데.”
준형이 키들거리고 웃으며 그에게 아몬드를 서비스해 주었다.
“어찌 됐든, 지기와 술을 마시는 쪽이 너구리와 능구렁이 상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보다 낫지.”
“지기는 무슨. 여기 젊은 놈이 싫어하는 거 안 보여?”
“신체 강화계 능력자한테 위아래로 50까지는 다 똑같은 거야.”
“50을 빼도 션보다 나이 많지 않아?”
“뭐, 정신 조작계 능력자에게도 3살이나 80살이나 다 비슷하게 보이긴 하니까 상관은 없습니다만.”
“하하, 하긴 우리나라 속담에도 철들자 노망난다는 명언이 있었지.”
“뭐야, 그거 지금 내가 노망났다는 뜻이야?”
“팔순도 넘은 나이에 세계 정복을 하자는 게 3살짜리랑 뭐가 달라.”
“남자의 야망에 나이는 없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위아래로 검은 정장을 빼입은 남자 넷이 다가왔다. 모두 체격도 좋고 틀림없이 유능하기도 할 터이지만, 덤 앤 더머들이라는 준형의 말을 떠올리고 션은 픽 웃었다. 만약의 사태가 생겨도 U급의 신체 강화계 능력자를 저 남자들이 막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점잖게 생긴 인텔리를 시키는 쪽이 체면과 실익을 차리는 일이 될 것이다.
맥이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조만간 언터쳐블의 클럽하우스에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그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뜨는 뒷모습을 쳐다본다.
깔루아 밀크는 맛있었다. 션은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아침부터 바를 열어 둬요?”
“믿기지 않겠지만 7시까지 마시다 가는 사람도 있어. 아침에 오는 사람도 있고. 너처럼.”
“저야 뭐, 맥에게 인사하러 나온 거니까요. 그런데 오늘 잠깐 정박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점심쯤 예정이었던 것 같은데?”
“한 달 내내 안 내리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까. 땅이 그리워?”
“아직은 괜찮은데, 2주쯤 더 지나면 그리워질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웨스트베리 남작이다. 그것 봐라, 휴양지에서는 아침의 술손님도 드물지 않다며 준형이 영업용 미소를 띠고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했다.
“유감스럽게도, 술손님이 아니라 제 손님인 것 같은데요.”
션의 말대로 그는 곧바로 션을 향해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션은 일어서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남작이 근사한 얼굴로 웃었다.
“맥케인 씨에게서 먼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자리를 옮길까요?”
“어차피 아무도 없고, 괜찮지 않겠습니까?”
남작이 살짝 준형을 바라보았다. 션은 방긋 미소했다.
“어디 가서 무얼 해도 제이 씨 귀에는 어차피 들어갈 거니까 괜찮습니다.”
“비용이라도 들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돼?”
“제이 씨랑 적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남작이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섣불리 준형의 정체를 묻거나 하지는 않는다. 션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준형은 두고 볼 모양이었다.
“사업 이야기를 하자고 부르셨으니 무척 기대가 됩니다.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큰 계약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그냥 호기심에 여쭙는 건데, 첫 번째는 무엇이었습니까?”
“찰리 코리를 영입한 거였죠. 중요한 계약을 하러 가던 길에 차가 고장이 나서 할 수 없이 서류 봉투를 들고 지하철로 달리다가, 역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찰리를 보고 그 자리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뒤집은 봉투에 계약서를 쓰고 서명시킨 건 제가 낯선 사람과 친해지려고 할 때 자주 써먹는 무용담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월드 스타가 지하철역 앞에서 쪼그려 앉아 첫 에이전트 계약을 했다는 일화는 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검색으로 경영지표이니 시가총액이니 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훨씬 남작의 에이전시가 어떤 회사인지 실감이 들었다.
“하하. 무용담이 될 만합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신 거군요.”
“겸손의 미덕을 잊고 말하자면,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식으로 주목을 끄는지, 어떤 매력을 숨기고 있는지 남들보다 잘 알죠. 그걸로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장담하고 말씀드리건대, 맥케인 씨는 어떤 렌즈를 통해도 틀림없이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할 겁니다.”
션은 칵테일 잔을 기울이며 하하 웃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용모가 매우 특출하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작의 평가에 GFG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GFG가 작용하지 않는 스크린이나 사진에서 그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션은 일평생 증폭 능력을 천형처럼 달고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모델이라든가 배우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영상 너머로, 혹은 사진이나 포스터와 인터뷰로,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에 흥미가 있고, 남작님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델도, 배우도 아니라면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정치입니다. 상원 의원이 될 생각입니다.”
설마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뱉어 놓고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버트가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말이 지침을 알려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웨스트베리 남작은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놀란 것은 준형이었다.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헤리퍼드 합하께서는 공중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시는 것으로 아는데, 그분의 지명권으로 정계 진출을 한다면 파장이 보통이 아닐 겁니다.”
“알버트 전하께서는 그러기를 원하시는 것 같지만, 엘리엇 씨를 피곤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혀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헤리퍼드의 후원을 받는 것은 지금 당장은 예정이 없고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꽤 먼일이 되겠지요.”
션은 긴장한 웨스트베리 남작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계획은 있습니다. 사실 지금으로서 가진 자산이라고는 저 자신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사람 보는 눈에 자신이 있다는 남작님에게 제안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 러닝메이트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섣불리 결정할 만한 일은 아니로군요.”
웨스트베리 남작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면전에서 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좀처럼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매우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니로군요.”
“저는 돈을 벌었고 작위를 샀지만, 아직 진짜 명예가 없으니까요. 사실 돈만으로는 진짜 하이 소사이어티에 들어갈 수 없죠. 아직은 제대로 된 신사 클럽의 회원권 하나 없으니까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제 손자가 자식을 볼 때쯤이나 추천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진솔하게 말했다.
“하지만 맥케인 씨가 성공하고 제가 그것을 돕는다면, 운이 좋다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부들스 클럽이나 브룩스 클럽의 임시 회원권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정치권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분명히 욕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쪽에서 아무런 제안도 받아 보지 못한 미약한 신세라는 이야기도 되고요. 맥케인 씨가 상원을 이야기하실 때는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으실 텐데, 제 무엇을 보고 그리 제안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비열한 수단을 쓰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만큼 책략가이면서, 동시에 신중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션은 그렇게 말했다. 웨스트베리 남작은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의외인 듯했으나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은 그에게는 특기 같은 것도 아니라 그냥 시각의 일부에 불과하다.
“남작님이 알바네제 씨를 엘리엇 씨에게 소개한 것이 4월이라고 들었습니다. 엘리엇 씨가 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미모의 남자를 붙여 유혹해 내려고 했던 것이겠죠? 알바네제 씨는 아무리 봐도 모델 같은 걸 할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더군요.”
“순진한 아이라서 귀하게 아끼고 있습니다.”
“이 크루즈에 초대된 것이 엘리엇 씨의 부탁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고, 지금이 8월인데 한 번의 접촉도 없었죠. 그리고 저를 보자 바로 발을 빼셨죠. 잠깐이라도 울컥했을 법했는데 동요조차 하지 않았고.”
“맥케인 씨를 보면 안젤로로는 합하의 마음을 끌 수 없는 것이 명백해 보이니까요. 가망 없는 일에 오래 손을 담그고 있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동요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고. 오래 계획한 일의 성사 여부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지요. 종류야 무엇이든 엘리엇 씨가 명백하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는데도 식사 모임은 식사 모임, 공연 관람은 공연 관람에서 끝을 내고 있고. 그런 측면을 높이 사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한 조언자보다 귀중한 것은 없지요.”
특히나 자신 같은 경우에는 말이다. 션은 그렇게 말하면서 남작과 눈을 맞추었다. 남작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높이 평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이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기꺼이. 그때까지는 더 좋은 대화가 될 수 있도록 계획해 보죠.”
남작이 가볍게 잔을 들었다. 깔루아 밀크는 건배를 할 만한 술은 아니지만, 션도 가볍게 술잔을 들어 보였다. 그 뒤는 훨씬 편안한 자리가 되었다. 들고 있던 진 토닉을 반쯤 비운 후에 남작이 말했다.
“맥케인 씨가 저를 높이 평가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과대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젤로를 빨리 포기한 것 말입니다만.”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합하가 맥케인 씨를 어떤 눈길로 보고 있는지 안다면 누구라도 최대한 빨리 발을 뺐을 겁니다. 판단하는 눈이 문제이지, 결단력이나 신중함과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죠. 이건 제가 맥케인 씨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오히려 세인트데이비스 경이 왜 그것을 모르는지를 알 수가 없더군요. 합하와 친분이 길다면 더 알기 쉬울 텐데.”
숨김없이 말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션은 표정 관리에 실패하여 웃는 듯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말았다. 기뻐해야 할지, 라이언 문제로 화를 내야 할지 애매해진 채 뺨을 붉히고 만다. 그것을 보고 남작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특별히 기 싸움을 한 것은 아니지만, 션은 선수를 빼앗긴 듯이 미묘한 기분이 되어 괜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준형이 묘하게 웃는 낯과 마주쳐 아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 *
엘리엇과 리암은 최상층 갑판 위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올해의 매출은 분명히 반 토막 날 거야.”
“입항 금지 때문에 그러는가?”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고. 입항 금지도 그렇지만 패싸움도 났는데.”
“패싸움?”
“데이지 양이 존 경과 결별 선언을 한 것은 알고 있는가?”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했다.
“존 경이 데본 백작가에 전화를 걸어서 파혼을 말한 것은?”
“몰랐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리암이 투덜거렸다. 변명할 일도 아니고 별달리 할 말도 없어서 엘리엇은 침묵을 선택했다. 리암이 한숨을 내쉬고는 기분을 바꾸려는 듯이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나는 일이 바빴다치고, 넌 왜 그리 피곤해 보여? 어제 션과 싸웠다더니 화해를 못 했어?”
“모를 거라고 생각은 안 했네만, 역시 그런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군.”
“그러려고 탄 거잖아. 존 경처럼 큰 사고만 안 치면 괜찮아. 그런데 화해 못 한 거야?”
“그건 아닐세.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진 것을 기억 못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열 시간은 넘게 잤을 테고, 션이 뒷정리도 깔끔하게 해 놔서 일어났을 때는 몸도 쾌적하고 깨끗했다. 그런데도 피로가 묵직하게 몸에 남고 감기 기운도 약간 있었다. 눈도 부어 있어서 나오기 전에 찬 수건으로 20여 분을 식혔는데도 아직도 눈꺼풀 안쪽이 까끌거린다. 이 일이 끝나면 침실로 돌아가 도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하품을 참았다.
“다행이군. 어제 패싸움도 결국 거기에서부터 연결된 이야기라서 너희들이 싸운 채로 있으면 소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거든.”
“나랑 션이 왜?”
“데이지 양이 존 경에게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존 경은 그녀가 션과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했거든. 마침 너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싸움을 했잖아. 오해를 한 거지. 화가 난 데이지 양은 존 경의 따귀를 갈기고, 존 경은 션의 멱살을 잡으러 너희 객실로 달려가다가 카일에게 붙잡혔는데, 몸싸움을 하다가 실수로 카일이 팔꿈치로 눈자위를 맞았어.”
“저런.”
“그래서 에이던이 화를 내며 존 경에게 따지고 헤이스팅스 남작은 존 경의 편을 들었는데, 거기에 윌리엄 경과 헨리 경이 끼어들었다가 주먹다짐이 된 거지.”
그리고 결국 온 바의 남자들이 덤벼들어서 누가 쪼잔한 남자인가로 따지며 패싸움이 되었다는 모양이다. 남 일처럼 그걸 듣고 있던 엘리엇은 “퍼블릭 스쿨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20살도 안 됐을 때잖아, 그땐.”
“존 경은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라네.”
“내가 스물일곱 때에도 그런 병신 짓은 안 했어. 데이지 양이 시원하게 잘 갈겨 버렸지.”
리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데이지 양은 가방을 싸서 매디슨 양의 객실에 신세를 지겠다고 나오고, 존 경은 오늘 아침에 데본 백작가에 직접 전화를 걸어서 파혼을 하겠다고 했다는 거야. 데이지 양과 결혼을 해야겠다는 거지. 그래서 양가에서 펄쩍 뛰는 중인데 지금. 그렇지 않아도 데이지 양의 문제로 레이디 그레이스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텐데.”
“그렇군. 유감일세. 그런데 자네, 스캔들은 환영한다지 않았는가?”
“이런 스캔들을 환영한 게 아니라고. 그나마 이번 시즌에 그럴듯한 스캔들이라고는 딕시 도노반과 카터 양이 갑판에서 열렬한 키스를 나눠 준 것밖에 없군. 역시 믿을 건 카터 양뿐이라니까.”
그러나 그녀의 스캔들은 너무 많아서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리암은 몸에서 힘을 빼고 두통이 일어난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 봐야 입항 금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보다 큰 사건은 아닐 게 아닌가.”
“그렇지. 맥 마셜이 어떤 인사이기에 이렇게까지 되는 거야?”
엘리엇은 잠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앤은 산탄데르 항에서 12해리 밖으로 나와 다음 기항지인 폰테베드라를 향해서 가고 있다. 리암이 맥 마셜을 찾아낸 직후에 알버트에게 연락하자 알버트는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스페인에 그를 접촉시켜서는 안 된다며 영해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맥에 대해서 미국의 용병 회사 사주이며 신체 강화계 GFG 능력자라는 것까지밖에 알 수 없었던 리암으로서는 두 나라의 정보부가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지아 내전의 제노사이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 엘리엇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제1차와 2차의 콩고 전쟁, 시리아 내전, 얼마 전에 발칸 반도에서 있었던 코소보와 몬테네그로 분쟁을 부추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네. 소말리아 내전에 파병되었던 미군이 몰살당했던 것도 그가 한 일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고.”
“용병 회사 사주가?”
“단순히 용병 회사의 사주라고 할 수는 없네. 미 육군이 사실상 그의 손아귀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일세. 제2차 세계대전에서 20살의 나이로 북아프리카의 영웅이 된 이래 줄곧 그랬었지. 단순한 전쟁 상인이라면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아.”
엘리엇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의 행동은 경제적 논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네. 정치적 논리로는 더더욱 알기 어렵고. 미국의 국익에 배치되는 일은 물론 가끔은 자기 회사의 손해가 되는 일도 개의치 않으니까. 알이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런 사람과는 아예 엮이지 않는 쪽이 좋지.”
“그렇군……. 션은 그러면 그 남자를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션을 영입하러 왔다고 하더군. U급의 GFG 능력자이니까.”
리암이 말을 잃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은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션은 맥 마셜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 경력에 대해서, 미확인된 의심까지 전부 말하면 평가가 달라질까? 그의 GFG로부터 파생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는 뜻은 존중해야 마땅하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무겁다네.”
“직접 만나 보고 결정한 일이겠지. 능력자는 능력자끼리만 통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제이도 그렇고. 션도 사람은 어지간히 겪어 보았을 텐데.”
“션이 어렵고 힘든 일을 겪어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세.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보호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션도 그렇지 않겠어? 너에 대해서.”
“……그렇겠군.”
듣고서 납득하면서도 그럴 필요가 없다든가, 션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상상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은 역시 대등하게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하고 엘리엇은 멍하게 생각했다.
역시 미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의외로 말을 해 보면 션은 조금 슬퍼하고 가뿐하게 털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버트가 조심하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자신에게 적절하게 위로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은 위로할 자신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미루고 있는 것뿐일까.
검게 칠한 SSB의 헬기가 다가왔다. 강한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와서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리암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버트가 헬기에서 내렸다. 변함없이 찌푸린 얼굴이 불쾌한 듯 보인다.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와 악수를 했다. 통화는 얼마 전에 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인데도 알버트는 조금도 반가운 기색이 없다. 특별히 반가운 마음이 없기는 엘리엇도 마찬가지라서 인사하는 자리가 무미건조했다.
“둘 다 얼굴 펴. 왜 그래? 싸운 사람들처럼.”
“뭐 좋은 일이 있다고 웃겠습니까, 숙부님. 저도 피서지에 가다 말고 날아오는 길입니다. 마셜은요?”
“글쎄. 오전 9시라고 이야기했었는데.”
리암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알버트는 동반한 비서에게 맥을 찾아오도록 하라고 시키고 리암을 돌아보았다.
“직접 만나 보셨습니까?”
“높으신 분인 것 같고, 뭐. 너한테 연락하기 전에 인사나 한 정도야. 하루 사이에 제일 비싼 코냑을 여섯 병이나 비우셨지만.”
누군지 잘 모르지만 말이야, 라고 리암이 덧붙였다. 알버트가 날카롭게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엘리엇, 이번 일은 실수였네. 아는 체하지 말고 그냥 우리에게 맡겼어야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이 배는 리암의 것일세.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는 리암의 체면에 흠이 갈 뿐이니까.”
“알게 됐다고 해서 뭐가 해결된 것도 아니긴 하지만.”
“맥케인은?”
“그는 이번 일과는 상관없으니 오지 말라고 했네.”
엘리엇이 말했다.
“덕분에 맥 마셜과 독대를 할 기회를 얻었으니 좋은 게 아닌가?”
“최악보다 조금 낫긴 하지.”
알버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최악보다 조금 나은 정도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회였다. 맥 마셜은 SSB의 국장이라 해도 단독으로 만나기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며, 언터쳐블에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다. 1년에 딱 일주일만 받는 자신만의 휴가를 취소하고 날아온 것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션의 정보를 확고하게 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벌써 상당 부분 다른 곳보다 앞서 있다. 이번 회담은 그것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갑판의 문이 열렸다. 네 명의 요원에게 둘러싸인 건장한 중년의 남자가 힘찬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디. 아래층의 젊은이들은 나를 귀찮아하며 내쫓던데 여기는 좀 덜 그런가? 오, 잘생긴 왕제님이시군.”
“하루이지만 즐거우셨습니까?”
“물론이지. 아아주 미인만 골라 모아 놔서 어찌나 눈이 호강스럽던지. 잘 놀다 가오. 그리고 운 좋은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마셜 씨.”
엘리엇은 평화롭게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리암이 “면식이 있는 사이였어?”라고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
“카자흐스탄의 시추 사업을 시작할 때 KH47이 경비 업체로 입찰을 했었지.”
“그전에 아부다비에서도 소개받지 않았소.”
맥이 싱글거리면서 힘껏 엘리엇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준형에 이어 션이라. GFG 능력자를 끌어들이는 힘이라도 있으신가 보오. 무슨 매력이 있어 그러실까.”
“좋은 친구와 소중한 사람을 얻었으니 운이 좋습니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얼굴을 뜯어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엘리엇은 평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맥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 운이 좋으시지.”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시당한 알버트가 일그러진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꾼 채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맥이 명랑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 긴장하지 마시구려. 그런데, 내가 타고 갈 헬기는 어디에 있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제 쪽에서 준비될 겁니다.”
엘리엇이 말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강풍이 이마를 때리고, 곧 SSB의 헬기 옆에 헤리퍼드의 문장이 그려진 수직이착륙기가 내려섰다. 엘리엇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션을 찾아오신 분이니 마땅히 뭍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 겁니다.”
맥 마셜은 마음에 드는 배려라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SSB와 회담을 한다면 다른 세력의 영역에 있는 쪽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서 중립 지역으로서 비행기를 제공하는 것이고, 션이 얽혀 있느니만큼 직접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일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인데,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웃을 만큼 재미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이자벨이 내려서 네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맥을 안내했다. 그가 먼저 탑승구로 들어가고, 알버트가 그 뒤를 따랐다. SSB의 요원들은 하나도 타지 않았다. 맥이 혼자 몸이기 때문이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면서 리암이 물었다.
“이걸로 된 건가?”
“나머지는 알이 알아서 할 걸세.”
“너도 저기 탔어야 하는 거 아니고?”
“이 정도로 됐어. 이자벨이 잘할 걸세. 션과는 이야기를 끝마친 듯하고, 이 뒤는 마셜 씨가 정상적인 입국 절차 없이 영국 땅을 밟았다는 것뿐이니까. 그런 문제는 알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자네 걱정도 한시름 덜었군.”
“이제 입항하는 건가. 하아. 드디어.”
“급히 내릴 사람이 있었는가 보지?”
“데이지 양을 내려 줘야지. 이 뒤의 일정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정이 안 된다면 헬기라도 동원할 생각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비용 문제가 있어서……. 분위기도 술렁술렁하고.”
“그렇겠군.”
“이제 문제는 존 경뿐인가. 포틀랜드 백작의 결혼식으로 쌓아 올린 주가가 한 방에 무너질 거 같은데 이를 어쩐다.”
리암이 투덜거리면서 앞장섰다. 엘리엇은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17층에서 둘은 헤어졌다. 리암은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고 엘리엇은 침실로 돌아갔다. 아침에 볼일이 있다고 그보다 먼저 나간 션은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피곤하지만 아직 눕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나치게 오래 잠들어 있었던 탓으로 여기저기 근육통도 생기고 쑤셨다. 그러고 보니 배 안에 마사지 샵이 있을 텐데 거기라도 가 볼까. 시설 카탈로그에서 스파에 대한 것도 읽었던 것 같다.
월풀 욕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서 그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카탈로그를 찾아 거실로 나왔다. 엘리엇은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으므로 스파라든가 마사지 같은 것을 이용해 본 일이 좀처럼 없었지만, 지금은 기꺼이 하고 싶었다. 션에게 부탁해도 등 정도는 주물러주겠지만, 그도 피곤할 테고 말이다.
어제 왜 그리 울었는지 엘리엇은 아직도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좀 멍하지만, 피곤함과는 별개로 이상할 정도로 시원한 느낌이 가슴 안쪽에 있다. 늘 섹스 하고 난 뒤에나 피상적으로 맛볼 수 있었던 상쾌함이 보다 깊은 곳까지 들어와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도 처음이다.
카탈로그를 쥔 채로 소파에 앉아 있다가 엘리엇은 상반신만 옆으로 쓰러뜨려 반쯤 누웠다. 옳지 못한 몸가짐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션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바쁜 게 아니라면 올라와 무릎베개를 해 달라고 해야지, 하고 생각하며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션은 신호 대기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듣자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져서 엘리엇은 “음…….” 하고 애매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엘리엇 씨. 용건은 끝나셨어요? 알버트 전하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특별히 아무 말도 없었네. 마셜 씨와 독대할 기회가 생긴 것이니 기뻐하겠지. 그런데 자네 지금 바쁜가?”
「아뇨. 바에서 제이 씨랑 웨스트베리 남작이랑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엘리엇 씨도 내려오실래요?」
“피곤해서 자네랑 둘이 있고 싶은데.”
「그럼 15층 테라스에서 만나요. 계속 객실에서만 쉬시는 건 몸이 오히려 피곤하실 테니까요. 거기에서 식사를 하고, 산책 조금 하고 음악 감상실에 가서 레몬티 마셔요. 아니면 스파에 가서 마사지 받는 것도 좋고요. 마사지사가 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꽤 좋은 욕조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좋아.”
「조금 이따 봬요.」
션이 송화구에 키스하는 듯이 쪽 소리를 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엘리엇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는 억겁처럼 무겁지만 조금 움직여 주는 쪽이 낫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마음이 게을러서 그렇지, 이 정도 피곤한 상태에서 일을 계속해야 하는 때도 얼마든지 있었다.
15층으로 내려가자 션은 아직 올라와 있지 않았다. 웨스트베리 남작과 함께 있다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인사를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왼손에 깁스를 한 에이던이 울적한 얼굴로 바 앞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들이켜고 있었다.
“어, 엘리엇.”
“패싸움을 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는가?”
엘리엇은 놀라서 물었다. 에이던이 특별히 점잖은 성품은 아니지만, 이제는 나이도, 지위도 있고 싸움을 하다가 손목을 부러뜨릴 만한 위인은 아니다. “인대가 늘어난 것뿐이야.”라고 대꾸하면서 그가 왼손을 들어 보였다. GFG로 치유도 받았다니 회복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키이라한테 한 소리 들었다. 이번에 기항하면 내리기로 했어.”
“잘 생각했네.”
그렇지 않아도 날마다 수영장 위의 테라스에서 죽치면서 여자 모델들의 비키니 차림을 구경하다가 부부 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엘리엇은 두말없이 그렇게 말했다. 에이던이 한숨을 내쉬었다.
“꼭 뭐에 씐 것 같아. 카일도 그렇다고 하고.”
“카일은 또 왜?”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가 엘리엇을 쳐다보고 어색한 얼굴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배가 이렇게 큰데도 갇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휴가라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뭐든 잘 억제가 안 되더라고. 별일 아닌데도 화가 치밀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데 기분이 너무 좋아질 때도 있고. 키이라도 그래. 괜히 왔다가 싸움만 하고 가네.”
“그런가.”
“자네를 보러 온 게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아닐세.”
“휴. 그러고 보니 기항은 언제 한다고 하던가?”
“조만간 이야기하겠지. 아마 저녁을 넘기지는 않을 걸세.”
“그래? 그럼 지금 미리 인사를 해야겠군. 만나서 반가웠네. 언제 한 번 맥케인과 같이 우리 쪽으로도 와.”
“기꺼이 그러겠네.”
에이던이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테라스에서 나갔다. 라이언이 들어온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엘리엇이 막 바다 쪽으로 나와 있는 끝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엘리엇. 여기 있었군. 찾아다녔는데.”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안색은 초췌하다. 딱 보기에도 별로 잠을 자지 못한 얼굴이라 엘리엇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 거라면 거절하겠어.”
“이야기 좀 해!”
그가 강경하게 팔을 잡아끌었다. 조금도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 곧 션이 온다. 션의 앞에서 어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라이언을 따라 테라스 밖으로 나섰다.
라이언은 그의 팔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빈 객실에 카드 키를 꽂았다. 그리고 엘리엇을 억지로 안으로 끌어들였다.
힘으로 싸운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소란을 벌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엘리엇은 순순히 그를 따라 객실로 들어섰다. 소파에는 하얀 커버가 덮여 있었다. 라이언이 “앉아.”라고 말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이야기해. 이제 곧 션이 올라올 거야.”
“또 그놈이야?”
라이언이 입을 악다물었다.
“역시 납득할 수 없어. 내가 그놈하고 나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네가 집착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우리 둘을 놓고 저울질해도 상관없다고.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니.”
엘리엇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알버트를 기다리던 때보다 훨씬 피로를 느꼈다. 라이언은 확실히 이상하다. 그는 라이언의 모든 성품 중에서 냉정함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바람에 탐욕스럽기는 했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오래 미련을 두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10년 전에는 그랬다. 옛일을 가지고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것은 라이언답지 않다. 생각해 보면 재회한 후로부터 계속 그렇다. 이 남자는 그가 알던 라이언 세인트데이비스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잖아. ‘다시’라니. 한 번이라도 우리가 ‘시작’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션에게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니고, 우리 관계에 대해서 선배가 이해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어. 이 이야기는 끝났어. 아내에게 돌아가, 라이언. 이건 선택이 아니라 당위의 문제야.”
10년은 사람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엘리엇은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달았다. 라이언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당위라니, 웃기는구나. 네가 그런 윤리 도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엘리엇은 문득 웃고 싶어졌다. 라이언과 정신적으로 가까웠던 적은 없지만, 그가 그 나름대로 엘리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맞아. 나는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
그는 언제나 당위를 선험이 아니라 학습으로 이해했다.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적으로 일반화된 부분에서 하나씩 구체적인 상황을 적용하여 테두리를 좁혀 가는 방식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이해는 공감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는 배신당한 아내와 남편들이 증오와 분노를 품는 것을 사례로써 알기는 하지만 그 감정에 공감한 일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라이언의 말이 맞다. 그리고 틀리기도 했다. 이제 그는 10년 전의 그와 달랐고, 라이언이 알고 있는 그와도 달랐다. 그는 여전히 당위에 공감하지 않지만 제 소중한 사람이 무엇에 아파할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면 션이 미칠 거라는 건 알아. 그러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라이언. 앞으로 한 번이라도 더 이런 말을 꺼낸다면 묻고 넘어가지 않겠어.”
몸을 돌리자 라이언이 뒤에서 다시 팔을 붙잡아 휙 돌려세우며 벽으로 밀쳤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려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엇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벽에 등을 부딪쳤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멍하던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라이언이 그의 목 옆에 위협적으로 손을 짚었다.
“너는, 나를, 좋아하잖아.”
그가 이를 갈듯이 내뱉었다. 엘리엇은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그가 말하는 것이 지금이 아니라 10년 전의 일이라 해도 역시 엘리엇에게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저 비밀을 지킨 채 안전하게 욕망을 만족시킨 게 아니었던 건가. 라이언이 으르렁거리듯이 절박하게 토해 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억지로 안으려고 했을 때 왜 받아들였어. 너 정도 되는 남자가, 뭣 때문에 다리를 벌렸어!”
“라이언.”
“그래도 나는 네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썼어. 네가 위태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너는 헤리퍼드의 후계자로서 합당한 결혼을 해야 할 테고 나 역시 내 살길을 찾아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엘리엇은 이번에도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다리를 벌린 것은 그저 그것이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사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몇 번이나 잠자리를 함께하면 교제하는 사이가 된다는 상식 때문이었다.
초반의 몇 번은 분명히 기대를 했을지도 몰랐다. 남들처럼 살을 맞대는 가까운 사람이 생겨 연애라는 것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안전한 집을 부수고 들어와 안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아마, 몰랐지만, 10년 전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라이언이 그러리라고 기대한 적은 없다. 그것이 몸만의 관계라는 것은 처음 관계를 맺고 나서 열흘도 되기 전에 확실해졌고, 엘리엇은 거기에서 아쉬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교류를 할 필요가 없어서 매우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성적으로 매력적인 상대라고 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었던 것이다.
엘리엇이 되묻자 라이언이 울화가 터진 듯이 벽을 후려쳤다.
“뭘 모르는 척하는 거야! 내가 마리나와 약혼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한테 안기고 싶어 했었잖아! 결혼과 사랑이 꼭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도 너였어! 이제 와서 네 입으로 아내에게 돌아가라니, 이제야말로 걱정할 것 없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게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어, 라이언. 그리고 나는 별로,”
“너는 내 거였어.”
그가 고개를 숙였다. 키스하려는 거다. 깨닫는 순간 엘리엇은 고개를 뒤로 빼고 옆으로 물러서서 공간을 확보했다. 그대로 물러났다면 별일 없었겠지만, 라이언이 손을 뻗어서 뒷덜미를 잡으려 했기 때문에 그는 주먹을 날렸다.
턱을 정통으로 후려 맞은 라이언이 뒤로 나자빠졌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때릴 작정이었던 게 아니라 반은 우연이었다. 엘리엇은 멈칫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라이언이 찢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키려고 허우적거렸다.
문이 열리고 션이 얼굴을 내민 것은 마침 그 순간이었다.
“엘리엇 씨.”
그는 완전히 무표정을 한 채로 엘리엇을 바라보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라이언을 바라보고, 다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민망해져서 “별일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을 돌렸다. 서로 비밀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약속이 이렇게 고마워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로?”
“정말이야. 괜찮아. 가세.”
션이 싸늘한 얼굴로 다시 라이언을 내려다본다. 엘리엇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뒤에서 라이언이 아직 어지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 밑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은 노이로제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엘리엇은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젓고는 문을 닫았다.
말없이 걷는데 션이 손을 잡아 왔다. 마주 잡기는 했지만 역시 뭔가가 부끄러워서 엘리엇은 눈을 돌렸다. 그러나 션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은 듯이 걸음을 멈추고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었어요?”
“정말로 별일 아닐세.”
엘리엇은 곤란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엘리엇 씨.”
“자네의 일을 자네가 해결해야 한다면, 내 일도 내가 해결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라이언 문제는 이미 끝났으니, 자네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네.”
비꼬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만하면 라이언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엘리엇은 정말로 이 일이 여기에서 끝났다고 생각했고, 션이 그런 사소한 문제에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이 션에 대해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말을 해 놓고 나서 자신의 말투가 마치 그를 배제하려는 듯이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션을 바라보았지만 그다지 그런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엘리엇 씨가 저를 배려하려고 하시는 말씀인 걸 아니까요.”
“음……. 고맙네.”
의례적인 말을 하는 것뿐인데 뺨이 뜨거워진다. 션이 작게 신음했다.
“엘리엇 씨.”
“응?”
“키스할래요.”
객실에서 누가 나오면 어쩌느냐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션의 입술이 먼저 뺨에 닿고, 눈 밑에 쪽, 하고 감촉을 남긴 다음 윗입술을 달콤하게 핥아 온다. 엘리엇은 눈을 감고 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기꺼이 그 키스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