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August (3)
선박은 브리튼을 한 바퀴 돌며 애버딘과 워터포드에 한 번씩 들러 사람을 더 태우고, 닷새째의 오전에 스페인의 산탄데르 항구에 기항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이 무색하게 배는 정시에 항구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전 8시나 되어서야 일어나서 션은 그것을 알았다. 그의 배를 베고 누운 채 엘리엇이 게으른 목소리로 간밤에 내내 비가 오고 파고가 높았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도 점심에는 도착할 것 같더군. 어차피 일정이 빡빡한 여행도 아니니까, 내일까지 정박해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았다.
“점심 전에 도착한다면 점심은 내려서 먹어요. 산탄데르에 가 본 적 있으세요?”
“옛날에……. 지나가다 들르다시피 한 것이라서 별로 기억할 만한 건 없군. 백사장이 좋다고 하니까 내려서 산책이라도 하세.”
“바다는 실컷 보고 있지만, 역시 해변은 또 다르니까요.”
션이 나른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엘리엇이 물었다.
“아침은?”
“별로 생각 없는데. 룸서비스라도 시킬까요?”
“룸서비스를 받으려면 최소한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맨몸에 가운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는 엘리엇을 내보낼 생각은 없고, 자신도 비슷한 꼴이라서 션은 “그냥 이렇게 있죠.”라고 중얼거리면서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요.”
“어젯밤에 배가 제법 흔들렸으니까.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잔 자네가 놀라운걸.”
“피곤했었나 봐요. 엘리엇 씨는 자지 못했어요?”
오늘 엘리엇이 이렇게 게으르게 뒹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 모양이다.
“약간.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뱃멀미가 있긴 했어.”
“지금은 괜찮아요?”
이마에 손을 얹어 보자 조금 미열이 있는 듯도 싶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엘리엇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루 정도 잘 자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건강을 해칠 만큼 허약한 체질로 보이는가?”
“드물지만, 아침에 못 일어나실 때도 있으시잖아요.”
“그건 대부분 자네 탓이지.”
엘리엇의 손가락이 기습적으로 옆구리를 더듬어 왔다. 션은 기쁨과 고통이 뒤섞인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피해서 침대 끝으로 도망갔다. 그 겨를에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엘리엇이 반 바퀴를 빙글 구르며 팔을 뻗었다.
“간지러워요, 으억!”
도로 다섯 손가락에 옆구리를 잡힌 션이 소리를 지르며 엘리엇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털썩 몸 아래에 깔아 눕히며 옆구리를 움켜쥐자 엘리엇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웃음이 섞인 신음소리를 냈다. 간지럽다고 하소연하는 입술에 가쁜 숨결을 겹치자 파란 눈동자가 처음에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한 듯 깜박거리다가 천천히 내리감겼다.
션은 부드러운 키스로 파고들어 깊게 엘리엇의 숨을 깨물며 등을 손으로 훑었다. 약한 부분을 달콤하게 더듬는데, 엘리엇이 물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자네가 아침밥을 챙기는 빈도로 보건대 슬슬 배가 고플 것 같은데?”
“부추긴 건 엘리엇 씨 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처음에는 그런 의식이 없었다고 엘리엇은 생각했지만, 몸은 벌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안 될 것은 없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침대에서 뒹구는 것이야말로 휴가의 본분이 아닌가.
“씻어야 할 텐데. 읏, 응.”
“끝나고 나서 엘리엇 씨를 안고 욕조로 들어가고 싶어요.”
“점심을 해변에서 먹기는커녕 오후가 되도록 침실 밖으로 못 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가운 끈을 풀어헤치며 션이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었다. 엘리엇은 헐떡거리며 션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입욕제가 바뀌어서 냄새가 조금 달라졌어요.”
“음. 읏.”
골반을 깨무는 감촉에 엘리엇은 숨을 들이켜고 몸을 조금 경직시켰다. 션의 손이 허벅지를 젖혀 열고 그 안쪽에 얼굴을 묻는다. 회음부와 허벅지 안쪽에 키스를 받으며 그는 다시 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션이 미소로 눈을 가늘게 하면서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면 엘리엇은 금세 숨이 가빠지곤 했다.
다급해진 호흡 대신 숨을 쉬기라도 하려는 듯이 오물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반쯤 물려 준 채 션이 천천히 엘리엇의 위로 다시 기어 올라왔다. 애를 태우듯이 느리게 아래를 만지면서 쇄골과 어깨를 깨문다.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무는 것이 아프기도 하고 자극적이기도 해서 엘리엇은 숨을 몰아쉬면서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리를 세워 옆구리를 조였다. 깨물린 유두가 빨갛게 부풀고, 마주 닿은 음경이 비벼지면서 흘러내린 체액이 뒤까지 적신다. 손가락 하나가 문제없이 미끌미끌 들락거렸다.
엘리엇이 아래로 손을 뻗어 션의 것과 자기 것을 합쳐서 쥐자 션이 헐떡거리며 그 손을 풀게 했다. 그리고 잠시 몸을 일으켜 욕실로 젤을 가지러 갔다. 엘리엇은 자극을 잃고 벌름거리는 뒷구멍을 의식적으로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션을 기다렸다.
그가 금세 젤을 가지고 돌아와 침대 위로 오르면서 말했다.
“아예 베개 밑에 놔둘까 봐요.”
“자네는 날 다시 반신불수로 만들 셈인가?”
“그러면 다시 제가 안고 다니죠.”
“음…….”
션이 너무 즐겁게 말해서 엘리엇은 반론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입술로 입술이 막혔다. 젤로 금세 뒤가 질척질척해진다. 뒤를 충분히 벌려 준 후에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엘리엇은 곧 닥쳐올 쾌감을 기대하며 허리에서 힘을 풀고 몸을 늘어뜨렸다. 다리 사이에서 션이 묵직한 물건에 처덕처덕 젤을 바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애가 탔다. 그런데 그는 얼른 넣어 주기는커녕 애를 태우려는 듯이 느릿하게 제 것을 비비면서 다시 질퍽한 손가락을 뒤에 삽입했다.
그때였다. 션은 누군가가 17층의 엘리베이터에 내린 것을 알았다. 그가 잠깐 움직임을 멈추자 엘리엇이 “빨리.”라고 속삭였다. 항문이 꿈질꿈질 움직이며 션을 재촉한다. 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싱 씨가 온 것 같은데.”
“응?”
17층에 내릴 수 있는 사람은 VIP 객실에 머무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스태프밖에 없다. 옆방의 리암은 선박 일정 문제로 부재중이고 존 세실 오브 솔즈베리와 그 파트너도, 헤이스팅스 남작 커플도 아직 방에서 뒹굴고 있다. 내리자마자 똑바로 이 객실로 올 사람은 싱뿐이었다.
엘리엇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션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싱은 현관 키를 가지고 있고, 아침마다 신문과 편지, 그날 열릴 이벤트의 카탈로그를 가져다주었다. 침실까지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거실에 사람을 둔 채로 이럴 수는 없다.
엘리엇이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의욕 없는 얼굴이 되었다. 션은 가운을 걸치면서 “금방 돌아올게요.”라고 달랬지만, 좀처럼 표정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션은 옷깃을 여미고 거실로 나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싱이 빙그레 웃으면서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간밤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푹 주무신 것 같군요. 멀미가 있으실 것 같아서 몇 가지 물건을 준비해 왔습니다. 합하께서는 아직 주무십니까?”
“어젯밤에 별로 못 주무신 듯해서 늦게까지 쉬실 겁니다.”
“아, 선의를 부르는 게 좋을까요?”
“그럴 정도는 아니고요. 아침을 가져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카트에는 레몬수와 국화차가 얹어져 있고, 제법 큰 수프 볼에서 송로버섯의 향기가 났다. 햄이 끼워진 크루아상이 아직도 따뜻해 보였다. 싱은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션이 그녀가 빨리 나가 주기를 원한다는 걸 눈치챈 듯 곧 상냥한 얼굴로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갔다.
션은 침실로 돌아와 몸을 일으키려는 엘리엇에게 다시 입술을 겹쳤다. 엘리엇은 눈을 감고 입술을 열어 달게 혀를 내주었지만, 션이 가볍게 미는 손에 넘어가는 대신에 가운을 끌어당기며 대꾸했다.
“그럴 마음이 사라졌어.”
젖은 채로 식은 뒤가 축축하고 기분 나빴다. 션도 더 하자고 조르지는 않고 산뜻하게 그를 놓아주었다.
“네, 샤워하고 오세요. 싱이 수프를 가져왔더라고요.”
“고마운 일이군.”
엘리엇이 다시 한번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욕실로 사라졌다.
션은 먼저 거실로 나갔다. 레몬수를 따라 입을 적시고 작은 크루아상을 입에 던져 넣는데, 이내 엘리엇이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거실로 나왔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셔야죠.”
엘리엇에게는 국화차를 따른 찻잔을 건네주고 션은 그의 머리에서 수건을 풀어내어 꼼꼼하게 닦았다. 그는 샤워 후 몸이 쉽사리 차가워지는 편이다. 여름이라지만 실내는 에어컨 때문에 도리어 춥다.
반짝거리는 백금발을 닦다 말고 정수리에 입술을 누른다. 엘리엇이 무심한 얼굴로 손을 뻗어서 편지 뭉치를 집어 들었다. 쓱쓱쓱 봉투를 추리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볼만한 게 없군.”
“보지도 않고 아세요?”
“점심, 저녁, 야회, 뮤지컬, 차 모임의 초대 중 하나이겠지.”
그는 스탠리 부인과 세인트데이비스 부인에게서 온 봉투 두 개만 따로 빼고, 남자의 이름으로 온 것은 모두 한쪽에 몰아 무시했다. 미혼 여성의 것은 분류하여 대부분 거절의 답장을 쓴다.
스탠리 부인의 편지는 내일 디너의 초대장이었다. 십여 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작게나마 만찬을 하고, 함께 뮤지컬을 보자는 이야기이다. 세인트데이비스 부인의 편지는 오늘 저녁에 산탄데르의 레스토랑에서 커플 동반으로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둘 다 거절할 이유는 없군. 괜찮겠지?”
“네.”
스탠리 부인의 모임이야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고, 세인트데이비스 부인의 제안도 공개적으로는 그렇다. 션은 라이언에 대해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만, 부인이 초대장을 보내는 이상 정말 특별하게 바쁜 용무라도 있으면 모를까, 거절할 핑계를 찾기가 쉽지 않다.
“매번 기혼 여성의 초대장에만 긍정의 답을 보내시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특별하지는 않지만, 이유는 있지. 남자들이 작위가 있건 권력이 있건 소용없이 사교계의 평판이라는 건 부인들이 쥐고 있는 거니까. 밉보이면 아주 피곤해져. 그러니까 그쪽부터 신경 쓰는 거라네.”
“스탠리 부인도, 세인트데이비스 부인도 젊어서 별로 힘이 없을 것 같은데요?”
“나중을 생각하면 미리 친분을 쌓아 둬서 나쁠 건 없다네. 아직 젊지만 결혼을 한 이상 기혼 여성 그룹에 끼어 있을 거고, 같은 그룹의 부인들 전부에게 바로 전달되어서 금세 동일한 평판이 매겨질 거니까. 그리고 나 정도 되는 지위나 연령의 남자가 미혼 여성의 모임에 초대받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일이고. 그런데 여기서는 대부분 미혼이 아닌가.”
“그렇군요. 확실히 제가 생각하기에도 좀 껄끄러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부부 동반으로 탄 친구들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다행이라네. 리암이 싫어하는 이유는 알고 있지만. 답장은 자네가 써 주겠는가?”
“좋아요.”
션은 일어서서 침실로 종이와 편서집을 가지러 갔다.
손 편지로 의사를 주고받다니 시대에 뒤떨어진 것에도 정도가 있지,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메신저가 자주 오가다 보니 의외로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면회 신청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풍습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편지로 용건을 받으면 답장이 잘못될 우려가 적고, 원할 때 답장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수가 있는 데다가 이메일처럼 발신이 잘못되었다거나 하는 핑계를 댈 우려가 없다.
크루즈선 안에서도 그렇다. 라이언이 엘리엇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굴어도 그의 카드 키로는 17층까지 올라올 수 없고, 인터폰도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초대나 통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벨이 끝없이 울릴 것이다. 서로 사적인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런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 약속을 잡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션은 고쳐 쓸 종이까지 아예 한 뭉치를 들고 도로 거실로 나왔다. 엘리엇이 답신을 적는 것은 여러 차례 보았지만, 직접 쓰는 것은 아직 한두 번밖에 해 보지 않아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문장은 정형화된 문형이 있으니 편서집에서 적당히 뽑아내어 바꾸면 되므로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악필까지는 아니더라도 손 글씨를 쓸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엘리엇처럼 유려한 필체로 적을 수는 없다. 같은 분량의 글자를 적어 넣어도 자기가 쓴 것은 항상 텅 빈 듯 광활한 백지가 느껴져서 션은 글씨 연습이라도 해야 되는 건가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이쪽은 자네에게 온 것이로군. 대부분 여자인데?”
“질투 나세요?”
“하는 게 좋을까?”
“하면 기쁘고, 안 하셔도 본전?”
“앞으로 자네가 모아들일 시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그러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군. 카터 양으로부터도 초대장이 왔는데.”
엘리엇이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션에게 건넸다. 왜 직접 보지 않고 넘겨주는 거냐면서 션은 예쁜 하늘색 종이를 폈다. 사흘 후의 점심 초대였다.
“자네랑 둘이서?”
“설마요. 앨리스와 데이지도 온답니다. 물론 동반인인 헤이스팅스 남작과 존 경도 함께요.”
현재 선내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여자 셋을 하나로 묶어 낸 이유가 션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존의 파트너인 데이지 니콜스야 신분이 높지 않지만, 베드퍼드 공작의 딸인 레이디 앨리스가 만난 지 몇 번 되지도 않는 평민 남자에게 이름을 허락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엘리엇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션이 그 시선의 의미를 오해한 듯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의 머리에 다시 입술을 눌렀다.
“당연히 엘리엇 씨도 함께죠.”
“음.”
엘리엇이 약간 눈썹을 세웠다. 같은 17층에 머무르고 있다지만 헤이스팅스 남작이나 존 경이나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이도 어리다. 지루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조합이라는 것도, 자신이 아니라 션을 중심으로 하리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지루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도 할 이야기가 없어진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걱정되세요?”
“걱정까지야. 나와 맞는 조합은 아니다 싶어서.”
“싫으시면 그만두고요.”
“아니. 싫지 않네. 단지 자네가 여자를 피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어.”
“대체로는 그렇지만, 그러지 않아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리고 앨리스나 데이지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편지를 마저 모두 분류하고 나서 대부분 답장을 션에게 쓰라고 미루고 엘리엇은 수프 그릇을 끌어당겼다. 배가 고팠지만, 어제저녁에 한 번 뒤집힌 속이라 이것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보온이 잘 된 볼에 담긴 수프는 아직 따뜻했다.
자기는 이것으로는 모자란다며 션이 룸서비스를 더 시켰다. 그리고 옷을 제대로 갈아입겠다고 침실로 들어갔다. 엘리엇이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고 수프를 다시 뜨는데, 벨이 울렸다.
누굴까. 싱은 이미 다녀갔으니 십중팔구 리암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는 그냥 바지 위에 가운 한 장만 걸친 채 옷깃을 잘 여미고 현관으로 나갔다. 인터폰에 카메라가 붙어 있었지만 보지 않은 것은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앨리스와 데이지가 나란히 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아, 죄송합니다. 합하. 저희가 방해를…….”
“아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리암 경일 거라고 생각해서 실례를 저질렀군요. 잠시 들어오시겠습니까?”
엘리엇은 자기 차림새가 여자를 맞이하기에 매우 부적절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휴가 여행 중이라는 것과 예고 없는 방문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허용 범위 밖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앨리스도 짧은 반바지와 반팔 티에 얇은 카디건을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고, 데이지는 그보다도 간단한 차림새라 결코 남자의 객실을 방문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헤이스팅스 남작은 앨리스 양을 혼자 보냈습니까?”
존 경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앨리스의 약혼자인 헤이스팅스 남작과 달리 그는 데이지를 아침부터 챙길 만큼 예의가 바르지 않았고, 오래된 사이인 만큼 존중도 허술했다.
“네. 굳이 에스코트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저어, 션은요?”
“곧 나올 겁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단정한 모습이 된 션이 침실에서 나왔다. 두 아가씨가 소리 없이 기쁜 몸짓으로 발을 굴렀다. 엘리엇은 그에게 둘을 상대해 주라고 말하고 자신도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드레스 룸에서 바지와 셔츠를 꺼내어 갈아입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엘리엇은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알……?”
개인적인 통화를 한 것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5년 전의 일이다. 앤드류나 해리가 그의 전화기로 거는 것일까 하고 엘리엇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선 건너편에서 인사를 건네 온 것은 진짜로 알버트였다.
“별일이로군. 자네가 오전부터 전화를 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일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네. 내가 직접 전화를 걸지 않으면 직통으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런 것뿐이야.」
그것도 결국 직통으로 연결해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전화기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맥케인은 옆에 있나?」
“없네. 밖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어. 왜?”
「특별한 이유는 아니야. 조금 껄끄러워서. 우선, 맥케인의 요청은 제대로 처리되었다고 전하게.」
“션의 요청……?”
엘리엇은 고개를 기울였다. 션이 알버트에게, 아니, SSB에 무슨 요청을 할 만한 일이 있었을까? 무심결에 팔걸이를 검지로 두드린다. 되물은 것에 설명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알버트는 “그래.”라고만 대꾸했다.
그는 망설였다. 이전에 알버트가 납치하다시피 션을 데려가 만났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 그때 션은 분명히 그에게 비밀을 만들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숨긴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분명하게 대답까지 해 주었으므로 자신이 뒤에서 캐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결국 엘리엇은 묻고 말았다. 그는 조금 더 자신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알버트가 션에게 특별히 적대감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앤드류나 왕실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션이 U급의 능력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알버트가 그를 억압하려고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도.
알버트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재촉하는 쪽이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엇은 그를 믿기 때문에 생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이 적대하지 않으면 알버트도 적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은 것은 친구 간의 신뢰라고 엘리엇은 믿었다.
그 신뢰는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로부터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 오면서 서로의 인품과 성격, 각자가 가진 힘을 알기 때문에 오는 것이므로 리암이 보내는 것 같은 무조건적인 호의보다 기반이 튼튼하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자네에게 이야기하는 게 별로 현명한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나는 자네들 두 사람이 의논하여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고 션 맥케인의 개인적인 결단이라면 그것대로 됐어. 나는 맥케인을 자네의 부속물로도, 헤리퍼드 소속으로도 보지 않아. 그러니 그와 나 사이에 이루어진 협상에 관하여, 그가 직접 자네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자네에게 말하는 일은 없을 걸세.」
“온당한 이야기로군.”
「굳이 자네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다른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야. 에미르 알 아시리에 대해 조사를 시켰다지?」
“공개적인 루트로 지시한 것인데, 자네가 관계해야 할 만한 일이 있는가?”
「BO 2)에서 자네 행보를 오해하여 술렁거리고 있다네. 덕분에 일이 늘어났어.」
알버트가 푸념처럼 말했다. 엘리엇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소란이 될수록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고? 아무튼 에미르 알 아시리, 정확히는 전대 에미르인 미란 알 아시리에 대해서, 물론 돌아가면 보고를 받게 되겠지만 지금 먼저 알려 주겠네. 이것이 맥케인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자네가 그에 대처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미란 알 아시리는 뇌종양일세. 이제 두 달쯤 남았어.」
“그런가.”
「치매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네. GFG성의. 8년 전에 미란 알 아시리가 새로운 에미르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그 때문일세.」
엘리엇은 이번에도 “그렇군.”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GFG에 의해 정신 방벽이 완전히 무너진 채로 상대에게 종속되는 경험을 하면 뇌에 병변이 생긴다. 지배당하는 도중에는 느끼기 어렵지만, 지배가 깨진 후의 후유증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그 대부분은 마음의 빈 곳을 채우지 못하고 상실감과 고독으로 자살하거나 미쳐 버린다. 살아남은 사람을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저항해 온 것 같지만, 뇌 자체에 물리적인 변화가 생긴 것으로 추정돼. 실제로 치매의 진행과 더불어 종양도 생기기 시작했고. A급 이상의 능력자가 정신 방어를 깨부쉈는데도 스스로 저항해 낸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연구소에서는 흥분해 날뛰었지만 카이루완의 에미르를 연구 샘플로 쓸 수 있었을 리 만무하지. 자네 때와 마찬가지야.」
라고 알버트가 말했다. 엘리엇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살아남았고, 그는 결국 무너졌으니까. 물론 알버트가 말한 것이 신분과 가문의 힘 때문에 연구물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것은 엘리엇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션 맥케인은 자신의 GFG나 입장에 대해서 제법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카이루완에서의 일은 열여덟도 되기 전의 일이야. 아동기에 받았던 충격의 연장선에서 쇼크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게.」
알버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엘리엇이 통화 중인 것을 본 션이 멋쩍게 웃었다.
“나오시질 않기에 뭘 하시나 하고요. 아, 방해하지 않을게요.”
그가 도로 나가려 하자 엘리엇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수화기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하겠네.”
션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알버트가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엘리엇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시 션을 바라보았다. 미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별다르게 생각되지 않아서, 그래서 표정이 변한다거나 션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든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앨리스 양과 니콜스 양은?”
“아. 그거 말인데요. 8층 수영장에 가자고 왔다는데, 갈까요?”
“나에게 묻지 말고 자네 뜻대로 하게.”
“엘리엇 씨가 가면 가고, 안 가면 안 가려고요.”
“그러면 가는 게 낫겠군.”
어차피 객실에 있어도 별달리 할 일은 없다. 사교 활동을 하러 왔으니 나가 보는 게 나으리라. 편안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을 보려고 배에 탄 것이 아니었던가.
션이 알렉산드라와 브라이언에게도 오라고 하겠다며 핸드폰을 들고 꼼지락댔다. 그리고 수영복을 찾는다고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엘리엇이 핸드폰을 서랍에 넣고 태블릿 PC만 챙기자 의아하게 물었다.
“그대로 가시게요?”
“수영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서. 그냥 해를 쬐면서 테이블에서 차나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네.”
션이 잠깐 머뭇거렸다.
“자네는 놀고 오는 쪽이 좋아. 갈아입고 나오게.”
“하지만…….”
“아까 자네가 깨물어 놓은 걸 잊었는가. 이대로는 윗도리를 벗을 수 없어.”
엘리엇은 미소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션이 얼굴을 붉히며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어차피 수영할 생각은 없었다네. 준비하고 나오게.”
그는 태블릿 PC를 챙겨서 먼저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있는 앨리스와 데이지는 발랄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엘리엇을 돌아보고 물었다.
“합하께서도 같이 가실 건가요?”
“태양 빛을 받으며 게으름을 부릴 생각입니다. 어젯밤에 멀미를 했더니 격렬한 운동을 할 만한 기운은 없군요.”
두 사람이 까르르 웃었다.
“좋아요. 저희도 사실 수영보다는 일광욕을 하러 가는 것이거든요.”
“합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지요. 뵐 기회가 있어도 언제나 아버지가 놓아주시질 않으시니.”
“베드퍼드 공작과는 뜻이 잘 맞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는 건 앨리스 양과는 별로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설마요. 저희는 아주 아주 기대하고 있거든요.”
둘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뭘?’이라고 생각했다. 데이지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합하가 션을 어디에서 만나서, 어떻게 사귀게 되셨는지, 어떻게 파트너로 소개시킬 결심까지 하게 되셨는지, 그런 이야기요. 션은 만난 지 2년이 다 되도록 합하가 헤리퍼드 공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틀림없이 로맨틱한 만남이었겠지요?”
곤란해졌다. 그녀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나잇을 하러 갔던 수상한 바에서 만나서 몸을 섞다가 모텔보다 위생적인 장소에서 편하게 섹스 하고 싶어서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엘리엇이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만드는 쪽을 선택하기 전에 다행히 션이 나왔다. 그는 반바지 아래로 뻗은 길고 탄력적인 다리에 넋을 잃고 시선을 주다가 두 숙녀가 자신을 보고 키들대고 웃는 것을 알았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으세요?”
구원이라도 요청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 되어 있는 그를 보고 션이 의아하게 물었다. 엘리엇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고 가자고 고갯짓했다.
* * *
오전 8시의 수영장은 제법 한가했다. 운동 삼아 아침마다 수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광욕을 하는 사람뿐이다. 여름휴가 중이다. 밤늦게까지 놀고 이 시간에는 자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리라.
존 경과 헤이스팅스 남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둘 다 없었다. 션이 각자의 파트너들은 어디에 갔느냐고 묻자 앨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헤이스팅스 남작이 아침부터 카드 게임을 하러 나갔다고 했다. 존은 간밤에 내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아직까지 자고 있다고 한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점심때나 되어서야 기어 나올 테니까. 아, 여기서는 식사도 되는 것 같더라고요.”
데이지가 명랑하게 말하고 작은 손가방에서 오일을 꺼내어 앨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수영은 하지 않으시더라도 합하께서도 일광욕 정도는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햇살이 좋은데요.”
여름 햇살은 그녀들이 말하는 대로 정말로 멋졌다. 아직 오전 중이라 기온도 그리 높지 않고 바닷바람이 불어서 쾌적하다. 그러나 태닝 하는 습관이 없는 엘리엇은 정중하게 그것을 거절했다. 그는 피부가 약한 편이다. 햇볕을 쬐어도 보기 좋게 그을리기는커녕 빨갛게 화상을 입을 뿐이기 때문에, 굳이 범절 때문이 아니라도 좀처럼 짧은 바지나 소매 없는 윗도리를 입지 않았다.
느긋하게 등받이에 기대고 급사가 가져온 아이스티를 마시며 몸을 편하게 둔다. 앨리스가 데이지의 등에 오일을 발라 주었다. 이 크루즈에서 처음 만난 사이일 텐데 사이좋은 자매처럼 보였다.
“션은 태닝은 하지 않아요? 아, 오히려 색을 망치게 되려나요?”
“어느 샵에서 했어요? 런던에서 제일 비싼 곳이라는 데 갔었는데도 그렇게 잘 빠진 색은 본 적이 없는데. 결국 본인 피부색도 중요하니까.”
“카터 양도 정말 예쁘게 잘됐지요. 그녀는 자기 집에 아예 태닝 룸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션에게 질문을 해 놓고는 대답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무척 편안해 보여서 션은 우습다는 생각에 공감을 구하려고 엘리엇을 쳐다보았는데, 그가 순수하게 궁금증이 담긴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태닝 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정말요?”
데이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션은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외할머니를 닮은 것이라서요. 아랍계 혼혈인데 갈색 피부를 가지고 계셨죠.”
“어머.”
“진짜 유전자의 행운은 전부 싹쓸이한 것도 아니고.”
데이지에게 등을 맡기고 있던 앨리스가 분개하며 말했다.
두 사람이 나른하게 선 베드에 드러누워 조용해지고, 엘리엇은 평온하게 햇볕을 즐겼다. 션은 엘리엇을 혼자 놔두고 가도 되려나 고민했지만, 어린애도 아닌데 무얼 걱정하는 거냐며 엘리엇이 황당해하고 앨리스마저도 깔깔거리면서 “두 분이 이 배에서 가장 안전한 신사분인 것처럼 우리도 무해한 숙녀가 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엘리엇에게서 떨어져 풀에 들어가자마자 금세 몇 사람이 둘러쌌다. VIP 전용 시설이라고 해서 모두가 엘리엇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가문의 일을 맡고 있지 않거나 앞으로도 작위를 이을 가능성이 없는 젊은이들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관심이 있더라도 실제로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훨씬 적다는 것을 션은 이제 알고 있었다. 남들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소문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예의에 어긋난다. 그것이 이 사회의 ‘규칙’인 것이다.
그러니 엘리엇 대신에 화제가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션은 웃는 낯으로 대충 응대해 주고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엘리엇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혼자 수영을 한다는 것은 조금 불안한 기분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맑고 서늘한 물과 태양 빛의 조합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라인의 끝까지 가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에 가벼운 비치볼이 머리를 쳤다. 바람이 들어간 공이라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션은 약간 불쾌감을 느끼며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이리 주세요!”
비키니를 입은 한 무리의 여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외쳤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태도였다. 싸울 것도 아니므로 션은 그쪽을 향해 그냥 공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쪽으로 오세요!”라는 애교 섞인 외침이 연달아 던져지더니 순식간에 여자들이 그를 둘러싸 버렸다. 제멋대로 팀까지 짜기 시작하여 션은 몹시 곤란해하며 거절의 말을 되풀이했으나 흥분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별로 통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엘리엇은 거의 신기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저게 매혹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 더 놀랍지 않은가.
“음. 제가 가 볼까요? 공작님께서 이런 일에 나서시는 것도 좀 그렇지요.”
그가 불쾌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앨리스가 그렇게 제안했다.
“놔두어도 알아서 잘 처리할 겁니다. 앨리스 양이 신경 써 주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션이 어린애도 아니고요.”
“그냥 호의예요. 염려 마세요, 공작님.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란 일개 차녀인 저라도 베드퍼드의 딸이랍니다. 션에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이로운지 정도는 잘 알고 있어요.”
에드워드는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다며 그녀가 괜스레 사죄를 하고 일어섰다. 엘리엇은 그녀가 객실에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우아한 걸음으로 그쪽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미소하며 바라보았다. 그냥 어린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곧 션을 둘러싼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수영장 밖으로 사라졌다. 션이 앨리스에게 뭔가를 말하자 그녀가 까르륵 웃었다. 데이지는 선글라스를 낀 채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다. 따뜻한 햇살이 무릎과 허벅지를 물들여서 이내 엘리엇도 졸음을 느꼈다.
낯모르는 여자 하나가 션과 앨리스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앰버 펨버튼이에요.”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말을 건 것이 데이지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챘다.
“카터 양의 말벗이지요. 합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여자는 아니에요. 앨리스는 그녀가 마음에 드는 것 같지만, 카터 양이 그렇게 오래 그녀를 옆에 둘 리 없고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이 사회에 들어와 보고서도 아직까지 신데렐라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요. 신분과 재력을 갖춘 다정하고 멋진 남자가 가문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에 빠져서, 결국은 모든 반대를 뚫고 적절하지 못한 애인을 아내의 자리에 올리는 일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 말이에요. 차라리 성을 버리고 자기가 평민이 되는 쪽을 선택한다면 모를까. 그건 그녀가 통찰력이 없든가,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든가,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그릇되게 하고 있다는 걸 뜻하죠.”
그녀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그녀야말로 존과 사랑에 빠져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엘리엇은 의문을 느꼈다. 데이지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합하를 일컬으려는 건 아니에요. 존의 이야기죠.”
“존 경이 니콜스 양을 사랑하고 있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펨버튼 양이 기대하는 것 같은 환상적인 사랑이었다면 저는 지금쯤 다이아몬드 반지를 약지에 끼고 있을 거예요.”
그녀가 시니컬 하게 대꾸하더니 선글라스를 벗고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합하께서는 얼마나 긴 시간을 유효기간으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아, 그러니까……. 미래가 없는 애인을 파트너로서 남들에게 소개시킨 사람의 입장에서.”
“관계가 얼마나 오래갈 것 같냐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곤란해졌다. 한 번도 유효기간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 같은 것이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헤어지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로테르담으로 션을 찾아갔던 그때부터 그는 관계가 끝나는 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런 날이 있다면 아마 션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는 있다.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그는 그런 경우에 맞추어 유언장도 수정해 놓았다.
잠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죄송해요. 제가 곤란한 이야기를 여쭌 것 같네요.”
“아닙니다.”
“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신가 봐요. 션이 부럽네요. 진짜로 신데렐라 맨이었어요.”
엘리엇은 그녀에 대해 잘 몰랐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토마가 걱정하는, 한때는 아일라가 그랬던, 리암이 괴로워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이따금 션이 그늘을 드리우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알고는 있었다.
“사교계에서 존 경의 평판이 책임감 있고 좋은 남자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략결혼이든 뭐든, 이유야 어떻든 간에 신의 앞에서 서약을 나눈 배우자가 있는데도 다른 파트너를 두는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지요. 그러나 존 경이 좋은 남자였다면 애초부터 니콜스 양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을 겁니다.”
“네, 그렇죠.”
“니콜스 양은 부럽다고 말했지만, 이혼하지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정말요? 합하께서는 사실상 싱글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상, 이라는 말이 붙는다는 것은 법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요. 제가 비난받지 않는 것은 이것이 아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라는 것과, 존 경과 달리 뜻을 살펴야 할 부모가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엇은 평온하게 말했다.
“그들은 저를 비난하는 대신에 제 아내를 먼저 비난하지요. 그리고 평판대로라면 제 아내는 명예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망종이지만, 저는 한 번도 그녀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 따뜻한 사람이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며, 훌륭한 어머니이지요. 그리고 혼인 관계의 여부와 관계없이 저는 션과의 관계를 끝내야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세간의 평판을 따지자면 매우 그릇된 일이죠. 제가 그런 말을 모두 따르고자 한다면, 우선 이혼을 한 후에 션과는 깨끗이 손을 끊고 신분이 적절한 어느 가문의 영애를 만나서 재혼을 한 다음 자녀를 셋이나 넷쯤 두어야 할 겁니다.”
데이지가 묘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그렇게 살 생각이 없고, 그에 대해서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니콜스 양에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라는 이야기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습니다. 각자 모두가,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고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평판을 중요시할 것이냐, 감정을 중요시할 것이냐, 물리적인 위협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어느 쪽이든 자기 선택이니까요. 저는 저 자신을 위해 제 감정과 션을 소중히 여기기로 결정했습니다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그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정론이네요.”
데이지가 대답하고는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조금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정하시네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특별한 진실처럼 들리게 말씀하시는 법을 아시는 것 같아요.”
“아마 제가 무신경한 편이라서 정말로 남의 말을 상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엘리엇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얼마 전까지는 명예와 평판을 신경 쓰고 있었다. 마음이 바뀐 것은 평판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상처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행복은 자신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합하에 대해서 좋지 못한 이야기라고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걸요. 침착하고 공평하시다는 말씀은 종종 들었지만.”
“깊은 교류를 갖지 않으면 누구에게라도 공정하게 보이는 법이니까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서 공정하다고 할 정도로 차가우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대체로 숙녀분들에게는 친절하게 하려고 애쓰긴 합니다. 폭한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러자 그녀가 깔깔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보다는 그냥 다정한 분이라고 기억할게요.”
“돌아가실 겁니까?”
“네. 존이 보고 싶어져서요. 또 뵈어요. 아 참, 내일 점심에 카터 양의 점심 초대는 받아들이실 건가요?”
“그러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내일 뵙겠네요. 그럼.”
데이지가 무릎을 구부렸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에게 커트시로 인사를 받는 것은 그를 이상한 기분으로 만들었고, 그녀의 동작이 어려서부터 예법을 배운 것처럼 흔들림 없이 우아해서 더욱 그랬다. 아마도 그녀는 존과 교제하게 되고 나서부터 그의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엘리엇은 그녀를 보내고 나서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션이 반지를 주려고 했다는 것을 엘리엇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의식불명이었던 때에 한 번 손가락에 끼워 보고 자선기금에 기부해 버린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준형의 손을 거쳐서 그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그 반지를 그냥 서랍 속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다. 남에게 넘길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지만, 자기 쪽에서 되찾았노라고 꺼내어 말하는 것이 좋은 선택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히 좋지 않은 기억만 후벼 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션은 그 뒤로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있다. 적어도 겉으로는 같은 집에서 살게 되고, 여기에서나마 그를 파트너라고 지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심은 어떨까. 션도 데이지처럼 끝에 관해 생각하면서 불안해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다가왔다. 엘리엇은 수영장 쪽을 바라보았다. 션이 물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자네 생각.”
션이 손바닥으로 물에 젖은 얼굴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수영장 가장자리를 잡고 상체를 쑥 물 밖으로 내밀었다. 엘리엇은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션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서는데, 한발 늦게 도착한 앨리스가 그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저도 도와주세요.”라고 내밀어진 팔을 잡으려 하자 엘리엇이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션이 앞질러 잡아서 쑥 물속에서 꺼냈다.
“꺄아!”
앨리스가 환성인지 비명인지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서 끌려 나왔다.
“힘이 굉장히 세시네요.”
“엘리엇 씨를 안아 들려면 근력 운동을 빼먹어서는 안 되죠.”
“남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린가.”
엘리엇이 꾸짖듯 말했지만, 션은 방긋 웃음으로 대답했다. 앨리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이제 사람들한테 깔려 죽어도 안 도와줄 거라면서 선 베드 쪽으로 총총 향했다.
“데이지는 어디 갔어요?”
“존 경을 보러 간다더군요.”
엘리엇은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몸을 대강 닦은 앨리스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며 양해를 구하고 그녀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션은 두 손으로 다시 물이 떨어지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엘리엇이 앉아 있던 테이블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급사가 쪽지를 가져다주었다. 션이 그것을 펴 보고 말했다.
“알렉산드라가 못 오게 되었다는군요.”
“그래? 몸이라도 좋지 않은가?”
“엘리엇 씨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달래요. 이거 제가 마셔도 돼요?”
“그러게.”
션은 아이스티 잔을 집어 들었다.
“답장을 써야 할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따 돌아가서 안부 전화라도 하면 될 것 같군.”
“네. 그런데 엘리엇 씨는 긴 바지 입고 덥진 않으세요?”
“아직은. 더워지면 먼저 들어가겠네.”
“아까 괜히 그랬어요.”
상반신에 치흔을 낸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어차피 실외 수영장에서 겉옷을 벗을 생각은 없었다며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션이 손을 뻗어 입술을 만져 왔다.
그때, 리암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수영장으로 들어왔다. 처음 초대를 받았을 때 션은 그가 노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렬히, 적극적으로 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업이라는 엘리엇의 말이 맞았다. 그는 모든 디너쇼와 파티, 차 모임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즐긴다고 할 만큼 오래 있는 적은 없었다. 수영장과 피트니스에서 얼굴을 보이는 일도 거의 없다. 한번 방문해 본 일이 있는 그의 객실은 엘리엇과 션이 묵는 객실과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었으나 스위트룸이라기보다는 집무실에 가까웠다.
지금도 그렇다. 수영장에 왔지만 빈틈없는 정장을 갖춰 입고 있다. 명백히 놀러 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전부터 수영장이라니 웬일이야?”
그는 곧바로 엘리엇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션은 엘리엇의 입술에서 아쉽게 손을 떼면서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리암도 마주 인사를 하고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았다. 피로 가득한 얼굴로 그가 한탄했다.
“왜 입장이 반대지?”
“뭐가 말인가?”
“네가 일을 하고 내가 연애질을 하고 있는 게 정상이잖아?”
“나에게 휴식 시간을 늘리라고 늘 말하던 게 누구인지 모르겠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피곤해 보이는데. 쉬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한가하게 쉴 팔자가 아니지. 헤리퍼드 공작에게 양해를 구하러 왔어. 솔직히 존 경이나 에드워드 경한테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일단 너한테 숨기는 것은 곤란하고.”
“양해?”
“스페인에서 입항을 거부했어.”
“뭐?”
리암이 피곤한 얼굴로 얼굴을 쓸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엘리엇조차도 경악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유가 뭐라던가?”
“밀항자가 있다나 봐. 입국 금지 대상은 아니지만, 정보부의 요주의 인사 중 하나라서 소재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라면 국내에 선박 자체를 들일 수가 없다고. 그런데 그게 SSB에서도 요주의 대상이라서 난장판이 됐어. 그런데 누군지 물어봐도 알버트가 알려 주려고 하지를 않아서 내가 대처할 수가 없어. 내 손님들은 모두 신원이 확실하단 말이야. 고용인 중에 있는 건가 싶어도 노년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예 없는데.”
리암이 다시 한번 얼굴을 쓸었다.
“그래서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기항하지 못하게 된 거지. 산탄데르를 넘어서 다음 기항지로 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어쨌든 찾지 못하면 다음 항구에서도 입항을 못 할 테니까. 제이한테도 이야기해 봤는데, 돈을 준다는데도 중복 의뢰는 안 받는다고 거절하더군. 내 배인데 나를 배제시키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어서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오늘 안에 기항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중복 의뢰가 아니라 상대가 문제일 겁니다.”
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리암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지 아는가?”
“알 것 같군요. 저도 직접 찾아 드리는 건 입장상 좀 곤란하고요. 머리는 붉은색에 기골이 장대하고 겉보기에는 사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입니다. 아마 스태프나 승무원으로 위장하고 탄 게 아닐 테니까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아, 어, 그걸, 에.”
리암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물어봐야 대답도 듣지 못하고 서로 곤란해지기만 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션은 미소하며 덧붙였다.
“자기를 숨길 생각이 없는 사람이니 인상착의를 알면 찾기 쉬우실 겁니다. 잘못했다는 자각도 없을 것 같은데 그냥 협력을 구하시는 게 편할 거고요. 매우 높은 수준의 신체 강화계 능력자입니다. 화를 돋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SSB가 싫어할 것 같으니 제가 알려 드렸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알았어. 고마워.”
그가 벌떡 일어서서 대답하고는 서둘러 수영장을 빠져나갔다. 션은 느긋하게 나머지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맥 마셜이 배를 탄 수법은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항구에서 도움닫기로 건너뛰어 배로 넘어왔든가 승무원을 매수했으리라.
흔적이 남지 않았을 텐데 그것을 알아낸 스페인 정보부도 제법이다. 일단 영국으로 들어왔다가 배를 탔을 테니 SSB에서는 빨리 알아낸 쪽이 당연하지만 말이다. 스페인 정보부에서 말을 꺼낸 뒤에도 누구인지 몰랐다면 협력을 취소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정도다.
알버트를 몰아세울 생각에 조금 즐거워하고 있자니 엘리엇이 몇 번 팔걸이를 두드려 그를 상념에서 끌어내었다.
“그 밀항자라는 사람은, 자네와 알 사이에 맺어졌다는 협상과 관계있는 사람인가?”
미간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션이 멈칫했다. 입매에 서린 당혹감이 슬며시 사라지고 애교 섞인 웃음이 된다. 엘리엇은 그것이 상냥한 모양새의 가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홧홧한 감각이 퍼졌다.
“저와 협상을 맺었다고, 알버트 전하가 그러시던가요?”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은 그 ‘협상’이 나와 자네가 같이 의논하여 결정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더군.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네.”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SSB에게,”
“말할 필요 없네.”
션의 말을 엘리엇은 중간에서 잘랐다.
“말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일을 내 안색을 살펴서 말할 필요는 없어. 자네 일은 자네 문제이지. 자네는 내게 종속된 사람도 아니고 부하도 아니야.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네.”
“엘리엇 씨……. 혹시 화가, 나셨어요?”
“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걸세.”
적어도 입 밖으로 내고 있는 말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알버트에게 했던 것도 같은 뜻의 말이었다. 션은 그의 부하도, 아랫사람도 아니다. 그의 문제는 그가 처리할 것이며, 자신이 알 필요 없는 프라이버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작정 의지하고 조를 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슴에 뭔가가 뚫린 듯이 바람이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엘리엇은 이미 이 기분을 한 번 맛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 ‘실망’이라든가 ‘공허’라고 부르는 것이다.
엘리엇은 자신이 왜 그런 감상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션이 비밀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알버트가 말했을 때도 그는 그게 지극히 온당한 일이라고 판단했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그리 대수로운 것도 아니리라.
리암의 약간의 곤란함을 타파해 주기 위해서 말하고, 자신의 앞에서 언급하는 것을 조심할 필요조차 없으리만큼. 그가 상냥한 얼굴을 일부러 만들어 보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당혹감을 미소로 가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면서도 엘리엇은 그 구멍이 쑤욱 커지는 것을 알았다.
“엘리엇 씨. 잠깐만요.”
션이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잡아 빼고 더 놀란 것은 엘리엇 쪽이었다. 냉정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대와 친근하게 접촉하는 것이 낯설기 때문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다.
그러자 션이 테이블을 빙 돌아 그의 앞으로 와서 몸을 구부려 시선을 맞추고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션의 손은 뜨겁고, 자신의 손은 차가웠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그 사람, 정말로 별로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협상이라는 것도 알버트 전하가 거창하게 말씀하신 것뿐이고, 경호를 좀 잘해 달라고 부탁한 것뿐이니까요. 제가 U급의 능력자라고 포섭하려는 사람이 있다기에 어차피 거절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말하지 말라지 않았는가?”
“엘리엇 씨.”
“자네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서 내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어. 나는 자네를 구속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의 GFG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생각 같은 건 정말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네.”
“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자네의 문제이지. 지금은 다만―.”
다만, 뭐. 그 뒤에 이을 말이 없어서 엘리엇은 침묵한 채로 섰다. 망연한 기분이 든다. 다만 뭐가 어떻다는 걸까. 모르겠다. 이야기를 할수록 침착해지기는커녕 없었던, 혹은 몰랐던 것들이 가슴에서 머릿속으로 순서 없이 마구 튀어 오른다.
결국 그는 막막해진 기분으로 션의 손에서 다시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션이 그를 따라 일어서며 다시 손목을 잡아 왔다.
“엘리엇 씨.”
당혹감에 가득 찬 눈길이 사랑스러우면서도 피하고 싶어졌다. 엘리엇은 “나중에.”라고 중얼거리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리 가벼운 자리라도, 여기도 엄연히 사교계의 일부였다. 몸은 드러낼 수 있어도 내면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물러가게.”
그는 명령조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놀란 션의 눈이 커졌다.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자리를 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자네가 물러가게. 이 일은 나중에,”
그렇게 말하다 말고 엘리엇은 깨달았다. 이것은 션에게 너무 부당한 일이다. 바로 몇 분 전에 자신은 데이지에게 평판이나 명예 따위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션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남들 앞에서 그를 무릎 꿇게 하고 마치 아랫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러가라고 명령하다니.
“아니야. 미안하네. 내가 가겠네.”
“엘리엇 씨!”
션이 언성을 높였다. 엘리엇의 생각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그로서는 지금 엘리엇이 자기가 가겠다고 한 것을 같은 자리에 있고 싶지도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객실에서 이야기하세.”
“엘리엇 씨.”
그는 션의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아 빼내고 몸을 돌렸다. 걸음이 성급해지려는 것을 억누르면서 천천히 출구로 향한다. 션은 뒤따라오지 않았다. 뒤에 남은 션은 엘리엇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낸 것도 놀라웠지만 밀어내진 것은 믿기지 않았다. 쓸개를 쥐어짜기라도 한 것처럼 목구멍 아래로 온통 써졌다.
신경에 거슬리는 수런거림에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련만 말을 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앨리스조차도 갈등하는 얼굴로 멀찍이서 둘러싸고 수군대고 있을 뿐이다. 온몸을 화살처럼 찌르는 것은 호기심과 음험한 만족감들이다.
션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걸쳐 놓았던 비치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엘리엇을 뒤따를 생각은 없었지만 여기 계속 있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터덜터덜 밖으로 나가는데 어느 용감한 여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션은 힐끗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구설수에 오를 겁니다, 펨버튼 양.”
엘리엇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제 평판은 바닥인 걸요. 저어……. 제가 말한다고 위로가 되시지는 않겠지만,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여기서는 남들 보이는 곳에서 감정 섞인 말을 주고받는 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거든요. 합하께서는 그런 태도가 몸에 배어 있으실 거예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꼭 화해하세요.”
“고맙습니다.”
션은 온건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녀를 뒤로했다.
* * *
“한 잔 더.”
종을 흔들어 급사를 불러 말하고 엘리엇은 상자를 열어 새 시가를 꺼내다가, 재떨이에 놓인 끝까지 태운 꽁초가 벌써 네 개인 것을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한 번에 한 개를 다 태우는 일도 적은데 네 개라니. 션이 알면 화를 낼 것이다. 많이 피웠다고 자각을 해서 그런지 조금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평소보다 과용한 시가 탓인지 위스키 탓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위스키도 다섯 잔째였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 보내기 위해서 술과 담배를 이용하는 것은 엘리엇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빡빡하게 쓰고 있다.
휴식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게 앉아 있었던 적은 있지만, 그런 것은 스스로 빼낸 휴식 시간이 아니라 아일라나 윌리엄이 잔소리를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에 가까웠다. 클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가나 태우고 있을 때도 늘 뭔가를 읽고 있곤 했다. 그런 시간은 휴식이기는 해도 사실 절반 정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진짜 개인으로서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공작으로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션에게서 도망쳤다고 해서 갈 곳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 가도 되고, 리암의 일을 도와도 된다. 그것조차 아니라면 이 바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
알면서도 나른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데도 그를 명확하게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것은 마치 실내에 고이는 담배 연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비슷한 일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엘리엇은 이전에도 션의 문제로 이랬던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다시 만나기로 결정했을 때 그랬고, 그 이후에도 한두 번은 짧은 시간이나마 이런 식으로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한 번과 두 번까지는 생경한 불꽃놀이 같았지만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 되면 놀랍다거나 생경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이만하면 퍽 인간다워지지 않았는가 생각하면서도 그것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지금 당장 속이 아프고 쓰린 것이 괴로웠다. 그것이 이상해서 엘리엇은 혼자서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션에게 감사하고 싶은 동시에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전자와 달리 후자 쪽에는 정당한 이유를 붙이기 어려웠다.
급사가 정중한 동작으로 앞에 온더록스를 내려놓았다. 엘리엇은 손끝으로 유리잔의 차가운 겉면을 쓸다가 이것을 다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보고 싶다는 말은 이런 일에도 마법을 일으킬까? 차갑게 식힌 독주보다 션의 입술을 마시면 기분이 더 나아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돌리다가, 어둑하게 내려놓은 블라인드 아래로 아직 일광이 내비치는 것을 깨닫는다. 몇 시쯤 되었을까. 점심이 되기 전에 션에게서 도망쳤고, 연달아 시가를 네 대 피웠으니 아직 4시가 넘지 않은 오후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났는지는 일단 삼켜 버리고 나자 그리 기억나지도 않았다. 짙게 남은 것은 오히려 자기혐오 쪽으로, 이제까지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자신이 못난 인간임을 끊임없이 깨닫는다. 션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가서 사과를 하면 그만이다. 그가 다정하게 받아 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망설이고 있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가서 미안하다고 다시 제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을 비우려고 억지로 애쓰면서 술잔을 끌어당긴다. 도망치고 싶어졌다고 해도 배 안에서 갈 곳이라고는 손님이 없는 바의 별실 정도였다. 준형이라면 적절한 조언을 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다. 이런 얼굴로 사람이 북적거리는 2층의 큰 바에 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웬일이야? 대낮부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술을 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자 라이언이 서 있었다. 엘리엇은 대답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가 털썩 엘리엇의 옆에 앉았다. 건너편이 아니라.
“네 아도니스랑 싸웠다면서. 왜?”
“벌써 소문이 났나.”
소문이 순식간에 돌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엘리엇은 한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아도니스라는 단어에 약간 헛웃음이 나기는 했지만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나지 않고 배기겠어. 네가 표정을 바꾸는 걸 본 사람조차 없을 텐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
“충격으로 쓰러진 레이디도 있다던데.”
그건 확실히 거짓말일 것이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고 술잔을 끌어당겼다.
“별일 아니야. 선배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신경 안 쓰일 리 있겠어? 사이좋은 것 같더니.”
라이언의 손이 뻗어 와 그의 손등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잔을 빼앗아 갔다. 다정하게 쥐거나 했다면 엘리엇도 눈치를 챘겠지만, 잔을 끌어가는 손길은 스킨십이 아니라 술을 그만 마시라고 말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야기해 봐. 네가 줄담배에 술이라니 처음 본다고.”
“내가 선배의 생각만큼 기계적인 인간이 아니었나 보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네가 퍽 다른 사람보다 식어 있는 건 사실이지.”
그러면서 라이언의 손이 다시 뻗어 왔다. 손가락이 살며시 앞머리를 건드린다.
“이야기해 봐. 말하면 시원해질지도 모르잖아?”
“…….”
엘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남들은 이럴 때 어떤 식으로 감정을 처리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아일라는 실연을 당하거나 애인과 헤어질 때마다 그에게 와서 울면서 사연을 모조리 쏟아 내곤 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더 가끔은 안아 주기도 하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와 아일라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리암조차도 그런 일이 있을 때 그를 찾아와 털어놓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대개는 모든 일이 정리된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 라고 말했고, 그조차 하지 않는 적이 많았다. 그것이 자신이 좀처럼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담 상대가 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해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라이언이 이런 일을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전에 라이언이 몸을 기울이며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위로해 줄까?”
손등 위에서 손가락이 부드럽게 글씨를 쓰듯 움직였다. 연갈색 눈동자에 어둑하고 농염한 빛이 감돈다. 엘리엇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라이언과는 1년 넘게 몸을 섞었던 사이다. 그가 욕망을 품었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 마.”
입술이 닿기 직전이 되어서야 제재한 것은 그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위로가 유혹으로 연결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게 무엇인지 생각하느라 대응이 늦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기울여 키스하려던 라이언이 작게 흘리는 숨결이 인중과 입술에 닿았다. 그가 그대로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왜? 션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
“놔.”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언이 덮고 있는 왼손도 빼내려 했지만, 그전에 그가 손을 꽉 움켜잡았다.
“엘리엇.”
“이건 옳지 않아, 라이언.”
“대체 뭐가? 마리나라면 신경 쓸 것 없어. 그녀는 이해할 거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초췌하고 불안한 얼굴로 말인가. 엘리엇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가 반음쯤 낮아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 마음은 어떤데? 정말로 나를 조금도 원하지 않아? 생각해 본 적은 있었을 거 아니야.”
“라이언.”
“네게 모험을 하자고 조르는 게 아니야. 지금의 애인과 헤어지고 다시 시작하든가 그런 것도 아니야. 위로해 줄게. 다 잊어버리게 도와줄 테니까.”
달래듯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소매 안쪽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온다. 엘리엇은 그 손을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10년 전에도 라이언이 이렇게 달콤하게 굴었던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엘리엇이 성욕과 애정을 혼동하지 않는 것처럼 라이언 역시 그랬다. 시작은 대체로 건조했고, 끝난 후에 기분이 좋아져서 이따금 배가 고프다며 뭘 먹으러 가자고 재촉하여 일으켜 세우는 일은 있어도 연인처럼 미소하고 속삭이고 손을 맞잡은 일은 최초의 한두 번조차도 없었다. 그가 그것을 배운 것은 모두 션을 상대로였다.
대체 왜일까.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육체적으로 라이언에게 별로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매력이라면, 침대에서 찍어 눌렀을 때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상대라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혹했을 때 그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찍어 누를 대상에게 시간을 들이는 것은 라이언의 스타일이 아니다. 차라리 강제로 끌어안아 소파에 누르려 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라이언이 검지 끝으로 손목 안쪽을 어루만지며 커프스를 풀었다. 엘리엇은 다시 한번 손을 빼냈다. 라이언은 일단 손을 놓아주는 듯하더니 다시 붙잡아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감은 속눈썹이 제법 애처로운 체 떨렸다.
“원하잖아.”
라이언이 달래듯이 소곤거렸다.
“답답할 때는 항상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아무나 괜찮다는 것은 아니야.”
과거에는 아무나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답답할 때 섹스를 하고 싶어진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과거에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탈이었다. 특별히 취미도 없고, 유흥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친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침대에서 낯선 남자를 상대로라면 민낯을 까놓을 수 있다. 섹스가 물리적인 자극일 뿐이라고 해도 좀처럼 고조되는 일이 없는 몸과 마음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졌고, 가끔은 가슴까지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지금도 그렇기는 했다.
그러나 션과 손을 맞잡은 뒤로 행위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몸을 부대끼는 것도, 눈앞이 아찔한 황홀을 맛보는 것도, 감정의 고조도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답답해진 순간에 일탈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 자고 싶은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전에는 어렴풋이 ‘내키지 않는다’라고만 생각했던 문제에 대해서 엘리엇은 명확하게 인식했다.
어쩌면 만난 것이 션이 아니었더라면, 혹여나 고정적인 파트너를 만들었더라도 별생각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번보다는 두 번이 쉽고 낯선 사람보다는 익숙한 사람이 나으니까. 라이언과는 몸이 잘 맞았고, 안전하고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점도 이미 10년 전에 증명되었다.
잃을 것이 많아졌다는 점에서 그때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도덕적인 문제라면, 그는 이미 과거에 라이언이 마리나와 약혼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섞었었다.
하지만 그러면 션이 슬퍼할 것이다. 공감 능력이 남보다 부족한 그라 해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를 슬프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단순하여 유치하게까지 생각되었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마법의 단어처럼 그 말도 만들어서 입 밖에 내고 나자 가슴이 편해졌다. 육욕 같은 것 때문에 비로소 손에 넣은 보물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다.
“그냥 외로울 때, 힘들 때, 그럴 때 위로해 주고 기댈 자리 만들어 주는 역할조차 맡길 수 없어? 그렇게 나한테 실망했어?”
“라이언, 10년 전에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해해. 이해하니까 그냥 마음 푸는 데 이용만 해도 괜찮다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어도 상관없어. 앞으로도 아무것도 없어도 돼. 다시 시작하는 것까지는 원하지도 않아. 그냥 가끔, 네가 힘들 때 나를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마리나의 문제로 널 곤란하게 하지도 않을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게.”
도무지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서 엘리엇은 답답해졌다. 라이언이 손등에 키스해 왔다. 엘리엇은 힘을 주어 손을 잡아 빼고 다른 쪽 소매로 손등을 닦았다.
“이상하게 말하는군. 마치 나 때문에 부인과 이혼이라도 할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여기에서 웃어야 하는 건가 하고 엘리엇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데 애틋한 라이언의 얼굴만 동동 떠서 이해할 수 없는 희극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내야겠다고 생각하여 손을 뿌리치고 엘리엇은 테이블을 반 바퀴 돌아가 라이언의 건너편에 털썩 앉았다.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 라이언, 이러는 게 불편해. 10년 전에 내게 품었다는 감정이, 그런 게 정말로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고, 그것이 설령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해도 이제 와서 보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만약에 정말로 나를 좋아하기라도 했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도 마리나 부인과 결혼하여 떠나기를 선택한 것은 선배 자신이야.”
“너도, 정략결혼이 어떤 것인지 알잖아. 그러니까 아일라 스칼렛이 그렇게 체면조차 내던지고 애인을 사귀고 다니는 것을 묵인했고……. 의무로 결합한 상대에게까지 정절을 요구할 수 없다고 네가 말했었지.”
“경우가 달라. 내 아버지가 결정한 이상 아일라에게는 한다, 안 한다, 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라이언의 경우와 똑같이 말하는 것은 아일라에게 미안한 일이다. 동일한 이유로 그는 존 세실도 동정하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결혼과 애정 생활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주어진 현실이다.
맞서 싸우고 뛰어넘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쟁취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찬사하고, 혹은 의무를 다하여 자신을 죽이고 모범적이고 청렴한 삶을 살아간 이를 존경할 수는 있겠지만, 일개인이 나약하여 그저 부모가 결정한 대로 결혼을 하고 손에서 사랑하는 이를 놓지도 못한 채 비겁하게 살아갔다고 해서 특별히 비난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한정적인 선택지 안에서도 사랑을 찾아내는 사람은 있다. 사랑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결혼을 결정했더라도 그 선택에 끝까지 충실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라이언은 스스로 마리나 자파스를 선택했고 그녀의 마음을 끌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때가 있었다. 그 결합이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사랑이 분명히 있었으리라고 엘리엇은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나를 생각하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가 라이언에게는 있었고, 아마 그녀에게도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그런 시간들에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마리나 부인과 딱히 오픈 매리지를 약속하고 결혼한 것도 아니겠지. 라이언. 그녀를 생각해.”
“마리나는 이해할 거라고 했잖아. 내 마음은 항상 너한테 있었어. 네가 여자였더라면 당연히 네게 청혼했을 거야. 지금까지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한 것도 그것 때문에…….”
“내가 정말 우습게 보였나 보군.”
엘리엇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상대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짓말조차 꿰뚫어 보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래도 한때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옛 인연을 들먹여 한다는 소리가 이런 허언이라니 허탈할 정도였다.
“그야 물론 듀크 콘소트의 작위는 매력적이었겠지.”
“엘리엇.”
“더 이상 자네와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군. 이만 물러가게, 세인트데이비스 자작가의 라이언 경.”
엘리엇은 다리를 꼬며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을 쭉 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헤리퍼드 공작으로서 내뱉자 라이언이 멈칫 안색을 굳혔다. 분노와 수치로 얼굴을 붉힌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분별력을 잃지 않고 불린 호칭에 걸맞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비로소 조용해졌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덮었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어차피 한번 치러야 하는 일이라면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온더록스는 반이나 녹아 있었다. 엘리엇은 그것을 훌쩍 들이켜고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바를 나섰다. 저지른 실수는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하자. 그는 틀림없이 용서해 줄 것이다.
션은 객실 테라스의 풀에 반쯤 잠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엘리엇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뒤쫓아 가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션은 약간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엘리엇이 그에게 물러가라고 명령조로 말했다든가, 그가 엘리엇을 배제하고 알버트와 협상을 했다는 사실에 화를 낸 것이 부조리하다든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좀 더 엘리엇이 부당하게 굴었더라도 크게 마음 상해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화가 난 것은 엘리엇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션은 생각했다. 엘리엇은 화가 났다면 설령 그것이 불합리한 일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부딪쳤어야 했다. 장소가 적절하지 못하다면 객실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면 된다. 감정이 흔들리고 화가 나고, 그러는 자신에게 당황하고 있었던 것은 안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션은 뒤늦게이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대로 자신에게 속에 있는 걸 전부 쏟아 내는 것이 옳았다. 갑작스럽게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깨닫고, 입을 다물고 냉정한 귀족의 얼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과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고 빌 준비도 언제든지 되어 있다. 그러나 알버트와의 협상에 대한 일이나 맥에 대한 일이나, 잘못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거짓으로 달래고 구슬리는 일이 간편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엘리엇은 타인의 감정을 판단하는 것에 둔한 주제에 거짓은 놀랄 만큼 잘 판단한다. 눈앞의 사람에게 휩쓸리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진짜로 화를 낸 것은 션이 일단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사과의 말을 주워섬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심 그대로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거짓 위에 쌓아 올려진 관계의 허망함에 대해서는 션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자면, 불만이라든가 서운했던 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하나씩 떠오르면서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진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채 찰랑거리는 물에 몸을 맡긴다. 미지근한 물에는 마음을 풀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션은 희미하게 눈을 뜨고 환한 하늘과 새파란 바다를 바라본다. 엘리엇의 위치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네 시간하고도 20분 만의 일이었다.
조금 겁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단단한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정신이 다가올 때마다 션은 조금씩 조금씩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화를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가 나기는커녕 그저 기쁠 뿐이라서 과연 자기가 뛰쳐나가 그를 끌어안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그는 표정을 무심하게 다듬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거실로 들어온 엘리엇이 일단 침실로 향했다가 다시 나왔다. 션은 눈을 감은 채 그가 다시 침실을 거쳐 욕실로 갔다가 나오는 것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뻐지는지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마침내 테라스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 있었군.”
엘리엇이 말했다. 션은 심장이 뛰는 것을 억누르고 팔다리에서 힘을 빼고 둥둥 떠 있던 자세 그대로 도로 눈을 감았다.
“션.”
타이르듯이 부르는 소리에도 눈을 뜨지 않자 엘리엇은 초조해졌다. 잠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션이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수영장 가장자리로 다가섰다.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말씀하세요. 듣고 있으니까.”
“……사과하고 싶네. 아까, 자네에게 명령조로 말한 것.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미안하네.”
그 목소리는 몹시 낮게 가라앉아 있어서 엘리엇이 얼마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션은 팔다리를 휘저어 몸을 물속에서 곧바로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그것을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션은 당혹했다.
그것은 그가 엘리엇에게 화가 난 부분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이었다. 처음부터 엘리엇은 그에게 하대하고 있었고, 대개 누구에게나 윗사람으로서 행동해 왔다. 화난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지만, 화가 났을 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션은 특별히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엘리엇이 그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내리깔았다.
“당황했었어. 그런 것이 핑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들 앞에서 이렇게 감정적이 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그러니까 용서해 달라고 말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간 초조한 듯이 엘리엇이 몇 걸음을 풀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며 짧은 길이를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알버트와 자네 사이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캐물은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겠네. 말하지 말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추궁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 생각해 보면 이미 자네가 내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던 일인데. 자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게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내 태도가 부적절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미안하네.”
“정말로 단순히 부적절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걸음이 멎었다.
션은 물속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엇은 완전히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술 때문인지 아니면 수치심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어쩌면 화가 나는 것을 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션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네가 말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네.”
“알버트 전하에 대해서요?”
“신체 강화계 능력자를 만났다는 일에 대해서.”
엘리엇이 빠르게 내뱉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이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게 아무 말도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해서는 안 됐네.”
“엘리엇 씨…….”
“SSB와 스페인 정보부까지 나서서 제어하려고 하는 인물이고 게다가 준이 피하기까지 하는 신체 강화계의 능력자라면 나에게도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 있는데, 내 생각이 틀린가?”
“……아뇨. 아마 생각하시는 사람이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그 사람을 혼자 만나서는 안 됐어. 그가 위험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자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든가, 자네가 그보다 강한 능력자일 수도 있다든가, 그런 건 전혀 문제가 아니야. 알과 이야기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내가 알을 신뢰하든 하지 않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네는 그게 자네의 안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내게 의논했어야 했어. 그가 맥 마셜이 아니라 다른 신체 강화계 능력자라도 마찬가지야.”
션은 놀라서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 엘리엇이 화를 낸 이유가 그것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해졌다. 그가 화를 낸 이유를 여러 가지 생각하면서, 그 안에 걱정을 포함시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솔직하게 사과하고 그는 엘리엇의 앞으로 헤엄쳐 갔다. 발끝에라도 키스하고 싶었지만, 슬리퍼와 양말이 가로막고 있어서 슬퍼졌다. 손을 대면 젖을 거라는 장벽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짜고짜 바닥에 쓰러뜨려 정신없이 입술을 탐닉했을 테니까.
“하지만 맥은 단순히 절 포섭하러 왔던 것이고, 악의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이야기는 온건하게 잘 끝났습니다. 맥이나 저나 서로 싸우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이어 갈 겁니다. 알버트 전하가 SSB를 보낸 이유도 단순히 타국에서 저를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막으려고 하는 거라고 들었고요. 그래서 알버트 전하를 안심시켜 드릴 겸,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저한테까지 그런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도록 잘 막아 주시라고 부탁드렸을 뿐이었어요.”
“그건 잘된 일이로군.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려는 문제는 그것과 별개야.”
엘리엇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잘 끝났지만, 앞으로의 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알과의 관계도 그래. 전에 말했던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철회하겠네. 나에게 의지해. 내가 자네를 지킬 수 있도록 하게.”
“엘리엇 씨.”
“그게 자네의 안위에 대한 문제라면 무조건 나에게 이야기해야 해. 약속하게.”
엘리엇이 몸을 구부려 앉아서 션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얽으며 눈을 맞춰 왔다. 찰랑거리는 물살이 그의 바지 자락과 무릎을 적셨다.
“아뇨.”
션은 미소하며 그의 손등에 물기로 그림자를 그렸다.
“약속할 수 없습니다.”
“션.”
벽을 박차고 물 한중간으로 돌아가자 엘리엇이 몸을 일으키며 그를 불렀다. 션은 물속에서 다시 머리를 내밀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끌어안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거리를 두지 않으면 대화는 냉정하게 이어질 수가 없다.
“저는 엘리엇 씨의 피보호자가 아닙니다.”
“자네를 아랫사람 취급하려고 그러는 게 아닐세. 거만하게 말한 것에 대해서는 몇 번이라도 사죄하겠네.”
“그게 문제는 아니에요. 아니, 사실 그게 문제인 건지도 모르겠군요. 엘리엇 씨는 느끼고 있지 못하신 것 같지만, 이 관계는 너무 일방적이에요.”
션은 물속에서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내가 자네를 보호하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에요. 저라도 엘리엇 씨가 위험에 빠진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돕고 싶을 테니까요. 하지만 엘리엇 씨가 아무런 의식도 하지 못하고 제게 주시려는 것들의 파급효과가 너무 커요. 똑같이 손을 내밀어도, 제게서 엘리엇 씨에게 흘러가는 것은 미미하고 엘리엇 씨가 저에게 퍼붓는 것은 너무 양이 많지요. 지난번에 주신 카드와 마찬가지예요. 엘리엇 씨는 그게 우리 둘의 관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단둘만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적어도 저한테는 그래요. 서로 나누려고 해도 실제로는 제가 일방적으로 받는 것밖에 되지 않고, 그런 게 쌓이면 남들이 정부라거나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누가 감히.”
“지금도.”
션이 지적하자 엘리엇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네에게 받는 게 작다고 누가 그러던가.”
“엘리엇 씨가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걸 전 알고 있고, 그 마음이 물질적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너무 커서 그것에 늘 감사하고 있지만요.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션은 미소했다.
“그리고 제가 U급의 GFG 능력자라는 것은 엘리엇 씨와 제 관계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제 문제입니다. 저는 제 능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도 스스로 처리해야만 해요. 그다음에야 저 자신에게 당당해질 수 있겠죠.”
“그러니까 자네를 보호하지 말라는 건가?”
“네. 엘리엇 씨는 적어도 제 문제를 제가 스스로 처리하게 놔두셔야 해요.”
엘리엇이 침묵했다. 미간에 그늘을 깔고 생각에 잠겨 든다. 션은 그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엘리엇이 그들 사이에 우열 관계를 만들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자신을 소유물처럼, 혹은 휘하의 아랫사람처럼 생각한다면 저렇게 고민하며 지금의 말을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션은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좋아. 그게 자네 자신의 문제이며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겠네. 하지만 안전은 의논할 대상이 아니고……. 이건 단순한 내 고집이라는 것을 알지만, 역시 자네가 비밀을 만드는 것은 싫어.”
“엘리엇 씨도 저에게 숨기는 일이 있으시잖아요. 그럼 그거, 전부 말씀할 수 있으세요?”
“…….”
엘리엇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션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싫으셔도 할 수 없네요.”
“그래도, 안전에 대한 문제는 양보할 수 없어.”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위험할 것 같은 일은 엘리엇 씨에게 의논하겠어요. 그래도 제가 요청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그래. 그 정도라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엘리엇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대신에 엘리엇 씨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세요. 화나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서운한 것도, 뭔지 잘 모르겠는 것에 대해서도, 저로 인해 생기는 감정들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지요. 제가 비밀을 만들어서 화가 난다면, 그때마다 저한테 화가 났다고 말씀하세요. 조금 전처럼 저를 내버려 두고 혼자 가 버리시지 말고요. 뭐라고 말씀하셔도 제가 그것 때문에 엘리엇 씨가 싫어지는 일은 없으니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션이 함박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럼 이제 우리 화해한 건가요?”
“그래, 그런 것 같군.”
엘리엇이 확신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타협점이 생긴 것은 맞았다.
션이 미끄러지듯이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끌어 올려 줄 생각으로 엘리엇은 그 손을 잡았는데, 반대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풍덩 소리가 났다.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기는 바람에 엘리엇이 물을 먹고 버둥거리는데 단단한 팔이 그를 받쳐 안았다. 반사적으로 상대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며 그는 몇 번 쿨룩거려 물을 토해 냈다.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걷어 넘겨 주며 션이 엘리엇의 미간과 코끝에 키스했다.
“생각보다 깊군, 이 수영장. 쿨룩.”
“발끝은 아슬아슬하게 닿아요. 갑판하고 8층 수영장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요.”
손을 놓아도 균형을 잡는 데에 문제는 없을 테지만, 엘리엇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끌어안자 션도 마주 허리와 등을 안아 왔다.
“자네, 몸이 차가워. 입술도 좀 파랗고.”
“괜찮아요. 여름이니까. 금방 더워져요.”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고 입술을 더듬는다. 혀를 내밀어 그 손가락 끝에 가볍게 쪽, 하고 뽀뽀한다. 엘리엇은 가만히 그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무는 것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자네, 화난 것은 다 풀린 거지?”
“네. 사실 이제 기쁠 정도라고 하면 이번에는 엘리엇 씨가 또 화나실까요?”
“내가 그럴 리 있겠는가.”
“제가 화났던 건 엘리엇 씨가 자리를 박차고 가 버렸던 것 하나뿐이에요.”
션이 웃으면서 말하고 입술을 맞대어 비벼 왔다. 그리고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술 얼마나 마셨어요? 담배 냄새도 나고.”
“으음…….”
엘리엇이 할 말이 없어서 시선을 옆으로 떨어뜨렸다. 그래도 목을 감은 팔을 풀지는 않았다. 팔 안에 안기고 나자 한없이 더 안아 줬으면 싶었다. 션이 눈가와 뺨에 쪼는 듯이 가벼운 키스를 떨어뜨리며 속삭였다.
“스트레스받는다고 술로 푸는 건 안 좋아요. 담배도 그렇고.”
“하지만…….”
“정말로. 건강 때문에라도 차라리 저한테 푸는 습관을 들이세요. 엘리엇 씨는 건강하셔야 해요. 저는 엘리엇 씨랑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션의 말에 엘리엇은 조금 웃고 말았다.
“글쎄.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보다 5년은 건강할 수 있게 노력해 보겠네.”
물맛 나는 키스를 반복하면서 션이 셔츠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왔다. 엘리엇은 숨을 멈추면서 물에 불어 주름이 생긴 손가락이 유두를 어루만지는 감촉에 집중했다.
“침대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싫어요?”
“밖으로 트여 있는데…….”
“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이 맞다. 건너편에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물새가 되어서 날아오지 않는 이상 저 바다에서 누가 볼 수 있을 리도 없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고 션의 목에 매달려 시키는 대로 순순히 두 다리를 들었다. 벗겨진 바지가 수영장 밖으로 철퍼덕 떨어진다.
션이 그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받친 채 자신도 수영복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그를 안은 채 수영장 가로 헤엄쳐 가, 가볍게 그를 들어 올려 가장자리에 앉혔다.
“션.”
평소보다 서늘한 입술이 깊게 엘리엇을 삼켰다.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그는 션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입술은 서늘하고 입속은 뜨겁다.
“으, 응.”
션이 그의 엉덩이를 더 당겨 깊이 빨아들이면서 상체를 밀었다. 엘리엇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몸을 눕히고 다리를 벌렸다. 찰랑대는 물살이 엉덩이와 뒷구멍을 간질인다.
“너무 들여다보지 말게.”
“깨끗해요.”
아침에 씻어 두길 잘했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코로 회음부를 비비며 션이 그 밑을 몇 번이나 맛보았다. 물에 젖은 덕분인지 젤이 없이도 길쭉한 중지가 쉽사리 뒷구멍으로 들어온다. 그 손가락도 평소보다 차가워서 엘리엇은 숨을 헐떡였다.
몸이 물에 쓸릴 때마다 부르르 떨린다. 뒤로 들어온 손가락이 부드럽게 안을 후빌 때마다 구멍이 스스로 벌어졌다. 몇 번이나 션의 목구멍까지 깊이 삼켜지는 사이에 앞쪽도 금세 한계까지 부풀었다.
“션, 역시 침대 쪽이 낫겠어…….”
역시 물속에서는 좀 그렇지 않은가 생각하며 엘리엇은 그를 잡아당겼지만, 션이 웃으며 도리어 그를 다시 물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요? 전 엄청 흥분되는데요. 조금 다르게 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엘리엇은 보수적이지만 타인의 눈에 띄는 일이 아니라면 잠자리에서의 새로운 시도를 거부하려고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위생 문제 때문에 약간 망설임은 있었지만, 순순히 션의 품에 다시 안긴다. 션은 그대로 삽입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물속이라서 자세를 고정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가 엘리엇을 돌려세우고 수영장 가장자리를 잡으라고 손을 살짝 눌렀다.
“션.”
깊이는 목까지 물이 찰 정도로, 바닥에 충분히 발이 닿지만 그래도 불안한 기분이 든다. 엘리엇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션을 불렀다. “괜찮아요.”라고 젖은 머리칼에 입술을 대며 션이 뒤에서부터 허리를 끌어안고 손으로 앞섶을 넉넉하게 쥐어 온다. 엉덩이를 당기듯이 들게 하자 발꿈치까지 떴다. 션이 작게 웃었다.
“엘리엇 씨가 제 마음대로 되는 것 같아서 조금 좋아요.”
“션. 으읏.”
중지가 다시 뒤로 파고들어 구멍을 약간 헤집는다. 물이 들어가는 것 같아서 엘리엇은 몸을 떨었다. 이내 단단한 귀두가 뒤에 닿았다. 평소보다 뜨겁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파고들고 나자 오히려 다른 때보다 서늘한 느낌이었다.
“엘리엇 씨, 엄청나게 뜨거워요.”
“윽, 션. 잠깐.”
앞을 쥔 션의 손이 충동적으로 비벼대려 해서 엘리엇은 안달을 내며 그 손을 붙들었다. 아직 익숙해지지도 못했는데 심하게 자극을 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아나듯이 벽에 달라붙자 션이 성급한 손으로 허리를 끌어당겼다. 발이 다시 들렸다. 제대로 된 지지대가 없어서 션의 것에 매달리듯이 뒤가 조이고 만다. 엘리엇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수영장 가장자리를 쥔 손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었다. 션이 고개를 기울여 그의 뺨과 입술 옆에 키스를 퍼부었다.
“제가 느껴져요?”
“키스. 음.”
조르며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민다. 션이 그의 턱을 붙잡아 뒤로 돌리며 입술을 겹쳤다. 물이 혀와 함께 밀고 들어왔다가 예민한 곳을 쓸고 나간다. 피부는 식어 서늘하고 몸속은 뜨겁게 움직이는 그 낙차에 도착적인 흥분이 든다. 힘껏 션을 조이며 엉덩이를 움직이려 했지만,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세요. 제가.”
션이 헐떡이며 엘리엇의 몸을 벽에 밀어붙이고 힘껏 끝까지 박아 넣었다. 느끼는 곳까지 파고드는 단단한 감각에 엘리엇은 발가락에 경련이 나도록 힘을 주었다.
“좀, 더.”
자꾸만 손과 허리에서 힘이 풀려서 미끄러져 물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것을 션이 다시 붙들어 끌어낸다. 물이 귓가와 입술과 턱을 간질이고, 몸이 출렁거릴 때마다 몸속이 움직거려 부드러운 충격을 준다. 엘리엇은 스스로 벽을 붙잡는 것을 포기하고 한 팔을 돌려 션의 목을 끌어안았다. 션이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좋아요?”
“좋아. 거기. 좀 더, 하앗.”
느낌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애가 탔다. 이쯤에서 한 번쯤 격렬하게 박아 줄 법도 한데, 저항력 때문인지 션이 빠르게 한다고 해도 애를 태우듯 뭉근하게 비비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앞쪽을 만져 주는 손길도 여느 때보다 느리다.
엘리엇은 션과 반대 방향으로 허리를 흔들어 움직임을 더 깊이 받아들이려고 애썼지만, 리듬을 맞추지도 못했을뿐더러 생각보다 동작이 커져서 자꾸만 빠질 것처럼 되고 만다. 안 된다고 신음할 때마다 션이 그의 몸을 끌어당겨 다시 깊이 집어넣어 주기는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가 초조해하면서 재촉해 대자 션이 웃으면서 끝까지 박아 넣은 채로 그를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애가 타요?”
“션. 션.”
“그럼 이렇게.”
그가 부력의 힘을 빌려 엘리엇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쑥 빠져나가는 느낌에 엘리엇은 버둥댔지만, 션은 어렵지 않게 그를 다시 돌려세웠다. 열이 오르는 얼굴에 입맞춤을 여러 번 떨어뜨리며 엘리엇의 손을 뒤로 돌려 가장자리를 잡게 한다.
“잘 잡고 계세요.”
“어떻게 하려고. 으응.”
션이 그의 무릎을 접어 올려 그 사이로 자기 몸을 밀어 넣었다. 거의 수평으로 띄우고 엉덩이를 크게 벌린다. 그리고 벌어진 구멍에 끄트머리를 대고 천천히 몸을 끌어 내렸다.
“아, 잠깐. 아.”
엘리엇은 당황하면서 힘껏 수영장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금세 뱃속 깊은 곳까지 션이 들어찼다. 침대에 누웠을 때에야 흔히 하는 자세이지만 등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위태로움을 못 이기고 몸을 뒤로 빼려 하자 션이 그의 등을 끌어당겨 안으며 물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가는 바람에 허둥지둥 두 팔로 그에게 매달리고 만다. 힘이 들어간 뱃속에서 음경이 더 뜨거워진다. 그러나 달아날 방법은 없고 지지할 곳도 없어서 결국 뒤를 조인 채 더 강하게 매달렸다.
“션, 이거, 헉, 앗.”
“괜찮아요, 엘리엇 씨. 물속이니까 가벼워요. 힘을 빼고 저를 껴안으세요.”
사지로 그를 휘감아 매달린 듯한 자세가 된 채로 엘리엇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션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가장 느끼는 곳을 심하게 눌려서 할딱대자 션이 웃으면서 그의 입술에 계속 키스했다.
“힘 빼요. 괜찮아요, 엘리엇. 잘하고 있어요.”
“하, 아. 응. 으응.”
엘리엇은 신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면서 션의 턱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비볐다. 결합한 채로 마주 앉는 자세는 매번 그를 미쳐 버리게 했지만, 그래도 몇 번 해 봤다고 조금 익숙해졌는지 바로 울음이 터지지는 않았다. 짓뭉개듯이 비벼지는 대신에 느릿하고 약간 온도가 낮은 쾌감이 조금씩 신경을 잠식해 온다.
션이 조금씩 움직이는 건지, 이렇게 큰 배라도 흔들림이 안까지 전달되는 건지, 물살이 출렁일 때마다 몸이 흔들려서 미세하고 부드럽게 자극된다. 엘리엇은 가쁜 숨을 내쉬며 션에게 더 꽉 안겨든 채 고개를 숙였다. 션이 기쁜 듯이 그의 뺨과 목덜미와 귓가를 할짝거리고 빨면서 달콤하게 속삭인다.
“엘리엇이 무서워하는 건 느끼는 게 아니라 상대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잖아요. 저한테는 그래도 돼요. 그러니까 매달리세요.”
그렇게 말한 것은 우선적으로는 섹스와 쾌락의 문제였다. 엘리엇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하고 침대에서 솔직하면서도 심적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지 않고 이성을 한 줄 잡고 있으려고 애쓴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원나잇을 계속해 왔으니 그런 버릇이 들어 있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 자신에게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션은 생각했다. 세상에서 온통 떨어져서, 땅에 발을 대는 것조차 못한 채로 오로지 자기에게만 의지하고 자기에게만 안겨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완전히 의지해 주기를 바라고, 그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팔을 갖고 싶었다.
엘리엇은 대답이 없었다. 목을 그러안은 팔이 파들파들 떨리고, 목덜미에 뿜어지는 뜨거운 숨결이 흐느낌처럼 새어 나온다.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서 션은 웃으면서 허리를 흔들어 더 깊이 파고드는 대신에 그를 안은 몸 전체로 물속에서 부드럽고 나긋하게 움직였다.
“기분 좋아요?”
울음소리가 단속적으로 끊어진다. 따뜻한 기운이 젖은 어깨에 떨어져서야 션은 그가 신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깐. 엘리엇 씨, 지금 울, 어요?”
션은 크게 당황해서 엘리엇의 뒷덜미를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연푸른 눈동자가 어른거려 보이도록 눈물이 고여 있더니 주르륵 흘러내린다.
“엘리엇, 씨. 왜, 울어요?”
“내가?”
그는 정말로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쾌감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침대에서 그를 울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무릎 위에 앉아 마주 안은 자세를 강요할 때마다 엘리엇은 너무 느낀 나머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목이 쉴 때까지 흐느끼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태와 다르다. 션은 다급하게 몸을 빼냈다. 급하게 빠져나가는 감촉에 엘리엇이 진저리치면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벌름거리는 구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왜?”
“엘리엇 씨 지금, 울고 있잖아요.”
짠맛이 입술에 떨어져서야 엘리엇은 그것을 알았다. 자신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괴로워하는 것이 몸을 달구던 충족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전자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션이 혼란스러워하면서 그를 안은 채 다급하게 물가로 헤엄쳐 갔다. 그리고 허둥지둥 그를 수영장 밖으로 끌어 올리고 타월을 가지러 달려갔다. 엘리엇은 망연자실한 채로 자신의 손바닥에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체 왜?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큰 타월을 가져온 션이 일단 그의 셔츠를 벗긴 후에 그것으로 몸을 감싸서 해가 닿는 쪽으로 끌고 가 선 베드에 앉혔다. 실내에는 냉방이 돌려져 있으니 이대로 데리고 들어가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애달게 속삭이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으러 뛰어 들어간다. 그러나 엘리엇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금방 올게요.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리니까요. 잠깐만요.”
“가지, 마.”
말을 하려고 해도 울음 때문에 좀처럼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던 것이 반대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부풀어 올라 도로 꽉 막히는 것 같기도 하다. 화가 났을 때 가슴속에서 튀어 오르던 뜨거운 것이 한꺼번에 치밀어 목구멍을 통해서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엘리엇은 제대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겨우 부탁했다.
션이 복잡한 얼굴로 그의 곁에 남았다. 손으로 뺨과 눈을 닦아 주고 닦아 줘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왜 울어요? 엘리엇, 응? 말해 봐요. 나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었어요? 그렇게 하는 건 싫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닿아 오는 입술이 따뜻하고 등과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아서 엘리엇은 힘없이 션에게 기대었다.
“울지 말아요. 잘못했어요. 울지 말아요.”
션은 서둘러 그를 끌어안고 눈가에 키스를 퍼부었다. 잘못했다고 그는 거의 빌면서 엘리엇을 안아 들다시피 하여 침대까지 데려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표정을 전부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우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은 자기 품에서 쾌락을 못 이겨서 울어 버릴 때로 충분하다. 이렇게 무표정한 채로 기운 없이 울게 할 생각은 없었다.
눕혀질 때까지도 엘리엇은 자기가 왜 우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끌려갔다.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력한 채로 팔을 벌리자 션이 그의 몸을 꼭꼭 닦아 주고 시트를 덮어 주다가 이마와 눈가에 다시 키스했다. 그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엘리엇은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렸다.
“자네도, 젖었는데.”
“괜찮아요. 저는. 울지 말아요. 엘리엇 씨.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테니까요. 싫어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을게요. 잘못했어요. 화도 내지 않고, 비밀도 만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응?”
달래면서 끊임없이 키스해 오는 것이 좋으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엘리엇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운하거나 화가 난 것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션은 좀처럼 믿지 않았다. 짠맛이 나는 키스를 계속해서 뺨과 눈꺼풀에 받다가 그는 속삭였다.
“키스해 줘.”
“엘리엇 씨.”
흐느낌 속에서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엘리엇의 입술에 닿아 왔다. 살며시 맞물렸다가 금세 떨어지는 입술을 붙잡고 엘리엇은 시트를 걷고 다리를 벌렸다. 그 의사를 깨닫고 션이 숨을 들이켰다.
“엘리엇 씨.”
“원해.”
도무지 눈물이 멈추지 않아 엘리엇이 흐느끼듯이 말했다. 왜 이런 상황에서도 원하는 마음이 드는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션을 갖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자네를 사랑해.”
기묘하게도 그것만이 멍한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엘리엇은 머릿속의 껍질 안에 무엇인가가 가득 고였다가, 마침내 수용 불가능해져서 터질 듯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네를 사랑해.”
좀 더 제대로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는 좀처럼 단정하게 나오지 않았다.
션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눈동자가 에게해의 바다처럼 새파랗게 일렁거려, 엘리엇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고 눈물에 젖은 입술로 그의 입술을 물었다.
“죄송해요.”
션이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리엇 씨가 울고 있는데, 이것밖에 못 되는 인간이라서.”
엘리엇이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팔을 내뻗으며 원한다고 말하는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비호욕보다도 탐욕이 이겨서, 그는 참지 못하고 엘리엇의 위로 올라타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벌어진 살 틈에 자신을 푹 파묻자 엘리엇의 몸이 순간 바짝 긴장했지만, 이내 두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으며 목을 젖혔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그 이상으로 충족감이 있어서 흐느낌과 울음소리를 같이 내며 션을 재촉한다.
“더, 들어와.”
이제 울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다. 대신 괜찮으니 더 울어도 된다고, 내 팔 안에서는 괜찮다고 달랜다. 션은 더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엘리엇의 온몸을 쓸어 주고 품 안에 포옥 껴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흔들리며 엘리엇은 끊임없이 흐느끼다가, 까무룩 잠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