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August (2) (32/52)

8. August (2)

일어나니 침대에 혼자였다. 션은 몇 번이나 서늘한 옆자리를 더듬다가 겨우 그 사실을 인정하고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준형이 왔다 간 뒤로 몇 시간이나 생각에 잠겨서 뒤척였기 때문에 실제로 잠이 든 것은 아침나절이 다 되어서였다. 일찍 일어나는 엘리엇은 아무리 늦더라도 10시가 되기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좀 더 자는 건 어떨까. 정신력 소모 때문에 피곤했다.

어차피 휴가 중인데 괜찮지 않으냐 하고 꾸물거리고 이불 속에서 버텼지만, 션은 결국 기어 나오고 말았다. 욕실에 가서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나와 시계를 보자 11시가 넘어 있었다.

엘리엇은 거실에도 없었다. 션은 잠시 헛된 기대를 하면서 객실 안을 전부 돌아다녀 보았지만, 수영장에 있을 리도 없고 사용인용의 침실에 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찾으러 다니는 건 너무 웃기는 일일까 생각하면서 션은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냥 티 룸만 들여다보고, 없으면 혼자서 라운지로 밥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15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혹시나 하고 16층의 테라스를 들여다보았는데 의외로 엘리엇이 거기에 있었다. 휴일 아침의 습관대로 시가를 물고 신문을 들고 있는 자세가 여유롭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어제 봤던 남자들이 몇 명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서 마찬가지로 담배나 시가를 태우면서 잡담을 하거나 신문을 보고 있다. 신사 클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분위기에 션은 그가 흡연실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빙긋 웃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엘리엇이 눈만 들었다가 션이 온 것을 알고는 미소를 지었다. 션은 그의 입에서 시가를 빼내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여러 개의 눈동자가 그들을 살피다가 재빨리 다른 곳으로 향한다. 션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체했다.

“건강에 나쁘다니까요.”

“음.”

엘리엇이 곤란한 듯이 신음했다. 션은 그에게 한 번 더 키스하고는 다시 입술에 시가를 물려 주었다. 그러나 엘리엇은 신문을 접어서 내려놓고 결국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놨다가 비벼서 끄고 말았다.

“아침은?”

“아직이에요. 엘리엇 씨한테 모닝 키스부터 하고 먹으러 갈까 했으니까요. 엘리엇 씨는요?”

“나는 간단히 먹었다네. 여기서도 간단한 브런치 정도는 될 텐데…….”

엘리엇이 급사를 찾으려는 듯이 몸을 기울였다. 라이언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양손에 각각 쿠키 접시와 머그잔을 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엘리엇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좋은 아침.”

“선배도.”

엘리엇이 짧게 대답했다. 라이언이 션을 향해서 “자네도.”라고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미 아침은 아니지만.”

마음 좁게 구는 모습을 엘리엇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션은 그에게 미소해 보였다. 라이언이 모닝 티를 입에 대면서 쿠키를 엘리엇에게 밀어 주었다.

“먹어 봐. 2층에 갔었는데 밀레의 사과 오트밀 쿠키를 팔더라고. 좋아하잖아.”

“딱히 좋아했던 기억은 없는데.”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엘리엇이 접시에 손을 뻗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와삭거리고 쿠키를 씹는 것만 보아도 그가 제법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션은 약간 얼굴이 구겨지려는 것을 참으며 웃는 얼굴로 엘리엇에게 물었다.

“어제도 느꼈지만, 라이언 씨랑 많이 친하신가 봅니다.”

“글쎄. 특별히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같이 살았으니까.”

라이언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정말로요?”

“내가 더부살이했어. 엘리엇의 집에는 빈방이 많았으니까.”

“맞네.”

엘리엇이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로 긍정했다. 션은 엘리엇에게 패스트푸드와 콜라를 맛보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라이언이 어제 자신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불쾌한 일이었다.

“부인은?”

“마리나는 방에서 자라고 했어. 피곤한 것 같아서.”

“그런가.”

“뭐 흥미로운 기사라도 있어?”

“특별한 건 없어. 언제나 비슷하지. 션, 아침을 먹어야지?”

엘리엇은 일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션은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라이언을 피하는 것보다 지켜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뭘 어쩌려는 건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음험한 색채와 욕망을 표시하는 보라색이지만, 그것은 아직 행동화될 것이 아니다. 아내까지 데려왔으니 여기에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말이다. 오히려 그의 친구라는 자들 중에 오로지 이 남자만이 엘리엇의 진가를 알고 있는 건가 싶은 느낌도 든다.

테이블에 놓인 종을 끌어당겨 울리자 다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급사가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구부렸다. 간단한 음식은 대부분 되는 모양이라 션은 크로크무슈와 따뜻한 밀크티를 부탁했다. 음식이 오자 엘리엇이 설탕 그릇을 끌어당겨 그의 찻잔에 설탕을 한 스푼 탔다. “고맙습니다.”라고 션은 그의 머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라이언이 기이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사이가 좋군.”

“……?”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는 건가 하고 엘리엇은 라이언을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아니.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한 적이 없어서.”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일라에게도 늘 하던 일이다. 라이언이 아련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 고개를 저었다.

“부러워서.”

“마리나 부인은 상냥한 사람처럼 보이던데. 선배에게 엄한가?”

간혹 그런 사람도 있지, 하고 엘리엇은 덧붙였다. 라이언이 쓴웃음을 짓고, 션은 폭소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무신경하게 대답하던 때에는 죽고 싶었는데 주는 거 없이 미운 놈한테 하니까 몹시 즐거웠다.

라이언의 주위에 일렁이던 색채가 변한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상냥하지. ……무엇이든 용서해 버리거든.”

“소중히 하도록 해. 사랑해서 결혼했잖아.”

엘리엇이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찻잔을 입술에 댔다. 라이언이 “그렇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짐짓 명랑한 태도로 일어섰다.

“가 봐야겠다. 오늘 하루 잘 보내.”

“부인에게 안부 전해 줘.”

션은 약간 애매한 기분이 된 채로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테라스에서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엘리엇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나쁜 사람은 아닐세.”

“엘리엇 씨의 경박한 남자 취향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다고 하면 화날 것 같으세요?”

“……선후가 틀린데.”

“정말로?”

“정말이야. 잤던 상대를 기준으로 취향이 바뀐다면 지금쯤 내 기준은 자네가 되어 있을 텐데, 그랬다가는 영원히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겠군.”

잤던 게 맞구나, 하고 답을 얻어 버린 션은 화를 내야 할지,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될 거라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웃음과 찡그림이 섞인 얼굴로 엘리엇에게 고개를 숙여서 속삭였다.

“빨리 그렇게 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몸이 좀 힘들어지실 테니까요.”

엘리엇은 그제야 자기 실수를 알아챈 듯하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다. “지금은…….” 하고 우물우물 사라지는 말끝은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귀가 붉었다.

* * *

아침 식사 후에 계속 그 테라스에 있을 거라는 엘리엇을 놓아두고 션은 혼자 밖으로 나왔다. 생각할 것도 있었고, 해야 할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언이 남아 있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그는 객실로 돌아갔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엘리엇을 붙잡아 봐야 사업 이야기나 할 것 같아서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엘리엇은 담배 연기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약간 염려스럽게 물었다. 하늘 밑에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탁 트인 갑판에서 담배 연기가 무어 그리 거슬리겠느냐고 고개를 젓고, 염려되는 건 연기가 아니라 건강 쪽이라고 한마디를 덧붙이자 난처한 얼굴로 션이 내미는 손에 얌전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을 했으니 오늘은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더 피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션은 14층으로 내려갔다. 14층에는 큰 카페가 있다. 배꼬리 쪽에 있는지라 큰 창으로 물러가는 바다와 이내 사라지는 하얀 뱃자국이 전면 유리 너머로 보인다. 제법 멋졌지만, 역시 하늘 밑 바다에 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16층 테라스와는 차이가 있다. 서늘하게 조절된 공기 조절 장치는 쾌적하지만, 실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했다.

그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어제 밤새도록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깨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지나치게 인상을 남겼는지,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메리카노로 주세요. 더블 샷으로.”

얼굴이 발간 웨이트리스에게 메뉴판을 돌려주고 그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GFG를 풀어냈다.

방사상으로 촘촘하게 뻗어 나가는 힘이 배 전체를 감싼다. 션은 찬찬히 감각에 걸리는 것들을 살폈다.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방사상은 본능적인 형태이다. 그를 중심으로 중앙 부분에는 낭비가 있고, 먼 쪽에는 빈틈이 생긴다. 빈틈없는 원반 모양은 어떨까. 좋지 않다. 힘의 낭비도 낭비이지만, 밀도가 높아지자 바로 카페에 있는 사람들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그의 힘은 지각용이 아니다. 이래서는 탐색 기능으로 쓸 수가 없다.

션은 한숨을 내쉬고 일단 힘을 거두었다. 웨이트리스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종종종 뒷걸음질 쳤다. 남녀 여섯 명으로 구성된 그룹이 션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했다.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어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리라. 이쪽을 향해 오려는 것 같아서 션은 의식적으로 그들의 주의를 돌렸다. 갑자기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 사람들은 션에게 다가오는 대신에 각자 용무를 해결하러 흩어졌다.

‘만만치 않군.’

인식 장해의 벽을 쳐서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한 후에 션은 잠시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힘을 방사상으로 방출한다. 이번에는 거기에 더하여 동심원을 하나 더 그렸다.

감정이 갑자기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얇게 증폭 능력을 깔아 거기에 저항하는 정도로 상대를 판별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인지할 수는 없고,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정신 벽과 저항력을 기준으로 상대가 GFG 능력자인가 아닌가, 능력자라면 어느 등급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걸리는 유의미한 정신 방벽은 두 개. 션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신중하게 자신을 일부 동화시켰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는 그중 P급의 텔레파시스트를 SSB의 요원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능력은 직접적인 정보, 의식에 떠오른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감정 상태라는 것은 의외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다른 하나는 H급의 치료사다. 아마 의무 요원일 것이다.

이 거리에서도 흔들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완전히 잡아 뜯어 부숴 버리는 게 아니라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애매하다.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연습을 한답시고 타인의 정신을 부술 수는 없는 일이다.

션은 눈을 감은 채로 “너의 타기팅에는 시각이 필요하다.”라는 준형의 말을 생각했다. 그는 준형의 앞에서 힘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고, 타기팅 역시 SSB의 안가에서 딱 한 번 보여 주었을 뿐이다. 행적을 파악해 보면 좀 더 정보가 나오기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고작해야 문자로 적힌 정보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그의 힘의 특징을 파악하여 약점까지 파헤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것은 준형이 U급의 능력자로서 GFG라는 것 자체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가능하다면 두 사람도, 열 사람도 가능할 것이다. 서류상으로 알아내는 자도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자신은 타기팅 할 때 시각을 이용하고 있다. 그것은 상대의 정보―특히 감정 영역의―를 알아내는 데 있어 그의 경우 시각이 가장 직관적이고 많은 양의 정보량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가능하다’라는 것은 스스로의 힘을 추측해서 한 생각일 뿐이지 실제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가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안전을 위해서 힘의 사용법을 익힌다면, 대인 능력보다는 탐색과 유지 능력이 더 우선이다. 그는 범위를 위아래로 확산시켰다.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힘의 구체가 배 전체를 감싼다. 이번에 걸리는 것은 7명이었다. 그것이 전원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일단 엘리엇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준형도. 그 두 사람의 정신 방벽은 촉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맞는지 아닌지 곧 알 수 있다.

‘이런 형태로는 안 되는군. 꽤 정신력이 들어가는데.’

고작해야 두 개의 벡터로 사용하고 있을 뿐인데도 손 안에 땀이 고였다. 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GFG를 능동적으로 사용해 본 일이 없었다. 심지어 타인의 주의를 돌리는 일에도 먼저 사용한 일이 없다. 지금 몸을 숨기고 있는 인식 장해의 은신처조차도 생각만 해 봤을 뿐이지 실제로 만들어 본 적은 없다. 

정신 조작계 GFG는 접하면 접할수록 정신 방벽을 허술하게 하는데, 이것은 이후에 다른 GFG에 영향을 쉽게 받게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너질 경우 개체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작은 일에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을 수십 번이나 겪은 션은 그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때문에 영향받는 일이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사실상 언제나 억제하고 수습하는 방향으로만 능력을 써 왔다. 편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신하는 것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자위책이 필요하다면 능동성 역시 필요할 것이다. 무조건 억누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르지 않고 타인에게 인지시키기로 했지만, 오늘 새벽 준형과의 대화로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제 그가 지켜야 하는 것은 어찌 되어도 별 상관없었던 자기 목숨 하나가 아니다. 엘리엇이 그를 보호하고 있고 그가 엘리엇의 ‘세력’으로 파악된다면, 반대로 그를 노리는 자가 엘리엇을 먼저 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능력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 또한 필요했다. 새벽에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단순 지각계로서 발신 능력은 전혀 없는 준형이 그의 GFG 특성을 파악하고 정신 방벽의 일부를 뾰족하게 만들어 노크하는 그 수법은 얼마나 세련된 것이었던가. 예전에 그는 션의 GFG 지각에 전혀 걸리지 않고 바로 뒤까지 다가온 적도 있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만 더 있어도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번에는 촘촘한 모눈의 그물을 떠서 배 전체에 깔았다. 섬세한 실처럼 뽑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히 이쪽이 나았다. 이번에 잡힌 숫자는 스물일곱이었고, 거기에는 엘리엇과 준형이 포함되어 있었다.

션은 성공한 것에 약간 만족감을 느끼며 몸을 폈다. 엘리엇이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을 더했다. 그는 아까 말했던 대로 테라스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불러내는 것도 가능할까. 그는 준형이 했던 것을 흉내 내어 살짝 뾰족한 형태로 힘을 상대방에게 기울였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SSB 요원인 P급의 텔레파시스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P급으로서는 같은 층에 있더라도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정도의 능력이 못 된다. 그자는 곧바로 이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션은 SSB 요원이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몇 가지 실험을 더 해 봄으로써 아주 약간의 힘만으로 놀랄 만큼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게끔 되었다. 그동안에 사라진 기척은 두 개뿐이다. 하나는 확실히 준형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 준형이 말한 그 용병 회사의 사주라든가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여태까지 션이 자기 이외의 강력한 GFG 능력자를 알지 못해 신경 써 본 일이 없지만, 능력의 종류와 관계없이 자기를 숨기거나 위장하는 법이 있다는 뜻이다.

SSB 요원이 금세 카페 입구에 나타났다. 청소부 유니폼을 입은 것도 잊고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무척 당황한 듯했다. 션은 인식 장해 너머로 그의 정신에 직접 접촉했다. 상대방이 텔레파시스트이므로 션이 수신자라도 일단 연결이 되면 구체적인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인식 장해라고는 해도 실제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 관심을 갖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용건을 가지고 알아본 사람은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요원이 다가와 션의 앞자리에 앉았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길어지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UAE 정보부의 인사가 저와 접촉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원이 당황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션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보를 들어내는 것은 간단하지만, 굳이 조작을 해서 토설시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협력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더더욱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

“307호, 809호, 1132호에 현재 머물러 있는 사람 중에 그쪽 요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션이 그렇게 판단한 것은 그 세 개 객실에 상당히 강력한 정신 방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 조작계 GFG 능력자인 자신과 협상을 하러 온다면 최소한 자기가 정신을 놓고 있는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GFG 능력자를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앞의 요원이 P급의 텔레파시스트인 것처럼 말이다. 

고작해야 좁은 방 안에서, 그것도 와라, 가라, 봐라 정도의 간단한 의사 전달밖에 안 되는 P급 텔레파시를 어디에 쓰겠는가. 그것을 계발하는 것은 텔레파시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GFG를 계발함으로써 방어 능력을 강화하고 자신의 정신을 점검할 방법을 얻기 위해서이다.

“왜, 알려 주시는 겁니까?”

요원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과례라 생각하면서도 션은 평화롭게 말했다.

“SSB가 그들이 제게 접촉하는 것을 막아 주기를 바라서 하는 말입니다. 동시에 그것을 저들에게 전해 주기도 했으면 좋겠군요. 저는 이런 일에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니, 단순히 제가 거절의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SSB에서 좀 더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번거로운 일을 원치 않는다는 것과 영국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왕자님에게 전해 주시면 고맙겠군요. 앞으로도 SSB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영국을 떠날 생각은 없고, 엘리엇과 왕실의 관계를 생각하면 SSB와도 적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국 안에서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SSB와 신경전을 벌이느니 차라리 이미 인식되어 있는 것처럼 SSB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쪽이 좋다. 알버트에게 보호를 청하여 질질 끌려갈 생각은 없지만 조금 더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엘리엇 씨가 왕실과 적대하지 않는 이상 저 역시도 그러하리라는 것도요.”

어차피 서로가 아는 이야기라도 말로 공언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요원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 참, 이름이 뭐지요? 앞으로도 연락이 필요한 일이 있을 텐데.”

막 자리에서 일어서서 떠나려던 그가 돌아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로건 스미스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수줍어서 션은 조금 실수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텔레파시스트라면 미세 발현 상태인 증폭 능력에 홀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내 그것을 잊었다.

13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깨어나 개인실에서 룸서비스를 시키거나 하지 않고 14층으로 올라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되기 전의 일이다. 12층의 사람들도 깨어났고, 10층과 11층 객실의 사람들도 일어난 사람은 각자 자기 층의 카페로 갔다가 빈자리가 없음을 알고 14층까지 올라갔다. 티 룸은 모두 텅텅 비어 있고, 특별히 다른 층의 카페와 다를 것도 없는 14층의 카페 라운지에만 테이크 아웃을 원하는 손님들이 줄을 길게 늘어섰다.

션은 세 잔째의 커피를 마시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경 쓸 일이 있거나 바쁠 때 끊임없이 카페인을 들이켜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었다. 엘리엇에게 금연을 요구할 거라면 자기도 커피 정도는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아마 홍차나 녹차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우리는 홍차나 녹차는 영 맛이 없다. 티백은 말할 것도 없고.

앞에 거구의 남자가 털썩 앉았다. 붉은 머리는 절반 가까이 희끗했지만 활력이 넘치고, 얼굴은 쉰이 넘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 최소한 여든은 되었으리라. 신체 강화계의 GFG 능력자는 노화가 느리게 온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신체의 세포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그가 준형이 말한 KH47의 사주인 것은 명백했다.

접근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션은 놀라지 않았다. 카페 입구에서 션의 탐색 능력에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 그는 인식 장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션은 거기에도 놀라지 않았다. 신체 강화계라고 해도 U급의 GFG 능력자라면 그만큼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임시로 만들어 본 인식 장해에 속아 넘어간다면 그쪽이 더 놀라운 일이다.

“맥 마셜이다. 이건 네 방어벽이냐?”

그가 명함을 던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션은 그것을 받아서 읽어 보았다. ‘Kingdom of Heaven 47. 대표이사 맥 마셜.’ 용병 회사에 걸맞지 않은 이름이다.

“명함을 가져오지 않아서 드릴 수가 없군요. 이름이야 이미 알고 계실 테고……. 뭐어, 맞습니다. 신체 강화계 능력자와 맨몸으로 마주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저한테 변변한 자위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행히도 이 배의 손님은 모두 유명 인사뿐이니까 꽤 안심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 개 벡터로 GFG를 사용하고 있는 거로군, 넌. 상하좌우 반경 500m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네 개 층의 사람 전부를 네 뜻대로 움직이고, 동시에 본인에게는 인식 장해를 걸고, 거기에 더해서 나를 무기력하게 하고 있지? 아니, 이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를 일종의 성역으로 만든 건가.”

“이렇게까지 힘을 쓰는 건 오늘 처음이라서 많이 서투릅니다.”

“겸양이든 아니든 진짜 괴물이군.”

맥이 헛웃음을 쳤다. 션은 빙그레 웃었다.

“저를 스카우트하러 오셨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대비는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이해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굳이 이 시점을 골라 찾아왔다는 것을 션은 그렇게 해석했다. SSB의 안가를 망가뜨렸던 것을 계기로 그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다면 그것은 적어도 2년 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런던에는 준형이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로테르담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그 뒤로도 엘리엇과 같이 몇 번이나 외국의 휴양지에 나갔었다. 해외에서까지 SSB가 그렇게 능숙하게 이 남자를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헤리퍼드 보안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보안부 사람들은 엘리트들이고 GFG에 대한 대응책도 다른 경호 업체나 보안 팀보다 아득히 앞서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지바른 환경에서 엘리엇을 경호하는 것에 한한 이야기이다.

혹은 그때의 일은 숨겨져 있는데 준형이 이제 와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2년 정도 션을 관찰해 보고 나서 언터쳐블에 가입 의사를 타진했다. 가입 권유를 했다는 것은 반대로 언터쳐블 쪽에도 그가 컨트롤 가능한 U급의 능력자라는 것을 알렸다는 뜻이다. 친목 모임이라고 말은 그래도, 기존 멤버의 동의 없이 권유가 성립할 리 없다. 만장일치의 동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호 불가침에 가입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상대와 동등한 입장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포섭이든 제거이든 그가 언터쳐블에 가입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맥 마셜이 장소를 신중하게 골랐다는 것은 확실했다. 배 위에서는 심각한 적대 행위가 불가능하다. 맥에게는 수틀리면 션을 죽일 힘이 있고 십중팔구 일정 수준의 정신 지배를 피할 방법도 몸에 익히고 있겠지만, 션이 선원들의 뇌를 녹여 버리는 것을 막을 수단은 없다.

반대로 션은 인의 장막을 둘러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고 어쩌면 맥의 정신 방어를 깨고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맥이 배를 부숴 버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어느 쪽에서 먼저 GFG를 발휘하든 간에 결말은 나란히 대서양에 침몰이다. 맞대면하지 않고 달아날 만한 공간도 없다. 이것은 강제적인 평화 회담이다.

“도대체 김준형 그놈이 뭐라고 말해 놨길래 이렇게 적대적이야?”

발음하기 어려워 션은 애초에 포기한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며 맥이 탄식했다.

“글쎄요. 특별히 적대적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제이 씨도 관계없고요. 솔직히 저로서는, 엘리엇의 행동반경 안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참을 수 없군요.”

“걱정 마. 헤리퍼드 공작을 공격했다가는 김준형이 가만 있지 않을걸.”

“그건 더 불쾌한데요.”

맥의 말은 사실이다. 준형이 엘리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션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엘리엇이 신뢰하는 사람이므로 가능하다면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의지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준형이라는 것은 상당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휘유. 영역 본능이 아주 강하네.”

션은 조금 짜증이 나려 해서 테이블 위에 올린 두 손을 깍지 끼었다. 맥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마음에 들어. 남자라면 모름지기 그래야지. 김준형 그놈은 너무 기계적이야.”

“잡담은 그만하지요. 제안을 말씀하십시오. 그래야 거절할 수 있으니까요. 제 인내심은 주로 일반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에, 같은 GFG 능력자에게까지 쓸 부분은 없습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거절합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보여 주마. 내 바로 아랫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굽어볼 수 있게 해 주겠다. 그 힘을 가지고 태어나서 헤리퍼드 공작에게 언제까지고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원한다면 영국을 통째로 주지.”

맥이 오만하게 말했다.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국을 주겠다니, 최소한 미국 정도는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가질 능력은 있지.”

“단순히 능력의 말이라면, 저도 있습니다.”

“너로서는 무리다.”

“아직은, 말이지요.”

션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걸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 전부와 바꿔 준다고 해도 저는 그것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침에 계란 토스트를 만들어 주는 게 행복한 사람이라서요. 엘리엇 씨가 가지고 싶어 한다면 고민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그런 것을 원할 리도 없고.”

그러자 맥이 입을 다물었다. 이만하면 평화롭게 거절한 것이 되려나 하고 션은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은 검붉은색이 되어 넘실거렸으나 적어도 표정만으로는 침착함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맥은 팔짱을 끼었다.

“그 꼬마애가 이렇게 크다니, 미란이 알면 지금쯤 널 놓아준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될성부른 떡잎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방향은 아니었는데.”

“그때……?”

션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루완에서 말이다. 그래도 그때에는 통제 가능한 수준의 괴물인 줄 알았는데 설마 힘이 더 커졌을 줄이야. 애교 부리는 것 같은 기색이 있더니 이제는 제법 색이 빠졌어. 생존 본능이었던 건가? 하긴, 그때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때의 일은 기억조차 어렴풋하여 잊고 지내려 한 지가 오래다. 그때의 그를 기억하는 자와 이제 와서 다시 만나는 일이 있을 줄 몰랐다. 미란 알 아시리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게 될 줄도 몰랐다.

“당신은, 그때의, 일, 설마……?”

맥이 충격을 받은 듯한 션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이자의 머릿속을 파헤쳐서 뜯어 내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이자가 자기 목을 틀어쥐고 조르는 것이 빠를까. 계산하면서 션은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

“참아, 잘생긴 친구. 나는 널 시험하거나 폭주시키려고 온 게 아니고 싸우려는 것도 아니야. 네 그 끔찍하게 귀중한 애인을 수장시키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리고 지금 네 이마에 사신의 시선이 닿아 있다.”

션은 당혹스럽게 이마 쪽에 손을 댔다. 붉은 레이저 포인터이다. 그는 애써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어디에서부터 쏘아지는 것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맥에게도 그랬는지 그가 혀를 내둘렀다.

“김준형 이 새끼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어디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하면 이놈이 저승에서 온 저격수라는 소리를 듣지 않겠지.”

남들에게는 가능한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물은 건데 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션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데.”

“미란 이야기? 미란과는 친구야.”

맥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야. U급의 GFG를 가진 꼬마가 폭주해서 알 아시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미란은 자기 사병으로는 대처할 수가 없어서 나를 불러들였지. 상식적으로 그때 네 상태를 생각해 봐. 어지간한 사람이 그 마굴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아?”

“당신이 거기에서, 저를 꺼냈습니까?”

“그래. 내가 직접 행차해서 네놈을 꺼내다가 리스트레인 룸에 처박았지. 코일이 과부하로 일제히 터져 버리는 광경은 장관이었어. 제어기는 원래 내가 쓰던 특수제작품이니까 버텼지만.”

“제이 씨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김준형이 왜 그런 이야기를 네게 해 줬겠냐? 자기편도 아닌데.”

하긴, 그것도 그렇다. 애초부터 정보거래로 일대일이라는 교환 조건을 제시했을 때 거절한 것은 자신이었다. 션은 자기가 안이했다고 생각했다. 준형은 엘리엇의 친구이지만 자신의 아군은 아니다. 언터쳐블에 대한 정보를 주고, 맥에 대해 먼저 알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의를 보여 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머릿속에 열이 오른다. 맥의 목소리가 한 꺼풀 덮인 저 너머로 들리는 것처럼 멀었다.

“그리고 네가 거기서 나올 때도 미란에게 의뢰를 받았다. 네가 다시 한번 폭주하거나, 알 아시리에 관련될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죽여 달라고. 선금도 받았고 5년쯤 지켜봤지만 이제 완전히 일반인이라고 생각해서 2년에 한 번씩 보고를 받는 정도로 그만뒀었지.”

“모르는 사이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었군요…….”

“지키지 못할 보물을 가진다는 건 그런 거잖냐. 인연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제안하는 거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알 아시리에 빚을 갚게 해 주고, 보호도 해 주지. 내 바로 밑의 대우를 받게 될 거야. 딱히 네 연애를 방해하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연애만이라도 상관없잖아? 헤리퍼드 공작을 해칠 생각은 어차피 없어. 원하지 않는다면 철저하게 신원을 숨기는 것도 도와주지.”

“아뇨.”

션은 조용하게 대답했다. 맥이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 언터쳐블에 가입한 후에 자구책을 스스로 마련할 거냐? U급 능력자로부터 안전해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닐 텐데.”

“…….”

“사실 내 기분으로 말하자면 그래. 안 믿겨. 네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도, 알 다하브가 목숨을 걸고 한 봉인이 깨졌다는 것도. 네가 GFG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미란이 무엇을 원할까? 알 아시리에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건 나도 안다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헤리퍼드에 붙으라고 널 놔줬을까? 그럴 리가 없지. 미안하다는 마음이 든다면, 지금까지처럼 아예 능력의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위장하고 있었어야지.”

이자가 감정을 건드리려는 건지 정말로 포섭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션은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천천히 커피 잔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결심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마음을 구속하고 있는 미란의 말이 떠올라 목구멍까지 미지근한 것이 찬다.

“미란 님의 말씀은 어기지 않을 겁니다. 그것 외에 확답드릴 수 있는 것이 없군요. 기꺼워하시지 않으리라는 건 압니다. 빚은 빚이고, 은혜는 은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세상을 굽어보는 일 따위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흥미는 없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엘리엇만 볼 수 있으면 되었다. 굽어보는 것도 필요 없다. 마주 볼 수 있으면 되었다. 손에 차가운 왕홀 따위를 들어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쥐고 싶은 것은 따뜻한 연인의 손이었다.

“저는 제 뜻대로 삽니다. 이 힘이 보물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이제 지킬 수 있으니까요. 저 자신도, 제 행복도. 예전처럼 겁내고 웅크린 채 바닥을 기면서 살지는 않을 겁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고 비웃으셔도 말입니다.”

션은 잠시 망설인 후에, 맥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만일에 미란 님을 만나실 일이 있다면……. 제가 언제까지라도 감사히 여기고 있다고 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살아 있어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목숨을 건져 낸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 마셜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넌 사람들이 엔간해서는 네게 호감 외의 다른 감정을 품기 어렵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냐?”

“일부러 하고 있는 일은 아닙니다.”

션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맥이 “아아.” 하고 짜증스럽게 뒷목을 주물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언터쳐블에 가입해라.”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나랑 김준형이놈이 싸우면 내 편 들어.”

“그건 두고 보죠.”

션은 그의 손을 잡았다. 강화 능력을 사용해서 잡은 것도 아닐 텐데 맥 마셜의 아귀힘은 강했다. 한 번 악수를 하고 나자 손이 시뻘게져 있었다.

언터쳐블에서 보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맥은 카페에서 나갔다. 션은 한숨을 내쉬면서 GFG를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반쯤 남은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충동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와글거리는 사람의 무리를 뚫고 계단으로 향한다. 빠른 걸음은 금세 달음박질이 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자 엘리엇이 겉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 왔네. 지금 존 경이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션.”

션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딱히 슬프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다. 맥이 아무 말 없이 물러가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특별히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저 이 온기가 필요했다.

“무슨 일 있는가? 좋지 못한 말이라도 들었어?”

엘리엇이 두 팔을 들어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채 살며시 쓸어내렸다. “아뇨.” 하고 션은 작게 속삭였다.

“그냥 보고 싶어졌었어요.”

“몇 시간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래도요.”

이 사람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환하게 아름다워지고 온몸에 피가 도는 따듯함을 느낀다. 션은 어떻게 하면 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행복하고, 또 조금은 죄스럽기까지 하다.

“사랑해요.”라고 속삭이자 엘리엇이 품에서 조금 굳었다. 싫어서나 놀라서가 아니라 변함없이 당혹하여 그러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션은 얌전히 기다렸다. 엘리엇이 가만히 그의 등을 끌어안은 채 “나도 자네를 사랑한다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빛으로 만들어진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