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July. (30/52)

6. July.

이달에 새로 산 커피 머신에서 뜨거운 우유 거품이 뿜어지는 것을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있다가 션은 베이컨을 태울 뻔했다.

여름 햇살은 뜨거워서 벌써부터 집 안 깊숙한 곳까지 환하게 들고 커피 향은 가득하고 침실에는 애인이 잠들어 있으며 날짜는 토요일이었다. 이것이 사람 사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라떼를 들고 싱크대로 돌아왔다. 적당히 익은 베이컨 위에 미리 썰어 놓은 양배추와 브로콜리, 파프리카를 더하고 굴 소스를 약간 넣는다. 미리 삶아 놓은 계란을 꺼냈다가, 그러지 말고 아예 오믈렛을 할까 생각하며 그는 잠시 커피를 든 채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버터가 없다. 아침부터 베이컨을 꺼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계란을 까서 잘라 두고 이번에는 빵을 꺼내는데 엘리엇이 방에서 나왔다. 웃옷도 걸치지 않고 바지만 주워 입은 채 나온 것을 보니 아직 잠이 덜 깬 듯했다.

“식사 준비는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라고 말했는데, 엘리엇은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가와 치즈를 썰고 있는 그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엘리엇 씨, 감기 걸려요. 에어컨 켜져 있으니까.”

달래듯이 말했지만 엘리엇이 투정을 부리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션은 하마터면 치즈가 아니라 손가락을 썰 뻔했다.

얼마 전부터 엘리엇은 어리광이 늘었다. 원래도 침대에서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편이었으나 정말로 침대에 한정된 일이었는데, 차근차근 침실, 욕실 순으로 범위가 넓어져 간다 싶더니 지난달 션의 생일을 기점으로 단둘이 있는 집 안에서는 어디서든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캐번디쉬의 아파트와 션의 집에 한정된 일이다.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에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순간조차 어색해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일상사와 분리된 공간에서만 그럴 수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기쁜 일이다. 기쁘다 못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기분이라서 션은 허리에 감긴 엘리엇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신음했다. 엘리엇이 어깨에 턱을 걸치며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냄새가 아침부터 거창하군.”

“준비해 놓을 테니까 씻고 오세요.”

“응…….”

대답하듯이 중얼거리면서도 엘리엇은 팔을 풀지 않았다. 션이 작게 자른 치즈를 입에 넣어 주자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숙여 어깨에 입 맞춰 온다. 따뜻한 체온이 등에서부터 번져 와서 숨이 막혔다. 금세 곤란해졌다. 특히 다리 사이가.

“엘리엇 씨.”

말꼬리를 늘이며 슬쩍 몸을 빼내려 하자 엘리엇의 손이 아랫배에서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션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제가 아침부터 식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게 하고 싶으세요?”

그러자 꾸물꾸물 손이 물러난다. 씻고 오라고 다시 재촉하자 엘리엇이 그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 모를 태도로 동문서답했다.

“빨아 줄까?”

이번에야말로 물리적인 자극도 없이 션은 속옷을 적실 뻔했다. 참아 낸 자신의 인내력이 대단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한 시간 후에는 비서가 마중 올 것이다. 그때까지 밥도 안 먹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탐할 수는 없다. 아랫도리는 그러고 싶다고 굴뚝처럼 우뚝 서서 자기주장을 하려 들었으나 그는 그것보다는 손을 잡고 아침을 먹는 쪽이 좋았다. 처음부터 섹스보다 대화가 아쉬웠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행선지가 프랑스라고 들었는데, 그러면 비행기 안에서 식사를 제대로 할 만큼 먼 거리가 아니다. 십중팔구 간단히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때울 텐데, 그것은 자신이 싫었다.

이제는 붙잡기 위해서 쾌락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다. 션은 그것이 제일 행복했다.

“식사하고 나갈 준비 하셔야지요. 10시 반까지 공항으로 가셔야 한다면서요.”

“하아.”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가기 싫어하는 태도가 역력해서 션은 기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상냥한 얼굴로 다시 씻고 오라고 달래자 그가 무뚝뚝한 얼굴이 되더니 순순히 팔을 놓고 돌아섰다.

션은 불편한 고간을 가라앉히기 위해 딴생각을 하면서 접시를 꺼냈다. 아무리 해도 솜씨가 늘지 않는 홍차 대신 오렌지주스를 컵에 따르고 베이컨 야채 볶음과 삶은 계란을 올렸다. 빵과 치즈를 따로 차리고 나자 보기에 제법 그럴듯해서 그는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지난 덕에 발기는 가라앉았다. 커피를 마저 마셔 버리고 기다리자 엘리엇이 곧 욕실에서 나왔다. 말끔해진 얼굴에 선명한 이성이 돌아와 있어서 션은 조금 아쉬워졌다. 자신이 휴일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엘리엇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게 아깝다. 그는 다다음주 수요일에나 돌아온다.

“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커프스링크를 채우면서 엘리엇이 식탁에 앉았다. 션은 턱을 괴며 그를 바라보았다.

“열흘이나 엘리엇 씨를 못 본다니까 우울해서요.”

“같이 가도 괜찮은데…….”

“월요일에 출근은 해야죠.”

“그리 먼 거리도 아니잖나.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아침 일찍 돌아오면 될 텐데.”

“엘리엇 씨는 공식 일정이잖아요. 절반 정도는.”

“혼자서 호텔에서 기다리는 건 싫은가?”

“어딜 가시든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구는 것보다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쪽이 빨리 안 질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리엇이 주스 잔을 입에 대다 말고 이상한 얼굴이 되어 션을 쳐다보았다. 션은 킥 웃으면서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자신에게도 정말 여유가 생겼구나 하고 놀라운 기분이 된다. 질리는 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완전히 빈말도 아니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어디든 함께 가서 밤에 잠깐 얼굴만 보더라도 온종일 호텔에서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 그의 측근들에게 빈축을 사거나 사회적인 입지에 해를 입힐 생각은 없다.

“거리를, 둘 생각인가?”

엘리엇은 션이 치즈를 발라서 건넨 빵을 두 조각이나 먹고 나서야 되물었다. 굳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진지하게 생각한 것 같아서 션은 미소 짓고 말았다.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도 약속이 있고요.”

“음. 그렇지. 오늘 디너 슈트의 가봉일이었지? 애쉬튼을 보낼까?”

“그냥 밀리랑 같이 갈 예정입니다. 궁금해해서요.”

“그래.”

이번에도 엘리엇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왜요? 제 디너 슈트 모습을 처음 보는 게 엘리엇 씨가 아니라서요?”

“음, 아니. 베일리 양의 동거인은 그래도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했네.”

반은 농담이랍시고 말해 본 건데, 엘리엇은 반응하기는커녕 웃지조차 않았다. 션은 조금 우울해져서 포크를 전투적으로 놀려 브로콜리를 찍었다.

“타일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던데요. 무슨 여자 친구의 옷 쇼핑에 따라가는 일처럼 생각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태평하군. 자네가 이렇게 매력적인데.”

“지금 건 하트에 꽂혔어요.”

션은 갑자기 밝은 기분이 되었다. 그가 환하게 웃자 엘리엇은 이번에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내가 자네를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질투를 받는 건 역시 다르죠.”

“음. 지금 내가 질투를 한 건가?”

“요만큼?”

션이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쌀 두 톨만큼 벌려 보였다. 엘리엇은 웃었다.

“걱정은 하고 있지 않다네.”

“그래서 서운해요.”

“그녀는 좋은 사람 같더군. 센스도 좋고. 이거 무척 맛있어.”

엘리엇이 베이컨 야채 볶음을 칭찬했다. 션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기름질까 생각했는데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고 보니 알랑 부인이 둘째를 낳았다고 했지요?”

“음. 이번에는 사내아이라더군.”

“보러 가실 거지요?”

“파리에서 사흘 정도 묵을 생각이라네. 아기도 보고, 이네도 봐야지.”

“엘리엇 씨는 아이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특별히 그렇지는 않아. 아일라의 아기니까 보살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대하기 어려워서…….”

“모든 사람이 아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이네는 곧 귀여워지실 겁니다. 알랑 부인을 쏙 빼닮았으니까요.”

그러자 그가 웃음 지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군.”

“출산 선물을 준비해 놨는데 엘리엇 씨가 전해 주세요.”

“그것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자네는 참 다정하군.”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배달을 시키는 대신에 엘리엇에게 전달시키려고 한 것이었으므로 션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자 엘리엇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듯 따뜻하게 그의 손등을 감쌌다.

둘 모두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식사는 앗 하는 사이에 끝났다. 엘리엇은 아쉬운 듯이 접시를 내려다보았고, 션은 그런 엘리엇이 아쉬워서 바라보았지만 빈 접시가 다시 차는 것도 아니고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벌써 9시 40분이었다.

엘리엇은 잘 먹었다고 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식탁에서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션은 남아 있는 빵 쪼가리에 마저 치즈를 바르면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길어야 2주의 이별인데도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먹다 말고 입을 주스로 헹구고는 드레스룸까지 엘리엇을 쫓아갔다.

너무 귀찮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발기척이 들린 듯 엘리엇이 뒤를 돌아보았다. 션은 그대로 그의 팔목을 잡고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겹쳤다.

키스는 해도 해도 달고 체온도 언제까지라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좁은 드레스룸에 갇힌 채 단둘이 죽을 때까지 있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면서 션은 그를 품 안에 가둔다. 자유로운 엘리엇의 다른 팔이 그의 등을 안았다. 가쁜 숨을 내쉬려 입술을 떼었다가도 결국 멈추지 못하고 어느 쪽에서든 혀를 내밀어 상대의 입술을 빨아 들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멀리 벨 소리가 들렸다. 션은 몸을 굳혔다. 보내야 할 때였다. 엘리엇이 취한 듯이 눈을 내리감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리고 잠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매무새를 바르게 했다.

“가야겠군.”

“네.”

“전화하겠네.”

“잊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할 테니까요.”

션은 그의 손끝에 한 번 입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엘리엇이 서둘러 재킷을 걸치고 지갑을 찾아 주머니에 넣다가 “아.”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카드 한 장을 꺼내서 션에게 내밀었다.

“주고 가려고 했는데 깜박 잊을 뻔했어.”

션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고 받지도 못한 채 그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난처해진 채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슈퍼 카를 선물 받는 것과 신용카드를 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므로 안색을 굳히자 엘리엇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여름휴가 비용을 전부 내가 지불하는 것에 자네도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디너 슈트도 맞춰 주시고, 새 구두와 타이도 사 주셨죠. 그거야 그렇지만, 이런 건…….”

“그것 말고도 필요한 게 많을 거 아닌가. 가능한 한 애쉬튼이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자네가 직접 사야 할 것도 있을 테고. 그러니까 쓰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테니까 계속 갖고 있도록 해.”

“엘리엇 씨, 제 생각에 이건, 음, 지금 바로 결정하기에는 곤란한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고작해야 돈 같은 게 우리 관계에 지장이 될까?”

“저와 엘리엇 씨 사이에서는 아무 상관 없겠지만.”

과연 그럴까 생각하면서도 션은 어렵게 대답했다. 그러자 엘리엇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보기에 그렇지 않다는 건 나도 안다네. 그래서 더 그래. 이제부터 자네가 들어갈 곳은 타이가 비뚤어진 것조차도 비난의 씨앗이 되는 사회일세.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지 않도록, 뭐든지 좋은 것으로 준비하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응?”

달래듯이 다정하게 되묻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션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카드를 받아 들었다. 상류 사회에서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수준의 물건을 사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차가운 카드의 감촉에 손가락이 아렸다.

“그럼 차라리 같이 가서 사 주세요. 그렇다면 저도 기꺼이…….”

“자네는 미혼이었고 어머니를 모시고 산 적도 없어서 모르나 본데.”

엘리엇이 웬일로 알아보기 쉬운 쓴웃음을 지어서 션은 당혹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세상에서 쇼핑이 제일 싫다네. 특히 크리스마스 쇼핑과 여름휴가 준비가.”

“네……?”

엘리엇이 뭐가 ‘좋다’라고 말하는 일도 좀처럼 없지만, 이렇게까지 ‘싫다’라고 의사표시를 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라서 션은 놀라서 되물으려 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올까 겁이 나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는 홱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수행 비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션에게도 목례를 건넸다.

“출발하실 시간이십니다.”

“다녀오겠네.”

션은 머뭇거리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엘리엇이 약간 난처한 얼굴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맞춤을 되돌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뒤에 남은 션은 미묘한 기분이 된 채로 받은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심플한 은색의 카드에는 번호와 더비 은행의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다. 플래티넘이었다. 등급이 아니라 재질이. 오른쪽 모서리에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션은 그게 진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큐빅일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생각해 보았다가 부질없어져서 그만두었다.

* * *

왜 엘리엇이 여름휴가 준비를 위한 쇼핑과 크리스마스 쇼핑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션은 밀리를 만나고 세 시간 만에 완벽하게 이해했다. 왜 타일러가 그에게 밀리와의 쇼핑을 떠넘겼는지도.

“쇼핑을 한다.”라는 말을 들은 밀리는 단숨에 전투 모드가 되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8시간 동안 네 군데의 디자이너 숍과 두 곳의 백화점을 돌았다. 처음으로 물건을 결제한 것은 35파운드짜리 선글라스로, 백화점 두 바퀴째의 일이었다. 처음 그 선글라스를 봤을 때 밀리는 “저렇게 예쁜 게 있다니, 사야겠어!”라고 말했고, 스무 개의 선글라스를 더 본 후에 결국 그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 션의 팔에는 밀리의 것과 자기 것을 합쳐 쇼핑백 20여 개가 들려 있었다. 이 두 배만큼이 이미 차 트렁크에 꽉꽉 들어차 있다. 배달받기로 한 것도 있으므로 실제 사들인 물건은 더 많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지치지도 않는지 그녀는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한 시간쯤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외곽의 다른 백화점에 가 보자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뭘 더 살 작정인 건지 션은 공포를 느꼈다.

밀리와 같이 쇼핑을 하러 나온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전에는 가게 여러 곳을 돌아보긴 했어도 대충 한 바퀴 안에서 해결해 주었고, 피곤하다, 지친다, 하면 알았다면서 중간 휴식을 넣었다. 잠깐 티타임을 갖는다거나 적당히 하고 다음에 다시 만난다거나. 

그러나 관심을 둔 남자와 그냥 친구 사이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션은 자기를 ‘밀리의 여자 친구’라는 포지션에 넣은 것이 타일러가 아니라 밀리 자신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솔직히 더 못 걷겠다.”

차라리 마라톤을 완주하는 쪽이 낫겠다. 진심으로 생각하면서 션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있어서 쇼핑이라는 것은 필요한 물품을 취급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권하는 제품을 사고 나오는 것이었다. 옷도 예외는 아니다. 눈에 띄는 첫 번째 가게로 들어가서 디스 플레이된 것을 그대로 사든가 권유받은 것을 싹 사 와서 대충 맞춰 입는 식으로 생활해 왔다. 그렇게 해도 못났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이번에도 엘리엇의 체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밀리가 “지금부터가 딱 좋은 물건이 나올 때인데.”라는 얼굴로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며?”

“그러기는 했지만…….”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모든 걸 다 이쪽에서 알아서 구비해 놓을 테니 몸만 오라는 이자벨의 제안을 수락했을 것이다. 션은 그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그녀의 통제 욕구를 만족시켜 줄 작정도 없고, 주도권을 잃은 채 질질 끌려갈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엘리엇의 연인이 될 작정이었지, 아랫사람들이 곱게 꾸며 옆구리에 달아 놓은 위안거리가 될 작정은 없었다.

애쉬튼이나 벤에게 부탁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헤리퍼드 내부에서 이미 그의 존재를 두고 파벌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리가 될 때까지 독립성을 유지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을 사려면 직접 쇼핑해야 했다. 엘리엇이 필요한 것은 뭐든지 말하라고 했다고 해서 양말이니 면티 같은 것까지 전속 테일러에게 맞춤으로 부탁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신분에 과하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그러나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브랜드 품을 구비하고 싶다는 션의 바람을 듣고, 그런 거라면 맡기라고 밀리는 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처음에는 믿음직했었다. 한, 두 시간 정도는.

역시 속옷 20벌에 양말 30켤레, 선글라스 9개와 캐리어 5개는 지나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옷은…… 세는 것도 포기했고. 션은 한숨을 내쉬며 미끼를 던졌다. 뇌를 쇼핑에서 다른 쪽으로 전환시키려면 먹이가 필요할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게 어때? 배도 고프고.”

“그래? 하긴, 늦긴 했네. 푸드 코트에서 간단히―.”

“길 건너에 스피로 호텔이 있던데.”

“내가 왜 이유도 없이 너랑 5성급 호텔 디너를 먹어? 싫거든요?”

“아니야. 엘리엇 씨가 너한테 식사 대접 한번 하라고 했었어.”

션은 절박하게 핑계를 쥐어짜 냈다. 푸드 코트에서 핫바를 물고 다시 1층을 돌게 된다면 토하고 말 것이다. 밀리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공작님이? 나한테? 왜?”

“신세를 졌으면 한 번쯤 대접을 해야 한다고 전부터 말씀하셨어. 왜, 전에, 내가 끌려갔을 때 전화해 줬던 일 때문에.”

“그래?”

밀리가 솔깃했다. 이유가 있으면 되는 모양이다. 션은 거의 억지로 웃었다. 엘리엇은 지나가는 말로 말했고, 굳이 그런 걸로 식사 자리를 마련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서 밀리에게는 전한 적도 없지만, 지금은 매우 고마운 핑곗거리였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밀리가 발그레한 뺨으로 설레게 말했다.

“아, 어쩌지? 나 그런 데에 그냥 갈 상황이 아닌데.”

“왜? 지금도 괜찮은데.”

“말이나 돼? 이왕 스피로 호텔 레스토랑에 가려면 제대로 된 옷차림을 해야지! 잠깐만 기다려 봐. 아니, 오래 기다려. 아예 주차장에 가 있어. 갈아입고 갈게.”

밀리가 서둘러 션의 팔에서 몇 개나 되는 쇼핑백을 내려 이것저것 바꿔 담더니 한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는, 예약 안 해도 자리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해 두라고 주의까지 주고 총총 복도 저쪽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긴장이 풀려서 몸에 찌르르 피가 도는 느낌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거래처 대표이사가 갑자기 프레젠테이션에 끼어들었을 때도 이것보다는 덜 피곤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대로 집에 가서 침대에 쓰러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도 드레스 코드가 있는 레스토랑에 갈 차림새는 아니었으나 남자는 비교적 해결이 간단하다. 사들인 옷더미 중에 캐주얼과 포멀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재킷을 꺼내 놓고, 나머지 쇼핑백들을 뒷좌석에 채워 넣었다.

트렁크에는 이미 빈 공간이 없고 뒷좌석도 가득하다. 모처럼 휴일 외출이라고 람보르기니를 끌고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2주간의 여행에 이렇게 많은 옷과 잡동사니가 필요한가 의문을 느낀다. 사 두면 앞으로도 쓰긴 할 테지만.

운전석에 앉아서 우선 그는 스피로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자리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이번에는 타일러에게 SOS를 친다.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 나오라고 말이다. 타일러는 몹시 게으른 목소리로 이해심 많은 남편처럼 “괜찮아. 디너 정도야, 뭐.”라고 말했지만, 션 쪽이 괜찮지 않았다. 사 줄 테니 나오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뒤에 전화를 끊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이번에는 엘리엇에게 걸었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션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때마침 밀리가 돌아왔다. 비즈니스 정장도 아니고 데이트용 원피스도 아닌 매우 어중간한 차림새였다. 션은 패션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밀리가 이상하게 입었다는 건 확실했다.

“자리 있대?”

달칵 조수석 문을 열면서 그녀가 물었다.

“있다더라. 옷이 왜 그래?”

“어쩔 수 없잖아! 스피로에서 디너를 먹는데 후줄근하게 입을 수는 없고 일 이야기도 아닌데 정장도 그렇고, 그렇다고 너랑 들어가는데 데이트하는 것처럼 차릴 수도 없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지 그랬어. 타일러한테도 오라고 했는데.”

“나 죽어도 재력과 권력을 다 가진 상급 귀족에게 질척한 오해를 살 생각은 없으니까.”

“오해라도 해 줄 사람이면 내 심적 고통은 지금의 십 분의 일도 안 될걸.”

밀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네 심적 고통은 주로 자업자득이잖아. 누가 누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다는 건지.”

“내가 왜 자업자득이야?”

“물어보면 끝날 일을 괜히 이것저것 다 마음에 담아 두고 고민하는데 그게 왜 자업자득이 아니야? 문자에 답이 반나절은 넘어서 왔다, 전화 거는 횟수에 차이가 난다, 저녁 식사를 반밖에 안 먹었다. 쪼잔하게 그게 뭐야? 데일리 메일에 공작의 여자 친구라는 금발 미녀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찍힌 스캔들이 난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고. 공작님은 너 그러는 거 알아?”

“…….”

션은 입을 다문 채로 시동을 걸었다. 밀리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그래도 아쉽다. 이렇게 눈 보신할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닌데.”

내가 엘리엇도 아니라 네 눈 보신을 위해서 옷 수백 벌을 벗었다 입었다 해야 하는 거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같이 나온 상대가 엘리엇이라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라도 창고째 쓸어다가 눈앞에서 갈아입을 작정도 있지만, 밀리는 아니다. 밀리의 여자 친구로 분류된 이상, 자신도 밀리를 남자 친구로 분류하기로 결정한 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됐어.”라고 짧게 끊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너 이번 것도, 공작님이 ‘대접하겠다’라고 말하니까 네가 ‘알아서 할 테니 됐다’고 말하고 모른 척했었지? 그게 언제 일이라고 이제 와서.”

“…….”

“견제할 사람을 견제해야지. 아무한테나 날 세우지 말고. 뭐, 나도 그분 만나는 건 무서워서 싫으니까 괜찮지만, 너무 그러다 미움받는다.”

“엘리엇 씨의 경우, 미워한다기보다는 귀찮아할 것 같긴 하다…….”

“어찌 됐든 마음이 멀어진단 소리잖아.”

“하아…….”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에 션이 절망적인 얼굴을 했다. 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러포즈 링 문제로 한 번 그녀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고 나서 션은 이제 더 숨길 게 없다고 속이 편해졌는지 툭하면 연애 상담을 해 왔는데, 그 대부분이 옆에서 보기에는 매우 하잘것없다 못해 시시껄렁한 고민이었다. 그것도 런던으로 돌아와서부터는 애인 자랑인지 고민인지 분간이 안 가게 되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가 알고 있던 친절하고 스마트 하지만 어딘가 냉정한 구석이 있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가 버렸느냐고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은 심경이었다. 본성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본 덕분에 엷었던 연심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없다. 이 남자는 답이 없다고 3년 전의 자신에게 소리 질러 알려 줄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애초부터 이 녀석을 다시 오브라이언으로 스카우트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재계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표이사인 풀러가 춤을 추며 기뻐했으니 완전히 자기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처음에 요청하면 아마 간단히 재계약할 수 있을 거라고 언질했던 것은 밀리 자신이었다. 

설마하니 회사에서도, 퇴근 후에도 남의 연애사를 듣고 툭하면 징징대는 꼴을 보게 될 줄 알았나. 여자 친구들 중에는 간혹 이런 타입이 있지만, 남자 중에는 본 적이 없어서 방심했다. 그래도 얼굴 하나는 쳐다만 봐도 여전히 좋았으니 자신의 얄팍한 욕망에 그녀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흥미진진하긴 했다. 귀족과 연애하는 친구는 흔치 않다. 그것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명성을 유지해 온, 왕위 계승권까지 거론되는 진짜 전통 있는 공작과.

그녀는 가십을 사랑했다. 썸 타는 남자와 분위기 있는 파스타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것인가, 아직 엠바고에 걸려 있는 가십에 대해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샌드위치를 우적거릴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하면 고통스럽게 고민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잘해. 특히 그 전 부인이라든가, 이번에 친구들 만나도 그렇고. 너무 질질 달라붙으면 금방 질리는 사람 많잖아.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니까.”

“엘리엇 씨가 그런 걸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한발 물러서면 ‘아, 이제 식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이별 준비 같은 걸 할걸.”

“그렇게 되기 전에 적당한 순간에 도로 잡아야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는 넌 타일러랑 얼마나 잘하고 있기에.”

로비 앞에 차를 세우자 벨 보이 둘이 달려와 한 사람은 키를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문을 열었다. 좋은 차가 좋긴 좋다고 밀리가 혼잣말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예약을 하지 않았으므로 좋은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거의 문가였고, 테이블 간격이 놀랄 만큼 좁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아니라 음식을 먹으러 온 두 사람에게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이었다.

“쇼핑 잘해 놓고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해?”

“정말 끔찍하게 피곤하다.”

“그것만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한숨 몇 번 쉬었는지 알아? 카드 때문에 그래?”

션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몇 번째 한숨인 거냐고 밀리가 타박했다.

“아무리 써 봐야 저번에 그 페라리만 하겠어? 타일러가 기절하려고 하던데. 그 차, 80만 파운드도 넘는 거라며.”

“그래도 그건 선물이고.”

밀리가 손을 내밀었다. 카드를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다. 션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주었다.

“이것도 비슷하잖아.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있고.”

“커프스링크라든가, 넥타이핀이라든가, 그런 거라면야 기꺼이 받았겠지. 처음으로 받은 귀금속이 신용카드라니 기분이 정말 이상해.”

자기 돈으로 엘리엇의 ‘격’에 맞추는 것은 절대로 무리이다. 션은 물론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내심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으나,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엘리엇이 그를 사교계에 소개하겠다는 것이나 자신의 파트너로서 적절한 차림을 하라고 한 것은 정말 기뻤지만, 지갑을 무겁게 만드는 카드를 생각하면 무척 무능력해진 것 같은 기분에 좀 무력감마저 들었다.

“이왕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이라면, 몸에 착용할 수 있는 게 좋은데.”

“사치스럽긴.”

“맞아. 사치스럽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반대로 너라도 말이야, 여행을 같이 가는데 네 애인이 가난해서 입고 갈 옷이나 가방이 없다고 고민하면 그 정도는 사 줄 수 있는 거 아냐. 친구들한테 무시 안 당하게 이것저것 챙겨 줄 거고.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무능력하고 못났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냥 진짜로, 격의 차이 같은 게 느껴져서.”

“그렇게 치면 탯줄부터 다른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

“알아.”

“이왕이면 공작님이랑 같이 오지 그랬어? 안심하고 내세울 건 얼굴하고 순정밖에 없는데, 돈 쓰는 보람을 느끼게 해 주면 되잖아.”

“너 요즘에 무지 신랄하다.”

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유는 사실 션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밀리는 본래 이런 성격이다. 그간 자신에게 상냥했던 이유는 호감과 애틋함을 증폭시킨 GFG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니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렇게 내뱉어 주는 게 고맙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남녀를 모두 합쳐서 진짜로 긴장 풀어도 되는 친구가 생긴 건 처음인지도 몰랐다.

“딱히 내세울 게 얼굴……. 맞나.”

“우와, 겸손한 척도 안 해.”

“이야기는 해 봤는데, 거절당했어.”

“바쁘시대?”

“아니. 크리스마스 쇼핑과 여름휴가 준비가 싫으시다더라. 나보고 결혼을 안 해 봐서 모른다고 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공작 부인이 인생을 구가하며 사셨나 보구나. 부럽다.”

션은 새삼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밀리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왜, 뭐. 그야 관심 있는 남자가 인상 구기는 건 싫으니까 데이트할 때야 눈치 봐 가면서 하지.”

“타일러도 온 힘을 다해 거부하던데?”

“같은 집에서 살 정도면, 좀 다르고. 가정을 만드는 건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내 남자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것도 싫고.”

“왠지 좋게 들리는데.”

그러나 현실은 아픈 다리와 뻐근한 어깨와 바닥까지 빨린 체력이 남았을 뿐이다.

그때,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쳤다고 해서 굳이 쳐다볼 필요는 없었는데도 션이 시선을 준 것은 그 남자가 사람의 시선을 잡아당길 만큼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몸에 딱 맞는 슈트를 품위 있게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였다. 붉은 포켓치프가 얄밉도록 잘 어울렸다. 션이 똑바로 바라보자 씩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태도가 다소 경박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그 가벼움은 자신감에서 온다. 자신이 능력 있고, 매력적으로 보이리라는 자신감. 그리고 그럴 만해 보이기도 했다.

남이 자신감을 갖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션은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되지도 않은 플러팅 때문이 아니다. 그 남자가 매우 엘리엇의 취향일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사에 능숙하고 잘 놀 것 같은 얼굴에 늘씬한 허리와 긴 다리를 가진 남자를 이 세상에서 전부 제거하고 싶었다. 게이라면 더더욱.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행할 작정은 없으므로 그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타일러는? 언제 온대?”

“난 연락 안 해 봤는데. 기다려 봐.”

밀리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타일러는 받지 않는 듯했다.

“운전 중일지도 모르지.”

“음. 나한테 와 있는 연락도 없다.”

션이 핸드폰을 켜 보고는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입술과 별개로 눈썹이 살짝 처진다. 약간 웃음을 머금는 모습에 그녀는 무심한 척 미끼를 던졌다.

“공작님이 연락했어?”

“응. 멘느에서 위체가 소유의 고성을 미니어처로 만들 계획이 있는가 본데, 혹시 갖고 싶은 생각 있느냐고 하시네.”

방글방글 웃으며 그가 문자를 찍었다. 따분한 기분으로 밀리는 그가 멍청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알기 쉬운 얼굴이었나 싶다.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다. 적어도 3년 전에는.

런던을 떠났다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션의 표정은 매우 풍부해졌다. 그전에도 잘 웃고 잘 떠들고 사교성도 좋은 편이었지만, 대부분이 거짓으로 만들어 냈던 얼굴이었던 거라고 밀리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달라진 것은 그 징글징글한 연애 덕분이리라.

이제야 친구 같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정이라든가 호의라든가,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퍼부었던 여러 감정들이 정작 본인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는 것을 실감하여 입맛이 썼다.

그래도 밥은 맛있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저녁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나왔다. 밀리는 배를 두드리며 행복한 눈길로 디저트를 바라보았다. 우윳빛 물 위에 뜬 돛단배를 연상시키는 저 아름다운 디저트의 이름은 모르겠으나 엄청나게 맛있을 것만은 틀림없다. 손대기도 황송스럽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은 바닥까지 긁어서 해치우겠지. 

아, 행복하다.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지금부터 션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공작님이 문자 끝에 마침표를 찍어 보내지 않았다는 걱정이나 잘 자라고 작별 인사를 해 주었다는 자랑으로 세 시간 동안 떠들더라도 기꺼이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돛단배를 허물어뜨릴 각오를 마치고 포크를 들었을 때, 웨이터가 타일러를 안내해 왔다. 그는 수염조차 깎지 않은 얼굴에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타일러! 어디 오는지 알면서 얼굴이 그게 뭐야?”

“벌써 식사 끝났어? 션이 사 준다고 해서 왔는데.”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벌써 9시 반도 넘었는데. 면도도 안 하고.”

“어쩌다 보니까. 근데 자리 옮길 거야? 우와, 디저트 끝내주네.”

타일러는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 있는 얼굴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션은 이리 앉으라며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일어섰다.

“나는 먼저 들어갈 테니 둘이 마저 식사하고 가. 아직 라스트 오더 시간은 안 됐으니까. 아 참, 타일러, 밀리 짐이 제법 되는데 프런트에 맡겨 놓을게.”

“어, 고마워.”

션은 웨이터를 불러서 타일러 몫의 식사를 주문하고, 밀리에게 디저트 한 개를 더 시켜 주었다. 두 사람 다 물론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덕분에 공짜로 데이트한다고 타일러가 감사 인사를 하다가 밀리에게 찰싹 허벅지를 맞았다.

계산을 마치고 혼자서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흘끗 시선을 들자 아까의 그 남자였다.

“애인 아니었어?”

대뜸 반말이다. 션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남자를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 남자는 이번에도 혼자 멋대로 친근한 척하며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도도하네.”

“그쪽이 취향이 아닐 뿐입니다. 놓으시죠.”

노려보자 남자가 선선히 웃으며 손을 놓았다. 대신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션의 재킷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괜찮은 비즈니스가 하나 있는데, 생각 있으면 전화해. 개인적인 관심으로 전화해도 환영하고.”

그리고 산뜻하게 돌아서서 갔다. 션은 잠깐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명함을 꺼내 보았다.

“스피로 호텔 대표이사, 라이언 오브 세인트데이비스.”

뒷면에는 제법 멋들어진 글씨체로 적힌 전화번호와 서명이 있었다. 유난스레 자신감에 가득했든 어쨌든 이런 식의 유혹을 받는 것은 걷어찰 만큼 흔한 일이었다. 션은 명함을 구겨서 로비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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