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June.
리암이 말했다.
“요트지, 역시. 이제 곧 여름이고.”
앤드류가 말했다.
“요트는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잖아. 나라면 별장으로 하겠어. 엘리엇 너, 틴타겔 성 앞에 작지만 기가 막히게 예쁜 저택 하나 갖고 있잖아? 애인에게 선물하기에는 절호의 위치인데.”
알버트는 둘을 다 비웃었다.
“요트든 별장이든 다닐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 이야기지.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월급보다 많을 텐데.”
옳은 말이었으나, 그럼 뭐가 좋겠느냐는 말에 대답 대신 흥 하는 콧방귀가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자 아일라는 불만 가득한 부루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럼 여행이나 가든가. 지중해의 별장에 가서 요트를 타면 되겠네.”
그건 멋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년에 이미 실행한 바가 있었다. 엘리엇은 밸런타인에 훌륭한 충고를 해 준 바 있는 클로이를 찾아 준형의 바에 갔다. 그녀는 이야기를 듣고는 생긋 웃으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섹시한 속옷을 입고 스트립.”
씹고 있던 아몬드에 사레들렸다. 엘리엇은 어지간해서는 여자에게는 늘 예의 바르고 상냥한 얼굴로 신사도를 지키고자 했으나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그러나 클로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로 살짝 혀를 빼물고 의미심장한 얼굴을 만들며 윙크했다.
“남자라면 다 통해요. 효과는 백만 점. 30초 안에 천국행 티켓을 끊을 수 있다는 걸 제가 보장합니다아.”
“그건 클로이 양이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이기 때문이겠지.”
“제가 예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엘리엇 씨에게 매력이 없다면 션 씨가 엘리엇 씨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엘리엇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기가 그런 민망한 짓을 좀 한다고 해서 션이 경악해서 질려 한다거나 섰던 게 식을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적성이 다 따로 있다. 엘리엇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상상 정도는 해 봤다는 뜻이지만 말이다. 엘리엇은 이왕 그런 짓을 하려면 션처럼 몸매가 근사하고 다리가 긴 남자가 해 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처음에는 어이없는 얼굴로 듣고 있다가 이제 흥미진진한 표정이 된 준형이 물잔을 건네주었다.
“진짜로 좋아할 것 같아서 무서운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엘리엇은 몇 번 더 기침하여 목을 가다듬었다. 준형이 키들거렸다.
“찢는 전용의 레이스 팬티라도 사다 줄까? 물에 녹는 거라든가, 설탕으로 만든 것도 있어. 생각해 보니 맥케인이 좋아할 것 같긴 하네.”
세상에는 엘리엇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물건이 많이 만들어지는 모양이었다. 궁금한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품위 있는 신사로서 아직 변태의 길에 들어설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설령 사들인다 해도, 그런 건 한 살이라도 젊고 잘생긴 션이 입을 것이지 자신이 입을 일은 결코 없다.
상상해 보니 좀 좋긴 했다.
“거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준형이 헛웃음을 쳤다.
“농담이었지만, 진짜로 필요하면 사다 줄게.”
“됐네.”
엘리엇은 자기 얼굴이 붉어져 있지 않기를 바랐다. 클로이가 불쑥 그의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엘리엇 씨에게는 너무 고난도인 것 같긴 하네요. 그러면 요리는 어떠세요?”
“요리?”
“정성이 들어간 요리! 케이크 굽는 법이라면 가르쳐 드릴게요. 스테이크도 고기만 좋은 거면 실패하는 게 더 어렵고요.”
준형이 먼저 비웃음부터 흘렸다. 엘리엇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은 생각이기는 했다. 션이 뭔가를 만들어 줄 때마다 자신은 즐거움을 느끼고, 반대로 뭔가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차례 있다. 제대로 해 줄 수 있다면 분명히 기뻐해 주리라. 그러나 계란 프라이조차 제대로 뒤집지 못하는 그에게는 스트립만큼이나 고난도의 미션이었다.
“엘리엇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그냥 돈이나 써.”
“정성이 모자란 게 아닐까?”
“돈이 정성이야. 정성은 돈이지. 이퀄이라고. 정성 없이 돈을 쓸 수 없고 돈 없이 정성을 표할 수 없어. 애인이 구워 주는 반쯤 탄 스테이크에도 감동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호텔 스카이라운지를 통째로 빌려서 미슐랭 쓰리 스타 요리사의 풀 코스 디너를 먹여 주는 건 백 퍼센트 감동적이지. 거기에 백만 파운드짜리 다이아몬드를 첨부하면 더 좋고. 선물은 비싼 게 최고야. 감동받을 정도로 돈을 때려 부어. 비싼 것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없어. 재벌과 귀족님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돈 귀신다운 주장이었다. 클로이도 순순히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엘리엇은 그런 건 너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예산 같은 건 한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품목이 제한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명쾌한 해답을 준 것은 벤이었다.
“션 님은 아마 새 차가 필요해지실 겁니다.”
“차?”
“지난번에 보니 10년 가까이 된 경차를 타고 있으시더군요. 지금 살고 계시는 아파트는 주차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겠지만, 그런 차는 헤리퍼드가에는 어울리지 않지요. 적당히 제가 선택해서 발주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 선물하시기에도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자벨의 아들이 스포츠카에 목을 맨다던 이야기가 기억난 것은 그 덕분이다.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스포츠카를 좋아한다지?”라고 묻는 말에 션보다 두 살 많은 벤도, 동갑인 데이비드도 눈빛만 활화산처럼 불태우면서 점잖게 긍정했다.
그러고 보면 션도 언젠가 지나가는 노란색 오픈카를 보고 멋지다고 말했었다. 션의 작은 차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에도 엘리엇은 동의했다. 딱히 문제가 있다거나 고장이 나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긴 데 비해 공간이 좁아서 불편한 것 같았다. 외형을 두고 말하자면 더더군다나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엘리엇은 지금까지 스스로 차를 사 본 적이 없었다. 면허도 없다. 용도에 따라 여러 대의 차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선택한 것은 기사였고, 의전용부터 개인용, 고용인용에 이르기까지 헤리퍼드 가의 모든 차는 롤스로이스였다. 그건 딱히 그가 특정 브랜드의 차를 선호한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선대부터 늘 타던 차였기 때문이다.
션에게 그런 중후한 차가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엘리엇은 비서를 불러 요즘 인기가 있다는 자동차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하여 그렇게 되었다.
* * *
벨 소리가 울렸다.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몽중을 헤매던 션은 반쯤 눈을 뜨고 몸을 돌려 눕혔다. 해가 비쳐서 커튼은 밝은색이 되어 있었고,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다. 배달부라면 문 앞에 두거나 수위에게 맡기고 돌아가겠거니 하고 내버려 두었더니 벨을 누르는 간격이 무슨 드럼 치는 것처럼 짧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데 소음 때문에 두통이 더 심해져서 션은 굴러떨어지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속이 확 뒤집히면서 술 냄새가 팍 올라왔다. 그는 현관으로 달려가는 대신에 먼저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젯밤에 먹은 안줏거리를 뒤에서부터 전부 확인하고 나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어제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펍에서 하루 이른 생일 파티를 했다. 사실 그의 생일 축하를 위해서 술을 마신 건지 술을 위해 술을 마신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파티라고 할 만큼 난장판이었던 건 확실했다. 피날레는 타일러와 밀리의 동거 선언과 키스로 마무리 지어졌고, 그쯤에는 펍에 모인 이유가 션의 생일이었다는 것은 완벽하게 잊혀져 있었다.
사실 나쁘진 않았다. 혼자서 작은 조각 케이크에 초를 밝히고 외할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집착하다 못해 널 죽여서라도 가져야겠다는 애인이 식칼을 들고 머리맡에 서 있는 것보다 백배 나았다. 기분 좋게 친구들에게 축하받고 눈을 떴더니 어제까지 친구였던―약혼자가 있는― 여자가 발그레 얼굴을 붉히고 내려다보고 있다거나 하는 사태도 없었고 말이다.
션은 세면대에서 얼굴을 적시고 거울에 비치는 사흘쯤 노숙한 것 같은 몰골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길에서 여자에게 말을 걸면 비명을 지르면서 가방을 휘두르거나 후추 스프레이를 뿌려 댈 것 같은 형상이었다.
좀 더 잘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미 깨 버렸다. 그리고 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션은 그것을 무시했다. 배달부인지 민폐스러운 돌격 대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지치면 갈 것이다. 간단히 눈곱부터 떼고 나서, 면도를 하려고 거품을 턱에 바르는데 벨 소리가 뚝 그쳤다. 드디어 포기했나 했더니 벨 소리가 언쟁 소리로 변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얼굴을 대강 수건으로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벌컥 열자 건너편에 서 있던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커다란 꽃바구니를 든 배달부가 둘, 그리고 해리스 부인이 있었다.
“아.”
“션?”
배달부가 짤막하게 겁에 질린 소리를 내고, 그와 싸우고 있던 해리스 부인이 당혹한 목소리로 션을 불렀다. 션은 자기가 얼마나 흉험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을지 생각하며 한 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해리스 부인. 제가 숙취 때문에 자느라고 벨 소리를 잘 못 들었나 봅니다.”
“아, 아니야. 괜찮아. 그……. 괜찮은 거지?”
“네. 괜찮습니다. 어제 파티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쪽.”
“아, 네?”
톡톡 벨 밑에 붙여 놓은 종이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꽃 배달 수취 거부]라고 적혀 있었다.
“안 보입니까?”
“아, 하지만 마시알라스 씨는 반드시 맥케인 씨에게 직접 전달하라고,”
“그 마시알라스 씨가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안 받는다고 전하세요. 그 뒤쪽 분도.”
션은 다시 한번 종이를 가리켰다. 신경질을 꽤 있는 그대로 드러냈는데도 용감한 배달부 하나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이봐요, 수취 거부하면 반이나 환불해 줘야 된다고요! 이게 대체 얼마짜리인 줄 알기나 해요?!”
그때, 엘리베이터가 딩 하고 소리를 냈다. 션과 배달부 둘, 해리스 부인까지 일제히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전통적인 스타일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션을 보고 우아하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풋맨 네 명이 하얀 장미가 가득 꽂힌 커다란 꽃병을 안고 그의 뒤에 서 있다. 같이 탄 것 같은 꽃 배달부가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션 님, 잠시.”
벤이 그를 자연스럽게 옆으로 비켜 세웠다. 풋맨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서둘러 꽃병을 놓고 나왔다. 내려갔다 올라온 엘리베이터에는 다섯 명의 남자와 다섯 개의 꽃병이 더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이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벤, 음, 이게…….”
“주인님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음, 아니죠. 정확히는, 헤리퍼드가에서 보내는 겁니다. 주인님께서는 하얀 장미가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뿐이니까요.”
“벤이 결정한 거예요?”
“관습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께서는 매년 작약과 사프란을, 아일라 님께서는 수국을 침실과 거실에 한가득 채워서 선물 받으셨지요. 크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밀회에 필요한 것은 비밀과 방관이지만, 뭐라도 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벤이 별반 비밀도 아닌 일을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이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제 선물은 나중에 따로 받으시게 될 겁니다.”
“선물이요? 받아도 되는 거려나요?”
“받고 나면, 분명히 저에게 고맙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션은 곤란하게 생각하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무 비싼 게 아니라면 평범한 호의 정도는 받아도 될 테지만, 그렇지 않아도 최근 헤리퍼드 가문이 자신의 문제로 시끄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예 염려를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풋맨들은 부지런히 꽃병을 날라 온 집 안을 하얀 장미로 파묻었다. 션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청소라도 좀 해 놓을 것을. 면도는 반밖에 안 했고 숙취에 찌들어 구겨진 민소매 한 장을 달랑 입고 있는 노숙자 같은 꼴도 그렇지만, 어질러진 집 안도 신경이 쓰였다.
“나쁘진 않네요. 하얀 장미라니 좀 낯부끄럽긴 한데.”
“주인님께서 어울리신다고 생각해서 고르셨을 겁니다.”
벤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 꽃 장식이 끝났다. 풋맨들이 줄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물러갔다. 벤은 벨 밑에 달린 종이를 가볍게 떼어 내며 배달부들에게 말했다.
“두고 가고 싶으시면, 그러셔도 됩니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화내지 않으실 테니까요. 어느 분이 보내시는 건지, 카드도 잊지 마십시오.”
“아, 아뇨.”
창백하게 질린 배달부 하나가 고개를 격렬하게 젓고 꽃다발을 부둥켜안은 채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다른 분들은?” 하고 벤이 돌아보자 둘 다 망설이기는 했지만, 배달하는 본인들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주춤주춤 현관 안쪽으로 들어가 신발장 옆에 꽃바구니를 내려놓는다. 꽤 가격대가 나가는 묵직한 바구니였으나 온 집 안을 가득 채운 장미 화병에 비하면 아마추어가 한 달 말린 꽃다발처럼 초라했다.
배달부 둘이 서둘러 돌아간 뒤에 벤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고 현관 쪽을 향했다. 션은 들어가라고 고갯짓하자 그가 현관에 한 발 들어가 몸을 구부리고 꽃바구니에 붙어 있는 카드 두 장을 떼어 냈다.
“제가 처리해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고맙죠.”
“음. 아주 사적인 문제라거나, 이미 헤어지긴 했어도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거나 하는 상대라면…….”
“아뇨.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알더라도 십중팔구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벤이 카드를 앞주머니에 넣고 다시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왔다.
“하아.”
션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에는 그와 해리스 부인만 남았다. 해리스 부인이 머뭇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저기. 셔언……?”
“애인이 부자라서요.”
션은 최대한 별일 아닌 것처럼 들리기를 희망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주, 많이요.”
해리스 부인이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는 서둘러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누구한테 전화를 걸려나. 언니? 친구? 션은 아무래도 빨리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로 들어가든가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옷 트렁크라도 끌고 캐번디쉬로 가든가.
지금 당장 짐을 싸서 가겠다고 조르면 엘리엇이 어이없어 할까? 알버트의 말에 따르자면, 밀어붙이면 무조건 통한다니까 이혼시키는 건 무리라도 객실에 들어가는 건 충분히 될 것 같기도 했다. 전의 집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 쫓아내지는 않겠지.
해리스 부인이 생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케이크를 굽겠다거나, 점심 초대를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몹시 고맙게 느껴졌다. 그녀는 꽤 장기간 션의 GFG에 노출되었고, 그렇다면 이제 감정은 충동이 아니라 오래 쌓인 다른 무언가로 변했을 터이다. 그러나 얕은 흔들림 정도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대부분은, 그런 것이겠지.”
현관 안으로 들어와 꽃집이라기보다는 거의 온실처럼 변한 집을 보고 션은 픽 웃었다. 사람의 감정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제일 먼저 현관 앞의 꽃바구니 두 개를 들어다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실내에 꽃향기와 찌든 술 냄새가 섞여 형언할 수 없이 지독한 냄새가 되어서 그는 얼른 온 집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다시 물속에 처박으러 갔다.
엘리엇이 션의 나이만큼 묶은 흰 장미 다발을 들고 도착한 것은 점심 즈음의 일이다. 그는 벨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열었다가 숨을 멈췄다. 온실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집 안이 푸른 냄새와 꽃향기가 가득 차 있었다.
“대단하군…….”
대체 누가 보낸 건가. 션에게 홀딱 빠진 부유한 숭배자라도 있는 건가 하고 멍하게 생각하며 그는 신발장 옆에 세워진 아름다운 유리 화병에서 꽃 한 송이를 뽑아냈다. 봉오리가 막 벌어지기 시작한 훌륭한 장미였다. 엘리엇이 가지고 온 것과 마침 같은 품종이다. 장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집 장미 온실에 있는 것도 같은 것이므로 엘리엇은 그것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한 채로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쾌하지 않다. 아니, 명백하게 불쾌하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션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남자다.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지만, 구애자는 아마 지금도 걷어찰 만큼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션은 자신을 일념으로 사랑하고 있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
냉정한 생각과 별개로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동물처럼 피부 위에 차가운 소름이 돋는다. 털이 있다면 곤두섰을 것이다. 엘리엇은 고개를 기울인 채로 조금 더 생각했다. 이것은 질투일까? 질투를 하고 있구나, 하고 자각을 한 것은 몇 번이나 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감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을 꽃으로 채울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션의 뒷조사를 한다든가 자신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아냈으리라는 법은 없는데 말이다.
그냥 꽃을 보낸 것뿐이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고른 것이 자기와 똑같은 하얀 장미라는 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션이 문을 열어 주어서, 그것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 집은 션의 집이지 자기 집이 아니므로 관여할 바는 아니다. 프라이버시는 지켜 주는 게 옳다.
그렇게 생각해 보아도 불쾌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뽑아낸 장미를 화병 옆에 버리려다가 문득 거울을 보았다. 어두운 현관에 서 있는 자신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는 그것에도 조금 화가 났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으려는데 인기척을 들었는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꽃보다 더 꽃처럼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세요.”
“생일 축하하네. 자정 넘어서 말했었지만.”
“두 번 들어도 좋은데요.”
엘리엇은 그에게 안기는 대신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션이 꽃다발을 쥔 손목째로 그를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입술이 마주 닿아 엘리엇은 눈을 내리감았다. 션의 입술에서는 민트 냄새가 났고, 거기에 장미 향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키스는 달았지만 어쩐지 열중할 수가 없었다. 션은 엘리엇이 긴 한숨을 토해 낼 때까지 흠뻑 키스를 퍼붓고 나서 허리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안으로 이끌었다. 향기로 이미 짐작은 했지만, 거실과 주방에도 꽃이 가득 꽂힌 유리 화병이 수십 개가 놓여 있다. 모르는 체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엘리엇은 약간 날카롭게 질문했다.
“이 꽃은 다 뭔가?”
“엘리엇 씨가 보내신 거잖아요?”
엘리엇이 물을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션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보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션이 그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한 번 더 입술을 대고는 허리를 끌어당겨 집 안으로 이끌었다.
“아침에 벤이 왔더라고요. 하얀 장미가 좋겠다고 하셨다면서요?”
“음.”
그것은 자기가 들고 올 꽃다발을 준비하라는 이야기였고, 윌리엄은 그가 말한 뜻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지금 들고 온 꽃다발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이런 것도 예전에는 매년 하던 일이니, 말을 전해 들은 다른 고용인들이 오해를 해서 집 안을 꽃으로 채웠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로소 이성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상황은 물론 션에게 꽃을 보내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것을 그가 받았다는 것보다는 월등히 나았다. 그러나 그래도 그다지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게 별로, 우리한테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군.”
‘우리’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자신이 보내고 션이 받았으니 그 행위 자체가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건만, 그 말을 발음하는 입술과 혀가 이상하게 의식되어서 엘리엇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머니나 아일라에게 보내던 때에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션은 눈치채지 못한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그럼 다음부터는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이게 자네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
션이 또 그리 말하자 틀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엘리엇은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여 조금 초조한 기분이 된 채 들고 있던 서른두 송이의 장미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휙 션에게 떠넘기고 환한 거실 유리창 앞에 나란히 놓인 화병 앞으로 다가갔다.
색유리에 심플한 금장식이 달린 화병은 세련되었고, 거기 가득 꽂힌 흰 장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온 집 안에 가득한 꽃은 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어울려서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왠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헤리퍼드 공작이 보내는 꽃이라는 건 대개 이런 것이다. 그것에 비교하여, 자기가 들고 온 꽃다발은 얼마나 시시한가. 물건을 보는 안목은 없지 않았으나 값진 것이라고 해서 딱히 선호하지도 않았던 그에게 사실 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으로서 좋고 나쁨을 가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똑같은 품종의 장미이지만, 션의 가슴에 달아 주기 어울리는 것은 오히려 공작이 보내는 꽃 쪽이 아닌가. 스스로를 타인과 비교해 본 일도 없고, 헤리퍼드 공작이라는 직위를 자신과 분리해서 인식해 본 일도 없는 엘리엇에게 그 느낌은 몹시 낯설었다.
초조한 기분이 된다. 엘리엇은 그 감정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션이 주는 대부분의 감정들은 새롭고, 부정적인 것조차도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으나 지금의 것은 돌아보고 싶지 않다.
“엘리엇 씨?”
엘리엇은 충동적으로 돌아서서 션의 등을 꽉 껴안았다. 션이 당혹하면서도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꽉 끌어안자 몸이 따뜻해진다. 추웠던 건가, 하고 생각하며 엘리엇은 그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숙여서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션이 작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닐세.”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엘리엇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션의 생일이다. 엘리엇은 자신의 생일에나 남의 생일에나 특별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날을 소중히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될 수 있으면 기쁘게,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스스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감정으로 그를 기분 상하게 해서야 될 말인가. 기쁜 낯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옳다. 새로운 감정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곱씹고 연구해 봐도 되는 일이다.
고개를 들자 션의 새파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달콤한 키스가 내려왔다. 엘리엇은 머릿속을 비우고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뒷머리를 감싸고 깊게 입술을 겹쳐 안을 더듬어 온다. 얼핏 가늘게 눈을 뜨자 붓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긴 션의 속눈썹이 바로 눈에 들어와서 엘리엇은 속으로만 숨을 삼켰다.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그가 딴생각을 한 것을 깨달은 듯 션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리고 웃으며 장난처럼 한 번 더 입술을 마주 비볐다. 엘리엇은 가만히 그의 눈가를 손으로 덧그렸다.
“자네 얼굴이 좀 초췌한 것 같은데…….”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숙취가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허리를 끌어당겨 안는데, 꾸르륵하고 위장이 비명 지르는 소리가 울렸다. 션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아침도?”
“늦잠을 자서요. 이불도 걷어차고 나온 그대로예요.”
“이렇게 고운데?”
생각난 그대로 말하며 콧잔등을 쓰다듬자 션이 농담하지 말라며 팔에 힘을 주어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데 말이다. 움푹 패어 그늘진 눈까지도 일부러 그런 것처럼 섹시하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잠시 더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데 션의 뱃속이 또다시 꾸르륵거렸다. 그가 민망하게 웃으며 엘리엇을 놓았다.
“배고파요.”
션을 따라 주방으로 가자 싱크대에 토마토와 계란이 나와 있었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나온 것 같았다.
“엘리엇 씨도 점심 아직 안 드셨죠?”
“나는 자네랑 같이 나가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지금부터 만들려고?”
“배고파서 못 나가겠어요. 먹을 만한 가게까지 가려면 너무 멀기도 하고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방심한 사이에 쪽 하고 다시 입 맞춰졌다. 엘리엇은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다시 싱크대 앞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전에는 내내 술 냄새 빼느라고 고생했거든요. 엘리엇 씨한테 키스할 때 술 냄새 나는 거 싫으니까.”
“어제는 즐거웠는가?”
“아, 재밌었어요. 친구들하고 이만큼 놀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밀리하고 타일러가 동거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팀에는 그 둘하고 올리버 말고는 다 싱글남이었으니까, 난리도 아니었죠.”
“자네는 알고 있었을 거 아닌가?”
“눈에 자연스럽게 보이는 부분까지로는, 감정의 깊이는 알 수 있어도 실제로 얼마나 드러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둘이 서로 확확 깊어지고 있는 건 알았어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자네가 빠져 준 덕분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죠. 아, 남의 연애 이야기라는 건 왠지 즐겁네요.”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가까운 사람이 좋은 짝을 만나는 건 안심되고 좋지.”
“엘리엇 씨 친구 중에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리암 경이라든가. 짝은 많지만, 정착할 생각은 없으신 듯하고?”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버트 왕자님도 아직 독신이시고. 그분은 어째 잡지에 스캔들 사진 한 번 찍힌 적이 없으시고요.”
“여왕 폐하께서도 아주 심려가 크시지.”
자아, 하고 션이 토마토 주스와 파슬리를 뿌린 스크램블드에그, 구운 소시지와 베이크드 빈즈가 얹어진 접시를 엘리엇의 앞에 놓았다. 평소보다 겉날린 메뉴에 피곤하긴 했구나 하고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도 푸른 채소를 빠뜨리는 걸 본 일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본인도 자리에 앉더니 주스를 큰 컵으로 한 컵 벌컥벌컥 한꺼번에 들이켜고는 한 잔을 더 가져왔다. 정말 피곤한 듯했다.
“자네 괜찮은가? 무리하지 않고 내일쯤에나 만났어도 괜찮을 텐데.”
“그러느니 차라리 어제 파티를 안 하는 게 나았죠. 저한테 엘리엇 씨하고 다른 사람은 아예 비교 대상이 아니에요.”
“나랑 만난다고 해도 뭐 별다른 걸 하는 건 아니잖나. 오늘 보지 못하면 내일도, 모레도 볼 수 있고 통화도 할 수 있는데.”
요전에 션이 통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며 말하자 그가 미소했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뿐이고, 내일은 내일뿐이죠. 앞으로 1만 일 동안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해도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숫자가 줄어드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손톱 끝에 보드라운 입술과 혀로 키스해 온다. 엘리엇은 잠시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닿은 곳이 뜨겁고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날마다 24시간 내내 둘이 같이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늘 만나고 싶고, 만날 때마다 특별한 거예요.”
엘리엇은 역시 잘 모를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만나서 마주 보고 손을 쥔 것이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하는 적이 종종 있어도, 션이 말하는 그 ‘특별함’이라는 것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감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날이라고 해도,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라고 중얼거리자 션이 작게 웃었다.
“알랑 부인의 생일에는 어떻게 하셨는데요?”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선물은 아일라가 알아서 고르고, 꽃은 집사가 알아서 보내고, 저녁에는 생일 파티를 하지만 그건 공식 일정 중의 하나이니까.”
흘끗 주방을 바라본다. 식탁은 물론이고 주방에도 구석구석 장미가 가득하다. 분위기는 로맨틱했고 애인도 달콤하지만, 그것이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션의 생일인데 자신이 감동을 받아 봐야 아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선물 받은 게 있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엘리엇 씨에게 여쭤보려고 일단 받아만 놨는데…….”
“자네가 받은 선물을 왜 나한테?”
보면 안다면서 션이 가져온 선물 상자는 열 개가 넘었다. 제일 위에 붙어 있는 카드에 발송인이 대니얼 풀러라고 적혀 있었다.
“음. 설마 나 때문에 보낸 건가?”
“그럴걸요. 오브라이언에서 꽤 오래 근무했었지만, 생일에 뭘 받은 건 처음이거든요.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고.”
“뜯어 보게.”
“그래도 될까요?”
“뭐 어떤가?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적절한 선물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인데. 과하지만 않다면 아무 문제 없네.”
“풀러 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어서요. CE의 로고가 인쇄된 명함이 붙어 있어서 일단 받아 두긴 했는데.”
엘리엇은 누가 여기까지 선물을 보냈는가 싶어 흥미롭게 그 상자를 꺼내 보았다. 발송인인 헨리 글래스데일은 그의 자산을 관리하는 화이트 포인트 투자 회사의 임원으로 꽤 자주 얼굴을 마주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인 이야기를 할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니고, 당연히 션의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소문을 어디서 듣기는 했겠지만 당황스러웠다.
“주소를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당혹스럽군.”
“역시 그렇지요?”
“풀러 씨라면 자네와도 개인적인 관련이 있으니 이상할 게 없고, 피처버트 씨도 일단은 풀러 부인의 이름으로 보냈으니 이상할 것까지는 없지만 글래스데일은 아니야. 이것은 돌려보내게.”
션이 “네.” 하고 대답하고 상자를 멀찍이 밀어 두었다. 그 외에도 그런 상자가 몇 개 더 있었다. 엘리엇은 헤리퍼드 집사부의 데이비드 윌슨과 기사인 마스턴, 그 밖에도 비서부의 몇몇 사람에게서 도착한 선물도 반송하게 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고가의 시계라든가 보석으로, 가격대가 단순한 인사나 예의라기에는 도저히 적절하다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다 정리하고 나자 사실상 남은 것은 벌커리가에서 보낸 탁상시계와 대니얼 풀러의 만년필, 젊은 풀러 부인―아마도 실제로는 피처버트가 보냈을 것이다.―의 포켓 스퀘어뿐이었다.
“아마 피처버트 씨가 보낸 것도 풀러 씨가 조언했을 확률이 높겠군.”
만년필이나 포켓 스퀘어나, 둘 다 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아마 세 자릿수까지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품위 있는 물건이었다. 물건 자체가 값비싸지 않은 것에 비해 새겨진 이니셜 쪽이 정교한 수공으로, 분명히 장인의 솜씨였다. 엘리엇은 만년필을 흥미롭게 살피며 말했다.
“풀러 씨가 균형 감각이 좋은 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훌륭한데.”
별것은 아니지만, 사교계에서 치레하려면 이런 것도 필요하다.
거절할 이유조차 없는 액수의 선물을 하면서 신경을 썼다는 흔적을 드러낸다. 더하여 지지도 표시한다. 올여름에 션을 사교계에 내보일 생각인 엘리엇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도와줄 사람이 적어도 넷은 더 생겼으니까. 젊은 풀러 부부도 평판 쪽에서 대단한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또래의 인맥이 생기면 션도 버티기 쉬울 것이다.
션이 오브라이언에 다시 채용되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특별히 호의를 받았다고 신경 써서 보답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 번쯤은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엘리엇은 션에게 호감을 산 사람이라고 해서 공적으로 특혜를 줄 생각은 없지만, 받은 선물과 별개로 이 정도로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조금 더 친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풀러가 원하는 것도 그 정도의 것이리라.
“비싸진 않지만 정성이 고마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더 그렇군. 자네가 싫지 않다면, 머지않은 시일에 답례의 뜻으로 간단히 디너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어떤가?”
“저야 괜찮죠. 브라이언이나 알렉산드라와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요.”
“그러고 보니 자네가 결혼식 피로연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었지? 친분이 생겼나?”
“면식이 있는 정도이지만요. 일 관계로 만나더라도 친근하게 불러 달라는 분들이 많으시죠.”
그럴 것이다. 누군들 싫어할까, 하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아마 친근하게 불러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가 되기를 바랐으리라.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답답해져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직 점심이지만 이왕 선물을 받았으니 보여 주겠다면서 션이 상어 인형처럼 생긴 깜찍한 디캔터에 물을 담아 왔다. 토마와 아일라의 이름으로 보내진 선물이라고 한다. 함께 보낸 것은 야라 예링의 90년도 빈티지이더라면서 션이 웃었다.
“엘리엇 씨와 함께 맛보라고 보낸 거겠지만, 전 어제 너무 폭음해서 오늘은 와인조차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디캔터는 귀여우니까. 조카가 있었으면 콜라를 담아 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렇군.”
“토마 씨는 센스가 좋아요. 알랑 부인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알겠어요.”
“그런가……?”
역시 센스가 중요한 건가? 하고 엘리엇은 중얼거리자 션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디캔터를 기울여 물을 따랐다.
“알랑 부인이 기뻐할 일을 잘할 것 같다는 의미이지, 제가 이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토마 씨에게 반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실은 엘리엇 씨 선물을 제일,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고요.”
“너무 기대하면, 곤란한데…….”
정말로 자신이 없었으므로 엘리엇은 우물거리고 말꼬리를 흐렸다.
“엘리엇 씨 손에 선물 상자가 들려 있지 않다고 해서 벌써부터 주머니에 작고 비싼 게 들어 있을 거라고 믿을 만큼 기대하고 있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작고 비싼 거……? 가지고 싶은 게 있었는가?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미리 파악했어야 하는 건가 하고 엘리엇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션이 파안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엘리엇 씨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안심해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중얼거리자 션이 웃느라 달걀을 흘렸다. 괜찮다, 농담이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듣고 키스까지 받고도 여전히 미묘한 기분인 채로 괜스레 콩만 뒤적이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션이 잠깐만 기다리라면서 포크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엘리엇은 묵묵히 소시지와 콩을 입으로 옮겼다. 아무 맛도 안 느껴졌다.
“리암 경이 보내셨네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거 죄송스러워서 어쩌죠?”
식탁으로 돌아오는 션은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았다.
“리암이? 생일 선물인가?”
“네. 매년 크리스마스카드는 왔지만, 생일 선물은 올해가 처음이에요.”
뜯어 보자 상자에는 속옷이 몇 벌 들어 있었다. 잘 찢어질 것처럼 생긴 얇은 레이스의 여성용 브리프, 재질이 수상쩍은 드로즈, 사각거리는 느낌이 드는 끈팬티가 각각 3벌씩 세트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품목에 엘리엇은 침묵했다. 션도 침묵한 채로 조용히 그것을 차곡차곡 도로 상자에 넣어 한쪽에 밀어 두었다.
“……그거야말로 돌려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모처럼 받은 건데요.”
“션.”
“……돌려보낼까요?”
엘리엇은 난감하게 입을 다물었다. 션이 입어 준다면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음탕한 것 같고, 혹시라도 나에게 입힐 생각은 아니겠지 라고 추궁하는 것도 민망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그것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던 것이다.
어영부영 그가 말이 없는 사이에 션이 상자를 재빨리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엘리엇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원래 예정은 좀 더 느긋하게 집에서 뒹굴다가 오후 늦게쯤 엘리엇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욕이 사라진 채 식사를 끝내자마자 엘리엇은 션을 끌고 집에서 나왔다. 집 안 가득한 장미가 계속해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션이 리암의 선물에 대해서 다시 말을 꺼낼까 두렵기도 했다. 마침 적절한 핑계도 있었다.
“선물을 보러 가세.”
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녁에 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엘리엇은 소파에 파묻히려는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엘리엇이 뭔가를 재촉하는 것을 그다지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션은 이상한 기분이 되어 옷을 갈아입었다. 디너까지 생각한다면 정장을 입어야 하는 걸까.
고민을 했지만 그는 결국 청바지와 면티 위에 가벼운 여름 재킷만 걸치고 나가기로 했다.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의 디너가 아무리 격식 넘치는 풀코스라도 결국 단둘이 식사하는 것이니, 드레스 코드까지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엘리엇이 손까지 잡아끄는 것이 귀여워서 어쩐지 기분 좋았다. 무심코 웃어 버리자 그가 왜 웃느냐고 눈썹을 세웠다.
“예전에는 엘리엇 씨가 멋지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새는 귀엽다고 생각하는 때가 더 많아서요.”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대답하자 엘리엇이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역시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운전석에 올랐다.
차가 밀리지만 않으면 윌슨 그로브에서 헤리퍼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엘리엇이 그쪽이 아니라며 우측으로 돌아가게 시켰다. 션은 순순히 그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차를 돌렸다. 런던 시내에 10만 평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헤리퍼드 타운 하우스의 부지에는 일반에 공개되어 있는 미술관과 도서관, 박물관 하나가 포함되어 있고, 세 개 건물로 구성된 본채를 제외하고도 고용인 숙소라든가 보안 팀 건물, 작은 규모의 공연장과 영지 사람이 런던에 왔을 때를 대비하여 숙소로 세워 놓은 옛 호텔 같은 건물도 따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확하게 타운 하우스에 포함된 것인지 션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공원만큼이나 큰 정원이 딸려 있어서, 그중 일부가 공개되고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왕궁처럼 관광 코스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입구에 다가가서야 알 수 있도록 조용하게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엘리엇이 한 것이 아니라 밀리가 한 것이다. 도서관에 왔다가 데이트 코스로 가면 딱 좋다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션은 가 본 적이 없었다. 본관 쪽에 있는 백양나무 정원을 산책해 본 것이 전부였다.
다음에는 굳이 어디 멀리 데이트하러 가자고 할 것이 아니라 엘리엇에게 정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션은 미소를 띠었다. 집 안에서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 가지고 밖으로 나와서 미술관에 들렀다가 걸어서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엘리엇에게도 새로운 체험일 것이 틀림없었다.
도서관 옆의 사유 도로로 들어가자 금세 조용해진 것으로 보아 거기서부터 비공개 구역인 듯했다. 얼마 더 가지 않아 차고가 보였다. 반짝거리는 새 건물이었다.
“저기 세우면 되겠군.”
엘리엇이 손짓했다. 직접 차를 몰고 온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차고로 온 것은 처음이다. 대개는 정문에서 기사가 차 키를 받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위치에 있었구나 하고 괜히 감동하며 션은 차고 앞에 차를 세웠다. 엘리엇이 먼저 내리고, 그가 뒤따라 내렸다. 엘리엇이 약간 한숨을 내쉬며 차고를 올려다보았다.
“선물일세.”
“네?”
션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선물.”
“음, 그러니까, 저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차고가 보였을 때부터 예상치 못했던 바는 아니다. 엘리엇이 선물 상자를 들고 오는 대신에 굳이 “저녁에 집에 가서 주겠다.”라고 했을 때 들고 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았고, 그러면 그다음에 선물이 될 만한 물건의 종류는 한정된다. 차 한 대 정도는 그리 놀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선물일세.”
“차고가요……?”
“엄밀하게는 아니지만, 이것도 자네 것일세. 목걸이를 선물한다고 해서 갑을 돌려받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차고 문이 열리고 작업복을 입은 남자 둘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정중하게 엘리엇에게 인사를 하고 션에게도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션 님.”
“준비는 끝난 줄 알았는데.”
“설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션 님의 정보도 등록해야 하니까요.”
그가 션을 이끌고 차고 앞에 세워진 작은 설비 쪽으로 데려가며 설명했다.
“안면 인식으로 했습니다. 허술해 보이지만, 타운 하우스 부지 안이라서 어차피 보안부가 관리하고 있으므로 이중 보안은 그렇게까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요.”
한 명이 션의 얼굴을 카메라에 인식시키고 뭔가를 조작하면서 설명했다.
“출입 가능한 것은 션 님과 보안부, 미캐닉인 저와 제 조수뿐입니다. 주인님의 얼굴도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 잭입니다. 이번에 션 님의 전속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남자가 쾌활하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떨한 채로 션은 그와 악수를 했다.
차고 문이 스르르 올라가자 높은 천장에 일렬로 박힌 조명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안에는 열세 대의 차가 널찍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다. 그중 두 대는 세단이고 열한 대는 스포츠카였다. 잭이 끌고온 포드를 주차해 두겠다고 해서 션은 멍한 채로 그에게 키를 넘겨주었다.
“설마 이게 다 선물이라는 건 아니죠……? 맙소사, 이거 베네노 로드스터 아니에요?”
엘리엇과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션은 스스로 배포가 커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물로 슈퍼 카 한 대가 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슈퍼 카 열한 대와 아우디, 롤스로이스의 세단이 들어 있는 차고가 나올 줄은 몰랐다. 션이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엘리엇은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마음에 드는 모델이 있을지 모르겠군. 다들 좋아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운전도 안 하고 이런 건 도통 몰라서.”
서른 초반의 젊은 남자가 타기에 모두 좋은 물건이니 그냥 어울리는 것으로 고르라고 들었지만, 그건 더 판단하기 어려운 기준이었다. 어디에 대어 봐도 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그냥 브랜드별로 가장 좋다는 것으로만 한 대씩 들이게 했다. 준형이 돈과 성의는 동치관계라고 했지만, 역시 성의라고는 들어 있지 않은 게 아닐까 싶어 염려스러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냥, 너무 엄청나서요.”
그는 스포츠카를 사기 위해 적금을 들 정도는 아니지만, 심심한 날에 맥주캔을 까고 앉아 자동차 버라이어티쇼를 연속 시청하거나 길가에 맥라렌이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는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웃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거절해야 맞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다가 션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엘리엇에게는 아마 자신이 미니 카 열세 대를 산 것과 비슷한 감각일 것이다. 공연한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기쁘게 감사하는 게 우선이리라.
“진짜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뭐랄까. 너무 커서.”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다행이고. 타 보게.”
“저 같은 가난뱅이가 타서야 차만 동동 뜨겠어요.”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느 사람에게도 어울리지 않을 걸세.”
엘리엇이 어서, 하고 재촉했다. 션은 머뭇거리면서 차를 둘러보았다. 애스턴 마틴, 아우디, 아스카리, 페라리에 코닉세그. 무슨 국제 모터쇼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한정판뿐이다. 부가티 베이론 앞에서 션은 발을 멈췄다.
“비테세라니. 잡지에서 봤을 때 실물을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게 마음에 드는가?”
“네. 고맙습니다.”
션은 빙긋 웃었다.
“타 보게. 시승을 해야지.”
“그럴까요? 아, 너무 떨리는데요.”
받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간단히 적응할 수는 없었다. 션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키 두 개가 차 옆에 세워진 작은 기둥에 걸려 있었다.
엘리엇이 멀찍이 서서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션은 다시 차에서 내려서 엘리엇을 조수석까지 끌고 와 앉혔다. 싫다고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앉으면서도 여전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션이 안전벨트를 매어 줬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몸은 굳어 있었다.
“시승하기 싫으세요? 혹시 스포츠카를 아예 싫어하신다거나? 저 때문에 싫은 걸 사신 거예요?”
“그런 거 아닐세.”
“시승이라고 해도 이 앞에만 잠깐 나갔다 올 거니까요. 무서워서 도로에는 못 나가요.”
“수집용도 아닌데 타야지. 수리비 같은 건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잭이 알아서 할걸세.”
“아, 사고는 내는 게 전제인가요. 뭐……. 어지간한 사람은 겁이 나서 근처에도 못 올 거라 접촉 사고 같은 건 나지도 않을 것 같지만요.”
일부러 가볍게 말하며 시동을 걸었지만, 드림 카를 탄다는 기분에 흥분한 것도 잠시였다. 그는 자신이 잠깐이라도 입을 다물면 좁은 차 안에 침묵이 내리깔리는 것을 알았다. 엘리엇이 왜 그러느냐는 듯이 돌아보았다. 전혀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션은 도로 시동을 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내가 뭘?”
“화가 나신 것 같아요. 제가 뭔가 실수했어요?”
“아니. 전혀 아닐세. 자네가 내게 뭔가를 잘못하는 일 같은 건 없어.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걸세.”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엇이 잡힌 손을 끌고 가 손등 위에 입술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긴 한숨이 손등 위로 흘러 떨어졌다.
“별것 아니야.”
“별것 아닌 게 아니지요? 아까 저희 집에 들어오셨을 때부터 그랬잖아요. 제발,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고칠 수 있잖아요. 저는 대부분의 사람의 생각은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으면 이해하는 게 느리니까요.”
션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2인승 차는 좁다. 운전석은 쾌적했지만 그래도 옆자리 사람이 충분히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엇은 가는 숨을 토해 냈다. 션은 자기가 이해하는 게 느리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자신을 배려해서 하는 말인 것은 명백하다.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나 자신의 잘못이다. 그는 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온당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조차 못했다. 특히나 션을 상대로는.
그러나 숨기는 것도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서 그는 잘해 내지 못했다. 션이 부드럽게 부르며 재촉하는 바람에 결국 뭉글거리고 계속해서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불분명한 감정을 어중간한 말로 만들어 뱉어 버리고 만다.
“아마 나는, 비교되는 게 겁이 나는 것 같아.”
“엘리엇 씨가요?”
“자네의 옛날 애인들에게도 그렇고…….”
엘리엇은 드물게도 말꼬리를 흐리고는 그냥 고개를 숙여 버렸다.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 어른스럽지 못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다. 그리고 정확한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치 다른 이야기가 문제이기라도 한 양 얼버무리듯이 화제를 돌렸다.
“내가 사실 자네에게 잘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재작년에는 자네 생일이 언제인지 알지도 못해서 그냥 넘어가 버렸고.”
션이 놀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작년에 끝났잖아요. 제가 말씀 안 드린 것뿐이니까요.”
“내가 물어봤어야 온당한 건데. 작년에도 날짜를 한 번 들어 놓고는 전날까지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준비했었고.”
“산토리니섬에 있는 별장이 완벽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시간을 들여 계획해서 간 것이라면 그 마음 씀씀이가 멋진 거겠지.”
“엘리엇 씨.”
션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가까이에서 눈을 맞춰 왔다.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션은 그가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개를 더 기울이고 마주 보게끔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당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을 들여다보며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엘리엇 씨는 완벽해요. 그리고 전 엘리엇 씨 것이에요. 알고 계시잖아요?”
“잘, 모르겠어.”
엘리엇이 빠르게 내뱉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고 나니까 시원해진 건지 허탈한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션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아직도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잡아서 내려놓고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 그를 외면한 채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끔 자네가 말하는 그 완벽한 사람이라는 게,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엘리엇 씨.”
“차분하다, 점잖다, 어른스럽다, 배려할 줄 안다, 당황하지 않는다, 신사적으로 행동한다, 그런 평판들이나, 지위에 걸맞게 행동하고 신분을 잊지 않고 나서지 않으면서 물러서지도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고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왕실에 충성하고 신실하게 보이고, 자비롭되 단호하고 냉정하되 따뜻하라고, 그런 수식어는 알고 있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배운 대로 살아왔으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든 아니든 간에 말일세.”
그것은 헤리퍼드 공작이다. 자신과 어떻게 다른가 말하라고 한다면 엘리엇은 표현해 낼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것이 자신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대체로 감정적이지 않았고, 표현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교계에서 한 번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을 만큼 올바른 몸가짐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게 바보 같은 이야기라는 것은 안다. 가문이나 신분을 뗀 자신이 누구인지, 본질이 무엇인지, 가치가 있는지 같은 생각은 어릴 때나 하는 것이다. 퍼블릭 스쿨까지는 그런 고민을 하는 동기가 많았던 것 같지만, 이 나이에 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머릿속을 뭉게뭉게 흐리는 생각들이 멈춰지지 않았다. 남들이 방황할 때는 어른스럽고 확고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갈등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자기 자신에게 질투하고 있다니.
“그건 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진짜 자신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엘리엇은 한숨을 쉬었다. 이때까지는 그런 것으로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자신의 내부에 아무것도 없어도, 겉으로 구축하여 쌓아 올린 삶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타인의 시선을 포함하여, 현실과 타협하여 삶을 만들고 그 외면의 삶과 내면이 조응하여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내면이 없기에, 굳이 안팎의 모순을 느껴 본 일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가 나. 나는 물론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주 많고―외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기는 해도―, 꽃이라든가 차라든가 이런 걸 실제로 산 것이 내 돈이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자네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아니, 그것도 부정확하군. 자네는 나한테는 과분하게 매력적인 사람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마치 돈이라든가 신분밖에 없다든가 하는 생각이…….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군. 모르겠어. 우습게 들리겠지만, 자네의 옆에 있기에 적절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 헤리퍼드인 것 같다고 생각되어서…….”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한 션은 더 참지 못하고 엘리엇의 입술을 덮었다. 엘리엇이 몸을 경직시키며 빠져나가려는 듯이 몸을 움찔거렸지만 놓아주지 않고 허벅지와 어깨를 어루만지며 긴장을 풀라고 달랜다.
이 사람은 정말로, 자신을 미치게 한다. 롤러코스터보다 더했다. 전반부에서 이미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 후반부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도망가려는 듯이 오므라든 입술을 풀어 깊게 맞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가 육식동물처럼 날카로웠다면 정신을 잃은 채 통째로 뜯어서 먹어 치워 버렸으리라. 등받이가 뒤로 툭 떨어졌다. 엘리엇이 놀라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션이 그의 입술에 몇 번이나 키스하고, 눈꺼풀과 코에 입술에 눈을 떨어뜨렸다. 밀어내려는 손을 붙든 채 깍지를 낀다. 키스는 싫지 않았지만 마치 그것으로 얼버무려진 것 같아서 엘리엇은 미간을 조금 좁혔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데, 다시 짙은 키스가 눈을 감겼다.
“엘리엇 씨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저는 물론 엘리엇 씨에 비해서는 가난하지만, 이런 것은 정말 원한다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부자를 사로잡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고, 부유한 노인에게 유산을 상속받을 만큼 신뢰와 애정을 받는 것도 말 한마디로 족했다. 그런 불성실한 행각이 아니라도 간혹 권유받는 것처럼 연예계로 나서거나 하다못해 영업직을 했더라도 이런 것 한 대 정도는 사고도 남을 만큼 돈을 벌었을 것이다.
얼굴도, GFG도 관계없이 살자고 결심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다. 자기에게 한계를 정해 놓고 살아왔다. 션은 그렇게 결정한 평범한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만족도 하고 있었다. 이런 차를 탈 수 없는 생활이라고 아쉬워한 적도 없다.
“엘리엇 씨가 선물해 주니까 받는 겁니다. 엘리엇 씨의 집에 제 물건이 놓이는 거니까 기쁜 거예요.”
션이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 엘리엇은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에 손을 댔다. 고운 눈썹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처졌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아름다운 미소에 눈을 뜨고 있기조차 어려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드릴 것도 없고 격도 맞지 않는 건 저이지요. 그래도 저는 엘리엇 씨가 주시는 것은 전부 받을 겁니다. 그래야 제 생활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섞이고, 당신의 안에도 제가 조금 더 스며들 테니까요.”
“션…….”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엘리엇 씨가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거나 노숙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라서 엘리엇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손가락에 키스하면서 션이 웃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행방불명시켜서, 방에 가두고 저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었죠. 엘리엇 씨가 무엇이어도, 누구였어도 저는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지금도 멋진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높이 있어서 가끔 끌어내리고 싶어져요.”
엘리엇은 약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에게, 자네가 말하는 것 같은 가치가 있다고는…….”
“저를 믿으세요. 엘리엇 씨는 헤리퍼드 공작에 걸맞은 사람이고, 그래서 더없이 멋지고, 저는 그래서 엘리엇 씨의 것이지만, 만약에 엘리엇 씨가 이 어깨에 많은 것을 지고 계시지 않았다면 엘리엇 씨가 제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만큼 여기에 있는 것이 탐나니까요.”
그의 관자놀이와 이마에 키스하고 가슴을 더듬으면서 션이 속삭였다. 엘리엇은 숨 막히는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라 헤리퍼드가 선물을 주어도?”
“고민하던 끝에 고르신 거잖아요. 왜 헤리퍼드가 줬다고 하세요? 보통은 그만큼 고민하다가 그냥 하나 선택하는 거고, 엘리엇 씨는 그걸 전부 제게 사 주실 능력이 있었을 뿐인데요. 굳이 비교하자면, 사람을 시켜 보내는 삼천 송이보다 엘리엇 씨가 주시는 서른 송이가 더 좋긴 하지요. 얼굴을 보고 직접 건네받는 거니까.”
션이 쿡쿡 소리를 내서 웃었다.
“재작년에는 잊으셨었고, 작년에는 별장에 갔지요. 올해는 꽃과 선물을 주셨으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저를 더 행복하게 하실 겁니다.”
“응…….”
엘리엇은 자신이 어린애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두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어쩐지 더 부끄러워져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자니, 션이 꿈질거리면서 몸을 뺀다. 온기가 아쉬워져서 붙잡자 그가 곤란한 듯이 물러나려 했다.
“곤란해요, 엘리엇 씨.”
“왜……?”
“130만 파운드짜리 한정판 부가티에 타서, 옆자리에 엘리엇 씨가 누워 있는데 제정신일 만큼 전 침착한 사람이 못 되어서요.”
“아.”
엘리엇은 당황해서 얼른 끌어안았던 팔을 놓고 등받이를 도로 세웠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뒤로 쓰러졌다. 션이 싱글거리면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엘리엇 씨는 이게 선물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그럼 하나 더 주세요.”
“선물을?”
“섹시한 슈퍼 카에 애인이 섹시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원하는 건 하나뿐이죠. 안 돼요?”
잠깐,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도로 입술이 덮어졌다. 상반신만 기울여도 좁았는데 션이 아예 조수석으로 넘어오려고 했다. 저항할 것을 예상한 듯 손목을 꽉 잡힌 채로 엘리엇은 당황해서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읍.”
도로 입술이 키스로 막힌다. 차고이고, 게다가 씻지도 않았고, 준비도 안 되었고, 좁고, 섹스를 할 곳이 아니다. 할 말이 많았지만, 입술이 놓여났어도 그 말을 할 여유는 없었다. 엘리엇은 넋을 잃고 션의 목을 끌어안으며 시키는 대로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그를 맞아들였다. 원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응, 하, 잠깐. 으응.”
“아무도 없잖아요. 괜찮아요.”
션이 뺨과 입술과 턱에 키스를 퍼부으며 헐떡거렸다. 셔츠 단추를 풀어내다가 초조함을 못 이기고 휙 잡아당기는 바람에 단추가 튕겨 날아갔다.
몇 번이고 목덜미에 키스하고 쇄골을 깨문다. 뾰족해진 유두에 혀를 대고 그가 허벅지를 쓸어내리면서 그 안쪽을 몇 차례 주물렀다. 예민한 돌기에 찌르르한 성감을 느끼며 엘리엇은 조금이라도 공간을 확보하려고 한 팔로 헤드레스트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션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더 뒤로 물렸다.
“부가티가 좀 넓다고 하더니 맞는 말인가 봐요. 할 만하네요. 한정판 로드스터에 정액을 묻히다니 이게 진짜 끔찍하게 사치스러운데요.”
“그게 문제가, 아흣.”
바지 단추를 풀어낸 손이 여밈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엘리엇은 끙끙거리고 허리를 들었다. 좁아서 될까 싶었는데, 어떻게든 벗겨지긴 했다. 한쪽 발목에 바지를 걸친 채로 들어 올리자 허리가 접힐 지경이었다.
“와, 진짜.”
“션.”
“너무 좋아서 그냥 쌀 것 같아요.”
션이 헐떡거리다가도 킬킬 웃었다. 그럴 때마다 꽉 마주 닿은 몸이 비벼져서 엘리엇은 몸부림치며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어렵게 손을 뻗어서 그의 벨트를 풀자 이제 농담할 여유도 없어진 션이 헐떡거리면서 손가락을 엘리엇의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자극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구멍은 움씰댔지만, 말라 있어서 손가락 두 마디도 넣기 어려웠다.
엘리엇이 두 다리를 그의 몸에 감아 끌어당긴다. 삽입은 무리일 것 같아서 작은 구멍에 어림도 없는 크기의 성기를 가져다 대고 션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질척하게 젖은 성기로 구멍부터 회음부를 쓸고 고환을 찌르며 문지르자 엘리엇이 작은 소리로 울었다.
“귀여워 미치겠어.”
엘리엇이 얼굴을 숨기듯이 그의 팔에 파묻었다. 션은 허리를 구부려 귓바퀴를 핥고 그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더러워, 으응. 잠깐. 아!”
귓속에서 움직이는 젖은 소리조차 자극이 되어서 엘리엇은 교성을 올렸다. 티셔츠 앞자락에 엘리엇이 흘리는 체액이 얼룩질 것 같아서 션은 잠깐 기다리라며 좁은 조수석에서 어찌 저찌 몸을 틀어 대시보드를 열었다. 워낙 준비성이 좋은 고용인들이 있으니 티슈나 물티슈가 들어 있지 않을까 하고 연 것인데, 안에는 그 두 가지에 더하여 일회용 주사 젤과 콘돔이 들어 있었다.
“션……?”
그가 멈칫하자 엘리엇이 열이 오른 목소리로 불렀다. 굳이 엘리엇에게 알릴 필요는 없겠지, 하고 션은 그를 덮듯이 몸을 기울여 키스하면서 젤의 포장을 뜯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이 항문을 한 번 더 더듬는다. 엘리엇은 애가 달아서 션의 몸을 다시 다리로 감으려 했다. 차가운 것이 뒤에 닿더니 미끈한 것이 안으로 주입되었다.
“으, 응!”
“죄송해요. 차가우시죠.”
“아니. 하지만, 그런 걸 자네, 하으…….”
갖고 다니는 거냐고 말할 여유는 없었다. 션의 손가락이 젤로 가득 찬 뒤로 들어왔다. 뒤는 금세 녹아서 흥건해졌다.
“아, 션, 세상에.”
“아파도 조금 참아 주세요.”
그가 잡으라고 엘리엇의 손에 자기 옷을 쥐여 주었다. 엘리엇은 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희가 부족해서 확실히 힘들었다.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에 엘리엇의 몸이 자꾸 뒤로 물러나는 것을 션이 억지로 끌어안아 당겼다. 션의 어깨를 쥐어뜯으면서 그는 입을 벌렸다. 도망갈 곳도 없는 공간에서 션의 팔 안에 갇힌 채로 울음을 참는다. 아래도, 위도, 온몸을 결합시킨 채로 엘리엇은 충족감과 산소가 모자란 것 같은 감각에 동시에 허덕였다.
습기는 충분한데도 상처가 났는지 가득 벌어진 뒤에 열이 오른다. 션이 그의 얼굴을 두 팔로 감싸며 속삭였다.
“좁네요. 너무 좋아요.”
그게 공간이 좁다는 건지 엘리엇의 안이 좁다는 건지는 불분명했다. 확실한 건 엘리엇에게는 공간이 너무 좁았다는 것이다. 들려진 발이 천장을 치고 반대쪽 무릎은 유리창에 눌려서 멍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금세 그것도 신경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션이 몸에 꽉 차는 것을 느끼며 곧 열기에 휩쓸렸다.
* * *
[선물 고마워요.]
차고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 정확히 한 시간 후에 문자가 왔다. 벤은 흐뭇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욕실을 다시 한번 살핀다. 지금 준비할 것은 입욕제를 넣은 뜨거운 물과 한 다발의 장미, 차게 식힌 스위트 와인이면 족하다. 케이크는 한 조각이나 겨우 될까 하는 작은 것이다. 그 외에는 침대에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파이를 마련했지만, 이것은 레드 와인과 함께 침실에 놓아두었다.
밖으로 나오자 데이비드가 복도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아랫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벤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데이비드가 준비한 것은 호화로운 디너와 커다란 생일 케이크, 실내악단이었다. 기념일의 정석이지만 좁은 차에서 섹스를 한 뒤에 바로 생각나기에는 무리인 것이다.
데이비드는 아마 둘이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온 뒤에 저녁을 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것은 엘리엇의 생각만 헤아린 것이지 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결과이다. 벤의 판단에 이제 서른 초반인 젊은 남자가 파가니 존다이든 포르쉐이든 람보르기니이든 멋진 스포츠카를 처음 몰고 나가면서 옆에 안달 날 정도로 사랑하는 애인을 태우고 있다면 드라이브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물론 엘리엇은 차에서 섹스 하는 일 같은 건 상상도 안 했을 테지만 말이다. 차고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를 거고.
장수를 공략하려면 모름지기 말부터 쏴야 하는 법. 윌리엄은 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데이비드도 그것에 동조하고 있으나 벤은 누구에게 붙어야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찔러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주인이 남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치정 싸움 끝에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다가 한동안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는데, 그 상대를 벌하기는커녕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온 힘을 다해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게 관리하고 있던 사생활에 흠을 내면서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이것만으로도 게임은 끝난 거다.
윌리엄은 이제 나이가 많다. 그에 대한 엘리엇의 신뢰와 애정은 무너뜨릴 수 없는 아성을 쌓고 있지만, 앞으로 5년 이상 일하지는 못할 것이다. 벤은 데이비드 윌슨과 차기 총집사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윌리엄의 뒤를 이어 엘리엇의 시중을 드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지만, 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다.
어차피 엘리엇은 감정이 희박하고, 바라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20년도 넘게 윌리엄의 빈틈없는 봉사를 받아 왔다. 이제 와서 아무리 충실하게 모셔 봐야 시중인으로서 그에게 감동을 주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한발 앞서나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름지기 훌륭한 집사란 주인이 말하기 전에 그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법이다.
이것으로 투 카운트였다. 첫 번째는 윌리엄에게 케이론의 방이 적당하지 않겠느냐고 건의한 것이다. 아마 데이비드는 정말로 엘리엇이 그러라고 할 줄은 몰랐으리라.
하지만 거기까지 알았으면 알아서 잘 기어야지 말이다. 물론 케이론의 방은 공작 부인의 방처럼 그 자체만으로 직접적인 권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를 허락했다는 것은 공작가의 직계와 똑같이 대우하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고로 케이론의 방 주인이라는 건 미래의 실세라는 것과 동의어였다.
CCTV로 비테세의 사치스러운 차체가 미묘한 리듬으로 덜컹덜컹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찌그러지던 놈의 얼굴을 생각하니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아 참, CCTV 영상은 지워 주세요.]
두 번째 문자가 왔다. 알고 계셔서 좁을 텐데도 지붕을 안 여신 거였군. 벤은 어흐흠 헛기침을 하고 매고 있던 타이를 괜스레 다듬었다. 하긴, 모를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경쾌한 걸음으로 로비 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보안 팀에 인터폰을 걸러 갔다. 요청받은 일은 완벽하게 해 두어야 하니까 말이다.