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ift from God:12months)2권-7. August. (1) (31/52)

7. August. (1)

리암 튜더가 자칭 ‘사랑의 배’라고 부르는 여름 크루즈는 유럽의 사교계 모임 중에서 가장 격식이 없고 느슨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명목부터가 젊은이들끼리 뭉쳐서 딱딱한 예의범절을 따지지 말고 진솔하게 친목을 도모해 보자는 것이었다. 

리암은 매년 초대객 리스트를 직접 작성하는데, 알려진 기준은 ‘유럽의 미래를 이끌 젊은이’였다. 물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잣대는 매우 제멋대로였으며, 규칙성을 가지고 바뀌는 것은 해마다 리암의 나이에 따라 제한 연령이 상승한다는 것뿐이다.

엘리엇은 매년 초대장을 받아 왔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 크루즈에 참석한 적이 없다. 작년에 션이 왜 참석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지는 쪽이 놀랍다는 듯이 대꾸했었다.

‘나는 미래의 명사가 아닐세.’

현재의 명사이므로 참석할 이유가 없다는 뜻인 듯했다.

그 말을 들은 리암은 잘나셨다고 불평했었지만, 엘리엇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백작의 작위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고 CE의 부사장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서른이 되었을 때는 이미 헤리퍼드와 콘월의 공작이자 일문의 주인으로서 사교계의 핵심 인사였던 그가 새삼스럽게 차세대 지도자니 미래의 명사니 하는 젊은이들과 미리부터 인맥을 쌓거나 교류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리 없다.

그와 비슷하게 일찍 작위를 물려받거나 상급 귀족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은 청년들이 이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주로 매년 초대되는 슈퍼 모델과 미인 대회 입상자들 때문이다. 아니면 연예계 출신 애인을 남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이든가.

레드 카펫이 깔리는 것은 또 몰라도 포토존을 만드는 사교계 모임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종종 젊은 부호가 갓 유명세를 탄 여배우와 팔짱을 끼고 있거나 키스하는 사진을 찍히고, 혹은 귀족 영애가 축구선수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든가 하는 이야깃거리로도 유명했다. 

리암의 배는 스캔들과 가십의 온상이었으며, 그런 것에 거의 관심이 없는 션도 그 크루즈 여행에서 흘러나온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결백하고 청렴한 사람들 중에는 스폰서와 정부를 매칭시키는 모임이라고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크루즈 여행은 확고하게 사교계의 정기적인 모임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세습 귀족의 자녀들도 대부분 일주일 정도는 참석하려 하고, 종신 귀족 출신은 어떻게든 초대장을 받기 위해 애쓰며, 작위가 없는 셀레브리티는 이곳에서 부족한 격을 채우려 든다.

데일리 메일이나 저널 하이소사이어티 같은 가십지에서 두 달 전부터 누가 초대장을 받았는가에 대해 추측 기사를 쓰고 출항 전의 크루즈선 앞에는 파파라치가 진을 친다. 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일반인에게까지 노출되고 나면, ‘제대로 된 모임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참석하지 마라.’라는 어르신들의 말만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된다. 규모도 해가 갈수록 커져서, 지금에 와서는 참석을 하든 안 하든 어퍼 클래스이면서 한 번도 초대장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올해의 초대객은 1028인입니다. 이중 귀족이 94인, 종신 귀족가나 명예 있는 집안의 출신으로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데뷔한 숙녀분이 86인, 그 파트너로서 신사분이 또 86인, 데뷔하지 않은 종신 귀족의 혈육이나 사업가가 128인이며 그 파트너까지 모두 포함하여 497인이 사교계 출신입니다. 나머지 중 200인은 모델, 150인은 스포츠 선수와 연예인, 나머지는 학계와 예술계 등에서 호스트인 리암 경의 뜻대로 선택하여 초대되었습니다.”

“올해는 참석자가 많군.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참석할 만한 젊은 남녀가 백 명에 가깝지는 않을 텐데.”

“합하께서 참석하신다는 소식이 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비서인 마틸다가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션은 미묘한 기분이 된 채로 발아래에 보이는 17층짜리 덱을 가진 거대한 호화 크루즈선을 내려다보았다. 평균적으로 천 명 안팎의 초대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대강 짐작은 했으나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자 어마어마했다. 

사실 규모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유지비로나 운용의 어려움으로나 지금 타고 있는 수직이착륙기 쪽이 아득히 높은 클래스였으나 일반인인 션으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운 일이다. 리조트를 통째로 배 위에 얹어 놓은 선박 쪽이 인상적이었다.

“비용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왕실에서 부담하는 건 아니지요?”

성실한 납세자로서 마땅히 가질 만한 의문이라고 션은 생각했다. 만약 이게 왕실 지원이라면 조금 화가 날 것 같기도 했다.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사업이라네.”

“사업이요?”

“인맥, 유명세,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임의 주인이라는 프리미엄 같은 것을 제외하고서도 말일세. 저 선박은 리암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업체이거든. 여름 크루즈를 성공리에 마치면 티켓 값이 같은 급의 크루즈에 비해서 서너 배로 뛰어.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만, 프리미어 리거와 윔블던 챔피언이 같이 썼던 방이라면 웃돈을 주고라도 거기에서 자고 싶어지는 사람이 생기는 모양이지.”

엘리엇은 무덤덤하게 말했으나 션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곧 이해했다. 리버풀의 에이스와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자가 게이 스캔들을 터뜨렸던 것은 6년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7월이었던 것 같다. 그는 특별히 광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응원 팀이 있을 정도로는 축구를 좋아했으므로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엘리엇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아하, 그 윔블던 챔피언은 확실히 엘리엇 씨의 취향이지요? 터프하면서도 늘씬하고 다리가 긴 게.”

엘리엇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귓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테니스 선수 다리가 멋지다고 생각했다고 해서 질투할 작정까지는 없었으므로 션은 그저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오히려 이 정도로 마음이 열렸다는 것은 다소나마 좋은 일로까지 느껴졌다. 당황한 것은 마틸다 쪽으로,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내려가세.”

엘리엇이 고갯짓했다. 갑판 위에 마련된 헬기장을 향해 수직이착륙기가 천천히 내려갔다.

고도가 내려가자 포토존의 플래시가 무슨 섬광탄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번쩍대는 것이 보였다. 차로 오지 않고 굳이 수직이착륙기까지 동원한 것은 그런 이유이다. 헤리퍼드 공작이 참석한다는 소문은 이미 알음알음 다 알려져 있겠지만, 그것이 저 플래시 속으로 걸어 들어갈 이유는 되지 못한다. 사실 소문을 피하려는 대부분의 상류 계급 출신들이 다음 기항지에서 타거나 헬기로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직이착륙기는 최상갑판에 내려섰다. 투피스를 갖춰 입은 중년 여성이 십여 명의 유니폼을 대동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두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앤의 VIP 서비스 매니저인 로렌 싱입니다. 여기 머무르시는 동안 두 분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리퍼드 합하, 맥케인 님.”

“리암 경은?”

“1층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합하께 환영 인사를 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리암이 그랬을 리 없다. 아마 엘리엇에게는 굳이 인사할 필요 없다고 했으리라. 별로 신경 쓰이지 않고, 그저 의례적으로 물어봤을 뿐이므로 그는 알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그녀에게 살짝 묵례하며 말했다.

“잘 부탁하네.”

이런 식으로 인사한 일은 좀처럼 없지만, 션을 생각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부드럽게 한마디라도 해 두어서 아군으로 만들어 두는 편이 낫다. 그가 살짝이지만 고개까지 숙이며 부탁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싱은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얼굴에는 웃음꽃을 피우며 “저 따위가 어찌 감히.”라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마틸다가 이만 돌아가겠다며 깊이 인사하고 들고 있던 가방을 션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여행에 엘리엇의 고용인은 하나도 동행하지 않았다. 크루저 측에서도 필요 최저한의 사람은 붙여 줄 테고, 되도록 둘만 있는 시간이라도 션이 편하게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 자신도 혼자서 옷을 입을 줄 모른다는 종류의 귀족은 아니다. 타인의 눈이 있다고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지만. 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밀도 높고 행복한 것도 사실이었다.

싱이 객실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머무를 곳은 최상갑판에서 한 층 아래인 17층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객실은 다해서 네 개뿐이었다.

“엘리베이터는 17층에 머무는 다른 분들과 함께 쓰시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방마다 엘리베이터를 설비하기에는 공간이 모자라서요. 하지만 4개실뿐이니까 그리 불편하시지 않을 겁니다. 2층과 6층, 8층에 각각 VIP 객실의 카드 키로만 출입이 가능한 전용 테라스가 따로 있고, 15층에는 전용 피트니스와 게임실, 티 룸이 있습니다. 미리 예약하시면 12층의 영화관도 단독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17층에 머무르실 분은 리암 경, 헤이스팅스 남작과 그 약혼녀인 베드퍼드의 레이디 앨리스, 솔즈베리의 존 경입니다. 파트너가 있으시고요.”

“존이 파트너를 데리고 참석하다니.”

“친한 분이신가요?”

“그건 아니고, 내년 봄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을 텐데.”

“아, 그러니까―.”

파트너가 결혼 상대가 아닌 거로군, 하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션은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객실 문을 열자 유리로 만들어진 현관이 있고, 응접실과 사용인용의 침실로 통하는 복도가 나왔다.

“개인실이 딸려 있기는 합니다만, 비서나 하인을 데려오지 않으셔서 그냥 비워 뒀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새로 치우고, 간단히 시중들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딱히 필요 없을 것 같군. 수고했네.”

“출항은 5시로 예정되어 있고, 저녁 8시에는 디너 파티가 있을 예정입니다.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싱은 마지막으로 침실과 거실의 벨이 자기 호출기에 연결된다는 설명을 하고 뒷걸음질로 현관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만 남았다. 션이 긴장했던 등을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수직이착륙기에서부터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약간 불편했던 참이다.

호기심에 사용인용의 작은 방이라는 것을 열어 보자 말이 작지 그냥 고급 호텔의 트윈룸이었다. 그런 것이 다섯 개이다. 션은 ‘적어도 자네보다는 엘리트일 텐데.’라는 알버트의 말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흔들어 지웠다.

“엄청나네요.”

“뭐가?”

“크루즈선에 탄 건 처음이니까요. 어쨌든 배니까 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완전히 스위트룸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응접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 있는 것은 소파와 테이블 두 가지뿐이지만 제법 넓이가 있다. 연결된 문은 두 개였다. 하나는 화장실로, 하나는 거실로 통하는 것이다. 거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전면 유리창으로 펼쳐진 바다와 항구의 모습이었다.

“멋지군요.”

션의 집 거실과 주방을 합친 듯한 넓이의 거실 바닥에는 시원한 색의 카펫이 깔려 있고 소파와 테이블, 식탁과 작은 바가 각각 공간을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테이블에는 커다란 환영의 꽃바구니가 놓였다. 바의 선반에는 위스키와 리큐르가 진열되어 있고, 와인 셀러는 절반 정도 차 있다. 냉장고에는 음료수와 미네랄 워터가 들어 있었다. 맥주를 사다 놓을까. 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시중을 받는다는 건 익숙해지면 편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맥주 정도는 그래도 직접 사다 넣는 게 편하다.

거실에서 유리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테라스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혼자서 수영할 수 있을 것 같다. 션은 정정했다.

“스위트룸이 아니라 풀 빌라였네요.”

“마음에 드는가?”

“그럼요. 엘리엇 씨는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자네가 마음에 든다면 나도 좋네.”

그가 빙긋 미소를 짓고 거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사교 활동을 2주 내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피곤한 일이지만, 션이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다.

그다음에는 두 개 있는 침실 중 큰 쪽의 문을 열었다. 커다란 침대 말고도 우아한 디자인의 책상이 있고, 안락의자와 티 테이블도 따로 있다. 욕실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도 바다 쪽을 향해 난 테라스에 욕조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쪽은 미닫이를 전부 열어 침실과 한 공간처럼 쓸 수 있었다. 션은 엘리엇의 브리프 케이스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새삼스럽게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된다. 엘리엇과 함께 자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장소는 늘 서로의 집이 아니면 멀리 가더라도 엘리엇의 별장이었다. 정말로 외부로 나온 것은 처음이구나 하는 실감도 들고, 당연한 것처럼 호텔의 같은 침실로 들어와 있다는 게 이상하게 간지럽기도 했다.

엘리엇이 털썩 안락의자에 앉았다. 션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을 기울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엘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손을 맞잡은 채로 둘은 잠시 입술을 마주한 채 눈을 감았다. 애틋하게 몇 번 비비고 살며시 떨어진다. 엘리엇이 열이 오른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목을 감아 안았다.

“비행기에서부터 키스하고 싶었다네.”

“제가 윔블던 챔피언의 이야기를 해서?”

“그것과는 상관없어.”

조곤조곤 입술에 쪼는 듯한 키스를 계속하면서 션은 의자에 한쪽 무릎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엘리엇이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다시 안락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댄 몸이 점점 깊이 파묻히고, 키스도 깊어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아…….” 하고 엘리엇이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션은 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그의 입술을 삼켰다. 그러나 한 번만 울리게 설정해 놓는 것을 잊었는지 1분 후에 소리가 다시 났다. 그리고 또 1분 후에. 집중력이 깨진 엘리엇이 흘끔 시선을 돌리고 마주한 입술에서도 틈이 벌어졌다. 션은 약간 신경질적인 기분이 되어 그를 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브라이언이에요. 지금 도착했다는데요.”

브라이언과 알렉산드라 부부와는 결혼식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션은 단순히 결혼식의 보안 담당 책임자였으나 우선 용모의 덕이 있고, 대니얼 풀러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점도 있어서 두 사람 다 꽤 친근하게 대해 왔다. 야심가인 부친과 달리 단순하고 소박한 성품인 브라이언은 션과도 마음이 잘 맞는 편이었는데, 당시의 사연이 사연인지라 친구가 될 기회는 없었다.

그가 다시 연락해 온 것은 런던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두 달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브라이언은 난처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재촉하셔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풀러의 성격을 알기에 션은 큰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으레 그럴 줄 알고 있었고, 폐가 될 거라고 이미 결정해 놓은 듯한 브라이언의 태도에는 오히려 공감 가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주 연락하거나 크게 친해진 것은 아니고, 한두 번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같이 첼시의 경기를 봤을 뿐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라의 이름으로 생일 선물이 왔었다. 답례 인사를 브라이언에게 보내자 알렉산드라가 전화를 걸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그는 무심결에 웃었다. 정략결혼을 해 놓고 나서 연애를 시작한 부부는 서로 션을 견제했는데, 브라이언은 그가 미남이라는 점을 경계했고 알렉산드라는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의식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분별력이 있을뿐더러 브라이언은 완전한 스트레이트이고, 알렉산드라도 처음에 아주 잠깐 시선을 주었을 뿐이지 용모나 육체적 매력보다는 금력이나 지위에 끌리는 타입이다.

그런 식으로 견제당하는 것은 보통은 유쾌한 일이 아니겠지만,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에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션에게 즐거운 일이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하자 엘리엇도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곧바로 연락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지난주가 되어서야 브라이언으로부터 아마 크루즈에서 만나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을까 봐 엘리엇이 배려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 션은 기쁘게 생각했다.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갑지 않았다.

됐다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키스하려고 엘리엇의 뒷목을 어루만지는데 두 번째 문자가 왔다. 엘리엇이 힐끔 그쪽을 쳐다보았다. 션은 이번에도 키스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배를 돌아볼 건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하는군요. 알렉산드라가 처음이 아니니까 안내를 해 준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다녀오게.”

엘리엇이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 혼자요?”

“번잡스러운 것은 싫어. 미리부터 피곤하게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내키지 않고.”

“그럼 저도 됐어요.”

“자네는 즐기고 오도록 해. 어차피 2주나 되는데 내내 찰싹 붙어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다 읽지 못한 논문도 있고, 피곤하기도 하니 나는 쉬겠네.”

“논문이요? 어젯밤에도 논문 읽다가 밤을 새우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과제가 밀려서. 될 수 있으면 여기까지 끌고 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기말 과제 말씀이세요? 8월인데 아직도 제출 안 하셨어요?”

엘리엇의 입가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작년부터 에너지 공학의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딱히 대학원에 가지는 않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담당 교수를 불러다 수업을 받고 과제를 제출해서 학점을 따는 모양인데, 필요해서 강의를 듣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 와서 또 새로운 학위를 딸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물음에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차피 공부를 할 거라면 따는 게 낫지.”라고 대답했었다.

왜 공부를 하느냐, 라는 물음에는 그거야말로 이상하다는 얼굴을 해 버렸다. “적어도 수만, 많으면 나라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프레젠테이션에서 멍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자문단이 있긴 하지만 해당 분야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자문단에 속한 이에게 교수를 받으면 시야가 좁아져서 무조건 그 의견에 따라가게 되기 십상이니까. 일부러 일반 대학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네.’

이런 게 귀족의 의무라면 신분제도가 유지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션은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물론 리암은 그런 놈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으냐고 일축했고 션도 그럴 줄 알긴 했지만 말이다.

소중한 이의 고매함이 자랑스럽기는 했으나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사업을 하든가 공부를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도 힘들 텐데 거기에 더하여 사교 활동까지 해야 한다. 사업 쪽의 일을 절반으로 줄였다는데, 도저히 줄어든 것 같지가 않았다. 같이 있는 시간 동안에 외부의 연락을 받거나 하지 않는 식으로 사업 쪽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지만 결국 공부할 것은 가지고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이만큼 서로 생활이 겹쳐졌다는 사실도 기쁘긴 했다.

“아무래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네요.”

“곧 끝나.”

“저는 괜찮지만, 엘리엇 씨 건강이 걱정이에요. 한 시간만 보고, 나머지 시간은 진짜로 쉬세요. 좀 주무시고요.”

“디너는 8시이니 그래도 두 시간은 잘 수 있겠군.”

“한 시간만 보시라고 했는데 왜 두 시간을 잡고 있어요?”

“걱정 말게. 나는 금방 잠드니까.”

션은 엘리엇의 코를 검지와 중지로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PC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10분 후에 15층에서 만나자고 브라이언에게 문자를 보내 놓고 나서 엘리엇의 재킷을 받아 드레스룸에 가져다 걸고 룸서비스로 홍차를 부탁했다. 드레스룸에는 미리 보냈던 짐들이 전부 정리되어 들어가 있었다. 굳이 캐리어는 사지 않아도 됐던 게 아닐까 하고 션은 생각했다.

“다녀올게요.”

“음.”

엘리엇은 이미 집중해 있었지만, 잊지 않고 고개를 들어 션에게 키스해 주었다. 션은 혼자서 침실 밖으로 나왔다. 굳이 이야기 같은 걸 나누지 않고 엘리엇을 내내 보고만 있어도 자신은 그걸로 충분하지만, 엘리엇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질질 달라붙어 있으면 질릴 거라는 밀리의 말이 신경 쓰여서는 아니다. 절대.

생각해 보면 2주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라도 사전 답사는 필요하다. 엘리엇의 성격상 절대 자발적으로 나서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않을 테니, 무작정 놀자고 조르는 것보다 미리 할 만한 일을 봐두고 꾀어내는 쪽이 낫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볕을 쪼이면서 책이나 읽다가 돌아가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야 보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어도 불만은 없었지만, 이왕이면 즐기는 쪽이 좋다.

거실에 놓인 안내 책자를 챙겨서 문을 열자마자 팔짱을 낀 한 쌍의 남녀와 마주쳤다.

“아.”

“어머. 2호실이라면,”

여자 쪽이 놀란 소리를 내면서 흘끗 션이 나온 문을 쳐다보았다. 남자도 이채를 띤다. 관찰하는 듯한 네 개의 눈이 신중하게 그를 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자였다.

“헤리퍼드 공작님의 동행이세요?”

“그렇습니다. 션 맥케인입니다.”

“아, 저희야말로 실례를 저질렀군요. 헌팅던 백작가의 에드워드 윌리엄 헤이스팅스입니다. 에드워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쪽은 앨리스 러셀 오브 베드퍼드로, 제 약혼녀입니다.”

비로소 남자가 말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션은 미소를 지으며 그와 악수했다.

“헤이스팅스 남작님과 그 약혼녀께서 17층에 머무르실 거라고 하더니 두 분을 이르는 것이었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맥케인 씨는 공작님의 파트너로서 참가하신 것이지요? 공작님은 뭘 하고 계신가요?”

“바쁜 일이 있으셔서요. 저는 먼저 여기저기 둘러볼까 해서 나왔습니다.”

앨리스가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면서 션을 올려다보았다. 아닌 체하고 있지만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의 시선이 던져진다. 흥미, 욕망, 호감, 경계, 궁금증……. 거기에 미약한 경멸까지. 여자로서 그에게 호감을 느낀 앨리스보다는 에드워드에게서 그 경멸의 빛은 현저하다. 그것이 조심성과 경계심을 전부 누를 만큼의 것은 아니었으나, 전혀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것도 아니다.

션은 이 크루즈의 초대장에 답하는 문제에 대해서 엘리엇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작년만큼 완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의 답을 쓰면서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원치 않는다면 가지 않는 게 낫지 않겠다는 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딱히 자네와의 관계를 숨기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세.’

엘리엇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숨기려고 했다는 것 자체는 맞는 말인 것 같군. 사실 지금도 내키지는 않아.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처럼 신분 문제 때문은 아닐세. 자네가 남자라는 것도 큰 부분은 아니야. 그러나 드러내고 난 후에는 지금처럼 이게 우리 둘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네. 자네는 분명히 아주 크게 화제가 될 테고……. 몹시 불편해지겠지. 거기에서 내 파트너로 소개되는 이상 자네는 무조건 헤리퍼드 공작의 정부라는 이름과 성적 능력으로만 평가될 걸세.’ 

그는 한숨을 내쉬고 션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런 곳에 내보내고 싶지 않다네. 자네는 그저 내 사람인 쪽이 좋아.’

그 말은 션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만사 잊고 키스하느라 엘리엇이 예약해 놓은 치과에 가지 못하게 했을 만큼 말이다.

‘사실 저는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성적 능력으로 평가됩니다. 엘리엇 씨에게는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죠.’

말꼬리를 올려 묻는 듯이 소곤거리고 엘리엇의 입술에 작은 진동을 일으키자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도 피곤하겠군.’이라고 엘리엇이 미묘한 얼굴로 대답했었다.

‘어쨌든 이 집에서 살게 된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전에 적당한 곳에 한 번 얼굴을 내밀어두는 것도 좋아. 여름 크루즈에는 딱히 격식 같은 것도 없고, 꼭 사교계에 데뷔한 사람만 초대되는 것도 아니니까 자네를 소개하기에는 적당한 모임이라고 생각되네. 적어도 왈츠는 추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지금 그가 말하는 의미를 션은 거의 정확히 알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이 그를 보고 머릿속으로 품는 여러 가지 욕망들과 이 시선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납득과 호기심이 포함된 그 시선들에는 “과연”과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두 사람이 지금 머릿속에서 그와 엘리엇의 잠자리에 대해서 온갖 무례한 상상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굳이 추측해 보지 않아도 빤했다.

타인이 자신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하든 그는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무슨 상상을 하든 상관없었다. 마음속에서 엘리엇을 벗기고 있다면 화가 날 터이지만 보통 대상은 자기 쪽이다.

“저희도 지금 막 도착해서 둘러볼 생각이거든요. 같이 가시는 건 어떨까요? 저희는 올해 두 번째거든요. 안내해 드릴게요.”

앨리스가 약간 볼을 붉힌 채로 말했다. 션은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이미 안내받기로 약속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뵙기로 하지요.”

“그렇군요. 선약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에드워드가 약간 안심하며 말했다. 매끄러운 예의범절로 가려진 겉모습에 속마음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션에게 타인의 조심성이나 경계심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안심은 게이에 대한 거북함이나 비롯되는 것이나 약혼녀에 대한 경계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션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동요하며 일렁거리는 보라색 속에는 욕망과 분노, 경멸과 흥미, 경계와 현실적인 필요성이 혼재되어 있다.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모욕을 당하는 것은 엘리엇이다. 그 실감이 확 다가왔다.

“앞으로도 일정이 보름이나 되니까 기회야 많이 있겠지요. 그럼 먼저.”

션은 그렇게만 말하고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 않아도 발그레하던 앨리스의 볼이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에드워드의 경계심이 확 늘었지만, 션은 그들에게 평이하게 인사를 하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꺼려져서 션은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참에 경호원이 둘 서 있었다. 문을 벽과 똑같은 공단으로 바른 경호원 숙소도 그 앞에 마련되어 있다. 션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 앞을 지나쳤는데, 경호원 하나가 따라붙었다.

“……음.”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것이 절차라면 필요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 자체가 경호원들에게는 번거롭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엇이 헤리퍼드에서 경호 인력을 하나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아마 이쪽과 협의가 되어 있으리라.

두 층을 내려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브라이언이 몇 호실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그쪽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잠깐 기다리자 곧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나왔다.

“션! 오랜만이에요!”

알렉산드라가 높은 목소리로 션을 부르며 다가왔다. 션은 뺨을 내주고 대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엘리엇을 흉내 낸 것이지만, 알렉산드라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만나서 반가워. 솔직히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까 걱정했는데.”

“하하.”

알렉산드라가 콕콕 남편의 팔을 찔렀다.

“친한 사람들은 금방 생긴다니까.”

“글쎄, 별로 친해질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아 참, 합하께서는?”

“공부.”

대답하면서 션은 애매하게 웃었다. 브라이언이 “공부?”라고 되물었다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가 수집하는 유일한 것이 학위증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하던데.”

“처음 들어 봤어.”

알렉산드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버지가 왜 너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느냐고 채찍질할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니까. 정말이야?”

질문이 션에게 왔다. 졸업 증명서라든가 학위 증명서를 모아 놓은 파일철이 개인 서재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션은 아마 수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정도일 거라고 중얼거렸다.

“자아, 그럼 우리 어디부터 갈까요? 15층? 14층? 1층? 2층?”

“15층은 여기잖아요. 뭐가 있습니까?”

“티 룸과 바가 있지요. 전용 피트니스도 있고. 14층에는 누구나 쓸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있고, 대부분 먹을거리예요. 전망대도 하나 있고요. 2층에는 운동 시설이나 영화관, 쇼룸 같은 게 대부분 몰려 있고, 1층은 메인 스트리트. 막 승선한 사람들이 대부분 모여 있을 테니 꽤 볼만할걸요. 저는 15층 티 룸부터 가 보고 싶어요.”

“그건 둘러본다는 목적으로는 좀 그렇지 않아? 시설을 둘러보려면 2층부터 올라오는 게 제일 낫겠는데?”

“무슨 소리! 이 크루저의 백미는 15층부터라고. 15층 이상은 귀빈실이라서 특별한 객실에 머무르는 손님이 아니면 들어오지도 못하니까!”

“그렇군요.”

“알렉산드라는 한 번 초대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션은 의아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약간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빠르게 말했다.

“그때는 15층이 아니라 12층 객실에 있었어요. 15층 이상은 본인이 직접 작위를 가지고 있거나 세습 귀족의 자제가 아니면 초대되지 않거든요. 그야 물론 여름 크루즈가 아니라 직접 예약을 해서 오면 되지만, 단순히 시설에 들어가 볼 수 있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이번에도 합하께서 신경 써 주지 않으셨더라면 15층에 묵기는커녕 아마 초대장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는 본인도 부친이 작위를 가지고 있는 종신 귀족의 딸이고, 평범한 사람으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금액의 VIP실을 ‘예약하면 되지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이면서도 박탈감을 이야기해서 션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돈으로 나누든 신분으로 나누든 손이 닿지 않는 아래라는 입장은 마찬가지이련만 왜 박탈감이 더 느껴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금전적인 어려움은 겪은 일이 없을 브라이언조차도 미묘한 얼굴로 션을 바라보았다. 션은 그에게 공감의 웃음을 던져주었다.

“전용 시설이야 앞으로도 가 볼 일이 많을 것 같으니 지금은 1층이 어떻습니까? 유명인이나 미인 대회 수상자도 초대된다고 하니 구경할 만할 것 같은데요.”

“뭐……. 좋아요. 출항일에는 출항일의 분위기라는 것도 있으니까.”

제안한 것은 션인데 알렉산드라가 브라이언에게 눈을 흘기며 그렇게 대답했다. 브라이언이 “내가 뭘!”이라고 항의하자 그녀가 꾹 꼬집는 흉내를 낸다. 그가 “아야야.” 하고 아픈 척하면서 엄살떠는 것을 지켜보면서 션은 조금 부럽게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아마 엘리엇이 그를 사교계에 소개시키더라도 생기지 않는 당당함, 말하자면 알버트가 말하는 ‘합법적인 애인’이나 ‘아내’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해도 타인의 멸시 어린 시선을 받는 관계는 ‘비합법적인 애인’ 혹은 ‘정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션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 * *

‘너는 구정물이다.’

미란 알 아시리가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덮으며 내뱉었다. 거기에는 약간의 혐오, 증오, 멸시가 들어 있었지만 션은 원망이라든가 미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고통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손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그 피는 그의 경호원들의 것이고, 아내와 딸들의 것이며, 또한 그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미란의 왼쪽 손목에는 손이 아니라 붕대 더미가 달려 있었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칼로 다졌고 검지를 쪼갰으며 마침내는 왼손을 스스로 잘라 버렸다. 식솔인 어린 소년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는 욕망을 증오로 바꾸는 것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통은 그의 분별력을 지켰으나 감정마저 지키지는 못했다. 그는 낮게 쉰 목소리로 비난하듯 내뱉었다.

‘너는 사람을 더럽게 만들어. 자제력을 잃게 만들어. 미치게 만든다. 그게 네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모두 죽은 자들의 잘못이지. 모두가 제멋대로 네게 제 욕망을 투영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등을 휘감은 것도 온통 시푸른 보라색의 욕망이다. 수갑을 찬 채로 션은 몽롱한 채 그 말을 들었다. 그것은 내 탓일까. 내 탓이라면, 내 고통 역시 내 탓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원망하거나 증오할 상대조차 없는 것이 아니냐며 멍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다. 다들 자기 안에 그런 추악하고 더러운 욕심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안 했을 거야. 너는 사람의 모습을 비추지만, 가장 더럽게 비춘다. 너무 새카매서 선명하게 보이니까, 그게 너 자신이 아니라 제 추악함이라는 사실조차 느낄 수조차 없도록. 손을 내밀면 손이 더러워지고 다가서면 몸이 더러워져. 너는 구정물을 내뿜는다. 멀리 있어도 흙탕물이 튀고 가까이에 다가가면 늪 속에 끌어들이는 끔찍한 것이다.’

뻗은 손이 목을 감아쥔 것은 아마 조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러지는 못했다. 그것이 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목을 졸라 죽이기에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그러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지기에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목을 붙들린 채 무슨 생각을 했더라. 리스트레인 룸에서 세 겹의 수갑을 찬 채로도 션은 동조를 일으키고 있었다. 증오와 자기혐오로 바뀐 후견인의 감정에 뒤범벅된 채로 그 증오가 미란이 자기에게 향하는 것인지, 혹은 미란이 미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미란이 자기에게 그런 감정을 향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향해 그러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안에서도 존재하는 어떤 고결함과 강인함에 접촉한 채로 그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미란은 결국 그의 목을 조르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그것도 일시적인 충동이었을 뿐이고, 이내 지각을 되찾고는 손을 놓고 세 걸음을 물러섰다.

‘너는 나조차도 추악하게 만드는구나.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내가 이렇게 약하고 형편없는 인간인 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선고는 나직했으며 대단히 온당한 것이었다.

‘떠나라. 두 번 다시 카이루완의 땅을 밟지 말 것이며 알 아시리의 혈통과 관련되지 마라. 네가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든 내 관여할 이유는 없으나 다시는 한 번이라도, 조금이라도, 나와, 내 자식과, 내 형제와 혈족들, 내 가문을 유혹하지 마라. 그 힘의 한 방울이라도 튀게 하여 내 영혼을 더럽히지 마라. 알 아시리는 앞으로 결코 너와 연관되지 않을 것이며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할 것이다. 나는 너를 용서하지만, 두 번 다시 너를 보고 싶지 않구나.’

어린 시절을 보낸 땅에 그리운 것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션은 두 번 다시 그쪽을 향한 적이 없다. 그는 미란을 존경했으나 그 마음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이 숨 쉬는 공기가 모든 것을 추악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되새기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멸시받아 마땅한 존재가 맞을 것이다. 상대가 엘리엇이 아니었다면. 엘리엇이 아닌 그 누구도 추악해지고 마니까, 결국 상대를 늪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천박한 자는 자기가 맞다.

그러나 엘리엇에게만은 아니다. 그에게만은, 자신은 그저 다른 사람과 똑같이 자기감정에 사로잡히고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알고 싶어 안달하기도 하고, 마음을 끌어오기 위해 거짓을 가장하고 숨겨 놓은 욕망 위에 꽃을 피우기도 하고, 장미를 받아 거기에 키스하는 보통의 남자다.

‘죄송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모두 이미 옛날의 일이다.

“미란 님…….”

션이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엘리엇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악몽을 꾸는 듯 괴로운 얼굴이다. 눈가에 반짝이는 것이 보여서 엘리엇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션이 나간 뒤에 엘리엇은 한 시간쯤 논문을 읽다가 결국 졸음을 못 이겨 침대에 누웠었다. 그리고 알람에 맞춰 일어나자 션이 곁에 누워 그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시간은 7시로, 디너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할 때였지만 엘리엇은 그가 좀 더 잘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꿈자리가 불편해진 것은 그때부터인 것 같았다. 조금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척이는 것을 피곤해서 그런 걸 거라고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더니 이제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무슨 꿈일까. 그 이름은 분명히 은퇴한 지 8년은 되었을 알 아시리의 가주의 것이다. 엘리엇은 그냥 검지 끝에 묻어나는 물기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것은 ‘눈물을 흘린다’거나 ‘울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잠결에 눈가가 조금 젖는 일쯤이야 흔하지 않은가.

션의 과거가 그리 평탄치 않았다는 것은 알고, 카이루완에서 참혹한 일이 있었다는 것도 초반에 보고를 받았다. 지나간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션이 그 당시의 기억을 지금까지 끌고 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슬픈 꿈은 꿈일 뿐이다. 그런데 그 보고 내용이 새삼스럽게 신경 쓰였다.

엘리엇은 자기가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브리프 케이스를 열어 전화기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이자벨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엘리엇 님?」

“알 아시리에 은퇴한 에미르가 있었지? 미란이라고.”

「예.」

“근황을 조사하게. 사소한 일이라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알아 와. 에미르 미란 알 아시리를 중심으로 하되 가문의 직계와 사업체 전부에 대해서.”

「결과는 바로 보내 드릴까요?」

“아니. 돌아가서 보겠네. 정리만 해 두게.”

「알겠습니다.」

엘리엇은 전화를 끊었다. 십중팔구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고 별일도 아닐 것이다. 션은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이니까. 알면서도 시키는 것은 ‘지켜보고 있다’라는 표시이다. 알 아시리만이 아니라 션에게 관심을 둘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말로 사적인 정보를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자벨이 아니라 준형을 시켰을 것이다.

누구라도 감히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낮게 탄식하며 션의 곁에 다시 앉았다. 약간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뺨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 듯 부드럽게 펴진다.

“션.”

그는 션을 다정하게 흔들었다.

“일어나게.”

“음…….”

“벌써 7시 20분이라네. 디너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지.”

션의 팔이 그의 허리에 감겨 왔다. 몽롱하게 열린 물빛 눈동자가 고운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에 꿈의 잔해는 남아 있지 않다. 엘리엇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눈가를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준비해야지.”

“아아, 제가 잠들었었군요. 늦은 건 아니죠?”

“옷만 갈아입으면 되니까 괜찮네. 어서 일어나서 씻고 와.”

션이 그 말을 듣고서도 침대에 앉은 채 잠시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앉아 있었다. 그것이 철없는 소년처럼 사랑스러워서 엘리엇은 웃었다.

“왜요?”

“어서 씻고 오래도.”

재촉하자 션이 꾸물꾸물 침대에서 기어 내려왔다. 엘리엇은 커프스를 마저 여미고 브레이시스를 어깨에 걸치며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벨이 울렸다. 거실로 나가 보자 인터폰에 비치는 것은 로렌 싱이었다. 문을 열어 주자 그녀가 카트를 하나 밀고 들어왔다. 급사 옷을 입은 경호원 둘이 그 뒤를 따랐다.

“준비에 필요하신 일이 있을까 하여 일찍 왔습니다.”

카트에는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놓여 있었다. 미리 뭐라도 간단히 위장에 넣어 두는 편이 확실히 나으므로 엘리엇은 “고맙네.”라고 대답하고 샌드위치를 하나 입에 집어넣고 접시를 들고 다시 침실 쪽으로 향했다. 싱이 뒤따라오려 했으나 엘리엇은 문 앞에서 그녀를 막았다. 션을 보여 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리게.”

싱은 놀란 눈치이면서도 왜 그러시느냐거나 그래도 시중을 들겠노라고는 말하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침실 문을 닫았다.

“누가 왔어요?”

션이 샤워실에서 가운만 걸치고 나왔다. 엘리엇은 “신경 쓸 필요 없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미리 조금이라도 먹어 두는 게 좋을 거라고 접시를 내민다. 션이 웃었다.

“안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긴장해서 위장이 요동치거든요.”

“긴장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네. 자네보다 근사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실수라도 해서 엘리엇 씨 체면에 먹칠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그건 더더욱 걱정할 필요 없어. 이곳에 감히 내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 가부를 말해도 되는 사람은 없으니까.”

엘리엇이 션의 머리칼을 쥐고 끌어당겼다.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는 손길이 강인하여 션은 웃으면서 “네.” 하고 그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댔다.

션이 드라이어로 머리를 대충 말리는 동안에 엘리엇이 드레스룸을 열어 그의 옷을 대신 꺼냈다. 션의 디너 슈트는 엘리엇의 것보다 더 포멀한 형태로, 커머번드까지 입어야 하는 것이다.

머리를 다 말린 션이 셔츠를 걸쳤다. 매끄럽게 빚어진 조각 같은 몸이 실크 셔츠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엘리엇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벗는 것이 섹시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입는 것이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입는 것도 벗는 것만큼이나 자극적일 수 있었다.

그는 안락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옷을 사 주는 것은 벗기기 위해서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지금이라면 약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션이 소맷부리를 다듬어 링크를 달았다. 잘 빠진 손목이다. 엘리엇은 그가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훑는 것을 홀린 듯이 쳐다보다가 약간 서툰 손가락이 오른손의 커프스링크를 달고 소매를 다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그게 아니야.”

“뭔가 틀렸나요?”

션은 고개를 갸웃했다. 프렌치 커프스는 처음이지만 테일러가 입혀 줄 때 분명히 이렇게 했으니 방법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서 엘리엇이 고개를 젓고 일어서서 침실의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귀갑으로 만들어진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를 꺼냈다.

“하나쯤은 오래된 것을 착용하는 게 좋으니까, 이것을 주려고 했었네.”

그가 갑을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진녹색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커프스링크였다. 금으로 둘러진 베젤에는 작은 흑옥이 박혀 있다.

“달아 보게. 아니, 내가 해 주지.”

“이거 아주 귀한 거 아니에요?”

“외조부께서 성인식 때에 착용하셨던 걸세.”

그는 평이하게 말했지만, 국왕의 조카인 콘월 공작이 성인식에 썼던 물건이 예사로운 것일 리 없다. 션은 엘리엇에게 손을 내민 채로 숨을 죽였다. 손목이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물건의 가격 때문이 아니라, 유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엘리엇이 직접 자기 소매에 채워 주는 것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 자네에게 디너 슈트가 필요하다고 할 때부터 이게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엘리엇이 션의 손을 잡은 채 한 걸음 물러서서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오늘 파티가 끝나고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그건 이제 자네 거야.”

엘리엇이 미소를 띠었다.

“나름대로 값나가는 보석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보 같은 것도 아니고 아직은 그냥 내 개인적인 기념품이라네. 자네가 가졌으면 좋겠군.”

“헤리퍼드가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줄 만하니까 주는 거야.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자네가 다른 사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 가솔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전부 아랫사람에 불과해.”

“네…….”

션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엘리엇이 이번에는 보타이를 집어 들었다. 몇 번 연습을 했지만 좀처럼 세련되게 매지 못했던 터라 좀 다행이었다. 매듭을 짓고 나서 “좋아.”라고 물러나려는 손목을 붙잡고 션은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입술을 삼켰다. 그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아, 누가 와 있어요?”

“싱이야. 상관할 것 없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션의 목에 팔을 감았다.

로비에서부터 시작된 크리스털 장식은 갑판까지 이어지고, 눈부신 조명이 밤바다를 백사장처럼 만든다. 분수대에서 뿜어지는 것은 달콤한 향기, 뿌려지는 것은 연한 꽃잎. 음표는 빛처럼 허공에 흐르고 아리따운 여인의 뾰족한 발끝이 사랑스럽게 속삭인다. 어떤 사람은 꿈이 고인 잔을 받고, 어떤 사람은 황홀이 가득한 술에 입술을 댄다. 땅에서 떨어진 이곳은 사랑의 배, 비할 바 없는 인생의 기쁨이 가득한 곳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리암은 우울하게 장내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이렇게까지 성공적인 연회를 개최하시고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루이스 카터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조부가 백작위를 사들이고 부친은 여왕으로부터 남작위를 하사받은 종신 귀족가의 딸이었고, 레이디의 칭호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거의 그만큼 존중받고 있었다. 또한 지금 영국에서 가장 섹시하고 가장 제멋대로인 여자로 유명하기도 했다. 딱 그만큼 화젯거리를 많이 뿌리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그녀가 4년째 이 크루저에 연달아 탑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리암의 재산을 늘리는 데 큰 기여를 해 주고 있기도 했다.

리암은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요, 카터 양. 물밑에 가려져 있는 일이라는 것은 항상 조명의 밝기보다 침울하고 지저분한 것이니까.”

“설마 저 때문이라고 하실 건 아니시죠?”

그녀가 루비처럼 붉은 입술로 날카롭게 말했다. 댁 같은 잔챙이가 문제를 일으켜 주는 것 정도야 오히려 환영하지, 이 아가씨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리암은 정말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신사답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높다란 힐이 또각또각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왜요? 제가 공작님 애인의 머리채를 잡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시나요?”

그리고 세 번이나 엘리엇에게 추파를 던졌다가 무시당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유명하다고는 해도, 엘리엇 자체가 외부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 보니 뜬소문처럼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 사건을 지켜보고 있던 리암이 정리하자면, 엘리엇에게 루이스 카터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고, 자기소개를 한 것도, 소개를 받은 것도 아닌 여자의 이름을 알 리 없으니 평범하게 모르는 여자를 대하듯이 정중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친 것이다. 이 끝내주게 멋진 몸매를 보고서도 무반응인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바이 기질이 전혀 없는 진성 게이였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엘리엇은 이름조차 모르고 기억에도 없는 여자에게 알지도 못하는 원한을 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가 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본인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앞으로도 알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카터 양이 그러실 리 있겠습니까.”

리암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흔히 그녀가 머리 비고 가슴 큰 미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리암은 잘 알고 있었다. 유명세나 지위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엘리엇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욱한 김에 기자에게 분노의 말을 쏟아 낸 것 정도는 엘리엇에 대한 이야기가 어째서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는지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알 가망이 없는 신흥 귀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그렇다. 카터는 “흐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도 밉지 않게 말했다.

“뭐, 저는 여자니까 애초부터 대상이 아닌 거잖아요? 게다가 제 장점을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달라붙을 만큼 바보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자자한 소문은 사실인가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그 애인이 주님께서 실수로 유전자를 흘리셨다가 회수하려고 게이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만큼 미남이라는 소문이요.”

“하하.”

리암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울해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사실에 꽤 근접하게 들리기는 하는군요.”

“흐음. 그래요?”

그렇지만 그래 봐야 그 남자도 게이가 아니냐며 루이스가 투덜거렸다. 리암은 정말로 차라리 그녀가 사건을 일으켜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은 뭐예요?”

“음. 굳이 말하자면, 별로 성공적인 야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왜 성공이 아니에요? 제가 여름마다 여기 오는 게 벌써 몇 번째인데, 솔직히 참석자 신분으로나 보나 뭐로 보나 올해처럼 거창한 건 처음인걸요.”

“기혼자가 많잖습니까? 그것도 부부 동반의.”

“아. 그러고 보니 정말로.”

“불륜이라든가 소문처럼 정부 매칭을 위해서 모임을 열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스캔들은 환영하지만,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는 로맨스를 원하는 거지 사업에만 관심 있는 기혼남 따위는 사양입니다.”

리암은 한쪽에 우글우글 몰려서서 샴페인을 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새카만 무리를 쳐다보았다. 동반한 부인들조차 따로 떼어 놓고 나누는 이야기는 십중팔구 주식이 어떻고 어디의 외교정책이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연령이 제한을 넘지 않았고 신분도 충분하며 런던에 정착하면 언제든지 사교계의 이너서클이 될 수 있는 남자들이 초대장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도 괜찮다. 이번 크루즈의 최대의 화제는 엘리엇이다. 이 정도의 부작용은 짐작하고 있었고, 취향에 안 맞아서 그렇지 오히려 모임의 품위를 올려 줄 것이다.

문제는 한 사람이다. 리암은 정말이지 션이 무서웠다. 엘리엇은 그를 무슨 날개를 갓 떼어 낸 천사같이 애처롭고 여리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SSB가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한 채 공포에 질려 둘러싸고 있는 방사능 물질이다. 

이번에도 경호 문제로 얼마나 골치를 썩였던가. 리암은 런던에 그렇게 많은 첩보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번에 크루저에 탑승한 승무원의 절반이 SSB, 혹은 그 출신의 경호원인 것은 엘리엇 때문이 아니다. 심지어는 안전 때문도 아니었다.

속 모르는 루이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이제는 리암 경도 적지 않은 나이이니까. 또래의 좋은 남자라면, 싱글인 쪽이 더 적을 것 같은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가슴에 대못을 박으시는군요. 하지만 틀린 말씀도 아니죠. 이제 슬슬 모임의 성격을 바꿔야 할 때가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핵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17층에서부터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있구나 하고 리암은 흡 숨을 들이켰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뇌를 직접 두드린다. 션의 GFG는 본인이 시야에 들어와 있지 않아도 작용하며, 유효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에서 딩 하고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칠팔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그 소리가 들릴 만큼 로비에 정적이 가득하다. 멈춘 것은 아마도 시간일 것이다.

차가운 잔이 톡 뺨에 닿았다. 리암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잔을 받아 들었다. 그에게 잔을 건네준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존재감이 사르륵 사그라지며 주의의 벡터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흐트러진다.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순간 모든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고, 거기에서 두 사람이 함께 내리는 것을 본 것은 확실했다.

이 친구가 아주 작정을 했구나. 리암은 그렇게 생각했다. 본인을 직접 드러내거나 사람을 지배한 것은 아니다. 아마 원래부터 션의 GFG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왜 자신이 그쪽을 쳐다보았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세련되어졌다고 해야 하나.”

리암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통제를 늦게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션이 예전처럼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억압하지 않기로 한 것은 확실했다. 지금쯤 알버트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욕실에서 뛰쳐나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서 와.”

호스트의 자격으로서 그는 가장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엘리엇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 줘서 고맙네.”

“감사합니다.”

“편안히 즐기다 가도록 해. 사실 원래는 드레스 코드도 없는 모임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자네가 블랙 타이를 입은 것을 보니 멋지긴 하군. 옷이 날개라는데 이건 날개라고 하기는 그렇고, 뭐라고 해야 하지? 자네 얼굴이 옷의 날개인가?”

농담으로 던지자 션이 약간 민망한 얼굴을 했다. 어쨌거나 훤칠한 몸에 딱 떨어지는 턱시도가 션에게 끝내주게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하고 베이직하면서도 독특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여름의 야회에 입기에는 좀 너무 클래식한 디자인인데 칼라에 가죽띠가 한 줄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세련되게 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엘리엇의 테일러가 혼신의 힘을 다한 역작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리암은 확신할 수 있었다. 상당한 액수의 보너스를 받았으리라는 것도 말이다.

“너무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엘리엇 씨에게 부족하지 않은 정도라면 좋겠습니다만.”

살짝 얼굴을 붉히며 짓는 미소 한 방에 달콤한 한숨이 사방에서 몰래 흘러나왔다. 엘리엇이 약간 얼굴을 경직시켰다. 설마 저게 지금 질투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리암은 말했다.

“이런, 션. 자네가 겸손이 지나치면 잘난 체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나야말로 영광이야. 부디, 많은 소문거리를 만들어서 나를 즐겁게 해 주게.”

“곤란한 소리를 하는군. 한데.”

엘리엇이 찬찬히 시선을 돌렸다. 리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턱시도를 입은 하이에나 떼가 어느 틈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엘리엇이 남자들과 번갈아 악수를 했다.

“다들 웬일들이지? 에이던은 독일에 있는 줄 알았는데. 자네는 또 브라질에서 언제 돌아왔고?”

“웬일이겠어. 그 ‘엘리엇’이 ‘애인’이 생겼는데 그게 ‘남자’이고 ‘여름 크루즈’에 참가를 하다니 이걸 구경하러 안 올 수가 있나.”

맞아 맞아, 라는 동의가 여기저기에서 올라왔다. 엘리엇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 대단한 일이라고.” 하고 대꾸했다. 품평하려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수십 개의 눈이 동시에 꽂히는 것에 션도 약간 당황했다.

“소문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소문보다 더하군. 이런 미남은 그림에서도 못 보고, 소설 속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개안하는 기분이야.”

“자네가 이렇게 얼굴을 밝히는 줄 몰랐어.”

“션은.”

얼굴 때문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엘리엇은 그만두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대도 농담이고, 션이 잘생긴 것도 사실이다. 지극히 내밀한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도 꺼려지지만, 말한다고 해서 이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든 반갑네. 작년에 국제 에너지 포럼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네는 대리인에게 맡겨 두고 안 나오지 않았는가. 바빠진 것도 이해는 하지만.”

“그쪽 일은 궤도에 올랐으니까. 굳이 일일이 관여할 필요가 없지.”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카일에게 엘리엇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션이라고 했던가? 이 친구를 위해서 타운 하우스를 리모델링 하기로 했다지?”

“빈방을 치우게 한 것뿐일세.”

“소문 다 났는데 새삼스럽게. 내숭 떨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자네 혈관에 흐르는 게 진짜로 푸른 피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엘리엇이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런데, 자네들이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엘리엇 씨 친구분들입니까?”

“음. 비슷하지. 대학 동창일세.”

케임브리지에서 같은 클럽에 있었던 멤버들이라면서 엘리엇이 션에게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적지만 션이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대부분 오브라이언의 클라이언트이거나 풀러의 손님으로 브라이언의 결혼식 때에 이유가 있어서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정도였지만 말이다.

“자네 얼굴이 그때에도 진짜 눈에 띄게 잘생겨서 오브라이언 같은 곳에 다니기 아깝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설마 엘리엇의 파트너가 되었을 줄은 몰랐네.”

“감사합니다.”

리암의 말처럼 지나치게 겸손하게 구는 것도 대화가 제대로 끝나지 않으므로 션은 공손한 태도로 그렇게만 말했다. 르 데스펜서 남작 에드워드와 론스데일 자작의 삼남이라는 휴를 비롯하여 몇 사람이 아직 판정이 끝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직장은 계속 다닐 생각인가? 오브라이언이라면 대우는 괜찮아도 시간이 많지 않을 텐데.”

“저보다는 엘리엇 씨가 바쁘시지요.”

“아, 그래. 보안 기기 전공이라면 루카, 너희 회사에도 계열사가 하나 있잖아?”

“글쎄, 엘리엇이 자리 만들기가 어려워서 오브라이언에 두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 어떤 남자가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게.”

몇 장의 명함이 더 건네졌다. 션은 그런 권유들에 적당히 대답하면서 건네주는 샴페인 잔을 받았다. 드러난 소맷자락의 커프스링크를 여러 개의 눈이 아닌 척 빠르게 훑었다.

“엘리엇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도, 그 애인을 내놓기로 했다는 것에도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사실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 거거든. 아무리 요즘 세상이 개방되었다고 해도 말이야."

“이만한 미남이면 당연히 내밀어서 자랑을 해야지. 옛날의 미인은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하는 거지만 요즘의 미인은 능력 있는 자가 차지하는 거라고.”

“반대로 능력 있는 자도 미인이 차지하는 법이지. 얼굴도 능력인데.”

누가 비꼬는 투로 내뱉었다. 션은 애매하게 웃었다.

“뭐, 농담이야. 엘리엇이 얼굴 같은 것에 간단히 홀릴 사람이었으면 훨씬 전에 누가 꼬셔 냈겠지.”

“사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 아니겠나.”

미묘한 뉘앙스였다. 그냥 소탈한 친구 사이로만 생각한다면 농담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도 올리버에게 무슨 수로 그런 미인을 꼬셔서 결혼까지 골인했느냐고 놀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뜻하는 바가 다르다. 그들은 션이 엘리엇의 배경을 미리 알고 접근해서 그를 유혹해 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체 어디에서 만났는가? 사실 엘리엇이 자네 같은 사람이 만나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바에서 우연히, 제가 한눈에 반했었습니다.”

그 우연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입이 까끌하다. “그것참 멋진 우연이었겠군.”이라고 대답하는 말속에도 진심은 없다.

“자네의 행운을 축하해야겠네.”

“예. 엘리엇 씨를 만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죠.”

아마 당신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테지만 말이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뒤섞인 감정들이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의외일 정도로 멸시의 감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하기에 엘리엇은 그렇게 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황금의 손이며, 또한 엘리엇의 ‘애인’이 되기에 충분한 용모와 성적 매력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동반자로서 두 사람을 한 쌍으로 묶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는 엘리엇이 가질 만한 값진 장난감으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이자벨 벌커리나 데이비드 윌슨이 그에 대해 가지는 호의나 판단과 일치한다.

자신의 존재가 엘리엇에게 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불편하게만 여겨 왔던 아름다운 용모에 드디어 제대로 된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그가 엘리엇의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엘리엇만 인정해 준다면 외부의 다른 사람이야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과연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션은 조금 화가 났다. 그는 엘리엇이 부유한 귀족이기 때문에 반한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들보다도, 이들이 엘리엇을 오로지 돈과 신분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신경에 거슬린다.

나쁜 일이 아니었다. 엘리엇의 사랑스러운 점은 자기만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들이 그의 진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 댄다는 점이 화가 난다.

아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다. 드러나지 않은 감정들에 대해서도 대처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감정은 의지나 이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자벨이 정말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거나 데이비드가 그를 무시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예절이란 본심을 적절히 감추는 것에 있는 것이다. 션이 꿰뚫어 보는 감정이나 생각은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이다.

상대의 가장 추악한 면모까지 볼 수 있다고 해서 무조건 추악하다고 매도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유야 무엇이든 겉으로 적절히 예절을 지켜 대해 주면 그것으로 된 게 아닌가. 자신도 항상 공정한 마음으로 남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들의 태도에는 잘못된 점이 없다. 헤이스팅스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션은 대등함과 존중에 대해 생각했다. 엘리엇은 그를 존중하고 있다. 케이론의 방, 커프스링크, 전속 테일러에게 만들게 하는 옷, 초콜릿, 직접 들고 오는 꽃다발……. 엘리엇이 단순히 비싼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들을 그에게 주는 뜻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그저 물러나 있는 대신에 보다 더 대등한 사람으로 대우받기 위해서 애써야 할까. 집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아직 그의 것으로 있겠다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션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엘리엇이 걱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까이에 있는데도 그리워져서 다가서자 카일과 새로 시작하는 시추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엘리엇이 션 쪽으로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쪽 방향에서 이제나저제나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달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다가서며 “그러고 보니 아르헨티나에 땅을 사들였다지?”라고 운을 띄웠다. 잠깐 마주쳤던 시선이 말을 건 남자에게 닿았다가 다시 션을 돌아보았다. 션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표시하고 다가서기를 포기했다.

같은 화제를 꺼내고 싶은 사람이 많았는지 거의 십여 명이 다가서고, 대신 시추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던 남자 십여 명이 물러섰다. 카일이 물러나지 않은 것은 아마 진짜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네가 식량 사업에도 손을 댈 생각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농장을 경영하려고 세운 건 아닐세.”

“하지만 농지만 거의 5천 에이커나 사들이지 않았는가. 농업 법인을 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낭설인가?”

“확실히 법인은 준비 중이지만.”

“그건 연구소 때문이지.”

엘리엇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명랑한 목소리로 끼어들며 엘리엇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몸짓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태도였다. 션도 아는 얼굴이었다. 안다기보다는 한 번 봤다는 정도가 정확하겠지만, 오히려 그것을 감안하면 남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 정도의 매력이 있다는 것과도 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당혹한 듯이 질문을 했던 남자가 “세인트데이비스.”라고 웅얼거렸다. 엘리엇이 흘긋 남자를 쳐다보고, 그다음으로는 션을 쳐다보고,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션은 멈칫 굳었다. 그러니까 지금, 눈치를 본 건가?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션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명백히 재미있어하는 듯한 눈빛들이 션을 향했다. 엘리엇이 자연스럽게 라이언 세인트데이비스의 팔을 떨어냈다. 그 뒤에서 리암이 보라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서른 중반의 귀부인과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라이언, 요즘 엘리엇이 놀아 주지 않았다는 건 알겠지만, 부인을 팽개쳐 놓고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아, 이런. 마리나, 화났어?”

“아니에요.”

부인은 소극적인 태도로 작게 말했다. 라이언이 그녀를 끌어당겨 허리를 감으며 엘리엇에게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인사한 적이 없지? 이쪽은 엘리엇 위체. 전에 이야기했었지? 이쪽은 마리나. 아내야.”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부인.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게 늘 마음에 걸렸었죠.”

“식을 미국에서 올렸었으니까요. 기억해 주셨다니 기쁩니다.”

부인이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나서 엘리엇이 션을 돌아보았다. 션은 천천히 세 사람에게 다가섰다.

“이쪽은 션 맥케인입니다. 제 파트너입니다. 라이언 세인트데이비스 오브 세인트데이비스, 내 대학 시절 선배라네. 그리고 부인.”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션은 안색을 수습하여 상냥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하고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가 싱글싱글 웃었다.

“우리는 구면이지?”

“그래?”

“스피로 호텔에서. 아주 귀여운 아가씨와 디너를 먹고 있던걸?”

션은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엇에게 설명했다.

“밀리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지나가는 사람을 공연히 불러서 명함을 주시더군요. 괜찮은 비즈니스가 있으니 연락하라고.”

“하하, 하도 냉정하게 걷어차고 가길래 도도하다 했더니 설마 엘리엇의 파트너였을 줄 짐작이나 했겠나. 뭐어, 그렇다면 당연히 몸가짐을 신중하게 해야지.”

윙크해 보이는 얼굴은 산뜻할 정도로 밝다. 곁에 선 아내에게 미안하다든가 염치가 없다든가 하는 생각도 전혀 없어서, 눈으로 감정이 보이는 게 아니라면 션은 자기가 괜한 오해와 착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앞에서 사람은 위선을 떨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이언이 엘리엇을 향해 내보이는 당당한 친밀감에 그늘지듯이 세인트데이비스 부인의 주위에 불안과 두려움이 점멸한다.

어쩐지 긴장한 태도인 리암이 연한 복숭아색의 샴페인을 모두에게 한 잔씩 돌리게 했다.

“무엇을 위해서 건배하지?”

“음. 엘리엇의 행복에 대해서 할까?”

“아무리 엘리엇을 구경하러 왔어도 디너 파티의 건배 정도는 나를 위해서 해야지.”

리암이 불평했다. 그러자 라이언이 씩 웃으며 제일 먼저 잔을 들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빌지. 언제나 그랬던 대로.”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그것은 그들 사이에서는 관용적인 문구였던 것 같다. 낮은 남자들 목소리가 일제히 우렁우렁하게 울렸다.

션은 한 박자 늦게 잔을 비우고 지나가는 급사에게 잔을 건네주었다. 엘리엇은 금세 아까의 농업 법인이 어쩌고 하던 남자에게 붙들렸고, 리암이 그의 어깨를 톡톡 쳐서 무리에서 빼냈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션은 내심 고마운 기분을 느끼며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손님맞이는 괜찮으십니까?”

“내려올 사람은 때 되면 내려오겠지. 하이에나 떼 사이에 끼어 있을 필요는 없어. 엘리엇도 좋아하지 않을걸.”

“별로 불편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으, 응?”

“뭡니까, 저 라이언이라는 남자는?”

리암의 감정이 눈에 띄게 불안으로 요동쳤다. 션은 다시 엘리엇 쪽을 돌아보았다. 부인이 옆에 붙어 있으니 내버려 두기는 했지만, 라이언은 여전히 엘리엇의 바로 옆에 서서 활발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뭐냐. 친한 선배였어. 원래가 발이 넓고 사교성이 좋아서 아무하고나 잘 지내지. 노는 데에도 능하고.”

“그렇군요.”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

“요절을 낼 거면 배에서 내려서 해.”

션은 소리 내서 웃었다.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웃음소리를 흘리자 시선이 재차 쏠려왔다.

“제가 뭘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령 저 남자랑 엘리엇 씨 사이에 뭐가 있었어도 옛날 일이잖아요?”

“그렇지.”

리암이 안도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분에 션이 입매를 굳혔지만, 금세 미소로 가려 버려서 눈치채지 못했다.

루이스가 리암의 곁으로 다가오며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눈치 보고 있었는데, 저는 이 잘생긴 분한테 영원히 소개해 줄 계획이 없으신가 봐요?”

“아차. 미안합니다, 카터 양. 이쪽은 션 맥케인입니다. 션, 루이스 카터 양일세.”

“아하. 안녕하세요.”

션은 놀라운 기분으로 루이스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엘리엇만큼은 아니었다. 당연히 루이스 카터를 알고 있었다. 실물로 보고 직접 악수를 하다니 신기했다. 게다가 그녀는 구글링으로 알아냈던 엘리엇에 대한 얼마 안 되는 추문에 등장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엘리엇에게 말을 걸었는데 무시를 당했다고 했던가.

“진짜. 합하의 취향이 이런 미남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알려 주시는 게 제가 부끄러움을 덜 당하는 일 아니겠어요?”

그녀가 담백하게 말하고는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서 일어나는 감정이 정직한 호감과 있는 그대로의 패배감이었기 때문에 션은 부담 없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잡았다. 그는 직설적인 사람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사는 그냥 인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루이스는 악수를 하는 대신에 션을 끌어당겨 팔짱을 끼었다.

“여자에게는 관심 없어요?”

“엘리엇 씨 이외의 사람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너무 만점짜리 답은 여기에서는 별로 인기를 못 끌어요.”

“그런데, 음, 이거 제가 지금 에스코트를 해야 하는 분위기인 겁니까?”

“바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제 존재를 눈치조차 채지 못하시던 분이 어떻게 하시나 좀 궁금하니까.”

그건 션도 좀 궁금했다. 리암이 열없는 눈으로 “나는 뒷일 책임 못 진다.”라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그리고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른 손님들한테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아서 한 남자가 시뻘건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실례하겠네. 나를 기억하고 있는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랑포드 남작가의 사람이었다. 차남이었나, 삼남이었나. 션이 엘리엇을 찾아 헤매던 때에 맡았던 일 중 하나로 랑포드 남작가의 별장에 보안 시스템을 구비하는 일이 있었다. 이 남자가 부친 대신 계약서에 서명했었다. 남자 본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약혼녀의 이름은 에드위나였다.

그는 그때 자기 약혼녀와 션이 불륜 관계일 거라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험한 짓을 하고 결과적으로는 션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도록 만들었었다. 처음의 한 번은 진짜로 오해였지만, 나머지는 그를 괴롭히는 일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화풀이는 점점 심해졌다.

실제로 션은 그 약혼녀를 두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오해는 쉽게 불식되었고, 랑포드 남작으로부터 직접 사과를 받았다. 피해 보상 제안도 받았었지만, 이번에는 도리어 랑포드 남작이 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양하고 일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애초부터 이 남자가 이성을 잃고 그런 짓을 한 것은 통제력을 잃고 있던 자신의 GFG 때문이었고, 문제가 크게 불거지면 상류층의 일을 더 맡을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참았던 면도 있다.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었네.”

뒤늦게 겁이라도 먹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션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나간 일입니다.”

“합하께서는,”

“그때 이미 사과도 받았고요.”

엘리엇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런 의도를 담아서 짧게 끊자 남자가 “알았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것 말고도 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오래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무시하고 걸음을 옮긴다. 루이스가 미묘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캐묻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역력했다. 션은 웃어넘겼다.

“별일 아닙니다.”

“저만 몰랐지, 사실 유명 인사이셨나 봐요?”

“그럴 리가요. 예전에 회사 일로 몇 번 뵈었던 것뿐인데요.”

둘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무사히 바에 도착하자마자 션은 멈칫했다. 익숙한 기척이 있다 했더니 준형이 바에서 쓱 얼굴을 내밀었다.

“제이, 칵테일 한 잔 줘요. 빠알갛고, 달콤한 것으로.”

루이스가 애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달콤하지는 않지만 루이스 양의 입술과 같은, 홀릴 만큼 예쁜 체리 색 잔은 만들어 드릴 수 있지요.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그 드레스는 캐시 머레이 디자인인가요?”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쁘네요. 섬세한 남자는 매력적이죠. 제이는 최고예요.”

준형이 하하 웃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쉐이커를 흔들었다. 그리고 석류 주스처럼 붉은 술을 조그만 잔에 부어 과장된 몸짓으로 건넨다. 루이스는 만족한 얼굴로 그 잔을 받더니, 션을 향해 “고마웠어요.”라고 인사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션은 바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제이 씨가 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이것도 통상적인 경호 업무의 범주입니까?”

“아니. 의뢰야. 왕자님의.”

리암의 의뢰인가 하고 로비 쪽을 쳐다보자 그가 “까탈스러운 쪽.”이라고 덧붙였다.

“아하, SSB의. 그분, 제이 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요?”

“벌레처럼 혐오하지. 그렇다고 자기 밑의 덤 앤 더머들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무엇을 드릴까요?”

준형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위스키를 주문하는 남자에게 잔을 내주었다. 그가 가자마자 션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SSB가 그렇게 긴장할 만한 일이라면 엘리엇에게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물은 건데 준형이 빙글빙글 웃었다.

“내 정보는 비싼데.”

“그럼 됐습니다.”

“그렇게 일찍 손 털면 이쪽이 아쉽고. 어때? 일대일의 교환은?”

“그 왕자님이 하는 일에는 관심 없어요.”

“그럼 라이언 세인트데이비스의 정보는 어때?”

션은 잠깐 머뭇거렸다. 준형이 얄밉게도 생글거렸다.

“궁금해지면 엘리엇 씨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인보우 칵테일 한 잔 주시겠어요?”

“지금 내가 바텐더는 부업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나 본데, 이래 봬도 자격증 가진 프로거든?”

준형이 씩 웃으면서 긴 잔이 아니라 마가리타 잔을 꺼냈다. 션은 깊은 푸른색 위에 내리깔리는 무지개 색 술을 보면서 “진짜군요.”라고 감탄사를 냈다. 그가 잔을 션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여기서 하기는 좀 그렇지만,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중에 따로 조용한 곳에서 잠깐 보자.”

“알겠습니다.”

션이 잔을 들고 돌아서자마자 이제나저제나 말을 붙이려고 가까이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이 칵테일을 소재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미소 짓는 얼굴을 철벽처럼 둘러치고 새로운 사람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션이 아름다운 여자와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훑으며 엘리엇은 위스키 잔을 입술에 댔다. 저 여자가 누구더라. 분명히 무슨 자선 파티에선가 몇 마디 말을 나눈 기억이 있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루이스 카터.”

카일이 말했다. “응?” 하고 돌아보자 그가 웃는 얼굴로 다시 말해 주었다.

“루이스 카터라고, 저 여자. 카터 제약 회사의 손녀야.”

“아아. 코벤트리 백작의.”

“본인도 패션 업계에서 꽤 알아주는 큰손이라네. 정말로 몰랐어?”

“그다지 인연이 없는 계통이니까. 코벤트리 백작과는 알고 지내는 사이이지만.”

“하긴. 조손이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어. TV에 나오고 언론에 노출되는 방식으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걸 선택한 여자니까 제프리 카터가 미워할 만하지.”

“확실히.”

엄격한 성품에 귀족적인 기품이 있는 코벤트리 백작을 떠올리며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션을 바라본다. 그만이 아니라 함께 서 있는 남자들도, 술잔을 나누며 환영의 인사를 하던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리며 소란을 피우던 남녀도 한결같이 그를 바라본다. 마치 그곳에 시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도 있는 것처럼 션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파티의 중심이 이동하는 느낌이다. 실제로 중심은 리암과 그가 있는 이 자리일 텐데 말이다.

션의 주위에는 공기가 다르다. 나란히 서 있을 때는 좀처럼 인식할 수 없지만 이렇게 한 걸음 떨어져 보면 누구라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그 수려함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엘리엇은 해로드 백화점에서 마주쳤을 때의 인상을 기억해 냈다. 그때에도 그랬다. 억지로 불쾌감을 주어 사람을 내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눈길을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그를 무시하는 기미가 있었던 웬즈데이 클럽 1)의 친구들마저도 시선을 좀처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션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로비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고 바닷바람도 차가워서 덥기는커녕 추울 지경인데도 얼굴이 싯붉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사람 같았다.

“저건 누구지?”

“랑프리 남작의 차남. 좋지 않은 소문이 있던데. 자네가 알 만한 사람은 아닐세. 어떻게 초대장을 구한 거지?”

누군가가 대답해 주었다. 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엘리엇은 그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솔즈베리 후작의 장남 존 경이 파트너를 데리고 등장했기 때문에 잠시간 모두의 관심은 그쪽으로 옮겨 갔다. 엘리엇은 그사이에 살짝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유럽의 아름다운 여자는 다 모이는 자리라고 리암이 자부하더니 틀리지 않았다. 션이 금세 미녀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조명을 반사하여 화려하게 빛나는 드레스나 액세서리의 반사광이 보석으로 만든 꽃밭 같다.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게 아닌가 하고 엘리엇은 무심히 생각했다. 리암이 초대객을 결정했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누군가가 말을 걸자 션이 웃었다. 이런 자리에서 보통 웃는 얼굴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엇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뒤따라온 라이언이 중얼거렸다.

“푹 빠졌네.”

“그래.”

엘리엇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질투 날 정도야. 놀랄 만큼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치를 따지는 것은 그들이 늘 해 왔던 일인데도 라이언의 그 말이 약간 낯설게 들렸다. 도자기나 와인을 감정하는 것처럼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심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언이 실제로 질투 같은 걸 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는 최소한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엘리엇 자신보다 훨씬 귀족적인 남자다.

그는 새삼스럽게 라이언을 돌아보고, 마리나 부인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인은?”

“피곤하다고 쉬러 갔어.”

“그런가.”

하긴, 사람이 많고 시끄럽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상대적으로 점잖은 분위기였으나 갑판 쪽에서는 수영장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것이 그리 흉이 되지 않는 것은 물에 젖은 남녀가 모두 하나같이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헤리퍼드 합하.”

웨스트베리 남작이 다가왔다. 옆에 있는 것은 변함없이 곱게 다듬어진 천사이다. 지난번보다 얼굴이 더 희어 보였다. 라이언이 휘익 휘파람을 불려고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참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리암에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리암 경께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로버트 경이 초대장을 못 구해서 못 오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는 몰라서 별말 안 했었지만, 런던에서 꽤 유명하던데, 자네는.”

“구하려고 애쓰면 불가능하기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합하께서 불러 주신 것과 같겠습니까? 소문의 그분과 함께 참석하셨다지요?”

“너무 소문거리로 삼지 말게. 부담스러우니.”

“저분이 맞으시지요?”

안젤로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션을 가리켰다. 천사는 목소리도 천사였다. 턱시도를 입고 야회에서 휘황한 조명을 받는 것보다는 흰옷을 입히고 띠를 둘러 성가대석에 세우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웨스트베리 남작이 미소했다.

“저도 바로 알아봤습니다. 유럽의 미남 미녀는 모두 체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런 보석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합하의 안목은 다르시군요.”

“경매장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것도 아닌데 안목 같은 것을 따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자네야 사람의 용모 아래에 있는 재능을 알아봐야 하겠지만, 나는 그런 일과는 거리가 멀다네.”

“아깝습니다. 제가 먼저 발견했어야 더 많은 사람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을 텐데요. 합하께서 간직하는 보석이 되어 버리면 그럴 기회는 없겠지요?”

“글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말일세. 션은 진짜로 보석이 아니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보기 드물게 진솔하고 큰 웃음에 주변이 약간 술렁거렸다.

“하지만 원래 네 타입은 아니잖아? 옆에 두기에 모자란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사실 처음 봤을 때 의아하게 생각한 건 사실이라고.”

라이언이 끼어들었다. 웨스트베리 남작이 “그렇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화제를 더 그쪽으로 진전시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는 듯이 션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거나 좋아하게 되는 건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합하께서 마음에 두셨다면 용모 이상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그 말은 엘리엇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라이언이 입을 다물었다.

그 외에도 뒤늦게 다가와 인사하려는 자가 여럿 있었다. 리암이 초대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채워 넣은 모델들의 대표와 엘리엇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채로 웨스트베리 남작의 눈에 들려는 연예인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혹은 스스로의 야심을 가지고 헤리퍼드 공작에게 접근하려는, 평소라면 같은 공간에 초대되는 일도 없는 이들이 연이어 주위를 둘러쌌다.

갑판을 향해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공기가 탁하다. 엘리엇은 악수와 인사에서 벗어나 좀 쉬러 가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션을 시선으로 찾았다. 혼자서만 자리를 비키는 것도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션도 먼저 쉬러 간 걸까.

그를 찾으러 갈 생각으로 라이언과 웨스트베리 남작에게 양해를 구하는데, 뒤에서 낯익은 감촉이 옆머리를 가볍게 감쌌다. 청량한 박하 향이 무료함까지 씻어내리는 듯 기분 좋게 나서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마침 자네를 찾고 있었는데. 그건 향수인가?”

“조향사라는 분을 만났는데 한번 뿌려 보라고 권하시더군요. 향수 같은 건 처음이었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서요. 엘리엇 씨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군. 자네한테 잘 어울려.”

션의 뺨은 살짝 익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데, 션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짓는 대신에 사방을 살짝 돌아보았다. 엘리엇에게 조금이라도 눈도장을 찍으려던 사람들이 입으로 불어 버린 설탕처럼 흩어져서 사방으로 퍼졌다. 션이 남아 있는 두 사람과 라이언에게 시선을 던졌다. 엘리엇은 빙그레 웃으며 둘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션 맥케인, 션, 그는 웨스트베리 남작 로버트 산더스일세.”

“션 맥케인입니다.”

“로버트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쪽은 안젤로 알바네제입니다. 모델이지요. 이것을.”

최대한 담백한 태도로 인사하는 션에게 웨스트베리 남작이 마찬가지로 진솔하고 직설적인 태도로 대답하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산더스 에이전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주로 다루었던 것은 음악입니다만, 최근에 모델과 연기자를 키우고 있지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남작.”

엘리엇이 말을 잘라 끊었다. 남작은 아쉬운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합하의 뜻에 반하는 것은 압니다만, 맥케인 씨 같은 인재를 놓칠 수는 없어서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기에 자신이 없다면 간단한 화보집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직접 무대에 서는 일이 아니라면 크게 부담될 것도 없지요. 취미 정도라도 충분히.”

“죄송합니다. 그런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서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션은 부드러운 어조로 거절했다. 남작이 애석하다는 듯이 한탄했다.

“무리하게 권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생각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구차하게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강조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션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엘리엇이 평소와 다른 눈길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왜요?”

“저쪽에 가서 서 보게.”

그가 안젤로의 옆을 가리켰다. 션은 그가 왜 그러는 건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안젤로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안젤로가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겉보기에는 워낙 사라질 듯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그렇게 커 보이지 않지만, 나란히 서자 의외로 션보다 별로 작지 않았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남자 둘이 나란히 서자 특별히 GFG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시선이 일제히 몰려왔다.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취재는 금지되어 있으니 아마 크루저 자체에 고용된 사진사일 것이다.

사람의 시선이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진을 찍히는 일에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션은 몹시 불편해졌다. 엘리엇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피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옆을 돌아보자 안젤로는 모델이라면서도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둘을 바라본 웨스트베리 남작이 “이것 참.”이라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놓치면 안 되겠다 싶은데요.”

“눈이 즐겁긴 즐겁군. 자네 진짜로 웨스트베리 남작 밑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라이언이 거의 반쯤 소리 내서 웃으며 말했다.

“글쎄. 션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대중의 앞에 나서는 것보다 자네 시선을 사로잡는 쪽이 월등히 이익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아깝지 않은가.”

“안젤로와 함께 월드 투톱이 되고도 남을 겁니다.”

“알바네제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션이 낫지.”

엘리엇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턱시도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도 드물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시착할 때도 따라가는 거였다.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화이트 타이는 준비시키지 않았지만, 그것은 어떨까. 입을 만한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몇 벌쯤 만들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노골적으로 안으로 굽는 팔에 웨스트베리 남작과 라이언이 황당한 얼굴을 채 하기도 전에 그는 션에게 다가서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얼굴에 웃음을 덮어씌운 채 적당히 여기저기 시선을 던지고 있던 션이 안달 난 듯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이만 돌아갈까?”

“그래도 괜찮겠어요?”

“볼 사람은 다 봤고, 이만하면 예의도 지켰으니까. 더 있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네만. 더 있고 싶은가?”

“아뇨.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좀 지치네요.”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 엘리엇이 라이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돌아가 봐야겠어. 선배도 몸이 좋지 않은 부인을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도록 해.”

“어, 그래.”

라이언이 당혹을 숨기지 못한 채로 내뻗으려던 손을 내렸다. 웨스트베리 남작과 안젤로에게 시간이 있을 때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엘리엇은 션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조용해졌다. 엘리엇은 몸을 돌려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발갛게 물든 볼이 따끈따끈했다.

“즐거워 보이는데.”

“제가요?”

“얼굴이 상기되었어.”

“즐거운 게 아니라 부끄러운 겁니다.”

“부끄러워? 왜?”

“사진을 찍혔잖아요.”

그러자 엘리엇이 파안했다.

“유출되더라도 자네가 무얼 걱정하는가. 솔직히 오늘 저곳에서 자네보다 멋진 사람은 없었는데.”

션이 얼굴을 붉히면서 엘리엇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사르륵 눈꼬리를 접는 웃음에 엘리엇이 마주 미소를 짓는다.

“좀 어땠는가? 있을 만하던가?”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좀 지나치게 소란스럽기는 했지만요. 다들 친절하고…….”

“다들 친절하다기보다는 다들 자네를 좋아하게 된 것일걸세. 가는 곳마다 여자들을 몰고 다니던데.”

“하하.”

션이 열없이 웃으면서 제 뺨을 쓸었다.

“그러는 엘리엇 씨야말로 얼굴 조금만 잘생기고 괜찮다 싶은 남자는 전부 끌어다 주위에 둘러쳐 놓지 않았어요?”

“설마. 난 별로 남자 얼굴은 안 보는데.”

그리고 엘리엇은 잠시 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긴, 자네 때문에 안 믿더라고. 눈이 즐거웠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만.”

“하하. 알아요. 엘리엇 씨는 몸매를 월등히 먼저 보시죠.”

“으음……. 꼭 그렇지만은…….”

“사실 얼굴에는 조금 자신 있었는데, 처음부터 정말 신경도 쓰지 않으셔서 놀랐었어요.”

션이 명랑하게 말을 잇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엘리엇의 손을 잡고 내렸다.

“자네가 나한테 반했다는 건 그게 계기였는가?”

새로운 반응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이 물었는데 션이 “글쎄요.”라면서 웃음을 띠었다. 어쩐지 태도가 미묘하게 느껴져서 엘리엇은 그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엘리엇 씨한테 접근하려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일로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아요. 질투는 좀 할 거지만.”

“질투라면 내 쪽이 해야 할 것 같은데. 여자가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관심 없는 거 아시잖아요. 사실 이름도 잘 모르겠어요.”

싱이 마중을 나왔기 때문에 그 화제는 거기에서 끝났다. “두 분 즐거우셨습니까?”라는 인사를 들으며 둘은 가벼운 걸음으로 그녀의 인도를 따랐다.

“그런데 엘리엇 씨는 제이 씨가 바텐더로 채용된 걸 알고 계셨어요?”

“이야기는 들었네.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굳이 경호원을 데려올 필요는 없겠구나 했었지. 알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엘리엇 씨는 원래 경호원을 별로 잘 데리고 다니지 않으시잖아요.”

“그건 런던에 준이 있기 때문이라네.”

그런 클라이언트라면 골칫거리이겠다고 션은 농조로 말했다. 엘리엇은 미소를 띠었다. 사실 헤리퍼드 보안부에 준형의 존재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주 경호 문제로 입씨름이 되곤 했다.

“아 참, 저 딕시 도노반에게서 사인받았어요.”

보라면서 그가 주머니에서 코스터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그게 누군데?”

“에버턴 FC의 미드필더예요. 중국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부상 때문에 이번 프리시즌을 스킵하기로 했다더라고요. 악수도 했어요. 올리버한테 말하면 난리가 날걸요. 책상 위로 뛰어 올라갈지도 모르죠. 시간 나면 같이 골프를 치자던데, 저 골프는 구경한 적도 없으니까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에도 아마 골프 연습장 정도라면 있을 걸세. 내일이라도 나랑 같이 가서 연습해 보면 되지. 그런데 자네는 첼시 팬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네. 그래도 딕시 도노반은, 음. 고마워요.”

싱이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엇이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가고 션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엘리엇이 한 팔을 션의 목에 감으며 키스해 왔다. 입술과 혀에서 위스키 냄새가 나서 취할 것 같았다. 션은 그의 허리를 감아 안고 밀어붙였다. 등이 쿵 하고 현관문에 부딪혔다.

“키스하고 싶어서 돌아가자고 하셨어요?”

“약간은.”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섞여 든다.

“침실로 가요. 음.”

션이 그를 놓으려 했지만 엘리엇이 놔주지 않고 목과 허리를 감아 끌어당긴다.

현관의 센서 등이 몇 번이나 꺼졌다가 켜졌다. 엘리엇은 흥분하여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션의 손가락이 보타이를 풀기 위해 목 언저리를 스치는 것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오른다. 그는 션을 끌어당겨 자세를 바꾸어 벽 쪽에 그를 세우며 커머번드 아래쪽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계속 자네의 옷 속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엇, 씨.”

“입고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션이 숨을 들이켰다. 엘리엇은 바지 단추를 풀어 두툼해진 안쪽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젖어 든 윗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고 드로즈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헤쳐 낸 바지 자락 사이로 발기한 물건을 끌어내어 부드러운 기둥을 몇 번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기둥 전체를 쥐고 훑자 금세 열기를 더하며 심을 세웠다. 단단하고 뜨거운데도 말캉말캉하게 손에 잡히는 감촉이 좋다.

션의 물건은 크기는 둘째 치고 모양이 좋다. 엘리엇은 원나잇을 전전했던 만큼 꽤 많은 남자의 음경을 보았으나 이렇게 잘생긴 물건은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 이것을 봤을 때 미모를 좌우하는 유전자가 이런 데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나서 그는 무심결에 웃었다. 사실 처음 섹스 했을 때 가장 마음에 울리게 잘생겼다고 생각한 것도 이것이다. 지금이야 얼굴도 시간 가는 걸 잊을 만큼 보고 있곤 하지만 말이다.

“왜 웃어요?”

션이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욕망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섹시하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의 색도 살짝 어두운 군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엇은 귀가 간지러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혀를 내밀어 끝부분을 핥았다.

“엘리엇 씨.”

마치 간지러운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션의 손가락이 귓가를 훑고 귓바퀴 안으로 들어왔다. 음란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퍼진다. 엘리엇은 흥분으로 목을 울리면서 입을 벌려 그의 것을 물었다.

엘리엇은 구음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다 보니 기회가 닿지 않았기 때문이지, 결코 싫어서는 아니다. 원나잇 상대에게 이런 것을 해 줄 이유는 없고, 션과 만나던 중에도 아직 섹스 파트너에 머무르고 있었던 때에는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라텍스를 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콘돔 없이도 할 수 있는 사이이다. 이렇게 탐스러운 걸 놔둘 필요는 없다.

“읏, 잠깐만요, 엘리엇. 진정해요.”

달래는 듯한 손길이 계속해서 그의 뺨과 귀를 어루만졌다. 피부에도 미각이 있다면 지금 분명히 단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엘리엇은 바짝 힘이 들어간 션의 물건으로 자신의 입천장을 훑듯이 하며 깊이 빨아들였다. 그는 키스로 많이 느끼는 편이었고 혀 깊은 곳과 입천장 안쪽에 성감대가 있는 것도 스스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음경으로 자극하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입 속에 조금씩 흘러드는 쿠퍼선액은 결코 좋은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션이 거의 괴로워하는 듯이 몸을 뒤틀며 신음하는 것에 엘리엇은 크게 흥분했다. 빈틈없이 성장한 남자를 무너뜨리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엘리엇은 혓바닥 안쪽으로 귀두의 주름을 쓸며 코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열이 오른 푸른 눈동자를 위로 올려 뜨며 손으로 기둥 아래쪽을 훑자 션이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문에 몸을 기대었다. 입 안에서 음경이 조금 더 커졌다.

엘리엇은 몇 번에 걸쳐서 션의 것을 조금씩 깊이 물어갔다. 굵기도 만만치 않지만 길이도 길이라, 반 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빨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여러 차례 시도해야 했다. 이렇게 큰 것이 뒤로 파고드는 거라고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서, 욱신거리는 뒤를 조였다 풀었다 하며 자극을 준다.

“더 깊이 넣어도 괜찮네.”

그는 한 차례 귀두를 세차게 빨았다 놓아주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기둥 아랫부분에서부터 위까지 혀로 핥아 올렸다가 다시 내려와 고환에 키스하고 밑동을 입술로 깨물었다.

“엘리엇, 그러시면 저, 후우.”

션이 신음하며 입을 막았다. 빨갛게 물든 얼굴이 귀여웠다. 손끝으로 말랑말랑한 포피를 어루만지다가 다시 입 속 가득히 받아들이자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신음한다.

점점 고개를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션의 숨결도 격해졌다. 흥분을 참지 못하고 엘리엇은 한쪽 손을 아래로 내려 스스로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이미 한계까지 달아올라 흥건하게 젖어 있었지만, 앞을 만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항문이 벌름거린다. 뒤에 넣고 싶었지만, 입에서 빼낼 여유도 없었다. 뺀다고 당장 올라탈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엘리엇, 그대로…….”

션이 거의 앓는 소리를 내면서 그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강제로 뿌리까지 삼키도록 밀고 들어온다. 입술에 까칠한 음모가 닿았다. 그렇지 않아도 길고 굵은 물건이 목구멍까지 꽉 차는 바람에 숨이 턱 막히고 구역질이 났다. 괴로웠지만, 자극적이었다. 엘리엇은 숨을 멈추고 마치 뒤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항문을 꾹 조인 채로 션을 올려다보았다.

“으, 윽!”

션이 얼마 견디지 못하고 정액을 내뿜었다. 엘리엇은 쿨룩거리면서 션의 물건을 뱉어 냈다. 목구멍으로 들어갔던 것이 도로 올라오면서 입 안이 정액 냄새로 가득 찼다.

“엘리엇.”

엘리엇은 그의 정액을 입에 문 채로 몽롱하게 올려다보았다. 션이 그를 일으켜 세워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싸 버린 사타구니가 축축하고 차가웠다.

“뱉어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엘리엇은 약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젓고 그것을 그냥 삼켰다. 그러자 션의 안색이 변했다. 다음 순간에 정신없이 키스당하며 엘리엇은 침실까지 질질 끌려갔다.

* * *

노크 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어렴풋이 눈을 뜨자 새벽이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은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션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일 아침에는 알람을 맞춰놓고 새벽에 일어나서 엘리엇을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엘리엇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블라인드를 내리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간다. 속옷과 바지를 챙겨 입고 셔츠를 팔에 꿰며 밖으로 나가자 준형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모히토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

“나중에 보자의 ‘나중’치고는, 아직 여섯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잘도 일어나는군요.”

션은 눈곱조차 끼지 않은 바싹 마른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피로가 온몸에 내려앉았다. 퇴장은 11시 전후에 했지만 계속 긴장 상태로 있었고, 돌아와서는 엘리엇과 몇 시간이나 뒹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잠든 시간은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파티가 이제 끝났어. 나는 이 용건까지 마치고 잠자러 갈 계획인데.”

“아아. 바텐더도 힘들군요.”

“남의 돈 벌어먹고 살기가 어디 쉽나.”

준형이 손을 까닥까닥하며 웃었다.

“얼굴이 빤질빤질하네? 분명히 라이언 세인트데이비스 때문에 신경질이 치솟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상관없습니다.”

“진짜? 나중에 남몰래 바다에 던져 버리기로 결심한 게 아니고?”

“……그놈 뭐예요?”

션은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준형이 “공짜로는 곤란하지.”라고 대꾸했다.

“아까도 제안했잖아. 일대일의 교환. 한 가지 정보에 한 가지 일. 어때?”

“됐습니다. 그거 솔직히 말해서 제이 씨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잖아요?”

“내가 뭐 일을 시킨다고 널 왕실에 잠입시키거나 하겠어? 그냥 평범하게, 한두 놈한테 웃어 주고 입이나 열어 주면 되는데.”

“안 해요.”

“살다 보면 필요해질 날이 있을 텐데 미리 거래를 뚫어두는 것도 좋아. 어차피 영원히 능력을 쓰지 않고 살 수는 없을 텐데.”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냥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준형이 진심으로 아깝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션은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제안이 있어.”

“설마 제이 씨의 부하가 되라는 건 아니죠?”

션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바보야? 세상에 통제 못할 부하처럼 쓸모없는 게 어디 있다고. 그런 게 아니라 친목 모임에 가입하라고 하려고. 언터쳐블(Untouchable)이라고 하는 건데, U급 GFG 능력자 모임이지.”

션은 숨을 삼켰다. 놀란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완전히 태연한 척하는 건 별로 쉽지 않았다. 그가 놀라는 것이 흐뭇한 듯 준형이 만족스럽게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게 모임으로서 성립합니까?”

“지금까지 회원 수는 전 세계에 12명이고 네가 가입한다면 13번째야. 조건은 U급의 GFG 능력자로서 자기 능력을 컨트롤 할 수 있고,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을 것.”

“13명……. 생각보다 많군요. 협회에 알려지기로는 열 명 안쪽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능력자도 있으니까.”

준형이 빙글빙글 웃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등록하지 않아도 알려지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해. U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날카로운 송곳이 가득 솟아 있는 철구와 비슷한 거니까. 아무리 주머니 속에 깊숙이 숨으려 해도 어느 쪽에서든 드러나지 않을 수 없어. 센터가 없는 제3세계의 열악한 소수 부족 출신이라 해도, 컨트롤이 가능한 채로 성인이 되는 것에 성공한다면 어떻게든 알려지게 되어 있지. 그렇게 해서 끼리끼리 알고 지내다 보면, 뭐, 한 세상 혼자 사는 것보다 서로 돕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되거든.”

“그렇습니까.”

“규약은 세 가지야. 첫째, 상호 불가침. U급의 능력자를 해칠 수 있는 건 같은 U급의 능력자뿐이니까.”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쓰일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나쁘지 않은, 어찌 보면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가 끄덕이는 것을 본 준형이 파안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너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이건 어마어마한 일이야. 언터쳐블의 회원 대부분은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어. 애초부터 U급 능력자가 자유를 가진다는 것부터가 세력을 형성했다는 소리라고. 아니면 기존 세력에게 철저하게 보호를 받든가. 너처럼.”

“저요? SSB가 저를 보호하고 있다는 소리입니까?”

“아니, 엘리엇이.”

준형이 명쾌하게 내뱉었다.

“엘리엇이 아니라면 제일 먼저 SSB가 손을 댔겠지. 아, 물론 알아. SSB의 런던 지부 따위는 그냥 좀 심력을 소비하면 하루 이틀 만에 없애 버릴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영국과 전쟁이잖아? 넌 런던에 사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왕실을 지배하고 내각을 장악한 후에 영국군의 작전권까지 손에 넣었다 치자고. 그다음에는 암살자가 오겠지. 대충 3백만 파운드에 경비를 전부 대준다면 나도 그 의뢰를 받을 용의가 있어. 네 능력의 비거리는 측정 불가능이지만 타기팅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이 필요하지. 즉, 2㎞ 밖에서 머리를 날려 버리거나 건물째로 폭발시켜 버리면 사태는 종료. 여기까지 한 달이면 충분해.”

“시뮬레이션을 해 보신 것 같군요.”

“견적 의뢰가 들어왔거든. 알버트 왕자로부터. 견적만 뽑아 주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으니까.”

준형이 빠앙 하고 션의 머리를 쏘는 흉내를 내고는 말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있어. 그러니까 왕실은 너를 적대할 수 없고, 미래의 불안 요소로 생각해서 미리 제거할 수도 없지. 제거할 수 없는 U급 능력자와는 친분을 유지하는 게 제일이고, 최소한 타국으로 넘어가지는 않도록 막아야 해. UAE의 정보부가 다이아몬드를 싸 들고 너와 접촉하는 걸 막으려고 나에게까지 의뢰를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야.”

“그렇, 군요.”

“그 정도로 네가 위협적이라는 거야. 다시 말해서 포섭할 수 없다면 배제하는 것이 기본. 그게 SSB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지.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그건 아직 너에 대한 정보가 모자랐기 때문이고 앞으로는 달라질 거야. 그리고 나는 언터쳐블에 가입해 있으니까 엘리엇이 널 보호하라는 의뢰를 하더라도 U급 능력자가 나서면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게 돼.”

션은 침묵했다.

“지금까지의 행보로도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제 의사는 충분히 전달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사람은 다 자기 기준으로만 살잖아. 세력을 키우는 것에 인생을 건 놈들은 절대로 널 이해 못 해. 아마 엘리엇의 애인으로 있는 것도 그를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헤리퍼드의 세력을 빼앗아서 영국을 거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현실적으로 너는 이미 엘리엇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그걸 방비할 방법은 다른 능력자들과 친분을 쌓는 것뿐이라고 준형은 말했다. 상호 불가침 조약을 어기면 나머지 회원이 모두 같이 배신자를 제재한다. 능력의 상성이 있으니까 그 누구도 혼자서 다른 전부를 죽이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미 컨트롤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네가 처음 발현했을 때 U급이었다는 건 센터에 정보원이 있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거고, 그간 정기적으로 한 번씩 체크하던 조직도 있었지. 네 능력은 범용성이 높아. 욕심을 안 내는 쪽이 이상해. 가입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러려면 자위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살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해.”

“좋습니다.”

션은 찬찬히 정리했다.

“언터쳐블은 상호 불가침. 제이 씨는 물론이고 다른 U급 능력자를 비롯하여 그들의 세력도 접근해 오지 않게 되겠군요. 그리고 그 세력의 범위가, 제가 엘리엇 씨 덕분에 사실상 영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 규모라고. 즉, 12인……. 산술적으로 생각한다면 12개 국가분의 안전이 확보되는 거군요. 게다가 세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U급 능력자가 자의이든 고용이든 저를 위협할 가능성 역시 사라지고.”

“그렇지. 어차피 같은 U급이 아니라면 위험할 일이 없는 게 현실이니까.”

E급이 10명쯤 팀을 이루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착각에 빠진 사람도 없지는 않다며 준형이 웃었다.

“제이 씨는 어떻습니까? 엘리엇 씨는 제이 씨의 그 ‘세력’에 속해 있나요?”

“나는 아니야. 엘리엇이 내 상사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선순위 의뢰인일 뿐인데. 애초부터 내 능력은 단독으로 행동할 때 유의미한 종류이니까 조직을 만들어 봐야 아무런 가치가 없지.”

그러나 사람의 위험도로 따지자면 아마 수위에 속해 있을 거라고 션은 생각했다.

“두 번째 의무는 무엇입니까?”

“1년에 한 번 정기 모임에 참석해야 해. 한두 해 정도는 이유가 있으면 빠질 수도 있지만, 세 번 이상 연속해서 빠지면 자동으로 탈퇴되지.”

“상식적인 이야기로군요.”

“그렇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친목 모임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니까.”

“세 번째는?”

“회비.”

“회비요?”

“그래. 모임이 유지되려면 회비를 내야지. 월급쟁이는 연봉의 5%.”

“많군요. 시시한 조건인 줄 알았더니.”

“자영업자는 5만 달러씩 내고 있으니까 참아. 클럽하우스 운영에 쓰고 있어.”

“클럽하우스요?”

“베를린에 있지. 완벽한 리스트레인 룸을 맛볼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네 능력에 폭발 안 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준형이 먼저 변명을 덧붙였다.

“어떻게 할래?”

“생각해 보겠습니다.”

“빨리 결정해야 할 거야. KH47의 사주가 배에 들어와 있거든.”

“KH47이요?”

“미국에 있는 용병 회사인데, 주로 해상의 안전을 지키고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하는 미국 기업을 보호하지. 일부 부대는 전쟁에도 보내고. 여하튼 사주인 맥 그 사람, 신체 강화계의 U급 능력자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이상한 느낌이 감지되었다. 작은 소란과 삐리릿 하는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션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준형이 “벌써 알았어? 역시 대단한데.”라고 싱긋 웃었다.

“좌우명이 세계 정복이야. 널 포섭하겠다고 무거운 엉덩이를 직접 들었으니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SSB의 의뢰는 너한테 접근하려는 모든 외부인을 체크하고 특히 정보부나 군 관계의 인사가 접촉하는 것을 막으라는 거지만, 언터쳐블 규약에 따라 나는 저 인간을 공격할 수 없거든.”

모히토 잔을 내려놓고 준형이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게으르게 말했다.

“선박의 일정이 시작될 때까지 SSB 요원들 똥줄이 타겠군. 과연 어디까지 막아 낼 수 있을지 흥미가 있는데.”

“음. 제가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션은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 모임에 가입하기 전에 힘을 좀 보여 주는 게 보탬이 되겠죠?”

“싸움이 안 될 텐데. 신체 강화계라니까? 정신을 제압하면 끝난다지만, 네 동체시력이 거기까지 따라가겠어? 단거리 측정하려다가 돌풍을 일으켜서 건물이 날아가는 괴물이라고. 나라면 절대 2㎞ 반경 안에 안 들어가.”

“선박의 일정이 시작될 때까지가 저 사람의 타임 리밋이라면, 이렇게 하면 되겠죠.”

션을 중심으로 소리 없는 파문이 강력하게 배 전체에 번져 간다. 각성효과이다. 잠든 사람들도, 잠들기 위해 준비하던 사람들도 일제히 말똥말똥해지면서 선박 전체가 깨어났다. 물론 17층의 안락한 스위트룸에까지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션이나 준형이나 선박 안의 사람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오감을 사용할 필요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수천 명이 각성하는 현상은 상대의 표층 심리를 읽는 준형의 정신에 데미지를 주었다.

“으.”

준형은 두통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운항에 관계하는 승무원들까지 잠을 못 자서 수면 부족이 되면.”

“10분 안에 다시 잠들 거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런 능력을 보여 주면, 더 좋다고 달려들걸.”

준형이 그렇게 말하고 자기는 이만 가겠다며 현관 쪽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거실에 혼자 남은 션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리는 자가 있다면 잠을 자지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적어도 하루 정도는 여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온 배에 각성 효과를 뿌렸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 엘리엇은 여전히 푹 잠들어 있었다. 션은 다시 바지와 셔츠를 벗고 알몸이 되어 엘리엇의 옆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엘리엇이 고르게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한다.

머리칼을 가만히 건드리자 엘리엇이 조금 잠이 깬 듯 눈꺼풀을 희미하게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션…….”

“주무세요. 아침까지는 아직 멀었으니까.”

조용히 귓가에 소곤거리자 엘리엇이 긴 한숨을 내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시 잠 속으로 떨어졌다. 맨몸과 맨몸의 접촉은 어쩌면 이리도 기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션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날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